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시화첩
    2026-06-22
    검색기록 지우기
  • 늦잠
    2026-06-22
    검색기록 지우기
  • 25명
    2026-06-22
    검색기록 지우기
  • 카드사
    2026-06-22
    검색기록 지우기
  • IT품목
    2026-06-2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7
  • [기고] 겸재정선미술관에서 피어난 예술혼

    [기고] 겸재정선미술관에서 피어난 예술혼

    겸재 정선은 72세이던 1747년, 노년의 무르익은 필치가 집약된 금강산 그림을 남겼다. 그는 이 그림에 당대 최고의 시인 이병연과 김창흡의 시를 곁들여 산수화 21폭을 비롯한 총 38폭의 ‘해악전신첩’을 제작했다. 예술·학술·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이 화첩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 이 화첩은 한때 영영 사라질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33년 고미술상 장형수는 용인 양지면 일대를 둘러보던 중 한 대저택을 발견했다. 수소문 끝에 그 집이 친일파 송병준의 손자 송재구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송재구와 경성의 소식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날이 저물자 장형수는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그날 밤 뜻밖의 장면을 목격했다. 하인들이 불을 지피기 시작할 무렵, 마침 밖으로 나왔던 장형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불쏘시개로 쓰려던 것이 다름 아닌 초록 비단으로 장정된 오래된 화첩이었기 때문이다. 그림과 글씨가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직감한 그는 곧장 이 화첩을 간송 전형필에게 가져갔다. 처음에는 자신이 송재구에게 치른 값의 열 배인 200원 정도를 받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화첩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본 간송은 1500원이라는 거금을 선뜻 내놨다. 당시 경성 시내의 제법 큰 기와집 한 채 반에 해당하는 거금을 들여 소중한 문화재를 지켜낸 셈이다. 오늘날 서울 강서구는 조선시대에 양천현으로 불렸다. 겸재 정선은 영조의 명을 받아 65세이던 1740년부터 70세인 1745년까지 5년간 양천현 현령으로 재직했다. 그는 지금의 강서구 궁산에 올라 마곡나루 주변의 뛰어난 경관을 그려 보내곤 했는데, 절친인 사천 이병연은 그림을 감상한 뒤 시로 화답했다. 멀리 떨어진 겸재를 그리워하며 이병연이 시 한 수를 지어 보내면, 겸재는 이를 받아 그림으로 옮겼다. 이처럼 한강 변 풍경부터 일상의 소식까지 그림과 시로 교류한 작품들을 후손들이 모아 엮은 것이 바로 ‘경교명승첩’이다. 이 화첩 역시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 강서구에서는 겸재 정선이 ‘경교명승첩’이라는 불멸의 작품을 남긴 것을 기념하고,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중심으로 연구·전시하고자 2009년 겸재정선미술관을 설립했다. ‘해악전신첩’(정선이 금강산을 그린 진경산수화 시화첩)처럼 우리 선조가 지켜낸 겸재의 원화 27점을 순환 전시할 뿐 아니라 겸재의 진경산수화를 알리는 학문적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또한 현대 화가들이 겸재의 정신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매년 ‘겸재미술대전’과 ‘겸재 내일의 작가전’ 등 공모전도 개최한다. 특히 겸재정선미술관에서는 겸재 탄생 350주년을 기념해 4월 14일부터 6월 21일까지 특별 기획전 ‘소나무, 늘 푸르른’을 열고 있다. 겸재의 ‘사직노송도’를 비롯해 김홍도·강세황·이재관·이인문 등 조선 후기 화가들의 작품부터 채용신·김은호·박노수 등 근현대 화가들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23건 37점의 명작이 모였다. 소나무라는 하나의 상징을 통해 한국 회화 350년의 흐름과 변천사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획이다. 겸재가 거닐던 강서구에는 서울 유일의 양천향교, 의성 허준 선생의 자취가 깃든 허가바위, 겸재가 그림에 담았던 궁산과 소악루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와 그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예술의 인연을 만나는 기회를 강서구 겸재정선미술관에서 갖기를 권한다. 김진호 서울 강서문화원장
  • 동아시아 최고 풍광 품은 ‘물의 나라’[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동아시아 최고 풍광 품은 ‘물의 나라’[서동철의 이야기가 있는 옛성]

    천하제일 명승지…군사 요충지 충남 보령이라면 누구나 대천해수욕장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길이가 3.5㎞에 이르는 넓은 백사장은 대천을 일찍부터 서해안을 대표하는 휴양지로 명성을 날리게 했다. 보령은 서해를 방어하고 삼남에서 도성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는 수군 사령부가 있던 고장이기도 하다. 오서산에서 발원한 광천천이 천수만으로 흘러드는 오천의 충청수영성이 그것이다. 군선 정박지 선소(船所)엔 이제 형형색색 낚싯배만 가득하다. 하지만 ‘천하제일의 명승’으로 불리며 숱한 시인 묵객을 불러들였던 영보정(永保亭)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광은 여전히 감동적이다. 역사와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충청수영성과 오천항의 아름다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질 것이라고 장담한다. 보령을 찾는다면 충청수영성도 찾아보기를 권한다. 자연은 물론 역사와 문학의 즐거움도 함께 누리는 품격 높은 여행이 될 것이다. 조선시대 충청수영성의 모습은 규남 하백원의 ‘해유시화첩’으로 그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화순 선비 하백원은 1842년 보령의 다섯 선비와 더불어 일대를 유람하고 그 감상을 시와 그림으로 남겼다. 시화첩을 펴면, 수영성 내부에는 영보정을 비롯한 건물이 들어차 있고 지금은 터만 남은 충청수영의 수호사찰 한산사(寒山寺)도 하구 너머에 보인다. 바다에는 몇 척의 배도 떠 있는데 거북선의 모습을 강조해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규남은 수차의 일종인 자승차(自升車)를 고안하고, 당시 전라도관찰사 서유구에게 수리에 활용하도록 건의했다는 실학자다. 2015년 복원된 영보정에 오르면 수편의 제영시가 걸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누정 같은 곳에서 그 공간에 얽힌 이야기를 운문으로 짓는 것이 제영시다. 읍취헌 박은(1479~1504)의 ‘영후정자’(營後亭子)도 그중 하나다. 읍취헌은 갑자사화로 불과 25세의 나이에 목숨을 잃은 인물이다. 파직당하고 충청도 수군절도사였던 장인 신용개를 찾아 충청수영에서 열흘 남짓 머물 때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충청수영성과 주변의 풍광을 문학성 높게 표현한 작품으로 후세까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아름다운 풍경들 詩로 남아 ‘영후정자’에는 수영성 주변을 택국(澤國·물의 나라)이라는 표현으로 운하의 고장인 중국 소주와 연결 짓는 대목이 보인다. 자연스럽게 당나라 시인 장계의 ‘풍교야박’(楓橋夜泊)에 나오는 ‘고소성 밖 한산사’(姑蘇城外寒山寺)라는 시구를 떠올리게 했다. 소주의 옛 이름이 고소(姑蘇)이고 고소성은 곧 소주의 고대 성곽을 가리킨다. 소주의 한산사는 지금도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고 한다. 고소성은 이렇게 충청수영성의 별칭이 됐다. 옛 시인들은 수영성 앞바다도 소성강이라 불렀다. 수영성이 자리잡은 동네는 지금도 소성리다. 충청수영은 충청도수군절도사영의 줄임말이다. 충청도 수군의 총대장인 절도사가 있는 본부라는 뜻이다. 관할구역은 북쪽으로 아산만에서 남쪽으로 금강 하구 장항만에 이른다. 충청도 수역은 전라도와 경상도 평야 지대 세곡을 수도로 나르는 조운선의 중간 기착지에 해당한다. 고려 말 왜구가 횡행하자 육로 수송으로 돌아갔지만 세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자 조선은 조운을 재개했다. 왜구의 가장 중요한 약탈 대상인 조운선을 보호하려면 충청도 수군을 강화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외교 1번지…조선 수군의 핵심 기지 고려시대 왜구가 날뛸 수 있었던 것은 수군이 육군의 보조기능에 그쳤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지역 사령관인 도절제사를 두면서 수군 강화 의지를 보였다. 수군도절제사는 세종시대 수군도안무처치사로 바뀌었다가 세조시대 수군절도사라는 이름으로 정착한다. 충청수영은 ‘연려실기술’(1776년) 기록 이후 본영과 함께 소근포진, 안흥진, 평신진, 마량진, 서천포의 5개 수군진으로 운영됐다. 소근포진과 안흥진은 태안, 평신진은 서산, 마량진과 서천포는 서천에 있었다. 충청도 서해안은 고대부터 선진문물이 중국으로부터 가장 먼저 들어오는 통로였다. 백제가 웅진(공주)에 이어 사비(부여)로 잇따라 천도하면서 보령지역 포구의 역할도 전과 달라졌을 것이다. 서해로 나가는 출구에 자리잡은 오늘날의 오천 대회이포도 국제항구로 역할을 했을 것으로 학계는 본다. 고려시대 거란의 방해로 송나라를 오가는 항로가 북로에서 남로로 옮겨지면서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대회이포 서쪽 고만도에는 송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영빈관이 설치되기도 했다. 고려사에는 ‘삼별초가 고란도에 침입해 병선 6척을 불사르는 한편 선장(船匠)을 죽이고 조선관(造船官)인 홍주부사와 결성·남포 감무를 사로잡아 갔다’는 기록이 있다. 1272년(원종 13년)의 일이다. 고란도는 그 위치나 역할로 볼 때 고만도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본다. 고만도는 국가적 외교 공간이자 핵심 수군 기지였다. 더불어 고만도가 국가적 차원의 조선소 역할도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시대에도 안면도를 포함한 충청도 서해안의 소나무는 병선·조운선 및 궁궐 건축 재료로 특별히 보호됐다. 왜군 방어 해상 보루…배낚시 메카 조선왕조가 출범하자 태조는 1396년 고만도에 수군 첨사를 배치한 데 이어 곧 수군 사령 부를 대회이포로 옮긴다. 큰 바다가 가까운 고만도는 왜적이 대규모로 침입하면 방어가 쉽지 않다는 판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수군도안무처치사는 보령현 서쪽 대회이포에 머무른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충청수군 사령관을 당상관으로 임명한 것은 그 이전인 듯하다. 충청수군절도사는 조선 후기 삼도수군통제사와 삼도수군통어사의 지휘를 동시에 받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경상좌·우수군과 전라좌·우수군, 충청수군을, 삼도수군통어사는 경기수군과 황해수군, 충청수군을 총괄했다. 외적이 남쪽에서 침입하면 통제사, 북쪽에서 공격하면 통어사 지휘를 받는 것이 충청수군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충청수사 최호가 이순신 장군에 이은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명령에 따라 투입된 칠천량에서 전사한 것도 이런 수군 체계를 보여 준다. 조선과 왜의 관계가 비교적 안정된 이후 충청수영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조운선의 안전한 항해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조운선 관리 책임은 수군절도사의 참모인 우후에게 맡겨졌다. 우후는 1669년(현종 10년)부터 조운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3월부터 9월까지 아예 원산도에 상주했다. 우후에겐 세곡선을 호송하고 기상 변화에 따라 출입을 통제하는 한편 난파한 조운선의 곡식을 수습하는 역할도 주어졌다. 조운선을 통제한 관아의 흔적은 원산도의 가장 큰 포구인 진촌에 남아 있다. 19세기 들어 우후에게는 이양선을 경계하는 임무도 주어졌다. 원산도의 가장 높은 봉우리 오봉산에선 외적 침입을 신속하게 충청수영에 알리던 봉수대의 유구도 확인됐다. 진촌에는 수군 우후 최창호 등을 기리는 공덕비도 남아 있다. 대천과 원산도를 잇는 보령해저터널이 2021년 개통됨에 따라 조운선 통제와 이양선 경계의 현장을 찾아보는 것도 어렵지 않게 됐다. 오천항은 ‘배낚시의 메카’로도 불린다. 연중 다양한 어종이 잡히지만 4~5월 주꾸미 시즌과 9~10월 갑오징어 시즌에는 주변에 교통체증이 빚어질 만큼 많은 낚시객이 몰린다. 낚시를 즐기지 않더라도 오천항에선 다양한 제철 해산물을 만날 수 있다. 이번에도 잠수기 어업 본거지이기도 한 오천에서 갖가지 키조개 음식을 맛볼 수 있었다. 병인박해 순교 성지…5인 성인으로 충청수영성을 둘러보고 오천항의 맛을 즐겼다면 2㎞ 남짓 떨어진 갈매못 순교 성지를 방문하는 것이 순서다.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로·위앵 신부, 황석두·장주기가 참수된 충청수영성의 형장이다. 충청도 내포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체포된 다블뤼 등은 한양으로 압송됐다. 이들을 굳이 충청수영성으로 데려가 처형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다양한 분석이 이뤄졌다. 그중 하나가 군문효수(軍門梟首)로 바다를 이용한 천주교와의 교섭을 경고하려 했다는 것이다. 다섯 순교자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집전으로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글·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 검은 비단 위 ‘금빛 기개’… 조선은 꺾이지 않았다

    검은 비단 위 ‘금빛 기개’… 조선은 꺾이지 않았다

    민족 정신 담은 매화·대나무·난초 보물 이정 ‘삼청첩’ 56면 최초 공개 “성글어도 즐거워할 만하고 빽빽해도 싫지 않다. 소리가 나지 않아도 들리는 듯하고, 색이 비슷하지 않아도 참모습을 지녔다.” 임진왜란과 광해군 즉위 무렵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꼽혔던 최립(1539~1612)이 ‘하늘로부터 타고난 재능’이라고 극찬했던 탄은 이정(1554~1626)의 대나무 그림이 눈앞에 펼쳐진다. 대구간송미술관이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전시 ‘삼청도도(三淸滔滔)-매·죽·난, 멈추지 않는 이야기’에서는 임진왜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어두운 시기 꺾이지 않았던 민족의 정신적, 문화적 힘을 삼청(三淸), 매화·대나무·난초 그림을 통해 선보인다. 도도는 물이 막힘없이 흐른다는 의미다. 전시 중심에 ‘삼청첩’이 있다. 2018년 보물로 지정된 삼청첩은 이정의 그림과 시를 함께 엮은 시화첩으로 한국 회화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가진 작품이다. 이정은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칼에 팔을 크게 다쳤으나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뒤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고 조선의 자존과 사기를 북돋우고자 1594년 삼청첩을 완성했다. 여기에 최립, 한호(한석봉), 차천로가 글을 더했다. 이후 삼청첩과 유사하게 이정의 작품과 문인들의 글을 엮어 만든 ‘유금강산권’, ‘탄은삼청첩’ 등이 계속 만들어져 당대 삼청첩에 대한 인기가 굉장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표지와 빈칸을 포함해 모두 56면으로 이뤄졌는데, 전면을 온전히 펼쳐 선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개 전시실이 오로지 삼청첩으로만 꾸며져 있어 시와 그림 사이를 거닐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림은 먹으로 물들인 비단 위에 금가루를 아교로 갠 금니로 그렸다. 검은 바탕을 뚫고 금빛으로 선명하게 드러난 매, 죽, 난은 화려하지만 가볍지 않다. 특히 12폭을 차지하는 비와 바람, 이슬과 서리, 안개에 따라 서로 다른 기개를 보여 주는 대나무 그림을 두고 최립은 서문을 통해 “기운을 형상화하지 않아도 상쾌한 바람이 불어닥치는 듯하고, 덕을 베풀지 않아도 의연하여 공경할 만하다”고 감탄했다. 여기에 화려함과 간결함이 공존한 매화, 강인하게 뻗어 나간 난초의 모습에서 국난 극복의 의지가 오롯이 드러난다. 거울로 마감된 전시장 벽면은 시야를 확장해 삼청첩의 영향이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병자호란 때는 화재로 소실 위기를 겪고 19세기 일본으로 반출되기도 했던 삼청첩은 1935년 간송 전형필 선생이 수집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또 다른 전시실에서는 이정의 묵죽화 가운데 백미로 꼽히는 ‘풍죽’을 만날 수 있다. 대나무 줄기와 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했으며 공간감을 살리기 위해 짙은 먹과 흐린 먹의 구별이 뚜렷한 대나무들을 대조시켰다. 백인산 대구간송미술관 부관장은 “고난과 시련에 맞서는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풍죽의 내재된 본질과 의미를 이만큼 잘 살려 낸 작품은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조선시대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가혹한 억압 속에서 이어진 삼청의 정신도 엿볼 수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김진우가 원형 화폭에 그린 대나무 ‘허심수덕’과 항일독립군의 초석이 된 이회영의 작품도 관람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전시는 오는 12월 21일까지. 추석 당일엔 문을 닫는다.
  • 종로, 김상옥 의사 의거 96주년 기념식

    서울 종로구는 22일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김상옥 의사 의거 96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고 21일 밝혔다. 김 의사의 후손, 의열단 후손, 3·1운동 100주년을 기리기 위해 구성된 서울시 ‘시민위원 310’위원 등이 참석한다. 기념식은 김 의사 의거일인 22일 대학로 36-4 인근 지역에서 펼쳐진다. 이곳은 김 의사가 생을 마감하기 전 일본 군경 1000여명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 장소이다. 아울러 3·1운동 100주년 서울시기념사업회는 김 의사 의거 현장 기념 조형물 설치 구상안을 발표할 계획이다. 조형물 디자인은 김 의사가 맞은 총 11발을 상징하는 구멍 11개와 김 의사가 일본 군경들과 싸운 장면이 담긴 구본웅 화백의 시화첩 ‘허둔기’를 활용한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우리 겨레에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김 의사의 행적을 널리 알리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주현진 기자 jhj@seoul.co.kr
  •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사직터널 사이로… 서쪽 서울 사람들의 시간을 잇다

    [2018 서울미래유산 그랜드 투어] 사직터널 사이로… 서쪽 서울 사람들의 시간을 잇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8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회 서울사방 서대문 안과 밖 편이 지난 26일 진행됐다. 봄바람과 봄볕을 따라 걷는 5월 마지막 주 해설이 있는 주말 나들이였다. 정원 30명과 대기자 및 진행자까지 40명이 결원 없이 모두 참가해 준비한 오디오 가이드 40개 전량이 동났다. 부부, 친구, 모녀, 동호인 등 다양한 관계와 연령의 조합이 환상적인 팀을 이뤘다.일행은 구수한 입담을 자랑하는 한세화 해설사를 따라 체부동 생활문화지원센터와 체부동 시장골목을 둘러본 뒤 사직터널로 향했다. 광화문풍림스페이스본 아파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내수동과 신문로 골목을 이리저리 헤치고 나아가 옛 경희궁 궁역인 서울역사박물관에 도착했다. 서대문 안이다. 경교장이 있는 강북삼성병원부터 서대문 바깥이다. 돈의문 박물관마을을 조성하면서 서대문을 복원하지 않은 건 두고두고 아쉽다. 일제는 1915년 도시계획을 핑계 삼아 서대문을 철거한 뒤 목재값 205원 50전을 받고 팔아 버렸다. 100년이 지난 뒤에도 ‘서대문이 없는 서대문’은 여전하다. 참가자들은 4·19혁명기념도서관, 충정아파트, 미동아파트, 충정각, 손기정체육공원 등 우리 근현대사가 남긴 서대문 밖 풍경을 2시간 30분 동안 차근차근 돌았다. 독립문에서 광화문을 잇는 찻길인 사직터널로 말미암아 끊어진 서울의 서쪽 사람 길을 회복하는 여정이었다. 일행 중 답사 경험이 풍부한 몇몇은 우리가 서촌이라고 부르는 우대(웃대)에서 서대문으로 나가는 길이 사직터널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다는 점을 새삼 확인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새문안길을 통해 두 장소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일깨웠다. 서촌이라는 지명의 유전(流轉)이 증명하듯 장소의 역사는 머물지 않고 쉼 없이 흐른다. 서촌의 유래는 한양을 구성하는 5촌(동촌·서촌·남촌·북촌·중촌)에서 비롯됐다. 여기서 서촌은 서소문과 덕수궁 주위를 이른다. 요즘 경복궁 서쪽, 인왕산 아래 동네를 서촌이라고 부르는 건 잘못된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경복궁 동쪽에 있는 북촌을 동촌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 동촌은 엄연히 낙산 아래 대학로 주변이다. 북촌은 북악산, 남촌은 남산 아랫동네이며 중촌은 사대문 중앙을 흐르는 청계천 주변을 지칭한다. 조선의 5촌 또는 5부는 현대 서울의 25개 자치구 격이다. 굳이 서촌을 고집하겠다면 ‘인왕산 서촌’이라고 한정했으면 한다. 1929년 9월에 발행된 잡지 ‘별건곤’에 실린 ‘옛날 경성 각급인의 분포 상황’이라는 글을 보면 ‘서소문 내외를 서촌이라고 하고…(중략)…서촌에는 양반이 살되 문반 중 서인이 살며…(중략)…우대에는 육조 이하의 각사에 소속된 이배(吏輩)·고직(庫直)이 산다’고 적었다. 18세기 문인 이가환이 당대 우대에 사는 경아전들이 주축이 돼 결성한 모임 ‘송석원시사’의 시화첩에 붙인 서문 ‘옥계청유첩서’에서 ‘경복궁의 서쪽은 좁은 땅이다. 이 때문에 서리들이 많이 살며 일에 익숙하고 질박함이 적다’고 묘사했다.우대라고 불리는 경복궁 서쪽과 서북쪽 누하동 근처는 궁에 소속된 대전별감, 내시가 각각 살았다는 사실도 적시돼 있다. 우대는 인왕산 아래 옥인동·누상동·사직동·효자동·창성동·통인동·신교동 등을 이른다. 17세기 말 한양의 풍속을 묘사한 정래교의 ‘임준원전’을 기준으로 보면 인왕산~경복궁 사이, 사직로~북악산 사이쯤이다. 이배·고직이란 서울의 중인 계급인 경아전의 통칭이라고 보면 된다. 이를 서리 또는 겸인이라고도 했는데 행정관청에서 실무를 맡은 말단 관리이자 양반가의 비서에 해당하는 청지기를 이른다. 양반촌 서촌과 중인촌 우대는 별개의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촌은 한양도성의 서남쪽 서소문 일대이며 지금도 행정구역상 서소문동을 이룬다. 양화진과 마포 및 서강나루에 도착한 어물과 세곡선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 요충지였기에 점차 양반촌에서 상인 거주지로 변했다.우대 중인과 서촌 상인들이 사실상 서울의 주인 노릇을 했다. 17세기 한성부의 호적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서울 사람 열에 일곱은 노비였다. 서울의 특성상 지방보다 노비가 많기도 했지만 조선 전체로 따져도 1200만명 중 30~40%는 노비 계층이었다. 한양 인구 20만명 중 왕족과 양반·관료 및 유생·선비는 10% 안팎이었고, 경아전·별감·서리·겸인·내시 및 역관·의관·화원·율관 등 중인 계층과 시전을 운영하는 부유한 상인 계층 그리고 서울에서 근무하는 하급 장교와 일반 군사 등 중인·평민 계층이 20~30% 정도였다. 임지를 전전하거나 낙향이 잦았던 양반과 달리 중인 및 상인이 서울 사람의 주류를 이뤘다고 할 수 있다. ‘인왕산 서촌’과 서대문은 별개의 동네이면서도 늘 연결됐다. 인경궁과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은 두 개의 궁이다. 인왕산 아래 인경궁은 누상동·누하동·누각동이라는 지명을 낳고 곧 사라졌다. 신문로(새문안) 일대의 왕기를 지우려고 세운 경희궁은 서궐의 역할을 했다. 도성 서쪽에는 서대문(敦義門)과 서전문(西箭門)이 있었다. 태종 때 세도가 이숙번이 자기 집 앞 서대문을 닫고, 문을 다른 곳에 짓도록 했기 때문이다. 새문은 ‘성문을 막은 문’(塞門)이라는 뜻과 더불어 ‘새로 지은 문’(新門)이라는 복합 의미를 가진다. 서대문을 대신한 서전문은 지금의 사직터널 앞쯤에 있었다. 사직터널을 뚫고 사직천을 복개해 사직로를 놓기 이전에는 고개로 막혀 있었다. 광화문을 돌아서 가야 하는 먼 길이었다. 조선의 왕들도 사직단에 갈 때는 광화문 육조대로를 지나 지금의 세종대로 네거리까지 나온 뒤 세종문화회관, 정부서울청사, 서울지방경찰청 앞길을 따라 사직단을 오갔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이원석 연구위원 ●다음 일정 : 서울사방 북촌(북촌개발자 정세권의 길)●일시 및 집결 장소 : 6월 2일(토) 오전 10시 안국역 2번 출구 앞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의상대사 창건 高雲寺, 가운루·우화루 지은 최치원 호 따 孤雲寺로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의상대사 창건 高雲寺, 가운루·우화루 지은 최치원 호 따 孤雲寺로

    1742년(영조 18년) 10월 보름, 임진강 우화정(羽化亭)에서 웅연(熊淵)까지 선상(船上) 연회가 벌어졌다. 참석자는 경기도관찰사 홍경보와 연천현감 신유한, 양천현령 정선이었다. 이날은 중국 북송의 시인 소동파(1037~1101)가 적벽강에서 뱃놀이를 하며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지은 660주년이었다고 한다. 우화정은 경기 연천군 중면 대사리에 있었다. 지금은 임진강댐 상류 북한 땅이다. 청천 신유한이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이라면 겸재 정선은 당대를 대표하는 화가다. 이 뱃놀이에서 신유한은 ‘의적벽부’(擬赤壁賦)를 지었고 겸재는 배가 우화정에서 떠나는 장면과 웅연에 닿는 모습을 각각 ‘우화등선’(羽化登船)과 ‘웅연계람’(熊淵繫纜)이라는 그림에 담았다. 여기에 창애 홍경보의 서문이 더해진 시화첩을 세 벌 만들어 나누어 가졌으니 유명한 ‘연강임술첩’(漣江壬戌帖)이다.번데기가 날개 달린 나비로 변하는 것이 우화(羽化)다. 우화등선(羽化登仙)은 사람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감을 이르는 도교적 표현이다. 소동파의 ‘훌쩍 세상을 버리고 홀몸이 되어 날개를 달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다’(飄飄乎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는 ‘적벽부’ 구절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겸재는 이 구절의 신선 선(仙) 자를 배 선(船) 자로 살짝 비틀어 화제(畵題)로 삼았다. 신유한(1681∼1752)은 집안 배경이 변변치 않은 탓에 늦은 나이까지 지방관을 전전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시와 문장에서만큼은 일찍부터 높은 평가를 받아 1719년(숙종 45)에는 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으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통신사 제술관은 여간 글재주가 뛰어나지 않으면 뽑힐 수 없었다. 신유한의 이름이 역사에 남아 있는 것도 통신사행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는 1719~1720년 일본을 여행하면서 지리·풍속·제도는 물론 자연환경까지 자세히 적었으니 곧 ‘해유록’(海遊錄)이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을 이끈 사명대사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사명대사 관련 자료를 모으고 자신의 평가를 붙인 ‘분충서난록’(奮忠難錄)을 편찬하기도 했다.●오늘날 고운사 중심은 대웅전… 과거엔 극락전 오늘은 ‘컬링의 고장’으로 떠오른 경북 의성의 고운사(孤雲寺)로 간다. 의성군 동북쪽의 고운사는 안동과 경계를 이루는 등운산(登雲山)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절 이름만으로도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孤雲) 최치원(857~?)에 자연스럽게 생각이 미친다. 신유한을 떠올린 것은 그가 평해군수 시절인 1729년(영조 5) 고운사의 사적기를 썼기 때문이다. 그의 사적기는 1918년 오시온이 지은 또 다른 사적기와 함께 이 절의 역사를 구성하는 결정적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고운사는 절의 역사를 이렇게 서술한다. ‘신라 신문왕 원년(681년) 해동 화엄종의 시조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연꽃이 반쯤 피어난 부용반개형상의 천하명당에 자리잡은 이 사찰은 원래 고운사(高雲寺)였다. 신라말 불교·유교·도교에 모두 통달해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如智)·여사(如事) 양 대사와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고운을 빌려 고운사(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 이후 도선국사가 가람을 크게 일으켜 세웠다. 현존하는 약사전의 부처님과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도 도선국사가 조성한 것들이다’. 고운사는 조계종 제16교구 본사로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에 흩어진 60곳 남짓한 절들을 관장하고 있다고 한다. 새로 지은 산문을 지나 일주문으로 들어서면 역시 최근 조성한 대웅전을 비롯한 30개 남짓한 전각이 규모 있게 자리잡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고운사는 ‘사세(寺勢)가 번창했을 당시에는 366칸 건물에 200여 대중이 상주했던 대도량이 지금은 교구본사로는 작은 사찰로 전락했다’고 적어 놓았으니 지금보다 훨씬 화려했던 시절이 있었나 보다. 오늘날 고운사의 중심은 웅장한 대웅전 주변이라 할 수 있지만, 과거의 중심은 극락전이었다. 극락전과 마주 보는 우화루 사이 양옆으로 만덕당과 종무소가 사방에서 마당을 에워싼 일종의 산지중정형 사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유행한 형태다. 극락전 영역은 소박하기만 하다.●가운루, 구름 탄 누각 의미… 등운산 계곡 가로질러 종교적 의미에서 절의 중심이 어디든, 고운사의 상징은 우화루와 가운루다. 등운산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가운루는 과거 다리 역할을 했다. 가운루란 구름을 타고 앉은 누각이라는 뜻이다. 곧 신선의 세계다. 고운이라는 최치원의 아호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우화루란 이름에서는 곧바로 홍경보, 신유한, 정선의 임진강 뱃놀이가 떠오른다. 사찰의 강당은 부처가 설법하자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법화경의 가르침을 빌려 우화루(雨花樓)라 이름붙이는 게 일반적이다. 지금은 찻집으로 쓰는 고운사 우화루에도 내부에는 우화루(雨花樓)란 편액이 하나 더 붙어 있다. 우화루와 가운루는 이 절이 최치원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음을 과시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화루 명칭은 신선·부처님 가르침 동시에 상징 고운사가 신유한에게 사적기를 청한 것도 청천이 유학은 물론 불교와 도교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청천은 사적기 서두에 ‘1728년 고운사 스님이 찾아와 청하는 것을 서류에 파묻힐 만큼 바빠 응하지 못했는데, 이듬해 사자(使者) 셋이 고운사 주지의 글을 다시 들고 오니 거절할 수 없었다’는 취지로 고운사의 역사를 정리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사적기는 신유한이 관련 사료를 엄격히 고증해 서술했다기보다는 스님들이 알고 있는 구전(口傳) 자료를 재구성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런데 청천의 사적기에는 ‘의상대사 창건’ 다음에 최치원이 등장하지 않고 곧바로 ‘고려 건국 초 운주화상 중수’로 넘어간다. 최치원의 고운사 중창설(說)과 이후 절 이름 변경설(說)은 신유한이 사적기를 쓰던 시기에는 아직 널리 보편화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명대사가 고운사를 의승군의 전초기지로 썼다는 이야기도 전하지만 ‘사명대사 전문가’인 신유한은 역시 사적기에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운사와 최치원과의 관계로 국한하면 신뢰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보물로 지정된 고운사 약사전의 석조여래좌상은 최치원이 살았던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미술사학계는 보고 있고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도 신라 후기 양식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신유한의 사적기에 왜 최치원과의 관계가 서술되지 않았고 오시온의 사적기에는 왜 들어가게 됐는지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다. ●극락전이 서쪽에 있는 건 서방정토 상징성 살린 것 가운루의 존재에서 보듯 고운사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그 동서쪽에 전각이 있는 사찰이었다. 극락전 영역이 서쪽에 자리잡은 것은 주존(主尊)인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서방정토의 상징성을 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계곡 동쪽은 모니전(牟尼殿) 영역이었다. 석가모니 부처를 모신 전각이다. 흔히 이런 전각을 대웅전이라 부르지만 절의 큰법당이라는 느낌을 주지 않고자 이런 이름을 붙인 것 같다.대웅전은 1992년 가운루 상류의 계곡을 메우고 모니전 영역을 해체해 세운 것이다. 모니전 옛 건물은 대웅전 동쪽의 삼층석탑 위로 옮겨 지었으니 지금의 나한전이다. 조촐함에서 닮은 나한전과 삼층석탑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던 것인 양 자연스러운 조화를 보여 준다. 일주문 밖으로는 화엄승가대학원이 보인다. 산내 암자인 운수암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신유한은 운수암기(雲水庵記)도 남겼으니 이래저래 고운사와는 인연이 깊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한강·돛단배…그 속엔 왕실 그릇 제작소 오롯이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한강·돛단배…그 속엔 왕실 그릇 제작소 오롯이

    조선시대 사옹원(司饔院)은 궁중의 먹을거리에 관한 일을 맡았던 관청이었다. 궁궐에서 필요한 그릇을 만들어 공급하는 것 역시 사옹원에 부여된 역할의 하나였다. 사옹원의 그릇 제작소인 분원(分院)은 땔감을 찾아 경기도 광주 일대를 옮겨 다녔다. 일대에 수백곳의 가마터가 남아 있는 것은 분원이 대략 10년 단위로 옮겨 다닌 결과이다. 땔감 때문이었다. 백자와 같은 경질 사기그릇을 구우려면 가마를 초고온으로 유지해야 했고 땔감은 끝없이 들어갔다.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의 경우 15세기와 17세기 두 차례에 걸쳐 왕실도자기 가마가 운영됐다는 발굴조사 결과가 나왔으니 흥미롭다. 15세기 신대리 주변 산림은 땔감 채취로 황폐해졌지만 200년 남짓 세월이 흐르자 가마를 다시 설치해도 될 만큼 복원됐음을 의미한다. ●‘천금을 줘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 낙관 찍어 그런데 분원은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산간 지역을 버리고 하천 주변으로 옮겨가게 된다. 도자기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한정된 지역의 산림자원으로 땔감을 충당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분원은 경종 1년(1721) 우천(牛川)변의 금사리에 자리잡는다. 금사리라면 달항아리를 비롯해 매우 질 좋은 백자를 생산한 곳이다. 오늘날에는 경안천이라고 부르는 우천은 순우리말로 소내라고도 한다. 용인에서 발원해 광주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든다. 분원은 영조 28년(1752) 오늘날의 분원리로 옮겨간 뒤 고종 21년(1884) 경영권이 민간으로 전환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금사리와 분원리는 지척이다. 하지만 분원리는 수운(水運)을 훨씬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분원이 한강 수운을 적극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원자재 공급원도 다양해졌다. 백자의 질을 좌우하는 태토(胎土)는 북한강 상류의 양구, 남한강 상류의 원주는 물론 멀리 경상도 서부 지역의 진주와 곤양의 백토도 세곡선에 실어 가져다 썼다. 땔감은 영조 1년(1725)부터 한강을 오가는 목재상인들로부터 10% 분량을 통행세로 걷어 충당했다. 겸재 정선(1676~1759)의 ‘우천’은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알면 이해가 쉽다. 겸재는 65세 되던 영조 16년(1740) 양천현령에 임명됐다. 양천현은 서울 강서구와 양천구 일대였다. 지금의 가양지구 복판에 현아(縣衙)가 있었다. 양천은 강 건너 도성이 멀지 않은 데다 물산이 풍부하고 경치도 좋아 현령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영조가 진경산수화풍이 경지에 오른 겸재를 이 자리에 앉힌 것을 두고 한강 경치를 마음껏 그려 보라는 뜻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겸재는 영조의 기대대로 한강 풍경을 33폭에 담았는데,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 그것이다. ‘경교명승첩’은 겸재와 사천 이병연(1671~1751)의 우정이 낳은 시화첩(詩畵帖)이기도 하다. 한양의 사천이 시를 써 보내면 양천의 겸재가 시제(詩題)에 맞추어 그림을 그린 것이다. 화폭마다 ‘천금을 준다고 해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는 뜻으로 ‘千金勿傳’(천금물전)이라고 낙관했다. ‘우천’에도 화면의 왼쪽 아래 이 도장이 찍혀 있다. ●정선의 그림 ‘牛川’ 한강 풍경 밀도 있게 재구성 ‘우천’은 영조시대 분원 일대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산 중턱에 보이는 큰 기와집은 분원 가마가 위치했던 바로 그곳이다. 물론 조금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기록상 겸재가 ‘우천’을 그릴 당시 분원은 아직 금사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운이 편리한 분원리에는 이미 사옹원과 관련한 어떤 시설이 운영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것이 아니라도 겸재의 모든 진경산수화는 눈에 보이는 실제 경치를 화폭에 옮긴 것이 아니다. 게다가 겸재도 왕실 부속기관인 분원의 존재가 아니었다면 굳이 이 그림을 그릴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싶다. 그림 속 돛단배는 분원에 필요한 원자재를 실어 오거나 완제품을 실어 가는 데 썼을 것이다. 다른 배를 타고 멀리서 바라본 듯한 그림의 구도도 일대 풍경을 압축하여 밀도 있게 재구성한 것으로 실경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30] 겸재가 묘사한 국영 도자기 제작소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30] 겸재가 묘사한 국영 도자기 제작소

     겸재 정선(1676∼1759년)은 65세 되던 영조 15년(1740년) 양천현령에 임명됐다. 양천현은 지금의 서울 강서구와 양천구 일대다. 아파트가 가득 들어찬 지금의 가양지구 한 복판에 현아(縣衙)가 있었다. 양천은 도성이 강 건너로 멀지 않은 데다, 물산이 풍부하고 경치도 좋아 현령 자리를 노리는 인사가 많았다고 한다.  영조가 진경산수화풍이 경지에 오른 겸재를 양천현령에 임명한 것을 두고 한강변 경치를 마음껏 그려보라는 뜻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겸재는 영조의 기대대로 한강변의 경치를 33폭에 담았는데,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 그것이다.  ‘경교명승첩’은 겸재와 당대 진경시의 거장인 사천 이병연(1671∼1751)의 우정이 낳은 시화첩(詩畵帖)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겸재의 양천현령 발령으로 헤어지게 되자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양의 사천이 시를 써 보내면 양천의 겸재가 시제(詩題)에 맞추어 그림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화폭마다 천금을 준다고 해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는 뜻으로 ‘千金勿傳’(천금물전)이라고 낙관하기로 했다.  ‘우천’(牛川)에도 화면의 왼쪽 아래 ‘천금물전’ 도장이 보인다.‘우천’은 ‘경교명승첩’에 담겨있는 한강변 풍경 가운데 가장 상류지역에 해당한다. 우천은 용인에서 발원해 광주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드는 경안천의 하류지역이다. 경안천 하류 일대는 팔당댐이 지어진 뒤 수도권 주민들의 식수원인 거대 호수로 탈바꿈했다.  ‘우천’이 눈길을 끄는 것은 풍경도 풍경이지만 분원(分院)의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분원은 조선시대에 왕실에 음식을 공급하는 총괄기관인 사옹원의 그릇을 만드는 하부조직으로 일종의 국영 도자기 제작소였다고 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분원이 있던 곳이 바로 그림 속에 집들이 보이는 지금의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이다. 기관 이름이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된 것이다.  ‘우천’에 나타난 분원의 모습은 왜 이곳이 왕실 도자기 제작소로 이름을 떨쳤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맑고 풍부한 물과 충분한 땔감, 원료의 조달과 완성품의 수송이 손쉬워야 한다는 도자기 가마의 입지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분원은 세조 13년(1467년)에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사옹방을 사옹원으로 이름을 바꾼 다음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 보통 10년을 주기로 옮겨다녔다. 땔감을 찾아다닌 것인데, 경종 즉위년(1720)에 이르면 더 이상 가마에 불을 지필 수 없는 형편에 이른다.  분원을 우천이 가까운 금사리로 옮긴 것은 배가 지나다니는 하천에서는 땔감 수급이 원활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땔감 뿐만 아니라 그릇을 만드는 흙 역시 수로를 이용해 편리하게 공급받을 수 있었다. 만들어 놓은 그릇을 실은 배는 노를 저을 필요도 없이 흐름을 타고 순식간에 마포에 로 다다를 수 있는 것도 장졈이었다.  그림에 보이는 산중턱의 큰 기와집이 분원 시설인지는 얼마간 의문도 없지 않다. 금사리에 있던 분원이 공식적으로 이전한 것은 영조 28년(1752)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교명승첩’이 제작된 시기와는 10년이 조금 넘는 시차가 있다. 겸재가 찾았을 당시 사옹원과 관련한 어떤 시설이 이미 분원리에 세워져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배를 타고 바라보는 시점의 ‘우천’은 일대 풍경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압축하여 밀도있게 재구성한 그림이다. 산허리에 기와집이 보이지 않고, 강가에는 그릇을 실어나를 돛단배가 없었다면 ‘우천’은 조금 심심한 그림이 되었을 것이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시리즈 전체보기
  • 진경산수화로 유람하는 조선의 산천

    진경산수화로 유람하는 조선의 산천

    조선시대에는 중국의 유명 화가들이 그린 작품을 최대한 비슷하게 따라 그리는 것을 최고의 배움이요 재능으로 여겼다. 하지만 아무리 잘 그린들 그것은 중국의 산이요 강이었다. 17세기 조선성리학의 토대가 확고해지면서 우리의 강산을 우리 고유의 시각문화로 담아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고 이는 시대의 문화를 특징 짓는 주된 흐름이 된다. 우리 국토 안에 있는 진짜 경치(眞景)를 사생해 내는 진경산수다. 진경산수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토대를 마련한 조선의 성리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율곡학파가 주도하고 퇴계학파가 동조해 인조반정이 성공한 이후 우리 산천과 삶의 풍경에 자주적 정신과 자연관을 접목한 진경산수화의 서막이 열린다. 하지만 제대로 화법을 창안하고 이를 완성해 진경시대 문화를 연 것은 겸재 정선(1676~1759)이다. 주역에 밝은 문인화가였던 겸재는 주역의 음양조화와 음양대비의 원리를 토대로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했다. 중국 남방화법의 기본인 묵법으로 음인 흙산을 표현하고 북방화법의 기본인 필법으로 양인 바위산을 표현했다. 중국에서는 대립적으로 발달해 온 남북 화법을 이상적으로 조화시켜 우리 산천의 표현에 가장 알맞도록 만들어 낸 획기적인 화법이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배움터 2층 디자인박물관에서 간송미술문화재단의 소장품을 주제별로 묶어 소개해 온 간송문화전의 세 번째 전시 ‘진경산수화-우리 강산, 우리 그림’전은 진경산수화의 진수를 감상할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다. 겸재와 그 뒤를 잇는 현재 심사정, 단원 김홍도, 진경산수의 정신과 화풍을 발전시킨 조석진, 안중식, 노수현 등 조선시대 화가 21명의 작품 90여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번 진경산수화전에는 겸재 59세 때의 작품인 경북 울진의 명승 ‘성류굴’부터 84세로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 ‘금강대’까지 출품된다. 우리 국토에서 명승지로 꼽히는 금강산과 관동팔경, 단양팔경, 서울 주변의 경교명승, 박연폭포 등이 포함된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백인산 연구실장은 “진경은 조선성리학이라는 고유이념을 바탕으로 움터오는 조국애와 국토애의 발현현상이었다”면서 “절묘하게 남북화법을 조화시킨 기법으로 우리 산천의 특징을 담아낸 겸재의 진경산수화들을 연대별로 유의하며 보면 진경산수화법의 변화과정을 확연히 구분해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겸재는 36세 때 금강산 초입의 금화현감으로 있을 때 진경시의 대가인 사천 이병연과 함께 스승인 삼연 김창흡을 모시고 금강산을 처음 여행한다. 이때 완성된 시화첩 ‘해악전신첩’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겸재는 당대 제일의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된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나 72세가 된 겸재는 그곳을 다시 찾아 무르익은 솜씨로 ‘금강내산’을 그렸다. 비로봉을 정점으로 내금강 1만 2000개 화강암봉을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놓아 막 피어나는 백련꽃 봉우리처럼 화면을 구성했다. 평생을 수련하며 독자적인 진경산수화풍의 완성에 매진한 그가 노년기에 터득한 우주 자연의 섭리를 풀어낸 명작이다. 비슷한 시기에 그린 ‘단발령망금강’, 봄의 금강산 경치를 그린 ‘금강전도’, ‘만폭동’ 등은 필묘법과 묵묘법을 적절히 조화해 그린 진경산수화풍의 전형적인 작품들이다. 겸재는 말년에 이르러 장식적인 요소를 모두 걷어내고 극도로 추상화된 진경산수화법으로 그려낸다. ‘금강대’는 겸재 만년 특유의 대담한 필법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겸재 다음 세대인 현재 심사정, 능호관 이인상, 진재 김윤겸, 단릉 이윤겸 등 사대부 화가들은 겸재의 영향으로 진경산수화를 각자의 기법으로 완성한다. 진경 말기에 이르면 단원 김홍도, 고송유수관 이인문, 긍재 김득신 등 화원화가들이 배출돼 겸재의 진경정신을 계승한다. 특히 김홍도는 정조의 왕명을 받들고 강원도 영동 9군의 명승을 사생해 돌아오는데 세련된 필법으로 섬세하고 충실하게 묘사해 겸재와는 또 다른 흥취를 자아낸다. 이번 전시에는 진경 문화가 부정당하기 시작하는 북학시대에 그려진 이방운, 윤제홍, 김기서, 조정규, 허유 등 진경정신을 상실한 산수화와 국망기에 활동한 김영, 조석진, 안중식 등의 작품들이 함께 걸렸다. 밝은 인공조명과 현대적인 공간의 생김새 탓에 고미술의 느낌이 반감되는 게 흠이지만 작품에만 집중하면서 진경문화의 실체와 시대별 진경산수화의 특징을 비교 감상하면 큰 공부가 된다. 전시는 내년 5월 10일까지. 입장료는 성인 8000원, 학생 4000원. 1644-1328.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단종 영정 승하 552년만에 첫 조성

    단종 영정 승하 552년만에 첫 조성

    조선시대 단종(1441~1457년)의 영정이 처음으로 조성됐다.단종은 아버지 문종이 갑작스레 승하해 12세에 조선의 6대 임금이 됐으나 재위 3년 만에 삼촌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준다(선양·禪讓). 형식은 넘겨주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숙부에게 강제 퇴위당한 것으로, 정궁인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거처도 옮겨야 했다. 그후 사육신이 주도한 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2년 후에는 노산군(山君)으로 격하돼 강원 영월로 유배됐고, 4개월 후 사약을 받았다. 단종의 시신은 세조의 어명으로 제대로 수습되지 않았으나, 당시 영월의 호장이던 엄흥도가 몰래 수습해 암매장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후대 임금인 숙종이 단종의 왕위 ‘선양’을 인정해, 사후 241년 만에 단종을 왕으로 복위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종에 대한 기록은 쉽게 세상에 나오지 못했고, 관련 유물도 많지 않았다. 생김새 또한 전혀 알 길이 없다. 이번 영정은 몇 줄 안 되는 기록을 근거로 김호석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가 상상력을 동원해 그린 것이다. 김 교수는 “‘기록에 총명하고 성덕이 있었다.’고 돼 있었다.”면서 “이를 토대로 맑고 투명한 도화색으로 얼굴을 그렸다.”고 말했다. 사망당시 17세에 불과했던 단종의 모습은 조선 초기의 높이가 낮은 익선관을 쓰고, 단심(丹心)을 나타내듯 붉은 색 도포를 입고 있다. 코 밑에 아직 수염이 채 나지 않은 앳된 모습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고 초췌하다. 눈의 형태와 눈빛 탓이다. 원래 조선시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에 나타난 왕의 눈들은 총명함 등을 표현하기 위해 눈꼬리가 치켜올라가 있는데, 단종의 눈꼬리는 그렇지 않다. 불안한 눈빛을 표현하기 위해 오른쪽 눈을 정면상보다 살짝 비틀어서 그린 것도 이유가 된다. 이번 단종 영정 조성은 고미술품 전문화랑인 고도사 김필환 대표가 주도한 것으로, 단종의 영정과 함께 단종 관련 자료 100여점도 모아 ‘잊혀져간 단종 역사의 숨결을 찾아’란 전시를 연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 28일부터 6월9일까지다. 김 화백이 구성하고 소림 화가가 그린 길이 15m짜리 대형 산수화인 ‘단종산하도’도 처음 선보인다. ‘단종산하도’는 영월로 유배된 단종이 그곳에서 사약을 받을 때까지의 주요 자취를 단종의 시각에서 기록한 산수역사화다. 형 신숙주와 달리 수양대군의 권력 찬탈에 부정적이었던 신말주가 제작을 주도한 시화첩 ‘십로계화상’도 이번에 처음 공개된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57) 겸재 정선의 ‘우천’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57) 겸재 정선의 ‘우천’

    겸재 정선(1676∼1759년)은 65세 되던 영조 15년(1740년) 양천현령에 임명되었습니다. 양천현은 서울 강서구와 양천구 일대로, 지금은 아파트가 가득 들어찬 가양지구 한 복판에 현아(縣衙)가 있었지요. 양천은 도성이 강 건너로 멀지 않은 데다, 물산이 풍부하고 경치도 좋아 현령 자리를 노리는 인사가 많았다고 합니다. 영조가 진경산수화풍이 경지에 오른 겸재를 양천현령에 임명한 것을 두고 한강변의 경치를 마음껏 그려보라는 뜻이라고 해석한 사람은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입니다. 겸재는 영조가 ‘기대’한 대로 부임 첫해와 이듬해에 걸쳐 한강변의 경치를 33폭에 담았는데, 바로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입니다. ●시화첩 경교명승첩 중 한 작품 ‘경교명승첩’은 겸재와 당대 진경시의 거장으로 절친한 벗인 사천 이병연(1671∼1751) 사이의 우정이 낳은 시화첩(詩畵帖)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겸재의 양천현령 발령으로 헤어지게 되자 너무나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한양의 사천이 시를 써 보내면 양천의 겸재가 시제에 맞추어 그림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고 합니다.‘경교명승첩’의 화폭마다 천금을 준다고 해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고 ‘千金勿傳(천금물전)’이라고 낙관한 것도 우정을 영원히 간직하자는 뜻이겠지요. ‘우천(牛川)’에도 화면의 왼쪽 아래에 ‘千金勿傳’ 도장이 보입니다.‘우천’은 ‘경교명승첩’에 담겨있는 한강변 풍경 가운데 가장 상류지역에 해당하지요. 지금은 경안천이라고 불리는 우천은 경기도 용인에서 발원하여 광주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이었습니다. 경안천 하류는 팔당댐이 지어진 뒤 거대한 호수로 탈바꿈했지요. ‘우천’이 눈길을 끄는 것은 풍경도 풍경이지만 분원(分院)의 모습이 담겨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원은 조선시대에 왕실에 음식을 공급하는 총괄기관인 사옹원의 그릇을 만드는 하부조직이었습니다. 일종의 국영 도자기 제작소였지요. 조선의 마지막 분원이 있던 곳이 바로 그림 속에 집들이 보이는 지금의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입니다. 기관의 이름이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된 것입니다. ‘우천’에 나타난 분원의 모습은 왜 이곳이 왕실 도자기 제작소로 이름을 떨쳤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맑고 풍부한 물과 충분한 땔감, 원료의 조달과 완성품의 수송이 손쉬워야 한다는 도자기 가마의 입지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음을 보여주고 있지요. 분원은 세조 13년(1467년)에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사옹방을 사옹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관리를 임명한 이후 경기도 광주 일대에서 보통 10년을 주기로 옮겨다녔습니다. 땔감이 부족했기 때문인데, 경종 즉위년(1720년)에는 더 이상 가마에 불을 지필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다고 하지요. 이듬해 지금의 광주군 남종면 금사리로 분원을 옮긴 것은 장작을 나르는 배가 지나다니는 강가에 자리잡으면 땔감을 사서 쓸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우천’에 보이는 산중턱의 큰 기와집이 분원인지는 얼마간 의문도 없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에 가마를 허물고 국민학교를 지은 바로 그 지점이기는 하지만, 금사리에 있던 사옹원 분원이 분원리로 이전한 것은 영조 28년(1752년)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경교명승첩’이 제작된 시기와는 10년이 조금 넘는 시차가 있습니다. ●남종면 일대 풍경 압축적으로 그려 금사리는 그림에 보이는 마을의 오른쪽 고개를 넘으면 바로 나타납니다. 겸재가 찾았을 당시 사옹원과 관련한 어떤 시설이 이미 지금의 분원리에 세워져 있었을 가능성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겸재가 화폭에 분원을 앞당겨 분원리에 가져다 놓은 것은 진경산수 정신이 낳은 상상력의 발로라고 이해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우천’은 남종면 일대의 풍경을 압축하여 밀도있게 재구성해 놓았지요. 산허리에 기와집이 보이지 않고, 강가에는 마포로 도자기를 실어날랐을 돛단배가 없었다면 ‘우천’은 심심한 그림이 되었을 것입니다. dcsuh@seoul.co.kr
  •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5)금강산 삼일포의 매향비

    [바다에 살어리랏다-주강현의 觀海記](35)금강산 삼일포의 매향비

    고려 충선왕 원년(1309년). 금강산 삼일포에 강릉도 존무사(存撫使·관찰사) 김천호를 비롯, 강릉부사 박흥수, 판관 김관보 등 동해의 지방관리들이 승려 지여(志如)와 함께 모였다. 의관 정제한 이들이 먼길 마다않고 이른 아침에 모인 것을 보면 필경 곡절이 있을 법하였다. 석수장이가 지게에 비석을 지고 다가왔다. 김천호는 아무 말없이 눈길로 배를 가리켰다. 비석이 먼저 배에 실렸다. 이어 김천호를 비롯해 박흥수 등이 차례로 배에 올랐다. 다행히 날씨는 좋았다. 지여가 “날짜 하나는 참으로 잘 잡았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으나 좌중은 묵묵부답이었다. 응답할 분위기가 아닌 듯했다. 배는 삼일포를 향해 노를 저어갔다.“단서암에 배를 대게나.” 김천호는 단호히 말했다. 삼일포에 있는 4개의 섬 중에서 단서암(丹書岩)을 택한 것이다. 단서암을 선택한 데는 연유가 있었다. ●고려 충선왕 원년, 단서암에 매향비를 세우다 신라 화랑들이 삼일포를 다녀간 기념으로 남겼다는 기록,‘영랑 일행이 남석을 다녀가다.’(永郞徒南石行)는 여섯 글자가 전해지고 있음을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예로부터 미륵의 당래하생(當來下生)을 서원하면서 은밀하게 찾아들던 비밀스러운 곳임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매향비를 세우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 아닌가.“호숫물이 가로막고 미륵도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곳이니, 누군들 이 매향비를 함부로 옮기지는 못하리라.”라고 내심 확신하면서. 이상의 기록은 삼일포 매향비의 40행,369자를 풀어서 매향비 세우던 광경을 재구성해본 것이다. 당시 강원도 각 포구에 향나무를 베어 물 속에 넣은 뒤 그 증표로 삼일포에 매향비를 세웠다. 매향비가 건립된 1309년으로부터 40년이 지난 1349년 가을, 이곡(李穀)이 삼일포를 다시 찾았다.‘죽부인전’의 작가로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올라 있는 이곡은 ‘동문선’에 전해지는 동유기(東遊記)에 이렇게 썼다.‘초사흘에 일찍 일어나 삼일포에 이르렀다. 성에서 북쪽으로 5리쯤에 있는데, 배에 올라 서남쪽 조그만 섬에 이르니, 덩그런 큰 돌이 있다. 그 꼭대기에 돌벽장이 있고 석불이 있으니, 세칭 미륵당이다.’ 이곡이 찾을 당시에는 매향비는 물론 석불까지 있었고 미륵당도 현존해 이곳이 미륵신앙의 ‘메카’였음이 틀림없다. 그 뒤로도 매향비를 직접 보았다는 기록은 곳곳에 있다. 농암 김창협(1651∼1708)은 1671년 여름에 금강산을 유람한 뒤 삼일포에서 배를 타고 호수의 섬으로 들어갔다가 이런 글을 남겼다.‘배를 옮겨대고 사선정 남쪽의 작은 바위 봉우리에 오르니 짤막한 비석이 있는데 마멸되어 글자를 볼 수가 없었다. 이를 세상에서 말하기를 미륵 매향비라고 한다.’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김상성 주관하에 1746년부터 1748년 사이에 그려진 시화첩 ‘관동십경’에는 매향비가 선명하게 나타나며,‘매향비 아래에서 짐짓 배를 돌리네.’라는 시구까지 확인된다. 박종(1735∼1793)은 1767년 경주 구경을 떠났다가 삼일포에 들러서 쓴 ‘동경기행(東京紀行)’에서 이 비를 침향비(沈香碑)라고 하여 향을 묻었음을 분명히 하였다.‘단서암에 올라 침향비를 보고는 배를 타고 오른쪽 언덕에 이르러 걸어서 솔숲을 빠져나와 돌아보니, 중은 노를 저어 돌아가고 있는데 풍경이 한적하기로는 그만이다.’ 이처럼 삼일포 매향비는 후대인들의 인구에 회자되던 비석이었으며 금강산 순례의 필수 코스였다.20세기에는 위당 정인보 선생이 금강산을 다녀오며 기록을 남겼다.‘관동 해안에 향을 묻은 곳이 많으니, 이는 불사(佛事)라. 미륵하생할 때 같이 용화회(龍華會)에 나게 해달라는 발원이라 한다. 호수 위에 매향비가 있었는데 근재(謹齋)의 단갈사제(斷碣沙際)라는 시어가 이를 이름이다.’ ●향 묻고 미륵 오기를 바란 민중들 매향비가 세워지던 충선왕 원년이면 고려가 저물어가던 때가 아닌가. 숫처녀와 내시를 공물로 바치는 등 원나라의 횡포가 자못 극심하였고, 불교의 타락상도 극에 달하고 있었다. 당대 불교가 보여주었던 그릇된 행실을 새삼 탓해서 무엇하랴. 그러한 시대에 동해의 변방에서 지방관리들에 의해 매향의례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당시 민중의 염원을 형식적으로나마 풀어주려는 노력의 일환은 아니었을까. 삼일포 매향비는 1926년에 일본인 등전량책(藤田亮策)에 의해 소개되었다. 그런데 그 뒤로 매향비가 간 곳 없이 사라지고 탁본한 비문만이 전해지고 있을 따름이다. 어떤 경로로 이 매향비가 사라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높이 60㎝에 불과한 작은 비였으니 집어가려고 마음만 먹는다면야 손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어디선가 박복한 여생을 쓸쓸히 보내고 있든가, 아니면 그 누군가가 미륵의 당래하생을 서원하면서 향을 묻듯 비 자체를 삼일포 깊은 물 속에다 던져버렸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서원이 담겨 있는 매향비(埋香碑)란 무엇일까. 매향비란 글자 그대로, 향을 묻고 미륵이 오기를 기원하면서 세운 비석을 말한다. 그러나 그 실체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불교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가 하면 금석문의 숨겨진 비밀 혹은 글씨로 새겨진 비밀문서라고 하는 이들도 있고, 미륵세상을 찾아가는 해법이라고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 모든 의문의 열쇠가 매향비에 있다. 나라가 좁다보니 비밀스러운 것이 별반 없는데, 매향비만큼은 우리들의 지적 호기심과 궁금증을 더해주기에 충분한 탐구 대상이 된다. 금강산 매향비문을 보고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현장을 찾아 나선다면 실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삼일포 매향비문에는 삼척현 맹방촌(孟方村)에 향나무 150그루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맹방촌은 지금의 동해안 맹방해수욕장에 해당되며, 산봉우리가 아름답게 솟고 백사장이 좋아 예로부터 명승지로 알려진 곳이다. 삼일포 매향비에서 지적한 맹방에 가면 지금도 매향의례에 대한 촌로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그야말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는 매향비의 신화다. ●‘침향’은 새로운 세상에의 희구 상징 매향비는 흡사 해적들이 남긴 ‘보물지도’처럼 미륵신앙의 비밀과 맞닿아 있다. 그들은 왜, 무슨 마음에서 그런 비의(秘儀)를 열려고 했을까. 지금까지 발견된 매향비는 모조리 바닷가, 그것도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대에 자리잡고 있다. 그 비밀은 향을 바다에 묻는 침향(沈香)에 있다. 사찰에서 피우는 향은 그을음이 생기므로 해마다 불상을 닦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침향은 그을음이 없어 귀하게 치며 약재로도 쓰인다. 부적에 영험이 있다고 믿듯이, 침향의 신성성에 기대어 고급 약재로 인정되었던 것 같다. 침향이 얼마나 소중했던가는 사리함에서 잘 드러난다. 금동으로 감싼 사리함 안에는 옥함이 있는데, 그 옥함 속 사리와 직접 닿는 부분만큼은 침향으로 만들었을 정도다. 명품이라고 부를 만한 불상 중에도 딱딱한 침향을 파서 조각한 것이 다수 있다. 침향을 예사롭지 않게 대한 옛사람의 경외심이 배어나온다. 갯펄에 묻은 향목은 침향이 되면 물 위로 떠오른다고 한다. 이무기가 천년이 되면 용이 되어 승천하듯, 단순한 향목도 침향이 되면 이런 ‘승천의식’을 거친다고 믿었던 것. 미륵하생을 기다리는 민중들에게 침향의 부상은 바로 새로운 세상의 떠오름이 아니었을까. 매향비는 반드시 강물과 바닷물이 합수하는 바닷가에 세워졌다. 한반도 최고의 절경으로 불리는 해금강에 연한 삼일포는 석호의 으뜸으로, 신라시대 화랑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아름다운 삼일포 안에 세워진 매향비는 미륵을 기다리며 집단적으로 서원하던 당대 민중들의 장엄, 그 자체를 웅변해준다. 미륵을 기다리는 민중의 서원은 하나의 운동 양상으로 발전하곤 하였다. 가까운 중국에서도 미륵에 의탁한 ‘동양식 천년왕국운동’이 자주 벌어졌다. 청조를 타도하고자 한 ‘백련교의 난’ 따위가 그것이다.‘천하가 난(亂)하면 미륵불이 강생한다.’,‘미륵불이 바로 천하를 지킬 것이다.’,‘천지를 바꾸자, 세상을 바꾸자, 반란의 해, 미결(未決)의 해’ 같은 슬로건에서 새 세계의 열망과 미륵신앙과의 관련성이 잘 드러난다. 우리의 경우에도 궁예가 스스로 미륵불을 자칭하였고, 강증산도 미륵불에 의탁하였다. 불교가 시작된 이래로 미륵신앙은 하나의 운동, 미래불의 기다림 그 자체였다. 무슨 확신이 민중들로 하여금 미륵의 당래하생을 서원하게 만들었을까. 그만큼 현실의 고통이 심했다는 증거이리라. ●통일시대 오면 비밀스러운 자태 드러내려나 남쪽 사람들이 연일 금강산 관광에 나선다. 관광에 나선 남쪽사람들에게 삼일포와 해금강은 필수 코스이지만 정작 안내문에는 매향비에 관한 기록이 없다. 남한은 물론이고 북쪽의 안내자들도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매향비를 설명하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 삼일포의 가장 신비로운 대목인 매향비의 내력을 전혀 모르고 돌아오기 마련이다. 마음 속으로만 삼일포를 그리워하다가 실제로 삼일포에 갔을 때, 필자는 삼일포 호수 안의 섬들을 바라보면서 매향비 생각에 가슴이 벅차 잠시 숨이 막혔던 적이 있다. 사라진 삼일포 매향비가 혹시나 말법의 상징처럼 존재하는 분단상황이 종식되고 통일시대가 오면 비로소 그 비밀스러운 자태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을까.
  • 선비다운 삶이 그립다/학고재화랑 ‘유희삼매전’

    옛 선비는 문(文)·사(史)·철(哲)은 물론 시(詩)·서(書)·화(畵)를 겸비한 이상적인 인간상을 목표로 했다.그러나 오늘날 지식인은 그러한 전인적인 자기 도야와는 거리가 멀어 세상의 사표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선비가 그리운 시대이다.꼿꼿한 지조와 굳건한 기개가 그립고 넉넉한 인정과 은은한 아취가 아쉽다.새로 단장한 서울 인사동 학고재가 조선 선비들의 멋을 흠뻑 느끼게 하는 전시를 마련했다.‘선비의 예술과 선비취미-유희삼매’전(20일∼12월2일)이 그것이다. 선비는 어떤 자세로 살았을까.이번에 출품된 영조 때 문인 한정당 송문흠의 예서 ‘행불괴영 침불괴금(行弗愧影 寢不愧衾)’의 뜻을 새겨 보면 금방 알 수 있다.행동할 때는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게 하고 잠잘 때는 이부자리에 부끄럽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그러나 선비라고 해서 늘 엄격한 기강 속에 경직되게 살았던 것은 아니다.공자님 말씀대로 “도를 목표로 하고,덕에 근거하며,인에 의지하는” 삶을 살았으되 예에서 노닐었다.한마디로 ‘유어예(遊於藝)’할 줄 아는 여백이있었다.이번에 소개된 송하옹 조윤형의 행서 ‘유희삼매(遊戱三昧)’에는 그런 선비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선비예술의 면모는 문인화에 그대로 드러난다.이정의 ‘묵란도’,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석란도’,조속의 ‘묵매도’,조희룡의 ‘홍매도’,장승업의 ‘묵모란도’는 사군자를 통해 선비의 지조와 품격을 표현한 작품들.조선시대 선비들이 애장하던 시화첩도 여러점 나왔다. 정선의 ‘구학첩(丘壑帖)’은 발문과 함께 발굴돼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김광국의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 속에 들어있는 외국 그림 세 점도 내걸렸다.한국계 중국 화가 김부귀의 ‘낙타도’,18세기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 ‘미인도’,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 솅크의 동판화 ‘술타니에(Sultanie) 풍경’이다.선비 취미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김용준,김환기,이용우,이상범,이응노 등의 작품도 눈길을 끈다.(02)739-4937. 김종면기자
  • 詩 안으로 끌어들인 ‘醜의 미학’/김지하 수묵시화첩 ‘절, 그 언저리’

    민주투사,시인,사상가,동양화가….이런 수식어보다는 그저 ‘예술가’란 말이 어울리는 김지하.그가 새 봄 두가지 모습으로 속내를 내비쳤다.하나는 계간 문예지 ‘시작’과의 신춘대담이고,다른 하나는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수묵시화첩 ‘절,그 언저리’(창작과비평사)이다. 시화첩은 2001년 봄부터 지난해 가을까지 문예지에 발표한 절 순례 시 32편에다 매화·난초·달마를 소재로 “만날 먹장난”한 수묵화를 보탠 것이다.가는 곳마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상상의 나래 속에 선인들을 불러들여 민족의 앞날을 사색한 힘겨운 기록들이다. 그는 “지난해 시집 ‘화개’의 애잔함·슬픔을 넘어 선(禪)적 생명의 숭고함에로,불(佛)적 영성의 심오함에로 나아가고자 했고,그 과정에서 ‘괴(怪)’와 ‘기(奇)’와 ‘추(醜)’를 도리어 시 안으로 끌이들이고자 했다.”고 말한다. 선문답처럼 들리는 설명을 이해하려면 ‘신춘대담’을 읽는 게 도움이 된다.홍용희 경희사이버대 교수와의 대담에서 김지하는 지난해 ‘붉은 악마와 촛불 행진’으로 터져나온 민족의 역동성을 “역사적 전환기에 나타나는 민중적 힘”으로 바라봤다.이 힘을 문학적 추동력으로 전환시켜야 하는데 이를 위해 이론화 이전에 추,괴,기,축제성,골계에 근거한 이미지네이션을 통한 작품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흔히 비정상적이고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는 추,괴,기 등에 당대 문화논리를 전복할 수 있는 힘이 잠재돼 있다.대담에서 그는 김정희의 예를 들면서 그가 당대에 유행하던 우아하고 귀족적인 글씨를 부정하는 그릇을 ‘괴와 기의 미학’에서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 정점을 김지하는 눈 속에서 봄을 예언하는 매화로 비유한다.“유생들은 꽃에만 집착했지만 구부러진 줄기와 몸체,거기에 진짜가 있다.”며 이것이 서구의 ‘추(醜)의 미학’과 통한다는 것.이 미학이 문예부흥·문화혁명을 관통하며 추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절,그 언저리’는 이런 그의 주장을 시와 그림으로 모색한 것이다.환웅·단군의 얼굴을 붉은악마에 연결하는가 하면(시 ‘삼성각’),‘백정의 스승이 되고/민중의 참벗이 된’(‘백정의 난’)동학당소년 접주 김도야가 독학한 수묵기법을 통해 가능성을 찾기도 한다. 이종수기자
  • 詩로 달래고 그림되어 가슴적신 美學

    옛 문인 묵객들은 만남의 의의와 기쁨을 그림으로 남겼고,헤어짐의아쉬움을 시와 글씨로 달랬다.계회도(契會圖)니 전별시(餞別詩)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선인들의 만남과 헤어짐의 미학,그 아취 넘치는 정신은 현대인의 메마른 마음밭을 적셔주기에 충분하다.고서화를찾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잃어버린 삶의 여유를 되찾게 하는 고서화 특별전이 서울 관훈동 학고재화랑에서 열리고 있다.30일까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계회도다.계회도는 문인풍속화의 한 유형으로,고려와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문인계회의 광경을 묘사한 그림을말한다.16세기 계회도는 대부분 관료들의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됐다.그 모임은 입직(入直)과 송별,사가독서(賜暇讀書),전·현직 관료의 만남 등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시음회(詩飮會) 형태로 진행됐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시음계회는 중국 진나라 왕희지의 난정수계,당나라 백낙천의 낙중구로회,송나라 문언박의 진솔회 같은 풍류모임에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계회도는 고려 때 시작돼 조선조 성리학이 완성되는 16세기,붕당정치가 정착되면서 전형화됐다.조선시대 문인들은 관아의 동료나 과거의 동년(同年) 또는 70세 이상 원로 사대부들이 참여하는 기로회(耆老會) 등의 그림을 그려 후손들이 선조의 삶을 배우도록 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16세기 계회도는 모두 26점.특히 이번 전시에는 예안김씨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추관(형조)계회도’와 ‘기성(병조)입직사주도’,‘금오(의금부)계회도’ 등 3점의 국보급 계회도가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돼 관심을 모은다.‘추관계회도’는 을사사화 이듬해인 1546년 명종 1년에 정5품 정랑 4명과 정6품 좌랑 4명 등 형조소속 낭관 8명의 모임을 그린 수묵화.‘기성입직사주도’는 정3품직참의와 참지,정6품 좌랑 2명 등 4명의 계회를 담은 산수도다.또 1606년에 제작된 ‘금오계회도’는 의금부 소속 종4품 경력 2명 등 10명의 모임을 기념해 그린 작품이다.이 3점의 계회도는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초에 이르는 명종과 선조시대 계회산수의 양식적 변화를 살피는 데 귀한 자료로 꼽힌다.이와 관련,이태호 전남대박물관장은 “이3점의 계회도는 사림의 성장기인 16세기 조선사회를 가장 정확히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며 “한국회화사에서 16세기는 한 마디로‘계회도의 시대’”라고 밝힌다.이번 전시에서는 이밖에 능호관 이인상의 심오한 문기가 서린 ‘수하한담도(樹下閑談圖)’,윤제홍의 최만년 작품인 ‘학산구구옹(鶴山九九翁)’,윤덕희의 흥미로운 말그림‘상견상애도(相見相愛圖)’,김홍도·홍의영·유한지가 합작한 ‘병암진장(屛巖珍藏)’시화첩,근대문인·화가들의 풍류를 보여주는 아회도 등 고서화의 세계를 두루 감상할 수 있다. 글씨로는 퇴계 이황이 후학인 남언경과 헤어지면서 쓴 송별시를 비롯,자하 신위가 용강현령으로 떠나게 되자 유득공,천수경 등 20여명의 벗들이 지은 전별시를 묶은 ‘암연첩’ 등이 전시돼 있다.또 추사 김정희의 ‘운외몽중(雲外夢中)’첩과 ‘해붕대사 화상찬’도 빼놓을 수 없는 명품.특히 서간이 아니라 본격적인 서예작품인 ‘운외몽중’첩은 추사가 40대에 쓴 글씨로 추사의 서체가 골격을 잡아가는무렵의 작품이어서 주목된다.이번 전시를기획한 유홍준 교수(영남대·미술사)는 “추사가 35세때 쓴 ‘직성유궐하(直聲留闕下)’만 해도 글씨에 기름기가 흐르고 쓸데없이 살이 쪘다는 흠을 면키 어려웠다. 하지만 ‘운외몽중’에 이르러서는 추사의 글씨가 골기(骨氣)를 살리면서 굳세졌음을 대번에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02) 7394937. 김종면기자 jmkim@
  • [화제의 책] 관동십경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는 조선후기 시화첩 ‘관동십경’(關東十境)을번역했다.이 시화첩은 소론의 명문가 출신 문인 김상성(金尙星·1703∼1755)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고을을 순시하면서 화원에게 경치를 그리게 하고그림첩을 친한 이들에게 돌려보게 한 뒤 시를 받아 완성한 작품이다.‘관동십경’은 총석정 삼일포 등 ‘관동팔경’에다 흡곡 시중대와 고성 해산정 두곳을 더한 것으로,18세기 사대부들이 남긴 진경문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정기홍기자
  • 화가와 시인/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굄돌)

    화가는 그림으로 아름다움을 묘사해내고 시인은 시어로 아름다움을 묘사해 낸다.그러니 다만 그 묘사 방법만 다를 뿐 아름다움을 표현해 낸다는 사실에서는 공통성을 가지게 된다.그래서 고래로 시정과 화의는 동일한 것으로 여겨왔다. 남종화의 시조로 추앙되는 왕유가 『당세의 잘못 된 시인,전신은 응당 화사였으리』라고 읊은 시구나,북송대의 대문호인 동파 소석이 왕유가 그린 「남전연우도」제발에서 「왕마힐의 시를 맛보면 시가운데 그림이 있고,왕마힐의 그림을 보면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한 제사가 이를 극명하게 밝혀주는 내용들이다. 이에 그림을 소리없는 시(무성시)라 하고 시를 형태없는 그림 (무형화)이라 하기도 하였다.따라서 명시인이 명화를 좋아하고 명화가가 명시에 탐닉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여겨져 왔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해 삼절로 꼽히는 대예술가들이 간간 출연하기도 하였다.그러나 화성이라고 추앙할만한 명화가와 시성이라고 추앙할만한 명시인이 동시대에 출현하여 서로의 시화를 가장 잘 이해하고 그것을 극진히 아낀 예는그리 흔치 않다. 그런데 영조시대에 절정을 이루었던 진경문화기에서는 겸재 정선(1676∼1759)이라는 진경산수화의 대가와 차천 이병연(1671∼1751)이라는 진경시의 대가가 거의 동시에 출현하여 삼연 김창홉(1653∼1772)이라는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하고 백악산 밑 같은 동네에서 평생을 같이 살면서 서로의 그림과 시를 그렇게 잘 이해하며 아껴주었었다. 겸재가 65세,사천이 70세 되던 해에 겸재가 현재 강서구 가양동 읍치가 있던 양천현의 현령으로 부임해 가게 되자,그들은 노경에 접어든 나이도 잊은채 전별의 자리에서 시 한수 지어보내면 그 시제와 시의에 맞는 화정으로 그림 한 폭을 그려 보내기로 하자는 시화환상간,즉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는 약속을 하고 이를 잘 지켜 「경교명승첩」이라는 기념비적인 시화첩을 남기기도 한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