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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천오층석탑 환수, 자선당 유구 찾아 온 삼성의 도움 필요“

    “이천오층석탑 환수, 자선당 유구 찾아 온 삼성의 도움 필요“

    “한국 땅을 바라보며 100년 넘게 서 있는 이천오층석탑을 외면하는 것은 일본제국주의 강제 수탈을 인정하는 꼴 입니다. 이천오층석탑은 우리 것이 명백하고 불법 반출이기 때문에 반드시 돌려받아야 합니다.” 17일 서울신문과 만난 이상구(67) 이천오층석탑환수위원회위원장은 지난 12년 간의 반환운동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며 한숨부터 쉬었다. 이천오층석탑은 고려 초에 만들어진 균형미가 뛰어난 국보급 문화재로 이천 향교옆에 자리했었다. 문화재 수집광이자 일본의 기업인 오쿠라 기하지로의 수중에 들어가 1918년 인천세관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됐다. 이후 도쿄 오쿠라호텔 정원에 평양 율리사 터에서 반출한 같은 고려시대 석탑인 팔각오층석탑과 함께 외로이 서 있다. 이 위원장은 이날 “오쿠라가 경복궁 자선당 유구(기단과 주춧돌)가 1995년 12월 삼성그룹 삼성문화재단을 통해 돌아온 선례가 있다”며 “지난 12년간 불교계와 국회 등 통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진척이 없었다. 실낱 같은 희망이지만 오쿠라호텔측과 친분이 있는 삼성그룹이 이천오층석탑 반환에 나서주면 가능 할 수도 있을 것” 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또 이천오층석탑 반환으로 냉각된 한일관계 개선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경복궁 자선당은 세자가 기거하던 곳인데 1915년 오쿠라 기하치로에 의해 일본으로 헐려 가서 오쿠라호텔에서 ‘조선관’이라는 이름으로 별채로 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소실 되었다. 이후 자선당의 기단과 주춧돌은 불에 그을린 채 방치되다가 1993년 당시 김정동 목원대 명예교수가 찾아내어 다방면의 노력끝에 삼성의 신라호텔이 오쿠라호텔과 자매호텔 관계라는 인연으로 삼성문화재단이 반환 받아서 국가에 기증한 것이다. 이 위원장은 “1918년 오쿠라와 조선총독부가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오쿠라는 먼저 이축한 경복궁의 자선당에 꾸밀 석탑이 필요해 평양 전차장 앞 6각 7층 석탑을 요청했지만, 조선총독부는 사람의 왕래가 많다는 이유로 이천오층석탑을 추천했다”며 “총독부의 허가는 이천오층석탑의 명백한 일본 정부차원의 불법 반출의 증거”라고 강조했다. 이천오층석탑환수위원회는 2008년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이천시민단체 32개가 발대식을 통해 환수운동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 위원장은 “환수위의 석탑과 고려청자 영구교환, 임대 협상 등의 노력과 32차례의 방일 협상에도 오쿠라문화재단은 이천오층석탑은 법인등록이 된 것으로 돌려주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고 있다”면서 “환수위의 영구임대 제안에 오쿠라문화재단은 보물급 이상 수준의 문화재와 맞교환을 요구하는 등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여러 번에 걸친 해체·복원으로 훼손이 심한 석탑 이음 부분을 석회로 덧칠하는 등 훼손이 심각하다”며 “오쿠라재단은 석탑 보수 전문가를 보내 보수하겠다는 환수위 측 요청도 거절했다”고 분노했다. 이 위원장은 “지난달 시민 모금으로 환수염원탑을 실물 크기로 제작해 시청 광장에 설치했다. 석탑의 웅장함과 멋을 이천시민에게 보여드려 후대에서라도 이천오층석탑을 환수하자는 결연한 의지를 담고자 했다”고 밝혔다. 엄태준 시장은 “이천오층석탑은 일본이 아닌 바로 이곳, 이천에 있을 때 가장 어울리고,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모형탑이 세워졌다고 말했다. 글·사진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봄밤에 즐기는 고궁의 정취… ‘경복궁 별빛야행’ 24일 예매 시작

    봄밤에 즐기는 고궁의 정취… ‘경복궁 별빛야행’ 24일 예매 시작

    봄밤 궁궐의 고즈넉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경복궁 별빛야행’ 상반기 행사가 새달 8일 시작된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와 한국문화재재단은 새달 8일부터 19일, 6월 5일부터 15일까지 ‘경복궁 별빛야행’을 진행한다고 22일 밝혔다. ‘경복궁 별빛야행’은 궁중음식 체험과 전통공연, 야간 탐방을 결합한 프로그램이다. 관람객들은 홍례문 앞에 모여 입장한 후 동궁 권역인 자선당과 비현각을 거쳐 소주방에서 왕과 왕비의 일상식인 12첩 반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도슭수라상’을 맛본다. 올해는 도슭수라상 외에도 별도로 제작한 유기에 왕실 특별식을 담은 ‘꽃별찬’을 제공한다. 상반기 메뉴는 전복을 양념 간장에 조려서 만든 궁중 보양음식인 전복초다. 이어 교태전에서 세종과 소헌왕후의 사랑을 소재로 제작한 샌드아트 영상을 감상하고 집경당과 함화당 내부를 관람한다. 또 평소에는 관람이 제한되는 경회루 누각에서 국악 독주를 감상하는 기회를 누릴 수 있다. 경복궁 휴궁일인 화요일을 제외하고 총 20회에 걸쳐 진행되는 이번 행사는 회당 60명씩 참가할 수 있다. 사전예매는 옥션티켓(ticket.acution.co.kr)에서 오는 24일 오후 2시부터 하면 된다. 만 65세 이상 어르신·장애인·국가유공자는 전화예매(1566-1369)도 할 수 있다. 참가비는 5만원.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경복궁 현판 오자 10년간 방치

    경복궁 현판 오자 10년간 방치

    한자 표기가 잘못된 경복궁 현판 3개가 10년째 오자(誤字) 그대로 방치돼 왔던 것으로 확인됐다. 18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경복궁 교태전 권역의 ‘보선당’과 함원전 권역의 ‘자선당’, ‘융화당’ 현판은 19세기 말 제작된 경복궁 평면배치도인 ‘북궐도형’(北闕圖形), 조선 시대 문헌 ‘궁궐지’(宮闕志), ‘일성록’(日省錄) 등과 대조했을 때 글자에 오류가 있었다. 이들 현판은 모두 1995년 만들어졌다. 문화재청은 2006년 연세대 국학연구원으로부터 제출받은 ‘고궁현판 학술조사 연구용역’ 보고서를 통해 오류를 파악하고서도 10년간 그대로 놔뒀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교태전 남쪽 행각의 서편에 있는 보선당(왼쪽·補宣堂) 현판은 본래 ‘보의당’(補宜堂)이다. 보의는 ‘천지의 마땅함을 보상하다’라는 뜻으로 주역의 ‘보상천지지의’(補相天地之宜)에서 왔다. 함원전 서쪽 행각에 있는 자선당(가운데·資善堂)과 융화당(오른쪽·隆化堂)은 각각 자안당(資安堂)과 융화당(隆和堂)이 올바른 표기다. 보고서는 함원전 권역의 두 현판에 대해 1915년 이후 출판된 자료에 나오는 명칭으로 현판을 새로 교체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지적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오류가 확실하다고 판단되는 현판은 교체할 계획”이라며 “수리할 시점이 되면 고증조사와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바꾸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경복궁 현판 3개, 글자 오류 10년째 방치

    경복궁 현판 3개, 글자 오류 10년째 방치

     한자 표기가 잘못된 경복궁 현판 3개가 10년째 오자(誤字) 그대로 방치돼 왔던 것으로 확인됐다. 18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경복궁 교태전 권역의 ‘보선당’과 함원전 권역의 ‘자선당’, ‘융화당’ 현판은 19세기 말 제작된 경복궁 평면배치도인 ‘북궐도형’(北闕圖形), 조선 시대 문헌 ‘궁궐지’(宮闕志), ‘일성록’(日省錄) 등과 대조했을 때 글자에 오류가 있었다. 이들 현판은 모두 1995년 만들어졌다. 문화재청은 2006년 연세대 국학연구원으로부터 제출받은 ‘고궁현판 학술조사 연구용역’ 보고서를 통해 오류를 파악하고서도 10년간 그대로 놔뒀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교태전 남쪽 행각의 서편에 있는 보선당(輔宣堂) 현판은 본래 ‘보의당’(輔宜堂)이다. 보의는 ‘천지의 마땅함을 보상하다’라는 뜻으로 주역의 ‘보상천지지의’(輔相天地之宜)에서 왔다. 함원전 서쪽 행각에 있는 자선당(資善堂)과 융화당(隆化堂)은 각각 자안당(資安堂)과 융화당(隆和堂)이 올바른 표기다.  보고서는 함원전 권역의 두 현판에 대해 1915년 이후 출판된 자료에 나오는 명칭으로 현판을 새로 교체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지적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오류가 확실하다고 판단되는 현판은 교체할 계획”이라며 “수리할 시점이 되면 고증조사와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바꾸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경복궁 현판 3개에 오류...문화재청 발칵

    경복궁 현판 3개에 오류...문화재청 발칵

    조선의 대표적 법궁인 경복궁의 현판 가운데 3개는 색상과 형태가 아니라 글자 자체가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18일 문화재청에 따르면 경복궁 교태전 권역의 ‘보선당’과 함원전 권역의 ‘자선당’, ‘융화당’ 현판은 19세기 말에 제작된 경복궁 평면배치도인 ‘북궐도형’(北闕圖形), 조선시대 문헌 ‘궁궐지’(宮闕志), ‘일성록’(日省錄) 등과 대조했을 때 글자에 오류가 있었다. 이들 현판은 모두 199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문화재청이 지난 2006년 연세대 국학연구원으로부터 제출받은 ‘고궁현판 학술조사 연구용역’ 보고서에 오류가 적시됐음에도 10년간 방치돼 있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교태전 남쪽 행각의 서편에 있는 보선당(輔宣堂) 현판은 본래 ‘보의당’(輔宜堂)이다. 보의는 ‘천지의 마땅함을 보상하다’는 뜻으로 주역의 ‘보상천지지의’(輔相天地之宜)에서 왔다. 또 함원전 서쪽 행각에 있는 자선당(資善堂)과 융화당(隆化堂)은 각각 자안당(資安堂)과 융화당(隆和堂)이 올바른 이름이다. 특히 자선당은 경복궁 함원전의 행각이 아니라 세자와 세자빈이 머물던 동궁 건물이다.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자선당은 1999년 복원돼 경복궁에는 한자가 똑같은 ‘자선당’ 현판이 두 개 존재하는 상황이다. 보고서는 함원전 권역의 두 현판에 대해 “1915년 이후 출판된 자료에 나오는 명칭으로 현판을 새로 교체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지적했다. 2006년 용역조사를 주도한 김영봉 연세대 강사는 “보의당과 보선당은 ‘의’자와 ‘선’자가 비슷해 헷갈린 듯하고, 자선당과 융화당은 잘못된 일제강점기 자료를 참고해 오류가 발생한 것 같다”며 “1995년 현판 복원 당시 북궐도형과 일성록을 확인하지 않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편 글자에 오류가 있는 세 현판은 문화재청이 지난해 다시 용역 형태로 진행한 ‘궁궐현판 고증조사’에서는 문제 현판으로 분류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를 수행한 역사건축기술연구소는 사료와 20세기 초반에 촬영된 사진 등을 근거로 바탕색, 글자색, 형태, 단청과 장식, 게시 위치가 잘못된 현판을 가려냈으나, 세 현판은 이에 포함되지 않았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오류가 확실하다고 판단되는 현판은 교체할 계획”이라며 “수리할 시점이 되면 고증조사와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바꾸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격동의 한·일 70년] 문화재 반환

    [격동의 한·일 70년] 문화재 반환

    1993년 한·일 양국이 발칵 뒤집어졌다. 경복궁 안에 있어야 할 자선당 유구(遺構, 옛 건축물의 흔적)가 일본 도쿄의 오쿠라호텔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김정동 목원대 명예교수가 찾아냈다. 김 교수는 “건축문화재는 우리뿐 아니라 일본도 몰랐다. 1965년 한·일협정 때도 논의되지 않았다. 건물까지 뜯어서 갖고 갔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빈이 머물던 전각이다. 일본은 1914년 식민통치 홍보 박물관인 ‘조선총독부미술관’을 세우기 위해 자선당을 철거했다. 당시 작업을 맡았던 오쿠라 기하치로는 데라우치 총독에게 자선당 반출을 부탁, 일본으로 뜯어갔다. 조선관으로 개명, 오쿠라슈코칸 전시실로 사용했다. 1923년 간토대지진 때 소실됐다. 기단, 주춧돌, 계단 등 석재들만이 남아 수십년간 방치됐다. 자선당 유구는 반출 81년 만인 1995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경복궁에서 뜯어간 가마쿠라의 ‘관월당’, 벽제 또는 경복궁에서 옮겨간 것으로 알려진 이와쿠니의 ‘정자’, 이천에서 가져간 오쿠라호텔 경내 이천오층석탑 등 일본에는 아직 국내의 건축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김 교수는 “관월당, 정자 등은 일본에서 돌려줄 것처럼 얘기했는데 한·일관계가 경색되면서 대화 채널이 완전히 끊어졌다. 일본 측은 예민한 한·일문제 때문에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다고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김 교수는 정년퇴직 뒤 우리근대건축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건축문화재 반환에 힘을 쏟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된 한국 문화재는 공식 확인된 것만 6만 7000여점에 달한다. 개인 소장 등 드러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20만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본 소재 우리 문화재는 김 교수 사례처럼 민간의 노력으로 돌아온 게 많다. ‘김시민 선무공신교서’는 시민 모금으로 되찾았다. 1592년 10월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진주목사 김시민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604년 전공 및 김시민과 그의 가족에게 내리는 포상 내용을 적은 임금의 글이다. 2005년 일본 도쿄 고서점가 경매에서 이 교서를 낙찰받은 한 일본인 고서적상이 재판매하려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국민 모금이 시작됐다. 2006년 7월 1400만엔(당시 환율로 약 1억 2000만원)을 주고 찾아왔다. 정부 협상으로 돌아온 문화재도 적지 않다. 1965년 한·일협정 부속협정에 의거해 고고유물, 도서, 도자기 등 1326점이 돌아왔다.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을 앞두고 일본은 ‘외교적 제스처’로 1958년 4월 경남 창녕 고분군 출토 유물 106점을 반환했다. 1991년에는 한·일 정부 간 협상에 의해 복식류, 장식물, 장신구 등 ‘영친왕 일가 복식’ 333점이 환수됐다. 이는 이방자 여사가 소장했다 1957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2002년 이토 히로부미가 무단으로 일본 황실로 반출했던 규장각 도서 숫자를 기재한 문서철이 발견됐다. 한·일협정 때 반환된 90책을 제외한 900여책에 대해 반환요구 움직임이 일었다. 2010년 11월 ‘도서에 관한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국 정부 간 협정’에 의거 이듬해 일본 궁내청에서 소장하고 있던 900여책과 조선왕실의궤 등 1205책이 반환됐다. 민관 협력도 빼놓을 수 없다. 북관대첩비는 남북 합작으로 반환이 이뤄졌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정문부가 함경도 길주, 쌍포, 단천 등지에서 왜군을 격퇴한 업적을 기리는 비로, 숙종 때 세워졌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무단 반출해 야스쿠니 신사에 세워 놨다. 일본 유학생과 학자에 의해 존재가 국내에 알려지면서 정부와 남북 불교단체가 환수에 앞장섰다. 2005년 국내에 돌아온 뒤 이듬해 북한으로 보내져 본래 자리에 세워졌다. 2006년에는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가운데 47책이 되돌아왔다. 일제강점기 조선 연구를 명목으로 조선총독부를 통해 도쿄대학으로 무단 반출됐다. 1923년 간토대지진 때 대부분 소실됐다. 혜문 스님이 2004년 도쿄대학 도서관 귀중본 서고에서 발견, 반환 운동을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에 되돌아온 문화재도 있다. 국외 유출 문화재의 첫 환수 목록에 올라 있는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등이다. 현재 국내 민간단체를 중심으로 후쿠이현 조구진자(常宮神社) 소장 신라종, 도쿄 오쿠라호텔 경내 이천오층석탑,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컬렉션 등 반환 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문화재가 반출된 지 100년이 넘으면서 일본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들의 상태가 나빠지고 있다는 점이다. 의류, 문서, 목재 건축물 같은 건 보존이 시급하다. 조선왕조 도서 환수 공로로 훈장을 받은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 원장은 “어떤 문화재가 어디 있는지 실태부터 파악하는 게 급선무”라며 “실태도 모른 채 반환 캠페인을 앞세워선 안 된다”고 조언했다.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8·15 65주년] 훼손 궁궐 제모습 찾기 어디까지

    원형 복원된 광화문이 15일 일반인에게 공개되면 1990년부터 진행돼 온 경복궁 1차 복원사업은 마무리된다. 경복궁 복원사업은 일제 강점기에 변형, 훼손된 경복궁을 원형대로 복원해 민족 정기를 회복하고 문화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한편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조성하려는 목표로 시작됐다. 1차 복원사업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거나 훼손된 전각을 새로 지어 정전(正殿), 편전(便殿), 침전(寢殿), 동궁(東宮), 빈전(殯殿) 등으로 이루어진 기본 궁제를 정비하는 것이었다. 1990~1995년 강녕전 등 임금과 왕비의 처소가 있는 침전 권역이 복원됐고, 1995년 동궁 권역 복원을 위해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됐다. 1999년에는 세자의 거처인 동궁 자선당 영역이 복원됐고, 2000년대 들어 흥례문, 건청궁, 태원전 등이 되살아났다. 20년간 총 89동을 복원했다. 일제의 철거를 피해 남아 있던 기존 건물 36동을 포함하면 총 125동으로, 고종 당시 500여동의 25% 수준에 도달했다. 1571억원의 사업비가 들었다. 경복궁은 내년부터 2030년까지 2차 복원 사업이 추진된다. 총 540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궐내 각사와 동궁 권역 등을 중심으로 6개 권역에서 254동의 건물을 복원한다는 계획이다. 경희궁은 1980년 9월 궁터가 사적으로 지정됐고, 1985년에는 공원으로 지정됐다.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과 함께 서울시립박물관과 미술관을 짓기로 하고 경희궁터의 유구 발굴 조사를 실시했다. 발굴 결과와 문헌 고증을 거쳐 1987년 흥화문, 1991년 숭정전, 1998년 자정전과 회랑, 2000년 태령전과 그 일곽을 각각 복원했다. 다만 흥화문은 원래 있던 자리에 구세군회관이 자리해 서쪽으로 100여m 옮겨 복원했다. 창덕궁 인정전 행각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뒤 일제가 복원하면서 전통 궁궐 건축 양식으로 복원하지 않고 트러스 구조 위에 일본식 널개판과 루핑을 깔고 그 위에 한식 기와를 올렸다. 겉으로는 우리 전통 궁궐의 모습으로 보이나 내부 구조는 서구식이다. 정부는 1990년부터 1999년까지 대규모 복원 사업을 벌여 돈화문 월대, 낙선재 일대, 진선문, 숙장문 등을 복원했다. 창덕궁과 종묘는 원래 담장을 사이에 두고 하나로 이어져 있었으나 1931년 일제가 율곡로를 개설하면서 분리됐다. 서울시는 10월부터 이 구간의 일부를 지하화하는 등 복원계획을 추진 중이다. 덕수궁은 석조전의 내부 원형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2012년 10월까지 고종 당시 원형 그대로 복원해 ‘대한제국 역사관’(가칭)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일제강점기에 최대의 행락지였고 광복 후에도 유원지로 전락했던 창경원은 가장 먼저 복원공사가 이뤄져 1983년 12월 창경궁으로 환원됐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수난의 우리 문화재를 지킨 사람들

    수난의 우리 문화재를 지킨 사람들

    “3∼4일 전 무기를 가진 일본인 130∼200명가량이 급습해 와서, 관리자와 주민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탑을 해체하여 개성철도역으로 운반하고, 다시 부산으로 실어갔다고 한다.…우리 인민이 그 만행과 모욕에 능히 항거하여 일어설 것임은 이미 스스로 표시하였다. 만약 다나카 자작이 그 귀중한 석탑의 불법반출을 기어이 해 간다면 그가 능히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1907년 3월7일자 대한매일신보는 논설로 일본의 궁내대신 다나카가 조선에 특사로 왔다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에 있는 경천사터십층석탑을 빼앗아가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이렇게 경고했다. 서울신문의 전신으로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이 발행인으로 있던 대한매일신보는 이후 6월5일자까지 무려 9차례에 걸쳐 다나카의 만행을 고발하는 기사와 논설을 실었다. 또 미국인 호머 헐버트는 이듬해 일본의 ‘재팬 메일’과 ‘재팬 크로니클’ 등에 관련 내용을 기고해 비난여론을 들끓게 했고, 결국 일본은 1918년 11월 이 탑을 반환했다. 이 탑은 경복궁을 거쳐 지금은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문화재청이 ‘수난의 문화재, 이를 지켜낸 인물 이야기´(눌와 펴냄)를 내놓았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6·25전쟁 등 긴박한 시대적 상황에서도 민족 문화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자긍심으로 문화재를 지킨 13건의 사례를 담았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8월 팔만대장경이 있는 합천 해인사에서는 500명 남짓한 낙오 인민군이 게릴라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장지량 당시 제1전투비행단 중령은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작전명령을 받고 미 고문단을 설득하면서 시간을 끄는 지혜를 발휘하여 해인사를 지켜낼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문화유산을 수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국보 제70호 훈민정음을 비롯한 수천점의 문화재를 모아 오늘날의 간송미술관을 이룩한 간송 전형필도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뒤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다가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과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 간 강화도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낸 재불서지학자 박병선 박사도 빼놓을 수 없다. 독일의 오틸리엔 수도원에 있던 겸재화첩을 국내에 돌아오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성 베네딕도수도원의 선지훈 신부와 경복궁 자선당 유구를 일본 도쿄의 오쿠라 호텔 정원에서 발견하여 반환받도록 한 김정동 목원대 건축과 교수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 문화재청은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과 김정동 목원대 교수, 북관대첩비의 반환에 힘쓴 초산 스님 등 생존인물은 물론 돌아가신 분의 후손을 5일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초청하여 감사장을 전달하고 노고를 위로하기로 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광화문 복원 진두지휘 신응수 대목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광화문 복원 진두지휘 신응수 대목장

    ‘어라, 광화문이 사라졌네!’‘그럼, 언제 다시 나타나지?’ 서울 도심의 한복판, 세종로에 왔다가 광화문이 없어진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이곳을 지날 때면 저절로 고개를 돌려 깜쪽같이 사라진 광화문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한번쯤 해봤을 터이다. 지난 9월28일자 서울신문에는 훈훈한 기사가 단독보도돼 눈길을 끌었다. 광화문 복원을 총지휘할 도편수 자리를 놓고 벌이던 전통 건축분야의 양대 산맥의 한판 승부에 대한 내용이다. 형님뻘인 전흥수(70) 대목장이 신응수(66) 대목장에게 도편수 자리를 아름답게 양보했다는 것이다. 전 대목장은 추석 연휴 직전에 신 대목장과 만나 “우리끼리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은 누워서 침뱉기가 아니냐.”면서 물러서겠다는 뜻을 알렸다. 신 대목장은 전 대목장의 어려운 결정에 고마움을 표시했음은 물론이다. 특히 전 대목장은 “그 사람(신 대목장)이라면 광화문 복원을 제대로 해낼 것”이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로써 광화문 복원공사의 도편수(목수 우두머리) 자리는 신 대목장이 맡게 됐다. ●18년간 경복궁 복원사업 이끌어 신 대목장은 1991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보유자로 지정됐으며 지금까지 18년동안 경복궁 복원사업을 대부분 진두지휘해 왔다. 또한 앞으로 2년동안 광화문 복원까지 맡게 됐으니 천년궁궐 재현의 대역사는 사실상 그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서울 경복궁 함화당 복원공사 현장에서 신 대목장을 만났다. 명함을 내밀었더니 돌아온 명함이 특이하다. 근정전 사진 위에 ‘성재(誠齋) 申鷹秀’라고 적혀 있었다. 하늘을 나는 매응(鷹)? 의아해 하자 “향나무 숲에서 매가 날아오르는 어머님 태몽 때문에 매응자로 했고 성재는 경복궁 복원사업 초창기때 한 서예가 선생이 집을 정성스레 잘 지으라며 지어준 호”라고 설명했다. 먼저 전 대목장과 만남에 대한 얘기를 슬쩍 꺼냈더니 “그 분과는 친하게 지내고 있다.(전 대목장은)기능인들이 화합이 잘 안되는데 그러면 되겠느냐고 하셨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광화문 복원공사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산림청과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아 국유림과 사유림 등에서 적합한 목재를 고르고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아마 동해안쪽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적송)가 선택될 것 같으며 천년궁궐을 짓기 위해서는 좋은 나무가 필수조건”이라고 강조했다. 대들보인 경우 소나무 수령이 300∼400년정도 돼야 한다는 그는 “일제때 좋은 나무들이 마구 남벌돼 나무 구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높이 18m, 직경 70㎝이상의 적송을 찾기가 녹록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또 “올 겨울부터 목수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이전에 나무를 구입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궁궐 복원 공사에는 뭐니뭐니해도 철저한 고증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광화문 복원공사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목수 30여명이 투입된다고 밝혔다. 현재 경복궁 복원공사 사업은 모두 5단계 중 4단계를 마친 상태. 이 가운데 광화문 복원사업이 최종단계로 경복궁 재현의 화룡점정인 셈이다. 그가 맡은 경복궁 복원사업으로는 현재 진행 중인 함화당을 비롯해 ‘침전지역’‘동궁지역’‘태원전 권역’‘건청궁’‘근정전’ 등이다. 광화문의 경우 본문 외에 군사방, 수문장청, 영군직소 등이 포함된다.2009년까지 목재만 450만재, 기와 150만장, 비용 1789억원이 투입되며 전각 등 총 93동이 복원되는 대단위 공사다. 신 대목장 개인적으로는 꼬박 20년을 경복궁에서 출퇴근하게 되는데 그 대미를 광화문으로 장식하게 된다. 그는 “문무백관의 조회와 국가의식을 거행했던 근정전은 우리 고건축의 백미”라고 극찬하면서 해체·복원하는 과정에서 140년전의 건축기법을 완전히 이해하게 됐고 또한 광화문도 이와 비슷한 건축기법이라고 귀띔했다. 근정전 복원은 2000년부터 3년 10개월 걸렸다. “광화문 복원공사는 예정된 2009년 말 이전에 끝낼 수 있습니다. 목조는 잘 관리만 하면 천년수명이기 때문에 광화문 또한 이제 새로운 천년을 시작한다고 볼 수 있지요.” 그는 중졸학력으로 당대 최고의 목수자리까지 올랐다. 올해로 꼭 50년째 목수인생을 맞고 있는 그는 1942년 충북 청원군 오창면에서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병천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서울로 올라와 신강수 한테 망치질을 배우며 일찍 밥벌이 전선에 뛰어들었다. 말 그대로 먹고 살 수 있는 기술 한가지만 배우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것. 그러다보니 목수들의 양말 세탁 등 온갖 심부름과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들보용은 소나무 수령 300~400년 돼야 그러던 1960년 명인 이광규의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이때 봉원사 요사 및 종각 공사에 참여했다. 이듬해에는 스승의 스승 조원재를 만나 남대문 중수 공사에 동참했다. 1965년 군복무를 마친 후에는 오대산 월정사 대웅전, 진주성 촉성문, 서울 숭인동 청룡사 대웅전, 용인 호암장 신축 공사 등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대목장의 길로 접어들었다. 1975년 수원성 장안문 복원공사 때에는 도편수로 독립하면서 1983년까지 밀양군 무안면 홍제사 법당, 서울 삼청동 총리공간, 서울 필동 한국의 집, 경주 안압지 1∼3건물, 단양 구인사 사천왕문, 부여 삼충사 영당 및 내외삼문, 울산 동축사 대웅전 및 산신각, 유성 현충원 현충문, 부여 무량사 극락전 보수 공사 등을 맡으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중졸 학력으로 50년째 목수… 당대 최고 도편수 자리에 1982년 청와대 영빈관인 상춘재를 신축할 때 도편수를 맡았다. 한겨울에 30여명의 목수들과 함께 새벽 여섯시에 청와대로 출근,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부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웠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상춘재는 4개월 만에 완공됐다. 이와 관련 “아마 가장 빨리 지은 한옥이 아니겠느냐.”고 술회했다. 이 같은 인연이 있어서인지 1989년 청와대 대통령관저의 신축공사까지 맡게 된다. 그는 평소 “좋은 적송을 구하는 사람이 좋은 건축을 하는 것”이라고 늘 주장해왔다.1980년대 초반 강원도의 적송 많은 산 50만 평이 매물로 나오자 주저 없이 사들여 좋은 재료를 현장에 공급하면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바탕이 된다. 대한민국 최고의 명품인 경복궁 보수공사의 도편수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경복궁 복원공사가 다 마무리되면 평소의 꿈인 우리나라 전통건축 박물관을 지을 예정이다. 슬하에 2남3녀를 두었으며 큰아들이 목재소를 운영하면서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신 대목장은 우리나라 고건축의 대가인 조원재, 이광규로 이어지는 대목장 계보를 잇고 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그가 걸어온 길 ▲1942년 충북 청원 출생 ▲58년 충남 병천중학교 졸업 ▲58∼60년 신강수, 박광석 문하에서 한옥 주택 신축 공사 ▲75∼78년 수원성곽 장안물, 창용문 복원 공사(도편수 신응수) ▲79년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 신축 공사 ▲82∼83년 청와대 상춘재 신축 공사 ▲88년 경복궁 만춘전 복원 공사 ▲89∼90년 청와대 대통령관저 신축 공사 ▲91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 74호 대목장 보유자 ▲91∼95년 경복궁 침전지역 복원 공사(강녕전, 교태전, 경성전, 연생전, 웅지당, 연길당, 함원전, 흠경각, 동서행각, 건순각, 양의문, 함흥각 등) ▲96∼98년 경복궁 동궁지역 자선당, 비현각, 회랑 복원 공사 ▲97∼99년 경복궁 자경전, 창덕궁 돈화문 보수 공사, 경복궁 경회루 보수 공사 ▲97∼2001년 경복궁 흥례문 권역 복원 공사(흥례문, 유화문 및 화랑) ▲2000∼04년 창덕궁 규장각 옥당, 약방, 영의사, 검서청, 양지당, 봉모당 복원 공사, 경복궁 근정전 보수공사 ▲04∼현재 경복궁 건청궁(장안당, 곤녕합, 복수당 外 13동) 복원공사 # 수상 만해예술상 수상(99년), 옥관문화훈장(2002년) 등 # 주요 저서 ‘천년 궁궐을 짓는다’‘목수’‘경복궁 근정전’ 등
  • [발언대] 충무공의 마음/오창수 전주보훈지청 보상팀장

    지난 토요일(28일)은 충무공 탄신일이었다. 올해로 462주년이 됐다. 서울 건천동 을지로 3가 인근 명보극장 앞에는 표지석이 있다. 충무공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조그마한 돌이다. 눈여겨보는 이는 드물다. 오히려 지나는 이들이 버린 휴지 등으로 어지럽다. 부근에서 신문가판을 하는 이종임(71) 할머니가 20여년 전부터 날마다 주변을 정갈하게 청소하고 있다. 충무공 전문가인 문학평론가 이유식 청다한민족문학연구소장은 충무공의 관직생활을 외관직과 미관말직으로 요약했다. 무관이라 그랬던 측면도 있지만 평생을 거의 외관직에 떠돌아 다녔다.32세때인 1576년 함경도 삼수 동구비보의 권관(종9품)이 된 후 1598년 삼도수군통제사로 노량해전에서 순직할 때까지 22년 관직생활중 2년반 정도만 경관직(京官職)이었다. 전라좌수사 시절 기록이 있다. 그는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장교로 돌았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일곱에 제독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유식은 만약 임진왜란때 충무공이 경관직이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고 했다. 난중일기 중간중간에 충무공이 집안문제로 고민하는 대목이 나온다. 식은 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며 앓아 누운 대목도 있다. 가정적으로는 여수 진남관 지근에 자선당을 지어 모친을 모시고, 아산 선영과 가족의 안부도 사흘거리로 연락한다. 선영을 중히 여기는 당시의 풍습 때문이라고는 하나 적에 노출되어 있는 아산 집에 부인과 아들들을 둔 것은 정말 아쉬운 대목이다. 충무공은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순직하기 1년전인 1597년 10월 아산 고향의 한 집안이 적의 공격을 받아 잿더미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또 막내 아들 면이 배를 타고 올라가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한다. 선영과 가족의 안부 등으로 항상 노심초사하면서도, 왼손으로는 허리춤을 잡고 싸운 충무공. 가정의 달 5월을 앞두고 그의 마음을 모두 헤아려 봤으면 한다. 오창수 전주보훈지청 보상팀장
  • ‘조선의 正宮’ 복원 어디까지/ 경복궁 살아난다

    경복궁이 살아나고 있다.외세에 의해 철저히 훼손됐던 조선의 정궁(正宮)이 12년에 걸친 복원사업으로 제모습을 서서히 되찾고 있는 것이다. 경복궁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무슨 공사를 일년 내내하나.’하고 무심코 지나치곤 하지만 그곳은 바로 조선 고종 때에 지은 ‘제2의 경복궁 중건’의 현장이다.그때처럼 국력을 기울일 정도의 국가적 역사(役事)는 아니지만 상처받은 민족적 자존심을 되찾는 정신사적 의미가 크다. 지난 90년부터 2009년까지 20년에 걸쳐 진행되는 경복궁복원사업의 기본 방향은 경복궁의 중심건물인 기본 궁제(宮制)를 갖추는 것.복원의 기준 시점은 경복궁을 마지막으로 중건한 해인 고종 25년(1888년)이다. 경복궁은 조선시대의 가장 중심이 되는 궁,즉 정궁으로북궐(北闕)로도 불렸으며,대원군에 의해 중건됐을 때 330여 건물,7000여칸의 전각이 늘어서 있었다. 정부는 일제에 의해 훼손,변형된 경복궁을 복원·정비하기 위해 5대 권역으로 나누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왕과 왕비가 기거하던 강령전,교태전 등 침전(寢殿) 권역은 95년,왕세자가 거처하던 자선당과 비현각 등 동궁 권역은 99년 각각 복원작업을 끝냈다. 96년부터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된 자리에 흥례문권역 복원공사에 착수,지난해 흥례문과 유화문,주변 행각(行閣)들,어구 및 영제교 등을 복원·완료했다.흥례문 복원으로 궁궐의 기본 궁제인 삼문(광화문-흥례문-근정문)을 갖추게 되고,삼문이 경복궁의 정전(正殿)인 근정전으로 이어져 왕궁의 제도를 갖추게 되었다.흥례문 권역내의 넓은 공간은 왕의 즉위식 및 왕비 책봉,세자 책봉,사신 환영 및 환송 행사 등 국가의 중대행사를 거행한 곳이다. 궁궐에서 상을 치르던 태원전 권역은 지난해 복원사업에들어가 한창 공사가 진행중이다.이곳에 이어 마지막 단계로 진행될 광화문 권역 복원이 오는 2009년 완료되면 경복궁은 129동의 건축물을 갖추게 된다.고종 당시 330여동에비하면 40%에 불과하지만,정궁으로서의 옛모습은 어느 정도 되찾게 된다. 경복궁의 완전한 복원을 위해 현재 경복궁 터 서쪽과 북쪽에 자리잡은 국립중앙박물관 및 국립민속박물관 등도 2009년까지 새 자리를 찾아 옮겨가게 된다. 이번 복원공사에서 목수일을 총괄하는 도편수 역할을 맡은 이는 중요 무형문화재 대목장 보유자 신응수(61)씨.신대목의 지휘 아래 목수들과 단청장,소목장,미장공 등 수백명이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신 대목은 고종 때 경복궁 중건을 맡은 최원식 대목의 몇대를 이은 제자다.그의 스승인 이광규 대목이 서울 남대문 해체 및 중수공사의 도편수로 활약한 조원재 대목의 제자이고,조 대목의 스승이 바로 최원식 대목이다. 최원식은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호군의 벼슬을 지내면서 경복궁 중건의 목수일을 총지휘했다.구한말경복궁을 중건한 목수의 장인정신이 100년을 뛰어넘어 제자를 통해 다시 살아나 궁궐을 세운다는 사실도 새삼 의미를 더하는 대목이다. 임창용기자 sdragon@
  • 경복궁 복원계획 어떻게

    26일의 흥례문(興禮門)복원 기념낙성식과 더불어 경복궁복원사업이 새 차원으로 올라선다.흥례문 권역의 복원은 경복궁 복원의 3단계 사업으로 실행되었지만 이 권역의 복원완료는 보다 큰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일제가 1916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던 곳이고 일반 건축과 차별되는 왕궁양식을 어느 곳보다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90년 침전·동궁·흥례문·태원전 및 광화문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시작한 경복궁 복원사업은 총1,789억원을 투입하여 2009년까지 추진하는 대역사다.경복궁 복원은 단순한왕궁 복원이 아니라 서울 한복판에 민족정기와 자존심을 다시 세우는 역사적 작업으로 받아들여져 큰 관심을 모았다. 1단계 사업은 침전 권역으로 95년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과 중전의 침전 교태전(交泰殿) 등 12동(794평)이 복원되었다.다음이 왕자들이 살던 동궁 권역으로 94년부터 5년 동안 자선당 등 18동(352평)과 건춘문(建春門) 등 고건물 5동이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이번에 낙성하는 흥례문 권역은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로 96년 복권공사를 시작했다.1년 앞선 95년 11월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돼 복원의 터가 닦여진 뒤 98년 말 흥례문이 복원되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남은 곳은 왕의 비빈들이 살던 태원전(太元殿) 권역과 광화문(光化門) 및 기타 권역으로 1,105억원이 투입된다. 경복궁 북서쪽 태원전 권역은 2003년까지 25동(469평)을복원하고 주변을 정비할 예정이다.이 지역에 주둔하던 수도방위사령부 30경비단은 96년 이전했다. 마지막 단계인 광화문 및 기타 권역은 2009년 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광화문을 현 위치에 목조건물로 다시 짓고 방향도 원래대로 돌릴 계획이다.동남쪽으로 32개동(1,091평)의 건물을 복원하고 집옥재등 12동을 보수하고 주변을 정비한다. 경복궁 복원사업이 예정대로 끝나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대원군과 고종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경복궁을 중건할 당시에는 건물이 330여 동(1만5,600여평)에 달했으나 2009년 복원사업 완료 시의 건물은 129동(6,180평)에 그쳐 40%만이 복원되는 셈이다.그러나 90년 복원사업 직전에는 단 36동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종수기자 vielee@
  • ‘주제가 있는 답사기’출간 바람

    ◎일본을 걷는다­일이 뺏어간 우리문화재/나의 문화유산3­4개 문화권에 서린 미학/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쓰여지지 않는 문화’ 조명 ‘주제’가 있는 답사기가 여름 독서계를 풍성하게 하고 있다.최근 출간된 중국 선불교 답사기 ‘밥그릇이나 씻어라’‘한국의 묘지기행’ 등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가운데 세권의 역사·문화답사기가 새로 나왔다.‘일본을 걷는다’(한양출판)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3’(창작과비평사),‘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해냄). ‘일본을 걷는다’는 건축학자인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일본의 도도부현을 직접 돌아다니며 쓴 역사체험기다.모두 3부로 1부는 일본이 탈취해간 우리 문화재에 관한 기록을 담았다.조선시대 왕세자의 거처였던 자선당을 비롯,평양팔경 가운데 하나인 애련당,지금도 남아있는 관월당,데라우치 마사다케(사내정의) 총독이 탈취해간 박물관을 만들 정도로 많은 문화재들,조선을 사랑한 인사로 알려진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가 수집해간 문화재로 가득한 일본 민예관 등을 소개한다.2·3부에서는 조선침략의 자취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현장들과 강제로 끌려가 노역에 동원된 조선인들의 한이 서린 장소들을 찾아간다.게이오 의숙,도쿄대학,오이소(대기)의 통감도,백제인이 지은 오사카의 진자(신사),조선총독부 청사를 설계한 독일인 기사 게오르그 데 라란데,일본의 기차역들,히비야(일비곡)공원,미츠비시 재벌의 상징 마루노 우치 빌딩,일본 국회의사당 등 일제침략의 현장을 낱낱이 살핀다. 영남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3’는 서산 마애삼존불로부터 출발해 능산리 고분군이 있는 부여에서 끝난다.지난 93년 발간돼 인문학 책으로는 드물게 1백만부이상 팔려나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권에서 문화유산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강조했던 지은이는 2권에서는 문화유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보여줬다.이번의 3권에서는 우리 문화유산의 미학을 이야기한다.이 책은 답사장소를 네개의 문화권으로 나눠 접근한다.부여 공주 익산 서울 등지에 남아있는 백제 문화유산의 미학,경주 불국사가 보여주는 통일신라의 ‘조화적 이상미’,안동문화권에 서려있는 조선시대 양반문화의 미학,그리고 섬진강·지리산변의 옛 절집들에 녹아있는 산사의 미학 등을 다룬다. ‘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은 그의 또다른 저서 ‘우리문화의 수수께끼’와 맥을 같이 하는 인문기행서.‘어디를 가면 무엇을 볼 수 있다’는 식의 답사기를 지양했다는 지은이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고려청자처럼 보란듯이 번듯한 문화유산이 아니라 ‘쓰여지지 않은 문화’‘이름표 없는 문화유산’이다.외면도의 당숲에서부터 수원 화성에 이르기까지의 여로가 담겼다.
  • 고려석탑 등 한국문화재 11점/일 도쿄 오쿠라집고관서 확인

    ◎일 한글잡지 「월간아리랑」 보도 【도쿄=강석진특파원】 일본 도쿄시내에서 고려시대 초기 5층석탑 등 한국문화재가 대량 확인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도쿄에서 발행되는 한글잡지 월간 아리랑은 1월호 표지스토리에서 오쿠라호텔옆 오쿠라 슈코칸(집고관) 주위에 충주 탄금대 부근 정토사에서 가져간 고려시대 초기(10∼11세기) 5층석탑 등 11점의 석재문화재가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확인된 문화재가운데는 이밖에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사에서 가져간 고려중기(12∼13세기) 팔각5층석탑과 조선시대 석인상4점,화표 4점,석양 등이다. 이들 문화재는 오쿠라재벌총수이던 오쿠라 기하치로(대창희팔낭)가 일제시대 한국문화재를 대량수집하면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월간 아리랑대표 김종영씨는 『보존상태가 좋을뿐 아니라 고려시대 초기 석탑 등 시기적으로도 문화재가치가 높은 것같다』면서 『옥외에 있는 이들 문화재뿐 아니라 슈코칸 내부에도 한국문화재가 다량 소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한편 오쿠라호텔측은 경복궁에서 가져간 자선당을 최근 삼성문화재단을 통해 한국에 돌려보낸 바 있다.
  • 평화의 문화재산과 약탈문화재/황규호 문화부부국장급(데스크 시각)

    우리 문화재에 관한 두가지 뉴스가 6일 밤 베를린과 도쿄로부터 날아들었다(서울신문 7일자 1·10면).베를린에서 들어온 뉴스는 우리 문화재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이를 정식 선포했다는 소식이다.그리고 도쿄에서는 일제가 약탈한 문화재를 민간차원에서 반환한다는 내용의 뉴스를 보냈다.모두 반가운 일이기는 하나 평화와 침략이 오버랩하는 여운을 남겼다. 이번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선포된 문화재들은 침략전쟁과 무관치 않다.석굴암을 포함한 불국사,대장경판과 경판고를 한데 묶은 해인사,종묘 등이 다 그렇다.불국사와 종묘는 1593년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버린 폐허 위에 다시 복원한 전통 건조물이다.종묘는 소실한지 16년만에 다시 터를 다지고 기둥을 세우는 초기입주를 했으니,침략의 피해는 실로 컸던 것이다. 오늘날 팔만대장경으로 부르는 해인사 대장경판도 예외가 아니었다.고려왕조가 국력을 기울여 만들었던 초조대장경판이 1232년 몽고군 병란에 불에 타자 새로 새긴 것이 해인사에 남은 대장경판이다.대장경판을 다시 완성하는데 자그마치 11년이 걸렸다.이 경판을 새기면서 몽고군의 재침을 염려한 나머지 강화와 남해 두 섬에서만 일을 했다.외침이 없는 평화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그렇듯 전쟁과 문화재는 악연관계다.20세기가 다 저문 최근에도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된 유적을 허다하게 만날 수 있다.그 대표적 사례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유적이 아닌가 한다.크메르 왕국의 영화가 깃든 12세기의 이 유적은 유네스코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구제불능 상태가 되었다.내전과 외침으로 얼룩진 캄보디아의 내우외환은 유적파괴는 물론 문화재 약탈로 이어졌다. 전쟁과 침략은 필연적으로 약탈을 수반하게 마련이다.이른바 열강이라는 이름의 강대국들은 식민지확장시대부터 경쟁적으로 피정복국의 문화재들을 약탈했다.서구의 유명박물관을 돌다보면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통째로 들어 옮긴 그리스의 석조신전이나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와 로스톤 따위의 약탈문화재들이 박물관 전시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돌려주기로 했다는뉴스초점 대상문화재도 1914년에 일본이 몽땅 뜯어간 경복궁 고건축물 자선당이다.건물은 1923년 간토(관동)대지진 당시 불타버려 주춧돌을 비롯한 기단의 돌덩이만 돌아오게 되었다.그러나 더 많은 문화재가 아직 귀환하지 못한채 일본전역의 박물관 전시실과 수장고 속에서 타국살이를 하고 있다.우리도 그처럼 민족문화유산을 잃어버리고 빼앗기는 일제식민통치시대를 살았다. 문화재는 기원과 역사,전통적 배경을 뒷자락에 깔았을 때 가치가 인정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약탈문화재는 본래의 자리로 반환되어야 한다.유네스코가 지난 1970년에 채택한 「문화재 불법반출입 및 소유권양도의 금지와 예방수단에 관한 협약」이 있기는 하다.그러나 협약 채택 이전시대의 약탈문화재에 대해서는 도덕적 임무만을 간접적으로 강조했다.더구나 타국의 문화재를 약탈한 일본과 구미의 강대국들은 협약에 가입하지 않았다. 우리 문화재가 인류공동유산의 보편적 가치가 인정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시점에서 아쉬운 여운이 감도는 까닭도 바로 여기 있다.다만 인류의 문화유산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신념에는 변화가 없다.그래서 모처럼 맞은 세계문화유산시대를 국력과 조화롭게 활용하는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 자선당 주춧돌 “79년만의 환국”/강석진 도쿄특파원(오늘의 눈)

    일본 도쿄 유수의 호텔 가운데 하나인 오쿠라호텔 옆 벚꽃 나무가 우거진 산책로에는 요즘 때아닌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자그마한 공원으로 꾸며져 있는 그곳에서 건물은 자취를 찾을 수 없지만 그 터의 주춧돌,기단등이 들어 올려져 하나하나 정성스레 포장되고 있다.가로 18.6m,세로 11.02m의 터에서 나오는 돌은 2백88개,무게는 1백20t이상 된다. 우리나라 경복궁에서 뜯겨 나가 이곳 일본에 옮겨졌던 자선당 터다.자선당은 조선왕조 세자들이 학문수양을 하던 건물.단종애사의 주인공 단종이 세자시절을 보냈던 곳이라고도 한다. 일제가 경복궁을 철거하면서 건축책임자였던 오쿠라 기하치로(대창희팔랑)가 옮겨가 1916년 자신의 집에 복원하면서 자선당은 일본생활을 시작했다.그러나 이 건물은 한국인이 대량 학살당했던 23년 관동대지진 때 불타버려 기단과 계단,주춧돌등만 남게 됐다.이것을 기록등을 바탕으로 추적,현재 위치에서 3년여전 찾아낸 것은 대전 목원대의 김정동교수였다. 그뒤 자선당 터의 반환이 조심스레 추진돼 결국 오쿠라호텔과 관계를맺어온 삼성그룹의 삼성문화재단이 기증받는 형식으로 성사됐다.호텔측의 아오키 도라오(청목인웅) 명예회장도 김교수의 발견으로 사실을 처음 알고 반환에 선선히 응했다고 한다.경복궁 복원작업이 벌어지고 있어 자선당의 반환은 시기적으로도 여간 적절하지 않다. 전후 50주년인 올해 에토 다카미(강등융미) 전총무청장관등 일부 정치인들의 망언이 잇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얼마전 데라우치문고의 반환이 뜻있는 한국과 일본 인사들의 노력으로 결실을 맺은데 이어 자선당 터가 반환되게된 것은 각별한 주의와 노력이 기울여지면 우리 문화재가 차근차근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게 해준다.아직도 일본에는 우리 문화재가 즐비하다. 해방 50년에 뿌리만 돌아가는 자선당 터에 호텔측은 무궁화를 심어 벚꽃과 어우러지게 꾸며 보고 싶다고 한다.앞으로 도쿄에 들를 때 무궁화와 벚꽃이 어우러진 오쿠라호텔의 산책로를 걸으면서 문화재 반환을 위해 노력한 인사들과 이에 선선히 응한 일본인들을 떠올려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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