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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태째 한가윗날 달리는 강명구씨 “할아버지 뵈러 갑니다”

    이태째 한가윗날 달리는 강명구씨 “할아버지 뵈러 갑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한가위를 가장 특별하게 보내는 이들 가운데 한 명일 것 같다.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120번째’를 들려주는 강명구(62) 평화 마라토너 얘기다. 120번째는 ‘세상에서 가장 먼 성묘 길’이란 제목을 달았다. 지난해 9월 1일 네덜란드 헤이그를 출발해 지난 24일 한가윗날 중국 랴오닝성 진저우 지역을 달리고 있다. 매일 40㎞씩 달려 다음달 초순 단둥에 도착해 북한 땅에 들어설 요량을 세우고 있다. 내처 평양에서 한바탕 신명나는 축제를 즐긴 뒤 판문점을 거쳐 경기도 파주부터 서울 광화문까지 이어 달릴 비원을 품고 있다. 아직 남북 어느 쪽도 신의주 관문을, 휴전선을 열어주겠다는 확답을 주지 않고 있지만 그는 오늘도 달리고 있다. 그가 한가위를 맞고 보내는 감회를 담은 글을 담담히 적어 여기 옮긴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중국의 시 중에 ‘달은 고향의 것이 더 밝네.’라는 시가 있다. “모든 사람들은 고향이 있고, 고향마다 달이 있지만 사람들이 고향의 달만 사랑한다.” 지금은 랴오닝 성의 진저우 지역을 달리고 있다. 중국의 하늘에도 달이 휘영청 떠오르는데 고향의 달이 그립다. 작년 추석에 이어 올 추석도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는 마음이 애틋하다. 그러나 지금 마음속에 보름달처럼 꽉 차오르는 꿈을 안고 달리는 발걸음엔 힘이 붙는다. 좀 늦어지겠지만 이 길은 난생처음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하러 가는 세상에서 가장 먼 성묘 길이다. 나는 1만 5000㎞를 달려서 성묘하러 가는 길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어느 나라도 추석과 비슷한 명절은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각별한 추석은 없다.그 속에 유교적인 전통이 어우러진 조상과 가족, 마을 공동체, 고향의 끈끈한 연이 녹아 있다. 그 추석날 모두들 즐거워하지만 마음이 아파오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실향민들이다. 나는 할머니와 아버지, 작은아버지들의 아픔을 지켜보면서 자라며 슬픔을 물려받았다. 잠시 이별인줄 알았던 핏줄을 영영 보지 못하는 아픔을 안 당해본 사람들이 어찌 알겠는가? 이산가족 대부분이 고령인 점을 고려하면 늦었지만 남북 모두의 큰 결단이 절실하다. 중국의 중추절은 단오절, 청명절, 춘절과 함께 4대 전통명절이다. 월요일이지만 공휴일이라 아침의 거리는 한산하고 공원에는 모여서 기공 체조하는 사람들과 수십명의 아주머니들이 무지갯빛 부채를 들고 군무를 추는 모습과 둥그렇게 둘러서서 제기차기 모습이 정겹다. 자주 보는 모습이지만 이 사람들 제기 차는 발기술이 대단하다. 발을 앞발 뒷발 다 사용해서 제기를 차는 모습이 마치 무술영화의 신공 같기도 하다. 이렇게 발재주들이 좋은 사람들이 왜 축구에서는 공한증에 떠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이다. 추석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우리나라에 송편이 있다면 중국에는 월병이 있다.영어로는 Moon cake라고 부르는 것이다.보름달 모양으로 둥근 빵에 돼지기름, 설탕, 달걀, 호도, 밤 등 견과류를 넣어서 만들어 중추절이 되면 보름달에 이 빵을 바쳐 가족의 행운과 안녕을 비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월병은 중추절에 가장 많이 주고받는 선물이고 종류도 다양해지고 있다고 한다. 월병의 역사는 은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다 장건이 비단길을 열고 서역으로부터 호두와 깨가 들어오면서 그것을 월병 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호두로 만든 월병을 호병(胡餠)이라고 불렀다. 중추절 밤 당 현종이 달을 보며 양귀비와 호병을 먹다가 호병의 호자가 오랑캐 호자를 연상시킨다고 투덜거린다.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며 보름달의 정취에 젖어있던 양귀비는 자신도 모르게 ‘월병’이란 말을 내뱉었다. 호병이 월병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중국의 중추절은 달구경이나 가을잔치의 개념이지만 우리의 추석은 대동제의 성격이 강하다. 월병은 꽉 찬 보름달과 같고 송편은 반달과 같다. 보름달은 기울어갈 것이고 반달은 차츰 커져서 만월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미래지향적이었다. 이제 그리도 오랜 세월 꽉 찬 보름달이 되고픈 우리가 바야흐로 통일을 이루어 꽉 찬 보름달 같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세계를 향한 대동제를 신명나게 펼쳐나갈 때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추석을 맞아 한국의 극장가에서는 ‘안시성’이라는 영화가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하는 것 같다. 안시성은 내가 지금 지나는 후루다오와 진저우를 조금 더 가면 랴오닝성 하이청(海城)의 동남쪽에 있는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당나라군은 안시성을 공격하기 전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을 함락했다. 당군은 이제 안시성을 함락하기 위해 총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성과가 없자 당 태종 이세민은 안시성보다 높은 토산을 쌓아 성으로 쉽게 넘어가려 했다. 60여일 만에 토산이 완성되었는데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고 안시성 성주 양만춘과 병사들이 새벽에 기습 공격해 토산을 점령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당나라 보급을 맡은 수군이 풍랑을 만나 몰살당하는 상황에 이르자 88일 만에 이세민은 전군에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때 양만춘 장군이 추격하다가 당 태종의 눈에 화살을 정확하게 박았다. 이 지역이 옛 고구려의 땅이었거니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이 부근에는 석유시추공이 수없이 보인다. 갑자기 배가 아파진다.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하자 이곳은 요동지역에서의 고구려 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신채호는 그의 <조선사 연구초>에서 하이청 부근을 고평양(古平壤), 즉 고조선의 옛 수도라고 지목했다. 고평양이니 고조선이니 하는 말 앞에 ‘고(古)’자가 붙은 것은 후의 평양,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 학자들이 붙인 말일 것이니 이곳에 진짜 우리의 평양이 있었고 조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일대가 고구려의 중심지였다. 나는 가끔 내 안에 광개토대왕 유전자가 있어 ‘만주벌판을 달리는 꿈을 꾸었나!’하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는 지금 그의 위엄에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의 땀과 그의 말의 땀방울이 떨어졌을 이 땅 위에 나의 땀을 섞으며 할아버지 묘소에 성묘하러 가고 있다. 개인적인 성묘 길에 ‘남북평화통일’이니 ‘세계평화’니 하는 거창한 표어를 내걸어서 미안한 생각이 든다. 다시 한 번 고백하지만 나는 통일열사로 교육받거나 거창한 사상이나 이념 같은 것 없다. 더군다나 평화운동가로 내 인생의 목표를 삼은 적도 없었다. 내 체력이란 것도 그리 대단한 것이 못되어 시작할 때 나는 내 자신도 이렇게까지 거뜬하게 달려올지 의심했었다. 그러니 나를 열사니 초인이니 이런 말로 오글거리지 않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70여 년간 남북 무장군인 백만여 명이 철통같이 지켜낸, 안시성보다 더 견고한 저 삼팔선을 뚫고서 성묘 갈 길은 도저히 없었다. 그래서 1만 5000㎞나 되는 우회로를 생각해냈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성묘 길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북평화통일’이니‘세계 평화’란 간판을 도용했다.그러니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죗값을 단단히 치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힘들게 먼 길을 오는 동안 기적 같이 평화가 내 길동무를 해주었다. 평화가 내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어 행진하여주었다. 내가 성묘를 다녀오고 또 누군가가 성묘를 다녀올 수 있다면, 추석 하루만이라도 성묘 길을 열어준다면. 그 길은 성묘 길이 되고, 그 길은 수학여행 길이 되고, 또 신혼 여행길이었다가 자유왕래길이 될 것이니 내가 ‘남북평화통일’이니 ‘세계 평화’란 간판을 도용한 것을 나무라지 말고 앞으로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평화운동가로 행세를 하더라도 크게 나무라지 말고 용기를 주었으면 좋겠다.다만 열사니 초인이니 이런 말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으니 피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중국의 동해안 길을 따라 달리는 길에 가을바람이 넉넉해서 달리기에 더없이 좋다.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북한 학계, 15년 논쟁 끝은 ‘낙랑군=요동설’… 그 중심엔 리지린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북한 학계, 15년 논쟁 끝은 ‘낙랑군=요동설’… 그 중심엔 리지린

    북한은 고조선의 강역과 한사군의 위치 문제 등을 놓고 치열하게 논쟁했다. 논쟁은 주로 문헌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전개됐다. 문헌사학자들은 중국의 고대 문헌사료를 근거로 고조선의 강역이 지금의 요하(遼河) 서쪽까지 걸쳐 있었다고 보았다. 이에 맞서 과학원 산하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 소장이었던 고고학자 도유호는 1960년 4월 ‘고고학상으로 본 고조선에 대한 과학 토론회’에서 “고조선 국가의 영역은 오늘날 대동강을 중심으로 한 일대이며 그 북계를 이룬 패수는 청천강이다”라고 달리 주장했다. 문헌사학자들이 고조선이 요하 서쪽까지 차지한 제국이었다고 본 반면 도유호는 평안남도에 국한된 작은 소국이었다고 주장한 것이다.그러나 모든 고고학자가 도유호의 견해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이 토론회 때 중앙역사박물관 관장 황욱은 “고조선의 강역을 압록강 이남만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으며, 요하(遼河) 일대도 고조선의 강역”이라고 주장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고고학 연구실 소속의 전주농, 정찬영 등은 도유호의 견해를 지지했지만 중앙역사박물관의 황욱, 백연행 등은 문헌사학자들의 학설을 지지했다. 이 문제를 두고 북한 고고학계가 둘로 갈라진 것이다.●7차례 걸친 치열한 ‘고조선 토론회’ 고조선에 대한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과학원 역사연구소는 1961년 6월 21일부터 9월 21일까지 3개월간 7차례나 ‘고조선에 관한 과학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에서 과학원 원사 백남운과 과학원 고전연구실장 리상호, 언어문화연구소 교수 정렬모, 중앙당학교 조선사 강좌장 림건상, 김석형 등의 문헌사학자들은 대부분 ‘고조선의 중심지=요동설’을 지지했다. 중국 고대 문헌사료에 고조선과 낙랑군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는 기사가 다수 나오는 상황에서 요동설이 당연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자 도유호는 유물사관에 기대어 평양설을 주장했다. 그는 ‘문화유산’ 1962년 3호의 ‘신천 명사리에서 드러난 고조선 독널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고조선을 논하는 마당에 먼저 문제로 되는 고고학적 자료는 바로 고조선 유물이다. 그것은 가장 본질적인 것이며 기본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조선 유물이 다수 출토된 평양이 유물사관에 따라 고조선의 중심지라는 주장이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조선 유물이 전연 보이지 않는 고장에서 중국 갈래의 유물을 들고서 여기가 고조선 자리라고 하여서는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다”라고 반박하면서 “누가 아무리 무어라고 하던 간에 낙랑군 치지(治地:다스리던 곳)는 처음부터 평양에 있었다”고 다시 한번 ‘고조선의 중심지=낙랑군=평양설’을 주장했다. 그 시점까지의 고고학 연구 성과로 본다면 도유호의 주장이 아주 그르다고 볼 수는 없었다. 북한이 중국과 ‘조·중고고발굴대’를 조직한 것은 1963년이고, 이듬해 요동반도 남단 여대(旅大:여순과 대련)시에서 고조선 무덤인 강상무덤과 누상무덤을 발굴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중국의 요령성은 물론 하북성과 내몽골 일대까지 고조선의 표지유물인 ‘비파형동검’ 등이 다수 쏟아질 줄 알았다면 도유호도 일찌감치 손을 들었을 것이다.●반박하던 ‘지도교수’ 구제강도 결국 수긍 북한에서 고조선의 강역과 낙랑군의 위치에 관한 논쟁이 계속되는 동안 베이징대 대학원으로 유학 간 리지린은 고사변학파의 구제강(顧剛)을 지도교수로 박사논문에 여념이 없었다. 1957년쯤부터 베이징을 오가던 리지린은 1960년 12월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위한 구두시험을 치렀다. 구제강은 자신의 일기(구제강 일기·顧剛日記:8권)에서 “리지린은 자신의 민족적 자존심을 위해서 한사군의 위치를 우리나라의 동북쪽으로 보고 패수(浿水)를 요수(遼水)로 보았다”고 썼다. 구제강은 1961년 9월 29일자 일기에는 “오늘의 시험은 사실상 형식적인 것이다. 국제적인 우호관계를 위해서 그 결점을 지적하지 않고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리지린은 단순히 ‘민족적 자존심’ 때문만이 아니라 중국의 수많은 문헌사료를 가지고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를 북한이 아니라 고대 요동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구제강은 리지린의 견해를 반박할 만한 근거가 없었다. 그 자신이 일기에서 “조선의 유학생을 위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4사(史)의 동이전을 세밀하게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나도 적지 않은 수확이 있었고, 이렇게 발견한 문제들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 두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리지린를 제자로 받고 나서야 문제의식을 갖고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4사란 ‘사기’, ‘한서’, ‘삼국지’, ‘후한서’ 등 중국 고대의 4개 역사서를 뜻한다. 구제강은 리지린의 논문에 대한 평가를 대학 당국에 제출했는데, 먼저 리지린이 고대 조선족이 현재 중국 영토에 광범위하게 존재했고 그 중심을 요서와 요동 일대라고 서술했다고 정리했다. 구제강은 리지린의 논문이 “문장이 번잡하고 중첩돼 견해 파악이 어려워 설득력이 떨어진다.”, “자의적이고 견강부회적으로 역사를 해석했다.”, “객관적 연구를 표방했으나 민족주의적 속박에 사로잡혀 있다”는 식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구제강의 비판은 대부분 총론에 불과했다. 구체적인 비판으로는 예를 들면 “기자(箕子)와 그 후예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기(箕)를 왕(王)을 의미하는 조선어 ‘검’과 관련되었다고 본다”는 것 등 지엽적인 것에 불과했다. 구제강은 리지린이 고조선 관련 현존 자료의 95%를 읽었다고 시인한 것처럼 고대 4사는 물론 ‘관자’(管子), ‘산해경’, ‘전국책’, ‘진서’, ‘구당서’, ‘수경주’ 등 수많은 중국 사료를 인용해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를 논증한 것을 반박할 방법이 없었다. ●고대 4사·수많은 中 사료 인용해 논증 리지린은 어떤 측면에서는 북한 학계가 ‘낙랑군=평양설’을 완전히 무너뜨리기 위해 준비한 일종의 비밀병기였다. 중국의 수많은 문헌사료에 나오는 고조선과 한사군의 위치를 베이징대 박사논문으로 재확인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리지린은 1961년 8~9월에 열린 ‘고조선의 생산력과 국가형성’에 대한 토론회에 참석해 그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이미 베이징대에서 통과됐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에 그의 참석은 큰 관심을 끌었다. 이 토론회에서 리지린은 그간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고조선의 강역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했고, 과학원 원사 백남운은 “고조선은 압록강 이북과 요서, 요동지방에서 찾아야 하며 점차 동쪽으로 옮겨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리지린의 견해에 힘을 실어 주었다. ●남한 학계는 토론 없이 정설로 받아들여 이 토론회를 기점으로 1963년 리지린의 박사학위 논문인 ‘고조선연구’가 출간되면서 북한 학계의 고조선사에 대한 정리는 일단락됐다. 고조선의 강역에 관한 리지린의 핵심 논리는 서기전 5~4세기쯤까지는 고조선의 강역이 지금의 하북성 난하(河)부터 압록강 북부까지 걸쳐져 있었다가 서기전 3세기쯤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에게 1천~2천리의 강역을 빼앗긴 후 요령성 대릉하(大陵河)까지로 축소됐다는 것이다. ‘고조선연구’가 간행되면서 북한 학계에서 ‘낙랑군=평양설’은 자취를 감추었다. 중국의 방대한 문헌사료는 물론 중국에서 출토된 여러 고고학 사료들을 가지고 고조선의 강역이 때로는 중국 하북성까지 걸쳐 있었다고 논증했는데, 평양 부근의 일부 고고학 유물들, 그것도 일제의 조작설이 만연했던 고고학 유물들만 가지고 ‘낙랑군=평양설’을 더이상 주장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북한 학계는 거의 15년 이상에 걸친 치열한 논쟁을 거쳐 ‘낙랑군=요동설’을 확립시키면서 ‘낙랑군=평양설’을 무너뜨렸다. 남한 학계가 지금까지 이 문제에 대한 논쟁다운 논쟁 한번 하지 않고 조선총독부에서 확립시킨 ‘낙랑군=평양설’을 100년 전에 확립된 ‘정설’이라고 우겨 온 것에 비춰 보면 전체주의라고 비판받던 북한 학계가 이 문제를 두고 치열하게 토론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채롭다. ■리지린 ‘고조선연구’ 논문 現중국 요서·요동지역 고고학 발굴까지 논증 리지린은 ‘고조선연구’ 8장에서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본 고대 조선 문화의 분포”라는 제목으로 현재의 중국 요서·요동지역의 고고학 발굴 결과까지 언급했다. 리지린은 한반도와 중국 요령지역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을 가지고 고조선 강역이 지금의 요서지역까지 차지했다고 주장했다. 한 예로 요령성 서쪽의 조양(朝陽)시에서 서기전 5세기쯤의 동검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조양에서 발굴된 청동검의 사용자는 고대 조선인이었다고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방대한 문헌사료는 물론 다양한 고고학 자료를 가지고 “기원전 3세기 초까지 고조선의 영역은 현 난하(하북성) 부근 영평부 지역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하는데, 평양 일대의 한정된 고고학 자료만을 근거로 삼는 도유호 등의 논리는 더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압록강 서북쪽 ‘철령’은 요동… 일제때 함경남도 안변이라 우겼다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압록강 서북쪽 ‘철령’은 요동… 일제때 함경남도 안변이라 우겼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자국사가 암기과목이 된 유일한 국가일 것이다. 국정·검인정을 막론하고 교과서에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가 많으니 따지지 말고 외우는 것이 점수 잘 맞는 유일한 방법이 됐다. 철령의 위치도 그중 하나다. 고려 우왕 14년(1388)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한 것은 한국사의 줄기를 바꿔 놓았다. 이에 반발한 우왕과 최영이 요동정벌군을 북상시켰는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조선을 개창했기 때문이다. 조선 개창의 계기가 된 철령위에 대해서 현재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고려 후기 명나라가 안변(安邊), 곧 철령 이북의 땅에 설치하고자 했던 직할지”라고 설명하고 있고 국정·검인정 교과서도 이를 따르고 있다.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한 곳이 함경남도 안변이란 것이다. 철령위를 설치한 곳은 동쪽인 함경남도 안변인데, 정작 고려군사는 왜 동쪽이 아니라 북쪽인 요동으로 향했을까? 앞뒤가 안 맞으니 따지지 말고 외우는 수밖에 없다. ●철령 두고 다투는 주원장과 고려 우왕 철령은 명나라의 정사인 ‘명사’(明史)에 다수 나온다. ‘명사’ ‘조선열전’은 철령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이보다 앞서 원나라 말기에 요심(遼瀋:요양과 심양)에서 병란(兵亂)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난을 피해 고려로 이사했다. 황제(명 태조 주원장)가 고려의 말을 사는 기회에 수색령을 내리자 요심 백성 300여호가 돌아왔다.”(‘명사’ ‘조선열전’) 원나라 말기 요령성 일대에서 병란이 일어나자 백성들이 고려로 이주하면서 철령의 귀속 문제가 발생했다는 설명이다. 시작부터 요령성에서 발생한 이야기지 함경남도에서 발생한 이야기가 아니다. 명 태조 주원장은 홍무(洪武) 20년(1387) 12월 우왕에게 국서를 보내 이렇게 통보했다. “철령 북쪽과 동서의 땅은 예부터 (원나라) 개원로(開元路)에 속해 있었으니 (명나라) 요동에서 다스리게 하고, 철령 남쪽은 예부터 고려에 속해 있었으니 본국(고려)에서 다스리라. 서로 국경을 확정해서 침범하지 말라.”(‘명사’ ‘조선열전’) 주원장이 철령의 동서북쪽은 명나라 땅이고, 남쪽은 고려 땅이라고 통보하자 우왕은 요동정벌군을 북상시키는 한편 재위 14년(1388) 4월 표문을 보내 “철령 땅은 실로 우리 조상 대대로 지켜왔으니 예전처럼 고려 땅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주원장은 “고려는 예전에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삼았는데 지금은 철령이라고 꾸미니 거짓임이 분명하다”면서 불화의 단서를 만들지 말라고 받아쳤다. 압록강이 고려 경계라는 주원장의 말은 압록강 서북쪽이 명나라 땅이라는 주장이지 함경남도가 자국령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두 임금은 압록강 서북쪽을 가지고 다투는 것이지 함경남도는 관심 사항 자체가 아니다. 주원장은 철령을 개원로(開元路) 소속이라고 말했는데, 개원로는 원나라가 요동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했던 관청이다. 그 치소(治所·다스리는 관청)를 중국에서는 지금의 길림(吉林)성 장춘(長春)시 북쪽 농안(農安)현으로 보고 있다. 주원장이 고려 국경선을 압록강이라고 주장하는 배경은 고려 고종 45년(1258)의 사건에 있다. 이해 고려의 반역자 조휘(趙暉)·탁청(卓靑) 등이 화주(和州) 이북의 땅을 들어서 항복하자 원나라는 여기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하고 자국령으로 삼았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자국사가 암기과목이 된 유일한 국가일 것이다. 국정·검인정을 막론하고 교과서에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가 많으니 따지지 말고 외우는 것이 점수 잘 맞는 유일한 방법이 됐다. 철령의 위치도 그중 하나다. 고려 우왕 14년(1388)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한 것은 한국사의 줄기를 바꿔 놓았다. 이에 반발한 우왕과 최영이 요동정벌군을 북상시켰는데,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조선을 개창했기 때문이다. 99년 후인 공민왕 5년(1356) 5월 공민왕은 이 땅을 되찾기 위해 평리(評理) 인당(印)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삼아 “압강(鴨江:압록강) 서쪽 8참(站)을 공격”하게 하고,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두만강을 건너게 했다. 이 구강수복전쟁으로 고려는 압록강~두만강 북쪽의 옛 강역을 수복했는데, 명 태조 주원장이 압록강 서북쪽에 철령위를 설치하자 우왕이 반발한 것이다.●중국 사료가 말하는 철령의 위치 ‘명사’ ‘지리지’에 따르면 철령위는 둘이 있다. 하나는 주원장이 홍무 21년(1388) 옛 철령성에 설치했던 ①철령위다. 또 하나는 고려의 반발에 밀려 홍무 26년(1393) 북쪽의 옛 은주(銀州)로 이전한 ②철령위다. ①·② 두 철령의 위치를 정확하게 특정할 수 있다. ‘명사’ ‘지리지’는 철령의 위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철령 서쪽에는 요하(遼河)가 있고 남쪽에 범하(汎河)가 있다. 또 남쪽에 소청하(小河)가 있는데, 모두 요하로 흘러들어간다.” 철령이 함경남도 안변이면 그 서쪽이 랴오닝성 요하일 수는 없다. 또한 근처의 모든 강이 요하로 흘러갈 수도 없다. ‘명사’ ‘지리지’는 또 ①철령위에 대해서 “봉집현(奉集縣)이 있는데, 즉 옛 철령성으로서 고려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홍무 초에 현을 설치했다가 곧 폐지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려와 경계를 접했다는 봉집현이 명나라에서 ①철령위를 설치했다가 고려의 반발 때문에 폐지한 철령이라는 설명이다. 봉집현의 위치는 ‘요사’(遼史) ‘지리지’에 나온다. 거란족이 세운 요(遼:916~1125)나라 ‘집주(集州)·회중군(懷衆軍)’에 봉집현이 있었는데, 원래는 발해가 설치한 현이라는 것이다. 중국학계는 ①철령위가 있던 봉집현을 현재 심양(瀋陽) 동남쪽 55㎞ 진상둔진(陳相屯鎭) 산하 봉집보(奉集堡)로 보고 있다. 요령성 본계(本溪)시 조금 북쪽인데, 이 일대는 원래 철광(鐵鑛)으로 유명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철령(鐵嶺)이란 이름으로 불린 것이다. 중국 학계에서도 요령성 진상둔진이라는 철령위를 한국 학계는 함경남도 안변이라고 우긴다. ‘요사’ ‘지리지’는 또 봉집현이 속해 있던 집주·회중군은 “한나라 때는 요동군 험독현(險瀆縣)에 속해 있었다”고 말한다. 요령성 진상둔진이 위만 조선의 도읍지 자리에 세운 한나라 요동군 험독현 자리라는 기록인데, 한국 학계는 위만조선의 도읍지를 지금의 평양이라고 우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명나라는 요령성 진상둔진에 ①철령위를 설치했다가 고려에서 강하게 반발하자 홍무 26년(1393) 심양 북쪽의 고 은주(銀州)로 이전하고 ②철령위를 설치했다. ②철령위는 현재 심양 북부에 있는 철령(鐵嶺)시 은주구(銀州區)다. ①철령위나 ②철령위나 모두 요령성 내에 있었다. ●후세 교육까지 망치는 식민사관 여진족이 세운 금(金·1115~1234)나라의 정사인 ‘금사’(金史) ‘지리지’는 “봉집현은 본래 발해의 옛 현이다. 혼하(渾河)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혼하는 심양과 본계 사이를 흐르는 강이다. 중국 사료들은 주원장이 1388년 설치했던 ①철령위는 심양 남쪽 진상둔진이고, 1393년 이전한 ②철령위는 심양 북쪽 철령시 은주구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케우치 히로시는 1918년 ‘조선 우왕 때의 철령 문제’에서 함경남도 안변을 철령이라고 우겼다. 안변 남쪽에 철령(鐵嶺)이라는 고개가 있는 것에 착안한 대사기극인데, 이를 조선총독부의 이나바 이와기치, 조선사편수회 간사이자 경성제대 교수인 쓰에마쓰 야스카즈가 뒤를 따랐다. 그리고 “일본인 스승님들 말씀은 영원히 오류가 없다”라는 한국 역사학자들이 100년째 추종 중이다. 나아가 이 사기극을 국정·검인정 교과서에 실어서 미래 세대들의 정신세계까지 갉아먹고 있는 중이다. 선조들의 피 서린 강토와 역사를 팔아먹고, 나라의 미래까지 팔아먹고 있건만 이를 바로잡아야 할 책임 있는 당국자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인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다.
  • 마오쩌둥 “요동지역은 조선민족 땅… 역사에 써야”

    마오쩌둥 “요동지역은 조선민족 땅… 역사에 써야”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공산당 주석과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북·중 간 국경획정 협상을 하던 1958∼1964년 북한 주요 인사들과 만나 요동 지역이 원래 조선 민족의 땅이었음을 확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이종석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2월 10일 펴낸 ‘북한-중국 국경획정에 관한 연구’ 제목의 연구보고서에서 마오 주석이 1958년 11월 당시 김일성 수상을 만난 자리에서 “당신들 선조는 당신들의 영토가 요하를 경계로 한다고 말했으며, 당신들은 현재 당신들이 압록강변까지 밀려서 쫓겨왔다고 생각한다”며 “당신이 역사를 기술할 때 이것을 써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또 마오 주석은 북·중 국경획정이 끝난 직후인 1964년 10월에도 베이징을 방문한 최용건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북한대표단에도 “당신들의 경계는 요하 동쪽인데, 봉건주의가 조선 사람들을 압록강변으로 내몬 것”이라며 “봉건주의는 가혹한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이 같은 마오 주석의 발언은 중국 외교부가 펴낸 ‘모택동접견외빈담화기록’에 실려 있다. 저우 총리도 1963년 6월 북한 과학원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으며 심지어 예로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밝혔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28일 “두 지도자의 발언으로 보아 이것이 당시 중국 정부의 정리된 공식 입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중국 학자들의 주장은 신중국을 창시한 중국 지도자들의 인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안석 기자 ccto@seoul.co.kr
  • “백제 멸망시기 8세기 중반~ 9세기 초로 봐야”

    백제사를 7세기 후반 한반도에서의 멸망 시점이 아니라 백제 유민들이 당나라 요동의 건안고성(建安故城)에서 재건한 왕국이 발해에 병합된 8세기 중반 내지 9세기 초반까지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는 20일 “당은 보장왕을 수반으로 한 고구려 유민들을 요동에 거주시켰고, 이 집단이 소(小)고구려의 기원이 됐다. 당이 웅진도독 부여웅을 수반으로 하는 백제 유민 집단을 건안의 고성으로 이주시킨 것도 이와 유사한 사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즉, 건안고성에서 존속된 백제 유민 집단도 소백제로서 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지적이다. 백제의 멸망시점은 31대 의자왕이 나당군에 항복한 660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이 교수는 당이 백제에 설치한 행정관청 웅진도독부를 백제부흥운동의 연장선상으로 파악해 웅진도독부가 신라의 공격으로 해체된 672년을 백제사의 종지부로 주장해 왔는데 이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다. 이 교수는 이에 대한 근거로 ‘삼국사기’와 중국 역사서 ‘구당서’ ‘신당서’에 기록된 “그 땅(백제)은 이미 신라·발해말갈에게 분할되어 국계(國系)가 끊기고 말았다.”는 구절을 지목했다. 백제 영역이 신라로 넘어간 건 맞지만 발해말갈로 분할되었다는 내용은 기존의 통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어서 이 구절은 오류로 간주돼 왔다. 하지만 당나라는 676년 건안고성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해 유민들을 모여살게 하고, 이듬해 백제의 태자 부여웅을 웅진도독 대방군왕에 봉해 통치하게 했다. 이 교수는 “부여융은 조부인 무왕이나 부왕인 의자왕이 당으로부터 부여받았던 대방군왕 관작(官爵)을 동일하게 습봉하였다.”면서 “실질적인 독립국은 아니더라도 명목상 백제 왕국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건안고성에 재건된 백제는 언제까지 존속했을까. 이 교수는 “이 문제는 발해의 요동 지배시점과 맞물려 있다. 건안고성의 백제 왕국은 8세기 중반이나 9세기 초반 어느 때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뻗친 발해에 병합되었다.”면서 “‘삼국사기’등 사서에 기록된 ‘발해말갈에 분할되었다’는 구절은 이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런 내용을 담은 논문 ‘당에서 재건된 백제’를 다음달 6일 부산 경성대 인문학연구소가 주최하는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발로 뛰어 뒤져낸 동이족 문명

    요동지역 랴오허 문명(遼河·BC 6000년경)은 황허문명(BC 5000년경)보다 훨씬 먼저 동북아시아 지역에 화려한 문명의 꽃을 피웠다. 중국은 이 문명을 중국 역사 속으로 끌고 갔지만, 사실 그 중심에는 한족이 아니라 동이(東夷)족이 서 있었다. 지은이들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이를 ‘발해연안문명’이라 이름 붙였다. 발해연안에 터를 잡고 은(殷), 고죽국, 고조선, 부여 등의 국가를 세운 동이족의 문명을 고고학적 방법론과 유물 및 사료를 통해 되살려 냈다. 고문서와 박물관 유물만 뒤진 것이 아니라 직접 옛 동이족 활동지역에 있는 유적들을 찾아가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하고자 했다. 동이와 한족의 격전지였던 청쯔산·싼줘뎬 유적, 동이족 마을인 차하이·싱룽와 지역, 웅녀의 원형이 나타난 둥산쭈이 지역 등 동북아 일대를 답사했다. 지은이 이형구 교수는 평생 동북아 지역의 고고학을 연구한 인물. 공동 저자인 이기환 기자는 문화재 전문기자로 수년간 각종 현장을 발로 누볐다. 1년간 신문에 연재한 글을 대폭 수정·보완해 책으로 묶은 것. 학자 글쓰기의 치밀함과 기자 글쓰기의 대중성을 두루 갖췄다. 유적지, 출토 유물, 발굴현장 등 다양한 모습을 담은 사진과 지도도 삽입해 보는 재미와 더불어 이해를 돕는다. 1만 7500원.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9)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19) 심하전역과 인조반정 Ⅰ

    광해군은 노회한 명과 사나운 후금 사이의 대결 속으로 말려들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가 정보를 수집하고, 기미책을 강구하며, 자강 능력을 배양하려 애썼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정세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비록 외교적 노력을 통해 누르하치와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었다. 누르하치가 명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 한, 그 때문에 양자의 관계가 갈등으로 치닫는 한, 조선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1618년(광해군 10) 누르하치가 푸순성을 함락시킨 이후 벌어졌던 일련의 상황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출병 여부를 둘러싼 갈등 명은 관응진(官應震) 등이 주장한 이이제이책(以夷制夷策)에 따라 조선도 병력을 내어 후금을 공략하는 데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1618년 윤 4월, 명의 병부시랑(兵部侍郞) 왕가수(汪可受)는 조선에 보낸 격문(檄文)에서 병력을 뽑아 별도의 기별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고 요청했다. 형식은 요청이지만 사실상 ‘지시’였다. 명의 통첩을 받았을 때 조선 조정의 의견은 확연히 갈라졌다. 광해군은 파병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는 먼저 조선의 군사적 역량이 미약한 것을 이유로 들었다. 그는 1618년 5월1일, 신료들에게 내린 교시(敎示)에서 ‘병(兵)과 농(農)이 분리되지 않은 조선의 병력을 동원해 봤자 후금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므로 굳이 병력을 보내야 한다면 수천명 정도를 의주(義州) 등지에 대기시켜 기각(角)의 형세를 이루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설사 군대를 동원하더라도 국경 바깥으로 출전시킬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광해군은 명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했다. 그는 후금의 군사력이 막강하므로 명의 원정군이 일거에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오랜 동안 후금 관련정보를 수집함으로써 내릴 수 있었던 결론이자 판단이었다. 광해군은 명에 보내는 회답서신 속에 “경솔하게 정벌에 나서지 말고 다시 생각하여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내용을 첨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비변사(備邊司) 신료들은 반발했다. 그들은 명에 보내는 서신에 명에 대해 ‘충고’의 성격을 담은 문구를 삽입하는 것 자체를 비판했다. ‘조선은 소방(小邦)이자 명의 번국(藩國)에 불과하기 때문에 대국(大國)인 명의 군무(軍務)에 간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그저 명의 지휘에 따라 진퇴를 결정해야 할 뿐’이라고 반박했다. 비변사 신료들은 또한 ‘명은 조선에 부모의 나라’이며 ‘임진왜란으로 조선이 망할 뻔했을 때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를 베풀었다.’며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상기시켰다. ‘자식’의 처지에서 ‘은혜를 베푼 부모’가 위기에 처한 것을 보면 그저 있는 힘을 다해 구원하려 노력해야 할 뿐, 자신의 강약(强弱)이나 처지를 따지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광해군으로부터 총애를 받던 대제학 이이첨(李爾瞻)조차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지키고, 재조지은에 보답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채근했다. ●굴레가 돼버린 再造之恩 ‘명이 재조지은을 베풀었고, 조선은 그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조선 지배층의 뇌리에 확실히 각인되었다. 왜란 초반,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려 나라의 존망 자체가 불투명했던 상황에서 명군의 참전은 그야말로 한줄기 ‘복음’이었다. 더욱이 1593년 1월, 명군이 평양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세가 역전되면서부터 ‘재조지은’은 조선이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지고(至高)의 은혜’로 굳어졌다. 아예 ‘임진왜란’을 ‘재조(再造)’라고 부르는 인물조차 등장할 정도였다. 비록 명군이 일본군과 싸우는 것을 회피하고, 조선 백성들에게 엄청난 민폐를 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조지은’의 위상은 변하지 않았다. 그같은 분위기를 이끄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선조(宣祖)였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끝낼 수 있었던 모든 공로를 명군의 역할 덕분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조선 관군이나 의병의 역할은 평가절하했다. 임진왜란 최고의 영웅 이순신은 두개의 적과 맞서야 했다. 하나는 일본군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선조다. 이순신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할수록, 따라서 그에 대한 국민적 신망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선조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의병장 곽재우와 선조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난 뒤 논공행상 과정에서 선조는 이순신을 제치고, 정곤수(鄭崑壽)를 1등 공신이자 원훈(元勳)으로 책봉했다. 그가 명군을 불러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나마 곽재우는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재조지은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조선군 영웅들의 위상은 낮아지고, 선조의 실추된 위상이 다소나마 회복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지식인들은 조선 내부의 그 같은 분위기에 반색했다. 푸순성 함락 이후 등장한 ‘주요석획(籌遼碩)’에서 요동을 수복하는 데 조선을 이용하자고 주장했던 인물들이 내세운 논리는 거의 똑같았다. ‘임진왜란 때 우리는 모든 힘을 기울여 변변찮은 조선을 도왔다. 이제 그 은혜를 갚으라고 요구해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신료와 명의 지식인을 막론하고 ‘재조지은’을 강조하고 있던 분위기를 광해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명에 보내는 회답서신에 ‘혈기를 갖고 있는 조선 백성은 누구라도 황제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라는 내용으로 문장을 잘 다듬을 것을 지시했다. 외교를 위해 겉으로라도 ‘재조지은’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외교적 노력이 물거품되다 ‘재조지은에 보답하려면 출병하라.’는 안팎의 공세에 맞서 광해군은 외교적 ‘카드’를 총동원했다. 광해군은 먼저 조선에 출병하라고 요청한 주체가 명의 황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문제 삼았다. 자문을 보낸 왕가수는 명의 신료일 뿐, 황제가 아니므로 번국의 입장에서는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명의 분위기를 파악하고, 조선의 어려운 사정을 황제에게 직접 알리기 위해 사신들을 줄줄이 베이징으로 보냈다. 황제에게 조선 사정을 제대로 보고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사신들이 소지한 국서의 내용은 대동소이했다.‘조선은 아직 왜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의 미약한 군사력을 동원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등이었다. 명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명 조정은 후금에 대한 군사적 응징을 총괄할 경략(經略)으로 양호(楊鎬)를 낙점해 랴오양(遼陽)으로 보냈다. 임진왜란 때도 총사령관으로 참전했던 그는 조선 사정에 밝았다. 양호는 조선 사신들이 소지한 국서의 내용을 문제 삼아 베이징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는 조선이 은혜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사신 왕래를 통해 요행을 바란다고 질책했다. 광해군은 양호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칙서가 없는 상황에서는 파병할 수 없다고 버텼다. 양호는 조선 사신 박정길(朴鼎吉)에게 “북관과 연락하고 조선을 고무하라.(聯絡北關鼓舞朝鮮)”는 문구가 담긴 황제의 칙서를 보여주었다. ‘북관’은 당시 누르하치의 후금에 밀리고 있던 해서여진의 예허(葉赫)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양호는 또한 당시 요동지역에 ‘조선이 후금, 일본과 내통하고 있으며 후금군 가운데 3000명이 조선인’이라는 풍문이 돌고 있음을 들어 협박했다. 박정길 일행은 양호의 협박에 밀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조선 영내로 돌아오고 말았다. 1618년 10월.‘조선은 병력을 동원하여 오랑캐를 치는 데 협조하고, 양호의 지휘를 받으라.’는 내용의 명 황제의 칙서가 날아들었다. 광해군의 입장에 반대했던 비변사 신료들은 힘을 얻었고, 출병하라는 채근 또한 더 심해졌다. 안팎으로 곱사등이가 된 처지에서 광해군은 소신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시기 명군의 참전을 통해 떠오른 ‘재조지은’은 17세기 초에도 조선 정치와 외교 전반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사극 사실왜곡 “해도 너무 하네”

    사극 사실왜곡 “해도 너무 하네”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등 고구려와 발해를 소재로 한 역사드라마들의 이른바 ‘역사왜곡’을 어떻게 봐야 할까. 역사드라마들이 한민족 웅비의 역사를 보여주겠다는 기획의도에 맞추느라 정작 많은 부분이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나 있다는 주장이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돼 왔다. ‘안시성 전투에서 식량부족을 겪은 것은 당나라 군대였는데 드라마에서는 고구려 군대가 식량부족 때문에 힘들었다고 묘사했다.’ ‘주몽과 소서노, 대소의 삼각관계는 역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발해 건국까지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대조영이 아니라 걸걸중상이었다.’ 고구려연구회는 오는 19일 ‘역사와 고구려·발해 드라마’란 주제의 학술세미나를 통해 이같은 역사드라마들의 ‘사실 왜곡’을 진단한다. 서길수 서경대 교수는 MBC의 ‘주몽’을 집중분석한 결과,“고구려사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높인 점은 긍정적이지만 국민이 드라마로 역사를 공부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데 더욱 충실했어야 한다.”고 아쉬워했다. ●‘주몽’의 한계 서 교수는 인물 및 사건 등에서 크게 15가지의 오류를 지적했다. 북부여 왕인 해모수(허준호 분)와 동부여 왕인 금와(전광렬)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친구가 될 수 없고, 주몽(송일국 분)과 소서노(한혜진 분) 그리고 대소(김승수 분)는 서로가 만난 시차 때문에 삼각관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서 교수는 또 ▲유화부인(오연수 분)의 사망시기 ▲송양에 대한 평가 ▲협부의 동성애자 묘사 ▲유리의 밀수 묘사 등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부여의 황제 칭호 사용 ▲‘현도’의 ‘현토’ 표기 ▲고구려 상징으로 삼족오 설정 등도 오류라는 지적이다. 서 교수는 무엇보다도 주인공 이름인 ‘주몽’이 중국식이라는 결정적 오류를 지적했다. 원래 ‘추모’였으나 중국의 북위 사서에 한자로 옮기면서 의도적으로 ‘난쟁이처럼 작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의 ‘주몽’을 사용한 것을 무비판적으로 차용했다는 것. 서 교수는 “결과적으로 주몽은 ‘추모’의 창씨개명과 마찬가지”라면서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에서도 요즘에는 ‘추모’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조영’의 오류 KBS 드라마 ‘대조영’을 분석한 한규철 경성대 교수는 “역사의 주인공과 드라마 주인공의 불일치가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고구려 멸망후 발해 건국까지는 대조영(최수종 분)의 아버지인 걸걸중상(임혁 분)이 주도적 역할을 했고, 걸걸중상과 같은 반열에 있던 걸사비우(최철호 분)는 대조영의 의형제나 부하가 될 수 없는 데도 드라마에서 잘못 묘사했다는 것이다. 당나라 장군 설인귀(이덕화 분)를 지나치게 미화·과장한 것도 문제점으로 꼽았다. 고구려 멸망 당시 토번에 파견돼 있던 설인귀를 계속해서 요동지역에서 활동한 인물로 그리는 등 역사적 사실과 불합치한 점이 많다는 것. 한 교수는 고구려 멸망의 원인으로 지나치게 내재적 요인을 강조한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침략자인 당나라에 의한 멸망 요인을 소홀히 다루고 내부 정쟁과 연개소문 자제들의 정치적 야욕 등을 강조한 것은 역사에 대한 패배주의 등을 부추기는 역기능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이다. ●시대 뛰어넘는 ‘연개소문’ SBS의 ‘연개소문’도 오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은 연개소문(유동근 분) 등 주요인물들의 시대적 배경이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다고 지적했다. 서기 618년에 사망한 수 양제(김갑수 분)를 비중있게 다루다 보니 연개소문의 출생연도를 앞당기게 됐고, 마찬가지로 김유신의 활동시기도 앞당기는 연쇄적인 ‘시대오류’를 범했다고. 수백년 뒤에 창작된 중국의 ‘삼국지연의’ 내용을 드라마 속에 차용한 것도 문제로 꼽았다. 김 소장은 “지나친 삼국지연의 베끼기가 계속되고 있다.”면서 “작가의 취향을 감안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사극에서 시대적 감각은 반드시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소장은 “드라마 속에서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인물로 그려지지 않고 있다.”면서 “고·당 전쟁을 묘사하게 될 향후 대본부터는 고증에 충실해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박홍환 한준규기자 stinger@seoul.co.kr
  • [생각나눔] 고조선 신화서 역사로… 청동기 1000년 앞당겨

    올해 신학기 역사교과서에 한반도 청동기 보급 시기가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최대 1000년까지 앞당겨진다. 또 그동안 신화 형태로 기술된 고조선 건국 과정이 공식 역사로 편입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학계 의견이 엇갈려 논란이 예상된다. 교육부는 학계의 지적을 수용해 2007학년도 고교 역사교과서의 ‘고조선과 청동기 문화’ 단원을 일부 수정해 신학기부터 일선 학교에 개정교과서를 보급하기로 했다고 23일 밝혔다. 교육부에 따르면 이 단원 27쪽의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 지역에서는 기원전 15∼13세기에 청동기 시대가 전개되었다.’는 부분이 새 교과서에는 ‘신석기 말인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 요령(랴오닝), 러시아 아무르 강과 연해주 지역에서 들어온 덧띠새김무늬 토기 문화가 앞선 빗살무늬 토기 문화와 약 500년간 공존하다 점차 청동기 시대로 넘어간다. 이 때가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으로,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라고 기록된다. 이 부분을 집필한 최몽룡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강원도 정선과 춘천, 홍천, 경기도 가평, 경남 진주 등지에서 최근 출토된 유물 등을 근거로 한반도에 청동기 문화가 전래된 시기를 앞당겼다.”고 말했다. 또 32쪽의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기원전 2333년)’ 부분도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수정했다. 서강대 사학과 이종욱 교수는 “중국이 고조선 건국 장소인 중국 요동지역 청동기 도입 시기를 앞당기고 있는데 한반도 청동기 도입 시기를 앞당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또 “단군조선 초기 역사 형성 시기는 기원전 12세기다. 신화를 역사적인 시각으로 전환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송호정 교수는 “기원전 15세기에 한반도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는 이야기는 학계에서 합의된 내용은 아니다. 이 시기에 나타나는 청동기 유물은 극소수 장신구에 불과하다.”면서 “중국 동북공정에 대항해 이런 논리가 나오는 것 같은데 좀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고 합의가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울대 고고사학과의 한 교수도 “고조선 편입 문제는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다.”면서 “위만 조선이 과연 정치적 실체로서 얼마만큼 영향력을 행사하고 실체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었나를 생각하면 상당히 회의적”이라고 주장했다. 김재천 강아연기자 patric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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