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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골 쥐보다 대담한 도시 쥐… 과학이 풀어낸 이솝우화[유용하 과학전문기자의 사이언스 톡]

    시골 쥐보다 대담한 도시 쥐… 과학이 풀어낸 이솝우화[유용하 과학전문기자의 사이언스 톡]

    ‘도시 쥐와 시골 쥐’라는 이솝우화 기억나시나요. 도시 쥐가 “화려하고 맛있는 음식이 뭔지 보여주겠다”며 시골 쥐를 도시로 초대해 진수성찬이 가득한 곳으로 이끕니다. 시골 쥐가 감탄하며 음식을 먹으려던 순간 문이 열리고 고양이와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두 쥐는 혼비백산해 도망칩니다. 소동이 가라앉고 도시 쥐가 다시 먹으러 나가자고 권하지만 시골 쥐는 “맛없는 음식이라도 마음 편히 먹을 수 있는 시골이 좋다”며 도시를 떠납니다. 우화가 주는 교훈은 행복의 상대적인 기준, 분수에 맞는 삶, 안전한 소박함과 위험한 풍요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우화의 다른 측면인 “도시 쥐는 왜 위험 요소 가득한 도시를 떠나지 않을까”에 주목했습니다. 프랑스 몽펠리에대 기능적 진화생태학 연구센터, 몽펠리에 진화과학 연구소, 미국 노스다코타 주립대, 오리건 루이스앤클라크대 공동 연구팀은 도시에 사는 야생동물들이 시골에 사는 같은 종의 개체들보다 더 대담하고 공격적이며 탐험적이고 활동적이라고 20일 밝혔습니다. 이런 재미있는 연구 결과는 영국 생태학회에서 발행하는 국제 학술지 ‘동물 생태학 저널’ 5월 19일 자에 실렸습니다. 연구팀은 28개국의 조류, 포유류, 양서류, 파충류, 곤충 등 다양한 야생동물 집단 133종을 조사한 논문 80편을 메타분석했습니다. 특히 도시에 서식하는 개체군과 비도시 지역에 서식하는 개체군의 행동이 어떻게 다른지를 세계 단위로 비교 분석했습니다. 도시 동물의 행동 변화에 대한 종(種)간 비교 연구는 많았지만 이번처럼 같은 종 안에서 거주 환경에 따른 행동의 차이를 전 세계 규모로 정량 분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분석 결과, 도시에 사는 개체군은 시골 거주 개체군보다 대담성과 공격성, 탐험성, 활동성이 모두 두드러지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런 경향성은 특히 조류에서 가장 뚜렷하게 관찰됐습니다. 이번 결과에 대해 연구팀은 전 세계적으로 도시화가 가속하면서 서식지가 줄어들자 동물들이 위험을 감수하려는 성향이 강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연구를 이끈 트레이시 버크하트 미국 루이스앤클라크대 교수는 “동물들이 위험을 회피하지 않는다면 특정 지역에서는 사람과 야생동물이 마주치는 사례가 급증할 것”이라며 “동물들이 대담해질수록 인수공통감염병 전파 위험도 커질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 “지드래곤 따라했더니 대박”…중국판 ‘빅뱅’에 200만명 열광

    “지드래곤 따라했더니 대박”…중국판 ‘빅뱅’에 200만명 열광

    중국 농촌 출신 5형제가 K팝 그룹 빅뱅을 흉내 내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24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이른바 ‘농촌 빅뱅’으로 불리는 ‘벵산 칼라카(Bengshan Kalaka)’는 빨간색 의상을 입고 ‘판타스틱 베이비(FANTASTIC BABY)’와 ‘이프 유(If You)’ 등 빅뱅의 히트곡을 완벽히 커버해 화제를 모았다. 주 무대는 윈난성 자오퉁시의 한 시골 마을이다. 멤버들은 검은 비닐봉지로 옷을 만들어 입고, 마이크 대신 옥수수나 나무 막대기를 쥐고 노래한다. 전기 삼륜차, 옥수숫대 등을 활용해 무대를 꾸미고 닭·오리·거위의 배설물을 치우느라 공연을 잠시 중단하기도 한다. 소박한 영상으로 눈길을 끈 벵산 칼라카는 한 달 만에 소셜미디어(SNS) 구독자 200만명을 돌파했다. ‘판타스틱 베이비’와 ‘뱅뱅뱅(BANG BANG BANG)’ 커버 영상은 수천만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으며, 라이브 방송에는 최대 30만명이 접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누리꾼들은 이들의 인기 요인으로 ‘진정성’과 ‘겸손한 태도’를 꼽았다. 온라인에서는 “한국어 실력은 거의 완벽하고 춤 실력도 훌륭하다”, “겉모습은 우스꽝스럽지만, 표정 연기와 열정만큼은 진지하다”, “이 성실한 가족에게 반했다” 등의 반응이 나왔다. SCMP는 “이들은 화려한 K팝 산업과는 거리가 먼 환경에 있지만, 빅뱅이 가진 ‘영혼’을 포착해냈다”라고 평가했다. 그룹을 이끄는 장남 관헝은 메이크업부터 편곡, 한국어까지 독학해 팀 내 ‘지드래곤’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과거 바에서 가수로 활동했으며, 5년 전 아버지가 사고로 사망한 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이발사와 건설 현장 노동자로 일하다 최근 귀향했다. 관헝은 어려운 형편 때문에 그룹을 결성했다며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인터넷 스타가 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머지 4형제 또한 막냇동생의 학업을 지원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생업에 뛰어든 것으로 전해졌다.
  • 주먹 쥐고 몸서리친 김정숙 여사 “소리치고 싶어요”…‘양산 시위’ 언급 눈길

    주먹 쥐고 몸서리친 김정숙 여사 “소리치고 싶어요”…‘양산 시위’ 언급 눈길

    문재인 전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양산 사저’ 주변에서 이어지고 있는 보수단체 및 유튜버들의 시위를 언급해 눈길을 끌고 있다. 20일 출판계와 MBC에 따르면 평산책방의 ‘책방지기’인 문 전 대통령 부부는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을 찾아 평산책방 부스를 둘러봤다. 부스에 모여있던 문 전 대통령 지지자들 및 관람객들이 문 전 대통령 부부에게 손을 흔들고 말을 건네는 도중, 지지자로 추정되는 한 여성이 경남 양산 사저에서 이어지고 있는 보수단체의 시위에 대해 언급했다. 이 여성은 “시끄러운데 버텨주셔서 감사하다. 평산에 내려갔을때 너무 시끄러워서 진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김 여사는 두 손으로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떠는 모습을 취하며 “지금도 그래요”라고 웃으며 화답했다. 이에 이 여성은 “지금도 그러나. 작년에도 그러더라”라고 한숨을 지었다. 이 여성이 “저 사람들 도대체 왜 그러는거예요”라고 묻자 김 여사는 재차 주먹을 쥐고 “몰라요. 소리치고싶어요”라고 말하다 웃음을 터뜨렸다. 문 전 대통령은 퇴임한 뒤 경남 양산 평산마을의 사저에서 거주하면서 보수단체 및 유튜버들의 시위에 몸살을 앓았다. 이들은 문 전 대통령 사저 주변에 모여 확성기를 들고 욕설과 비방을 하는가 하면, 시위대들 사이에서 모의권총 등 위험한 도구들까지 발견됐다. 이에 2022년 8월 대통령경호처는 경호 구역을 기존의 ‘사저 울타리’에서 ‘울타리부터 300m까지’로 확대했다. 이후 시위는 점차 줄었지만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9월에는 한 20대 남성이 평산책팡의 여성 직원을 무차별 폭행해 구속되기도 했다. 김 여사가 “지금도 그래요”라고 말한 것은 최근에도 양산 사저 주변에서 크고 작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편 문 전 대통령 부부는 서울국제도서전에 평산책방의 부스가 마련된 것을 계기로 도서전을 찾았다. 문 전 대통령은 주빈관인 ‘대만관’에서 렉스 하우 타이베이도서전재단 대표 등과 만나 환담하고 ‘한국에서 가장 좋은 책’ 시상식에 시상자로 나섰다. 문 전 대통령은 이날 “퇴임 이후 살고 있는 작은 시골 마을에 동네 책방을 열고 지역 출판도 함께하고 있다”면서 “출판문화계의 일원이 돼 대한민국 최고의 책 축제에 부스를 배정받아 참여하고 시상식에도 함께하게 돼 뜻깊고 영광스럽다”고 밝혔다.
  • 돼지꿈/고찬하 [서울신문 2025 신춘문예 - 희곡]

    돼지꿈/고찬하 [서울신문 2025 신춘문예 - 희곡]

    때: 현재곳 : 단독주택, 침실등장인물병철(58세, 남)동수(95세, 남)은희(57세, 여)민식(32세, 남)태연(29세, 여) 1장 무대는 침실이다. 옷장과 수납장이 있고 선반에 동수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액자가 걸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누런 자국이 남아 있는 벽지.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병철과 은희가 잠들어 있다. 병철의 코 고는 소리가 이어지면, 동수가 지팡이를 짚고 등장한다. 동수: 끌끌끌…. 자식, 잘도 자는구만. 인자 좀 먹고살 만허냐? 이 썩을 자슥아! 아부지 왔다. 인나라! 느그 아부지 왔다! 동수, 병철을 내려다보며 발로 걷어찬다. 병철: (눈을 비비며) 야밤에 누구여…. 워메, 아부지! 동수: 이 자슥, 인자 배때지가 뜨뜻허니 먹고살 만한갑네. 병철: 아부지! 무슨 일로 또 이까지 오셨수! 동수: 인마, 아버지가 자식놈 생일도 못 챙기냐? 병철: 생일? 동수: 그려! 생일! 워떠냐? 이 애비 덕에 좀 먹고살 만허냐? 병철: 아유, 말을 혀야 뭣할라요. 접때 아부지가 짚어 준 종목들이 상한가를 칠 줄을 누가 알았겄어요? 아부지 덕에 우리도 인자 팔자 폈으요! 강진 당숙네에 저당 잡힌 주택담보 싹 다 갚구, 십 년 묵은 신용대출도 깨끔허게 정리해부렀당께요. 보소, 이 집도 우덜 것이라요. 울 집안도 인자 남부럽지 않다고요. 동수: 자슥, 얼굴 폈네. 살림도 이만허믄 좀 나아진 것 같고. 애들은 잘 있냐? 병철: 애들이요? 그 개팔 놈의 호로자슥들은 말도 마셔요. 연락 끊긴 지 오래구만. 동수: 다 죽어 가는 집안 살려 놨더니 도루 콩가루네. 병철, 베갯머리에서 신문지와 볼펜을 꺼내 든다. 병철: 아부지, 고건 고렇고 요참에는 어디요? 어따 돈을 박어야 쓰겄소? 동수, 병철의 시선을 외면하며 딴청을 피운다. 병철: 아따, 아부지 그라지 말고 요번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알려주쇼! 아니믄 복권 번호라도 몇 개 찍어주셔요! 동수: 패가 안 좋아. 병철: 고거이 뭔 말이여? 동수: 다 잃을 패다, 이거다. 병철: 좀 알아듣게 말혀 보소! 동수: 이 자식아, 잘 들어라. 너 애비 덕에 딴 돈 그거 있지? 병철: 암요. 인자 그 돈으로 대대손손 먹고 살아야제! 동수: 그 돈 하룻밤에 다 잃을 거다. 병철: 고거시 뭔 자다가 벼락 맞을 소리여? 동수: 오늘 하루다. 시간이 읎어. 병철: 와요? 뭣 땀시 나가 돈을 다 잃는다는 거시여? 동수: 한 방에 땄으면 한 방에 또 잃는 거지. 동수, 몸을 돌려 나가려고 한다. 병철: 아부지, 가지 마요. 인자 좀 먹고살만헌디 다 잃는다뇨. 동수: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말 알지? 요즘은 ‘운구기일’(運九技一)이란다. 병철: 운구기일? 동수: 다 운이다 이 말이여. 아등바등 살아 봐야 우에 쓸꼬, 팔자가 좌우하는 벱인 것을…. 동수, 크게 웃으며 퇴장한다. 병철: 아부지! 아부지! 병철, 동수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소리를 지르면, 자고 있던 은희가 깨어난다. 은희: 여보, 여보? 병철: (넋이 나간 채로) 아부지! 아부지…. 은희: 이 양반이 자다 말고 왜 땀을 비질비질 흘리구 소리를 꽥꽥 질러대? 병철: 어? 뭐시여? 당신이여? 은희, 선반에서 알약과 물그릇을 가져와 병철에게 먹인다. 은희: 또 자다가 뭐라도 본 거야? 왜 그렇게 얼굴이 새파래졌어? 병철: (약을 삼키며) 아부지 왔다 갔어. 은희: 또? 죽은 아버님이? 병철: 그, 글씨 말여…. 은희: (반색하며) 이번에는 또 뭐래? 복권 번호라도 몇 개 찍어 줍디까? 병철: 개꿈이여. 은희: 개꿈? 병철: 그려! 개꿈! 은희: 뭐라고 하셨는데? 병철: 아니 글씨, 요참엔 돈을 다 잃을 거라네…. 은희: 그거 개꿈이네. 병철: 접때는 돼지꿈이더니 요번엔 개꿈이여. 은희: 그냥 흘려들어. 병철: 아부지 덕에 돈방석 앉은 거 잊었어? 무시혔다간 집안 말아묵어! 은희: 당신 꿈속에서 아버님 나타났다는 게 몇 번째지? 병철: 아이, 요참에도 확실하다니께. 은희: 암만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저번에 그것도 그냥 운이 좋아서 대박 났던 거 아냐? 솔직히 요즘 같은 때에 이게 뭔 귀신이 씻나락 까먹을 소리야. 아무래도 집터가 이상한가 봐. 언제 한번 굿이라도 해야 하려나. 병철: 이 사람이 아직도 못 믿네? 꿈 속에서 아부지가 다 알려 줬다니께. 금영에 칠천! 현산에 팔천! 그 육실헐 잡주들이 한날한시에 약속이나 한 맹크롬 들쓱거릴지 누가 예측혔겄어? 그걸 우덜 같은 선량한 서민들이 워쩐다고 예측혀? 다 아부지 덕이제…. 은희: 죽은 사람이 꿈에 나타난다는 거 자체가 망조야! 병철, 수납장에서 신용카드, 통장, 인감도장, 집문서 따위를 꺼내어 바닥에 늘어 놓는다. 병철: 어디 보자. 농협에 칠천, 새마을에 육천, 수협에 삼천오백…. 은희: 뭐하는 거야? 병철: 일단 우덜 계좌에 있는 돈은 싹 다 인출해 와야 쓰겄구만. 은희: 그 돈 들고 워따 쓰게? 병철: 여그 보이는 데에 딱 놓구 지켜야제. 은희: 그다음은? 병철: 집안에 돈 될 만한 물건도 싹 다 창고로 좀 옮겨야 쓰겄어. 은희: 그렇게 하면 잃을 돈이 그대로 있대? 병철: 아부지가, 분명히 아부지가 말혔어…. 은희: 이 양반이 진짜, 돈이 그렇게 좋아? 망할 놈의 주식질에 맛들리더니 헛것이 보이는 거야! 병철,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친다. 병철: 나는 은행엘 좀 갔다 올 것인께. 당신은 창고에 물건 좀 옮겨 둬. 은희: 이게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병철: 시간 읎어! 싸게 움직여! 은희: 민식이 아부지, 난 말이야. 이런 돈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우리 목포 월세집서 시작했을 때처럼…. (곰곰이 떠올리다가) 아, 그땐 좀 아닌가? 병철: 가난뱅이였던 때가 좋아? 씨빠지게 고생혔던 때가? 밤낮 공장서 일당 받아감서 삭신이 쑤시네 어쩌네, 앓는 소리 달고 살믄서 은행에 돈 갖다 바쳤던 때가? 은희: 주식하고 나서부터는 당신 맨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눈알 퀭해 가지고는 헛것이 나 보고, 이딴 약이나 달고 살고 말이야. 사람이 뒷바라지를 시켜도 정도껏 해야지. 병철: 요것이 다 내 땜시다? 은희: 당신은 뉴스도 안 봐? 밤낮 돈, 그놈의 돈 때문에 가족끼리 칼로 배때지를 쑤셔대고 이게 정상이냐고? 병철: 그런 썩어 빠진 정신으로는 요즘 같은 시상에서 못 살아남어. 글고 우덜 자석들 생각은 안 혀? 울 자석들은 번듯허게 살게 혀야 않어? 이거, 이거, 이 집두 워뜨케 산 건디? 은희: 자식들 생각한다는 인간이 애들이랑 연락도 끊고 살어? 병철: 당신은 신경 꺼! 나가 다 알어서 헐것잉께! (넋이 나간 채로) 아, 아부지, 아부지 어따가, 어따 돈을 넣어야 이 우환을 피할랍니까…. 병철, 통장과 신용카드, 인감도장, 집문서를 집어 들고 퇴장한다. 은희: 얻다 대고 큰 소리야? 저 망할 놈의 인간, 된통 당해 봐야 속이 시원하지. 은희, 불길하다는 듯이 동수의 영정사진을 뒤집어 놓는다. 암전. 2장 무대는 이사를 앞둔 집처럼 텅 비어 있다. 동수의 영정사진이 옆으로 누워 있고 가구가 있던 자리는 짙은 자국만 남아 있다. 구석에 놓여 있는 빗자루. 조명이 밝아지면, 병철과 은희가 여행 가방을 낑낑대며 끌고 등장한다. 병철: 어구, 무거워라! 은희: 어디 금고에라도 넣어 놔야 하는 거 아냐? 병철: 집에 금고가 어딨어? 은희: 그럼 이 많은 돈을 어떡하려고? 병철: 저짝 다용도실에 박스 몇 개 없는가? 은희: 감자 박스가 있긴 할 텐데. 은희, 퇴장한다. 병철, 여행 가방을 연다. 오만 원짜리 지폐 다발이 쏟아져 나온다. 병철: 이 한병철 쉽게 안 죽는다. 이거시 워뜨케 딴 돈인디. 아부지, 보고 계시죠? 나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 아니어요. 은희, 감자 박스를 들고 등장한다. 은희: 이거면 돼? 병철: 이리 가져와 봐. 다 들어갈란가 모르겄네. 병철, 감자 박스에 돈을 차곡차곡 담는다. 은희: 그러니까 이게…. 병철: 우덜 계좌에 짱박아 둔 것은 다 쓸어온 거시여. 은희: 무슨 계좌? 병철: 아따, 그 뭐시냐, 보이스피싱인가 머시긴가 땀시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니여. 출금 한도가 걸려분다고 은행 청년이 하두 의심을 혀 싸는 바람에…. 은희: 그나마 찾아온 게 이 정도라는 거야? 병철: 긍께 당신 것이랑, 내 것이랑 끄낼 수 있는 현찰이란 현찰은 죄 뽑아온 것이여. 저짝 읍내부터 시내꺼졍 은행만 여섯 군데를 돌아다녔다니께! 은희: 개꿈 하나 때문에 아침 댓바람부터 집 치우랴 돈 숨기랴 이게 뭔 짓이야? 병철, 박스를 단단히 포장하며 집문서, 통장, 인감도장까지 넣는다. 병철: 이걸 인자 여그다 넣고 자알 지키기만 허믄 돼. 은희: 지켜? 어떻게? 병철,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아 주변을 보다가 빗자루를 집어 든다. 이내 사주경계를 하며 초병처럼 듬직하게 서 있는다. 은희: (한참을 보다가) 그러고 언제까지 있을 건데? 병철: 아부지가 분명 하루라고 혔어…. 은희: 하루? 병철: 오늘 하루만 이 돈이 고대로 여기 있음 되는 거시여. 은희: 당신 진짜 이번에 아무 일도 없으면 주식 그만하는 거야. 사람이 성실하게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지…. 병철: 뭐? 승실? 은희: 생전 자식들한테는 제 손으로 밥 벌어 먹고 살라고 혁대 풀고 고래고래 야단을 쳤으면서, 애비란 작자가 저러고 자빠졌으니. 병철: 알어! 잔말 말구 싸게싸게 돈이나 지켜. 암만혀도 불길하단 말이여. 그때, 초인종이 울린다. 잔뜩 경계하며 밖을 노려보는 병철과 은희. 침묵이 흐르면, 두 사람을 재촉하듯 초인종이 연달아 울린다. 은희: 누가 왔나 봐. 병철: 아침 댓바람부터 올 사람이 누가 있어? 은희: 나가 볼까? 병철: 잠깐! 나가지 말어! 은희가 무시하고 나가자, 병철은 감자 박스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살핀다.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민식과 태연이 케이크 박스를 들고 등장한다. 민식, 태연: 아버지! 생신 축하드립니다! 태연, 삑삑이를 분다. 은희, 뒤따라 들어온다. 은희: 웬일이야? 연락일랑 하고 오지! 태연이도 같이 왔네! 은희, 태연을 꼭 끌어안는다. 민식: 어머니, 잘 지내셨죠? 태연: 아따, 명절도 아닌디 차가 허벌나게 막혀부렀소. 은희: 둘이 어떻게 이렇게 같이 왔어? 민식: 터미널에서 만나서 같이 왔어요. 은희: 여보, 우리 애들 왔어! 병철: (떨떠름한 표정으로) 느그들, 그동안 연락 한번 없더니 웬일이냐? 민식: 꼭 무슨 일 있어야 오나요? 오늘 아버지 생신 아녀요. 축하드리러 왔죠. 병철: 우리 첫째, 복지관서 사회복지산가 머시긴가 허느라 바쁘담서. 민식: 내내 복지원에 있다가 새벽에 내려 왔어요. 여기 눈 밑에 다크써클 봐요. 태연: 아부지, 오랜만이요? 근디 내는 별로 안 반가운 갑소? 병철: (싸늘하게) 니는 서울서 사업허느라 바쁘담서. 은희: 아유, 또 왜 그래? 간만에 우리 가족 이렇게 다 모였는데! 민식, 케이크 박스를 흔들어 보인다. 민식: 아버지, 제가 케이크 사 왔어요. 고구마 케이크. 태연: 그라요. 일단 께이크에 불부터 붙입시다. 민식, 케이크 박스에서 성냥을 꺼내려고 하면, 태연, 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켠다. 어색한 침묵. 은희: 참, 부엌에 소고기미역국 있는데 그것도 좀 가져와야겠다. 간만에 이렇게 다 같이 모이니까 얼마나 좋니? 은희, 퇴장한다. 민식, 케이크를 꺼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민식: 아니, 근데 밖에 있던 식탁은 어디 갔어요? 태연: 그라고 보니께 가구들이 죄 사라져 부렀네. 민식: 어? 할아버지 사진은 왜 이러고 있어요? 태연: 여행 가방은 또 뭐시여? 병철: 뭐, 뭐가? 민식: 우리 가족 사진도 없어졌네! 태연: 아부지, 집안 꼴이 와 이랍니까? 워데 이사 갑니까? 병철: 벽지 도배를 새로 혀서 그란다. 창고에 다 있응께 신경 꺼라. 태연: 벽지는 누리끼리한 거시 그대론디…. 민식: (케이크 박스를 흔들며) 이걸 올려둘 곳이 필요한데요. 민식, 태연 주변을 살핀다. 병철: 느그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태연, 감자 박스를 발견한다. 태연: 저짝에 박스 하나 있구만. 민식: 잠깐 그거라도 여기 가운데에 두죠. 태연, 말릴 틈도 없이 감자 박스를 들어 중앙으로 옮긴다. 태연: 아따, 묵직한 거시 상으로 딱이네잉. 병철: 안돼! 누구 맘대로 그러는 거여! 태연: 거참, 여그 뭐 금덩이라도 들었소? 병철: 느자구 없는 것들이 댓바람부터 들이닥쳐 가지고는, 여그 안 갖다 놓냐? 병철, 빗자루를 마구 휘두른다. 태연: (기침을 한다) 워메, 아부지! 먼지 날린당께요! 은희, 김이 피어오르는 냄비를 들고 등장한다. 은희: 아니, 이 양반이! 애들아 글쎄 니들 아버지가 말이다. 병철: 에헤이, 진짜! 민식: 경계 좀 풀어요. 오늘 생신이잖아요. 아무도 아버지 안 해쳐요. 저희는 진심으로 축하드리러 온 거예요. 태연이 감자 박스를 툭툭 털면, 민식은 그 위에 케이크를 올려 둔다. 병철: 이건 내 거야, 내 거라고. 왜 내 것을 느그들이 맘대로 하려고 혀? 민식: 잠깐 쓰고 저기다 그대로 돌려 둘게요. 병철: 내 거라는데 자꾸, 어? 태연: ···참말로 째째허시네. 아부지 성깔은 하여간 징해부러. 민식: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또 안 좋다고 하니까. 민식, 태연 웃는다. 병철: 우째 느그들은 만날 멋대로냐? 집 나가는 것도 멋대로, 연락도 멋대로, 불쑥 찾아오는 것도 멋대로. 왜 매사에 느그들 맘대로인 거냐고? 민식: 우리 아버지, 서운했구나? 병철: 그려! 서운혔다! 인자 솔직허게 말혀 봐라. 무신 볼일이 있어서 온 거냐? 민식: 가족이란 게 무슨 볼일이 있어야 만납니까. 늦게 와서 미안해요. 병철: 이 늙은 애비가 눈치도 없는 줄 알어? 이것들 시커먼 속내가 있어서 온 거시여. 고거이 아니믄 저렇게 방실거릴 것들이 아니여. 은희: 무슨 말을 또 그렇게 섭하게 해. 얼른 케이크에 불이나 붙이자. 은희, 감자 박스 위에 냄비를 올려 둔다. 민식이 케이크에 초를 꽂으면, 태연은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민식: 이야, 초에 불이 붙으니까 연말 느낌이 나고 좋은데요? 민식, 병철의 머리에 고깔모자를 씌운다. 병철: 어허이! 뭐시여? 민식: 아버지, 다시 한번 생신 축하드려요. 만수무강하셔야죠. 간만에 노래라도 같이 부를까요? 병철: 노래는 무슨! 민식: 자자, 축하 노래 다 같이 부르는 거예요. 은희, 벽면의 전등 스위치를 내린다.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민식이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자, 은희와 태연도 덩달아 부른다. 은희, 민식, 태연: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생일 축하합니다! 병철, 빗자루를 쥔 채로 머쓱하게 있다. 은희: 빨리 불어! 초 다 녹는다! 병철, 마지못해 불을 끈다. 울려 퍼지는 박수와 웃음소리. 태연이 폭죽을 터트리면, 은희가 전등 스위치를 올린다. 조명이 다시 밝아진다. 병철: 이란다고 눈이나 끔뻑할 거 같으냐? 시상 천지에 느그들 만치…. 은희, 케이크 칼로 케이크를 크게 썰어 병철의 입에 넣어 버린다. 은희: 소원 빌었어? 병철: (우물대며) 소원은 무슨! 민식: 자, 다들 건강하시라고 제가 대신 소원 빌었다 칠게요. 민식, 바닥에 흩어진 폭죽 잔해를 치우면, 은희, 병철의 입을 소매로 거칠게 닦는다.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웃는 민식. 태연, 주위를 서성이다 목을 가다듬으며 병철에게 가까이 간다. 태연: 아부지, 인자 생일 축하도 혔겄다. 쪼까 드릴 말씀이 있는디요…. (사이) 긍께, 시방 지가 요참에 투자처에서 중국 수출 계약 건을 하나 잡아부렀는디, 계약금을 저당 잡을 것이 쪼까 부족허거든요? 큰 거 두 장으로 급전만 땡기믄 그다음 수익은 서너 배로 불릴 수가 있는디…. 병철: (케이크를 삼키다 말고) 너, 너 지금 그따구 소리가 목구녕서 나오냐? 태연: 아따, 아부지! 사람 말을 좀 끝까지 들어보시랑께요. 민식: 야, 아까랑 얘기가 다르잖아? 돈 얘기 안 한다면서? 태연: 우째 이래? 오빠도 돈 얘기할라고 온 거 아녀? 요새 복지원 힘들어서 후원 필요하다 안 혔어? 계장인가 뭔 쌈장인가 실적 타령 허믄서 들들 볶는담서? 민식: 인마, 사람이 순서라는 게 있는 법이지. 아버지 앞에 두고 다짜고짜 그게 맞아? 너도 허구헌 날 돈 빌린 사람들 쫓아다녀 봐서 알 거 아니냐. 이런 일일수록, 절차에 맞춰서 진행하는 게 업계의 도리 아니겠냐. 병철, 이마를 짚는다. 병철: …이 새끼들이 보아하니 생일 핑계 대고 또 돈 빌리러 왔구나. 태연: 아부지! 내는 참말로 힘들어요. 인자 곧 나이가 서른인디 신림동 단칸방서 월세살이 허구, 대출금 갚느라 바쁘당께요. 참 웃기지 않어요? 냄들한테 돈 빌려주는 내 같은 금융업자도 빚을 갚느라 또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니께? 무신 놈의 시상이 죄다 대출이고 할부고 빚으로 돌아가요. 요즘도 다달이 나가는 이자 갚느라, 요 주둥이가 바짝바짝 마른당께요. (사이) 아부지, 인자 손주는 봐야 쓰지 않겄소? 민식: 금융업은 개뿔, 사채로 사람들 등쳐 먹고 다니는 것이…. 태연: 뭐시여? 민식: 중국 수출이 뭐? 이제는 약장사도 하냐? 태연: 먼 약을 팔어? 요참엔 화장품이여. 화장품. 은희: 니들은 예나 지금이나 나이를 똥구녕으로 먹는 건지 만났다 하면 쌈박질이냐? 병철: 오늘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다 니들 때문이구나. 돈 잃는다는 얘기가 다 느그들 때문이여. 조상님덜, 보고 있소? 나가 전생에 먼 죄를 지었다고 자슥들이 이랍니까. 태연: 예? 먼 돈을 잃어요? 민식: 아버지, 죄송해요. 집 앞에서 싸우지 말자고 그랬는데…. 은희: 돈, 돈, 그놈의 돈 얘기 지긋지긋하다. 먼 놈의 대화가 도로 돈 얘기냐? 이러니 집안이 콩가루네 뭐네, 동네 마실에서 할매들이 손가락질을 해 대지. 집안 꼴이 아주 아사리판이야. 태연: 간만에 모였응께 다 같이 살 궁리를 찾자 이거죠. 가족 아닙니까. 병철: 다 같이 살어? 너 우리랑 다 같이 살자고 접때 돈 안 빌려준다고 연락 끊었냐? 태연: 나가 시방 언제 연락 끊었다 그라요? 핸드폰 신형으로 바꿔서 그렸다 안 혔어? 병철: 느그들한테 줄 돈 10원두 없다. 돌아가라. 보기도 싫다! 태연: 에이, 돈이 없긴…. 집에 가구며 돈 될 만한 건 싸그리 치워 놓구. 병철: 뭐시여? 민식: 아버지, 근데 정말 저희들 오는 거 알고 물건 치우신 거예요? 태연, 집안을 둘러본다. 병철: 뭐, 뭐가? 느그들이 뭔 상관이여? 도둑놈들도 아니구? 여그는 느그 엄니랑 내랑 씨빠지게 주택담보대출 갚아서 산 내 집이란 말이다. 내 집서 나가 맘대로 집도 못 치우냐? 이 손을 봐라, 딱딱허게 이 마디마디가 죄다 늘러붙은 이 손을. 나가 이 손으로 평생 쇳질을 해다가 은행에 차곡차곡 적금 부어서 산, 내 것이다 말이다. 민식: 네? 집을 사셨다고요? 태연: 당숙 어른네 집이 아니고? 워메, 먼 수로? 병철: 느그들이 알 거 없다. 병철이 감자 박스를 치우려고 하자, 태연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는다. 태연: 아부지! 참말로 부탁 좀 헙시다. 요참엔 분명 감이 좋아요. 나가 시방 어젯밤에 먼 꿈을 꿨는 줄 알어요? 이 집채만 한 황금돼지가 가랑이로 들어왔당께요! 요 몇 년 새 그런 돼지꿈은 처음이었제. 지금도 눈앞서 본 것 맹크롬 아주 선명혀. 휘황찬란하게 순금으로 맹근 돼지드라니까? 그라서 오는 길에 편의점서 스피또도 하나 샀어요. 부정탄다고 혀서 아무한테도 말 안혔는디…. 근디 요참엔 참말 이어요.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믿어 보시랑께요. 열 배, 아니? 스무 배로 돌려줄 수가 있당께요. 그 돈이믄 대대손손 먹고살고도 남아불제. 우리 가족도 인자 남부럽지 않게 살 수가 있다니께. 병철: 뭐? 꿈? 정신머리가 있는 눔이냐 없는 눔이냐? 그리고 뭐? 스피또? 젊은 놈이 성실하게 일을 해서 돈을 벌 궁리를 혀야지, 미친 것! 태연: 내 믿고 한번만, 지발 목돈 좀 마련 해 줘 봐요. 큰 거 두 장은 바라지도 않어. 딱 한 장만 있어도 떡을 치고도 남제. 암, 그라제잉. 민식: 저어, 아버지? 말이 나온 김에 저도 한 말씀 올려도 될까요? 병철, 두 사람을 번갈아 노려본다. 병철: 니들은 천성부터 버러지여. 애비가 느그들 땀시 여태 잃은 돈이 얼맨 줄 알어? 이 집안 말아먹을 놈들아! 서울서 번듯허게 자리나 잡으라고 씨빠지게 쇳밥 먹어감서 아등바등 키워 놨드만. (가슴을 치며) 워메, 복창 터져분다! 태연: 나가 뭐 첨부터 이렇게 돈, 돈 거렸는 줄 알어요? 다 시상이 이렇게 맹글었다 안 합니까. 아니, 막말로 냄들은 집에서 다 척척 해 준다고. 갸들하고 나는 출발점부터가 다르다니께? 민식: 아버지, 일단 진정하시고 천천히 얘기 좀 들어봐요. 그러니까 저희들 계획은 말이죠…. 병철: 느그들이 그러니 문제다! 두 손이 멀쩡한 것들이 쇳질을 하든, 길바닥서 발품을 팔든 일을 혀서 번듯하게 자수성가를 혀야 쓰지 요즘 것들은 돈만 생겼다허믄 워따가 꼬라박을 생각부터 하니. 고거시 전부 한탕주의다, 이 말이다! 태연: 뭐시여? 뭔 주의? 워메, 기냥 맥아리가 확 나가부네잉. 나가 이 말은 안 할라고 혔는디, 막말로 아부지 때랑 지금이랑 같어요? 병철: 다를 건 또 머시여? 태연: 한탕주의로 따지믄 소싯적 아부지도 한따까리 허셨음서, 남 말하듯 허는 거시 참말로…. 민식, 태연 웃는다. 병철: 너 이 자슥, 주둥이 안 다물어? 태연: 못 다물어요! 요것이 다 아부지한테 배운 거 아녀요. 우리 집이 그동안 와 돈이 없었는지 엄니는 알어? 공장 장막 치믄 읍내 잡부들이랑 비닐하우스서 삼삼오오 모여가 아부지가 섯다 치믄서 돈을 월매나 땡겼는디? 일당 받으믄 밤낮 경마장에서 눈깔 빠지게 뻬팅이나 했음서, 뭐시여? 내보고 한탕주의? 병철: 그 주둥아리로 한마디만 더 지껄여 봐라잉! 태연: 나처럼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일찍부터 집안 건사하랍시고 대학도 못 가게 허고, 상고로 밀어 넣은 것이 아부지 아니여? 나가 상고 졸업하고, 열아홉에 뭣 땀시 은행에 기 들어가 행원으로 씨빠지게 일을 혔는디? (웃는다) 나가 그 망할 놈의 캐피탈이란 것을 열아홉에 은행서 다 깨우쳐 부렀지라. 그라니 지금 이라고 냄들한테 돈 빌려주고, 이자 장사하고 있는 거 아녀요. 병철: 뭐시여? 캐피탈? 이 가시나, (태연의 머리를 민다) 니가 그리 원대한 꿈이 있어 은행 박차고 나와서 냄들 삥이나 뜯구 사냐! 태연: 지금 나 쳤소? 태연, 감자 박스를 엎고 일어난다. 박살나는 케이크. 병철: 이 육실헐 것이…. 병철, 덩달아 일어나자, 태연은 감자 박스를 발로 걷어찬다. 오만 원짜리 지폐가 쏟아진다. 민식: 어? 돈이다! 태연: 이게 뭐시여? 태연, 바닥에서 지폐 다발을 한 움큼 집어 든다. 병철: 느자구없는 것들이, 뭔 짓거리여! 손대지 마! 만지지 말라고! 태연: 워메, 여따 꽁쳐두고 있었구만? 아부지 진짜 너무한 거 아니요? 민식: 태연아, 일단 그만둬. 아버지도 그만해요! 병철, 민식, 태연 너나 할 것 없이 뒤엉킨다. 엎어진 케이크와 미역국으로 범벅이 된 돈다발. 은희: 무슨 꿈 타령 하나에 자발들을 떨어대는 거냐? 병철: (태연을 붙잡으며) 나가 시상에 호래자식을 내놨당께! 민식: 진정 좀 하세요. 이러다 숨넘어갑니다! 태연: (뿌리치며) 누가 가져간다 혔어? 기냥 세어보기만 현다고! 병철: 이 년이 가장 문제여! 애비 말이 홍어 거시기로 들리냐? 이것아, 안 놓냐? 태연: 아따, 참말로 얼맨지 시어보기만 현다니께! 병철: 안 놔? 요것이 애비 돈을 껄떡대고, 기냥 눈깔이 확 뒤집혀 부렀구만! 병철, 태연의 뺨을 후려친다. 정적이 흐른다. 태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노려본다. 태연: 시방 혁대로 후려치던 그 손버릇을 여태 못 버리구 또 손찌검이요? 병철: 요, 요것이 말하는 뽄새 좀 봐라, 어서 이런 막돼먹은 가시내가 나와가지고. 이젠 허다허다 애비 돈에 손을 갖다 대냐? 태연: 나가 인자 얻어 맞고도 가만히 있는 기집이 아니여, 다 컸다 이 말이여! 태연, 케이크 칼을 주워서 허공에 번쩍 들면, 은희: 안돼! 병철: 아이고! 자석 놈이 애비한테, 애비한테! 아이고, 골이야, 골이야! 병철, 뒷목을 잡고 쓰러진다. 은희: 워메, 민식이 아부지! 민식: 아버지! 괜찮아요? (태연에게) 야이, 호로새끼야! 태연: …뭐시여? 나 암것도 안 혔어! 민식: 이 자식이 이제는 패륜을 서슴지 않네. (병철을 흔들며) 아버지, 일어나세요! 아직 가시면 안 돼요! 아버지! 태연: 참나, 저 여시 같은 인간. 닿지도 않았는디 회까닥? 아주 징해부러라···. 태연, 케이크 칼을 내려놓고 돈을 살핀다. 민식: 돈 줍지마! 아버지 쓰러졌잖아! 어떡할 거야? 어떡할 거냐고! 민식, 태연을 붙잡으면, 태연, 민식의 멱살을 쥐고 흔든다. 태연: 그따구 명령조로 지껄이지 말어! 민식: 이 새끼가 진짜. 민식, 주먹을 치켜들면, 은희: 진정해라, 다 설명해 줄라니까. 응? 둘 다 내려놔라. 태연: 돈의 출처부터 알아야 현다고. 요거시 시방 아부지 돈이 맞어? 집안에 현찰을 요로코롬 짱박아 뒀다고? 밤낮 돈 읎다고 노랭이질하던 인간이? 민식: 아버지가 쓰러졌는데 이 짓거리 하는 건 맞아? 은희: 피보다 진한 게 돈이라더니, 그만 안 하냐? 태연, 민식에게 머리를 들이민다. 태연: (노려본다) 쳐, 쳐보랑께? 둘 중 한 놈은 오늘 제삿상 치르는 거시여. 민식: (손목시계를 푼다) 이 자식이, 간만에 피를 끓게 만드네. 은희, 냄비를 집어 들고 바닥에 있는 힘껏 내던진다. 은희를 쳐다보는 민식, 태연. 은희: 너희들 아버지 아프다! 맨날 죽은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난다고 하지를 않나, 제정신이 아니란 말이다. (약 봉투를 보이며) 이봐라, 약도 안 먹으면 잠도 제대로 못 잔단 말이다. 민식, 태연 씩씩대며 떨어진다. 은희, 병철을 살핀다. 민식: 어머니, 구급차라도 부를까요? 은희: 다행이다. 잠깐 정신을 잃은 거야. 태연: (한참을 보다가) 이것두 연기 아니여? 와, 그 있잖어. 비암이 나타나믄 깨꼬닥 죽은 척허는 개구락지 맹크롬. 은희와 민식, 태연을 보고 한숨을 쉰다. 민식: 너 그게 할 소리냐? 태연: 엄니, 요참에 깨끔허게 단도리를 칩시다. 은희: 뭘 쳐? 태연, 돈다발을 은희에게 쥐여 준다. 태연: 이왕 이래 된 거, 같이 뜹시다. 나가 시방 돼지꿈을 꾼 거시 뭔 뜻인지 이제야 알겄어요. 엄니, 내랑 같이 살어요. 같이 요 뭣 같은 집안, 확 떠불자니께요. 은희, 아무 말 없이 돈다발을 바라본다. 민식: 쓰러진 아버지 앞에 두고, 터진 입이라고 말을 함부로 해? 태연: 내는 집안서 뭔 말도 못 혀? 민식: (태연의 머리를 밀친다) 넌 성격 괴팍한 것이 아버지랑 똑 닮았어. 태연: 뭐시여? 오빠가 내한테 이럼 안 되는 거시지. 민식: 내가 틀린 말 했냐? 태연: 안 여물어? 나가 그동안 월매나 참았는지 알어? 아부지가 나를 상고에 왜 보냈는지 모르제? 시골 동네서 기집애는 개천에 용 날 수가 없다드라고. 언능 취업혀서 오빠 학비나 보태라 그라드라고. 고거이 벌써 십 년 전이여! 내는 뭐, 하고 싶은 게 없는 줄을 알어? 근디 다른 놈도 아니고 우째 오빠가 그라고 느자구없는 말을 헐 수가 있어? 진장 염병할 집안! 민식: 뭐? 저 툭 터진 주둥이를 아주 그냥…. 민식, 태연의 얼굴을 부여잡는다. 두 사람, 낑낑대며 악다구니를 쓴다. 태연: 시상에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없다는디, 요 집안은 귀한 아들래미 뒷바라지할 씨는 따로 있당께! 은희: 그만해라. 입 아프다! 민식: 그래! 이 자식아! 악 좀 그만 써라. 까놓고 그게 내 잘못이냐? 내가 너한테 은행 가라고 시켰냐고 인마. 민식, 태연을 바닥에 패대기친다. 은희: 첫째야, 그만은 네가 해야 할 것 같다. 민식: 저요? 아니, 저 파렴치한 놈이 지금 아버지 돈에 눈깔이 뒤집어져 가지고는…. 은희: 뭐? 아버지 돈? 태연, 대자로 뻗어 발버둥친다. 태연: 그려! 눈깔 뒤집어졌다! 눈깔을 뽑아다 오독오독 씹어 묵어부러라! 민식: 저도 돈 빌리러 왔다지만, 아버지 돈에 손을 대는 저런 패륜아가 어딨어요? 은희: 아버지 돈? 아버지 돈에 손을 대? 민식: 네, 아버지 돈이요. 태연, 누워서 돈다발을 허공에 뿌린다. 태연: 더러븐 집구석, 기냥 다 같이 뒷간에 콱 빠져 디져 불자! 은희, 민식에게 다가간다. 은희: 첫째야, 넌 왜 이 모든 게 당연히 네 아비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민식: 네? 은희: ···그래, 너희들은 어릴 적부터 돈에 관한 것은 전부 아버지한테 말하고는 했지. 문구점에서 연필 한 자루를 사더라도 밥상머리 앞에서 국그릇 내다 주는 이 어미한테는 일언반구 않고 그저 아버지 눈동자만 멀뚱멀뚱 쳐다보곤 그랬지. 민식: 갑자기 무슨 서운한 말씀이세요. 태연, 버둥거리며 돈다발 사이를 헤엄친다. 은희: 너희 아버지는 쩍쩍 갈라지고 마디가 툭 터진 손이 무슨 훈장인 것마냥 꺼드럭대는데, 니들이 이 어미 손을 본 적이 있냐?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하루 열두 시간 서 있던 몸뚱이 끌고 와, 밥 차려주던 이 손을 본 적이 있어? 민식: 어머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은희: 이제야 알 것 같다. 내 것을 너무 쉽게 남한테 맡겨 버렸어. 다들 이렇게 악을 쓰면서 자기 것이라고 바락바락 우기면서 사는데, 어째서 나는 한 번도 내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민식: 어머니, 그러지 마시고 아버지 일어나면 차분하게 얘기를 하시죠. 은희: 아니다! 민식: 네? 은희, 동수의 영정사진을 본다. 은희: 그래, 오늘 하루라고 했지? 분명 하룻밤이라고 했지? 돈에 발이 달린 것 마냥 오늘만큼은 이 인간 손에서 전부 떠난다고 했지? 민식: 하루요? 은희, 돈다발 틈에서 통장과 집문서를 꺼낸다. 은희: 나한테는 이거 필요 없다. 이참에 내다 버리자…. 민식: 다 버리자고요? 태연,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다. 태연: 엄니, 고거이 무슨 자다가 벼락 맞을 소리여? 은희: 오 년이다! 오 년! 너희들이 돈 때문에 집구석에 오는 것이 오 년 만이다! 니들 아버지는 평생을 제 것처럼 하고 살았는데 왜 나는 하루도 내 것이라고 못해? 이 어미는 왜 하루도 제 것처럼 하지 못하냐 이 말이다! 오늘은, 하루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할 거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 나도 그럴 수 있는 거야. 민식: 어머니···. 태연: 오라질 것! 뭘 고로코롬 실없는 소리를 혀요? 콱 기냥 뜹시다! 은희, 통장과 집문서를 갈가리 찢어 버린다. 은희: (돈다발을 걷어차며) 이거 전부 갖다 줘 버려라. 이까짓 거 들고 있다고 악다구니 쓸 일 없는 사람들한테나 줘 버려라. 민식: 네? 은희: 싹 다 복지원에나 줘버려라. 태연: 환장하겄네! 이 돈으로 나랑 대대손손 먹고살아야제! 민식: 기부를 하시겠다는 거예요? 은희: 그래, 가지고 가라. 다 가지고 가 버려. 얼른 들고 사라져라…. 태연, 돈다발을 벽에 던진다. 태연: 진장, 염병할! 나 안 가! 오함마로 손모가지를 찍든, 도끼로 발모가지를 끊든, 여서 한 발자국도 안 갈 것잉께 그리 알어! 민식: ···저 자식은 돈에 한 맺힌 악귀가 든 게 분명해요. 태연: 그려! 나 돈에 허천났다! 배때지를 찢든, 대그빡을 부수든 혀라! 나 안 가! 민식: 어머니, 이놈은 제가 구마를 하든 굿을 치든 해서라도 끌어낼게요. 근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저야 상관이 없지만···. 은희: 너 좋으라고 하는 일 아니다. 태연: 뭣 같은 시상! 또 아들래미 몫이여? 민식: 이제는 어머니 앞에서도 막말을 하네! 태연: 돼지꿈은 육실헐, 팔자가 개팔자인디···. (주머니에서 복권을 꺼낸다) 냄들은 뭐 잘만 풀린다드만 또 꽝이네? 난 태생부터 허벌나게 꼬여부렀어. 사는 것이 요로코롬 뺑이치다 뒤질 개꿈이라니께! 민식, 태연을 붙잡으려 하면, 은희, 태연을 꼭 끌어안는다. 은희: 이것아, 돼지꿈은 무슨 돼지꿈이냐···. 정신 좀 차려. 세상이 돼지우리다. 눈을 씻고 봐도 똥 묻은 돼지 새끼들이 지 몸에 묻은 것이 황금이나 된 줄 알고 똥밭을 뒹굴고 사는 거란 말이다. 너까지 돼지가 되면 어미는 어쩌란 말이냐. 이빨 드러내면서 컹컹 짖는 개처럼 살어. 차라리 개처럼 악을 쓰면서 살란 말이야. 태연: 엄니, 요것이 참말로 사는 것이 맞어? 내는 우째 악쓰고 살아야 쓰는디? 내는 우째 악을 써야만 되는 것인디? 우째 꽥꽥 소리를 써야만 들어주는 것인디? 은희: 누가 네 것을 빼앗으려고 하면, 지금처럼 소리를 꽥꽥 지르고 악을 단단히 써 버려. 절대 빼앗기면 안 돼. 이 어미처럼 살지는 말어. 그냥 그렇게 살어…. 태연: 시방 나도 기냥 살고 싶단 말이여. 기냥 살고 싶다 이 말이여. 태연, 서럽게 운다. 은희,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워서 태연에게 쥐여 준다. 은희: 굶지 말고 가는 길에 따뜻한 밥이나 한 숟갈 떠. 글고 다 잊어. 그깟 꿈 얘기, 싹 잊어버려. 태연: (돈을 쥐고) 진장, 드러븐 돈, 드러븐 집구석···. 민식, 감자 박스에 돈을 쓸어 담는다. 민식: 익명으로 후원하면 아버지도 모를 거예요. 근데 정말 후회 없으시겠어요? 은희: 괜찮아. 다 필요 없다. 나는 필요 없어. 민식: 아버지는 어쩌죠? 가만히 있진 않으실 텐데. 은희: 그놈의 아버지, 지긋지긋한 아버지. 민식: 죄송해요. 걱정이 되어서···. 은희, 입을 쩍 벌리고 누워 있는 병철을 바라본다. 잠꼬대를 하듯이 몸을 움찔거리는 병철. 은희: 또 꿈을 꾸는 모양이구나. 이 인간 깨어나기 전에 가라. 민식: 괜찮으시겠어요? 은희: 걱정할 거 없어. 원래부터 내 것이었어. 다 내 몫이었어. 얼른 가, 어서 가라…. 민식: (태연을 걷어찬다) 일어나! 아버지 깨어난다! 이제 가자! 민식, 감자 박스를 집어 들면, 태연,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일어난다. 태연: 엄니, 사실 핸드폰 안 바꼈어요. 연락 자주 헐 것잉께…. 민식: 핸드폰 바꾼 것도 거짓말이었냐? 태연, 은희와 포옹한다. 병철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인다. 은희: 애들아, 얼른 가라, 얼른 가. 민식: 어머니, 만수무강하세요. 구정에는 과일이라도 한 박스 사서 올게요. 태연: 엄니…. 민식, 태연을 끌고 퇴장한다. 은희: (무대 밖으로) 그래, 연락들 자주해라. 밥 잘 챙겨 먹고, 뛰지 말아라 다친다···. 병철, 잠꼬대를 한다. 은희,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보다가 전등 스위치를 내린다.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병철, 요람에 싸인 아기처럼 몸을 웅크린다. 3장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은희는 가구를 재배치한다. 무대 밖에서 옷장과 수납장을 들여와 제자리에 두고, 누런 벽지에 가족 사진도 건다. 선반에 제대로 놓여 있는 동수의 영정사진. 규칙적으로 코 고는 소리가 울리는 와중에, 은희는 병철에게 다가가 고깔모자를 벗긴다. 순간 잠에서 깨는 병철. 병철: 아부지! 아부지! 은희: 이 양반이 또 꿈을 꿔? 병철: (끙끙 앓는다)  아부지! 은희, 병철을 흔든다. 은희: 왜 자다 말고 땀을 비질비질 흘리구 소리를 꽥꽥 질러대? 일어나…. 병철: 어? 당신이여? 은희: 자다가 뭐라도 봤어? 병철: 아부지가 꿈에 나왔구만! 은희: 그래? 이번에는 뭐래? 복권 번호라도 몇 개 찍어 줍디까? 병철: 그, 글씨 말이여…. (사이) 아니, 근데 우리 돈은? 이 써글 놈들! 병철, 자리에서 일어난다. 은희: 돈? 병철: 그려! 여그다 내가 돈을 분명히! 근디 그 호로자슥들이 와 가지고! 은희: 개꿈이야. 당신 꿈을 꾼 거야. 병철: 꿈? 은희: 당신 원래 꿈을 잘 꾸잖아. 돈은 무슨, 귀신이 씻나락 까먹을 소리야. 병철: 꿈? 꿈이라고? 병철, 혼란스러운 듯이 주변을 둘러본다. 은희: 도대체 무슨 꿈을 꾼 거야. 평생 제 손으로 돈은 만져 본 적도 없으면서. 병철: 분명히 아부지가 그렸어, 아부지가! 은희: 아까 전화 왔었어. 민식이랑 태연이한테. 둘 다 서울에서 번듯하게 자리잡았나 봐. 구정에 한 번 내려오겠대. 애들이랑 연락 안 한 지 오래됐잖아…. 병철: 안 돼! 그것들이 여그 오믄 안 돼! 은희: 그냥 살자, 제발 그냥 살자 우리. 병철: 아버지가 오늘 하루라고 혔어. 하룻밤 안에…. 은희: 당신 오늘 생일이잖아. 더 자, 푹 자. 그냥 그 터무니없는 돼지꿈이나 꿔버려. 병철: 꿈? 꿈이라고? 진장 꿈이라고? 워째 혀끝에 엿기름이 배인 만치 달디달다 혔어. 은희, 선반에서 알약과 물그릇을 가져와 병철에게 먹인다. 병철: (약을 삼키며) 아, 아부지. 어따 돈을 넣을까요? 아아, 요참엔 어따 돈을 넣어야 할까요…. 병철, 중얼거리며 드러눕는다. 은희도 함께 눕는다. 암전.
  • [훔치고 싶은 문장]

    [훔치고 싶은 문장]

    홈 가드닝 블루(고민실 지음, 열린책들) “옆자리에 앉은 엄마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엄마 손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부드러운 피부가 자랑이었던 손등이 거칠해졌다. 손을 쥐었다. 척추가 비뚤어질까 봐 엄마는 집에서도 브래지어를 벗지 못했다. 도로 손을 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손을 쥐었다 펴도 엄마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열린책들 ‘한국 문학 소설선’의 첫 번째 작가인 고민실의 첫 소설집. 그의 세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평범하다. 그 인물들을 둘러싼 일상을 덤덤하게 들여다보는 그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이 삶이 나 혹은 내 가족을 말하는 게 아닌지 서늘해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일상에 균열이 생기고 알 수 없는 불안을 홀로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서 균열된 삶을 어떻게 이어 갈 것인가, 작가는 소설에서 답을 찾는다. 272쪽, 1만 6000원. 웃기지 않아서 웃지 않음(선우은실 지음, 읻다) “‘오직 너만이 가능한 자비를 지녔다는 자부심으로’. 이 한 문장은 영원히 뇌리에 남는다. 자신의 고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자가 타인의 고통 또한 제대로 볼 수 있다. 자신의 미덕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자가 타인의 미덕 또한 볼 수 있다. 오직 내가 그것을 지녔기에, 타인의 그것 또한 헤아릴 수 있음에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환희, 그리고 그에 대한 자부심으로.” 글쓰기 생활자인 평론가 선우은실이 ‘생활 비평 산문집’을 표방한 기록이다. 작가는 1~3부에 걸쳐 아직 언어로 소화되지 않았던 이름 모를 불편과 기쁨을 내밀하게 되짚고 30대, 비혼, 여성, 비평가로서 마주치는 곤경과 곤란을 해석한다. 추천 글을 쓴 김금희 작가의 말처럼 “발랄하고 매몰찬 듯 너그러우며 도전적인” 글의 면면에는 고군분투하는 한 글쓰기 생활자의 흔적이 담겨 있다. 244쪽, 1만 8000원. 달리기를 잘하는 법(이은홍 글, 혜원 그림, 딸기책방) “달리기를 잘한다는 것은 빨리 달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웃으면서 뛰고 싶은 대로 뛰고, 다른 이들도 그 모습을 보면 즐거워한다면 그보다 멋진 달리기도 없는 것이다. 달리기를 못하지만, 사람들을 웃게 만들 수 있는 민호처럼, 사람은 저마다 자기만의 개성을 가지고 산다.” KBS 1TV의 어린이 눈높이 역사 프로그램 ‘역사야 놀자’를 진행한 이은홍 만화가가 쓴 첫 번째 동화. 작가가 동네책방을 운영하는 충북 제천 덕산면의 시골 마을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동화에는 농촌 학교의 소소한 일상과 여유, 잔잔한 행복이 녹아 있다. 이 작가는 2001년 만화 ‘술꾼’으로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수상했고, 저서로는 20만부 이상 팔린 ‘역사야 나오너라!’ 등의 작품이 있다. 반려자이자 책방 동업자인 신혜원 작가가 그림을 그렸다. 148쪽, 1만 5000원.
  •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감, 대추, 밤… 차례상 식물의 고군분투

    [이소영의 도시식물 탐색] 감, 대추, 밤… 차례상 식물의 고군분투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다.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은 한가위쯤 날씨를 뜻하는 말이지만, 올 추석은 무척 더웠다. 식물은 온도 외에도 해의 길이로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지금 산에는 밤나무가, 마을 어귀와 정원에는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열매를 가득 매달고 있다. 이들은 명절 차례상에 오르는 과일이자 ‘시골’이라 불리는 농촌과 산촌 풍경을 이루는 대표 식물이다. 먼 옛날부터 서민들의 식량이 돼 준 밤, 겨우내 간식이었던 감, 아픈 이들에게 약이 돼 준 대추. 주식은 아니었으나, 우리의 삶 가장 가까이에서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형태를 달리해 온 식물들이다. 한반도에 대추가 들어온 시초는 알 수 없으나 본격적으로 대추를 재배한 건 고려시대라 추측한다. 옛날에는 부잣집 마당에 조경수로 대추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대추를 가장 오랫동안 재배해 온 국가는 중국이다. 기원전 1000년 전부터 재배를 시작해 대추는 중국에서도 가장 오래된 과수로 꼽힌다. 그런 대추나무가 우리나라에 도입돼 오랫동안 재배돼 온 이유는 다른 과수보다 재배가 수월하고, 열매가 많이 맺으며, 약효가 많기 때문이었다. 흔히 결혼식 폐백을 드릴 때 부모가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신부의 한복에 대추를 던져 주는데, 이는 열매가 많이 맺는 대추나무의 특성에서 유래한 풍습이다. 조상들은 대추를 먹으면 양기가 채워지고 몸이 가벼워지며 안색이 좋아진다고도 믿었다. 그 때문에 대추는 감초와 더불어 가장 많이 쓰이는 약재이자 요리 재료였다. 물론 이들은 이제 더이상 약재로만 소비되지 않는다. 달콤하고 아삭한 데다 과실이 큰 왕대추와 사과대추의 등장으로, 대추를 생과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감도 우리나라에서 오래도록 재배돼 온 과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감을 처음 재배한 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 명종 때 감나무와 친척뻘인 고욤나무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고려 원종 때 ‘농상집요’에 감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 후 홍시 만드는 법, 감식초 만드는 법에 관한 레시피도 기록됐다. 그러나 감은 현재 달콤한 아열대 과일의 등장으로 인해 소비량이 점점 줄고 있다. 물론 감도 아열대·온대 기후 원산이기에 사실상 지구온난화로 감을 재배할 수 있는 면적은 점점 확대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어떻게 재도약을 할지 고민할 시점으로 보인다. 이들은 말린 과일의 원조 격이기도 하다. 요즘 건강식을 찾거나 외국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말린 과일의 소비량도 늘고 있다. 동남아에서 판매하는 열대과일 건조 칩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사과, 귤, 딸기 등을 건조해 과자로 판매한다. 생과는 기한 내에 빨리 먹어야 하지만, 건조과는 유통기한이 길어 보관이 편리하고 영양학적으로도 건강하기에 건조 과일의 소비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이미 우리가 오랫동안 먹어 왔던 대표적인 건조 과일이 바로 곶감과 건대추다. 나 역시 매번 차례상에서 만나는 과일들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 건 식물 세밀화를 그리면서였다. 쑥 세밀화를 그리며 알게 된 농장에서 사과대추 한 봉을 보내 주었는데, 그 맛을 본 후로 대추의 달콤함에 푹 빠지게 됐고, 일본 진보초의 중고 서점에서 1940년대 기록된 일본의 감 그림 도감을 손에 쥐게 된 후로 우리나라의 감을 기록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물론 대추나무꽃이 다른 꽃보다 늦게 핀다는 사실, 감나무 아래 떨어진 열매를 곤충들이 유난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어릴 적 농촌에 살던 내 고모 덕분이었다. 내가 서울 도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식물을 낯설게 느끼지 않은 것은 명절과 방학마다 시골의 고모와 외할머니 댁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만난 감나무, 대추나무, 백일홍, 봉선화, 꽈리…. 도시에선 만나기 힘들지만, 도시만 벗어나면 아주 흔히 만날 수 있는, 논과 밭 주변의 식물들과 친숙해졌다. 고모는 어릴 적 내게 봉선화 열매가 톡톡 터진다는 사실을, 백일홍꽃 한 송이에는 여러 꽃이 들어 있다는 사실도 보여 주었다. ‘시골’이라 부르는 농촌과 산촌은 나에게 식물이 참 많은 걸 주고, 채소와 과일도 나처럼 그저 살아 있는 생물이란 걸 알려 주었다. 이제 나는 어릴 적의 내가 기억하는 고모와 이모 나이가 됐다. 그러나 나는 내 고모와 이모처럼 농촌과 산촌에 살지 않는다. 또래의 친구와 지인 모두 아파트와 빌딩이 빼곡한 도시에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 조카는, 현재의 어린이들은 어디에서, 누구를 통해 자연을 경험하지?’ 물론 자연을 공부하기보다 코딩을 공부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예전보다 자연을 덜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류는 자연에 더 기댄다. 마침 얼마 전 열차역에서 ‘생태 유학 오세요’라는 문구를 내건 지역 광고를 보았다. TV에서 ‘촌캉스’란 용어를 내건 여행 프로그램도 봤다. 우리는 자연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많은 값어치를 들여 자연을 찾고 있다. 나 역시 도시에 살며, 어릴 적 주변 어른들로부터 받은 자연 경험을 현재의 어린이들에게 되돌려주지 못하는 부채감을 안고만 있을 뿐이다.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 인의보다 철저히 이익 추구하라… 中 2인자들의 ‘사내정치’ 비급서

    인의보다 철저히 이익 추구하라… 中 2인자들의 ‘사내정치’ 비급서

    역사는 제왕을 주인공으로 기록하지만 최고권력자를 성공으로도, 실패로도 이끄는 건 참모들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권력자의 처세술과 통치 기술을 다룬 제왕학이라면 신간 ‘막료학’은 중국 역사 속 2인자들의 처신과 생존 기술을 통찰한 참모학이다. 국내에 출판된 과정도 흥미롭다. 저자로 표기된 ‘쥐런’은 필명으로 추정된다. 그의 신상명세나 행적은 베일에 가려 있다. 국내 ‘사기’(史記) 연구 권위자인 김영수 한국사마천학회 이사장이 1998년 출간된 초판을 경매로 입수한 뒤 꼼꼼하게 팩트체킹해 편역했다. 박성규 들녘출판사 부대표는 “중국 쪽 에이전시를 총동원해 백방으로 저자를 수소문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공탁금을 걸고 국내에 출간했다”며 “초판이나 중국 인터넷 어디에서도 저자 정보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쥐런은 싸우기를 좋아하는 중국인 특유의 문명사에 주목한다. 그가 두 글자로 요약한 중국 역사는 ‘투’(闘·싸움)와 ‘모’(謀·꾀)다. 인류 역사를 이익을 좇는 집단 투쟁사로 규정하는 그는 승리의 방편을 뛰어난 책략을 발휘하는 참모들의 능력에서 찾는다.책의 부제는 ‘참모 대 리더, 장막에서 펼치는 다이나믹 정치학’이다. 권력 공간인 ‘막부’(幕府) 안에서 펼쳐지는 최고권력자 ‘막주’(幕主)와 참모인 ‘막료’(幕僚)의 관계를 200자 원고지 4000장이 넘는 풍부한 역사적 사료로 풀어낸다. 등장 인물만 1177명인 중국 처세 철학의 결정판이다. 성공한 막주 뒤에는 예외 없이 뛰어난 막료들이 존재했다. 시골 촌락의 무뢰배에 불과했던 한고조 유방이 천하를 얻은 건 ‘서한삼걸’인 장량·소하·한신 덕분이다. 유방과 항우의 ‘초한쟁패’의 본질은 인재 전쟁이었다. 반대로 어리석은 막주를 만난 막료는 아무리 뛰어나도 능력을 발휘할 수 없고, 자유롭게 떠날 수 없는 구조에서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다. 리더와 참모의 관계는 공동의 이익을 좇는 만큼 상대적이고 동태적이다. 저자는 막주의 인재 통제 7원칙으로 ‘큰 그림을 파악하고 자질구레한 것을 버려라’, ‘재능을 헤아려 기용하고 예의를 다해 인재를 대우하라’는 보편적인 용인술을 제시하지만 ‘먼저 쓰고 버려 인재의 기세를 꺾어라’라는 냉혹한 통제술도 담았다. 막료 6원칙 중 ‘좋은 리더를 골라 모시되 맞지 않으면 떠나라’는 형세를 살펴 진퇴를 결정하라는 ‘도세진퇴’(度勢進退)의 처신과 닿아 있다. 저자는 “뛰어난 인재들이 자신보다 못한 지도자에게 몸을 맡기는 이유는 담장을 넘을 사다리가 없는데 옆에 놓인 똥통이라도 밟고 올라가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권력의 불나방들을 향한 일침이지만 3류 지도자가 결코 일류 인재를 쓰는 법이 없기 때문에 권력의 품질은 하향평준화된다. 전체 6편 중 참모의 생존 기술을 다룬 3편 ‘막료술’은 사내 정치의 비급서 같다. 저자는 ‘싸움의 원칙’으로 공자의 ‘인의’(仁義)가 아니라 철저히 ‘이익’을 추구하라고 한다. ‘상대의 약점을 이용하고 남의 힘을 빌려 싸우라’거나 ‘이익으로 유인하고 위세로 압박하라’는 싸움의 기술편은 재야 고수의 내공이 엿보인다. 장막 속 모습은 권력자의 이익과 사적 감정에 따라 독선적인 통치로 흘렀던 봉건적인 ‘인치’(人治)의 잔영이 짙다. 예나 지금이나 리더십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 저자가 초판 서문에 쓴 “백성들이 그 장막 뒤에 무엇이 있는지 똑똑히 보도록 하려 했다”는 바람대로 수천년간 리더와 명멸해 온 참모들이 경계했던 나쁜 지도자들의 전형도 생생하게 그려 낸다.
  • 20평의 기적… 70년 된 한을 푸는 9인이 있었다

    20평의 기적… 70년 된 한을 푸는 9인이 있었다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지난 14일 장관 취임 이후 공식적으로 제주를 처음 방문하면서 제주4·3사건 직권재심 합동수행단(단장 강종헌·이하 합동수행단) 사무실을 가장 먼저 찾아 지역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제주시 연동 설문대여성문화센터 내 제주도 도로관리과 청사에 위치한 합동수행단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너무나 소박한 모습이다. 설문대여성문화센터에서도 동쪽 한 귀퉁이에 있어 보일 듯 말 듯 했다. # 역사적인, 너무나 역사적인 그곳은… 1980년대 시골학교보다 더 비좁은 사무실 제주 4·3 당시 부당하게 작동했던 사법체계를 70여년이 흐른 지금 바로 잡기에 나선 역사적인 장소이지만, 합동수행단 건물은 마치 1980년대 시골학교를 닮았고 사무실은 그보다 더 협소했다. 그럼에도 합동수행단은 한 장관이 방문하는 이날 아침 일찍부터 귀한 손님을 맞느라, 혹은 기자들의 취재 열기가 뜨거울 것으로 판단해 협소한 사무실을 최대한 넓게 보이려고 복도 칸막이를 떼어 내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이곳의 수장인 강 단장마저 별도 룸도 없이 자영업자 대표보다도 못한 칸막이 한 칸을 룸으로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아침 칸막이마저 떼어내자 그나마 있었던 자신만의 공간조차 사라졌다. 그만큼 사무실은 비좁고 열악한 상황이었다. 손님이 와도 그 흔한 소파도 없어 대접할 공간마저 없어 보였다. 이날 변진환 검사는 “칸막이 없애니 사무실이 넓어 보인다”며 애써 웃었다. 그리고 “이 정도면 기자들도 몰려와도 비좁아 보이지 않을 것 같지 않냐”고 일찍 온 기자들에게 진지하게 되물었다. 하지만 이날 한 장관이 도착하고 취재 열기가 뜨거워지자 한 장관과 마주하지도 못한 채 복도에서 목소리만으로 취재하는 기자도 발생했다.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한 장관이 이날 기자들에게 입을 떼면서 언급한 “70여년이 지난 아픈 역사를, 70여년이 지난 후에 재심을 위해, 70여년이 된 재판기록을 완전히 전수조사하는, 흔치 않은 일을 하는” 합동수행단이 아니던가. 4·3 희생자 가족과 유족들의 한 풀어주기 위해 애쓰는 공간의 현주소는 청백하다 못해 민망할 정도로 초라했다. # 70여년 된 아픔을 치유하는 그곳인데… 협소한 사무실 탓 일부 대면도 못한 채 목소리로만 취재도 70여년의 아픔을 치유하고 새 역사를 써 내려가는 업무를 담당하는, 그들의 빛나는 업적에 비해 흔하디 흔한, 평범한 사무실이어서 놀랐다.이날 합동수행단의 업무에 속도를 내려면 인력 충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한 장관은 “검사나 수사관 한명을 늘리려고 해도 국회에서 해주지 않는다”고 우회적으로 비난한 뒤 “속도가 느릴지언정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직권재심)해내겠다”고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어쩌면 예우받지 못하는 그들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장관 취임 이후 첫 제주 방문에서 가장 먼저 ‘여기, 이곳’을 찾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었다. 합동수행단은 이날 평소에 하던 작업들을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눈으로 확인해야만 그들의 업무를 실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 알아보기도 힘든 수사기록을 보면서, 황색 모노톤으로 빛바랜 장부들을 보면서, 조금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와 닿았고 결코 생색내기용 연출이 아니었다. 이날 한 장관도 실제 이 서적들을 펼쳐보이고 손에 쥐고 열변을 토하듯 말했다. “한자 세대도 아닌데 고어체이고 흘려 기록된 한자를 일일이 해독하는 일을 그들은 하고 있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실제 점 하나만 달라도 성이 바뀌고 이름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또 신중하게 확인 작업을 거쳐야 하는,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희생자가 바뀔 수도 있는 상황이다. 한 사람의 운명이 달려 있다.# 빛바랜 기록과 싸우는 그곳엔… 70년 아픔을 치유하는 기적의 9인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 더 수북이 쌓인 4·3관련 기록과 수형인명부, 제대로 알아보기 조차 힘든 한자 기록과 씨름하며 날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빛바랜 기록의 역사와 싸우고 있다. 한 장관은 “처벌만 하던 검찰이 억울한 한을 풀어주기 위한 일을 하고 있다”고 특유의 또렷하고 진중한 어조로 합동수행단을 치하했다. 지난 14일 기준 군사재판 피해자 2530명 중 합동수행단은 1061명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고 이 중 1031명의 수형인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한편 합동수행단은 강 단장을 비롯, 검사 2명, 검찰수사관 3명. 실무관 1명, 파견경찰 2명 등 총 9명이다. 이들은 원팀으로 희생자와 유족의 명예회복을 위해 75년이 된 아픈 역사를 치유하고 있다. 불과 20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해내는 기적이었다.
  • 교대 근무 4주 이상 땐 생식능력 장애 유발[유용하 기자의 사이언스 톡]

    교대 근무 4주 이상 땐 생식능력 장애 유발[유용하 기자의 사이언스 톡]

    18~19세기 산업화 시대에는 많은 나라가 ‘보이지 않는 손’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유방임주의 경제를 따랐습니다. 당시 기업가들은 임금이 싼 여성이나 아동을 고용했습니다. 이들은 최악의 작업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산업화 시대 열악한 노동 환경은 주로 기록으로만 남아있을 뿐 생물학적 증거는 많지 않습니다. 이런 가운데 영국·체코·네덜란드 공동 연구팀은 산업화 시대 강제 노동으로 인해 어린이들이 겪은 건강 문제에 대한 직접적 증거를 찾아냈습니다. 더럼대, 옥스퍼드브룩스대, 요크대, 브라이턴대, 워시번 헤리티지 센터, 체코 마사리크대, 네덜란드 발틱시청각자료협의회(BAAC) 등이 참여한 연구의 결과는 미국공공과학도서관에서 발행한 국제학술지 ‘플로스 원’ 5월 18일자에 실렸습니다. 18~19세기 산업화 시대의 대규모 아동 노동은 악명이 높습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도시의 공장이나 시골 농장에서 일하도록 내몰렸습니다. 가혹한 노동 환경과 적은 임금 탓에 영양실조와 각종 질병을 달고 살았으며 낮은 기대 수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실제로 아동 노동에 시달린 이들의 평균 수명은 25세 정도였다는 통계 결과도 있습니다. 연구팀은 1783~1864년에 사망해 북요크셔주 퓨스턴의 공동묘지에 묻힌 154명의 유골을 분석했습니다. 사망 당시 나이는 대부분 8~20세였다고 합니다. 유골에서 스트론튬과 산소 동위원소를 분석한 결과 이들 중 상당수는 외지인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유골을 지역 주민의 유골과 비교한 결과 저성장, 비타민 결핍, 호흡기 질환, 골격계 질환에 시달렸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탄소 및 질소 동위원소 분석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단백질이 부족한 식단에 만성적인 영양부족 상태였다고 합니다. 열악한 노동 환경은 어른에게도 심각한 건강상 문제를 유발합니다. 지난 13~16일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열린 ‘제25회 유럽 내분비학회 콘퍼런스’에서 프랑스 세포·통합 신경과학 연구소, 스트라스부르대 공동 연구팀은 4주 이상 교대근무를 할 경우 생식능력에 심각한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습니다. 모든 동물은 하루 24시간 주기로 작동하는 신체 시계인 ‘일주기 리듬’을 갖고 있습니다. 일주기 리듬은 수면·각성 주기, 호르몬 분비, 소화 및 생식 등 다양한 생물학적 기능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뇌 중앙 시상하부 핵에 있는 ‘마스터 생체 시계’가 망가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동물과 사람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연구에서 일주기 리듬이 깨지면 생식능력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은 확인됐지만 정확한 메커니즘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연구팀은 사람의 장기 교대근무 조건을 모방해 암컷 생쥐들에게 4주 동안 빛에 노출되는 시간을 10시간씩 늦추거나 앞당긴 뒤 생체 변화를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배란을 유도하는 황체형성호르몬의 분비가 중단돼 생식능력과 임신 성공률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이번 연구 결과들로 알 수 있지만 잦은 야근이나 밤낮이 바뀐 불규칙한 근무 시간, 열악한 근무 환경은 장기적으로 국가와 사회의 경쟁력과 생산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입니다. 무조건 오래 일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란 말이지요.
  • 13년 지났는데...해외 매체 “960번 운전면허 車 할머니 멋져요”

    13년 지났는데...해외 매체 “960번 운전면허 車 할머니 멋져요”

    2010년 961번째 도전 끝에 운전면허를 따낸 차사순(82) 할머니의 사연이 느닷없이 해외 언론에 다시 소개돼 눈길을 붙든다. 60대 중반 도전을 시작해 끈질긴 도전 끝에 69세 나이에 마침내 면허증을 손에 쥐고 기뻐하는 시골 할머니의 사연이 갖는 매력과 호소력은 13년의 세월과 국경을 단숨에 뛰어넘어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안긴다. 차 할머니의 사연을 전한 매체는 미국 일간 뉴욕 포스트와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로 지난 27일(현지시간) 웬만한 우리 독자들은 다 아는 차 할머니의 사연을 전했다. 2010년 뉴욕 타임스(NYT)와 NBC 뉴스의 보도를 되풀이하는 수준이었다. 미국의 한인 문제 전문매체인 넥스트샤크도 차 할머니의 사연을 전했는데 과거 여러 보도들을 정리해 옮기는 수준이었다. 이들 매체의 보도를 끌어낸 것은 열흘 전쯤 레딧에 올라온 동영상이었다. 많은 댓글이 달리는 등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다. 유튜브의 아시안 컬처 언록티드란 계정에 올라온 동영상도 눈길을 끌었다. 당연히 차 할머니의 근황을 모를 수 밖에 없는 한 누리꾼은 “절대 운전대를 잡게 하면 안된다”며 흥분했다. 누군가는 차 할머니가 일년도 안되는 새 네 건의 사고, 그 중 셋은 정지된 물체를 들이받은 사고를 냈다고 알리며 고연령층의 운전을 자제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 있는 차 할머니 집까지 찾아가 인터뷰한 기자로선 안타까운 대목이 있다.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에 조그만 텃밭과 낡은 주택에 혼자 살던 차 할머니가 운전면허를 따야겠다고 결심한 이유 때문이었다. 지방도로를 벗어나 이 마을로 들어가려면 상당히 비좁은 길을 올라야 했고, 이 때문에 마을버스도 하루 한 차례 밖에 다니지 않았다. 세월이 많이 흘러 지금은 달라졌겠지만 당시에는 그랬다. 해서 할머니는 손주들을 태우고 동물원에도 나들이가고 싶어 그렇게도 운전면허를 따겠다고 열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들이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이 이렇게 시골에 혼자 사는 어르신들이 일상적으로 외부와 왕래하고 병원, 문화시설을 이용할 수 있으려면 자유롭게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점이다. 기자가 할머니를 인터뷰했을 때는 현대자동차가 ‘기프트 카’ 캠페인의 첫 사례로 쏘올 자동차(최근 미국의 한 고속도로에서 옆 픽업트럭의 바퀴가 떨어져나와 충돌하는 바람에 3m나 치솟았는데 운전자가 가벼운 부상만 입어 화제가 됐던 그 모델)를 기증한 뒤 얼마 안된 때였다. 차 할머니는 운전대를 잡고 마냥 들뜨고 행복해 하셨지만 힘겨워하기도 했다. 주유소에 기름을 넣으려 들어갔는데 주유기를 들이받을 듯 운전하는 모습을 촬영하며 아찔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할머니는 감나무를 들이받는 등 네 차례 사고를 일으켰고, 나중에 결국 그 차를 폐차한 것으로 지난해 말까지 언론에 보도됐다. 기자 일행이 차 할머니의 차에 탑승했던 경험을 돌아볼 때 어떤 손주도 그 차에 오르게 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전주시에 산다는 아드님이나 가족들도 간곡히 만류한다고 차 할머니는 말씀하셨던 터다. 그런데 앞에서 지적했듯 시골의 외딴 곳에서 혼자 사는 어르신들의 건강권과 이동권 문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과제를 던진다. 해외에서는 인간승리 드라마에 흥분하겠지만 우리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숙제다.
  • 그리스 노예의 성공담, 우화같은 죽음…거지꼴을 한 철학자 이솝[으른들의 미술사]

    그리스 노예의 성공담, 우화같은 죽음…거지꼴을 한 철학자 이솝[으른들의 미술사]

    한 남자가 한 손엔 책을, 한 손은 옷에 찔러 넣은 채 정면을 무심히 바라본다. 헝클어진 머리, 주름진 얼굴, 아무렇게나 막 입은 옷으로 볼 때 그는 세상의 가치를 초월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의 이름은 화면 오른편 상단에 적혀 있는 대로 아이소포스(Aesopus·BC 620~BC560)다. 아이소포스는 고대 그리스 기원전 6세기 사람으로 소크라테스보다도 한 세기 먼저 태어난 사람이다. 많이 들어본 이름 같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낯선 이름이다. 그는 이솝이라는 영어 이름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우화 작가다.  ‘이솝 우화’ 작가의 삶을 함축한 벨라스케스의 작품 <이솝>  우화(寓話)란 동물을 주인공으로 인간의 어리석음을 풍자한 글이다.  언뜻 생각나는 이솝 우화만 해도 개미와 베짱이, 시골 쥐와 서울 쥐, 여우와 포도 등 신랄하고 재치 번뜩이는 이야기가 넘쳐난다. 동물에 빗댄 이솝 우화는 인간 사회를 통찰하는 이솝의 철학적 직관과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이솝의 초기 삶은 우아한 철학자의 삶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는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노예의 삶을 살았다.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어도 그의 외모에 대한 기록은 하나같이 그가 추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솝은 낮은 이마, 들창코에 튀어나온 입,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해 오늘날 미의 기준으로 보면 잘생겼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솝의 스토리텔링 솜씨와 재치, 지혜는 주변의 많은 노예들로부터 인기가 있었다. 그의 재주는 주인에게까지 알려져 대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솝의 스토리텔링 능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웃 나라에까지 알려졌다. 사모스 철학자 크잔토스가 이솝의 능력을 눈여겨 보고 그를 곁에 두고자 했다. 크잔토스의 도움으로 이솝은 노예 신분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솝의 능력은 최고 통치자에게도 알려져 통치자 곁에서 국사를 논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여기까지만 보면 어느 그리스 노예의 성공담이다.  입담 넘치는 노예에서 국사를 논하던 철학자  그러나 이솝의 죽음은 너무 어이없었고 죽음 자체가 우화였다. 이솝이 출세하면 할수록 이를 배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느날 이솝이 델피로 길을 떠나자 시기심에 눈이 먼 사내들이 이솝의 길을 막아섰다. 노예 주제에 어디를 감히 돌아 다니느냐, 어디 감히 국정을 논하느냐 등 지금까지 이솝이 해왔던 모든 일들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들의 시기, 모함은 끝이 없었다. 델포이 사람들은 이솝의 짐에 잔을 미리 숨겨 이솝을 도둑이라 몰아세웠다. 이 절도 때문에 이솝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여기서 그친 게 아니라 이솝을 절벽에서 떨어뜨려 사형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이렇게 이솝은 허무하게 절벽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얼마 후 현자를 살해한 델포이에 전염병이 돌았고 그제서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닫게 되었다. 이솝을 살해한 델포이는 이솝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똑같은 결말을 맞았다.  이제 벨라스케스(1599~1660)가 그린 <이솝>을 자세히 보자. 이솝이 입은 걸인의 옷은 바로 노예의 삶을 상징하며 한 손에 든 책은 이솝 우화로 그의 업적을 상징한다. 왼편의 물통은 이솝을 해방시켜준 크산토스와 나눈 지혜의 샘을 의미한다.  오른편에 있는 물건은 델포이 사람들이 잔을 숨긴 이솝의 짐으로 그의 죽음을 상징한다. 벨라스케스는 모델에게 실제로 거지가 입는 옷과 신발을 신겨 사실성을 더했다.  이는 철학과 배고픔을 동일하다고 본 바로크식 관념을 보여준 것이다. 거지꼴을 하고 남루한 옷을 입었어도 철학자 이솝의 태도는 당당하다.  벨라스케스의 시선에서 본 고귀한 존재들  17세기는 다들 먹고살기 바쁠 때라 인권, 기본권과 같은 인간의 권리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 배려와 보살핌은 기대할 수 없던 시기였다. 그러나 벨라스케스가 그린 거지, 난장이, 광대들을 보면 사회적 편견과 달리 인간의 품격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사실 궁정에 사는 광대와 난장이들은 말 그대로 왕실의 장난감이었다.  태엽을 감거나 건전지를 갈아 끼울 필요가 없는 살아있는 장난감으로서 이들은 왕의 존재를 돋보이게 하는 서글픈 존재들이었다. 현실에서도 서글픈 존재들이 있다. 바로 노인들이다. 벨라스케스 작품에 등장하는 노인들은 하나같이 쓸모를 다한 잉여 존재들이 아니라 지혜를 갖춘 인물들로 등장한다. 벨라스케스의 시선으로 보면 이들은 고귀한 존재들이다. 벨라스케스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현자 앞에 마음이 못난 사내들이 길을 막아섰을 때 이솝이 느낀 감정을 표현했다. 철학자가 느낀 이 감정은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다. 이솝의 달관한 듯한 표정에서 할 말은 많은데 하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가 읽힌다. 2500여 년 전 이솝에게서, 400여 년 전 벨라스케스에게서 으른들의 품격이 느껴진다.
  • 전병주 의원 “열차는 이미 떠났습니다. 열차 떠나고 가져온 5688억원 삭감액 근거…누구보고 보라는 말씀이십니까?”

    전병주 의원 “열차는 이미 떠났습니다. 열차 떠나고 가져온 5688억원 삭감액 근거…누구보고 보라는 말씀이십니까?”

    서울특별시의희 전병주 의원(더불어민주당·광진1)은 제315회 정례회 서울특별시의회 제6차 본회의에서 5688억원이 삭감된 채로  상정된 2023년도 서울특별시교육비특별회계 예산안에 대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16일 본회의장에서는 삭감된 5688억원의 2023년도 서울특별시교육비특별회계 예산안과 더불어민주당이 수정제안한 2023년도 서울특별시교육비특별회계 예산안 2건을 두고 찬성, 반대 토론이 진행됐다. 국민의힘 정지웅 서울시의원은 교육청 예산 5688억원의 삭감은 정당함을 주장하면서 삭감액에 대한 근거들을 나열했다. 전 의원은 “삭감 근거는 보름 전 교육위원회 예산 예비심사 때 진작 제출했어야하지만 이제 와서 뒤늦게 엉터리 삭감근거들을 제시하며 천만 서울시민들을 호도한 셈”이라고 주장했다. 발언대에 선 전 의원은 “전국 17개 광역시 맏형으로 불리는 ‘서울’, 바로 ‘서울시의회’에서 동네 구멍가게에서도 발생하지 않는 터무니없는 상황이 발생했다”며 “존경하는 이성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님과 26명의 예결위원의 권위에 도전한 교육위원회 국민의힘 의원님들은 과연 천만 서울시민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겠냐”고 비판했다. 이어서 전 의원은 “삭감근거도 없이 삭감된 4.4%의 삭감액이 국민의힘에게는 단순히 의원에게 주어진 고유권한을 행사하기 위함이냐”면서 “그것이 삭감 근거는 될 수 없다”고 발언했다. 또한, 전 의원은 “국민의힘이 삭감한 4.4%의 삭감액 5,688억원은 22년도 서울시 종로구 예산 4908억원 그리고 용산구 예산 5789억원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이며 우리 아이들의 교육에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미치는 큰 액수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전 의원은 토론을 마친 뒤 본회의장에서 나와 “양당 간 토론시간을 형평성 있게 배분해주지 않아 천만 서울시민들이 알아야할 정보들을 모두 제공하지 못했다”면서 “반대토론 원고 공개를 통해 천만 서울시민들이 많은 정보를 얻길 바란다”고 하며 아쉬움을 표했다. 한편, 오늘 제6차 본회의에서는 양당 간 토론을 위해 국민의힘은 20분 더불어민주당은 15분을 줘 형평성 논란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김현기 의장은 국민의힘은 1명, 더불어민주당은 2명에게 발언권을 줬으며, 이는 양당 교섭단체 원내대표 간 합의된 내용이라면서 본 사건에 대해 정당함을 주장했다. 다음은 2023년 서울특별시교육비특별회계 수정예산안에 대한 찬·반 토론 원고 존경하는 김현기 의장님과 선배 동료의원 여러분,그리고 오세훈 시장님과 조희연 교육감님, 관계공무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더불어민주당 광진 제1선거구에서 의정활동 하고 있는 전병주 의원입니다. 지금부터 2023년도 서울특별시교육비특별회계 예산(안)과 관련해 토론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본 의원은 예산결산특별위원회를 거쳐 본회의에 상정된 2023년도 서울특별시교육비특별회계 수정예산(안)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또한, 더불어민주당이 제안한 2023년 서울특별시교육비특별회계 수정예산(안)에 대해서 찬성의사를 밝힙니다. 오늘 발언대에 선 이유는 바로 ‘우리 아이들의 소중한 예산, 사라진 5,688억원’ 때문입니다. 이번에 서울시교육청이 제출한 2023년 예산(안) 규모는 약 13조원 가까이 됩니다. 그 중 삭감액은 5,688억원입니다. 그러나 삭감근거가 없습니다. 동네 구멍가게에서도 발생하지 않는 터무니없는 상황이 전국 17개 광역시 맏형으로 불리는 ‘서울’, 바로 ‘서울시의회’에서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교육위원회 국민의힘 의원들은 삭감액 5,688억원에 대한 근거를 교육위원회 더불어민주당 의원들과 서울시교육청에게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는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영상회의록을 통해 명명백백하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로인해 2023년 서울시교육청 예산은 영문도 모르고 5,688억원이 삭감된 채 결국, 갈기갈기 찢어진 채, 예산결산특별위원회로 전달됐습니다. 존경하는 이성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님과 26명의 예결위원의 권위에 도전한 교육위원회 국민의힘 의원님들은 과연 천만 서울시민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까? 교육위원회 국민의힘 의원님들의 만행으로 인해 13조원 가까이 되는 2023년도 서울시교육청 예산을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제대로 심사를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치열하고, 뜻깊은 논의의 장을 만들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들은 결국, 의미 없이 끝이 났으며 5,688억원이 삭감된 엉터리 수정예산안이 본회의에 상정됐습니다. 국민의힘 최호정 원내대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교기본운영비 삭감분 1,829억원은 한 학교당 약 1억 5천만원 수준이며 학교회계의 약 5%에 그친다”고 했습니다. “삭감분 1,829억원은 23년도 증액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22년도 수준의 학교 운영비 지원은 그대로 인정했다”고 합니다. 22년도 서울시교육청 본예산 학교기본운영비를 포함해 22년도에 있었던 서울시교육청 추가경정예산에도 학교기본운영비를 추가로 편성했습니다. 그 이유는 필요하기 때문이죠.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물가인상률은 역대 최고치로 달하고 있으며 전기, 수도, 가스 등 공공요금의 폭발적인 상승으로 인해 23년도 학교별 학교기본운영비는 필수불가결하게도 인상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2년도 추가경정예산 반영분도 아닌 22년도 본예산 수준의 학교기본운영비를 편성해 1,829억원 감액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국민의힘 최호정 원내대표는 예산안을 제대로 검토한 것은 맞습니까? 과연 교육현장에 직접 나가 학부모 앞에서 예산 삭감의 정당성을 당당하게 설득할 수 있습니까? 학교기본운영비가 정당 이념에 따른 정책의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는 예산입니까? 최호정 원내대표에게는 아이들의 냉⦁난방비가 정치적 쟁점에 있는 예산이란 말입니까?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또한, 국민의힘 최호정 원내대표는 “경제위기에 마주하고 있으니 학교 회계의 5%만 절감하면 된다” “시민을 대표하는 의회가 5% 삭감도 못하고 교육청의 거수기가 되어야 하냐”고 했습니다. 최호정 원내대표님,원내대표님을 포함한 112명의 선배동료의원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예산삭감의 고유 권한은 이와 같이 권한 남용을 꾀하기 위해 법령에서 보장해주면서 천만 서울시민이 위임해준 것이 아닙니다. 증액의 권한은 집행부에게만 감액의 권한은 의원에게만 보장하듯 모든 일과 절차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삭감근거도 없이 삭감된 4.4%의 삭감액이 국민의힘에게는 단순히 의원에게 주어진 고유권한을 행사하기 위함입니까? 그것이 삭감근거란 말입니까? 언론에서는 서울시교육청 예산 5,688억 삭감에 대해 연이어 비판 보도를 내보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호정 원내대표는 삭감액이 고작 전체 예산의 4.4%밖에 되지 않는다며 정당함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최호정 원내대표에게는 5,688억원이 고작이란 말입니까? 22년도 서울시 종로구 예산은 4,908억입니다. 22년도 용산구 예산은 5,789억입니다. 5,688억이란 이 엄청난 규모는 1개 자치구의 1년 농사를 책임지고 있는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5,688억이 최호정 원내대표에게는 고작일 수 있겠지만 우리 아이들의 5,688억은 교육에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미치는 큰 액수라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드립니다. 그리고 최호정 원내대표는 특정정당의 당명이 노골적으로 들어갔다며 더불어키움유치원 예산을 전액삭감이 타당했다고 합니다. 296명의 원아와 학부모 그리고 교직원들은 당장 내년 1월, 짐을 싸고 나가야될 판국에 놓였습니다. 더불어키움공영형사립유치원 정책의 성공실패여부가 삭감이유가 아니였습니다. 오로지 ‘더불어’라는 명칭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296명의 원아와 교직원들을 내쫓기로 결정했습니다. 최호정 원내대표에게 제안합니다.“국민의힘으로 키운 유치원”으로 명칭을 바꾸길 원하십니까?명칭을 바꾸면 예산삭감을 철회하시겠습니까? 조희연 교육감에게 요청하겠습니다. 5년 전, 서울시민들이 직접 제안한 ‘더불어키움’의 명칭을 과감히 져버리고, 서울시민들의 의견을 거스르고 국민의힘이 원하는 명칭으로 바꾸어주시길 요청합니다. 296명의 원아와 학부모 그리고 교직원이 우리에게 더 소중합니다.명칭 때문에 당장 학부모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증가시키고 교직원들을 실직으로 내모는 것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습니다. 약 1,600여억원의 전자칠판 예산은 오로지 학교현장에서 수요조사를 통해 서울시교육청으로 신청된 예산입니다. 이게 어찌 조희연 교육감 개인의 목적을 위한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교육현장의 요청에 따라 배정된 전자칠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희연 교육감의 역점사업임을 근거로 난도질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매우 안타까울뿐입니다. 현재 서울시의회에는 국민의힘 소속 의원 12명이 활동하고 있는 ‘통일안보지원 특별위원회’가 있습니다. 통일안보지원 특위에서는 조희연 교육감에게 업무보고를 받았고 시정질의를 통해서 통일교육 예산편성을 확대하고 통일 교육사업을 확대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교육위원회 국민의힘 의원들은 통일교육 관련 예산을 통째로 삭감했습니다. 통일안보지원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교육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혜영 의원은 특위에서는 통일교육을 찬양하고 교육위에서는 통일교육을 지양하자고 합니다. 교육위원회 국민의힘 기조는 무엇입니까?국민의힘과 교육위원회 국민의힘의 교육기조방향은 정작 다르다는 말씀이십니까?이제는 확실한 방향을 정해주시기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얼마 전, 미국 VOA 방송은 대한민국의 시골학교 폐교문제와 그에 대한 해법으로 시도중인 ‘농촌유학’에 대해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한국의 저출산과 고령화 및 도시화에 따른 농촌사회의 붕괴 위기 등 복합적인 문제를 전남 화순군의 사례를 통해 언급했는데요. 서울시교육청이 지난해부터 추진해온 ‘농촌유학’ 프로그램을 소개하며 이는 우리가 겪고 있는 농촌사회 붕괴 위기를 극복할 하나의 대안으로 볼 수 있다고 혹평했습니다. 오히려, 농촌유학에 참여학생이 적은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했습니다. 국민들 앞에서 지방균형발전은 옳다고 말하면서 정작 지방균형발전을 위한 예산을 삭감한 이유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천만 서울시민을 넘어 대한민국 국민이 지켜보고 있습니다.표를 얻기 위해 했던 발언들, 본회의장에서도 동일한 기조를 유지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이외에도 디지털기반 학생맞춤형 교수학습지원인 디벗사업과 생명존중차원에서 자살예방교육 연수를 포함한 학교민주시민교육지원, 학생인권증진, 혁신교육지구, 꿈꾸는교실 등 우리 아이들의 협력 및 창의교육을 위해 마련된 핵심 사업의 예산이 대거 삭감됐습니다. 존경하는 김현기 의장님과 선배 동료의원 여러분,우리 아이들을 볼모로 하는 정치행위는 절대 금지해야합니다.어른들 손바닥 뒤집기에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좌지우지하는 과오를 우리는 절대로 범해선 안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이 내놓은 수정예산안은 교육위원회 예비심사 때, 부서별 감액안을 근거로 산출한합리적인 수정예산안입니다. 존경하는 선배 동료의원 여러분들의 선한 의지가 2023년도 서울시 교육현장의 미래를 결정짓습니다. 마지막으로 신호현 교사의 칼럼 일부를 함께 보면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모두가 과거를 되돌아보고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예전에 아버님이 초등학교에 근무하셨는데 숙직을 하시며 도둑들과 싸우다가 다치신 적이 있었다. 학교에 훔쳐갈 것이 많아 도둑들이 잦았고 교직원들은 숙직을 서며 학교를 지켜야했다” “흑백 텔레비전을 볼 때, 비싼 컬러 텔레비전을 학교에 먼저 비치하여 학생들에게 컬러의 세상을 보여주었던 교육청 교육공무원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에게 적극 행정 우수상을 시상하지 않아도 묵묵히 교육의 백년지계를 내다보며 일했다” “그때에도 지자체가 있어 교육위원들이 돈줄을 쥐었더라면 ‘학생들이 컬러 텔레비전을 보면 시력이 떨어질 것에 공감’했을 것이다” “세계를 넘어 우주로 달려가는 아이들의 미래가 한편으론 안타깝고, 한편으론 대견하기만 하거늘, 그 아이들의 미래에 디벗 기기 하나 쥐어줬다고 다시 뺏으려 하는가” “얘들아! 디벗 꺼내렴. 다시 가져가련다!” 다시 한 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수정예산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선배동료의원 여러분들의 신중하고 세심한 배려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텅 빈 그림책, 아이들은 오해 안 해요”

    “텅 빈 그림책, 아이들은 오해 안 해요”

    “독자 곁에서 오랜 시간 함께해 온 그림책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아이들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어린이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아름다운 세상의 정수가 그림책에 담겨 있죠.” 한국인 최초로 ‘그림책의 노벨상’ 격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받은 이수지(48) 작가가 6일 말레이시아 푸트라자야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38회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 국제총회 겸 시상식에서 전한 수상 소감에는 어린이들을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 이 작가의 수상 소감은 그의 그림책과 어린이 독자들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이 작가는 그림책을 “가장 보수적이면서 가장 혁신적인 매체”라고 했다. 과감히 선보인 그의 혁신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거울속으로’에선 책의 한가운데 제본선이 있는 접지 부분 다음 페이지를 하얗게 비웠고, ‘파도야 놀자’에선 아이의 몸을 반쪽만 그리기도 했다. 이 작가는 “‘혹시 인쇄 사고 아니냐’는 메일을 많이 받았다”며 웃었다.그럼에도 끊임없는 예술적 실험은 이어졌다. 작품이 아닌 작가에게 주는 안데르센상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이런 도전 정신이 꼽힌다. 이 작가는 “무수히 많은 흥미로운 실험을 그림책에서 시도할 수 있던 이유는 그림책이 그 누구보다도 가장 창조적이고 유희적인 독자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어린이들”이라고 말했다. 어른들이 그의 그림책을 오해할 때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스스로 질문하고 답했다. 이 작가는 “손끝과 발끝으로 짜릿하게 느껴지는 생의 기쁨을 아주 진지한 태도로, 온 마음을 다해, 가장 즐겁게 놀이하는 마음으로 그려 낸다. 이것이 이 아름다운 독자들에 대한 저의 감탄을 표현하는 최고의 방법”이라며 수상 소감을 마무리했다. 이번 총회에선 이 작가와 2020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 수상자인 백희나 작가의 작품이 전시돼 한국 그림책이 세계 아동청소년문학의 중심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한국을 대표해 최근 2년간 우수작(어너리스트)으로 출품된 김동성 작가의 ‘시골 쥐의 서울 구경’, 이현 작가의 ‘푸른 사자 와니니’, 김영진 번역가의 ‘아벨의 섬’ 등도 자리를 빛냈다.
  • 뱅크시가 英 마을에 남긴 ‘마구간 미니어처’ 경매 나온다

    뱅크시가 英 마을에 남긴 ‘마구간 미니어처’ 경매 나온다

    세계적인 거리 예술가 뱅크시의 작품 한 점이 경매에 나온다. 지난 24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BBC 등 현지언론은 뱅크시의 미니어처 모형이 오는 27일 경매회사 앤더슨 앤 가랜드가 뉴캐슬에서 주최하는 경매에 출품된다고 보도했다. 뱅크시의 일반적인 다른 벽화와 다르게 이 작품은 마구간 미니어처다. 영국 시골 집의 전통적인 건축 방식을 따라 만든 이 작품을 보면 말이 머리를 내밀고 있으며 쥐 캐릭터 그림 옆에는 ‘모 아이면 도'(Go big or go home)라는 알듯말듯한 글귀가 적혀있다.이 작품은 지난해 8월 이와 유사한 모형들이 전시 중인 노퍽 주 그레이트야머스의 메리베일 모델 빌리지에 깜짝 등장했으며 최초 발견자는 관광객이다. 경매 회사 측은 "이런 상징적인 예술가의 작품을 경매할 수 있는 것은 절대적인 특권"이라면서 "적어도 100만 파운드(약 16억 원) 이상의 가치로 판매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명 ‘얼굴 없는 화가’로 전 세계에 알려진 뱅크시는 도시의 거리와 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그라피티 아티스트다. 그의 작품은 전쟁과 아동 빈곤, 환경 등을 풍자하는 내용이 대부분으로 그렸다 하면 사회적 파문을 일으킬 만큼 영향력이 크다.    
  • [2022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되돌아오는 곰/함윤이

    [2022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되돌아오는 곰/함윤이

    화마는 나흘 만에 잡혔다. 두툼한 잿더미와 무너진 바위들만 남기고서. 녹원은 결심했다. 담배를 끊자. 한 번에 끊어 버리자. 대신 그는 종일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몇 시간 내내 산불 사진만 바라보자니 눈이 따끔거렸다. 사진 속 불길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웠다. 때로는 숨이 막힐 정도였다. 타오르는 가지들이 밤을 붉게 밝히고, 바위를 감싼 불꽃은 날개처럼 솟구쳤다. 녹원은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폈다. 어떤 사진 앞에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목줄에 묶인 채로 화마의 먹이가 된 개들, 산 위로 녹아내린 짐승들의 잿더미. 지난 나흘간 몇 장의 사진을 보았더라? 수십 장, 어쩌면 수백 장에 달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사진도 녹원이 찾는 것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래서….” 녹원은 도시락통을 열면서 말했다. “주말에는 산에 다녀올까 해요.” 노아가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언제나 그랬듯, 탕비실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읍내의 백반집에 갔을 터였다.                    어쩌다가 노아와 매일 점심을 먹게 되었더라. 잘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노아는 점심 도시락을 싸 들고 탕비실에 찾아왔다. 언젠가, 센터의 다른 직원들이 노아에게 슬그머니 질문하는 순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었다. 노아씨는 박 주사가 안 무서워요? 노아가 물었다. “전에 일하던 곳 가시는 거예요?” 녹원이 답했다. “네, 이래저래 신경이 쓰이네요. 그냥 한 번 직접 보고 올까 싶어요.” 노아가 양손을 만지작거렸다. 녹원은 그를 빤히 지켜보았다. 그날, 노아의 대답을 떠올리면 언제든 웃음이 나왔다. 질문을 받은 뒤, 노아는 양손을 한참이나 만지작거리다가 말했었다. 글쎄요. 녹원 주사님 요리를 엄청 잘하시는데… 맨날 나눠 주세요. 노아가 불쑥 말했다. “주사님, 저도 같이 가도 돼요? 주말에 가실 때요.” “산에요? 왜요?” “그냥… 마음이 쓰여서요.” 녹원이 웃었다. “아니, 누가 주말에 직장 상사를 만나요.” “아니, 그래두 그거랑 다른 게, 저희는 친하잖아요.” 노아는 그렇게 말하고서 고개를 떨어트렸다. 젓가락을 툭 내려놓는 손짓까지, 그 모든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녹원은 빠르게 백기를 들었다. “아니, 가고 싶으면 같이 가요. 토요일 아침에 출발할 거예요.” 노아가 웃었다. 녹원 역시 웃어 버렸다. 그는 창밖을 보았다. 희뿌연 유리창 너머로 검게 번진 산맥이 펼쳐졌다. 새카맣게 그을린 산은 그림자처럼 보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붉거나 노란빛으로 번득거렸지. 지지 않는 태양처럼 사흘 내내 빛났다. 녹원은 그것을 보면서 내내 손톱을 물어뜯었다. 너덜너덜해진 손끝을 보며 생각했다. 무엇을 생각했냐면, 그러니까. 그것이 거기에 있을까? 그 산에서, 아직도 살고 있을까?            그해, 한 통의 전화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지리산에서 걸려온 전화는 사무소 곳곳을 돌아 우도근 과장의 손에 도착했다. 전화를 끊은 과장은 눈썹을 긁적이다가 입을 열었다. 곰이 왔다구 그러네요. 녹원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곰이요? 직원 중 하나가 물었다. 곰이요. 우도근이 덧붙였다. 아마 또 그 곰이겠죠. 사무실의 다른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녹원은 몇 분간 말없이 기다렸다. 곰이라는 게 무엇인지, 진짜 동물을 뜻하는지, 혹은 일종의 암호인지. 누구도 그에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사무소 사람들 대부분이 녹원을 어려워했다. 그들은 녹원이 신입이라는 것을, 그가 대학을 갓 졸업했으며 이 사무소가 첫 직장이라는 사실을 잊은 양 굴었다. 낯선 상황은 아니었다. 녹원이 어느 집단에 녹아들기까지는 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람들은 대개 녹원을 불편해했다. 처음에는 그의 거대한 몸집에 압도당하고, 이후에는 그의 무표정이 난처하다고들 했다. 어쩔 수 없지. 녹원은 생각했다. 불편한 건 피차 마찬가지니까. 녹원이 손을 들자, 사무실의 눈길 모두가 그에게로 쏠렸다. 녹원은 모른 척 말했다. 과장님. 저는 곰이 뭔지 모르는데요. 아 맞네. 박 주임 들어오기 전에 생긴 일이구나. 잠깐 와 볼래요? 과장에게로 가려면 사무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야 했다. 통로 측 직원들이 어깨를 움츠리며 자신의 의자를 당겼다. 녹원은 그들 사이를 느리게 지나갔다. 우도근 과장이 빈 의자를 꺼내어 툭툭 두드렸다. 녹원은 의자에 앉았다. 과장은 사무소 내에서 녹원을 꺼리지 않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지위 탓인지, 경력 덕인지, 혹은 한평생 산사람으로 살아왔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어떤 상황에서든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모두 우도근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체로 온화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다. 지위나 나이 상관없이 존댓말을 쓰고, 자잘한 실수는 웃으며 넘어갔다. 정말이지 괜찮은 상사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녹원은 생각했다. 나는 왜 사람이 이토록 불편할까. 아니, 사실은, 불편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우도근은 불편하고… 께름칙한 존재였다. 이 곰이 그 곰이에요. 과장이 컴퓨터를 가리켰다. 화면 중앙에서 어린 곰이 양팔을 벌리고 있었다. 가슴의 흰 반달을 환히 내보인 모습이었다. 과장이 말했다. 우리끼리는 도돌이라구 불러요. 녹원이 물었다. 도도리요? 우도근이 정정했다. 도돌이. 도돌이표 할 때 그 도돌이요. 그가 곰의 얼굴을 툭툭 두드렸다. 이 녀석이 말이에요. 매년 돌아오거든요. 아무리 내쫓아도 포기하질 않아요. 그래서 도돌이에요. 멈추지 않고 되돌아와서요.      노아는 반쯤 감긴 눈으로 차에 탔다. 어깨에 멘 가방 입구로 스테인리스 보온병이 비죽 나와 있었다. 그는 차가 출발했을 때부터 꾸벅거리며 졸다가, 고속도로에 진입할 무렵에는 푹 잠들었다. 녹원은 라디오 소리를 줄였다. 양쪽 창 너머로 산기슭이 형태를 드러냈다. 새카맣게 탄 자국이 군데군데 보였다. 녹원이 기사에서 찾아본 대로였다. 산은 파괴되고 소실되었다. 기사들은 특정한 단어들을 되풀이했다. 재앙, 재난, 상실. 평소에도 산불이 자주 나는 지역이었으나, 이번 피해는 유난히 참혹했다. 처음에는 누군가 버린 담배꽁초로부터 불씨가 솟아올랐다. 불씨는 때마침 불어온 강풍을 타고 날아올랐다. 마치 누군가 사주한 양, 화마는 적절한 환경 속에서 긴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현장의 직원들은 검은 재로 뒤덮인 마스크를 쓰고 인터뷰를 했다. 마스크를 벗으면 까만 코피가 쏟아져요. 그들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매일매일 목이 아픕니다. 그들의 말은 녹원을 슬쩍 스치고 사라졌을 뿐이다. 녹원의 머릿속을 채우는 건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는 곰을 생각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곰에 대한 질문만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괜찮을까? 살아 있을까? 산속에서, 이제는 폐허로 변한 그곳에서? 녹원은 흘끗 조수석을 보았다. 노아는 덜컹거리는 창에 이마를 댄 채 잠들어 있었다. 녹원은 뒷좌석의 목 베개를 찾으려다가 관두었다. 괜한 배려를 해 준답시고 잠을 깨우는 건 아닐까. 상사와 여행을 한다는 생각에 가득 긴장하여 잠들지 못한 건 또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손이 움츠러들고 말았다. 녹원은 한숨을 내쉬고서 속력을 올렸다. 여전히 이런 일들이 어려웠다. 어느 정도 친밀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조차 무엇을 해 주는 게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노아는 톨게이트를 지날 즈음에 깨어났다. 부스스한 머리로 좌우를 살피고서 웅얼거렸다. “주사님. 커피 안 드셨죠. 드셔야 해요. 제가 직접 내렸는데. 맛있을 텐데.” 그는 보온병 뚜껑에 커피를 따라 건네고서는, 다시금 까무룩 잠들었다. 녹원은 홀로 웃다가 커피를 마셨다. 노아의 말이 맞았다. 커피는 맛있었다. 알맞게 따뜻하기도 했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한국의 마지막 야생 반달곰은 설악산에서 죽었다. 천구백팔십삼년, 녹원이 태어난 해였다. 곰은 살해당했다. 웅담을 노린 밀렵꾼의 총알이 곰의 척추를 뚫었다. 곰은 총알이 박힌 몸으로 마등령 계곡까지 달아났다. 바위들 사이에 웅크려서 며칠을 울어댔다. 그의 죽음을 다룬 기사는 울음소리를 이렇게 묘사했다. 으엉, 으엉. 글자로 적힌 울음은 처절하기보다 우스꽝스러웠다. 으엉, 으엉. 짐승은 보름 가까이 앓다가 죽어 버렸다. 우도근은 말했다. 그 후로 이 산에는 곰이라고는 없었거든요. 그러나 사십여 년이 지난 후, 그러니까 녹원이 입사하기 삼 년쯤 전에, 곰 한 마리가 설악산에 나타났다. 아홉 살배기 암곰이었다. 백오십오 센티미터의 신장에 백 킬로그램, 날렵하다고 할 만한 덩치였다. 몇 해 전 지리산에 방사한 반달가슴곰 중 하나인 양 싶었다. 주말 등산회 사람들이 그를 처음 발견했다. 당시 암곰은 폭포를 어슬렁거리며 도토리를 줍고 있었다. 신고인은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곰이 도토리를 먹는다니까요. 곰이 원래 도토리를 먹어요? 사무소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지리산에 방생한 곰들이 다른 국립공원으로 넘어간 일은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설악산이라니. 이 정도의 거리를 이동한 야생동물은 한 번도 없었다. 곧 남부보전센터에서 인력을 파견했다. 설악산 국립공원 쪽에서도 직원들을 내보냈다. 모두의 목적은 최대한 빠르게 곰을 생포하여 지리산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당시 계장이던 우도근을 포함하여, 현장직 몇몇이 포획 조에 가담했다. 그들은 방패와 밧줄을 지고서 산을 올랐다. 암곰은 폭포에 있었다.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리자마자 후다닥 참나무에 올라가서 버텼다. 우도근은 다른 직원들과 함께 녹색 그물을 설치했다. 보전센터 직원이 마취총을 쐈다. 십여 분이 지나고, 정신을 잃은 곰이 그물 위로 떨어져 내렸다. 기절한 곰은 꽁꽁 묶인 채 지리산으로 돌아갔다. 그쯤에서 마무리가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한 달이 지났을 때 암곰이 새끼를 남기고 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설악산에서 낳은 새끼인지, 설악산까지 데리고 온 새끼인지는 모르겠으나 야생에서 태어난 개체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곰에게 어떤 발신기도 붙어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새끼 곰은 폭포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홀로 남은 새끼를 잡는 일은 딱히 어렵지 않았다. 당시의 도돌이는 약 육십 센티미터 정도였다. 포획되는 순간에는 나무 뒤에 숨어 부들부들 떨고 있었더랬다. 촉촉한 코나 동그란 귀가 어찌나 귀엽던지, 현장에 나온 직원들 모두가 끙 소리를 냈더랬다. 붙잡힌 도돌이는 어미와 마찬가지로 헬리콥터를 타고 지리산으로 갔다. 현장에 간 직원들은 은은한 얼굴로 말했다. 그 녀석, 돌아가서 엄마랑 다시 만났겠지? 이것 참, 이산가족 상봉이네…. 그들 중 누구도, 그 곰이 귀환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낸 새끼 곰이 무수한 위험을 무릅쓰며 산맥을 넘어오다니. 우도근이 손가락을 튀겼다. 그런데 진짜로, 이 녀석이 돌아온 거예요. 이 년 만이었다. 이번에는 대피소의 직원이 먼저 곰의 흔적을 발견했다. 대피소 부근의 물푸레나무에 커다란 발톱 자국이 남아 있노라고 했다. 족제비나 오소리의 발톱 같지는 않다. 그보다 훨씬 거대하고 깊은 자국이다. 꼭 곰이 남긴 흔적처럼 보인다고. 무인카메라를 추적한 결과, 그의 말은 사실로 밝혀졌다. 다시금 보전센터의 직원들이 오고, 또 한 번 포획 조가 꾸려졌다. 우도근은 지난 포획에 참여한 경력을 인정받아 두 번째로 방패를 들었다. 곰은 나무 위 벌집을 습격하던 중에 붙잡혔다. 마취총에 맞아도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아서, 보전센터 직원들이 직접 나무에 올라가 몸을 밧줄로 묶어야 했다. 그들은 곰의 왼쪽 귀에서 조그만 기계를 하나 발견했다. 배터리가 닳은 발신기였다. 수의사는 말했다. 배터리를 교체하기 전에 서식지를 탈출한 모양이네요. 곧 그들은 몇 가지 사실을 더 알아냈다. 수의사는 곰이 세 살이 조금 안 된 암컷이며, 또한 두 해 전 이 산에서 퇴출당한 바로 그 새끼 곰이라는 사실까지 밝혀 주었다. 모두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얘가 그 곰이라고? 우리가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낸, 그 아기곰 말이야? 수의사가 말했다. 뭐, 이제 아기라고 부르긴 뭐하죠. 그의 말이 맞았다. 철창에 갇힌 짐승은 일 미터하고도 오십팔 센티미터였다. 몸무게는 백사십오 킬로그램, 울부짖는 모양새는 가히 맹수라고 부를 만했다. 곰이 또다시 지리산으로 돌아간 후에도, 다들 찜찜한 느낌을 걷어내지 못했다. 과장이 말했다. 물론, 그 느낌이 맞았죠. 일 년 만에 지리산에서 전화가 왔어요. 위치 추적을 했는데, KF-75가 그곳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요. ‘돌아갔다.’ 그쪽에서도 돌아갔다고 표현하더군요. 설악산의 직원들은 혀를 찼다. 독한 곰이다. 지독한 놈이야. 쑥덕거렸다. 곰 방사 계획 같은 거 대체 누가 짠 거냐? 낮은 목소리로 불만을 토했다. 심지어 그때는 한겨울이었다. 나뭇가지마다 흰 서리가 열매처럼 맺혀 있었다. 다른 반달곰들은 지리산 곳곳에 웅크려 동면을 취하고 있을 텐데. 단 한 마리의 곰만이 얼어붙은 산맥을 넘어 고향에 돌아왔다. 그때부터 직원들은 곰을 도돌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며칠간 추적이 이루어졌다. 곧 곰이 설악산에서 동면을 취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번에는 사무소에서도 차분하게 대응책을 마련했다. 어느덧 세 번째로 이곳에 방문한 보전센터의 직원들과 함께 동면포획을 준비했다. 산속의 굴 어딘가에 잠든 곰을 끌어내는 방법이었다. 녹원이 끼어들었다. 잠든 중에 끌어낸다고요? 네, 그래서 동면포획인 거죠. 무서운 방법이네요. 음, 사실은 그게 가장 평화로운 방법인데요. 곰의 입장에서는, 잠든 사이에 세상이 뒤바뀐 거잖아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요. 우도근이 턱을 괴고서 녹원을 바라보았다. 곰의 입장이라. 과장이 중얼거렸다. 곧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녹원은 그 미소를 해석할 수가 없었다. 우도근이 말했다. 박 주임은 곰이 불쌍한가 봐요. 나는 우리 직원들이 불쌍한데. 매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짐승 하나 때문에. 안 그래요? 녹원은 허리를 꼿꼿이 폈다. 우도근의 앉은키는 그보다 훨씬 작았다. 백육십 센티미터를 아슬아슬하게 넘는 키에 가느다란 팔다리. 그와 비슷한 외양의 남자들은 대체로 녹원을 불편하게 여겼다. 경계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녹원의 몸을, 그의 크기 자체를 용납할 수 없는 듯했다. 과장은 한 번도 그런 기색을 내보인 적 없었다. 외려 그는 어린아이를 대하듯 녹원을 대하곤 했다. 이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과장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박녹원 주임님. 이번 포획 작전에 같이 가 볼래요? 녹원은 숨을 들이마셨다. 곧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예, 좋아요. 그럼 좋을 것 같습니다. 우도근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 좋다. 그럼 정해진 거지요? 이제 자리로 돌아가세요.      사무소는 녹원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늙은 소나무 두 그루가 정문 양쪽에서 가지를 맞대고 있었다. 진입로 안쪽으로 목조 건물이 엿보였다. 여기까지는 화마의 여파가 미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녹원은 정문 건너편에 차를 세웠다. 막 깨어난 노아가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하고 있었다. 녹원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노아씨. 제가 왜 여기 왔는지 설명을 먼저 드려야겠는데요.” “아, 네, 네.” “그러니까…. 여기에 곰이 한 마리 있었거든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우스꽝스러운 시작점이었다. 녹원은 가장 건조한 단어들을 사용하여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개체, 포획, 복원 프로젝트, 서식지, 정부 지침. 그런 단어들이 이 상황을 합리적으로 보이게 해 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도돌이에 대한 이야기가 끝난 뒤, 차 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노아는 찌푸린 얼굴로 양손을 만지작거렸다. 녹원은 내내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마침내 고개를 돌린 노아가 활짝 웃었다. 녹원은 물속에서 나온 사람인 양 참던 숨을 토해냈다. 노아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사님. 진짜로 엄청난 사연이네요. 저라도 여기 왔을 거예요. 잘 오셨어요.” 녹원은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양 뺨이 화끈거렸다. 곧 코끝까지 시큰거릴 듯했다. 녹원은 노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차에서 내렸다. 문을 열자마자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쳤다. 푸른 기를 머금은 하늘은 투명해 보였다. 녹원은 길을 건넜다. 사무소 정문 기둥에 기대고 서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 시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의 기억대로라면, 사무소의 점심시간이 끝나기까지 약 사십 분이 남아 있었다. 건너편에서 달칵, 소리가 트였다. 곧 우도근이 소리를 쳤다. - 아니, 뭐야. 박녹원 주임이 건 거예요? “네, 안녕하세요, 과장님. 제가 지금 사무소 앞에 와서요. 인사라도 드리려고 했어요.” 우도근이 정문으로 나오기까지는 채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녹원은 금세 그를 알아보았다. 깡마른 몸집과 산양처럼 총총거리는 걸음걸이. 과장은 그대로였다. 시간이 그를 비껴간 듯 보였다. 머리가 더 벗어지지도, 주름이 늘어나지도 않았다. 우도근은 어설픈 인사치레로 시간을 잡아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질문부터 던졌다. “아니, 진짜로, 뭐 때문에 왔어요?” “도돌이 말이에요. 무사한가요?” “에? 도도리?” “도, 돌, 이. 아시잖아요. 되돌아오는 곰이요.” 우도근이 아아― 길게 소리를 냈다. 탄식 같은 소리였다. 녹원은 지금껏 내내 연습한 얼굴, 가능한 한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는 얼굴로 버티고 섰다. 과장은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물었다. “박 주임, 그거, 곰 때문에 온 거예요? 그거 물어보러?” “네. 맞습니다.” “세상에… 박 주임 대단하네요. 아니지, 지금은 주임이 아니지요? 뭐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렇게나 부르세요, 보통 주사라고들 불러요.” “그래요. 박녹원 주사님. 얼마나 걱정이 됐으면 거기서 여기까지 왔어요. 한 시간은 걸릴 텐데. 굉장하네, 정말로 굉장하네요.” 녹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과장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우도근이 한숨을 내쉬면서 웃었다. 눈에 익은 표정이었다. 그는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요새는 산불 뒤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재난안전과고 자원보전과고 할 거 없이 다들 난리거든요. 곰까지는 신경 쓸 시간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나도 몰라요. 얘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발신기는요? 센터 쪽에서 확인 들어가지 않았어요?” “발신기 그거.” 과장이 수염 자국조차 없는 턱을 어루만졌다. “어디 보자…, 그 얘기는 들은 것 같은데. 잠깐 기다려 봐요. 지금 몇 시죠?” “점심시간 끝나려면 아직 삼십 분 남았어요.” 과장이 허,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녹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마침내 우도근 쪽에서 손을 들었다. “좋아요. 알아봐 줄게요.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는데.” “감사합니다.” “사무소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래요?” “괜찮습니다.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차 안에 있을게요.” “친구? 박 주임 친구요?” “네. 직장 동료 겸 친구요, 같이 왔어요.” 과장이 눈을 치켜떴다. 입은 헤 벌어졌다. 몇 초 지나지 않아서, 이상하리만치 환한 웃음이 그의 얼굴 곳곳으로 번져 나갔다. 녹원은 어찌할 바 모른 채 그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이번에도 과장의 미소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우도근은 사뭇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럼 금방 올 테니까 기다려요.” 녹원은 그의 뒷모습이 사무소 안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자신이 과장의 안부에 대해서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삼차 포획은 이른 새벽 중에 진행되었다, 직원들은 사무소 정문 앞에 모였다. 푸르스름한 새벽빛 속으로, 우도근의 이야기에 등장하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나타났다. 수의사는 녹원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젊었다. 그와 함께 온 보전센터 직원들은 대부분 점잖은 인상으로, 말수가 적고 걸음이 빨랐다. 설악산에서도 꽤 많은 인원이 참가했다. 녹원과 우도근을 포함한 공원사무소의 직원들 외에도, 곰이 머무는 구역 근처의 분소 직원들 역시 합류했다. 보전센터 직원들은 여섯 다리가 달린 은색 안테나를 들고 왔다. 그것으로 곰을 찾아냈다고 했다. 곰은 탐방로로부터 머지않은 계곡을 배회하는 중이었다. 도돌이가 홀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바로 그 계곡이었다. 사람들은 장비지원조와 마취조, 추적조로 나뉘었다. 녹원은 장비지원조에 배치되었다. 곰을 붙잡아 데려오는 데 필요한 장비를 운반하는 역할이었다. 우도근은 추적조에서 움직이기로 했다. 우도근의 조가 선두에, 녹원의 조가 후미에 섰다. 행렬은 흔들다리를 건너고 금강문을 거쳐서 산길을 올랐다. 폭포로 가는 방향이었다. 그들은 곧 탐방로를 벗어나 숲 안쪽을 가로질렀다. 나무로 둘러싸인 공터에서 멈춰서 짐을 풀었다. 녹원은 가방을 내려놓고 장비를 하나씩 꺼냈다. 녹색 안전그물과 구조용 밧줄, 헬멧과 방패 등이 손에서 손을 타고 넘어갔다. 이제 마취조와 추적조가 공터 너머의 폭포로 가서, 곰을 데리고 올 것이라고 했다. 녹원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수풀 뒤에서 조끼를 걸치는 우도근이 보였다. 녹원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우도근이 인사를 건넬 듯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녹원은 그 몸짓을 무시하고 다짜고짜 물었다. 곰이 여기에서 살 수는 없나요? 예? 뭐라고요? 곰 말이에요. 세 번이나 돌아왔잖아요. 여기가 자기 고향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건 아닐까요. 원하는 곳에 놓아주는 게 불가능한가 해서요. 침묵이 흘렀다. 과장이 천천히 헬멧을 썼다. 턱에 매는 끈을 고정한 뒤 녹원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웃음기조차 없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박녹원 주임님. 네, 우도근 과장님. 저건 맹수예요. 말이 천연기념물이지, 사실은 유해조수라고요. 그리고 여기는 국립공원이에요. 매일 사람들이 오가는 산이요. 이해하겠어요? 녹원은 숨을 들이마셨다. 올라오는 말을 삼키려 했다. 그러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녹원이 말했다. 저도 알아요. 그의 목소리가 나무들 사이로 울려 퍼졌다. 저도 안다고요. 과장님. 매일매일 사람들이 여기에 오잖아요. 자연이 좋다거나, 건강해지고 싶다거나, 취미 생활이라면서 산에 오르내리죠. 그런데 제 말씀은요, 과장님, 그건 그 사람들 선택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저 곰의 경우는 다르다고요. 쟤는 이 산이 필요해요. 그러니까 계속 되돌아오는 거겠죠. 여기에서 살아야 하니까. 여기서 살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녹원은 입을 다물었다. 턱이 떨리고 있었다. 등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과장은 자신의 이마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거의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는 녹원이 건네준 가방 안에서 보호구를 하나씩 끄집어냈다. 그는 팔꿈치와 무릎 위로 보호구를 주섬주섬 끼우며 말했다. 우리 박녹원 주임님은 말이야. 여기에 오면 안 되는 사람이었네요. 녹원은 그를 쳐다보았다. 질문들이 입안을 맴돌았다. 여기란 어디이며, 대체 무엇이 안 되는 거냐고, 여기가 아니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물론, 녹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우도근은 낡은 지프를 타고 되돌아왔다. 도돌이가 사라진 지점까지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직원들에게 미리 얘기해 놓았다고도 덧붙였다. 과장은 왜인지 들뜬 듯 보였다. 예상치 못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과장이 따라나서 준다면, 훨씬 간편히 산을 돌아다닐 수 있을 터였다. 노아와 녹원은 우도근의 지프 뒷좌석에 올라탔다. 과장이 몸을 돌려서 노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 반갑습니다. 박녹원씨 직장 동료라면서요.” “네.” 노아가 그와 악수하며 답했다. “네, 동료 겸 친구예요.” 우도근이 빙긋 웃더니, 다시 앞으로 돌아앉았다. 차가 출발하고 나서, 녹원은 우도근의 말을 다시금 곱씹었다. 박녹원씨라니. 생경한 호칭이었다. 우도근 과장이 자신을 그렇게 부른 적은 단 한 번밖에 없었다. 아주 오래전, 저 산속에서. 우도근의 지프는 금세 산중도로로 들어섰다. 오른쪽으로는 까맣게 탄 산맥이, 왼쪽으로는 잿빛 강이 이어졌다. 검은 산에서부터 흩날린 잿가루가 차창에 달라붙었다. 지프는 강의 굽이를 따라서 모퉁이를 돌았다. 국립공원의 시작점을 알리는 아치형 입구와 함께, 강변을 따라 선 갖가지 가게들이 나타났다. 잿빛 먼지에 휩싸인 편의점과 식당, 분사무소와 등산로로 향하는 흔들다리. 우도근은 다리 앞에 차를 멈춰 세웠다. 차창을 내리고 강 건너편을 가리켰다. “저쪽이에요.” 녹원과 노아는 창밖으로 목을 뺐다. 강 건너로 접근금지 테이프를 친 약수터가 보였다. 폭포 방향으로 입산하는 사람들이라면 필수적으로 거치는 구간이었다. 몇 해 전 녹원이 삼차 포획 행렬에 낀 채로 지나갔던 지점이기도 했다. 우도근이 약수터 위쪽을 가리켰다. “저쪽 산허리에서 발신기를 발견했어요. 아주 훼손되었다던데. 억지로 뜯어 버렸나 봐요.” “그 외 흔적은 못 찾았고요?” “네, 사체 같은 건 전혀 없었고….” 과장이 룸미러로 녹원의 얼굴을 흘긋 보았다. 그가 시동을 끄면서 말했다. “산에 다녀오고 싶으면, 지금 다녀와요. 나는 여기에서 기다릴 테니까.” 녹원은 머뭇거렸다. 적잖이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지금껏 우도근을 오해했던 것일까?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과장은 친절하고 온화한 남자였다. 녹원의 기억 속에서 보여 주던 적대적인 태도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허탈한 웃음이나 경시하던 눈길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치… 아군처럼 보였다. 녹원은 차에서 내렸다. 노아가 그를 뒤따라왔다. 그들은 다리를 건너고 약수터를 지났다. 숲은 고요했다. 산으로 향하는 계단의 난간은 새까맣게 그을린 상태였다. 바삭하게 타오른 나무들은 식물보다는 불꽃의 잔재처럼 보였다. 보이는 곳마다 회색 재가 휘날렸다. 새들이 지저귀지 않고 잎사귀도 흔들리지 않았다. 도돌이를 처음 만난 날과는 모든 게 달랐다.         추적조와 마취조는 숲 너머로 떠났다. 장비지원조는 공터에서 짐을 가지고 대기하기로 했다. 녹원은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채, 숲속을 바라보았다. 물푸레나무와 박달나무, 피나무, 소나무, 벚나무. 여름의 샛노란 볕뉘가 나뭇가지 사이를 환히 비췄다. 곧 낯선 소리가 그 풍경을 뒤흔들었다. 쿵. 높은 곳에서 묵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바위에 기댄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새들이 날아오르고 잎사귀들이 흔들렸다. 산 전체가 몸을 털어내는 듯했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아득하게 번져 왔다. 얼마 후, 그들이 나무 그늘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행진이라도 하듯 한 줄로 선 채 숲을 가로질렀다. 수의사와 과장이 선두에 서 있었다. 그 뒤로 들것을 붙든 남자들이 내려왔다. 녹원은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들것 안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짐승이 있었다. 포로처럼 눈과 입, 팔다리를 묶인 채. 녹원이 지고 온 밧줄이 곰의 몸을 엑스자로 붙잡고 있었다. 수의사의 목에 둘렀던 파란 천은 곰의 눈을 가리는 데 쓰였다. 벌어진 입 사이로 붉은 혀가 늘어져서 달랑거렸다. 녹원은 행진을 쫓는 아이처럼 곰을 따라서 걸었다. 필사적으로 들것을 쫓아가며 곰을 보았다. 그의 귀에 새로 부착된 발신기를, 어깨와 가슴을 가로지르는 흰 반달을, 마른 땅처럼 갈라진 발바닥을 보았다. 남자들은 공터 정중앙에 들것을 내려놓았다. 다른 사람들도 보호구를 주섬주섬 벗었다. 녹원은 장비들을 챙기는 일도 잊고, 내내 곰만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 다가온 사람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한번 만져 봐요. 녹원은 놀라서 옆을 돌아보았다. 우도근 과장이었다. 그가 부드러운 얼굴로 곰을 가리켰다. 쓰다듬어 보라니까요.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겠어요. 머뭇거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녹원은 곰의 배 위에 손을 얹었다. 검은 털은 까슬까슬하고 서늘했다. 피부는 몹시 단단했다. 녹원과는 전연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진 털과 살, 그 안에서 흐르는 피가 손바닥 아래에서 두근거렸다. 녹원은 눈을 깜빡였다. 곰의 치욕과 자존심, 곰의 마음에 대하여 생각했다. 끊임없이 돌아온다는 뜻의 이름도 곱씹었다. 짐승이 꿈틀거린 순간에도, 그는 손을 떼지 않았다. 나중에 과장과 수의사를 비롯한 몇 사람이 물어보았다. 왜 손을 떼지 않았어요? 왜 달아나지 않았습니까? 녹원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순간 느꼈던 소속감을 묘사할 방법이 없었다. 그토록 아늑하고 달콤한 마음은 처음이었다. 극복해 낼 수도 없으며,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곰은 소리를 질렀다. 으엉, 소리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밧줄의 매듭을 제대로 고정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곰은 순식간에 들것에서 벗어났다. 그는 녹원이 보았던 사진처럼 양팔을 벌리고, 가슴의 흰 반달을 환히 드러낸 채로 일어나 섰다. 도돌이는 잠시 휘청거리다가 녹원을 끌어안았다. 끌어안았다―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같은 표현을 썼다. 끌어안았다. 곰이 그를 끌어안았다고. 녹원은 등 뒤의 바위로 쓰러졌다. 그 순간이 녹원의 목숨을 구했다. 곰의 무게는 녹원의 몸을 지나 바위 아래로까지 분산되었다. 만약 선 채로 힘겨루기를 했거나, 땅바닥에 곧바로 쓰러졌다면, 녹원의 뼈는 모조리 부서지고 말았을 것이다. 녹원은 그 접촉을 기억했다. 그날의 다른 어떤 때보다 더욱 선명히 기억했다. 늑골을 짓누르는 냄새와 촉감. 곰은 녹원보다 머리 하나 정도가 작았다. 그런데도 어찌나 무거운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녹원은 이후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도돌이는 저를 끌어안지 않았어요. 걔는 저한테 기대어 있었죠. 수의사도 그의 말에 증언을 보태 주었다. 곰이 박녹원씨를 고목이나 바위, 혹은 어떤 기둥처럼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살기 위해서, 박녹원씨에게 매달린 거죠. 파란 천이 흘러내리며 초점을 잃은 눈이 드러났다. 입가에서 흰 거품이 끓었다. 남자들이 곰을 끌어냈다. 녹원은 바위벽에 기댄 채로 주저앉았다. 흐릿한 사람들이 소리쳤다. 괜찮아요? 숨 쉴 수 있어요? 녹원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괜찮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렇지가 않았다. 호흡할 때마다 갈비뼈가 조각나듯 아팠다. 결국에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곰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기사에서 읽은 기묘한 울음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채우고 있었다. 정말로 으엉, 으엉, 하고 우는구나. 녹원은 생각했다. 정말로 울어버리듯이 우는구나. 바로 앞에서는, 누군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녹원씨. 박녹원씨. 녹원은 고개를 돌렸다. 우도근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그는 몇 해는 더 늙어버린 양,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여기에서 일하면 안 돼요.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해. 과장은 몇 번이나 말했다. 박녹원씨. 산에서 내려가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요.              “날이 늦었으니, 우리 집에서 자고들 가요.” 우도근은 주장했다. 녹원과 노아가 연거푸 손사래를 쳤는데도,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그의 집은 산기슭 끝자락에 있었다. 녹원과 노아는 빨간 지프를 따라서 시멘트 언덕 위를 올라갔다. 새하얀 돌벽에 노란 지붕을 올린 집이 나타났다. 옅은 녹색 잔디를 깐 마당에는 흔들 그네와 스프링클러, 평상이 놓여 있었다. 집의 뒤뜰은 산사면과 바로 맞닿았다. 천만다행으로 이쪽 능선까지는 불길이 오지 않아서 피해를 면했노라고 했다. 녹원은 자신의 트럭에서 내려와 주위를 살폈다. 우도근의 집은 언덕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다. 언덕 앞뒤로 보이는 것은 산과 강뿐이었다. 주위에 놓인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녹슨 가로등 하나가 전부였다. 우도근이 노란 현관문을 두드리면서 소리쳤다. “란이. 나 왔어.” 녹원은 어깨를 움츠렸다. 우도근에게 부인이 있다는 사실은 들은 적 있었다. 직접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심지어 우도근이 부인을 부르는 광경을 보다니. 란이, 라고 부르다니. 그가 누군가를 저토록 친근하게 부르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곰을 부를 때만 제외하면. 저녁 시간은 한없이 평화롭게 흘러갔다. 그들은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란은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아름 꺼내 녹원의 품에 안겨 주었다. 별구경하다가 자세요. 란은 오래전부터 녹원을 알아온 양 친근한 어투로 말했다. 마당 평상이 별구경하기 딱 좋거든요. 맥주 곁들이면 그만 한 휴가도 없어요. 막상 부부는 평상 휴가에 동참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아홉 시만 되어도 눈꺼풀이 감겨서, 먼저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도근은 평상에 담요를 깔아 주었다. 조카에게나 건넬 법한 목소리로 말하기도 했다. “재밌게 놀고 푹 자요. 알겠지요?” 마당에는 녹원과 노아만 남았다. 두 사람은 평상에 나란히 앉았다. 다리를 죽 편 채 맥주를 홀짝거렸다. 산에서 내려온 찬 공기가 살갗을 서늘하게 적셨다. 부부의 말대로, 마당에서 보는 별은 몹시 선명했다. 허공에 멈춘 불씨처럼 반짝거렸다. 녹원은 언덕 너머에서 흐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두 갈래로 나뉜 물길이 다시 한 길로 합쳐지는 지점까지 살폈다. 강 뒤편의 산은 부드러운 어둠에 잠겨 있었다. 녹원이 불쑥 말했다. “천 킬로미터예요.” 노아가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하셨어요?” “곰이 이동한 거리 말이에요. 한 번에 삼백사십사 킬로미터, 세 번 돌아오면 천백삼십이 킬로미터 정도 돼요. 서울에서 도쿄까지가 그 정도 거리래요.” 노아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서 말했다. “지독한 곰이네요.” 녹원은 동의했다. 정말이지 지독한 곰이었다. 세 번째 귀환 이후, 이 독한 곰은 제법 유명해졌다. ‘되돌아오는 곰.’ 그런 유의 머리기사와 함께. 도돌이라는 이름 역시 앙증맞게 실렸다. 설악산 측은 이 사건을 일종의 기회로 삼았다. 설악산 반달가슴곰 복원사업의 시작점을 ‘되돌아오는 곰’으로 삼자. 마침내 도돌이는 설악산으로 방사되었다. 몇 가지 복잡한 행정적인 절차를 거쳐서, 사무소 내부에도 곰의 위치를 주기적으로 추적하는 절차가 투입되었다. 반응은 썩 괜찮았다. 이토록 강력한 의지를 가진 곰이 번번이 돌아오던 고향. 한 기자는 도돌이를 천구백팔십삼년에 죽은 곰의 환생인 양 묘사하기도 했다. 수십 년의 한이 이제야 풀렸노라고. 녹원이 말했다. “어릴 때 제 별명이 웅녀였거든요.” 노아가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잠시 후에 그가 말했다. “웃어도 돼요?” 녹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가 웃는 사이에,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열세 살쯤 때 이미 키가 백칠십을 넘었어요. 그때 짝꿍이 되게 웃기던 애였거든요. 저를 맨날 웅녀라고 불렀는데, 그게 못내 좋았어요. 그전에는 한 번도 별명을 가져본 적이 없었거든요…. 이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요.” 녹원은 설악산에서 마지막으로 살던 곰의 최후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국의 마지막 야생 곰, 그가 태어나던 바로 그해 엉엉 울어버리다가 죽은 짐승. 녹원은 곰이 죽은 날짜도 찾아보았다. 곰은 칠월 말일, 녹원이 태어나기 바로 전날에 죽었다. 그 숫자 간의 관계를 깨달은 순간, 녹원의 머릿속으로 괴상한 생각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누구에게도 이것에 대해 말한 적 없었다. 가뜩이나 자신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가는 어떻게 반응할지 뻔했다. 녹원은 천천히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나야말로, 그 곰에게서 돌아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이번에 노아는 웃지 않았다. 녹원은 말을 이었다. 그 생각은 오래도록 그를 옭아맸다고. 누구나 이상한 믿음 하나 정도는 있잖아요, 그런 말로 뭉뚱그리기에는 지나치게 묵직한 믿음이었다. 자신이 그 죽음으로부터 돌아온 존재라면, 왜 이토록 사람들이 어려운지 설명할 수 있을 듯했다. 사람에게 죽은 짐승은,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역시나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내가 바로 그런 경우는 아닐까.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에서 마음을 떼어낼 수 없었다. 꼭 사랑에 빠진 것처럼. “그래서요. 도돌이와 나 사이에도 무언가 이어져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녹원은 고개를 들었다. 노아는 끌어안은 무릎에 턱을 괸 채로 잠들어 있었다. 녹원은 평상에 깐 담요를 펼쳐 노아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고개를 드니 보름달이 떠 있었다. 희고 선명한 달이었다. 두 갈래의 강 위로 두 개의 달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밤 동물의 눈동자처럼 보였다. 녹원은 일어서서 기지개를 켰다. 양팔을 죽 펼친 순간, 그대로 멈춰 섰다. 그는 빳빳이 굳은 채로 귀를 기울였다. 눈앞으로는 밤의 어둠을 타고 흐르는 산의 능선만 보였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등 뒤 어딘가에서, 아마도 뒤뜰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고 있었다. 곧이어 낮게 숨 쉬는 소리가 울렸다. 녹원은 그 숨소리를 알고 있었다. 분명히 귀에 익었다. 다시 한번 비닐이 흔들렸다. 얇은 막이 찢어졌다. 그것이 그르렁거렸다. 나는 알아. 녹원은 생각했다. 나는 이 소리를 알고 있어. 녹원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발뒤꿈치를 들고 돌아섰다. 주택은 엷은 가로등 불빛에 잠겨 있었다. 소리는 조금 더 뒤에서, 가로등 너머에서 들려왔다. 녹원은 천천히 걸었다. 가로등을 지나서 집의 뒤쪽으로 갔다. 뒤뜰에는 지붕을 씌운 분리수거함과 차고가 있었다. 차고의 비상등은 활짝 켜져 있었다. 안쪽의 빨간 지프가 선명히 보였다. 그 옆의 분리수거함을 뒤적거리는 물체 역시도 뚜렷하게 보였다. 녹원은 멈춰 서서 그 물체를 보았다. 검고 큼직한 뒷모습. 몇 해 전보다는 살이 좀 빠진 것 같았다. 곰은 비닐봉지를 뒤지고 있었다. 검은 발이 노란색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움켜쥐었다. 비닐들이 흔들리고 찢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녹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목이 메었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마음은 한 차례 솟구치더니, 도무지 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녹원은 집의 그늘에 몸을 숨긴 채 곰의 움직임을 훑었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니 부석거리는 털이라거나 바싹 야윈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얘.” 녹원이 말했다. “도돌아.” 곰은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응답하듯이. 자신이 어떻게 불리는지를 알고 있다는 듯이. 녹원은 한 발짝 다가섰다. 다음 걸음은 좀더 가볍게 옮겼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잡지 않았더라면 계속 걸어갔을 터였다. 손은 녹원을 꽉 쥐고 뒤로 당겼다. 녹원은 뒤돌아보았다. 노아가 거기 있었다. 비상등의 빛에 새하얗게 질린 채, 녹원을 붙들고 속삭였다. “움직이면 안 돼요. 주사님, 움직이지 마세요.” 녹원도 무엇인가 말하려 했다. 괜찮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는 이미 한 번 이 곰을 만난 적 있다. 그때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곰은 놀랍도록 명민한 동물이라 몇 해 동안 사람을 기억한다. 그러나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곰은 구부정하게 서서 멀뚱히 그들을 보고 있었다. 흰자가 슬며시 드러난 눈은 사람의 것보다 둥글고 검었다. 그 눈동자에서는 어떤 생각도 읽어 낼 수 없었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결, 그것들로부터 추측할 수 있는 감정 또한 없었다. 곰은 그와 전혀 다른 구역에, 다른 세계에 있었다. 그가 자신의 이름에 반응했다니. 우스운 생각이었다. 그들 간에는 무엇도 교차하는 것이 없었다. 녹원은 그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녹원이 속삭였다. “노아씨. 뒤로 가요. 등 돌리지 말고, 뒷걸음질로요.” 노아는 그의 말을 따랐다. 그들은 기묘한 춤을 추듯, 일정한 리듬에 따라 뒷걸음질을 쳤다. 곰은 그들을 빤히 지켜볼 뿐이었다. 자신의 트럭 옆으로 다가갔을 무렵, 녹원은 주머니에서 차 열쇠를 꺼냈다. 그것을 차의 앞문에 대고 몇 차례 내리쳤다. 열쇠와 문이 맞부딪치며, 금속이 깨지는 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곰이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팍에 모으고 있던 앞발을 바닥에 내딛더니 그대로 등을 돌려 달아났다. 산속으로, 그리하여 어둠 너머로 녹아내렸다.        그들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곰이 뜯어둔 비닐들을 바라보면서. 창문 안쪽에서는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도근 아니면 란이 깨어난 모양이었다. 녹원은 잽싸게 몸을 돌렸다. 노아는 여전히 하얗게 질려 있었다. 녹원은 그의 팔을 붙들었다. “노아 씨. 여기에서 다른 거 본 거로 해요. 아무거나 좋아요. 고양이나 멧돼지, 살쾡이. 뭐 그런 게 내려왔다고 그래요. 곰을 봤다고는 하지 마요.” “왜요? 주사님. 방금 보셨잖아요. 곰이에요. 맹수라고요. 제대로 말씀드려야 해요.” 녹원은 숨을 들이마셨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던 눈 한 쌍, 그 눈길이 불에 덴 자국처럼 머릿속에 새겨졌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몇 해 동안 그를 옭아매던 감정들이 이제야 제대로 된 언어로 자리를 잡았다. 곰은 사람과 다르다. 곰은 사람이 아니다. 곰은 사람보다 나은 존재다. 앞뜰에서는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녹원이 낮게 속삭였다. “노아씨. 나는요. 늘 곰에게 산을 주고 싶었어요. 아주 통째로 줘 버리고 싶어요.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다고요. 그게 맞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해하겠어요?” 노아가 자신의 팔을 붙든 손을 붙잡아 내렸다. 그는 오래전에 과장이 짓던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곧 울음을 터뜨릴 듯 일그러진 얼굴, 여전히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없었다. “주사님. 저는 이해가 안 돼요. 우리가 산을 줄 수 있나요? 우린 애초에 산을 가진 적도 없잖아요. 다들 그걸 알아요. 그래서 여기 계신 분들이 저 곰을 찾으려고 하는 거잖아요. 찾아서 보호하고, 같이 살려고요. 다들 그걸 위해서 애쓰는 거잖아요.” 노아의 등 뒤로 우도근이 보였다. 그가 집의 벽을 따라 돌아와 가로등 아래 섰다. 그가 부스스한 머리를 정돈하며 물었다. “뭐 깨지는 소리가 나던데, 무슨 일 있어요?” 노아가 녹원을 올려다보았다. 녹원도 노아를 내려다보았다. 노아씨. 박녹원 주사가 안 무서워? 직원들의 질문이 녹원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쩔 수 없었다. 녹원이 말했다. “노아씨, 먼저 들어가세요. 저도 곧 갈게요.” 노아가 눈을 깜빡거렸다. 무엇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리더니, 이내 포기한 듯 몸을 돌렸다. 우도근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노아를 흘끗 보고서, 녹원에게 다가왔다. 녹원은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차 안에서 무엇인가 찾다가 열쇠를 떨어트렸고, 차 문에 부딪힌 열쇠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고. “죄송해요, 주무시는 걸 깨웠네요.” 우도근은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녹원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우도근도 집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과장의 눈길이 뜯어진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가 닿는 순간, 녹원이 입을 열었다. “과장님. 여기 족제비 같은 게 있던데요.” 우도근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족제비요?” 녹원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열쇠를 찾다가 뒤뜰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고. 다가가니 족제비인지 오소리인지가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는 중이었다고. 꽤 굶주려 보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과장은 분리수거함으로 다가가 핸드폰 플래시를 켰다. 봉투를 이리저리 비쳐 보더니 혀를 찼다. “아이고, 이걸 하루 늦게 내놨더니…험하게도 물어뜯어 놨네.” “안에 들여놓으시는 게 나을 거 같아요.” 녹원은 너덜너덜한 봉지를 들어 우도근에게 건넸다. 옛 과장이 그것을 받으며 빙그레 웃었다. “시골은 시골이지요?” 박녹원도 마주 웃었다. 지금은 이 정도의 대응이야,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녹원은 방으로 돌아왔다. 벽을 향해 누웠다. 그의 옆에 누운 노아가 뒤척거렸다. 그는 녹원 쪽으로 몸을 돌렸다가, 반대로 돌아눕고, 깊은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의 망설임이 애틋한 동시에 힘겹게 다가왔다. 녹원은 반대쪽으로 돌아누워 눈을 감았다. 노아가 움직임을 멈췄다. 녹원은 벽에 드리워진 그늘을 물끄러미 지긋이 보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등 뒤로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울렸다. 노아가 결국 피로에 항복한 모양이었다. 녹원은 몸을 돌려 정면으로 누웠다. 유리창으로 스민 달빛이 천장을 부드럽게 밝혔다. 녹원은 눈을 깜빡거렸다. 그는 불타는 산을 생각했다. 잿빛 산, 폐허처럼 모두 불타버린 산, 잿더미로 뒤덮여 일견 늪처럼 보이기도 하는 산이다. 곰이 그 위를 달리고 있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처럼, 두 발이 아니라 네 발로. 그는 산맥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빠르다. 성체로 자라난 곰들은 사십에서 육십 킬로미터의 속력을 낸다. 그는 타고난 사냥꾼이며 끈기의 화신이다. 바삐 위치를 바꾸는 앞발과 뒷발 너머로 회색 구름이 퍼져 나갈 것이다. 곰은 바위를 뛰어넘고, 나무를 오르고, 강을 건넌다. 어떤 방해도 없이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간다. 누구도 그를 쏘지 않는다. 잠든 채로 끌려 나오지도 않는다. 그는 어디든지, 원하는 만큼 간다. 산은 모두 곰의 것이다. 그는 자유롭다. 녹원은 가슴에 양손을 올렸다. 마치 포로처럼.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윽고,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의 얼굴로 번져 나갔다.
  • 쥐 물린 듯 아픈 괴질… 선조들의 처방은 거리두기와 ‘이것’?

    쥐 물린 듯 아픈 괴질… 선조들의 처방은 거리두기와 ‘이것’?

    1821년 조선에 창궐한 콜레라는 ‘괴질’로 불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병이라는 뜻이다. 콜레라가 쥐에게 물린 통증과 비슷하다고 여긴 조선인들은 이를 치료하기 위해 대문에 고양이 그림을 붙였다. 몸 안에 들어온 쥐 신(神)을 내쫓기 위해서다. 19세기 프랑스 인류학자 샤를 바라가 ‘조선 기행’에 기록한 당시의 풍습이 이랬다. 코로나19 팬데믹이 2년째 이어지는 가운데 과거부터 현재까지 한반도를 공포에 떨게 한 역병과 그 대처법을 다룬 전시가 눈길을 끌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역병 속에서도 일상을 살아낸 이들의 이야기를 조명하는 특별전 ‘역병, 일상’을 내년 2월 28일까지 선보인다. 역병에 관한 과거 기록은 물론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선조들의 노력을 담은 자료 158건, 353점이 전시된다. 이 가운데 ‘노상추 일기’와 ‘묵재 일기’가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노상추 일기는 조선 후기 무관인 노상추(1746~1829)가, 묵재 일기는 조선 중기 문신 묵재 이문건(1494~1567)이 쓴 것이다. 특히 노상추 일기는 그가 17세부터 사망 직전까지 무려 67년간 기록한 것인데, 조선 시대 역병에 대한 인식과 치료법 등이 상세히 나와 있어 의학사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자료다. 개인의 일기뿐 아니라 조선이 생산한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도 ‘두창’과 ‘여역’(돌림으로 앓는 열병)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역병이 도는 것을 막으려 한 옛 사람들의 노력도 엿보인다. 조선 때도 역병이 돌면 조용하고 산수가 맑은 곳으로 피접(避接)을 가고, 집 안에서 스스로 격리하는 일이 빈번했다. 현재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자가격리와 유사하다. 두창에 대한 공포를 굿으로 달랜 ‘마마배송굿’ 풍습도 접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짚말(사진)을 만들고 굿을 한 뒤 이를 태웠는데, 여기엔 역병을 멀리 실어 보낸다는 의미가 담겼다. 전시는 전염병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다시 함께의 가치’도 강조한다. 조선 시대 시골 양반이 마을의 안정을 바라며 지은 제문과 오늘날 동네에서 방역 활동을 하는 자율 방범대의 모습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나훈영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역병은 인류 역사에서 반가운 존재는 분명 아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면서도 “역병이 유행할 때마다 일상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함께 지혜를 발휘해 왔다”고 말했다.
  • 코로나 이전의 역병, 선조들은 어떻게 견뎠을까

    코로나 이전의 역병, 선조들은 어떻게 견뎠을까

    1821년 조선에 창궐한 콜레라는 ‘괴질’로 불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병이라는 뜻이다. 콜레라가 쥐에게 물린 통증과 비슷하다고 여긴 조선인들은 이를 치료하기 위해 대문에 고양이 그림을 붙였다. 몸 안에 들어온 쥐 신(神)을 내쫓기 위해서다. 19세기 프랑스 인류학자 샤를 바라가 ‘조선 기행’에 기록한 당시의 풍습이 이랬다. 코로나19 팬데믹이 2년째 이어지는 가운데 과거부터 현재까지 한반도를 공포에 떨게 한 역병과 그 대처법을 다룬 전시가 눈길을 끌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역병 속에서도 일상을 살아낸 이들의 이야기를 조명하는 특별전 ‘역병, 일상’을 내년 2월 28일까지 선보인다. 역병에 관한 과거 기록은 물론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선조들의 노력을 담은 자료 158건, 353점이 전시된다. 이 가운데 ‘노상추 일기’와 ‘묵재 일기’가 일반에 처음 공개된다. 노상추 일기는 조선 후기 무관인 노상추(1746~1829)가, 묵재 일기는 조선 중기 문신 묵재 이문건(1494~1567)이 쓴 것이다. 특히 노상추 일기는 그가 17세부터 사망 직전까지 무려 67년간 기록한 것인데, 조선 시대 역병에 대한 인식과 치료법 등이 상세히 나와 있어 의학사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자료다. 개인의 일기뿐 아니라 조선이 생산한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도 ‘두창’과 ‘여역’(돌림으로 앓는 열병)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역병이 도는 것을 막으려 한 옛 사람들의 노력도 엿보인다. 조선 때도 역병이 돌면 조용하고 산수가 맑은 곳으로 피접(避接)을 가고, 집 안에서 스스로 격리하는 일이 빈번했다. 현재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자가격리와 유사하다. 두창에 대한 공포를 굿으로 달랜 ‘마마배송굿’ 풍습도 접할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짚으로 말을 만들고 굿을 한 뒤 이를 태웠는데, 여기엔 역병을 멀리 실어 보낸다는 의미가 담겼다. 전시는 전염병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다시 함께의 가치’도 강조한다. 조선 시대 시골 양반이 마을의 안정을 바라며 지은 제문과 오늘날 동네에서 방역 활동을 하는 자율 방범대의 모습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나훈영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역병은 인류 역사에서 반가운 존재는 분명 아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면서도 “역병이 유행할 때마다 일상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함께 지혜를 발휘해 왔다”고 말했다.
  • [신가영의 장호원 이야기] 사람만 어른인 동물세상/화가

    [신가영의 장호원 이야기] 사람만 어른인 동물세상/화가

    가을이 그랬던가. 구름을 날려버린 청량한 하늘이 마냥 계속될 듯하더니 장맛비 같은 된비가 험상궂게 내리치고는 다시 푸른 하늘이다. 적막은 비 그치면서 깨지고 풀벌레 소리 높아지고 동네 개들 짖어대기 시작한다. 주인이 기척을 보이면 좋아라 짖어대고 배고프면 짖어대고 낯선 이가 지나가면 유난스레 더욱 짖어대어 조용히 기다리는 우리 집 개보다 더 신경 쓰게 하는 마을 강아지들. 시골에 내려오면 하고픈 일 중 하나가 마음껏 개를 풀어놓고 키우는 것, 그리고 함께 시골길을 산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사건과 사고의 연속이었다. 이웃집 할머니께서 늘 마주하던 개에 물리는 큰 사고가 있었고, 이웃집에서 키우는 닭들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하는 일이 생겨 충격을 주었다. 또 강아지와 고양이를 해치는 사고들도 연속이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개 등이 짧은 끈으로 묶여 살아야 하는 걸 무지하고 동물들에 대한 냉혹한 인식이라고 단순 치부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바람과 달리 동물들을 키우며 커지는 건 두려움이다. 많은 동물과 함께하며 더 많은 죽음을 접하게 되고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잔혹함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감하게 바라보는 풍경 속에 나를 제외시킨 시선이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드러난 잔혹함이란 더 단순한 일일지도 모를 일이다. 사마귀를 잡아와 노는 고양이, 울타리 안에 들어온 쥐를 사냥하는 개, 날벌레 둘둘 감아 먹이로 만드는 거미, 공중을 선회하는 수리들. 새들이 괜히 우짖을까. 유기견들이 늘어나고 들개가 되어 위협적인 대상이 되어 버린 그 모든 배경에 뒷짐 지고 서성이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사람만 어른이 되는 세상이다.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사는 세상 속에서 보호 대상이 되고 관리 대상이 되고 기피 대상이 되는 그들. 그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어른이라는 역할일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이 책임져야 할 것이 적지 않다. 울타리 안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바람이 한여름 뭉개구름처럼 모이다가 가을하늘 구름처럼 변해간다. 많다고 할 수도 없지만 적지 않은 동물과 함께 살아가며 스스로 내가 어른인지 묻는다. 외면할 수 없는 그들 속에서 투영되는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 [신가영의 장호원 이야기] 풍경 안에서/화가

    [신가영의 장호원 이야기] 풍경 안에서/화가

    입추 지나니 더위가 꺾인 듯하나 마당에 나서면 뜨거운 햇살 아래다. 더 뜨거워지기 전에 화단에 기승하는 바랭이, 깨풀, 여뀌들 솎아 낸다. 어느새 한 무더기 쌓여 간다. 고양이들이 언제 나왔는지 마당을 헤집고 다닌다. 주먹만 하던 아기 고양이들이 어느새 커서 각자 하고 싶은 바를 찾아다닌다. 그저 지켜보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재미난 것 없나 살피며 장난치는 녀석, 마당을 질주하며 노는 고양이들을 보자 하니 눈에 들어오는 풍경들이 별스럽지 않다.새들 노래하는 소리도 당연하고, 귀뚜라미 쓰르라미 여치 우는 소리도 새삼스럽지 않다. 달려드는 모기도, 나무에 톡톡 튀어 다니며 하얗게 만드는 미국선녀벌레도 유별나지 않다. 집 안을 기어 다니는 돈벌레나 거미들 때문에 놀라 호들갑 떨던 때가 언제였나 싶다. 제비, 어치, 박새, 오목눈이와 오색딱따구리, 청딱따구리, 꾀꼬리, 후투티, 물까치 등이 몰려오면 카메라를 꺼내 사진 찍기 바빴는데 이젠 그러려니 무심히 바라보게 된다. 마당과 숲을 종횡무진 돌아다니는 고양이들이 달고 오는 벌레들과 물고 오는 뱀이나 쥐, 새들도 놀랍지 않게 돼 간다. 그러자고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이 아닐 텐데 어느새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서울 수유리에 살 때 어쩌다 들어오는 곤충들이 궁금해서 안방 방충망 문을 열어 놓고 며칠 지낸 적이 있었다. 모기 파리가 주로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천장이며 벽이며 여러 나방과 딱정벌레들이 잔뜩 붙어 있거나 날아다녔다. 그 모습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한참 구경했던 적이 있다. 시골에 내려오니 늘상 접하게 되는 풍경이다. 시골에 왜 내려왔느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농사짓는 것도 아니고, 어떤 활동도 아니고, 시골 공동체 안에 들어와 그들처럼 살고픈 마음도 아니다. 자연에 좀더 가깝게 살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서도 아니다. 이곳에 정착하기 전 했던 전원생활은 적응이 쉽지 않아 다시 도시로 돌아가기도 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밖에서 주는 매뉴얼에선 찾기 어렵다. 무심히 보내는 시간이 필요하고 자신을 들여다보는 계기들이 쌓이다 보면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 풍경 안에서 그들과 별다를 바 없이 지내는 호사를 이제 좀 누리고 있는 즈음, 여전히 답을 찾고 있다.
  • 바이든, ‘푸른 벽’ 세우고 ‘붉은지역 침투’해 이겼다

    바이든, ‘푸른 벽’ 세우고 ‘붉은지역 침투’해 이겼다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미 대선 승리는 한편의 역전 드라마였다. 결과적으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초반 승리를 바탕으로 ‘승리 선언’을 한뒤 바이든 후보가 추격해 역전하는 소위 ‘레드 미라지’(붉은 신기루) 현상이 일어날 거라는 세간의 예상대이 맞았다. 하지만 개표 초반 러스트벨트에서 격차가 두 자릿수까지 벌어지면서 사실상 패배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을 정도로 손에 땀을 쥐게 했다. 특히 공화당의 텃밭이었던 애리조나주와 조지아주가 각각 24년, 28년만에 바이든 후보를 택하며 승부가 결정되기까지 닷새 넘는 시간이 걸렸다. 다만 향후 소송전이 남아 있어 완전한 결과를 받기까지는 예상보다 긴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 ●개표 초반 플로리다부터 휩쓸던 트럼프, 푸른벽에 막혀 전날 개표 초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파죽시세에서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를 구한 건 결국 위스콘신·미시간·펜실베이니아주 등 소위 ‘푸른 벽’(blue wall)이었다. 2016년 트럼프 대통령에게 승리를 빼앗기기 전까지 민주당의 텃밭으로 불렸던 곳이다. 개표 첫날인 3일(현지시간) 밤 북부 러스트벨트 3개주(위스콘신·미시간·펜실베니아)는 모두 10%포인트 이상으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앞섰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우세한 시골지역에서 먼저 개표를 빠르게 진행하면서 격차는 더욱 커졌다. 사전투표(우편·현장조기투표)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도심 지역은 개표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선거에 앞서 많은 전문가들이 이 지역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초반에 이기다 역전되는 ‘레드 미라지’(붉은 신기루) 현상을 예상했지만, 이런 판단이 틀렸다는 때이른 판단이 나올 정도의 큰 격차였다. 이날 심야회견에서 바이든 후보는 “시간이 걸려도 우리가 이긴다”고 주장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승리 선언’을 했다. 하지만 4일 새벽 바이든 후보는 위스콘신을 시작으로 아침에 미시간마저 역전했고, 다시는 우위를 내주지 않았다. 펜실베이니아에서 추격 속도는 좀 늦었지만 결국 1%포인트 안으로 격차를 줄인 뒤 역전했다.트럼프 대통령이 제조업 부활과 일자리 확대를 공약으로 2016년 이겼던 러스트벨트의 탈환은 한 가지 원인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우편투표로 청년 및 유색인종의 참여가 늘었고, 제조업 노조를 집중공략한 바이든 캠프의 전략도 주효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폴리티코는 “이들은 흑인 인구가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흑인시위를 지지한 바이든 후보가 표를 더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근 미네소타주에서 벌어진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촉발된 흑인시위가 위스콘신의 제이컵 블레이크 사건으로 이어진 탓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공화당의 뼈를 때린 애리조나, 위스콘신 그리고 네브래스카 러스트벨트의 푸른 벽이 부활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북진을 막았다면, 바이든 후보 입장에서 애리조나주와 조지아주는 소위 적진을 빼앗아 승리를 안은 곳이다. 아직 개표가 완료되지 않았지만 근소한 차이로 앞서고 있다. 일부 미 언론은 애리조나의 경우 이미 바이든 승리 지역으로 선언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 당일 밤 보수성향의 폭스뉴스가 애리조나를 바이든 후보의 승리로 분류하자 노발대발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지난 72년간 민주당은 애리조나에서 1996년에만 한 번 이겼을 정도로 보수성향이 강했다. 피닉스·투손 등 애리조나의 주요 도시가 커지고 일자리가 늘면서 진보색이 강한 인근 캘리포니아에서 청년들이 유입된 것이 원인으로 꼽힌다. ‘매케인 효과’도 언급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숨진 존 매케인 전 공화당 상원의원과 앙숙으로 지내며 독설을 서슴지 않았는데, 매케인은 생전 ‘애리조나의 아들’로 불릴 만큼 지역구에서 두터운 지지를 받던 인물이었다. 바이든 후보는 개표가 진행되면서 공화당의 안방으로 불리는 네브래스카에서도 1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했다. 선거분석기관 ‘538’이 미국 내에서 가장 보수적인 지역으로 꼽았던 곳이다. 이곳과 메인주는 승자에게 선거인단 전체를 몰아주는 구조가 아니다. 주 전체 투표에서 이긴 후보에게 2명을, 하원 선거구 승자에게 1명을 배정한다. 바이든 후보는 이곳의 최대도시인 오마하가 속한 2선거구에서 승리했으며 작지 않은 이변으로 평가됐다. 워싱턴 이경주 특파원 kdlrudw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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