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조봉암 선생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 대북정책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 비서실장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 추징금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 미국 원정
    2026-03-1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67
  • ‘박진경 대령 유공자 지정’ 재발 방지법 개정 발의한 박찬대… 서훈 심사 투명해지나

    ‘박진경 대령 유공자 지정’ 재발 방지법 개정 발의한 박찬대… 서훈 심사 투명해지나

    4·3 강경진압을 지휘한 고(故) 박진경 대령이 국가유공자로 지정된 데 대한 비판이 이어지는 가운데,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의원이 서훈 심사체계를 손보겠다며 관련 법 개정에 나섰다.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의원(인천 연수구갑, 정무위원회)은 12일 ‘상훈법(대한민국 훈장 및 포장에 관한 법률)’, ‘5·18민주유공자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이하 5·18유공자법),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하 5·18보상법) 등 3건의 일부법률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고 밝혔다. 박 의원은 “비공개 심사라는 낡은 관행이 결국 시대적 판단을 그르쳐 왔다”며 “잘못된 서훈이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박 의원이 지적한 핵심은 서훈 심사의 불투명성이다. 대표적 사례로 꼽힌 조봉암 선생은 독립운동 공적이 명확함에도 서훈을 받지 못한 채 수십 년이 흘렀다. 2011년 재심에서 간첩 조작이 무죄로 결론났지만, 심사 기준도, 탈락 사유도 공개되지 않았다. 반면 4·3 당시 강경 진압작전을 지휘한 박 대령은 과거의 무공훈장을 이유로 역사적 논란을 외면한 채 국가유공자로 지정됐다. 심사 과정은 단 한 줄도 공개되지 않았다. 정치권에서는 ‘공적’보다 ‘비공개 관행’이 서훈을 좌우한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박 의원은 이날 5·18유공자법과 5·18보상법 두 법률 개정안도 함께 내놓았다. 현행법은 국적 요건 때문에 5·18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외국인을 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제 인물인 독일 기자 힌츠페터, 미국의 찰스 헌틀리 선교사 등이 대표적이다. 개정안은 이들을 ‘민주화운동 공헌자’로 인정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을 마련하고, 국가 차원의 예우와 안장 기준까지 포함했다. 박 의원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공헌은 국적과 무관하게 평가받아야 한다”며 “힌츠페터 기자, 찰스 헌틀리 선교사 같은 외국인 공헌자에 대한 예우 체계를 시대정신에 맞게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 [열린세상] 노년이 더 빛난 월남 이상재

    [열린세상] 노년이 더 빛난 월남 이상재

    여느 선진국처럼 한국도 고령화 사회가 됐다. 나도 어느덧 칠십 노인이 됐지만, 65세 이상의 노인이 천만명을 돌파하면서 전체 인구의 20%를 넘었다. 이제 노인들이 자신의 역할을 잘하고, 좋은 태도로 잘 살아 줘야 나라 전체가 편안하고 발전하는 시대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 시대 노인들, 아니 내 친구들에게 사표(師表)로 삼을 분으로 월남 이상재 선생을 추천하고 싶다. 월남의 가장 훌륭한 점은 청년들을 친구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청년들을 가르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로부터 배웠다. 그분은 한성감옥에서 25살이나 어린 우남 이승만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 아들에게 배우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독립운동사에서 월남과 우남의 관계는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시절부터 시작된 오랜 인연이고, 우남에게 월남은 든든한 보호자로서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 1910년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승만을 불러들여 전국으로 순회강연을 시키고,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1912년 다시 미국으로 내보낸 이도 바로 이상재다. 한성 임시정부에서 집정관 총재로 이승만이 추대된 배경에도 월남의 영향력이 느껴진다. 50세 차이가 나는 박헌영에게 월남은 할아버지뻘이다. 1900년생 박헌영은 경기고보 학생 시절 YMCA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미국 유학을 꿈꾸던 청년들 중 한 사람이다. 1899년생 조봉암도 3ㆍ1운동으로 감옥에 갔다 풀려나와서는 바로 YMCA 중학부에서 공부를 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1920년대 경성은 이런 청년들이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고, 소련의 식민지 종속국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물심양면의 지원으로 공산주의로 휩쓸리던 때였다. 이런 시대에도 월남은 의연히 청년들과 함께 놀고 즐기면서 그들이 극단으로 가지 않도록 달래던 어른이었다. 그래서 그는 ‘흰 터럭의 청년’, 즉 수염과 머리카락이 흰 젊은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월남은 종로 YMCA에 버티고 있으면서 통렬한 풍자와 유머로 아들 세대와 손자 세대를 모두 넉넉하게 품에 안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큰 어른이었다. 1927년 좌우를 아우르는 연합전선으로 신간회가 만들어질 때 월남이 회장으로 추대된 모습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나라 없는 백성들의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고난에 찬 그분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가 가장 화려하고 장엄하게 빛난 것은 물론이다. 그분의 장례식은 전 민족이 참여한 거대한 시위였다. 나라가 없는 시절이라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이라 이름하였지만, 실제로는 국장(國葬)이었다. 전국 모든 도시에 장례위원회가 꾸려지고 참여한 장례위원이 10만명을 넘어섰다. 특히 장례 마지막 날 저녁, 서울역에서 출발한 장의 열차가 수원역, 평택역, 천안역, 조치원역, 서대전역, 논산역, 이리역을 통과할 때마다 수백명의 시민들이 횃불을 들고 나와 맞이하는 광경은 장례를 빙자한 시위ㆍ독립운동과 다름없었다. 장의 열차는 느릿느릿 달려 마침내 다음날 아침 군산역에 도착했다. 군산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영결식을 거행하고 상여를 배로 옮겨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 선생의 고향 서천군 한산면 장지에 이르렀다. 월남은 끊임없이 성장해 노년이, 70대가 가장 빛났던 분이었다. 1898년 만민공동회가 열린 종로 거리에서 월남이 사회를 볼 때 나이는 48세였다. 당시 그 나이면 이미 어른으로서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사상과 인품이 한층 깊어져 더 큰 산이 됐다. 모든 노인들에게 권하고 싶다. 혹시 종로 4가를 지나칠 일이 있으면 잠시 선생의 동상 앞에 가서 절이라도 한번 하시라. 그분에 대하여 알고 자주 생각하면, 모두가 월남 같은 위인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손자 세대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지는 않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주대환 민주화운동동지회 의장
  • [황수정 칼럼] ‘임종석 의장님’과 몇몇 586이 연명하는 법

    [황수정 칼럼] ‘임종석 의장님’과 몇몇 586이 연명하는 법

    임종석 전 대통령실 비서실장이 “통일하지 말자”고 했다. 이 말을 보수쪽 유력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했다면 어떤 사달이 났을까. “출세를 위해 (사법)고시를 했으니 미안해하라”고 그가 공격했던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말했다면. “반통일 반민족 행위”로 벌집이 쑤셔졌을 것이다. 임 전 실장은 대한민국 영토를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규정한 헌법 3조를 “지우든지 개정하자”고 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통일부도 없애자고 했다. 연방제 통일론을 접은 김정은이 ‘2국가론’을 주장하고 있으니 기존의 통일 논의는 비현실적이라고 했다. 에둘렀을 뿐 북한의 입장이 달라졌으니 우리도 그에 맞게 자세를 교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회(전대협) 3기 의장. 조국 통일을 앞세운 운동권 이력으로 정계 입문해 청와대 비서실장까지 지냈다. 나 같은 586세대는 ‘전대협 의장님’의 대단했던 위용을 기억한다. 두루마기 자락을 깃발처럼 펄럭이면서 가는 곳마다 수백명의 선발대를 앞세웠다. ‘통일’과 ‘민족’이라는 구호만으로 ‘의장님’은 개선장군이었다. 5년 전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도 통일운동에 매진하겠다고 했다. 그래 놓고 “통일이 좋다고 자신하기 어렵다”고 ‘전향’한 이유에 해설이 분분하다.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라는 북한 주장에 편드는 것이라고도 공격받는다. 통일을 포기해야 평화가 온다는 그의 논리는 비현실적 비약이다. 동독은 ‘2민족 2국가’를 주장했지만 서독은 거부했고 결국 통일됐다. 그에게 주사파 통일운동은 입신의 밑천이고 재료였다. 통일 수정론을 말할 때는 움직이지 못할 논거가 준비됐어야 한다. 야권에서도 공박하건만 변명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자기 배가 부르다고 밥상 치우자는 얘기인가. 시중에 들리는 말이다. ‘안방의 코끼리’ 같은 통일 수정론을 들고나왔으니 다른 책임도 졌으면 한다. 김구 선생을 온전한 영역으로 복권시키는 전향 운동에 나서 주면 어떤가. 해방과 분단의 공간에서 김구가 언제 좌익이었던 적 있나. 이념의 대척점으로 데려가 주사파 통일운동의 방패 삼았노라 고백부터 해 주면 어떤가. 좌도 우도 말하지 못해 굳어진 이 불편한 진실을 인정할 용기는 없는가. 그 김구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엉뚱하게 소환했다. 지난주 선거법 위반 재판에서 “김구는 총에 맞아 죽었고… 나 역시 칼에 찔려 보기도” 운운했다. 무죄를 주장하자고 자신을 김구, 조봉암에 빗댔다. 기사의 댓글 반응이 어땠는지는 상상에 맡긴다. 민주화운동을 입신의 과실로 따먹지 않은 사람도 많다. 노동운동가인 주대환(조봉암기념사업회 부회장)은 “87년 민주화의 승리에 취한 학생운동은 관념의 놀이터가 필요했고, 그것이 ‘통일운동’”(책 ‘K데모크라시’)이라 일갈했다. 이후 한 해 수만명씩 대학에서 사회로 쏟아진 지금의 40~50대들이 진보 우위의 정치 지형으로 판을 바꿔 줬다. 그러니 근현대사에 출세와 입신의 빚을 진 이들이 586 정치인들 아닌가. ‘공천 학살’에도 살아남은 운동권 스타들의 연명 방식은 비루하고 처연하다. 극적으로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구제된 김민석 의원은 ‘이재명 호위무사’를 자임했다. 28세에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발탁된 ‘386 정치인 1호’다. “이재명의 삶이 김대중의 삶과 유사하다”고 했다. 동갑내기 당대표를 엄호하느라 김대중을 매명했다. 4개 재판 11개 혐의의 당대표를 위해 근거가 없는 계엄령 괴담 정치를 주도한다. ‘서울의 봄’을 그런 조직의 이름에 갖다 붙였다. 독재정권 계엄령에 맞섰던 청춘의 훈장마저 엿바꿔 먹었다. 제 손으로 제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법제사법위원장이 된 정청래 의원은 당대표 방탄 입법의 수문장이 됐다. 품격을 완전히 내려놓은 막말과 궤변으로 저질 시비를 몰고 다닌다. 이십대 운동권 DNA가 환갑의 높이로 자라지 못했다. ‘국회 빌런’으로 불리고 말았다. 떠날 때가 지났는데 떠나지 않는 사람들. 근현대사의 상처를 단물로 짜 먹고 있는 사람들. 더이상 놀라울 추문도 없을 것 같다. 자기부정을 하면서 연명하는 586들, 막차가 다시 오거든 이제는 정말 떠나 주면 좋겠다. 황수정 수석논설위원
  • 박은식 국힘 비대위원 “김구? 폭탄 던지던 분이 나라 돌아가는 시스템 알까?”

    박은식 국힘 비대위원 “김구? 폭탄 던지던 분이 나라 돌아가는 시스템 알까?”

    박은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이 과거 소셜미디어(SNS)에서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 “폭탄 던지던 분이 국제 정세와 나라 돌아가는 시스템을 잘 알까?”라고 쓴 것으로 9일 확인됐다. 박 위원은 SNS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했다. 박 위원은 2021년 자신의 SNS에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 “막장 국가 조선시대랑 식민지를 이제 막 벗어난 나라의 첫 지도자가 이 정도면 잘한 거 아니냐”며 “그래도 이승만이 싫다면 대안이 누가 있나?”라고 썼다. 그는 “김구? 폭탄 던지던 분이 국제 정세와 나라 돌아가는 시스템에 대해 잘 알까? 여운형 암살에 김구가 관련돼 있다는 건 들어 봤냐?”라고 썼다. 박 위원은 이날 경향신문 통화에서 “김구를 비하하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며 “국제 정세에 대해서는 이승만이 훨씬 더 잘 아는 건 사실이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그는 “취약한 국가에 국제 정세를 잘 아는 지도자가 필요했고 그런 의미에서 이승만을 좀 더 도드라지게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 위원은 당시 작성한 다른 글에 “노예제에 의존하던 조선과 근대화된 대한민국 사이의 큰 간극에 결국 일제강점기가 있었음을 확인했다”며 “조선이 갑오개혁 이후 노비도 폐지하고 형법대전도 만들어냈다고는 하나, 나라가 망해 의병을 일으켰을 때도 상놈이 양반에 말대꾸하다가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당했던 역사를 보면 지금 대한민국의 선진 법률 시스템 수준으로 도약할 가능성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썼다. 이어 “그런 생각을 가진 채로 수강했던 고려사이버대 민법총칙 강의는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우리 민법의 기원으로 일제강점기 ‘조선민사령’을 언급했고 교과서에도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며 “조선민사령의 영향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있겠지만, 적어도 그냥 일베(극우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에서 나오는 주장으로 치부하기에는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다”고 했다. 조선민사령은 일제강점기 무단통치시기인 1912년 제정된 기본법규다. 박 위원은 경향신문에 “내 전체적인 의도는 절대 그게 아니다. 차라리 전문을 기사에 실어 달라”고 말했다. 아래는 박 위원의 SNS 게시글 전문.<광주청년의 좌파 탈출기 #3> 5.18의 아픈 기억 때문에 신군부와 맥을 같이하는 정치집단에 반감이 큰 광주에서 태어나, 건국대통령의 과오만 서술해 놓은 교과서를 보며 자란 나는 이승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해방전후사의 인식’ ‘백년 전쟁’같은 컨텐츠에서 볼 수 있는 교묘하게 짜여진 퇴보좌파/수정주의 역사관에 찌들어 민주당만을 지지하던 2014년... EBS에서 방영된 허동현 교수님의 ‘21세기에 다시 보는 한국근현대사’를 보고 마치 매트릭스의 모피어스가 건넨 진실의 빨간약을 먹은 듯 큰 충격을 받았다.나의 역사인식이 「특정 정치집단이 추구하는 이념을 지지하도록 필요한 사실만 선택주입된 결과물이구나」 하는 일종의 배신감이 들어 닥치는 대로 세계사 관련 책들을 읽고 부족한 부분은 인터넷을 참고해가며 공부하게 되었다.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이승만이라는 정치인을 진심으로, 아주 많이 존경하게 되었다.정치에 관심이 있던 광주친구들, 좌파성향인 친구들과의 술약속이 불편해진 게 바로 이 때부터였다.술을 마시면 정치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고 나는 흥분해서 이렇게 말했으니까.“야, 우리 해방될 땐 국민 80프로가 글을 모르고, 제주4.3, 여순사태, 대구사태 이런 거 맨날 생기고 정치인들끼리 서로 테러하고 조폭이 주름잡던 시대라니깐?경제규모도, 군대도 북한의 절반도 안되는데 김일성이가 쏘련이 지원해준 탱크로 막 밀고 내려와브러.그 상황에서 일본이랑 일 좀 했다고 치안이랑 국방 전문가들 다 내쳐블믄 나라가 어떻게 되겄냐?그렇게 되믄 문재인/박원순/유시민/기타 민주당 국회의원 아빠들 다 실업자 되어가꼬 얘네들이 태어나긴 했을랑가 모르겄다.이거는 북한도 동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여.프랑스? 야 비교할 걸 비교해라.전세계에 식민지 경영하는 초강대국이 잠깐 독일한테 졌어도 본토가 다 점령되지도 않았고 미국이 도와줘서 금방 되찾을 수 있는 상태로 4년 정도 점령 당한 거랑 우리처럼 지지리 못살다가 총 한방 못 쏘고 고종이 나라 팔아 36년간 지배당한 거랑 같냐?그래 프랑스처럼 재판 대충해서 ‘저놈이 독일협력자 년놈이요’ 하면서 칼로 막 쑤셔블고 여자들 삭발시켜다가 ‘부역자들’팻말 목에 걸고 거리 행진하게 시키믄, 그게 식민잔재 청산이냐?이승만은 미국에 있을 때부터 일본이 곧 쳐들어올거고 망할거라고 ‘japan inside out’ 책 내서 베스트셀러 되가꼬는 엄청 유명해졌어.해방 뒤에 독도가 아직 누구 건지 애매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선그어서 막 뺏어와블고 대마도도 우리꺼라고 난리치다 대한해협에서 일본어선들 막 잡아들였다니깐!이래도 이승만이 친일이냐? 아니잖아.독재를 했다는데, 야 세상 어느 독재자가 국민의 재산 소유권을 늘리는 방향으로 정책을 만드냐?국민의 재산을 국유화 해놓고 지가 맘대로 하는 게 독재자야.북한이 했던 무상몰수/무상분배가 바로 그거라고.공짜로 땅 받은 게 아니라 모조리 김일성 맘대로 하는 땅이라고.이승만은 농지정책전문가인 조봉암을 사회주의자였어도 발탁해서 유상몰수/유상분배 추진해서 몇 천년 내려온 지주제를 없애고 시장경제를 지키면서, 국민에게 「지켜야 할 나의 것」을 만들어줬잖아.이 분들이 북에서 쳐들어온 놈들 목숨 걸고 막아서 지금 대한민국이 있는 거 아니겠어?마지막에 있었던 부정선거도, 이승만은 경쟁자였던 조병옥 사망으로 이미 당선확정이었어.부통령 선거에서 밑에 애들이 장난친거지.그리고 어느 독재자가 시위 좀 한다고 하야하냐?심지어 시위하다 다친 학생이 있는 병원까지 가서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학생들이 참으로 장하다’ 이런 말을 하는 지도자가 독재자일까?국민이 한사람이라도 더 똑똑해지길 바라며 없는 재정에 초등의무교육을 도입한 사람이?우리랑 비슷한 수준이던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동남아 국가들 독립할 때 이디아민, 폴포츠같은 독재자들 보면, 너 절대 이승만한테 독재자 소리 못할거다.그쪽 나라들 아직도 군부독재에 막장정치 허고 있잖어.그렇다고 선진국은 뭐 얼마나 더 선진적인 정치했간디?미국은 1965 흑인한테 처음 투표권 줬고 스위스는 1971에 여자한테 처음 투표권을 줬다니까.그 시대가 원래 그런 상황이었다고.지금이랑은 비교가 안 돼.해방될 때 동아일보에서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믄, 국민의 80프로가 공산+사회주의를 원하고 있었어.미국마저 쏘련이랑 마찰을 피할라고 좌우합작 지지하고 유럽 신경쓰느라 한반도에서 철수준비 할 때, 김일성은 이미 쏘련 지원 받아가꼬 군대 만들고 법 만들고 정부 만들어브렀다니까?이러는데 김구/김규식이 김일성 백날 만나봐야 남북협상이 되것냐?이승만이 천만다행으로 김일성 장난질에 안 넘어가서 남한만이라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단독선거를 진행한게 반민족적인건가?난 전세계 절반이 공산화되는 이 거대한 물줄기를 쪼매난 반도 끄트머리에서 온몸을 바쳐 막아내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게 민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봐.6.25때 전쟁났다고 뭣하러 먼나라에서 지원군 보내주겄냐.다 이승만이 외교력 발휘해서 UN승인받아 합법성 인정됐으니까 자유세계 국가들이 도와준 거잖어.그렇다고 이승만이 미국 따까리만 한 게 아니여.불리하게 휴전협정이 진행되니깐 반공포로를 석방해버리는 벼랑끝 전술을 써가지고 미국도 빡쳐서 이승만 없애버릴까 하다가 결국 이승만 달랠라고 ’한미상호방호조약‘체결 해줘서 대한민국 침범은 곧 세계최강대국 미국침범과 같게 되는 시스템을 만들어놓은거야.중국/일본/러시아 강대국들 사이에서 언제 먹힐지 모르던 나라가 안보문제를 해결해버린 거라고.경제원조는 당연하고.국익을 위해서 미국과 싸워가며 「대한민국 건국을 쟁취」한거지.막장국가 조선시대랑 식민지를 인제 막 벗어난 나라의 첫 지도자가 이 정도면 잘한 거 아니냐?물론 잘못한 점도 많지만 넌 구구단도 버벅이는 상태에서 미적분 바로 가능하냐?안 되잖어.그래도 이승만이 싫다고 하믄 대안이 누가 있냐?- 김구? 폭탄 던지던 분이 국제 정세와 나라 돌아가는 시스템에 대해 잘 알까? 여운형 암살에 김구가 관련되있는건 들어봤냐?- 김규식. 응. 엘리트 유학파지. 근데 김규식 묘지가 어디있는지 알아? 북한 열사릉이야 북한.- 여운형? 아이고 김일성한테 이미 남한 뺏기고 숙청당했을거다.이승만이랑 건국세대 어르신들 아니었으믄, 우리가 이렇게 빛나는 불이 들어오는 술집에서 저렴한 가격에 맛있는 술이랑 안주를 치안 걱정 없이 즐길 수 있었을까?난 아니라고 봐.그냥 전기도 안들어오는 김씨 세습왕조 밑에서 노예로 굶주리고 있겄제.「이승만이 최선」이었다고!”내 말이 끝나면 친구들은 대부분 반박하지 못하고 주제를 돌리거나, 그래도 이승만은 아니다는 대답을 했고 다시는 나와 정치이야기를 하지 않았다.이런 생각을 가진 나는 일베/뉴라이트/극우파일까? 아니면 옳은 생각을 가진 걸까?전 세계가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인정한 시기에 과거를 분노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진 않았으면 좋겠다.비록 건국/산업화/민주화 과정에서 상처받은 분들이 많지만, 조금만 분노를 내려놓고 당시 우리의 상황과 세계정세를 같이 공부해보면 고향 광주의 어르신들과 나랑 술자리를 피하게 된 친구들도 나라를 조선으로 퇴행시키는 저 민주당을 향한 지지를 멈추고 정권 교체에 힘을 보태줄 것이라 믿는다.**마지막 사진으로 이승만 청년시절 의회민주주의를 주창하다가 고종에게 잡혀 사형선고를 받아 한성감옥에 복역하던 시절 사진을 올린다. 이승만은 운동권의 원조였다. 대한민국의 존경을 받을만한 분이다.**< 광주청년의 좌파탈출기 #8 >2014년, 친구랑 술을 마시며 정치이야기를 하다 보니 일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갔다.민주당식 역사관을 신봉했던 나는 일제의 만행과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성에 대해 침까지 튀겨가며 열변을 토했다.이에 친구는“야, ㅅㅂ 민족이 뭐고, 나라가 뭔데?내가 개고생해서 번 돈으로 와이프랑 딸래미 먹여 살릴 수 있으면 지배자가 일본인이든 외계인이든 뭔 상관이야?상놈으로 태어나면 돈 벌어봤자 임금한테 ㄱ무시당하면서 굶어죽도록 세금 뜯기고,조선말에 30%나 있었다는 노비로 태어나면 내 딸래미까지 노비돼서 양반들 노리개짓이나 해야 되는데내가 왜 그 나라에 충성하고 독립운동 해야 되냐?조선은 망해도 싼 나라였다니깐?ㅈㄴ굴욕이긴 해도, 그런 한심한 조선이 근대화되는데 일본 영향이 하나도 없었겠냐?”분위기가 험악해질까봐 더는 반박하지 않고 집에 돌아 오는 길에 ‘식민지 근대화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그럼 근대화란 뭘까?’ 생각을 해봤다.(어려운 말 다 빼고)- 나를 제약하는 신분이란 게 없고- 산업이 발전해 생산물이 풍족해져 배곯지는 않아야 하고- 열심히 일해 모은 재산을 나라가 멋대로 빼앗아가지 않고- 개인 간의 계약이 존중되는 시스템이 갖춰진 사회일 것이다.조선이 갑오개혁(1894)이후 노비도 폐지하고 형법대전(1905)도 만들어냈다고는 하나, 나라가 망해 의병을 일으켰을 때도 상놈이 양반에 말대꾸하다가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당했던 역사를 보면 지금 대한민국의 선진 법률시스템 수준으로 도약할 가능성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생각을 간직한 채로 수강했던 고려사이버대 민법총칙 강의는 내게 큰 충격이었다.우리 민법의 기원으로 일제강점기 「조선민사령」을 언급했고 교과서에도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노예제에 의존하던 조선과 근대화된 대한민국 사이의 큰 간극에 결국 일제강점기가 있었음을 확인했던 순간이었다.굴욕적이긴 했지만, 그게 ‘역사’였다.조선민사령의 영향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겠지만, 적어도 그냥 일베에서만 나오는 주장으로 치부하기엔 어느 정도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이런 경험을 한 뒤 비슷한 류의 주장들을 접했을 때는 친일/일베라 단정짓지 않고 직접 자료들을 찾아보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고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면서 결국 민주당식 역사관에서 탈출하게 되었다.법학뿐이었을까?나라를 이끄는 전문가를 양성하는 서울대의 전신이 ‘경성제국대’였음을 떠올려 보면 과학, 인문학 분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그렇다고 일제가 조선을 근대화「시켜줬다」는 주장에 전부 동의하진 않는다.* 김성수는 일제강점기에 학교와 기업세우며 실력을 키웠고*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자유세계로 편입시켰고* 박정희는 산업화를 성공시켰고* 전두환/노태우는 폭발적 경제성장을 해냈고* 김영삼/김대중은 국민의 열망을 담아 민주화를 이뤄낸 것에 더해* 우리 국민이 공산정권과의 전쟁과 독재정권과의 투쟁을 불사했기에 근대화에 성공한 것이지 누군가 시킨다고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진정한 근대화를 이룬 우리나라에 자부심을 가지되, 일제강점기 사료를 해석할 때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객관적으로 접근했으면 좋겠다.그래야 역사에서 뭔가 배울 것 아닌가?
  • 박민식 “北김일성 정권 기여자, 독립유공자로 용납 못해”

    박민식 “北김일성 정권 기여자, 독립유공자로 용납 못해”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3일 “가짜 독립유공자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박 장관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건설이 아니라, 북한 김일성 정권을 만드는 데 또는 공산주의 혁명에 혈안이었거나 기여한 사람을 독립유공자로 받아들일 대한민국 국민이 누가 있겠느냐”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현행 상훈법에 따르면 대한민국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한 공적이 있는 사람에게 건국 훈·포장을 주게 돼 있다고 설명하면서 “항일운동을 했다고 무조건 오케이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는 진보, 보수에 따라 좌우될 것이 아니라, 자유 대한민국 정통성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앞서 보훈부는 전날 보도자료를 통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거나 공적조서가 허위로 드러나면 서훈을 박탈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광복 후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한 손혜원 전 의원의 부친 손용우(1923∼1999년) 선생, 공적 조서에 나온 출신지와 활동 시기가 달라 언론에서 ‘가짜 광복군’ 논란이 제기됐던 고(故) 김원웅 전 광복회장의 부모인 김근수(1912∼1992년)·전월순(1923∼2009년) 선생 등을 다시 들여다볼 것으로 전해졌다. 반대로 대한민국에 기여한 공은 뚜렷하지만 친일 논란이 있어 서훈을 인정받지 못한 죽산 조봉암(1898∼1959), 동농 김가진(1846∼1922) 등을 서훈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이 인정돼 서훈이 박탈된 인촌 김성수(1891∼1955),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하나 서훈이 취소된 언론인 장지연(1864∼1921)에 대해서도 공과를 가려 재서훈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 주호영 “38표 ‘불신임’ 이재명 사퇴해야…野조차 탄압 주장 동의 안한 것”

    주호영 “38표 ‘불신임’ 이재명 사퇴해야…野조차 탄압 주장 동의 안한 것”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27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국회 체포동의안 표결에서 최대 38표의 민주당 내 이탈표가 나온 것과 관련해 “이 대표에 대한 불신이고 사실상의 가결”이라며 이 대표의 사퇴를 촉구했다. 주 원내대표는 체포동의안 표결 직후 국회 기자간담회에서 “민주당이 결국 이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부결시켰다”며 “예상은 했지만 민주당이 거듭 불의의 길 선택한 것은 진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라고 총평했다. 이날 이 대표의 체포동의안은 297인이 표결해 찬성 139표, 반대 138표, 무효 11표, 기권 9표로 부결됐다. 주 원내대표는 “민주당이 헌정사상 유례없는 ‘부적격 불법 대표’를 뽑아놓고 70년 전통 국민 정당을 방탄 도구로 전락시키고, 신성한 민의의 전당인 국회까지 불의의 방패로 삼았다”며 “그런 파렴치로도 모자라 심지어 이 대표를 김대중(DJ) 전 대통령, 조봉암 선생까지 비교하는 후안무치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다만 주 원내대표는 이날 체포동의안 표결 결과에 대해 “그래도 오늘의 표결 결과는 민주당에 아직도 공당으로서의 의무감과 양심이 일부는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주 원내대표는 “민주당 소속 169명과 민주당을 탈당하거나 연관 있는 의원을 모두 더하면 175명”이라며 “국회의장이 유무효 판정이 안 되는 2표 중 1표만 무효로 봤으니 우리는 무효 2 본다. 결국 부결이 137명이므로 최대 38명이 체포동의안에 찬성하거나 적어도 기권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 원내대표는 “민주당은 사실상 가표, 체포동의안 찬성이 많았다는 것을 인식하길 바란다”며 “이 대표는 정치적 책임을 지고 깨끗하게 사퇴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사퇴 후 사법절차를 통해 자신의 결백 증명하고, 민주당 주류도 이제 이재명을 방탄 국회로 보호하려는 시도를 오늘부로 그만두길 바란다”고 했다. 예상 밖 무더기 이탈표에 대해 주 원내대표는 “예상하지 못했다”며 “이 대표의 의총 발언, 또 민주당 의원들에게 일일이 전화하고 만났는데도 백약무효, 많은 민주당 의원조차 이재명의 ‘검찰 탄압’ 주장에 동의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 죽산 조봉암 선생의 장녀, 조호정 여사 별세

    죽산 조봉암 선생의 장녀, 조호정 여사 별세

    인천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진보 정치인 죽산 조봉암 선생의 장녀 조호정(曺?晶) 여사가 향년 94세의 일기로 26일 오전 1시21분 서울 한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1928년 죽산이 독립운동을 하던 상하이에서 태어난 고인은 부친이 일제 경찰에 체포돼 신의주감옥으로 압송된 다음해인 1933년 귀국, 인천에서 자랐다. 인천 박문여학교를 거쳐 1950년 이화여대를 졸업했고, 부친이 제헌 국회의원(인천 을구)을 거쳐 제2대 민의원(인천 병구) 겸 국회 부의장으로 활동할 때는 비서로 일했다. 1955년 시인이자 영화감독이던 이봉래씨와 결혼해 외동딸 이성란씨를 두었다. 고인은 죽산이 1958년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투옥된 뒤 국가보안법상 간첩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1959년 7월31일 사형이 집행되자 평생 부친의 사면복권을 위해 애썼다. 대법원은 고인의 이모부 윤길중(1916∼2001) 전 의원이 1991년 ‘죽산 조봉암 사면복권에 관한 청원’을 제출한 지 20년만인 2011년 1월20일 이뤄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고인은 이후 국가보훈처에 3차례 부친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달라고 신청했지만 명예 회복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주대환 죽산조봉암기념사업회 부회장은 “죽산은 줄곧 항일운동을 벌였고 1945년 1월에도 일제에 예비검속돼 광복 후 서울 충무로에 있던 일제 헌병대사령부에서 풀려나왔다”며 “보훈심사위원회가 죽산이 일제 말기에 국내에 있으면서 소액을 헌금했다고 매일신보에 보도된 걸 거부 사유로 든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조 여사의 장례식장은 연세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17호실이다. 발인은 오는 28일 오전 8시40분이다.
  • 중랑 ‘망우리역사문화공원’ 산책·힐링하며 역사 교육 명소로

    중랑 ‘망우리역사문화공원’ 산책·힐링하며 역사 교육 명소로

    서울 중랑구 망우리역사문화공원이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역사문화공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망우(忘憂)라는 이름은 태조 이성계가 사후 능(건원릉)을 정하고 이곳을 지나며 ‘이제야 근심을 잊겠다’고 경탄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1933년부터 1973년까지 40년 동안 4만 7700여기의 묘가 있던 공동묘지로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기, 산업화 시기까지 수많은 망자들의 안식처가 됐다. 1977년 망우리공동묘지에서 망우묘지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다시 1998년부터 망우리공원으로 불리다 지난 10월 망우리역사문화공원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최근에도 7000여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역사문화공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울창한 숲과 운치 있는 산책로, 그리고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이끌어 간 인물들까지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사색의 길’을 따라 산책하며 마음을 치유하는 공간,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애국지사 한용운, 유관순, 오세창, 문일평, 조봉암 등을 비롯해 근대 의학의 선구자 지석영, 화가 이중섭, 시인 박인환·김상용, 아동문학가 방정환, 극작가 함세덕 등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이끌어 간 60여명의 선구자들이 한곳에 잠들어 있다.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고 2016년 망우리 인문학길인 ‘사잇길’ 2개 코스를 조성하면서 근현대 인문학의 보고(寶庫)가 됐다. ●망우리공원묘지에서 현재 역사문화공원 개칭 구는 지난해 7월 서울시로부터 망우리공원의 관리권을 이관받았다. 지난 7월에는 전담 부서인 ‘망우리공원과’를 신설하며 행정력을 집중하고 있다. 기존 공원녹지과, 문화관광과 등 부서별로 분산돼 있던 망우리공원 관련 업무를 한곳으로 집중해 유기적인 사업체계를 구축했다. 전담부서는 정책팀, 시설팀, 운영팀의 3팀으로 현재 조성 중인 ‘중랑망우공간’ 운영, 묘역 및 등산(산책)로 정비, 휴식공간 조성, 탐방 및 교육프로그램 개발·운영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역사문화공원의 거점 시설인 중랑망우공간은 지난 4월 공사를 시작해 다음달 23일 준공을 앞두고 있다. 규모는 지상 2층, 전체면적 1247㎡(약 377평)이다. 카페, 화장실, 주차장 등 편의시설뿐만 아니라 전망대, 홍보·전시관, 교육실 등을 조성해 역사문화교육 장소로 활용될 예정이다. 신은실 중랑구 망우리공원과장은 “중랑망우공간이 조성되면 망우리역사문화공원을 찾는 많은 주민들이 쾌적하고 편안하게 공원을 즐길 수 있고, 영면해 있는 수많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관심도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망우리공원과는 유관순 열사 추모행사도 진행하고 있다. 구는 지난해 유관순 열사 순국 100주기를 맞아 망우리역사문화공원에 있는 유관순 열사 합장 묘역을 정비하고 추모 행사를 개최했다. 지난 9월에도 추모 음악회를 열어 가을의 정취가 느껴지는 클래식과 재즈를 감상하며, 치열한 시대를 살다 간 유관순 열사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렸다.망우리역사문화공원에 안장된 근현대 유명인사의 묘역을 주민이 일대일로 관리하는 ‘영원한 기억봉사단’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봉사단은 모두 81개 단체, 총 446명으로 구성돼 있다.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라는 신조로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봉사단은 공원 내 안장된 근현대 역사적 인물의 묘역을 관리하는 것뿐 아니라 인물에 대한 기본 지식과 역사의식을 함양한 전문 봉사단으로서의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실제로 봉사단원들은 공원에 안장된 인물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김영식 작가와 공원 일대를 탐방하며 주요 인물들의 업적 등을 함께 공부했다. 또한 주요 인물과 관련된 영화를 감상하며 그들의 삶과 정신을 배우는 인문학 특강에 참여했다. 이중섭, 오세창, 박인환, 영화감독 노필 등을 주제로 한 특별전에도 함께했다. 지난 21일 중랑구는 이들 중 12개 단체, 82명을 선정해 감사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봉사단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금자(75)씨는 “지역에 역사문화적으로 의미가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 주민 한 사람으로서 도움이 되고자 봉사를 시작했다”며 “손녀가 ‘할머니와 함께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할 정도로 좋아하는 모습에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조씨는 지난해에는 세브란스의 최초 한국인 교장이었던 오긍선 선생의 묘를 관리했고, 올해는 유관순 열사 합장비 관리를 맡고 있다. ●방문객 이용 돕게 공원 버스정류소 신설 한편 구는 공원 방문객이 보다 편안히 공원을 오갈 수 있도록 지난 9월부터 망우리역사문화공원 버스정류소를 신설해 운영하고 있다. 과거 공원 진입로에 가까운 정류소가 없어 방문객이나 주민은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야 했다. 정차 버스는 서울 시내버스 201번, 경기 남양주 버스 165, 166-1, 202, 65번 등 총 5개다.
  • 망우리공원서 애국지사 기리는 한마디 적어 보세요

    망우리공원서 애국지사 기리는 한마디 적어 보세요

    ‘나라 사랑! 겨레 사랑! 애국지사와 순국선열의 숭고한 뜻을 기립니다.’ 서울 중랑구는 제76주년 광복절을 맞이해 망우리 공원에 잠들어 있는 애국지사들을 기리고자 메시지 보드를 설치했다고 15일 밝혔다. 애초 구는 광복절 당일 지역 내 독립유공자와 기념행사를 개최하려고 했으나,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에 따라 이번 메시지 보드로 대체한 것이다. 메시지 보드는 망우리 공원 내 인물전시관 앞과 구청 중랑구민광장 2곳에 설치돼 있다. 누구나 메시지 작성에 동참할 수 있으며, 오는 20일까지 이어진다. 망우리 공원은 1933년부터 1973년까지 40년 동안 공동묘지였으나 현재는 숲과 산책로, 근현대사 유명 인물들의 묘역 등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주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곳에는 3·1 운동을 주도한 한용운 선생과 함께, 오세창, 문일평, 방정환, 조봉암 등 애국지사들이 잠들어 있다. 또 유관순 열사도 이곳에 영면해 있다. 중랑구는 지난달 망우리공원과를 신설할 정도로 망우리 공원을 서울 대표 역사문화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역사문화공원의 거점 시설인 ‘중랑망우공간’을 지상 2층 전체 면적 1247㎡(377평) 규모로 올해 안에 개관할 예정이다. 류경기 중랑구청장은 “메시지보드 작성에 동참해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겨보시길 바란다”면서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해 근현대사를 이끌어간 수많은 인물이 잠들어 있는 망우리 공원을 앞으로도 잘 관리해나가겠다”고 말했다.
  • “죽산 선생,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야 완전히 명예회복”

    “죽산 선생,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야 완전히 명예회복”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돼야만 완전한 명예회복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어요.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셨어요. 아직 그동안 해 오신 것의 반도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죽산 조봉암(1898~1959) 선생은 해방 후 국회의원을 지내며 진보당을 창당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죽산 선생은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돼 간첩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5개월이 지난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됐다. ‘사법 살인’으로 기록된 사건이 발생한 지 52년이 지난 2011년에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죽산 선생의 장녀 조호정(91) 여사의 노력 덕택이었다. 지난 9일 조 여사의 외동딸 이성란(59)씨를 만났다. 조 여사는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이씨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났을 때 어머니께서 ‘이제야 죽어서 아버지를 뵐 낯이 있다´고 하시면서 크게 기뻐하셨다”며 “어머니의 마지막 소망은 할아버지의 완전한 명예회복”이라고 말했다. ●광복 후 조선공산당 탈당… 건국 참여 -완전한 명예회복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난 건 간첩죄에 대한 명예회복이에요. 정치인으로서 명예회복은 이뤄진 겁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원래 독립운동가였어요.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1932년부터 신의주 감옥에서 7년을 보냈으며 1945년 광복하던 날을 서대문형무소에서 맞으셨어요. 그런데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반려했어요. 독립운동을 인정받아야 ‘죽산’이라는 이름이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는 2011년 1월 20일 조봉암 재심 사건에서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피고인은 일제강점기하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고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 개혁의 기틀을 마련해 우리나라 경제 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었다. 이 사건 재심에서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재심 판결로써 그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내용을 판결문에 명시했다. ●빨갱이로 헐뜯는 것 볼까 봐 기사 댓글 못 읽어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은 왜 반려된 건가요. “무죄 판결을 받은 2011년 그리고 2015년 두 차례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는데 모두 거절당했어요. 이번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지난해 7월 보훈처에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들이 서류를 검토했는데 안 되겠다는 거죠. 기분이 안 좋았어요. 저희가 신청도 안 했는데 보훈처에서 검토하고, 또 안 된다니요. ‘이제는 그만 신청하라’는 의미로 이해했어요. 그래서 더이상 서훈을 신청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할아버지에게 누를 끼치는 일 같아서요.” “저희 가족은 아직도 할아버지 기사에 달린 댓글을 못 봐요. 여전히 무섭거든요. 나중에 언젠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는다면 ‘빨갱이가 무슨 독립유공자냐’고 헐뜯는 사람들이 나타날까 봐 두렵습니다. 공산주의적인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죠. 이런 이야기를 더이상 하고 싶지가 않아요. 아직도 간첩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한스럽지요.” ●‘진보당 사건’ 압수수색으로 자료 사라져 보훈처는 ‘친일 흔적’이 있다며 죽산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반려했다. 1941년 신문 기사에 죽산이 휼병금(장병 위로금)을 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는 이유에서다.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되기 전 가택 압수수색으로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많은 자료가 다 사라졌어요. 보훈처에서는 입증할 자료를 더 찾아서 가져오라고 하는데, 일반인이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잖아요.” 이씨를 만난 지난 9일 국회 의원회관 세미나실에서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후원으로 ‘청년 조봉암’ 발대식이 열렸다. 이씨는 광복회,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등이 주관한 이 행사에 참석했다. ‘청년 조봉암’은 죽산의 고향인 인천 지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를 기념하고 발자취를 좇기 위해 만들어졌다. -진보당 사건은 대표적인 ‘사법 살인’으로 불리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1심에서 간첩죄는 무죄, 국가보안법만 유죄로 징역 5년이 나왔는데 2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돼 사형이 선고됐어요.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되고 재심을 청구했는데, 기각되자마자 바로 다음날 사형을 집행했죠. 이게 사법 살인이 아니면 뭘까요. 다른 말로 대체할 수가 없죠. 할아버지 싹수를 자른 거예요. 여운형, 김구 선생을 살해하듯 정적을 제거한 거죠.” -기념사업회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요. “기념사업회에서는 죽산 선생의 정신과 사상을 계승하고 선양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어요. 학술 활동과 토론,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요. ‘청년 조봉암’도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청년들이 죽산 선생의 생각과 이념을 공유하고 생각해 보는 거죠. 내년에는 생가터 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해요.” 재심 무죄 판결을 받던 날 조 여사는 “아버지 비석에 비문을 새길 수 있게 돼 기쁘다”고 언론에 소감을 말했다. 그러나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에 있는 죽산 묘지의 비석 뒷면은 아직도 비어 있다. ●60주기에 죽산정신 계승 청년들 참석 뜻깊어 “백비는 보존해야 될 역사적 가치가 있어 보존하려고 해요.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아 완전한 명예회복이 되면 비를 새로 세우려고 합니다. 지난달 31일 60주기 추모식이 열렸는데 호우 경보가 떴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어요. 그 빗속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신 분들은 물론 죽산의 정신을 이으려는 청년들까지 참석해 정말 고맙고 뜻깊었어요.”-어머니 조 여사의 건강은 어떤가요. “지병은 없지만 거동이 불편하셔서 몇 년째 추모식에도 참석을 못 하세요. 어머니는 너무 고초를 겪으셔서 이제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태연자약하시지요. 재심 무죄 판결이 나던 날도 저는 얼굴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 생각에 법정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울었는데, 어머니는 편안하게 웃으시더라고요. 그런데 사실은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눈을 떴는데 할아버지가 사형 선고받던 날이 생각나서 너무 힘드셨다고 해요. 50년이 지나도 잊히지가 않는 거죠. 아직도 서대문형무소 인근을 가면 어머니가 몸서리를 치세요. 텔레비전에서 감옥, 수의가 나오면 숨을 못 쉬고요. 옥바라지하던 시절이 생각나서요.” 고 노회찬 의원은 죽산 선생을 ‘한국 정치사 최초의 좌파 정치인’이라고 명명했다. 추모식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궁금합니다. “사회활동을 하실 때는 냉철하고 빈틈을 보이지 않으셨다고 해요. 반면 집에서는 너그러우시고 유머가 넘치셨다고 합니다. 식구들이 식사하고 있으면 와서 보시고는 ‘왜 내 상에 있던 반찬이 없냐. 내 상에만 특별한 반찬을 놓지 말고 다른 식구들도 똑같이 놓고 먹어라’고 하셨다네요.” -죽산 선생께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십니까. “할아버지의 마지막 옥중 유언으로 대신할게요.” “우리의 정치적 이상은 책임 정치, 수탈 없는 경제 민주화, 그리고 평화 통일이었지. 우리는 벽에 막혀 하지 못했지만 먼 훗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 나갈 것이네. 그러면 결국 어느 땐가 평화 통일의 날이 올 것이고 국민이 고루 잘사는 날이 올 것이네. 씨를 뿌린 자가 거둔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죽산 선생,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야 완전히 명예회복”

    “죽산 선생,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야 완전히 명예회복”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돼야만 완전한 명예회복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어요. 할아버지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셨어요. 아직 그동안 해 오신 것의 반도 인정을 못 받았습니다.”  죽산 조봉암(1898~1959) 선생은 해방 후 국회의원을 지내며 진보당을 창당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죽산 선생은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돼 간첩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5개월이 지난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됐다. ‘사법 살인’으로 기록된 사건이 발생한 지 52년이 지난 2011년에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죽산 선생의 장녀 조호정(91) 여사의 노력 덕택이었다. 지난 9일 조 여사의 외동딸 이성란(59)씨를 만났다. 조 여사는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이씨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났을 때 어머니께서 ‘이제야 죽어서 아버지를 뵐 낯이 있다‘고 하시면서 크게 기뻐하셨다”며 “어머니의 마지막 소망은 할아버지의 완전한 명예회복”이라고 말했다.-완전한 명예회복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난 건 간첩죄에 대한 명예회복이에요. 정치인으로서 명예회복은 이뤄진 겁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원래 독립운동가였어요.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1932년부터 신의주 감옥에서 7년을 보냈으며 1945년 광복하던 날을 서대문형무소에서 맞으셨어요. 그런데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반려했어요. 독립운동을 인정받아야 ‘죽산’이라는 이름이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는 2011년 1월 20일 조봉암 재심 사건에서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재판부는 “피고인은 일제강점기하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고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 개혁의 기틀을 마련해 우리나라 경제 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었다. 이 사건 재심에서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재심 판결로써 그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내용을 판결문에 명시했다.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은 왜 반려된 건가요.  “무죄 판결을 받은 2011년 그리고 2015년 두 차례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신청했는데 모두 거절당했어요. 이번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지난해 7월 보훈처에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들이 서류를 검토했는데 안 되겠다는 거죠. 기분이 안 좋았어요. 저희가 신청도 안 했는데 보훈처에서 검토하고, 또 안 된다니요. ‘이제는 그만 신청하라’는 의미로 이해했어요. 그래서 더이상 서훈을 신청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할아버지에게 누를 끼치는 일 같아서요.”  “저희 가족은 아직도 할아버지 기사에 달린 댓글을 못 봐요. 여전히 무섭거든요. 나중에 언젠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는다면 ‘빨갱이가 무슨 독립유공자냐’고 헐뜯는 사람들이 나타날까 봐 두렵습니다. 공산주의적인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죠. 이런 이야기를 더이상 하고 싶지가 않아요. 아직도 간첩이라고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한스럽지요.”  보훈처는 ‘친일 흔적’이 있다며 죽산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반려했다. 1941년 신문 기사에 죽산이 휼병금(장병 위로금)을 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는 이유에서다.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되기 전 가택 압수수색으로 할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많은 자료가 다 사라졌어요. 보훈처에서는 입증할 자료를 더 찾아서 가져오라고 하는데, 일반인이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있잖아요.”  이씨를 만난 지난 9일 국회 의원회관 세미나실에서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후원으로 ‘청년 조봉암’ 발대식이 열렸다. 이씨는 광복회,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등이 주관한 이 행사에 참석했다. ‘청년 조봉암’은 죽산의 고향인 인천 지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를 기념하고 발자취를 좇기 위해 만들어졌다. -진보당 사건은 대표적인 ‘사법 살인’으로 불리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1심에서 간첩죄는 무죄, 국가보안법만 유죄로 징역 5년이 나왔는데 2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돼 사형이 선고됐어요. 대법원에서 판결이 확정되고 재심을 청구했는데, 기각되자마자 바로 다음날 사형을 집행했죠. 이게 사법 살인이 아니면 뭘까요. 다른 말로 대체할 수가 없죠. 할아버지 싹수를 자른 거예요. 여운형, 김구 선생을 살해하듯 정적을 제거한 거죠.” -기념사업회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요.  “기념사업회에서는 죽산 선생의 정신과 사상을 계승하고 선양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어요. 학술 활동과 토론,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요. ‘청년 조봉암’도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청년들이 죽산 선생의 생각과 이념을 공유하고 생각해 보는 거죠. 내년에는 생가터 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해요.”  재심 무죄 판결을 받던 날 조 여사는 “아버지 비석에 비문을 새길 수 있게 돼 기쁘다”고 언론에 소감을 말했다. 그러나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에 있는 죽산 묘지의 비석 뒷면은 아직도 비어 있다.  “백비는 보존해야 될 역사적 가치가 있어 보존하려고 해요.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아 완전한 명예회복이 되면 비를 새로 세우려고 합니다. 지난달 31일 60주기 추모식이 열렸는데 호우 경보가 떴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어요. 그 빗속에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신 분들은 물론 죽산의 정신을 이으려는 청년들까지 참석해 정말 고맙고 뜻깊었어요.” -어머니 조 여사의 건강은 어떤가요.  “지병은 없지만 거동이 불편하셔서 몇 년째 추모식에도 참석을 못 하세요. 어머니는 너무 고초를 겪으셔서 이제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태연자약하시지요. 재심 무죄 판결이 나던 날도 저는 얼굴도 본 적 없는 할아버지 생각에 법정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울었는데, 어머니는 편안하게 웃으시더라고요. 그런데 사실은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눈을 떴는데 할아버지가 사형 선고받던 날이 생각나서 너무 힘드셨다고 해요. 50년이 지나도 잊히지가 않는 거죠. 아직도 서대문형무소 인근을 가면 어머니가 몸서리를 치세요. 텔레비전에서 감옥, 수의가 나오면 숨을 못 쉬고요. 옥바라지하던 시절이 생각나서요.”  고 노회찬 의원은 죽산 선생을 ‘한국 정치사 최초의 좌파 정치인’이라고 명명했다. 추모식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궁금합니다.  “사회활동을 하실 때는 냉철하고 빈틈을 보이지 않으셨다고 해요. 반면 집에서는 너그러우시고 유머가 넘치셨다고 합니다. 식구들이 식사하고 있으면 와서 보시고는 ‘왜 내 상에 있던 반찬이 없냐. 내 상에만 특별한 반찬을 놓지 말고 다른 식구들도 똑같이 놓고 먹어라’고 하셨다네요.” -죽산 선생께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십니까.  “할아버지의 마지막 옥중 유언으로 대신할게요.”  “우리의 정치적 이상은 책임 정치, 수탈 없는 경제 민주화, 그리고 평화 통일이었지. 우리는 벽에 막혀 하지 못했지만 먼 훗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 나갈 것이네. 그러면 결국 어느 땐가 평화 통일의 날이 올 것이고 국민이 고루 잘사는 날이 올 것이네. 씨를 뿌린 자가 거둔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민주당 반일 총공세 vs 한국당 반공 프레임

    더불어민주당이 ‘반일’에 드라이브를 걸자, 자유한국당은 ‘반공’을 강조하며 맞서는 형국이다. 각 당 의원들이 주최하는 관련 행사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 민주당 소속인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은 8일 ‘안익태 곡조 애국가 계속 불러야 하나’라는 주제의 공청회를 열고 “친일 작곡가 안익태에 대한 평가를 해 보자, 불편한 진실을 이제는 공개적으로 꺼내 국민에게 판단을 맡기자는 제안을 (씨알재단에서) 받고 행사를 주최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한일 경제 갈등은 이겨야 되는 경제 전쟁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최적기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안익태는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지휘자 겸 작곡가로 애국가를 작곡해 대한민국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았으며 사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하지만 일본 및 만주국의 영광과 나치의 건승을 비는 내용이 담긴 ‘만주환상곡’을 작곡하는 등 친일 행위를 한 것이 밝혀져 친일 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올랐다. 민주당 우원식 의원은 지난 7일부터 9일까지 국회의원회관에서 성남문화재단과 함께 독립운동가 웹툰 전시회 ‘위대한 시민의 역사전’을 열고 있다. 백범 김구, 약산 김원봉 등 독립운동가 웹툰 콘텐츠를 홀로그램으로 구현했다. 같은 당 최재성 의원도 같은 기간 의원회관에서 강제징용·위안부 피해자 사진 전시회를 열고 있다. 민주당 송영길 의원은 9일 독립운동가 죽산 조봉암의 서거 60주년을 맞아 ‘청년조봉암’ 발대식을 연다. 죽산 선생은 3·1운동에 참여하고 해방 후 좌우합작운동을 벌였으며 1대 농림부 장관, 2대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하지만 진보당 사건에 연루돼 국가변란과 간첩혐의 등으로 1959년 사법살인을 당했다. 반면 한국당 김영우 의원은 이날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한반도선진화재단 및 여의도연구원이 연 ‘대한민국 역사 정체성 토론회’를 후원했다. 그는 “대한민국은 지금 낭만적 민족주의와 좌편향적 역사관이 판을 치고 있다”며 “정부는 대한민국의 역사 정통성과 정체성마저 뿌리째 흔들고 있어 지금 현실이 매우 걱정된다”고 주장했다. 한국당 원유철·백승주 의원은 오는 12일 ‘한국형 핵전략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같은 당 조경태 의원은 14일 ‘전술핵 재배치를 위한 정책 토론회’를 주최할 예정이다. 12일 토론회에는 황교안 당 대표도 참석한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국가 폭력에 의한 ‘간첩죄’… 58년 만에 무죄 판결 “기쁘지만 억울”

    국가 폭력에 의한 ‘간첩죄’… 58년 만에 무죄 판결 “기쁘지만 억울”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아버지는 간첩 누명을 쓰고 사형 위기에까지 몰렸다가 2년간 옥살이 끝에 풀려났다. 아버지가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국민학교 1학년 막내딸의 꿈은 이때부터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 드리는 것’이 됐다. 오랜 세월이 걸렸다. 군사정권이 물러나도 ‘빨갱이’의 굴레는 무거웠다. 여전히 국가를 믿을 수 없었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한을 품고 세상을 뜬 지 30년이 넘어서야 재심을 청구할 수 있었고 지난 5월 16일, 58년 만에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 그렇게 막내딸의 힘으로 명예를 되찾은 아버지는 해방 후 서울대 법대 학장을 지내고 한글로 된 최초의 민법학서를 남긴 진승록 교수다. 지난 23일 서울 서초동 자택에서 만난 막내딸 진미경(64) 한국외대 초빙교수는 인터뷰 2시간 내내 눈물을 흘렸다. 재심 준비 과정이나 앞으로의 계획은 힘주어 말했지만, 과거를 돌이킬 때마다 눈물을 쏟았다. 그는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나니 아버지의 인생이 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뒤늦게 재심을 청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버지가 국민학교 1학년 어느 날 새벽에 끌려가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나요. 3학년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오셨죠. 중학교 1학년 때였는데 아버지가 잠들지 못한 채 홀로 탄식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억울하다. 원통하다’ 그러시더라고요.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아버지 한을 풀어 드려야겠다’고 거듭 다짐했지요.” “어느 날 신문을 보는데 간첩 누명을 썼던 죽산 조봉암 선생님이 무죄 판결(2011년)을 받아서 따님이 인터뷰한 기사가 나오더라고요. 그때 따님 나이가 여든이 넘었어요. ‘저렇게 연세가 많은 분도 하는데 나는 이게 뭔가´라는 자책감이 들었죠. 2014년 서울대 법대에서 6·25전쟁 관련 세미나를 열었는데, 아버지 이야기를 해 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거기서 아버지의 서울대 법대 제자들을 만났는데, 그분들이 ‘서울대 법대 학장이 빨갱이라는 게 말이 되냐. 재심을 청구하라´고 적극 권유했어요. 그분들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내게 됐어요.” 진승록 교수는 6·25전쟁 당시 서울대 법대 학장으로 교정을 지키다 납북됐고, 넉 달 만에 탈출해 고시위원장 등을 지냈지만 1961년 5·16 직후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항소심에서 간첩방조죄만 인정돼 징역 10년으로 감형, 1963년 가석방됐지만 1985년 80세로 작고할 때까지 누명을 벗지 못했다. 진미경 교수는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국가를 믿지 않았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만들어졌을 때도 그런 이유로 아버지 사건을 신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국가 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했는데 국가가 다시 심사해서 밝혀 준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국가가 진실을 밝혀 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재심 과정에서 어떤 점이 힘들었나요. “판결문 이외에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았어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일했던 김윤경 조사팀장이 자료를 찾는 방법을 알려줘서 도움이 많이 됐어요. 판결문 외에 재소자 인명부를 챙겼죠. 수사기록을 국가정보원이나 군에 요청했는데 처음에는 수사한 적 없다고 답하더라고요. 아는 국회의원을 통해 정보공개를 요청했더니 그제서야 수사는 했지만 기록이 없다고 말을 바꿨어요. 증언해 줄 사람을 찾기 위해 강원 원주, 전남 순천, 부산 등 안 가 본 곳이 없어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대부분 돌아가셨거나 살아 있어도 증언을 거부했어요.” 서울고법 형사2부의 재심 판결문에는 “이 사건에 대해 육군고등검찰부, 국가정보원, 국가기록원 등에 기록 송부와 보존 여부 확인을 요청한 결과 그 어디에도 수사기록이나 재판기록이 보존돼 있지 않았다”고 명시돼 있다. 진 교수는 아버지에게 사형을 구형한 군검사를 어렵게 만났지만, 아버지를 모른다고 부인했다. 그는 나중에야 ‘진 학장의 딸이 나를 찾아올 줄 몰랐다. 상부의 지시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결국 재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불법구금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음을 인정할 수 있고, 수사 과정에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볼 개연성이 있다”며 “불법구금과 가혹행위 등으로 임의성 없는 진술을 한 후 임의성 없는 심리 상태가 법정에서도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며 무죄를 선고했다.-재심 준비 5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은 기분은 어땠나요. “선고 전부터 법정에 앉아서 남편이랑 계속 울었어요. ‘간첩´이란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요즘 사람들은 모를 거예요.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더라고요. 재판장인 차문호 부장판사가 ‘너무 늦게 무죄를 드려서 미안하다. 지금이라도 무죄를 받게 돼서 다행´이라고 말했어요. 처음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드디어 아버지 한을 풀어드렸구나. 아버지의 법대 제자들이 축하연도 열어 주셨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더 슬프고 억울한 느낌이 들어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서 무죄 판결을 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살아 돌아오시지도 못하고, 아버지의 억울한 삶은 되돌릴 수가 없구나´ 이런 생각만 커지네요.” 진승록 교수는 1905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고려대) 교수와 서울대 법대 학장 등을 지냈다. 1947년 ‘민법총칙’을 시작으로 민법총론, 물권법, 담보물권, 채권총론, 채권각론 등 6권의 저서를 남겼다. 1952~1955년 지낸 고시위원장은 당시 정부 서열 4위로, 진 교수는 기술고시를 도입했다. -간첩죄에 휘말린 뒤 아버지는 어떻게 지냈나요. “엄마가 먼저 집에 왔는데, 또렷이 기억나요. 언니와 함께 학교 앞에서 떡볶이를 사 먹고 있었는데 입주 도우미 언니가 달려와서 ‘엄마가 오셨다´고 말했어요. 많이 남은 떡볶이를 그냥 내려놓고 놀라서 뛰어갔어요. 이듬해 여름에 아버지가 오셨어요. 풍채 좋던 아버지가 굉장히 수척해지셨어요. 고문 때문에 수저도 들어 올리지 못하셨어요. 벽에 금을 단계별로 그어 놓고 조금씩 올리면서 나름의 재활운동을 하셨지요.” “학자로서 활동은 전혀 못하셨어요. 한동안은 몸이 안 좋아서 그랬고, 박정희 사후 전두환 군부가 이어지니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죠. 형사들이 툭하면 찾아왔어요. 잡혀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늘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요. 글조차 쓰지 못하셨죠. 유머가 많은 분이셨는데 성격도 변했고요. 1978년에 사면을 받고 변호사 등록을 하려고 했는데 법무부가 안 내줬어요. 변호사 등록 업무가 대한변호사협회로 이관된 1983년에야 변호사 재등록이 됐어요. 제대로 활동도 못하고 2년 후 돌아가셨죠.”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아버지 제자들은 저보고 효녀라고 하지만, 스스로 자랑스럽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아버지 간첩 누명 때문에 1980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는데 외무부에서 여권을 안 내줬어요. 아버지 제자들이 신원보증을 서서 어렵사리 유학을 떠났죠. 저도 그런 일을 겪으면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죄송하죠. 아버지가 사면받고 변호사 등록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셨을 때도 도와드리지 못했어요.” “아버지의 업적을 재평가하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학술 세미나도 하고요. 아버지 고향인 강릉 옥계면의 이름을 따서 기념사업을 계획 중이에요. 아버지의 민법이론과 고시위원장 당시 하신 일을 재조명할 거예요. 저는 아버지 때문에 정치학 교수가 됐어요. 어렸을 때부터 ‘국가란, 정치란,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다시는 이념 갈등으로 인해, 국가폭력으로 인해 희생되는 사람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기고] ‘1991, 봄’/김종식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

    [기고] ‘1991, 봄’/김종식 한국사회주택협회 이사장

    영화 ‘1991, 봄’ 시사회에 다녀왔다.‘1991, 봄’은 1991년 4월 26일 강경대 열사로 시작해 5월 25일 김귀정 열사까지 국가의 불의에 저항한 11명의 청춘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한국판 드레퓌스’로 불리었던 당시 유서 대필과 자살 방조라는 죄명으로 낙인찍힌 스물일곱살 청년 강기훈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시대적으로 보면 지난해 개봉해 720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1987’의 후속작 같은 영화다. 1987년 6월 항쟁은 미완이긴 해도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승리의 항쟁으로 기억되는 반면 1991년 봄은 실패한 항쟁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성공한 항쟁이 얼마나 될까. 1980년 5월 민중 항쟁은 군인들에 의해 제압됐고 동학혁명도 실패했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과 항쟁의 고귀한 가치가 훼손될 수 있겠는가. 민족민주열사추모연대의 자료에 따르면 1959년 사형당한 조봉암 선생부터 1987년 이한열 열사까지 수십년 동안 국가에 의해 희생된 열사들보다 1987~1991년 국가 폭력에 의해 희생된 열사들이 많다고 한다. 5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1989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의 방북으로 통일 논의가 봇물 터지듯 나왔고 국가 폭력에 저항해 투쟁이 들불처럼 번져 일어났다. 반통일적이고 반민주적인 불의한 정치 권력과 탐욕스런 자본 권력에 맞서 민주주의와 생존권 확보를 위한 투쟁이었고,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격렬했던 민중 항쟁의 5년이었다. 영화에서 노동자 김진숙은 하늘 위에서 369일 동안 고공농성한 이유가 1991년 의문사한 박창수 열사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김진숙은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죽음을 세상에 말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그렇게 1987년과 1991년은 2017년 촛불 항쟁으로 연결돼 있다. 영화에서 박승희 열사는 말한다. “왜 사람들은 죽은 사람보다 죽인 사람 편을 들까.” 김귀정 열사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난 무엇이 될까, 10년 후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필자는 1991년 봄의 싸움으로 감옥에서 4년을 보내는 대가를 치렀지만 여전히 살아 있기에 김귀정 열사의 질문이 현재진행형이다. 거울을 보듯 내 삶을 성찰하게 만들었고 내 삶의 무수한 선택을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끊임없이 되묻게 했다. 그 질문들은 내 인생의 항로에서 흔들림 없이 어두운 밤 갈 길을 밝혀 주는 북극성 같은 질문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1991, 봄’은 회고적이기보다는 대단히 성찰적인 영화다.
  • [73주년 광복절] “누명 벗은 조봉암 선생, 독립유공자 서훈 더 늦으면 안 돼”

    [73주년 광복절] “누명 벗은 조봉암 선생, 독립유공자 서훈 더 늦으면 안 돼”

    3·1운동 선봉장… 현실 진보정치 선구자1959년 간첩죄 사형 2011년 무죄 판결 동명의 국방헌금 내역에 심사 3번 탈락‘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이는 1956년 진보당을 창당하고 3대 대통령선거에 나서는 등 ‘현실주의적 진보정치’의 선구자로 불리는 조봉암(위)의 어록에 있는 글귀로, 그가 묻혀 있는 서울 중랑구 망우리 묘의 비석에도 새겨져 있다. 지난 13일 서울 중구 충무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곽정근(아래·85) 회장은 “조봉암 선생은 항일독립운동과 근로 대중을 위해 한평생을 살았던 분이다”면서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곽 회장은 “조봉암 선생은 20살 때인 1919년 3·1운동 선봉에 서다 징역 1년을 살았다”면서 “당시에는 독립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던 조선공산당 활동을 하다 1933년 상하이에서 체포돼 신의주형무소에서도 7년을 옥살이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는 일제 치하에 있던 시기인 1941년 12월 23일자 ‘매일신보’에 “인천 서경정에 사는 조봉암씨가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단신 기사를 문제 삼아 조봉암의 서훈을 거부하고 있다. 이를 이유로 조봉암은 2011년, 2015년, 2018년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곽 회장은 “기사에 나온 장소는 조봉암 선생과 살던 곳도 다르고 선생은 그만큼의 돈도 없었다”면서 “만약 사실이라면 정치적인 적들이 친일을 했다며 이용했을 텐데 그런 기록도 없다”고 반박했다.고향인 충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인천으로 올라와 고학을 하던 곽 회장은 신문사에서 진보당 당원들이 토론하던 모습을 보고 조봉암의 사상에 매료돼 1956년 대선 선거운동에 뛰어든다. 곽 회장은 “당시에는 선거운동만 해도 잡아가는 시기라 운동원도 5~6명 정도였다”면서 “인천부두노동자들이 조봉암 선거 운동 차량에 손을 흔들며 따라오던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고 돌이켰다. 초대 농림부 장관과 2대 국회부의장까지 지낸 조봉암은 간첩죄 등 혐의로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9년 7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곽 회장은 “선생이 주장한 ‘진정한 민주주의’, ‘서민경제’, ‘평화통일’이라는 시대정신은 미래지향적이었다”면서 “대선이 끝나고 위협을 느낀 이승만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법살’(법에 의한 살인)을 당했다”고 아쉬워했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조봉암이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복역한 사실이 있으므로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것이 상당하다”고 했다. 2011년 대법원 무죄 판결로 명예도 되찾았다. 곽 회장은 “내년이면 조봉암 선생 탄생 120주년, 서거 60주년”이라면서 “늦었지만 건국훈장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고 말했다. 기민도 기자 key5088@seoul.co.kr 류재민 기자 phoem@seoul.co.kr
  • 성백진 서울시의원 “망우역사문화공원 웰컴시설 내년 3월 착공”

    성백진 서울시의원 “망우역사문화공원 웰컴시설 내년 3월 착공”

    서울시의회 보건복지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의정활동을 하고 있는 성백진 의원(중랑1, 더불어민주당)은 2018년 중랑구 주민센터 동정보고행사에서 망우역사문화공원((종전)망우리묘지공원)에 설치된 노후 안내소를 철거하고 현대화된 웰컴센터 건립 일정을 구체적으로 밝혔다.성백진 의원이 밝힌 웰컴시설이 건립되면 기존의 묘지공원이 역사문화공원으로 실질적으로 탈바꿈하여 중랑구민의 생활문화환경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1977년 묘지공원으로 지정된 망우리묘지공원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과 소파 방정환 선생, 정치인 조봉암 선생, 예술가 이중섭 님, 종두법의 아버지 지석영 선생을 비롯한 근·/현대사 선구자(50여명)들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서울시의회 보건복지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의정활동을 하고 있는 성백진 의원(중랑1선거구, 더불어민주당)은 망우리묘지 지역 일대를 메모리얼 파크(Memorial Park) 형태로 조성하여 중랑구 주민과 서울시민에게 여가와 취미활동 공간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제안을 제시해 왔다. <망우묘지공원 현황 및 실태>① 공원위치: 중랑구 망우동 산57-1, 경기 구리시 교문동 산34-1② 공원면적: 1,762천㎡(묘지공원 832천㎡, 묘지공원 지정 1977년③ 묘지현황: 잔존분묘 7,907기(유명인사 묘소 포함, 한용운 선생 및 예술인 이중섭 등) 서울시는 망우리묘지공원에 안장된 유명인사 묘역을 근현대사 교육장소로 활용하고, 서울둘레길 이용자와 외국 관광객을 위해 역사의 가치를 느끼며 여유를 찾을 수 있는 편안한 쉼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공원화할 필요성을 공감했다. 망우리묘지공원이 시대적 증언과 문화적 다양성이 현존하는 등 교육적 가치가 높은 역사·문화 및 관광자원으로서 의미가 새롭게 다루어져서 ‘망우리 공원 웰컴센터 건립사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성백진 의원은 밝혔다.망우리 공원 웰컴센터가 건립되면 ‘인문학적 길 조성 사업’과 ‘사색의 길 가로등 설치 사업’과 연계되어 망우리묘지공원은 역사문화공원으로 그 기능이 대폭 변경된다. 현재까지 서울시가 계획 중인 웰컴센터의 규모를 보면, 연면적 2,137㎡의 지상 3층 규모로서 사업비는 78억 3천 9백만원에 이른다. 웰컴센터에는 카페테리아와 매점 같은 이용자 편익시설과 휴게공간 그리고 사이버 추모관과 세미나실과 같은 다목적홀이 마련될 예정이다. 성백진 의원은 망무리묘지공원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미래를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메모리얼 파크(Memorial Park) 기능을 가진 역사문화공원으로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한국 근․현대사의 유명인사 묘역과 그 인문학적 가치를 알리며, 연간 36만명의 이용자에게 힐링하는 공간을 제공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추진되는 사업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웰컴센터사업은 망우리역사문화공원사업의 중추라고 할 수 있다. 방문객과 시민이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휴게시설과 카페시설 등 편익시설을 보다 확보할 수 있도록 서울시 집행부와 긴밀히 협의해 나가겠다.”라고 구체적인 의정활동 계획을 밝혔다. 서울시는 망우리묘지의 안내소를 대신할 망우리묘지공원 웰컴센터에 대한 제2차 공공투자심사를 2018년 3월에 마치고 2018년 11월까지 실시설계를 끝낼 예정이다. 실시설계를 바탕으로 2019년 3월부터 공사에 착공하여 2020년 8월 준공하여 공개할 예정이다. 성백진 의원은 망우역사문화공원 조성을 위한 웰컴센터 건립과 인문학적 길 조성사업 그리고 사색의 길 가로경관 등 설치사업의 실시도 중요하시만, ‘무연고분묘’를 개장하여 이전하는 사업의 중요성도 간파하여, 서울시의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으로서 2018년 ‘망우역사문화공원 일제조사 및 무연고분묘개장사업’ 예산 3억원을 확보했다고 웰컴센터 시설 건립 예정 보고에서 함께 밝혔다. 무연고분묘개장사업이 성백진 의원의 제안한 바대로 집행될 경우, 망우역사문화공원의 환경 개선과 공원화 사업에도 탄력이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성백진 서울시의원 “망우리묘지공원에 웰컴센터 건립 추진”

    성백진 서울시의원 “망우리묘지공원에 웰컴센터 건립 추진”

    서울시의회 보건복지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의정활동을 하고 있는 성백진 의원(중랑1, 더불어민주당)은 망우리묘지공원에 설치된 노후 안내소를 철거하고 현대화된 웰컴시설 건립을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웰컴시설이 건립되면 묘지공원이 역사문화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중랑구민의 생활문화환경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1977년 묘지공원으로 지정된 망우리묘지공원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과 소파 방정환 선생, 정치인 조봉암 선생, 예술가 이중섭 님, 종두법의 아버지 지석영 선생을 비롯한 근·/현대사 선구자(50여명)들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서울시의회 보건복지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의정활동을 하고 있는 성백진 의원 망우리묘지 지역 일대를 메모리얼 파크(Memorial Park) 형태로 조성하여 중랑구 주민과 서울시민에게 여가와 취미활동 공간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제안을 제시해 왔다. 서울시는 망우리묘지공원에 안장된 유명인사 묘역을 근현대사 교육장소로 활용하고, 서울둘레길 이용자와 외국 관광객을 위해 역사의 가치를 느끼며 여유를 찾을 수 있는 편안한 쉼터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공원화할 필요성을 공감했다. 이에 따라 망우리묘지공원이 시대적 증언과 문화적 다양성이 현존하는 등 교육적 가치가 높은 역사·문화 및 관광자원으로서 의미가 새롭게 다루어져서 ‘망우리 공원 웰컴센터 건립사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성백진 의원은 밝혔다. 망우리 공원 웰컴센터가 건립되면 ‘인문학적 길 조성 사업’과 ‘사색의 길 가로등 설치 사업’과 연계되어 망우리묘지공원은 역사문화공원으로 그 기능이 대폭 변경된다. 웰컴센터는 연면적 2,137㎡의 지상 3층 규모로서 사업비는 78억 3천 9백만원에 이른다. 웰컴센터에는 카페테리아와 매점 같은 이용자 편익시설과 휴게공간 그리고 사이버 추모관과 세미나실과 같은 다목적홀이 마련될 예정이다. 성백진 의원은 망무리묘지공원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미래를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메모리얼 파크(Memorial Park) 기능을 가진 역사문화공원으로 활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한국 근․현대사의 유명인사 묘역과 그 인문학적 가치를 알리며, 연간 36만명의 이용자에게 힐링하는 공간을 제공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추진되는 사업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웰컴센터사업은 망우리역사문화공원사업의 중추라고 할 수 있다. 방문객과 시민이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휴게시설과 카페시설 등 편익시설을 보다 확보할 수 있도록 서울시 집행부와 긴밀히 협의해 나가겠다”라고 구체적인 의정활동 계획을 밝혔다. 서울시는 망우리묘지의 안내소를 대신할 망우리묘지공원 웰컴센터를 2018년 10월까지 실시설계를 끝내고 12월부터 공사에 착공하여 2020년 1월부터 운영할 계획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김동율 서울시의원 “죽산 조봉암 독립유공자 서훈돼야”

    김동율 서울시의원 “죽산 조봉암 독립유공자 서훈돼야”

    서울시의회 김동율 의원(더불어민주당, 중랑4)은 31일 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 열린 죽산 조봉암 선생의 추모식에 참석했다. 이날은 선생의 기일이다. (1959년 7월 31일. 사형) 죽산 조봉암 선생은 일제강점기하에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 제헌국회와 2대 국회의원 및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하고 제2,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재직하며 농지개혁의 기틀을 마련하고 우리나라 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 이었다. 김 의원은 이날 추모식에서 “망우묘지공원에 영면해 계신 조봉암선생은 지난 1959년 이날 억울한 정치적 누명을 쓰고 사형집행을 당했으며 2011년 그 혐의에 대해 대법원의 무죄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독립유공자 서훈이 되지 못했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며 “새로운 정권에 새로운 처장을 맞이한 국가보훈처가 적페청산을 위해 죽산 조봉암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통해 역사를 바로 세우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김 의원은 그 동안 망우묘지공원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영면하고 계시는 근현대사의 여러 위인들을 소개하고 뜻을 기릴 망우역사문화관 건립을 끈질기게 주장하여 내년에 착공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고, 지난해 12월에 준공한 ‘망우리 사잇길’ 정비 사업을 이끌어 유명인사 묘소에 안내시설 및 정비를 하는 등 활발한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독립운동가 조봉암 선생, 생가 복원 언제쯤

    독립 운동가인 죽산 조봉암 선생(1899∼1959)의 강화도 생가 터 복원 사업이 예산 미배정으로 몇년째 제자리걸음이다. 15일 인천시에 따르면 시는 2011년 죽산 선생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차원에서 12억여원을 들여 생가 터 발굴·복원 기념사업, 중구 도원동 거주지 보존사업 등을 민간단체와 공동으로 추진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2013년에는 제68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죽산 조봉암 선생 기념사업중앙회’와 생가 복원을 함께 추진키로 했다. 이에 따라 인천시는 1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죽산 선생의 생가를 복원하고 추모공원도 조성하기로 했다. 당시 기념사업중앙회는 죽산 선생의 생가를 찾아내기 위해 생가터 발굴 조사위원회와 함께 인천시와 강화군 지원을 받아 2012년 9∼11월 기초 조사를 마쳤다. 이어 죽산 선생의 족보·가계 분석, 친족 정보 수집, 문헌 조사 등을 마치고 생가 터를 강화군 선원면 금월리 가지마을로 잠정 확정했다. 사업회는 이러한 사실을 심포지엄에서 밝히고 인천시와 토지 매입 등을 협의하기로 했지만 이후 시 재정난과 서훈 문제가 겹쳐 사업 예산이 책정되지 않았다. 사업회는 2011년 국가보훈처에 죽산 선생의 서훈 신청을 했지만 그가 일제에 헌금 150원을 냈다는 1941년도 ‘매일신보’ 기사를 이유로 신청이 반려돼 지난해 재심 청구를 한 상태다. 결국 죽산 선생 생가 터는 아무런 조치 없이 5년째 그대로 방치됐다. 1898년 강화도에서 태어난 죽산 선생은 일본 동경에서 유학하면서 사회주의 노선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1932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7년간 복역하는 등 치열한 항일 운동을 벌였다. 해방 후 국회의원과 농림부장관 등을 지내고 진보당을 창당했지만 1958년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돼 간첩죄 등으로 기소됐다. 1심에서 징역 5년이 선고됐으나 2심과 3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재심 청구가 기각되면서 1959년 7월 형장의 이슬이 됐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07년 죽산 선생의 사형 집행을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으로 규정했다. 대법원이 유족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여 2년여의 심리를 한 끝에 2011년 1월 무죄 판결을 받아 사형 집행 52년 만에 간첩 누명을 벗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자치단체장 25시] 빈민에겐 ‘엄마’… 軍 통합훈련장 건립 반대엔 ‘전사’

    [자치단체장 25시] 빈민에겐 ‘엄마’… 軍 통합훈련장 건립 반대엔 ‘전사’

    홍미영(61) 인천 부평구청장의 삶은 ‘소외된 사람들과 동행’으로 집약된다. 정치인들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을 보란 듯이 드러내지만 ‘말의 향연’에 그치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홍 구청장은 살아온 과정으로 얼마나 치열하고 한결같이 약자의 편에서 실재했는지를 증빙하고 있다. 서울이 고향인 그는 사업하던 아버지와 어머니 슬하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그는 1학년 때 서울 중랑천 뚝방촌에 빈민 봉사활동을 나갔다가 큰 충격을 받는다. 지저분한 공동 화장실은 물론 최소한의 주거환경을 갖추지 못한 곳에서 아이들은 신발도 없이 맨발로 뛰어다녔다. 아이들의 부모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사회구조가 불평등하다는 사실에 눈을 떴다. ‘금수저’로 태어나 ‘흙수저’와 함께 행복하게 사는 삶을 꿈꾸는 계기가 됐다. “다들 부모 덕에 어느 정도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제 생각이 철없음을 절감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받은 몫이 이 사회에서 덜 가진 다른 사람들이 받아야 할 몫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그 인식은 더 받은 몫을 사회에 돌려줘야겠다는 성찰로 이어졌고, 60이 넘어선 지금까지 이를 실천하는 삶이 됐다. 육아와 노동을 병행하는 빈민 여성들에게서 한국사회의 모순이 집약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1983년 일곱 살, 다섯 살배기 딸 둘을 데리고 인천 동구 만석동으로 이사 왔다. 서울토박이가 서울을 떠나 인천 부둣가 판자촌에 살기로 한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이후 인천 최초 비영리 공부방인 ‘큰물공부방’을 차렸다. 엄마들이 조개·굴을 캐거나 공장 일을 하러 나간 사이 지저분한 골목과 어두운 방에 방치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그의 차지였다. 모든 게 어려운 상황이었다. 공부방이 자리를 잡아가던 중 만석동 판자촌이 철거되자 인천의 또 다른 달동네인 부평구 십정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 두 칸짜리 전셋집을 얻어 한 방은 유아놀이방, 다른 방은 초등학생 공부방을 운영했다. 도시빈민과 같은 삶을 살아야 그들을 주체로 세우는 빈민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공부방은 후배들에게 맡기고 공장을 다니거나 우유 배달, 가내 부업을 하는 평범한 아줌마로 변신했다. 거리에서 시위하는 것보다 더 치열한 ‘운동권’이었던 셈이다. 주민들과 지역모임을 만들어 산동네 쓰레기수거, 가로등·공중전화 설치, 상하수도 정비 등을 논의하는 한편 동네신문을 찍고 주민자치회, 바자회 등을 주도하면서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던 그에게 ‘정치’는 운명적으로 다가왔다. 1991년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하자 주민들과 공부방 교사들, 자원봉사자들이 구의원 출마를 권유했다. 낙후된 십정동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동네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출마해야 한다며 등을 떠밀었다. 그는 주민들의 적극적인 신뢰에 힘입어 십정동으로 이사 온 지 5년 만에 당시 인천 최다 득표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인천 북구(현 부평구) 의원에 당선된다. 한국여성운동의 대모였던 고(故)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은 “초대 기초의원선거 유세현장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당시의 감동을 절대 잊을 수 없다. 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구체적인 문제를 소상하게 지적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실천방안을 또박또박 제시함으로써 유권자의 갈채를 받았다. 참다운 의미에서의 생활정치인 탄생이 확실시되는 순간이었다”고 평가했다. 홍 구청장의 구의원 활동이 소외된 자들을 대변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음은 물론이다. 역량과 진정성을 인정받은 그는 재선 인천시의원과 17대 국회의원을 거쳐 재선 구청장이 됐다. 그래서 지방자치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는 여전히 가난한 자들의 이웃이다. 한국 정치인들은 체급(?)이 올라가면 초심을 벗어나기가 다반사지만, 홍 구청장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등식이다. “지방자치는 주민들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생활자치’ 영역이란 철학을 가지고 주민들의 일상적인 문제를 세심하게 살피고 해결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부평구는 요즘 통합예비군훈련장 문제로 시끄럽다. 국방부가 산곡동에 통합훈련장을 만들어 인천 주안·계양·공촌·신공촌훈련장은 물론 경기 부천과 김포에 있는 훈련장까지 합치는 방안을 추진하자 주민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통합훈련장 예정지 반경 3㎞ 이내에 20여만명이 거주하고 31개의 유치원 및 초·중·고가 밀집해 있다. 주민들은 대대적인 반대운동을 벌여 지금까지 24만명이 서명을 했다. 부평구는 인천시에 대체부지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시는 마땅한 대체부지를 찾기 어려운 데다 부지를 확보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인근 주민들의 반대가 예상된다며 난색을 보이고 있다. 국방부 역시 애매한 태도를 보인다. 홍 구청장은 “현재 14개의 군부대가 부평지역 330만㎡를 점유해 군부대 이전이 시급한 상황에서 통합예비군훈련장까지 들어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부평4동에 있는 미군부대 ‘캠프 마켓’ 이전을 서두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부대가 경기 평택으로 이전하는 방안은 수년 전 결정됐으나 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홍 구청장의 마음은 다급하다. 홍 구청장은 부대가 이전하면 공원 외에 풍물전시관 등 문화역사공연장을 만들겠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다. “캠프 마켓은 일반 군부대가 아니라 빵을 만들어 전국 미군부대에 공급하는 일종의 군수기지인데 예정보다 이전이 늦어져 2018년쯤 이전이 완료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승만의 독재정치에서 희생된 ‘1950년대 진보정치’의 대명사 조봉암 선생의 동상을 만들겠다는 구상도 밝혔다. 조봉암은 부평을 기반으로 했던 정치인으로 이곳에서 국회의원을 두 번이나 지내고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했다. 부평을 가로지르는 굴포천과 그 주변을 생태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것도 홍 구청장이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이다. 굴포천은 인천가족공원(부평동)에서 시작해 계양구, 경기 부천·김포를 거쳐 한강까지 흐르는 서부 수도권의 대표적인 하천이다. 구는 인천가족공원부터 부평구청까지 3.4㎞에 대한 단계적 개발을 시행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해 굴포천 복원과 연계되는 국비사업에 응모, 3개 분야에서 870억원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홍 구청장은 “사람 사는 곳에 물길이 있다는 것은 큰 복”이라며 “굴포천 복원으로 30여 전 물놀이를 하고 물고기를 잡던 시냇물을 재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낙후지역이 많은 부평에서 뉴스테이(기업형 임대주택) 사업도 가속도가 붙고 있다. 수많은 재개발사업이 부동산경기 침체로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대안으로 떠오른 뉴스테이는 사업 속도가 빠르고 재정착 주민들에게 혜택이 많다는 점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청천2구역과 십정2구역인데 2019년 말쯤 입주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홍 구청장의 행정 화두는 단연 서민경제 활성화다. 서민들이 많이 사는 곳의 자치단체장으로서의 운명이기도 하겠지만, 평생을 약자의 편에서 살아온 만큼 당연한 행정철학이기도 하다. 홍 구청장은 “부평은 대체로 못사는 지역이지만 소통을 잘하는 공동체이고, 역동적이면서 민주주의적 자질이 강한 시민들로 가득하다”면서 “단체장이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제공하고 있다”며 밝게 웃었다. 김학준 기자 kimhj@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