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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울릉도 수토(搜討)

    [씨줄날줄] 울릉도 수토(搜討)

    조선왕조실록 1699년(숙종 25년) 7월 15일 자에 ‘강원도 월송 만호 전회일이 울릉도를 수토(搜討)하고 대풍소(待風所)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지도를 그려 올리고 토산품인 황죽·향목·토석을 진상했다는 것이다. 월송은 울진에 있던 수군진, 순풍을 기다린다는 대풍소는 군선 정박지다. 서울대 규장각한국연구원에는 삼척 영장 박석창이 1711년(숙종 37년) 수토관이 되어 그린 ‘울릉도 지도’가 있다. 울릉도 수토역사전시관이 소장한 ‘울릉 도동리 신묘명 각석문’ 또한 박석창의 수토가 남긴 흔적이다. 수토란 자세히 살펴 위험을 없앤다는 뜻이다. 안용복이 1693년(숙종 19년)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다 일본 어부들과 충돌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이듬해 조정은 군진을 설치할 수 있는지 판단하도록 삼척 첨사 장한상을 울릉도에 보낸다. 장계를 바탕으로 조정은 월송 만호와 삼척 영장을 교대로 울릉도에 보내 불법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내보내기로 했다. 수토의 역사는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태종은 1416년 전직 삼척 첨사 김인우를 무릉등처안무사(武陵等處按撫使)로 울릉도에 보냈다. 김인우는 “무릉도에 사람이 많이 살면 왜적이 들어와 도둑질하고 결국 강원도를 침노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호조 참판 박습은 조정에서 “무릉도 곁에 작은 섬이 있다”고 했다. 말할 것도 없이 독도를 가리킨다. 당시 울릉도에 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1765년(영조 41년) 삼척 영장 조한기는 ‘울릉도 수토기’에 ‘사흘 전부터 가족과 친지가 위로하고, 음식을 먹이며 울면서 이별을 고하는 모습이 서글프고 간절했다’고 출항 장면을 묘사했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오늘부터 울릉도에서 수토의 흔적을 찾는 학술 조사를 벌인다. 각석문을 다시 조사하고 유적을 살피는 한편 지도의 땅 이름도 고증한다. 하반기에는 독도로 조사 범위를 넓힌다. 광복 직후 울릉도·독도 학술 조사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의지가 결연해 보인다.
  • 센터에 선 北주애, 대사관 중앙까지…후계설에 日·美 댓글 폭주 [핫이슈]

    센터에 선 北주애, 대사관 중앙까지…후계설에 日·美 댓글 폭주 [핫이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딸 김주애를 둘러싼 ‘후계 구도’ 관측이 한 단계 더 뜨거워졌다. 국가정보원이 12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김주애를 ‘후계 내정 단계’로 평가했다는 보고가 나오면서다. 일본에서는 “사진 속 ‘센터(정중앙)’ 연출이 결정적”이라는 해설 칼럼까지 등장했다. 특히 눈길을 끈 장면은 지난 1월 1일 평양 금수산태양궁전 참배다. 일본 최대 포털 야후재팬에 소개된 고영기 데일리NK재팬 편집장 칼럼은 “북한 공식 행사에서 ‘센터’는 상징적 권위 부여”라며 김주애가 사진·영상에서 정면 중앙에 서도록 연출된 점을 ‘후계 내정’ 신호로 해석했다. 국정원 역시 같은 맥락에서 김주애의 ‘노출 수위’와 ‘역할 부여’가 달라졌다고 본 것으로 전해진다. AP통신은 국정원이 비공개 브리핑에서 김주애를 과거의 ‘후계 수업’ 단계에서 ‘후계 내정 단계’로 격상해 언급했고 향후 2월 하순 노동당 당대회 동행 여부를 주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 “딸이 센터면, 게임 끝?”…日 댓글은 ‘숙청·김여정 변수’에 꽂혔다 야후재팬 댓글창 분위기는 한마디로 “섬뜩하다”에 가까웠다.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반응은 “독자 체제·사상만 주입받은 채 후계자가 되면 결국 숙청이 반복될 것”이라는 비관론과 “김여정이 무사하겠냐”는 권력 투쟁 전망이었다. 또 “후계자가 되면 결혼 상대 선택을 둘러싼 암투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도 적지 않았다. 일부는 외형 변화나 옷차림을 두고 “갑자기 어른 같은 분위기”라며 연출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고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혈통 세습”이라는 체제 비판도 이어졌다. ◆ 국내 여론은 ‘4대 세습’ 프레임…정치 혐오·냉소도 확산 국내 포털 댓글 반응은 “4대 세습 본격화”에 방점이 찍혔다. “가족 공화국”, “왕조” 같은 표현과 함께 “북한이 알아서 무너질 것”이라는 냉소, “통일·안보 대비”를 언급하는 경계론이 뒤섞였다. 다만 댓글 흐름은 북한 체제 비판을 넘어 국내 정치 갈등 프레임으로 번지는 양상도 나타났다. 이 지점은 직접 인용보다는 “댓글이 이념 공방으로 확장됐다”는 수준의 정리로 그치는 것이 포털 운영 측면에서도 안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AP “당대회가 힌트”…야후뉴스 댓글도 “김여정은?” “왕좌의 게임” AP는 “북한이 이달 말 최대 정치 행사인 노동당 당대회를 준비 중이며 그 무대가 후계 구도를 드러낼 힌트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다만 당 규정상 당원 자격이 18세 이상인 점을 들어 공개 직책 부여는 시기상조라는 견해도 함께 소개했다. 야후뉴스 댓글에서는 “김여정이 가만있겠냐”, “가부장적 체제에서 여성 지도자라면 내부 반발이 거셀 것” 같은 분석이 이어졌다. “현실판 왕좌의 게임”이라는 반응도 줄을 이었다. 이 같은 연출은 북한의 대외 선전 공간에서도 감지된다. 13일 외신과 국내 보도에 따르면 중국 베이징 주중 북한대사관은 정문 옆 게시판에 김정은과 김주애가 함께 등장한 사진을 중앙에 배치했다. 그동안 이 자리는 김 위원장 단독 사진이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함께한 사진이 차지해왔다. 대외 선전 성격이 강한 해외 공관 게시판 중앙에 부녀 사진이 전면 배치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김주애의 상징적 위상이 한층 강화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중앙 한 장뿐 아니라 양옆에도 부녀 동반 사진이 반복 배치된 점에서, 단순한 행사 기록이 아니라 ‘후계 서사’를 점진적으로 구축하려는 의도라는 분석도 있다. 다만 사진 설명에는 김 위원장 이름만 적히고 김주애 이름은 명시되지 않아, 상징적 노출과 공식 지위 사이의 간격을 유지하는 단계라는 해석도 나온다. ◆ 후계 구도 가를 세 가지 신호…‘등장 무대’ ‘호칭’ ‘직책의 신호’ 다만 향후 북한 매체의 ‘연출 수위’와 공식 신호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이달 하순으로 거론되는 노동당 주요 정치 행사 전후로 김주애의 동행 여부와 노출 빈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가 첫 번째 관건이다. 또 북한이 그를 지칭하는 호칭이나 수식어가 ‘존귀한’, ‘가장 사랑하는’ 등으로 한층 강화되는지도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당 규정상 공식 직책 부여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는 만큼, 직함보다 내부 선전 문구에서 ‘혁명 계승’ 같은 서사가 얼마나 뚜렷하게 드러나는지도 주목된다.
  • 김건희 ‘종묘 차담회’에 고종 후손 분노 “나도 입장료 내고 들어가는데…선조 능욕”

    김건희 ‘종묘 차담회’에 고종 후손 분노 “나도 입장료 내고 들어가는데…선조 능욕”

    윤석열 전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국보인 종묘에서 사적인 차담회를 열었다는 사실이 재조명되자 대한제국 황실 후손이 “선조를 능욕하고 국격을 실추시켰다”고 비판했다. 대한제국 황실 후손인 이준 의친왕기념사업회 회장은 지난 27일 입장문을 내고 “김 여사는 세계유산 종묘를 사적 카페로 사용한 것에 대해 국민 앞에 사죄하라”라고 촉구했다. 이 회장은 “역대 조선왕실 임금의 신위가 모셔진 종묘는 한국 뿐 아니라 세계인이 지키고 보존해야 할 세계문화유산”이라면서 “저희 황실 후손들도 여느 대한민국 국민처럼 종묘 입장료를 내고 입장하고, 명절에 조상의 신위 앞에 나아가 향 한자루 사르거나 술 한잔 올릴 수 없다”고 입을 열었다. 이 회장은 “그럼에도 종묘는 저희 가문의 사당이 아니라 정부가 보호해야 할 공공재이고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이해한다”면서 “황실 후손도 대한민국의 법을 존중하는 것이 의친왕께서 꿈꾸셨던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가치”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 여사의 ‘종묘 차담회’에 대해 “종묘를 신성시하고 경건한 자세로 여기는 종묘의 직계 후손들은 국가원수 부인의 이러한 행동에 크게 개탄을 금치 못한다”면서 “경건하고 신성시돼야 할 세계유산 종묘는 어느 누구의 사적 찻자리 장소가 돼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 회장은 김 여사를 향해 “대통령 영부인은 왕조 시절의 왕후나 대비마마가 아니며, 위대한 국민들이 뽑은 단기 선출직 공무원인 대통령의 부인”이라며 “군주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이제는 왕이 아닌 헌법을 준수하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직격했다. 이어 “남편이 뽑아준 국가유산청장에게 명령하고 언제든 궁궐의 가구를 가져다가 세팅하고 지인들과 차를 마셔도 되느냐”며 “신성한 종묘에서 휴관일에 전세낸 것처럼 지인들과 차를 마실 권한을 누가 줬느냐”고 반문했다. 이 회장은 “모두가 지키고 보존해야할 종묘는 한 개인이 지인들에게 폼내고 싶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카페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영부인, 대비마마 아냐…군주제 사라졌다”의친왕기념사업회는 대한제국 황실 직계후손들이 설립한 단체로, 조선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차남인 의친왕의 장손인 이 회장이 이끌고 있다. 황실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고 조선의 궁중문화와 황실문화를 보존, 계승, 진흥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의친왕은 일제강점기 김구, 윤봉길, 안창호 선생 등과 교류하고 조선 최대 비밀 항일단체 대동단의 독립선언문에 33인 중 첫번째로 서명하는 등 황족의 자격으로 항일운동을 펼쳤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이강 공’으로 격하된 의친왕은 결국 1930년 ‘공’ 작위까지 박탈당해 평민이 됐다. 김 여사는 지난해 9월 3일 종묘 망묘루에서 외부인들과 차담회를 한 사실이 드러나 국가유산을 사적으로 사용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김성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25일 국가유산청으로부터 당시 종묘 차담회 관련 자료를 제출받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대통령실 문화체육비서관실은 지난해 8월 30일 궁능유적본부장에게 유선으로 차담회 장소 협조를 요청했고, 종묘 망묘루가 차담회 장소로 선정되자 종묘 관리소 직원들이 ▲망묘루 거미줄 제거 ▲냉장고 운반 설치 및 형광등 교체 ▲영녕전 대청소에 동원됐다. 또한 차담회 당일 김 여사 일행을 태운 차량은 소방차와 작업 등 필수차량만 진입할 수 있는 ‘소방문’을 통해 종묘를 드나들었다. 차담회 당일 종묘 내부 폐쇄회로(CC)TV 8대는 김 여사 방문시간에 맞춰 녹화가 중단됐으며, 궁능유적본부 직원들은 차담회에 배석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허민 국가유산청장은“잘못된 행위를 했으면 반드시 감사 청구하고 고발 조치해 엄중히 문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조선 궁중 회화는 보수적 시각 효과… 동아시아 궁중 미술 비교 연구 필요”

    “조선 궁중 회화는 보수적 시각 효과… 동아시아 궁중 미술 비교 연구 필요”

    “조선 궁중 회화의 가장 큰 특징은 보수성이죠. 앞선 예를 따르는 상고(尙古) 정신이 깃들어 있어요. ‘일월오봉도’처럼 의도적 대칭 구도, 단순한 소재 구성, 오방색 위주의 채색 등이 만들어 낸 평면 감각과 강한 시각 효과가 특징입니다.” 최근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만난 박정혜(64)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조선의 궁중 회화의 독자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조선 궁중 회화 연구의 권위자인 그는 고궁박물관 개관 20주년을 기념해 지난달 27~28일 열린 국제학술대회 ‘동아시아 왕실 문화와 미술’에서 기조 강연자로 나섰다. 박 교수는 “궁중 회화는 한 국가나 특정 시대의 미감, 정체성을 나타낸다”면서 “특히 공적인 제작 시스템 안에서 관행을 중시하며 생산된 궁중 회화는 일반 회화와 다른 독자적 특징을 지녔다”고 말했다. 이어 “이 중 조선 왕조는 동아시아에서 사례가 흔치 않은 500년간 이어진 단일 왕조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의궤, 궁중 행사도는 왕실에 경사나 상사가 났을 때 행하는 의식인 전례(典禮)를 시각화하기 때문에 보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서도 “행사도의 경우 행사 뒤 참석한 관료들이 합의해 제작했는데, 그 숫자대로 나눠 가져 ‘기념품’ 역할을 했으며 왕과 왕가의 모습을 그리지 않는 점이 눈에 띄는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영·정조 때를 조선 궁중 회화의 수준이 도약한 시기로 꼽았다. 그는 “어느 왕이든지 선왕이 남긴 뜻과 사업을 잘 받들어 계승하는 ‘계술’을 중시했지만 유독 영조는 ‘효를 실천하는 최고의 방법은 계술’이라며 선왕의 행적을 되살리고 반드시 기록을 남겼다”면서 “이런 행보가 궁중 회화, 특히 궁중 행사도를 다채롭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소개했다. 이어 “정조의 경우 도화서 화원 일부를 규장각에 차출해 운영하는 ‘차비대령화원제’를 시행하면서 화원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안목과 지향을 궁중 회화에 반영했다”고 덧붙였다. 박 교수는 동아시아 궁중 미술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위페이친 대만 고궁박물원 부원장, 이노쿠마 가네키 도쿄국립박물관 공예실장, 유키오 리핏 하버드대 교수 등이 참석한 이번 학술대회가 세계 연구자들의 안목을 높이고 자극을 주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박 교수는 “다른 듯하면서도 같은 게 동아시아 궁중 미술”이라며 “한중일 삼국이 공통적 소재와 주제를 갖고 있지만 각자 정치, 사회, 문화적 사정에 따라 혹은 최고 통치권자의 취향에 따라 변용돼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를 다각적으로 비교 분석하고 각기 특수성을 심화해 밝혀내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말했다.
  • ‘정치 말고 예술에 몰두했다면…’ 찰스 1세의 아까운 재능

    ‘정치 말고 예술에 몰두했다면…’ 찰스 1세의 아까운 재능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국왕인 찰스 1세(1600~1649)는 스튜어트 왕조를 세운 제임스 1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약했고 말더듬이 심한 편이었다. 그런데 형 헨리가 사망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생각지도 않게 12살에 왕위 계승권자가 된 것이다. 찰스는 프랑스 루이 13세의 여동생 앙리에트 마리아와 결혼해 6남매를 뒀다. 이들의 결혼은 계약에 의한 것이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다스리기엔 찰스의 능력은 보잘것없었다. 찰스는 왕이 된 첫해부터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의회와 반목했다. 세금 징수 때문이었다. 찰스는 누이가 시집간 팔츠 선제후국을 돕고자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의회가 이를 거절하자 독단적으로 채권을 발행하려 했다. 단두대에서 마친 삶찰스는 전지전능한 왕으로서 국정을 운영하고자 했다. 당연히 왕권을 제한하려는 의회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11년간 의회를 폐쇄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정복에 자금이 필요해지자 어쩔 수 없이 의회에 동의를 구해야 했는데, 1642년 양측은 이 문제로 정면충돌했다.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4년이나 지속된 1차 내전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의 승리로 끝났다. 찰스는 투옥과 탈옥을 반복하다가 1649년 1월 30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내전은 영국 역사상 왕을 반역죄로 처형한 첫 사례가 됐다. 비공식 초상화찰스 1세는 선왕이 신봉하던 왕권신수설을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의회와 정면으로 충돌할 만큼 정치 감각이 없었고 시대를 읽는 눈도 모자랐다. 그런데 예술에 대한 안목만큼은 꽤 탁월했으며 자신을 꾸밀 줄도 아는 멋쟁이였다. 안토니 반 다이크가 그린 ‘사냥 중인 찰스 1세’는 왕의 공식 초상화는 아니다. 사냥 중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일상의 모습을 그렸다. 언뜻 보면 귀족의 초상화처럼 보인다. 그림 속 주인공이 왕이라는 사실은 오른편 아래 적힌 비문 ‘찰스 1세, 대영제국의 왕, Carolus.I.REX Magnae Britanniae’에서 드러난다. 멋쟁이 왕실물 크기로 그려진 이 초상화는 1635년 찰스의 권세가 정점에 있던 시기에 그려졌다. 그가 사냥 도중 잠시 말에서 내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이에 두 수행원이 말을 보살피고 있다. 말고삐를 쥔 인물은 찰스를 대신해 그림을 구매하던 엔디미온 포터다. 포터는 친구인 루벤스와 반 다이크 작품을 비롯해 유럽 다른 나라의 작품을 사들여 찰스의 컬렉션을 풍성하게 했다. 그림 속 말은 찰스에게 고개를 숙여 왕에 대한 예우를 다하고 있다. 찰스는 군주로서의 위엄이나 진지함보다 자연인으로서 자유를 만끽하는 듯 보인다. 찰스는 160㎝가 조금 넘는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이를 알아챈 반 다이크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보는 위치에서 그림을 그려 키에 대한 고민을 없앴다. 찰스의 세련된 취향은 패션 아이템에서 잘 드러난다. 비스듬히 쓴 모자와 귀걸이, 레이스 칼라, 은색 공단 재킷, 붉은 바지, 가죽 장갑과 부츠는 세련된 그의 취향을 보여준다. 그가 수집한 예술품은 작품성이 상당했다. 흩어진 찰스의 예술품들찰스는 티치아노와 홀바인, 뒤러 등 당대 최고 화가들의 작품을 사고 루벤스, 반 다이크에게 예술을 의뢰하는 등 뛰어난 컬렉션 라인을 보유했다. 그러나 그가 화이트홀 궁에서 참수당하자 아들 찰스 2세는 해외로 도망쳤다가 11년 뒤인 1660년에야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아버지가 수집한 예술품들은 유럽 곳곳으로 헐값에 팔려나갔다. 찰스가 소유했던 예술품 상당수는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과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컬렉션의 핵심을 이룬다. 영국 왕의 사냥 뒤 휴식을 그린 ‘사냥 중인 찰스 1세’가 루브르에 자리 잡게 된 이유다. 찰스는 정치보다 예술에 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가 정계가 아닌 예술 영역에서 일했다면 영국 미술계의 명성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을 때 가장 빛난다.
  • ‘정치 말고 예술에 몰두했다면…’ 찰스 1세의 아까운 재능 [으른들의 미술사]

    ‘정치 말고 예술에 몰두했다면…’ 찰스 1세의 아까운 재능 [으른들의 미술사]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국왕인 찰스 1세(1600~1649)는 스튜어트 왕조를 세운 제임스 1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약했고 말더듬이 심한 편이었다. 그런데 형 헨리가 사망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생각지도 않게 12살에 왕위 계승권자가 된 것이다. 찰스는 프랑스 루이 13세의 여동생 앙리에트 마리아와 결혼해 6남매를 뒀다. 이들의 결혼은 계약에 의한 것이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다스리기엔 찰스의 능력은 보잘것없었다. 찰스는 왕이 된 첫해부터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의회와 반목했다. 세금 징수 때문이었다. 찰스는 누이가 시집간 팔츠 선제후국을 돕고자 자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의회가 이를 거절하자 독단적으로 채권을 발행하려 했다. 단두대에서 마친 삶찰스는 전지전능한 왕으로서 국정을 운영하고자 했다. 당연히 왕권을 제한하려는 의회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11년간 의회를 폐쇄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정복에 자금이 필요해지자 어쩔 수 없이 의회에 동의를 구해야 했는데, 1642년 양측은 이 문제로 정면충돌했다.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4년이나 지속된 1차 내전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파의 승리로 끝났다. 찰스는 투옥과 탈옥을 반복하다가 1649년 1월 30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내전은 영국 역사상 왕을 반역죄로 처형한 첫 사례가 됐다. 비공식 초상화찰스 1세는 선왕이 신봉하던 왕권신수설을 고민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의회와 정면으로 충돌할 만큼 정치 감각이 없었고 시대를 읽는 눈도 모자랐다. 그런데 예술에 대한 안목만큼은 꽤 탁월했으며 자신을 꾸밀 줄도 아는 멋쟁이였다. 안토니 반 다이크가 그린 ‘사냥 중인 찰스 1세’는 왕의 공식 초상화는 아니다. 사냥 중에 잠시 휴식을 취하는 일상의 모습을 그렸다. 언뜻 보면 귀족의 초상화처럼 보인다. 그림 속 주인공이 왕이라는 사실은 오른편 아래 적힌 비문 ‘찰스 1세, 대영제국의 왕, Carolus.I.REX Magnae Britanniae’에서 드러난다. 멋쟁이 왕실물 크기로 그려진 이 초상화는 1635년 찰스의 권세가 정점에 있던 시기에 그려졌다. 그가 사냥 도중 잠시 말에서 내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이에 두 수행원이 말을 보살피고 있다. 말고삐를 쥔 인물은 찰스를 대신해 그림을 구매하던 엔디미온 포터다. 포터는 친구인 루벤스와 반 다이크 작품을 비롯해 유럽 다른 나라의 작품을 사들여 찰스의 컬렉션을 풍성하게 했다. 그림 속 말은 찰스에게 고개를 숙여 왕에 대한 예우를 다하고 있다. 찰스는 군주로서의 위엄이나 진지함보다 자연인으로서 자유를 만끽하는 듯 보인다. 찰스는 160㎝가 조금 넘는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이를 알아챈 반 다이크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보는 위치에서 그림을 그려 키에 대한 고민을 없앴다. 찰스의 세련된 취향은 패션 아이템에서 잘 드러난다. 비스듬히 쓴 모자와 귀걸이, 레이스 칼라, 은색 공단 재킷, 붉은 바지, 가죽 장갑과 부츠는 세련된 그의 취향을 보여준다. 그가 수집한 예술품은 작품성이 상당했다. 흩어진 찰스의 예술품들찰스는 티치아노와 홀바인, 뒤러 등 당대 최고 화가들의 작품을 사고 루벤스, 반 다이크에게 예술을 의뢰하는 등 뛰어난 컬렉션 라인을 보유했다. 그러나 그가 화이트홀 궁에서 참수당하자 아들 찰스 2세는 해외로 도망쳤다가 11년 뒤인 1660년에야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아버지가 수집한 예술품들은 유럽 곳곳으로 헐값에 팔려나갔다. 찰스가 소유했던 예술품 상당수는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과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컬렉션의 핵심을 이룬다. 영국 왕의 사냥 뒤 휴식을 그린 ‘사냥 중인 찰스 1세’가 루브르에 자리 잡게 된 이유다. 찰스는 정치보다 예술에 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가 정계가 아닌 예술 영역에서 일했다면 영국 미술계의 명성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을 때 가장 빛난다.
  • 다양성의 공존… 200여년간 펼쳐진 ‘조선 전기 미술’ 대서사

    다양성의 공존… 200여년간 펼쳐진 ‘조선 전기 미술’ 대서사

    시작과 끝은 점이 아니라 선이자 면이다. 조선 전기는 왕조 교체에 따른 혁신과 이상으로 새로운 미감이 탄생한 시기였지만, 동시에 고려 말부터 이어져 오던 미의식의 변형과 성장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다양함이 공존하던 조선 전기 미술의 면모를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다. 국립중앙박물관이 10일부터 8월 31일까지 선보이는 특별전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 대전’이다. 그동안 조선 후기에 비해 전기의 면모는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현존하는 작품 수가 적을뿐더러 주요 작품 다수가 국외에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국립중앙박물관 용산 개관 20주년을 맞이해 열리는 만큼 대규모로 기획됐다. 도자, 서화, 불교미술 등 당시 미술을 대표하는 691건의 작품이 출품됐다. 이 중에는 국보 16건, 보물 63건과 미국, 일본 등 5개국 24개 기관에서 온 작품이 포함됐다. 국내 최초로 공개되는 작품도 23건에 달한다. 이번 전시는 조선 전기 200여년간 펼쳐진 미술의 거대한 서사를 도자, 서화, 불교미술 세 분야로 나누고 각각 백(白), 묵(墨), 금(金)이라는 세 가지 색으로 살펴보는 점이 흥미롭다. 전시장 초입에는 멈추지 않는 시간의 흐름 한가운데 자리잡은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을 전시했다. 금강산 월출봉 석함에 봉안한 사리장엄 표면에는 새로운 시대를 바라는 민중의 염원을 등에 업고 이성계 자신이 직접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의지가 담겼다. 푸른 청자의 시대가 가고 분청사기와 백자의 시대가 펼쳐진 광경도 엿볼 수 있다. 특히 도자 300여건을 배치한 길이 14m, 높이 3m의 벽은 이번 전시의 백미다. 연한 상아색을 띠는 국보 ‘백자 상감연화당초문 대접’, 1489년 제작된 사실을 알 수 있는 ‘백자 청화 홍치2년명(銘) 송죽문 항아리’ 등이 전시됐다. 임진아 학예연구사는 “조선 전기는 역사상 가장 다양한 도자기가 공존했던 시대”라며 “고려 상감청자를 계승한 장식기법이 ‘상감’에서 무늬 도장을 사용해 그릇 표면에 새기는 ‘인화’로 변화하면서 일종의 시대 양식을 이뤘고 결국 백자로 수렴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조선 사대부의 취향이 깃든 여러 서화도 만나 볼 수 있다. 사대부들은 먹 안에 모든 색이 들어 있다고 여겼는데, 사유를 중시했던 그들의 이상과 잘 맞았다. 일본 모리박물관이 소장한 ‘산수도’는 기존에는 중국 송나라 시기의 그림으로 여겨졌으나 최근 연구를 통해 16세기 중반 작품으로 재평가됐다. 미국 LA카운티미술관이 소장한 ‘산시청람도’와 일본 야마토문화관 소장 ‘연사모종도’는 함께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나란히 전시된다. 조선 시대에 배척된 것으로만 알려졌던 불교미술을 다시 보는 공간도 마련됐다. 불교는 유교가 해결하지 못하는 죽음 등의 문제에서 많은 이에게 위안을 줬다. 이번 전시에서는 불교미술을 조선 전기 주요한 전통으로 조명하며, 왕실 후원의 불상과 불화를 소개한다. 비단 위에 석가모니 부처의 일생을 그린 ‘석가탄생도’를 만날 수 있다. 전시장의 마지막 공간은 조선의 문화적 역량을 가장 잘 보여 주는 ‘훈민정음’이 오롯이 채운다. 여러 소장처에서 전시품을 모은 만큼 교체 일정을 살펴보고 방문하는 게 좋다. 보물인 조계사 ‘목조여래좌상’은 22일까지 전시되며 간송미술문화재단 ‘훈민정음’과 일본 야마토문화관 소장 ‘어촌석조도’, ‘평사낙안도’는 7월 7일까지만 전시된다.
  • 고구려가 소수민족?…중국, 황금 인장 공개하며 ‘관할권’ 주장

    고구려가 소수민족?…중국, 황금 인장 공개하며 ‘관할권’ 주장

    1700여년 전 고구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황금 인장이 현지 박물관에 기증된 뒤 중국 관영 매체가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관할 하에 있던 지방 정부”라는 주장을 재차 내놓았다. 중국 신화통신과 중국중앙(CC)TV는 18일(현지시간) “이날 오전 지린성(省) 장춘시(市)에서 개최된 ‘2025 국제박물관의 날’ 기념행사에서 ‘진고구려귀의후’(晉高句驪歸義侯)라는 문구가 새겨진 황금 인장이 지린성 지안시박물관에 기증됐다”고 보도했다. 이 유물은 중국 서진(265~316년) 왕조 시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전체 높이 2.8㎝, 무게 약 88g의 크기로, 손잡이 부분은 말을 형상화한 조각이 덧붙여졌다. 도장 면에는 ‘진고구려귀의후’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중국 언론은 인장에 새겨진 ‘귀의’(歸義)라는 단어를 ‘순종’의 의미로, ‘귀의후’(歸義侯)는 고대 중국 국가가 소수민족 지도자에게 내리던 봉작(칭호)이라고 해석하며 “고구려가 당시 중국 중앙정부에 ‘신복(臣服·신하로서 임금을 복종함)’ 했음을 상징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고구려는 중국 동북부에 있던 ‘고대 지방정권’으로, 한·위진남북조·당 시대를 거쳐 동북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서 “진나라 이후 중국 중앙 정부는 관할하에 있는 소수민족 정권 수장에게 인장을 수여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또 “이 인장의 발견은 관련 문헌 기록의 공백을 메워준다”면서 “이는 중국 서진 왕조와 고구려 사이에 어떤 형태의 종속 관계가 존재했음을 증명한다”고 강조했다. 왕즈강 지린대 고고학과 교수는 현지 언론에 “이 황금 인장은 서진이 고구려에 대해 책봉을 했다는 실물 증거”라면서 “문헌상에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이 황금 인장과 과거 출토된 ‘진고구려솔선’(晉高句率善) 동인(청동 인장)은 고구려가 당시 중원왕조의 영향권 아래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언급된 ‘진고구려솔선’ 동인은 고구려가 서진과의 교섭 과정에서 받은 외교적 증표로, 국내 학계는 고구려가 독자적 외교 주체로서 서진과 상호 교섭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반면 중국 학계와 언론은 이 동인이 황금 인장과 마찬가지로 고구려가 서진이 지배하던 소수민족이었다고 주장해 왔다. 황금 인장과 관련한 역사 논란이 예상되는 가운데, 우리 정부는 공식 논평이나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한편, 이번에 논란이 된 황금 인장은 한 현지 기업 회장 부부가 지난달 차이나가디언 홍콩 춘계 경매에서 1079만 7000홍콩달러(한화 약 19억 2800만원)에 낙찰받아 기증한 것이다. 이를 경매에 내놓은 이는 익명의 일본 소장가로 알려졌다. 잊을만하면 나오는 중국의 동북공정 역사왜곡중국은 1990년대부터 고구려의 역사를 자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의 역사로 편입하는 왜곡 작업을 추진해왔다. 이는 국가적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을 통해 공식화됐다. 동북공정은 고구려를 한민족의 독립적 국가가 아니라, 중국 역사 내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으로 기술하며, 대학 교재 등을 통해 이를 활발히 주장해 왔다. 지난해 3월 중국 정부가 발간·보급한 대학 교재인 ‘중화민족 공동체 개론’은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 변방 정권”으로 서술하고, 고구려가 중국 왕조의 책봉을 받았으며 한자 문화를 썼다는 점을 강조해 논란이 됐다. 중국은 또 고려가 고구려와 발해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고구려와 발해사를 한국사에서 제외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중국은 2016년부터 교과서에서 ‘고구려’ 표기를 삭제했고, 국제 전시에서도 고구려·발해의 건국 연도를 의도적으로 빠뜨리는 등 왜곡을 지속하고 있다.
  • [포착] “중국이 고구려 지배, 결정적 증거 찾았다” 주장…우리 정부는 ‘침묵’

    [포착] “중국이 고구려 지배, 결정적 증거 찾았다” 주장…우리 정부는 ‘침묵’

    1700여년 전 고구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황금 인장이 현지 박물관에 기증된 뒤 중국 관영 매체가 “고구려는 고대 중국의 관할 하에 있던 지방 정부”라는 주장을 재차 내놓았다. 중국 신화통신과 중국중앙(CC)TV는 18일(현지시간) “이날 오전 지린성(省) 장춘시(市)에서 개최된 ‘2025 국제박물관의 날’ 기념행사에서 ‘진고구려귀의후’(晉高句驪歸義侯)라는 문구가 새겨진 황금 인장이 지린성 지안시박물관에 기증됐다”고 보도했다. 이 유물은 중국 서진(265~316년) 왕조 시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전체 높이 2.8㎝, 무게 약 88g의 크기로, 손잡이 부분은 말을 형상화한 조각이 덧붙여졌다. 도장 면에는 ‘진고구려귀의후’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중국 언론은 인장에 새겨진 ‘귀의’(歸義)라는 단어를 ‘순종’의 의미로, ‘귀의후’(歸義侯)는 고대 중국 국가가 소수민족 지도자에게 내리던 봉작(칭호)이라고 해석하며 “고구려가 당시 중국 중앙정부에 ‘신복(臣服·신하로서 임금을 복종함)’ 했음을 상징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고구려는 중국 동북부에 있던 ‘고대 지방정권’으로, 한·위진남북조·당 시대를 거쳐 동북아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서 “진나라 이후 중국 중앙 정부는 관할하에 있는 소수민족 정권 수장에게 인장을 수여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또 “이 인장의 발견은 관련 문헌 기록의 공백을 메워준다”면서 “이는 중국 서진 왕조와 고구려 사이에 어떤 형태의 종속 관계가 존재했음을 증명한다”고 강조했다. 왕즈강 지린대 고고학과 교수는 현지 언론에 “이 황금 인장은 서진이 고구려에 대해 책봉을 했다는 실물 증거”라면서 “문헌상에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이 황금 인장과 과거 출토된 ‘진고구려솔선’(晉高句率善) 동인(청동 인장)은 고구려가 당시 중원왕조의 영향권 아래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언급된 ‘진고구려솔선’ 동인은 고구려가 서진과의 교섭 과정에서 받은 외교적 증표로, 국내 학계는 고구려가 독자적 외교 주체로서 서진과 상호 교섭한 결과라고 해석한다. 반면 중국 학계와 언론은 이 동인이 황금 인장과 마찬가지로 고구려가 서진이 지배하던 소수민족이었다고 주장해 왔다. 황금 인장과 관련한 역사 논란이 예상되는 가운데, 우리 정부는 공식 논평이나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한편, 이번에 논란이 된 황금 인장은 한 현지 기업 회장 부부가 지난달 차이나가디언 홍콩 춘계 경매에서 1079만 7000홍콩달러(한화 약 19억 2800만원)에 낙찰받아 기증한 것이다. 이를 경매에 내놓은 이는 익명의 일본 소장가로 알려졌다. 잊을만하면 나오는 중국의 동북공정 역사왜곡중국은 1990년대부터 고구려의 역사를 자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의 역사로 편입하는 왜곡 작업을 추진해왔다. 이는 국가적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을 통해 공식화됐다. 동북공정은 고구려를 한민족의 독립적 국가가 아니라, 중국 역사 내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으로 기술하며, 대학 교재 등을 통해 이를 활발히 주장해 왔다. 지난해 3월 중국 정부가 발간·보급한 대학 교재인 ‘중화민족 공동체 개론’은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 변방 정권”으로 서술하고, 고구려가 중국 왕조의 책봉을 받았으며 한자 문화를 썼다는 점을 강조해 논란이 됐다. 중국은 또 고려가 고구려와 발해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고구려와 발해사를 한국사에서 제외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중국은 2016년부터 교과서에서 ‘고구려’ 표기를 삭제했고, 국제 전시에서도 고구려·발해의 건국 연도를 의도적으로 빠뜨리는 등 왜곡을 지속하고 있다.
  • 한국주교회의, 교황 일대기 발표…“세상 끝에서 온 목자, 하느님 품으로”

    한국주교회의, 교황 일대기 발표…“세상 끝에서 온 목자, 하느님 품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이후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21일 교황의 일생을 일대기 형식으로 정리해 발표했다. 전문은 아래와 같다. 세상 끝에서 온 목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다…1936.12.17. - 2025.4.21.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애로마 시각 2013년 3월 13일 저녁(로마 현지 시각)에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됐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이었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 바로 우리가 추모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는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17세 되던 해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에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받던 중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체험했고, 동시에 사제성소를 느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목 표어인 ‘자비로이 부르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는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신 복음서 기록에 관한 베다 성인의 강론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베르골료는 1958년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에 입회하여 1969년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 수련장과 관구장, 산미겔 철학·신학 대학 학장 겸 산미겔 교구 파트리아르카 산호세 본당 주임 신부 등을 역임했다. 1992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보좌주교로 주교품을 받았고, 1998년 교구장 대주교로 임명됐으며, 2001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추기경으로 서임했다. 2005년부터 6년간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의장을 지내며 교황청 라틴아메리카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밖으로 나가는 교회, 세상을 향한 발걸음2013년 3월 13일, 베르골료 추기경은 로마 시스티나 성당에서 열린 콘클라베(교황 선출 비밀 투표)를 통해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저의 형제 추기경님들께서 [로마의] 주교를 찾으러 지구의 끝까지 가신 것 같습니다”(선출 직후 첫 강복 메시지)라는 소감처럼, 그레고리오 3세 교황(시리아) 이후 1282년 만의 비유럽 출신 교황 탄생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콘클라베를 위해 소집된 추기경 회의에서 그는 ‘밖으로 나가는 교회’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고 한다. 쿠바 출신 동료 추기경이 전한 그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신약성경 요한] 묵시록에서 예수님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신다고 전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 시대에 예수님은 안에 계시면서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문을 두드리신다고 생각한다. 자기중심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 안에 가두고 그분이 밖으로 나가시지 못하게 한다.”(zenit.org, 2013.3.26.) 이는 그가 첫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2013년)에서 말한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라는 표현과 맥을 같이 한다. 그가 선택한 교황명은 ‘프란치스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평화의 사도이자,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과 평생을 함께했다. 성인의 삶을 닮고자 했던 프란치스코는 즉위 직후부터 행동으로 메시지를 전했다. 즉위 후 9일 뒤 로마의 한 교도소에서 첫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를 봉헌하며 재소자들의 발을 씻겼다. 2013년 7월 람페두사에서 난민들의 죽음을 환기하며 “무관심의 세계화”를 질타하던 목소리, 2014년 한국 방문에서 보여준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연민, 2020년 3월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코로나19 팬데믹에 두려워 떠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던 뒷모습은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교황은 또 현대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한 관심을 제도화하여 ‘세계 가난한 이의 날(11월, 전례력 연중 제33주일)’과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7월 마지막 주일)’을 제정했다. ●복음의 기쁨 전하며 공의회 정신 계승프란치스코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이하 ‘공의회’) 이후 사제품을 받은 첫 교황으로서, 가톨릭의 현대화(아조르나멘토)를 이뤘다고 평가받는 공의회 정신의 계승에 심혈을 기울였다. 교황은 2015년 공의회 폐막 50주년 기념으로 거행된 ‘자비의 특별 희년’ 개막 미사에서 교회와 우리 시대 모든 이의 만남, 복음의 기쁨과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선교 열정, 민족과 계층을 초월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자비를 실천하자고 권고했다. 2022년에는 9년간 준비한 교황청 기구 개혁을 단행했다. 개혁안을 담은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2022.3.19. 반포, 6.5. 발효)는 개혁의 지향을 공의회의 쇄신 정신, 착한 사마리아인의 영성, 친교 안에서의 공동 책임, 주교들의 사명에 대한 봉사, 보편성의 표현, 부(富)의 축소 등으로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파격적인 인사를 통해 유럽인 성직자 중심으로 여겨지던 교황청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재위 기간에 걸쳐 미얀마,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동티모르, 라오스 등 다양한 아시아 국가의 주교들을 추기경으로 발탁했으며,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추기경(복음화부 장관 직무 대행, 필리핀),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성직자성 장관, 대한민국) 등 아시아 성직자, 시모나 브람빌라 수녀(수도회부 장관), 파올로 루피니 박사(홍보부 장관), 막시마노 카바예로 레도 박사(재무원장) 등을 교황청 관료로 등용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4편, 교황 권고 7편을 비롯해 자신이 반포한 공식 문헌들에서 기쁨, 자비, 생태적 회개, 형제애를 실천을 강조했다. 아울러 전 세계 13억 가톨릭 신자들에게 현대의 위험인 고립과 자아도취를 물리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을 모두와 나누며(「복음의 기쁨」), 철저히 현실적이면서도 희망에 가득 찬 영으로 다른 이들을 비추자고 요청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2015년 자비의 특별 희년에 조명한 착한 사마리아인 정신은 「모든 형제들」(2020년)에서 구체화됐다. 교황은 「찬미받으소서」(2015년)를 통해 지구에 대한 인류의 관점을 쓰고 버리는 자원 창고가 아닌 ‘공동의 집’으로 전환시켰고, 창조 질서 수호를 위한 국제적 연대의 사명을 일깨웠다. 그는 정교회가 1989년부터 지내 온 9월 1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을 2015년부터 가톨릭 교회 기념일로 지정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기도하고 행동하는 날로 만들었다. 시노달리타스, 곧 모든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걷는 여정에 대한 꿈은 그가 교회에 남긴 귀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시노달리타스의 어근인 ‘시노드’는 의미상 ‘함께+길’의 합성어이면서 교회 회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무리하며 제정한 세계주교시노드가 지역 교회의 목소리를 충실히 반영하도록 힘을 실었다. 그가 소집한 세계주교시노드 정기총회는 가정(2015년 제14차), 청년(2018년 제15차) 등 현대 교회와 사회의 관심사를 짚으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를 주제로 한 제16차 정기총회는 2021년부터 햇수로 4년간 이어졌다. 교회 자체를 성찰과 쇄신의 대상으로 삼은 이 정기총회 여정은 풀뿌리 교회 조직인 본당에서부터 교구, 주교회의, 대륙을 거쳐 두 차례 로마 총회(제1회기 2023년 10월, 제2회기 2024년 10월)로 수렴되었고, 폐막 후에도 전 세계에서 ‘이행 단계’로 이어지고 있다. ●희망과 평화의 사도한국인에게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잊지 못할 존재다. 2014년 8월, 재위 2년차 교황은 첫 아시아 순방지로 한국을 택했다. 제6회 아시아 청년 대회(AYD) 폐막 미사에서 “잠자고 있는 사람은 춤출 수 없다”는 말로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 미사를 주례하면서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들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를 시복했으며,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나 위로하며 깊은 울림을 남겼다. 국가 단위의 주교단이 교황에게 지역교회 현황을 직접 알리고 논의하는 ‘사도좌 정기 방문’(Visita ad limina)에서도 교황은 한국을 향한 사랑을 전했다. 2015년 방문 중에는 한국 주교들에게 한국 사회의 현안을 묻는 한편, 현지에서 봉헌된 124위 시복 감사 미사에 부쳐 “평신도에 의해 시작됐고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한국 교회가 안락한 신앙을 버리고 아시아 교회의 빛이 되”기를 당부했다. 2024년에는 “분단된 한국, 고통의 상황이 속히 개선되고 종결되도록 기도”할 것을 약속하며, “젊은이들에게 신뢰를 주는 교회, 열린 분위기의 교회”를 만들어 나가자고 독려했다. 교황은 재임 기간 내내 세계 평화를 위한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2013년 7월 브라질부터 2024년 12월 프랑스까지 70여 개국을 사목 방문했고, 전쟁 지역인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교황 특사를 파견했으며,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와 단식의 날’을 여러 번 선포했다. 교황은 2013년 9월 7일 시리아의 평화를 위해, 2018년에는 콩고민주공화국과 수단, 2020년에는 레바논, 2021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2022년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해, 2023년에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종식을 위해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연대를 청했다. 평화를 위한 교황의 기도는 병상에서도 계속되었다. 교황은 서면으로 발표한 2025년 2월 23일 주일 삼종기도 연설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3년을 언급하며,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중동, 미얀마, 수단 등 분쟁 지역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청했다. 병세가 완화된 24일에는 가자 지구의 본당신부에게 전화로 위로를 전하기도 했다. 2025년 3월 23일 로마 제멜리 병원에서 퇴원한 뒤에도, 교황은 생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주님의 양 떼인 신자들과 함께했다. 비록 휠체어에 의지한 모습이었지만, 교황은 퇴원하던 날에도, 4월 6일 병자와 의료 종사자를 위한 희년 행사 현장에도, 성주간의 첫날인 4월 13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도, 17일부터 이어진 파스카 성삼일과 20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도, 그를 위해 기도하는 신자들에게 직접 찾아가 인사를 건넸다. 즉위 직후 2013년 3월 28일(성주간 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 때 사제들에게 권고한 대로, 교황은 끝까지 주님의 양(羊=신자)들 가운데에 있었던 “양 냄새 나는 목자”였다. 2025년 가톨릭 교회의 정기 희년(25년 주기)을 선포하며 ‘희망’이라는 키워드를 세계인의 가슴에 새기고, 희년의 부활 대축일을 지낸 후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프란치스코 교황. 교황은 최근에 발행된 자서전 「희망」(Spera)에서 그가 사목 방문 때마다 찾아가 기도했던 로마 성모 대성전(Basilica Papale di Santa Maria Maggiore)에 묻히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 이성계 건원릉 한식 맞아 억새 벌초한다

    이성계 건원릉 한식 맞아 억새 벌초한다

    한식을 맞아 태조 이성계(1335~1408)의 묘에서 억새(청완)를 베는 행사가 열린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동부지구관리소는 다음달 5일 경기 구리 동구릉 내에 있는 조선 1대 임금 이성계의 건원릉 봉분을 덮고 있는 억새를 자르는 ‘청완 예초의’를 진행한다고 26일 밝혔다. 건원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봉분이 억새로 덮여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르면 태조의 유언에 따라 고향인 함흥의 억새를 옮겨 와 봉분을 조성했다. 국가유산청은 전통 계승을 위해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듬해인 2010년부터 매년 예초의를 진행해 왔다. 지난해부터 궁능유적본부 홍보대사로 활동 중인 배우 김영민이 예초 전 왕릉을 살피는 절차인 ‘봉심’ 과정에 직접 참여한다.
  • 한식 맞아 이성계 무덤서 억새 베는 행사 열려…배우 김영민 참여

    한식 맞아 이성계 무덤서 억새 베는 행사 열려…배우 김영민 참여

    한식을 맞아 태조 이성계(1335~1408)의 무덤에서 억새(청완)를 베는 행사가 열린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동부지구관리소는 다음달 5일 경기 구리 동구릉 내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봉분을 덮고 있는 억새를 자르는 ‘청완 예초의’를 진행한다고 26일 밝혔다. 건원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봉분이 억새로 덮여있다.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의 유언에 따라 고향인 함흥의 억새를 옮겨와 봉분을 조성했다. 이에 매년 한식에 건원릉에서 풀 베기를 했다고 전한다. 국가유산청은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조선왕릉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듬해인 2010년부터 매년 ‘청완 예초의’를 진행한다. 봉분의 억새를 베는 예초의, 이를 알리는 고유제(중대한 일 이전이나 이후에 일에 대한 사유를 고하는 제사), 음복 순서로 진행된다. 지난해부터 궁능유적본부 홍보대사로 활동 중인 배우 김영민이 예초 전 왕릉을 살피는 절차인 ‘봉심’ 과정에 직접 참여할 예정이다. 행사는 누구나 볼 수 있으며 고유제에 제관으로 참여하려면 28일부터 4월 2일까지 궁능유적본부 홈페이지에서 신청하면 된다.
  • [열린세상] 2025년의 3·1 정신은 무엇일까

    [열린세상] 2025년의 3·1 정신은 무엇일까

    이번 삼일절은 근래에 들어서 가장 정치적인 삼일절이었다. 작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정국이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을 둘러싸고 계속 격화되면서, 탄핵 반대 시위와 탄핵 찬성 시위가 삼일절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치적 삼일절은 실제 역사 속 3·1 정신의 왜곡일까. 확실히 3·1운동을 독립이라는 민족적 염원을 위한 비폭력 평화 시위로 한정한다면 2020년대에 정치적인 이유로 3·1 정신을 동원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정치적 동원이 실제 3·1운동의 역사와 부합하는 것임을 인식해 볼 필요도 있다. 우선 3·1운동은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폭발한 국민운동이었다. 그리고 3·1운동으로 등장한 한국인의 ‘일치단결 에너지’는 역설적으로 이후 한국 현대사를 수놓을 무수한 갈등과 분열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민족 의지의 폭발로서 3·1운동은 한국 공화 정치의 시작이었다. 대한제국 황실이 일본에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않고 국권을 넘겨준 이전 경술국치와는 달랐다. 왕조와 국가의 구분이 희미하던 당시에는 왕가의 항복으로 독립 정신도 타격을 입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왕조의 소멸은 동시에 정치적 상상력이 만개하게 도왔다. 독립을 꿈꾸고, 독립한 나라를 개명되고 발전된 나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타올랐고, 국민 한 명 한 명이 그 과업에 참여하겠다며 태극기를 흔든 것이다. 민족 의지의 폭발은 당연히 민족 지식인과 후대 지도자들에게도 엄청난 영감을 주었다. 한국인은 나라를 허무하게 넘겨주는 무기력한 민족이 아니라 모두가 일치단결해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단합력과 의지를 지닌 민족이라는 희망이 생겼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목표를 무엇으로 설정하냐는 것이었다. 어떻게 독립을 해야 하고, 독립 후에 어떤 사회를 건설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독립운동가들은 분열을 거듭했다. 이 노선 투쟁에서 이기는 자가, 3·1이 보여 준 국민 단결의 에너지를 독점해 새로운 나라를 그릴 수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단결을 향한 염원이 다원성의 부재와 동의어였음은 해방 정국에서도 드러났다. 국내외 민족 운동가들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를 자신의 뜻을 따르게 ‘단결’시키고자 했다. 안타깝게도 그 논쟁은 해방 정국의 혼란, 나아가 분단과 참혹한 전쟁으로 확대됐다. 물론 3·1에서 발현된 일치단결의 정신은 대한민국이 위대한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하다. 한국이 이룬 산업화와 민주화는 한국인들이 보인 일치단결의 에너지가 세계적으로도 놀라운 수준이라는 생생한 증거로서 3·1 정신을 잇는 것이었다.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 이후 그에 버금가는 합의가 등장하지 못하자 문제가 생겼다. 단결할 목표가 없어진 상태에서 오직 단결만을 요구하는 것은 정치적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그 결과 6공화국의 민주정치는 파행에 이르렀고, 끝내는 2020년대에도 서로 다른 두 세력이 3·1 정신의 계승을 주장하며 대립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존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3·1 정신을 내려놓아야만 할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더 위대한 목표를 향해 단결하고자 하는 충동은 한국인의 강력한 심리적 경향이다. 한 번 단결하기까지는 힘들지만, 일단 정해지면 놀라운 속도의 집단적 동기화가 이루어져 예상도 못 한 결과물을 내놓는다. 그러니 우리의 문제는 단결의 강조로 빚어지는 다양성의 부재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 단결할지를 결정하지 못한 합의의 부재일 수도 있다. 지정학, 인공지능(AI), 미디어 등 모든 면에서 앞으로 벌어질 이 대격변의 시기를 통과해 새로운 한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발굴하는 것, 아마 그것이 3·1의 정신을 높은 차원에서 회복하는 길이 되지 않을까. 갈등으로 얼룩진 2025년의 삼일절에, 우리에게 여전히 에너지는 남아 있다는 희망의 씨앗을 찾아보고 싶다. 임명묵 작가
  • 김원중 서울시의원, 사찰음식 축제마당 & 왕실다례재현 성황리 개최

    김원중 서울시의원, 사찰음식 축제마당 & 왕실다례재현 성황리 개최

    서울시의회 교통위원회 김원중 의원(국민의힘·성북2)은 지난 6일 ‘서울시 종교계와 함께하는 문화행사 지원사업’의 하나로 열린 ‘사찰음식 축제마당 & 왕실다례재현’ 행사에 참석했다. 이번 ‘사찰음식 축제마당’ 행사는 성북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흥천사(주지 각밀스님)에서 성북구사암(사찰) 연합회(회장 심곡사 주지 원경스님)의 주최로 진행됐으며, 성북구의 8개 사찰이 음식 부스를 운영해 대표 사찰음식을 시민들에게 소개하고 직접 만들기 체험을 제공하는 축제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왕실의 ‘진전다례(眞殿茶禮)’를 재현한 ‘왕실다례재현’ 행사는 ‘조선 왕실의 원찰’인 흥천사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재발견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축제와 함께 진행된 다양한 문화행사는 서울시민과 성북구민에게 한국불교의 우수한 문화와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며 전통을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 김 의원은 “‘종교계와 함께하는 문화행사’로 진행된 이번 축제는 전통과 어우러진 불교문화를 ‘사찰음식’과 ‘진전다례’로 시민들에게 보여드릴 수 있어 매우 뜻깊은 자리였다”라며 “사찰음식을 통해 한국불교 문화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김 의원은 “사찰음식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정신과 문화를 담고 있는 소중한 유산”이라고 말하며 “참석하신 모든 분이 정갈한 사찰음식과 왕실대례재현을 경험해 전통을 계승하고 마음의 풍요로움을 얻으시길 바란다”라며 축제의 의미를 강조했다. 시민 약 1500명이 함께한 이번 축제에서 김 의원은 축사를 통해 행사를 준비한 성북구 사찰연합회와 흥천사에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연합회 회장 원경스님과 부회장 지산스님, 이승로 성북구청장과 함께 무대에 올라 차회를 시작하는 ‘다반개반(茶盤開盤)’ 의식을 개시했다.
  • “이승만 미화·우상화 없이, 객관적 사실 기술하는 기념관 만들 것”[박성원의 직설대담]

    “이승만 미화·우상화 없이, 객관적 사실 기술하는 기념관 만들 것”[박성원의 직설대담]

    내년 상반기 착공… 2027년 개관초대 대통령 기념관 없는 건 잘못실체 없는 건국절 논쟁 부질없어독도 지우기 논란, 답답하고 한심“정파적 이익보다 국익 생각해야”공동체 이익 위해 대화·타협 중요독일 발전은 협치와 연정의 산물정치란 미우나 고우나 타협해야“4대 개혁 위해 獨 경험서 배워야”개혁정책 계승, 경제 번영의 토대어느 한쪽 완승완패는 해결 아냐독한 말 ‘업보’… 표현에 신중해야김황식 전 국무총리는 지난해 6월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발족 때부터 이사장을 맡아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 추진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재임 시절부터 온화한 성품의 김 전 총리였지만, 기념관 건립 활동을 비롯한 일에 관해 설명할 때는 열정이 느껴지는 여전한 ‘청년’이었다. 김 전 총리는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의 기틀을 만든 대통령의 기념관이 없다는 건 잘못된 일”이라며 “일방적으로 미화하거나 우상화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기술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의 건국절 논쟁에 대해선 “부질없는 짓”이라고 했고 독도지우기 논란에 관해서는 “답답하고 한심스럽다”며 안타까워했다. ―총리 퇴임 후 독일에 계실 때 이승만 연구를 하셨는데요, 이유가 궁금합니다. “독일에 가서 독일 총리들의 리더십을 연구했는데, 특히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를 공부하다 보니 자꾸 이승만 대통령이 오버랩되는 거예요. 독일도 아데나워 총리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매우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독일이나 한국이나 국운이 있는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김 전 총리는 저서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에서 집필 동기를 ‘모두 성공적이었고 실패한 총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라는 관심에서 출발했다고 소개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온전한 퇴임 후를 보낸 이가 드문 우리로선 부러운 얘기였다. ―두 나라의 어떤 차이가 양국 국가지도자들에 대한 상이한 평가를 가져온 걸까요. “우리는 왕조와 일제강점기를 거쳤을 뿐 민주주의 경험이 없이 민주국가로 출발한 반면 독일에는 바이마르 민주공화국과 나치 전체주의라는 우여곡절을 겪은 민주주의 역사가 있었어요. 우리는 6·25전쟁을 치르는 등 이념 갈등이 너무 컸고요. 그럼에도 우리 대통령들이 나름의 역할들을 다 하셨기에 오늘 우리 대한민국이 있는 거죠.” 이승만 기념재단은 10여곳의 부지를 검토한 끝에 지난달 13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인근을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 부지로 선정했다. 2027년 개관을 목표로 관계기관 협의 등 절차를 진행 중이며 내년 상반기에 착공할 예정이다. 부지 결정에는 무엇보다 지리적으로 서울 중심에 있으며 인근에 국립중앙박물관, 한글박물관, 전쟁기념관, 용산가족공원 등이 있다는 접근성과 편의성이 고려됐다고 한다.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분들도 있는데요, 기념관 건립이 갖는 의미와 필요성은 무엇입니까. “일부 반대하는 분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과를 부풀리거나 오해해서 그러는 게 있을 겁니다. 공과를 평가해서 국민께 정확히 알린다면 모든 국민이 찬동할 것입니다. 지금 네 분 대통령의 기념관은 있는데 대한민국의 기틀을 만든 대통령의 기념관이 없다는 건 잘못된 일이죠.” 김 전 총리는 기념관의 전시 내용에 관해서도 “일방적으로 미화하거나 우상화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정확히 기술할 것”이라고 했다. 견해가 다른 부분은 병렬적으로 소개함으로써 국민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는 말도 했다. 건립 비용은 독립유공자예우법에 따르면 전액 정부 예산으로 충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초대 대통령이라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30%만을 국비로 지원받고 나머지 70%는 국민 모금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을 택했다. 모금 목표액 700억원 가운데 지난 5일 현재 140억원가량이 모금된 상태라고 한다. ―내년이 광복 80주년입니다. 칼럼 모음집 ‘풍경이 있는 세상’에서 “광복절은 분노하는 날이 아니라 미래를 다짐하는 날”이어야 한다고 쓰셨죠. “일본이 과거사 문제에 제대로 사과하는 태도를 보여 주지 못한 데 대해서는 우리가 서운해하고 (사과를) 요구할 수 있죠. 그러면서도 일본은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웃이고 이제 우리도 맞설 수 있는 국력을 키웠으니 그저 싸우거나 화를 내기보다는 좀더 당당하고 어른스럽게, 품격 있게 접근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올해 ‘쪼개진 광복절’ 행사와 건국절 논쟁, 최근의 독도 지우기 논란을 어떻게 보셨는지. “건국절 논쟁은 시민사회나 학계에선 있을 수 있겠지만, 정부가 건국절을 따로 제정하려는 계획은 없는 걸로 압니다. 그걸 갖고 마치 그러한 움직임이 있는 것처럼 전제로 해서 저렇게 예민하게 대응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며, 그걸 기화로 행사도 반쪽으로 나눠서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국력을 소모하는 일이다, 정말 부질없는 짓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요.” 김 전 총리는 대체로 담담한 어조를 유지했지만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이 조금 빨라졌다. “독도 문제도 느닷없이 독도를 지운다, 일본에 내준다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며, 만약 정부가 그런 일을 한다면 그 정부는 그날로 문을 닫아야 할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이야기들을 함부로 공공연히 하는지, 그리고 그 기반 위에 정치권이 그걸 또 정치적으로 이용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는 건설적인 일에 신경을 써서 함께 가야지, 어떻게라도 핑곗거리를 찾아서 서로 분열할 생각을 하는지 너무 답답하고 한심스럽습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얘기들을 갖고서 왜 이렇게 나라가 갈갈이 찢겨지는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말부터 남북 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로 규정하고 ‘민족’ ‘통일’ 등의 개념을 아예 지워 버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독일 통일의 교훈은 어떤 것인가요.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자유민주주의 통일이고, 전쟁 아닌 평화통일을 해야 하는데 거기엔 너무 많은 장애가 있으니까 어떤 구체적인 계획으로 통일할 수 있는 건 아니고요. 하나의 민족으로 서로 교류하고, 경제적으로 앞선 우리가 인도적 지원을 확대하면서 할 도리를 해 나가다 보면 통일의 기회는 온다고 봅니다. 독일도 구체적 통일정책을 세운 것은 아니고, 통일부도 없었어요. 다만 하나의 민족으로 서로 교류하며 도울 수 있으면 돕고 잔잔하게 해 나갔기에 동독 사람들의 마음을 사서 하늘이 준 기회를 살렸던 것이죠.” ―칼럼집 ‘풍경이 있는 세상’에서 “정치, 종교, 언론, 법원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함에 따라 그 결과로 우리 사회 공동체 구성원 간의 신뢰가 무너지고 상대방에 대한 증오가 넘쳐나고 있다”라며 걱정하셨죠. 오늘 우리 정치가 특히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선 무엇을 고치는 게 좋을까요. “정치란 건 미우나 고우나 타협을 해야죠. 개인의 정파적 이익보다는 국익을 생각해야 하는데, 국익이라는 게 생각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독일이 오늘날 저런 발전을 한 것은 협치와 연정을 통해 이뤄 낸 겁니다.” 김 전 총리는 ‘풍경이 있는 세상’에서 “거칠고 독한 이야기, 남에게 상처를 주는 글은 쓰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썼다. 이에 대해 그는 “누구를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내 생각을 얘기하며, 함께 생각해 보자는 뜻으로 썼다. 그래서 설명하듯 구어체로, 또 낮은 자세로 경어체로 썼고, 되도록 문장을 쉽고 평이하게 쓰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요즘 정치인을 비롯해 소셜미디어(SNS)에 글을 올리면서 거칠고 독한 말들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현재 입장에서만 생각하니까 독한 얘기를 할 텐데, 언젠가 그런 독한 말이 업보가 돼 부메랑으로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표현한다면 본인에게도 이득이 될 겁니다. 나중에 후회할 일은 하지 않는 게, 자중자애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정부의 의대 증원 방침에 반발하는 의료계의 진료 거부 장기화로 응급실 공백이 우려되는데요, 해결 방법이 없을까요. “이것도 서로 타협하고 절충할 여지가 분명히 있는 문제죠. 서로 인정하고 협력할 수 있는 파트너로 대화했으면 좋겠어요. 어느 한쪽이 완승완패한다면 해결이라 할 수 없겠죠.” ―로스쿨과 의과대학으로 우수 인력이 쏠리는 현상을 적절히 제어할 합리적 정책이 필요하다고 쓰신 적도 있죠. “이건 정말 국가 장래가 걱정되는 현상이에요. 현실적으로 법조인이나 의사라는 직업에 안정성이 있다 보니 몰려가는 건 뭐라 할 수 없는 것이지만, 국민들이 좀더 이 사회에 헌신하고 자기만족을 할 수 있는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지도록 정책적 배려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2003~2005년의 ‘어젠다 2010’과 ‘하르츠4’라는 포괄적 노동·사회 개혁을 통해 독일 경쟁력의 회복을 시도했다. 이 정책은 슈뢰더와 사민당에 2005년 총선 패배를 가져왔지만, 개혁정책을 계승한 기민당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독일 경제를 회복시켜 번영의 기틀을 만드는 토대가 되었다. ―연금·의료·노동·교육 등 4대 개혁은 더이상 늦출 수 없는 국가적 과제인데요. 슈뢰더의, 독일의 경험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슈뢰더가 시작한 개혁은 사민당 지지자들이 손해를 보는 것이었어요. 그럼에도 국가 발전을 위해선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내세웠던 것이고, 메르켈 총리가 사민당과의 대연정을 통해 정책을 계승하고 독일을 번영시키는 엔진이 됐던 거죠. 우리도 정파적 이익이나 목전의 선거만 생각할 게 아니라 국가공동체의 장래를 위해 어떤 게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을 해 줘야 해요. 서로 충분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절충점을 모색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대화와 타협이 안 된다면 제비뽑기라도 해서 타협을 해야죠.” ■김황식 前총리는 1948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났다. 광주일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광주지방법원장, 대법관, 감사원장에 이어 이명박 정부에서 제41대 국무총리(2010년 10월~2013년 2월)를 지냈다. 퇴임 후 안중근의사숭모회, 호암재단 이사장 등으로 활동 중이고 지난해 6월부터는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지산통신’,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 ‘풍경이 있는 세상’ 등의 저서를 펴냈다.
  • 인류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긴 황제의 순애보 [한ZOOM]

    인류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긴 황제의 순애보 [한ZOOM]

    서양인들에게 있어 ‘로마제국’은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런 이유 때문에 로마제국이 역사에서 사라진 후에도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과 같은 수많은 나라들은 “우리가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해왔다.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 나라 중에는 러시아도 있었다. 1453년 동로마제국이 오스만제국에 의해 멸망하자 러시아의 이반3세는 “나는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조카 소피아 팔라이올로기나(Sophia Palaiologina) 공주와 결혼했다. 따라서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이은 유일한 황제는 나뿐”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따로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제국만 로마제국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동로마제국도 서로마제국과 마찬가지로 로마제국의 역사를 계승한 제국이다. 하지만, 일부 서유럽의 역사가들이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서술하면서, 동로마제국은 유럽대륙을 버리고 떠났다가 이슬람 제국에 의해 멸망한 나라로만 기억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동로마제국은 유럽대륙 변방으로 옮겼다가 이슬람 제국에 의해 멸망한 작고 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가 동로마제국의 위대한 황제가 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Justinianus I·483~565)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동로마의 위대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482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황실경비대 사령관이었던 외삼촌 유스티누스에 의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왔으며 나중에는 외삼촌의 양자가 되었다. 518년 동로마제국 황제가 세상을 떠났다. 황제의 후사가 없는 혼란한 틈을 타서 유스티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외삼촌 유스티누스가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원로원의 신임까지 얻었다. 시간이 흘러 527년 유스티누스도 세상을 떠났고 유스티니아누스가 뒤를 이어 동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재위기간(527~565)은 동로마제국은 전성기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사산왕조페르시아의 침입을 막아 제국을 안정시켰고,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게르만족이 가져간 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영토의 상당부분을 되찾았다. 그리고 537년에는 소실된 ‘성 소피아 대성당’을 재건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제국의 위대한 황제로 평가받고 있으며, 동방정교회로부터 대제(大帝)라는 칭호를 받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로 기록되어 있다.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사랑한 여인 ‘테오도라’ 522년 동로마제국의 황태자였던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라(Theodora)를 만나 한 눈에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 후 공식적으로 그녀와의 결혼을 발표했다. 황태자의 결혼발표는 로마사회 전체를 충격에 빠뜨렸다. 테오도라는 당시 가장 천한 신분으로 여겨졌던 서커스 극단의 여배우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라면 황태자와 여배우의 ‘세기의 결혼’ 또는 ‘세기의 로맨스’로 세간의 관심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관습법은 고위 관료와 천한 여배우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았다. 테오도라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황태자 유스티니아누스는 법을 개정해서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그리고 2년 후에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테오도라는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테오도라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는다. 아마도 천한 신분의 여배우를 황후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테오도라 황후를 마녀처럼 묘사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테오도라 황후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함께 동로마제국의 번영을 이끌었던 위대한 리더였다. 반란으로 황제의 자리가 위태로웠을 때에도, 페스트에 걸린 황제가 죽음의 문턱을 넘고 있었을 때에도 테오도라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황제와 황실을 지켜냈다. 신분이 달라도 결혼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여성의 지참금을 강요하는 악습을 폐지했으며,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행위를 엄격히 단죄하는 법을 만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재단을 만들어 구호활동에도 앞장섰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은 그녀의 진심을 알아갔고, 어느덧 황후는 성녀(聖女)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테오도라는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황후를 잃은 황제는 발이 닿는 모든 곳마다 황후를 기억했고, 황후가 생전에 실천한 모든 것들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황제는 언제나 테오도라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고, 적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에도 테오도라의 무덤을 먼저 찾아 그녀에게 승리의 기쁨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황후가 떠난 지 17년이 지난 어느 날 81세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리워하던 황후의 곁으로 떠났다.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최대 업적은 ‘로마법 대전’의 편찬이다. 로마제국의 모든 법률, 판례, 칙령 등을 집대성하여 체계적으로 구성한 로마법 대전은 이후 대륙법으로 전승되었고 독일과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 법률에도 영향을 주었다.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Rudolf von Jhering·1818~1892)은 그의 저서 ‘로마법 정신’을 통해 로마는 세 번에 걸쳐 세계를 지배했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는 무력을 통한 유럽대륙을 통일이고, 두 번째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종교적 통일을 이룬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서양법률의 근간이 되는 로마법을 완성해 인류의 행동기준과 정신을 통일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로마법 대전을 로마제국이 인류에게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동로마제국의 위대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업적과 순애보를 정리하며, 동로마제국은 결코 작고 약한 유럽대륙 변방의 나라가 아니었으며, 인류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긴 위대한 제국이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 왕권을 강화시킨 ‘의회 정치’… 국가를 무너뜨린 ‘의회 패싱’[차용구의 비아 히스토리아]

    왕권을 강화시킨 ‘의회 정치’… 국가를 무너뜨린 ‘의회 패싱’[차용구의 비아 히스토리아]

    대헌장으로 불리는 마그나카르타는 1215년 영국의 존 왕이 귀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왕에게 대항해 왕에게서 받아 낸 문서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왕의 독주와 전횡을 막고 백성의 권리와 자유를 쟁취한 문서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러한 기존의 해석에는 놓친 부분이 있다. 존 왕이 헌장 초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귀족들과 오랜 시간 토의함으로써 그들에게서 화해를 끌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대헌장은 통치자와 귀족들이 긴 시간 협상한 결과물로, 결국에는 통치자의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도운 모범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더 나아가 존 왕은 귀족들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음으로써 이들이 더는 국정 운영에 방해꾼이 아니라 동반자이자 책임자로 참여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대헌장은 훗날 영국에서 왕과 귀족들이 국사를 걱정하고 논의하던 의회를 탄생시키고 대의민주주의가 발전하는 초석을 놓았다.대헌장 제정을 계기로 왕과 귀족의 신뢰가 회복되고 양측이 협치함으로써 정책 의제를 수월하게 입법화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왕들은 의회의 동의를 얻으면 세금을 징수하거나 법률을 제정하고자 할 때 일을 좀더 쉽게 추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았다. 의회를 이용한 통치는 결국 왕권 안정은 물론 국가 재정 수입 증가와 건실한 재정으로도 이어졌다. ●왕이 만든 의회, 왕의 국정 파트너 영국 이외의 유럽 국가들도 의회와 더불어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통치자에게 유리함을 인식하게 됐다. 왕들은 의회를 국가 운영에 매우 유용하고 편리한 장치이자 교두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필리프 4세는 1302년 삼부회로 알려진 신분제 회의를 소집했다. 전국의 성직자, 귀족, 시민의 대표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의회를 연 것이다. 필리프 4세는 당시 대외적으로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대립하면서 위기감을 느끼자 프랑스가 왕권을 중심으로 통합됐음을 과시하려고 의회를 소집했다. 그의 이러한 정치적 실험은 의회가 왕의 정책에 거국적인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영국의 왕이 과세를 하려고 의회의 힘에 의존했듯이 프랑스의 통치자도 의회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강력한 군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필리프 4세는 신민의 대표 기구인 의회의 지지를 끌어냄으로써 교황과 벌인 권력 다툼에서 승리했다. 이렇듯 통치자의 위용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려고 왕국의 대표자들을 소집해 의회라는 기구를 만든 당사자는 바로 통치자 자신이었고, 왕은 의회라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았다. 하지만 아름다운 음악은 지휘자와 악단의 호흡이 잘 맞을 때 가능한 법이다.성공한 군주는 ‘의회 정치’ 활용의회와의 협상 결과물 英 대헌장 佛 삼부회 지지 얻은 필리프 4세다수결로 왕 선출했던 獨 ‘선제후’의회가 왕권 안정의 교두보 역할의회 협력 없인 왕권도 위험루이 16세 의회제 활용할 줄 몰라佛절대왕정이 대혁명 배경 되기도의회의 힘 무시했던 일부 통치자정치적 역풍 맞아 국정 혼란 초래의회 정치의 또 다른 선진국인 독일에서는 통치자와 신민 대표자가 주종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였다. 전통적으로 지방분권적 성향이 유난히 강해서 토착 세력이 중앙정부로부터 독립적이었던 독일에서는 통수권자인 왕조차 지방 호족들 손에 선출됐다. 특정 가문에서 왕위가 세습되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때도 왕위 계승에 대한 귀족들의 동의 절차가 필요했고 왕권의 정통성은 귀족들의 선출로 보장됐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로 선제후들이 왕을 선출하는 금인칙서가 반포(1356)되기도 했다. 왕이 죽으면 왕국을 대표하는 선제후 7명이 모여 다수결로 새로운 통치자를 뽑는 것을 명문화한 것이다. 신임 왕은 자신을 선출해 준 데 대한 답례로 귀족들과 일종의 선거 계약을 해야 했다. 이는 독일어로 ‘발카피툴라티온’(Wahlkapitulation)이라고 하는데 ‘카피툴라티온’(Kapitulation)은 사실 항복이라는 뜻이니 왕권은 귀족권, 즉 통치자는 신민의 대표자들과 타협·협상·협력적 태도를 보여야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통치자·선제후단은 합의제적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1356년의 ‘선거법 개정’ 과정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왕과 선제후들이 1년 이상 협의 과정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양측이 서로 합의해 선거법을 만들었으므로 왕위 계승 과정에서 분쟁이 발생할 여지가 줄어들었고, 동시에 선제후단은 왕국을 대표하는 대의 기구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흑사병이라는 사상 초유의 감염병에 직면하자 왕과 선제후단은 합심해서 국가의 통일성과 안정성을 확보해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다. 양측은 공공선을 지상 목표로 삼아 인내심을 갖고 정치적 대화와 타협으로 국정을 안정화할 수 있었다.●혁명까지 불러일으킨 슬로건 중세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로 평가받는 프리드리히 2세는 대귀족들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면서 그들의 영지에 동의 없이 과세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이러한 의회주의적 전통은 훗날 “대표 없이 조세 없다”는 슬로건에서도 잘 드러난다. 18세기 중반 영국이 북미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자 신대륙에 정착한 영국인은 “국민이 자신들의 대표자를 뽑아 의회에 보내지 않으면 세금을 부과당할 수 없다”며 저항했다. 자신들을 대표할 의회 의원을 선출할 투표권이 없으니 영국 정부에 세금을 낼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영국 정부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기는커녕 군대를 보내 진압하면서 식민지 주민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결국 미국 독립전쟁(1775~1783)이 벌어졌고 영국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식민지를 잃었다. 마그나카르타의 협상자들이 과세를 둘러싼 팽팽한 기 싸움을 현명하게 해결했지만, 후대의 영국인은 그러지 못했다.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를 거치지 않고 국민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려던 영국 왕실의 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식민지 주민들의 간절한 바람은 자신들의 의견을 대변할 대표, 즉 의회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당시 영국 왕인 조지 3세에게 희망을 품고 기다렸으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자 통치자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점차 분노로 바뀌었다. 결국 이들은 1774년 ‘대륙 의회’를 구성하고 영국 왕실에서 독립하면서 직접 대안을 찾으려고 했다. 의회와의 관계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는 바람에 정부가 붕괴한 역사적 사례는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들 수 있다. 1789년 5월 5일 프랑스 절대왕정을 상징하는 베르사유궁전에서 루이 16세는 신분제 회의를 소집했다. 절대왕정이 확립되면서 1614년 이후 단 한 번도 개최되지 않다가 무려 175년 만에 의회가 열렸으니 제대로 운영될 리 없었다. 의회가 열리기 전부터 사람들은 인권·자유와 평등·민주주의적 국가 운영 방식 등에 대한 논의를 활발히 진행했기에 이들의 정치의식은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의회를 소집하라고 요구했으나 왕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왕이 백성들의 목소리를 직접 경청할 수 있는 ‘민생 행보’를 펼치기 어려웠던 시대였기에 의회를 통해 우회적으로나마 이런 급격한 변화를 읽어 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터이다. 하지만 자신의 막강한 공권력에만 의존했던 왕은 신민의 대표 기구인 의회라는 좋은 제도를 활용할 줄 몰랐다. 이처럼 꽉 막힌 정치 상황에서 스스로 주권자로서 인식하기 시작한 국민은 새로운 국회(국민의회)를 구성하고 혁명을 일으켰다. 루이 16세는 몰래 도망치다가 붙잡히는 수모를 당했고, 결국 의회가 내린 사형 결정에 따라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한 달 뒤면 대한민국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그 결과가 여소야대이든 여대야소이든 대통령은 의회를 국정 파트너로 존중하고 의회와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협치하며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 유럽에서는 의회를 뜻하는 ‘팔러먼트’(parliament)라는 단어가 13세기부터 사용됐는데, 어원은 중세 프랑스어의 ‘파를레’(parler·말하다)에서 파생됐다. 이처럼 본래 의회는 왕과 신민의 대표자들이 협상을 벌이는 기구였음을 잊지 말자. 영국·프랑스·독일·미국 등 의회민주주의가 발전한 선진국의 역사적 사례가 보여 주듯이 성공한 통치자는 국민의 대의기관인 의회의 정치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에 상응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국정 운영의 동반자로 격상된 의회는 공동체의 번영을 이루려고 통치자와 기꺼이 협력했다. 하지만 의회를 무시하거나 존중하지 않은 통치자들은 정치적 역풍을 맞아 목숨을 잃거나 심지어 국가에 손해를 입혔다. 역사는 성공한 통치자가 되려면 의회와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양보할 것은 양보해야 함을 말해 준다. 중앙대 교수·작가
  • 이순신 장군 예장 행렬 409년 만에 되살리다

    “죽음마저 숨긴 인간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을 우리가 위로해야 합니다.” 충남 아산에서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의 예장(국가에서 예를 갖춘 장사) 행렬이 409년 만에 재현됐다. 아산시는 지난 17일부터 현충사 등에서 ‘그리운 사람 이순신이 온다’를 주제로 ‘이순신 순국제전’을 열었다. 19일에는 마지막 행사로 온양온천역∼현충사 4.4㎞ 구간에서 ‘이순신 장례 행렬’이 17세기 예법에 따라 진행됐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충무공의 예장은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하고 16년이 지난 1614년 산소를 아산으로 이장하며 치러졌다. 이날 예장 행렬에는 덕수 이씨 종친회와 군인, 지역민 등 700여명이 참여했다. 제관 복장은 문화재청 등 한국 장례학 분야 학자들의 고증으로 복원했다. 상여는 온양민속박물관이 소장한 ‘32인 상여’를 사용했다. 이 상여는 1940년대 만든 것으로 현존하는 민속 상여 중 최대 규모다. 온양민속박물관이 기증받은 것으로 전문가의 고증과 복원을 거쳤다. 행렬 재현은 임진왜란과 가장 인접한 시기인 1645년 소현세자의 ‘예장도감의궤’와 1692년 원종의 ‘예장도감의궤’를 참고했다. 도가대·선상군·의장대 등으로 구성된 장례 행렬은 은행나무길을 거쳐 장군의 업적과 위업을 선양하기 위해 조성한 현충사까지 진행됐다. 순국제 기간에는 1973년 발표된 고 박동진 명창의 판소리 ‘충무공 이순신’을 이봉근 명창이 재해석해 복원한 ‘성웅 충무공 이순신가(歌)’와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보존회의 ‘충무공 이순신 현충 제례악과 일무’도 펼쳐졌다. 박경귀 아산시장은 “이순신 순국제전은 장군을 제대로 기리기 위해 400여년 전 정서를 실감할 수 있게 기획했다”며 “순국제전이 한국 전통문화의 창조적인 계승에 이어 아산시의 문화 정체성을 대변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말했다.
  • 조수미 금관 문화훈장…50주년 맞은 문화훈장 15명 수훈

    조수미 금관 문화훈장…50주년 맞은 문화훈장 15명 수훈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성악가 조수미 씨가 금관 문화훈장을 받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올해 문화예술발전 유공자로 문화훈장 수훈자 15명과 대한민국 문화예술상(대통령 표창) 수상자 5명,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문체부 장관 표창) 수상자 7명, 예술가의 장한 어버이상(문체부 장관 감사패) 수상자 5명 등 모두 32명을 선정해 27일 발표했다. 조씨는 38년간 세계 오페라 무대에서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고 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공적을 인정받아 금관 문화훈장을 받는다. 문화훈장은 문화예술 발전과 국민 문화향상에 이바지한 공적이 높은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금관은 5개 등급 가운데 최고 등급으로, 해당 분야 개척자나 원로급에 수여한다. 은관 문화훈장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24호 궁중채화 보유자로 60여년간 ‘조선왕조실록’ 기록에만 현존한 조선왕조의 의례를 연구 복원하고 한국궁중꽃박물관 설립 등으로 한국궁중예술 전승 발전에 기여한 전통공예가 황을순 씨에게 돌아갔다. 또 40여년간 전국 각지를 돌며 한국의 토속 음악을 소재로 활발한 작곡과 방송활동을 하고 창작품 및 녹음자료 등 8000여점을 국립국악원 아카이브에 기증한 국악작곡가 고 이해식 씨, 평생 춤 외길을 걸어온 전통무용가로 승무와 살풀이춤, 태평무 등 전통춤을 계승한 무용가 정승희 씨 등 3명이 받는다. 보관 문화훈장은 최영묵 빛소리친구들 대표, 표미선 표 갤러리 대표, 오수환 서울여대 명예교수, 강석영 전 이화여대 명예교수, 박광웅 전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등 5명에게 수훈한다. 문체부는 1969년부터 매년 10월 셋째 주 토요일 문화의 날에 문화예술발전 유공자를 선정해 포상한다. 올해는 1973년에 제정된 문화훈장이 50주년을 맞았다. 유인촌 문체부 장관은 “예술인들이 작품 활동을 통해 마음껏 자신의 꿈을 꽃피울 수 있도록 자유롭고 공정한 창작환경을 조성하고, 국민의 문화 향유 기회를 증진해 국민이 문화로 행복하고 화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 1500년 전 백제 왕실의 장례… 무령왕의 마지막을 함께하다

    1500년 전 백제 왕실의 장례… 무령왕의 마지막을 함께하다

    장례는 망자를 기리는 것이나 산 자를 위한 의식이기도 하다. 떠난 이가 남기고 간 슬픔의 무게를 남은 이들이 견뎌 내면서 그 사람 없이 살아가야 하는 시간을 준비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충남 공주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지난달 개막한 ‘1500년 전 백제 무령왕의 장례’는 무령왕(462~523) 1500주기를 맞아 성왕(504?~554)이 곡진하게 치렀던 아버지의 장례 과정을 조명한다. 무덤 안치 등 약 27개월간의 일을 국보 9건 등 백제 왕실의 장례문화와 관련된 126건 697점을 통해 보여 준다. 왕권 사회에서 선왕의 장례는 일반 장례보다 더 중요했다. 아버지가 구축한 세계를 아들이 무사히 이어받는 것은 왕조의 운명과도 직결된 일이었다. 흔들리던 백제 왕조를 강화한 무령왕을 계승해야 하는 성왕에게 장례는 새 백제왕으로서 자리와 권위를 찾아가는 핵심 과정이었다. 성왕은 돌아가신 왕을 위해 땅의 신에게 묘소로 쓸 좋은 땅을 ‘돈 1만매’를 내고 샀고 이를 증명하는 내용을 돌에 새겨 넣었다. 영원한 안식처가 될 공간은 연꽃무늬 벽돌로 채워 꾸미는 등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아버지를 모시면서 성왕은 새로운 시대의 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전시는 크게 5부로 구성됐다. 무령왕이 죽은 523년 5월 7일을 알려 주면서 전시관에 입장하면 관람객들은 조문객이 된다. 무령왕의 묘지석에는 황제의 죽음을 뜻하는 ‘붕’(崩)이 쓰여 있는데 김미경 학예연구사는 “장례를 황제의 격식으로 치르며 자신의 위상까지 높이려 한 의지”라고 설명했다. 1부에선 무령왕의 죽음을 맞이한 성왕이 장례를 준비하는 과정을 담았다. 선왕의 선업이 이어지기를 바란 성왕의 염원이 다양한 유물을 통해 소개된다. 2부에서는 무령왕의 시신을 생전 모습으로 정성껏 꾸민 뒤 집 모양의 목관에 안치하기까지 과정을 보여 준다. 무령왕 목관 위로 영상으로 별자리가 펼쳐져 27개월 시간의 흐름을 표현했다. 장례가 진행되며 죽은 왕은 생전 호칭인 사마왕에서 무령왕이 됐고 성왕은 태자 명농이 아닌 새 왕으로 조문 사절을 맞았다.3부는 성왕이 무령왕의 시신을 무덤에 안장하며 제사를 지낸 과정을 전한다. 장례의 마지막은 무덤을 지키던 짐승 조각인 ‘진묘수’(鎭墓獸)가 채운다. 이정근 국립공주박물관장은 “장례식의 주인공인 무령왕과 장례를 주관한 성왕 두 명이 주인공인 이야기”라며 “같은 유물이지만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눈여겨봐 달라”고 말했다. 12월 1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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