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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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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향가 배우려 교직 접고 한국행… “한일 문학 차이점 파악할 때 쾌감”

    신라 향가 배우려 교직 접고 한국행… “한일 문학 차이점 파악할 때 쾌감”

    이화여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신라 향가(鄕歌)를 연구하는 후지타 미호(43)는 일본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일본문학을 가르치던 교사였다. 대다수 한국인에게도 낯선 향가는 신라와 고려에서 한자의 음과 뜻을 빌리는 표기법인 향찰(鄕札)을 이용해 부르던 시를 말한다. 후지타는 향찰이 7~8세기 일본 시가집인 만엽집의 표기법 ‘만요가나’(万葉仮名)와 방식이 매우 유사하다는 걸 알고 흥미를 느꼈다. ‘한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까르르 웃을 정도로 K팝에 진심인 학생들을 위해 만엽집·만요가나를 가르칠 때마다 향가와 향찰도 꼭 함께 소개하곤 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고전문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국어 공부를 위해 국내 소재 대학의 한국어학당 온라인 강의도 챙겨듣던 2023년, 그는 ‘조금이라도 어릴 때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자’라는 생각으로 생업을 잠시 접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형설지공 끝에 지난해 8월 이화여대에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박사 과정으로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11일 “일본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도 만요가나를 특히 좋아했는데, 한국에도 그와 비슷한 게 있다는 말을 듣고 꼭 공부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후지타의 자부심은 한일 양국 사이에 서서 동아시아 문학의 특징을 조망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애초 일본과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는 데서 한국 고전문학에 관심이 생겼지만, 양국 고대가요를 비교하면서 차이점을 파악할 때 쾌감을 느낀다. 그는 “사람 사이의 공감을 위해 쓰인 일본 고대가요와 달리, 신라 향가는 초자연적인 기대감을 노래한다는 특징이 있다는 걸 연구를 통해 엿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제26회 전국가사문학학술대회’ 성료···K 시가의 멋과 맛 우수성 알려

    ‘제26회 전국가사문학학술대회’ 성료···K 시가의 멋과 맛 우수성 알려

    제26회 전국가사문학학술대회(진흥위원장 최한선) 및 2025 오늘의 시조시인회의(의장 오종문) 가을 세미나가 15일 담양 한국가사문학관에서 성대하게 개최됐다. K-시가의 멋과 맛, 그 아름다움과 탁월성을 온 세계 사람들과 공유하고 향유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대회에는 대한민국 시조시인 회원들과 가사문학을 아끼고 사랑하는 애호가·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올해로 26회째 맞은 학술대회에는 강릉원주대 박영주 교수, 경기대 이지엽 교수, 국립 경상대 강경호 교수의 주제발표에 이어, 조선대 이상원 교수가 주재해 종합 토론을 진행했고 연세대 김형태 교수와 전남대 윤병용 교수, 이송희 교수 등이 토론자로 나섰다. 이번 학술대회 기조발표에 나선 최한선 교수(전남도립대 명예교수)는 ‘K-시가를 말하다. 가사창작을 말하다’란 발표문에서 K-시가는 신라 10줄 향가가 ‘3句 6名’의 시학 전통을 수립한 이래, 이를 계승·발전시켜 시조의 ‘3章 6句’, 가사의 ‘3詞 6闋’의 구성법으로 면면히 이어 온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펼쳤다. 최 교수는 <중국의 시(한시)가 중국 말을 5자와 7자로 갈고 닦아서 ‘엮어짠’(搆) 것이라면, 신라의 노래는 신라말을 3구와 6명으로 다듬어 ‘배열’(排)한 것으로 양국의 시는 서로 그 작법은 다르지만 그 문리(文理)를 가지고 말한다면 창과 방패로서 어느 것이 강하고 약한지 단정하기 어렵다>이 이론에 대해 오랜 연구를 거듭한 결과, 3과 6은 ‘주역’ 대성괘의 3재(才) 6효(爻)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했다. 한국시조시학회 제1회 평론상을 수상한 바 있는 최 교수는 “가사의 창작 역시 ‘주역’의 3재 6효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3사詞(서사, 본사, 결사) 6결闋(본사 부분이 4단 형식을 지님)의 형식이라며 명품 가사로 알려진 <면앙정가><상춘곡><사미인곡> 등을 분석한 결과 거의가 서사-본사-결사의 3사의 완결 구성을 가지며 본사의 경우 다시 공간 이동이나 계절의 변화 등 여러 수법을 원용하여 4단의 구성을 지니는 바 이와 같은 원리와 가사의 서술이 사유(조목조목 자상하게 말하기 방식)와 정감(노래하듯 다정하게 말하기 방식)의 조화를 절창으로 친다는 사실 등을 제대로 숙지한다면 앞으로 현대가사 창작에 커다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설명했다. 최 교수는 또,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지난 2018년 한국가사문학관에서 선포했던 ‘시조·가사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 등재를 위한 전라남도와 담양군의 노력이 가일층 가속화되어 세계 각처에서 시조와 가사를 창작하고 향유하며 연구하는 뜻깊은 날이 다가오기를 소망한다”고 강조했다.
  • ‘2025 세계유산축전 경주역사유적지구’ 12일 쪽샘지구서 개막

    ‘2025 세계유산축전 경주역사유적지구’ 12일 쪽샘지구서 개막

    ‘2025 세계유산축전 경주역사유적지구’ 행사가 12일 경북 경주에서 개막해 22일간 일정에 들어갔다.이 행사는 국내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축제다. 국가유산청, 경북도, 경주시가 주최하고 국가유산진흥원,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주관한다. 다음 달 3일까지 이어지는 올해 축전은 경주 외에 제주, 순천, 고창에서도 열린다. 쪽샘지구 일대에서 열리는 개막식은 대동제 길놀이 행렬, 신라고취대 고증 공연, 청도 차산농악과 영덕 월월이청청 공연으로 이어진다. 또 주제공연 ‘황룡, 다시 날다’를 통해 황룡사 창건과 선덕여왕 즉위, 9층 목탑 건립, 황룡의 승천 등 신라 황룡사 서사가 웅장한 무대미술과 드라마틱한 연출로 펼쳐진다. 공연 후에는 1000대의 드론이 황룡사 구층목탑, 황룡 등을 밤하늘에 구현하는 쇼를 펼친다. 특히 주최 측은 13일과 14일 오후 7시 쪽샘지구에서 통일신라시대 국가 행사였던 ‘신라 팔관회’를 재현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을 바탕으로 현대적 공연예술을 접목해 신라 팔관회 전통과 상징을 되살린다. 경북도와 경주시는 축전 기간에 불국사, 석굴암, 남산, 월성, 대릉원, 황룡사 등 경주 전역의 유산을 무대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새로운 문화 경험을 제공한다. 추첨을 거친 참가자들은 평소 접근하기 어려운 석굴암 내부에서 명상 체험을 하거나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위를 직접 밟아볼 수 있다. 도와 시는 첨성대 별자리 관측 프로그램, 양동마을에서 즐기는 고택 밤마실, 분황사 음악회, 신라 향가와 처용무에 페르시아 서사를 더한 ‘신 쿠쉬나메’ 공연, 김알지 탄생 설화를 따라 걷는 관광상품 등을 준비한다.
  • 경북 경주서 신라예술제 개최…“신라 문화의 현대적 재해석”

    경북 경주서 신라예술제 개최…“신라 문화의 현대적 재해석”

    신라 역사와 문화를 현대 예술로 담아낸 축제가 경북 경주시에서 열린다. 3일 경주시는 한국예총 경주지회 주관으로 경주예술의전당 일대에서 오는 13~14일 ‘2025 신라예술제’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행사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예술로 담아내고, 지역 예술인들의 창작을 통해 재해석함으로써 시민과 관광객 모두에게 풍성한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다. 올해 대표 프로그램은 주제 공연 ‘신라의 빛’이다. 신라 향가 ‘도천수대비가’를 모티브로 신라의 설화와 인물을 재현한다. 국악과 클래식이 어우러진 관현악 연주에 연극·마임을 결합한 ‘국페라타(국악+오페라+연극)’ 형식으로 양일 간 저녁 7시에 진행된다. 낮 시간에는 가족 단위 관람객을 위한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아트빛, 머무르는 시간’ 에서는 종이컵 설치미술 제작과 어린이 체험이, ‘계림학생미술대회’에서는 청소년들이 신라를 주제로 창의적 작품을 선보인다. 또한 ‘인생샷, 예술샷’ 참여형 전시, ‘서라벌사진 촬영대회’, ‘이야기 도서관’과 ‘백일장 대회’가 이어져 행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시민과 함께하는 빅밴드’에서는 지역 가수와 전문 밴드가 함께 대중가요를 연주할 예정이다. 김상용 한국예총 경주지회장은 “이번 신라예술제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창출하고, 지역 예술인의 창작 활동을 널리 알리는 장이 될 것”이라며 “시민과 관광객이 함께 즐기는 축제를 통해 경주의 문화 브랜드 가치를 더욱 높이겠다”고 말했다.
  • 신라의 화랑은 게이?… 한국사서 끄집어낸 ‘퀴어의 순간’

    신라의 화랑은 게이?… 한국사서 끄집어낸 ‘퀴어의 순간’

    “얼굴이 아름다운 꽃과 같고 교태는 마치 부인과 같았다.” 7세기 통일신라 시대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라는 책이 있다. 천광공이라는 화랑은 이 책에서 위와 같이 묘사되고 있다. 실제로 어리고 아름다운 소년들을 선발해 가르쳤던 걸로 전해지는 신라의 화랑 제도는 오늘날 다양한 상상력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이들 사이에 연모하는 감정이 피어나진 않았을까. ‘삼국유사’에 실렸으며 여러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향가 ‘모죽지랑가’가 동성애에 관한 기록이라는 주장도 있다. 화랑 득오가 선배 죽지랑을 그리워하는 내용인데 단순히 존경하는 수준이라고 하기에는 수위가 조금 높아서다. ‘퀴어’라는 말 자체는 해외에서 수입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역사에 ‘퀴어적인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내 트랜스젠더 퀴어 연구자인 루인과 성소수자 인권 활동가 한채윤이 한국사를 퀴어한 시각에서 다시 써냈다. ‘퀴어 한국사’(이매진)가 그 결과물이다. 책에는 무려 365가지의 짤막한 이야기가 담겼다. 하루에 한 편씩 읽으면 1년 안에 한국사를 퀴어한 시선에서 새롭게 독파할 수 있겠다. 목차만 봐도 흥미롭다. ‘결코 알 수 없는 공민왕의 진심’(6장), ‘실록에 남겨진 인터섹스, 사방지’(13장), ‘김구, 동성애를 이용해 탈옥하다’(30장) 등 한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퀴어한 순간을 끄집어낸다. 또 ‘게이 인권 단체 친구사이 탄생하다’(76장), ‘피시통신과 성소수자 인권의 상관관계’(84장) 등 1990년대 이후 한국의 퀴어 문화가 어떻게 발달해 왔는지도 아울러 살핀다. 루인은 책의 에필로그에 이렇게 적었다. “한국의 퀴어 역사는 아직 충분히 설명되지 못해 종종 새로운 사건을 발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성과로 오인된다. 모르던 역사적 사건을 새롭게 발굴하는 일은 대단한 성과이지만 최초 발견만큼이나 계속해서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발굴된 새로운 사건이라는 사실이 유일한 평가라면 그 사건은 다시 잊힐 뿐이다. 그러니 이 책을 쓴 두 저자가 한 해석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새로운 해석과 비평을 해 준다면 나로서는 매우 기쁘겠다.”
  • 탱글 전어 상큼 유자… 입으로 담은 맛보석

    탱글 전어 상큼 유자… 입으로 담은 맛보석

    가수 송창식은 노래 ‘고래사냥’에서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를 외쳤다. 동해는 바다를 뜻하지만 지명인 동해시도 있다. 안타깝게도 서해엔 서해시(군)가 없지만, 남해 바다에는 경남 남해군이 있다. 남해란 이름은 특별하다. 1980년대 생긴 지명인 동해시와 달리 신라 경덕왕 때부터 불린 이름이다. 남녘 바다를 지칭하는 이름처럼 영호남을 에워싼 남해 바다 중간에 떠 있는 섬이다. 지금이야 다리가 두 개나 놓여 육지와 연결됐지만 섬은 섬이다. 별칭은 보물섬이다. 보물이 많다. 마늘과 시금치(섬초), 유자, 죽방멸치 등 ‘먹는 보물’은 물론 아름다운 풍광의 ‘보는 보물’에다 문화재 등 ‘역사적 보물’까지, 진귀한 것들로 가득하다. 선선한 바람이 쪽빛 바다를 타고 불어 드는 가을에 보물섬을 다녀왔다. 동화를 연상케 할 만큼 신비로운 섬이지만, 외다리 존 실버 선장처럼 보물을 노리는 해적은 없다.●20년 전부터 조성된 남해 독일마을 ‘아우프비더젠’은 독일어로 또 만나자는 작별인사다. 필자는 고교 시절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다. ‘데어데스뎀덴 디데어데어디’ 하는 신라 향가 같은 관사와, 숨을 모았다 내쉬어야 제대로 나오는 이상한 발음의 전치사를 외우느라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대부분 학교의 독일어 선생님 별명은 게슈타포(나치 비밀경찰)였다. 필자가 다니던 학교에도 게슈타포가 한 분 계셨다. 그분은 독일어가 얼마나 과학적이며 매력적인 언어인지 늘 강조하셨고, 그 때문에 학생들이 이 위대한 언어에 대한 불경을 저지르는 것을 용서치 않았다. 학력고사 20점에 해당하는 문제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고, 그에 대한 학습효과를 ‘단호한’ 교편(敎鞭)으로 ‘친히’ 점검하셨다. 졸업한 지 30년도 더 지난 지금, 필자가 수많은 독일어 주요 문법을 아직도 달달 외우는 이유다. 독일어의 추억이 대상포진처럼 문득 발진한 이유는 남해군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독일마을에 갔기 때문이다. 삼동면 물건리와 봉화리 일대 언덕의 약 9만㎡ 너른 부지에 위치한 독일마을은 조성한 지 올해로 딱 20년 됐다. 독일마을은 남해군이 독일 북부의 도시 노드프리슬란트와 1997년 자매결연을 맺으며 그 맹아가 텄다. 2001년 남해군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귀국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택지를 조성해 분양했다. 이에 관심을 가진 25가구 정도가 직접 독일로부터 건자재를 수입해 전통 독일식 가옥을 짓고 이주하며 마을의 역사가 시작됐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교포들이 거주하는 집보다 민박과 게스트하우스, 상점, 식당, 카페 등이 더 많다.하지만 일부러 꾸민 ‘독일 테마파크’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독일에서 살아온 교포들의 실생활이 이뤄지던 곳으로, 그 진정성과 세밀함이 매력 포인트다. 집안의 소품 모두 재현품이 아닌 독일의 것이다. 호박색 기와를 올린 독일식 건축물과 외벽 장식, 정원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꾸며낸 것이 아니다. 가난한 시절 이역만리 독일 땅으로 떠났던 이들의 삶과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파독 광부 전시관과 파독 근로자 전시관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주택가 진입로에는 독일 정통 수제 소시지와 햄, 족발 요리, 사우어크라우트 등을 판매하는 음식점과 샤퀴테리아(가공육 공방)가 있고 바다를 조망하는 카페 역시 독일식 인테리어로 갖춰 놓았다. 언덕배기에 양쪽으로 펼쳐지는 거리 풍경이 하도 이국적이면서도 현실감 있어 마치 독일 북부 항구도시에 와 있는 듯하다. 물론 식사와 함께 독일이 자랑하는 맥주도 곁들여 맛볼 수 있다.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며 테라스에 앉아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아무렴, 발트해보다는 남해가 낫다. 풍광도 좋다. 언덕 아래로 물건 방조어부림(防潮魚付林)과 바다가 펼쳐지고, 해안을 옆에 두고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는 물미해안도로도 있어 관광 코스를 짜기에도 딱이다. 천연기념물 제150호 방조어부림은 폭 30m에 길이 1500m에 이르는 해변의 숲이다. 바닷바람을 막는 방풍과 숲 그늘로 물고기를 꾀어내는 어부림 역할을 동시에 한다. 무려 400여년 전인 1640년쯤 조성했다고 하니 실로 놀라운 일이다. 1960년도 1인당 국민소득 79달러의 최빈국. 당시 한국은 가난했다. 무엇보다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비약적 경제성장을 이룬 서독으로부터 차관을 받기 위해 ‘한독근로자채용협정’을 체결한다. 독일에서 기피업종으로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는 직종인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는 것이다. 이면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의 옹색한 국가신용등급 탓에 차관을 제공받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해외근로자의 임금을 담보로 서독 은행으로부터 지불보증을 받아 내려는 전략이었다. 1963년부터 시작된 파독 근로자는 1970년대 중후반까지 2만여명에 이르렀다. 광부가 8395명, 간호사(간호조무사 포함)는 1만 371명이 서독으로 떠났다. 1인당 월급으로 100달러가 넘게 지급됐으니 차곡차곡 외화가 쌓였다. 덕분에 한국 정부는 서독으로부터 약 7000만 달러의 차관 도입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은 이 돈을 바탕으로 빈곤퇴치와 경제부흥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정말 ‘나라를 구한’ 열렬한 애국이었다. 파독 근로자들은 어려운 근무환경에 인종 차별을 견디며 특유의 뚝심과 근면으로 버텼다. “글뤽 아우프(무사하기를).” 고등학생 때 이 말을 배우지 않았던 것 같지만, 광부들이 아침저녁으로 이렇게 인사를 나눴다. 이것만 봐도 당시 갱 속의 위험한 근무여건을 알 수 있다. 간호사들은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아 내며 밤낮을 지새웠다. 성공적으로 독일에 안착한 이들이 노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보금자리를 튼 곳이 바로 독일마을이다. 파독역사전시관에 이에 관한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다.●비단산 둘러싸고 도는 옥색바다 남해와 해남(전남)은 앞뒤 음절만 다른 게 아니라 이미지도 많이 다르다. 해남은 땅끝의 이미지로 왠지 육지 느낌이라면, 남해는 이상향 같은 심상을 준다. 남녘, 남촌, 남국 등 남(南) 자가 앞에 달려서 그럴 것이다. 아직 춥지는 않지만 그래도 10월, 풍(楓) 내려오는 가을 복판이다. 들판과 바다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다. 남해대교와 노량대교를 차례로 건너면 붉은 황토와 노랗게 물들어 가는 황금들판, 옥색 바다가 한눈에 든다. 남해의 산과 들, 바다가 잘 짜 놓은 유화 팔레트처럼 조화롭게 펼쳐진다. 남해는 사실 산이다. 욕탕에 물을 빼듯 바닷물을 비운다면 뾰족한 산이 나올 텐데, 그 산들이 바로 남해도, 창선도, 우도 등 남해군이 품은 섬이다. 실제 국내 섬 중 가장 산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최고 786m(망운산) 등 기세 좋은 산들이 섬을 채운다. 왕이 되면 온 강토를 비단으로 두르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조선 태조가 이름을 붙였다는 금산(錦山). 무려 해발 700m에 이른다. 태조처럼 뭔가를 이루기 위해 찾는 이들이 많은 전국 3대 기도 도량 보리암이 금산의 산마루에 있다. 관광객이야 좋은 풍경을 보러 오는 것이니 어쨌든 그 소원 하나는 들어준다. 산은 좋지만 경작할 농토는 모자랐다. 이렇다 할 장비도 없이 ‘수금푸’(삽의 사투리)와 호미로 일일이 산을 깎아 경작지를 개간해야 했다. 남해에는 가천면 다랑이논 같은 노동의 유산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10여층 높이의 계단 같은 논밭이 산허리로부터 바다를 향해 가파르게 떨어진다. 피땀 흘려 개간한 노동의 현장이지만 조형미만큼은 가히 예술적이다. 유려한 곡선(사실은 직선화할 수 없어 그랬을 테지만)이 가파른 층을 이루며 첩첩 오른다. 밑에서 보자면 하늘 계단이며 위에서 보면 곡면으로 구성한 몬드리안의 추상화다. 벼가 무르익으면 여기에 황금색이 입혀진다. 가을 다랑이논이 사진가에게 사랑받는 이유다.남해가 보물섬이란 설정에는 특유의 목가적 분위기도 한몫한다. 설천면 구두산에는 유럽 초원을 닮은 양떼목장과 양모리학교가 있다. 푸른 언덕에 양들이 뛰어놀고 있다. 시간 맞춰 가면 양몰이 개 보더콜리가 뛰어다니며 어린 양떼를 통제하는 진풍경도 관람할 수 있다.남해는 바다다.(아깐 산이라더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풍요롭고 비옥한 바다다. 이 바다에 봄이면 플래티넘처럼 반짝이는 멸치떼가 돌아오고, 가을이면 전어와 우럭 등 싱싱한 횟감과 전복, 소라 등 맛난 먹거리가 넘쳐난다. 관음포는 고현면 북쪽에 있는 포구다. 노량 바다를 바라보는 나지막한 언덕 아래 있다. 이락포(李落浦)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순신 장군이 서거한 곳이란 뜻이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충무공은 관음포에서 왜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 중 장렬히 전사했다. 충무공의 뜻을 기리는 이락사 등 유적과 영상관, 다양한 조형물과 기념물이 이곳에 있다. 그 이전인 고려 때는 인근 선원사(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에서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을 판각했다. 이래저래 호국성지인 곳이다. 상주은모래해변도 남해 바다를 만끽할 수 있는 포인트다. 저물어 가는 가을볕을 받아 윤슬과 더불어 반짝이는 은싸라기 같은 모래밭을 바라보면 과연 그 이름이 무색하지 않다. 이 외에도 멸치떼가 지나는 지족해협과 죽방렴, 남해안 특유의 청자색 계열을 색색별로 눈에 담아 올 수 있다. 산이 높아 길도 한참 올라가는 탓에 눈부신 바다는 어느 곳엘 가도 따라다닌다. 코로나로 ‘바다 결핍’에 시달린다면 당장 남해를 찾아야 한다.●보물섬의 숨은 보물찾기 엘림 마리나 앤드 리조트는 독일 마을 아래 물건항에 위치한 요트 리조트다. 요트 정박장과 편의시설동, 테라스와 월풀욕조 등을 갖춘 숙박동으로 구성됐다. 럭셔리 요트와 제트 보트 등을 체험할 수 있다. 19~20세기 초에 제작된 빈티지 아날로그 오디오와 다양한 제조사의 중대형 바이크를 수십대 모아 둔 전시실도 갖췄다. 비 오는 날 등 야외 활동이 어려운 날에 찾아볼 만하다. 바닷가에 바로 접한 골든앵커 레스토랑에선 정통 이탈리아 요리를 선보인다. 저녁 시간에는 새파란 하늘이 코발트 빛으로 저물어 가는 진풍경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 아난티 남해는 이미 유명한 곳. ‘물결’이 모티브로 녹아든 건물에 스위트룸 150개와 프라이빗 빌라 20개로 구성됐다. 리조트 조성 당시 5베이 구조를 채택해 어떤 객실에 묵어도 바다와 섬, 골프 코스를 볼 수 있다. 몇 년 전 힐튼 브랜드에서 아난티로 주인이 바뀌었다. ‘관광’보다는 ‘쉼’을 강조하며 콘셉트도 바꿨다. 어린이 섹션과 반려동물 동반, 서가 등 일상 속 ‘느림’을 표방하며 자연 속 휴식의 즐거움을 추구했다. 예술적 영감을 더한 굿즈와 식음료는 독특한 개성으로 채웠다. 아난티 남해는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며 시너지를 낸다. 리조트 곳곳을 둘러보는 것 자체가 휴식이다. ●조선시대 여행작가 류의양 ‘남해문견록’ 남겨 독서의 계절에 남해에 왔는데 유배문학관을 빼놓기도 뭐하다. 남해는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하지만 남해 풍광을 가만 떠올려 보면, 형벌이 아니라 인센티브 휴가에 가깝다. 워케이션처럼 남해에 유배 와서 교육과 저술활동을 한 선비들이 많았다. 가시나무 울타리 밖으로 못 나오게 하는 위리안치를 제외하면 집을 짓고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시를 쓰며 보냈다. 이때 유배문학이라는 독특한 장르가 탄생했다. 유배형이 있던 외국에도 공통된 현상이 있었다. 일본의 스가와라노 마치자네, 중국의 이백, 소동파, 백거이 등 당대 최고 시인들은 물론이며 서양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후 1815년 영국령 세인트헬레나섬으로 귀양을 가서 구술서 ‘세인트헬레나의 회상’을 남겼고 문호 빅토르 위고 역시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추방당한 후 영국 해협의 저지섬과 건지섬에서 살며 명작 ‘레미제라블’을 썼다. 러시아 푸시킨 역시 미하일로프 유배 생활 중 그 유명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썼다. 남해에는 ‘사친시’(思親詩)의 서포 김만중을 비롯해 이규보, 김굉필, 권근, 김정 등 수많은 문필가들이 유배 생활 중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 가운데 류의양(1718~미상)은 현대적 의미의 ‘여행작가’라 할 수 있다. 그림 같은 남해의 풍경과 생활상을 한글로 기록한 남해문견록을 남겼다. 류의양은 책에 풍경과 지리뿐 아니라 사투리 등 다양한 생활상까지 담아 국문학뿐 아니라 언어학에서도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가을날의 보물찾기. 보물섬 남해 땅에서 도전할 수 있다. 글 사진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 demory@naver.com
  • 은빛 윤슬 금빛 들판… 눈으로 담은 가을 보석

    은빛 윤슬 금빛 들판… 눈으로 담은 가을 보석

    가수 송창식은 노래 ‘고래사냥’에서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를 외쳤다. 동해는 바다를 뜻하지만 지명인 동해시도 있다. 안타깝게도 서해엔 서해시(군)가 없지만, 남해 바다에는 경남 남해군이 있다. 남해란 이름은 특별하다. 1980년대 생긴 지명인 동해시와 달리 신라 경덕왕 때부터 불린 이름이다. 남녘 바다를 지칭하는 이름처럼 영호남을 에워싼 남해 바다 중간에 떠 있는 섬이다. 지금이야 다리가 두 개나 놓여 육지와 연결됐지만 섬은 섬이다. 별칭은 보물섬이다. 보물이 많다. 마늘과 시금치(섬초), 유자, 죽방멸치 등 ‘먹는 보물’은 물론 아름다운 풍광의 ‘보는 보물’에다 문화재 등 ‘역사적 보물’까지, 진귀한 것들로 가득하다. 선선한 바람이 쪽빛 바다를 타고 불어 드는 가을에 보물섬을 다녀왔다. 동화를 연상케 할 만큼 신비로운 섬이지만, 외다리 존 실버 선장처럼 보물을 노리는 해적은 없다.●20년 전부터 조성된 남해 독일마을 ‘아우프비더젠’은 독일어로 또 만나자는 작별인사다. 필자는 고교 시절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다. ‘데어데스뎀덴 디데어데어디’ 하는 신라 향가 같은 관사와, 숨을 모았다 내쉬어야 제대로 나오는 이상한 발음의 전치사를 외우느라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대부분 학교의 독일어 선생님 별명은 게슈타포(나치 비밀경찰)였다. 필자가 다니던 학교에도 게슈타포가 한 분 계셨다. 그분은 독일어가 얼마나 과학적이며 매력적인 언어인지 늘 강조하셨고, 그 때문에 학생들이 이 위대한 언어에 대한 불경을 저지르는 것을 용서치 않았다. 학력고사 20점에 해당하는 문제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고, 그에 대한 학습효과를 ‘단호한’ 교편(敎鞭)으로 ‘친히’ 점검하셨다. 졸업한 지 30년도 더 지난 지금, 필자가 수많은 독일어 주요 문법을 아직도 달달 외우는 이유다. 독일어의 추억이 대상포진처럼 문득 발진한 이유는 남해군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독일마을에 갔기 때문이다. 삼동면 물건리와 봉화리 일대 언덕의 약 9만㎡ 너른 부지에 위치한 독일마을은 조성한 지 올해로 딱 20년 됐다. 독일마을은 남해군이 독일 북부의 도시 노드프리슬란트와 1997년 자매결연을 맺으며 그 맹아가 텄다. 2001년 남해군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귀국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택지를 조성해 분양했다. 이에 관심을 가진 25가구 정도가 직접 독일로부터 건자재를 수입해 전통 독일식 가옥을 짓고 이주하며 마을의 역사가 시작됐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교포들이 거주하는 집보다 민박과 게스트하우스, 상점, 식당, 카페 등이 더 많다.하지만 일부러 꾸민 ‘독일 테마파크’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독일에서 살아온 교포들의 실생활이 이뤄지던 곳으로, 그 진정성과 세밀함이 매력 포인트다. 집안의 소품 모두 재현품이 아닌 독일의 것이다. 호박색 기와를 올린 독일식 건축물과 외벽 장식, 정원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꾸며낸 것이 아니다. 가난한 시절 이역만리 독일 땅으로 떠났던 이들의 삶과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파독 광부 전시관과 파독 근로자 전시관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주택가 진입로에는 독일 정통 수제 소시지와 햄, 족발 요리, 사우어크라우트 등을 판매하는 음식점과 샤퀴테리아(가공육 공방)가 있고 바다를 조망하는 카페 역시 독일식 인테리어로 갖춰 놓았다. 언덕배기에 양쪽으로 펼쳐지는 거리 풍경이 하도 이국적이면서도 현실감 있어 마치 독일 북부 항구도시에 와 있는 듯하다. 물론 식사와 함께 독일이 자랑하는 맥주도 곁들여 맛볼 수 있다.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며 테라스에 앉아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아무렴, 발트해보다는 남해가 낫다. 풍광도 좋다. 언덕 아래로 물건 방조어부림(防潮魚付林)과 바다가 펼쳐지고, 해안을 옆에 두고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는 물미해안도로도 있어 관광 코스를 짜기에도 딱이다. 천연기념물 제150호 방조어부림은 폭 30m에 길이 1500m에 이르는 해변의 숲이다. 바닷바람을 막는 방풍과 숲 그늘로 물고기를 꾀어내는 어부림 역할을 동시에 한다. 무려 400여년 전인 1640년쯤 조성했다고 하니 실로 놀라운 일이다. 1960년도 1인당 국민소득 79달러의 최빈국. 당시 한국은 가난했다. 무엇보다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비약적 경제성장을 이룬 서독으로부터 차관을 받기 위해 ‘한독근로자채용협정’을 체결한다. 독일에서 기피업종으로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는 직종인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는 것이다. 이면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의 옹색한 국가신용등급 탓에 차관을 제공받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해외근로자의 임금을 담보로 서독 은행으로부터 지불보증을 받아 내려는 전략이었다. 1963년부터 시작된 파독 근로자는 1970년대 중후반까지 2만여명에 이르렀다. 광부가 8395명, 간호사(간호조무사 포함)는 1만 371명이 서독으로 떠났다. 1인당 월급으로 100달러가 넘게 지급됐으니 차곡차곡 외화가 쌓였다. 덕분에 한국 정부는 서독으로부터 약 7000만 달러의 차관 도입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은 이 돈을 바탕으로 빈곤퇴치와 경제부흥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정말 ‘나라를 구한’ 열렬한 애국이었다. 파독 근로자들은 어려운 근무환경에 인종 차별을 견디며 특유의 뚝심과 근면으로 버텼다. “글뤽 아우프(무사하기를).” 고등학생 때 이 말을 배우지 않았던 것 같지만, 광부들이 아침저녁으로 이렇게 인사를 나눴다. 이것만 봐도 당시 갱 속의 위험한 근무여건을 알 수 있다. 간호사들은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아 내며 밤낮을 지새웠다. 성공적으로 독일에 안착한 이들이 노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보금자리를 튼 곳이 바로 독일마을이다. 파독역사전시관에 이에 관한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다.●비단산 둘러싸고 도는 옥색바다 남해와 해남(전남)은 앞뒤 음절만 다른 게 아니라 이미지도 많이 다르다. 해남은 땅끝의 이미지로 왠지 육지 느낌이라면, 남해는 이상향 같은 심상을 준다. 남녘, 남촌, 남국 등 남(南) 자가 앞에 달려서 그럴 것이다. 아직 춥지는 않지만 그래도 10월, 풍(楓) 내려오는 가을 복판이다. 들판과 바다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다. 남해대교와 노량대교를 차례로 건너면 붉은 황토와 노랗게 물들어 가는 황금들판, 옥색 바다가 한눈에 든다. 남해의 산과 들, 바다가 잘 짜 놓은 유화 팔레트처럼 조화롭게 펼쳐진다. 남해는 사실 산이다. 욕탕에 물을 빼듯 바닷물을 비운다면 뾰족한 산이 나올 텐데, 그 산들이 바로 남해도, 창선도, 우도 등 남해군이 품은 섬이다. 실제 국내 섬 중 가장 산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최고 786m(망운산) 등 기세 좋은 산들이 섬을 채운다. 왕이 되면 온 강토를 비단으로 두르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조선 태조가 이름을 붙였다는 금산(錦山). 무려 해발 700m에 이른다. 태조처럼 뭔가를 이루기 위해 찾는 이들이 많은 전국 3대 기도 도량 보리암이 금산의 산마루에 있다. 관광객이야 좋은 풍경을 보러 오는 것이니 어쨌든 그 소원 하나는 들어준다. 산은 좋지만 경작할 농토는 모자랐다. 이렇다 할 장비도 없이 ‘수금푸’(삽의 사투리)와 호미로 일일이 산을 깎아 경작지를 개간해야 했다. 남해에는 가천면 다랑이논 같은 노동의 유산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10여층 높이의 계단 같은 논밭이 산허리로부터 바다를 향해 가파르게 떨어진다. 피땀 흘려 개간한 노동의 현장이지만 조형미만큼은 가히 예술적이다. 유려한 곡선(사실은 직선화할 수 없어 그랬을 테지만)이 가파른 층을 이루며 첩첩 오른다. 밑에서 보자면 하늘 계단이며 위에서 보면 곡면으로 구성한 몬드리안의 추상화다. 벼가 무르익으면 여기에 황금색이 입혀진다. 가을 다랑이논이 사진가에게 사랑받는 이유다.남해가 보물섬이란 설정에는 특유의 목가적 분위기도 한몫한다. 설천면 구두산에는 유럽 초원을 닮은 양떼목장과 양모리학교가 있다. 푸른 언덕에 양들이 뛰어놀고 있다. 시간 맞춰 가면 양몰이 개 보더콜리가 뛰어다니며 어린 양떼를 통제하는 진풍경도 관람할 수 있다.남해는 바다다.(아깐 산이라더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풍요롭고 비옥한 바다다. 이 바다에 봄이면 플래티넘처럼 반짝이는 멸치떼가 돌아오고, 가을이면 전어와 우럭 등 싱싱한 횟감과 전복, 소라 등 맛난 먹거리가 넘쳐난다. 관음포는 고현면 북쪽에 있는 포구다. 노량 바다를 바라보는 나지막한 언덕 아래 있다. 이락포(李落浦)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순신 장군이 서거한 곳이란 뜻이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충무공은 관음포에서 왜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 중 장렬히 전사했다. 충무공의 뜻을 기리는 이락사 등 유적과 영상관, 다양한 조형물과 기념물이 이곳에 있다. 그 이전인 고려 때는 인근 선원사(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에서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을 판각했다. 이래저래 호국성지인 곳이다. 상주은모래해변도 남해 바다를 만끽할 수 있는 포인트다. 저물어 가는 가을볕을 받아 윤슬과 더불어 반짝이는 은싸라기 같은 모래밭을 바라보면 과연 그 이름이 무색하지 않다. 이 외에도 멸치떼가 지나는 지족해협과 죽방렴, 남해안 특유의 청자색 계열을 색색별로 눈에 담아 올 수 있다. 산이 높아 길도 한참 올라가는 탓에 눈부신 바다는 어느 곳엘 가도 따라다닌다. 코로나로 ‘바다 결핍’에 시달린다면 당장 남해를 찾아야 한다.●보물섬의 숨은 보물찾기 엘림 마리나 앤드 리조트는 독일 마을 아래 물건항에 위치한 요트 리조트다. 요트 정박장과 편의시설동, 테라스와 월풀욕조 등을 갖춘 숙박동으로 구성됐다. 럭셔리 요트와 제트 보트 등을 체험할 수 있다. 19~20세기 초에 제작된 빈티지 아날로그 오디오와 다양한 제조사의 중대형 바이크를 수십대 모아 둔 전시실도 갖췄다. 비 오는 날 등 야외 활동이 어려운 날에 찾아볼 만하다. 바닷가에 바로 접한 골든앵커 레스토랑에선 정통 이탈리아 요리를 선보인다. 저녁 시간에는 새파란 하늘이 코발트 빛으로 저물어 가는 진풍경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 아난티 남해는 이미 유명한 곳. ‘물결’이 모티브로 녹아든 건물에 스위트룸 150개와 프라이빗 빌라 20개로 구성됐다. 리조트 조성 당시 5베이 구조를 채택해 어떤 객실에 묵어도 바다와 섬, 골프 코스를 볼 수 있다. 몇 년 전 힐튼 브랜드에서 아난티로 주인이 바뀌었다. ‘관광’보다는 ‘쉼’을 강조하며 콘셉트도 바꿨다. 어린이 섹션과 반려동물 동반, 서가 등 일상 속 ‘느림’을 표방하며 자연 속 휴식의 즐거움을 추구했다. 예술적 영감을 더한 굿즈와 식음료는 독특한 개성으로 채웠다. 아난티 남해는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며 시너지를 낸다. 리조트 곳곳을 둘러보는 것 자체가 휴식이다. ●조선시대 여행작가 류의양 ‘남해문견록’ 남겨 독서의 계절에 남해에 왔는데 유배문학관을 빼놓기도 뭐하다. 남해는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하지만 남해 풍광을 가만 떠올려 보면, 형벌이 아니라 인센티브 휴가에 가깝다. 워케이션처럼 남해에 유배 와서 교육과 저술활동을 한 선비들이 많았다. 가시나무 울타리 밖으로 못 나오게 하는 위리안치를 제외하면 집을 짓고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시를 쓰며 보냈다. 이때 유배문학이라는 독특한 장르가 탄생했다. 유배형이 있던 외국에도 공통된 현상이 있었다. 일본의 스가와라노 마치자네, 중국의 이백, 소동파, 백거이 등 당대 최고 시인들은 물론이며 서양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후 1815년 영국령 세인트헬레나섬으로 귀양을 가서 구술서 ‘세인트헬레나의 회상’을 남겼고 문호 빅토르 위고 역시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추방당한 후 영국 해협의 저지섬과 건지섬에서 살며 명작 ‘레미제라블’을 썼다. 러시아 푸시킨 역시 미하일로프 유배 생활 중 그 유명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썼다. 남해에는 ‘사친시’(思親詩)의 서포 김만중을 비롯해 이규보, 김굉필, 권근, 김정 등 수많은 문필가들이 유배 생활 중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 가운데 류의양(1718~미상)은 현대적 의미의 ‘여행작가’라 할 수 있다. 그림 같은 남해의 풍경과 생활상을 한글로 기록한 남해문견록을 남겼다. 류의양은 책에 풍경과 지리뿐 아니라 사투리 등 다양한 생활상까지 담아 국문학뿐 아니라 언어학에서도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가을날의 보물찾기. 보물섬 남해 땅에서 도전할 수 있다. 글 사진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 demory@naver.com
  • [슬기로운 문학생활]당신이 설 연휴에 읽어야 할 책

    [슬기로운 문학생활]당신이 설 연휴에 읽어야 할 책

    패기만만하고 호기롭게 적어본다. 설 연휴에 문학책을 읽어보자고. 안 읽어도 상관없지만, 넷플릭스에 지친 당신이 불현듯 활자를 읽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하나만 파다 보면 좀 질리는 법이고, 설 연휴나 되니까 당신이 책을 집어들 수도 있으니. 혹여나 읽어보고 재미가 없으면 기자에게 항의 메일을 보내도 된다. ●강화길 ‘음복’: 가족 내 진짜 ‘빌런’은 누구인가. 장례식장에서 다른 가족들이 일하는 동안 본인 앞으로 들어온 조의금을 세보는 사람, 식구들이 모이면 너는 성적이 어느 정도이고 취직은 언제할 생각이냐고 묻는 사람.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가. 올해 젊은작가상 대상에 빛나는 강화길 작가의 ‘음복’에 등장하는 시고모의 모습이다. 소설 속 표현에 따르면 ‘집안마다 한 명씩 있는 그런 사람’. 시할아버지 제삿날, 고모의 무례한 질문에 점점 더 기분이 나빠진 ‘나’는 얼결에 ‘음복’까지 한다. 그런데 뒤집어 보면 ‘집안마다 한 명씩 있는 그런 사람’은 과연 시집에만 있을까? 그리고 끝판왕 같은 ‘진짜 악역’은 원래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가족 내 진짜 ‘빌런’은 누구인지 다각도로 살펴보게 하는 작품이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낸 ‘소설 보다 2019,가을’에 실렸다. ●박해울 ‘기파’(허블): 문턱이 낮은 SF소설 ‘SF가 유행이라며’ 라는 말을 문학에 관심 없는 이들도 한 번 쯤은 들었을 법 하다. 지난해 김초엽 작가 같은 걸출한 신예의 등장, 기존 작가들의 활약, SF 무크지의 등장으로 SF 시장은 더없이 풍성해졌다. 그러나 SF 문학에 입문하는 일은 소설 좀 읽는다 하는 사람도 쉽지가 않다. 특히나 ‘스페이스 오페라’류의 하드한 SF는 문학 담당인 기자에게도 만만치가 않았다. ‘나도 SF 한번 읽어보자’하는 초심자에게 권한다. 지난해 한국과학문학상 장편부문을 수상한 ‘기파’다. 향가 ‘찬기파랑가’에 SF를 접목한 작품인 ‘기파’는 신라 시대 화랑으로 널리 알려진 ‘기파’가 해독자에 따라 의사로도, 승려로도 해독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추리 형식의 미스터리 SF다. 사이보그와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는 근미래에, 예기치 못한 운석 충돌로 난파된 우주크루즈 안에서 벌어지는 추격극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술술 넘어가는데다 어려운 과학적 설정이 없어 조금 조숙한 초등학생 조카와도 나눠 볼 수 있다. SF 못지 않게 요즘 유행하는 단어인 ‘90년대생’의 사회복지사인 작가가 썼다. ●김보라 ‘벌새’(아르테): 시나리오로 다시 보는 ‘벌새’ 영화 아니다. 국내외 영화제 45관왕 달성에 빛나는 영화 ‘벌새’의 시나리오집이다. 영화를 보고 보면 더욱 의미가 풍부해질 것이다. 영화에 담지 않은 신들도 모두 들어가 있기에. 순서를 바꿔도 상관은 없다. 내가 만든 머릿속 영화와 실제 영화를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기에. 인물들 대사의 뉘앙스를 고르고 고르는 김보라 감독 특유의 작법을 되새기는 데 이만한 책이 없다. 가령, 오빠에게 맞아 고막이 터진 어린 은희를 진찰하는 의사의 말 같은 것. “혹시… 진단서가 필요하니?” 모종의 폭력이 일어났음을 눈치챘지만 은희의 의사를 묻는 것이 먼저인 그의 행동을 감독은 섬세한 말의 뉘앙스를 통해 구현해냈다. 뒤에 실린 영화 리뷰도 놓칠 수 없다. 최은영, 남다은, 김원영, 정희진의 글에 이어 그래픽 노블 작가 앨리슨 벡델과 김 감독의 대담까지…. 영화 ‘벌새’가 세상에 나오기까지, 감독의 벌새 같은 날갯짓을 그의 입으로 직접 들을 수 있다. ●창작동인 ‘뿔’ 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아침달): 90년대생들의 시 90년대생 시인 3명으로 이루어진 창작동인 뿔의 시집이다. 최지인·양안다·최백규 세 명의 시인으로 이루어진 ‘뿔’은 미래를 지향한다고 스스로 말한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미래는 무조건적인 장밋빛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바라보는 슬픔 어린 미래가 마냥 먹빛도 아니다. 이들에게 있어 슬픔은 또한 아름다운 것이거나, 혹은 슬픔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능력이 이들에게는 있노라고 출판사 측에서는 설명한다. 슬픔도 공감을 동반한다면, 마냥 나쁘지만은 않은 것일테다. ‘회사 생활이 힘들다고 우는 너에게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이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했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게 계속 일할 의지 계속 살아갈 의지가 없다는 게 슬펐다’(54쪽, ‘기다리는 사람’ 부분) 처럼 현실에 발 디딘 시편이 많다. 그 덕에 시가 일상과 멀리 있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든다. 3명의 시인들은 각 시편마다 이름을 적지 않았다가, 마지막 장에 깜찍하게 밝혔다. 아까 그 시의 마지막은 ‘우리는 가만히 누워 손과 발이 따듯해지길 기다렸다’이다. 따뜻한 설 연휴 되기 바란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고요한 땅속 차가운 소름 이게 ‘동캉스’

    고요한 땅속 차가운 소름 이게 ‘동캉스’

    연일 폭염이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 어디 시원한 곳 없을까. 올여름에는 깊은 동굴 속으로 떠나 보면 어떨까. 들어서기만 해도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곳. 터널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다 보면 뼛속까지 시원해진다. 한국관광공사가 8월에 가볼 만한 곳으로 동굴 피서지를 선정했다. 글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사진 한국관광공사 강원 동해 천곡황금박쥐동굴 동굴 탐방을 위해 꼭 깊은 산골까지 갈 필요는 없다. 동해 천곡황금박쥐동굴은 도심 속 천연 동굴이다. 1991년 아파트 공사를 하던 중 처음 발견됐다. 길이 1510m 가운데 810m가 관람 구간이다. 동굴의 평균기온은 10~15℃. 동굴에 들어서면 이마에 송글송글 맺혔던 땀방울이 이내 사라진다. 천곡황금박쥐동굴에는 황금박쥐(붉은박쥐)가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멸종위기종 1급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희귀 야생동물이다. 동굴은 현재진행형이다. 천장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며 계속 석회암을 녹이고 있다. 바닥에 솟은 석순과 천장에 매달린 대형 종유석, 석순과 종유석이 연결된 석주 등이 끊임없이 나타나며 흥미진진한 동굴 탐방을 이끈다. 천장에 굴곡을 형성한 용식구는 국내 동굴 중 최대급 규모다. 동해 여행 때는 옛 묵호항의 사연을 벽화 골목에 담아 낸 논골담길, 새로운 서핑 포인트로 사랑받는 대진해변, 무릉계곡의 절경을 간직한 무릉반석과 쌍폭포 등을 함께 둘러보면 좋다. 충북 단양 수양개빛터널 단양 수양개빛터널은 빛터널과 비밀의정원으로 나뉜다. 빛터널은 일제강점기부터 1984년까지 쓰인 길이 200m 철도 터널이다. 거울 벽으로 각 구간을 나누고, 꽃 타래와 은하수 모양 LED 전구 등으로 변화를 줘 환상적이고 몽환적이다. 비밀의정원은 알록달록한 LED 튤립 사이를 산책하며 일루미네이션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다. 돌아가는 길에는 핑크빛 은하수 터널이 낭만적인 포토존이 된다. 이끼터널 역시 지척이다. 길 좌우 축대 벽의 이끼와 하늘을 덮은 나무가 초록 터널을 만드는데, 여름이 압권이다. 빛터널 인근의 만천하스카이워크는 스카이워크 3곳이 아찔한 스릴을 선물한다. 다누리아쿠아리움이나 고수동굴은 생태 학습과 함께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곳. 두산활공장의 ‘카페 산(SANN)’도 명물이다. 옛 우체국을 개조한 영춘면의 만종리대학로극장에서는 매주 토요일 연극 무대를 올린다.경북 울진 성류굴 울진은 삼림욕, 해수욕, 온천욕을 사계절 즐길 수 있는 ‘삼욕(三浴)의 고장’이라 불린다.여기에 시원한 ‘동굴욕’을 더하면 어떨까? 왕피천이 휘감은 선유산에는 2억 5000만년 세월을 품은 울진 성류굴(천연기념물 155호)이 있다. 성류굴은 오랜 역사와 과학이 담긴 동굴이자, 선조들이 문학과 예술을 즐긴 흔적이 많은 동굴이다. 최근 성류굴 암벽에서 1500여년 전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이 다녀갔다는 ‘국보급’ 명문이 발견돼 큰 관심을 끌었다. 제8광장 일대에 명문들이 많다. 죽변항 뒤 드라마 ‘폭풍 속으로’ 세트장 인근의 하트해변에서 해수욕을, 응봉산 중턱에서 솟구치는 덕구온천과 응봉산 등산로를 따라 만나는 덕구계곡에서 온천욕과 삼림욕을 즐기는 재미도 그만이다. 경상북도민물고기생태체험관, 명승으로 지정된 불영사계곡의 불영사도 꼭 찾아보자. 전북 순창 향가터널 순창 향가터널은 일제강점기 때 쌀을 수탈하기 위해 만들었다. 길이가 384m에 달한다. 1945년 광복 후 마을을 오가는 터널로 사용되다, 2013년 섬진강종주자전거길을 조성하며 내부를 정비했다. 터널에 들어서면 냉기가 피부에 와 닿는다. 기온이 10℃는 떨어진 것 같다. 터널 벽에는 당시의 공사 현장과 미곡 수탈 과정을 재현해 놓았다. 욱일기 아래 힘겹게 돌을 짊어지고 가는 농민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소름이 돋는다. 강천산 맨발산책로(2.25㎞)도 여름에 걷기 좋다. 강천사로 가는 지방도 792호 메타세쿼이아길은 여름 드라이브 코스로 딱이다. 순창전통고추장민속마을에는 가문의 비법대로 장을 담그는 판매장이 들어섰다. 동계면 어치리 내룡마을에 자리한 장군목은 수만년 동안 거센 물살이 만들어 낸 기묘한 바위가 약 3㎞나 이어진다.전북 무주 머루와인동굴 무주의 농가들에선 국내 머루 생산량의 약 60%를 재배하고, 이를 활용해 맛깔스러운 와인을 빚는다. 머루와인은 적상산 중턱의 무주머루와인동굴에서 만난다. 더위를 피하고 머루와인도 맛볼 수 있어 여름철 여행지로 제격이다. 머루와인과 사과와인 6종을 무료로 시음하는데, 조금씩 다른 맛이 오묘하다. 동굴에 오래 있으면 몸이 으슬으슬하다. 이때 머루와인 족욕을 하면 몸이 따뜻해지고 피로가 스르르 풀린다. 무주머루와인동굴과 이웃한 적상산전망대, 안렴대, 안국사 등도 둘러보자. 무주양수발전소의 발전설비에 만든 적상산전망대가 최근에 생긴 곳이라면, 안렴대는 예부터 유명한 조망 포인트다. 두 곳에서 조망을 비교해 즐기고, 호젓한 숲길을 걸어 내려오면 안국사의 품에 닿는다. 여행 마무리는 무주의 문화 인물을 만나는 김환태문학관과 최북미술관이 좋다.경남 밀양 트윈터널 밀양 트윈터널은 무더위를 피하고 신비로운 빛의 세계를 즐기는 이색 명소다. 특별한 볼거리와 체험 거리가 많아 가족이나 커플 여행지로 인기다. 터널에 발을 들인 순간 아름다운 빛의 파노라마에 빠진다. 오색으로 불 밝힌 전구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탄성을 지르며 빛의 황홀경에 빠져든다. 터널 맞은편 체험장에서 아이들과 피자도 만들고, 카트를 타고 달리며 남은 더위를 날려 보자. 트윈터널에서 멀지 않은 만어사는 오랜 세월 품어 온 전설과 소원을 들어준다는 신비한 돌이 유명하다. 크고 작은 돌이 골짜기로 쏟아져 내린 듯한 풍광도 인상적이다. 밀양에서 하룻밤 머문다면 저녁에는 영남루의 야경을 감상하고, 이튿날 아침에 밀양연꽃단지를 산책해 보자. 참샘허브나라도 가족과 함께 가볼 만한 명소다.
  • 로맨티시스트 무왕의 정원… 1500년 만에 깨어나는 서동요

    로맨티시스트 무왕의 정원… 1500년 만에 깨어나는 서동요

    ●서동요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백제 무왕의 신수도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해두고 맛동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 유명한 신라 향가, 서동요의 주인공은 백제 30대왕 무왕(재위 600~641)으로 알려져 있다. 서동요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 기이편은 무왕의 남다른 출생부터 왕위에 오르는 과정까지 한편의 드라마를 전한다. 그의 모친은 과부로 궁의 남쪽 못에 사는 용과 정을 통해 무왕을 낳았고, 무왕은 어려서부터 마를 팔아 가족을 부양해서 서(맛)동이라 했다. 신라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경주로 가서 위와 같은 서동요를 유포시켜 결국 결혼에 성공한다. 백제로 돌아와 공주의 지참금과 그동안 모았던 큰 재력으로 민심을 얻어 왕이 되었다. 정사인 삼국사기는 다른 면모를 소개한다. 그는 법왕의 아들로 풍채와 거동이 빼어났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했다. 즉위 이후 십수차례에 걸쳐 신라와 전쟁을 벌였고, 중국 수와 당나라에 적극적인 조공 외교를 펼쳐 고구려를 치도록 공작했다. 국토 곳곳에 전쟁용 성곽을 쌓았고, 사비성의 궁궐을 수리했으며, 국가 사찰인 왕흥사를 중건하는 등 대대적인 토목 건설 사업을 일으켰다. 이름에 걸맞게 부국강병을 꾀해 쇠락하던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 영웅적인 왕이었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역사서들은 같은 인물의 모순된 양면을 그리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서동은 사랑을 위해 적국의 수도까지 잠행하는 희대의 낭만주의자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무왕은 조국을 위해서 처가 나라인 신라를 끈질기게 공격하는 냉철한 제왕이다. 어찌 장인인 진평왕을 공격할 수 있는가 등의 이유를 들어 삼국유사의 기록을 허구적 설화로 치부하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정원을 만들고 절경에서 풍류를 즐겼다는 삼국사기의 말년 기사들은 철혈군주 무왕이 로맨티스트 서동으로 다시 회귀했음을 보여준다. 상충되는 두 역사서가 모두 사실이길 바란다면, 이 정도로 절충해서 이해하고 넘어가자. 서동의 고향으로 알려진 익산은 부여, 공주와 함께 백제역사유적지역으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익산에는 왕궁리, 왕평뜰, 고도리, 궁성로 등 지명이 전하고, 무왕이 창건했다는 제석사와 미륵사 터, 왕궁 터, 그리고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이라는 쌍릉이 남아 있다. 남겨진 유적의 거대한 흔적들만 보아도 무왕의 호방한 뜻과 걸출한 기상이 보인다. 이를 토대로 익산이 일시적인 백제의 수도였다는 주장들이 힘을 얻었다. 입증할 기록도 남아 있다. 일본 교토의 사찰인 쇼오렌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에 “백제의 무광왕(무왕)은 지모밀지(왕궁)로 천도하여 새로이 사찰을 경영했다”라고 적혀 있다.기록은 계속된다. “639년 큰 벼락이 치고 비가 내려 제석정사가 화를 입어 불당과 7층목탑, 회랑과 승방이 모두 불탔다.” 무왕이 새로이 경영했다는 사찰은 왕궁리 궁평마을에 위치한 제석정사(제석사)이다. 1993년부터 발굴 조사해서 ‘제석사’라는 명문이 쓰인 기와를 발견했고, 여러 건물 터도 찾아냈다. 가람 전체를 관통하는 남북 중심축 위에 정문-목탑-금당-강당 터들이 위치하고 그 외곽을 회랑과 승방들이 감싸는 모습이다. 모두 ‘관세음응험기’의 기록과 일치하는 유적이다. 제석사는 불타기 이전인 600~630년 사이에 창건됐고, 무왕의 익산 천도도 그 시절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정도 사찰이면 수백 승려들이 거주하고, 수천의 신도들이 출입하게 된다. 주변에는 시장이 형성되고 민가들이 들어선다. 목탑지의 아래층 기단은 2m가 넘는 높이다. 높은 기단 위에 우뚝 솟은 목탑은 당시 초고층 건물로, 신도시의 랜드마크가 되었을 것이다. 천도를 위해서는 인구를 유입할 수 있는 도시의 기반시설이 필요하다. 왕실이 운영하는 제석사는 익산 천도를 위한 중요한 선행 시설이었다.●제석사지·왕궁리유적… 455m 길이 운하형 연못 수도 익산의 중심은 왕궁이었다. 현재 ‘왕궁리유적’이라는 애매한 명칭으로 불리지만, 1989년부터 발굴 조사 결과 확실한 백제의 왕궁 터임을 확인했다. 일대는 넓은 평야지대지만, 남북으로 길게 솟은 언덕을 찾아 그 위에 터를 잡았다. 남북 490m, 동서 245m의 완벽한 직사각형 궁성을 쌓고 그 안에 여러 전각을 지었다. 조선시대 경복궁 면적의 4분의 1 정도로 일시적인 행궁으로 쓰기에는 충분한 규모다. 무왕 이후에 익산은 결국 수도의 지위를 잃어 왕궁은 폐지되고 사찰로 바뀌었다. 지상에 남아 있는 구조물은 ‘왕궁리5층석탑’이 유일한데, 사찰로 바뀐 백제 말 작품이라는 설과 고려 초라는 설이 팽팽하다. 왕궁 건물 터 위에 사찰 건물들을 세웠고, 그 시기 사찰에 필수적인 회랑이 없는 등 특별한 기능의 사찰이었다. 무왕이 사후에 익산쌍릉에 모셔짐에 따라 그의 명복을 비는 왕실 원찰이었다는 주장이 그럴싸하다. 뒤편의 볼록 솟은 언덕에 정원을 조성하고, 가운데 정상부에는 큰 정자를 세워 경치를 감상했다. 정원의 가장자리에는 말굽형 환수구를 파서 운하 형태의 기다란 연못을 만들었다. 폭은 3~7m, 전체 길이는 455m에 달한다. 정원에 물을 공급하는 집수시설인 동시에 자체로서 훌륭한 조경시설이 되었을 것이다. 지그재그 모양으로 판 곡수로는 더욱 창의적이다. 환수구에 연결된 지류로 조성된 물길이며, 전체 길이 685m에 달한다. 마치 커다란 물결과 같은 모양으로 조성한 곡수로는 한국은 물론 세계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조경시설이다. 기이한 동식물을 키우고 독창적 정원을 만들어 경치를 즐겼다는 무왕의 풍류와 창의성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단한 정원유적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미륵사의 창건 설화는 특별하다. 무왕 부부가 왕궁 인근의 사자사로 행차할 때 연못에서 미륵3존이 나타나 왕비의 청탁으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늪을 메운 후 3곳에 각각 불당과 탑을 만들었다. 신라 진평왕이 공인을 보내 공사를 도왔다니 당연히 왕비는 선화공주일 것이고, 당탑을 3곳에 세웠다니 통상적인 사찰 3개가 연립된 초대형 규모였다.●20년간 보수한 미륵사지석탑 주인은 사택왕후 오랜 기간의 발굴조사를 통해 미륵사의 전모가 드러났다. 400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면적의 절터는 동아시아 최대로 추정한다. 3개의 당-탑, 다시 말해 3개의 사찰이 나란히 놓여 동-중-서의 3원을 형성했고, 각원은 회랑으로 분리됐다. 중원에는 목탑을 세웠고 동원과 서원에는 각각 석탑을 세웠다. 중원의 목탑을 비롯해 목조 건물은 물론 동원의 석탑도 조선 후기에 이미 사라졌다. 다행히 서원의 석탑은 반파된 부분이나마 기적적으로 남았다. 6층 일부까지 남았음에도 현존 석탑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커서 국보 중의 국보인 미륵사지석탑이다. 이 석탑은 기둥과 보 등 수천개의 부재들을 정교하게 깎아 조립한, 마치 목탑과도 같은 석탑으로 백제계 석탑의 원형이다. 일제기인 1915년, 붕괴 직전의 석탑에 185톤의 시멘트 덩이를 발라 흉측하나마 응급 보존공사를 했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난 1999년, 응급용 시멘트마저 수명을 다해 완전 해체 보수 정비를 결정하게 된다. 정교한 조사와 연구 끝에 드디어 2019년 5월 재조립 공사를 마쳤으니 꼬박 20년이 걸려 문화재 보수 정비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이 석탑의 원형이 7층인지 9층인지 아직 결론을 못 냈다. 1993년 확정된 결론 없이 동원에 높이 27.7m의 9층 석탑을 세웠다. 세부적인 모습도 어색하고, 전체 석재를 기계로 가공하여 정교한 백제건축의 미를 잃어버렸다. 20세기 최악의 문화재 복원이라는 오명까지 쓴 시행착오를 교훈 삼아 이번 보수정비에는 엄격한 원칙들을 세웠다. 추론 복원을 하지 않고, 직전 모습인 6층 일부까지만 복원 보수한다. 문화유산의 진정성을 최대한 존중한 결과다. 총 1627개의 부재 가운데 원래의 것을 최대한 보강 활용하여 재사용률을 81%까지 높였다. 석탑의 해체 과정에서 사리봉안기가 출현했다. 여기에는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지적의 따님으로…가람을 세우시고…”라 새겨져 있다. 미륵사의 주인공이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왕후라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다시 여러 가설이 등장했다. 왕비가 여럿이라는 설, 선화와 사택의 역할 분담설 등. 익산 쌍릉 중 대왕릉의 재발굴조사 결과 그 주인공이 무왕일 확률이 대단히 높아졌다. 현재 소왕릉 발굴 중인데, 제발 이 주인이 선화공주이기를 고대한다. 1500년 전, 무왕의 도시와 건축을 재구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료와 다소 황당한 설화뿐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실은 아닐지라도 일말의 진실은 품고 있다. 미완성 복원된 미륵사지석탑이 아직은 부분적인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건축학자·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 춘향이 발그레하듯… 생기 도는 광한루, 몽심재·구룡폭포… 이몽룡 다녀간 듯

    춘향이 발그레하듯… 생기 도는 광한루, 몽심재·구룡폭포… 이몽룡 다녀간 듯

    ‘이편에는 함양 저편에 담양/ 꿈에는 가끔가끔 산을 넘어/ 오작교 찾아찾아 가기도했소/ 그래 옳소 내 누님, 오오 누이님/ 해 돋고 달 돋아 남원땅에는/ 성춘향 아가씨가 살았다지요/ (김소월의 시 ‘춘향과 이도령’ 중) 퇴기 월매의 딸 성춘향과 남원 부사의 아들 이몽룡의 신분을 뛰어넘은 로맨스는 전북 남원을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사랑 이야기다. 춘향가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판소리 다섯 마당 중 음악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으뜸으로 꼽히고, 이들의 사랑을 노래한 명시만도 여러 편이다. 춘향제가 열리는 매년 5월이 다가올 무렵이면 남원은 이팔청춘 춘향이처럼 생기가 돈다. 싱그러운 봄바람이 살랑이던 날 지리산 자락의 맑은 정취, 천년고찰의 운치, 민족의 문학혼을 함께 돌아볼 수 있는 남원을 다녀왔다.●기왓장과 나무로 지어진 옛 서도역 수도권에서 남원으로 향한다면 남원 시내에 이르기 전 시 북동쪽에 자리한 옛 서도역에 먼저 들르는 것이 동선을 짜는 데 좋다. 임실군과의 경계에 위치한 옛 서도역은 전라선 철도에 놓인 기차역으로 일제강점기인 1931년 영업을 시작했다. 2002년 전라선이 정비되면서 도보로 5분 남짓 떨어진 곳에 새 역사가 생겼고 철거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보존을 주장하는 주민들의 요구에 남원시가 철도청으로부터 역사와 부지를 매입했고, 기왓장과 나무로 지어진 과거 모습으로 복원하면서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로 거듭났다.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아름드리 벚나무 아래 세월을 거슬러 서 있는 듯한 옛 서도역을 돌러보던 중 짤랑짤랑 방울 소리를 들었다. 할아버지를 따라 산책을 나온 생후 1개월 된 강아지가 짧은 다리로 아장아장 뛰어다니고 있었다. 젊은 시절 군대에 가기 전 서도역에서 급사로 일했었다는 이길무(76) 할아버지는 지금도 서도역 맞은편에 살고 있다. 이 할아버지는 “기차가 다니던 시절엔 줄을 서서 표를 끊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며 “그때는 역 앞에 여관도 있었고 하루 한 마리씩 돼지를 잡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역 앞 벚나무는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에도 컸고 수령 100년은 족히 넘었다고 한다.●소설 속 여러 장면 볼 수 있는 혼불문학관 최근에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촬영지 중 한 곳으로 소개되며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의 배경이 된 곳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있다. ‘혼불’은 1930년대 말 전라도의 유서 깊은 문중에서 무너지는 종가를 지키는 종부 3대를 통해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애환을 담아낸 작품이다. 소설 속 종가집 효원이 마을로 시집을 오는 장면, 주인공 강모가 전주로 전학하는 장면 등에서 서도역은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옛 서도역에서 차로 3분가량 떨어진 곳에 혼불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문학관 내부에서는 소꿉놀이, 혼례식, 액막이연 날리기, 명혼식, 장례식 등 소설 속 여러 장면들을 디오라마(입체전시)로 볼 수 있고 각 장면마다 전통 풍속에 대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생전 집필실이 재현돼 있고 자필 원고 등 여러 전시물을 통해 작가의 생애를 돌아볼 수 있다. 문학관 옆 최명희 가문에서 100여년 전 만들었다는 청호저수지는 둘레로 짧은 산책을 하기 좋다.●몽룡이 춘향이 보고 첫눈에 반한 곳,광한루 혼불문학관을 나서 차로 25분쯤 달려 남원 시내의 광한루원으로 향한다. 광한루에 올라앉아 있던 이도령이 단오날 그네를 뛰는 춘향이를 보고 첫눈에 반한 그곳이다. 보물 281호인 광한루는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인 1419년 남원으로 유배를 오게 된 황희 정승이 지은 누각으로 처음에는 광통루라고 이름 붙여졌다. 이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인지가 이곳의 경치에 취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광한청허부’로 부른 것을 계기로 광한루라는 이름을 얻었다. 1461년에는 부사 장의국이 광한루를 보수하면서 남원 시내를 흐르는 요천의 물을 끌어다 둘레에 연못을 만들었다. 1582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철은 연못 가운데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따 섬을 만들고 정자를 세웠다. 금실 좋은 원앙 한 쌍이 노니는 연못 위로 돌다리 오작교가 가로놓여 있다. 버드나무 가지가 수면에 닿을 듯 드리우고 그 너머 광한루가 고즈넉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풍경은 그대로 한 폭의 수묵화가 된다. 여러 차례에 걸친 확장공사로 2만 여평 부지에 조성된 광한루원에는 수중누각 완월정, 춘향 어머니의 집인 월매집, 이도령과 춘향이 백년가약을 맺은 부용당, 춘향전기념관 등이 있어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다. 한편에서는 춘향이 된 듯 커다란 그네를 타고 투호놀이 등도 즐길 수 있다. 춘향의 일편단심을 기리기 위해 1931년에 세워진 영정각에는 김은호 화백이 그린 단아한 모습의 춘향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 사당에서 축원을 빌면 백년가약이 이뤄진다고 하니 광한루원을 찾은 연인이라면 이도령과 춘향의 사랑을 떠올리며 소원을 빌어 봐도 좋겠다.●요천 따라 산책로 양옆으로 벚꽃 활짝 광한루원을 나서면 맞은편 도로변에 활짝 핀 벚꽃이 장관이다. 남원 중심부를 흐르는 요천을 따라 숭사교에서 춘향교 부근까지 산책로 양옆으로 벚나무가 빽빽이 심겼다. 사방으로 풍성하게 뻗은 가지마다 핀 벚꽃이 연분홍 장막을 드리운다. 군밤, 솜사탕 등을 파는 노점이 즐비하고, 엿장수의 구성진 입담에 지나가던 어르신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벚꽃으로 물든 요천변과 광한루원 일대는 다음달 8일부터 12일까지 춘향제의 무대로 변신한다. 완월정 무대에서는 개막공연과 춘향선발대회, 춘향국악대전 등 공식행사가 펼쳐진다. 평소 출입이 제한되는 광한루각은 1년에 단 한 번 축제 기간 동안 개방된다. 이 밖에 명인·명창·명무들의 국악 향연과 전국에서 온 버스커들의 거리공연도 풍성하게 열린다.●춘향테마파크 지나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 요천 벚꽃길 남쪽의 춘향테마파크를 지나 춘향의 흔적에서 벗어나 본다. 춘향테마파크 남쪽 출구 부근에 옅은 회색의 깔끔한 외관이 인상적인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 서 있다. 지난해 3월 개관한 공립미술관으로 남원 출신 김병종 작가가 남원시에 기증한 컬렉션을 기반으로 문을 열었다. 입구로 들어서는 나지막한 오르막길 주위로 계단식 물의 정원이 조성돼 있다. 작품 감상에 앞서 잡념을 씻어 주는 듯하다. 1층에서는 김병종 작가의 상설전이, 2층에서는 기획전이 열린다. 약 2000권의 미술·문학·인문학 서적이 비치된 1층 북카페는 물의 정원을 바라보며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기에 제격이다.●몽심재, 조선 후기 상류 가정 가옥 형태 그대로 시내를 벗어나 ‘숨은 보석’을 찾아 떠난다. 차를 타고 남쪽으로 15분가량 가다 호곡삼거리를 지나면 몽심재에 다다른다. 내비게이션에서 검색이 되지 않는다면 ‘수지면 내호곡2길 19’로 주소를 입력하면 찾아갈 수 있다. 마을 입구 빨간 하트 모양 표지판이 ‘남원의 숨은 보석 10선 몽심재’라고 길을 안내한다. 몽심재는 조선 후기 전북 지방 상류 가정의 전형적인 가옥 형태를 고스란히 보존한 고택이다. 경사진 지형 위에 뒤로는 대나무숲을 두고 앞으로는 소나무가 병풍처럼 자란 낮은 언덕을 마주한다. 잿들에서 흘러내린 물이 마당 앞으로 흘러 연못을 이루고 배산임수의 명당을 완성시킨다. 솟을대문을 높게 세웠는데, 여인네들이 가마를 타고 마당 안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지은 것이라고 한다. 대문 오른편으로는 하인들이 기거하는 문간채가 있다. 문간채 앞으로는 거북 모양의 큼직한 바위가 놓여 있어서 사랑채가 바로 보이지 않는다. 하인들이 마음 놓고 쉴 수 있도록 배려한 조경이라고 한다. 가옥 중심에 있는 사랑채는 정교하게 쌓인 높은 축대 위에 자리해 고고하고 위엄 있는 인상을 준다. 사랑채 뒤편 안채에는 양편으로 다락이 있다. 다락방의 창을 열면 사랑채 지붕 너머로 집 앞 아미산의 눈썹 같은 능선이 내다보인다. 건물 주위를 둘러싸고 높낮이를 알맞게 조절해 완성한 배수시설에서는 몽심재의 세심한 건축기법을 엿볼 수 있다. 몽심재를 방문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곳에서 묵어갈 수 있다. 사랑채와 안채 등의 일곱 칸을 묵어가는 방문객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지리산 자락 구룡폭포·회덕마을도 가볼 만 이번에는 남원 동남쪽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간다. 내비게이션에 ‘구룡폭포 주차장’을 찍고 달리다 보면 어느새 경사가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길이 계속된다. 40분가량 달려 도착한 주차장에서 구룡폭포까지는 400여m. 가까운 거리지만 산길을 타고 가는 게 쉽지만은 않다. 산을 오르다 작고 가파른 계단 400여개를 내려가야 폭포를 만날 수 있다. 4월 초파일에 아홉 마리의 용이 내려와 놀다가 승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구룡폭포는 굽이쳐 흘러내리는 물살을 보면 그 전설에 왠지 수긍이 간다. 작지만 아찔한 출렁다리에서 폭포를 감상한 뒤 비폭동, 지주대, 유선대, 육모정으로 이어지는 절경을 둘러볼 수도 있다.구룡폭포 주자창에서 멀지 않은 곳에 회덕마을이라는 동네가 있다. 지리산 둘레길 상에 놓인 이 마을에는 아는 사람만 아는 오래된 샛집이 있다. 평범해 보이는 시골마을인 회덕마을 경로당 뒤편에 자리잡은 덕치리 초가는 1985년 박창규씨가 지은 것이 시초로, 6·25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가 1951년 재건했다. 억새풀로 지붕을 이은 샛집은 조선시대 일반가옥 형식을 따르고 있어 지리산 골짜기 마을의 시간이 멈춘 듯한 풍경을 느낄 수 있다.●신라 흥덕왕 때 창건한 천년고찰 실상사 마지막 목적지는 경남 함양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천년고찰 실상사다. 회덕마을에서 40여분 차를 달리면 닿는다. 신라 흥덕왕 때인 828년 증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실상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처음으로 문을 열었을 만큼 유서 깊다. 이곳에는 국보 제10호 백장암 3층석탑과 보물 제33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 등 1000년 넘는 세월을 견딘 유물이 가득하다. 막상 절 문턱을 넘으면 글로 쓰인 거창한 역사 대신 고즈넉한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지리산 자락 봉우리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한가운데 너른 평지에 자리잡아 부처님 품에 감싸인 듯한 안온한 느낌이 든다. 절 오른편에 조성된 크지 않은 대숲에서는 마음을 툭 내려놓고 바람이 움직이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글 사진 남원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여행수첩 전북투어패스를 이용하면 남원을 포함한 전북 여행을 더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즐길 수 있다. 광한루원, 춘향테마파크, 지리산허브밸리 등 남원의 유료 관광지를 여러 곳 방문할 계획이라면 전북투어패스를 사용하는 것이 저렴하다. 관광형 카드 기준 1일권 8300원, 2일권 1만 3900원, 3일권 1만 9900원 등이 있다. 전북 14개 시·군의 60여개 주요 관광시설에 해당 기간동안 제한 없이 입장할 수 있다. 교통형 카드 이용 시 시내버스, 공영주차장 무료 이용 등 혜택이 추가된다. 관광안내소 등 40개 판매점과 온라인에서 구매할 수 있다.
  • [열린세상] 기어코 일을 낸 한국인의 신기/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열린세상] 기어코 일을 낸 한국인의 신기/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

    방탄소년단(이하 방탄)이 심상치 않다. 한국 가수 최초 빌보드 200 1위, 빌보드 아티스트 100 1위 등이 그렇고,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TV 출연이나 각종 상 수여 등 기록이 차고도 넘친다. 그런데 방탄 같은 걸출한 인물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 정도의 인물이 나오려면 기반이 있어야 한다. 그 기반이라는 게 무엇일까? 그 세세한 설명은 대중음악 평론가들에게 맡기고 여기서는 한국 문화라는 전체적 시각에서 보려고 한다.방탄은 전형적인 한류 현상이다. 한류는 한국 문화의 한 지류다. 따라서 한류는 한국 문화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류는 한국인이 단군 이래 최초로 전 세계에 한국 문화를 수출한 사건을 말한다. 생각해 보자. 한민족 수천 년 역사 동안 한국인들이 전 세계를 상대로 한국 문화를 수출한 적이 있었는지 말이다. 있었다면 천수백 년 전에 일본에 이주한 조상들이 일본인들에게 전해 준 다양한 문화가 유일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부터 한류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 무엇일까? 대중문화 전문가들은 여기에 수많은 요인을 나열한다. 예를 들어 음악의 경우에 스카우팅이나 오디션으로 선발된 특정 공정을 거쳐 만들어졌다든지, 만들 때부터 국제화를 고려한 전략적 접근을 했다느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가장 중요한 요인을 놓치고 있다. 한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자국민, 즉 한국인들이 노래와 드라마를 너무도 사랑하고 즐겼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어떤 문화가 수출될 때 자국민들이 먼저 그것을 향유하지 않으면 실패하고 만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철칙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본인들이 즐기지 않는 것을 다른 나라 사람들이 즐기겠는가? 이것이 이른바 냄비 이론이다. 냄비에 음식을 넣고 끓일 때 열이 과하면 바깥으로 넘친다. 한류도 이런 식으로 외국으로 퍼진 것이다. 한국인들이 노래와 드라마를 지독히도 좋아했기에 그 열기가 자연스럽게 이웃 나라로 전해진 것이다. 한국인들이 음악을 좋아하는 모습은 3세기경에 쓰인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나온다. 고구려나 부여에서는 길을 가면서도 노래를 하고 일이 끝나면 저녁에 모여 노래를 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신라에서는 ‘처용가’처럼 귀신을 쫓을 때에도 노래를 했고, 왜군을 물리칠 때에도 향가를 지어 불렀다. 이런 노래 사랑 정신은 고스란히 현대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노래방이다. 1990년대 초에 한국에 소개된 노래방 기계는 1년도 안 돼 한반도를 뒤덮었다. 관광버스도 이 기계가 없는 차가 없다(그런데 이것은 모두 불법이다). 그래서 나온 게 관광버스 춤이다. 얼마나 신명이 많으면 달리는 버스에서 가무를 하는가? 또 지금은 조금 시들해졌지만 라디오 노래방도 기승을 부렸다. 대학생들도 MT를 가면 시작부터 끝까지 음주가무와 게임만 한다. 먹고 마시고 노는 데는 한국인을 따라갈 민족이 없다(인터넷 게임도 최강 아닌가?). 그래서 나는 한국인들의 이러한 기운을 신기(神氣)라고 명명했고, 이 기운에 관한 한 한국인은 세계 최고라고 했다. 이렇게 전 국민이 먹고 마시고 노래하다 보니 싸이도 나오고 방탄도 나오는 거다. 싸이가 갑자기 전 세계적인 조명을 받을 때 사람들은 ‘뭐 저러다 말겠지. 어떻게 싸이 같은 물건이 한국에 또 나오겠어?’라고 했다. 그때 나는 ‘아니 분명히 또 걸출한 가수가 나온다. 한국인의 신기가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다가 방탄이 나온 거다. 그래서 나는 진작부터 한국인들은 노래와 춤으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 신기의 문화를 더 키워야 한다. 여기에는 음악과 드라마만 있는 게 아니다. 한국인들은 가만히 앉아서 따지는 것은 능하지 않다. 그래서 세계적인 인문학자나 걸출한 문호가 나오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대신 감각적인 예술은 대단히 뛰어난 민족이다. 순수 예술뿐만 아니라 디자인 등에서 한국인들은 앞으로 단연 두각을 나타낼 것이다.
  • 7세기에 숨진 건장한 남성 노인의 뼈…서동요 무왕, 쌍릉 대왕릉 주인 가능성

    7세기에 숨진 건장한 남성 노인의 뼈…서동요 무왕, 쌍릉 대왕릉 주인 가능성

    “당시 사망한 백제왕은 무왕밖에 없어” 기존 여성 치아 발견 등 주장 뒤집어 “소왕릉 주인은 선화공주?” 추가 조사백제시대 왕릉급 무덤인 전북 익산 쌍릉(사적 87호) 대왕릉에 묻힌 주인공이 백제 제30대 임금 무왕(재위 600~641)일 가능성이 커졌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 4월 익산 쌍릉 대왕릉 내부에서 발견한 인골을 분석한 결과 “최소 50대에서 60~70대 남성으로 키는 161~170.1㎝이며 620~659년에 사망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대왕릉과 소왕릉으로 구성된 쌍릉은 향가 ‘서동요’의 배경 설화인 서동설화의 주인공 백제 무왕과 그의 부인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여겨져왔다. 이번 분석 결과를 토대로 대왕릉 피장자의 정체를 무왕으로 본 통설에 힘이 실리게 된 셈이다. 이상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은 “정강뼈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사망연도로 산출된 620~659년 사이에 사망한 백제 왕은 무왕밖에 없다”면서 “그 외에도 무덤 구조와 규모, 유물의 품격, 당시 시대상황 등을 고려했을 때 대왕릉의 주인이 무왕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무왕의 출생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600년에 즉위해 641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연구소는 대왕릉의 주인을 파악하기 위해 고고학과 법의인류학, 유전학, 생화학, 암석학 등 관련 전문가들을 총동원해 인골을 분석했다. 인골함에서 확인된 인골은 모두 102개로, 겹치는 뼈조각이 없어 모두 한 개체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법의인류학 분석을 맡은 가톨릭의대 응용해부연구소의 견해다. 이우영 가톨릭의대 교수는 “팔꿈치 뼈의 각도, 목말뼈의 크기, 넙다리뼈 무릎 부위의 너비 등으로 봤을 때 성별은 남성일 확률이 높다”면서 “넙다리뼈의 최대 길이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키를 추정한 결과 약 161~170.1㎝로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인골의 주인보다 훨씬 후대인 19세기 성인 남성의 평균 키가 161.1㎝인 점을 고려하면 비교적 건장한 편이다. 삼국사기에서 무왕을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고 묘사한 부분과 일부 들어맞는다. 나이는 최소 50대에서 60~70대 노년층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는 분석이다. 이 교수는 “목 갑상연골에 골화(骨化)가 많이 진행됐고, 골반뼈 결합면의 표면에 거칠고 작은 구멍이 많다”면서 “남성 노년층에서 발병하는 등과 허리가 굳는 증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앞서 2016년 국립전주박물관이 일제강점기 쌍릉 조사 당시 대왕릉에서 수습한 유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찾은 치아 4점을 분석한 결과 20~40세 여성의 것이고, 무덤 내부에서 신라 토기가 출토됐다는 결과를 공개하면서 일각에서 대왕릉의 피장자가 무왕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번 인골 분류 과정에서 추가로 발견한 치아 2점에 대해 이 교수는 “전주박물관이 당시 의견서에 치아만으로 성별을 구별하고 나이를 추정하는 것은 어려운 작업임을 밝혔다”면서 “유골과 치아를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결과를 확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대왕릉과 180m 떨어진 소왕릉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앞으로 밝혀야 할 과제로 남았다. 이 소장은 “현재는 대왕릉 조사에 집중하고 소왕릉 발굴은 내년부터 추진할 예정”이라면서 “소왕릉에서 인골 등 피장자를 추측할 수 있는 자료가 나오면 향후 대왕릉 피장자와의 관계를 규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광복 후 유명 역사학자들 월북·납북… 남한은 식민사학자들 장악

    [이덕일의 새롭게 보는 역사] 광복 후 유명 역사학자들 월북·납북… 남한은 식민사학자들 장악

    북한의 역사학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먼저 아래 글을 보자.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에 성공하자 그들의 소위 역사학자들은 조선역사에 대해서 이상한 관심을 보였다… 그들이 입증한 사실의 가장 중요한 것이란 과연 어떠한 것들인가? 첫째 서기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약 500년 동안 오늘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漢)나라 식민지인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것이요, 둘째 신라·백제와 함께 남조선을 분거하고 있던 가라가 본래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요….” ‘조선’만 ‘한국’으로 바꾸면 아직도 한국 사학계가 일제 식민사학을 추종한다고 비판하기 위해 엊그제 쓴 글 같다. 그러나 이 글은 ‘임꺽정’(林巨正)의 저자인 벽초 홍명희의 아들 홍기문이 1949년에 쓴 ‘조선의 고고학에 대한 일제 어용학설의 검토(상·하)’라는 글의 일부다. 윗글은 일제의 식민사학이 두 축으로 되어 있다고 분석한 글이다. 하나는 낙랑군이 서기전 108년부터 서기 313년까지 500여 년간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평양설’이고, 다른 하나는 가야가 임나라고 주장하는 ‘가야=임나설’이다.홍명희는 1948년 4월 백범 김구와 함께 ‘전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협상)’ 참석차 방북했다가 내려오지 않은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였다. 아들 홍기문도 훈민정음과 향가 및 이두(吏讀) 등에 정통한 국어학자였는데, 홍씨 부자는 국어뿐만 아니라 국사에도 해박했다. 정상적인 학자들이라면 국어와 국사는 떨어질 수 없다.●北은 ‘낙랑=평양설’ 1949년 이미 비판 홍기문이 1949년에 이미 ‘낙랑=평양설’을 비판한 것은 남한 학계에서 ‘낙랑=평양설’이 100년 전에 논증이 끝난 ‘정설’이라고 우기는 것과 잘 대비된다. 더구나 이때는 김일성 일가 중심의 주체사관이 등장하기도 전이었다. 그런데 이런 글들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었다. 북한이 역사학을 남북한 체제 경쟁의 주요한 요소로 설정한 데서 나온 글들이기 때문이다.1945년 10월 10~13일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이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김일성은 박헌영이 당수인 조선공산당에서 북한 지역을 떼어 독립하겠다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주장했다. 오기섭, 정달현 등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한 나라에는 하나의 공산당만 존재한다’는 코민테른(제3국제 공산당)의 ‘1국1당주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반대했지만 소련 군정이 지지하는 김일성의 주장이 관철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같은 해 10월 2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치되었다. 이 대회에서 북한을 먼저 사회주의 체제로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남한까지 사회주의화하겠다는 이른바 ‘민주기지론’을 채택한 것은 ‘북조선분국’ 설치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북한에 먼저 사회주의 체제를 수립하고 남한과 체제 경쟁에 나서 통일하겠다는 의미였다. 북한은 이때 역사학을 체제 경쟁의 중요한 요소로 여겼다. ●南선 식민사관을 정설 인정 비난 자초 1946년 7월 31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김일성은 남한에 파견원을 보내 유수한 역사학자들을 초청했다. 박시형·김석형·전석담 같은 마르크시스트 역사학자들이 김일성의 초청에 응해 월북했다. 이외에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였던 역사학자 백남운도 1947년 5월 여운형 등과 근로인민당을 결성해 부위원장을 역임하다가 월북했다. 식민사관에 비판적인 남한의 역사학자 중에서는 국학대학 학장 정인보와 안재홍 등 소수만 남게 되었다. 그나마 이들도 6·25전쟁 때 모두 납북되고 말았다. 그 결과 남한에는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이병도·신석호 등만 남아서 역사학계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들이 북한의 학자들처럼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역사학에 의문을 품고 광복된 조국에 맞는 새로운 역사학 연구 기풍을 일으켰다면 지금 남한의 역사학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북한이 남한을 식민지 등으로 폄하하는 논리가 궁색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병도·신석호 등은 조선총독부에서 조작한 역사학을 하나뿐인 ‘정설’로 승격시키고 이를 비판하는 모든 학설을 이단으로 몰아 강단과 국사관련 국가기관에서 내쫓았다. 그 결과 조선총독부가 왜곡한 ‘낙랑군=평양설’이 이미 100년 전에 확립된 ‘정설’이라는 망발이 지금까지 횡행하면서 남한 사학계는 여전히 조선총독부를 추종한다는 비난을 자초하게 된 것이다. ●패수, 신채호 “요령성에” 이병도 “청천강” 북한은 1947년 2월 17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내에 ‘조선력사편찬위원회’(이하 위원회)를 설립했다. 위원회는 “가장 과학적이고 선진적인 사상에 의거해서 조선민족의 장구한 역사를 고대부터 오늘날까지 옳게 표현”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고대부터 오늘날까지’라는 연속성은 역사학의 가장 기초이다. 그러나 남한은 이른바 전공이란 칸막이로 역사학과 다른 학문을 단절시키고, 역사학 내에서도 각각의 전공으로 서로 단절시켜서 ‘전공이 아니라서…’를 입에 달고 사는 분절적 역사학자들만 양산했다. 위원회의 위원장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투옥되었던 이청원이 맡았다. 이청원은 최익한의 사위였는데, 최익한은 조선 말기 영남 유림의 거두이자 파리장서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곽종석의 제자이자 사회주의자였고 1938년부터 ‘동아일보’에 ‘여유당전서를 독(讀)함’을 연재했던 다산 정약용 전문가였다. 위원회는 1948년 10월 2일 관할 기관을 교육성으로 이관했는데, 위원장은 교육상(敎育相: 교육부 장관) 백남운이 겸임했다. 위원회에는 백남운·박시형·김석형·김광진 등의 역사학자와 도유호 같은 고고학자뿐만 아니라 홍명희·한설야·리기영 등의 문학가들과 최창익 등의 정치가들도 참여했다. 그야말로 범국가적인 위원회였다. 이 위원회의 기관지가 앞의 홍기문의 글을 실은 ‘력사제문제’(歷史諸問題)였다. ‘력사제문제’는 1948년부터 1950년 6·25전쟁 직전까지 만 2년이란 짧은 기간에 18집이나 간행되었다. 고대사에 관한 여러 논문이 실렸는데, 그중 하나가 정세호가 1950년 ‘력사제문제’ 16호에 실은 ‘고조선의 위치에 대한 일고찰’이고, 또 하나가 17호에 실은 정현의 ‘한사군고’(漢四郡考)다. 정세호와 정현의 논리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고조선의 서쪽 강역이 지금의 북경 부근까지 이르렀다가 연(燕)나라 장수 진개(秦開)에게 1000~2000리의 땅을 빼앗긴 이후 지금의 대릉하와 요하 사이까지 밀렸다고 보고 있다. 한사군도 당연히 한반도 북부가 아니라 요동 지역에 있었다고 보았다. 남한에서 고조선의 강역을 평안남도에 국한했던 것에 비교하면 큰 차이였다. 이런 역사인식은 다분히 단재 신채호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였던 패수(浿水)의 위치에 대해서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은 압록강(쓰다 소키치)·청천강(이병도)·대동강(이나바 이와기치) 등 한반도 내의 강으로 비정했지만 정세호와 정현은 지금의 요하(遼河) 부근으로 비정했다. 그것도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1000~2000여리의 땅을 빼앗겨 축소된 이후의 패수가 그렇다는 것이었다. 신채호는 패수의 위치를 지금의 요령성 해성(海城)시로 비정했는데, 정현은 ‘한사군고’에서 “(신채호는) 패수를 지금 해성현에 있는 헌우락(軒芋樂)이라고 했는데, 참으로 탁월한 고찰 방법이다”고 높였다. ●신채호를 北 “탁월한 고찰” 南 “또라이” 패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남한에서는 지지난 정권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진흥사업단장으로 연간 300억원대의 예산을 주무르던 한 역사학자가 공개 학술대회 석상에서 “단재 신채호는 세 자로 말하면 또라이, 네 자로 말하면 정신병자”라고 폄하했다. 신채호의 학설을 ‘참으로 탁월한 고찰’이라고 보는 북한학계와 ‘또라이, 정신병자’로 보는 남한학계 사이의 괴리는 클 수밖에 없다. 더구나 북한 학계는 1960년대 초반까지 고조선의 중심지와 낙랑군의 위치를 고대 요동으로 보는 리지린 등의 문헌사학자들과 평양으로 보는 도유호 등의 고고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을 거치며 학설을 정리해 나갔다. 일체의 논쟁을 봉쇄하고 ‘낙랑군=평양설’이 ‘정설’이라는 따위의 비학문적 논리로 문제제기 자체를 막았던 남한 역사학의 행보와는 달랐다.(계속) 中 국공 내전 때 학자 쟁탈전…대만, 지식인들 학문 기반으로 대륙과 겨뤄 중국의 국공 내전 때 국민, 공산 양당은 문화재 쟁탈전만 전개한 것이 아니라 역사학자 쟁탈전도 전개했다. 1948년 12월 북경에서 이륙한 국민당 비행기에는 북경대 총장을 역임한 호적(胡適)과 청화대 역사학과 교수 진인각(陳寅恪) 등이 타고 있었다. 유수한 학자들을 대만으로 이송하는 ‘학자 이송’의 서막이었다. 그러나 비행기가 남경에 기착하자 진인각은 대륙을 선택해 내렸고, 호적은 대만으로 갔다. 다수의 학자가 대륙을 선택했지만 북경대 총장대리를 역임했던 부사년(傅斯年)도 대만을 선택했다. 부사년, 호적 등은 국립 대만대와 중앙연구원(中央研究院) 등을 세계적인 연구기관으로 성장시켰다. 현 중화민국(대만)이 그 협소한 영토에도 대륙과 정신적으로 당당히 겨룰 수 있는 원천이 대만을 선택한 지식인들이 만든 학문에 있었다.
  • [석가탄신일 특집] 남해 보리암 능원 주지스님 “모든 이의 간절함 끌어안는 관음보살 품”

    [석가탄신일 특집] 남해 보리암 능원 주지스님 “모든 이의 간절함 끌어안는 관음보살 품”

    어려운 경제 상황,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 일…. 세상살이가 팍팍할수록 유명한 기도처에는 사람들이 몰린다. 관세음보살은 그들의 기도를 듣는 보살이다. 그래서 관음보살은 어머니의 이미지로 많이 표현된다. 들어주고 위로해주며 기댈 수 있는 품을 내어준다는 뜻일 테다. 경남 남해군 금산의 남쪽 봉우리 정상, 해발고도 681m 절벽 위에 국내 3대 관음성지로 불리는 보리암이 있다. 이곳에서 기도하면 한 번은 소원을 성취한다고 알려진 기도처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하면서 관음보살을 친견한 뒤 이 산에 보광사(普光寺)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에 따라 산도 보광산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이성계가 이 산에서 백일기도 후 조선을 개국한 뒤 그 영험에 감사하는 의미로 금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었다는 뜻이다. 후에 현종은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보리암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인접한 곳까지 차를 몰고 들어갈 수 있지만, 귀가 멍해지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높은 길을 오르다 보면 다른 세상으로 들어서는 기분이 든다. 소금강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산의 모습과 그에 맞닿아 펼쳐진 남해 바다를 보노라면 마음이 먼저 편안해진다. 산의 정상에 가까운 곳인데도 산죽이 속세의 번뇌를 차단하듯 신비롭게 보리암을 둘러싸고 있다. 저마다의 소원을 가지고 보리암에 오른 이들을 맞이해 온 능원 주지스님은 “종교와도 상관없이 오는 분들 누구나 마음의 평안을 얻고, 그 마음을 삶의 현장에 가지고 나가셔서 오래 유지하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 능원 스님은 “보리암의 스님들도 관세음보살님처럼 어머니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보리암은 기도하기 위해 찾아오는 신자들 외에 지역 사회의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도 앞장서 왔다. 매년 5000만원 넘는 장학금을 내놓고, 각종 시설과 어려운 이웃에게 직접 나눔을 실천한다. 관음보살의 마음을 나누는 보리암을 찾아 능원 스님에게 대화를 청했다. 보리암의 영험함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기도의 참의미와 현대사회를 향한 조언으로까지 이어졌다.→보리암은 환경부터 참 신비로운 느낌입니다. 원효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태조 이성계가 기도한 곳으로 유명한데, 또 다른 이야기가 더 있습니까. -이성계가 기도했다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만, 사실은 금산 곳곳에서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특히 보리암 법당과 산신각이 있는 축에서 주로 기도를 하셨을 거라고 많은 사람이 말합니다. 이 금산 중에서도 보리암이 있는 여기가 중심이고 핵심이라고 하거든요. 또 보리암에서 30㎞ 정도 바다로 나가면 ‘세존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다녀가셨다고 하는 섬입니다. 부처님이 금산에 오셨다가 여기서 돌을 떼서 배를 만들어 세존도로 지나갔다고 전해집니다. →그만큼 오랜 세월 영험한 기도처로 여겨졌다는 뜻일 것 같습니다. -사실 금산이 좁은 산인데도 바위 밑이나 굴에 보면 옛날 스님들이 수행하시던 터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토굴도 곳곳에 많은데 지금은 헐었어도 흔적은 남아있습니다. 수행이라고 거창하게 말하지 않더라도 그런 바위 밑이나 굴에 한 번 들어가 앉아보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것이 있어요. 금산은 그런 종교적인 체험, 기도체험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이 모이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죠. 사람들이 얼마나 다녀갑니까.-주말 이틀이면 1만 명 넘게 다녀갑니다. 평일에도 하루 2000명 남짓 오셔서 기도를 하시고요. 이곳이 일출 명소이기도 해서 1월 1일엔 7000명 정도가 옵니다. 공간이 넓지 않아서 해를 볼 수 있도록 서 봐야 3000명이면 꽉 차 보이는데, 해돋이 인파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이지요. 새해가 시작되면 개인이나 국가가 잘되길 바라는 염원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습니까. 그 마음들이 모이는 겁니다. 이 깊은 산속에 빼곡하게 선 사람들이 떠오르는 해를 함께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거룩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난해 말 종교 인구 통계 조사에서 불교 인구가 많이 감소한 것으로 나왔는데 이곳에선 그런 걸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작년에 비해서 더 많이 오고 있어요. →기도하는 분들을 많이 지켜보셨을 텐데, 소원을 비는 이들에게 좋은 기도방법을 알려주신다면. -제가 지켜보니, 기도하러 오시는 분들의 말씀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보리암에 와서 기도하면 한 가지는 꼭 들어준다더라’ 였습니다. 그다음엔 ‘한 가지는 꼭 들어주시는데, 나를 위한 기도를 하면 안 되고 남을 위한 기도여야 한다더라’라고 말이 바뀌었어요. 요즘에는 ‘보리암 관세음보살님은 누구나 차별 없이, 종교와도 관계없이 소원을 들어주신다’라고요. 종종 이런 얘기를 합니다. ‘기도를 할 때 내 기도가 이뤄지는 건, 다른 사람들의 수많은 기도와 정성이 오늘 내 기도를 이뤄줍니다. 오늘 내 기도도 나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열심히 정성을 다하면 그 기도가 다른 사람의 소원을 이뤄줄 겁니다. →보리암 관음보살님은 종교와 관계없이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말이 있다고 하셨는데, 다른 종교를 가진 분들이 오신다면 어떤 자세를 갖는 것이 좋겠습니까. -소원을 털어놓고 남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은 종교를 초월해 중요한 마음 같아요. 종교가 다른 분들은 오셔도 법당엔 안 들어가시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그럴 때 ‘부처님은 존경할 만한 어른이다’라고 말씀드려요. 저도 교회나 성당에 갈 때가 있는데, 예배당에 가면 십자가 앞에 나가서 합장으로 예를 갖춥니다. 제 나름대로 존경의 표시를 하는 것이지요. 법당처럼 예배당도 성전이고 예수님 또한 존경할 만한 어른이기 때문입니다. →차별 없는 보살핌, 남을 위한 기도 등의 말씀은 갈등이 심한 현대사회에 꼭 필요한 교훈인 것 같습니다.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해법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제가 어떤 하나의 방법만을 전하기엔 어려운 내용입니다만, 신라 말기 충담사가 지은 향가 ‘안민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라를 평화롭고 안정되게 이끌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지요. 우리 또한 각자 다 역할과 위치에 충실하면 됩니다. 대통령답게, 국회의원답게, 장관답게 말이지요. 갈등은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행실로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당하면서 생겨납니다. →보리암이 지역사회의 어려운 이들을 돕고 있는 것도 그 ‘역할’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군요. -전국적으로 유명한 기도처라고 하지만, 지역사회에서 지역민들과 함께하지 않으면 사찰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긴 어렵습니다. 마땅한 역할을 해야지요. 그런데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일을 하다 보니, 베푸는 일에도 배려가 필요하다는 걸 많이 느낍니다. 누군가에게는 그 도움이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거예요. 세심하게 배려하며 그들과 함께 호흡하려고 합니다. →기도하러 오시는 분들 중에도 뭔가 절박한 분들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직접 스님을 뵙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절에 있는 시간이라면, 사람을 피하거나 안 만나지는 않습니다. 우리 신도가 만나자고 하면 꼭 만나고, 모르는 분들이라도 신분만 정확히 밝혀주시면 만납니다. 만나서 주로 이야기를 듣지요. 차 한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것만으로도 그분들에게 힘이 되나 봅니다. 관세음보살님을 어머니에 많이 비유를 합니다. 보리암은 관세음보살님이 상주하는 도량인데, 그렇다면 이곳 스님들도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 출가를 하신 계기가 있었습니까. -저는 출가의 계기나 출가 이전의 얘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물어봐도 답을 안 해요. 자꾸 과장이 되더라고요. 자세한 말씀은 드리기 어렵습니다만 저도 나름대로 절박한 것이 있었지요. 그때는 니체와 사르트르 책들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보리암을 찾는 분들, 그리고 각자의 삶에서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있는 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직접 도와드릴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 오시는 분들이 편하게 기도하고 참배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겠지요. 보리암에 오시는 것만으로도, 금산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평안을 얻으신다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법문을 듣는 게 아니라고 해도 이곳에서 바다를 보며 깨달아지는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부디 그 기도하는 마음, 수행자의 마음을 삶의 현장에 돌아가서도 잘 유지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분이 지친 마음에 평안을 얻고, 우리 서로가 상대와의 ‘다름’을 인정하면 좋겠습니다. 동시에 서로 같은 부분, 즉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하고요. 서로가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갈등을 넘어 화합할 수 있습니다. 정태기 객원기자 jtk3355@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백제 미륵사터 석탑, 신라 선화공주 덕에 살아남았다?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백제 미륵사터 석탑, 신라 선화공주 덕에 살아남았다?

    오늘은 좀 엉뚱해 보일지도 모를 상상을 하나 해보려 한다. 선화공주와 서동, 곧 백제 무왕(재위 600~641)에 얽힌 설화를 떠올려 본다. 무왕이 향가 ‘서동요’를 지어 신라의 선화공주를 왕비로 맞았다는 ‘삼국유사’ 내용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선화공주 설화는 2009년 익산 미륵사터 서탑에서 사리장엄구가 출토되면서 결정적 위기를 맞는다. ‘탑을 발원한 무왕의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발원문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선화공주 설화는 우리 문화사를 풍요롭게 하는데 단단히 한몫을 했다. 그런데 희대의 거짓말로 판명되며 하루아침에 없었던 일이 되어버릴 판이었다. 고고학적 증거에 할 말을 잊었던 학계는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는 ‘그렇다고 선화공주 설화가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는 아니다’는 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사택적덕의 딸은 선화공주 사후 간택된 계비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파괴되지 않고 아직 남아있는 백제 석탑은 세 개뿐 이야기를 익산 미륵사 탑에서 부여 정림사 탑으로 돌려본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백제시대 석탑은 정림사 오층석탑과 미륵사 서탑, 그리고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뿐이다. 왕궁리 석탑의 경우, ‘백제 석탑의 영향을 받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알려지다 최근에야 백제 석탑으로 공인받기 시작했다. 극소수 백제 석탑만이 남아 있다는 것은 의도적 파괴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사비, 곧 오늘날의 부여는 나당연합군에 점령된 이후 흔적을 찾기 어려울 만큼 철저하게 파괴됐다. 그런데 도성 중심에 정림사터 오층석탑만이 유일하다시피 제모습을 유지하며 남아 있으니 매우 이례적이다. 이 탑에는 잘 알려진 것처럼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이른바 ‘평제비문’(平濟碑文)이 새겨져 있다. 사실상 백제 주민들에게 ‘반역을 꿈꾸지 말라’는 경고문이다. 이 같은 정치적 메시지가 담겨 있지 않았다면 정림사탑도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정림사터는 백제시대나 지금이나 부여 시가지의 한복판이다. 성왕은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내부를 중앙과 동·서·남·북의 5부로 가르고 주거지를 조성했다. 성왕의 도시 계획에는 사찰도 포함됐는데, 정림사는 사비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았다. 소정방이 백제인들에게 정치적인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정림사탑을 선택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렇게 정림사 탑에는 백제의 멸망과 통일신라의 옛 백제 땅 통치에 따른 정치적 상징성이 일찌감치 부여됐다. 백제계 주민들에게 정림사 탑이란 곧 멸망한 왕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상징물이나 다름없었다. 새로운 통치자에게 정림사 탑이란 백제계 주민들에게 반정부 의식을 일깨우는 불온한 상징물이었다. 정림사 탑의 정치적 성격은 이후의 이른바 백제계 석탑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오늘날 백제계라 부르는 석탑은 부여 장하리 삼층석탑과 서천 비인 오층석탑,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 강진 월남사터 삼층석탑 등 10개 남짓 남아 있다. 백제의 옛 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도 한결같이 통일신라 시대가 아닌 후삼국 시대 이후 세워졌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후삼국 시대 백제계 석탑이란 유행이 수백년이나 지난 ‘구식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시대 백제계 석탑 건립은 곧 ‘반국가 활동’ 역사학계는 통일신라의 옛 백제땅에 대한 지배정책이 매우 완고하여, 백제계 석탑의 건립조차 불온시되는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불국토(佛國土)를 표방한 통일신라에서 석탑이 갖는 대중적 영향력은 엄청났을 것이다. 그런 마당에 백제계 석탑을 세우는 것은 백제계 주민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반국가 활동’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백제 시대 익산의 위상이 아직 뚜렷하게 밝혀지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의 존재 등으로 미루어 도읍에 버금가는 중요성이 있는 도시였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나당연합군, 그리고 이후 통일신라 점령군은 익산의 백제 관련 흔적 역시 부여처럼 남김없이 지우려 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미륵사터 석탑은 백제 멸망 이후에도 건재했다. 아마도 백제 왕궁의 수호 사찰에 세워졌을 왕궁리 석탑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탑 모두 정림사 탑에 버금가거나, 오히려 정림사 탑을 뛰어넘는 정치적 상징성이 담겨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정치적 상징성이 선화공주와 연관될 수도 있다고 본다. 신라군이 신라 공주가 발원했다는 사실이 당시에도 널리 알려졌을 미륵사와 왕궁리 절을 파괴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dcsuh@seoul.co.kr
  • [新국토기행] 춘향의 고장 남원… 광한루엔 연인들의 ‘사랑가’ 한 자락

    [新국토기행] 춘향의 고장 남원… 광한루엔 연인들의 ‘사랑가’ 한 자락

    전북 남원시는 예로부터 ‘천부지지 옥야백리’(天府之地 沃野百里)라고 했다. 천부지지는 하늘이 고을을 정해준 땅이라는 뜻이고 옥야백리는 넓고 비옥한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다는 의미다. 살기 좋은 곳으로 유명했던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전북 5소경의 하나로, 고려시대는 남원부로, 조선시대에는 남원도호부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아우르는 중요한 위치였다. 전북의 동남권으로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동으로는 경남 하동, 남으로는 전남 구례, 북동부는 경남 함양과 인접해 있다. 춘향전의 무대로 역사의 숨결이 담긴 문화유산이 풍부하고 먹거리도 풍성하다.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을 끼고 있어 경관이 수려하다. 신명 나는 우리 가락 동편제의 본향이기도 하다. 현재 행정구역은 23개 읍·면·동(1읍 15면 7동)으로 구성돼 있고 인구는 8만 5000명이다. 볼거리 ●남한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지리산 지리산은 남한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산이다.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됐다. 해발 1915.4m의 천황봉을 중심으로 총면적이 440.4㎢이다. 능선의 길이가 동서로 40㎞에 이르는 거대한 산악군을 형성한다. 높이 1500m 이상 봉우리가 18개, 1000m 이상 봉우리는 40개나 된다. 큰 산줄기는 15개, 아름다운 골짜기가 20여개다.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피아골, 뱀사골, 칠선, 한신 등 4대 계곡은 저마다의 특색을 자랑한다. 국보와 보물을 간직한 대사찰과 수많은 암자가 지리산 자락에 안겨 있다. 화엄사, 쌍계사, 연곡사, 실상사 등 대사찰을 비롯해 많은 암자가 남아 있다. 문화재는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국보 12호)을 비롯한 국보 8점, 보물 56점이 있다. 800여종의 식물이 분포하고 400여종의 동물이 서식한다. 천연기념물은 반달가슴곰(329호), 수달(330호), 하늘다람쥐(328호) 등이다. 지리산의 절경은 필설로 다하기 힘들다. 무수히 많은 비경이 사시사철 펼쳐진다. 지리산 둘레길은 3개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전북 남원시, 경남 함양·산청·하동군, 전남 구례군)에 걸쳐 있는 274㎞의 장거리 도보길이다. 정겨운 숲길, 논두렁길, 마을길을 환형으로 연결한다. 남원시에는 둘레길의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4개 구간이 있다. ●춘향전 배경·한국 대표 누각 광한루원 남원은 춘향의 고향이자 춘향전의 발상지다. 광한루원은 춘향전의 배경이 된 조선시대 대표적인 정원이다. 명승 제33호. 경회루, 촉석루,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누각에 들어갈 만큼 만듦새가 뛰어나다. 우리 선조들이 자연을 닮고자 하는 생각을 표현해 낸 정원으로 신선이 사는 이상향을 지상에 건설했다. 하늘나라 월궁을 광한루라 했고 그 아래 천상의 은하수를 상징하는 호수와 오작교를 놓았다. 오작교는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깃든 아름다운 돌다리다. 이곳에서 사랑을 약속하면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와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유명하다. 신선들이 산다는 전설 속의 삼신산을 연못 가운데 조성했다. 전체적인 구성이 천체우주를 상징한다. 인간이 천상의 세계를 꿈꾸며 달나라를 즐기려고 지었다는 완월정을 비롯해 춘향사당, 춘향관, 월매집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그네 등 전통놀이 체험장도 다양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남원 상징물·위락시설 모인 관광단지 한국관광공사가 남원의 모든 상징물과 위락시설을 모아 놓은 종합관광단지다. 남원시 어현동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춘향전과 관련된 춘향테마파크, 춘향문화예술회관, 국립민속국악원, 남원향토박물관 등 문화시설이 들어서 있다. 춘향테마파크는 춘향전의 스토리를 따라 5개의 장으로 꾸몄다.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곳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전’ 세트장도 이곳에 있다. 단심정에서는 남원시를 모두 조망할 수 있다. 숙박업소와 음식점도 잘 갖춰져 있다. ●천년 고찰 실상사와 중요 역사 유적들 남원은 역사를 품 안에 가득 채울 수 있는 여행이 가능한 지역이다.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민족정신이 응집된 역사의 고장이다. 천년 고찰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창건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선종 사찰이다.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제10호)을 비롯한 국가지정 문화재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만인의총은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1만명의 넋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비와 피바위, 유구한 세월을 버티며 그 옛날 영화를 말해주려 하는 만복사지는 빼놓지 말아야 할 유적이다. 이 밖에도 용담사 석불입상, 대복사 동종, 선원사 칠조여래좌상 등 많은 유적이 보존돼 있다. ●정겨운 우리 가락 울리는 동편제 본향 우리 가락과 관련된 볼거리도 풍부하다. ‘남원 가서 소리 자랑하지 말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남원은 국악을 낳고 소리를 키운 고장이기 때문이다. 춘향가, 흥부가 등 판소리 동편제 본향으로 국악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보고 즐길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악성 옥보고는 지리산에서 거문고를 완성했다. 조선시대 가왕 칭호를 받은 송흥록의 생가도 보존돼 있다. 송흥록은 민속음악 가운데 가장 느린 진양조를 응용해 극적이면서 예술적인 판소리를 완성했다. 지방무형문화재 류명철씨의 전라좌도 남원농악관과 국립민속국악원이 있어 어딜 가나 정겨운 우리 가락과 풍류를 즐길 수 있다. 최명희의 장편 소설 ‘혼불’의 배경이 된 남원시 사매면 ‘혼불문학관’도 문학기행 코스다. 남원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먹거리 ●‘가을 보양식 으뜸’ 얼큰 구수한 추어탕 남원 먹거리의 으뜸은 추어탕이다. 광한루원 주변에 추어탕거리가 형성될 정도로 유명한 토속 음식이다. 남원 추어탕이 유명한 것은 섬진강 지류인 요천 등 청정 하천 곳곳에서 미꾸라지가 많이 잡혔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추수가 끝나면 통통하게 살이 오른 미꾸라지를 잡아 시래기와 토란대를 넣고 끓여 먹은 전통음식이다. 추어탕을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새집’ 등이 각기 다른 조리법과 맛을 보여준다. 추어탕은 가을 미꾸라지를 최고로 친다. 미꾸라지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가을이면 몸속에 영양분을 가득 저장하기 때문이다. 여름 더위에 지친 원기를 회복시켜 주고 추운 겨울을 든든하게 버틸 힘을 주는 보양식으로 통한다. 남원 추어탕은 미꾸라지와 시래기 등으로만 시원하고 구수한 맛을 낸다. 된장, 들깨 불린 물, 다진 양념을 넣어 걸쭉하게 끓인다. 미꾸라지는 길이가 짧고 몸통이 동글동글한 ‘동글이’를 고집한다. 맛이 좋고 비린내가 적다. 지리산 고랭지에서 재배되는 추어탕 전용 무청도 남원 추어탕의 맛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입맛에 따라 향신료인 제피가루(초피가루)를 뿌려 먹는 것도 특징이다. 추어튀김, 추어숙회도 유명하다. ●‘탱글탱글 감칠맛’ 흑돼지 버크셔K 남원에서 생산되는 흑돼지는 ‘버크셔K’라는 특별한 품종이다. 미국계 버크셔 품종을 들여와 한국 기후에 맞게 육종했다. 2004년 미국에서 유전자원을 도입·개량해 국제식량기구(FAO)에 새로운 품종으로 등재했다. 해발 500m 고랭지에서 기르기 때문에 일반 돼지보다 육질이 부드러우면서 씹는 맛이 고소하다. 탱글탱글한 육질에 부드럽게 녹는 듯 씹히는 비계의 식감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맛을 낸다. 백색 돼지와 달리 근섬유의 단면적이 작으면서 수가 많아 촉촉하면서 탄력 있는 식감을 주고 감칠맛이 뛰어나다. 비계도 다른 돼지에 비해 수분이 20% 정도 적고 불포화지방산이 많아 부드럽고 잡내가 없다. 운봉읍 등 4개 읍·면 흑돼지 사육농가들이 생산하고 있다. 농가들은 엄격한 품질 관리를 위해 법인을 설립하고 공동출하, 공동판매를 하고 있다. 관광산업과 연계시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발전시킨다는 계획이다. ●‘지리산 나물 풍성’ 한정식·산채정식 남원은 예로부터 음식이 발달한 맛의 고장이다. 지리산을 끼고 있어 다양한 산채가 연중 생산되고 남해안에서 건져 올린 생선류도 전라선을 타고 곧바로 공급되기 때문이다. 한정식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30여 가지의 반찬이 상을 가득 채운다. 고기와 생선은 물론 나물류가 다양하다. 무·배추·파·고들빼기, 물김치 등 여러 종류의 김치와 꼬막, 새조개, 굴 등 다양한 어패류가 상에 오른다.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얇게 저며 석쇠에 구운 숯불구이가 유명하다. 산채정식은 지리산에서 채취한 향기로운 산나물이 주재료다. 고사리, 취, 미나리, 도라지, 뽕잎, 시래기, 명이, 쑥부쟁이, 곰취, 곤드레, 비비추, 원추리, 땅두릅, 엄나물, 두릅 등을 데치고 말려 고소하게 볶아낸다. 남원시 근교는 물론 지리산 자락인 주천면 고기리 일대에 산채정식 집들이 즐비하게 자리잡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건배 전통주 ‘황진이’ ‘황진이’는 각종 주류 품평회에서 크고 작은 상을 휩쓴 전통주다. 지리산 자락 농가에서 빚어 오던 오미자 약주를 발굴 계승한 순수 발효주다. 2006년 남북정상회담 건배주, 2007년 전통주품평회 대상, 2007년 제1회 대한민국주류품평회 금상, 2013년 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 대상 등 화려한 수상 이력을 자랑한다. 청정지역에서 무농약으로 재배한 오미자와 산수유를 쌀과 누룩으로 발효시켜 빚는다. 깊고 풍부한 맛, 환상의 붉은색이 조화를 이뤄 남녀 모두가 즐겨 찾는 남원의 대표 전통주로 통한다. 남원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야심 찬 삼국유사 프로젝트… ‘민족성지’ 꿈 영근 군위

    야심 찬 삼국유사 프로젝트… ‘민족성지’ 꿈 영근 군위

    조그마한 시골 자치단체인 경북 군위군이 국내외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우리 문화유산 보고의 원천으로 평가되는 ‘삼국유사’ 재조명 사업에 박차를 가하면서부터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군위군의 삼국유사 사업에 큰 애정과 관심을 보였고, 프랑스의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76) 등 노벨문학상 수상자들도 잇따라 군위를 방문해 힘을 보탰다. 정부 및 학술단체 관계자, 전국의 학생들도 삼국유사를 배우기 위해 군위로 달려오고 있다. 갈수록 성과를 내면서 머지않아 군위가 민족사적 정체성 확립에 기여함은 물론 문화·관광 중심도시로 도약할 것으로 기대된다. 도대체 재정자립도 10%대, 인구 2만여명에 불과한 작은 고을인 군위군이 ‘삼국사기’와 함께 우리나라 고대 역사서의 쌍벽으로 꼽히는 삼국유사와 관련해 어떤 사업들을 벌이고 있는지 한 번 들여다봤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는 없는 우리 역사의 뿌리인 고조선 개국 신화를 비롯해 가야·신라·고구려·백제 등 4국의 역사, 종교, 문학, 민속, 신화, 전설 등을 총망라한 한국 고대사의 보고다. 육당 최남선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경우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만큼 삼국유사에는 ‘절대적’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16일 군에 따르면 고려 말 승려 일연(1206∼1289)이 군위 고로면 화북리의 천년 고찰 인각사에서 평생의 역작인 삼국유사를 집필한 사실적 근거를 기반으로 관련 사업들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경북의 3대(유교·신라·가야) 문화권 개발 사업의 하나이자 삼국유사와 일연을 통한 군위의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노력들이다. 가장 눈에 띄는 사업은 인각사 인근 의흥면 이지리 일대 71만 8000㎡ 터에 조성 중인 ‘삼국유사 가온누리(중심 세상)’ 사업이다. 삼국유사 속 신화·설화·향가 등 다양한 콘텐츠를 활용한 역사교육형 테마단지이다. 2019년까지 국비 894억원 등 총 1374억원이 투입된다. 현재 공정률은 30% 정도. 삼국유사 가온누리는 으뜸누리(얼), 얼쑤누리(흥), 아름누리(꿈) 등 3개 지구로 조성된다. 으뜸누리지구는 가온누리주제관을 비롯해 천지인신화촌, 설화이야기원, 향가원 등 전시, 교육, 학습시설을 설치해 역사체험 공간으로 조성한다. 얼쑤누리지구는 이야기나라놀이터, 삼국스피드슬라이드(썰매장), 아침향기원, 삼국유사역사존 등을 만들어 물놀이·썰매 등 놀이와 산책·명상 등 휴양을 겸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민다. 아름누리지구에는 삼국유사이야기학교, 가온누리동량원, 승마장(로) 등이 들어선다. 군은 이 사업으로 지역 특화형 관광인프라를 구축해 국내 대표적 신관광지로 육성 발전시킬 계획이다. 한국 문화 5000년을 담는 그릇으로 삼국유사 문화콘텐츠의 세계화를 추진해 삼국유사로 한류 문화를 주도한다는 복안이다. 군은 또 올해부터 삼국유사의 산실인 고로면 화북리 인각사 복원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삼국유사 민족성지’로 가꾸기 위해서다. 최근까지 20년이란 오랜 기간에 걸쳐 이 일대에 대한 발굴 작업을 마쳤고, 종합정비 계획도 마련했다. 2019년까지 총 121억원을 들여 명부전과 국사전, 요사채를 발굴해 새로 세우고 중문 좌·우익채 및 정문 등을 복원한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당시의 모습과 최대한 가깝게 복원한다는 게 목표다. 인각사는 통일신라 선덕여왕 시절 의상대사 또는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연이 만년에 이곳에 어머니를 모시고 기거하면서 민족의 고전인 삼국유사를 완성한 역사의 현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된 뒤 여러 차례 중수되면서 본모습이 대부분 훼손됐다. 올 연말까지 인각사 일원에는 효를 주제로 한 ‘일연 테마로드’도 생겨난다. 인각사~일연 부도탑~일연공원~일연 모친 묘소~인각사 4.8㎞ 구간에 황톳길과 전망대, 부도탑 등을 만든다. 군이 경북도와 함께 내년까지 추진할 삼국유사 목판 복원 사업도 돋보인다. 1512년 경주 부윤 이계복이 간행한 임신본을 마지막으로 500여년간 완전히 자취를 감춘 삼국유사 목판을 복원한다. 구체적으로는 삼국유사 판본 중 ‘조선초기본’, ‘조선중기본’과 이를 교정·집대성한 ‘경상북도본’을 목판으로 복각하는 것이다. 사업비 34억원이 투입된다. 목판이 완성되면 책을 찍어 연구소·대학 등에 보급할 계획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3월 경북도청 신청사 개청식에 참석해 김관용 경북도지사와 김영만 군위군수로부터 ‘삼국유사 목판 복원 사업’을 보고받고는 큰 관심을 표명했다. 앞서 지난해 말엔 르 클레지오를 군위로 초청, 삼국유사 목판 복원 특별자문위원으로 위촉하고 특별강연을 가져 국내외의 큰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르 클레지오는 목판 복원사업의 문학적 자문과 홍보뿐만 아니라 목판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지원도 약속했다. 군위군의 삼국유사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학술조사와 교육, 연구, 홍보 등의 사업을 전방위적으로 펼치고 있다. 군은 오는 8월 27일 군위읍 삼국유사교육문화회관에서 전국 고교생 1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삼국유사 퀴즈대회’를 연다. 삼국유사에 담긴 내용을 중심으로 기량을 겨루는 퀴즈대회다. 올해로 8회째다. 군은 2009년부터 매년 이 대회를 열고 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삼국유사의 가치를 일깨워 주고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불어넣기 위해서다. 지난해까지 모두 4100여명이 참가했다. 올해 하반기에는 삼국유사 바로 알리기를 위한 특별강좌 및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다. 군은 지난해까지 서울과 대구 등지에서 삼국유사 특별강좌 및 세미나를 각 6회(연인원 5700여명 수강) 가졌다. 11월에는 전국 마라톤 동호인과 주민 등 5000여명이 참가하는 삼국유사 마라톤 대회를 개최한다. 11회째다. 인각사는 일연 스님의 생애를 집대성하고 있다. 오는 8월에 삼국유사 문화축전을 연다. 축전에서는 일연 스님의 정신과 사상을 기리는 추모다례재, 산사음악회와 뮤지컬로 구성된 ‘삼국유사 문화의 밤’ 행사가 마련된다. 11월에는 삼국유사·일연 학술대회를 개최해 공모한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할 예정이다. 물질만능주의와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요즘, 지역의 작은 자치단체와 사찰이 삼국유사와 일연 스님 재조명 사업을 통해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신문화를 새롭게 하는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군위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新국토기행] 강원 삼척시

    [新국토기행] 강원 삼척시

    강원 삼척시는 험준한 태백산맥과 넓고 긴 해안선, 많은 항·포구를 간직한 천혜의 관광지다. 여기에 수많은 계곡과 깨끗한 백사장,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해변이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더한다. 5억 3000만년 전에 생성된 환선굴과 대금굴은 삼척에 신비로움까지 선사한다. 두타산 정기를 이어받고 오십천 맑은 물이 죽서루를 감돌아 동해로 흐르는 곳을 터전 삼아 제왕운기의 자주정신과 호국정신을 이어 온 유서 깊은 고장이다. 태백탄전과 동해공업지역의 연계 교역지로 지하자원, 수산자원, 관광자원이 풍부해 한때 산업의 근간이 되기도 했던 고장이다. 올 상반기에 삼척~동해 간 고속도로가 개통하고 2018년 포항~삼척 간 동해선 철길까지 완공하면 사통팔달 교통 요지로 각광받을 것으로 보인다. 시민들은 지역 경제에 생기를 줄까 벌써 기대에 부풀었다. 강원 최남단에 진주처럼 남아 있는 삼척의 속살을 들여다보자. 삼척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볼거리 ●관동팔경 제1루 죽서루 노래한 詩 500수 넘어 관동팔경의 제1루 죽서루(보물 제213호)는 삼척시 서쪽을 흐르는 오십천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태종 3년(1403년) 삼척부사 김효손이 옛터에 중창한 뒤 지금까지 수십 차례에 걸쳐 중수하거나 증축했다. 죽서루는 하층이 17개의 기둥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 가운데 9개는 자연석에 세워졌으며 8개는 넓은 바위를 기초석으로 건립돼 건축사적 특성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건물 상층부는 20개의 기둥에 의지해 팔작지붕으로 덮였다. 죽서루 난간에 기대어 멀리 바라보면 서쪽으로 백두대간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아래로는 까마득한 절벽 아래 오십천의 푸른 강물이 휘감아 돌아 흘러 예부터 많은 시인 묵객 및 화가들이 끊임없이 찾아 죽서루를 노래했다. 현재 알려진 시는 500수가 넘는다. ●고려 마지막 왕이 잠든 공양왕릉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태동이 시작된 곳이 삼척이다.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일파에 의해 교살됨으로써 고려의 국운이 삼척에서 끝을 맺는다. 강원도 기념물 제71호인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공양왕릉에는 왕자 왕석과 왕우, 그리고 시녀의 무덤이 함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공양왕과 그의 추종자들이 살해된 곳이 살해재이고 이곳에 한 달이 넘게 핏물이 흘렀다. 궁촌은 임금이 계신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됐다. 이성계가 삼척 땅에서 공양왕을 살해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삼척은 조선의 건국이 시작된 곳이다. ●조선 왕실 가장 오래된 선대 묘 준경묘·영경묘 이성계의 5대조이며 목조(이안사)의 아버지인 이양무 장군 묘가 준경묘다. 조선 왕실의 가장 오래된 선대 묘로 그 터는 왕기가 서린 천하의 대길지로 조선왕조를 태동시켰다는 ‘백우금관(百牛棺) 전설’(100마리 소 대신 흰 소, 금관 대신 보리짚으로 관을 만들어 사용)이 전해진다. 이양무는 본래 전주의 호족이었다. 당시 향촌 사회를 붕괴시키는 고려 정권에 대한 불만이 관기 문제로 촉발되자 이를 계기로 170여호의 자기 세력을 이끌고 삼척에 정착했다. 이양무는 1231년(고려 고종 18년)에 죽었다. 이들은 의주로 이주하기까지 삼척에서 17년여간 살았다. 이양무 부인의 묘가 영경묘다. 역사성뿐만 아니라 풍수지리적 가치 등 중요한 학술 가치를 인정해 강원도 기념물에서 2012년 사적 제524호로 승격됐다. ●물과 5억년 시간이 빚은 환선굴·대금굴 물과 오랜 시간이 빚어낸 삼척의 동굴은 모두 55개로 대이리 동굴지대(천연기념물 178호)를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개방한 동굴은 환선굴과 대금굴이다. 동굴 생성 시기는 고생대(5억 3000여만년 전)로 알려졌다. 동굴 내부에선 에그프라이 석순, 곡석, 종유석, 동굴진주 등 기기묘묘한 동굴 생성물이 감탄을 자아낸다. 특히 지하에는 근원지를 알 수 없는 많은 양의 동굴 수가 흐르고 있어 여러 개의 크고 작은 폭포와 동굴 호수가 형성돼 있는 게 특징이다. 백두산 천지를 닮은 천지연, 비가 오면 높이 2m까지 뜰 수 있도록 설치한 용소부잔교, 높이 8m의 비룡폭포 등을 감상할 수 있다. 모노레일을 타고 140m의 인공터널을 지나 동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 덕항산 절경과 주변의 생태공원, 전나무 숲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어촌민 생활 느낄 수 있는 해신당공원 동해안 유일의 남근 숭배 민속이 전해 내려오는 해신당공원은 어촌민의 생활을 느낄 수 있는 어촌민속전시관, 해학적인 웃음을 자아내는 남근조각공원 등으로 구성됐다. 또한 공원을 따라 펼쳐지는 소나무 산책로와 푸른 신남바다가 어우러져 스트레스 해소는 물론 웃음 바이러스가 넘쳐나는 동해안 최대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동해안 따라 5.4㎞ 삼척해양레일바이크 삼척해양레일바이크는 일제강점기, 삼척에서 나오는 지하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삼척에서 포항까지 철로를 놨다가 해방이 되면서 중단한 것을 삼척시에서 2010년 관광자원화한 것이다. 레일바이크 구간은 모두 5.4㎞에 이르며 레일바이크를 타고 가다 보면 자연스레 동해안의 경관을 즐기고 감상할 수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됐다. ●아름다운 길 100선 선정 된 새천년해안도로 이름처럼 새천년을 맞는 2000년에 만들었다. 새천년해안도로는 삼척항에서 삼척해변까지 4.5㎞에 이르는 코스로 바다와 산을 가로질러 해안선을 따라 만들어 해안 절경과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관광도로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됐다. 드라이브 코스로 알려졌지만 중간중간 차를 멈추고 잠깐 쉬어 갈 수 있는 소망의탑, 조각공원, 삼척해변 사랑공원 등이 있다. ●전설 깃든 조각·그림… 수로부인헌화공원 삼척시 원덕읍 임원리 남화산 정상에 있는 수로부인헌화공원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헌화가’와 ‘해가’ 속 수로부인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공원이다. 절세미인으로 알려진 수로부인은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의 부인이다. 남편이 강릉 태수로 부임해 가던 중 수로부인이 사람이 닿을 수 없는 돌산 위에 핀 철쭉꽃을 갖고 싶어 하자 마침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꽃을 꺾어 바칠 때 부른 노래가 4구체 향가인 헌화가다. 임해정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용이 나타나 수로부인을 바닷속으로 끌고 갔는데 백성이 노래를 부르자 다시 수로부인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 노래가 신라가요인 해가다. 공원에는 이 수로부인 전설을 토대로 한 다양한 조각과 그림 등이 있다. 이와 함께 산책로, 데크로드, 쉼터 등이 잘 갖춰져 있어 탁 트인 동해의 비경을 감상하면서 걷기 좋다. 공원의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는 초대형 수로부인상은 높이 10.6m, 가로 15m, 세로 13m, 중량 500t에 달한다. 천연 돌로 만들어 관광객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현재 임원항 방파제 부근에서 올라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운행 중이다. >>먹거리 ●버림받던 고기에서 금치 된 곰치 곰치는 다른 고장에서도 볼 수 있는 어종이지만 동해안의 곰치가 살이 더 부드럽고 담백하다. 잘 묵은 김치와 함께 푹 끓여 낸 곰치국은 살살 녹는 하얀 속살에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 맛 때문에 해장국으로 최고다. 곰치국은 삼척이 원조다. 옛날 고기잡이배에 큰 곰치가 걸리면 “재수 없게 제사상에도 못 오르고 값도 없는 이놈의 곰치가 그물 찢어지게 왜 이리 걸렸냐”고 푸념하며 나룻가에 버렸다고 한다. 그런 곰치가 어느 때부터인가 삼척의 대표 음식으로 전국에 소개되며 이제는 바다에서 나지 않으면 아무리 돈을 줘도 먹지 못하는 귀한 음식이 됐다. ●쫄깃한 속살·담백한 맛 삼척 대게 대게는 물이 차면 살이 꽉 차는 한랭성 어종으로 겨울이 제철인 음식이다. 고려 시대 문장가인 이규보는 게를 산해진미를 초월하는 맛이라고 격찬했고,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은 1600년대에 지은 ‘도문대작’에서 “삼척에서 나는 대게는 크기가 강아지만 해 그 다리가 대나무 줄기만 하다. 맛이 달고 포를 만들어 먹어도 좋다”고 했다. 게는 삼척말로 ‘기’이므로 게 모양의 줄을 당기는 놀이인 ‘게줄다리기’ 또한 ‘기줄다리기’로 불린다. 지난해 12월 삼척의 기줄다리기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인접지 경북 울진과 영덕의 인지도에 밀려 명성을 얻지 못하던 삼척의 대게에 대한 관심도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산삼 효능 ‘삼척 장뇌산삼’ 지리적 표시제 등록 120년 전 삼척의 하늘과 맞닿은 작은 마을인 여삼리에서 한 어르신이 산삼씨를 근처 산에 심은 게 현재 ‘삼척 장뇌산삼’의 시초로 알려졌다. 현재 대략 60여 농가가 연간 1만본 정도를 생산하는 삼척 장뇌산삼은 2010년 특허청에 지리적 표시 단체표장등록을 하며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삼척시는 이를 홍보하기 위해 삼척교 입구에 장뇌 홍보 조형물을 설치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찍 따서 말린 올미역은 산후조리 인기상품 올미역은 이른 철에 따서 말린 미역으로 허균의 도문대작을 보면 “조곽(早藿)은 이른 미역으로 삼척에서 1월에 나는 게 좋다”고 기록돼 있다. 올미역은 색깔이 온통 검은색으로 요오드 성분 함량이 높아 피를 맑게 해 주는 성질이 있어 산후조리용으로 인기가 많다. ●진한 맛과 향 한잔~ 친환경 ‘삼척 머루와인’ 삼척 너와마을에서 생산하는 머루와인은 해발 600m의 육백산 청정 지역에서 재배한 친환경 머루를 사용해 맛과 향이 진하다. 너와마을 와인공장에는 구입 및 시음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머루는 포도에 비해 5~10배 정도 많은 칼슘, 인, 회분, 안토시아닌 성분이 함유돼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고 장기를 튼튼하게 하는 효과, 저혈압과 고지혈증, 부인병 예방과 치료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삼국유사 판각 작업 700년 만에 첫 공개

    인쇄본만 전해지는 삼국유사 판각 작업이 사상 처음으로 공개된다. 경북 군위군은 다음달부터 군위읍 삼국유사 역사테마공원 내에 260㎡ 규모로 마련된 도감소(都監所)에서 삼국유사 목판 복원 과정을 일반에 공개한다고 15일 밝혔다. 이 과정은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문화재로 지정받은 10명 정도의 전문 목판장인들이 판각용 목재인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로 62㎝, 세로 28.6㎝, 두께 4㎝)에 삼국유사 기록을 새기는 것이다. 삼국유사 판각 작업이 일반에 공개되기는 1281년(고려 충렬왕 7년)쯤 일연(1206~1289) 스님이 군위 인각사에서 신라·고구려·백제 등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 책으로 편찬한 이후 700여년 만에 처음이라고 군 관계자는 설명했다. 삼국유사 목판은 조선 초기(1300년대 추정)와 중기(1512년)에 제작됐으나 여러 본의 인쇄본만 전해질 뿐 목판 자체는 남아 있지 않다. 군은 이들 판본을 모델로 삼아 목판을 복원하기로 했다. 군은 또 목판이 판각돼 가는 과정을 전시하고 목판을 한지에 찍어 내는 판각·인쇄 등을 체험할 수 있는 전시체험관도 운영할 계획이다. 김영만 군위군수는 “고조선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 민족의 역사를 폭넓게 다룬 역사서로 향가, 설화 등의 중요한 역사적 사료를 포함한 삼국유사의 목판 복원은 정교한 고난도의 작업으로 그 자체가 문화재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서 “민족의 얼을 새겨 위대한 문화유산을 깨우는 이번 작업에 전국적인 많은 관심과 성원을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경북도와 군위군, 한국국학진흥원은 2017년까지 30억원을 들여 삼국유사 목판 3개(조선 초기 판본, 조선 중기 판본, 경북도 교정본)를 복원한다. 또 목판을 이용해 한지에 찍은 인쇄본을 대학·연구소·도서관 등에 보급할 계획이다. 군위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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