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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전기엔 대나무·술… 후기는 山·水… 선비들에게 그림은 ‘정신 수양’이었다

    조선 전기엔 대나무·술… 후기는 山·水… 선비들에게 그림은 ‘정신 수양’이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대나무, 술, 말, 소나무, 용 등 현실적이면서 상징적인 사물이 주로 사용됐지만, 중기로 접어들면서 산수(山水)가 주요 사물로 등장하고 회화 주제가 자연 풍경 중심으로 변화했다. 이렇게 조선시대 회화의 주제가 바뀌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임태승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최근 발간한 학술서 ‘조선시대 화론의 회화미학개념 계보 연구’에서 “조선 초에는 문인적 정서와 상징성이 강조되는 경향이 강했고 후기에 들어서면서 소재의 다양성이 줄어들고 산수로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회화가 안정되고 형식화되는 경향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 책에서 임 교수는 조선시대 문헌에 수록된 화론 자료를 면밀하게 검토해 회화 창작과 감상의 이론적 토대를 이루는 미학 개념이 어떤 사상적,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고 변용됐는지를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특히 이 책은 조선 시대 회화미학의 계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여줌으로써 단순히 그림을 감상하는 법을 넘어 예술과 사유의 관계를 생각하도록 이끈다. 임 교수에 따르면 동아시아에서 그림은 이데올로기라는 원리를 패턴이라는 형식적 장치로 구현한 대표적 조형 예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은 시대와 지역의 문화적 성격을 읽어내는 데 가장 적합한 장르이고 동시에 그림 속 패턴과 원리를 찾아내는 것이 예술과 문화의 본질을 이해하는 관건이 된다고 설명한다. 그는 조선 회화미학의 사상적 기반을 유가를 중심으로 도가와 선종(불교)의 융합에서 찾았다. 조선시대 회화가 형상보다 정신을 중시하게 된 것도 회화를 창작하고 평가한 주체가 문인계층이었기 때문이었다. 임 교수는 “조선시대 회화는 화가의 인격과 정신, 자연과의 합일, 무심의 경지, 정교한 기법이 결합된 총체적 미학으로 인간 수양과 정신적 이상을 실현하는 장으로 승화시킨 예술”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책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2030년까지 50권 발간을 목표로 출간하는 ‘한국예술총서’ 첫 번째 책이다.
  • 1600만도 뚫은 ‘왕사남’ 흥행 3위…  N차 관람 업고 ‘극한직업’ 넘을까

    1600만도 뚫은 ‘왕사남’ 흥행 3위…  N차 관람 업고 ‘극한직업’ 넘을까

    영화 ‘왕과 사는 남자’(왕사남)가 16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역대 국내 개봉작 가운데 흥행 3위에 올랐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N차 관객’이 흥행을 견인하고 있어서 ‘극한직업’(1626만명)을 제치고 흥행 2위까지 갈 수 있을지 기대를 모은다. 영화 배급사 쇼박스는 왕사남이 개봉 61일 만에 국내 개봉 영화 가운데 3위에 올랐다고 5일 밝혔다. 지난 4일에도 12만명이 관람하는 등 흥행몰이가 계속되고 있다. 현재 국내 개봉작 흥행 1위는 ‘명량’(1761만명), 2위는 ‘극한직업’이다. 영화 흥행에는 충성 관객이라 불리는 ‘N차 관람객’들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분석됐다. CGV에 따르면 이 영화를 2회 관람한 관객은 전체의 5.2%, 3회 이상 관람한 관객도 3.0%나 됐다. 관객의 8.2%는 두 번 이상 영화를 본 셈이다. 특히 3회 이상 본 관객은 역대 1000만 영화 가운데 ‘서울의 봄’(2023)과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와 함께 공동 1위를 기록했다. CGV 관계자는 “모든 연령대에서 비교적 고르게 관람이 이뤄지며 대중적인 확산력을 보이는 동시에, 반복 관람 수요도 함께 나타나고 있다”면서 “작품의 정서적 여운과 배우·서사에 대한 선호가 N차 관람으로 이어진 결과로, 몰입도 높은 관객층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또 다른 흥행 요인으로 이번 작품까지 총 5개의 출연작이 1000만 영화에 등극한 유해진의 맛깔스러운 연기,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15㎏을 감량한 박지훈의 호연이 꼽혔다. 왕사남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숙부에게 배신당해 폐위된 단종이 강원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된 뒤 그 마을 촌장 엄흥도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유해진이 엄흥도를, 박지훈이 단종, 유지태가 한명회 역을 맡아 연기했다. 이와 함께 전미도·이준혁·안재홍 등이 출연했다. 연출은 장항준 감독이 맡았다. 영화 흥행과 더불어 관련 책과 음악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 영화의 각본집은 예약 판매 단계부터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고, 출판 전부터 4쇄에 들어갔다. 전미도가 부른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벗’도 지난 3일 발매돼 호응을 얻고 있다. 달파란 음악감독이 작곡, 가수 윤종신이 작사를 맡았다.
  • 한·인니 ‘특별 포괄적 전략 동반자’로… KF-21 등 방산 협력

    한·인니 ‘특별 포괄적 전략 동반자’로… KF-21 등 방산 협력

    “K방산·에너지 공급 소중한 파트너”전투기 공동개발 성공적 완수 축하핵심광물·재생에너지 등 협력 나서무궁화대훈장 수여하며 ‘극진 예우’ 이재명 대통령과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1일 핵심광물 발굴·탐사와 재생에너지, 원전 등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또 이를 위해 양국 관계를 ‘특별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국빈 방한한 프라보워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모두발언에서 “우리 양국은 서로에게 매우 각별한 국가”라며 “이번 대통령님의 국빈 방한을 계기로 양국 관계를 대한민국에서는 유일한 ‘특별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는 역사적인 결실을 맺게 됐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방산 등의 분야에서 양국 간 협력 강화를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인도네시아는 한국기업의 첫 해외 투자처였고 오늘날의 K방산을 있게 한 소중한 파트너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양 정상은 이날 한국형 차세대 전투기 ‘KF-21’의 양국 공동 개발 사업이 오는 6월 성공적 완수를 앞둔 것을 축하했다고 한다. 또 양 정상은 단순 무기 수출을 넘어 공동생산, 유지 보수 정비 센터 설립, 인력 양성 등을 포함한 포괄적 방산 협력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고 강유정 청와대 수석대변인이 전했다. 이 대통령은 중동 정세 악화 상황에서 인도네시아로부터의 에너지 수급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우리는 인도네시아가 LNG와 석탄 등 주요 에너지원의 안정적 역할을 해주는 데 대해 무척 든든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위기가 양국 경제와 국민의 삶에 미칠 영향이 최소화되도록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 및 자원안보 관련 양국 간의 협력을 확대해 나갈 필요성이 매우 크다”고 했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모두 발언에서 양국 관계를 “서로에게 보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라고 생각한다”며 이 대통령의 발언에 화답했다. 그는 “한국에는 뛰어난 산업 능력, 과학 기술이 있고 인도네시아에는 풍부한 자원, 큰 시장이 있다”고 했다. 프라보워 대통령 역시 국제 정세의 불확실성으로 양국의 협력 강화 필요성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제가 이번에 국빈 방문하는 이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는 그런 안타까운 상황”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한-인니 양국 간의 관계가 더욱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저희 관계를 계속 키워나가야 한다”며 “보다 더 포괄적인 협력으로 확대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양국은 이번 회담을 계기로 핵심광물, 디지털 개발, 재생에너지 등 분야에서의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 16건을 체결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프라보워 대통령에게 무궁화대훈장을 수여하는 등 극진히 예우했다. 강 대변인은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등 한·인도네시아 우호 관계를 증진시킨 프라보워 대통령의 기여를 높게 평가하면서 최고 수준의 예우를 표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빈 오찬은 프라보워 대통령에게 맞춰 할랄 식재료를 기본으로 한 한식 메뉴에 인도네시아식 삼발 소스 등을 준비해 양국의 화합을 표현했다. 또 국방장관을 역임하며 전통무예에 관심을 가진 프라보워 대통령의 취향을 고려해 육군 태권도 시범대가 외빈 상대로 첫 공연을 펼쳤다. 국궁 활 세트와 조선시대 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 영문판도 선물했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이 대통령에게 번영을 상징하는 물결 문양이 세공된 ‘발리 크리스’ 단검 등을 전했다.
  • 마곡에 세계 바이어 집결… 강서 ‘엑스포 도시’ 도약 시동 [현장 행정]

    마곡에 세계 바이어 집결… 강서 ‘엑스포 도시’ 도약 시동 [현장 행정]

    서울 기초지자체 첫 엑스포 유치수출 상담회 통해 중기 판로 개척진 구청장 “반년간 준비 끝에 개최강서 산업·역사 경쟁력도 알릴 것” 세계 75개국 1200여명의 바이어(구매자)와 240여개 국내 우수 중소기업이 서울 강서구에 있는 코엑스 마곡에 모였다. 진교훈 서울 강서구청장은 31일 코엑스 마곡에서 열린 기자설명회에서 “‘한국 비즈니스 엑스포 강서’ 행사는 대한민국의 역동성을 재외동포와 바이어들에게 알릴 절호의 기회”라며 “성공적인 개최를 통해 엑스포 도시로 도약하겠다”고 밝혔다. ‘비즈니스 엑스포 강서’는 전날 개회식을 열고 4월 1일까지 사흘 간의 일정을 시작했다. 재외동포 최대 경제인 단체인 세계한인경제무역협회(월드옥타), 서울경제진흥원, 강서구가 공동 주최한다. 전시·수출상담회가 열린 1층 전시장은 국내 중소기업 상품을 문의하는 해외 바이어로 붐볐다. 부스별로 10~16건의 상담이 이뤄졌다. 구에 있는 54개 우수 중소기업도 참여했다. 뷰티·헬스케어 기업 22개, ICT(정보통신기술) 기업 13곳 등이다. 또 글로벌 AI 스타트업 경진대회도 개최됐다. 서류 심사를 통해 선발된 인공지능(AI) 기반 스타트업 24곳이 글로벌 투자사에게 사업을 설명했다. 강서구는 지난해 서울 기초자치단체로는 처음 엑스포를 유치했다. 2024년 개관한 코엑스 마곡과 머큐어호텔과 같은 뛰어난 인프라가 기반이 됐다. 지하철 5·9호선, 공항철도가 연결돼 접근성이 탁월한데다 서울식물원 등 문화 시설도 있다. 진 구청장은 “202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비즈니스 엑스포에서 월드옥타와 만난 것이 시작”이라며 “규모 있는 엑스포를 개최할 수 있는 역량과 인프라가 갖춰졌다는 확신을 가지고 반년을 준비한 끝에 개최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행사는 강서의 유구한 역사를 알릴 기회이기도 하다. 강서구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의 고향이자 조선시대 진경산수화풍을 창안하고 완성한 겸재 정선이 현령으로 재직했던 곳이다. 진 구청장은 “많은 분이 강서의 인프라를 놀라워한다”라며 “공항 문을 나서 만나는 첫 번째 도시, 역사와 혁신이 공존하는 미래형 도시인 강서의 이야기를 알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박종범 월드옥타 회장은 “강서는 대규모 컨벤션에 최적화된 도시”라며 “앞으로 국내 중소기업들의 수출 시장 판로 개척의 플랫폼 역할을 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 도심과 자연을 잇는 조망의 명산, 검단산 [두시기행문]

    도심과 자연을 잇는 조망의 명산, 검단산 [두시기행문]

    경기도 하남시 배알미동에 위치한 검단산은 해발 658m의 높이를 지닌 산으로, 수도권에서 손꼽히는 근교 산행지다.한강변에 자리한 지리적 특성과 뛰어난 접근성으로 인해 연중 많은 등산객이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검단산은 한남정맥의 한 지맥에 속하며, 북쪽으로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예봉산과 마주하고 있다.이 사이에 형성된 협곡은 팔당댐과 연결되며, 수도권 수자원 관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남쪽으로는 용마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형성되어 있으며, 일대 산세는 비교적 완만하면서도 조망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정상에 오르면 시야가 탁 트이며, 팔당호를 비롯해 양수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특히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지형은 수도권에서도 보기 드문 자연 경관으로 평가된다.날씨가 맑은 날에는 북한산과 도봉산 능선까지 조망할 수 있어 산행의 만족도를 높인다. 검단산은 역사적 의미 또한 지닌다.조선시대에는 광주목의 진산으로 여겨졌으며, 백제 한성시대에는 위례성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던 산지로 추정된다.‘검단’이라는 명칭 역시 신성한 제단을 의미한다는 설이 전해지며, 실제로 산 일대에는 제사의 흔적과 관련 이야기가 남아 있다.또한 세종대왕 능을 이곳에 조성하려 했던 기록과 함께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의 묘가 위치해 있어 역사적 가치도 주목된다. 산행 코스는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하산곡동 산곡초등학교에서 출발해 정상에 오르는 코스와 창우동, 호국사를 경유하는 코스가 대표적이다.전반적으로 등산로 정비가 잘 되어 있으며, 일부 구간은 경사가 가파르지만 능선에 오르면 비교적 완만한 길이 이어져 초보자부터 가족 단위 탐방객까지 무리 없이 이용할 수 있다. 교통 접근성도 뛰어나다.수도권 지하철 5호선 하남검단산역을 통해 접근이 가능하며, 시내버스와 도로망이 잘 연결되어 있어 대중교통과 자가용 모두 이용이 편리하다. 도시화가 가속화하며 녹지 공간의 중요성이 커지는 가운데, 검단산은 수도권 시민들에게 자연 속 휴식과 여가를 제공하는 대표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도심과 가까우면서도 뛰어난 조망과 역사적 가치를 함께 지닌 이 산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의 발길을 끌 것으로 보인다.
  • 성곽 위를 걷는 산, 남한산과 남한산성의 역사 [두시기행문]

    성곽 위를 걷는 산, 남한산과 남한산성의 역사 [두시기행문]

    경기도 광주시와 성남시, 하남시, 서울 송파구 일부에 걸쳐 있는 남한산은 해발 522m의 높이를 지닌 산이다. 산 자체만 놓고 보면 비교적 완만한 능선을 가진 평범한 산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넓은 분지 형태를 이루고 외곽은 급경사를 형성하고 있어 예로부터 방어에 유리한 지형으로 평가받아 왔다. 남한산의 가장 큰 특징은 산 정상부 일대에 조성된 남한산성이다. 현재의 산성은 조선 인조 2년(1624년)부터 축성돼 1626년에 완공된 산성으로, 총 길이 약 12km의 성곽을 갖춘 대규모 방어시설이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45일간 항전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사적 제57호로 지정돼 있다. 남한산과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청량산과 맞닿아 있어 구분이 모호한 편이다. 일반적으로 수어장대가 위치한 청량산(약 497.90m)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지도상 최고봉은 남한산(522m)으로 구분된다. 이처럼 여러 봉우리와 능선이 이어져 있어 다양한 산행 코스를 구성할 수 있다. 산행은 비교적 부담이 적은 편이다. 남한산성 내부 도로를 따라 북문과 동장대를 거쳐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는 짧은 시간 내에 정상에 도달할 수 있으며,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은 완만하게 이어져 초보자나 가족 단위 탐방객에게도 적합하다. 반대로 성남, 하남 등 외곽에서 출발해 성곽을 따라 길게 걷는 코스는 비교적 긴 산행을 원하는 이들에게 적합하다. 정상과 능선에서는 탁 트인 조망을 즐길 수 있다. 산 주위가 비교적 낮은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어 시야가 넓게 열리며, 하남과 성남 일대는 물론 한강과 주변 산줄기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특히 벌봉(약 515m) 일대에서는 성곽과 어우러진 능선 풍경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남한산은 과거 ‘일장산’ 또는 ‘주장산’으로도 불렸다. 산의 사방이 평지로 둘러싸여 낮이 길게 느껴진다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또한 이 일대는 삼국시대 이후 군사적 요충지로 인식돼 왔으며, 조선시대에는 국가 방어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산행의 또 다른 특징은 성곽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다. 수어장대를 비롯해 동문, 서문, 북문과 암문, 옹성 등 다양한 방어시설이 남아 있어 단순한 산행을 넘어 역사 탐방의 의미를 더한다. 또한 장경사 등 사찰과 행궁터, 전각들이 산성 내부 곳곳에 위치해 있어 문화유산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남한산성 일대는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으며, 현재도 많은 탐방객이 찾는 수도권 대표 산행지다. 서울과 인접해 접근성이 뛰어나고, 비교적 완만한 코스와 역사적 가치가 결합돼 있다는 점에서 꾸준히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산행 이후에는 산성 내부의 식당가나 주변 지역을 함께 둘러보는 것도 가능하다. 인근 하남시와 광주시 일대에는 다양한 음식점과 휴식 공간이 형성돼 있으며, 한강 방향으로 이동하면 팔당호 일대까지 연계가 가능하다. 남한산은 높이보다 역사와 지형적 특징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산이다. 성곽과 함께 이어지는 산행은 수도권에서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의 탐방으로, 자연과 역사를 동시에 체감할 수 있는 공간으로 평가된다.
  • ‘왕사남’ 단종 유배길, ‘케데헌’ 누빈 성곽길… 시간 품은 길[서울 로드]

    ‘왕사남’ 단종 유배길, ‘케데헌’ 누빈 성곽길… 시간 품은 길[서울 로드]

    태조 때 쌓은 18.6㎞ 중 13.7㎞ 남아총 6개 코스 작년 방문객 5580만명처음 찾는다면 평탄한 숭례문 구간백악 구간 경사 가팔라 난이도 최상인왕 구간은 서울 명품 야경 한눈에‘길에는 주인이 없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신경준은 ‘도로고(道路考)’에 이렇게 썼다. 소설가 김훈은 ‘허송세월’에서 ’“길은 소통의 통로란 의미”라고 풀었다. 오래 전부터 길을 중심으로 사람과 재화, 서비스가 움직이고 건물이 들어섰다. 이처럼 길은 도시의 경쟁력이자 풍경이며 삶을 비추는 거울이다. 600여년 역사의 서울에는 많은 길이 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단종이 쫓겨갔던 유배길부터 3·1 운동과 4·19 혁명, 6월 민주항쟁, 2002년 월드컵, 두 번의 탄핵 촛불까지, 역사의 변곡점마다 길이 있었다. ‘서울 로드’에서 길에 스며든 과거와 현재, 미래를 풀어보려 한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조선을 건국하고 3년 뒤 수도를 개경(개성)에서 한양(서울)으로 옮기면서 가장 먼저 도성을 쌓았다. 전국에서 차출된 19만 7400여명이 98일 만에 총길이 18.6㎞의 성곽을 축조했다. 북악산과 낙산, 인왕산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한양도성은 500여년 동안 서울의 울타리로 소임을 다했다. 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시나브로 모습을 잃어갔다. 1899년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전차 개통과 함께 기능을 상당 부분 상실했고, 1907년 일본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길을 넓힌다는 이유로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됐다. 1908년 평지의 성벽 대부분이 헐렸다. 1925년에는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 흥인지문(동대문) 옆에 경성운동장을 지으면서 성벽을 헐어 석재로 썼고, 민간에서도 집을 짓기 위해 훼손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1968년 북한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한 ‘김신조 사건’(1·21 사태)을 계기로 숙정문 주변부터 복원이 시작됐다. 문화유적으로 정체성 변화에 맞춰 서울성곽이란 이름을 쓰다가 2011년부터 한양도성이란 공식명칭을 얻었다. 전체 구간의 70%인 13.7㎞ 구간이 남아 있다. 총 8개의 문(4대문·4소문) 중 숙정문(북대문)과 창의문(북소문)을 제외한 나머지는 헐리거나 소실돼 새롭게 복원(서대문·서소문 제외)됐다. 조선시대에도 한양도성을 따라 걸으면서 풍경을 감상하는 여행을 ‘순성(巡城)’이라 부르며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K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인기 덕분에 낙산공원 성곽길 코스가 유명세를 탔지만, 지금도 한양도성은 전체 구간을 걸어서 이동할 수 있다. 지난해 한양도성을 찾은 국내외 방문객은 총 580만명에 이른다. 한양도성을 처음 접한다면 숭례문(남대문) 구간이 제격이다. 강북삼성병원이 있는 돈의문 터에서 남산 입구 백범광장까지 도심을 가로질러 평지로 이동하는 구간이다. 남아 있는 성벽은 없지만 서울역사박물관과 덕수궁 돌담길 등을 지날 수 있어 서울을 처음 찾은 관광객들에게 안성맞춤이다. 백범광장에서 남산을 타고 장충체육관으로 이어지는 목멱산 구간은 다산 성곽길로 불린다. 당시 공사를 담당했던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각자성석(刻字城石)’도 볼 수 있다. 성곽길 곳곳에 숨겨진 맛집과 카페를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흥인지문에서 장충체육관으로 이어지는 흥인지문 구간 역시 성벽은 없어졌지만 한양도성의 역사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한양도성박물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등이 있어 필수 코스로 넣을 만하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역대급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단종이 1457년 6월 노산군으로 강등된 뒤 강원도 영월까지 쫓겨가는 700리(280㎞) 유배길에도 흥인지문은 등장한다. 야사에서는 창덕궁에서 출발한 단종이 흥인지문을 나와 청계천 영도교에서 정순왕후와 작별한 것으로 전한다. 다만 일각에서는 광희문(남소문)으로 나갔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시체가 나가는 문이라는 뜻의 ‘시구문(屍口門)’으로도 불린 광희문은 한양에서 죽은 시신을 한양 밖으로 옮길 때 통과하는 문이었다. 시신은 모두 사대문 밖으로 옮겨 묻어야 했는데 광희문이 당시 묘지가 많았던 수철리(현 금호동)의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흥인지문 북쪽으로는 케데헌 성지순례 코스인 낙산 구간이 나온다. 산이 있는 구간 중 가장 완만하고 길게 뻗은 도성에 설치된 조명 덕분에 밤에는 로맨틱한 풍경을 연출한다. 오래된 집을 유지하며 건물 외벽 그림 등을 볼 수 있는 장수마을과 이화마을도 이곳에 있다. 한양도성의 북쪽인 백악산과 인왕산을 연결하는 백악·인왕산 구간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혜화문에서 창의문으로 이어지는 4.7㎞ 백악 구간은 도성에서 가장 높은 백악마루(해발 342m)를 포함한다. 경사가 가팔라 한양도성 6개 코스 중 가장 난이도가 높다. 백악마루에서 청운대로 내려가는 길에는 15발의 총탄이 박힌 소나무에서 김신조 일당과 군경이 총격전을 벌인 흔적을 찾을 수도 있다. 창의문에서 돈의문 터로 이어지는 4.0㎞의 인왕 구간에서는 서울의 명품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강북삼성병원에서 출발해 90분쯤 올라가면 인왕산 정상에서 사대문 안 도심이 한눈에 들어온다. 해 질 무렵 올라가면 낮의 풍경과 야경을 동시에 감상할 수도 있다.
  • 강원도청 신청사, 30일 착공… 2029년 말 완공

    강원도청 신청사, 30일 착공… 2029년 말 완공

    강원도가 신청사 건립 공사에 돌입한다. 6·3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소속 김진태 강원지사와 맞붙을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강원지사 예비후보가 신청사 건립 중단을 요구하며 공세를 펼치고 있어 양측간 신경전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도는 오는 30일 춘천 동내면 고은리 신청사 건립 부지에서 착공식을 연다고 26일 밝혔다. 신청사는 10만 759㎡ 부지에 연면적 11만 4332㎡ 지하 2층·지상 9층 규모로 2029년 말까지 지어진다. 본청과 의회, 강원소방본부, 직장어린이집이 들어서고 총 1618대를 수용하는 주차장을 갖춘다. 사업비는 4995억원이다. 신청사가 지어진 뒤 남을 현 청사에는 도 산하기관, 공공기관, 사회단체와 도가 신설할 교통연수원, 가칭 강원자치경찰청 등이 입주한다. 또 도는 현 청사에 옛 춘천이궁과 조선시대 관아를 재현하고 강원역사기록박물관과 근대문화관, 봉의산 문화 둘레길, 숲체험장, 북카페 등의 문화·관광시설도 만든다. 신청사 건립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역 정치권 최대 쟁점으로 부상했다. 우 예비후보는 “고은리 신청사 신축 결정 자체는 존중한다”면서도 “아파트 분양 수익으로 건설 비용을 충당하겠다는 방식은 현재 공급 과잉 상황을 고려할 때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 지사는 “우 예비후보가 도청 이전 문제와 행정복합타운 문제를 혼동하신 것 같다”며 “신청사 건립비로 현재 1267억원을 확보했고 1년에 1000억원씩 도 예산으로 충당해 나가려고 한다”고 반박했다. 우 예비후보는 착공식 개최에 대해서도 “시공사 선정은 물론 착공계도 제출되지 않은 상태”라며 “그럼에도 착공식부터 열겠다는 것은 선거를 앞두고 도민을 속이는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김 지사는 “착공식은 이미 이달 초 시작된 부지 조성 공사를 기반으로 진행되는 것”이라며 “최근 20년 내 건립된 4개 광역자치단체 청사 모두 부지 조성 공사 착수 시점에 착공식을 진행했다”고 맞섰다.
  • 영화 ‘왕사남’ 누적 매출액 1425억원… 국내 개봉작 1위

    영화 ‘왕사남’ 누적 매출액 1425억원… 국내 개봉작 1위

    조선시대 비운의 왕 단종의 유배 생활을 그린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역대 국내 개봉작 중 누적 매출액 1위를 차지했다. 관객 수는 3위에 올랐다. 23일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왕과 사는 남자’의 누적 매출액은 1425억원으로 ‘명량’(2014·1357억원), ‘극한직업’(2019·1396억원)의 기록을 넘어섰다. 지난 20~22일 총 80만 3000명이 관람하며 누적 관객 수는 1475만 7000여명으로 ‘신과함께 - 죄와 벌’(2017·1441만), ‘국제시장’(2014·1425만)의 기록을 깨고 역대 개봉작 3위에 등극했다. ‘왕과 사는 남자’가 국내 개봉작 중 관객 동원 1위 ‘명량’(1761만)과 2위 ‘극한직업’(1626만)보다 관객 수가 적은데도 매출액이 높은 것은 영화 티켓가 상승 등이 영향을 미쳤다. 장항준 감독의 작품인 ‘왕과 사는 남자’는 강원도로 유배 간 단종(박지훈 분)이 마을 촌장 엄흥도(유해진 분)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과 어우러지며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이야기다. 역사적 기록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채운 따뜻한 서사로 공감을 얻었다. ‘왕과 사는 남자’를 바짝 추격하는 작품은 영화 ‘프로젝트 헤일메리’다. 지난 주말 국내 박스오피스 2위를 차지했으며 총 43만명이 관람했다. 현재 누적 관객 수는 56만 1000명이다. 소설 ‘마션’, ‘아르테미스’ 등을 쓴 앤디 위어의 SF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배우 라이언 고슬링이 주연을 맡았다.
  • 강원도 현 청사에 16개 기관·단체 온다

    강원도 청사가 춘천시 동내면 고은리로 신축 이전한 뒤 남게 되는 현 봉의동 청사에 도 산하기관과 정부 공공기관이 입주한다. 강원도는 문화·교육시설도 조성해 봉의동을 비롯한 중앙로 일대 공동화 현상을 막는다는 구상이다. 도는 신청사를 완공하는 2029년 이후 현 청사 중 제2별관을 산하기관 7곳과 공공기관 5곳, 사회단체 4곳 등 기관·단체 16곳이 입주하는 행정복합청사로 활용한다고 23일 밝혔다. 도가 신설할 교통연수원도 제2별관에 들어선다. 현 청사 신관에는 가칭 강원자치경찰청이 배치되고, 도의회 청사에는 강원역사기록박물관이 조성된다. 청사 본관은 도지사 집무실, 통상상담실 등을 재현한 근대문화관으로 바뀐다. 제1별관은 철거하고 그 자리에 옛 춘천이궁과 조선시대 관아를 재현한다. 춘천이궁과 봉의산성으로 스토리텔링을 입힌 봉의산 문화 둘레길과 숲체험장, 북카페로 구성된 어린이 창의 도서관이 들어선다. 김진태 강원지사는 “현 청사에 상주할 인원은 1000명이 넘고, 교통연수원 교육생과 문화관, 박물관 관광객까지 더해지면 지금보다 더 북적일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도는 오는 30일 고은리 청사 신축 현장에서 착공식을 개최한다.
  • 공민왕 숨결 서려 있는 ‘임영관’…잉어가 이어준 사랑 ‘월화거리’[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공민왕 숨결 서려 있는 ‘임영관’…잉어가 이어준 사랑 ‘월화거리’[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강릉, 고려·조선 때 대도호부 지위강릉읍성, 남대천 북쪽에 자리잡아 객사 ‘임영관’ 현판은 공민왕 친필읍성 내부 한은 등 공공 건물 밀집명주동, 카페·식당 등 문화의 거리영동선 노선은 예국고성 훼손 피해 ‘월화거리’ 무월랑·연화 이야기 담겨 왕릉 방불케 하는 ‘명주군왕릉’ 명소 강원도 평창에서 강릉으로 넘어가는 대관령이라면 곧 아흔아홉 굽이를 떠올린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반문할 사람도 없지 않을 듯하다. 오늘날 영동고속도로는 인천에서 강릉을 잇는 명실상부한 동서횡단길로 기능한다. 이 고속도로는 1971년 신갈에서 새말을 잇는 왕복 2차로로 초라하게 시작했다. 대관령을 넘어 강릉까지 전 구간이 개통된 것은 1975년이다. 대관령 옛길 일부를 고속도로로 활용했으니 아흔아홉 굽이 분위기는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지금처럼 산악도로 답지 않게 4차로의 큰 길이 된 것은 2001년이다. 이제는 ‘대관령을 넘어간다’보다 ‘대관령을 지나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국사성황신·대관령산신 기리는 단오제 여유로운 가족여행이라면 한번쯤은 아흔아홉 굽이로 유명했던 경강로(京江路)로 대관령을 넘어 봐도 좋을 것이다.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나들목에서 대관령양떼목장을 지나가는 456호 지방도다. 일부는 2차로 시절 고속도로로 쓰던 길을 지방도로 되돌린 것이니 이것도 새로운 경험이 되겠다. 무엇보다 경강로 주변엔 강릉단오제 주신(主神) 범일국사를 모신 국사성황사가 있다. 대관령산신당엔 강릉을 위협하던 말갈을 물러가게 했다는 김유신 장군이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어 자리잡고 있다. 강릉단오제는 새로 빚은 신주(神酒)를 국사성황신과 대관령산신에게 올리며 영동 지역이 근심을 떨치게 해 달라고 비는 것으로 막을 올린다. 강릉(江陵)이라는 땅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시대다. 고려사에는 1194년 ‘좌도병마사 최인이 정예 군사 수천 명을 이끌고 남적(南賊)을 공격했는데, 강릉성에 이르러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렸다’는 내용이 보인다. 강릉성의 존재도 여기서 처음 나타난다. 남적이란 당시 남부 지방 곳곳을 휩쓸었던 반란세력을 일컫는데 이들이 동해안까지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고려는 강릉을 동원경, 명주, 하서부, 경흥도호부 등으로 불렀다. 고려사는 ‘1308년 강릉부로 고쳤다. 1389년 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별호는 임영(臨瀛)’이라고 적었다. 강릉의 고구려 시대 이름은 하슬라(何瑟羅)다. 토착어를 음차해 한자로 표기했지만 순수한 우리말 어감이 살아 있다. 하슬라의 ‘하’는 바다나 태양을, ‘슬라’는 땅이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니 바닷가 고을이나 해돋는 고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이 땅을 빼앗은 이후에도 하슬라라는 이름을 한동안 쓰다가 742~765년 재위한 경덕왕이 한자식 이름인 명주(溟州)로 바꾼다. 명주는 글자 그대로 바닷가 고을이라는 뜻이다. 옛 이름 하슬라의 의미를 그대로 살린 것이다. 임영 역시 바닷가 고을이라는 뜻이다. ‘강변의 언덕’이란 뜻을 가진 강릉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짐작한다.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의 ‘아침에 백제성(白帝城)을 떠나며’에 강릉이 나온다. ‘아침에 무지개 구름 사이로 백제성을 떠나 / 천 리 밖 강릉을 하루 만에 돌아온다’는 대목이다. 백제성은 중국의 장강 삼협에 있었다고 한다. 문학작품에서 강과 바다는 ‘끝없이 이어진다’거나 ‘넓고 아득하다’는 이미지로 혼용되곤 한다. 우리 땅이름이 중국화하는 과정에서 장강 북안 징저우(江陵)가 힌트가 됐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강릉은 고려시대 대도호부의 지위를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물려받았다. 대도호부사는 종3품으로 지방관으로는 위계가 높았다. 강릉읍성은 대도호부사가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던 치소(治所)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고려시대 토성으로 처음 쌓은 것으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512년(중종 7년)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문을 4곳에 두었고 우물이 14곳, 연못이 2곳’이라고 적었다. 개축한 읍성의 둘레를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134.6m인데 실제는 1826m라고 한다. 지대가 높은 북쪽과 서쪽 일부는 토성을 그대로 유지해 차이가 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임영관 삼문·칠사당만 옛날 그대로 강릉읍성은 남대천(南大川) 북쪽에 남북이 긴 마름모꼴 모양으로 자리잡았다. 남대천이라는 이름도 강릉대도호부 관아 남쪽에 있는 큰 하천이라는 뜻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기록한 대로 강릉읍성은 동서남북에 가해루(駕海樓), 망신루(望宸樓), 어풍루(馭風樓), 빙허루(憑虛樓)의 누각을 갖추고 있었지만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읍성 내부 지역은 지금도 관아를 중심으로 한국은행, 기상청, KBS 방송국, 우체국, 과거엔 전화국이었을 KT 지점, 초등학교와 중학교 등 공공성 있는 건물이 밀집한 모습이니 역사는 이어지고 있다. 강릉대도호부 관아는 939년(고려 태조 19년) 세워졌다는 조선시대 기록이 있다. 모두 83칸의 건물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객사 정문인 임영관 삼문과 수령의 집무공간인 칠사당만 옛날 것이다. 대도호부 정문과 동헌, 서쪽 언덕 위 의운루(倚雲樓)와 객사 임영관은 최근 복원한 것들이다. 배흘림기둥이 인상적인 임영관 삼문은 강원도에서 유일한 고려시대 건축물이다. ‘증수임영지’에 따르면 염양사(艶陽寺)가 폐사되면서 옮겨 지은 것이다. 임영관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한다. 공민왕이 1366년 낙산사에 관음 기도를 드리러 가다 강릉에 들렀다. 그런데 큰비가 내리며 강릉에서 열흘 동안 머물렀을 때 임영관 편액을 썼다는 전설이 있다. 삼문 뒤편의 객사 임영관은 일제강점기 초기엔 보통학교로 쓰였다. 하지만 1930년대 이 자리엔 콘크리트로 경찰서 건물이 지어졌다. 수난은 광복 이후에도 이어졌다. 동헌과 칠사당 사이엔 1955년 강릉시청이 들어섰다. 동헌은 강릉시장 사택으로 쓰이다 1967년 헐렸다. 관아에서 길을 건너면 명주동이다. 개성 있는 카페와 음식점, 공연장이 들어서면서 문화의 거리로 발전하고 있다. ‘시나미 명주길’이라는 이름도 붙여졌는데 시나미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을 뜻하는 강원도 사투리라고 한다. 차분하고 품위 있는 골목이라는 인상이었다. ●옛 남대천 철교, 도보다리 ‘월화교’로 강릉시내 중심부에는 또 다른 옛 성터가 남아 있다. 동예(東濊)의 중심이던 시절의 예국고성이다. 동예라면 ‘삼국지’ 동이전을 떠올리게 된다. ‘같은 성끼리 혼인하지 않았고, 호랑이를 섬겨 신으로 여겼다. 살인자는 죽였고, 도적이 없었다. 10월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고 밤낮으로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르며 즐겼는데, 이 축제를 무천(舞天)이라 했다’는 대목이다. 월화거리는 강릉읍성 동쪽에 있다. 월화거리는 중앙시장과 더불어 강릉을 대표하는 먹거리 타운으로 떠올랐다. 조선총독부가 1925년 수립한 ‘조선철도 12년 계획’에는 부산과 안변을 잇는 동해선도 들어 있다. 일제는 동해선 노선을 정하는 과정에서 1938년 예국고성을 조사한다. 1962년 동해선의 일부로 개통된 영동선 노선이 남대천을 건넌 이후 역(逆) 기역자(ㄱ)자 모양으로 크게 꺾어진 것도 예국고성 성벽의 훼손을 피하려 했기 때문으로 짐작한다. 옛 남대천 철교는 이제 월화거리와 월화정을 잇는 도보다리 월화교로 탈바꿈했다. 대신 KTX 강릉선은 지하터널로 남대천을 건너 강릉역으로 진입한다. 월화거리는 흔적도 찾기 어려운 예국고성의 서쪽 성벽을 따라 조성한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면 남대천에서 가까운 예국고성 주변은 지대가 낮은 듯 보인다. 예국고성을 버리고 강릉읍성을 새로 세운 것도 상습적인 수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높은 지대를 선택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월화거리는 ‘무월랑과 연화 부인’의 사랑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월화거리에서 조명이 아름다운 월화교를 건너면 월화정이다. 짐작처럼 무월랑과 연화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다. 월화정 설화는 강릉 출신 문인 교산 허균의 ‘별연사고적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무월랑은 강릉에 머물던 시절 연화와 사귀었는데 경주로 돌아간 뒤 연락이 없었다. 연화는 잉어를 잡아 뱃속에 편지를 넣은 뒤 다시 놓아 주었는데, 이튿날 경주의 무월랑 집에서 음식재료로 사들인 물고기가 바로 그 잉어였다는 내용이다. 강릉 김씨 시조가 되는 김주원의 부모가 곧 두 사람이다. 김주원은 신라하대 진골귀족으로 강릉에서 독자적 세력을 형성해 명주군왕에 봉해졌다. 강릉에는 왕릉을 방불케 하는 김주원의 무덤 명주군왕릉도 있으니 한번 찾아가 봐도 좋을 것이다. 글·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 조선 왕실이 추억한 단종의 마지막 자취

    조선 왕실이 추억한 단종의 마지막 자취

    조선 후기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장릉·청령포·관풍헌 등 그림 담아 조선시대 500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왕, 단종의 마지막 자취를 조선 왕실의 시각에서 복구한 ‘월중도’(越中圖)가 특별 공개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은 16일부터 경기 성남시 연구원 내 장서각 전시실에서 보물 ‘월중도’ 8폭 전면을 전시한다고 13일 밝혔다. 1457년 음력 6월 세조(재위 1455~1468)는 상왕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수도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영월로 유배를 보내라는 교지를 내렸다. ‘상왕이 종사(宗社·종묘와 사직을 일컫는 말)에 죄를 지었으니 편안히 거주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는 내용이다. 당시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의 아버지이자 판돈녕부사를 지낸 송현수(?~1457) 등이 반역을 꾀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열여섯 살인 조카 단종(재위 1452~1455)의 지위까지 강등한 것이다. 단종은 몇 달 후 영월에서 생을 마감했다. 단종이 숨지고도 단종 복권 논의는 끊이지 않았다. 드디어 숙종(재위 1674 ~1720)은 단종을 복위시키도록 결정했고, 영조(재위 1724~1776) 대부터는 단종과 충신의 사적을 복구하는 작업이 본격화된다. 정조(재위 1776~1800) 때인 1791년에 제작된 ‘월중도’는 200년 넘게 계속된 조선시대의 ‘역사 바로세우기’를 상징하는 작품인 셈이다. 단종의 무덤인 장릉, 유배지인 청령포를 실경으로 그린 산수화, 청령포에 홍수가 발생하자 거처를 옮겨 머물고 사약을 받아 숨을 거둔 관풍헌, 애처로운 마음을 담아 시를 지었다고 전하는 자규루(당시 매죽루), 단종에 절의를 지킨 사육신 등을 배향한 사당 창절사 등이 담겼다. 1763년 영조가 친필로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라는 비문을 써 단종의 집터에 세운 비각(碑閣)도 그려져 있다. 장서각 관계자는 “단순한 옛 그림이 아니라, 단종의 비극적인 생애와 그를 기리는 조선 왕실의 기억을 담은 기록화”라면서 “조선 왕실의 회화와 기록문화를 직접 살펴볼 기회가 될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6월 26일까지.
  • 자백할 때까지 주리를 틀어라? 국왕 형벌에 제동 건 ‘조선 여론’

    자백할 때까지 주리를 틀어라? 국왕 형벌에 제동 건 ‘조선 여론’

    1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돌풍을 이어가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단종 복위를 추진하다 체포된 신하들의 주리를 트는 고문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죄인의 다리를 묶은 뒤 그 사이에 굵은 막대기(주릿대) 두 개를 끼워 가위처럼 비트는 ‘주리틀기’는 사극 영화나 드라마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고문 방식이다. 조선시대 법제사를 연구하는 정진혁 박사는 최근 펴낸 학술서 ‘조선 후기 형정개혁과 추국’에서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조선의 중앙집권적 통치구조에서 추국(推鞠, 의금부가 임금의 특명에 따라 중죄인을 신문하던 일), 결안(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의 형 확정 절차)과 같은 형사행정(형정)의 구조와 변화과정을 추적했다. 정 박사는 조선 후기 중죄인의 조사·판결서를 모은 책인 ‘추안급국안’에 실린 형사 정보와 개인 정보를 모두 계량화해 조선 후기 사법개혁 추진 배경과 진행 과정을 살펴봤다. 1601년(선조 34년)부터 1892년(고종 29년)까지 300년 정도의 각종 사건을 전수조사한 셈이다. 저자에 따르면 숙종 대에는 경신·기사·갑술환국, 영조 대에는 이인좌의 난, 정조 대에는 정유역변(정조 시해 미수 사건)이 형정 운영의 변곡점이 됐다. 형정 개혁을 둘러싸고 왕권과 신권이 충돌하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권력이 국왕에 집중되던 숙종 때도 민간의 여론이 형사제도에 영향을 미친 장면은 눈길을 끈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 폐비 반대 상소를 주도했던 박태보에게 법외 악형인 압슬형(무릎을 짓이기는 형벌)과 낙형(쇠붙이로 지지는 형벌)을 가해 결국 물고(고문치사)시킨 사건은 부정적 여론을 일으켜 이후 숙종이 사망할 때까지 악형이 거의 시행되지 않았다. 국왕의 형사법 남용을 관료와 민간 여론이 제약한 대표적 사례라고 정 박사는 설명했다. 압슬형이나 낙형 같은 악형은 자백 유도 효과는 높았지만 부작용도 상승했다. 이 때문에 영조 이후에는 법외 악형은 완전히 소멸되는 상황이었고, 법적 규정에 의한 고신으로 전환됐다. 이에 대해 정 박사는 ‘국왕이 직접 수사하고 피의자가 직접 자백한다’는 도덕적 제약에서 벗어나 ‘하위 사법 기관이 수사하고 국가가 증거를 종합해 판결한다’는 효율적 측면으로 전환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책꽂이]

    [책꽂이]

    담바고 문화사(안대회 지음, 문학동네) 의학 지식이 축적되면서 담배는 모두가 꺼리는 애물단지가 됐다. 그렇지만 17세기 조선에서 담배는 10세 아이들부터 여성들까지 모두가 즐기는 기호품의 제왕이었다. 대표적인 애연가였던 정조는 백성 모두에게 담배를 피우게 할 방법을 찾으라고 신하들에게 지시까지 했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가 조선시대에 빼놓고 생각할 수 없었던 필수품 담배를 통해 당시의 문화와 예술, 경제, 의식과 풍속을 살펴봤다. 504쪽, 3만 3000원. 태도로 승진합니다(이인재 지음, 한국사회적자본연구소) 행정고시 합격 후 행정안전부에서 30년 넘게 행정전문가로 활약했던 저자가 퇴임 후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직장이란 전쟁터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실전 지침을 제시했다. 저자는 조직사회에서 요구되는 ‘태도’는 윤리나 도덕이 아닌 생존 기술이며, 태도 역량 강화야말로 일터에서 대체 불가한 인재가 되는 지름길이라고 강조한다. 368쪽, 2만 3000원. 빛나는 시절을 지나는 중입니다(이애경 지음, 섬타임즈) 우리는 나서 죽을 때까지 항상 ‘다음’을 맞는다. 하루, 한 달, 한 해의 시작과 끝, 스물, 서른, 마흔처럼 인생의 한 시절이 다음으로 넘어가는 매 순간 설렘과 기대, 불안과 초조가 뒤섞인 감정과 함께한다. 저자는 삶은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치열하지만, 깨짐을 받아들이고 회복하면서 내 삶을 끌어안고 사랑하는 것이 잘 살아가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밝힌다. 188쪽, 1만 4300원.
  • [서울광장] 청령포 가는 또 하나의 방법

    [서울광장] 청령포 가는 또 하나의 방법

    강원도 영월을 배경으로 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흥행하면서 2006년 개봉 영화 ‘라디오 스타’도 소환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왕사남’ 현장을 보러 영월을 찾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라스’의 금강정과 청록다방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라스’의 배경으로 영월이 선택된 것도 이 고장 분들에게는 송구하지만 오지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영월이 단종의 배소(配所)가 된 것과 같은 이유였다. 우리 뇌리 속의 청령포는 나갈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는 외로운 유배지다. 지금은 신림에서 영월 사이에 터널도 뚫렸다지만, 오래전 영월에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는 기억이 있다. 그러니 청령포를 방문하면 단종을 고립시킨 주변의 산과 강이 너무 아름다워 오히려 더욱 비극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런데 지역에선 단종의 유배길이 육로가 아닌 뱃길이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주장도 있는 모양이다. 영월읍은 서강과 동강이 합류해 남한강을 이루는 두물머리에 자리잡고 있다. 실제로 남한강 수운은 강원도 내륙과 한양을 잇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삼연 김창흡(1653~1722)의 ‘단구일기’(丹丘日記)는 일종의 유람기이지만 조선시대 남한강 뱃길의 사정도 짐작케 한다. 청음 김상헌의 증손자로 문곡 김수항의 자제인 김창집·김창협·김창흡·김창업 형제는 당대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흔히 장동 김문으로 불리는 이들 집안은 인왕산 옆 장동과 청풍계에서 대대로 살았다. 장동 김문은 겸재 정선의 패트런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겸재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인왕제색도’와 ‘청풍계도’ 역시 장동 김문이 사는 동네를 시점 삼아 그린 작품이다. 겸재의 대표 화첩 중 하나인 ‘경교명승첩’의 ‘석실서원도’도 그렇다. 남양주 한강변 석실서원은 장동 김문의 가묘(家廟)나 다름없었고 훗날 삼연도 배향됐다. 삼연은 1688년 3월 한양에서 출발해 뱃길로 여주·충주·청풍·단양·영월을 35일 동안 여행하고 일기와 300수 남짓한 시를 남겼다. 본격적인 유람에 앞서 덕포에서 성묘를 하고 4일 출발했다고 적었으니 석실서원과 묘소를 먼저 들른 듯하다. 삼연의 남한강 유람은 형인 농암 김창협이 한 해 전 청풍부사로 나간 것이 계기가 됐다. 청풍은 오늘날 제천시의 일개 면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읍 격이 높은 도호부였다. 남한강이 절경을 이루는 곳으로 수운을 이용하면 한양을 오가기도 어렵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청풍에는 당대 실력자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삼연은 한벽루에서 ‘양근과 여주 지나 동쪽으로 거슬러 충주를 넘어 도착한 뒤에는 조각배를 저녁 물가에 내버려두었네’라고 노래했다. 삼연은 3월 25일 단종의 무덤과 사육신의 사당인 육신사(六臣祠)를 찾았다. 이곳에서 ‘삼경에는 노산군의 무덤 위에서 울더니 / 사경에는 육신사로 옮겨 내려가고 / 오경에는 소리마저 끊어졌으니 어찌된 일인가 / 금강의 물은 흐느끼며 피를 더한다 / 나그네는 말을 몰아 밤에도 머물지 못하고 / 명월루에서 슬픔과 원망에 젖어 있네’라는 시를 남긴다. 자규(子規)란 소쩍새다. 단종은 영월 관풍헌에서 죽기 전에 지었다는 ‘자규시’를 통해 자신을 원통한 소쩍새에 비견했다. 삼연도 옮겨 다니며 구슬피 우는 소쩍새를 떠올렸다. 금강(錦江)은 청령포를 흐르는 서강을 이른다. ‘단종의 물길 유배’ 주장에는 “영월 뱃길은 험한 물살을 거슬러야 하는 만큼 꺼렸을 것”이라는 반론이 많다. 단종이 한양을 떠난 6월 22일은 장마철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삼연은 양평을 막 지난 대탄(大灘)부터 ‘물길이 높고 여울이 심히 사나운데 가운데 돌덩이가 많아 얼기설기 엉켜 있다. 물가는 사납고 물은 노하여 들끓듯 하니 차가운 포말이 날아와 매우 두려웠다’고 적었다. 그럼에도 단종이 유배길 초반 뱃길을 이용했다는 것은 정설이다. 원주 흥원창까지는 배를 탔을 것이다. ‘단구일기’를 보면 청령포가 ‘극악의 유배지’는 아닐 수 있다는 느낌도 갖게 된다. 뱃길이라면 영월에서 남한강 하류 서울 사이는 조금 과장하면 노를 젓지 않아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월과 청령포가 ‘마음의 거리’로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던 듯싶다. 적어도 세조가 조카 단종을 영월에 보내면서 처음 먹었던 마음만큼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모르겠다. 아직도 세조를 모르는 탓인가. 서동철 논설위원
  • 한국인의 삶, K컬처 뿌리를 캐다

    한국인의 삶, K컬처 뿌리를 캐다

    K푸드 원조 격 밥상의 역사 조명 가장 사적이며 보편적인 집 탐구 K패션 유래 여성 복식의 미 발굴 올해 주요 박물관, 미술관에서 우리 생활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衣食住)를 주제로 한 대형 전시가 잇따라 예고돼 눈길을 끈다. 높아진 K컬처의 위상이 한국인의 삶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된 영향으로 해석된다. ●‘국중박’ 7월 ‘우리들의 밥상’ 특별전 지난해 연간 관람객 650만명 돌파라는 기록을 세우며 세계 3위 수준의 박물관으로 우뚝 선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은 오는 7월 ‘우리들의 밥상’ 특별전(7월 1일~10월 25일)을 선보인다. K푸드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 속에서 우리 먹거리 문화의 원형과 변천을 조명하는 자리로 벌써부터 기대를 모은다. 전시에는 경남 창원시 다호리 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1세기 무렵의 감이 담긴 칠그릇,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식기, 조선 후기 성협의 풍속화첩 속 ‘고기굽기-야연’ 등 300여점을 소개한다. 유홍준 중앙박물관장은 지난달 3일 신년기자간담회에서 이 전시를 소개하며 “음식은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문화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소재”라며 “K푸드에 대한 세계적 관심에 발맞춰 우리 밥상에 올라와 있는 음식의 내용과 그 역사, 민속에 대해 알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국현’ 8월 설치미술가 서도호 개인전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은 전 세계 미술계의 시선이 서울로 향하는 프리즈 서울 기간에 맞춰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서도호(64) 카드를 내민다. 서 작가는 지난 30여년간 독창적이며 흥미로운 개념의 정교한 조각, 설치, 영상 작업을 통해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더 입지가 공고한 작가다. 특히 ‘집’으로 대표되는 공간, 기억, 이동, 정체성은 그의 핵심 주제다. 실제로 그는 지난해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전시에도 유년기 살았던 서울 성북동의 한옥집을 재현한 작품인 ‘러빙/러빙 프로젝트: 서울집’, 서울, 뉴욕, 런던, 베를린 등 세계 각 도시에서 생활하며 머물렀던 집들을 이은 21.5m 초대형 작품 ‘네스트’, 그가 머물렀던 집 내부 공간 손잡이, 전등, 스위치 등 사물들을 재현한 ‘퍼펙트 홈’ 등을 선보였다. 회고전 성격을 지닌 이번 서울 전시(8월 28일~2027년 2월 9일)에서는 런던에서 보여줬던 작품은 물론 지금까지 공개된 적 없는 대학원 시절 작품을 공개한다. 또 150여점에 달하는 작가의 드로잉을 최초로 한데 모아 공개한다. 전시를 기획한 설원지 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탐구한 작업과 거주와 이주의 경험을 다룬 ‘집’ 연작을 유기적으로 결합할 예정”이라며 “나와 타자, 집과 세계에 대한 가장 사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질문을 관람객이 각자의 방식으로 할 수 있도록 구성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경기도박물관 10월 ‘복식특별전’ 올해 개관 30주년을 맞은 경기 용인시 경기도박물관은 10월 2008년 발굴돼 화제가 됐던 ‘화조문자수스란치마’의 재현품을 최초로 공개하는 ‘복식 특별전’(10월 22일~2027년 2월 14일)을 예고했다. 복식 특별전은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여성 복식이 지닌 아름다움을 소개하는 전시로 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이자 희귀 유물인 화조문자수스란치마의 복원 과정을 공개해 전통문화의 현대적 의미를 재해석할 계획이다. 이 치마는 청송 심씨 문중 묘역 성산 이씨(1651~1671) 부인의 무덤에서 자수주머니, 노리개, 비녀, 가락지 등과 함께 발굴된 유물이다. 문헌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수치마’(자수치마)의 실물이 처음 확인된 사례로 정교한 자수로 새와 꽃무늬를 표현한 스란단이 덧대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미숙 박물관 학예팀장은 “최근 ‘K패션’과 전통 복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이번 전시는 조선시대 여성 복식의 아름다움과 섬세한 전통 공예기술 등을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됐어요! 조선시대 유생”… 즐거운 ‘신방례’

    “됐어요! 조선시대 유생”… 즐거운 ‘신방례’

    성균관대 신입생들이 8일 서울 종로구 성균관 문묘에서 열린 ‘2026 신방례’를 마치고 휴대전화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신방례는 조선시대 과거 합격생을 위한 환영식으로 선배들이 신입 유생을 맞이하던 일종의 통과의례다.
  • AI로 수평 조절 ‘척척’, 색감 보정 ‘쓱싹’, 말로 해도 ‘뚝딱’

    AI로 수평 조절 ‘척척’, 색감 보정 ‘쓱싹’, 말로 해도 ‘뚝딱’

    “세종대왕 동상에 조선시대 왕 옷을 입혀 줘.” 갤럭시 S26 울트라의 자연어로 원하는 내용을 입력해 편집하는 ‘포토 어시스트’에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사진을 넣고 이렇게 말하자 ‘상상 속의 이미지를 실현시키는 중’이라는 문구가 떴다. 10초도 안 돼 인공지능(AI)이 웹사이트에서 빨간 곤룡포를 찾아 자연스럽게 합성했다. 세종대왕이 앉아 있는 동작에 맞춰 옷의 굴곡, 그림자, 주름 등도 부드럽게 표현됐다. ●포토샵 등 문외한도 사진 합성 등 쉽게 브이로그를 생애 처음 시도한 기자는 5일 갤럭시 S26 울트라를 활용해 사진과 영상을 촬영하고 AI 기능이 대폭 업그레이드된 포토 어시스트로 편집을 했다. 포토샵을 전혀 다룰 줄 모르는 비전공자도 말 한마디로 전문가급의 자연스러운 사진 합성이 가능했다. 딥페이크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합성 사진의 왼쪽 하단에는 자동으로 ‘AI로 생성한 콘텐츠’라는 워터마크가 찍혔다. 동영상 촬영 기능도 향상됐다. 전작인 갤럭시 S25에 손 떨림 등 흔들림을 보정해 주던 ‘슈퍼스테디’ 기능이 있었다면, 갤럭시S26 시리즈에는 한 단계 더 나아간 ‘수평 고정 슈퍼스테디’ 기능이 추가됐다. 미세한 손 떨림은 물론, 격렬하게 움직이는 영상 속에서도 대상이 고정된 채로 촬영된다. 유튜버들이 사용하는 전문 장비인 ‘짐벌’의 기능이 휴대전화 안에 구현된 셈이다. 수평 고정은 유튜버들 사이에서 ‘챌린지’로 화제가 되고 있다. 360도 돌아가는 건조기, 차량 바퀴, 드릴 등에 갤럭시S26 시리즈를 부착해 영상을 찍은 뒤 화면이 돌아가지 않고 고정된 채로 촬영된 결과물을 인증하는 식이다. ●손떨림·버스 흔들림 도 안정적으로 실제 수평 고정 슈퍼스테디를 설정하고 버스 창문에 갤럭시 S26 울트라를 바짝 붙인 채 바깥 풍경을 촬영해보니 버스의 흔들림 없이 매끄러운 영상을 찍을 수 있었다. 또 지면에서 영상을 촬영하는 동안 걷거나 뛰는 등의 행동에 제약을 받지 않았다. 밤 10시에 찍은 영상에는 차량이나 건물 등은 물론 도로의 분홍색 교통안내선 색깔도 선명하게 찍혔다. 2억 화소 광각과 5000만 화소, 광학 줌 수준의 10배 줌 망원 카메라, 더 넓어진 조리개 등이 선명한 야간 촬영을 지원한 것이다. 실내와 실외, 햇빛이 많거나 흐린 날, 낮과 밤 영상을 이어 붙일 때도 하나의 톤으로 보정이 가능했다. 영상의 채도를 낮게 만드는 로그(LOG) 기능으로 튀는 색을 줄인 뒤, 룩업테이블(LUT) 기능을 사용하면 터치 한 번에 간단히 후보정을 할 수 있다. 채도, 조도 조절 등 전문적인 촬영을 하지 못하는 초보자도 LUT 기능에서 블록버스터, 로맨스, 스릴러 등 원하는 분위기를 선택하면 PC로 영상을 옮겨 편집할 필요 없이 휴대전화에서 간단히 보정이 이뤄진다. 카페나 대중교통에서 브이로그 편집을 하는 동안 옆자리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일 땐 ‘프라이버시 디스플레이’ 기능을 활용했다. 프라이버시 디스플레이 기능을 켜자 빛을 상하좌우로 넓게 분사하는 ‘와이드 픽셀’은 꺼지고 정면으로 비추는 ‘전면 픽셀’만 작동해 양옆이나 위아래 각도에서는 휴대전화 화면이 보이지 않았다. ●1억개 이상의 귀 토대로 버즈 출시 갤럭시 S26 시리즈와 함께 출시된 ‘갤럭시 버즈4 프로’는 음향을 섬세하게 들으면서 촬영할 수 있도록 도왔다. 착용감이 특히 좋아져, 장시간 착용해도 이질감이 크지 않았다. 달리기를 하는 동안에도 이어버드가 흔들리거나 빠지지 않는 안정감이 있었다. 삼성전자 측은 전 세계에서 수집한 1억개 이상의 귀 데이터와 1만회 이상의 착용 시뮬레이션을 활용한 인체공학적 디자인이라고 했다. 시끌벅적한 카페에서 버즈4 프로를 착용하자 주변 소음이 빠르게 잦아든 노이즈 캔슬링 성능도 인상적이었다. 전작과 비교했을 때 저음이 한층 단단하고 깊게 표현됐다.
  • 손끝의 고백처럼 느리게… 신라의 봄밤을 거닐다[박상준의 문장 여행]

    손끝의 고백처럼 느리게… 신라의 봄밤을 거닐다[박상준의 문장 여행]

    작은 고분 ‘마총’ 찾아가는 길아득한 사랑의 시작이 떠올라오아르미술관 창문 너머 고분금관총 지나 봉황대까지 산책3월 대릉원의 밤은 목련 명소불같은 사랑의 계절 지나간 듯황남리고분군에선 평온하게어느 커다란 무덤 앞에서 당신이 내 손바닥을 펴더니 손끝을 세워 몇 개의 글자를 적어 보였다. 그러더니 다시 손바닥을 접어주었다. 나는 무엇이 적힌 줄도 모르면서 고개를 한참 끄덕였다. -‘그해 경주’(박준) 당신이 내 손바닥에 적은 건 사랑의 고백이었을까. 봄밤의 서정이었을까. 아니면 말로 할 수 없어 그려 나간 암호 같은 기호였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손끝을 세워 점 하나를 찍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사는 이 도시에서, 커다란 무덤은 유구한 약속의 증표였으며 그 또한 하나의 점을 찍는 데서 출발했을 터이므로. ●사랑이 꽃피는 무덤가에서 제133호 고분 마총(馬塚)은 제일 작은 무덤이다. 경북 경주시에 가기 전, 지도 앱을 펼치고 손가락 끝으로 위치를 옮겨 다녔다. 노서동에서 노동동으로 황리단길을 건너 대릉원으로 가장 작은 고분을 찾으려 이름 없는 작은 원들을 살폈다. 점 하나라도 남기고 싶은 절박한 심정은 왜 꼭꼭 숨겨둔 사랑의 고백을 닮아 보이던지. 알고는 있다. 고분의 크기가 곧 권위다. 작은 무덤은 말석일 확률이 높다. 지도의 축척조차 표현하지 못한 너비가 있을 것이고, 그 터만 남아 한없이 초라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또 어떤 무덤은 이름조차 얻지 못한다. 고분에는 능(陵)이 있고, 총(塚)이 있고, 분(墳)이 있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미추왕릉은 삼국유사에 그의 무덤이라 기록된 바다. 총은 유물이 있어 왕릉으로 추정하나 이름을 알 수 없는 무덤이다. 금관이 나와서 금관총이고 천마도가 나와서 천마총이라 부른다. 가치는 있으나 유물도 없고 주인도 모르는 큰 무덤은 분이다. 분의 근원을 알 수 있는 무언가가 나오면 총이 되고 능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러니 실은 어느 것이 크고 어느 것이 작은 무덤인지 알 수 없다. 오늘은 그저 눈에 띈 가장 작은 것을 찾아 헤맬 따름이다. 왠지 그것이 ‘그해 경주’를 닮은 사랑의 깃대가 되어 줄 듯해서. 마총에 가려고 경주역에서 내려 버스를 탔다. 앞자리에는 젊은 연인이 앉았다. 버스는 황리단길까지 20분이 걸렸다. 그 짧은 동안에도 그들은 사소하게 다투고 서둘러 화해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 남자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사랑해.” 나는 왜 이토록 일상적인 사랑의 뒷자리에 앉아 있는가. 설레고 흔들리는 마음, 아무것도 모르면서 고개만 끄덕이게 하는 불안한 흔적들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지난해 가을, 우연한 기회로 경주에서 박준 시인의 강연을 들었다. 그는 시를 느리고 모호하게 표현하는 문학이라 정의했다. 뜨거운 감정은 말로 전하기 힘들어, 뜨거운 채로 건네지면 상처를 남긴다. 그래서 에둘러 건네는 복잡한 마음은 부풀어 시가 된다. 그날 시인이 읽어준 시가 ‘그해 경주’였다. 시인의 육성을 들으며 문득 이 시가 생각나면 다시 경주를 찾아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내게도 아득한 어느 날 당신이 손끝을 세워 써준 몇 개의 글자가 있을 테고, 접었던 손바닥을 스스로 펴보면 암호 같던 그 말들을 뒤늦게나마 알아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작은 고분과 명소가 된 미술관 마총은 노서리고분군 가장자리에 간신히 걸쳐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지름 11~14m, 높이 3.4m인 이 작은 무덤은 ‘고분’이란 말조차 버거워 보인다. 처음 연 지도에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작은 원이었다. 다른 지도에는 방문자 리뷰가 4건 있었는데 대체로 노서리고분군을 대신한 표시였다. 그나마 이름이 있고 안내판이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말뼈와 마구가 발견되어 붙은 마총은 얼마나 무심한 명명인가. 고분의 위용은 외려 이름 없는 134호 고분이 두드러진다. 남과 북의 두 기가 겹친 규모로 마총을 압도한다. 마총 곁에는 지난해 4월 1일 오아르미술관이 개관했다. 작은 고분 곁에 일어난 거짓말 같은 일. 오아르는 ‘오늘 만나는 아름다움’을 뜻한다. 유현준 건축가가 설계했다. 건축가의 명성 덕분인지 단숨에 경주의 명소로 떠올랐다. 고분과 접한 미술관 동쪽은 2층 전체가 거대한 창이다. 고분군의 풍경을 잔뜩 품어 안는다. 그래서 미술관을 소개하는 글에는 어김없이 ‘고분을 품은 미술관’ ‘왕릉 뷰’라는 수사가 따른다. 그때 고분과 왕릉에는 금관총과 봉황대 등 커다란 고분이 오르내린다. 마총은 미술관 가장 가까이에 있지만 슬며시 이름을 감춘다. 작은 봉분을 마주하려 미술관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을 여는 건 고작 작은 열쇠 하나다. 미술관 1층은 카페와 전시장이 공존한다. 카페만 이용할 수도 있는데 다정한 시간을 원하는 연인들은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그들이 1층에서 바라보는 건 어김없이 마총이다. 거대 고분군을 배경으로 소담하게 솟은 마총은 아래쪽 석재가 높이의 절반을 차지한다. 기단처럼 보이지만 봉분 안의 널길이나 돌방의 일부일 것이다. 본래의 크기는 인근에 있는 쌍상총(지름 17m, 높이 5m) 정도로 추정한다. 그러니 카페에서 보이는 마총의 서남쪽은 훼손된 형체, 시간이 지나 부서지고 무뎌진 자취다. 그 자리에서 ‘그해 경주’는 마총으로 인해 달리 읽힌다. 당신이 내 손바닥에 적은 말들은 어쩌면 접어 쥔 손안에서 모래시계처럼 흘러내려 이별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해 경주’가 실린 산문집의 제목은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난다)이다. 사랑이 지나간 후의 노래 같아서 책 속에는 ‘그해’로 남은 시가 유독 많다. ‘그해 인천’과 ‘그해 경주’가 첫 장을 열고 여수, 협재, 묵호, 행신, 삼척을 지나 ‘그해 연화리’라는 글로 닫힌다. 그해 경주에서, 시 속의 당신과 내가 나란히 앉아 바라보던 무덤은 혹여 마총 같은 자그마한 고분은 아니었을까. 다만 사랑했으므로 우리의 맹세는 그 무덤을 커다랗다고 믿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경주의 시간을 걷는 길 오아르미술관 2층에는 134호 고분의 정상부가 눈을 맞춘다. 마총은 보이지 않는다. 134호 고분은 하부가 절반쯤 사라진 높이로 주변의 고분과 부유한다. 창가로 한 걸음 다가가자 비로소 마총이 보인다. 한층 낮아진 고분 곁으로 손을 마주 쥔 연인들이 지난다. 그들에게는 이 모든 고분이 사랑의 배경이 될까. 마침 전시의 제목은 ‘잠시 더 행복하다’(2026년 3월 16일까지)다. 박서보, 야요이 쿠사마, 줄리안 오피 등의 작품을 본다. 시간을 겹겹으로 쌓아 그리는 박서보, 이우환과, 김문호 관장이 천진함에 반했다는 아야코 록카쿠가 세대를 넘나든다. 작품은 없지만 옥상은 잠시 더 행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소다. 계단식 전망대가 고분 위에 앉아 경주를 내려다보는 듯한 시점을 제공하는데, 봉분들은 파도처럼 넘실대고 능선 끝에서 기어이 경주 남산까지 가닿는다. 교촌마을의 한옥 또한 옹기종기하다. 천년 경주의 스펙트럼이 그 한 장면 안에 있다. 다시 부풀고 설레는 마음. 이런 황홀한 풍경을 같이 바라볼 때, 연인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처음으로 손을 잡을지 모르겠다. 미술관을 나와서는 금관총을 지나 봉황대를 돌아본다. 그러고는 대릉원으로 옮겨간다. 오로지 고분만을 따라 걷는 산책이다. 지도 위에 무뚝뚝한 직선을 그으면 500~600m 남짓이지만 발끝을 세워 걸으니 누그러져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이때만은 옛 무덤의 문을 두드리듯 능이나 총이라 이름 붙여진 고분의 사연을 물어도 좋겠다. 금관총은 봉분이 없다. 대신 돔을 덮어 유적 전시관으로 거듭났다. 신라의 고분은 어떻게 지어졌을까. 그 대답이 금관총 안에 고스란하다. 지난해 APEC 2025 정상회의 기간, 국립경주박물관은 신라 금관 여섯 점을 한데 전시해 주목받았다. 금관총은 처음 신라의 금관을 발견한 고분이다. 주막 주인이 언 땅을 파헤친 게 계기다. 2013년에는 ‘이사지왕’(爾斯智王)이란 이름을 새긴 고리자루큰칼이 출토되며 한 번 더 세상을 놀라게 했다. 봉황대는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다. 마총과 반대로 경주에서 가장 큰 고분이다. 지금은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조선시대 문인들은 구릉인 줄 알고 올라 경주를 조망하는 시를 읊었다. 고목 아홉 그루가 사슴 뿔처럼 무덤을 장식한다. 보는 방향에 따라 조금씩 변화해 연인들은 자꾸만 무덤 주위를 맴돈다. ●봄밤 그리고 목련 대릉원은 봄밤의 다정한 산책에 적합하다. 노서리와 노동리고분군이 집들과 경계 없이 한데 어울린다면 미추왕릉, 천마총, 황남대총은 담장을 둘러 한층 은밀하다. 어둠에 묻힌 능은 서로의 능선이 엇갈리며 길을 만들고, 그 사이로 다정한 걸음을 낼 때 봄밤의 상큼한 기운을 물씬 풍긴다. 그 또한 밤의 무덤일 텐데 두렵지 않은 건 왜일까. 고분과 고분, 대나무숲과 연못 사이를 거닐 때는 도심마저 잊힌다. 손끝에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연인들은 3월 중순이 나을 수도 있겠다. 대릉원 황남대총 동쪽은 목련 한 그루가 유명하다. 박준 시인의 ‘그해 경주’를 사진으로 그려내면 이런 장면이 아닐까. 두 봉분 사이로 하얗게 핀 목련은 고분 위에 쓰인 연서인 듯 하다. 목련 앞에는 사진으로 추억하려는 이들이 늘 길게 늘어선다. 고분의 목련은 경주오릉도 뒤지지 않는다. 오릉은 ‘능’이니 그 이름의 주인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부인 그리고 후대 네 임금의 무덤이라 기록한다. 경주오릉 숭덕전 담장에는 여러 그루의 목련이 전각보다 높게 자란다. 잎도 나기 전에 꽃부터 피운 나무는 사랑에 비유하면 풋풋하여 풋사랑이다. 그래서 어느 날 후드득 꽃잎을 떨구는 것이려나. 대릉원과 오릉 사이에는 황남리고분군이 있다. 고분 사이에 키 큰 메타세쿼이아가 눈길을 끈다. 남쪽에는 테라로사 경주점이 있는데 한옥의 대청마루에서 그 전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다. 먼 데서 보는 황남리고분군은 지척의 노서동이나 품 안의 대릉원과는 또 다른 감흥을 안긴다. 불같은 사랑이 지나가고 평온한 시절의 연인을 보는 듯 하다. “손끝을 세워 몇 개의 글자를 적어” 보는 대신 발끝을 세워 나란하게 지나온 궤적들, 오므린 손바닥을 가만히 펴서 지난 ‘그해’의 시간들을 들여다본다. 사랑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셈할 수 없는 발견이었을 뿐, 간절한 것은 또 얼마나 오래 걸려 이곳으로 왔던가.
  • [김정인의 역사프리즘] 3·1운동은 민주화운동이었다

    [김정인의 역사프리즘] 3·1운동은 민주화운동이었다

    올해로 107주년을 맞은 3·1운동은 20세기 한국사에서 손꼽히는 대표적 사건이다. 교과서에서도 단독 사건으로는 제일 많은 면을 차지한다. 역사학계에서도 연구 성과가 꾸준히 쌓이고 있다. 덕분에 잘못 알고 있었던 걸 바로잡거나, 새롭게 진실을 밝혀낸 게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3·1운동이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의를 제대로 인식하게 됐다는 점을 꼽고 싶다. 3·1운동이 우리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주장하는 대규모 시위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3·1운동을 세계가 주목할 정도의 대규모 운동으로 이끈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민족의 자유와 평등이 정당한 권리라는 주장은 민족의 독립이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1운동은 민주화운동이었다. 이는 더 나아가 일제강점기 내내 쉼없이 계속된 독립운동을 이끈 원동력 역시 다른 무엇도 아닌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이유로 대한제국이 망하고 10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조선시대로 되돌아가자거나 순종을 황제로 복귀시키자는 ‘왕정복고’ 구호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3·1운동의 배경으로 1918년 세계를 휩쓸었던 스페인 독감에 주목하는 연구도 눈길을 끈다. 1918년 가을부터 1919년 봄까지 한반도에서는 750만명이 스페인 독감에 걸렸고 14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사람이 사망했다. 조선총독부의 위생 방역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동아시아에서 가장 피해가 컸다. 1919년 봄 거리에서 독립 만세를 외친 한국인은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3·1운동 참가자들의 외침은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의 절규와도 맞닿아 있다. 3·1운동을 대표하는 사진 두 장을 둘러싼 오해도 100년이 다 되어서야 해소되었다. 광화문 기념비전 주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어딘가를 쳐다보는 사진을 보자. 이 사진은 학생과 함께 여성도 만세 시위에 많이 참가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사료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연구 결과 사진 속 군중들은 1919년 2월 28일 고종 장례식 예행연습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오사카 아사히 신문’ 1919년 3월 3일자에 실렸고 ‘경성 광화문통 기념비 문 앞 군중(예행연습일)’이라는 해설이 붙어 있다. 이 사실을 미처 몰랐던 대표 포털 사이트에선 100주년이 되는 날 첫 화면에 이 사진을 N이라는 글자에 넣어 게시하기도 했다. 한 무리의 여성이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는 사진도 있다. 이것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한 사실을 증빙하는 유일한 사진 사료다. 그런데 오래도록 이 사진은 기생들이 시위를 하는 모습을 찍은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 하지만 첫날 서울에서 기생 시위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역사학자들에게 문의했더니 그 머리 모양은 히사시가미라고 불리는데 당시 일본 여학생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또한 이 사진은 ‘오사카 아사히 신문’ 1919년 3월 5일자에 실렸고 ‘조선인 여학생이 만세를 절규하면서 전찻길을 행진하고 있다’라는 해설이 붙어 있다. 그런데 이 사진은 1998년에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경기여고 90년’에도 게재되어 있었다. 추적 결과 이 사진의 여성들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었다. 여러 장을 촬영했음에도 일본 신문이 3월 1일 서울의 만세 시위를 대표하는 사진으로 여학생 만세 시위 사진을 게재한 것은 여학생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에서 행진하는 장면이 그만큼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3·1운동 하면 떠올리는 첫 번째 인물은 단연 유관순이다. 한국인의 뇌리에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새겨진 유관순에 관한 진실도 100년이 되어서야 드러난 것들이 있었다. 유관순 하면 서대문형무소 투옥 당시 퉁퉁 부은 얼굴로 찍은 인물 카드 사진이 떠오른다. 여기에 더해 판결문까지 두 종의 사료만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런데 100주년 무렵 후배의 귀띔 덕에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새로운 유관순 사료를 찾을 수 있었다. 1919년 7월 9일에 충남 도장관이 조선총독부에 올린 “천안군 동면 용두리 유관순 일가는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으로 처분되어 일가가 거의 전멸하는 비참한 지경에 빠졌다”로 시작하는 정보보고서였다. 거기에는 유관순의 할아버지인 75세의 유윤기가 6월에 사망한 후 집안에서 장례 의식을 기독교식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전통식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갈등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조선총독부가 유관순 가족의 저항과 희생이 민심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유관순 일가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사료였다. 유관순은 1946년 가을 국어 교과서를 만들 당시 ‘한국의 잔 다르크’를 찾던 전영택 등 문교부 편수국 관리들과 이화학당 교사와 학생 출신들에 의해 발굴됐다는 것이 기존의 통념이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유관순이 국민 영웅으로 떠오른 시기를 추적했다. 국민들이 해방 후 세 번째 맞는 1948년 3·1절 당시 전영택이 쓴 전기인 ‘순국처녀 유관순’을 읽고, 영화 ‘유관순’과 연극 ‘순국처녀 유관순 혈투기’를 관람하며 3·1운동을 기념하고 기억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당시 좌우로 편을 갈라 싸우는 정치 현실, 나아가 분단 상황에 분노하던 여론은 10대 여성으로서 독립을 염원하며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았던 유관순을 통해 민족 통합의 염원을 표출했다. 영화 ‘유관순’ 제작자 방의석은 제작 동기를 묻자 “삼팔선을 우리의 손으로 부수고 쓸데없는 고집을 버리고서 한데 뭉치자”고 답했다. 윤봉춘이 감독한 영화 ‘유관순’은 1948년 3월 1일 개봉했는데, 영화에서 유관순이 흔드는 낡은 태극기는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 만세 시위에서 실제로 사용됐던 것이었다. 유관순 이웃에 사는 할머니가 30년 가까이 숨겨놨던 태극기를 영화에 써 달라며 가져왔고, 이 사연을 들은 배우와 스태프들 모두 울면서 시위 장면을 촬영했다고 한다. 진실이란 때론 왜곡되고 은폐되어 과거라는 지층 안에 묻혀 있지만 언젠가는 드러나고야 만다. 그것이 역사의 힘이고, 역사학자의 소명이라고 믿는다.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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