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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교 2배 규모’ 6만가구 공급…용산·과천 ‘금싸라기’ 땅에 1만가구씩

    ‘판교 2배 규모’ 6만가구 공급…용산·과천 ‘금싸라기’ 땅에 1만가구씩

    정부가 부동산 가격 급등에 따른 집값 부담 심리를 안정화하기 위해 수도권 주요 지역에 총 6만 가구를 공급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서울 용산과 과천 등 ‘금싸라기’ 땅에 1만 가구 안팎을 신규 공급해 신혼부부 등 젊은 세대의 수요에 대응한다는 복안이다. 정부는 2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주재로 주택 공급 촉진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이러한 내용의 ‘도심 주택공급 확대 및 신속화 방안’을 발표했다. 이는 2030년까지 수도권에 135만 가구 이상을 공급한다는 내용의 ‘9·7 부동산 공급대책’의 후속 조치다. 수도권 내 역세권 등에서 그간 유휴부지로 남아있던 곳과 노후 청사 등을 적극 활용해, 신혼부부 등 젊은 층이 선호하는 입지를 중심으로 총 487만㎡에 6만 가구를 공급한다는 내용이다. 지역별로는 서울 3만 2000가구(53.3%), 경기 2만 8000가구(46.5%), 인천 100가구(0.2%)다. 6만 가구는 2기 신도시인 판교신도시(2만 9000가구)의 2배 규모에 달한다. 면적으로는 여의도(2.7㎢)의 1.7배 규모에 해당한다. 특히 서울의 핵심 입지인 용산구 일대에 1만 3501가구를 공급하기로 한 것이 눈에 띈다. 용산역과 직결된 용산국제업무지구에는 서울시가 공급하기로 했던 6000가구에서 용적률 상향 등을 통해 1만 가구로 늘렸다. 남영역·삼각지역과 가까운 캠프킴 부지는 녹지공간 활용을 효율화해 기존 공급 물량(1400가구)보다 1000여가구 증가한 2500가구를 공급한다. 주한미군이 반환한 미 501정보대 부지에도 청년과 신혼부부 등을 위한 소형 주택 150가구를 공급한다. 집값이 가파르게 오른 경기 과천시에는 9800가구를 공급한다. 정부는 향후 과천 경마장(115만㎡)과 국군방첩사령부(28만㎡)가 이전하면 해당 부지를 첨단 직주근접 기업도시로 통합 조성한다는 구상이다. 정부는 문재인 정부 당시 개발이 추진됐다가 주민 반발 등에 부딪혀 무산된 서울 노원구 태릉골프장 카드도 꺼내 들었다. 과거 공급 목표치였던 1만 가구를 6800가구로 조정하고, 조선왕릉 경관을 침해하지 않도록 중저층 주택을 공급한다. 국가유산청과 협조해 문화재위원회 심의와 세계유산영향평가를 조속히 마무리하고 2030년 착공한다는 구상이다. 경기 성남시에는 판교 테크노밸리 및 성남시청과 인접한 성남금토·성남여수지구에 6300가구가 들어선다. 이밖에 서울 동대문구 옛 국방연구원·한국경제발전전시관(1500가구), 서울 은평구 불광동 한국행정연구원 등 연구기관 4곳(1300가구), 경기 광명경찰서(550가구), 서울 강서구 군 부지(918가구), 서울 금천구 독산동 공군부대(2900가구), 경기 남양주 군부대(4180가구), 경기 고양시 옛 국방대(2570가구) 등 수도권 역세권 소규모 부지나 그간 사업이 장기 지연된 부지도 공급 대상지로 지정됐다. 도심 내 노후 공공청사 등을 철거하고 주택과 공공청사, 생활기반시설을 복합 개발해 1만 가구를 공급하는 방안도 발표됐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소유한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서울의료원 남측 부지(518가구), 성동구 성수동 옛 경찰기마대 부지(260가구), 도봉구 쌍문동 교육연구시설(1171가구), 경기 수원시 수원우편집중국(936가구) 등이 이에 해당한다. 서울의료원 부지는 지하철 2호선 삼성역, 9호선 봉은사역과 인접한 역세권에 스마트워크 센터 등 비즈니스 시설과 주택을 결합한 스마트워크 허브를 조성하는 방식으로 개발된다. 성수동 기마대 부지에는 청년·신혼부부를 위한 주택이 공급된다. 이들 지역은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즉시 지정돼 투기성 토지 거래 등이 전면 차단된다. 정부는 해당 지구와 주변 지역에서 미성년·외지인·법인 매수, 잦은 손바뀜, 기획부동산 의심 사례 등 280건을 선별해 분석한 뒤 수사 의뢰 조치하기로 했다.
  • “문화유산은 한민족의 종자… 한류 번성하고 국가 품격 높였죠” [서동철의 노변정담]

    “문화유산은 한민족의 종자… 한류 번성하고 국가 품격 높였죠” [서동철의 노변정담]

    출판인 출발 뒤 문화유산운동가로20·30대 때 부산서 고서 수집 첫발국보·보물 등 출판 유산 다수 소장삼성출판박물관 보유 40만점 달해내 인생 길을 내준 고마운 두 분형 김봉규, 목포에 대양서점 설립당시 책 속 뒹굴면서 꿈 크게 가져이어령 설득에 출판박물관 세웠죠‘문화유산국민신탁’ 설립 주도숱한 문화 행사 참석 ‘축사의 달인’유산신탁 회원 1만 7000명 이끌어보성여관·시인 이상의 집 등 매입‘베푼 것 생각 말고 받은 것 잊지 마라’이젠 ‘입 닫고 지갑 열어라’ 실천중박물관 보람 컸지만 운영 쉽지 않아나 이후엔 사회 환원되지 않을까요김종규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은 문화예술 및 문화유산 분야에서 폭넓은 자취를 남긴 문화운동가이자 문화유산운동가다. 그에게 붙여진 ‘문화계 마당발’이라는 별명도 광범위한 활동의 결과일 것이다. 그는 우선 친형이 1964년 창업한 삼성출판사 운영에 일찍부터 참여해 우리나라 출판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고서(古書)에 대한 깊은 관심은 삼성출판박물관 설립으로 이어졌다. 과거의 출판문화에 대한 세상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물론 유산을 후손에 물려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더불어 한국박물관협회를 주도하며 우리 사회에 다양한 박물관의 필요성을 부각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최근까지 이사장으로 재임한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선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자부심을 사회 구성원 스스로 보전하겠다는 의지로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를 세검정에서 불광동으로 넘어가는 진흥로에서 북한산 등산로 방향으로 들어가는 초입 서울 구기동에 자리잡은 삼성출판박물관에서 만났다. 김 명예회장에게 출판인에서 문화유산운동가로 탈바꿈한 계기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부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형님이 삼성출판사를 시작하면서 출판일을 배우라며 부산지사장으로 보내 10년 남짓 일했어요. 그곳에서 지역 문화예술인들과 교유(交遊)하며 옛날 책에 관심을 갖게 됐지요. 부산의 대표적인 고서점가인 보수동 책방골목에 어지간히 드나들었어요. 당시는 수집가들이 도자기와 그림에 눈독을 들이던 때라 고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나에게는 행운이었지요. 아마도 6·25전쟁으로 부산에 피란한 수장가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생활고가 깊어지며 중요한 자료들을 헌책 골목에 내놓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는 “그때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었다”면서 “집안에선 젊은 놈이 벌써부터 골동품가게를 어슬렁거린다며 걱정하는 분위기도 없지 않았다”고 했다. ‘새책 팔아 헌책 사는’ 자료 수집은 서울 본사에 올라온 이후로도 이어졌다. 그가 지금도 관장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삼성출판박물관은 국보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과 보물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월인석보’, ‘제왕운기’, ‘금강반야바라밀경’, ‘경국대전’ 등 중요 출판 유산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옛 활자와 문방사우 등 보유하고 있는 출판 문화유산은 모두 40만점에 이른다고 한다. 김 명예회장은 ‘인생에 길을 내준 고마운 두 분으로 형인 김봉규 삼성출판사 창업회장과 문학평론가 이어령 선생을 꼽았다. 형님은 전남대 상대에 다니던 1951년 전남 목포에 대양서점을 세웠다. 당시 전남대 상대는 목포에 있었다고 한다. 형님은 1962년에 서울에 올라와 수도서적을 열었고 1964년에는 삼성출판사를 설립했다. “대양서점은 목포 한복판 죽교동에 있었어요. 일제강점기에 지은 2층 목조 상가 1층에 세들어 있었지요. 살림집도 안에 함께 딸려 있었습니다. 당시 학생이며 선생님, 목포 지역의 지식인들이 모두 이 책방에 들락날락했어요. 책 속에서 뒹굴 수 있던 시기였습니다. 맹모삼천지교를 떠올리게 하는 환경이었다고나 할까요. 형님은 그때부터 출판이 우리 사회와 문화를 주도하는 산업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어요. 덩달아 나도 꿈을 크게 가질 수 있었지요.” 이어령 선생은 김 명예회장에게 출판박물관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한 당사자였다. 이 선생은 초대 문화부 장관에 취임하고 삼성출판박물관이 개관하자 ‘출판박물관은 책의 탑이고, 출판박물관은 책의 씨앗이며, 출판박물관은 악기’라는 인사말을 남겼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처럼 출판박물관은 과거가 아니라 1000년 뒤 미래를 바라보는 존재이고, 곰팡내 나는 책이 있기에 앞으로 태어날 새로운 책들도 예비할 수 있다는 덕담이었다. 무엇보다 ‘출판박물관은 가만히 있으면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가까이 입술을 대고 허파 깊숙이 호흡을 하면 아름다운 음향이 들려오는 옥퉁소’라며 출범을 축원했다. 김 명예회장은 목포 문태중학교 시절 목포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형님의 권유로 목포상고에 가게 된다. 고교를 졸업할 무렵에도 시인 서정주 선생이 계셨던 동국대 국문과를 염두에 두었으나 다시 형님의 설득으로 같은 학교 경제학과로 진학했다. 그 시절 경제 구조의 선진화가 진행될수록 산업 분야의 격차를 줄이고 균형 있는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경제학자 조동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한다. 결국 부(富)든 문화유산이든 나누는 게 바람직하다는 가르침인 만큼 지금도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2022년 충남 논산 돈암서원에 ‘가례집람’ 등의 책판 54점을 기증한 것도 그 연장선상이다. ‘가례집람’은 돈암서원에 배향된 사계 김장생(1548~1631) 선생이 주자의 ‘가례’를 해석한 책이다. 더불어 ‘사계선생연보’와 ‘사계선생유고’, ‘사계전서’, ‘경서변의’의 책판도 포함됐다. 돈암서원은 한때 4168개 책판을 보관하고 있었으나 많은 분량이 흩어지고 1841개만 남았다. 기증한 책판은 50년 전 ‘서울 변두리 집 두 채 값’으로 구입한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기증으로 돈암서원 책판이 완질(完帙)을 이루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 박물관 100년’을 맞았던 2009년에는 삼국시대 금동제 말갖춤과 화살통 장식 등 10건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 2023년에는 인촌상을 수상하며 상금 1억원 가운데 5000만원을 자신이 몸담고 있던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기부했다. 남은 5000만원은 “문화유산과 박물관 사람들에게 흔쾌히 쏘겠다”고 공언해 궁금증을 자아냈다. 뚜껑을 열고 보니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양방언을 비롯한 음악가들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불러모아 ‘음류’(音流)라는 제목의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던 음악회를 열어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김 명예회장은 숱한 문화 행사에 참석해 인사말을 도맡는 ‘축사의 달인’이다. 요즘도 하루 2~3곳은 기본이고 박물관협회 회장 시절에는 7~8곳을 다닌 적도 있다고 한다.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다 보니 시간이 부족해 축사만 끝내고 자리를 떠야 할 때도 없지 않다. 그에게 “그렇게 숨차게 뛰어다니시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나에게 ‘약방의 감초’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있는 것도 잘 알고 있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세상에는 공것이 없다”고 했다. 다양한 행사에 가서 인사말을 하는 것도 결국 주어야 받을 수 있는 품앗이라는 것이다. “문화행사뿐 아니라 경조사에도 많이 갑니다. 옛 어른들은 아무리 원수같이 지낸 사람이라도 부모 상을 당했을 때 찾아가 예를 표하면 다 풀리게 마련이라고, 이런 게 인생의 지혜라고 가르쳐 주셨지요. 경사보단 흉사에 더 많이 가 줘야 합니다. 후손이 어려울 땐 더더욱 가야 하고요. 요즘도 흉사에 가면 자식·손자들에게 돌아가신 분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었는지를 증언해 줍니다. 후손들이 그런 줄 몰랐다며 뿌듯해하면 나도 보람이 있고요” 김 명예회장은 “돌이켜 보면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직을 맡았을 때 1000명 남짓이던 회원이 그만둘 때 1만 7000명이 넘도록 불릴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바쁘게 다니며 인연을 쌓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그는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의 요청으로 설립위원장을 맡아 2007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출범할 수 있도록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 2009년에는 다시 이건무 문화재청장 요청으로 제2대 이사장을 맡았다. 그는 문화유산국민신탁에 무보수로 만 15년 넘게 재임한 지난해 연말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었다”며 사임 의사를 밝혔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우리나라의 전통인 동계(洞契)와 같은 공동체 정신을 이어받아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문화유산을 민간이 보존하는 시민사회운동이다. 산업화로 파괴되는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영국의 ‘내셔널트러스트’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회원의 회비로 운영된다. 김 명예회장이 추구하는 ‘나눔의 정신’과도 일치한다.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에 ‘남도여관’으로 등장한 전남 벌교의 보성여관은 복원작업을 거쳐 2012년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개관했다. 서울 자하문로에 있는 시인 이상의 집은 2009년 국민신탁이 처음으로 매입한 보전자산이다. ‘마지막 신라인’으로 불리는 경주의 윤경렬 옛집, 군포 동래 정씨 동래군파 종택, 고흥 죽산재도 국민신탁이 사들여 문화공간화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농부는 죽어도 종자를 베고 죽었다”고 했어요. 아무리 먹을 게 없어도 다음 농사에 쓸 종자는 남겨 둔다는 뜻입니다. 우리 문화유산은 바로 한민족 문화의 종자이고 씨앗입니다. 종자가 되는 문화유산이 있기에 한류도 번성하고 국가 품격도 높아진 것이지요. 더많은 사람이 국민신탁에 참여해 문화유산을 지켜가야 하는 이유일 겁니다.” 김 명예회장에게 “꿈을 이루셨느냐”고 물으니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욕심을 부려 90세까지 산다고 할 때 처음 30년엔 군대도 갔다오고 자리를 잡는 시기였다면 다음 30년은 그야말로 생업에 전력투구하는 시기였어요. 이후에는 재산이든 재능이든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스스로 좌표를 잘 만들어 80~90%는 실천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앞으로 희망하시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보시라”고 했더니 “지금 이대로도 너무 바빠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다”며 웃었다. “그동안에는 좌우명이 ‘베푼 것은 생각하지 말고, 받은 것은 잊지 마라. 다른 사람 단점을 말하지 말고 자기 자랑은 하지 마라’였어요. 그런데 나이를 먹고 나선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를 실천하려 하고 있습니다.” 김 명예회장은 삼성출판박물관 개관 당시부터 “박물관은 개인의 것이 될 수 없다”고 했었다. “출판박물관은 내 생전 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꾸려 가려고 합니다. 박물관은 보람이 컸지만 운영은 쉽지 않았어요. 자식들에게는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합니다. 3남매가 자기들 밥벌이는 하고 있으니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사회에 환원이 되지 않을까요.” ■김종규 명예회장은 1939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났다. 목포상고와 동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삼성출판사 사장과 회장으로 일했다. 삼성출판박물관을 설립해 현재도 운영하고 있다.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건립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국민훈장 모란장과 은관문화훈장, 인촌상을 수상했다. 글·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 ‘화재·침수 주범’ 담배꽁초와의 사투…골목 곳곳에 담배꽁초 수거함이 설치된다

    ‘화재·침수 주범’ 담배꽁초와의 사투…골목 곳곳에 담배꽁초 수거함이 설치된다

    도심 곳곳 식당 및 상가 밀집 지역이 담배꽁초 투기로 몸살을 앓으면서 지자체마다 담배꽁초 수거함 설치를 확대하고 있다. 흡연을 유도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거리에 무분별하게 버려지는 담배꽁초를 줄이고, 장마철 하수구 막힘으로 인한 하수 역류 방지 등 순기능이 더 크다고 본 것이다. 28일 서울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최근 서울과 대전, 전북 등 많은 지자제에서 담배꽁초 수거함을 설치했다. 담배꽁초 수거함은 투입구가 작아 일반 쓰레기가 아닌 오직 담배꽁초만 버릴 수 있도록 특수제작됐다. 서울시는 각 자치구에서 담배꽁초 수거함 설치를 늘리고 있다. 용산구는 지난 7월 남영동 먹자골목, 이태원 세계음식거리 등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에 ‘담배꽁초 전용 수거함’ 11대를 설치했고, 용문시장·이태원 일대 등에도 수거함을 추가 설치하기로 했다. 응암오거리 먹자골목에 담배꽁초 전용 수거함 15대를 설치한 은평구도 불광동과 연신내 먹자골목 등에도 수거함을 추가 설치할 계획이다. 전북 김제시는 지난달 담배꽁초 투기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식당 및 상가 밀집 지역에 담배꽁초 전용 수거함 10대를 시범 설치했다. 설치장소 인근 상가 점주 등 주민과의 협의를 통해 관리책임자를 우선 지정했다. 시는 이번 시범사업을 통해 효과성이 입증될 경우 내년부터 확대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대전 유성구도 지난 7월 KT&G와 함께 봉명·관평동 상가와 주차장 등 유흥 밀집 지역에 ‘담배꽁초 전용 수거함’ 20대를 설치했다. 김제시 관계자는 “담배꽁초 수거함 설치 효과가 있다면 인근 주민과 상가 의견, 일반쓰레기 투기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설치 장소를 확대할 것”이라고 말했다.2020년에 발표한 환경부의 ‘담배꽁초 관리체계 마련 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길거리에 버려지는 담배꽁초는 하루 평균 1246만 개비로 추정되며 이중 최대 231만 개비(0.7t)의 담배꽁초가 바다로 흘러가고 있는 것으로 예측된다. 길가에 버려지는 담배꽁초로 환경오염과 침수 등 부작용이 심각해지자 지방의회에서도 수거함을 더 확대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서울시의회 박유진 의원(더불어민주당·은평3)은 “비흡연자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해 흡연자의 흡연권을 먼저 보장해주는 것도 필요하다”면서 “흡연할 수 있는 흡연구역을 명확히 하고 담배꽁초 전용 수거함 설치를 확대하는 등 흡연자에게 흡연구역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되, 그 외 장소에서의 흡연은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도선 대전 서구의원도 “환경보호와 주민 안전을 위한 예방책으로 현재 서구 둔산1동의 흡연 우발구역 3곳에 시범 설치·운영 중인 담배꽁초 전용 수거함을 확대 설치해야 한다”면서 “흡연자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예방캠페인 등 담배꽁초 무단투기를 근절할 수 있는 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불광문고를 지켜주세요”

    25년간 버틴 동네서점 폐점 소식에 은평 주민 청원… 동의 1500명 육박구 “문화재 접근… 다각도 지원 검토” 25년간 서울 은평구를 지켜 온 ‘동네서점’ 불광문고가 폐점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민들이 주민청원을 통해 구에 구제를 요청하고 나섰다. 은평구와 불광동을 지역구로 둔 더불어민주당 정준호, 국민의힘 신봉규 은평구의원에 따르면 ‘은평구의 지역서점을 지켜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원은 지난 19일 올라와 25일 현재 1425명 이상의 동의를 받았다. 구는 ‘열린청원’ 제도를 운영하며 청원 동의자 500명이 넘으면 구청장이 직접 검토하도록 하고 있다. 해당 청원은 올라온 다음날 동의자 500명을 돌파했다. 1996년 문을 열고 동네서점들이 연달아 문을 닫는 상황에도 명맥을 이어 온 불광문고는 최근 소셜미디어를 통해 폐점 소식을 알렸다. 서점 측은 “책 판매로는 임대료와 인건비를 감당하기 버거운 날들이 오래 지속됐다”며 “오프라인 지역 서점은 온라인 서점보다 비싸게 책을 공급받고 있다”며 “이런 기형적인 도서 유통 구조와 대형 서점의 지점 확장으로 설 자리가 갈수록 좁아졌다”고 했다. 이 문제와 관련해 구, 문고 측과 대화해 온 신 의원에 따르면 문고는 임대인과 임대조건에 합의하지 못했다. 청원인은 구가 지역자원으로서의 불광문고 가치를 이해하고, 폐업을 막기 위해 임대인과 지역사회공헌 협력을 통한 임대료 조정 협의에 나서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민간 사업자 간의 문제인지라 구와 구의회 차원에서 직접 해결할 방안이 없는 게 현실이다. 구는 “3~4개 관계부서를 소집해 폐업을 막을 방안을 다방면으로 검토하고 있지만 직접 지원할 근거는 없다”고 설명했다. 정 의원은 “사기업이지만 지역서점으로 오래된 대장간이나 문화유산과 같은 역할을 해 온 게 사실”이라면서 “의회 차원에서 이런 부분을 평가해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 의원은 “동네서점은 단순 소비재가 아닌 문화재로 접근해야 한다”며 “또다시 이런 안타까운 사례가 나오지 않도록 ‘지역서점 지원에 관한 조례’ 발의를 긴급하게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 봉제 주름잡던 동네… 개발과 보존 사이 ‘박제된 시간’

    봉제 주름잡던 동네… 개발과 보존 사이 ‘박제된 시간’

    북서울꿈의숲과 동남쪽으로 맞닿아 있는 서울 성북구 장위동은 서울의 과거가 박제된 듯이 남아 있는 곳이다. 1960년대에 지어진 국민주택단지와 성북동이나 한남동에 비견되던 고급 주택단지는 옛 모습을 다소 잃었지만, 변함없이 공존하고 있다. 더딘 개발의 역설적 효과로 장위동은 수십년 전 서울의 아슴푸레한 기억을 바로 눈앞에 소환해 준다. 그렇지만 서울의 다른 동네와 마찬가지로 변두리 이미지를 벗어나려는 개발 욕구가 보존 정책과 부딪치며 오랫동안 갈등을 빚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20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22회 김중업의 장위동 이야기 편은 지난 24일 오전 10시 서울지하철 6호선 돌곶이역에서 출발했다. 역에서 이어진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좌우로 작은 봉제 업체들이 눈에 들어온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장위동은 2000여개의 작은 봉제공장들이 밀집한 서울 패션산업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띄엄띄엄 소규모 업체들이 산재해 있어 그 시절의 명성은 잃었다. 미싱 소리가 가득했을 거리는 휴일이라 한산하다. 군데군데 ‘미싱사 구함’, ‘미싱 수리’ 등의 간판만 드문드문 보일 뿐 적막감이 감돈다.장위동에 봉제공장이 들어온 것은 1980년대라고 한다. 1970년대에 준공된 6개 동의 건어물 상가에 봉제업체와 자수업체가 들어오고부터다. 장위동은 이후 동대문 패션산업의 배후 단지로 성장했다. ‘내외’(NAEWAY)라는 상표로 와이셔츠, 점퍼 등을 만들어 판 신사복 전문업체 ‘내외패션’ 본사도 장위2동 새마을금고 앞에 있었다. 지금도 서울패션섬유봉제협회가 돌곶이역 근처에 있어 이곳이 한때 봉제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셔츠 전문 공장들이 많았던 장위동의 봉제산업은 2002년 월드컵 때 ‘Be the Reds’라고 적힌 붉은색 티셔츠를 만들어 내면서 ‘절정기’를 맞았다. 그러나 물밀듯이 들어온 외국 의류의 범람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서울미래유산의 후원으로 ‘봉제양명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부활’을 꿈꾸고 있다. 발걸음을 재촉해 다다른 곳은 장위 전통시장. 토요일인데도 상인들은 아침 일찍부터 가게를 열어 손님을 맞고 있다. 일을 마치고 장을 보러 온 봉제공들로 붐볐을 시장은 이곳저곳에 세월의 더께가 겹겹이 쌓여 있다. 이 시장은 400여m의 길이에 170여개의 가게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지금은 재개발사업으로 두 동강이 나 50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60여개 규모로 줄어들었다. 시장에는 어려운 이웃들이 아무나 가져갈 수 있는 식재료를 넣어 두었다는 냉장고가 있다. 쌀쌀한 날씨에 온기가 전해져 온다.전통시장과 접한 곳에 장위동 후생·국민주택단지가 있다. 6·25 한국전쟁의 전후(戰後) 주택난을 해결하고자 1950~1960년대 다양한 이름의 주택단지가 주요 도시에 지어졌다. 재건주택, 후생주택, 부흥주택, 국민주택 등인데 부족한 자재로 공병대를 동원해 짓다 보니 부실 공사를 피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는 청량리, 수유동, 갈현동, 불광동, 수유동, 남가좌동 등에서 지금도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958년에 들어선 장위동 후생주택을 자세히 살펴보니 벽체가 축대처럼 돌을 쌓은 모양이다. 처음에는 주먹돌이 들어간 흙벽돌을 썼다고 하는데 중간에 수리한 집들도 많다. 60년의 세월을 건너왔지만, 아직 단단해 보인다. ‘돌집’이라는 이름이 달갑지 않겠지만 겨울에 따뜻해서 좋다는 주민도 있다고 한다. 1층은 온돌이고 난방이 되지 않는 2층은 일본식 다다미로 만들었다. 장위동 국민주택은 1964년에 입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총면적이 5만 9000여㎡에 이른다는 조사가 있다. 장위초등학교에서 성북동 동아에코빌아파트에 이르는 장월로의 좌우 양쪽에 걸쳐 있다. 상당수 주택이 연립주택으로 재건축하는 등 단지가 변형되었지만 원래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각기 다른 시기에 형성된 후생주택과 국민주택의 원형을 확인하고 구분하기는 쉽지 않았다. 국민주택단지는 장위뉴타운 15구역 안에 있어 개발과 보존을 놓고 갈등을 겪고 있다. 서울시와 성북구는 2018년 이곳을 정비구역에서 주민투표를 거쳐 직권해제했다. 주민들은 소송을 내 서울시와 다투고 있다. ‘서울고법 판결에서 이겼다’는 조합 측의 알림 글이 눈에 띄었다. 재개발로 시가 10억원이 넘는 새 아파트들이 이미 들어선 구역도 있으니 해제된 구역 주민들이 반발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해제 구역의 일부에서는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13구역이 그런 곳이다. 골목길을 한참 걸어 도착한 곳이 ‘연주황골목’이다. 서울시 가꿈주택 골목길사업 1호로 24가구가 참여했다. 장위동에 감나무가 많아서 연주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지은 지 수십년이 더 되어 보이는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골목길이 아늑하고 아름답다. 담장을 낮추고 벤치와 화단을 만드니 이런 변화가 찾아온 것이다. 이 정도라면 개발 유혹을 견디고 동네를 떠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법도 하다.장위동은 조선 순조의 셋째 딸이며 조선시대의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와 연관이 있다. 윤의선에게 하가(下嫁)한 덕온공주는 1844년(헌종 10년) 헌종의 계비를 간택하는 행사에 참석했다가 급체로 사망했다. 덕온공주는 장위동에 안장됐는데 묘소는 개발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부마 남녕위 윤의선은 1865년 장위동 묘소 근처에 공주를 위한 재사(齋舍)를 짓고 살았다. 이런 인연으로 2012년부터 장위동에서는 덕온공주와 윤의선의 혼례를 재현하는 ‘장위부마축제’가 열리고 있다. 윤의선은 덕온공주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어 윤회선의 아들 윤용구를 양자로 삼았다. 윤용구는 고종 8년에 문과에 급제, 벼슬이 예조·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는 경술국치 후 일제가 남작 작위를 주었지만, 거부하고 ‘장위산인’(獐位山人)이라 자칭하며 장위동 재사에서 은거했다고 한다. 재사는 돌곶이역에서 북서울꿈의숲으로 이어진 도로 오른쪽 중간쯤에 있다. 서울시 민속자료 25호다. 이 집을 김진흥이라는 사람이 사들였다가 1998년 불교교단에 기증했다. 그래서 이름은 ‘김진흥 가옥’이지만 ‘진흥선원’이라는 절로 사용되고 있다. 답사단은 장위동 속의 부촌이었던 ‘동방단지’로 발걸음을 옮긴다. 고급주택들이 들어서 있던 곳으로 북서울꿈의숲과 접한 장위1동 언덕배기다. 1949년 서울로 편입될 당시 인구가 수천명에 지나지 않았던 장위동은 1950년대까지 대부분 논밭으로 이뤄져 있었다. 지금의 장위1동의 구릉지와 농토는 대부분이 윤용구의 후손들 소유였다. 6·25전쟁 이후 후손들은 옛 단위로 10만평에 이르던 넓은 땅을 팔았는데 그 땅을 사들인 것은 삼성생명의 전신인 동방생명이었다. 주택이 부족하던 시절에 자금력이 풍부한 보험회사에게 토지를 매입해 주택단지를 건설하도록 유도한 것은 정부의 전략이었을 것이다. 이름이 동방주택단지로 붙여진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지금도 동방고개, 동방어린이공원과 같이 동방 자가 붙은 이름을 찾을 수 있다. 동방주택단지는 정릉동에도 있었는데 장위동 단지가 4.6배나 더 컸다고 한다. 1968년 발행된 ‘동방생명 10년사’에 따르면 장위동 동방주택단지의 면적은 10만평보다 훨씬 큰 16만여평이었다. 그런데 이곳 주택들은 면적이 겨우 10평 안팎인 국민주택단지와는 대조를 이룬다. 대지가 100평이 넘는, 당시로서는 최고급 주택이었다. 서민주택 보급이라는 정부의 의도는 달성하지 못한 셈이다. 동방생명은 토지와 주택 분양으로 큰돈을 벌었을 것이다. 동방단지는 군 장성들과 유명 연예인들이 사는 곳으로 유명했다. 황영시, 노재현 같은 이름을 알 만한 장군들도 이곳에 살았는데 동방단지에 사는 ‘별’이 모두 32개였다는 말이 있다. 연예인으로는 문희와 이상해가 한때 거주했다고 한다. 대부분이 빌라 같은 공동주택으로 바뀌었지만 커다란 단독주택들이 그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전해 준다. 그중에 장위동 230의 49의 집이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1980년대 한국의 중산층 주택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1970년에 건축되었다가 1986년 건축가 김중업과 김수근이 리모델링한 집이다. 성북구가 이 집을 사들여 ‘김중업 건축문화의 집’으로 명명했다. 1층에는 장위마을 홍보실 등이 있고 위층에는 김중업 전시실 등이 있다. 답사단이 차례로 집 내부를 구경했다. 리모델링한 지도 30여년이 지났지만 실내외의 호화로움은 여전하다. 동방단지에서 길을 내려오면 도로를 건너 북서울꿈의숲에 이른다. 답사단은 창녕위궁재사에 모여 이번 답사를 마무리한다. 국가등록문화재 제40호인 이곳은 조선 순조의 둘째 딸이자 덕온공주의 언니인 복온공주와 부마 창녕위 김병주의 재사다. 한일병합 후 김병주의 손자 김석진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자결한 곳이기도 하다. 숲속에 합장됐던 복온공주와 부마의 묘소는 경기 용인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조선 말기 두 공주와 부마들, 그 후손들의 굴곡진 삶이 장위동 역사의 한쪽을 장식하고 있다. 장위동에서는 개발을 둘러싼 갈등과 알력이 10여년째 이어지고 있다. 장위동의 문제만이 아니라 서울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보다는 둘의 조화가 필요하다고 느낀 것은 답사의 수확이었다. 편리함만 추구하다 과거를 의식 없이 지우다 보면 역사와 기억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 손성진 서울신문 논설고문 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해설 최서향 서울도시문화지도사 ■다음 일정 제23회 노량진 산책 ●출발 일시 10월 31일(토) 오전 10시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더 안전해져요… 은평 전통시장 방역체계 구축·현대화 추진

    서울 은평구는 코로나19로 침체된 전통시장을 살리기 위해 방역 체계를 구축하고 현대화 사업을 추진한다고 19일 밝혔다. 은평구는 지난 3월부터 코로나19 장기전을 대비해 시장에 스프레이형 분무기, 소독약, 방역복 등을 계속해서 지원했다. 현재까지 7개 시장에서 155회 수시 소독을 진행하는 등 시장 자체 방역 체계를 구축했다. 또 낡은 시설로 인해 화재, 안전사고에 취약한 전통시장을 소비자들이 안심하고 방문할 수 있도록 상반기에 국비, 시비, 구비를 합쳐 총 4억원을 투입해 현대화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응암동 대림시장 외벽 및 옥상 보수보강공사, 대조동 대조전통시장의 스마트 사물인터넷(IoT) 화재알림시설 설치, 대림골목시장 노후전선 정비, 불광동 연서시장 화재방범용 폐쇄회로(CC)TV 설치 등이 진행될 예정이다. 김미경 은평구청장은 “코로나19로 침체된 전통시장과 소상공인을 돕기 위해서 다양한 제도가 시행되는 지금 소비자들이 더 안전하고 편안하게 시장을 방문하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흥미진진 견문기] 붉게 수놓은 김수근의 흔적…불광동서 만난 이국의 풍경

    [흥미진진 견문기] 붉게 수놓은 김수근의 흔적…불광동서 만난 이국의 풍경

    불광대장간에서 문학 작품 속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쇠 두드리는 소리가 “꽝”, “꽝” 하고 울려 퍼지는 게 너무 신기했다. 대장간 구경을 마치고 좀더 걸어가니 불광동성당이 나타났다. 건축가 김수근은 “건축은 빛과 벽돌의 조화”라며 사람들이 한 장 한 장 쌓아 올리는 따뜻한 벽돌 건물을 좋아했다고 한다. 불광동성당은 구조가 특이했다. 전면으로 입장하지 않고 옆으로 들어가서 내부의 길을 따라 빙 돌아서 들어가게 돼 있다. 성당 내부로 가는 벽돌로 둘러싸인 길은 매우 아름다워서 잠시 이국적인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성당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는 여느 성당들과 달리 화려하지 않고 단조로운 색들의 줄무늬로 이뤄졌다. 마치 한복의 색동저고리 소매 같았다. 이국적인 매력이 있으면서도 내부에 우리만의 특색을 겸비한 건축물이었다.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이동해 은평한옥마을 근처에 내렸다. 먼저 숙용 심씨 묘표를 보러 갔다. 숙용 심씨 묘표는 일본 도쿄의 한 공원 주변에서 발견돼 2001년에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밀반출됐던 문화재를 어렵게 되찾았는데 ‘왜 이렇게 잘 알려지지도 않고, 잡초 무성한 곳에 있을까’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잠시 들었다. 아들 영산군의 묘가 보이는 위치에 두게 돼 그렇다고 했다. 묘표 아래 ‘셋이서 문학관’이 있었다. 문학관에서 나와 조금만 걸으면 진관사 태극기비가 나온다. 일제강점기 백초월 스님께서 일장기에 먹물을 묻혀 만들어 불단에 숨겨 놓은 것을 2009년 발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은평역사한옥박물관 전망대에 올라 북한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절경과 한옥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느끼고 투어를 마쳤다. 이렇게 서울 곳곳을 누비며 현재가 역사의 연장선임을 실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박하민 이화여대 영어영문학부 3년
  • ‘서울스럽지 않은’ 경계의 땅에 내려앉은 한옥… 항일 숨결 속으로

    ‘서울스럽지 않은’ 경계의 땅에 내려앉은 한옥… 항일 숨결 속으로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2회 불광동과 은평한옥마을’ 편이 지난 13일 은평구 불광동과 진관동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더위를 피해 불광역 구내에 집결한 참가자 40여명은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불광대장간과 천주교 불광동성당을 찬찬히 둘러봤다. 참가자들이 독일제 쌍둥이 칼보다 한 수 위라는 ‘불광’ 부엌칼을 사려고 줄을 서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됐다. 김수근이 설계한 붉은 벽돌 성당은 “왜 굳이 유럽까지 성당 순례를 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행은 701번 시내버스를 잡아타고 진관사와 은평한옥마을까지 한걸음에 내달렸다. 답사 축지법(縮地法)이다.북촌 한옥마을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이층짜리 한옥마을길을 요리조리 걷는 기분이 삼삼했다. 대리석을 깎아 만든 수려한 조선 성종의 후궁 숙용 심씨 묘표는 압권이었다. 대리석 비석의 자태가 눈을 홀렸다. 걸레스님이자 화가 중광과 ‘소풍’의 시인 천상병, 소설가 이외수 등 ‘도적놈 셋이서’라는 제목의 시집을 낸 3명의 기인이사(奇人異士)를 모은 ‘셋이서 문학관’이 흥미진진했다. 백초월 스님의 얼을 느끼게 하는 진관사 태극기 비석을 거쳐 은평역사한옥박물관 옥상 전망대 정자에서 일정을 마무리했다. 초복 바로 다음날의 폭염도 북한산 바람 숲 아래에선 기를 펴지 못했다. 맵시 있는 개량 한복 차림으로 참가자들을 이끈 베테랑 정순희 해설사는 은평구의 중심 불광동과 문화예술촌으로 거듭나는 진관동에 서린 역사 실타래를 한 올 한 올 풀어냈다. 은평구는 ‘서울스럽지 않은’ 옛 풍광을 가장 오랫동안 간직했던 서울의 서북쪽 가장자리 고을이다. 서울의 25개 자치구 중 가장 늦게 편입된 막내 자치구이기도 하다. 아파트의 물결로 뒤덮이기 전까지 5000기가 넘는 무덤이 산재한 땅이었다.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이 언급한 대사찰 청담사의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나오고 서울에서 처음 통일신라시대 기와 가마터가 발견된 곳이다. 무덤과 유물은 조선시대 장례문화와 매장 풍습을 밝혀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됐다. 해발고도 132m의 나지막한 진관동 이말산 기슭에는 역관과 내시, 궁녀의 무덤이 수두룩했다. 중국으로 가는 의주로(통일로)의 길목에 위치했기 때문이리라. 의주로는 서울 서대문에서 의주까지 1080리 길에 이르는 조선의 제1대로였다. 중국과의 조공무역에서는 역관의 역할이 컸다. 지금은 전문직인 동시통역사이지만 조선시대 역관은 중인 신분의 대물림 직업이었다. 인동 장씨, 연주 현씨, 남양 홍씨, 우봉 김씨가 역관가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역관은 단순 통역관이 아니라 외교전문가였고, 무역상이었으며, 외국어 교육가였다. 때론 스파이 노릇도 마다치 않았다. 천주교와 실학이 이들의 손과 입을 통해 국내에 전파됐다. ‘실학파의 아버지’ 유대치, 오경석도 역관 출신이었다. 이말산은 역관을 93명이나 배출한 우봉 김씨의 선산이기도 했다. 조선 말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국제인’ 김득련의 묘가 남아 있다.내시와 궁녀의 무덤이 대거 발굴돼 이목을 끌었다. 진관내동 중골마을 백화사 옆에 이사문(李似文)을 시조로 모시는 이사문공파의 내시 분묘 45기가 실재했다. 국내 최대의 내시묘역으로 ‘내시들의 정원’이라고 불릴 만한 곳이다. 광해군 13년(1621)에 세워진 정2품 자헌대부 김충영의 묘가 가장 오래됐다. 왕과 왕비의 명령을 전하는 최고의 요직 대전 승전색을 지냈다. 비석이나 상석에 관직이 기록된 14기 중에는 종1품 숭록대부 2기, 종2품 상선의 묘 5기를 비롯해 정경부인에 오른 내시부부 합장묘도 7기가 있었다. 2003년 내시묘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뒤 4억 8000만원에 조경업자 손에 넘어가 파헤쳐졌다. 석물도 사라지고 상선 노윤천의 묘 등이 봉분도 없이 남았다. 현종의 유모였던 상궁 옥구 임씨, 임실 이씨의 묘도 마찬가지다. 사후 고향에 갈 수 없었던 내시와 궁녀가 묻히기에 딱 좋은 땅이었다. 이말산은 한양 사대문을 둘러싼 그린벨트지역인 사산금표(四山禁표)를 막 벗어난 지역이다. 궁에서 가까운 거리였다. 살아서 권력이 있던 자가 죽으면 묻힐 수 있는 공간이었다. 북한산 둘레길 내시묘역길에는 아쉽게도 내시묘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은평은 경계의 땅이다. 개성에서 서울로 들어서는 경계이자 서울과 고양, 양주 세 지방이 만나는 접경이다. 옛 조선 한성부 북부의 상평방, 연은방, 연희방이 도성의 서북경계였는데 이 중 연은방(홍제원계, 양철리계, 불광산계, 신사동계 등)과 연희방(수색리계, 증산리계, 성산리계, 망원정계 등)의 일부가 오늘의 은평구에 속한다. 18세기작 ‘해동지도’나 19세기작 ‘광여도’ 등을 보면 진관내동과 진관외동은 서울의 서북 외곽인 은평구의 가장 끝에 북쪽을 향해 돌아앉아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수봉에서 비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내려가다가 서오릉이 안겨 있는 효경봉에서 북으로 한 갈래가 갈라져 나가 창릉천을 맞는다. 이 줄기가 진관내동과 진관외동의 경계를 이룬다. 비봉에서 나지막한 산줄기 하나가 서북으로 길게 뻗어나가 한복판에 낮은 봉우리를 만들었는데 이게 이말산이다. 북쪽 창릉천의 낮은 지대가 진관내동이고 남쪽의 비봉에서 박석고개로 이어지는 큰 산자락 쪽이 진관외동이다. 1949년 고양군 일부가 서울시에 편입됐으나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 진관내리, 진관외리는 1973년까지 이어졌다. 서대문구 은평출장소를 거쳐 1979년에야 은평구로 승격됐다. 신라의 청담사, 고려의 신혈사·삼천사와 조선의 진관사는 천년고찰이다. 진관사는 1011년 고려 현종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진관대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 터에 큰 절을 세우고 대사의 이름을 따 세웠다. 태조 이성계도 물과 육지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에게 제사 지내는 수륙재(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126호)를 진관사에서 봉행토록 했다. 진관사의 신미대사가 첫 한글서적 중 하나인 ‘석보상절’을 펴낸 점과 세종이 성삼문·신숙주·박팽년·이개 등 집현전 학사들이 머물면서 훈민정음을 연구토록 경내에 독서당을 세워줬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진관사가 한글창제 비밀 작업 공간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민족대표 33인에 서명한 만해 한용운, 대각사의 백용성 스님과 함께 조선 불교계의 독립운동 선봉 백초월 스님의 본거지였다. 백초월 스님은 진관사와 진관사의 포교원인 마포 극락암을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내 비밀조직인 연통부의 불교계 연락본부로 사용했다고 한다. 2009년 진관사 칠성각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진관사 태극기와 인쇄물은 백초월 스님과 관련된 것으로 여겨진다. 태극기 보자기는 인쇄물을 싸고 있었는데 일장기 위에 먹물로 태극과 4괘를 그려 만든 것으로 파악됐다. 삼일운동 당시 사용된 태극기 대부분이 일장기에 덧칠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제정한 국기양식과 동일한 점 등이 인정돼 등록문화재 제458호로 지정됐다. 인쇄물은 삼일운동 직후 국내외 독립운동 현장에서 발간된 상하이판 독립신문, 신대한, 경고문, 조선독립신문, 자유신종보 등 6종 16점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발간한 신대한 2호와 3호는 유일본이다. 학계에서는 진관사의 태극기와 자료는 백초월 스님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본다. 백초월이 일본에서 체포돼 압송된 1920년 3월 이전 급히 숨겼다는 것이다. 1944년 청주형무소에서 순국하기 전까지 24년 세월은 체포와 옥고로 점철됐다. 진관사 태극기가 90년 만에 빛을 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진관사 진입로는 ‘백초월길’이라고 명명됐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제13회 부암동 능금나무길 ■일시 및 집결장소:7월 20일(토) 오전 10시 윤동주문학관 앞(창의문) ■신청(무료):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서울도시문화연구원(www.suci.kr)
  • 빨간 벽돌의 공장·창고 즐비한 골목… 수제화 역사가 숨쉰다

    빨간 벽돌의 공장·창고 즐비한 골목… 수제화 역사가 숨쉰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1회 성수동 붉은 벽돌마을’ 편이 지난 6일 성동구 성수동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뚝섬역 1번 출구에 집결한 참가자 40여명은 원조 대학서점 공씨책방을 둘러보고 성수동의 상징 붉은 벽돌마을 길을 찬찬히 걸었다. 성수아트홀~성수동 수제화거리~우란문화재단을 거쳐 서울경찰기마대에서 일정을 마무리했다. 코스 중 공씨책방, 수제화거리, 서울경찰기마대가 서울미래유산이다. 이날 올 들어 가장 더운 36도를 기록, 폭염경보가 발효됐지만 한강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과 서울숲이 내주는 넉넉한 나무그늘 덕분에 더위를 피할 수 있었다. 투어에는 부부와 모녀가 8쌍이나 참가해 미래유산 투어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줬다. 부인과 엄마를 따라 남편과 딸이 합류한 듯했다. 해설을 맡은 전혜경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참석자들이 단순히 말을 지켜보는 투어에서 탈피, 말먹이를 주도록 당근을 사전 준비해 액티비티가 있는 투어를 제공했다.조선 최고의 관찬 백과사전 ‘증보문헌비고’에 “살곶이다리(箭橋)는 사람들이 가장 빈번하게 왕래하는 도성 9개 다리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서울에서 뚝섬나루를 건너 청숫골(청담동)로 가거나, 광나루를 통해 강릉 방면으로 향하거나, 송파나루를 거쳐 광주로 나가는 동남지방의 관문이었다. 살곶이다리는 조선시대에 서울에 놓인 가장 큰 돌다리이기도 했다. 이 지역을 ‘화살이 꽂힌 평야’란 뜻인 전관평(箭串坪) 또는 살곶이벌이라고 불렀다. 한강이 중랑천과 합치는 중간에 있어서 너른 퇴적평야가 형성됐다. 말을 먹이는 목장이었기에 마장동이라는 지명을 낳았다. 마장에는 군인이 주둔, 열병과 무예를 검열했다. 성수동 1가와 2가에 걸쳐 있는 진터마을이 그 흔적이다. 왕이 말과 군대사열을 지켜보던 정자가 성덕정(聖德亭)이다. 열병이 끝나면 노루사냥을 즐겼다. ‘태조실록’ 4년 8월 1일자에 매를 관리하는 응방(鷹坊)이라는 관청을 뒀다는 기록이 응봉동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됐다. 왕이 머문다는 사실을 알리는 큰 기를 세웠는데 이를 독기(纛旗)라고 쓰고, 둑기 혹은 뚝기라고 읽었다. 독기를 세운 땅을 뚝섬이라고 불렀다. 이 지역의 이름이 뚝섬(둑섬) 혹은 뚝도(둑도)가 된 까닭이다. 이곳이 섬이라고 불린 이유는 아차산에서 중곡동, 능동을 지나 중랑천으로 유입되는 지류와 중랑천 그리고 한강에 의해 3면이 둘러싸인 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퇴적평야 지대에는 무, 배추, 오이, 미나리 같은 채소 재배가 적합했다. 거대한 소비시장을 끼고 있었고, 노동력이 풍부했다. 말 사육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조선시대 전국목장에서 사육한 4만~5만 마리 중에서 서울로 진상된 말 중 암놈은 자마장(자양동)으로, 수놈은 마장동으로 보냈다. 왕이 친히 말떼를 구경하던 화양정은 화양리에, 말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낸 마조단은 행당동 한양대 캠퍼스 안에 남아 있다. 뚝섬나루(성수동)와 두모포(옥수동)가 한강변 주요 나루로 쓰였다. 두 나루는 강원도에서 오는 건축용 목재와 연료용 시탄(숯)을 보관하는 천연 창고역할을 했다. 수철리(금호동)의 대장간과 뚝섬의 숯장이가 이름을 날렸다. 뚝도수원지와 기동차, 뚝섬유원지가 뚝섬의 옛 3대 명물이었다. 근대 이후 뚝섬의 변모는 1908년에 준공된 뚝도수원지가 이끌었다. 옛 경성수도양수공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상수도 시설이다. 초창기 서울시 5만 6000호 중 3분의1인 1만 8000호가 급수 혜택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뚝섬에 설치된 근대시설물 중 기동차는 추억의 기차다. 1930년 경성교외궤도주식회사가 왕십리~뚝섬 간 4.3㎞ 구간에 운행했으며 1934년 광장리(광장동)까지 지선 7.2㎞가 추가됐다. 애초 37대였던 기동차가 고장이나 노후로 말미암아 1950년대 말에는 18대로 반쪽이 됐다. 운행이 완전히 중단된 1966년까지 뚝섬 주민들은 기동차에 몸과 채소를 싣고 왕십리를 왕래했다. 1960~70년대 여름 피서철 뚝섬유원지에는 하루 평균 10만명의 인파가 몰렸고, 20만명 입장신기록도 세웠다. 당시 뚝섬유원지에는 70척의 놀잇배가 운행됐고, 20여개의 텐트가 난립했으며, 여학생 전용 수영장도 있었다. 사건·사고가 다반사인 서울 최대의 행락지였다. 뚝섬 일대는 1949년 서울시 성동구에 편입됐다. 성수동이라는 지명은 족보에 없는 새 이름이다. 성덕정에서 성(聖)자를 따고, 뚝도수원지에서 수(水)자를 따서 성수동이라고 융합 작명한 산물이다. 1954년 뚝섬경마장이 이전해오면서 성수동의 장소 관성을 깨웠다. 1928년부터 신설동에 있던 경성경마장이 한국전쟁 때 파괴되자 서울경마장이라고 이름을 바꾼 뒤 이전한 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승마경기를 치를 국제경기장이 필요해지자 과천경마장으로 옮겼다. 장소성은 경찰기마대가 이어받았다. 오늘의 붉은 벽돌마을을 남긴 성수동 공단은 어떻게 형성됐을까. 서울의 근교농업지대에서 공단으로의 변화는 1950년대 말 청계천 재개발과정에서 봉제, 섬유, 염색, 금속, 기계 공장들이 성수동으로 이전하면서 가속화됐다. 도심과 가깝고, 땅값이 싸고, 한강변 성수천을 끼고 있어 최고의 입지를 자랑했다. 1970년대를 전후 모토로라코리아, 아남산업, 대동화학, 금강제화, 오리엔트시계, 강원산업, 한일약품, 신도리코 등 종업원 300명 이상 대기업 15개 업체가 옮겨왔다. 100인 이상 업체도 73개였다. 빨간 벽돌로 지은 2~3층 공장과 창고, 연립주택이 성수천을 따라 바둑판 형태로 늘어서면서 공장지대로 면모를 갖췄다. 1971년 말 성수동 공단을 중심으로 한 성동구의 제조업체 총수는 671개로 서울 전체의 20%를 웃돌았다. 지하철2호선 순환선이 놓인 뒤 경마장 부근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공장지대나 전철역 주변을 중심으로 주거기능이 강화됐다. 특히 성수동 한복판을 가로지르던 성수천의 중금속 오염이 문제였다. 성수천은 1977년 복개공사로 덮었지만 공해 유발 업체는 쫓겨나고, 공장 신설도 금지됐다. 1983년 당시 성수동 공단에는 1273개 업체에 5만 2000명 이상이 종사하고 있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울에서 가장 많은 아파트형 공장이 지어진 성수동은 대표적인 주택과 공장 혼합지역이 됐다.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의 여파를 겪으면서 1997년 800여개의 공장 중 폐업한 공장이 300개를 넘었다.도시형 전통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수제화, 인쇄, 자동차정비업종이 스며들었다. 성수동의 새 3대 명물이다. 노동집약적 산업 대신 생활밀착형 산업을 앞세워 활로를 모색했다. 한국의 신발산업은 부산이 전략적 기지였으나 부산이 고무제품 중심이었다면, 서울은 가죽 제화산업의 중심이었다. 제화산업은 낮은 자본집약도와 상대적으로 낮은 단계의 기술투입, 높은 숙련인력 의존도, 높은 노동집약도가 필요했다. 해방 이후 서울의 수제화 산업은 염천교와 명동의 살롱화에서 싹텄다. 성수동은 수제화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다양한 신발공장과 수선에 필요한 부자재와 소재가 뒷받침했다. 강남과 도심 근접의 이점이 빛을 발했다. 생산부터 유통에 이르기까지 수제화 생산업체 400여개와 중간 가공 및 원부자재 유통 100여개 등 500여개의 업체가 모인 국내 최대의 수제화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대기업은 떠났지만 영세, 중소하청 업체들은 남아 수제화 산업 생태계를 복원한 게 더 값지다. 성수동은 한국 수제화 산업의 시간적 변천과 공간적 변천을 온몸으로 말한다. 지금 성수동은 ‘북촌=한옥’처럼 ‘성수동=붉은 벽돌마을’의 등식 성립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다음 일정: 제12회 불광동과 은평 한옥마을 ■일시 및 집결장소: 7월 13일(토) 오전 10시 불광역 7번 출구 ■신청(무료): 서울미래유산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go.kr) ■문의: 서울도시문화연구원 (www.suci.kr)
  • 일가족 3명 목숨 앗아간 ‘은평 아파트 화재’...전기 합선이 원인

    일가족 3명 목숨 앗아간 ‘은평 아파트 화재’...전기 합선이 원인

    일가족 3명의 목숨을 앗아간 서울 은평구 불광동 아파트 화재는 집 내부에서 전기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은평경찰서는 30일 사망자에 대한 부검과 화재현장 합동감식 결과 김모(91·여)씨와 아들 구모(64)씨, 며느리 나모(63·여)씨는 화재로 인한 질식과 화상 등 원인으로 사망에 이르렀다고 밝혔다.이날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김씨 등에 대한 부검 결과 전형적인 화재사 흔적이 발견됐다. 외부압력이 가해진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과 소방당국, 한국전력, 도시가스, 국과수가 5시간여에 걸쳐 진행한 합동정밀감식에서는 합선과 같은 전기적 요인에 의한 화재로 추정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경찰 관계자는 “주방이나 안방 쪽에서 처음 불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며 “정확한 발화 지점과 원인은 전선 등 수거물을 국과수에서 정밀감정 한 뒤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과 소방당국에 따르면 지난 28일 15층 아파트의 14층에서 난 불로 김씨 등 3명이 사망하고 소방당국 추산 3000여만원의 재산피해가 났다. 사고 아파트 내 소화전이 잠겨 있어 진화작업이 지연됐고, 지은 지 30년 넘은 아파트 내부에는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경찰은 아파트 내부 패쇄회로(CC)TV를 분석하는 한편 이 아파트의 관리소장과 소방안전관리자 등을 조사하고 소방법 위반 여부 등을 확인할 방침이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스프링클러 없고 소화전 먹통… 30년 된 노후 아파트의 비극

    스프링클러 없고 소화전 먹통… 30년 된 노후 아파트의 비극

    15층중 14층에서 불났지만 14·13층 소화전 물 안나와 동파 우려해 누군가 잠근 듯… 대피 안내방송 등 조치 없어 39명의 사망자를 낸 경남 밀양 세종병원 화재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또 화재가 발생해 일가족 3명이 목숨을 잃었다. 세종병원과 마찬가지로 미비한 방화시설 탓에 피해가 커졌다. 지어진 지 30년이 넘은 노후 아파트다 보니 스프링클러는 아예 설치돼 있지 않았다.29일 경찰과 소방당국에 따르면 지난 28일 오후 7시 7분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15층짜리 아파트의 14층에서 화재가 발생해 주민 김모(91)씨와 아들 구모(64)씨, 며느리 나모(63)씨가 사망했다. 30대인 김씨의 손자는 화재 당시 외출 중이어서 목숨을 건졌다. 은평소방서에 따르면 오후 7시 9분 최초 화재 신고가 이뤄졌고 4분 만인 7시 13분에 소방대원이 현장에 도착했다. 펌프차 등 장비 31대와 인력 99명이 투입됐다. 대원들은 화재 발생지점 아래층인 13층에 진입해 소화전을 사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다. 14층 소화전도 작동되지 않았다. 건물의 연결송수관에 펌프차를 연결해 물을 밀어올리려고 했지만 화재 지점까지 닿지 않았다. 결국 소방대원이 1층으로 내려가 펌프차에 직접 수관을 연결한 뒤 14층으로 올라가 진화를 시작했다. 그 사이 불은 15층 베란다까지 번졌다. 불은 신고 1시간 20여분 만인 8시 28분쯤 완전히 꺼졌다. 재산피해 규모는 약 3000만원으로 추산됐다. 은평소방서 관계자는 “소화전 배관 스위치가 ‘수동’에 놓여 있어 중앙 펌프가 작동되지 않았고 모든 아파트 배관이 비어 있는 상태였다”면서 “누군가 동파를 우려해 소화전을 잠갔을 가능성이 있는데 모든 소방시설은 소화관 배관 스위치를 ‘자동’으로 맞춰 놓아야 하기 때문에 이는 소방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해당 아파트 관리사무소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웃 주민 A씨는 “타는 냄새가 나 서둘러 대피했다. ‘불이 났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관리사무소는 관계자는 “화재 후 안내방송을 따로 하지 않았다”고 시인하며 “사고 관련해 더 할 말은 없다”고 했다. 이 아파트는 90가구 규모로 1987년 입주가 시작됐고 이듬해 사용승인을 받았다. 인근 부동산 관계자는 “예전에도 아파트에 화재가 나 주민이 사망한 사례가 있다”면서 “오래된 아파트라 누수 등 문제도 많아 재건축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은평경찰서는 아파트 내부 폐쇄회로(CC)TV를 분석하는 한편 관리소장 등을 상대로 누가 소화전을 잠갔는지 확인에 나섰다. 이어 소방당국과 한국전력, 도시가스와 함께 합동감식을 벌이고, 사망자 부검 결과를 종합해 정확한 화재 원인을 파악할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화재에 취약한 노후아파트에 대한 소방 관련 법규를 개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공하성 경일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오래된 아파트에도 스프링클러 설치를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면서 “소화전은 동파와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밸브를 항상 열어 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수 기자 tintin@seoul.co.kr
  • 연이은 화재에 국민 불안도 ↑

    연이은 화재에 국민 불안도 ↑

    연초부터 곳곳에서 화재가 끊이질 않고 있다. 불과 나흘전인 지난 26일 경북 밀양에서 화재로 37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도 매일 크고 작은 화재가 연이어 발생해 국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29일 오전 6시 5분쯤 경기도 평택시 통복동 통복시장 내 상가에서 불이 나 3층 상가와 점포 일부가 불에 탔다. 이날 화재로 상가 내부와 주변에 있던 시민 등 6명이 연기를 마셔 병원으로 옮겨졌다. 화재는 통복시장 입구에 위치한 3층짜리 상가에서 시작돼 인근 점포 2곳으로 옮겨 붙었지만 다행히 추가 인명피해는 없었다. 지난 28일에는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나 일가족 3명이 숨졌다. 이 화재로 연기를 들이마시고 병원으로 이송된 가족 3명 중 노모 김모 씨(91·여)가 화재 당일 숨진 데 이어 위독하던 구모 씨(64·남)와 아내 나모 씨(63·여)도 이날 새벽 끝내 숨을 거뒀다. 지난 27일에도 대구 신라병원에서 화재가 발생해 환자들이 긴급 대피하는 일이 발생했다. 대구소방본부는 화재 직후 소방차 53대와 소방관 112명을 현장에 투입해 20분여만에 화재를 진화했다. 이와 관련, 계속되는 화재로 불안해 하는 국민들을 위해서도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건물주의 안전불감증 ▲정부와 소방당국의 안이한 대응 ▲정치권의 보여주기식 구호 속에서 되풀이 되는 인재라는 분석이다. 따라서 정부는 끊이지 않고 있는 화재 사고의 철저한 원인과 책임규명을 통해 재발 방지에 만전을 기해야 하고, 또 이를 계기로 일반병원에까지 스프링클러 설치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밖에 상가 등 다중이용시설에 대한 더욱 엄격한 소방안전조치 이행과 미비한 소방법 개정에도 적극 나서 다시는 인재에 의한 재앙이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문경근 기자 mk5227@seoul.co.kr
  • 불광동 화재 일가족 3명 모두 숨져···“동파 우려로 소화전 펌프 잠가”

    불광동 화재 일가족 3명 모두 숨져···“동파 우려로 소화전 펌프 잠가”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15층짜리 아파트 14층에서 28일 발생한 불로 의식을 잃은 채 병원에 실려갔던 일가족 3명이 모두 숨졌다. 화재 진압이 20여분간 지체된 것은 한파로 인한 동파를 우려한 탓인지 아파트 중앙 펌프가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29일 경찰과 소방당국에 따르면 전날 오후 7시 7분쯤 구모(64)씨 집에서 난 불로 구씨 모친 김모(91)씨가 전날 숨진 데 이어, 이날 새벽 사이에 구씨와 아내 나모(63)씨도 끝내 숨을 거뒀다. 이 불로 윗층 집 베란다에도 불이 번졌으나 추가 인명피해는 없었다. 소방당국은 재산 피해는 3000만원으로 추산했다. 전날 화재 진압에는 펌프차 등 장비 31대와 인력 99명이 투입됐고, 화재 발생 1시간 20여분 만인 오후 8시 28분쯤 불이 완전히 꺼졌다. 주민들은 “아파트 내 소화전이 얼었는지 소방당국이 소화전을 사용하지 못해 약 20분간 작업이 지연됐다”고 전했다. 이는 아파트 중앙 펌프가 잠겨 있었던 탓으로 확인됐다. 은평소방서 관계자는 “지은 지 30년 된 오래된 아파트여서 중앙 펌프실에서 11개동 전체 소화전을 관리하는데, 소화전 배관 스위치가 ‘수동’에 놓여 있어서 중앙 펌프가 작동하지 않아 모든 아파트 배관이 비어있는 상태였다”고 밝혔다. 이어 “송수관에 펌프차 2대를 연결해 물을 밀어 올리려 시도했으나 배관이 비어있으니 물이 14층까지 도달하지 않았다”면서 “결국 땅 위에 있는 펌프차에서 수관을 5번 연장해 14층까지 끌어올리느라 시간이 소요됐다”고 설명했다.이 관계자는 “누군가 동파를 우려해 소화전을 잠갔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는 명백한 소방법 위반”이라고 말했다. 은평경찰서는 이날 해당 아파트 주민 등을 대상으로 탐문 조사를 벌인 뒤 30일 오전 합동 정밀감식을 진행할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동전 빨래방 북새통, 배수관 교체 바가지…한파가 만든 진풍경

    마치 ‘화재 바이러스’에 감염된 듯 전국에 화재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이와 동시에 맹추위로 인한 동파 사고도 속출하고 있다. 28일 소방당국에 따르면 이날 오후 7시 7분,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연기를 흡입한 주민 3명이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다. 불은 1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진화됐다. ●대구 신라병원 등 주말 화재 308건 지난 27일 오후 9시 29분 대구 신라병원 2층에서 불이 나 환자들이 긴급 대피했다. 화재 경보가 빨라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병원 5층과 6층에 있던 중환자 15명과 경증 환자 20여명은 출동한 소방관과 경찰관 등의 도움을 받거나 자력으로 무사히 대피했다. 그러나 신라병원도 38명의 사망자를 낸 경남 밀양 세종병원과 마찬가지로 스프링클러 설치 대상 건물이 아니어서 하마터면 대형 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이날 오전 4시 16분 경북 포항 남구 일월로의 한 아파트 2층에서 불이 나 주민 9명이 연기를 흡입해 병원으로 이송됐다. 40분 뒤인 4시 56분에는 인천 서구 공장 밀집지역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서울에서도 화재가 줄을 이었다. 지난 27일 강서구에서는 오후 5시 10분 개화산에서 불이 나 남성 1명이 숨졌고, 오후 10시 5분 마곡동의 한 공사장 컨테이너에서 불이 났다. 성동구에서도 오후 3시 30분 다세대 주택에서 휴대용 부탄가스가 폭발해 주민 A(49·여)씨가 화상을 입었고, 오후 6시 30분 성수동의 한 지하 인쇄업소에서 에어컨과 전기배선에 불이 붙어 크게 번졌다. 소방청에 따르면 26·27일 이틀간 전국에 308건(밀양 화재 제외)의 화재 사고가 발생해 7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을 당했다. ●“세탁기 금지” “배수관 교체 50만원” 한편 연일 한파로 서울 곳곳에 세탁기 배수관이 얼어붙으면서 ‘동전 빨래방’이 북새통을 이루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빨래방 주인은 이날 손님이 평소보다 10배 이상 몰리자 ‘셀프 빨래방’인데도 이날 출근해 세탁기 사용을 도왔다. 아파트 저층부의 배수관이 얼어붙어 물이 빠지지 않고 역류하는 현상도 잇따랐다. 아파트 관리실에서는 “세탁기를 돌리지 말라”는 방송을 해댔다. 설비 업체들은 배수관 교체에 최대 50만원을 달라고 하는 등 ‘바가지’를 씌우며 대목 효과를 누려 눈총을 샀다.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 은평 아파트서 화재…1명 사망 2명 중상

    은평 아파트서 화재…1명 사망 2명 중상

    한파에 소화전 얼어 초기 진화 지체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아파트에서 불이나 1명이 숨지고 2명이 크게 다쳤다. 40대가 넘는 소방차와 130명 이상의 소방대원이 출동했지만 한파 때문에 소화전이 얼어붙어 불을 끄는 데 한시간이 넘게 걸렸다.경찰과 소방당국에 따르면 28일 오후 7시 7분쯤 불광동 15층 높이 아파트의 14층 구모(64)씨 집에서 불이 나 1시간 20여분만에 완전히 꺼졌다. 이 화재로 구씨와 구씨의 어머니, 아내 등 3명이 구조돼 심폐소생술을 받으며 근처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어머니 김모(91)씨는 숨지고 구씨 부부는 중태다. 아파트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건물 밖으로 대피해 불이 꺼질 때까지 담요를 덮고 기다렸다. 소방당국은 펌프차 등 장비 42대와 인력 132명을 투입했으나 초기 진압까지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아파트 주민 임모씨는 “날이 추워 단지에 설치된 소화전이 얼어 작동하지 않았다”며 진화가 지체된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대해 소방당국 관계자는 “화재 당시 소화전이 작동하지 않았는지 점검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정확한 화재 원인 등을 조사하고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포토] ‘불길 치솟는’ 불광동 아파트 화재

    [포토] ‘불길 치솟는’ 불광동 아파트 화재

    28일 저녁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한 아파트 상층부에서 화재가 발생해 연기와 함께 불길이 치솟자 소방대원들이 옥상으로 진입해 진화 및 주민 구조 작업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지자체 앞다퉈 문학관 건립… 왜 문학계는 환영하지 않나

    지자체 앞다퉈 문학관 건립… 왜 문학계는 환영하지 않나

    문학계 “인기 작가 과잉소비 우려”… 설립 예정 국립한국문학관 활용 고민을문학이 읽히지 않는 시대라지만 문학관 설립은 전성기를 맞은 듯 활발하다. 전국 공·사립 문학관이 106개(3월 기준)에 이르는 가운데 이달 중순 경기 광명에 기형도 문학관이 들어섰다. 오는 30일에는 전남 고흥에서 조정래 가족문학관이 문을 연다. 조정래 작가와 부친인 시조시인 조종현, 아내인 김초혜 시인의 문학세계를 아우르는 문학관으로, 문인 가족의 문학관이 세워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와 함께 조정래 작가는 작품의 배경지에 세워진 ‘태백산맥 문학관’(전남 보성), ‘아리랑문학관’(전북 김제)에 이어 세 번째 문학관을 열게 됐다.지난 9월 이호철통일로문학상을 제정한 서울 은평구는 내년 하반기 은평구 불광동 북한산생태공원 인근에 이호철문학관을 세울 예정이다. 내년 11월에는 충남 논산에 김홍신 문학관·집필관이 들어선다. 2020년을 목표로 고은 시인 문학관 설립을 추진 중인 고은재단과 경기 수원시는 지난 5월 세계적인 스위스 건축가 페터 춤토르에게 설계를 맡긴 상태다. 고은재단 관계자는 “춤토르가 고은 시인의 독일어 번역 시집을 읽고 설계를 수락한 만큼 고은 시인의 문학 정신이 잘 구현된 공간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작가 개인 문학관뿐 아니라 강릉, 광주, 울산, 제주 등 각 지역에서도 지역 문학을 대표하는 문학관을 세우자는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전보삼 한국문학관협회 회장은 “지난해부터 문학진흥법이 시행되면서 문학관도 학예사·프로그램 운영 등 제도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며 “이에 따라 여러 지방자치단체나 작가들의 관심이 커지며 최근 문학관 설립이 더욱 활발해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전문인력 배치를 위한 인건비 지원은 올해 18개(3억 5200만원) 문학관에서 2021년 50곳(10억원)으로, 프로그램 설계·운영을 위한 지원은 올해 26개(2억 5000만원) 문학관에서 2021년 50곳(10억원)으로 늘릴 계획이다. 문학계에서는 문학을 향유하는 분위기가 척박한 상황에서 다양한 성격의 문학관이 세워지는 것은 긍정적이나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기초 자료조차 잘못된 부실한 콘텐츠, 문학관을 운영할 장기 기획 부재 등으로 독자들의 발길이 끊긴 ‘자료의 무덤’, ‘박제된 건물’만 양산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 문학계 인사는 “지방자치단체 수장들이 공약사업으로 내걸어 예산 따먹기 식으로 만들어 놓고 돌보지 않아 방치된 문학관이 부지기수인 건 문제”라며 “실제로 가 보면 문학관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볼만한 자료도 없고 문학정신을 배울 수 없는 곳이 수두룩하다”고 했다. 또 최근 하나둘 생겨나는 생존 작가 문학관의 경우에는 더욱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지금까지는 작고한 작가를 기리는 문학관이 대부분이었으나 2012년 강원 화천에 세워진 이외수 문학관이 관광명소로 성공을 거두며 지자체들이 지역 이미지 제고, 관광객 유치 등을 위해 인지도 높은 생존 작가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이에 대해 유성호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아직 문학적 평가가 완성되지 않은 생존 작가의 문학관을 성급하게 지어 올리는 건 장기적으로 볼 때 문학적 평가를 왜곡시킬 수도 있다”며 “일부 지자체가 수익성만 따져 인기 작가를 과잉 소비함으로써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작품성이 뛰어난 작가들을 사장시키는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때문에 전문가들은 앞으로의 문학관은 작가에 대한 면밀한 평가, 콘텐츠·기획에 대한 고민과 함께 박제된 전시 공간에서 벗어나 독자들과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는 체험형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문재원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교수는 지난해 문예지 ‘작가와 사회’에 게재한 기고 ‘문학관과 장소정치’에서 “10여년 문학관 문을 열어 놓고 보니, 문학관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드나드는 사람들이고, 무엇보다 일상의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이라는 목소리들이 현장에서 나온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해부터 ‘부지’를 둘러싼 논란만 거듭되고 있는 문학계의 숙원인 국립한국문학관 역시 문학관을 채울 콘텐츠와 시민들이 문학을 향유할 수 있는 활용법 등에 중지를 모아야 한다는 의견이 크다. 문체부는 지난 8일 ‘문학진흥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공청회’를 통해 문학진흥정책위원회 표결 결과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부지를 국립한국문학관 부지로 의결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주 구성되는 국립한국문학관 설립추진위원회가 내년 6월까지 부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예정이다. 이와 별도로 문체부는 다음달 중 전문가로 구성된 자료수집위원회를 꾸려 문학관을 채울 ‘소프트웨어’를 모색한다는 계획이다. 자료수집위원회에서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문학 작품, 유물, 유적 등을 근대문화재로 등록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등 우리 문학 유산의 수집·보존 대책을 마련한다. 이와 관련, 오창은 중앙대 교수는 “지난해 독일 현대문학관은 ‘움직이는 전시’라는 기획을 통해 2차 세계대전 당시 부상 군인들의 병동에 있던 책, 기차에서 승객들이 두고 간 책 등을 보여 주며 1910년대 책이 어떻게 움직이고 공유됐는지에 대해 관람객들의 상상력을 한껏 키우는 전시를 마련했다”며 “이와 같은 시선의 전환을 통해 앞으로의 문학관은 전형적인 전시 형태에서 벗어나 시민들이 콘텐츠를 다채롭게 즐기며 문화적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참여형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현식 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우리 문학사를 아우를 국립한국문학관인 만큼 친일·월북 작가에 대한 평가를 객관적으로 제시하고 정전(正典)을 확립하는 기능도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따뜻한 예술인의 낭만… 뜨거운 지식인의 고뇌… 은은한 근현대 문·예향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따뜻한 예술인의 낭만… 뜨거운 지식인의 고뇌… 은은한 근현대 문·예향

    서울신문은 ‘서울미래유산’을 시민과 공유하기 위해 서울시·문화지평과 함께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을 매주 토요일 진행한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co.kr)에서 답사 코스 확인과 참가 신청을 할 수 있다. 다음달 3일 20회차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은 전상봉 서울미래유산해설사의 설명으로 오전 10시부터 2시간 30분가량 마포대로 일대를 살펴본다. 이 지역은 활인서터, 경성감옥터, 3·1만세 시위터, 별영청터, 읍청루터 등 유적지와 최대포집, 역전회관 등 서울미래유산 노포식당이 즐비하다. 관심 있는 시민은 오전 10시까지 지하철 5호선 애오개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되면 인증서와 함께 소유주가 원할 경우 건물 외벽에 현판을 부착한다. 상징 도안은 서울미래유산으로 등록됐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 인장 형식으로 디자인됐다. 인장색은 서울 대표색 중 ‘단청빨간색’을 사용했다. 서울미래유산은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은 서울의 근현대 문화유산 중에서 미래세대에게 전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의 문화자산 중에서 선정한다. 서울시는 지금까지 372개의 미래유산을 지정했고 앞으로 1000개까지 늘린다는 방침이다.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은 생전에 “건축은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고 했다. 김수근은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기사에 여러 번 등장한다. 자유센터, 경동교회, 불광동 성당, 잠실 종합운동장, 정부서울청사, 워커힐 호텔 힐탑바(현 피자힐) 등 도심 곳곳에 그가 설계한 건축물이 많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17회차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출발지였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은 그의 건축물이 유독 많은 곳이다. 샘터극장, 아르코예술극장, 아르코미술관, 옛 한국국제협력단 건물 등 그가 말한 ‘벽돌이 짓는 시’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벽돌 건물이 사방에 들어서 있다. 그가 건축재료로 벽돌을 좋아했던 이유는 ‘실용과 예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리 급해도 벽돌은 한꺼번에 쌓지 못한다. 때문에 한 장 한 장 단정히 쌓지 않으면 무너지거나 제대로 힘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벽돌이 지닌 조소성은 무한히 인간화되는 과정을 상징한다”고 했던 벽돌예찬론자였다. 샘터사옥, 아르코예술극장, 아르코미술관은 모두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김수근作 샘터사옥·아르코예술극장한 장 한 장 쌓아올린 벽돌과 빛으로 지은 건물 샘터사옥은 1979년 지어져 연극인·화가 등 예술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많이 이용되는 공간이다. 대학로 랜드마크 중 한 곳이다. 1980년 제2회 한국건축가협회상을 받을 정도로 건축미를 인정받았다. 이날 해설을 맡은 한선영 서울미래유산해설사는 “샘터 사옥은 종로구 미관 건물로 지정돼 있어서 건물 외관을 건드리지 않고 유지, 보수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며 “대학로를 상징하는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으로서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자부심을 갖고 있다. 건립 당시 모습이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돼 있어 건축사적인 측면에서 보존 가치가 높다”고 해설했다. 아르코예술극장은 ‘공연예술 진흥과 공연인구 저변 확대를 위한 전문공간 확보, 재정난을 겪는 예술단체들을 위한 발표공간 마련·조성’이라는 취지로 1981년 문을 열었다. 아르코예술극장 개관은 명동·광화문 등 시내에 있던 공연장들을 동숭동으로 이동시키는 촉매 역할을 했다. 현재 동숭동 일대는 97개 극장이 들어서 있고 명실상부한 연극과 문예의 중심지다. 아르코미술관은 옛 서울대 본관 자리에 들어선 전시 전문 공간이다. 미술관이라는 기능 때문에 창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이 건물들이 위치한 마로니에 공원은 과거 서울대 본부가 있던 곳이다. 1975년 3월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택지로 개발하려 했지만 여론에 따라 공원으로 조성됐다. 지금은 서울대학교유지기념비를 통해 과거 상아탑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마로니에 공원에는 조선 중기 문신인 해남 윤선도의 생가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조선 후기 화가인 표암 강세황도 동승아트센터 근처에서 자랐다. 소설가 김훈도 마로니에 공원 뒤쪽 낙산을 올라가는 이화동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소설가 한무숙도 혜화동에서 태어났다. 마로니에 공원으로 대변되는 대학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문향과 예향’이 넘쳤던 곳이었다. 미래유산 보고 서울대병원·학림다방근대 의학의 산실…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된 곳 공원 건너편에는 서울미래유산이자 근대 의학의 산실인 서울대병원이 있다. 병원 내 시계탑 건물은 1907년 고종 황제 칙령으로 설립한 대한 의원 건물로 사적 248호로 지정돼 있다. 지금은 의학박물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앞서 1885년 제중원, 1899년 의학교, 1899년 광제원, 1902년 의학교부속병원, 1905년 대한국적십자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07년 대한의원으로 개원했다. 대한의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의 맥을 이으며 서울대병원의 전신이 된다. 대학로에서 서울대병원을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서울대 의과대학 정문 옆에는 서울미래유산 학림다방이 있다. 학림다방은 1956년 문을 열었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된 학림사건으로 유명한 곳이다. 소설가 이청준·김승옥, 시인 김지하·황지우 등 문학인들이 단골로 다녔던 곳이다. 다방 이름은 서울대 문리대가 마로니에 공원에 있던 시절의 축제인 ‘학림제’에서 따왔다. 신반포에 사는 김혜정(45)씨는 “학창 시절 마로니에 공원에서 연극 보고 나와서 커피를 마시던 추억이 떠오른다”며 “그동안 서울의 많은 것을 못 보고 살았는데 앞으로 부지런히 찾아다니겠다”고 말했다. 시비·기념비·흉상 가득한 대학로안창호 비석·타고르 시비 등 곳곳에 새긴 역사 대학로 주변에는 유난히 돌에 새긴 시비와 기념비, 흉상들이 많다. 흥사단 건물 앞에는 도산 안창호(1878~1938)의 흉상과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란 말씀 비석이 서 있다. 그 옆으로는 시인 김광균(1914∼1993)의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설야’(雪夜) 시비와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로 우리나라를 알렸던 인도 시인 타고르의 흉상 시비도 나란히 서 있다. 혜화동 로터리 우리은행 혜화동 지점 앞에는 한국기독교문인협회장을 지낸 김영진 시인의 ‘혜화동 로터리’라는 시비도 서 있다. 혜화동 로터리에는 4·19혁명 때 서울대와 함께 큰 몫을 한 동성고등학교가 있다. 학교 담벼락 앞에는 ‘4·19 횃불 바로 여기에서’라는 표석이 그날의 역사를 품고 섰다. 동성고 옆으로는 등록문화재 제230호로 지정된 혜화동 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혜화동 로터리 북쪽에는 1953년 문을 연 동양서림이란 책방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역사학자 이병도(1896~1989)의 장녀인 이순경씨가 문을 연 이 서점은 점원으로 일하던 최주보씨가 인수해 딸에게 물려줬다. 답사에 참가한 이동고(51) 한·아세안센터 부장은 “늦잠 자던 토요일에 일찌감치 도심으로 나와 문화유산을 만나면서 걷다 보니 주말이 산뜻하다”며 “서울신문과 서울시의 답사 기획이 시민들의 인문지식 함양에 좋은 밑거름이 되고 있다”고 했다. 60년 문화 이용원·40년 연우소극장혜화로 골목마다 시대상 간직·공연 열기 이어가 혜화동 로터리부터 혜화초등학교까지 이어지는 혜화로 골목 구석구석에는 동숭무대소극장, 선돌극장. 눈빛극장, 게릴라극장 등이 포진하면서 대학로의 공연예술 열기를 이어가고 있다. 이 골목에는 1940년대 문을 연 문화 이용원이 중간에 몇 차례 주인이 바뀌긴 했지만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다. 같은 장소에서 60여년 동안 운영된 이발소로, 혜화동 일대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장소로 서울미래유산이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오르면 혜화 칼국수가 나오는데, 이곳은 1970년대부터 경상도식 사골국수를 전문으로 했다. 박정희 정권이 1969년 분식장려운동을 펼치면서 국숫집이 성업할 당시 문을 연 것으로 보인다. 한 해설사는 “고개 넘어 한성대 입구 성북동 ‘국시집’은 서울미래유산이지만, 역사가 더 오래된 혜화 칼국수는 미래유산으로 지정받지 못했다”며 “서울미래유산은 소유주의 자율적인 참여를 우선시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내년이면 창단 40주년을 맞는 연우소극장 골목으로 접어들어 내리막을 걸으면 등록문화재 357호인 장면 가옥이 나온다. 장면(1899~1966)은 제1공화국 국무총리와 부총리, 내각제였던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정치 거목이다. 장면의 처남 김정희가 설계한 이 집은 한·일·양식이 혼합된 특징을 갖는다. 한옥으로 된 한명숙 문학관도 인접해 있다. 이 지역부터 시작된 명륜동 한옥밀집지역 전체가 서울미래유산이다. 과천 청계 초등학교 3학년 고승현(9)군은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엄마와 같이 나왔다”며 “경기도에도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에서 공식 답사를 마치고 한 해설사는 희망자를 이끌고 이화동벽화마을(서울미래유산)과 이화장(사적 497호)을 보기 위해 길을 건넜다. 이날 대학로는 이미 제3차 민중총궐기 참가자들로 꽉 차 있었다. 이화장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귀국 후 살았고, 3·15 부정선거 후폭풍으로 하야한 후에도 잠시 머물렀던 공간이다. 역시 박근혜 정부의 하야 여론이 무성한 시점, 미묘한 감정으로 열일곱 번째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이 마무리됐다. 글 사진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 ‘삶의 책꽂이’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 ‘삶의 책꽂이’

    그의 방은 책의 숲이기도 했고, 서화의 숲이기도 했다. 또는 사진의 숲이기도 했다. 파주출판도시의 한길사 건물 3층에 자리한 그곳에는 김언호(71) 대표가 40년 동안 출판인으로서 가꿔 온 철학과 여정이 속속들이 배어 있었다. 벽 한쪽에는 그가 지금까지 써 온 서예 작품들이 1m 정도 높이로 쌓여 훈훈한 묵향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기자분도 책 많이 보시지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살짝 고갯짓만 하고 말았다. -전국이 비상계엄의 장막에 갇혀 있던 1980년 2월 중순 어느 날, 나는 서울시청 건물에 차려진 계엄사령부를 내 발로 찾아갔다. 총을 둘러멘 군인들을 지나 2층 신문·서적 검열실로 올라가는 내 손에는 ‘판금(판매금지)도서’ 3권이 들려 있었다. “이 책들 제대로 읽어보기는 하셨습니까?” 검열실 담당자들에게 물었다. 다행히 검열의 실무 작업은 군인들이 아닌, 시청 직원들이 하고 있었다. 다소 용기가 났다. “민주주의 국가사회를 건설하려면 이만 한 수준의 논의는 허용돼야 합니다.” 검열실 뒤에는 소령, 중령 계급장을 단 장교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시청 직원들은 나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김언호 대표님 말씀에 공감은 가지만, 판금된 책에 아무런 수정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저희가 ‘검열필(畢)’ 처리를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필자들을 설득해 약간씩 내용을 수정했다. 얼마 후 책 3권의 맨 앞 장에 붉은색 검열필 도장이 찍혔다. 그 세 권의 책은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 그리고 ‘해방전후사의 인식’(제1권)이었다. 그때 그 책들이 복권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한길사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불을 밝힌 보석과 같은 책들을 세상에 낼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아이로니컬한 일이다. 군홧발과 총칼로 들어선 신군부의 계엄 통치하에서 박현채, 리영희 선생의 책과 민주주의 운동의 교과서로 통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은 평생을 검소하고 성실한 농군으로 사셨다. 6·25가 한창이던 1952년 초등학교에 들어가 중학교까지 고향인 경남 밀양에서 나왔는데, 동네에서는 책이란 걸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우리 수준에서는 수련장이나 영어단어장 정도가 전부였다. 당시 독서에 대한 욕구의 빈 공간을 채워 준 건 부산에서 사범학교에 다니던 큰형이 집에 올 때마다 가져온 잡지 ‘사상계’였다. 중학생이 쉽게 이해할 만한 글들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뭐가 됐든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형은 ‘사상계’ 안에서도 함석헌 선생의 글을 자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의 삶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1961년 부산상고에 입학했는데, 그해 5·16 정변이 났다. 우리 학교가 있던 서면에도 탱크와 군인들이 진주했다. 얼마 후 나온 사상계 7월호에 함석헌 선생의 글이 실렸다. ‘(박정희 님은) 단지 손에 든 칼만을 믿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무력만으로 얻지 못합니다.’ 선생의 글은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 주는 통쾌함 그 자체였다. -사상과 시국에 관심을 가지면서 언론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됐다. 중앙대 신문학과 64학번으로 입학했다. 2학년 때인 1965년 4월 한·일 기본조약 협정이 체결됐다. 전국이 반대 시위로 물결쳤다. 나도 그 속에 있었다. 어느 날 흑석동 캠퍼스 교문을 나와 한강대교 쪽으로 진출하며 구호를 외치다 경찰에 체포돼 선후배들과 함께 영등포경찰서에 끌려갔다. 우리 12명에 대해 구속영장이 신청됐는데, 그중에서 나를 포함한 3명의 영장이 발부돼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몇 숟가락 안 되는 꽁보리밥에 허여멀건 국물.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 때까지 늘 배가 고팠다. 태어나서 배고픔이란 걸 처음 느꼈다. 사형 집행도 보았다. 옆 방에 있던 2명이 교수대에 매달리던 그날 저녁 구치소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당시 우리 같은 대학생들은 교도소 내에서 꽤 예우를 받았다. 절도, 사기, 폭력 등 화려한 전과 기록의 잡범들과도 형, 동생처럼 친해져 많은 얘기를 나눴다. “범죄를 저지를 조건이 없어야 범죄가 안 일어날 것 아닌가. 이들이 대책 없이 그냥 사회로 나갔다간 언젠가 다시 이곳에 돌아오게 된다.” 이 부분은 나중에 사회부 기자가 된 후 내 취재의 주된 관심사였고, 실제로 나는 이에 대한 기획기사를 많이 썼다. 서울구치소 생활 두 달 만인 6월 중순 형의 도움으로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1975년 3월 나는 해직기자가 됐다.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송건호 당시 편집국장 등과 함께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을 당했다. 1968년 입사하고 햇수로 8년 만이었다. 1년 정도 다른 직장을 거쳐 1976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한길사를 차렸다. 은평구 불광동의 언덕배기 집 거실이 우리 회사였다. -“왜 멀쩡한 기자는 때려치우고 사서 고생을 하니.” 한길사를 차리고 몇 달 후인 1977년 봄, 결국 고향의 어머니에게 손을 벌리고 말았다. 책을 내려면 종잣돈이 있어야 했지만, 신문사에서 해직된 뒤 경제적인 궁핍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주신 30만원으로 그해 9월부터 ‘오늘의 사상신서’ 시리즈를 냈다. 동아일보 선배인 송건호 선생의 ‘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를 첫 권으로 해서 고은 선생의 ‘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 등 3권을 차례로 펴냈다. 그러나 이 책들은 발간과 동시에 ‘불온서적’으로 몰려 판매금지를 당했다. 리영희 선생은 출간 직후인 11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나의 아내 박관순(현 한길사 부사장)도 연행됐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아내가 회사의 대표로 등록돼 있었던 탓이었다. 아내는 얼마 후 풀려났지만, 리영희 선생은 2년간 옥고를 치르고 1980년에야 만기 출소했다. -이후로도 발간하는 족족 ‘판금’의 딱지가 붙었다. 1978년 4월에 나온 ‘민족경제론’이 그랬고 1979년 10월 16일 펴낸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그랬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나오고 10일 후에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0·26이 터졌는데, 그로부터 이틀 뒤인 10월 28일 문화공보부 출판 담당 과장이 나를 불렀다. 그의 책상 위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펼쳐져 있었다. “친일행위를 좀 했다는 게 뭐 대수냐. 그걸 지금 들춰내서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냐”고 엄포를 놨다. 그는 “구속이 당연하지만 이번만 봐 준다”며 그 책의 재고를 전량 문공부로 보내라고 윽박질렀다. 그때 용달차에 500여권을 실어 보냈는데, 그 책들의 ‘생사’는 지금도 알 길이 없다. -1980년 2월에 복권된 3권의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특히 학생들 사이에 ‘해전사’로 통했던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1989년까지 총 6권이 나오는데, 사회과학 서적으로는 경이로운 40만권 판매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 책을 기획한 것은 1979년 봄이었다. “우리가 외세(미국·소련)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이 됐다고 하지만 이유가 단지 그것뿐일까?” 나의 문제의식의 출발점이었다. 책의 기획안을 송건호 선생에게 맨 처음 보여 드렸다. 무릎을 탁 치더니 “나도 한 편을 쓰고 싶다”고 하셨다. 결국 송건호 선생이 쓰신 첫 번째 장 ‘해방의 민족사적 인식’이 사실상 책의 총론이 됐다. -어두운 시대에 사회과학 서적을 내면서 회사와 나에 대한 위협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때마다 요리조리 잘 피했다는 생각이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든다. 1981년 8월이었다. 당시 문공부 과장으로부터 “조심하라”는 경고 전화가 걸려오더니 얼마 후 ‘3개월 영업정지’ 조치가 떨어졌다. 3개월이 지나서도 정지가 안 풀리면 등록이 취소되는 수순이었는데, 정부로서는 그걸 노린 조치였다.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책들을 낸다는 이유로 출판사를 폐쇄하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만들겠다는 새 정부의 취지에도 맞지 않습니다.” 당시 서울대 정치학교 교수로 있던 김학준 전 동아일보 회장 등이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 주었다. 그런 도움들 속에 영업정지 처분은 일주일 만에 없었던 일이 됐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나는 허문도 정무수석과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만나 ‘올바른 출판인의 길’에 대해 일장 훈시를 들어야 했다. -1988년 작곡가 윤이상 선생을 독일 베를린에서 만나고 돌아온 뒤에는 1년 반에 걸쳐 출국금지를 당했다. 윤이상 선생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요 민족문화론자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이데올로기란 가을날 떨어지는 낙엽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민족은 저 푸른 창공처럼 푸르른 것이다.’ 세계가 연구하고 연주하는 음악가인데 그가 왜 자기 조국에서는 나래를 펼 수 없었던 것인지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1995년부터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소설 ‘로마인 이야기’를 펴내 2007년 15권을 완간했는데, 이 책이 400만권 정도 팔렸다. 최명희의 소설 ‘혼불’도 350만권 이상 나갔다. 판권이 바뀌기 전까지 우리가 찍었던 ‘태백산맥’도 약 400만부가 판매됐다. 내가 27권짜리 ‘한국사’를 비롯해 경제성에 약점이 있는 각종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출간할 수 있도록 해준 ‘효자’들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낼 때에는 상업성이 떨어진다며 주변의 많은 사람이 반대했다. 하지만 나는 이탈리아 로마로 저자를 직접 만나러 가 번역 판권을 확보했다. -보편적인 인문주의와 인문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출판 인프라 구축 운동 차원에서 1996년 ‘한길 그레이트북스’ 출간을 시작해 다음달이면 150번째 책이 나온다. 지난해에는 세계의 서점들을 찾아다니는 기행을 신문에 연재했다. 글은 물론이고 그 안에 들어가는 사진들도 모두 내가 찍었다. 그 연재물을 다듬고 보완해서 얼마 전 ‘세계서점기행’이라는 이름으로 냈다. 종이책의 미학과 존엄을 보여 주기 위한 기획이었다. 8만원이나 하는 고가임에도 책을 그리워하고 책의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독자들 덕에 두 번째 판을 찍었다. -나는 진보와 보수는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진정한 보수와 진정한 진보는 서로 대화를 할 수가 있다. 출판을 결정할 때도 마찬가지 원칙을 적용한다. 책이 정직한가, 정확한가, 최선을 다한 성과물인가가 중요할 뿐 보수인지 진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있으면 과감하게 일을 벌이는 편이다. 우리 파주출판도시는 전 세계에서 유일한 곳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논의를 시작해서 90년대 초반 위원회를 가동하고 2010년부터 입주를 시작했다. 예술마을 ‘헤이리’ 프로그램도 이끌었다. 지금 내가 절실하게 바라는 것은 종로서적의 부활이다. 1907년 문을 연 그곳이 2002년에 문을 닫았는데, 그건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짧게 살았던 곳도 떠들썩하게 기념관으로 보존하면서 현대사에서 우리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곳이 사라지는 걸 우리는 두 눈 뜨고 그저 바라만 보았다. 서점은 공공적 플랫폼으로 인식해야 한다. 출판사도 마찬가지다. 출판사는 단순히 종이와 잉크로 구성된 물건을 만드는 곳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연관되는 것이 책이다. 당장 책을 읽지 않는다고 오늘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10년, 20년 동안 책을 안 읽으면 바보가 된다. 한국 사회가 한 단계 도약하려면 정의로운 사회, 도덕적인 사회가 돼야 한다. 그런 사회는 책을 읽고 건전한 토론을 해야 만들어진다. 책을 안 읽는 사람은 자기주장만 한다. 현재 교육의 가장 큰 문제가 책 읽고 토론하고 생각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관용이 부족한 사회를 만든다. 나만 옳다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김태균 경제정책부장 windsea@seoul.co.kr >>김언호씨 ■언론자유를 위해 싸우다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된 뒤 1976년 한길사를 설립,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중심으로 40년간 3000여권의 책을 펴냈다. ‘한 권의 책은 한 시대와 사회의 사상을 담아 내는 아름다운 그릇’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오늘의 사상신서’,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 현대사의 굽이굽이를 장식한 다양한 책들을 기획하고 펴냈다. 한국출판인회의 창설과 파주출판도시, 예술마을 헤이리 건설을 주도했다. ▲1945년 경남 밀양 출생 ▲밀양 대사초, 동명중, 부산상고, 중앙대 신문학과, 서울대 대학원 언론정보학과 ▲동아일보 기자(1968~1975), 헤이리 이사회 이사장, 한국출판인회의 회장, 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 파주북소리(책축제) 조직위원장,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책의 탄생 Ⅰ·Ⅱ’(1997), ‘헤이리, 꿈꾸는 풍경’(2008), ‘책의 공화국에서’(2009), ‘한권의 책을 위하여’(2012), ‘책들의 숲이여 음향이여’(2014), ‘세계서점기행’(2016) 등 저술 ■한길사를 대표하는 책(가나다順) ▲‘로마인 이야기’(오른쪽·전15권) ▲‘리영희 저작집’(전12권) ▲‘송건호 전집’(전20권) ▲‘오늘의 사상신서’(전172권)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전22권) ▲‘한국사’(전27권) ▲‘한국학술진흥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전100권) ▲‘한길 그레이트북스’ (7월 초 150권째 발간 예정) ▲‘한길역사강좌·한길역사기행’ ▲ ‘함석헌 전집’(전20권) 및 ‘함석헌 저작집’(전30권) ▲‘해방전후사의 인식’(왼쪽·전6권) ▲‘혼불’(전10권)
  • [서울 핫 플레이스] 북한산 자락에 안긴 고즈넉한 한옥마을엔 역사와 문화가 숨쉰다

    [서울 핫 플레이스] 북한산 자락에 안긴 고즈넉한 한옥마을엔 역사와 문화가 숨쉰다

    서울 서북쪽 끝자락에 은평구가 놓여 있다. 은평구라 하면 수려한 북한산을 먼저 떠올릴 테고 그다음은 ‘개발 소외 지역’ 정도의 이미지가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개발은커녕 변변한 공연장 하나 갖추지 못했던 은평구는 최근 몇 년 사이 눈부신 문화적 발전을 했다. 지역 최고의 자연 자원인 북한산과 천년 고찰 진관사를 중심으로 전통 한옥이 모여 장관을 이루는 한옥마을, 한옥과 문학의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는 은평역사한옥박물관 등이 하나둘 들어섰다. 이참에 은평구는 곳곳에 깃든 문학적 역량을 길어 올려 전통과 문학의 고리를 조성하는 계획을 세웠다. 지난해 지정된 ‘한문화체험특구’에 다양한 문화를 들여다보고 체험할 수 있는 콘텐츠를 첨가하는 데 열정을 쏟고 있다. 진관동 기자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선 김우영 서울 은평구청장은 “역사와 문화를 입히면 사람이 온다”면서 “이곳에 문화예술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종합적인 테마공원을 만드는 구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에서 이말산 자락을 따라 2㎞ 정도 들어가면 고즈넉한 한옥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5만 2000㎡ 규모의 한옥지정구역은 2011년부터 조성에 들어갔다. 2014년 11월 155필지 분양을 완료했다. 38채가 건축허가를 받았고, 12채는 사용승인까지 마무리됐다. 몇 년 전까지도 허허벌판이었던 이곳에 40~124평짜리 한옥이 들어서서 마을 모양을 갖췄다. 단층 또는 2~3층짜리 한옥을 구경하면서 여유를 만끽하기 좋다. 은평구는 한옥마을로서 품격을 높이기 위해 올 초 한옥건축팀을 신설했다. 한옥 건축 심의 허가, 전통 한옥과 현대 건축의 장점을 살린 신한옥 적용, 한옥 유지 관리 지침 개발, 한옥마을 발전 방안 모색 등 다각도로 촘촘한 역할을 한다. ●전통 한옥을 체험하고 문학을 즐기는 마을 한옥마을 북쪽 끝자락에 자리한 ‘셋이서문학관’은 한옥마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곳이다. 총면적 142㎡ 크기의 은평 한옥체험관을 리모델링했다. 천상병과 중광, 이외수 작가의 그림과 시 등이 전시돼 있고 북카페가 있는 휴식 및 한옥 체험 공간으로 조성했다. 셋이서문학관에서 한옥마을을 가로질러 남쪽으로 내려가면 은평역사한옥박물관을 만나게 된다. 은평의 역사와 한옥을 체험할 수 있는 박물관으로, 지하 1층~지상 2층(총면적 2901㎡)으로 지었다. 지하 1층에는 장난감도서관과 교육실이 들어섰고, 1층에는 은평역사실이 있다. 은평역사실은 은평의 유래와 지리적 의미, 파발꾼과 사신 행렬, 은평뉴타운에서 발굴한 유물로 본 옛 서울 사람들의 문화, 북한산이 오랜 세월 간직한 유적 등을 소개한다. 2층에는 한옥을 체험하는 한옥전시실을 마련했다. 한옥의 변천사와 과학적 원리를 보고, 등록문화재 제229호 민형기 가옥 사랑채를 재현한 모형을 만날 수 있다. 한옥 모형을 조립하는 시간도 있다. 오는 6월 19일까지 아주 특별한 전시도 연다. ‘한국문학 속의 은평전’은 해방 전후 은평에 거주하던 문인 130여명의 작품 초간본과 은평에 거주했거나 연관 있는 문인들의 희귀본을 확인할 수 있다.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지용의 ‘정지용 시집’, 황순원의 ‘곡예사’ 등도 공개한다. 또 최인훈의 ‘광장’, 이호철의 ‘소시민’ 등 우리나라 분단문학 거목의 초간본을 전시한다. 이 전시와 관련해 오는 23일에는 녹번동 은평문화예술회관 숲속극장에서 이호철 작가를 초청해 ‘토크콘서트’를 진행한다. ‘무속 콘텐츠 관련 금성당의 보존과 활용을 위한 학술대회’와 ‘김훈 작가 초청 토크콘서트’도 줄줄이 기획해 놨다. ●숨은 역사문화의 발견, 진관사와 청담사지 은평구 통일로는 조선시대 9대 간선로 가운데 중국으로 통하는 의주로를 근간으로 한다. 의주로는 전통문화와 중국에서 유입되는 문화가 소통하는 관문 역할을 했다. 통일의 염원을 담은 통일로와 한국의 오악(五嶽)에 드는 명산 북한산 사이에는 은평구의 숨은 문화유산이 많다. 사찰 문화를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곳이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 사찰인 ‘진관사’다.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쪽의 진관사는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손꼽혔다. 고려 현종이 1011년 진관대사를 위해 지은 진관사는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됐다가 복구돼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매년 10월이면 진관사에서 수륙재를 펼친다. 조선 태조는 고려 왕실의 영혼을 기리는 한편 왕조가 바뀌어 동요한 국민을 달래고 조선 왕실의 안정을 꾀하기 위해 수륙재를 개설했다. 조선 왕실이 수륙재를 주로 진관사에서 진행해 국찰로 자리매김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된 진관사 수륙재는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장관을 연출한다. 석가탄신일, 수륙재 기간이 아니더라도 진관사를 들러볼 만하다. 초가집 같은 정겨움에 눈길이 가는 보현다실은 아늑한 공간에서 차 한잔 누리기 좋다. 진관사에서 운영하는 산사음식연구소에서는 사찰 음식도 배울 수 있다. 진관사에서 이말산 쪽으로 향하다 보면 조선시대 단종 복위운동에 실패해 죽음을 맞은 세종대왕 6남 금성대군을 신격화한 금성당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 통일로를 건너가면 화엄10찰 중 하나인 청담사지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핵심 사상인 화엄사상을 전파하는 곳이었다. 정조가 선왕 영조의 애민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금암기적비(서울유형문화재 제38호), 조선시대 공문서가 전해지던 파발로 등에서 역사의 현장을 발견할 수 있다. ●‘문화 은평’의 종착점은 국립한국문학관 은평구는 한옥마을과 역사한옥박물관, 진관사 등 지역의 역사문화 시설을 연계한 대규모 ‘문화테마파크’를 꿈꾸고 있다. 그 종착점에는 한국문학관이 있다. 김 구청장은 “기자촌의 역사, 그리고 은평구의 역사는 문학과 뗄 수 없는 관계”라면서 “우리나라 근대문학을 상징하는 이광수, 채만식, 이육사, 심훈, 주요한 등 수많은 작가들이 기자 활동을 하며 근대문학을 꽃피웠다”고 운을 뗐다. 기자촌은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기자들의 마을’이다. 1969년 박정희 정부는 한국기자협회에 5000평 규모의 국유지를 내줬다. 1974년까지 이곳에 터를 잡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월급도 변변찮고 집도 절도 없던 기자들이었다. 정부의 의도를 떠나 한국 언론을 일으켜 세우던 기자 선후배들이 모여 살며 애환과 정서를 녹여낸 이곳은 기자 출신 문학인을 배출한 텃밭이 되기도 했다. ‘기자촌 옆 한국문학관’을 중심으로 은평구는 지역 곳곳에 남아 있는 문인들의 발자취를 네트워크로 이을 계획이다. 녹번동에 있는 정지용 초당(草堂), 1938년 일제 신사참배를 거부해 폐교된 숭실학교가 해방 후에 자리한 신사동 숭실중·고, 이호철의 불광동 주택과 최인훈이 지냈던 주택 등이 연결된다. 기자촌 인근에 이전할 예정인 한국고전번역원부터 한국문학관을 거쳐 올 하반기에 한옥마을 끝자락에 들어설 삼각산미술관까지 이어지면 은평구에는 거대한 문화고리가 완성된다. 김 구청장은 “정지용이 납북되기 전 1948~1950년에 거주했던 초당, 시인 윤동주·김현승과 소설가 황순원·김동인·주요섭 등이 다닌 숭실학교 등 은평에는 문학 인프라가 충분하다”면서 “한국문학관이 건립되면 문인을 포함한 문화예술인을 위한 레지던스, 명인마을, 한옥마을, 한옥역사박물관을 이어 문학테마구역이 완성될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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