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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호의 종교로 읽는 세상] 성소수자 혐오, 그 밑바닥에는

    [김성호의 종교로 읽는 세상] 성소수자 혐오, 그 밑바닥에는

    서울 이태원 클럽을 중심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늘면서 대규모 지역 감염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무증상 감염자가 많은 데다 전국에서 3~4차 감염이 번지는 터라 이태원 클럽에 다녀간 성소수자들을 표적 삼은 원성이 높다. 특히 개신교계의 성소수자 혐오가 예사롭지 않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개설한 학당을 모체로 하는 숭실대는 현수막을 걸려던 성소수자 모임 학생들과 충돌을 빚었다. 내용 중에 ‘성소수자’ 문구가 있다는 게 학교 측의 불허 이유였다. 장로회신학대는 동성애 인권의 상징인 무지개색 옷을 입고 예배 수업(채플)에 참석한 학생들을 징계해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진행 중이다.개신교계에 따르면 교회의 예배, 설교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경계의 표현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목회자들이 신도들과 소통하는 문자메시지와 전화에서도 성소수자 혐오, 배척은 나날이 심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계 가운데 보수 개신교가 성소수자에게 유독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계 안팎의 전문가들은 입법부와 사회 일각에서 재추진 움직임이 일고 있는 차별금지법을 지목한다. 차별금지법은 인종이나 성별, 언어, 성적 지향성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법률이다. 2007년 유엔 인권이사회의 제정 권유 이래 3차례 입법 시도가 있었지만 개신교 측의 거센 반발로 무산됐다가 21대 국회 출범에 앞서 재추진 움직임이 나온다. ‘성경엔 흠이 있을 수 없다’는 성경 무오설과 문자주의를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보수 개신교계가 차별금지법을 보는 시각은 ‘동성애 전파를 양성화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토대’다. 교회에서 성소수자는 신행과 교리의 모든 측면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악이자 공격해야 할 명백한 표적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차별금지법 저지에 있어 교리 측면의 가장 좋은 ‘공공의 적’인 셈이다. 하지만 최근 진보적 교회 연합기구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보수 개신교 단체들 간에 빚어진 마찰은 성소수자와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개신교계의 시각차가 얼마나 큰지 단적으로 보여 준다. NCCK가 성명을 통해 ‘차별금지법을 더이상 미룰 수 없다’며 제정을 촉구하자, 보수 개신교 단체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거센 규탄시위를 했다. 많은 목회자, 신학자들은 개신교의 차별금지법과 성소수자 혐오를 기득권 수호 차원의 약자 차별로 치부한다. 실제로 개신교 연합기관이나 총회 대표 선거에서 동성애자 척결과 차별금지법 저지가 으뜸 공약으로 등장하기 일쑤다. 최근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은 긴급 임원회를 열어 차별금지법 제정을 ‘한국 교회의 생존이 걸린 매우 위험한 행위’라고 분명히 정리했다. 강단 설교나 전도 문제 등에 엄청난 법적 제재와 처벌이 뒤따를 수 있는 차별금지법을 막아 내는 데 한교연이 앞장서 달라고 요청한 사실도 전해져 주목된다. 그러나 개신교계의 차별금지법 혐오는 일반 여론과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지난해 KBS 신년 여론조사를 보면 응답자 1000명 중 64%가 차별금지법 제정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한국교회언론회가 6년 전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에서 응답자의 52.3%가 제정에 반대한 것과 비교된다. 이 법을 ‘동성애 창궐법’이나 ‘교회 파괴법’쯤으로 몰아가는 개신교인들의 시각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한국 최대의 개신교 연합체인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은 오는 31일을 ‘한국 교회 예배 회복의 날’로 선포했다. 코로나19 탓에 자의든 타의든 택했던 온라인 예배를 예배당 현장 예배로 완전히 돌려놓겠다는 선언이다. 그 선언에는 신도들의 신앙 회복과 함께 교회 생태계를 위협하는 움직임에 대한 단호한 의지도 담겨 있다. 지금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으뜸은 사랑 아닐까.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미워하고 배척하는 편 가르기는 아닐 터다.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 종교 지도자들에게 남긴 당부가 아직도 생생하다. “삶은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걸어가도록 합시다.”
  • “신약을 오역했다면”… 성경에 대한 발칙한 질문

    “신약을 오역했다면”… 성경에 대한 발칙한 질문

    신의 변명/옥성호 지음/파람북/343쪽/1만 6000원보수 개신교계가 성경을 보는 입장은 ‘성경 무오설’과 ‘문자주의’로 압축된다. 신의 말씀을 빠짐없이 적은 만큼 한 치 오류도 없는 절대 신봉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책은 놀랍게도 그 도그마를 정면 반박한다. 내로라하는 대형교회인 사랑의교회를 개척한 옥한흠 목사의 장남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성경을 비판해 논란이 예상된다. 성경은 유대교의 히브리 성경과 예수탄생 이후의 신약으로 나뉜다. 기독교는 신약성경과 대비하기 위해 히브리 성경을 구약이라 부른다. 책은 신약을 구약의 연속이 아닌 단절로 여겨 눈길을 끈다. “신약이 등장하면서 구약에 대한 오역과 의도적 왜곡이 저질러졌다.” 그 과정에서 전혀 다른 신을 섬기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조목조목 지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사탄을 비롯해 구원, 죄, 율법, 메시아까지 성경 전 영역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르다. 대표적인 건 에덴동산이다. 기독교에서 에덴동산은 타락한 인간과 원죄에 대한 예수의 대속이 시작되는 교리의 근원이다. 하지만 유대교에선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타락해 죄로 오염된 유전자를 가진 게 아니라, 오히려 독립함으로써 주체적 유전자를 갖게 됐다고 한다. 에덴동산은 비극의 시작이 아닌, 인간 성장과 독립의 영역인 것이다. 사탄도 엄청난 개념 차를 보인다. 히브리 성경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천사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신약에선 신인 예수를 시험하려는,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엄청난 존재로 탈바꿈한다. “궤변과 왜곡으로 가득 찬 신약성경이 기독교 경전으로 2000년을 버틴 것은 기적이다.” 저자는 그 기적의 원인 제공자를 ‘이단에 물들게 하는 질문을 던지지 말라’고 외쳤던 고대 로마 종교가 테르툴리아누스(160~220)로 지목한다. 그리고 말한다. “기왕이면 내가 더 건강해지고 당당하게 해 주는 하나님을 선택했으며 좋겠다. 그런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건 ‘진짜 나’를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심사평] 이론을 끌어오지 않고 이론을 능가… ‘눈먼 문학’에 길을 묻다

    [2018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심사평] 이론을 끌어오지 않고 이론을 능가… ‘눈먼 문학’에 길을 묻다

    평론 부문 투고작들은 세월호 사건이나 문단 내 성폭력 등의 재난 ‘이후’를 차분하게 성찰하는 글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크게 이야기하지 않으면서도 본질적이고, 비판을 하면서도 공감을 구하려는 모색의 결과일 듯하다. 또한 인용 위주의 이론은 공허하고 날것의 사건은 정치적이기에 그런 외부의 진앙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문학의 본질에 관한 질문을 멈추지 않으려는 시도로도 보인다.“절망의 가능 시계-임승유, 안희연, 백은선의 시세계”의 미덕도 바로 이런 ‘절망을 절망’하는 젊은 시인들의 긍정적인 주체에 주목했다는 점이지만 무기력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의 시도를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발화’로 귀착시킨 점은 다소 공허해 보였다. “쇼코의 미소를 보기까지는-최은영론” 또한 공허한 대문자주의와 자폐적 소문자주의 사이에서 정체되었던 한국 소설에 돌파구를 마련해 준 최은영의 소설이 지닌 공감과 연대의 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적실성을 확보했으나 좀더 도발적인 문제 제기가 아쉬웠다. 당선작인 “그림자 필경사-김소연의 시세계”는 그림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맹점에 주목하면서도 그런 맹점의 파쇄가 아닌 보완에 가치를 두는 시인의 판화적(版?的) 글쓰기에서 문학의 본질을 발견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아니라 어둠을 어둠으로 보는 어둠을 그려 내는 필경사로서의 시인의 매력을 시답게 읽어 내는 감수성이 탁월하다. 이론을 끌어오지 않으면서 이론을 능가하니 오히려 철학적이다. ‘눈먼 문학’에게 길을 물을 수 있게 해줘서 다행인 만큼 앞으로의 활동에 대한 기대도 크다.
  • [김성호 선임기자의 종교만화경] “종교 간 소통·대화 문제 대중적 차원서 다뤄야죠”

    [김성호 선임기자의 종교만화경] “종교 간 소통·대화 문제 대중적 차원서 다뤄야죠”

    종교다원주의는 배척 아닌 보완…불교·기독교 지향점은 다르지 않아 “사람들은 평화를 쉽게 입에 올리지만 실천은 딴판이지요. 종교도 평화보다 갈등과 전쟁의 원인이 되기 일쑤이지요.” 서울대 연구실에서 만난 레페스 포럼 대표 이찬수(55)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 연구교수는 “종교 간 소통과 대화의 문제를 대중적 차원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이 교수는 불교와 기독교, 목회와 강단을 넘나들며 평화적 측면의 종교 역할에 천착해 온 인물이다. ‘종교의 근본은 생명과 평화’라는 믿음 아래 ‘레페스 포럼’ 창립이나 그 전신인 종교문화연구원 태동과 활동을 주도해 왔다. 첫 대면에서도 자신을 ‘종교다원주의자’라 밝히면서 이런 말을 꺼냈다. “종교다원주의는 여러 종교의 혼합이나 잡탕이 아닙니다. 다양한 종교가 좀더 완성된 상태로 나아가도록 노력하는 배척 아닌 보완의 입장이지요.” 독실한 기독교 집안 태생인 이 교수는 서강대 화학과에 입학 후 목사가 되려 부전공으로 종교학을 선택, 신학과 종교학을 공부했다. 불교학과 신학 관련 두 개의 석사학위를 받았고 박사학위도 불교와 기독교 간 비교로 땄다. 대학원 공부에서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알게 됐고 특히 “기둥이 없으면 집이 없다”라는 화엄경의 관계론에 크게 감명받았다고 한다. “불교는 모든 세상을 관계적이고 상대적으로 보면서 집착의 근원을 제거하라고 가르치지요.” 불교사상에 빠져들면서 기독교와 불교의 외형적 언어 차이는 크지만 지향하는 세계는 통한다는 진리를 절감했단다. “불교와 기독교의 종착점, 가령 공(空)과 하느님, 열반과 하느님 나라, 그리스도와 보살, 기도와 염불 등은 동등한 체험의 깊이를 나타내며 붓다와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세계의 깊이도 비슷합니다.” 대학원 졸업 후 감리교에서 파생된 예수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목회활동을 할 무렵 불거진 사건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비극이다. 양평 수종사를 찾아 불상에 절을 했다는 게 빌미가 돼 교회를 떠나야 했고 결국 몸담고 있던 기독교계 학교 강남대에서 재임용을 거부당했다. 2년 9개월여의 법정 싸움 끝에 강단에 복귀했지만 결국 견디지 못한 채 사직하고 2012년부터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불상 앞에 고개를 숙인 건 불교적 세계관과 철학을 가르쳐 준 분에 대한 예의 차원이었을 뿐”이라며 우상화의 모순을 조목조목 짚었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신약성서의 깊은 뜻은 물론 구약성서 십계명의 역사적 의미도 무시하고 있어요. 십계명을 문자주의적으로만 이해하다 보니, 어떤 형상에 허리 굽혀 절하는 행위 자체를 우상숭배로 인식하는 경향이 생겼어요. 외적인 행위 자체보다 그 의미와 의도가 더 중요하다는 게 성서의 근본적 내용 아닐까요.” “평화는 폭력이 없는 상태라지만 정말 평화로운 때가 있었느냐”고 묻는 이 교수는 어쩔 수 없는 ‘평화전도사’였다. 평화란 폭력 없는 상태로 여길 게 아니라 폭력을 줄이는 감폭력으로 이해해야 한단다. “의도와 목적, 개념이 상이한 사람들 간의 합의를 통해 더 큰 평화의 세계를 만들어 가야 하고 그 역할의 선봉은 종교와 종교인들입니다.” 글 사진 김성호 기자 kimus@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상식의 줄다리기/김성호 문화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상식의 줄다리기/김성호 문화부 선임기자

    서울 도심 한복판이 또 술렁댄다. 이번엔 퀴어(Queer)축제다. 14~15일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성소수자 문화제 말이다. 퀴어축제라면 반세기 전부터 있어 온 문화제다. 1970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돼 세계 각지로 번져 온 그 문화제엔 성소수자와 지지자 말고도 시민단체들이 부스를 차려 인권의 가치를 공유한다. 한국에선 2000년 시작됐으며 지난해 6월 서울광장 행사엔 주한 미 대사관도 이름표를 붙였다. 그런데 그 행사를 놓고 여전히 찬반의 대립이 첨예하다. 그 반대의 진영엔 항상 보수 개신교 단체들이 선봉에 선다. 이번에도 퀴어축제가 열리는 15일 행사장 바로 옆 대한문광장에서 ‘국민대회’ 이름의 맞불 행사를 연다고 한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교회연합(한교연)를 비롯해 8개 보수 개신교단체가 단단히 벼르고 있다. 그 결집의 표어는 ‘동성애 반대’와 ‘차별금지법 반대’다. 에이즈 확산 방지 캠페인도 곁들여진다. 보수 개신교계가 퀴어축제를 바라보는 잣대는 성경이다. 실제로 신·구약 성경엔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구절이 곳곳에 등장한다. 문제는 해석의 입장이다. 잘 알려졌듯이 우리 보수 개신교는 성경을 한 치 어긋남 없이 그대로 믿고 실천한다는 ‘문자주의’와 ‘성경무오설’을 따른다. 하지만 오염되지 않는 ‘절대 신봉’의 대상이라는 성경 해석과 실천은 이미 다양하게 뒤집히는 추세다. 미국 성공회는 2003년 뉴햄프셔 교구에 동성애자 사제를 주교로 임명했다. 영국 성공회도 동성애자를 위한 성찬식 진행을 허용할 태세다. 지난 4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에 취임한 이경호 주교는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예외일 수 없고, 차별받아선 안 된다”며 동성애 문제에 전향적 입장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진보적 교단 연합 기구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보수 개신교계와는 사뭇 다른 입장이다. 2015년 ‘동성애를 공론의 장에 내놓고 대화해 보자’며 교회 입장을 정리한 가이드북 ‘우리들의 차이에 직면하다’를 펴내기도 했다. ‘이상한’ ‘색다른’이란 뜻의 퀴어는 영어권에서 오랫동안 위조술과 남성 동성애의 상징처럼 쓰였다. 하지만 이제 성소수자들이 드러내 놓고 자신들을 표현하는 사회적 언어로 바뀌었다. 상식의 전도인 셈이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그 상식의 줄다리기는 이제 절대적 믿음의 영역인 종교에서도 가시적으로 번지는 느낌이다. 지난해 8월 인도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가 구름처럼 몰려든 청중에게 던진 역발상의 사자후가 인상적이다. “평평한 사각의 세계 한가운데 수미산이 있다는 우주관은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입증한 과학과 배치돼 나도 믿을 수 없다.” 불교의 대표 세계관인 수미산 우주론의 부정이니 충격 아닌가. 상식이란 내 집단만의 철학과 이데올로기가 아닌, 많은 이들이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의 옹호와 실천일 때 빛나지 않을까. 퀴어축제를 둘러싼 서울광장과 대한문광장의 대치가 안타깝다. 더 큰 가치의 나눔과 이해가 확산됐으면 한다. 굳이 “아프고 소외된 이들 속에서 사랑하고 나누라”는 예수님 말씀과 실천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kimus@seoul.co.kr
  • [김성호 선임기자의 종교만화경] “개신교인이 새 대표 맡았으니 ‘친불교적’ 오해도 풀리겠죠”

    [김성호 선임기자의 종교만화경] “개신교인이 새 대표 맡았으니 ‘친불교적’ 오해도 풀리겠죠”

    “개신교인이 새 대표를 맡았으니, 이제 친불교적 단체라는 오해가 많이 불식되겠지요. 그동안 피해받는 약자 편에 서서 도와주는 활동에 치중했다면 이제부터는 적극적으로 피해를 예방하고 종교 간 대화와 화합을 주도하는 단체로 만들어 가겠습니다.” 지난 3월 비영리 민간단체 종교자유정책연구원(종자연) 창립 11년 만에 박광서 서강대 명예교수에 이어 두 번째 대표로 취임한 류상태(60) 목사. 서울 중구 장충동 우리함께빌딩 3층 사무실에서 만난 류 대표는 “종교자유를 침해받는 이들이 없는 사회를 위해 교류와 화합의 첨병 노릇을 주도하겠다”고 거듭 밝혔다.류 대표는 2004년 그 유명한 대광고 강의석군 단식 농성 사태 때 교목실장을 맡고 있었던 인물. 기독교 재단에 속한 학교 측의 예배 강요에 맞서 ‘학생들의 예배 선택권을 보장해 달라’며 46일간 단식 농성을 이어 가던 강의석군과 학교 측의 갈등 속에 교목실장 자리를 떠나야했고 소속돼 있던 예장통합 교회에 목사직까지 반납해야 했던 불운한 과거를 갖고 있다. “강의석군 단식 사태를 보면서 한국 개신교의 독단과 배타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지던 긴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대신 말끔한 얼굴에 짧은 머리카락으로 바꾼 이유를 묻자 정색하고 사연을 들려준다. “종자연 대표를 맡기 한 달 전쯤 삭발을 했어요. 우리 보수 개신교계에 만연한 교리기독교에 대한 저항과 이웃 종교계에 대한 사죄의 의미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삭발을 할 겁니다.” 무슨 사연이 그리 사무쳤길래 삭발까지 감행해 살겠다는 것일까. 지난 사연을 듣자니 험한 나날들의 연속이 실감 난다. 교목실장과 교목(학교목사)까지 박탈당하고 학교 재단 이사회로부터 ‘종교다원주의자가 아니냐’는 사상 검증까지 받은 끝에 결국 목사직을 반납하고 험한 일을 다 하며 살아갔단다. 노점상, 대리운전, 트럭운전사, 사무실 청소…. “오죽하면 기독교는 망해야 한다고 했을까요. 신도 죽어야 한다고 했지요. 배타적인 기독교가 안 죽으니 예수님 역할도 끝이 났다고까지 했으니까요.” 지독한 ‘안티 기독교인’으로 바뀌어 살다가 다시 기독교로 돌아온 건 ‘소설 콘스탄티누스’(2008년)를 쓰면서였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4세기 초 즉위해 왕권신수설을 무기 삼아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인물이지요. 예수는 신의 아들일 뿐 아니라 본질상 ‘신 자체’라고 했고 신으로부터 왕권을 받은 만큼 예수가 인정한 로마황제의 권위도 절대적임을 강요했어요. 한국 보수교회가 콘스탄티누스를 정통으로 여겨 입맛에 맞게 예수의 가르침을 오도했지만 소설을 쓰면서 따뜻한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됐습니다.” 교회는 잘못하고 있지만 예수님 가르침은 너무 훌륭함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소설 콘스탄티누스’ 후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학교, 교단과도 화해하고 싶다.” 종자연은 사실 창립부터 류상태 목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단체이다. 강의석군 단식 농성사태를 계기로 목사직까지 반납한 류 대표는 학교종교의 자유를 위한 시민연합(학자연)을 조직해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종교교육에 반발한 학생을 보호하고 함께 싸우는 일에 치중했었다. 그 사연을 전해 들은 종교계, 학계, 법조계 등 각계 인사들이 모여 2006년 3월 출범한 게 종자연이다. 류 목사는 창립 때부터 줄곧 종자연에서 일해 왔다. “비록 기독교로 다시 돌아왔지만, 한국 개신교에 대해선 여전히 애증이 엇갈린다”는 류 대표. 그 사무친 애증의 감정을 이제 화합과 교류의 실천으로 옮기겠단다. 그러면서도 한국 개신교가 바뀌려면 ‘나만 옳다’는 독선부터 버려야 한다고 재차 강조한다. 개신교 부정과 부패의 뿌리는 바로 배타적인 교리에 있는 만큼, 이제 교리 자체를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배타적인 교리가 바로 물질과 성장에 치우친 교회의 부패를 낳지요.” 특히 ‘성서무오설’을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보수 개신교계의 문자주의를 콕 짚어 지적한다. “불교에선 깨달음에 방해가 되면 조사도 죽이고 부처도 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기독교도 바뀌어야 해요. 깨달음을 얻고 기독교의 큰 가치인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려면 신도 죽이고 성서도 찢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2000년 전 사람들의 눈으로 현대를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제 성서를 보고 해석하는 눈이 바뀌어야 하지요.” kimus@seoul.co.kr ■류상태 종자연 대표는 ▲서울 신당동 출생 ▲중앙대 철학과 졸업 ▲장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예장통합 평북노회 목사 안수 ▲영락교회 전임전도사 ▲숭의여중 교목 겸 종교과 교사 ▲대광중 교목 겸 종교과 교사 ▲대광고 교목 겸 종교과 교사 ▲‘예배 선택권’ 둘러싼 강의석군 단식 농성 사건으로 대광중 강제 전보 ▲대광고 교목실장 겸 교목 박탈, 목사직 반납 ▲학교종교의 자유를 위한 시민연합(학자연) 조직 ▲종자연 대표 취임
  • [김성호 기자의 종교만화경] ⑤ 예배 강요

     학원가에 예배를 강요하는 폭력이 발생해 논란이 되고있다. 유명 입시학원 대표이사가 지점 소속 원장과 강사들에게 자신이 다니는 교회 예배에 참석하라고 강요해 소송이 접수됐다고 한다. 잊혀질 만 하면 또 터지곤 하는 개신교계의 고질이 또 도진 듯 해 안타깝다.예배 강요가 발생할 때마나 숱한 질타와 자성의 물결이 넘치지만 그 때 뿐이다. 이쯤 되면 심해도 보통 심한 망각의 병이 아닐 수 없다.  왜 종교를 강요하는가. 남의 종교와 믿을 권리를 왜 침해하는 것일까. 원치않는 강요는 엄연한 폭력이다. 문제는 폭력임을 알면서도 거듭하는 맹신과 억지의 반복이다. 국내외에서 일어난 그 무조건의 반복은 이루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서울 강남 봉은사 법당에서 개신교 신자들이 일으킨 이른바 ‘땅 밟기’ 사건이며 인도의 불교 성지에서 개신교 신자들이 ‘찬송 파티’를 벌여 세계인의 눈쌀을 찌푸리게 한 것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성경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심없이 믿고 따라야 한다는 한국 개신교의 ‘성경무오설’이며 ‘문자주의’는 세계 기독교계에서도 소문 난 근본주의의 전형으로 꼽힌다. 그리고 그 근본의 전형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끝 없는 전도와 강요의 실천으로 이어지곤 한다. 지금도 한국인의 뇌리에 생생하게 박혀있는 분당샘물교회 봉사 팀의 아프가니스탄 납치 피살 사건도 따져보면 ‘땅끝 전도’가 부른 희생에 다름 아니다.  내 것이 아무리 좋아도 남이 싫다면 권하지 않는 게 일반의 상식이다. 하물며 목숨까지 아낌없이 버린다는 신앙의 차원에서 강요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폭력행위로 받아들여진다.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들은 같은 무슬림끼리도 자신의 교리를 전파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한다. 그런 무전도의 신앙 지역에서 ‘땅 밟기’며 ‘찬송 파티’를 벌이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하고 무자비한 일인 지는 이미 여러차례의 참사와 희생을 통해 충분히 입증된 바 있다.  ‘종교는 문화다’ 세상의 많은 종교인들은 이제 이 명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 화합과 공존의 공동체 만들기에 힘을 쏟고 있다.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내는 상생 문화로서의 종교 만들기 말이다. 내 믿음과 신앙이 아무리 좋아도 나와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외곬의 배타성은 이제 설 땅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이 땅에선 ‘땅 밟기’같은 아집과 맹신의 전도며 강요가 계속된다. 이제 그만 멈출 때도 됐는데….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종교다원주의’의 들먹임은 이 땅의 많은 개신교인들에겐 욕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함께 평화롭게 어울려 살자’는 인류 보편의 정신인 원융과 화합만은 훼손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하물며 인간이 지닌 모든 윤리의 으뜸이라는 종교일진대.  김성호 선임기자겸 논설위원 kimus@seoul.co.kr
  • 교회의 대형화 성경 말씀 아니다

    교회의 대형화 성경 말씀 아니다

    한국 개신교는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단기간에 큰 성장을 이룬 공동체로 주목받는다. 그리고 그 업적의 공은 성경 말씀을 철저히 믿고 따른다는 ‘성서 무오주의’(문자주의)와 땅끝까지 말씀을 전한다는 ‘복음주의’에 돌려지곤 한다. 그런 한 켠에선 성경 맹신과 과도한 전도를 향한 질타가 적지 않다. 한국 개신교는 얼마나 성경과 예수님 말씀에 올곧은 믿음을 행하고 전하고 있을까. 한국 개신교의 성경 천착과 관련해 진짜 말씀과 행동이 무엇인 지를 따져 묻는 서적들이 잇따라 출간됐다. 이 책들은 개신교계에 만연한 일탈을 성경 해석 오류 탓으로 보고 그 대안을 내 눈길을 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강만원 지음, 창해 펴냄), ‘진보의 예수, 보수의 예수’(주원규 지음, 바다 펴냄), ‘메가처치를 넘어서’(신광은 지음, 포이에마 펴냄)가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 가운데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는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가 정색하고 가짜 교리와 그릇된 성경해석을 지적하고 나선 책이다. ‘교회가 부패 굴레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신앙의 근원인 말씀으로 오롯이 돌아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런 만큼 교회부패를 정당화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는데 이용된 기존 해석을 또박또박 반박했다. 예를 들어 목사는 사도나 선지자, 장로·집사처럼 처음부터 성경에 이름을 올린 원형적 직분이 아님을 꼬집는다. 목자로 번역했던 헬라어 ‘포이멘’을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 사제와 견줄 개신교 교회의 강력한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 만든 게 목사라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가톨릭의 타락을 부추긴 사제성직주의에서 목사성직주의로 얼굴만 바꾸었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오류 지적에 이어 성경적 교회로서 주의 계명에 순종하는 직분·역할만 있고 성직자·평신도를 구별짓는 계급이 없는 ‘원형교회(아르케 처치)’라는 새 교회상을 제시한다. 한편 ‘진보의 예수, 보수의 예수’는 교회의 분열 원인을 예수를 바라보는 시각 차에서 찾았다. 진보신학과 보수신학의 갈림은 예수를 신으로 바라보느냐,인간적 측면을 더 부각하느냐에 달렸다고 주장한다. 성서 독법에서 보수·진보 신학의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예수의 기적’ 대목이다. 보수신학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태생의 눈먼 자를 눈뜨게 한 기적, 죽은 나사로를 살려낸 기적들을 성서 그대로 예수가 행했으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진보 측은 실제 일이 아닐 것이라며 예수가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 지를 파악하고 정신을 계승하라고 말한다. 저자는 “예수는 신의 아들이자 인간의 아들”이라는 점을 중시한다. 결국 예수를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저 높은 곳의 초월자인 신으로 보는 보수신학이나, 성서를 시대·언어·사상적 한계를 지닌 ‘편집 결과’로 보는 진보신학 모두 예수를 논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주제라며 양쪽 입장을 모두 살펴 분열의 씨앗을 찾자고 매듭짓는다. 한편 ‘메가처치를 넘어서’는 현직 목회자가 성경해석 오류에 뿌리를 둔 대형교회, 이른바 메가처치를 정색하고 꼬집었다. 2011년 기준 세계 50대 메가처치 중 24개가 한국에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유독 한국에서 강한 메가처치 현상은 한국 개신교회가 태생적으로 성장 지향적이고 복음주의적이라는 사실과 연결된다. 개발독재 시절 배운 성장 지상주의가 교회에 이식된 점도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저자는 권력장악을 가속하던 히틀러와 나치당에 추종한 기독단체에 맞서 독일 고백교회가 발표했던 ‘바르멘 신학 선언’처럼 메가처치를 반성하는 한국 교회의 선언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선언에는 특정 권위로 신자 개인들을 복속시키려는 권위주의와 교회를 개인들의 집합으로만 보는 교회론적 개인주의를 정좌하는 내용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저자와의 차 한잔] ‘눈 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펴낸 인문학자 김경집

    [저자와의 차 한잔] ‘눈 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펴낸 인문학자 김경집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표류는 새삼스러운 화제가 아니다.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우려한다’는 비아냥은 일상의 명제가 된 듯하다.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하지만 대형 교회를 비롯해 이른바 어긋난 공동체를 이끄는 목회자·성직자들의 끊임없는 일탈과 무신경에 묻히기 일쑤다. 그래서 요즘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자주 들먹거려진다.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시공사)을 펴낸 김경집(54)씨도 그 하층부터의 개혁을 강조하는 독특한 인문학자다. “종교는 이제 단순한 신앙에 머물지 않습니다.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일상의 영역이지요. 인간의 가치있는 삶을 연구하고 천착하는 인문학자라면 종교에 관심을 갖고 고민하는 게 당연하다고 봅니다.” 서강대에서 영문학,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한 인문학자.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한때 수도원 입회를 꿈꾸었다는 김씨는 당당하게 ‘기독교 신자’라고 말한다. 학부시절 부전공으로 신학에 관여한 게 제도권 신학 공부의 전부지만 독학으로 기독교 공부를 계속했고, 그런 천착으로 지난 1999년부터 2011년까지 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에서 인간학과 영성 과정을 가르쳤다. 올해 초 서울서 충남 서산시 해미로 옮겨 지역사회의 문화운동과 공동체적 삶에 매달리면서 생활의 많은 부분을 기독교 관련 공부와 저술에 할애하고 있다는 김씨. ‘눈먼 종교를’은 이른바 공관복음이라고 하는 4대 복음서 바로보기에 초점을 맞춰 오랫동안 고민해 온 글쓰기의 결실이다. “4대 복음서는 예수의 출생과 공생애, 죽음, 부활까지 모두 담은 표준의 텍스트라 할 수 있지요. 4대 복음서만 제대로 읽고 그 속에 담긴 교훈을 오롯이 실천하더라도 지금의 상황에 이르진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서를 비롯한 성경에는 온갖 비유가 넘쳐난다. 그 비유는 사랑과 희생을 실천했던 예수님 교훈의 폭넓은 암시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그 비유의 보고인 복음서를 왜곡하고 있고 거기서부터 눈먼 종교의 일탈이 시작된다고 김씨는 거듭 말한다. “우리 기독교계에 뿌리깊은 문자주의와 성경무오설에 바탕한 근본주의 복음이 원인입니다.” 성경 속 비유는 너른 시야와 근거 있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그 가치와 교훈을 제대로 새길 수 있단다 “성경 문구에서 단 한 자도 벗어나선 안 된다는 고집과 강요는 예수님 말씀의 본뜻인 사랑과 희생의 실천과는 달리 그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무모한 전도로 치닫기 마련이지요. 도처에 흔한 ‘예수천당 불신지옥’식 강요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고집과 불통의 큰 원인은 서구 숭상 일변도의 신학과 교회체제란다. “우리 개신교계의 뿌리인 미국 근본주의 복음신학과 천주교의 중심인 로마 가톨릭에 너무 매달려 있어요. 우리 천주교만 하더라도, 오죽하면 ‘로마보다 더 로마 같다’는 말을 들을까요.” 개혁운동이 있다고 해도 교회를 이끌고 주도하는 목회자, 성직자의 힘에 주눅들고 마는 지금의 공동체 생리에선 변화를 기대하기란 요원한 실정. “이제 본격적인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 시작은 바로 성경 속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읽고 실천하는 신자들의 결집일 것입니다.” 지금 종교가 우선 치중해야 할 것은 신앙 이전에 도덕적 우월성의 회복이라고 흔히 말한다. “예수가 금지한 것을 예수의 이름을 팔아서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김씨는 성경 바로 읽기의 연장 작업으로 창세기와 한국 교회사에 관련한 책을 조만간 세상에 내놓겠다며 벼른다.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성경에서 길어낸 수사의 깊은 맛

    동서양을 통틀어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성경. 근본주의 개신교는 성경 자구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용납할 수 없다는 ‘문자주의’를 고집한다. 비단 근본주의를 떠나 많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성경은 어길 수 없는 경외의 대상이다. 그런가 하면 이 성경은 일반인들에겐 그저 ‘관심 없는 기독교의 경전쯤’으로 인식되기 일쑤다. 그 경외와 무관심의 간극을 좁힐 길은 없을까. 성경을 대하는 인식의 간극은 흔히 해석의 오류에서 생겨난다고 한다. 성경 원어의 난해함과 그로 인한 번역이며 풀이의 엇갈림이다. 개신교의 많은 교파가 생겨난 바탕도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문학적 텍스트로 본다면 그 간격을 어느 정도는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박사가 낸 책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열림원 펴냄)는 바로 그 성경 읽기의 새로운 접근법을 제시해 눈길을 끈다. 이 박사가 이 책에서 도전한 성경 읽기는 다름아닌 성경 속 아이콘을 문화사적으로 풀어내는 시학적 독서법이다. 문학 강의뿐만 아니라 기호학 분야의 걸출한 전문가답게 책에서는 그의 해박한 지식이 어김없이 드러난다. ‘신학(神學)에서 ㄴ 받침 하나만 빼면 시학(詩學)이 된다.’는 저자는 무엇보다 시나 소설을 읽듯이 성경을 읽으면 어렵던 말들이 더 가까이 다가온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시학에서 주로 쓰는 수사법이 가득하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만 성경이 감춰 둔 섬세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성경 속 수사의 깊은 맛을 볼 때 성경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고 성경을 둘러싼 오랜 갈등과 오류까지 지울 수 있다는 지론답게 책에는 그 ‘성경시학’의 흥미로운 풀이가 넘쳐난다. 예를 들어 주기도문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구절을 보자. 잘 알려졌듯이 영어 성경에는 그것이 일용할 빵(daily bread)으로 돼 있다. 저자는 성경 속 빵은 양식 전체나 의식주의 모든 물질적 생활을 상징하는 제유적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빵처럼 식탁에 매일 오르는 음식물을 어쩌다가 명절 잔칫날에나 먹는 떡으로 옮긴다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반문하다. 결국 단어 하나가 아니라 성경의 수사 구조 전체가 망가지고 만다는 오류의 지적이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게 더 쉬우니라.’라는 구절의 해석도 흥미롭다. 낙타의 히브리어 표기는 ‘gamla’이고 밧줄은 ‘gamta’인데 두 단어의 철자가 비슷해서 ‘밧줄’을 ‘낙타’로 잘못 번역했다고 설명한다. 결국 저자는 ‘책 뒤에 붙이는 남은 말’에서 “생활과 문화 코드가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다면 어떻게 될까.”라고 물은 뒤 “그 생각을 적은 것이 이 작은 책”이라고 설명한다. 1만 7000원. 김성호 편집위원 kimus@seoul.co.kr
  • [열린세상] 조계종의 종교평화선언을 바라보며/석영중 고려대 노문학과 교수

    [열린세상] 조계종의 종교평화선언을 바라보며/석영중 고려대 노문학과 교수

    조계종이 며칠 전 ‘종교평화선언’의 초안을 발표했다. 초안 작성 작업을 주도한 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 도법 스님은 그동안 종교가 화합과 평화가 아닌 갈등을 초래했음을 반성하면서 뼈저린 성찰과 자성을 통한 쇄신을 다짐했다. ‘나의 종교가 소중한 만큼 타인의 종교도 소중하게 여기고, 나의 종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고 타인의 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겠다.’는 것이 이 선언의 취지다. 오랜만에 접하는 화합의 메시지다.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다. 우리사회에도 갈등 요인이 많다. 이념·계층·세대 간은 물론 종교 갈등까지 상존해 있다. 이 때문에 상생과 공존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적잖다. 특히 다인종·다문화를 향한 문이 열린 마당에 종교 간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더 심각해질 수 있다. 이럴 때 한국 불교 최대 종단인 조계종이 관용과 평화의 선언을 한 것은 시의적절하다. 종교는 이데올로기, 민족과 더불어 인류의 화합을 저해하는 3대 요소로 간주된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종교로 인한 반목과 분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십자군 전쟁에서 보스니아 내전과 9·11 테러에 이르기까지 많은 재앙과 대학살의 근저에는 종교적 원인이 깔려 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종교야말로 모든 갈등의 근원이라는 극단적인 말이 나오기까지 했다. 도법 스님이 “종교는 사람들의 근심을 덜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종교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말도 이를 반영한다. 그러나 정말 종교가 모든 분쟁의 근원인가. 통계에 의하면 세계 69억 인구의 70% 이상이 가톨릭, 개신교, 무슬림, 불교, 힌두교, 유대교 등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 이 모든 종교들 중 분쟁과 대학살을 교의로 삼아 가르치는 종교는 없다. 저명한 영국의 종교비평가 카렌 암스트롱은 종교가 가르치는 교의는 참인지 거짓인지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으며, 윤리적 행동으로 옮겨졌을 때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종교로 인한 모든 분쟁은 종교 교의를 정치적 담론으로 만들 때 발생한다. 그리고 종교의 정치화, 권력화를 조장하는 것은 거의 언제나 근본주의다. 요컨대, 종교가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 근본주의가 문제다. 근본주의의 핵심은 편협과 오만과 탐욕이다. 자기가 믿는 것은 선이고 상대방이 믿는 것은 악이라는 믿음, 자기가 믿는 것만이 진리라는 믿음, 그것을 지지하기 위한 문자주의,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상대를 지배하려는 권력에 대한 의지가 근본주의의 본질이다. 엄밀히 말해서 여기에는 그 어떤 종교적 내용도 없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이러한 근본주의와는 상관없이 신앙생활을 한다. 종교가 원인이라고 알려진 역사상의 대재앙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이면에 있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빙자한 지배욕일 때가 많다. 이런 의미에서 근본주의는 광신이나 맹신과는 또 다르다. 맹신과 광신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믿는 것이지만 종교적 근본주의는 미친 듯이 믿는 것이 아니다. 지배하기 위해 믿는 척하는 것이다. 조계종의 선언이 반가운 게 종교적인 화합을 촉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무신론적 근본주의, 과학적 근본주의 역시 종교적 근본주의 못지않게 위험한 현상이다. 일부 미래학자들은 미래의 양극화 현상에 종교와 무신론 간의 대립을 첨가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런 대립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모든 종교를 악으로 규정하는 무신론적 근본주의, 무신론과 과학만능을 결합해 모든 종교를 비과학적 편견으로 비난하는 과학주의적 근본주의가 벌써부터 고개를 든다. “상대방을 악이라 부르는 사람이 곧 악이다.”라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도법 스님의 선언을 읽다 보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생각난다. 2000년에 교황은 가톨릭 교회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뉘우쳤다. 진리에 봉사한다는 명목으로 사랑을 멀리했다는 것이 교황 발언의 요지였다. 각기 다른 시기에 각기 다른 종교인이 한 말이지만 결국 같은 얘기다. 상대방이 믿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진리, 사랑이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 [생명의 窓] 종교의 표층과 심층/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생명의 窓] 종교의 표층과 심층/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세계 여러 종교를 살펴보면 거의 모든 종교에 표층(表層)이 있고 심층(深層)이 있다. 물론 종교 전통에 따라 그 두께의 비율은 다를 수 있다. 어느 종교는 표층이 심층보다 어느 정도 더 두껍고, 어느 종교는 표층이 압도적으로 더 두꺼울 수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종교는 표층 불교와 심층 불교, 표층 기독교와 심층 기독교처럼 표층과 심층을 같이 가지고 있다고 보아 틀릴 것이 없다. 표층과 심층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산타의 예를 들어 본다. 세 살이나 네 살 된 아이들은 착한 일을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벽난로 옆에 걸어놓은 양말에 선물을 많이 주고 간다는 것을 그대로 믿는다. 아이가 자라 엄마가 양말에 선물을 넣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아이는 자연스럽게 “아, 엄마가 산타였구나. 산타 이야기는 식구들과 선물을 나눈다는 뜻이구나.”라고 깨닫고 지금까지 받기만 하던 것에서 자기도 엄마, 아빠, 동생에게 선물을 주게 된다. 좀 더 크면 가족뿐 아니라 온 동네, 좀 더 자라면 나라와 사회에서 불우한 이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 산타 이야기의 정신이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정신적으로 아주 성숙하게 될 경우,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하늘이 내려오고 땅이 하늘을 영접하는 천지합일(天地合一), 신인합일(神人合一)의 뜻이 있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된다. 모든 종교인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표층에서 시작한다. 시대적으로도 역시 특별한 경우를 예외로 하고 옛날에는 이런 표층 종교인들이 절대다수를 이루었다. 빌기만 하면 하늘에 계신 신이든 누구든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리라고 믿는 믿음이었다. 문제는 많은 종교인들이 이제 개인적으로도 많이 자라났고, 시대적으로도 개명한 상태라 이런 표층적 종교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나이가 40이 되었는데 아직도 산타 할아버지를 위해 굴뚝을 쑤시고 있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일이다. 요즘은 병이 나면 병원에 가고 돈이 필요하면 은행에 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인 세상이 되었다. 그러면 이제 종교란 완전히 무의미한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서 떠나는 것은 대부분 표층적인 종교가 종교의 전부라고 오해하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문제는 종교에서 심층 차원을 찾는 것이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목말라하는 것은 이런 심층 차원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시원함이다. 심층 차원의 종교란 무엇인가? 우선 심층과 대조되는 표층 차원의 종교가 가지는 특색 몇 가지를 들어보면 첫째, 문자주의적이다. 문자의 표피적 뜻에 집착하는 것이다. 둘째, 모든 것을 지금의 나, 이기적인 나 중심으로 생각한다. 종교를 가지는 것도 내가 잘 되기 위한 것이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말을 빌리면 몸나, 제나, 좀나를 어떻게라도 확대하고 꾸미고 연장하려는 데 관심을 가지는 종교다. 이와 대조적으로 심층 차원의 종교는 문자를 넘어 더 깊은 뜻을 찾으려는 것이다. 글의 ‘속내’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것을 알고 문자를 통해 문자가 가리키는 그 너머의 것을 보려고 한다. 더욱이 심층 종교는 지금의 나에서 벗어나 참나, 큰나, 얼나로 부활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렇게 새롭게 된 참나, 얼나가 바로 내 속에 계신 신성(神性) 혹은 불성(佛性)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런 측면을 강조하는 심층적 종교를 종교의 ‘밀의적(密意的, esoteric)’ 차원으로 보고, 표층적인 ‘현교적(顯敎的, exoteric)’ 차원과 대비시킨다. 이처럼 내 속에 신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심층적 종교에 접하게 되면, 내 스스로도 늠름하고 의연한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고 내 이웃도 하늘 모시듯 하는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제 한국에서도 더욱 많은 종교인들이 각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종교의 심층적 차원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지고 종교가 줄 수 있는 더욱 깊은 뜻을 간파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통곡은 시로 절망은 소설로 피어나다

    통곡은 시로 절망은 소설로 피어나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고립 말살 정책은 현재진행형이다. 21세기 지구상에서 끊이지 않는 전투와 학살, 폭력이 난무하는 곳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 사실상 유일하다. 그러나 처참함과 절망, 야만의 살육 속에서도 문학은 피어난다. 자식을 잃고 아랫입술을 곱씹는 어미의 통곡은 시가 됐고, 스무살 피끓는 청년이 허리에 폭탄을 두르기까지 주거와 이동이 막히고, 취업을 하지 못하고, 친구가 이스라엘군의 총에 죽음을 당하는 등 이야기는 그대로 소설이 됐다. 아시아문화네트워크는 2일 펴낸 계간 문예지 ‘아시아’ 여름호를 아예 팔레스타인 문학 특집호로 꾸몄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구호물품을 실은 선박에서 민간인을 살상한 직후여서 더욱 눈길을 끈다. ‘아시아’는 근대 아랍시의 창시자로 꼽히는 마흐무드 다르위시(1941~20 08)와 근대 아랍소설 창시자 갓산 카나파니(1936~1972), 세계적인 석학으로 꼽히는 비교문학 이론가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 등에 대한 평가와 이들이 팔레스타인 문학에 미친 영향, 팔레스타인 문단의 현주소 등을 다뤘다. 자신을 ‘저항시인이기 이전에 시인이다.’라고 천명했던 다르위시의 시 ‘여권’, 카나파니의 단편소설 ‘난민촌의 총’, 사이드의 문학평론 ‘문학과 문자주의’, 팔레스타인의 민담 ‘초록새’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소개했다. 팔레스타인과 한국의 문학·문화 등을 소개하고 교류하는 예술가 등의 모임인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 회원인 소설가 오수연이 팔레스타인 현지에서 젊은 작가들과 나눈 지상 대담은 팔레스타인 언어와 문학의 깊이, 작가들의 생생한 고민을 엿보게 해 흥미롭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사회 상황 추적해 밝힌 예수의 역사

    한국의 개신교는 절대적 교리와 성경 문자주의 맹신에 매몰된 채 민중 속에서 호흡하며 고민했던 역사적 예수에의 성찰이 실종됐다는 지적을 흔히 받는다.최근들어 예수의 공생애 기간을 둘러싼 실존적 연구에의 관심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개신교계 한 쪽의 작은 목소리에 불과할 뿐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그리스도교가 형성된 1세기 무렵 지중해 연안의 사회 상황을 추적해 역사적 예수와 그의 추종자랄 수 있는 ‘예수 따름이’의 실상을 밝힌 역저가 국내에선 처음으로 번역 출간돼 눈길을 끈다.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가 기획해 한국 신약학계의 실력자로 인정받는 손성현(감신대 교수),김판임(세종대 교양학부 교수) 박사의 내공이 낳은 800쪽 분량의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동연 펴냄) . 독일 출신의 쌍둥이 신학자 에케하르트 슈테게만과 볼프강 슈테게만 원저로 예수 사후 1~2세기 초 다양하게 전개됐던 이른바 ‘예수 운동’의 실상을 사회사적으로 접근한 역저이다.예수운동이 지리적으로나 사회·문화적,혹은 정치적으로 동일하지 않은 배경에서 시작되고 펼쳐졌음을 정교하게 파헤친 점이 가장 큰 특징. 1979년 독일서 출간되자마자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고 초기 그리스도교에 대한 사회사적 연구를 태동,확산시킨 작품.저자들이 한국의 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밝힌 사실도 흥미롭다.저자들은 책 모두 ‘한국의 독자들에게’라는 글을 통해 “성서의 사회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할 때 한국의 민중신학을 통해 많은 영향과 자극을 받은 만큼 이 책은 한국으로부터 받은 것을 되돌려주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신의 가면’ 제1권 ‘원시신화’/예술적 시각서 신화의 원류 추적

    조지프 캠벨지음 이진구 옮김 / 까치 펴냄 미국의 비교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역작 ‘신의 가면’ 4부작이 완간됐다.‘동양신화’‘서양신화’‘창작신화’에 이어 최근 1권 ‘원시신화’(이진구 옮김,까치 펴냄)가 마지막으로 나온 것.캠벨이 50대 중반에 시작해 10년 만에 완성한 이 저작은 시기적으론 선사시대에서 현대에 이르고,공간적으론 서아프리카와 멕시코 유카탄 반도,시베리아,오스트레일리아에까지 미친다. ‘원시신화’는 고고학·민족학·심리학·생물학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인류를 관통하는 신화의 공통분모를 추적한다.원시농경인의 신화와 원시사냥꾼의 신화,신화의 심리학,신화의 고고학 등을 주요 테마로 다룬다.원시농경인 신화가 식물의 죽음과 재생을 근본 모티브로 한다면,원시사냥꾼 신화는 동물살해와 희생제의를 뼈대로 삼는다. 신화연구에서 문자주의와 실증주의의 시각을 경계하는 캠벨은 신화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다.신화를 시적 심성으로 바라보고 접근해야 삶에 대한 궁극적 신비가 풀린다는 것이다.이같은 맥락에서 캠벨은신화를 고리로 과학과 낭만의 대화를 촉구한다. 먼저 나온 2권 ‘동양신화’는 이집트·인도·중국·티베트·일본신화를,3권 ‘서양신화’는 레반트·페르시아·그리스-로마·북유럽 신화를 다뤘다.4권 ‘창조신화’에선 중세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화가 재생되는 과정을 살폈다.원시·동양·서양신화 각 2만원,창작신화 2만 5000원. 김종면기자
  • 예수는 신화다/ “”예수는 실존하지 않았다”

    ‘그대가 그들을 위해 죽었다고 그들은 말하는가?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영원히 살아 있다! 그들의 주님이신 그는 영원히 살아 있고,영원히 젊다.’이 시는 예수를 찬양한 것이 아니다.고대 이집트 시인이 그들의 신 오시리스를 찬미해 읊은 것이다.오시리스 또한 예수처럼 대속(代贖)해 죽은 뒤 부활했다. 중세기 프랑스의 한 성당에서는 검은색 처녀상을 마리아상이라고 믿고 숭배했다.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정밀 검사해 보니 이집트 여신 이시스의 상이라는 사실이 입증됐다.이시스는 오시리스의 배우자 격인 여신이다.이시스가 아기를 안고 있는 그림·조각은 마리아와 어린 예수의 모자상으로 종종 오인됐다. 왜 이같은 일이 일어났을까.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생애,동정녀에게서 태어났으며 세상의 죄를 대신하고자 십자가(또는 나무)에 매달려 죽었고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이 오시리스의 삶과 놀랍도록 닮았기 때문이다.그뿐이 아니다.오시리스 또한 예수처럼 인류의 구원자이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이며,12 사도를 거느렸고,결혼식장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등 숱한 이적을 행했다. 예수는 실존인물이 아니다,그 존재는 이집트를 비롯해 지중해 세계 각지에퍼져 있던 이교도 신(神)들의 또다른 변형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책 ‘예수는신화다’(원제 The Jesus Mysteries)가 최근 나왔다(동아일보사 간, 1만 2000원). 지은이는 철학박사로서 세계 신비주의에 관한 권위자인 티모시 프리크와 고대문명 전공자인 피터 갠디.두 사람은 현대 학계의 연구 성과를 폭넓게 활용해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철저히 추적함으로써 예수가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가설을 풀어나간다.그들의 주장을 따라가 보자. 고대 이집트에서는 일단 죽었다가 부활한 신인(神人)인 오시리스를 믿는 신앙이 성행한다.오시리스는 서기전 6세기 그리스에 도입돼 토착신 디오니소스로 모습을 바꾸었다.소아시아의 아티스,시리아의 아도니스,이탈리아의 바쿠스,페르시아의 미트라스 등 각 지역 신 또한 오시리스 신앙을 흡수했다.그핵심인 ‘죽음’과 ‘부활’은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상징화한 것이었다. 서기 70년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자 위기감에 빠진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더욱 열망했다. 이에 ‘실존적인’인물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신으로 제시하지만 유대인들은 거부한다.새로 형성된 그리스도교인들은 오래지 않아 두 파로 갈린다.예수가 실존했으므로 그의 말씀을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문자주의자’와 예수 이야기는 결국 깨달음을 얻기 위한 상징일 뿐이라는 ‘영지주의자’(그노시스)로. 서기 321년 로마제국은 ‘문자주의자’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채택한다.무조건적인 믿음을 요구하는 교의가 ‘하나의 제국’을 원하는 로마황제의 의도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국교가 된 ‘문자주의자’그리스도교는 반대파와 이교도를 탄압하고 각종 문헌을 왜곡해 예수의 존재를 역사적으로 확고하게 만든다. ‘예수는 신화다.’라는 주장에 무조건 동의할 까닭은 없다.다만 책 말미에 실은 곽노순 목사(후기 기독교 신학연구실)의 추천사 한 대목은 이 책의 가치를 제대로 대변해 준다.“분명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많은 신선한 생각거리에 부딪힐 것이고,땅 속에 묻혀 있던 보고(寶庫)를 찾아보려는 충동을 느낄 것이다.” 임창용기자 sd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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