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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조선과 멕시코의 ‘갤리언’ 교류

    [씨줄날줄] 조선과 멕시코의 ‘갤리언’ 교류

    한국은 2026년 북중미월드컵 축구대회의 예선 3경기를 모두 멕시코에서 치른다. 특히 두 번째 경기에서 주최국 멕시코와 과달라하라에서 맞붙는다. 세 번째 경기가 있을 몬테레이는 멕시코 한류를 주도하는 도시다. 기아의 자동차공장과 만도·현대모비스 부품공장, 포스코 자동차용 강판공장이 밀집해 있다. 한국과 멕시코의 교류는 1905년 1033명의 조선인이 유카탄반도 메리다의 애니깽(선인장의 일종) 농장에 노동자로 건너간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는 처음이다. 하지만 이전에도 간접적인 관계는 적지 않았던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동양과 누에바 에스파냐(새로운 스페인)라 불린 중남미를 연결하는 수단이 대항해시대 범선 갤리언이었다. 아카풀코와 마닐라를 잇는 항로는 마젤란이 1521년 개척했다. ‘마닐라 갤리언’으로 불리는 뱃길은 신대륙과 아시아를 잇는 교역로가 됐다. 아카풀코에서 갤리언에 실린 교역품은 금과 은이 많았다. 농산물은 중국과 일본을 거쳐 조선에도 전파됐는데 고추와 감자, 고구마, 호박, 옥수수, 땅콩이 대표적이다. 담배도 같은 경로를 거쳤다. 마닐라 갤리언이 사실상 한국인의 식생활을 완전히 바꿔 놓은 것이다. 마닐라는 아시아산 교역품의 집산지가 됐다.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동남아의 향신료, 인도의 면직물, 일본의 공예품이 한데 모였다. 나가사키 일본 상인이 대마도 중계무역으로 입수한 조선의 인삼과 한지도 태평양을 건넜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신대륙에선 화물의 국적은 신경쓰지 않았던 만큼 ‘중국산’으로 뭉뚱그려졌다. 일부에서 ‘한국 및 일본산’이라는 표식이 보이는 정도라고 한다. 월드컵이 한국과 멕시코 두 나라의 생각보다 밀접했던 교류 역사를 되새기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멕시코 현지에서 교류의 구체적 흔적을 찾아보는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더욱 가까워질 두 나라가 스포츠와 산업은 물론 문화에서도 유대를 강화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 [씨줄날줄] 쿠바 한인

    [씨줄날줄] 쿠바 한인

    1921년 3월 25일 300여명의 한인이 배를 타고 쿠바 마나티항에 도착했다. 앞서 16년 전인 1905년 멕시코의 에네켄(용설난의 일종)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고국을 떠났던 1033명의 이른바 ‘애니깽 한인’들 중 일부였다. 멕시코는 당시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던 한인들이 기대했던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땡볕에서 채찍질까지 당하며 노예처럼 일했고, 4년 계약 기간이 끝난 후엔 국권을 빼앗긴 조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 흩어져 살길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쿠바에선 사탕수수 노동자들도 넥타이를 매고 일한다”는 등의 소문에 멕시코의 한인들이 재이민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쿠바에서의 출발도 순조롭지는 않았다. 이들이 도착하자마자 설탕 가격 급락으로 사탕수수 산업이 급격히 몰락하면서 일자리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곳으로 이주해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거나 수도 아바나로 넘어가 힘겨운 삶을 이어 갔다. 1930년대 이후엔 쿠바 정권의 외국인 노동자 차별로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고, 1959년 쿠바혁명 이후엔 일부 성공한 한인들이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들은 지역별로 대한인국민회를 만들고 한글학교에서 우리말 교육에 나서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엔 조국의 독립을 위해 광복군 후원금도 보냈다. 끼니 때마다 쌀을 한 수저, 두 수저씩 모아 자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엔 “쿠바에서는 임천택·박창운 등이 임시정부를 후원하였다”고 서술돼 있다. 마나티항에 첫발을 디딘 1세대 한인들 중 지금까지 생존한 이는 한 명도 없다. 하지만 후손은 5세, 6세까지 이어져 현재 1088명에 이른다. 혼혈이 많아지면서 한민족의 피는 흐려졌고,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후손도 거의 없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많이 옅어졌다고 한다. 한·쿠바 수교를 계기로 쿠바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본격화할 전망이다.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은 최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유공자 후손 발굴 및 지원, 독립운동 사적지 발굴 등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두 나라 수교가 외교적 성과를 넘어 쿠바 한인들의 한국인으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두텁게 해 주는 디딤돌이 됐으면 한다.
  • [거리 미술관]16.그리팅 맨(Greeting Man)

    [거리 미술관]16.그리팅 맨(Greeting Man)

    서울 중구 삼일로 롯데 시티 호텔 앞에 가면 하늘빛이 감도는 알몸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양팔을 몸통에 붙인 채 인사하는 그의 모습은 단정하고 우아하다. 인사를 나눌 때 90도로 허리를 꺾으며 카메라 세례를 받는 정치인들이 있다. 이와 달리 이 남자는 15도 정도로 허리와 고개를 숙인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감은 표시하되 가식적인 모습은 취하지 않겠다는 자존감의 표현이다. 호텔을 찾는 사람이라면 이 남자에게 흐뭇한 미소를 던지지 않을 수 없을게다. 이 사람은 유영호(56) 조각가가 2015년 설치한 ‘그리팅 맨’(Greeting man·인사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이다. 그는 ‘인사하는 사람 프로젝트’로 유명하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문화방송 앞에 있는 ‘미러 맨(Mirror Man)’을 설치한 조각가이기도 하다. 미러 맨은 미국의 영화 어벤저스에 나오면서 유명세를 탔다.인사하는 사람의 재료는 스테인리스 스틸이다. 스테인리스판을 자른 뒤 하나씩 용접해 각진 몸체를 만들었다. 밤에는 이 몸에서 은은한 불빛도 낸다. 제작에는 7개월이 걸렸다. 그에게 인사는 소통과 평화의 아이콘이다. 삼일로 서울 시티 호텔 앞에 세워진 인사하는 사람 조각 표지판에는 “인간관계의 가장 중요한 시작점인 인사가 갖는 의미를 고취시키고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고 적혀 있다. 그리팅 맨은 이 곳을 포함, 우리나라에는 경기도 연천군 옥녀봉 등 다섯 곳에 있다. 해발 205m의 옥녀봉 정상에 있는 그리팅 맨은 키가 10M로 그리팅 맨 중에서는 가장 장신이다. 허리와 고개를 숙여 휴전선 너머 북녘을 향해 인사하는 모습이다. 이 곳은 일반인이 갈 수 있는 최북단 지역으로 DMZ에서 6KM정도 떨어져 있다. 북한의 잇단 핵실험으로 남북간 긴장이 고조되던 2016년 4월에 설치했다.그는 남북 간 평화의 메시지로서 옥녀봉을 마주보는 북녘의 마량산에도 남한을 향해 고개숙여 인사하는 조각을 세우고 싶어한다. 그는 “우리가 북한에 가서 작업하는게 어렵다면 북한의 조각가가 세워도 좋다”고 말한다. 그의 바람대로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적대감과 상호 비방의 정치적 메시지 대신 평화와 화해의 상징물이 마주 보게된다면 한반도 평화 분위기 조성에도 기여할 수 있을게다. 해외에는 2012년에 처음 세운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의 그리팅 맨에서부터 지난 3월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에 7번째로 설치한 그리팅 맨 등 7개의 그리팅 맨이 세워져 있다. 모두 덩치가 6M높이로 같다. 해외로 가는 배편의 컨테이너에 실을 수 잇는 최대 허용치가 6M라고 한다.해외 그리팅 맨들은 지역 간, 문화 간 소통을 통한 화해와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 우루과이는 우리나라에서 보면 가장 먼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다. 이 곳의 그리팅 맨은 지리적 거리감을 뛰어넘어 서로 소통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적도가 지나는 에콰도르의 수도 카얌베와 과야킬에는 2017년, 2018년에 그리팅 맨을 각각 세웠다. 지구의 남반구와 적반구가 인사하며 만나는 셈이다. 동서양 문명이 만나는 터키 부르사에는 지난해에 설치했다. 멕시코 메리다의 대한민국로에 있는 그리팅 맨은 이 곳 한인 후손들에게 조국의 정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반가운 친구이다. 이 곳에는 116년 전인 1905년 멕시코로 이민을 온 ‘애니깽’으로 불리운 한인 1세대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해외에 세운 인사하는 사람은 모두 그가 해당 나라 대사관을 찾아가 그리팅 맨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고 제안해 이뤄졌다. 제작에서부터 두달여가 걸리는 운송까지 억대에 달하는 모든 비용을 자비로 충당했다. 14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보내는 미러 맨의 경우, 처음으로 외교부로부터 재료비 지원을 받아 설치하는 작품이다. 이 조각은 아세안 대표부의 신청사 1층 로비에 세우게 된다. 문재인 정부의 대외경제구상의 한 축인 신 남방정책의 전략지로서 아세안의 중요성을 감안해 대한민국 작가의 작품을 세우는 의미가 있다.인사하는 사람은 모두 남성이다. 여성은 일부러 배제한 것인지 궁금해 물어봤다.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1999년 말 독일로 유학을 간 그는 “유학시절인 2000년 초반에 그리팅 맨을 구상하게 됐으며 여성 모형도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성 중심의 세상인데 여성들이 고개숙여 인사까지 해야 하느냐는 반발이 있어 남자로만 만들게 됐다고 한다. 인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 간 만남의 시작이자 끝이다. 동양인은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서양인은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인사는 문화권에 따라 그 표현방식은 다르나 상대방 안부를 묻는 인간 존중의 양식이다. 인사는 갈등은 해소하고 상호 존중, 화해, 그리고 평화의 마음은 키울 수 있다. 코로나19로 지구촌이 2년 째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리팅 맨처럼 공손한 자세로 인사하거나 가벼운 눈인사나 목례라도 하며 화해하고 평화의 마음을 공유해보자.
  • 40여년간 서울 종로 지켰던 서울극장, 다음달 문닫아

    40여년간 서울 종로 지켰던 서울극장, 다음달 문닫아

    40여년 동안 서울 종로4가에서 한국 영화의 부흥을 이끌었던 서울극장이 오는 8월 31일 영업을 종료한다고 밝혔다. 서울극장 측은 2일 홈페이지 공지를 통해 “1979년부터 약 40년 동안 종로의 문화중심지로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서울극장이 8월 31일 화요일을 마지막으로 영업을 종료하게 되었다”고 알렸다. 이어 서울극장을 운영하는 합동영화사는 시대를 선도할 변화와 도전을 준비 중이라며, 합동영화사의 새로운 도약에 관심을 부탁했다. 서울극장은 종로와 충무로 일대 영화의 역사를 대변해주는 곳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 미래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다. 서울극장을 운영하는 합동영화사는 1964년 설립된 회사로 그동안 247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했다. 유명작품으로는 1972년 ‘쥐띠부인’, 1980년 ‘사람의 아들’, 1996년 ‘애니깽’ 등이 있다. 그동안 모두 6차례에 걸쳐 대종상을 받았으며, 1978년 종로의 세기극장을 인수해 서울극장을 세웠다. 1900년대 초 서울 종로 일대는 단성사, 우미관, 조선극장 등 10대 개봉관이 운집해 한국의 극장가로 명성을 떨쳤다. 특히 1958년 지어진 세기극장을 20년뒤 인수한 서울극장은 서울의 10대 개봉관 가운데 하나였다. 지금은 옛 모습을 잃어버린 단성사, 우미관 등과 달리 개편과 증축을 거듭하면서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고 서울시는 미래유산 프로젝트를 통해 서울극장을 설명했다. 1907년 세워진 단성사는 2011년 1층에 보석 판매 백화점 등이 있는 멀티플렉스로 외형을 바꾸었다.
  • 故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등 18명 문화훈장

    故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등 18명 문화훈장

    지난 6월 세상을 떠난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받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훈장 수훈자 18명과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5명,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8명, 예술가의 장한 어버이상 5명 등 총 36명을 ‘2020 문화예술 발전 유공자’로 선정했다고 18일 밝혔다. 올해는 문학 부문 김 발행인과 미술 부문 고 이돈흥, 공예·디자인 부문 고 한익환, 건축 부문 승효상, 음악 부문 고 백대웅, 연극·무용 부문 고 김상열 등 6명이 은관 문화훈장을 받는다. 문체부는 “김종철 발행인은 문학비평가이자 사상가로 녹색평론을 통해 근대문명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돈흥 전 국제서예가협회 이사장은 1975년부터 지난해까지 서예 전시회를 43회 열고 1982년부터 38년간 청소년 서예대전을 개최하는 등 평생 후학 양성과 서예 예술 저변 확대에 공헌했다. 한익환 전승도예가는 조선 관요 백자 색을 처음으로 재현하는 업적을, 승효상 건축가는 광주비엔날레 총감독과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 건축문화 발전에 공헌한 공로로 수훈했다. 백대웅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는 구전 전통음악을 오선악보로 채보하고 이론적으로 정립해 전통음악의 구조를 체계화했고, 김상열 전 극단 신시 대표는 ‘길’, ‘애니깽’ 등 수많은 희곡을 창작, 연출하고 뮤지컬, 마당놀이 등 다양한 분야 개척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보관 문화훈장은 ▲2400여점에 이르는 문화재를 기증해 지역 문화에 기여한 고 최규진 전 남가람문화재단 이사장 ▲1971년 등단 후 50년 가까이 창작 희곡을 통해 한국의 오늘을 이야기한 이강백 극작가 ▲미술관 설립과 청년미술상 제정 등 지역 미술 발전에 기여한 유휴열 한국미술협회 고문 ▲한국 성악의 토대를 구축한 황영금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국립무용단 지도·자문위원과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을 지낸 김문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등 5명이 받는다. 옥관 문화훈장에는 이수영 경남문화원연합회장 등 4명, 화관 문화훈장엔 장상호 한국문화원연합회 국장 등 3명이 이름을 올렸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쿠바 빨갱이 영화까지 만드냐” ‘헤로니모’ 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쿠바 빨갱이 영화까지 만드냐” ‘헤로니모’ 보면 생각이 달라질걸

    지난 12일 두 편의 영화 시사회를 경험했다. 오는 28일 개봉하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보고 난 뒤 21일 개봉하는 이 영화 ‘헤로니모’를 만났다. 공교롭게도 두 영화 모두 한계가 뚜렷했다. ‘헤로니모’는 우리에게도 낯선 쿠바의 한국인 2세 디아스포라 헤로니모 김 임(한국 이름 임은조)을 아들과 손자가 그리워하며 밟는 여정을 재미교포 변호사 출신 전후석 (미국 이름 조지프 전) 감독이 다큐멘터리로 담아낸 영화다. 뻔한 얘기라거나 신파라거나 하는 선입견이 93분의 러닝타임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설 가능성이 높다. 기자와 함께 시사회에 간 한 선배는 “임은조 기사를 썼더니 ‘빨갱이 찬양 기사까지 쓰느냐’는 댓글이 달리더라”며 웃었다. 선뜻 지갑 열기도 쉽지 않은 영화다. 그런데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된 다음해인 2015년에 신나게 놀려고 쿠바에 갔다가 택시 운전사인 헤로니모의 손녀를 만난 인연으로 이 영웅적인 인물에 매료돼 변호사 일마저 접고 영화에만 매달린 전 감독의 내공이 대단하다. 지루하고 따분하거나 눈물 자아내게 하려는 데 급급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객관적 시선을 지켜내는 자제력이 놀라웠다. 임은조의 아들과 손자가 바다를 바라보며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이 첫 장면이자 마지막 장면인 점도 절묘했다. 헤로니모를 아는 쿠바의 한인 100명 정도를 취재한 정성은 꼼꼼했고, 이를 필름으로 직조하는 재주가 탁월했다. 한 인물의 일대기를 좇으며 한인 교포의 정체성을 묻고 또 묻는다. 쿠바의 근현대사를 맨앞에서 호흡하며 살아간 헤로니모의 이야기는 우리 한국의 근현대사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아버지 임천택 씨는 두 살 때 어머니 품에 안겨 1905년 인천 제물포 항을 떠난다. 1033명을 태운 배는 멕시코에 도착해 22개 애니깽(선인장) 농장들로 한인들은 흩어진다. 임천택 씨는 다시 1921년에 큰 기회가 있다는 말에 쿠바로 떠난다. 임씨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쿠바의 한인 이민자들이 끼니마다 쌀 한 숟가락씩 덜어내 모아 상해 임정으로 1489원 70점을 부치는 데 앞장선다고 백범일지에 기록된 인물이다. 헤로니모는 1926년 태어나 46년 남미 한인 최초로 대학생이 돼 아바나 법대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동기로 공부한 인연으로 59년 쿠바 혁명에 동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과 공산화 꿈을 이루고 훈장을 아홉 개나 챙긴다. 쿠바 한인 가운데 최고위 직에 오른다. 남북이 갈라선 뒤 일관되게 “미친 짓”이라고,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개탄하는 장면도 나온다.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때인 1995년 난생 처음 한국 땅을 밟은 임은조는 쿠바 한인 공동체를 재건하기로 마음먹고 낡고 허름한 트럭을 타고 한인의 피가 흐르는 이들을 찾아 쿠바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닌다. 2006년 기준으로 944명의 한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혀낸다. 그리고 한인회 설립 준비를 모두 마쳤는데 쿠바 정부가 이를 거부하는데 각별한 사이였던 북한을 의식한 조치였다. 이 과정에 이 영화의 가장 논쟁적인 대목이 등장한다. 미국에서 건너온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헤로니모가 한국을 다녀온 뒤, 옛 소련 붕괴 등을 바라보면서 속았다고 털어놓으며 사상 전향을 선언했다는 것이 선교사들의 설명이다. 물론 부인은 펄쩍 뛴다. 도움이 필요하고, 손을 벌리려니 그런 게 아니었나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2006년 헤로니모는 한많은 눈을 감았으니 이를 밝혀낸들 무슨 대수이겠는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데 한인들의 역사를 올곧게 세우겠다는 그의 결기만은 뚜렷하다.이역만리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갈구했고 분단을 “미친 짓”이라고 분개하며, 조국이 있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게 한인 이민 기념비의 처마를 세우도록 지시하는 장면 등이 인상적이다. 우리가 보통 ‘올드랭 사인’으로 알고 있는 멜로디의 예전 ‘애국가‘를 목놓아 부르는 장면, 한인들과 그저 한글을 배우려는 쿠바인들이 ’아리랑‘이나 ’고향의 봄‘, 노사연의 ’만남‘을 함께 부르는 장면. 아들과 손자가 대서양과 그 너머 태평양을 건너야 닿는 먼바다를 바라보며 훌륭한 삶을 다짐하는 마지막 장면은 묵직한 감동을 안긴다. ‘헤로니모’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고 살아갈 우리 관객들에게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800만명의 한인 디아스포라에 대한 관심을 가져달라고 망치로 내려 친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멕시코 한국의 날… ‘애니깽 망국의 한’ 달래다

    멕시코 한국의 날… ‘애니깽 망국의 한’ 달래다

    대한제국 시절 1033명 이주 고된 노동 을사늑약 후 정착… 독립운동 등 후원 임정 100년 맞아 제정·기념행사 개최“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망국의 한을 간직한 채 이국땅에서 나라 잃은 백성의 서러움으로 통곡의 세월을 보냈던 선조의 한을 이제야 풀어 주는 것 같아 기쁩니다.” 주멕시코 한국대사관은 지난 2~4일(현지시간) 멕시코 유카탄반도에 있는 캄페체시와 메리다시에서 현지 정부와 함께 ‘한국의 날’ 제정식과 기념행사를 개최하자 한인 후손들이 이 같은 감회를 전했다고 5일 밝혔다. 대사관은 지난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의 날 제정을 추진했으며 두 도시는 조례를 통해 한인이 멕시코에 처음 도착한 5월 4일을 한국의 날로 지정했다. 이는 대한제국 시절인 1905년 1033명의 한인이 노동이민으로 유카탄반도에 최초로 정착한 이후 114년 만이다. 당시 멕시코에는 선박용 밧줄의 원료를 채취하는 ‘에네켄’(선인장 용설란의 일종) 재배가 성행했는데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전근대적 고용 관계가 남아 있는 데다 더운 날씨 탓에 인력난에 시달렸다. 일본과 중국에서의 인력 수급이 중단되자 국제 이민 브로커는 한인에게 눈을 돌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에 “하루 노동 시간 9시간에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허위 광고를 게재했다. 1000여명의 한인이 제물포항에서 멕시코로 향하는 영국 선박 일포드 호에 몸을 실었다. 1905년 5월 4일 멕시코 서부 살리나크루스항에 도착하게 된 한인 노동자들은 광고 문구와는 달리 뙤약볕 아래 온종일 채찍질을 감내해야 했다. 한인 노동자들이 에네켄을 ‘애니깽’이라 부르자 현지인들은 한인에게도 같은 이름을 붙여줬다. 우리가 멕시코 노동 이민자들을 애니깽이라 부르는 이유다. 4년 후 계약 기간이 끝났지만 고향으로 되돌아올 수 없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며 조국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결국 귀향하지 못한 채 이곳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주민들은 대한인국민회 지부를 결성하고 독립운동 후원과 민족의식 고취에 나서며 한민족의 정신을 이어 나갔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흐른 지난 2일 엘리세오 페르난데스 캄페체 시장은 한국의 날 지정 법안을 통과시키고 한국의 날 발효를 선포했다. 이튿날 메리다시에서는 한국의 날 제정 기념 리셉션에 이어 전야제 행사로 페온 콘트라레 주립극장에서 아리랑 공연이 열렸다. 4일에는 메리다시 제물포 거리에서 한국의 날 기념식이 거행된 후 한인 이민자를 위한 헌화식이 개최됐다. 김상일 주멕시코 대사는 “한국의 날은 양국의 영원한 우정을 상징하며 양국 국민의 가슴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박미경의 사진 산문] 뭉우리돌 정신

    [박미경의 사진 산문] 뭉우리돌 정신

    ‘오냐, 나는 죽어도 뭉우리돌 정신을 품고 죽겠고, 살아도 뭉우리돌의 책무를 다하리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백범 김구 선생이 일제 순사로부터 고문을 받으며 ‘땅 주인이 논밭에서 뭉우리돌을 골라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속으로 다짐했던 말이다. 둥글둥글하게 생긴 큰 돌을 뜻하는 ‘뭉우리돌’은 지금은 사라지고 쓰이지 않지만,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만은 뚜렷한 상징으로 박혀 있다. 2019년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더이상 ‘뭉우리돌’이라는 우리말 단어가 일상에서 쓰이지 않듯이 겨우 100여년밖에 지나지 않은 ‘나라 잃은’ 역사를 우리의 일상은 감각하지 못한다. 여행사진가로 세계 일주를 하던 청년 사진가 김동우가 문득 그와 같은 사실을 자각했던 건 인도 뉴델리 ‘레드포트’에서였다. 무굴제국의 요새로 알려진 이 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사 중 빛나는 성과를 거둔 ‘인면전구공작대’가 훈련하던 장소였다. 그는 우리의 독립운동이 어떻게 이토록 먼 나라 인도와 연관이 돼 있는지 의아했다.의문을 좇다 보니 그동안 몰랐던 100년 전 역사의 여러 면면과 함께 유럽에서 중미까지 예상을 뛰어넘는 범위로 독립운동 유적지들이 산재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는 돌연 오랫동안 계획해 장도에 오른 세계 일주를 멈췄고, 그때부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현장들을 홀로 찾아 헤매는 여정을 시작했다. 여행 사진은 자신이 아니어도 누군가 할 수 있지만, 이 기록은 누군가 대신해 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홍범도 장군이 활약하던 연해주에서부터 말년을 보낸 카자흐스탄까지 장군이 넘어야 했던 7000㎞를 사진가 김동우도 넘었다. 독립운동을 하다 서른셋 나이에 처형된 김알렉산드리아가 죽기 직전 마지막 소원으로 우리나라 13도를 그리며 13발자국을 걸었던 러시아 하바롭스크의 ‘죽음의 계곡’ 위를 김동우도 따라 걸었다. ‘대한인 황긔환지묘’라 적힌 비석을 찾아 뉴욕 퀸스의 후미진 공동묘지를 헤맸고, ‘1전’씩을 모아 독립운동자금을 임시정부로 보냈던 멕시코 애니깽 농장의 노동자 임천택의 후손을 만나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그는 그렇게 2017년 4월부터 2018년 11월까지 인도, 중국, 멕시코, 쿠바,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9개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흔적들을 발로 좇고 사진과 글로 기록했다. 해외 독립운동 유적과 후손들을 집대성한 이 최초의 성과물은 3·1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사진전으로, 또 ‘뭉우리돌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여 희미해지는 우리 역사의 기억을 ‘기록’으로 분명히 했다. 이제 사진가 김동우의 꿈은 ‘만주’로 향한다. 독립운동의 최전선으로, 이제껏 기록한 9개국보다 더 많은 사적이 모여 있는 만주.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그 땅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야 할 것처럼 조바심이 인다고 했다. ‘뭉우리돌 정신’이 없었다면 하기 어려웠을 지난한 작업을 갓 마치고 돌아온 그가 다시 만주행을 꿈꾸는 것이다. 100여년 전 백범이 말한 정신과 책무가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음을 돌처럼 야물고 거침없는 이 사진가에게서 본다.
  • 19개국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 화가 207명 작품 한자리

    19개국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 화가 207명 작품 한자리

    전 세계 한민족 화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사단법인 한민족미술교류협회는 오는 8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2018 세계 한민족 미술 대축제’를 연다. 이번 축제에서는 ‘우리 집은 어디인가’를 주제로 한국을 포함해 19개국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 화가 207명의 작품을 선보인다. 프랑스·독일 등 유럽 작가 10여명, 미국 8명, 러시아·중앙아시아 6명, 남미 5명 등 다양한 국가의 작가들이 참여한다. ‘애니깽 3세’로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해 온 쿠바 국적의 알리시아 델 라 캄파 박과 그의 아들 쿠타라 델 라 캄파 가브리엘 안토니오의 작품도 나란히 내걸린다. 북한 작가 20명의 작품도 초청돼 눈길을 끈다. 중국 단둥 소재 북한 단군미술관 분관(관장 최명수)의 도움이 컸다. 널리 알려진 조선화(북한 사회주의 지도이념을 담은 동양화)가 아닌 유화만 20점이다. ‘인민예술가’ 박영철의 작품 ‘청년분조농장원들’과 그의 아들 삼지연창작사 소속 박단필의 ‘뜨개질’(그림) 등이다. 전시기획위원장인 윤범모 동국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는 “실제 거주지는 전 세계 각 대륙에 퍼져 있으나 한민족 DNA를 가진 후예들이기 때문에 ‘문화영토’라는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중국·일본을 넘어 중앙아시아·남미까지, 국내에 미소개된 작가들과 북한의 젊은 작가를 다수 초청했다”고 밝혔다. 개막일인 8일 오후 5시 오프닝 프로그램으로 여태명, 석창우 작가가 30분간 한민족의 비상과 번영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연다. 같은 날 오후 1시 예술의전당 무궁화홀에서는 윤 교수와 전승보 광주시립미술관장, 이선영 미술평론가 등이 관련 세미나를 개최한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최일화 자진고백? 25년 전엔 성폭행…소리 지르자 주먹질”

    “최일화 자진고백? 25년 전엔 성폭행…소리 지르자 주먹질”

    배우 최일화가 과거 성추행 전력을 자진고백한 가운데 성추행이 아닌 성폭행을 당했다는 폭로가 나왔다.최일화가 스스로 성추행 전력을 고백했다는 최초 기사에 과거 최일화와 같은 극단에서 활동하다가 성폭행을 당했고, 이후 또 성폭행을 하려해 저항하다 주먹으로 얼굴을 폭행당했다는 댓글이 달렸다. 이 누리꾼은 26일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나는 대학을 갓 졸업한 24살 연극배우 지망생이었다”면서 “‘애니깽’이라는 작품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뒤 (최일화가) 발성 연습을 하자며 새벽에 불러냈다. 새벽에 산 속에서 발성 연습을 일주일가량 했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술을 마시자고 해서 술자리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나에게 연기를 못한다면서 온갖 지적을 했다. 연기 지적이 계속되던 중 갑자기 강압적으로 성폭행을 당하게 됐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어 “25년 전에는 성폭행당한 여성에게 ‘처신을 어떻게 했기에’라는 꼬리표가 붙는 시절이었다. 무서워서 말도 못 하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며칠을 보냈다”고 했다. 그러나 일은 또 벌어졌다. 그는 “그 후 최일화가 나를 또 끌고 가기에 소리를 질렀다. 그랬더니 (최일화가)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해 기절했다”고 끔찍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나는 내 인생에서 연극을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크다. 이제 막 배우가 돼서 주연 자리를 꿰찼음에도 불구하고 연극 무대를 떠나야 했다”면서 “지금 24살 된 딸이 있다. 이 아이를 보면 참 어리다. 내가 피해를 당했을 때가 24살이다. 그렇게 어린 아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생각하면 그 때 못 밝힌 게 한스럽다. 그때는 무서웠다”고 털어놨다. 사과를 받으러 찾아간 적도 있다고 했다. 그는 “최일화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고 싶어서 극단을 찾아간 적이 있다. 내가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그 사람에게 사과를 받고 싶었다”면서 “그런데 그는 나를 보지도 않고 지나가더라. 그때 역시 무서워서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나는 지금 유방암 투병 중이다. 죽기 전에 최일화에게 직접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한 마디 받고 싶다”고 토로했다. 앞서 25일 최일화는 몇해 전 연극 작업 중 성추문 논란에 휩싸인 사실이 있다고 자진 고백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의 자진 고백이 더 무거운 범죄인 성폭행이나 다른 성폭력을 덮기 위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1박2일’ 김준호-데프콘-윤동구, 쿠바 ‘애니깽’ 체험 ‘한인후손 아픈 역사’

    ‘1박2일’ 김준호-데프콘-윤동구, 쿠바 ‘애니깽’ 체험 ‘한인후손 아픈 역사’

    ‘1박 2일’ 김준호-데프콘-윤동구가 쿠바 ‘애니깽’의 발자취를 찾아간다오늘(28일) 저녁 방송되는 KBS 2TV ‘해피선데이-1박 2일 시즌3’(연출 유일용/이하 1박 2일)에서는 지난주에 이어 10주년 특집 ‘카자흐스탄-쿠바’ 마지막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중 김준호-데프콘-윤동구가 쿠바 최초 한인촌 엘볼로 마을 방문과 함께 애니깽 농장 체험에 나선다. 애니깽은 스페인어로 ‘에네켄’으로 불리며 선박용 밧줄을 만드는데 쓰이는 선인장. 100여 년 전 멕시코 등 중남미로 건너간 한인 이민 1세들이 에네켄 농장에서 일한 것을 두고 한인들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는 등 쿠바 한인들의 아픈 역사가 깃들여있다. 특히 이날 김준호-데프콘-윤동구는 처음 도전한 애니깽 체험 시작과 동시에 녹록하지 않은 현실을 마주했다. 체험에 앞서 한 번의 칼질로 애니깽을 수확하겠다고 선포한 당당함은 작렬하는 태양 아래 녹아서 없어진 지 오래. 무엇보다 데프콘의 고군분투를 지켜보던 김준호가 “저기봐. 프콘이도 감당 못하네”라고 말할 만큼 ‘1박 2일’ 힘의 아이콘 데프콘마저 좀처럼 칼질이 들지 않은 애니깽과 온 힘을 다해 싸웠다는 후문. 더욱이 데프콘은 “이렇게 촘촘해”라며 애니깽의 날카로운 가시에 깜짝 놀라는 등 멤버들은 조상들의 어려움을 직접 피부로 느끼며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이와 함께 쿠바 한인 후손들과의 자리에서 노예와 같은 고된 삶에 얽힌 아픈 역사를 직접 듣는 등 가슴 아픈 이민사를 함께 나눴다고 전해져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과연 데프콘마저 고군분투하게 만든 애니깽의 실체는 어떨지 오늘(28일) 저녁 방송되는 ‘1박 2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그들은 나에게 누구인가

    [양진건의 유배의 뒤안길] 그들은 나에게 누구인가

    고려 제26대 충선왕은 혼혈이라는 이유로 부친과 신하들에게 배척을 당했던 비운의 왕으로 말년에는 티베트까지 유배를 가야 했다. 당시 토번 또는 서번이라 불리던 티베트까지는 가는 데만도 반년이나 걸렸다. 한 나라의 국왕이 1만 5000리 떨어진 곳으로 유배를 가는 심정이 얼마나 처참했을까. 아마도 그는 고려, 조선을 통틀어 가장 먼 외국에 유배됐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10여년 전 티베트보다 더 먼 외국으로 유배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있었다. 정확히 1905년 5월 12일 멕시코 중서부 살리나 크루스항에 한국인 1033명이 도착하면서 부터였다. 구한말 가난을 이기지 못해 멕시코로 노예 이민을 가게 된, 흔히 ‘애니깽’이라 불리는 유배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카탄 반도에 있는 에네켄 농장에서 노예생활을 하며 4년 동안 살다가 멕시코 전역과 쿠바로 흩어졌고, 현재 멕시코에는 4만여명, 쿠바에는 1000여명의 후손이 살고 있다. 내가 처음 이들을 알게 된 것은 1996년 34회 대종상 시상식 때문이었다.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의외로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당시 영화계와 언론에서는 광주사태를 다룬 장선우 감독의 ‘꽃잎’을 주요 부문의 수상작으로 예상했고 나도 같은 기대를 했다. 친구 가운데는 한국형 판타지라고 ‘은행나무 침대’를 거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상작은 놀랍게도 ‘애니깽’이었다. 애니깽이라는 단어도 생소한 데다 그런 듣보잡 영화가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여우조연상을 받다니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원칙상 대종상 출품 자격은 단 하루라도 유료 상영을 해야 하고, 몇 명이라도 관객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어야 가능했지만 애니깽은 이를 무시, 미완성인 상태로 출품한 작품이었다. 그렇다 보니 안기부가 후원해 제작됐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렇게 애니깽은 나에게는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 단어였는데 2004년 김영하의 소설 ‘검은 꽃’을 읽게 되면서 완전히 새로 알게 됐다. 당시 작가가 누군지,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다만 동인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책을 구입했는데 서너 장을 넘기기 시작하면서 숨이 컥 막혀 왔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검은 꽃은 자기 땅에서 유배된 1033명의 유배인 이야기다. 망해 가는 대한제국을 놓고 러일전쟁에 돌입한 어느 봄날 그들은 영국 소속 일포드호에 실려 멕시코로 향한다. 출신은 제각각이었지만 재산이 없다는 공통점을 지닌 그들은 멕시코에 가면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유배지의 가혹한 노동뿐이었다. 이들 애니깽 후손 가운데 쿠바에서 온 엘리자베스 주닐다(26)는 최근 정부의 독립유공자 후손 국적 증서 수여식에서 “한평생 이루고 싶었던 꿈이 실현됐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주닐다의 고조할아버지인 이승준 선생은 쿠바에서 한국인 구제 활동과 국어 교육 운동을 벌이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고 한다. 쿠바에는 노예 이민을 가 조국 독립에 애썼던 조상들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그들의 후손 1000여명이 살고 있다고 했다. 이승준 선생의 경우를 보며 이국의 유배지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던 그들은 대체 누구인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국내외적으로 독립유공자들의 현실은 여전히 서글프기만 한데 문재인 대통령이 독립유공자 3대까지 합당한 예우를 받게 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늦었지만 당연한 일이다.
  • “쿠바서 독립운동한 후손도 기억해 줬으면”

    “쿠바서 독립운동한 후손도 기억해 줬으면”

    “쿠바에는 일제강점기 때 이민 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썼던 조상들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그들의 후손이 아직 살아가고 있습니다. 쿠바에 오시는 많은 분들이 이들 후손에게도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쿠바에서 온 엘리자베스 주닐다(26)씨는 지난 11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후손 국적 증서 수여식에서 증서를 받은 뒤 “한평생 이루고 싶었던 가장 큰 꿈이 실현됐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주닐다씨의 고조할아버지인 독립유공자 이승준 선생은 1920년대 쿠바로 이주했다. 이 선생은 쿠바에서 한국인 구제활동과 국어교육 운동을 벌였다. 1931년부터 광복 때까지는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주닐다씨는 “이 선생의 아들인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한국 땅을 밟는 게 평생 소원이었는데 돈이 없고 한국으로 올 방법도 없어 끝내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선생은 쿠바에 이민 왔을 때 말이 통하지 않고 쿠바 국적을 취득하는 것도 어려워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깊은 시골이었던 ‘에네켄 농장’에서의 막노동이 유일한 생업이었다. 한국에서 ‘애니깽’이라고 불리는 에네켄은 열대식물인 용설란으로, 밧줄을 만드는 섬유의 원료로 활용된다. 쿠바로 이민 간 한국인들은 대부분 이 ‘애니깽’ 농장에서 일했다. 이 선생의 맏아들도 에네켄 농장에서 근무하며 11명의 형제를 건사했다. 현재 이 선생의 후손들은 쿠바와 미국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주닐다씨는 15세까지 증조할머니와 함께 살며 한국어와 한국 문화, 그리고 고조할아버지의 일화를 들었다고 한다. 주닐다씨는 “고조할아버지가 증조할머니의 아버지와 함께 쿠바의 한국인 커뮤니티를 이끌고 교육도 했다고 들었다”면서 “하지만 고조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어렸을 적 김치와 같은 한국 음식으로 도시락을 싸 다니고 얼굴 생김새도 친구들과 많이 달라 고민이 컸었는데 고조할아버지가 한국의 독립유공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는 다르다는 것이 특별하게 여겨졌다”고 덧붙였다. 주닐다씨는 증조할머니로부터 배운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공부해 왔다. 지난해에는 쿠바에서 만난 한국인과 결혼을 했다. 주닐다씨는 “최근 어린 쿠바 한인들은 한국에 초청받아 오는 경우가 많지만 나이가 있는 쿠바 한인들은 증조할아버지, 할머니처럼 한국 땅을 밟을 기회가 없다”면서 “이들을 한국에 모셔 오고 싶다”고 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눈물·피땀으로 채워진 한인 이민 110년

    지독한 굶주림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1905년 옥토와 신천지를 꿈꾸며 두 달이나 항해한 끝에 중앙아메리카 유카탄반도에 닿은 이민자들을 기다린 것은 떠나온 모국보다 더한 불모지였다. 초기 미국, 남미 이민자들은 대부분 농장 일꾼으로 일했다. 이른바 ‘애니깽’으로 불리는 멕시코 이민 1세대들은 에네켄(용설란의 일종) 농장에 끌려가 가시 돋친 잎에 몸을 찔려 가며 하루에 1000개씩 따야 했지만 일제 치하에 놓인 고국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남의 땅이었다. 이보다 앞선 1902년 12월 22일에는 121명을 태운 범선 ‘갤릭호’가 하와이를 향해 인천 제물포항에서 닻을 올렸다. 우리 역사상 공식 이민이 시작된 날이다. 해방 후에도 이민 농장, 탄광, 병원으로 이민 행렬이 이어졌다. 이들의 피맺힌 땀방울은 고국 경제의 밑거름으로 사랑스러운 결실을 맺었다.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은 이처럼 한이 서린 이민사를 고스란히 담아 ‘기록으로 보는 재외 한인의 역사, 이주와 정착 그리고 발전의 시간들’을 주제로 22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층 강당에서 포럼을 연다.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이다. 윤인진 고려대 교수, 이진영 인하대 교수 등 전문가들이 우리나라 이민사를 주제로 발표한다. 행사장 로비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는 1903년 대한제국 유민원(현재의 외교부에 해당)이 발행한 여행권, 1962년 브라질 이민단 출항 당시 영상, 1905년 대한일보(1904년 창간된 국한문 혼용 친일 신문)에 실린 ‘농부 모집 광고’, 1966년 한국은행이 재외동포 파견 근로자의 국내 송금 현황을 경제장관에게 보고한 문서 등 한인 이주 기록 자료 100여점을 만날 수 있다. 박동훈 국가기록원장은 “720만 재외 한인의 이주 역사를 기념하고 국내외 한민족의 정체성을 재확인해 화합과 상생을 위한 공감대를 조성하는 데 작은 마중물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한류 퍼지는 쿠바… 30시간 거리도 좁혀졌으면”

    “한류 퍼지는 쿠바… 30시간 거리도 좁혀졌으면”

    “쿠바에서 한국에 오기 위해 30시간 이상을 하늘에서 보냈어요. 제 마음속 한국은 고향처럼 가까운 곳인데, 아직 쿠바와 한국은 멀리 있네요. 어서 그 30시간의 거리가 좁혀지길 소망합니다.” 지난 3월부터 충남 천안 남서울대 국제문화교류원 한국어학당에서 6개월간의 한국어 연수과정을 밟고 있는 국내 1호 쿠바인 유학생 카레림 로레나(25·여)와 베르무데스 마리스베예(19·여). 6일 남서울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쿠바 젊은이들에게 한국은 매력적이고 너무나 가깝게 느껴지는 나라”라고 입을 모았다. 로레나와 마리스베예가 한국을 알게 된 계기는 서로 다르다. 한국계 쿠바인인 로레나는 일제 강점기 때 쿠바에 이주한 ‘애니깽 1세대’로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 독립운동가 고(故) 임천택씨의 증손녀다. 로레나는 “집에서 김치를 담가 먹는 등 어릴 때부터 한국 문화에 익숙했다”며 “지난 6월 현충일에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진 할아버지 묘소를 참배했을 때 자랑스럽고 벅찬 감동을 느꼈다”고 말했다. 마리스베예는 자신을 ‘한드(한국드라마) 마니아’라고 소개한다. 쿠바에 있을 때부터 한국 드라마와 프로그램에 푹 빠져 한국을 사랑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마리스베예는 “쿠바에는 한류 문화가 굉장히 전파된 상황”이라며 “쿠바의 TV마다 매일 한국 드라마가 방송되고, 개당 25페소(약 3100원) 정도인 DVD도 불티나게 거리에서 팔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그는 “쿠바에서 한국어 배우기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직접 한국에 와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두 사람은 한국인과 쿠바인 사이에 마음의 벽은 허물어진 것 같다고 느낌을 전했다. 하지만 물리적 벽은 높다.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한국과 쿠바는 국교가 단절된 상황이다. 반세기 넘게 비행기 직항 노선이 없고, 쿠바 국민들의 한국 관광도 제한되고 있다. 전 세계에 몇 남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 쿠바와 한국이 함께 걷는 미래를 그려볼 수 있을까. 둘은 자신이 넘쳐 보였다. “모든 사회엔 장단점이 있어요. 두 나라는 많이 다르지만 그렇기에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한국과 쿠바가 각자의 매력을 나눌 기회가 있으리라 믿어요.” 로레나와 마리스베예는 “하루빨리 두 나라가 자유롭게 교류를 해서 한국과의 인연을 미래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글 사진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씨줄날줄] 아바나와 애니깽/정기홍 논설위원

    1997년 카리브해에 위치한 쿠바를 방문한 기억은 상반된다. 체류 기간 동안 수도 아바나의 이국적이고 자유분방함에 흠뻑 취했고, 한편으로 우리의 슬픈 이민 역사를 간직한 ‘애니깽’(멕시코·쿠바 이민 1세대)과의 소중한 만남도 있었다. 우리와 비수교국임에도 건물마다 내걸린 쿠바 혁명가인 체 게바라의 사진을 배경으로 달리는 중고 엑셀 승용차를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비공식으로 이웃 파나마를 통해 들여온다고 들었다.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 정취들이다. 아바나공항의 입국 심사는 까다로웠다. 자본주의 서적은 철저하게 추려 냈고 미국풍의 의상과 소지품은 압수됐다. 수속을 끝내면 상황은 달라진다. 문 밖을 나서면 밤낮 없이 춤과 노래가 있는 곳이다. 시가의 나라이기 때문이겠지만 담배 연기가 자욱한 호텔 클럽에서 미녀들이 추는 살사춤은 눈을 떼지 못할 만큼 매혹적이다. 뱀이 움직이는 유연함이랄까. 전국의 관광특별구역에 있는 오픈식 나이트클럽에는 미녀와 관광객이 뒤섞여 자본주의 국가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유혹도 당연히 많다. 관광 가이드가 “매춘 요구에 홀리지 마라”고 다짐을 줄 정도다. 헤밍웨이의 단골 술집인 ‘라 보데기타 델 메데오’는 좁은 공간이지만 쿠바가 주는 또 다른 이국 정서다. 쿠바는 이처럼 ‘정열과 유혹’의 나라다. 스페인풍의 건물에 카리브 해변의 풍광, 구릿빛 여성의 살사댄스는 가히 최상의 볼거리다.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로 상징되는 사회주의 국가임에도 자존을 지키며 ‘카리브해의 보석’ 값어치를 톡톡히 한다. 미국이 1961년 외교를 단절한 지 53년 만에 쿠바에 빗장을 풀었다. 낡은 보트와 고무 튜브에 의지한 채 미국 플로리다로 건너간 보트피플의 애절한 역사도 뒤로했다. 쿠바가 단번에 개방한 것은 아니다. 혁명 정부를 세웠던 피델 카스트로가 1994년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개방정책을 선언한 뒤 관광으로 외화를 벌어들이면서 근근이 국가 경제를 지탱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쿠바의 개방 소식에 외벽이 허물어진 채 방치돼 있던 구(舊)아바나 시가지의 스페인풍 건물들을 떠올린다. 하루빨리 재건돼야 할 것 같다. 멕시코에서 쿠바로 넘어와 근 100년을 살고 있는 1000명 남짓한 애니깽은 개방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까. 지난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조국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을지 모른다. 3~4세대들은 한국어를 아는 이가 별로 없다고 한다. 하지만 방문 당시 1세대 애니깽 할머니는 “한국 소식도 잘 안다”고 말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의 고단한 삶에도 독립운동 자금까지 댔던 그들이다. 우리 정부도 쿠바의 개방에 맞춰 이들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정기홍 논설위원 hong@seoul.co.kr
  • “어릴적 꿈꾸던 한국에서 대학 졸업했어요”

    “어릴적 꿈꾸던 한국에서 대학 졸업했어요”

    “어릴 때부터 집안 어른들에게 들은 한국이란 나라를 동경했어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이 꿈만 같습니다.” 2009년 한국으로 건너와 2010년부터 이화여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마르가리타 스밀라 게레로 로드리게스(23·여)가 29일 오전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학사모를 썼다. 그에게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109년 전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로 건너가 ‘애니깽’(에네켄)으로 불렸던 한인 이민자의 4대손이다. 1905년 4월 가난을 버티지 못한 한인 1033명은 가난 탈출의 부푼 꿈을 안고 멕시코행 영국 화물선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린 건 멕시코 유카탄주 에네켄(선인장의 일종) 농장의 노예 생활이었다. 로드리게스의 가족은 당시 유카탄 지역으로 이민 온 선대로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 그는 “아버지는 항상 ‘한국인의 뿌리’를 강조하셨고, 한인 이민자가 얼마나 고초를 겪었는지를 말씀해 주셨다”면서 “아버지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한국어를 배웠고, 한국 문화도 좋아했다”고 말했다. 로드리게스는 이화여대에서 개발도상국 여성인재 학위과정 프로그램(EGPP) 대상자로 선정돼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공부했다. 유학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는 “한국 친구 대부분이 한인의 멕시코 이민사를 잘 모르는 것 같아 가슴 아팠던 적도 많았다”면서 “국적은 멕시코지만 에네켄 후손에겐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에서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로드리게스는 졸업 전 국내 한 대기업에 입사, 1년 뒤 멕시코 지사에서 근무할 예정이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부고] ‘충무로의 대부’ 곽정환 서울극장 회장

    [부고] ‘충무로의 대부’ 곽정환 서울극장 회장

    영화제작자와 극장업자, 감독으로 활동하며 ‘충무로의 대부’로 불렸던 곽정환 서울극장 회장이 지병으로 입원해 있던 중 심근경색으로 8일 0시 3분쯤 별세했다. 83세. 평안북도 용강군에서 태어난 고인은 성균관대 정치외교과를 졸업한 뒤 친구의 권유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1964년 합동영화사를 설립하고 1979년부터 서울극장을 운영하며 2000년대 초반 복합상영관이 생기기 전까지 국내 영화 배급의 주역으로 꼽혔다. 1964년 ‘계동아씨’를 시작으로 230여편의 영화에 제작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만희 감독의 ‘협박자’(1964)와 유현목 감독의 ‘사람의 아들’(1980), 유하 감독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1992), 신상옥 감독의 ‘증발’(1994), 김호선 감독의 ‘애니깽’(1996)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직접 감독으로도 나서 1971년 ‘애’(愛)를 시작으로 ‘쥐띠부인’(1972), ‘이중섭’(1974), ‘가고파’(1984), ‘이브의 체험’(1985), ‘무거운 새’(1994) 등 9편을 연출했다. 1978년 세기극장을 인수해 이듬해 서울극장을 연 이후에는 영화 제작과 수입, 극장업을 겸했다. 1982년 정인엽 감독의 ‘애마부인’으로 처음 심야상영을 시도했고, 1997년에는 서울극장을 증축해 7개 상영관을 만들면서 복합상영관 시대를 열었다. 중앙시네마타운과 이화예술극장, 영화나라, 부산 제일극장 등을 소유해 전국 최대의 극장 체인을 구축했다. 한국영화제작자협회(1974)·전국극장협회(1981)·서울극장협회(1988) 회장 등을 역임했고,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해 대종상 영화발전 공로상을 수상했다. 유족으로는 배우 출신으로 서울극장 사장인 부인 고은아씨, 서울극장 부사장인 아들 곽승남씨와 딸 인숙·승경씨가 있다. 발인은 11일 오전 8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 (02)2072-2091. 배경헌 기자 baenim@seoul.co.kr
  • “대한독립 만세 삼창에 가슴이 뭉클”

    “모국에서 가장 뜻깊은 광복절 기념식을 함께할 수 있어 꿈만 같습니다.” 멕시코·쿠바 한인 후손 40명이 15일 울산 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제6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해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재외동포재단 초청 모국 연수에 한인 후손을 이끌고 참석한 앙헬리카 황보(51·여) 재멕시코한인후손회 회장은 “광복절날 멕시코 전통의상을 입고 기념식에 참석해 무척 뜻깊다”고 말했다. 기념식에 참석한 울산 1500여 시민들은 40명의 한인 후손들을 큰 박수로 맞았다. 윌리엄 알레한드로 카스틸로 쿠에레로(22·멕시코)씨는 “선조가 선인장과 사탕수수 농장에서 힘들게 일하며 받은 임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냈던 사실을 모국이 기억해주니 무척 감사하고 뿌듯하다”며 감격했다. 쿠바에서 참가한 로날도 자비어 곤살레스 모레노(17)군은 “‘대한 독립 만세’ 삼창을 하는데 가슴 벅찬 뜨거움을 느꼈다”면서 “한민족의 일원으로 우리를 맞아준 모국에 너무 감사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박맹우 울산시장은 축사에서 “머나먼 멕시코와 쿠바에서 온 한인 후손들이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것을 감사드린다”면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뜻을 120만 울산시민과 함께 기리고 애국정신을 계승·발전시켜 나가자”고 강조했다. 지난 14일 울산에 도착한 이들은 동구에서 해녀체험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들은 기념식을 마친 뒤 경주로 이동해 불국사와 첨성대 등을 둘러보며 신라 문화유적 답사에 나섰다. 이어 16일 울산으로 돌아와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등을 방문하며 한국산업의 발전상을 느껴볼 예정이다.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 쿠바 한인4세 “독립투사 증조부 나라 대학생…꿈만 같아”

    쿠바 한인4세 “독립투사 증조부 나라 대학생…꿈만 같아”

    독립운동가 후손인 쿠바의 한인 4세가 어려운 과정을 거쳐 할아버지 나라의 대학에 다니게 됐다. 아자리아 임(20·여)은 다음 달 4일 한남대의 영어전용 특성화 단과대인 린튼글로벌칼리지에 입학한다. 아자리아 임은 “할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한국 땅을 밟고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다. 4년간 대학에 다니면서 한국의 경제, 문화, 과학 등 놀라운 발전상을 빠짐없이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증조부는 일제강점기 때 쿠바 이주 1세대로 이역만리 타국에서 항일운동을 펼친 임천택(1903~1985) 선생이다. 경기 광주에서 태어나 일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해 멕시코 애니깽 농장으로 팔려갔다가 18세 때 쿠바로 이주한 뒤 대한인국민회 쿠바지방회를 설립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김구 선생이 이끄는 임시정부가 재정난에 허덕일 때는 쿠바 교민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벌여 군자금을 보냈다. 정부는 임 선생의 공적을 기려 1997년 사회주의 국적으로는 최초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고 그의 유해를 옮겨와 대전 현충원에 안장했다. 임 선생의 증손녀인 아자리아 임이 한국에 유학을 온 것은 한남대 중국통상학과 정명기 교수와 만나면서다. 정 교수가 2011년 쿠바를 찾았다가 교포로부터 임 선생 후손 얘기를 듣고 도운 것이다. 하지만 아자리아 임이 수시모집 외국인 전형으로 한남대에 합격하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로 미수교국이었기 때문이다. 몇 개월간 서류 증명과 까다로운 심사를 거쳤다. 쿠바 한인협회의 도움으로 한글 공부에도 매달렸다. 우여곡절 끝에 양국 정부가 임 선생의 공적을 인정해 한국 유학을 허가하면서 길이 열렸다. 아자리아 임은 “쿠바에서 가수 싸이 열풍이 대단해 한국 피가 흐르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면서 “글로벌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해 졸업 후 한국 기업에서 일하고 싶고, 쿠바에 돌아가면 한국문화 전도사가 되겠다”고 밝혔다. 대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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