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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북극항로

    [씨줄날줄] 북극항로

    2020년 9월 미국 국립설빙데이터센터는 그해 북극 해빙이 374만㎢까지 녹아 1979년 기록 시작 이후 두 번째로 작은 면적을 기록했다고 보고했다. 지구는 1994년부터 2017년까지 28조t의 얼음을 잃었으며, 이 중 북극 해빙이 7조 6000억t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구온난화로 북극 얼음이 줄어들면서 북극해를 통과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바닷길이 넓어지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7~10월에 주로 이용했던 북극항로는 이제 연간 5~6개월 운항이 가능한 것으로 평가된다. 2040년쯤이면 운항 가능 기간이 8~9개월까지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기후변화가 북극에는 환경위기로 나타난 반면 해운업에는 새로운 물류시장을 열어 준 셈이다. 지난 22일 부산신항에서 2758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 ‘팬스타 아크로호’가 유럽을 향해 출항했다. 한국에서 유럽으로 가는 배는 원래 부산에서 출항해 서쪽 인도양을 지나 아프리카 대륙의 수에즈 운하를 거치는 게 일반적이다. 반면 이 배는 북동쪽으로 출발해 러시아 북쪽 연안을 따라 북극해를 가로지르는 북극항로로 시범운항할 예정이다. 부산에서 네덜란드 로테르담까지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면 약 2만㎞를 항해해야 한다.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약 1만 3000㎞로 7000㎞(35%)가량 짧다. 그만큼 운항 기간과 연료비를 낮출 수 있다. 중국은 지난해 ‘시 레전드’ 선사의 시험운항에 이어 올해 8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 닝보~북유럽 노선을 주 1회씩 8차례 운항하며 항로 개척에 속도를 내고 있다. 우리 정부도 2030년 북극항로 정기 상업운항 시작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 연안을 타고 가는 북동항로는 러시아 정부의 통항허가를 받아야 한다. 미국이 러시아를 제재하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도움을 받고 대가를 지불한다면 제재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이번 시범사업은 복잡한 국제정치 역학관계를 뚫고 나가야 하는 ‘외교안보 쇄빙선’의 시험대이기도 하다.
  • [씨줄날줄] 비만약 불법 직구

    [씨줄날줄] 비만약 불법 직구

    “왜 그렇게 살이 빠졌어요? 혹시 위고비나 마운자로 했어요?”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 모임에서 자주 듣는 질문이다. “난 요즘 살이 더 찐 거 같은데…. 위고비와 마운자로 중 뭐가 더 나아요?” 다이어트도, 비만약도 필요 없어 보이는 사람들까지 대화에 열심히 참여한다. 대한비만학회에 따르면 정상 범주의 체중인 여성 10명 중 2명이 자신을 비만이라고 인식한다. 비만 진료 지침에 따르면 체질량지수(BMI)가 18.5~22.9면 정상 체중, 23~24.9면 비만 전 단계, 25~29.9면 1단계 비만, 30~34.9면 2단계 비만 등이다. 특히 비만 전 단계 여성의 경우 자신을 비만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이 66.9%나 됐다. 실제 체중과 스스로 인식하는 체형 간 괴리가 크다. 그러니 비만약이 자연스럽게 사회적 관심사가 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는 비만치료제 위고비와 마운자로. BMI 30 이상 또는 BMI 27 이상이면서 고혈압·당뇨 등 관련 질환이 있는 경우에만 처방받을 수 있다. 국내에서 2024년 10월과 2025년 8월 각각 출시된 위고비와 마운자로는 처방이 급증해 올해 1분기까지 합쳐 1조원 이상 매출을 올렸다. 문제는 비만이 아닌 사람들도 이들 비만약의 유혹을 느낀다는 것. 처방전이 없으면 구입할 수 없으니 불법적 경로로 눈을 돌린다. 관세청에 따르면 올해 1~6월 위고비·마운자로 불법 반입 적발 건수는 4155건. 지난해(1189건)의 3.5배에 달했다. 특히 해외 판매 사이트를 통한 개인 직구 등 국제우편 악용 사례가 85%나 됐다. 한국보다 저렴하게 판매하는 일본 등에 다녀온 여행자들의 휴대품을 통한 반입도 증가세다. 지난 1월 미국 판매를 시작한 경구용 위고비에 이어 마운자로도 경구용이 나오면 불법 반입은 더 늘어날 수 있다. 관세청은 이들 비만약에 대한 식약처의 유해의약품 지정에 따라 수량과 관계없이 반입을 차단한다. 전문가들은 비만이 아닌 사람이 비만약을 복용하면 부작용이 더 커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장거리 배송·운반 과정에서 위조·변질, 보관 온도 등 안전성도 담보할 수 없다. 외모 가꾸기에 몰입하다 건강을 해치는 우를 범하지는 말자. 정상 체중이라면 식이요법과 운동으로 충분하다. 김미경 논설위원
  • [씨줄날줄] 중국의 ‘새로운 전통’ 한푸(漢服)

    [씨줄날줄] 중국의 ‘새로운 전통’ 한푸(漢服)

    현대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아Q정전’의 작가 루쉰은 1919년 단편소설 ‘쿵이지’(孔乙己)를 발표한다. 1905년 과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관리 지망생 선비가 몰락해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쿵이지는 언제나 장삼을 입는데 전통적 지식인 신분을 포기하지 못하는 구시대 인물을 상징한다. 문화대혁명(1966~1976) 시기 홍위병은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을 타파하고 새로운 전통을 만들자는 파구입신(破舊立新)을 외쳤다. 당시에도 전통 복식은 이미 보기 어려웠지만 문화혁명을 거치며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한국에서 의례용으로 꾸준히 한복을 입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한푸(漢服)는 21세기가 시작되며 새로 태어난다. ‘한족의 역사적 전통복식 전체를 아우르는 민족복식 체계’라는 개념이 새로 정립됐다. 2002년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민족 복식’(漢民族 服饰)에 관한 논의가 나타나고, 이듬해 한푸를 ‘한민족 복식’의 약칭으로 정한다. 중국에선 2003년을 ‘한푸 운동 원년’으로 본다. 한푸 운동은 전통문화에서 문화적 자신감을 찾아 중화민족 정체성을 살린다는 시진핑 정부의 애국주의와 결합해 가속도가 붙었다. 나아가 중국 정부는 2018년 한푸를 넘어 화푸(华服)라는 개념을 채택한다. 공산주의청년단은 중국화복일(中国华服日)을 지정해 국가주도문화운동으로 강화했다. 한족 의복으로 한정 짓지 않는 것은 물론 조선족을 포함한 소수민족 복식도 포괄하겠다는 의도가 읽힌다. 중국인이 많이 쓰는 동영상 플랫폼 틱톡에 ‘한복이 한푸에서 유래했다’는 내용의 영상이 심각한 수준으로 올라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그런데 하나의 통일된 형태로 한푸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국 학자들도 공감한다. 2000년 역사가 아니라 2000년 이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복식이 한푸라는 것이다. 한푸가 21세기에 창조한 ‘새로운 전통’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 [씨줄날줄] 일조권에서 그늘권으로

    [씨줄날줄] 일조권에서 그늘권으로

    2022년 대구의 한 아파트 주민들이 소송을 냈다. 30층짜리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햇빛이 크게 줄어들어서다. 법원은 일조 침해가 사회통념상 참을 수 있는 한도를 넘었다며 시행사에 손해배상 책임을 물었다. 거주자들에게는 1인당 100만원의 위자료도 인정했다. 햇빛을 누리는 일이 쾌적한 주거생활과 직결된다는 판단이었다. 일조권은 오랫동안 우리 주거문화에서 중요한 권리였다. 아파트를 고를 때 남향인지부터 따지고, 앞 동과의 거리나 층수에 따라 집값도 달라졌다. 법원은 동짓날을 기준으로 햇빛이 몇 시간 드는지까지 따져 일조 침해 여부를 판단해 왔다. 건축법상 기준을 지켰더라도 일조권 침해에 대한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례가 이어졌다. 그런데 기후변화가 도시의 상식을 뒤집고 있다. 이제 햇빛을 받을 권리 못지않게 햇빛을 피할 권리가 중요해졌다. 서울시는 시민이 그늘 속에서 걸을 수 있는 ‘그늘보행권’을 도시계획에 반영하기로 했다. 집에서 지하철역과 학교, 시장, 병원으로 가는 길에 나무와 건물, 차양이 만든 그늘을 이어 주겠다는 구상이다. 한여름 서울 거리를 걷다 보면 그늘 한 조각이 얼마나 반가운지 실감한다. 전체 보도 4031㎞를 분석했더니 여름철 햇빛에 노출되는 시간은 하루 평균 4시간 21분이었다. 네 곳 중 한 곳 이상은 6시간 넘게 뙤약볕에 놓인다. 최근 3년간 서울 온열질환자 셋 중 한 명이 길가에서 나온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서울시는 그늘의 넓이뿐 아니라 얼마나 오래, 끊기지 않고 이어지는지도 따지기로 했다. 버스정류장과 횡단보도 같은 길목에 가로수와 차양을 보태고, 올해와 내년 10곳에서 먼저 시험한 뒤 2028년 서울 전역으로 넓힌다. 폭염 속 그늘은 잠시 쉬어 가는 곳을 넘어 사람을 지키는 보호막이 되고 있다. 한때는 그림자 때문에 법정까지 갔다. 이제는 그 그림자를 더 만들고 이어 달라고 한다. 기후변화가 만들어 낸 흥미로운 역전이다.
  • [씨줄날줄] 전관 경찰의 ‘쓸모’

    [씨줄날줄] 전관 경찰의 ‘쓸모’

    ‘불송치·각하 결정 도출, 경찰대 출신 변호사 영입, ○○청 출신 영입….’ 로펌 홈페이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문구들이다. 2021년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경찰에 불송치 결정권이 부여된 뒤 경찰 출신 변호사의 몸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오는 10월 검찰 수사권 완전 폐지를 앞두고 몸값이 또 치솟고 있다. 이미 8대 로펌의 경찰 출신 인력은 290명을 넘었다. 올해 신규 영입만 18명. 전년의 두 배다. 경찰 전관의 진짜 가치는 수사 종결권을 쥔 전국 260여개 경찰서의 ‘지형’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다는 것. 이런 능력을 가진 전관의 ‘쓸모’는 다양하다. 특정 사건을 비교적 관대하게 처분하는 경찰서 관할로 피의자 주소를 옮길 수 있다. 반대로 관할이 모호한 사이버·재산 범죄의 고소장을 유사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서에 접수시키는 ‘관할 쇼핑’도 가능하다. 검찰은 전국 순환 인사였지만 경찰은 이동이 거의 없는 ‘향찰’ 체제. 60개 안팎 청·지청을 갖춘 검찰보다 무려 네 배나 많은 경찰 조직이니 어디에 맡겨지느냐에 따라 수사 처분의 편차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로펌의 전략에 맞춰 수사에 임하는 개인의 대응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로펌 광고대로 “형사 사건의 골든타임은 경찰 조사”가 현실이 되는 것. 검찰이 경찰의 무혐의 판단까지 재검토하던 과정이 축소되는 새 제도가 시행되면, 피의자에게는 전관을 동원할 골든타임이 생긴다. 피해자에게는 한 번 놓치면 더 호소할 곳이 없는 데드라인이 된다. 전관 우려가 커지자 경찰은 어제 퇴직자의 사건 문의와 사건 관계인 접촉 금지를 행동강령에 명문화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작 누구에게 적용해야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변호사 자격으로 채용된 경찰관 292명 중 84명이 이미 퇴직했고, 재직 중 별도로 자격을 딴 인원은 파악조차 안 되는 상황이다. 어느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는지조차 모를 현실. 한숨만 나온다.
  • [씨줄날줄] 조각투자거래소

    [씨줄날줄] 조각투자거래소

    1997년 영국의 록스타 데이비드 보위는 자신의 노래를 담보로 5500만 달러를 조달했다. 앞으로 들어올 저작권료를 묶어 채권으로 발행한 이른바 ‘보위 본드’였다. 음악이 듣고 즐기는 문화상품을 넘어 돈을 벌어들이는 금융자산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제 금융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미술품과 부동산부터 음원 저작권, 영화 제작까지 잘게 쪼개 여러 사람이 나누어 투자하는 ‘조각투자’의 시대다. 수억 원짜리 그림을 살 형편은 안 돼도 몇만 원어치 지분을 가질 수 있고, 건물주가 아니어도 임대와 매각 수익의 일부를 누릴 수 있다. 국내에서도 이미 낯설지 않은 투자 방식이다. 고가 자산의 투자 문턱을 낮춘 것이 강점이다. 앤디 워홀의 ‘플라워스’는 조각투자로 판매돼 100%가 넘는 수익률을 올렸고, 박서보의 ‘묘법’도 138% 이상의 수익률을 냈다. 음원과 부동산 역시 다양한 플랫폼에서 거래돼 왔다. 다만 상품마다 별도 플랫폼을 이용해야 해 거래 규모가 크지 않고 유동성에 한계가 있었다. 오는 11월 한국거래소가 유가증권시장 안에 정식 ‘신종증권시장’을 연다. 개별 플랫폼에 머물던 상품들이 증권사를 통해 주식처럼 거래되면서 제도권에 본격 진입하는 것이다. 미술품이나 음원 같은 비정형 자산이 정규 증권시장의 한 영역으로 들어오는 변화다. 투자 선택지는 넓어지고 거래 편의성도 높아질 수 있다. 상품 비교도 한층 쉬워질 수 있다. 다만 자산을 잘게 쪼갠다고 투자 위험까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미술품이나 영화는 객관적인 시장 가격을 매기기 어렵다. 일부 작품이 높은 수익을 거뒀다고 모든 상품이 그럴 수는 없다. 거래가 뜸하면 팔고 싶어도 살 사람이 없을 수 있다. 회사의 지분을 사고팔던 자본시장이 이제 노래와 그림, 영화까지 품에 안았다. 신종증권시장의 성패는 결국 자산의 가치를 얼마나 제대로 매기고 믿을 수 있게 거래하느냐에 달렸다. 박상숙 논설위원
  • [씨줄날줄] 구글의 정치 유튜브 폐쇄

    [씨줄날줄] 구글의 정치 유튜브 폐쇄

    구글이 올해 4~6월 한국 정치 관련 유튜브 채널 449개를 폐쇄했다. 여러 채널이 연결돼 특정 정치 여론을 조직적으로 조종하려 한 정황이 포착됐다는 이유에서다. 이 가운데 367개는 6·3 지방선거 직전인 5월에 집중됐다. 구글은 폐쇄 대상에 정부를 지지하는 채널과 비판하는 채널이 모두 포함됐다고 했다. 하지만 운영 주체, 배후 국가, 채널명, 조작 수법은 밝히지 않았다. 구글 위협분석그룹이 최근 3년간 분기마다 낸 ‘영향 공작 보고서’에서 한국 정치 관련 유튜브 채널이 제재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 해외에서는 이런 사례가 반복됐다. 올해 5월 대선을 치른 콜롬비아에서는 선거 직전인 4월 아르헨티나·칠레에서 운영된 공작 채널이 포착됐다. 유럽연합(EU) 가입을 추진하는 몰도바는 지난해부터 거의 매 분기 러시아발 여론 공작의 타깃이 돼 수백 개 채널이 폐쇄됐다. 아르메니아 역시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 양쪽의 공작 타깃이 됐다. 여론을 주무른 해외 수법들은 다양하다. 계정을 대량으로 사들이거나 휴면 계정을 재활용했고, 먹방·음악 콘텐츠로 구독자를 모은 뒤 정치 콘텐츠로 전환하기도 했다. 상업적으로 공작을 진행하는 외부 업체의 흔적이 감지된 적도 있다. 이번에 한국에서도 독립 채널처럼 보였던 449개가 실은 11개 조작 네트워크로 묶여 있었다. 이런 운영 방식에는 국내법 위반 소지가 있다. 지방선거 직전이어서 공직선거법 위반 여부도 따져 봐야 한다. 조직적 채널 운영이 유튜브의 정상적 운영을 방해했다면 업무방해죄가 성립될 여지도 있다. 과거 뉴스 댓글을 조작했던 드루킹 사건에서도 포털 업무방해 혐의가 인정됐다. 범죄 성립 여부를 밝히려면 구글이 제재한 채널 운영 정보가 필요한데, 이를 넘길 의무가 구글에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구글이 알아서 문제적 채널을 적발하고 제재까지 마친 상황이다. 한국 당국은 수사를 하기도, 외면을 하기도 애매한 처지에 놓였다.
  • [씨줄날줄] ‘아파트 입주민’이 꿈인 청년들

    [씨줄날줄] ‘아파트 입주민’이 꿈인 청년들

    202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전체 주택의 65.8%가 아파트다. 전남·제주만 빼고 지역민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서 산다. 아파트의 편리함은 설명이 필요 없다. 무엇보다 방범·청소에 신경 쓸 일이 없다. 놀이터나 독서실·경로당·체육시설 등이 갖춰진 주거 문화 속에서 입주민들은 배타적 공간을 얻었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파트 키즈’들이 지금 주택시장의 주요 세력이다. 비아파트 중 단독주택은 줄고 다가구·다세대 주택은 늘었다. 정부는 주택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저층 주거지의 용적률과 층수·주차 기준 등을 완화했다. 그 결과 쾌적성은 떨어지고, 생활 인프라는 부족하고, 주차난이 심각해졌다. 수도권 내 주택유형별 녹지율을 보면 아파트 단지가 29.1%. 저층 주거지(23.9%)보다 높다. 지난 3월 국토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생애 최초 주택으로 아파트를 선호한다는 응답이 79.7%였다. 비아파트가 주거 사다리가 되지 못하는 현실이 반영됐다. 팔고 싶을 때 안 팔리고, 가격도 잘 안 올라 더 나은 집으로 이사 갈 밑천이 되기 어렵다. 상황이 꼬이면 ‘징검다리’가 아니라 자산이 묶이는 종착지가 될 수도 있다. 청년가구의 비아파트 자가비율은 4.5%. 전체 가구(20.5%)보다 현저하게 낮다. 월세 거주 청년가구의 임차주택 유형별 비중은 아파트 28.3%, 비아파트 71.7%다. 8·13 부동산대책에 ‘월세로 집 사는’ 청년미래보금자리론이 있다. 4억원 이하 비아파트만 집값의 최대 80%까지 저금리로 대출해 주는 정책이다. 비인기 자산인 빌라·오피스텔을 청년층에 떠넘기는 ‘가두리’ 대출이라는 지적에 금융위원회가 부랴부랴 긴급 설명회까지 열었다. 틈새시장을 배려했다고 강조했다. 비아파트는 매매보다는 임대 수요가 많다. 8·13 대책에 비아파트 주거지역의 인프라 개선책은 없고 공급 생태계 복원 대책이 있다. 비아파트 지역 인프라를 지금처럼 내버려둔다면 원하는 성과를 거두기는 힘들 듯하다.
  • [씨줄날줄] 대구읍성과 ‘중양 타령’

    [씨줄날줄] 대구읍성과 ‘중양 타령’

    1909년 1월 16일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중양 타령’이 실렸다. ‘중양가절 말 말아라/ 통곡일세 통곡일세/ 누백년을 존숭하던/ 대구객사 어데 갔노/ 애구(哀邱) 대구’가 1절이다. ‘중양’은 당시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 박중양이다. 그가 주도한 대구 읍성 및 감영 철거에 ‘애구 대구’라는 후렴구로 탄식하고 있다. 일제 침략에 따라 읍성과 관아가 본격적으로 철거되기 사작한 것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신호탄이 됐다. 읍성이란 지방 행정기관과 군사 방어시설을 내부에 두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는 시설이다. 그런데 읍성의 군사적 기능이 박탈된 마당이니 성곽으로 보호할 대상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대구읍성과 경상감영은 그보다 앞선 1906년 철거가 시작됐다. 경상도 내륙의 대표적 상업 중심지였던 대구엔 한말 일본 상인들이 대거 찾아들었다. 외곽에 자리잡았던 일본 상인들에게 읍성과 관아는 자신들이 대구 상권의 주도권을 잡는 데 걸림돌이었다. 일본거류민단은 도로위원회를 조직해 성벽을 철거한 자리에 큰 길을 내는 방안도 추진했다. 흔히 ‘신념형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분류되는 박중양은 대한제국 정부의 허가도 받지 않은 채 대구읍성과 경상감영 객사 철거에 나섰다. 당시 일본 상인들은 저습지를 사들여 유곽 설치에 나섰고 성곽 철거로 나온 석재를 매립에 썼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대구 역사가 송두리째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주민들이 박중양에게 노래로 책임을 물은 것이다. 광복절을 앞두고 국립중앙박물관이 애국지사 박원근의 작품이라고 전시하던 글씨가 같은 이름도 쓰던 박중양의 글씨일 가능성이 제기됐다는 소식이다. 박물관 전시에서 내려진 유묵은 ‘한 그릇 밥도 다 나라의 은혜’(一飯是國恩·일반시국은)라는 내용이다. 박중양은 “백성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 충성할 필요가 없다”고 했던 인물이다. 그러니 박중양의 ‘나라’는 우리나라일 수 없다.
  • [씨줄날줄] 부양의무자

    [씨줄날줄] 부양의무자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 한국의 복지 제도는 오랫동안 이 속담의 틀 안에 갇혀 있었다. 가족 중 누군가의 소득이나 재산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정작 본인이 가난하더라도 국가 지원 대상에서 빠지는 ‘부양의무자 기준’이 대표적이다. 부모와 자녀는 서로 부양할 의무가 있다는 민법 원칙이 적용됐다. 부양의무자 제도의 뿌리는 일제강점기인 1944년 ‘조선구호령’. 65세 이상 노인, 13세 이하 아동, 임산부, 장애인을 구호 대상으로 정하되 부양의무자가 없는 경우에 한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유교적 가족주의 정서와 취약한 국가 재정 속에서 1961년 생활보호법은 이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국가가 전면에 서야 한다는 인식은 2000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서야 등장했다. 새 법은 국민의 기본권으로 최저생활을 보장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재정 부담 때문에 부양의무자 기준은 새 법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가족의 형태는 빠르게 바뀌었다. 2024년 1인 가구가 804만으로 전체의 36%를 넘었고 왕래하지 않는 가족도 늘었다. 연락이 끊긴 자녀가 용돈을 보내지 않는데도 수급에서 탈락한 고령층, 아버지 땅의 공시지가가 올랐다는 이유로 의료급여에서 탈락한 희귀질환 장애인, 사위의 소득이 늘어 수급에서 탈락한 독거노인…. 이런 기막힌 사례들이 속출했다. 복잡한 선정 절차, 가족 소득 조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신청조차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이 그랬다. 변화는 비극을 겪고서야 왔다. 2015년 교육급여부터 주거급여, 생계급여까지 부양의무자 기준이 차례로 폐지됐다. 부양의무자의 연소득이 1억 3000만원을 넘거나 재산이 12억원을 초과하면 여전히 수급에서 제외됐다. 정부는 어제 마지막 예외까지 단계적으로 없애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쓰러진 사람 곁에 부축할 가족이 있는지 찾는 대신 국가가 먼저 돕기로 한 것이다. 홍희경 논설위원
  • [씨줄날줄] 기댈 곳 없는 한국인들

    [씨줄날줄] 기댈 곳 없는 한국인들

    웰빙, 웰다잉, 워라밸, 소확행, 욜로, 파이어족…. 이런 신조어들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간절히 행복을 추구하는지 알 수 있다. 심신의 건강이든 사랑이든 돈과 명예, 권력이든 행복해지려고 무엇인가 찾기 바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그제 밝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더 나은 삶 지수’(BLI)에는 각국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엿볼 수 있는 지표가 있다. 한국의 BLI는 38개국 가운데 중간인 19위. 주관적 웰빙(35위), 노동(36위), 사회적 연결(37위) 영역은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세부적으로 성별 임금 격차(38위), 사회적 지지 부족(38위)은 꼴찌를 기록했다. 삶의 만족도(36위), 장시간 유급노동 비율(34위), 절망사 사망률(31위) 등도 하위권이었다. 사회적 지지가 부족하다고 답한 사람은 20.64%. 다시 말해 사회적 관계 단절로 곤경에 처했을 때 의지할 사람이 없다고 느끼는 한국인이 5명 중 1명꼴이다. 사회적 고립은 ‘외로움 병’이 되어 고독사로 이어질 수 있다. OECD가 새로 도입한 BLI 지표인 절망사 사망률은 한국인 10만명당 27.97명. 자살·알코올·약물 과다 등으로 인한 사망이 이 정도라면 방관할 수 없는 사회구조적 위기다. 보건복지부는 자살 고위험군을 미리 찾아내 지원하는 ‘고립·위기가구 자살 예방 대책’을 어제 발표했다. 생애 주기별 고립 예방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것이 핵심이다. 간병 자살·살인 등 사회 문제로 떠오른 노노(老老)간병과 장애인 가족 돌봄 부담을 줄이는 예방 대책도 강화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높은 자살률과 관련해 “전 세계적으로 이런 망신도 없다”며 대책을 주문한 결과다. 고립, 가난, 질병, 장애, 빚 때문에 세상을 등지는 사회 구성원들을 방치해서는 행복을 말할 수 없다. 이런 정책은 아무리 많이 나와도 부족하다.
  • [씨줄날줄] 용산어린이정원

    [씨줄날줄] 용산어린이정원

    서울 용산구 용산동5가 2-1. 지난 2023년 5월 국민에게 개방된 용산어린이정원의 주소다. 용산 미군 기지의 평택 이전 결정에 따라 2003년 기지 반환이 합의된 후 19년 만인 2022년 반환받은 부지는 전체 약 74만평 중 18만평. 이 가운데 9만평쯤이 용산어린이정원으로 조성돼 먼저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 미군 주둔 등 120년 동안 일반인 접근이 불가능했던 ‘금단의 땅’. 반환받은 미군 기지가 용산공원으로 변모하기 전에 일부가 어린이정원으로 먼저 개방되자 설왕설래가 많았다. 용산공원이 완전히 조성되지 않았는데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대통령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긴 뒤 이에 맞춰 ‘정치적 이벤트’로 일부를 졸속 개방했다는 지적이었다. 일각에서는 기지의 토양·지하수 오염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어린이들이 이용하는 공간인 만큼 철저한 정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3년이 지난 지금. 용산어린이정원 입구에서 지난 8일부터 때아닌 근조화환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정부가 주택 공급 확대를 위해 용산어린이정원 부지 활용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지자 주변 주민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 이들은 주거 환경 악화와 인근 주택의 자산 가치 훼손 등을 우려한다. 용산 주민 1000여명으로 구성된 ‘용산공원지키기주민모임’은 근조화환에 이런 문구들을 붙였다. ‘공원은 아이들의 내일입니다’, ‘주택 공급은 다른 곳에서, 공원은 후손에게’. 용산어린이정원 개발 논란은 2023년 황급히 문을 열었을 때부터 불씨가 내장됐는지도 모른다. 용산은 당시에도 국가공원으로 조성할 용산공원을 비롯해 용산국제업무지구·철도정비창부지·용산역세권·국립중앙박물관 등이 연계된 대형 개발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었다. 상징적인 녹지공원만 가꿀 것이냐, 국가공원을 중심으로 새로운 도시 발전 계획을 추진할 것이냐. 후대에 무엇을 물려주는 것이 더 나을까.
  • [씨줄날줄] ‘고려장’ 세법

    [씨줄날줄] ‘고려장’ 세법

    정부의 2026 세제개편안에 장기보유특별공제(장특공제)를 거주 중심으로 바꾸고, 초고가 주택 종합부동산세를 올리는 방안이 있다. 양도소득세 과세 기준인 양도차익을 줄이는 1주택자 장특공제는 2028년 20억원 한도가 생기고 2029년에는 절반(10억원)으로 줄어든다. 종부세를 깎아 주는 1주택자 세액공제는 내년에 800만원 한도가 신설되고 2028년 600만원으로 줄어든다. 종부세가 직전 연도의 1.5배를 넘지 않는 조항은 2배로 높아진다. 직전 연도 종부세가 200만원이었다면 공시지가 인상 등으로 400만원이 될 수 있다. 지난해 개인 종부세 납부자 중 60세 이상이 52.0%다. 평균 납부액은 264만원으로 전체 평균(241만원)보다 많다. 보유 공제(최대 40%)는 물론 60세 이상부터 20·30·40% 연령별 공제가 있는데도 그렇다. 보유 공제는 유예기간을 거쳐 2028년 거주 공제로 바뀐다. 실제 거주하지 않은 초고가 1주택자라면 부담이 커진다. 정부는 65세 이상 1주택자가 수도권 주택을 팔고 비수도권으로 가면 양도세를 내년 50%(5억원 한도), 내후년 30% 감면하는 조항도 내놨다. 보유세와 생활비를 동시에 감당하기 어려운 고령자라면 고민스러운 대목이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은 며칠 전 페이스북에 “서울 강남 3구 6070에게 집 팔고 수도권 떠나라는 ‘고려장 세법 개정안’”이라고 혹평했다. 강남 3구는 서울에서 초고가 주택이 몰려 있고 6070 주택 소유자도 많은 지역이다. 검찰개혁추진단 자문위원장을 맡았던 박찬운(64)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그제 페이스북에 “27년간 살고 있는 강남의 집을 처분할 계획”이라고 썼다. 보유세 강화 정책이 적지 않은 부담이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주택 갈아타기는 쉬운 선택이 아니다. 취득세, 이사 비용은 물론 적응 문제 등이 있다. ‘고려장’이 아니려면 비수도권 지자체가 어르신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발굴해야 한다. 세제개편안을 논의할 국회의원들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전경하 논설위원
  • [씨줄날줄]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씨줄날줄]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미국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Exemption)’은 일정 요건을 갖춘 관리·전문직 등을 초과근로수당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는 제도다. 국내에서도 노동시간 유연화 논의 때마다 거론됐던 이 제도가 서남권 반도체 메가특구 조성을 계기로 다시 화두가 됐다. 재계는 기술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연구개발 인력이 필요할 때 집중해서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노동자 동의를 전제로 소득 상위 3%의 관리자·연구개발자를 주 52시간 적용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메가특구의 노동 규제 특례로 검토 중이다. 노동계의 반발이 거센 가운데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도 이에 힘을 실었다. 주 52시간 예외 없이도 반도체 기업들이 “어마어마한 실적”을 냈고, 특별연장근로 신청도 많지 않다는 것이다. 장시간 노동을 경쟁력과 곧장 연결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에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오늘의 반도체 이익은 오랜 투자와 연구개발의 결실이다. 인공지능(AI) 반도체 경쟁에서는 기술 전환을 한 번만 놓쳐도 선두가 바뀔 수 있다. 지금의 성적표만 보고 미래 경쟁력까지 재단하는 것은 지나치게 근시안적이다. 정작 김 장관은 두 달 전엔 반도체를 “공기와 같은 공공재”라며 대기업 초과이익의 사회적 재분배를 공론화하겠다고 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도 AI·반도체 호황으로 생길 초과 세수를 ‘국민배당금’으로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나눌 이익도 세금도 기업이 세계시장에서 계속 이겨야 생긴다.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은 무제한 노동을 허용하자는 뜻이 아니다. 노동자 동의를 얻더라도 적용 기간을 한정하고 동의 철회권과 충분한 보상·휴식을 보장해야 한다. 이런 안전장치를 전제로 한 제한적 도입까지 막을 일은 아니다. 김 장관은 “속력이 빠르다고 방향을 역주행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 호황만 바라보며 미래 경쟁력을 준비할 길을 막는 것도 역주행과 다름없다. 박상숙 논설위원
  • [씨줄날줄] 쏘가리

    [씨줄날줄] 쏘가리

    오래전 경기도 광주 분원의 팔당호숫가 매운탕집 어항에서 황쏘가리가 헤엄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황금색의 황쏘가리는 1967년에 국가문화유산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황쏘가리는 일반적인 쏘가리와 같은 꺽짓과 쏘가리속이지만 색소가 변이한 개체라고 한다. 분원의 황쏘가리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비싼 값이 매겨져 회나 매운탕이 됐을 것이다. 당연히 잡아서도 먹어서도 안 된다. 고산 허균(1569~1618)은 ‘도문대작’(屠門大嚼)에 ‘금린어(錦鱗魚)는 산 좋은 고을에 모두 있는데, 양근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양근은 팔당호수가 있는 양평이다. 고산은 ‘이 물고기를 예전에는 천자어(天子魚)라 불렀는데, 중국 사신이 이름을 묻자 역관이 천자를 말할 수 없어 금린어라 둘러댔다’는 일화도 적었다. 고산은 궐어(鱖魚)도 언급했다. 서울 주변에서 많이 나는데 민간에서는 염만어(廉鰻魚)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가 쏘가리는 궐어, 황쏘가리는 금린어라 구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도문대작은 ‘도살장 문 앞에서 크게 입맛을 다신다’는 뜻이다. 고산이 함열 유배 시절 그동안 맛봤던 각 지역 음식을 떠올린 품평서다. 실학자 풍석 서유구(1764~1845)는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 쏘가리를 ‘수돈(水豚)이라 한다. 그 맛이 돼지고기처럼 좋기 때문’이라고 했다. 앞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은 쏘가리가 많이 나는 지역으로 광주목과 양근군은 물론 장단부·적성현·삭녕군·마전군·충주목·청주목을 들었다. 모두 북한강과 남한강·임진강·금강이 흐르는 고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쏘가리 서식지와 일치한다. 엊그제 북한강 상류 화천에서 황쏘가리 치어 5000마리를 방류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황쏘가리는 고사하고 자연산 쏘가리도 구경하기 어려운 요즈음이다. 폭염 기세가 엄청나니 이열치열의 쏘가리 매운탕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허균의 표현을 빌리자면 쏘가리 이야기만 들어도 입맛을 다시게 된다고나 할까.
  • [씨줄날줄] AI 시대의 기우제

    [씨줄날줄] AI 시대의 기우제

    단군신화에는 비, 바람, 구름을 관장하는 우사(雨師), 풍백(風伯), 운사(雲師)가 등장한다. 농경과 직결되는 자연 현상을 다스리는 이 신들은 오랫동안 가뭄과 홍수 같은 기후 재난 앞에서 인간이 마지막으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구원의 존재였다. 가뭄이 극심할 때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우제의 역사는 깊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가뭄이 들면 명산에 신하를 보내 제사를 지냈다. 고려 시대에는 국교인 불교 의례와 도교·유교·민간 신앙이 결합된 독특한 기우제가 발달했다. 조선은 기우제를 국가 공식 의례인 ‘국조오례의’에 포함시켜 운용했다. 국왕은 가뭄을 ‘부덕의 소치’로 여겨 삼베옷을 입고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는 등 절제와 수양에 힘썼다. 땡볕 아래 멍석을 깔고 앉아 칠일간 기도하거나 기우제를 직접 주관하기도 했다. 왕위에서 물러나 병석에 누웠던 태종은 가뭄으로 백성들이 큰 고통을 겪자 “내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반드시 하늘에 아뢰어 백성들에게 단비를 내리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런데 임종 직후 하늘에서 비가 내리자 음력 5월 10일 무렵의 단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부르게 됐다. 기상학과 수리 시설이 발달하고 국가 재난 대응 체계가 정착하면서 기우제는 거의 사라졌다. 일부 지역에서만 민속 의례로 명맥을 잇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행해진 경남 양산의 가야진용신제가 대표적이다. 1997년 경상남도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매년 봄 음력 3월에 제례를 거행한다. 기록적인 폭염과 극심한 가뭄이 덮치면서 최근 기우제가 잇따라 열리고 있다. 지난달 28일 경남 창녕군과 창녕군농업인단체협의회가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지냈고, 30일에는 가야진용신제가 열렸다. 함안군도 지난 3일 단비를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인공지능(AI)이 초고속으로 발전하고, 인류의 화성 이주를 꿈꾸는 시대. 아이러니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 [씨줄날줄] 난민으로 흔들리는 솅겐조약

    [씨줄날줄] 난민으로 흔들리는 솅겐조약

    1985년 여름, 룩셈부르크 솅겐의 모젤강. 유람선 ‘프린세스 마리 아스트리드’호 위에서 프랑스와 서독 등 5개국 대표는 국경 검문을 없애기로 합의했다. 전쟁으로 갈라진 유럽을 여권 없이 오가는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어낸 출발점이었다. 그로부터 41년 뒤, 정반대의 참극이 펼쳐졌다. 북아프리카의 스페인 영토 세우타로 모로코 이주민 최대 6만명이 몰려들었다. 철책을 넘고 방파제를 돌아 헤엄치다 숨진 사람만 72명이다. 당국은 시신 안치시설을 마련했고, 세우타 앞바다에는 이주민을 막을 500m 길이의 부유식 장벽을 띄웠다. 대규모 유입의 도화선은 스페인 대법원 판결이었다. 해상으로 들어온 이민자의 본국 송환을 잠정 금지한 결정이 “세우타로 가면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소문으로 번졌고 소셜미디어와 이민 브로커가 이를 부풀렸다. 그릇된 소문 하나가 국경의 질서를 뒤흔든 셈이다. 솅겐 조약은 가입국 사이의 검문을 없애는 대신 유럽 외부 국경을 함께 지킨다는 신뢰 위에 서 있다. 세우타 사태로 그 신뢰가 흔들리자 이탈리아는 스페인발 입국자 검문을 한 달간 부활시켰고 일부 국가는 스페인의 솅겐 적용 중단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국경 없는 유럽’을 지키겠다며 회원국 사이의 검문을 다시 꺼내 든 역설이다. 이 불안을 파고든 것은 극우 정치다. 스페인 극우정당 복스 대표는 세우타 사태를 ‘침공’이라 규정하고 국경을 “조국을 지키는 성벽”으로 불렀다. 난민의 비극은 국경 강화를 요구하는 정치 언어로 바뀐다. 물가와 일자리 불안이 커질수록 “우리도 먹고살기 힘들다”는 말이 인도주의를 밀어낸다. 한때 난민을 품었던 유럽도 경기 침체와 복지 부담이 겹치자 더는 선뜻 곁을 내주지 못한다. 극우 세력은 그 팍팍함을 자양분 삼아 세를 넓힌다. 세우타의 소동은 가라앉았지만 국경을 지워낸 유럽에서는 다시 국경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박상숙 논설위원
  • [씨줄날줄] 다시 그려야 할 ‘어장 지도’

    [씨줄날줄] 다시 그려야 할 ‘어장 지도’

    경남·전남 일대에 폭염중대경보가 일주일 넘게 이어지며 바다도 끓고 있다. 전남 완도에서만 양식하던 광어 9만 8000마리가 폐사하는 등 해수온 상승이 수산업을 직격하고 있다. 국립수산과학원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58년 동안 한반도 주변 표층 수온은 1.60도 올라 전 지구 평균(0.76도)의 두 배를 넘었다. 최근 10년의 상승 속도는 과거의 3배로 가속화되는 중이다. 바다의 변화는 밥상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동해에서는 명태가 씨가 말라 2019년부터 조업이 금지됐다. 대표 어종이던 오징어 어획량은 2020년 8652t에서 2024년 852t으로 90% 넘게 급감했다. 꽁치, 도루묵 같은 한류성 어종도 갈수록 자취를 감추고 있다. 남해의 갈치는 2008년 1만여t을 정점으로 2024년 3957t까지 줄었고, 참돔·돌돔 등 횟감 어종도 예전만큼 잡히지 않는다. 서해의 대표 어종인 참조기도 계속 감소세. 홍어는 전남 흑산도보다 인천 대청도·백령도에서 더 많이 잡힌다. 적절한 수온을 찾아 어종의 대이동도 시작됐다. 동해 남부의 오징어는 이제 서해에서 더 많이 잡히고, 남해의 멸치·삼치는 서해와 동해까지 어장을 넓혔다. 제주·남해 특산이던 방어는 최근 2년간 동해안 최다 어획 어종이 됐다. 동해의 참다랑어 어획량은 2020년 25t에서 2024년 996t으로 40배 가까이 뛰었다. 새 어종으로 접시를 채우면 될 것 같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동해의 참다랑어만 해도 10㎏ 미만 소형 개체가 대부분이라 상품성이 낮고, 국제 쿼터를 넘긴 물량은 버려야 한다. 수온 변화로 서식지가 달라진 복어들은 다른 종과 교배해 ‘잡종 복어’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독성 부위를 예측할 수 없어 식용이 불가능하다. 이에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지난 6월 ‘안전한 섭취를 위한 복어도감’을 펴내기도 했다. 지리 시간에 배웠던 내용들은 격세지감이다. 지명에 딱 붙어 고유명사가 된 ‘속초 오징어’, ‘영광 굴비’. 오래된 명칭 조합들을 조만간 크게 손봐야 할지도 모른다.
  • [씨줄날줄] 그래미 보이콧

    [씨줄날줄] 그래미 보이콧

    ‘음악계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67년 전통의 그래미 어워즈는 아메리칸 뮤직 어워즈(AMA), 빌보드 뮤직 어워즈(BBMA)와 함께 미국 3대 대중음악 시상식으로 꼽힌다. 특히 그래미 어워즈는 대중적 인기보다 음악 전문가들의 투표 참여 등을 통해 작품성을 강조해 가장 권위 있는 시상식으로 평가받는다. 미 빌보드 차트 1위를 석권하며 세계적 그룹으로 인정받는 방탄소년단(BTS)은 5집 ‘아리랑’으로 지난 5월 AMA에서 대상인 ‘올해의 아티스트’를 두 번째로 수상하는 등 수많은 상을 거머쥐었지만 그래미에서는 지금까지 무관에 그쳤다. BTS뿐 아니라 블랙핑크 로제 등 K팝 가수들이 그래미 문을 두드렸으나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이 때문에 그래미가 유독 K팝에 야박하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그런데 지난달 그래미 어워즈의 새로운 상 신설 소식으로 BTS 등 K팝 가수들의 첫 수상 가능성이 높아지게 됐다. 그래미 주관기관인 레코딩 아카데미는 내년 2월 열리는 시상식에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등 5개 부문을 추가한다며 “아시안 팝의 탁월함과 영향력을 인정해 신설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BTS 측의 반응이 궁금하던 차에 그들이 그제 밝힌 입장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저희는 올해 그래미에 출품하지 않기로 했다. 음악이 지역이나 언어로 구분되기보다 음악 그 자체로 들리고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한국 등 아시아 음악을 구분하는 부문 상을 신설한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이에 레코딩 아카데미 측은 “그들의 결정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면서도 “결코 구분 지으려는 것이 아니고 1만 5000명의 투표인단의 인정을 받는 대상을 넓히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지역과 언어를 초월해 활동해온 BTS만이 할 수 있는 보이콧 아닐까. 대표성과 공정성 등 논란이 적지 않았던 그래미의 제도 개선 계기가 될지 지켜보자는 시각도 있다. 이를 위해 BTS가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 등 본상에 계속 도전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 [씨줄날줄] 韓·브라질의 민항기 협력

    [씨줄날줄] 韓·브라질의 민항기 협력

    브라질 발명가 아우베르투 산투스두몽(1873~1932)은 세계 항공 산업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우리는 라이트 형제가 1903년 동력을 이용해 띄운 ‘플라이어 1호’가 최초의 비행기라고 알고 있다. 당시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는 레일 위에서 가속도를 얻는 방식으로 이륙했다. 그런데 산투스두몽의 ‘14-bis’는 1906년 활주로를 달려 날아올랐다. ‘14-bis’를 ‘최초의 본격적인 비행기’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산투스두몽은 브라질의 국가적 영웅이다. 일찍이 1936년 개항한 리우데자네이루의 산투스두몽 공항도 그를 기념한다. 비행기가 내리면 도심지를 지나는 활주로 끝의 구아나바라만 바닷가에 멈춘다. 공항에선 리우데자네이루의 상징인 코르코바두산의 예수상도 눈에 들어온다. 프랑스에서 활동한 산투스두몽이 세상을 떠난 뒤 브라질 국내에서 항공 산업이 본격화한 것은 1940년대다. 정부는 항공기 제조국을 목표로 항공기술센터(CTA)와 항공기술대학(ITA)을 잇따라 설립한다. 상파울루주 상조제두스캄푸스는 오늘날 연구 기관과 기업이 모인 브라질의 ‘항공 실리콘밸리’가 됐다. 브라질을 현대적인 항공 강국으로 만든 엠브라에르는 1969년 출범했다. 보잉이나 에어버스가 외면한 70~150석 여객기 시장을 노렸다. 중소 도시에 자주 띄워 승객 편의를 높이고 경제성 있는 기체로 항공사 비용을 크게 줄인 ‘E-Jet’는 크게 히트했다. 엠브라에르는 수송기 C390도 생산한다. 한국 공군은 미국의 C130을 대체하는 차세대 수송기로 C390의 개량형 KC390 밀레니얼을 들여오고 있다. 브라질을 국빈 방문한 이재명 대통령이 한국과 브라질의 차세대 민항기 공동개발에 대한 희망을 피력했다. 두 나라가 글로벌 시장을 주도할 항공 협력의 중요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첨단 전자·통신 기술과 브라질의 항공기 설계 및 제작 기술이 협업해 거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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