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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을 뒤흔든 혁명… 준비의 시간은 느리고 고요하다

    세상을 뒤흔든 혁명… 준비의 시간은 느리고 고요하다

    아프리카 첫 독립국 단초 된 ‘신문’유럽 과학 진일보시킨 ‘월식 측정’20년 이상 긴 시간 견딘 후 꽃피워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많은 사람이 ‘혁명’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급박하게 전개되는 드라마를 떠올린다. 십중팔구 한국인들이 떠올리는 가장 전형적인 장면은 최루탄 자욱한 거리를 가득 메운 군중이 목청껏 구호를 외치고 경찰이 곤봉과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2024년 계엄의 밤 당시 총을 든 군인들을 가로막고 맞서는 시민들의 이미지도 떠올린다. 미디어학 박사로 작가이자 ‘애틀랜틱’ 수석 에디터인 갈 베커만이 드러내는 혁명은 그보다는 훨씬 지루하고 밋밋하다. 그는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혁명의 본질은 우리 생각과 다르다고 지적하며 세상을 바꾼 급진적 사유의 계보를 추적한다. 전화도 철도도 없는 1635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 살았던 자연철학자 니콜라클로드 파브리 드 페이레스크는 인류 최초로 지중해를 둘러싼 유럽 전역에서 월식을 동시에 측정하는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페이레스크는 20년 동안 유럽 각국에서 월식을 측정해 경도를 계산하는 방법을 고안하고 각국 과학자들과 수만장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유럽은 과학적 방법론을 터득하고 다른 지역을 월등히 앞서게 됐다. 1935년 자기들을 ‘선량한 제국주의자’로 여긴 영국의 아프리카 식민지 중 하나인 골드코스트의 수도 아크라에서 문화통치 일환으로 신문 발행을 허용했다. 이때 ‘아프리카 모닝 포스트’의 편집장 은남디 아지키웨는 독자 투고란인 ‘투덜이 구역’이라는 면을 만들었다. 제한 없이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지면이었지만 영국인들은 ‘시끄럽지만 식민 지배에 위협은 주지 않는 것’으로 인식했다. 해당 지면을 읽고 쓴 독자들은 아프리카에 대한 합의된 상을 만들어 갔고, 그런 생각은 20년 뒤 꽃을 피웠다. 골드코스트는 아프리카 최초 독립국이자 범아프리카주의 거점인 ‘가나’가 된 것이다. 책을 읽고 나면 혁명을 촉발하는 급진적 생각은 고요하고 느린 시간을 견뎌낸 뒤 꽃피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매체가 온라인 공간으로 흡수된 요즘은 혁명과 변화를 이끄는 준비의 시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소셜미디어(SNS)는 소란스럽고 즉각적이고 개방적이며 수평적이라는 특성 때문에 혁명적 도구로 주목받았지만 요즘 상황을 보면 오히려 혁명을 방해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혁명은 사라지고 극우가 득세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21세기 미디어 환경에서 인류의 삶을 바꿀 혁명적 사상은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을 연결하고 확장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 조선시대 ‘우주덕후’가 관상감에 취직하려면…[이광식의 천문학+]

    조선시대 ‘우주덕후’가 관상감에 취직하려면…[이광식의 천문학+]

    조선 ‘우주 덕후’들의 꿈의 직장 만약 당신이 천문·우주 분야에 관심이 깊고 관련 정부기관에서 일하고 싶다면, 먼저 대학에서 천체물리학과 등에서 공부하고 한국천문연구원에 시험 봐서 취업하면 된다. 그런데 만약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관상감(觀象監)이란 기관에 취직하면 되는데, 우선 이 기관에 대해 미리 잘 공부해둬야 한다. 관상관은 한국천문연구원에다가 기상청까지 겸한 기구로, 천문학뿐 아니라, 지리학·역수(曆數 ·책력)·측후(測候)·각루(刻漏) 등의 업무를 두루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관상감의 우두머리는 영사(領事)이며, 보통 정1품으로 영의정이 겸임하고, 제조(提調) 2인을 두었다. 관상감은 잡과에 합격한 65명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이 관장하던 업무를 크게 나누면, 측우기와 각루, 천문관측, 책력 제작 등을 맡은 천문학 파트, 풍수를 다루는 지리학 파트, 운명, 길흉, 화복 따위를 연구하는 명과학 파트가 있었으며, 각 파트는 교수 1명(종6품)과 훈도 2명(정9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이 조선의 자연과학을 이끄는 전문 과학자 집단이었다. 관상감은 또한 각 분야의 인재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도 수행했다. 이들 피교육자를 생도라 했는데, 천문학 20명, 지리학 15명, 명과학 10명의 생도를 각각 두었다. 이들은 거의 양반이 아닌 양가(良家)의 자제나 양반의 서얼들이었다. 이 과정을 수료한 생도만이 3년마다 열리는 잡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며, 시험은 초시와 복시를 다 통과해야 한다. 선발인원은 천문학이 초시 10명, 복시 5명, 지리학·명과학은 초시 각 4명, 복시에서 각 2명을 뽑았다. 1등 합격자는 종8품, 2등은 정9품, 3등은 종9품 품계를 주어 관상감의 권지(權知·견습)로서 분속시켰다가 자리가 나는 것을 기다려 실직(實職)을 주었다. 이 잡과 시험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인데, 우주 덕후는 그때나 지금이나 있게 마련이어서, 이들은 이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해 비로소 관상감의 관료로 조선의 하늘을 책임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우주 덕후들은 우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중국 고전 <회남자(淮南子)>에는 ‘예부터 오늘에 이르는 것을 주(宙)라 하고, 사방과 위아래를 우(宇)라 한다’는 말이 있다. 조선 우주 덕후들은 이 <회남자>의 말에 따라 우주가 시간과 공간이 얽혀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천문 관료들이 하는 업무는 궁궐과 도성 안의 측우기를 관리하고 강우량을 측정하며, 천문관측을 행하는 것이었다. 관측은 하루에 15차례 실시되었는데, 3인 1조로 하여 교대로 행했다. 이렇게 밤새 관측을 한 후 하늘의 특이 사항을 보고서로 작성한 아침 궁궐문이 열리면 입시해 보고했다. 특히 헤성 같은 이변이 나타나면 방중에라도 왕에게 보고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낮에 태양을 관찰하기도 했는데, 오수정을 사용하여 태양의 흑자(黑子, 흑점)를 관측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최초로 태양흑점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1610년보다 최소 수백 년은 빠른 것이었다. 일관(日官)이라고도 불린 이들은 오늘날로 치면 천문학자로서 일식과 월식을 예보하는 일도 맡았는데, 세종 때 구식례를 행할 때 이 예보가 약 15분 어긋나는 바람에 관련 일관이 곤장을 맞았다는 기록이 <실록>에 전한다. 조선 우주덕후들이 남긴 기록 유네스코로…어쨌든 이들 덕분에 조선은 세계 최고의 천체관측기록인 <성변측후단자(星變測候單子)>를 남겼다. 별의 위치나 빛에 생긴 이변을 성변(星變)이라 하며, 이러한 변화를 관측하여 기록한 것이 성변측후단자이다. 여기에는 조선시대 천문관측 체계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당시 관상감의 천문학자들은 천문현상 중 혜성, 초신성, 운석을 기록하도록 했다. 특히 이 성변측후단자에는 유일하게 맨눈으로 볼 수 있는 혜성인 ‘핼리혜성’에 대한 기록도 담겼다. 핼리혜성의 존재를 처음으로 확인한 영국의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가 세상을 떠난 뒤 처음으로 남겨진 핼리혜성 관측 기록이다. 점성학에서 의미 있는 천문현상 가운데 절대 다수는 흉조라는 것이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이다. 성변이 계속될 경우에 임금은 수시로 중신들을 모아 이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는 것이 관례였다. 성변측후단자에는 1759년 당시 관측된 핼리 혜성의 모습이 매우 상세하게 적혀 있다.'3월 11일 신묘 밤 5경 파루 이후에 혜성이 허수(虛宿) 별자리 영역에 보였다. 혜성이 이유(離瑜) 별자리 위에 있었는데, 북극에서의 각거리는 116도였다. 혜성의 형태나 색갈은 어제와 같았다. 꼬리의 길이는 1척 5촌이 넘었다' 성변측후단자에 실린 3건의 혜성 관측 사료는 국가 공공기록물로서 현장의 기록을 담고 있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사료는 일본과 중국은 물론 서양에서도 발견된 사례가 없는 희귀한 자료로, 한국천문학회 등 관련 기관과 학계에서는 2025년을 목표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조선 천문학자들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성변측후단자에서 보듯 우주 덕후이자 기록 덕후인 선조들 덕분에 당시 조선의 천문학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으며, 결코 서양에 뒤지지 않았다. 
  • [이광식의 천문학+] 일식 예보 틀려 곤장 맞은 조선 천문학자

    [이광식의 천문학+] 일식 예보 틀려 곤장 맞은 조선 천문학자

    조선시대에 일식 예보를 잘못해 곤장을 맞은 천문학자가 있었다. 곤장을 때린 사람은 세종이었고, 맞은 사람은 천문과 역수(曆數), 각루(刻漏) 담당 부서인 서운관의 천문학자 이천봉(李天奉)이었다. 대체 어떤 사연이었는지, '조선왕조실록'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당시로 날아가보자. 일식 때 ‘반성’하는 임금 세종 4년(1422) 1월 1일 원단을 맞았는데, 마침 일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임금이 소복을 입고 인정전의 월대(月臺) 위로 나아가 일식을 구했다. 백관들도 소복을 입고 조방(朝房·신하들이 조회를 기다리는 대기장소)에 도열해 일식을 구하니 얼마 후 해가 다시 빛났다. 세종이 섬돌로 내려와 해를 향해 네 번 절했다. 이 같은 의식을 ‘구식(救蝕)’이라 하는데, 일식과 월식으로 인해 훼손된 일월(日月)을 구하는 재변 의례를 가리킨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대략 달력을 시간표 정도로 여기기 쉽지만, 농업생산이 경제의 축이었던 옛날엔 천체의 규칙적인 운행주기와 질서를 측정, 계산하여 만드는 책력은 국가 권력의 핵심적인 요소였다. 왕조국가 시대의 역법은 또한 왕조와 국가의 안위를 내다보기 위한 점성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도 매우 중시되었다. 전통 사회에서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과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일 사이에 일종의 상응 관계, 즉 천인상응(天人相應) 관계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천문은 곧 인문(人文)이기도 했다. 여기서 천문(天文)의 의미는 하늘에 나타난 별들의 운행을 무늬(文)로 표상한다는 뜻으로, '주역'의 다음 구절에서 유래한다. '우러러 하늘의 무늬를 보고, 굽혀서 땅의 결을 살핀다(仰以觀於天文, 府以察於地理)'​ 옛날에는 일식과 월식이 천체의 중심인 해와 달이 잠식되는 불길한 재변으로, 하늘이 왕의 잘못을 직접 꾸짖고 근신케 하는 징표라고 여겼다. 따라서 일식(또는 월식)이 예보되면 시일에 맞추어 각 관청은 어명을 받들어 당상관과 낭관 각 1명이 제사 때 입는 엷은 옥색 옷인 천담복(淺淡服)을 입고 하늘에 기원했다. 왕은 소복으로 갈아입고 하루종일 일식을 기다렸다가 인정전의 월대 위에 나아가 신하들과 함께 석고대죄하듯 하늘에 용서를 비는 구식례를 행했다. 이렇게 하면 그 정성에 하늘이 감복하여 일식·월식을 곧바로 원상대로 회복시켜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구식례가 끝나야 소복을 벗었다. 월식 때는 음기를 돋운다 하여 금으로 된 종을 쳐서 구식례를 행했다. 일식과 월식을 구한다는 구식 의례는 조선조 내내 매우 빈번하게 행해졌다. 이 구식례는 매우 번거롭지만 일식·월식이 지상의 왕에게 내리는 하늘의 경고라고 여겼으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세종 4년의 구식례 때 서운관이 예보한 일식 시간이 되었는데도 정작 일식은 일어나지 않았다. 왕과 대소 신료들은 하릴없이 일식이 일어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는데, 예보시간보다 15분이 지나서야 일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15분을 1각(一刻)이라 하여 시간의 가장 작은 단위로 삼았다. 고로 ‘일각이 여삼추’라는 말은 15분이 3년처럼 길게 느껴진다는 듯이다. 구식례가 끝난 후, 일식의 분도(分度)를 정확히 추보(推步·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하지 못해 예보를 15분 앞당겨 했다는 죄목으로 세종은 서운관 술자(術者) 이천봉에게 곤장을 치게 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약과였다. 심하면 투옥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조선의 일식 예보 단위가 상당히 정밀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왜 일식예보가 틀렸을까? 어떤 군주와 국가가 하늘의 질서를 보다 잘 살피고 이해한다는 것은 그 군주가 권력과 정치적 정당성을 보다 튼튼하게 확보한다는 것을 뜻으로, 농업생산 증대, 왕조와 국가의 길흉 예측, 정치적 정당성 강화에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세종대왕이 기울인 천문기상학 발전에 대한 노력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은 대단히 현실적인 안목을 가진 임금으로, 재위 12년(1430) 8월 3일 이런 지시를 내렸다. '천문계산은 전심전력해야만 그 묘리를 구할 수 있다. 일식, 월식과 성신의 변, 그 운행도수는 원래 약간의 착오가 있었는데, 전에는 명에서 전해진 선명력법(당나라 목종 2년인 821년 서양이 만든 태음력의 하나)만 썼기 때문에 오차가 꽤 컸었다. 그런데 정초가 수시력법(授時曆法/중국 원나라 천문학자 곽수경과 왕순 등이 만든 역법)을 연구해 밝혀낸 뒤로는 책력 만드는 법이 바로잡혔다. 그러나 이번 일식의 시간이 모두 차이가 있으니 이는 정밀하게 살피지 못한 까닭이다. 옛날에는 책력을 만들 때 오차가 있으면 반드시 용서하지 않고 죽이는 법이 있었다. 내가 일식, 월식 때마다 그 시각과 가리고 걷히는 시간을 기록하지 않아 뒤에 계산해볼 길이 없으니, 이제부터 예보한 숫자와 맞지 않더라도 모두 기록하여 뒷날 고찰에 대비토록 하라.' 그러나 이후로도 일식 오보는 고쳐지지 않았다. 세종 14년(1432) 1월 4일엔 서운관에서 일식을 예보했으나 일식 현상이 없자 사헌부에서 서운관 담당관리를 처벌해야 한다는 건의를 올렸다. 이에 대해 세종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분수가 매우 적어서 짙은 구름으로 못 보았을지도 모른다. 각도에 공문을 보내 물어보게 하라. 또 중국에서도 오늘 일식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니 이것은 관측을 잘못한 죄는 아니다. 각 도의 보고와 중국 조정에 들어간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다시 의논하라.' '칠정산외편'으로 조선 고유의 시간을 가지다 어쨌든 오랜 논의와 연구 끝에 조선의 일식-월식 예보가 오차를 보이는 것은 조선의 시간이 아니라 중국의 시간을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조선 고유의 시간을 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선결문제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세종이 일찌기 왕자 시절부터 천문에 대해 깊이 공부해 얻은 내공 덕분임은 말할 것도 없다.게다가 세종조에는 과학과 천문에 밝은 인재들이 많았다. 흔히 세종 시대의 과학기술이라고 하면 이천과 장영실을 떠올리지만, 천문역법 분야에서 이순지(李純之, 1406~1465)의 역할은 독보적이었다. 이순지는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조선 초 자주적 역법을 이룩하면서 우리 천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천문학자’라는 평가와 함께, ‘명예로운 과학기술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된 바 있다. 이순지는 21살인 1427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외교문서 관련 업무를 맡았다. 당시 세종은 역법이 정밀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문신들 가운데 재능있는 사람들을 선발하여 역법에 필요한 산법(算法)을 익히게 했는데, 이순지가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문신이었지만 이과형 천재였다. 이순지가 세종대왕의 눈에 들게 된 계기는 ‘본국(本國)은 북극(北極)에 나온 땅이 38도(度) 강(强)’이라는 계산 결과를 보고한 일이었다. 한반도의 가운데가 북위 38도라는 것을 계산한 것이다. 보고를 받은 세종은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들여온 역서(曆書)를 통해 이순지가 계산한 결과가 정확하다는 것을 알고는 크게 기뻐하며 1431년부터 이순지에게 조선의 천문역법을 정비하는 일을 맡겼다. 그 결과 1433년부터 이순지를 중심으로 조선 역법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1442년에 이르러 조선 독자의 역법인 '칠정산내편(七政算內編)'과 '칠정산외편'의 편찬이 완성되었다. 이로써 그간 중국의 역법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것에서 벗어나 비로소 독자적으로 천체 운행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 천문학,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서다 이순지의 천문역법 연구가 특히 크게 빛을 발한 성과는 ‘한문으로 펴낸 이슬람 천문 역법서 가운데 가장 훌륭한 책’으로 평가받는 '칠정산외편'이다. 칠정은 해와 달, 수성, 화성, 목성, 금성, 토성을 뜻한다. 1442년에 정인지, 정흠지, 정초 등이 편찬한 '칠정산내편'은 1281년 원나라에서 만든 수시력을 한양의 위치에 맞게 수정, 보완한 것이다. 이에 비해 1444년 이순지와 김담이 편찬한 '칠정산외편'은 아랍 천문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내편’은 중국 천문역법과 산학 전통을 따르기 때문에 원주를 365.2575도, 1도를 100분, 1분을 100초로 하고 있는 데 비해 ‘외편’은 그리스와 아랍 천문학 전통에 따라 각각 360도, 60분, 60초로 바꾸어 계산했다. 또한 평년의 한 해를 365일로 하고 128년에 31일의 윤일을 두었는데, 1태양년이 365일 5시간 48분 45초로, 수시력보다 더 정확할 뿐 아니라 오늘날의 수치와 비교했을 때 1초 짧을 정도로 정확하다. 1년의 기점을 중국이 동지에 둔 것과 달리 춘분에 두었으며, 일식과 월식 계산에서도 ‘외편’이 ‘내편’보다 정확하다. ‘내편’을 통해 한양을 기준으로 한 정확한 천문 계산이 가능해졌으며 ‘외편’을 통해 발달된 아랍 천문학의 성과를 우리 실정에 맞게 변용함으로써 조선의 천문학은 아랍, 중국과 함께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수준에 도달했다. 이순지는 이외에도 많은 천문역법서를 저술, 편찬했다. 그 가운데 1445년에 펴낸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은 다양한 서적에 흩어져 있는 천문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을 모아 정리한 책이다. 단순히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중복되는 것을 삭제하고 핵심을 취해 주제별로 분류함으로써 참고 자료로서 가치가 높은 역작이다. 1459년에는 일식-월식 계산법을 알기 쉽게 해설한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을 김석제와 함께 편찬했다. 계산 공식과 함께 실제 계산 사례가 실려 있으며, 계산법을 쉽게 외우는 데 도움이 되는 노랫말 형식의 설명도 실려 있어, 나중에 음양과(조선시대 관상감의 천문ㆍ지리 등을 맡는 기술직을 뽑던 잡과 시험)의 시험 교재로도 널리 쓰였다. 이처럼 이순지는 당대 세계 최정상급의 천문학자로서, 조선 천문학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이러한 업적으로 이순지는 승지, 중추원부사, 개성부 유수, 판중추원사(종2품)에 이르렀다. 1465년(세조 11년) 이순지가 세상을 떠난 뒤 실록에는 ‘지금의 간의(簡儀), 규표(圭表), 태평(太平), 현주(懸珠), 앙부일구와 보루각, 흠경각은 모두 이순지가 세종의 명을 받아 이룬 것’이라고 기록되었다. '세조실록'은 이순지를 이렇게 평한다 '이순지의 성품은 정교하며 산학, 천문, 음양, 풍수에 매우 밝았다. 그러나 크게 건명(建明)한 것은 없었다. 정평(靖平)이라 시호(諡號)하니, 몸을 공손히 하고 말이 드문 것을 정(靖)이라 하고, 모든 일에 임할 때 절제가 있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검색해본 결과, 조선시대에 일식이 265건, 월식이 344건 발생했다. 이는 조선의 천문기상 관측 수준이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조선 천문학과 표준시를 담당했던 관상감에서 1818년 편찬한 '서운관지'는 관상감의 조직과 운영, 천문관측과 기기, 천문서적 등을 총망라한 천문학 백과로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천문기록이다. 이처럼 세종시대는 세계 최고 수준의 관측기기 개발과 천문관측을 통해 천문학을 발전시킨 결과 세계 최고 수준의 천문학으로 성장했으며, 조선후기 '서운관지'에 기술된 것처럼 천문학이 국가의 제도를 튼튼히 하는 기둥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천문기록은 신라시대 첨성대를 시작으로 고려시대 서운관, 조선시대 관상감으로 이어졌다. 이 기관들이 기록한 천문기록은 적어도 1만 4천 건 이상이며, 아직도 해석과 발굴이 진행 중이다.좋은 일례로, 요하네스 케플러가 동년 10월 17일부터 프라하에서 관측에 착수했던 케플러 초신성은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그보다 4일 앞선 1604년(선조 37) 10월 13일(양력)부터 시작하여 7개월에 걸쳐 약 130회 위치와 밝기를 관측한 결과가 쓰여 있다. '밤 1경에 객성이 미수 10도에 있어, (북)극과는 110도 떨어져 있었으니, 형체는 세성(목성)보다 작고 색은 누르고 붉으며 동요하였다.' 케플러의 관측기록으로만 보아 유형 2로 추정되던 이 초신성은 ‘실록’의 자세한 관측결과에 의해 유형 1 초신성으로 밝혀졌다. 조선 천문학의 개가였다.
  • 37년 ‘반짝’ 수나라 역사서 ‘수서(隋書)’ 13권 완간, 5년 만에 완역

    37년 ‘반짝’ 수나라 역사서 ‘수서(隋書)’ 13권 완간, 5년 만에 완역

    당나라 명재상 위징(魏徵)과 사학자 영호덕분(令狐德棻), 천문학자 이순풍(李淳風) 등이 공동 저술한 ‘수서(隋書)’를 완역하는 작업이 5년 만에 마무리됐다. ‘수서’는 제기(帝紀) 5권, 지(志) 30권, 열전(列傳) 50권 등 모두 85권으로 원고지 1만 4189매, 책으로 5944쪽에 이른다. 지식을만드는지식(대표 박영률)이 25일 13권째인 ‘수서 율력지(隋書 律曆志)’를 끝으로 완역 작업에 마침표를 찍었다. 수서 완역 작업은 ‘사기’와 ‘한서’, ‘삼국지’에 이어 중국 정사 국내 번역 작업으로 네 번째다. 위진남북조 시대를 통일해 중국 고대사에 한 획을 그은 수나라, 특히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우리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수나라의 역사서가 지어진 지 거의 1400년 만에 우리글로 모습을 드러냈다. ‘수서’는 난세의 통일과 대제국 형성, 전쟁과 민란 등 왕조의 영욕을 세밀하게 살펴볼 수 있는 자료다. ‘제기’는 편년체(編年體)로 쓰인 수나라 제왕들의 기록이다. ‘지’는 천문지, 율력지, 음악지, 지리지 등 정사에서 기록할 수 없는 부분을 담았다. 가장 분량이 많은 ‘열전’은 황제의 일가친척, 신하와 관련된 기록뿐 아니라 다양한 인물의 행적과 성취를 다룬다. 특히 ‘고려전’을 들추면 수나라 조정의 고구려에 대한 입장과 인식, 고구려와 수나라의 관계, 고구려·수 전쟁의 전개 양상, 전쟁 후의 상황 등을 엿볼 수 있다. 또 고구려 ·수 전쟁에서 중립을 천명한 신라의 외교정책도 눈길을 끈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등 고구려와 네 차례 맞붙은 전쟁 이야기 속에서 폭군으로 이름난 수 양제의 면모가 매우 흥미진진하게 드러나며 치세에 관한 교훈도 얻을 수 있다. 수나라는 581년 문제(文帝) 양견(楊堅)의 건국부터 618년 양제 양광(楊廣)이 멸망하기까지 불과 37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대운하 건설과 천문학 발전, 음악, 도량형, 예법 등 통일제국의 뼈대를 세웠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럼에도 수나라는 주변국과의 외교 실패, 양제의 오만과 독선에 기반한 치세, 고구려와의 무리한 전쟁 등 내우외환에 시달려 결국 패망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과의 관계에 견줘 시사하는 대목도 적지 않다. 13권째 ‘수서 율력지’ 번역 작업은 특히 힘들었다. 일월식 시각, 동지 때 태양의 정확한 위치, 24절기의 해그림자 측정, 태양과 달 및 다섯 행성의 운동 등 고대 천문과 역법 관련 용어와 난해한 계산이 줄을 잇기 때문이다. 출판사의 소개로 역사 천문학을 연구하는 춘천교육대 과학교육과 이면우 교수의 도움을 받아 오류를 수정하고 상세한 주석을 달았지만 여전히 의미가 분명하지 않아 해결하지 못한 부분이 남았다고 했다. 번역자 권용호 박사는 후학들의 질정에 맡긴다고 했다. 이번에 완역 작업을 마친 ‘수서’는 중화서국(中華書局)의 ‘이십사사(二十四史)’ 교점본 중 ‘수서’와 한어대사전출판사본(漢語大詞典出版社本) ‘이십사사전역(二十四史全譯)’ 중 ‘수서’를 텍스트로 삼았다.한편 지만지는 ‘수서’ 완역 마무리에 발맞춰 권 박사가 집필한 ‘고구려와 수의 전쟁’을 함께 펴냈다. 이 책의 부제는 ‘수서를 통해 보는 동북아 최대의 전쟁 이야기’라고 붙여져 있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으로 유명한 612년의 2차 고구려·수 전쟁은 그 규모에서 동북아시아 최대의 전쟁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권 박사는 “수서를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고구려·수 전쟁 관련 사료를 틈틈이 모아 저술했다”고 말했다. 전쟁의 배경, 준비 과정과 진행 양상, 전쟁 이후의 상황 등을 살펴볼 수 있으며 역사적 인물들의 생생한 증언과 사실 묘사로 고구려·수 전쟁과 수나라의 흥망성쇠 요인을 상세히 짚어볼 수 있다고 지만지는 소개했다.
  • 한국 첫 달 궤도선 ‘다누리’ 임무기간 2년 연장한다

    한국 첫 달 궤도선 ‘다누리’ 임무기간 2년 연장한다

    한국 첫 달 궤도선 ‘다누리’의 임무 수행 기간이 2년 더 연장된다. 이는 다누리의 관측 결과가 예상외로 우수하고 국내외 연구자들이 달 탐사 연구성과 확대를 위해 임무 기간 연장을 요구한 것을 반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27일 ‘달 탐사 사업 추진위원회’를 열고 올해 말 종료될 계획이었던 다누리의 임무 운영 기간을 2025년 12월까지 2년 연장하기로 했다. 항우연은 임무 기간 연장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다누리의 잔여 연료량과 본체 부품에 대한 영향성을 분석했다. 다누리는 발사 후 달 궤도에 진입할 때까지 과정에서 약 30㎏ 연료를 절약해 임무 운영 간 연료의 여유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임무 궤도 진입 후 다누리의 잔여 연료량이 약 86㎏로 연간 연료 사용량이 약 26~30㎏인 것을 고려하면 2년 정도 임무 연장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됐다. 또 본체 부품도 태양전지판과 배터리가 노후되는 2025년에 일간 임무 시간이 단축되는 것 외에는 임무 운영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태양전지판의 생성 전략과 배터리 용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감소한다. 이 때문에 2024년까지는 하루 종일 임무 수행이 가능하지만 마지막 임무 기간인 2025년에는 하루 최대 16시간만 임무 수행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2025년에는 3월과 9월에 태양광발전이 불가능한 개기월식이 예상돼 다누리 배터리 방전으로 임무 수행이 조기 종료될 가능성도 있다. 애초 계획된 1년의 임무 운영 기간에는 제한된 범위의 자료 획득만 가능했지만 이번 임무 기간 연장으로 달 표면 촬영 영상을 추가 확보하고 자기장측정기, 감마선분광기의 보안관측 등 성과 확대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렇게 확보된 탐사자료는 2026년까지 달 착륙 후보지 3차원 지형 영상, 달 표면 원소 및 자원 지도 등을 제작하는 데 활용할 계획이다. 또 달, 화성, 소행성 등 우주탐사를 할 때 필요한 자료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분석까지 수행할 수 있는 우주탐사 자료 시스템도 2026년까지 구축할 계획이다.
  • 해를 다 품는 달…99년 만에 美대륙 관통 ‘우주 쇼’

    해를 다 품는 달…99년 만에 美대륙 관통 ‘우주 쇼’

    오는 21일(현지시간) 북미 대륙에서 펼쳐질 ‘역대 최고의 우주 쇼’를 앞두고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들썩이고 있다. 이날 낮 미국에서는 서부 해안부터 동부 해안까지 미국 대륙 전체를 스쳐 지나가는 개기일식이 일어난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이번 일식을 ‘그레이트 아메리칸 이클립스’(Great American Eclipse)라고 이름 붙이고 몇 달 전부터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똑같은 위치서 발생한 것은 375년만 지구 전체적으로 본다면 개기일식은 평균 18개월에 한 번 일어나는 천문 현상이지만 이번처럼 미국 본토 전체를 가로지르는 것은 1918년 이후 99년 만이다. 이번 일식은 1시간 30분 정도 지속된다. 태양면이 달에 완전히 가려지면서 깜깜해지는 하이라이트는 약 2분 40초 정도로 예상된다. 태양과 달, 지구가 일직선상에 놓여 달이 태양면을 가리며 생기는 천체 현상인 일식은 월식보다 자주 일어난다. 부분일식은 1년에 1~2번, 개기 일식은 1~2년에 한 번 정도 발생하는데 대부분 바다에서만 관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일식을 관측하기란 쉽지 않다. 미국 본토를 가로지르는 일식은 99년 만이지만 정확히 이번 일식과 똑같은 위치에서 발생하는 것은 375년 만이다. 따라서 1776년 미국 독립 이후 첫 번째 관측되는 대규모 일식이다. 태양면이 100% 가려지는 개기일식이 시작되면 주위가 어두워지고 붉게 노을이 지며 햇빛이 가려지면서 밤이 된 것처럼 별도 볼 수 있게 된다. 태양빛이 가려지면서 기온도 곧바로 2~3도 정도 내려가고 해안이나 산악 지역 같은 경우는 5~10도까지 떨어지는 경우도 나타난다. 보기 드문 천문 현상인지라 나사 연구진은 물론 전 세계 과학자들도 미국 대륙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관측에 나선다. 나사는 우주선 11대, 관측 비행기 3대, 풍선형 관측기 50여개 등 첨단 관측 장비를 총동원한다. 심지어 국제우주정거장(ISS)의 우주비행사까지 투입해 지상과 대기권, 우주에서 개기 일식을 입체적으로 관측할 예정이다. 나사TV는 생중계도 한다.한국천문연구원 우주과학본부도 미국으로 건너가 나사와 공동 관측에 나선다. 한국 관측팀은 미국 중서부 와이오밍주의 소도시인 잭슨에서 태양 코로나 관측을 담당하게 된다. 코로나는 태양 대기 가장 바깥층을 구성하는 부분으로 개기일식 때는 달에 가려지면서 그 둘레가 백색으로 빛난다. 태양의 실제 크기를 관측하거나 태양의 다양한 움직임을 관측하는 데 유용하다. 개기일식은 태양빛의 영향 없이 다른 천체를 관측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적 발견도 가능하게 해 준다. 시공간이 중력에 의해 휘어질 수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이 처음 입증된 것도 1919년 개기일식을 통해서다. 전문가들은 이번 개기일식 이후 수많은 관련 논문들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나사는 일반인들의 과학 연구 참여 열기를 높여 ‘시민과학’도 활성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시민과학은 전문가 영역으로만 여겨졌던 과학과 과학기술 정책에 일반인들이 직접 참여하도록 하는 것으로 유럽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종의 과학 대중화 운동이다. 전문가들이 일반인들과 동떨어진 연구나 정책 결정을 내리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NASA ‘일식 시민과학’ 프로젝트 나사의 이번 ‘일식 시민과학’ 프로젝트에는 미국 전역에서 수만 명의 일반인들이 참여한다. 각자 68개 팀으로 쪼개져 저마다의 관측 임무를 수행한다. 개기일식이 진행되는 동안 대기의 온도 변화를 측정하고 동물들의 움직임을 관찰해 기록하는 것이 주된 임무다. 일식 과정 중에 동물의 이상 행동에 대한 소문은 많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희박한 실정이다. 시민 참여를 통해 이런 연구가 본격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과학계의 기대다. 미국 국립태양관측소 소속 천문학자이자 시민과학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는 매트 펜 박사는 “일반인들이 직접 과학 연구에 참여함으로써 실제 과학자들의 연구뿐만 아니라 시각장애인들에게 일식 경험을 체험하기 위한 애플리케이션 개발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 [이광식의 천문학+] 네브라 스카이디스크, 청동기 인류의 천문지식

    [이광식의 천문학+] 네브라 스카이디스크, 청동기 인류의 천문지식

    3000~4000년 전쯤, 막 석기시대에서 벗어나 청동으로 칼과 창을 만들어 싸우고 사냥하던 선사시대 사람들은 과연 우주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이들의 우주관을 설핏 보여주는 놀라운 유물이 ​지난 1999년 독일 중부의 한 촌락에서 발굴되었다. 천체가 묘사된 청동 원반으로, 지름 약 30cm에 두께가 중앙으로부터 4.5mm에서 1.5mm로 점점 얇아지는 형태이며, 무게는 2.2kg이다. 원래의 색은 가지색인 갈색이었으나 지금은 녹이 슬어 청록색 녹청으로 덮여 있다. 원반 표면에는 금으로 된 상징물들이 박혀 있는데, 이들은 태양 또는 보름달, 초승달 그리고 별들(플레이아데스로 보이는 별들도 있음)로 해석된다. -선사시대 사람들의 우주관 담은 유물 원반은 2점의 청동 검, 2점의 도끼, 2점의 나선형 팔찌, 그리고 1점의 청동 끌과 함께 매장되어 있었는데, 신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인류 최초의 천문반이라 할 수 있는 이 유물이 발견된 곳은 독일 중부 작센안할트주 네브라 시 인근인 미텔베르크라는 아주 깡촌에 속하는 시골이다. 그래서 원반의 이름이 네브라 스카이 디스크(Nebra Sky Disc), 또는 네브라 하늘원반이라 붙여졌다. 이 세기적인 발굴에는 역시 범죄자들의 도움이 컸다. 흔히 보물 사냥꾼으로 불리는 이 도굴꾼들은 하늘원반을 손에 넣은 후 이를 처분하기 위해 한 대학교수에게 접근했는데, 교수는 너무나 엄청난 물건임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도굴꾼들이 호텔 바에서 교수를 만나 진품을 보여줄 때 교수의 신호를 받고 경찰이 덮쳐 세기적인 발굴품이 무사히 환수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혹시 모조품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샀지만, 정밀한 조사 결과 2005년 기준으로 약 3600년 전에 만들어진 진품으로 밝혀졌다. 문자기록이 없었던 시기에 제작된 네브라 하늘원반은 천문현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으로는 전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고학 분야 이외에 천문학이나 종교사 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귀중한 발굴 유물이다. 이 하늘원반에 표현된 것에는 천체현상에 대해 선사시대 사람들이 가졌던 놀라운 지식이 반영되어 있는데, 최근까지 선사시대 인류가 그러한 능력을 갖추었다고 믿었던 사람은 없었다. 천체에 관한 고대인들의 초기 지식과 관측 능력, 그리고 우주관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네브라 스카이 디스크는 더없이 귀중한 문화적,역사적 가치를 지닌 20세기 최대의 발굴품이라 할 수 있다.​ -네브라 스카이 디스크에 표현된 것들 네브라 하늘원반에 표현된 것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하늘원반에는 32개의 금 동그라미를 비롯해, 역시 금으로 된 커다란 원형 접시와 초승달 모양의 문양이 붙어 있다. 원형 접시는 해를 표현한 듯하고, 초승달 문양은 모양이 말해주듯 초승달이거나 월식이 진행 중인 달을 나타낸 듯하다. 조그만 금 동그라미는 별로 보이는데, 특히. 동그라미 7개가 오종종 모여 있는 것은 플레이아데스(좀생이별)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둘째, 후대에 와서 덧붙여진 것들이 있는데, 지평선을 나타낸 가장자리의 두 원호다. 금의 성분이 다른 것이 그 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두 원호를 붙인 자리를 만들기 위해 왼쪽의 별 하나는 중앙으로 옮겨졌고, 오른쪽에 있던 별 두 개는 원호로 덮어씌워져서 지금은 별이 30개만 남아 있다. 두 개의 원호는 지평선(horizon band)을 나타낸 것으로, 호의 양끝에서 원반의 중심으로 선을 그어보면 각도가 82도가 되는데, 이는 북위 51도에 있는 미텔베르크의 하지와 동지 때 일몰 위치의 각도 차이를 가리킨다. ​이것은 네브라 스카이 디스크를 만든 사람이 선진 문명으로부터 단순히 데이터를 베낀 게 아니라 측정법 자체를 들여와 자기 고장에서 직접 측정했다는 뜻이며, 이 원반이 수입품이 아닌 중부 유럽의 토속품이라는 증거다. 또한 원반의 둥근 접시를 보름달이 아니라 해로 보는 것은 바로 일몰 각도 차이 때문이다. 셋째, 마지막 첨가물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아래에 보이는 작은 원호로, '태양 배(sun boat)'를 상징한다. 역시 금의 성분이 다르다. 이 태양 배는 명백히 이집트에서 건너온 것으로, 고대 이집트 통치자였던 파라오들은 사망 후 태양 배가 자신들을 지하세계로 데려다 준다고 믿어 태양 배를 만들어 무덤에 함께 묻기도 했다. 청동기 시대에 지식의 유통이 벌써 널리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넷째, 이 천문반이 만들어져 부장품으로 묻힐 때 원반 가장자리를 빙 둘러서 지름 3mm 가량의 구멍들이 40개 가량 뚫려 있었다. 이것은 일년을 대략 40주기로 나눈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원반이 휴대용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농사짓기를 위해 만든 실용적인 도구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마지막 다섯째, 하늘원반을 만든 재료 문제인데, 원반 자체를 이루고 있는 구리는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맥에서 채취한 것이며, 금은 영국 잉글랜드 콘월 반도에서 나온 것이다. 청동기 시대 주석이 국제무역으로 유통되고 있었지만, 이 중부 독일의 깡촌에까지 영국과 오스트리아 지방의 출산물이 들어온 것을 보면 이미 청동기 시대에 유럽 전역을 아우르는 광범한 교역망이 이루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대체 불가능한 '오파츠'- 네브라 스카이 디스크 발굴의 역사를 살펴보면 장소나 제조법 등의 측면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유물들이 더러 나타나는 사례들이 있는데, 이런 유물들을 통칭해서 '오파츠'(Oopats·Out-Of-Place ARTifactS)라고 부른다. 곧,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유물'이라는 뜻이다. 기자의 피라미드와 영국 솔즈베리의 스톤헨지도 건축 방법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오파츠라고 할 수 있지만, 통상적으로는 작은 유물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한다.​ 네브라 스카이 디스크는 이런 의미에서 확실히 오파츠에 속한다. 이보다도 디테일 면에서 훨씬 처지게 천문현상을 도식적으로 나타낸 것도 100년 뒤에야 고대 이집트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천문현상을 문자로 표현한 것을 보려면 1000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게다가 다른 문명권이 해와 달, 별을 신화적인 소재로 다루고 있을 때, 네브라 청동기인들은 천문현상을 다 현실적인 실체로 보고 태양, 달, 별자리 모두를 통합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청동기인들의 우주관이 대단히 현실적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어쨌든 기원전 1600년, 문자도 없던 선사시대에 이런 천문반이 대륙의 오지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네브라 스카이 디스크가 대체 불가능한 유물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다. 네브라 스카이 디스크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고, 현재는 독일 작센안할트주 할레에 있는 주립선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독일을 여행하는 기회가 된다면 네브라 스카이 디스크 순례를 권하고 싶다. 3600년 전 청동기 인류의 우주관이 당신을 반가이 맞아줄 것이다.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28일 ‘슈퍼문 개기월식’이 달 탐사선을 긴장시킨다

    28일 ‘슈퍼문 개기월식’이 달 탐사선을 긴장시킨다

    -NASA, 긴급상황에 돌입 이번 추석 연휴중에 있을 희귀한 슈퍼문 개기월식은 미항공우주국(NASA)의 달 탐사선에 위기과 기회를 동시에 줄 것으로 보인다고 23일 NASA의 웹사이트 스페이스닷컴이 보도했다. 지구에 가장 가까운 천체인 달이 추석 다음날인 월요일 오전 11시 48분(한국시간)에 개기월식에 들어간다. 이번 개기월식 때는 달과 지구가 최단 거리를 유지하는 근일점에 가까워지면서 슈퍼문과 월식이 겹치지는 희귀한 천체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이같은 슈퍼문 개기월식은 지난 1982년 이후 33년 만에 처음 나타나는 현상으로, 다음 차례는 18년 후인 2033년에나 있을 예정이다. 특히 이번 개기월식 때는 슈퍼문과 개기월식으로 인한 '블러드문(Blood Moon)'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으로, 우주 팬들의 기대를 더욱 모으고 있다. 근지점의 달은 원지점의 달보다 지구에 약 4만 9000㎞ 정도 가깝게 접근한다. 이 때문에 근지점 달은 원지점의 보름달보다 크기는 14% , 밝기는 30% 정도 증가한다. 물론 시간상으로 한국에서는 볼 수 없고, 영국을 포함한 유럽 일대와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 등지에서 관찰이 가능하다. 한국에서는 슈퍼문과 블러드문 모두를 관찰하기 어렵지만, 추석연휴인 28일 저녁 날씨가 맑다면 슈퍼문에 가까운 큰 달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 월식 때 지구 그림자가 NASA의 달 정찰궤도탐사선(LRO)을 가림에 따라 탐사선의 태양 전지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NASA 과학자들은 걱정하고 있다. 어쨌든 탐사선은 지난 17개월 동안 3차례의 월식에도 거뜬히 생존해온 내력이 있는만큼 큰 걱정은 하고 있지 않지만, 우주탐사 과학자들은 최소한의 위험에도 늘 신경을 곤두세우는 법이라 이번에도 긴장을 늦추지는 못하고 있다. "우리는 방법을 가지고 있고, 그 방법이 잘 통하고 있다" 고 NASA 고다드 우주비행센터 돈 마이어 기획관이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월식 때마다 우리는 늘 긴장하지만, 매뉴얼대로 항상 대비해서 아직까지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매뉴얼은 지구 그림자 밖으로 빠져나갈 때까지 탐사선의 작동 시스템을 멈춤으로써 동력을 절약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지난 수년 동안 -달 탐사선은 2009년에 발사되었다- 미션 팀은 많은 경험을 쌓은 끝에 월식에 대비하는 자신감을 부쩍 키워왔다. 일례로, 최근의 월식 때는 일부 탐지기를 계속 작동해 월식 전후의 달 표면 온도를 측정하기도 했다. 그 결과 햇볕을 받을 때와 받지 않을 때 달 표면 온도가 극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표면 온도는 놀랍게도 몇 분 만에 무려 156도의 차이를 보였다. "월식 때 달 표면이 이처럼 급격히 냉각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달 표면 입자의 크기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고 로아 페트로 LRO 프로젝트 과학자는 밝혔다. 5억 400백만 달러(한화 약 6000억원)가 투입되는 달 정찰탐사 미션은 최고의 정밀도를 가진 달 표면 지도를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2016년 10월까지 그 기금을 조성할 예정이다. 탐사선은 조그만 차 크기 정도로, 모두 7가지 탐사장비를 탑재하고 있다. 물론 이들 장비 대다수는 월식 때 작동 중지될 것이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아하! 우주] 추석때 ‘슈퍼문 개기월식’...달 탐사선은 반갑지 않다?

    [아하! 우주] 추석때 ‘슈퍼문 개기월식’...달 탐사선은 반갑지 않다?

    -NASA, 비상 상황 돌입 이번 추석 연휴중에 있을 희귀한 슈퍼문 개기월식은 미항공우주국(NASA)의 달 탐사선에 위기과 기회를 동시에 줄 것으로 보인다고 23일 NASA의 웹사이트 스페이스닷컴이 보도했다. 지구에 가장 가까운 천체인 달이 추석 다음날인 월요일 오전 11시 48분(한국시간)에 개기월식에 들어간다. 이번 개기월식 때는 달과 지구가 최단 거리를 유지하는 근일점에 가까워지면서 슈퍼문과 월식이 겹치지는 희귀한 천체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이같은 슈퍼문 개기월식은 지난 1982년 이후 33년 만에 처음 나타나는 현상으로, 다음 차례는 18년 후인 2033년에나 있을 예정이다. 특히 이번 개기월식 때는 슈퍼문과 개기월식으로 인한 '블러드문(Blood Moon)'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으로, 우주 팬들의 기대를 더욱 모으고 있다. 근지점의 달은 원지점의 달보다 지구에 약 4만 9000㎞ 정도 가깝게 접근한다. 이 때문에 근지점 달은 원지점의 보름달보다 크기는 14% , 밝기는 30% 정도 증가한다. 물론 시간상으로 한국에서는 볼 수 없고, 영국을 포함한 유럽 일대와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 등지에서 관찰이 가능하다. 한국에서는 슈퍼문과 블러드문 모두를 관찰하기 어렵지만, 추석연휴인 28일 저녁 날씨가 맑다면 슈퍼문에 가까운 큰 달을 보는 것이 가능하다. 월식 때 지구 그림자가 NASA의 달 정찰궤도탐사선(LRO)을 가림에 따라 탐사선의 태양 전지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NASA 과학자들은 걱정하고 있다. 어쨌든 탐사선은 지난 17개월 동안 3차례의 월식에도 거뜬히 생존해온 내력이 있는만큼 큰 걱정은 하고 있지 않지만, 우주탐사 과학자들은 최소한의 위험에도 늘 신경을 곤두세우는 법이라 이번에도 긴장을 늦추지는 못하고 있다. "우리는 방법을 가지고 있고, 그 방법이 잘 통하고 있다" 고 NASA 고다드 우주비행센터 돈 마이어 기획관이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월식 때마다 우리는 늘 긴장하지만, 매뉴얼대로 항상 대비해서 아직까지ㄴ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매뉴얼은 지구 그림자 밖으로 빠져나갈 때까지 탐사선의 작동 시스템을 멈춤으로써 동력을 절약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지난 수년 동안 -달 탐사선은 2009년에 발사되었다- 미션 팀은 많은 경험을 쌓은 끝에 월식에 대비하는 자신감을 부쩍 키워왔다. 일례로, 최근의 월식 때는 일부 탐지기를 계속 작동해 월식 전후의 달 표면 온도를 측정하기도 했다. 그 결과 햇볕을 받을 때와 받지 않을 때 달 표면 온도가 극적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표면 온도는 놀랍게도 몇 분 만에 무려 156도의 차이를 보였다. "월식 때 달 표면이 이처럼 급격히 냉각되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달 표면 입자의 크기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고 로아 페트로 LRO 프로젝트 과학자는 밝혔다. 5억 400백만 달러(한화 약 6000억원)가 투입되는 달 정찰탐사 미션은 최고의 정밀도를 가진 달 표면 지도를 작성하는 것을 목표로 2016년 10월까지 그 기금을 조성할 예정이다. 탐사선은 조그만 차 크기 정도로, 모두 7가지 탐사장비를 탑재하고 있다. 물론 이들 장비 대다수는 월식 때 작동 중지될 것이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아하! 우주] 아득한 우주 거리, 과연 어떻게 잴까?

    [아하! 우주] 아득한 우주 거리, 과연 어떻게 잴까?

    -천문학자들의 줄자 ‘우주 거리 사다리’  100억 광년 밖의 은하를 관측했다느니, 1000만 광년 거리의 은하에서 초신성이 터졌다느니 하는 기사를 자주 보게 된다. 1광년이라면 1초에 30만km, 지구를 7바퀴 반이나 돈다는 빛이 1년을 내달리는 거리다. 이것만 해도 우리의 상상력으로는 잘 가늠이 안되는 거리인데, 천문학자들은 10억 광년이니 100억 광년이니 하는 그 엄청난 거리를 도대체 어떻게 재는 걸까? 물론 하루아침에 우주 측량술이 등장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천재들의 열정으로 갖가지 다양한 기법들이 차례로 개발되면서 이 엄청난 우주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우주 측량술이 정립되었다. 태양이나 달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려는 시도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행해져 왔지만, 하늘의 단위와 지상의 단위를 결부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천문학자들은 먼저 지구의 크기와 달과 태양까지의 거리를 구한 다음, 그것들을 기초로 삼아 가까운 별에서 더 먼 천체까지 차례로 거리를 측정하는 과정을 밟아왔다. 이런 식으로 단계별로 척도를 늘려나가는 측량 방식을 '우주 거리 사다리'(cosmic distant ladder)라 한다. 측량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것이다. 사람은 늘 측량한다. 인류가 지상에 나타난 그 순간부터 측량은 시작되었다. 측량이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측량에도 ‘천문’은 깊이 개입되어 있다.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기준으로 삼은 한 달의 날수가 바로 천문학적인 것이다. 또 미국과 미얀마 등 몇 나라만 빼고 전 세계가 쓰고 있는 미터법은 바로 지구의 크기에서 나온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불길이 채 잦아들기도 전인 1790년, 혁명정부가 도량형 통일을 위해 ‘미래에도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을 기준으로 1m를 정했는데, 그게 바로 북극과 파리, 적도에 이르는 자오선 길이의 1000만분의 1을 1m로 한 것이다. 곧, 북극점에서 적도에 이르는 거리의 1만분의 1이 1km인 셈이다. 그러니까 지구 한 바퀴는 4만 km가 된다. 오늘날 우리는 이 미터법으로 원자의 크기를 재고 우주의 넓이를 잰다. 삼각형 하나가 가르쳐준 ‘천동설’ 역사상 최초로 ‘우주 거리’를 잰 사람은 기원전 3세기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BC 310경~230)였다. 그가 우주 측량에 사용한 도구는 삼각형과 원, 그리고 하늘의 달이었다. 그러나 그 측량의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먼저 그가 월식을 관측하고 얻은 결과물을 살펴보도록 하자. 월식 때 월면은 지구에 대한 거울 구실을 한다. 월면에 지구 그림자가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때 지구 그림자를 보면 원형이다. 지구가 만약 삼각형이라면 그림자도 삼각형일 것이요, 편평한 판이라면 그림자도 길쭉하니 비칠 게 아닌가. 그런데 월식 때 보면 지구 그림자는 언제나 둥그렇다. 고대의 천문학자들은 이를 지구가 구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보았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월식 관찰은 여느 사람과는 달랐다. 월식으로 지구 그림자가 달의 가장자리에 올 때 두 천체의 원호 곡률을 비교함으로써 달과 지구의 상대적인 크기까지 알아냈던 것이다. 가히 천재의 발상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알아낸 값은 지구 크기가 달의 3배라는 사실이다. 참값은 4배이지만, 기원전 사람이 맨눈으로, 그리고 오로지 추론만으로 그 정도 알아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지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천재성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달이 정확하게 반달이 될 때 태양과 달, 지구는 직각삼각형의 세 꼭짓점을 이룬다는 사실을 추론하고, 이 직각삼각형의 한 예각을 알 수 있으면 삼각법을 사용하여 세 변의 상대적 길이를 계산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먼저 지구와 태양, 달이 이루는 각도를 쟀다. 87도가 나왔다(참값은 89.5도). 세 각을 알면 세 변의 상대적 길이는 삼각법으로 금방 구해진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달과 태양은 겉보기 크기가 거의 같다. 이는 곧, 달과 태양의 거리 비례가 바로 크기의 비례가 된다는 뜻이다. 아리스타르코스는 이 점에 착안하여, 다음과 같이 세 천체의 상대적 크기를 또 구했다. 태양은 달보다 19배 먼 거리에 있으며(참값은 400배), 지름 또한 19배 크다. 고로 달의 3배인 지구보다는 7배 크다(참값은 109배). 따라서 태양의 부피는 7의 세제곱으로 지구의 약 300배에 달한다고 결론지었다. 그의 수학은 정확했지만 도구가 부실했다. 하지만, 본질적인 핵심은 놓치지 않았다.  “지구보다 300배나 큰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돈다는 것은 모순이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구가 스스로 하루에 한 번 자전하며 1년에 한 번 태양 둘레를 돌 것이다.” 이로써 인간의 감각에만 의존해왔던 오랜 천동설을 젖히고 인류 최초의 지동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아리스타르코스의 주장은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신성 모독이므로 재판에 부쳐야 한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어쨌든 우주의 중심에서 인류의 위치를 몰아낸 지동설은 이렇게 한 천재의 기하학으로부터 탄생했다. 따지고 보면 직각 삼각형 하나가 인류에게 지동설을 알려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천재에게 마땅히 경의를 표해야 한다. 천문학사에 불멸의 이정표를 세운 아리스타르코스는 달 구덩이 가운데 하나에 그 이름이 붙여져 영원히 남게 되었는데, 그 중심 봉우리는 달에서 가장 밝은 부분이다. 작대기 하나로 지구의 크기를 잰 사람 아리스타르코스의 뒤를 이어받은 한 천재는 한 세대 뒤에 나타났다. 그가 바로 역사상 최초로 한 천체의 크기를 잰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에라토스테네스(BC 276~194)였다. 그가 잰 천체는 물론 지구였다. 에라토스테네스는 터무니없이 간단한 방법으로 인류 최초로 지구 크기를 쟀는데, 참값에 비해 10% 오차밖에 나지 않았다. 그가 이용한 방법은 작대기 하나를 땅에다 꽂는 거였다. 해의 그림자를 이용한 측정법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이 역시 기하학을 이용한 건데, 어느 날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거리다가 ‘남쪽의 시에네 지방(아스완)에서는 하짓날인 6월 21일 정오가 되면 깊은 우물 속 물에 해가 비치어 보인다’는 문장을 읽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리스 인들은 지역에 따라 북극성의 높이가 다른 사실 등을 근거로 지구가 공처럼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구체인 지구의 자전축은 궤도 평면상에서 23.5도 기울어져 있다. 하짓날 시에네 지방에 해가 수직으로 꽂힌다는 것은 곧 시에네의 위도가 23.5도란 뜻이다.(이 지점이 바로 북회귀선, 곧 하지선이 지나는 지역이다) 여기서 천재의 발상법이 나온다. 그는 실제로 6월 21일을 기다렸다가 막대기를 수직으로 세워보았다. 하지만 시에네와는 달리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막대 그림자가 생겼다. 그는 여기서 이는 지구 표면이 평평하지 않고 곡면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에라토스테네스가 파피루스 위에다 지구를 나타내는 원 하나를 컴퍼스로 그리던 그 순간,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이것은 수학적 개념이 정확한 관측과 결합되었을 때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가를 확인해주는 수많은 사례 중의 하나다. 에라토스테네스가 그림자 각도를 재어보니 7.2도였다. 햇빛은 워낙 먼 곳에서 오기 때문에 두 곳의 햇빛이 평행하다고 보고, 두 엇각은 서로 같다는 원리를 적용하면, 이는 곧 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 사이의 거리가 7.2도 원호라는 뜻이 된다. 에라토스테네스는 걸음꾼을 시켜 두 지점 사이의 거리를 걸음으로 재본 결과 약 925km라는 값을 얻었다. 그 다음 계산은 간단하다. 여기에 곱하기 360/7.2 하면 답은 약 46,250이라는 수치가 나오고, 이는 실제 지구 둘레 4만km에 10% 미만의 오차밖에 안 나는 것이다. 이로써 인류는 우리가 사는 행성의 크기를 최초로 알게 되었고, 이를 아리스타르코스의 태양과 달까지 상대적 거리에 대입시켜, 비록 큰 오차가 나는 것이긴 하지만 그 실제 거리를 알게 된 것이다. 2300년 전 고대에, 막대기 하나와 각도기, 사람의 걸음으로 이처럼 정확한 지구의 크기를 알아낸 에라토스테네스야말로 위대한 지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분은 또 수학사에도 이름을 남겼는데, 소수(素數)를 걸러내는 ‘에라토스테네스의 체’를 고안해낸 수학자이기도 하다. 달까지 거리를 ‘줄자’로 재듯이 잰 사람 에라토스테네스 다음으로 약 1세기 만에 나타난 걸출한 천재는 에게 해 로도스 섬 출신의 히파르코스(BC 190~120)였다. 그가 남긴 천문학 업적은 세차운동 발견, 최초의 항성목록 편찬, 별의 밝기 등급 창안, 삼각법에 의한 일식 예측 등 그야말로 눈부신 것이다. 그는 지구 표면에 있는 위치를 결정하는 데 엄밀한 수학적 원리를 적용하여 오늘날과 같이 경도와 위도를 이용하여 위치를 나타낸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돌던 팽이가 멈추기 전에 팽이 축을 따라 작은 원을 그리듯이 지구 자전축의 북극점도 그러한 모습으로 회전한다는 세차운동의 이론을 정립하고 그 값을 계산해냈다. 1년 동안 춘분점이 이동한 각도를 구하고, 360도를 이 값으로 나누어 구한 값이 2만 6,000년이었다.(오늘날의 그 참값은 25,800년). 히파르코스의 측량술은 달에까지 미쳤다. 그는 간단한 기법으로 달까지의 거리를 구했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시차(視差)였다. 한 물체를 거리가 떨어진 두 지점에서 바라보면 시차가 발생한다. 눈앞에 연필을 놓고 오른쪽 눈, 왼쪽 눈으로 번갈아 보면 위치 변화가 나타난다. 이처럼 하나의 물체를 서로 다른 두 지점에서 보았을 때 방향의 차이를 시차라 하는데, 천문학에서는 관측자의 위치에서 본 천체의 방향과 어떤 표준점에서 본 천체의 방향과의 차이를 말하며, 연주시차와 일주시차가 있다. 이 시차는 우주 거리를 재는 천문학자들이 가장 애용한 도구였다. 히파르코스는 두 개의 다른 위도상 지점에서 달의 높이를 관측해 그 시차로써 달이 지구 지름의 30배쯤 떨어져 있다는 계산을 해냈다. 이 역시 줄자를 갖다대 잰 듯이 참값인 30.13에 놀랍도록 가까운 값이었다. 이로써 그는 아리스타르코스가 구한 값(지구 지름의 9배)을 크게 수정한 셈이다. 이는 지구 바깥 천체까지의 거리를 최초로 정밀하게 측정한 빛나는 업적이었다. 히파르코스는 나이 쉰 살이 되어 로도스 섬 해변 가까운 산꼭대기에 천문대를 세우고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히파르코스 이후 적어도 300년 동안 그를 능가하는 천문학자는 태어나지 않았다. 그는 고대 그리스 시대 최고의 천문학자였다. 이광식 통신원 joand999@naver.com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9) 떠돌이 고아 출신 역관 (曆官) 김영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9) 떠돌이 고아 출신 역관 (曆官) 김영

    관상감은 천문과 지리를 비롯해 달력, 날씨, 시간 등을 맡아보는 관청인데, 영의정이 최고 책임자인 영사(領事)를 겸임할 정도로 중요한 관청이었지만 실제 업무는 중인들이 담당했다. 세조 때에는 관원 65명에 생도 45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영조 때에는 관원 150여명에 생도 60명으로 늘어났다. 경복궁 안과 북부 광화방에 관아가 있었는데, 청사와 함께 관천대(觀天臺)를 비롯한 관측시설이 있었다. 간의(簡儀)를 올려놓고 하늘을 관측하던 관천대는 첨성대(瞻星臺)라고도 불렸는데, 지금도 서울 계동 현대건설 앞에 남아 있는 관천대는 사적 제222호로 지정되었다. 경복궁이 불타버린 조선후기에는 창경궁에 다시 관천대를 만들어 보물 제851호로 지정되었다. ●이상한 별이 나타나면 관측해 기록하다 관상감의 관측제도는 ‘서운관지(書雲觀志)’ 권2 ‘측후(測候)’에 규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밤마다 5명이 숙직하며 관측해 기록했다. 지금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성변등록(星變謄錄)’에도 날마다 5명 관측자의 서명이 남아 있다. 성변(星變)은 별자리에 변화가 생겼다는 뜻. 혜성(彗星)이나 객성(客星)이 나타나면 천문학 관원들이 협의해 영사(領事)에게 알리고 관측을 시작했다. 혜성이 나타날 때부터 사라질 때까지의 움직임과 그 위치를 하루하루 관측하고 기록한 보고서를 성변측후단자(星變測候單子)라고 했으며 이 보고서들을 책으로 묶은 것이 등록(謄錄)이다. 이 보고서는 왕에게 보고되어 국정에 반영되었으므로, 관측자의 이름만 빼고 ‘승정원일기’에 거의 전문을 실었다. 현재 제대로 남아 있는 자료는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성변등록’뿐이다.1723년 9월21일 밤 1경에 여숙(女宿)에 나타난 혜성을 54명이 27일 동안 관측하였고,1759년 3월5일 밤 5경에 위숙(危宿)에 나타난 혜성을 35명이 25일 동안 관측하였으며,1759년 12월23일 밤 1경에 헌원(軒轅)자리에 나타난 객성을 21명이 11일 동안 관측하였다. 중인 출신의 천문학교수만으로는 부족해서 문관들도 많이 참여하였다. 이 가운데 1759년에 출현한 헬리 혜성에 대한 관측 기록은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사료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서울특별시에서 2007년 3월22일자로 ‘성변등록’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2호로 지정하였다. ●중인 역관(曆官)들의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역서 관상감은 천문학·지리학·명과학(命課學)의 3학으로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 천문학이 본학으로 가장 중요시되었다. 정성희 선생은 ‘조선후기 역서의 간행과 반포’라는 논문에서 “천문이나 역법에 대한 중요성이 높은 만큼, 그리고 전문성이 강조되었던 직책이던 관계로 관상감 관원의 실무(失務)에 대한 엄격한 처벌”이 따랐다고 하였다.“전통시대 천문학은 농사 절기에 대한 예보 기능 외에도 천인합일적(天人合一的) 성격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일식이나 월식, 오위(五緯 또는 5행성) 등 천문현상에 대한 정확한 예측과 예보가 중요했다.” “1710년에 관상감 관원이 월식 예보를 잘하지 못해 이를 감추려고 천변(天變)이라고 말했다가, 다시 월식으로 정정한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숙종은 월식을 천변으로 보고한 자와 추산(推算)을 담당한 관원을 처벌하도록 했다.” 역서(曆書)도 관상감에서 만들었는데, 일반 백성들은 천문학보다 역서를 통해 관상감의 존재를 실감했다. 조선초기에 4000여건에 지나지 않던 역서(曆書)가 조선후기에는 1만5000축이 넘게 간행 보급되었다. 일부 계층이 사용하던 역서가 보다 생활 깊숙이 대중적으로 사용되었음을 뜻한다. 물론 관상감 관원들이 종이를 사서 개인적으로 인쇄하여 판매하는 숫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역서를 위조하거나 제멋대로 인쇄한 자는 사형에 처했는데, 실제로 정조 1년(1777)에 책력을 사조(私造)한 죄로 이동이(李同伊)가 사형을 언도받았다. 역서 간행을 주도한 관원은 성력(星曆)을 계산한 삼역관(三曆官)인데, 삼역관 선발시험에 1등하는 사람을 부연관(赴燕官)으로 임명해, 수시로 북경에 가서 천문기계나 천문서적을 구입하는 특전을 주었다. 관상감 중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천문학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삼역관을 거쳐야 했다. 다른 관상감 기술직은 음양과에 합격하지 않아도 능력이 있으면 선발했는데, 삼역관만은 음양과 출신만 선발할 정도로 전문성이 강조되었다. 정조가 천재 과학자 김영을 삼역관으로 승진시키려 하자, 우의정 윤시동과 여러 역관들이 반대한 이유도 그가 음양과에 합격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사도세자 현륭원을 옮기기 위해 김영이 발탁되다 김영(金泳·1749∼1817)은 농사꾼 출신인데, 어려서 고아가 되어 이리저리 떠돌다 서울에 올라왔다. 중인 신분도 못되는 데다, 말도 어눌하고 용모까지 꾀죄죄했다. 산술(算術)에 타고난 재주가 있어 스승도 없이 혼자 공부했다. 너무 골돌하다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산가지를 늘어놓고 계산하다가 ‘기하원본(幾何原本)’을 구해 읽고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그의 제자 홍길주(洪吉周·1786∼1841)는 스승의 전기를 쓰면서 “혼자 ‘기하원본(幾何原本)’이라는 책 한 권을 가져다 읽은 뒤 그 이치를 모두 터득하여 산수에 있어서는 더 이상 익힐 것이 없게 되었다.”고 했다. 당대에 가장 이름 높았던 산학자 서호수가 관상감 제거(提擧·3품)로 있었는데, 김영의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몇 가지를 물어본 뒤에 자신의 실력보다 나음을 알았다. 그는 관상감의 책임자였던 영의정 홍낙성에게 김영을 추천해 관원으로 채용하였다. 김영은 그러한 인연으로 뒷날 홍길주의 집에도 드나들게 되었다. 홍길주는 김영이 관상감에 임용된 것은 “정조가 인재 등용하기를 좋아해, 남다른 재주로 이름난 자가 있으면 비록 지극히 미천한 자라도 남김없이 등용하던 시대 분위기 덕분”이라고 했다. 1789년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수원 화산으로 이장하는데 길일을 잡고 시각을 정하는 데에 문제가 생겼다. 중성(中星)의 위치를 측정한 지 50년이 지나 별자리의 위치가 1도 가까이 어긋나 있었고, 해시계와 물시계의 시간도 실제와 차이가 났다. 관상감사 김익이 8월31일 정조에게 아뢰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근본적으로 중성의 위치를 추산하여 그 궤도와 도수를 정해야 하는데, 만약 관측기구가 없으면 측정할 근거가 없습니다. 먼저 지평의(地平儀)와 상한의(象限儀) 및 새로운 해시계를 만들어 제대로 측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관상감의 감생 가운데는 제대로 추산할 수 있는 자가 매우 드무니, 역법(曆法)에 정통하다고 알려진 김영을 본감에 소속시켜 이 일에 참여하도록 한다면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음양과를 거치지 않았다고 관상감 관원들이 반대하다 세종대왕이 1434년에 만든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는 이름 그대로 솥 모양을 오목하게 파내고 영침(影針)을 세워 그림자가 변화하는 정도를 살펴 시각을 측정했다. 그런데 김영이 새로 만든 보물 제840호 지평일구(地平日晷)는 이름 그대로 해그림자를 받는 면을 평면으로 고쳐 만들었다. 중국의 지평일구(보물 제839호)가 수입되자, 그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그래프 용지에 1㎝ 간격으로 동심원과 10도 간격의 방사선을 그어놓고, 그 중심에 막대를 세워 시간에 따른 그림자의 변화를 보는 형태인데, 반구형 모습의 해시계 앙부일구를 전개하여 평면에 옮겨놓은 것과 똑같다. 김영이 처음 만들어내자 그 이후에도 여러 개가 제작되었는데, 재료는 보통 대리석이나 오석(烏石)을 썼으며, 놋쇠로 휴대용도 만들었다. 정조가 김영을 특채하려고 하자 관상감 관원들이 심하게 반대했는데, 홍길주가 그 사연을 기록했다.“관상감은 천문학과를 두어 사람을 뽑기 때문에 천문학과를 통해 조정에 들어온 자가 아니면 역법(曆法)을 제정하는 역관(曆官)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임금께서 특명을 내려 김영에게 역법을 제정하게 하시면서 ‘김영같이 남다른 재주를 지닌 자가 아니면 이런 예에 해당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니, 김영이 크게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당시 관상감 사람들이 모두 김영을 질시했으며,‘이는 우리 관직의 규율을 무너뜨리는 일이다.’라고 따졌다. 그러나 임금의 명이 있었으므로 끝내 그 누구도 크게 떠들지는 못했다.” ●정조 승하하자 벼슬에서 쫓겨나 굶어 죽다 중인들은 혼인은 물론, 교육과 관직도 몇몇 집안이 주고받았는데, 중인 출신도 아닌 김영이 중인의 전유물인 역관이 되었으므로 반대가 심했다. 서호수가 죽고 정조도 승하하자, 김영은 다른 관직으로 좌천되었다가 벼슬에서 쫓겨났다. 1807년과 1811년에 혜성이 나타나자 조정에서 관상감에 명해 혜성의 운행 도수를 계산해 올리라고 했는데, 아무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김영을 다시 불러들였다. 계산이 끝나자 그는 다시 쫓겨났는데, 그의 전기를 쓴 서유본은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면전에 욕하고, 주먹으로 때리기까지 했다.”고 기록했다. 그가 남의 집 어린아이에게 글을 가르치다 굶어 죽자, 관상감 생도가 그의 원고 상자를 훔쳐갔다. 미처 간행되지 못한 몇 권의 책은 다 없어지고,‘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나 ‘칠정보법(七政步法)’ 같은 책 끝머리에 그의 이름이 붙어 있을 뿐이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삼국사기 ‘진실’인가 ‘사기’인가…KBS1 ‘역사스페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역사서 ‘삼국사기’는 진실인가,사기(詐欺)인가. 1145년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 등 11명에 의해 편찬된 삼국사기는고구려 백제 신라 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유일한 책.고대 삼국연구에 기초가 돼 ‘고대 역사로 들어가는 창’,‘고대사의 바이블’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다. 하지만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내용이 틀린다’,‘편찬자 김부식이 사대주의적이다’등의 비판을 받으며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18일 오후8시 KBS 1TV ‘역사스페셜’은 이같은 학계의 논란을 조명하면서 새로운 해답을 제시해보는 시간을 마련한다.국내 사학자들의논쟁은 바로 280년경 중국 사람 진수가 쓴 ‘삼국지 한전’과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고대 삼국의 모습을 다르게 그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삼국지 한전’에 따르면 3세기 한반도는 70여개의 소국으로 나눠졌고 권역별로 소국들이 연맹을 해 마한 진한 변한으로 묶여있었다.이것은 이제껏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통설이다.반면 ‘삼국사기’에의하면 백제와 신라는 이미 1세기 후반에 여러 지역을 통합하고 상당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어 정면 배치된다. ‘역사스페셜’ 제작팀은 “풍납토성의 탄소 동위원소를 통한 연대측정 실험결과가 기원전후로 밝혀지면서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이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백제와 신라가 3세기 이전 강성한 고대국가로 성장해 있었다’는‘삼국사기’초기 기록에 처음으로 문제제기를 한 사람은 일본 역사계의 대부라 불리는 ‘츠다 소이치’씨.그가 논문을 낸 1919년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본격화되고,천황 중심의 역사관이 정립되던 때이다.그는 왜 이러한 주장을 했던 것일까? 혹시 고대 왜국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합리화 하기위한 포석은 아니었을까?제작팀은 이밖에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일식,월식 등 수많은 천문기록 조작주장에 대해 “최근 천문학계가 최첨단의 기술로 연구한 결과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보다 ‘삼국사기’에 적힌 천문기록이 더 정확하다는 사실을 알게됐다”며 반론을 편다. 제작을 맡은 우종택PD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고 조선을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책을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허윤주기자 r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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