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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회 제주비엔날레 25일 개막… 추사 김정희의 유배된 삶, 변용된 예술로 만난다

    제5회 제주비엔날레 25일 개막… 추사 김정희의 유배된 삶, 변용된 예술로 만난다

    추사 김정희의 제주 유배의 고립과 단절의 시간이 제주비엔날레에서 변용된 예술로 새롭게 만난다. 제주도가 주최하고 제주도립미술관이 주관하는 제5회 제주비엔날레 ‘허끄곡 모닥치곡 이야홍: 변용의 기술’이 25일 개막해 11월 15일까지 83일간 제주 곳곳에서 열린다고 24일 밝혔다. 올해 비엔날레는 특히 제주 유배의 대표적 인물인 추사 김정희를 출발점으로 삼아, 고립과 단절의 시간이 어떻게 새로운 예술과 문화로 변용되는지를 조명한다. 20개국 69팀(명)의 국내외 작가가 참여하며, 이종후 제주도립미술관장이 예술감독을 맡았다. 전시는 제주도립미술관과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 제주아트플랫폼, 예술공간 이아, 갤러리레미콘 등 5개 공간에서 펼쳐진다. #올해 주제는 ‘허끄곡 모닥치곡 이야홍’… ‘유배’, ‘돌문화’, ‘신화’ 전시올해 주제인 ‘허끄곡 모닥치곡 이야홍’은 제주어와 제주민요에서 출발했다. ‘허끄곡 모닥치곡’은 ‘섞이고 모이다’는 뜻이고, ‘이야홍’은 제주민요 ‘이야홍 타령’의 후렴구다. 제주의 토착문화가 외부 문명과 만나 섞이고 합쳐지면서 끊임없이 변화해온 과정을 ‘변용’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낸다. 전시는 ‘유배’, ‘돌문화’, ‘신화’ 세 갈래로 구성된다. 제주도립미술관에서는 ‘추사의 견지에서: 유배’를 주제로 추사 김정희의 제주 유배를 조명한다. 추사는 제주에서 약 9년간 유배 생활을 하며 고립과 단절의 시간을 견뎠지만, 그 시간을 예술과 학문을 확장하는 계기로 바꿨다. 이번 전시는 추사의 제주 유배를 개인의 고난에 머물지 않고, 외부 세계와 단절된 시간이 새로운 예술 언어와 문화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과정으로 바라본다. 1층 전시는 추사가 인장으로 사용한 문구 ‘불계공졸(不計工拙)’을 비롯해 제주 유배 시절의 조형적 유산을 보여주는 ‘귤화위지(橘化爲枳)’, ‘병거사예(病居士藝)’ 등 세 갈래로 구성된다. 2층 ‘세한(歲寒): 동시대 유배’에서는 난민과 흩어진 이주민 등 오늘날의 ‘유배’와 단절의 문제로 시선을 넓힌다. 전시의 문은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인 ‘세한도’ 영인본과 제주 문자도, 현중화의 ‘취시선’이 연다. 이어 오석훈의 대형 수묵화 ‘한라영곡’, 조기섭의 ‘걷는 풍경: 7계’, 이현태의 오디오비주얼 설치작품 ‘어 김없 는 것과 어긋나는(거)’ 등이 관람객을 맞는다. 2층에서는 아슬란 고이숨, 알라아 에드리스, 윤진미, 류봉식, 정기엽 등의 작품을 통해 유배와 이주, 기억과 단절의 의미를 확장한다. 제주 작가 이쥬의 신작 ‘아포리아의 증인’은 관람객이 직접 작품에 참여하도록 구성됐다. 인공지능(AI)으로 제작된 여섯 증인의 초상 앞에서 설문에 답하면 마지막에 한 명의 증인과 연결된다. 관람객은 이를 통해 자신 역시 상황에 따라 가해자 또는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아랍에미리트 작가 알라아 에드리스는 폐허가 된 고대 유적과 신화, 우화, 전설이 오늘날의 삶과 맞닿는 지점을 탐색한다. ‘휴전 오만 시대의 일곱 정령들’과 ‘서커스’ 연작을 통해 반복되는 시간과 기억이 끊임없이 변형되는 역설을 보여준다.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에서는 ‘검으나 돌은 구르고 굴러: 돌문화’를 선보인다. 제주의 현무암과 돌담에 쌓인 시간과 기억이 주요 소재다. 김현성의 신작 ‘담지체’는 24개의 물레 위에 돌을 올려놓은 작품이다. 관람객이 물레를 돌리면 돌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리듬을 만들고, 작가는 이를 ‘24개 행성들의 새로운 질서’로 표현한다. 일본 작가 오카베 마사오는 사진작가 미나토 치히로와 함께 신작 ‘TIME RINGS’를 선보인다. 제주와 홋카이도, 히로시마를 하나의 기억으로 연결한 설치작품이다. 이밖에 노진아의 ‘진화적 키메라-가이아’, 김정헌의 ‘흙 한줌의 인과성, 우주 생명의 토양’, 갈라 포라스-김의 ‘Forecasting Signal’, 룸톤의 VR 작품 ‘에코스피어’ 등이 전시된다. 야외 중정에는 송필의 ‘실크로드, 전설(version 2)’과 강문석의 ‘초원’이 설치된다. # 제주 신화와 공동체 기억도 예술로제주아트플랫폼과 예술공간 이아, 갤러리레미콘 등 원도심에서는 ‘큰 할망의 배꼽: 신화’를 주제로 제주 신화와 공동체의 기억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읽는다. 제주아트플랫폼 3층 대공연장에서는 캐나다 작가 뱅상 모리세와 캐롤라인 로버트의 ‘테라(TERRA)’ 가 선보인다. 높이 6m, 폭 15m가 넘는 벽 전체가 화면으로 변해 거대한 ‘살아있는 벽화’를 구현한다. 우크라이나 작가 자나 카디로바는 제주아트플랫폼 5층 영화관에서 신작 ‘퍼포먼스 VI’를 공개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사라진 마을과 사람들의 기억을 담아온 작가가 기존 퍼포먼스 시리즈를 제주라는 장소와 맥락에 맞게 새롭게 번안했다. 예술공간 이아에서는 제주의 녹나무를 신목이자 우주목으로 상상한 ‘날과 씨’를 비롯해 김상돈의 ‘거울 속 열쇠들-4개의 싹’, 최민화의 고대 신화 연작, 곽윤주의 심방과 굿을 기록한 영상 작품 등이 전시된다. 국가민속문화유산인 ‘제주도 내왓당 무신도’ 확대 복제 작품과 ‘천지왕본풀이’에서 출발한 손유진의 회화 ‘The Between Two Suns and Two Moons’도 만날 수 있다. # ‘표류’에서 ‘유배’로…제주의 문화적 변용 조명제5회 제주비엔날레는 앞선 제4회 비엔날레에서 ‘표류’를 통해 제주와 남방문화의 연결을 살폈던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선을 북방으로 확장했다. 해양을 따라 유입된 남방문화가 이동과 교차를 통해 제주에 영향을 미쳤다면, 북방문화는 유배와 이주, 신화 등을 통해 제주와 연결돼 왔다는 것이 비엔날레 측의 설명이다. 특히 추사 김정희의 제주 유배는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새로운 것으로 변화하는 ‘변용’의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제시된다. 고립된 섬에서 추사의 예술과 학문이 오히려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냈듯, 제주의 문화 역시 외부와 끊임없이 만나고 섞이며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해왔다는 것이다. 이종후 예술감독은 “지난 비엔날레가 표류로 남방문화와의 연결을 살펴봤다면, 이번에는 유배와 신화, 돌문화를 통해 북방문화와 제주가 이어져 온 흐름을 들여다보고자 했다”며 “서로 다른 문화가 제주에서 뒤섞이고 합쳐지며 만들어낸 변용의 기술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이야기하려 한다”고 말했다. 개막식은 24일 오후 6시 제주 관덕정 광장에서 열린다. 예술감독의 전시 소개와 홍보대사 김창옥의 인사말에 이어 경기소리꾼 이희문의 축하공연이 펼쳐진다. 입장료는 성인 8000원이다. 자세한 전시와 프로그램 일정은 제주비엔날레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바다거북과 붉은 노을… 하와이가 내게로 왔다

    바다거북과 붉은 노을… 하와이가 내게로 왔다

    시간을 늦추는 섬, 마우이거대한 바위처럼 엎드린 바다거북머물고 싶은 야자수 해변·금빛 노을 산불에도 변함없는 바다·화산 숨결에너지 넘치는 섬, 오아후개발·도시화에도 자연 보전은 철칙태양의 서커스·카카오 과수원 체험도심·태평양 품은 레아히 풍경 압권 바다거북이 열댓 마리가 모래사장 위에 거대한 바위처럼 엎드려 있다. 무리 사이로 작은 바다거북 한 마리가 천천히 모래 위를 기어오른다. 태평양 너머로 붉은 석양이 번지고, 노을빛이 거북들의 단단한 등껍질을 감싸는 순간 하와이 마우이섬 북쪽 호오키파 해변은 거대한 자연극장으로 변한다. 등껍질에 붙은 해조류와 기생생물을 햇볕에 말리고 떼어내기 위한 자연스러운 생태 활동이다. 여행자의 눈에는 마우이를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장면으로 남는다. 바다거북이 머무는 호오키파 해변을 뒤로하면 마우이는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면적 약 1883㎢의 마우이는 제주도(약 1847㎢)보다 조금 큰 하와이 제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으로, 바다와 화산, 농촌 풍경이 어우러진 섬이다. 북쪽 해안에서 자연의 생명력을 만났다면, 서쪽 카아나팔리 해변에서는 천천히 흐르는 휴식의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카아나팔리 해변은 카훌루이 공항에서 차로 약 45분 거리다. 카아나팔리 해변에서 맞는 아침은 창을 열면 먼저 들려오는 것이 파도 소리이고, 발코니 너머로는 야자수가 늘어선 해변과 수평선 너머 몰로카이섬이 펼쳐진다. 이곳에서 여행의 중심은 많은 일정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풍경을 오래 바라보는 시간에 있다. 에릭 프랭컴 더 웨스틴 마우이 리조트 앤 스파 마케팅 총괄이사는 “일정을 채우기보다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중요하다”며 “천천히 쉬는 것이 마우이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마우이는 단순한 휴양지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화산이 빚어낸 대지, 바다와 함께 살아온 문화, 변치 않는 풍경을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여유가 이 섬에는 있다. 이곳에서의 여행은 새로운 장소를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한 사람과 오래 간직할 장면을 만들어가는 시간에 가깝다. 마우이에서 관광업에 종사하는 김연주 윤스택시 대표는 “사이가 좋지 않던 사람들도 며칠 머무르다 보면 관계를 회복해서 나간다”고 전했다. 2023년 8월 발생한 대형 산불은 마우이의 시간을 잠시 멈춰 세웠다. 옛 하와이 왕국의 수도이자 19세기 태평양 포경 산업의 중심지였던 역사 도시 라하이나를 삼키며 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마우이는 복구와 재건의 시간을 지나며 다시 여행자를 맞이하고 있다. 카아나팔리 해변 주변 리조트와 상점에는 다시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전로사 하와이 관광청 한국사무소 과장은 “경기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우이를 찾는 관광객이 다시 늘어나는 것을 현장에서 체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우이를 가장 깊게 느끼는 방법은 시선을 낮추고 바닷속 세계를 마주하는 것이다. 마알라에아 항구 옆에 자리한 마우이 오션 센터는 하와이 해양 생태계를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다. 1998년 문을 연 이곳은 하와이 해양 생태계 보전과 교육을 위해 조성된 시설로, 상어와 가오리, 형형색색의 열대어가 살아가는 바닷속 세계를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다. 어둠이 내려앉은 혹등고래 전시관에서는 거대한 돔 스크린을 통해 실제 바닷속을 옮겨놓은 듯한 4D 영상이 펼쳐진다. 천장과 벽면을 타고 울려 퍼지는 고래의 울음소리가 공간을 채우면 관람객은 잠시 마우이 앞바다로 들어온 듯한 경험을 한다. 티아라 오션 센터 교육 총괄이사는 “고래들이 매년 겨울 알래스카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헤엄쳐 이 마우이 바다로 내려온다”고 설명했다. 마우이의 서사는 푸른 바다에서 끝나지 않고 거대한 화산의 대지로 이어진다. 하와이어로 ‘태양의 집’이라는 뜻의 해발 3055m 할레아칼라 화산의 경사면을 따라 올라가면 풍경은 몇 차례 변화를 거듭한다. 야자수는 사라지고 붉은 화산 토양과 초록빛 목초지가 펼쳐진다. 렌터카로 올라갈 경우 기온 변화가 크니 가벼운 방풍 재킷을 챙기는 것이 좋다. 해발 500~1000m 고지에 자리한 쿨라 업컨트리는 하와이 하면 떠오르는 해변과는 전혀 다른, 서늘하고 목가적인 풍경을 품은 지역이다. 비옥한 화산 토양과 서늘한 기후 덕분에 다양한 농업이 이어진다. 쿨라 업컨트리의 한 농장인 ‘푸에오 농장’을 운영하는 린다 러브는 붉은 흙을 가리키며 “화산이 만들어낸 이 땅에서 우리는 자연의 흐름을 따라 농사를 짓는다”고 말했다. 이 대지 위에서 만난 특별한 맛은 오스트레일리아 핑거라임이다. 초록색 가죽 같은 껍질에 손가락만 한 크기의 투박한 열매를 반으로 가르자, 투명한 알갱이가 쏟아져 나왔다. 혀끝에 올리고 입안에서 굴리자 알갱이가 톡톡 터지며 라임 특유의 상쾌한 산미가 퍼졌다. 함께 맛본 시원한 코코넛 워터와 코코넛 젤리는 화산 지대 농장이 선사하는 또 다른 자연의 맛이다. 저녁은 드넓은 파인애플 밭 한가운데 자리한 오래된 상점, ‘할리이마일레 제너럴 스토어’에서 이어진다. 빛바랜 간판과 나무 외벽이 남아 있는 이곳은 겉보기에는 소박한 시골 잡화점이지만, 하와이 음식 문화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1990년대 초 하와이에서 생산된 농산물과 해산물, 육류를 적극 활용해 지역의 개성을 살린 요리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었고, 이른바 ‘하와이 리저널 퀴진’의 중심 공간으로 이름을 알렸다. 카아나팔리 해변의 복합문화공간 ‘웨일러스 빌리지’는 마우이의 또 다른 활기찬 모습이다. 럭셔리 브랜드부터 하와이 감성이 담긴 부티크 등 100여개 매장이 입점해 있는 이곳은 단순한 쇼핑몰을 넘어, 광장 한쪽에서 우쿨렐레 강습이 열리고 훌라 공연이 펼쳐지는 문화의 장이다. 바닷가에 자리 잡은 오션프론트 레스토랑 ‘훌라 그릴’에서는 미식의 향연이 펼쳐진다. 대표 디저트인 마카다미아 넛 아이스크림과 초콜릿 쿠키 크러스트를 조합한 ‘훌라 파이’를 맛보는 동안, 창밖의 바다는 식사의 풍경까지 여행의 일부로 만든다. 해가 완전히 저물면 카아나팔리의 밤은 축제의 열기로 물든다. 해변 무대에서 펼쳐지는 ‘드럼스 오브 더 퍼시픽 루아우’에서는 하와이 전통 축제의 리듬이 이어진다. 쿵. 쿵. 쿵. 육중한 북소리와 함께 횃불이 밝혀지고, 무용수들은 훌라를 통해 바람과 파도,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어지는 불쇼는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지하 화덕 이무에서 오랜 시간 익힌 전통 돼지고기 요리 ‘칼루아 피그’까지 더해지면, 음악과 음식, 춤이 어우러진 하와이식 밤 풍경이 완성된다. 공연이 절정에 이르면 관객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리듬에 맞춰 춤을 추며 무대와 하나가 된다. 파도 소리와 불빛, 전통 음악이 어우러진 카아나팔리의 밤은 마우이에서 만나는 또 하나의 로맨틱한 순간으로 남는다. 마우이에서 시간의 속도를 늦추는 법을 배웠다면, 오아후섬에 도착하는 순간 하와이는 새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마우이 카훌루이 공항에서 비행기로 약 40분이면 닿는 이 섬은 자연 속 휴식이 중심인 마우이와 달리 도시의 활력과 문화의 에너지가 공존하는 곳이다. 고층 빌딩과 쇼핑몰, 레스토랑이 밀집한 호놀룰루는 하와이의 경제·문화 중심지다. 나단 정엽 리 한국하와이 마이스 팀장은 “오아후는 마우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적이고 역동적인 섬”이라며 “하지만 개발과 도시화 속에서도 자연 보전 원칙만큼은 엄격하게 지켜온 곳”이라고 설명했다. 오아후 북쪽에 자리한 카마나누이 과수원에서는 하와이의 또 다른 농업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카카오 나무 사이를 걷다 보면 나뭇가지에 럭비공 모양으로 매달린 카카오 열매가 눈에 들어온다. 농장 가이드 켈시가 잘 익은 열매를 반으로 가르자, 안쪽에는 하얀 과육에 둘러싸인 카카오 씨앗이 모습을 드러냈다. 쌉싸름한 초콜릿 맛을 예상했지만, 입안에 퍼진 것은 망고를 닮은 새콤달콤한 열대 과일의 향이었다. 이곳은 카카오 재배부터 발효, 건조, 로스팅, 초콜릿 제작까지 이어지는 ‘팜(농장) 투 초콜릿’ 과정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농장이다. 와이키키에서는 하와이의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새로운 무대가 펼쳐진다. 세계적인 서커스 예술단 태양의 서커스가 하와이에 선보인 상설 공연 ‘아우아나’다. 하와이어로 ‘새로운 여정을 떠나다’라는 의미를 담은 이 공연은 섬의 신화와 역사를 단순히 재현하는 대신, 공중 곡예와 퍼포먼스, 라이브 음악, 전통 훌라를 결합해 하와이 문화를 현대적인 예술로 풀어낸다. 공중으로 솟구치는 곡예사의 움직임과 무대를 가르는 음악이 이어지는 순간, 하와이의 오래된 이야기는 눈앞의 생생한 장면으로 되살아난다. 오아후 남동부 해안에 우뚝 솟은 레아히(다이아몬드 헤드)는 약 30만년 전 화산 폭발로 형성된 응회구로, 하와이를 대표하는 화산 지형이다.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약 1시간 안팎이면 충분하지만, 마지막 전망대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걸어 올라온 시간 이상의 여운을 남긴다. 가파른 계단과 터널을 지나 정상에 서면 와이키키 해변과 호놀룰루 도심, 끝없이 펼쳐진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온다. 19세기에는 군사 요충지로 활용됐던 이곳은 이제 여행자들이 하와이의 자연과 도시 풍경을 동시에 만나는 장소가 됐다. 특히 아침 햇살이 바다를 비추는 순간이나 해 질 무렵 붉게 물드는 능선은 오아후에서 만나는 가장 인상적인 풍경 중 하나다. 며칠 동안 마우이와 오아후를 오가며 만난 하와이는 풍경 그 자체보다, 그 앞에 오래 머물게 하는 힘을 가진 곳이었다. 화산이 빚은 대지와 바다, 원주민 문화가 어우러진 두 섬은 바쁜 일상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눈앞의 순간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석양이 내려앉은 호오키파 해변에서 바다거북 무리 사이를 천천히 걸어 나오던 어린 거북의 모습은 그 여정을 오래 기억하게 하는 장면이었다. 자연이 만든 풍경과 사람이 이어온 문화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어우러진 하와이는 오래도록 기억되는 로맨틱한 섬이다.
  • [훔치고 싶은 문장]

    [훔치고 싶은 문장]

    망명과 지성(권성우 지음, 소명출판) “당신이 작가라면, 당신이 밀도 깊은 문장, 치열한 문제의식, 깊고 넓은 지성의 시야, 통념을 자극하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갖출수록 당신의 작품이 안 팔리고 안 읽힐 가능성이 크다. …당신은 보상 없는 고립의 시간을 끝끝내 견딜 수 있는가. 이 시대에 당신이 진정한 의미에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위의 질문을 통과해야 한다.”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에 당선되며 등단한 저자가 오랫동안 품어온 문학적 화두, ‘망명’과 ‘지성’으로 작가를 조망하며 비평집을 냈다. 2016년 ‘비평의 고독’ 이후 10년 만에 낸 비평집에서 김석범, 김시종, 김학영, 서경식, 서준식 등 재일 한인 문인의 글쓰기를 ‘문학적 망명자’의 관점에서 탐구한다. 최인훈, 조세희, 현기영 등 현대문학의 주요 작가를 다루고, 2018년 작고한 비평가 김윤식을 집중 조명하는 등 한국 문학을 향한 다양한 시선을 모아 오늘 문학과 지성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456쪽, 2만 9000원. 백년의 정원사(김용철 지음, 달 출판사) “흔한 꽃이라도 그렇게 자리하면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이름 없는 꽃은 없다. 우리가 이름을 모를 뿐. 아름답지 않을 꽃은 없다.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모를 뿐이지.” 정원과 함께 사는 태도를 담은 에세이. 저자에게 정원은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체감하는 공간이자 잃어버린 생명의 리듬을 회복하는 장소다. 충남 청양군 덕암재는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심어진 목단과 어머니가 가꾸던 접시꽃이 남아 있는 ‘기억의 정원’이기도 하다. 잡초와의 전쟁을 벌이던 저자는 정원사 9년 차에 접어들며 “아름답지 않은 꽃은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렀다. 계절을 몸으로 살아낸 사람이 보내는 따뜻한 자연의 초대장 같은 책이다. 256쪽, 2만 2000원. 복숭아와 애벌레(안녕달 지음, 창비) “난 복숭아 밖도 보고/ 두 발로 걸어 보고/ 차가운 초콜릿도 씹어 먹어 보고/ 글씨도 써 봤어./ 글씨 쓰는 거 어렵지?/ 응, 너무 어려워서 머리가 아팠어./ 그래도 내가 쓰고 뿌듯해서 만져 봤어.” 한여름 대청마루에서 그림을 그리던 아이가 복숭아를 먹으려다 애벌레를 만났다. “복숭아를 온몸이 가득 차게 먹을 수 있는” 애벌레를 부러워하던 아이가 애벌레와 몸을 바꾸기로 했다. 아이는 복숭아 과육 속에서 신나게 놀고, 애벌레는 신기한 세상 구경을 했다. 외롭고 소외된 존재들을 다정하게 그려온 작가는 다른 존재의 삶에 스스럼없이 뛰어드는 어린이의 용기와 호기심을 매력적인 변신 서사로 풀어냈다. 상상은 단순한 놀이를 넘어 서로의 처지를 헤아리고 연대하는 과정이다. 72쪽, 1만 6800원.
  • 유산균 먹고 폭염·한파 견디는 장한 벌

    유산균 먹고 폭염·한파 견디는 장한 벌

    4~40도서 생존율 70% 이상 상승장 강화해 효소 생산 에너지 절감보충제 섭취량과 방어 효과 비례심각한 더위엔 환기·차광 더 중요 지구 온난화로 인해 여름 폭염, 겨울 한파가 매년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사람도 버티기 힘들지만 동물도 날씨의 변덕을 온몸으로 견뎌야 한다. 꿀벌의 경우 생체리듬과 서식 환경이 이상 고온과 한파 등 기후변화로 변하면서 폐사로 이어지곤 한다. 꿀벌은 날갯짓과 대사열, 물의 증발을 동원해 벌통 안을 34~36도로 정교하게 유지한다. 하지만 바깥 기온의 진폭이 조절 능력을 넘어서는 순간 극심한 열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이와 관련해 벌들의 장 건강을 챙겨주면 날씨 변화에 견디는 힘이 커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란 자볼대 식물보호학과, 이란 축산과학 연구소 꿀벌연구과, 캐나다 앨버타대 생명과학과 공동 연구팀은 장 건강에 도움을 주는 유익균 프로바이오틱스와 유익균의 먹이가 되는 성분인 프리바이오틱스를 함께 먹인 꿀벌이 온도 스트레스에서 견디는 능력과 생존율이 높아졌다고 밝혔다. 이 연구 결과는 미국 공공과학도서관에서 발행하는 국제 학술지 ‘플로스 원’(7월 16일 자)에 실렸다. 연구팀은 갓 우화(羽化·날개가 없던 곤충의 애벌레나 번데기가 날개를 가진 성충으로 탈바꿈하는 과정)한 일벌들에게 젖산균, 비피더스균 등 6종을 복합한 프로바이오틱스와 치커리 뿌리에서 추출한 프리바이오틱스 이눌린을 21일 동안 먹였다. 보충제 농도는 2.5~10g/ℓ까지 단계별로 나눠 투입했다. 이후 벌들을 4도, 15도, 35도, 40도에서 최대 열흘 동안 노출했고, 생존율과 항산화효소 활성을 측정했다. 극한 저온인 4도에서 아무것도 섭취하지 않은 꿀벌은 실험 종료 시점에 이를수록 빠르게 대부분 죽었지만 7.5g/ℓ 이상 고용량을 섭취한 꿀벌의 생존율은 70% 이상이었다. 중간 정도 저온인 15도에서는 최대 용량인 10g/ℓ을 섭취한 꿀벌들은 실험 종료 시점까지 80%가 넘는 생존율을 보였다. 연구팀에 따르면 보충제 농도가 높을수록 방어 효과가 커지는 소위 ‘용량 의존적 경향’도 나타났다. 온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벌 몸속에서는 활성산소가 늘고 이를 없애기 위해 카탈라아제·초과산화물 불균등화효소 같은 항산화효소를 동원한다. 보충제를 섭취하지 않은 벌들은 이 효소들의 활성이 크게 치솟았지만 보충제를 먹은 개체들은 오히려 효소 활성이 뚝 떨어졌다. 고온인 40도에서 일반 꿀벌은 보충제를 섭취한 꿀벌과 비교해 아스코르브산 과산화효소 활성이 2배 가까이 치솟았다. 유익균이 장 속에서 활성산소를 미리 제거하고 장벽을 튼튼하게 해준 덕에 벌의 몸이 효소를 쥐어짜낼 필요 자체를 줄인다. 효소를 만들어 유지하는 데 드는 막대한 에너지를 아낌으로써 스트레스 대응에 대한 부담을 줄였다는 것이다. 물론 유산균이 더위나 추위를 견디게 하는 데 만능은 아니었다. 40도의 극한 고온을 넘어서는 경우는 보충제 섭취 여부를 떠나 벌들은 사흘 내에 대부분 죽어버렸다. 고온이 단백질을 변성시키고 효소를 망가뜨리는 등 직접적 세포 손상을 가해 장 건강이 주는 이점을 압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구팀은 심각한 더위에는 영양 보충보다 벌통 환기, 차광 같은 물리적 대응이 1차 방어선이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이끈 나즈메 사헤브자데 이란 자볼대 교수는 “이번 연구는 벌의 장내 미생물을 돌보는 일이 기후변화로 인한 벌의 폐사를 막는 새로운 열쇠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 기초 연구에서 임상까지…의생명 발견 가속할 ‘AI 비서’ 등장

    기초 연구에서 임상까지…의생명 발견 가속할 ‘AI 비서’ 등장

    많은 사람이 실험실과 과학자라고 하면 피펫과 시약이 오가는 장면을 떠올린다. 전형적인 생명과학 실험실 풍경을 바꿀 혁신적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연구자가 지시만 내리면 AI가 스스로 유전자 가위 클로닝 프로토콜을 짜고, 액체 취급 로봇을 구동할 자동화 코드를 작성해 낼 수 있게 한다. 연구자들이 반복적 노동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가설 생성에 집중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 스탠퍼드대 컴퓨터과학과, 스탠퍼드대 의대 병리학과, 암 생물학 연구실, 소아과, 워싱턴대 컴퓨터과학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전기전자컴퓨터과학과, 프린스턴대 전기컴퓨터공학과, 생명과학 에이전틱 AI 개발사 사일로, 생명공학 기업 제넨텍, 아크 연구소, 레트로 바이오사이언스, 타마린드바이오 공동 연구팀은 다양한 의생명 연구를 자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범용 의생명 인공지능(AI) 에이전트 ‘비옴니’(BIomni)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이 연구 결과는 과학 저널 ‘사이언스’ 7월 10일 자에 실렸다. 현대 의생명 연구는 질병 기전, 진단, 치료제 개발을 이끌고 있지만 파편화되고 복잡한 작업 흐름 때문에 새로운 발견이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 대규모 실험, 데이터, 도구는 급증하고 있지만 이를 다룰 연구자 수는 턱없이 부족해 수많은 데이터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 연구팀이 개발한 비옴니는 의생명과학 분야 25개 하위 분야의 논문 2500여 편을 분석해 ‘행동 공간’을 통합적으로 구축했다. 행동 공간은 AI 에이전트가 의생명과학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자유롭게 꺼내 쓸 수 있는 가용한 모든 연구 도구와 자원의 총체를 뜻한다. 대형 언어 모델(LLM)을 기반으로 한 에이전틱 AI인 비옴니는 105개 소프트웨어 패키지, 150개 전문도구, 59개 데이터베이스가 통합돼 있다. 사전에 설정된 템플릿 없이도 검색 증강 계획과 코드 기반 실행을 통해 작업 흐름을 동적으로 구성한다. 성능 평가 결과 비옴니는 전문가 수준의 정확도를 유지하면서 작업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했다. 염기서열 분석을 통해 얻은 수만 개의 이름 모를 세포 데이터에 생물학적 이름표를 붙여주는 단일 세포 RNA 시퀀싱 주석 달기는 의생명과학 연구에서 필수적이지만 노동집약적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 전문가가 약 230분 걸리던 작업을 비옴니는 75분 만에 마쳤다. 희귀질환 진단은 약 3분, 전장유전체 연관분석(GWAS) 원인 유전자 탐지에서는 단 4분 만에 작업을 완료해 인간 전문가와 대등한 정확도를 입증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비옴니의 범용성은 웨어러블 센서 데이터를 활용한 코로나19 생리적 지표 및 생체리듬 분석, 다중 오믹스 데이터를 통한 인간 배아 골격계 세포의 유전자 조절 네트워크 분석, 단백질 열안정성 최적화, 액체 취급 로봇 구동을 위한 자동화 코드 생성까지 광범위한 임무를 자율적으로 완수함으로써 입증했다. 연구를 이끈 유레 레스코베츠 스탠퍼드대 교수는 “비옴니가 복잡하고 노동 집약적인 분석을 자동화함으로써 연구자들이 창의적인 가설 생성, 학제 간 협력에 노력을 집중할 수 있게 해줄 것”이라며 “이번 연구는 인공지능이 인간 과학자와 협력해 기초 연구부터 중개 연구까지 의생명 분야의 발견을 가속하는 연구 환경 변화의 이정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 결과에 대해 임수종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언어지능연구실장은 “이번 연구는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AI 과학자’(AI Scientist) 흐름을 대표하는 사례로 새로운 생명과학 전용 모델을 개발했다기보다, 대규모 언어모델이 문헌 검색, 데이터베이스 활용, 생명정보학 도구 실행, 코드 작성, 실험 프로토콜 생성까지 연구 전 과정을 하나의 워크플로우로 수행하도록 한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임 실장은 “비옴니는 연구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는 도움이 되는 연구 보조 플랫폼일 뿐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나 창의적인 가설 생성 능력이 충분히 입증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박종화 울산과학기술원(UNIST)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도 “연구팀에서 밝힌 것처럼 전문가 수준이라고 하는 것은 과장이다”라며 “AI 과학자가 좀 더 발전한다면 미래에는 AI는 반복 계산과 도구 조립을 맡고, 인간은 연구 개발의 방향·가치·철학 판단을 맡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 엄마 목소리가 에어컨보다 훌륭한 폭염 대비책? [달콤한 사이언스]

    엄마 목소리가 에어컨보다 훌륭한 폭염 대비책? [달콤한 사이언스]

    파리 협정에서는 지구 생태계 보전을 위해 산업화 대비 1.5도 상승을 마지노선으로 정했다. 그렇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연평균 기온이 1.5도를 넘는 경우가 자주 생기고 있다. 그러나 파리 협정에서 제시한 기준은 통상 20년 평균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아직 평균 1.5도를 넘지는 않은 상태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조만간 1.5도 상승은 기정사실이 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클렘슨대 생명과학과, 유전·생화학과, 스페인 도냐나 국립공원 생태·진화·생물다양성 보존 연구실, 호주 디킨대 생명·환경과학부, 영국 런던 퀸 메리대 생명·행동과학부 공동 연구팀은 어미 새가 아직 부화하지 않은 알 속 새끼에게 더위를 경고하는 ‘열 신호’를 전달함으로써 태어난 뒤 폭염에 잘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고 14일 밝혔다. 이 연구 결과는 생명과학 분야 국제 학술지 ‘실험 생물학 저널’ 6월 11일 자에 실렸다. 호주 사막에 사는 금화조(zebra finch)는 기온이 섭씨 26도 이상 올라 더워지면 알을 향해 특별한 소리를 낸다. ‘열 신호음’이라고 이름 붙인 이 소리는 빠르고 높은 리듬의 소리라서 평소 울음과는 구별된다. 알 속 새끼에게 ‘밖에 더우니 더위에 강한 몸을 준비하라’는 일종의 메시지로 실제로 알 속 새끼들은 이 소리를 들으면 부화 후 더위에 맞게 성장 속도와 행동이 바뀐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2016년에 처음 이런 현상이 발견된 뒤 지금까지 뇌와 유전자 수준에서 메커니즘이 연구되고 있다. 이번 연구팀은 부화 예정일을 며칠 앞둔 알 속 금화조 새끼에게 어미가 노래하는 듯 재잘대는 열 신호음을 녹음해 들려줬다. 이어 새끼가 부화하기 직전 뇌 표본을 채취해 부모의 열 신호음이 새끼 뇌에 어떤 변화를 만들었는지, 어떤 유전자가 영향을 받았는지 조사했다. 분석 결과 부모의 열 경고음은 세포 구조와 근육 수축에 관여하는 단백질인 ‘트로포미오신 1’을 만드는 유전자가 발생 중 새끼의 뇌에서 덜 활성화되는 것을 발견했다. 또 연구팀은 체내 과열 대응을 조절하는 뇌 시상하부를 살펴 봤는데 경고 노래가 시상하부 혈관 벽을 이루는 근육 속 유전자 활성을 바꿔 놓은 것이 확인됐다. 이 혈관은 혈액-뇌 장벽의 핵심 구성 요소를 이루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연구팀은 혈관이 부화 전에 완전히 성숙하는 것을 막아 혈관을 유연한 상태로 유지시킴으로써 새끼가 부화 후 폭염에 더 잘 적응할 수 있게 해준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이끈 줄리아 조지 미국 클렘슨대 교수는 “이번 연구는 어미의 열 신호음이 시상하부에서 호르몬을 형성하는 신경세포 자체를 바꾸기보다는 주로 혈관에 작용해 뇌 순환계가 열사병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라며 “이런 보호 효과는 새끼가 부화 후 마주할 환경을 부모가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 때 가능하기 때문에 최근 급격하게 변하는 기후 환경에서는 계속 작동 가능할지는 의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조지 교수는 “이번 연구는 기후변화 시대에 동물이 어떻게 적응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덧붙였다.
  • 여든, 한곳만 바라본 거장…여기, 한결같이 지킨 관객

    여든, 한곳만 바라본 거장…여기, 한결같이 지킨 관객

    80번째 생일·데뷔 70년 리사이틀나직이 담아 낸 슈베르트·브람스절제할수록 더 또렷해지는 음색“이젠 피아니스트라 말할 수 있어관객 한 분 한 분이 나의 수호천사” 앞서 달리지도, 무언가에 이끌리지도 않는 노(老)연주자에게서 예술을 대하는 태도를 배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형식에 집중한다. 차분한 리듬과 또렷한 음색으로 내면의 시(詩)를 소리로 표현한다. 그렇게 완성된 음악은 어딘지 영적인 구석이 있다. 무한을 향한 고조, 우주적인 떨림. 지난 10일 80번째 생일을 맞은 ‘건반 위의 구도자’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같은 날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팔순의 연주자에게서는 버거운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다만 피아노 앞에 앉아 평생에 걸쳐 탐구했던 음악이 어떤 것이었는지 나직이 들려줄 뿐이었다. 백건우의 선택은 슈베르트 그리고 브람스였다. 프란츠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3번’(1부)과 ‘피아노 소나타 20번’(2부) 그리고 요하네스 브람스 ‘4개의 발라드’(1부)가 연주됐다. 슈베르트의 작품이 두 곡이나 포함됐다. 백건우는 공연에 앞서 올해 탄생 80년과 데뷔 70년을 기념해 슈베르트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왜 슈베르트였을까. 백건우 자신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늘 내 안에 있었던 것, 내가 곡을 선택한 게 아니라 곡이 나를 선택했다”고 밝힌 바 있다.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3번’이 시작됐다. 아주 잠깐 들었을 뿐인데도 명징하고 우아한 음색의 힘이 느껴진다. 우수를 표현하는 것 같으면서도 대단히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또렷하게 다가올 뿐이었다. 감정을 완벽하게 통제한 예술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브람스 ‘4개의 발라드’에서 백건우는 형식과 감정의 관계를 질문하게 했다. 예술은 형식과 감정의 조화지만, 우리는 때때로 감정에 휩쓸린다. 백건우의 연주는 마치 ‘그럴 땐 형식에 집중해 봐’라고 말하는 듯했다. 인터미션 이후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20번’이 시작됐다. 한마디로 ‘쓸쓸함으로 충만했던’ 역설적인 연주였다. 절제된 연주 속에서 오히려 진한 감정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2악장에서 영혼을 건드리는 듯한 나직한 선율을 들려줬다면 3악장에서는 약동하는 생명의 힘을 느끼게 했다. 마치 새와 나비의 날갯짓에 질서를 부여하는 듯했다. 새삼 그의 별명이 ‘건반 위의 구도자’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의 연주는 한없이 차분하지만, 한발 한발 영적인 고양을 향해 나아가는 느낌을 줬다. 공연이 끝나고 앙코르 대신 조금 특별한 시간이 마련됐다. 커튼콜 중 열렬한 환호와 박수를 받은 백건우의 품에 꽃다발과 함께 편지가 주어졌다. 그는 자신의 ‘팔순 잔치’에 초대된 관객들에게 전할 말을 미리 준비한 듯했다. 백건우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소개할 때 늘 어색했는데, 오늘로서 팔십이 되니까 이제 ‘피아니스트 백건우’라고 해도 될 것 같아요. 80년은 짧고도 긴 시간입니다. 개인도, 나라도 겪어야 할 것도, 겪지 말아야 할 것도 많이 겪었지요. 우리는 늘 선택의 순간 앞에 서 있지요. 혹시 여러분은 수호천사를 믿습니까?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건 소리 없이 나타나지 않으면서 저를 지켜준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의 수호천사는 바로 여기에 계신 여러분 한 분 한 분입니다. 감사합니다.”
  • AI·자본 ‘가속’ 사회에서 ‘감속’을 외치다

    AI·자본 ‘가속’ 사회에서 ‘감속’을 외치다

    이재명 대통령이 후보 시절 ‘주가 5000 시대’를 연다고 했을 때 야당에서는 황당한 공약이라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올해 들어 종합주가지수가 무섭게 상승하면서 한때 코스피 6000을 돌파하기도 했다. 모든 삶의 가치가 주가 시세표로 환산되는 듯한 느낌까지 든다. 여기에 인공지능(AI) 기술은 인간을 위한 도구라기보다는 성장 가속화의 가속 페달이자 엔진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이론 전문 계간지 ‘문화/과학’ 125호(2026 봄호)는 ‘감속주의’를 주제로 특집을 마련하고 AI와 자본, 데이터가 인간의 리듬을 앞지르는 시대에 질주를 멈추고 공생의 리듬을 모색하자고 제안했다. 감속주의와 관련한 7편의 글은 가속의 순환 구조를 해체하고 돌봄과 호혜를 중심에 둔 생태주의적 체제 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국가 주도 AI 가속주의의 기술 환상을 타파하고, 기계적 합성에 저항하며 신체의 흔적을 새기는 인지적 감속주의 실천을 요구한다.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21세기 초가속 K-사회 비판: 감속주의적 전환과 생명 리듬의 회복’이라는 글에서 실용주의 정부가 강조하는 우상향 쾌속 성장 지표들은 일반 시민이 느끼는 삶의 행복이나 만족과는 꽤 거리가 멀다고 지적하며 “우리는 누구를 위한 어떤 성장을 욕망하고 있는가”를 물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는 AI 기술도 사회적 위험, 윤리적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AI 3대 강국’에 이르기 위한 국가 경쟁력 중심의 성장 속도 경쟁 문제로 축소한다고 비판했다. 가속주의는 특정한 정치·경제적 목적의 사회적 구성물이며, 인간 삶의 리듬과 관계, 생태를 희생시키며 유지하는 만큼 느림, 쉼, 회복의 생명 리듬을 문화사회의 공식적 가치로 재배치하고 ‘모두의 AI’와 같이 기술 약자의 인권과 생명권 접근을 구상해야 한다고 이 교수는 제안했다. 김현준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도 ‘AI 가속주의와 국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글을 통해 AI는 기술 만능주의와 발전주의적 기술 신화를 드러내는 물질적 행위자이자 담론이라고 강조했다. ‘AI는 국가 생존의 문제’,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등 한국 사회의 AI 가속주의 담론의 기저에는 1970~80년대 압축 성장과 발전 민족주의 향수가 짙게 배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은 발전 민족주의의 토대와 기억 위에서 신자유주의의 동력과 기술결정론을 통해 한국 특유의 테크노 내셔널리즘을 구축하는 모양새”라며 “가속 발전을 필연적 숙명으로 만드는 것은 AI나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핑계로 삼는 자본이고, 그에 대한 우리 사회와 국가의 욕망”이라고 비판했다.
  • 제주 바다가 허락한 길, 서건도를 걷다 [두시기행문]

    제주 바다가 허락한 길, 서건도를 걷다 [두시기행문]

    제주 서귀포 해안에는 하루 두 번, 바다가 길을 내어주는 특별한 섬이 있다. 서건도는 제주월드컵경기장 인근에 자리한 작은 섬으로, 썰물 때가 되면 바닷물이 양옆으로 물러나며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른바 ‘제주의 모세의 기적’이라 불리는 이 현상은 자연이 만들어낸 가장 신비로운 장면 가운데 하나로, 많은 이들이 그 순간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특히 서건도는 제주 올레길 7코스에 포함된 구간으로, 걷기 여행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장소다. 외돌개에서 시작해 월평포구까지 이어지는 이 코스는 제주 바다의 풍경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길로 꼽히는데, 그중에서도 서건도 구간은 자연이 만들어낸 특별한 체험이 더해지는 지점이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바다가 열리는 시간에 맞춰 섬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마주하게 되고, 여행의 흐름 속에서 또 하나의 장면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바다가 갈라지는 시간에 맞춰 해안에 서 있으면, 점차 드러나는 갯벌 위로 길이 이어지고 그 끝에 서건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좌우로 넓게 펼쳐진 갯벌은 많게는 10m 이상 드러나며, 사람들은 그 위를 따라 천천히 섬으로 향한다. 발밑에서는 조개와 낙지 같은 해산물을 만나는 재미도 있어 체험 관광지로서의 매력도 크다. 이 현상은 조수간만의 차가 큰 시기에 하루 2번 정도 나타나며, 특히 보름이나 그믐 무렵 사리 기간에 가장 극적으로 펼쳐진다. 때문에 방문 전 물때를 확인하는 것은 필수다. 서건도는 ‘썩은섬’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이는 섬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다 속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이 섬은 응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암석은 쉽게 부서지는 특징을 지녀 마치 썩은 바위처럼 보인다. 이러한 특성에서 ‘썩은섬’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이후 발음이 변형되며 오늘날의 서건도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작은 규모의 섬이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은 깊다. 서건도에서는 기원전 1세기경으로 추정되는 토기 파편과 동물 뼈, 주거 흔적이 발견되며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드나들던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섬 북쪽과 남쪽이 서로 다른 화산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질학적으로도 의미 있는 장소로 평가된다. 바다 위에 놓인 화산탄과 층리를 이루는 퇴적층은 이곳이 자연의 형성 과정을 고스르히 간직한 현장임을 말해준다. 섬 주변의 풍경 또한 다채롭다. 조이통물에서 흘러나온 담수가 바다와 만나는 조간대 ‘너븐물’은 다양한 생물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이루며, 때로는 이 앞바다에 돌고래 떼가 나타나기도 한다. 자연의 변화와 생명의 흐름이 동시에 느껴지는 곳이다. 현재 서건도는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가볍게 둘러보기에도 좋다. 올레길을 걷다 잠시 방향을 틀어 섬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길 위로 돌아오는 경험은 이 구간만의 특별한 매력이다. 바닷길이 열리고 닫히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건도는 단순한 목적지가 아니라 자연의 리듬을 직접 체감하게 하는 하나의 장면으로 남는다. 짧은 거리, 작은 섬이지만 그 안에서 만나는 풍경과 경험은 결코 가볍지 않다. 서건도는 걷는 여행 속에서 우연처럼 마주하는 기적 같은 공간이며, 제주 바다가 건네는 가장 인상적인 순간 중 하나로 오래 기억된다.
  • 쓰레기 수레에 매인 순종마, 로트레크 [이명옥의 예술가의 명언]

    쓰레기 수레에 매인 순종마, 로트레크 [이명옥의 예술가의 명언]

    유전적 취약성과 사고로 단신의 삶사회 편견의 감옥에서 살았지만회화 통해 동시대 진실 포착 증언그림만큼은 어떤 틀에 가두지 않아“모든 갇힌 것은 죽는다” 그의 말영원의 생명력 가지고 아직 생생 수많은 예술작품 가운데 어떤 작품이 시대를 넘어 불멸의 걸작으로 남게 되는 것일까? 영국의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는 저서 ‘명화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명화란 한 시대가 요구하는 주제를 천재예술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깊이 있게 담아내어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감동을 주는 예술작품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문구는 시대가 요구하는 주제, 즉 시대정신이다. 명화는 한 시대의 사회와 경제, 문화적 변화를 담아내는 시각적 기록이기 때문이다. 시대정신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포착한 예술가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1864~1901)를 빼놓을 수 없다. 로트레크가 남긴 편지와 주변 인물들의 증언은 그가 시대를 기록한 관찰자이자 인간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첫 번째 명언 “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며 논평하지 않는다. 나는 기록한다.” 로트레크의 예술세계로 들어가는 첫 문장은 그의 가장 유명한 선언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미술아카데미는 고전적이고 역사적인 주제를 기술적으로 완벽하고 아름답게 묘사한 그림을 요구했다. 반면 로트레크에게 회화란 동시대의 진실을 포착하고 증언하는 기록 행위였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19세기 말 프랑스 파리가 누렸던 풍요로운 황금기인 벨 에포크의 화려한 조명 뒤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로 향했다. 그의 그림 속에는 몽마르트르의 술집 손님들, 카바레와 댄스홀 무대 뒤에서 지친 몸을 추스르던 무희와 가수, 성노동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편견 없는 관찰자로서 삶의 진실을 기록하고자 했던 그의 예술철학은 대표작 ‘물랭루주에서’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은 1889년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 아래 문을 연 카바레 물랭루주의 내부를 배경으로 화려하면서도 퇴폐적인 밤 문화를 생생하게 펼쳐 보인다. 화면 속 테이블 주변에는 당대 유명 댄서인 제인 아브릴을 비롯한 단골손님들이 앉아 있다. 화면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초록빛 인공조명을 받아 창백하고도 괴기한 얼굴로 떠오르는 가수 메이 밀턴이 등장한다. 당시 물랭루주를 비롯한 카바레들은 가스등 대신 새로운 문명의 상징인 전기 조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로트레크는 강렬한 전기 조명이 인물의 얼굴에 반사되어 피부색을 초록빛으로 변형시키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인공 빛이 만들어 내는 낯설고도 몽환적인 효과를 통해 화려한 표면 아래 피로와 긴장, 쾌락과 허무함이 뒤섞인 유흥가 밤의 민낯을 보여 주었다. 흥미로운 점은 화면 한가운데 로트레크 자신도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곳의 단골손님이자 관찰자로서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장면을 화폭에 담아내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기법적으로도 이 작품은 매우 혁신적이다. 화면을 과감하게 잘라내고 인물을 비대칭적으로 배치한 대각선 구도, 강렬한 윤곽선과 평면적인 색면구성은 당시 유럽 예술계를 매료시킨 일본 우키요에 판화의 영향을 보여 준다. 그는 이 작품에서 물랭루주를 낭만적으로 미화하지도 퇴폐적이라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냉철한 관찰자적 시선으로 떠들썩한 향락 속에서도 불안과 공허가 감도는 카바레의 현장 분위기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두 번째 명언 “자기 자신을 견딜 줄 알아야 한다.” 이 말은 로트레크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붙들어야 했던 생존의 문장이다. 그는 남프랑스 알비의 유서 깊은 명문 귀족 툴루즈 로트레크 가문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부와 명예가 약속된 화려한 삶이었지만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적 취약성에 어린 시절 겪은 두 차례의 골절 사고가 겹치며 그의 키는 성인이 되어서도 152㎝에 머물렀다. 사냥과 승마, 귀족적 기품을 삶의 중심에 두었던 아버지 알퐁스 백작은 신체적 장애를 지닌 아들을 가문의 수치로 여기며 냉대했다. 로트레크는 야외 활동과 사교적 활동에 제약이 따르는 현실 속에서 그림에 몰두하며 또 다른 삶의 출구를 찾았다. 지역 미술교사 르네 프린세토에게 수업을 받으며 익힌 그림은 상처 입은 자아를 치유하는 마음의 피난처가 되었다. 차가운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 아델 백작부인은 외아들에게 아낌없는 사랑과 전폭적인 경제적 지원을 보냈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보호에 힘입어 예술가의 꿈을 키운 그는 열일곱 살에 파리로 향했다. 이듬해 그는 국립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해 전통적인 회화 기법의 기초를 다졌고 1884년에는 몽마르트르에 자신만의 화실을 마련하게 된다. 학교에서 정교한 데생과 기법을 배웠지만 인간의 다양한 표정과 군중의 심리를 읽는 방법은 길거리와 카바레에서 배웠다. 무엇보다 몽마르트르는 로트레크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기 자신을 견디는 법을 깨닫게 해 준 장소였다. 그는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며 하루를 버텨 내는 생의 끈질긴 생명력을 읽어 냈다. 이러한 그의 시선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 ‘물랭루주에서 나온 잔 아브릴’이다. 화면 속 여성은 물랭루주를 주름잡던 스타 무희 잔 아브릴이다. 로트레크는 무대 위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순간보다 공연의 열기와 조명이 사라진 뒤 어두운 밤거리를 쓸쓸히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에 시선을 맞춘다. 잔 아브릴의 표정과 자세에는 밤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피로와 권태, 현실의 고단함이 배어 있다. 그는 그녀를 눈부신 스타로 이상화하지도, 유흥의 상징으로 소비하지도 않는다. 대신 박수와 환호가 끝난 뒤 다시 홀로 자기 자신을 견뎌야 하는 고독한 인간으로 바라본다. 이 작품은 그가 왜 밤의 환락가에서 살아가는 이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고 왜 그들의 삶을 그토록 깊이 이해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는 추하거나 불완전해 보이는 모습 속에서도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는 존재들 안에서 인간의 진실을 읽어 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향락의 기록을 넘어 상처 입은 존재들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 기록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명언 “포스터, 그것이 전부다.” 이 말은 로트레크가 광고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선구자였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에는 광고나 디자인을 예술의 한 분야로 받아들이지만 당시에는 회화와 조각 같은 고급 미술과 광고나 디자인 같은 상업미술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었다. 로트레크는 그 장벽을 허문 최초의 예술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몽마르트르 밤 문화의 홍보 수단에 불과했던 포스터를 석판화라는 매체를 통해 독립적인 예술의 형식으로 끌어올렸다. 19세기 말 파리는 유흥가의 급격한 성장과 함께 광고 산업과 인쇄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던 시기였다. 포스터는 유흥가에서 펼쳐지는 공연에 대한 기대와 입소문을 만들어 내는 가장 효과적인 시각 매체로 떠올랐다. 카바레와 무도장, 음악당들은 더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치열한 광고 전쟁을 벌였다. 로트레크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누구보다 먼저 읽어 낸 화가였다. 그에게 포스터는 미술관이나 갤러리라는 닫힌 공간을 벗어나 대중과 직접 만나고 소통하는 살아 있는 길거리 예술이었다. 그는 누구나 미술을 쉽게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포스터 제작에 쓰이는 석판화 인쇄술에 남다른 열정을 쏟으며 인쇄기법의 표현 가능성을 끊임없이 실험했다. 그 결과 그의 포스터는 상업 광고의 목적을 달성하면서도 높은 수준의 예술적 완성도를 지니게 되었다. 강렬한 색면, 과감한 구도, 날카롭게 포착된 실루엣은 멀리서도 대중의 시선을 단숨에 붙잡았고 공연 분위기와 인물의 독특한 개성까지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전달했다. 로트레크의 천재성이 가장 강렬하게 발휘된 작품이 ‘물랭루주: 라 굴뤼’다. 그가 물랭루주를 위해 제작한 첫 번째 포스터이자 하룻밤 사이에 파리에서 가장 주목받는 포스터 작가로 떠오르게 한 기념비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전경을 과감하게 가로지르는 독특한 검은 실루엣이다. 바로 스타 남성 무용수 발랑탱 르 데조세의 옆모습으로 길고 유연한 몸의 선이 화면 전체에 강한 리듬감을 만들어 낸다. 그 뒤편 중앙에는 물랭루주의 인기 여성 무용수 라 굴뤼가 흥겨운 음악에 맞춰 특유의 캉캉 춤을 선보이고 있다. 배경에 자리한 관객들의 검은 실루엣은 중절모와 장식 모자를 통해 부르주아 관객층을 암시하며 밝게 빛나는 무대와 어둡게 가라앉은 객석을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로트레크는 노랑과 빨강, 검정이 이루는 강렬한 색면 대비와 대담한 실루엣을 통해 감상자가 실제 공연장에 있는 듯한 현장감과 공간감을 만들어 냈다. 또한 화면 상단에 ‘물랭루주’라는 상호를 세 차례 반복해 배치한 점도 매우 인상적이다. 광고로서의 기능을 분명히 하면서도 동시에 화면 전체에 시각적 리듬과 역동성을 부여했다. 1891년 12월 이 포스터 3000장이 파리 거리에 붙자 시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얼마나 인기가 대단했던지 밤마다 사람들이 광고판에서 몰래 포스터를 뜯어내 집으로 가져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생애 동안 31점의 포스터를 남긴 로트레크는 아트 포스터의 시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로트레크는 “나는 매일 저녁 일하러 술집에 간다”고 말할 만큼 술과 여자, 파리의 밤을 사랑했다. 밤의 카페에 앉아 피곤과 권태가 배어 있는 표정으로 술잔을 마주한 두 남녀를 그린 ‘카페 라미에서’는 화려하면서도 퇴폐적인 밤 문화가 그에게 영감의 원천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한 시대의 빛과 그림자를 집요하게 응시했던 로트레크의 삶은 동시에 스스로를 서서히 갉아먹는 시간이기도 했다. 파리 유흥가에서의 방탕한 생활과 과도한 음주, 그를 오래도록 괴롭히던 병마는 몸을 빠르게 쇠약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는 1901년 9월 9일 서른일곱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로트레크는 자신의 귀족적 혈통과 장애를 지닌 신체를 대비시키며 스스로를 “쓰레기 수레에 매인 순종마”로 비유할 만큼 사회의 편견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나 자신의 그림만큼은 어떤 틀에도 가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남긴 마지막 문장이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모든 갇힌 것은 죽는다.” 이명옥 사비나 미술관장
  • 르누아르가 남긴 행복의 문장들[이명옥의 예술가의 명언]

    르누아르가 남긴 행복의 문장들[이명옥의 예술가의 명언]

    19세기말 사실주의·자연주의 유행당대 작가들은 어두운 이면 폭로 르누아르 “세상은 이미 골치 아파 예술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소신붓을 든 ‘행복의 호르몬’ 역할 자처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는 행복을 그린 화가로 불린다. 실제로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마음이 즐겁고 편안해진다. 이런 감정은 기분 때문만은 아니다. 영국의 신경생물학자 세미르 제키는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우리 뇌의 특정 영역으로 흐르는 혈류량이 최대 10%까지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맛있는 음식을 볼 때처럼 뇌의 보상 회로가 활성화되면서 행복 호르몬으로 불리는 도파민이 분비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르누아르는 어떻게 관람자의 뇌를 사랑에 빠뜨리는 그림을 평생 그릴 수 있었을까. 대답은 르누아르가 남긴 편지와 그의 아들 장 르누아르의 회고록, 그의 화상이자 전기 작가였던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저서 ‘르누아르’에서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명언 “나에게 그림은 소중하고 즐겁고 예쁜 것이어야 한다.” 이 문장은 르누아르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르누아르가 활동하던 19세기 말은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예술사조가 유행하던 시대였다. 많은 예술가들이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폭로하는 것을 일종의 의무처럼 여겼다. 사회적 모순을 작품으로 고발해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서도 르누아르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에게 그림은 삶의 고단함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쉼터여야 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미 세상에는 골치 아픈 일이 충분히 많은데 굳이 예술가까지 나서서 불쾌한 일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낼 필요는 없다. 회화는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런 그의 생각은 그림의 장식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 배경과도 연결된다. “나는 벽을 즐겁게 해주는 그림을 선호한다”는 그의 말처럼 벽에 걸린 그림을 보고 잠시라도 기분이 좋아진다면 그것이 곧 예술의 역할이라고 믿었다. 이런 르누아르의 예술관은 대표작은 ‘뱃놀이 일행의 점심’에서 완벽하게 구현된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빈부 격차로 인한 불안과 긴장이 커지고 있었지만 화면 어디에서도 현실의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다. 그림 속 장면은 파리 시민들의 인기 나들이 장소였던 파리 근교 샤투에 위치한 메종 푸르네즈 식당의 발코니다. 르누아르는 14명의 젊은 남녀가 한낮의 햇살 아래 모여 음식과 와인, 이야기와 웃음을 나누는 화기애애한 순간을 포착했다. 화면 왼쪽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강아지를 어르고 있는 여성은 훗날 르누아르의 아내가 되는 알린 샤리고다. 의자를 돌려 앉아 편안한 자세로 대화하는 남성은 인상주의 화가 귀스타브 카이유보트다. 그 밖에도 여배우, 언론인, 상인 등 다양한 사회 계층과 직업군을 대변하는 젊은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르누아르는 이들이 점심을 먹으며 허물없이 교류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이 꿈꾸던 삶의 기쁨과 조화로운 공동체를 화폭에 담아냈다. 차양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한낮의 햇살, 식탁 위 술병과 유리잔에 반짝이는 투명한 빛, 와인과 대화로 달아오른 사람들의 발그레한 뺨까지 인상주의 특유의 밝은 색채와 자유로운 붓 터치를 사용해 화면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덕분에 관람자는 시원한 강바람이 부는 발코니에 함께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듯한 기분 좋은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놀라운 점은 파리 시민들의 행복한 여가 생활을 담은 그림과는 달리 르누아르의 실제 삶은 오랫동안 가난으로 얼룩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르누아르는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청년 시절에는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는 화공으로 일하며 지독한 궁핍을 견뎌야 했다. 그가 30대 중반이었을 때 인상주의 전시가 잇따라 실패하고 비평가들의 혹평이 쏟아지면서 경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는 너무 배고픈 나머지 목탄화를 지울 때 쓰던 빵 부스러기(당시에는 지우개 대신 빵을 사용)를 먹었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훗날 르누아르는 춥고 배고팠던 시절을 떠올리며 “한 자루의 말린 콩이면 한 달을 버틸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시카고 미술관의 연구에 따르면 르누아르는 새 캔버스를 살 돈이 없어 이미 그려진 그림 위에 다시 덧칠해 재사용하는 경우가 흔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인상주의 화가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매일 먹지는 못하지만 나는 여전히 즐겁네.” 이때나 그 이후에도 그는 단 한 번도 피로나 걱정, 우울과 같은 어두운 감정을 화면에 옮기지 않았다. 두 번째 명언 “신이 여성의 가슴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내가 화가가 되었을지 모르겠다.” 다소 파격적으로 들리는 이 말은 르누아르의 작품 세계에서 행복만큼이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 주제가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그에게 여성은 아름다움과 창조의 근원이었다. 그는 여성의 몸이 지닌 부드러운 곡선과 빛을 머금거나 반사하는 투명한 피부에서 무한한 회화적 가능성을 발견했다. 특히 여체를 그릴 때 조각가가 점토를 빚듯 붓으로 살결을 어루만지는 듯한 촉각적 질감을 화면에 구현하고자 했다. 그는 화상 볼라르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성의 엉덩이를 그렸을 때 그것을 만지고 싶은 욕구가 생기면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더 나아가 “나는 내 붓으로 사랑을 나눈다”며 누드화 작업을 성적 행위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말은 육체적 쾌락보다는 생식과 풍요, 자연의 순환과 연결된 건강한 에너지를 의미한다. 그는 몽마르트르의 평범한 모델들을 신화 속 여신 비너스처럼 묘사했다. 일상의 누드 속에서 고전미의 원형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구현하고자 했다. ‘금발의 목욕하는 여인’은 여성의 몸이 그의 창조적 에너지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금발의 여인은 알린 샤리고다. 자연 속에 편안히 기대어 앉은 그녀의 풍만한 몸은 다산과 풍요, 영원한 여성성을 상징한다. 이 누드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붓자국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매끄럽게 마감된 살결의 질감이다. 살이 눌리고, 접히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미묘한 굴곡과 빛을 머금은 듯 투명한 피부의 맑은 기운이 화면에서 생생하게 전해진다. 그림 속 여성 누드는 더이상 수치심이나 관음의 대상이 아니다. 르누아르는 이 작품을 통해 여성의 벗은 몸이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생명체라는 것을 보여 줬다. 세 번째 명언 “고통은 지나가도 아름다움은 남는다.” 이 말은 1917년 12월께 르누아르와 야수파의 거장 앙리 마티스의 대화에서 나왔다. 삶의 행복을 담은 르누아르의 그림들이 처절한 육체적 고통 끝에 얻어진 결실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증언이다. 젊은 시절 마티스는 노년의 르누아르를 당대 최고의 화가로 우러르며 그의 집을 정기적으로 찾아가 자신의 근작을 보여 주며 조언을 구하곤 했다. 르누아르는 마티스의 파격적인 화풍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뛰어난 색채 감각만큼은 누구보다 높이 평가하며 진심으로 격려했다고 전해진다. 그 무렵 마티스가 목격한 르누아르의 일상은 육체와의 전쟁터였다. 1890년대부터 시작된 류머티즘 관절염은 그의 관절을 서서히 파괴해 갔다. 특히 화가에게 생명과도 같은 손은 엄지가 손바닥 안쪽으로, 다른 손가락들은 손목 쪽으로 굽어 들어가 새의 발톱처럼 변형되었다. 마침내 걷는 것조차 불가능해져 결국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다. 손과 팔의 강직은 화가에게 치명적 위협이었지만 르누아르는 그런 상태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굳어버린 손가락 사이로 붓을 억지로 끼워 묶고 붓질 한 번 할 때마다 신음이 새어 나오는 노화가의 모습을 마티스는 곁에서 지켜보았다. 결국 참다 못한 마티스가 이렇게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고통을 겪으면서도 계속 그림을 그리십니까?” 그러자 르누아르는 붓질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했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네.” 르누아르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매달렸던 유작 ‘음악회’는 고통을 이겨내고 인류에게 아름다움과 기쁨을 선물하고자 했던 그의 투쟁의 결과물이다. 이 작품에는 이국적인 의상을 입은 두 여인이 등장한다. 한 여인은 악기를 연주하고 다른 한 여인은 그녀에게 부드럽게 몸을 기대어 깊은 친밀감을 표시한다. 어릴 적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했던 르누아르에게 음악은 조화와 평화를 의미한다. 그는 관절이 굳어가는 통증 속에서도 어릴 적 성가대에서 느꼈던 평온한 안식을 캔버스에 담았다. 그에게 그림은 고통을 잊게 해 주는 진통제이자 평생 갈망하던 조화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마지막 통로였다. 르누아르의 그림은 언뜻 보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그린 것 같은 가벼움과 자연스러움을 풍긴다. 그러나 작품 한 점을 완성하는 데 수십 년에 걸친 연습과 실패, 고통을 견뎌낸 인내가 농축되어 있다. 이를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그의 고백이 있다. “이 드로잉을 완성하는 데 5분이 걸렸지만 여기에 도달하는 데 60년이 걸렸다.” 그의 걸작 ‘조르주 샤르팡티에 부인과 자녀들’을 감상하면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목한 상류층 가족을 그린 초상화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부인과 그 옆에 나란히 앉은 두 아이, 소파와 카펫, 개까지 한순간 포착된 장면을 스냅사진처럼 자연스럽게 캔버스에 옮겨 놓은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물들의 시선과 자세가 만들어 내는 정교한 삼각 구도, 부인의 검은 드레스와 아이들의 흰 드레스가 이루는 선명한 색채 대비, 화면 전체에 흐르는 우아한 리듬까지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관람자가 느끼는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은 그가 창작에 바친 긴 세월과 치열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19년 12월 3일 행복과 아름다움에 평생을 바쳤던 르누아르가 숨을 거두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중 하나는 이렇게 전해진다. “이제야 무언가를 좀 알 것 같다.” 그의 말은 이렇게도 들린다. “평생을 바쳐 행복과 아름다움을 그리기 위해 애써 왔지만 이제야 그림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이명옥 사비나 미술관장
  • 속도를 멈춘 순간, 근대가 드러났다

    속도를 멈춘 순간, 근대가 드러났다

    질주 대신 멈춤을 그린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1864-1901)이 활동하던 19세기 말 파리는 급격히 변모하는 도시였다. 말은 여전히 경마와 마차, 군사의 중심에 있었지만, 더 이상 영웅과 함께 기억되는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로트렉은 경마장의 말을 그리면서도 승리의 순간이나 장엄한 기마 장면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대기 중인 말, 고개를 숙인 말, 지친 말을 선택했다. 이는 말이 귀족이나 영웅의 위엄을 상징하는 존재에서, 근대 도시를 구성하는 일상적 존재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로트렉의 말은 이상화된 자연이 아니라, 도시에서 인간의 리듬에 맞춰 살아가는 생명체였다. ●무대 뒤편의 초상 ‘백마 가젤’은 경마장을 배경으로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경주마의 이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가젤은 결승선을 향해 질주하지도, 군중의 환호를 받지도 않는다. 화면 속 말은 마굿간에서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서 있다. 로트렉은 경주마의 기록이나 승부가 아니라, 말의 휴식 시간을 선택했다. 흰 말은 순수나 숭고함의 상징이 아니라, 빛 아래 그대로 노출된 나약한 존재로 그려졌다. 빠른 선과 절제된 배경, 다리의 과감한 생략은 말의 근육과 골격을 설명하기보다, 순간의 인상을 전달한다. 말은 더 이상 영웅을 태우고 전장을 누비는 존재가 아니라, 근대적 시각 경험 속에서 소비되는 존재였다. ●경마, 사교의 장 19세기 후반 파리에서 경마는 이미 잘 확립된 대중적 오락이자 상류층 사교의 장이었다. 대표적인 경마장으로는 롱샹과 오퇴유, 뱅센 등이 있었다. 롱샹 경마장은 1857년 조성되어 빠르게 파리 상류 사회의 여름 사교 행사로 자리 잡았다. 특히 파리 그랑프리 같은 주요 경주는 1863년부터 매년 열리며 귀족과 부르주아를 불러 모았다. 당시 기수와 말들은 영국식 경마 전통을 반영했으며, 관중은 레이스 자체보다도 사회적 만남과 패션 과시를 즐겼다. 경마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사회적 행사이자 축제적 성격을 띠었다. 상류층은 정장을 차려입고 경마장에 모여 한나절을 보내며, 말과 기수의 질주뿐 아니라 사람들의 교류와 여행 같은 여가 생활을 즐겼다. 특히 롱샹에서 열리는 경주는 당시 파리 벨 에포크 시대 사교계의 중요한 일정이었다. 이는 경마가 단지 스포츠가 아니라 사회적 현상과 도시 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했음을 보여준다. ●말이 남긴 근대 도시의 얼굴 이 작품에서 말의 다리는 드러나 있지 않다. 가젤은 언제든 달릴 수 있는 신체를 가졌지만, 지금은 대기하고 있다. 질주보다 준비, 승리보다 정지의 순간이 강조됐다. 기수와 관중은 화면에서 사라졌거나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는 말이 인간의 소유물이나 도구라는 인식을 약화시킨다. 로트렉의 말은 인간보다 더 차분하고 묵직하게 존재하며, 근대 도시의 시간 속을 묵묵히 견딘다. 이 그림은 말의 초상이자, 화려한 오락 산업 뒤편에서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서글픈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로트렉은 말을 통해, 근대 도시를 살아가는 또 다른 얼굴을 조용히 드러냈다. 경마장은 화려한 무대이지만, 로트렉의 시선은 무대 뒤편을 향한다.
  • 속도를 멈춘 순간, 근대가 드러났다 [으른들의 미술사]

    속도를 멈춘 순간, 근대가 드러났다 [으른들의 미술사]

    질주 대신 멈춤을 그린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1864-1901)이 활동하던 19세기 말 파리는 급격히 변모하는 도시였다. 말은 여전히 경마와 마차, 군사의 중심에 있었지만, 더 이상 영웅과 함께 기억되는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로트렉은 경마장의 말을 그리면서도 승리의 순간이나 장엄한 기마 장면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대기 중인 말, 고개를 숙인 말, 지친 말을 선택했다. 이는 말이 귀족이나 영웅의 위엄을 상징하는 존재에서, 근대 도시를 구성하는 일상적 존재로 이동했음을 보여준다. 로트렉의 말은 이상화된 자연이 아니라, 도시에서 인간의 리듬에 맞춰 살아가는 생명체였다. ●무대 뒤편의 초상 ‘백마 가젤’은 경마장을 배경으로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경주마의 이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가젤은 결승선을 향해 질주하지도, 군중의 환호를 받지도 않는다. 화면 속 말은 마굿간에서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서 있다. 로트렉은 경주마의 기록이나 승부가 아니라, 말의 휴식 시간을 선택했다. 흰 말은 순수나 숭고함의 상징이 아니라, 빛 아래 그대로 노출된 나약한 존재로 그려졌다. 빠른 선과 절제된 배경, 다리의 과감한 생략은 말의 근육과 골격을 설명하기보다, 순간의 인상을 전달한다. 말은 더 이상 영웅을 태우고 전장을 누비는 존재가 아니라, 근대적 시각 경험 속에서 소비되는 존재였다. ●경마, 사교의 장 19세기 후반 파리에서 경마는 이미 잘 확립된 대중적 오락이자 상류층 사교의 장이었다. 대표적인 경마장으로는 롱샹과 오퇴유, 뱅센 등이 있었다. 롱샹 경마장은 1857년 조성되어 빠르게 파리 상류 사회의 여름 사교 행사로 자리 잡았다. 특히 파리 그랑프리 같은 주요 경주는 1863년부터 매년 열리며 귀족과 부르주아를 불러 모았다. 당시 기수와 말들은 영국식 경마 전통을 반영했으며, 관중은 레이스 자체보다도 사회적 만남과 패션 과시를 즐겼다. 경마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사회적 행사이자 축제적 성격을 띠었다. 상류층은 정장을 차려입고 경마장에 모여 한나절을 보내며, 말과 기수의 질주뿐 아니라 사람들의 교류와 여행 같은 여가 생활을 즐겼다. 특히 롱샹에서 열리는 경주는 당시 파리 벨 에포크 시대 사교계의 중요한 일정이었다. 이는 경마가 단지 스포츠가 아니라 사회적 현상과 도시 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했음을 보여준다. ●말이 남긴 근대 도시의 얼굴 이 작품에서 말의 다리는 드러나 있지 않다. 가젤은 언제든 달릴 수 있는 신체를 가졌지만, 지금은 대기하고 있다. 질주보다 준비, 승리보다 정지의 순간이 강조됐다. 기수와 관중은 화면에서 사라졌거나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는 말이 인간의 소유물이나 도구라는 인식을 약화시킨다. 로트렉의 말은 인간보다 더 차분하고 묵직하게 존재하며, 근대 도시의 시간 속을 묵묵히 견딘다. 이 그림은 말의 초상이자, 화려한 오락 산업 뒤편에서 보이지 않게 작동하는 서글픈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로트렉은 말을 통해, 근대 도시를 살아가는 또 다른 얼굴을 조용히 드러냈다. 경마장은 화려한 무대이지만, 로트렉의 시선은 무대 뒤편을 향한다.
  • 거꾸로 놓인 풍경화가 열어준 추상의 문 [이명옥의 예술가의 명언]

    거꾸로 놓인 풍경화가 열어준 추상의 문 [이명옥의 예술가의 명언]

    미술사에서는 20세기 미술을 구축한 세 명의 거장을 묶어 ‘현대미술의 삼각편대’라고 부른다. 형태를 해체해 세계의 구조를 새롭게 읽어낸 피카소, 색채를 해방해 감각의 기쁨을 확장한 마티스, 대상을 지워버리고 순수 추상의 문을 연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다. 흥미로운 사실은 추상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칸딘스키가 30세가 될 때까지 화가가 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모스크바대에서 법과 경제를 공부했던 그는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아 대학 정교수직까지 제안받은 지식인이었다. 매우 유능한 법학자였던 그가 어떻게 추상화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을까. 칸딘스키가 남긴 저서와 명언을 길잡이 삼아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을 따라가 보자. 첫 번째 명언 “대상은 그림을 해친다” 이 문장은 추상미술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다. 칸딘스키는 구체적 형상이 관람자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영혼의 깊은 울림을 방해한다고 보았다. 우리는 그림 앞에 서면 무의식적으로 대상을 먼저 찾아내곤 한다. “이건 사과네”, “저건 사람이구나” 하고 말이다. 이렇게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맞히는 데 집중하는 동안 정작 중요한 색채의 울림이나 선의 리듬 같은 순수한 조형적 아름다움을 놓치게 된다. 칸딘스키가 “대상은 그림을 해친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대상을 점·선·면 등 조형 요소로 표현 그렇다면 추상이란 무엇일까. 추상은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된 본질이나 핵심 특성을 뽑아내어 파악하는 것을 뜻한다. 미술에서 추상은 현실의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점·선·면·색과 같은 순수한 조형 요소로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을 말한다. 칸딘스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서양 미술사에서 최초로 추상의 영역을 개척했다는 점이다. 물론 동시대에도 힐마 아프 클린트처럼 추상적 시도를 한 작가들이 있었다. 칸딘스키가 특별한 이유는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와 같은 저술을 통해 추상미술을 체계적 이론으로 정립했다는 점이다. 오직 선과 색의 유희만으로 구성된 이 그림 ‘무제’(첫 번째 추상 수채화, 도판 1)은 최초의 순수 추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제 시계를 되돌려 성공 가도를 달리던 서른 살의 법학자가 왜 갑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붓을 들게 되었는지 세 가지 결정적인 사건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첫 번째 계기는 1889년 칸딘스키가 모스크바대 의뢰로 떠난 러시아 볼로그다 지방의 민족지학 탐사 여행 중에 일어났다. 그가 한 농가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것은 생활 공간을 가득 메운 화려한 장식과 성화(聖畵)들이 만들어내는 색채의 향연이었다. 그는 훗날 이때의 경험을 이렇게 회상했다. “마치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1896년 그의 인생을 뒤흔드는 두 번째 계기가 찾아온다. 칸딘스키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프랑스 미술 전시회를 방문했다가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의 연작 중 하나인 ‘건초더미’ 앞에 서게 된다. 러시아 사실주의 회화에 익숙했던 그에게 빛에 따라 변하는 색채를 포착하기 위해 형태를 흐릿하게 처리한 모네의 화면은 큰 충격이었다. 윤곽선, 명암, 입체감, 고유색은 사라진 듯했지만 대신 화면을 가득 채운 색채는 엄청난 힘과 광채로 그를 압도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그날의 경험을 이렇게 생생하게 적는다. “도록을 보고서야 그것이 건초더미라는 것을 알았다. 그림 속에 대상이 없다는 느낌을 막연하게 받았다. 놀라움과 당혹감 속에서도 그림은 나를 사로잡아 기억 속에 지울 수 없는 인장을 찍었고 언제나 눈앞에 세부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림의 필수 요소인 대상에 대한 믿음이 불신당하기 시작했다.” 칸딘스키가 모네 그림에서 받은 충격은 대상을 알아보려 애쓰는 습관이 순수한 감동을 방해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세 번째 계기는 같은 해 볼쇼이 극장에서 일어난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관람하다가 그는 소리가 색으로 보이는 공감각적 경험을 한다. 음악이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인간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다면 회화도 색과 선만으로 영혼을 울릴 수 있다는 확신, 이 연쇄적인 체험이 훗날 칸딘스키가 개척할 추상미술의 출발점이 된다. 1896년 서른 살의 칸딘스키는 마침내 결심을 생각에만 두지 않고 실행으로 옮긴다. 보장된 미래였던 대학교수직을 내려놓고 독일 뮌헨으로 이주해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한다. 칸딘스키는 붓을 잡자마자 곧장 추상화를 그렸을까? 아니다. 처음에는 그 역시 풍경과 인물을 그리는 구상 회화로 출발했다. 그가 뮌헨을 떠나 파리 인근 세브르에 머물 때 제작한 ‘말을 타고 가는 연인’(도판 2)은 추상화로 진입하기 직전 단계를 보여 주는 대표작으로 보석 스타일이라 불리는 시기의 특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화면 속 말을 탄 연인들은 러시아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 어두운 배경 위에 흩뿌려진 원색의 점들은 훗날 그가 구축하게 될 추상화의 전주곡처럼 느껴진다. 강 건너편 도시는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전과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떠올리게 하는 양파 모양의 돔들이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칸딘스키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영적 고향인 모스크바의 색채와 정서가 고스란히 스며든 화면이다. ●세상 모방이 아닌 색채와 형태의 탐구 여기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따라온다. 구상화를 그리던 칸딘스키는 어떻게 추상화로 건너가게 되었을까. 그의 극적인 전환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가 뮌헨에 머물던 시절 자신의 화실에서 겪었다는 거꾸로 놓인 그림 사건이다. 그의 회고록에 적힌 내용은 이렇다. 어느 날 해 질 녘 야외 스케치를 마치고 화실로 돌아온 칸딘스키는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낯선 그림 한 점을 발견한다. 어둠이 조금씩 내려앉는 화실에서 그림은 찬란한 색채들로 이루어진 듯 보였고 설명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한동안 넋을 잃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밝은 빛 아래서 신비로운 그림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자신이 그렸던 풍경화였다. 단지 거꾸로 비스듬히 놓여 있었던 것뿐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칸딘스키는 회화가 외부 세계를 모방해야 한다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색채와 형태 그 자체의 생명력을 탐구하는 새로운 항해를 시작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명언 “색채는 건반이요, 눈은 망치다. 영혼은 많은 현을 가진 피아노다” 칸딘스키는 소리를 들으면 색을 보고 색을 보면 소리를 듣는 공감각 능력자였다. 그는 피아노 건반이 각각 다른 음을 내듯 색채도 각기 고유한 음색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생각을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11년)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펼친다. 이 책은 그가 추상미술의 이론적 토대를 세운 핵심 저서로 색과 형태가 인간의 영혼에 미치는 영향을 음악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노란색이 “참을 수 없는 힘으로 마음을 교란시키며 맹목적인 광기나 격분과 같은 성질”을 지닌다고 말한다. 빨간색은 바이올린의 맑고 힘찬 울림처럼 “내면에서 끓어오르지만 억제된 강한 에너지”를 지닌 소리다. 칸딘스키에게 화가가 캔버스 위에 색을 조합하는 일은 작곡가가 악보 위에 화음을 적어 넣는 것과 똑같은 창조적 행위였다. 그의 이론을 가장 인상적으로 구현한 예가 ‘인상 III (콘서트)’(도판 3)다. 이 작품은 칸딘스키가 1911년 뮌헨에서 작곡가 아널드 쇤베르크의 연주회를 관람한 직후의 감동을 화면에 옮긴 것이다. 음악이 강렬한 색채의 환영을 만들어내는 순간을 목격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바이올린, 딥 베이스, 관악기들이 내 눈앞에서 색들을 보게 했다. 거의 미친 듯한 야생적인 선들이 내 앞에 그려졌다.” ‘인상 III’은 그가 음악을 색으로 보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직접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화면 중앙의 검은 형태는 무대 위의 그랜드 피아노를 단순화한 것이다. 거대한 노란색 덩어리는 콘서트홀을 가득 채운 음향의 압력을 뜻한다. 칸딘스키에게 그 음악은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트럼펫 같은 노란색으로 보였다. 그는 귀로 들은 음악을 눈으로 보이는 색채의 파도로 변환하며 “색채는 건반”이라는 자신의 말을 작품으로 증명한 것이다. 세 번째 명언 “작품 창조는 세계의 창조이다” 그가 말하는 세계는 현실 세계가 아니라 캔버스 안에서 스스로의 법칙으로 움직이는 자율적 우주에 가깝다. 세계 창조의 관점은 1926년 그가 독일의 현대 조형 학교 바우하우스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 집필한 이론서 ‘점·선·면’에서 더욱 논리적으로 다듬어진다. 이 책에서 칸딘스키는 예술 작품이 어떻게 하나의 독립적인 우주가 되는지를 점, 선, 면이라는 최소 단위에서부터 분석했다. 칸딘스키에게 작품은 점, 선, 면이 만들어 내는 긴장과 힘이 자기만의 법칙으로 조직되어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체계였다. 그가 추상화를 통해 보여 주려 했던 것은 자연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우주적 법칙이었다. 그의 우주적 관점이 아름답게 시각화한 사례가 ‘몇 개의 원’(도판 4)이다. ●추상화가는 시인이어야 한다! 무한한 우주 공간처럼 느껴지는 어두운 심연 속에 크기와 색이 다른 원들이 별과 행성처럼 떠 있다. 크고 작은 원들의 배치는 우주의 행성들이 중력에 의해 균형을 이루며 공전하는 듯한 우주적 조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 작품은 기하학적 도형만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놀랍도록 서정적이고 평온한 느낌을 준다. 칸딘스키는 기본형태 가운데 원을 가장 완벽하고 영적인 형태로 여겼다. 원은 안으로 모으는 힘(구심력)과 밖으로 퍼져나가는 힘(원심력)이 한 형태 안에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는 엄격한 기하학을 통해 깊은 내면의 평화와 우주의 질서를 끌어올린 영적인 우주 풍경화를 창조한 것이다. 칸딘스키는 추상 화가가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모든 예술 중에서 추상화가 가장 어렵다. 추상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림을 잘 그려야 하고 구성과 색채에 대해 고도로 예민한 감각을 가져야 하며 무엇보다 진정한 시인이어야 한다. 마지막 조건이 가장 필수적이다.” 그는 추상은 현실의 대상을 그리지 않기 때문에 더 완벽한 조형 기술과 더 높은 차원의 정신적 깊이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칸딘스키에게 추상은 최소의 언어로 최대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예술이었다. 이명옥 사비나 미술관장
  • 당신이 몰랐던 글로벌 스타들의 ‘숨은 취미’

    당신이 몰랐던 글로벌 스타들의 ‘숨은 취미’

    과시보다 몰입에 가치를 두는 ‘조용한 취미’가 주목받고 있다. 규칙적인 훈련이 필요한 스포츠부터 자연과 호흡하는 활동, 손으로 완성하는 수공예까지 취미의 스펙트럼도 넓어지고 있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선택은 이러한 변화가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은 흐름임을 보여준다. 미국 라이프스타일 매체 볼드(Bolde)는 26일(현지시간) 잘 알려지지 않은 스타들의 취미를 소개했다. 이를 바탕으로 생활·문화적 맥락에서 이들 취미를 살펴본다. ◆ 펜싱·나이프·밴조… 이미지와는 다른 선택 톰 크루즈는 액션 스타 이미지와 달리 펜싱에 꾸준히 몰두한다. 펜싱은 규칙과 반복, 정밀한 동작을 요구하는 종목이다. 즉흥성과 스펙터클을 앞세운 영화 속 모습과는 결이 다르다. 그의 펜싱 종목은 공개되지 않았다. 기본 종목인 플뢰레일 가능성이 거론될 뿐 확인된 바는 없다. 신체 통제와 집중력을 중시하는 훈련이라는 점에서 그의 자기 관리 성향과 맞닿아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안젤리나 졸리는 나이프 수집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모으는 나이프는 식사용이 아니다.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을 지닌 단검과 수공예 블레이드가 중심이다. 제작 배경과 기능적 의미를 중시하는 취향은 그의 영화 선택과 분쟁 지역에 대한 관심과도 겹친다. 스티브 마틴은 코미디언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블루그래스 밴조 연주자로도 오랜 평가를 받아왔다. 밴조는 기타보다 소리가 또렷하고 튕기는 느낌이 강한 미국 전통 현악기다. 블루그래스 음악에서는 금속 피크를 사용하는 고속 주법이 특징이다. 마틴은 취미 수준을 넘어 전문 연주자들과 무대에 오르며 이 분야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게임·오토바이·양봉… 통제 가능한 세계 메건 폭스는 비디오게임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고력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게임을 선호하는 편이다. 격투 게임 ‘모탈 컴뱃’ 시리즈의 오랜 팬이라는 점도 여러 차례 언급됐다. 그는 단순한 반응형 게임보다 판단과 패턴 인식이 중요한 게임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결과가 명확한 게임 세계가 주는 몰입감이 이러한 선택의 배경으로 꼽힌다. 키아누 리브스는 단순히 오토바이를 타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커스텀 모터사이클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한다. 설계와 디자인, 기계적 완성도를 함께 고민하는 작업이다. 느리고 손이 많이 가는 공정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비욘세는 의외로 양봉을 택했다. 그는 환경 보호 차원에서 벌을 기르고 가족을 위한 꿀을 채취한다고 밝혔다. 양봉은 철저한 관리와 관찰이 필요한 활동이다. 대규모 공연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집중과 리듬을 요구한다. ◆ 골동품·동물·건축… 시간과 책임의 취미 테일러 스위프트는 골동품과 역사적 소품 수집에 관심을 보여왔다. 그는 물건에 담긴 이야기와 시간의 흔적에 끌린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취향은 서사를 중시하는 그의 음악 세계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드웨인 존슨은 촬영과 운동 일정 외 시간에 농장 생활과 동물 돌봄에 힘을 쏟는다. 이 활동은 매일 반복되는 관리와 책임이 핵심이다. 화려한 스타 이미지와 달리 일상적인 노동이 중심을 이룬다. 그는 동물 앞에서는 명성이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해 왔다. 케이트 블란쳇은 역사적 건축물 복원에 꾸준한 관심을 보여왔다. 그는 단순한 부동산 투자가 아닌 보존의 관점에서 공간을 바라본다. 기존 구조를 존중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방식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연기 철학과도 닮아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카드·목공·재즈… 몰입이 주는 익명성 포스트 말론은 트레이딩 카드 게임(TCG) ‘매직: 더 개더링’에 깊이 빠져 있다. 그는 희귀 카드 수집뿐 아니라 실제 플레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 게임에서는 명성보다 규칙과 전략, 장기적인 판단이 중요하다. 줄리아 로버츠는 목공과 가구 제작을 즐긴다. 그는 손으로 재료를 다듬고 결과물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만족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촬영이 끝나면 사라지는 영화와 달리 손에 남는 결과물이 있다는 점이 이 취미의 핵심이다. 라이언 고슬링은 재즈 기타 연습에 오랜 시간을 투자해 왔다. 재즈는 즉흥 연주와 상호 호흡이 중요한 장르다. 그는 끊임없는 연습과 경청을 통해 연주를 이어간다. 완벽함보다 흐름과 반응을 중시하는 특성이 그의 음악적 관심을 설명한다.
  • 당신이 절대 짐작 못 할 글로벌 스타들의 ‘숨은 취미’

    당신이 절대 짐작 못 할 글로벌 스타들의 ‘숨은 취미’

    과시보다 몰입에 가치를 두는 ‘조용한 취미’가 주목받고 있다. 규칙적인 훈련이 필요한 스포츠부터 자연과 호흡하는 활동, 손으로 완성하는 수공예까지 취미의 스펙트럼도 넓어지고 있다. 할리우드 스타들의 선택은 이러한 변화가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은 흐름임을 보여준다. 미국 라이프스타일 매체 볼드(Bolde)는 26일(현지시간) 잘 알려지지 않은 스타들의 취미를 소개했다. 이를 바탕으로 생활·문화적 맥락에서 이들 취미를 살펴본다. ◆ 펜싱·나이프·밴조… 이미지와는 다른 선택 톰 크루즈는 액션 스타 이미지와 달리 펜싱에 꾸준히 몰두한다. 펜싱은 규칙과 반복, 정밀한 동작을 요구하는 종목이다. 즉흥성과 스펙터클을 앞세운 영화 속 모습과는 결이 다르다. 그의 펜싱 종목은 공개되지 않았다. 기본 종목인 플뢰레일 가능성이 거론될 뿐 확인된 바는 없다. 신체 통제와 집중력을 중시하는 훈련이라는 점에서 그의 자기 관리 성향과 맞닿아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안젤리나 졸리는 나이프 수집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모으는 나이프는 식사용이 아니다.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을 지닌 단검과 수공예 블레이드가 중심이다. 제작 배경과 기능적 의미를 중시하는 취향은 그의 영화 선택과 분쟁 지역에 대한 관심과도 겹친다. 스티브 마틴은 코미디언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블루그래스 밴조 연주자로도 오랜 평가를 받아왔다. 밴조는 기타보다 소리가 또렷하고 튕기는 느낌이 강한 미국 전통 현악기다. 블루그래스 음악에서는 금속 피크를 사용하는 고속 주법이 특징이다. 마틴은 취미 수준을 넘어 전문 연주자들과 무대에 오르며 이 분야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게임·오토바이·양봉… 통제 가능한 세계 메건 폭스는 비디오게임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고력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게임을 선호하는 편이다. 격투 게임 ‘모탈 컴뱃’ 시리즈의 오랜 팬이라는 점도 여러 차례 언급됐다. 그는 단순한 반응형 게임보다 판단과 패턴 인식이 중요한 게임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결과가 명확한 게임 세계가 주는 몰입감이 이러한 선택의 배경으로 꼽힌다. 키아누 리브스는 단순히 오토바이를 타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커스텀 모터사이클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한다. 설계와 디자인, 기계적 완성도를 함께 고민하는 작업이다. 느리고 손이 많이 가는 공정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비욘세는 의외로 양봉을 택했다. 그는 환경 보호 차원에서 벌을 기르고 가족을 위한 꿀을 채취한다고 밝혔다. 양봉은 철저한 관리와 관찰이 필요한 활동이다. 대규모 공연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집중과 리듬을 요구한다. ◆ 골동품·동물·건축… 시간과 책임의 취미 테일러 스위프트는 골동품과 역사적 소품 수집에 관심을 보여왔다. 그는 물건에 담긴 이야기와 시간의 흔적에 끌린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취향은 서사를 중시하는 그의 음악 세계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드웨인 존슨은 촬영과 운동 일정 외 시간에 농장 생활과 동물 돌봄에 힘을 쏟는다. 이 활동은 매일 반복되는 관리와 책임이 핵심이다. 화려한 스타 이미지와 달리 일상적인 노동이 중심을 이룬다. 그는 동물 앞에서는 명성이 중요하지 않다고 강조해 왔다. 케이트 블란쳇은 역사적 건축물 복원에 꾸준한 관심을 보여왔다. 그는 단순한 부동산 투자가 아닌 보존의 관점에서 공간을 바라본다. 기존 구조를 존중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방식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연기 철학과도 닮아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카드·목공·재즈… 몰입이 주는 익명성 포스트 말론은 트레이딩 카드 게임(TCG) ‘매직: 더 개더링’에 깊이 빠져 있다. 그는 희귀 카드 수집뿐 아니라 실제 플레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 게임에서는 명성보다 규칙과 전략, 장기적인 판단이 중요하다. 줄리아 로버츠는 목공과 가구 제작을 즐긴다. 그는 손으로 재료를 다듬고 결과물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만족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촬영이 끝나면 사라지는 영화와 달리 손에 남는 결과물이 있다는 점이 이 취미의 핵심이다. 라이언 고슬링은 재즈 기타 연습에 오랜 시간을 투자해 왔다. 재즈는 즉흥 연주와 상호 호흡이 중요한 장르다. 그는 끊임없는 연습과 경청을 통해 연주를 이어간다. 완벽함보다 흐름과 반응을 중시하는 특성이 그의 음악적 관심을 설명한다.
  • “죽었다 살아났다” 김수용, 임형준·김숙이 살렸다…‘심정지 골든타임’ 지켜

    “죽었다 살아났다” 김수용, 임형준·김숙이 살렸다…‘심정지 골든타임’ 지켜

    배우 임형준과 코미디언 김숙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위험한 상황에 처한 개그맨 김수용을 살린 은인으로 밝혀졌다. 1일 김수용의 소속사 미디어랩시소에 따르면 임형준, 김숙과 김숙의 매니저는 유튜브 콘텐츠 촬영 중 쓰러진 김수용의 응급 처치를 도왔다. 임형준은 김숙 매니저와 함께 구급대 도착 전까지 교대로 심폐소생술(CPR)을 했다. 변이형 협심증을 앓은 경험을 바탕으로 신속하게 대응해 골든타임을 지켰다. 김숙도 119 신고와 기도 확보 등 초동 조치를 도와 김수용을 빠르게 이송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김수용은 지난달 13일 경기 가평에서 유튜브 영상을 촬영하던 중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구급대가 심폐소생술을 이어가며 구리 한양대병원 응급실로 이송했다. 이송 중 호흡과 의식이 회복됐으며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의료진의 정밀 진단 끝에 김수용은 급성 심근경색 진단을 받았고, 같은 달 18일 혈관확장술(스텐트)을 성공적으로 받았다. 급성 심근경색은 심장에 혈액을 공급하는 관상동맥이 혈전 등으로 막히면서 심장 근육이 손상되는 응급질환이다. 뇌졸중과 함께 돌연사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며, 초기 사망률이 40%에 달한다. 환자 10명 중 3명은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하고, 치료를 받더라도 사망률은 5~10%에 이른다. 현장 동료들의 도움으로 위험한 순간을 넘긴 김수용은 지난 20일 퇴원해 자택에서 건강 회복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KBS 15기 공채 개그맨 윤석주는 지난 17일 인스타그램에 김수용과 주고받은 메시지 내용을 공개하기도 했다. 윤석주가 “형님 괜찮으시냐. 걱정된다”고 묻자 김수용은 “다행히 안 죽었다. 죽었다 살아났다”고 답했다. 윤석주가 “조의금 굳었다”고 농담을 하자 김수용 역시 “까비(아깝다)”라고 농담하기도 했다. 심정지 골든타임 ‘4분’…119 신고 후 즉시 CPR 시행해야이처럼 갑작스럽게 쓰러진 심정지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은 ‘4분’이다. 4분 이내에 심폐소생술을 시행할 경우 생존율이 50% 이상 증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환자가 쓰러진 순간부터 4분 이내 응급처치가 이뤄지지 않으면 뇌 손상이 급격히 진행되기에 주변인(목격자)의 신속한 가슴 압박이 가장 효과적인 응급처치 방법이다. 심정지 환자를 발견했을 경우 먼저 환자의 양어깨를 두드리며 큰 소리로 의식을 확인한 뒤 119에 신고하고, 주변에 자동심장충격기(AED)를 요청한다. 이어 호흡이 없는 경우에는 즉시 가슴 압박을 시작한다. 가슴 압박은 분당 100~120회 속도, 5cm 깊이로 강하고 빠르게 30회 시행한다. 압박 위치는 가슴뼈(가슴 정중앙 단단한 뼈) 하부의 1/2 지점을 손뒤꿈치로 강하게 누르는 것이 중요하다. 호흡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코를 막은 상태에서 입을 맞대어 인공호흡을 2회 실시한다. 환자가 의식을 회복하거나 구급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압박과 호흡을 반복해서 실시하면 된다. 자동심장충격기(AED) 사용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AED는 심장의 정상적인 리듬을 회복시키는 장비로, 공공장소에 비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여전히 일반인의 사용률이 낮아 AED 사용법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심폐소생술은 누구나 배워야 하는 필수 생존 기술”이라며 “위급한 순간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박정민의 몰입감, 박강현의 장악력, 리처드 파커의 생동감…‘라이프 오브 파이’ 2일 개막

    박정민의 몰입감, 박강현의 장악력, 리처드 파커의 생동감…‘라이프 오브 파이’ 2일 개막

    227일 동안 벵골 호랑이와 바다를 표류한 소년을 그린 소설 ‘파이 이야기’(Life of Pi)로 캐나다 소설가 얀 마텔은 2002년 부커상을 품고 자신의 이름을 세계 문단에 알렸다. 수상 10년 후 이안 감독이 소설을 영화화한 ‘라이프 오브 파이’를 내놨고, 이듬해 제8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촬영상, 시각효과상, 음악상을 받았다. 2019년 무대로 옮겨가 영국 셰필드에서 세계 초연한 ‘라이프 오브 파이’는 약 1개월 공연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무대는 거대한 폭풍우와 광활한 밤하늘, 신비로운 바닷속을 소품과 조명, 영상, 음향 등을 십분 활용하며 경이롭고 압도적이다. 무엇보다도 동물의 골격과 근육을 섬세하게 디자인해 표현한 동물이 압권이다. 퍼펫티어(puppeteer·인형을 움직이는 배우) 3명이 머리와 몸, 다리와 꼬리를 각각 담당하는데, 소리와 호흡이 정교해 극에 몰입하다 보면 실제 동물이 연기하는 듯한 착시까지 준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2021년 영국 웨스트엔드와 2023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뒤 올리비에상 5관왕(작품상, 조명상, 무대디자인상 등), 토니상 3관왕(무대디자인상, 조명상, 음향디자인상)에 오르며 공연계 명작으로 자리했다. 지난해 해외 투어를 시작한 ‘라이프 오브 파이’는 다음달 2일 서울 GS아트센터에서 개막한다. 첫 비영어 라이선스 작품이자 한국 초연이다. 배우들의 연기와 퍼펫티어의 활동, 무대 활용 등이 뮤지컬이나 연극이라는 장르를 벗어나 있다는 의미로 제작사 에스앤코는 이 공연에 ‘라이브 온 스테이지’(Live on Stage)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프로듀서 신동원 에스앤코 대표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라이프 오브 파이’ 속 퍼펫을 본 강렬한 경험이 이 작품을 제작하게 된 계기라면서 “배우의 연기와 영상, 음향 등 모든 무대 예술 요소가 결합해 만들어진 살아있는 생명체를 목격한 순간 받았던 환희와 충격, 희열을 한국 관객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소개했다. 이어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아갔는데 살아 움직이는 리처드 파커와 눈을 마주쳤을 때 (국내 제작을) 결정했다”며 “작품이 가진 철학적 메시지가 한국어로, 한국 배우를 통해 전달되는 데 공감이 클 것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소년 파이와 227일간 바다 여정을 하는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는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부터 잡아먹을 듯이 벌리는 입, 귀와 꼬리의 움직임 등은 살아있는 호랑이, 그 자체다. 심지어 리처드 파커는 2022년 올리비에상에서 조연상을 받았다. 이번 한국 초연에서 협력 무브먼트·퍼펫 디렉터를 맡은 케이트 로우셀은 퍼펫티어들의 호흡을 강조하면서 “우리 연습 과정 중 중요한 부분이 동물들이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연구하는 것”이라면서 “호랑이의 골격이 연결되듯 퍼펫티어들도 이런 연구를 하고 서로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이면서 예측불가한 야생 호랑이를 표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 호랑이를 여러 팀이 표현하는데 각자 성격도, 리듬도, 생각도 달라 공연마다 다른 호랑이를 만날 수 있다”고 덧댔다. 리 토니 인터내셔널 연출은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교감”이라면서 “배우가 네 번째 퍼펫티어로서, 실제 동물을 만났을 때처럼 편안하거나 굉장한 불안을 표현하는 반응이 공연에 대한 몰입감을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토니 연출은 파이 역할을 맡은 박정민과 박강현에 대해 “수많은 극적인 순간을 겪어야 해서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든 역할인데 그 깊이를 제대로 표현한다”면서 “여기에 자신들의 성격을 담아내서 모든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특별한 여정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신 대표도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아닌,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배우들”이라면서 “박정민 배우는 섬세한 감정 표현과 몰입감이, 박강현은 무대 장악력과 캐릭터 소화 능력이 뛰어나다”고 부연했다. 박정민·박강현과 함께 파이의 아버지는 서현철·황만익, 엄마와 간호사·퍼펫티어인 ‘오렌지 주스’ 역은 주아·송인성이 맡는다. 신 대표는 “(‘라이프 오브 파이’는) 믿음이 인간을 어떻게 살아가게 하는지 알아보는 이야기”라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생각해볼 만하다. 라이브 온 스테이지의 신비한 매력을 흠뻑 느끼시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공연은 내년 3월 2일까지.
  • [데스크 시각] ‘새벽배송 논쟁’이 놓친 것들

    [데스크 시각] ‘새벽배송 논쟁’이 놓친 것들

    “슬기님 (오전) 6시 전에는 끝날까요? A님 어마어마하게 남았네요.” “최대한 하고 있어요. 개처럼 뛰는 중이요.” 지난해 5월 숨진 쿠팡 야간 배송기사 정슬기씨가 평소 관리자와 새벽에 나눈 메신저 내용이다. 사인은 심실세동과 심근경색 등 심혈관계질환. 과로사였다. 근로복지공단의 업무상 질병판정서엔 ‘발병 전 4주간 매주 평균 74시간 24분’을 일했다고 돼 있다. 죽음은 계속됐다. 26일에도 경기 광주의 쿠팡 물류센터에서 50대 남성이 쓰러졌다. 지난달 민주노총 전국택배노조가 ‘택배 사회적 대화기구’ 첫 회의에서 ‘0시~오전 5시 배송 제한’을 제안한 배경이다. 과로사를 막기 위해 최소한의 수면·건강권을 보장하는 안을 고민해 보자는 취지다. 파문은 커졌다. ‘새벽배송 전면 금지’로 곡해 또는 오해한 이들의 반론이 이어졌다. 새벽배송이 없어지면 늦게 퇴근하는 맞벌이 부부를 비롯한 소비자 선택권과 청년 일자리가 흔들리고, 기업의 혁신 성장도 저해된다는 논리였다. ‘자영업자라던데, 싫으면 낮에 하면 될 것 아니냐’는 시각도 얹어졌다. 그러는 동안 쿠팡은 계속 침묵했고, 본질은 점점 희미해졌다. 쿠팡은 2014년 ‘로켓배송’을 시작할 때만 해도 ‘쿠팡맨’이란 이름으로 택배노동자를 직접 고용했다. 하지만 독점적 시장지배력을 굳힌 뒤 배송 부문을 자회사(CLS) 및 하청 체제로 재편했다. 쿠팡CLS가 중간 영업점과 계약하고, 대리점은 다시 택배노동자와 계약하는 식이다. CLS에 직접 고용된 ‘쿠팡친구’가 7500명, 대리점과 계약을 맺는 특수고용노동자(퀵플렉스)가 2만여명쯤 된다. 과로사 문제는 노동자와 자영업자의 경계에 놓인 ‘특고’들에게 주로 발생한다. 퀵플렉스들은 하루 11시간 일하고 주 52시간제와 야간근로수당, 연속 휴식 보장 등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자영업자일까. 가격 협상이 가능하고, 원하면 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지난 9월 택배노조와 과로사 대책위원회가 퀵플렉스 679명 대상으로 한 조사를 보면 더 선명해진다. 월 150만원 정도 추가 수입이 심야배송을 택하는 이유인 것은 맞지만 대리점에서 계약 조건에 야간배송을 임의로 집어넣거나 이를 거부할 경우 불이익이 우려돼 새벽에 일한다는 응답이 88.0%였다. 무늬만 개인사업자일 뿐 실질적으론 종속된 노동자에 가깝다는 얘기다. 명확한 진실은 야간노동이 건강을 갉아먹는다는 점이다. 멜라토닌 분비를 기준으로 생체리듬이 고정된 야간근무에 완벽하게 적응하는 경우는 2~3%에 불과하다. 급성심근경색증처럼 생명을 즉각적으로 위협하거나 몸 안에 위험을 서서히 쌓아 가는 식이다.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야간노동(night shift work)을 ‘2군 발암물질’로 지정하고 2~3일 연속 하지 못하도록 권고한 이유다. 이에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IARC가 2급 발암물질로 규정할 정도로 해로운데, 감내해야만 할 정도의 서비스인지 공론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국민의힘에선 “커피, 김치, 스마트폰, 임플란트 등도 2급 발암물질이다. 모두 금지할 거냐”고 반박했다. 발암물질이니 금지하자는 게 아니다. 필수 야간노동처럼 여겨지게 된 새벽배송의 위험을 어떻게 최소화할지 공동체가 머리를 맞대자는 것이다. 병원 야간근무자에겐 보건복지부 가이드라인이, 승무원에겐 항공안전법에 따른 관리기준이 있듯 택배기사 건강권도 산업보건 영역에서의 논의가 필요하다. 특수고용직이니 놔두자는 건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새벽배송을 법으로 금지할 것인지 혹은 제한·보상·기술적 대체를 논의할 것인지는 사회적 합의의 영역이다. 중요한 것은 논의의 출발점이 과학과 사실 위에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직업환경의학 전문가인 김현주 이대목동병원 교수의 말을 모두 곱씹어 봤으면 한다. 임일영 경제정책부장
  • 샤갈 ‘꽃다발’부터 ‘파리의 풍경’까지 국내 경매 출격

    샤갈 ‘꽃다발’부터 ‘파리의 풍경’까지 국내 경매 출격

    마르크 샤갈의 대표작 ‘꽃다발’부터 말년의 예술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파리의 풍경’이 미술품 경매에 나온다. 서울옥션은 오는 24~25일 서울 강남구 강남센터에서 총 290억원 상당의 미술품을 경매에 올린다고 밝혔다. 2008년 이후 국내 단일 경매 기준 최대 규모로 각각 고가의 주요작을 선보이는 ‘이브닝 세일’(24일)과 최신 경향을 반영한 ‘데이 세일’(25일)로 나눠 진행한다. 이브닝 세일 출품작은 총 26점, 낮은 추정가 총액만 약 270억원에 달한다. ‘색채의 마술사’ 샤갈의 ‘꽃다발’은 시작가 94억원에 새주인을 찾는다. 이 작품이 제작된 1937년은 샤갈이 평생의 뮤즈인 아내 벨라와 결혼한 지 22년 되는 해였다. 두 사람의 운명적인 사랑을 표현하듯 작품에는 공중에서 포옹하는 연인의 모습을 통해 중력을 거스르는 사랑의 환희가 담겼다. 화면을 가득 채운 꽃다발과 푸른 색채는 비극적인 세월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삶에 대한 찬미를 상징하며 작가가 추구한 사랑의 보편성과 예술적 신념을 가장 완전한 형태로 구현하고 있다. 함께 출품되는 100호 크기의 대작 ‘파리의 풍경’은 샤갈의 말년 예술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푸른색 배경 위로 서커스 단원, 공중그네 곡예사, 촛대를 든 인물 등이 어우러지며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독창적인 미감을 선사한다. 이외에도 1980년대 메소나이트에 그린 회화 두 점도 함께 출품돼 샤갈의 다채로운 작품 세계를 한자리에서 조망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미술 거장들의 수작도 새 주인을 찾는다. 김환기의 1969년 뉴욕 시기 작품 ‘15-VI-69 #71 I’이 경매에 오른다. 이 작품은 작가가 전면점화라는 독창적인 양식을 완성해 나가기 직전의 작업으로, 점으로 나아가기 전 면과 선, 색의 순수한 구성에 집중했던 작가의 치열한 조형적 실험이 드러난다. 이우환의 1990년작 ‘바람과 함께’는 100호 크기의 대작으로, 자유롭고 역동적인 붓질이 화면 밖까지 확장되는듯한 리듬감을 선사한다. 또한, 한국 동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이불의 초기 조각 시리즈 ‘사이보그 W10·도 출품된다. 기술 시대의 인간 정체성과 유토피아적 환상을 탐구한 이 작품은 한국 현대미술의 깊이와 동시대성을 동시에 보여준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대형 풍경화도 선보인다. 세로 2m가 넘는 이 작품은 베어진 나무와 황량한 대지를 통해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순환을 탐구한다. 오는 25일 진행하는 데이 세일은 젊고 감각적인 컬렉터들을 위한 작품들로 구성된다. 출품작 64점이며 낮은 추정가 총액 약 21억원 규모로 진행된다. 글로벌 미술시장에서 뜨거운 관심을 받는 니콜라스 파티의 수채화는 보석처럼 선명한 색조와 비정형적인 구성을 통해 몽환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또한, ‘라부부’ 캐릭터로 유명한 카싱 렁의 원화와 이민자로서의 정체성을 화려한 색채로 풀어낸 스튜디오 렌카의 작품 등도 만나볼 수 있다. 서울옥션 11월 이브닝 세일과 데이 세일의 프리뷰 전시는 13일부터 각 경매 당일까지 진행된다. 케이옥션은 오는 26일 신사동 본사에서 총 86억원 상당의 미술품 108점을 경매한다고 14일 밝혔다. 이번 경매에서 주목할 작품은 추정가 15억~25억원인 한국 근현대미술 거장 김환기의 1954년 작 ‘답교’다. 답교는 ‘다리 밟기’라는 의미로 정월대보름에 다리를 밟으며 액운을 막고 무병과 건강, 복을 기원하던 전통 풍속을 말한다. 김환기가 파리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54년에 제작된 것으로, 한국 고유의 풍경과 정서를 특유의 조형 언어로 묘사한 작품이다. 한국의 자연을 주로 그렸던 이대원의 3m가 넘는 대작 ‘농원’도 출품된다. 두 폭의 대형 화면에 들판과 과수의 형상을 펼쳐 자연의 생명력과 질서를 조형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작가가 평생 탐구한 자연과 예술의 조화가 잘 드러난다. 2억 5000만∼4억 5000만원으로 추정된다. 이밖에도 김창열의 ‘회귀’(1억 8000만∼4억원), 이우환의 ‘조응’ (5억 3000만∼8억원), 박서보의 ‘묘법’(3억 8000만∼7억 9000만원) 등도 만날 수 있다. 출품작은 15일부터 경매 당일까지 케이옥션 전시장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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