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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산 ‘영천암 무량수각’ 보물 지정…조선시대 불교 건축 가치 인정

    금산 ‘영천암 무량수각’ 보물 지정…조선시대 불교 건축 가치 인정

    충남 금산군은 7일 남이면 소재 금산 보석사 산내 암자 영천암의 중심 건물인 ‘영천암 무량수각’이 국가 보물로 지정 고시됐다고 밝혔다. 영천암은 통일신라시대 조구대사가 수도장으로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다. 영천암 무량수각은 2000년 전체 해체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과 상량 묵서를 통해 1786년(정조 10)에 중수된 사실과 함께 공사에 참여했던 승려와 장인이 정확하게 확인된 건물이다. 상량문에는 중수 당시 공사가 100여년 만의 보수였다는 내용이 남아 있어 무량수각이 17세기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됐다.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영천암 무량수각은 ‘ㄱ’자형 평면, 이익공 공포,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이 결합된 지붕 구조, 다락 공간 구성 등에서 조선시대 산중 암자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군 관계자는 “금산 영천암 무량수각은 조선시대 산중 암자의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됐다”고 설명했다.
  • 금산 ‘영천암 무량수각’·청양 ‘장곡사 설선당’ 보물 된다

    금산 ‘영천암 무량수각’·청양 ‘장곡사 설선당’ 보물 된다

    충남의 대표적 조선시대 사찰 건축물인 금산군 ‘영천암 무량수각’과 청양군 ‘장곡사 설선당’이 보물로 지정된다. 30일 충남도에 따르면 국가유산청이 영천암 무량수각과 장곡사 설선당을 각각 국가 지정 문화유산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두 사찰 건축물은 조선시대 조성된 전통 목조건축의 구조적 특성과 공간 구성, 시대적 건축 양식 등을 보여주는 도내 대표적인 건축 문화유산이다. 무량수각은 산중 수행과 생활이 가능하도록 온돌방에 불상을 안치한 인법당(因法堂) 형식의 건축물이다. 건축물은 상부 다락 설치와 불단 상부 반자 상승 등의 공간을 입체적으로 구성해 인법당 건축 구조와 구성 측면에서 학술 가치가 크다. 영천암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승장 영규대사 등의 진영을 모시고 춘추 제향을 이어온 역사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설선당은 승려들이 경전을 강론하고 참선을 수행하던 공간 건축물이다. 사찰 내 교육과 수행 기능을 함께 담당했다.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 주심포 양식을 기반으로 맞배지붕과 부섭지붕이 결합한 형식을 갖췄다. 경내 국가 보물인 장곡사 대웅전과 함께 사찰 배치와 기능적 관계 이해에 중요 자료로 평가받는다. 김재균 도 문화유산과장은 “도내 문화유산의 체계적 보존·관리와 활용으로 지역 문화유산 가치를 높이겠다”고 말했다.
  • 독창적 문양 분청사기 음각선어문 편병부터 가평 현등사 극락전까지 보물 지정 예고

    독창적 문양 분청사기 음각선어문 편병부터 가평 현등사 극락전까지 보물 지정 예고

    8년 전 미국의 한 경매에서 분청사기 역대 최고가 기록을 세운 ‘분청사기 음각선어문 편병’과 부불전인 가평 현등사 극락전 등이 보물이 된다. 국가유산청은 두 문화유산을 포함해 17건을 보물로 지정할 계획이라고 30일 밝혔다. 개인 소장 유산인 ‘분청사기 음각선어문 편병’은 15~16세기경 전라도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물레로 둥근 병을 성형한 뒤 몸통을 두드려 면을 만들고 굽을 깎은 편병(자라 모양으로 만든 병) 형태로, 날카로운 도구로 표면을 긁어 문양을 새겼다. 한쪽에는 물살을 헤치고 헤엄치는 물고기 한 마리가, 다른 한쪽에는 여러 선이 어우러진 기하학적 문양이 있다. 편병은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일본 소장가가 구입해 반출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후 유명 컬렉터가 소장하다 2018년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 내놓았다. 당시 경매에서 경합 끝에 313만 2500달러(수수료 포함·당시 기준 한화 33억 2500만원)에 낙찰돼 화제가 됐다. 그동안 불전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부불전, 요사채 등 불교 건축유산도 보물로 지정 예고됐다. 부불전은 부처나 보살을 모신 중심 불전에서 떨어져 있는 법당을, 요사채는 사찰에서 승려들이 거처하는 공간을 말한다. 국가유산청은 불교계와 함께 조사를 한 뒤 ‘가평 현등사 극락전’, ‘괴산 각연사 비로전’, ‘고창 선운사 영산전’, ‘순천 선암사 원통전’, ‘순천 송광사 응진당’, ‘경주 기림사 응진전’ 등을 보물로 지정하기로 했다. 요사채 중에서는 ‘금산 영천암 무량수각’, ‘청양 장곡사 설선당’, ‘부안 내소사 설선당과 요사’, ‘익산 숭림사 정혜원’ 등이 보물 예정 목록에 올랐다.
  • 지난겨울도 힘들었수다, 폭싹 속았수다… 고단한 세월 버텨온 그대, 아픔 달래줍서[박상준의 여행 서간(書簡)]

    지난겨울도 힘들었수다, 폭싹 속았수다… 고단한 세월 버텨온 그대, 아픔 달래줍서[박상준의 여행 서간(書簡)]

    지나고 나면 알게 되는 진심들이 있습니다. 더러는 후회로 남고 더러는 미련을 떨치지 못해서 자꾸 뒤돌아보게 하지요. 봄날이 화사할수록 그리움은 깊어만 갑니다. 당신의 4월 이야기는 누구와 함께인가요? 그이에게 건네는 당신의 말은 연애편지인가요, 낙서인가요? 오늘은 봄날의 마음을 먼 남쪽 땅 제주로 유배 보냅니다. ‘폭싹 속았수다’ 보고 계신가요? 딸 금명(아이유)이 엄마 애순(문소리)과 전화하는 장면에서 눈물, 콧물 다 쏟고 말았어요. ‘폭싹 속았수다’는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뜻의 제주말입니다. 드라마의 제목으로 쓴 이유를 알게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우리는 백 번, 천 번 고마워해야 할 이의 가슴은 낙서장처럼 쓰고, 어쩌다 한 번인 타인의 친절에는 연애편지처럼 관대하게 답하지요. 그럼에도 정제되지 않는 말들은 가까운 사이라 가능한 투정이겠습니다. 당신은 어떤가요? ‘폭싹 속았수다’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잃어버린 얼굴들이 떠올라 가슴 한켠이 서걱거렸습니다. 그리고 제주의 봄이 그리워졌습니다. ●‘금명’처럼 사랑하는이에게 푸념하듯 저는 지금 제주 남서쪽 대정읍을 향하고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 살던 동네에 가려 합니다. 대정에는 그가 유배 시절 가장 오랜 시간 머문 집이 있고,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기념관이 있습니다. 유배가 무에 기념할 일일까 싶지만 추사의 일생을 두고 보면 제주 시절은 스스로 낮아지고 가벼워지는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그는 유배지에서 많은 편지를 썼습니다. 아내에게, 가족과 지인에게 고단함을 토로하곤 했지요. 저는 그가 글씨를 잘 쓴 사람이 아니라 편지를 자주 쓴 사람이어서 좋습니다. 편지 속에서 속내를 숨기지 않고 푸념하듯 뱉은 글들은 조선 최고의 명필 이전에 나 같고, ‘금명’ 같은 사람이었을 거라 믿게 합니다. “… 팔도의 다 있는 것이 여기 없으니… 북어 명태란 말을 듣지도 못하였사옵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탄탄대로를 걷던 그에게 유배 생활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적당히 연하고 무른 민어를 가려서 사 보내라거나, 겨자는 맛난 것을 넉넉히 보내라는 등 재촉하는 내용이 적잖습니다. ‘금명’이 ‘애순’에게 그랬듯 사랑하는 이여서 그랬겠지요. 꼬박꼬박 한글로 ‘~사옵니다’라고 존대해 적은 편지는 이를 짐작하게 합니다. 1842년 11월 14일, 그는 또 아내 예안 이씨에게 편지를 씁니다. 아내의 병환을 걱정하며, ‘소식을 자주 듣지 못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타는 듯하여 못 견디겠사옵니다’라고 적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습니다. 제주와 육지를 오가는 편지는 족히 몇 달이 걸렸고, 그 시차가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바다 같았겠습니다. 그래서 건축가 승효상은 제주추사관의 전시공간은 지하에, 진입로는 가파르게 설계해 추사의 절박함을 전하려 합니다. 제주추사관이 처음 지어졌을 때 마을 사람들은 ‘감자창고 같다’ 했다고 합니다. 단아한 1층 건물은 추사의 명성에 비하면 소박합니다. 계단 사이로 가파르게 난 갈지자(之)형 경사로를 지나 전시실로 내려갑니다. 먼저 두 개의 무량수각(無量壽閣) 현판 앞에 멈춥니다. ●세월의 풍상 견디며 뿌리내린 삶의 흔적 추사가 유배 오는 길(1840년)에 썼다는 해남 대흥사 무량수각과 유배 6년이 지나 예산 화암사에 보낸 무량수각 글씨입니다. 앞에 것은 힘차고 호쾌하며 뒤에 것은 여유롭고 담백합니다. 탁본일지라도 한 생의 증거를 이처럼 나란히 두고 마주할 기회는 많지 않을 겁니다. 저는 문 아래 사람이 지나는 듯한 화암사 현판의 ‘각’(閣) 자가 좋습니다. ‘각’(閣) 은 2층 이상의 큰 집에 붙이는 말인데 ‘문’(門)의 우측을 슬며시 기울여 썼습니다. 세월의 풍상을 견딘 문은 분명 그런 모양으로 점점 낮아지며 땅에 뿌리 내려 나이 먹었을 겁니다. 추사에게 제주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알겠습니다. 이 현판은 대흥사에 얽힌 전설 때문에 유명하지요. 추사는 유배 길에 대흥사에 들렀다가 원교 이광사의 현판을 떼고 자신의 글씨를 걸으라 했다고 하지요. 8년 3개월의 유배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는 후회하며 이를 돌려놓았고요. 추사와 떼어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이 동갑내기 친구 초의선사입니다. 그는 우리나라 ‘차의 성인’(茶聖)이라 불립니다. 추사에게 ‘제주화북진도’를 선물하며 ‘서로 사모하고 아끼는 도리를 잊지 않은’ 사이라 했을 만큼 각별한 벗입니다. 추사가 대흥사에 들른 것 역시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시장 한쪽에는 ‘명선’(茗禪)이란 큰 글씨가 보입니다. ‘차를 마시며 선의 경정에 들다’라는 뜻입니다. 추사가 초의선사에게 선물한 호입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는 ‘완당전집’, ‘여초의’, ‘벽해타운’ 등에 알려진 것만 무려 70여편에 달합니다. 막역하고 개구진 벗들의 대화가 웃음 짓게 합니다. 추사는 제주에서 처음 말을 타다 살갗이 벗겨진 초의선사에게 사슴 가죽을 얇게 펴 밥풀로 붙이라 하며 ‘스님의 살가죽이 사슴 가죽과 비교해 어떤지 보자’며 놀립니다. 편지는 제주 유배가 끝난 후에도 이어졌는데요. 그때도 추사는 초의선사의 치통을 ‘혼자서 좋은 차를 마셨’기 때문이라 타박합니다. 저는 누구에게 이런 ‘낙서’ 같은 편지를 건넬 수 있을까요. 철없다 느껴지던 추사의 편지들이 조금씩 부러워지는 건 왜일까요. ●힘든 세월 잘 견뎌 낸 이들에게 전할 말 당신이 떠올리는 추사체는 어떠한가요? 제주추사관의 마지막 전시실은 우리의 선입견을 깨뜨립니다. 전시실 벽에 걸린 ‘판전’(板殿)의 현판은 그가 71세 병중에 마지막 쓴 글씨입니다. 비례나 균형이 맞지 않고 삐뚤삐뚤해 서툴러 보이기까지 해요. 추사의 글씨라 믿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서 대가의 글씨를 이미 마주했던 터라, 그 떨림을 더 오래 명상하듯 바라보게 됩니다. 끝끝내 잘 쓴다는 것,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까지 번져갑니다. 전시실을 나서기 전에는 어둠 속에서 추사의 흉상을 마주합니다. 흉상의 시선은 판전(板殿) 현판 위 동그란 창에 이릅니다. 그 너머로 소나무가 어리네요. 소나무와 잣나무 사이에 원형의 창을 가진 집 한 채. 제주추사관은 동쪽에서 보면 ‘세한도’의 정경을 닮았습니다. 추사의 유배가 5년 차에 접어들 때쯤, 북경의 귀한 책을 구해 준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선물한 그림입니다. 추사의 발문은 제자에게 전하는 편지이고, 댓글처럼 줄줄이 이어지는 20여명의 감상평은 후대의 사람들이 추사의 생에 바치는 헌사와 다름없겠습니다. 추사영실에서 길은 다시 건물 바깥의 추사적거지로 이어집니다. 적거지는 추사가 유배 시절 머물던 집으로 안채와 바깥채, 별채를 재현했습니다. 담장에는 제주말로 개탕쥐낭이라 불리는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러 위리안치를 표현했고요. 가시덤불이 담장을 타고 올라갑니다. 아쉽게도 제주추사관에는 추사의 편지가 많지는 않습니다. 가족과 지인에게 건넨 편지 정도가 있지요. 그럼에도 추사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한 통 한 통에 깃든 마음은 대정이라서 한층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추사는 1848년, 8년 3개월의 유배를 마치고 돌아갑니다. 제주에 처음 다다랐을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었겠지요. 추사체가 제주에서 비로소 얼개를 갖춘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점점이 멀어지는 바다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잘 견뎌 낸 자신에게, 먼저 떠난 아내에게, 굳건한 벗이 되어 준 초의선사에게 그리고 자신의 생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 제주와 그 땅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폭싹 속았수다.’ ●곶자왈 숲이 보낸 생명의 소리 유배지의 날들은 외롭고 고된 세월이었을 겁니다. 늘 바쁜 우리는 정작 그 유배의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고요. 4월의 제주는 활짝 핀 유채꽃과 벚꽃도 좋겠습니다만 오늘은 당신에게 제주 숲의 소리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제주에는 곶자왈이 있습니다. ‘곶’은 숲이고 ‘자왈’은 돌과 나무들이 엉클어진 덤불을 뜻하지요. 곶자왈에는 열대 북방한계와 한대 남방한계 식물이 어울려 산다고 해요. 제주의 생태 콘텐츠 스타트업인 ‘더사운드벙커’의 ‘사운드 워킹’은 그 숲을 거닐며 가만히 제주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프로그램입니다. 눈으로 좇고 혀끝으로 탐하던 제주를 귀로 맞아들이는 겁니다. 사운드 워킹은 제주추사관에서 멀지 않은 화순곶자왈에서 이뤄집니다. 전문가용 소형 녹음기와 헤드셋이 소리의 동반자입니다. 4월의 곶자왈은 초록이 한층 싱그럽게 피어납니다. 머리 위로 바람이 불고 나뭇가지와 잎들이 부딪쳐 웅성거릴 때 그것은 잔잔한 파도 소리처럼 들립니다. ‘호오~휘리릭’ 하는 섬휘파람새 소리도 들리네요. 새들의 소리가 구애의 ‘송’(song)과 신호의 ‘콜’(call)로 나뉜다는 걸 아시나요? 이것은 봄날의 섬휘파람새가 짝을 찾는 소리이므로 노래일 겁니다. 그리고 헤드폰을 벗는 순간 우리는 그 숲에 작은 생명들이 살아 숨 쉰다는 걸, 사람이 가늠할 수 없는 자연의 소리로 넘쳐난다는 걸, 때로는 귓가에 닿았으나 미처 알아채지 못한 공기 같은 소리가 있다는 걸 알아챕니다. 우리에게 여행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감각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지요. 사람과 자연은 글로는 소통할 수 없지만 그렇게 소리로 조금씩 서로를 알아갈 수 있다는 것도요. ●10년 지나 오는 ‘피그말리온 편지’ 다시 ‘폭싹 속았수다’입니다. 제주 푸른 바다가 눈물바다로 보이는 당신과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제주교육박물관은 ‘폭싹 속았수다’의 장면 장면이 겹쳐 흐르지요. 어린 금명이 등에 메고 인사하던 빨간 책가방, 시내버스 승차권, 구슬이나 딱지 같은 추억이 반짝입니다. 더구나 2층은 세트장이나 진배없습니다. 양은 도시락이 놓인 만화방, 애순(아이유)과 관식(박보검)이 된 양 옛 교복을 입어 볼 수 있는 교실 등에서 우리는 잠시 제주의 옛 시간을 살갑게 느껴 봅니다. “밥값. 시(詩) 써.” ‘폭싹 속았수다’에서는 딸 금명이 집을 떠나며 니베아 크림과 함께 엄마에게 엽서 같은 메모 한 장을 남깁니다. 저는 그 장면이 떠올라 2전시실 앞에서 한참 머물렀습니다. ‘어머님 보십시오’로 시작하는 1970년대 편지에는 어머니가 보내준 반찬거리에 ‘집의 냄새가 깃들여’ 있다 적혀 있습니다. 따라 스크랩해 붙인 편지였는데 제게는 어머니가 아들의 편지를 고이 간직했다는 증표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니 박물관을 쉬이 떠날 수 있을까요. 제주교육박물관에는 10년 후에 받아 보는 피그말리온 편지가 있습니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절실히 바라는 마음이 이뤄진다는 걸 뜻하는 심리학 용어지요. 누군가는 가족의 평안을, 건강을, 어떤 간절한 믿음을 글로 써나갔겠습니다. 지난해에도 10년 전 제주를 다녀간 이들에게 512통의 편지가 발송되었습니다. 저는 10년 후의 봄날을 떠올려 몇 글자를 눌러 씁니다. 제주교육박물관을 나와서는 4㎞ 남짓한 거리의 제주목관아와 관덕정을 찾아갑니다. ‘폭싹 속았수다’의 백일장 장면 촬영지입니다. 시인이 되고픈 애순과 그런 애순을 사랑하는 관식이 시를 쓰는 장면에 나오지요. 애순은 ‘가슴속에 식지 않은 돌 하나’를 엄마에 비유해 쓰고, 관식은 애순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왱왱왱, 잉잉잉’이라고 표현하지요. 제주목관아는 탐라국 시절부터 제주 행정의 중심이었습니다. 제주목관아 앞 관덕정은 제주에서 가장 오랜 건물이고요. 신발을 벗고 관덕정에 오릅니다. 눈 앞에 오늘의 제주 거리가, 등 뒤로는 제주목관아의 옛 시간이 흐릅니다. 평화로운 한때입니다. 그러나 이맘때는 제주 4·3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제주에서 4월의 봄꽃은, ‘폭싹 속았수다’라는 말은 어쩌면 제주가 간직한 모든 이야기의 주인공들에게, 그 시간을 견뎌 낸 당신들에게 건네는 위령의 말일지 모르겠습니다. ■ 여행수첩 ●제주추사관 -오전 9시~오후 6시(오후 5시 30분 입장 마감), 월요일 휴관, www.jeju.go.kr/chusa ●제주교육박물관 -오전 9시~오후 6시(오후 5시 30분 입장 마감), 월요일 휴관, www.jjemuseum.go.kr
  • 봄빛 아래 꽃비… 흐드러지다, 그날의 우리

    봄빛 아래 꽃비… 흐드러지다, 그날의 우리

    벚꽃 시즌이다. 나라 안 곳곳에서 풍경을 찢을 기세로 벚꽃이 부풀어 오르는 중이다. 이 봄에 놓칠 수 없는 수양벚꽃 명소를 꼽았다. 수양벚꽃의 자태는 여느 벚꽃과 다소 다르다. 늘어진 가지 때문인지 어딘가 차분하고 여성스러운 느낌이다. 수양벚꽃의 본디 이름은 ‘처진개벚나무꽃’이다. 외형을 충실히 반영한 이름인 듯한데, 학술명이 무엇이든 지금 이 자리에선 보다 서정적인 수양벚꽃이라 부르기로 한다.수양벚꽃엔 조선의 17대 왕 효종의 고사가 담겼다. 청나라에서 8년간 볼모 생활을 한 효종이 훗날 북벌의 꿈을 펼칠 무기로 쓰기 위해 많이 심었다고 한다. 나무로는 활을 만들고 껍질은 활을 감을 때 썼다는 것. 벚나무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은 것에 비춰 볼 때 나라 곳곳에서 자라고 있는 수양벚나무들은 이런 웅지가 DNA에 새겨진 후계목일 터다.완벽한 대칭의 ‘저세상 풍경’ 수양벚꽃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경남 창녕의 영산 만년교(보물) 옆 수양벚나무다. 영산 만년교 수양벚꽃은 이른 새벽에 찾아야 ‘저세상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햇살이 비칠 무렵 아치 형태로 쌓은 무지개다리와 노란 개나리꽃, 그리고 수양벚꽃이 완벽한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기온이 오르고 바람이 불면 시냇물이 흐트러지며 선경도 흔적 없이 사라진다. 만년교 옆의 연지못도 찾을 만하다. 불덩어리 형상이라는 영축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만든 저수지다. 연지못 주변에도 수양벚꽃이 많다. 연못 안에는 다섯 개의 섬이 떠 있다. 하늘의 다섯 별을 상징하는 인공섬이다. 가장 큰 섬에 세워진 정자는 ‘항미정’이다. 흔히 ‘향미정’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다. 항미정은 중국 항저우(杭州)의 미정(眉亭)에 빗댄 표현이다. ‘초승달을 닮은 눈썹’이라는 뜻의 아미(蛾眉)는 흔히 아름다운 여인을 우회적으로 표현할 때 쓴다. 항미정 역시 아름다운 연못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눈썹(眉)이란 단어를 쓴 것으로 보인다.꽃잎 우수수… 엔딩까지 절경 전남 순천 선암사는 나라를 대표하는 ‘꽃절집’ 화훼사찰이다. 경내 무량수각 앞에 나라를 대표할 만한 자태의 수양벚나무가 있다. 가지마다 매단 꽃등불들이 수수한 절집과 기막히게 어우러진다. 햇살을 마주하고 보면 반짝이는 꽃술들이 꼭 은하수 속 별들과 닮았다. 벚꽃은 질 때도 아름답다. 바로 앞 연지 위로 우수수 떨어진 벚꽃잎이 수면을 덮으며 그림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펼쳐 낸다. 선암사에서 가장 유명한 건 사실 선암매(천연기념물)라 불리는 매화다. 한데 깊은 산속에 터를 잡은 데다 워낙 수령이 오래돼 여느 매화보다 훨씬 늦게 꽃을 틔운다. 4월 중순 이후 찾길 권한다. 선암사의 겹벚꽃도 꽤 유명한데, 역시 늙은 매화들과 비슷한 시기에 피고 진다.이토록 고혹적인 옛 빨래터 대구에선 앞산 빨래터 공원의 수양벚꽃이 인상적이다.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녀 봐도 빨래터를 소재로 볼거리를 조성한 곳은 서울 청계천과 대구 빨래터 공원뿐이지 싶다. 벚꽃의 자태로만 보면 사실 그리 빼어난 건 아니다. 아직 어린 수양벚꽃이 더없이 고혹적으로 느껴지는 건 옛 빨래터와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엔 수많은 아낙이 이곳에 모여 빨래를 했을 것이다. 맨다리를 드러내고 빨래하는 아낙네를 훔쳐보는 떠꺼머리총각들도 수두룩했겠지. 이런 춘정의 역사 덕에 이 일대가 더욱 요염하게 빛난다.천주교 대구대교구청 안의 왕벚나무도 꼭 찾길 권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에 온 프랑스의 에밀 타케(한국명 엄택기, 1873~1952) 신부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나무다. 에밀 타케 신부는 우리 식물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1908년 한라산 자락의 관음사 인근에 자생하던 왕벚나무(천연기념물)를 발견해 일본 ‘사쿠라’의 원산지가 한국이란 사실을 처음 밝혔고, 1911년 ‘제주 밀감’(온주밀감)을 들여와 제주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그의 이름을 따 ‘타케티’라는 학명이 붙은 식물만 해도 한라부추 등 20여종에 달한다고 한다.대웅전·미륵불 감싸듯 활짝 무심천(無心川)이 흐르는 충북 청주에도 ‘결코 무심할 수 없는’ 수양벚꽃 명소가 있다. 우암산 자락의 대한불교조계종수도원이다. 원래 이름은 용화사였는데 동명의 대가람이 청주에 먼저 자리잡은 탓에 조계종 말사인 대한불교조계종수도원이란 긴 이름으로 바꿨다. 대웅전과 미륵불 주변으로 수양벚꽃이 흐드러진다.
  • ‘떨림’ 그리움에 사무치다…‘울림’ 속세에서 피안으로

    ‘떨림’ 그리움에 사무치다…‘울림’ 속세에서 피안으로

    피안앵(彼岸櫻). 절집에서 자라는 벚나무를 이르는 말이다. 고단한 현실의 강 너머 피안의 세계로 이끄는 나무란 뜻이다. 벚꽃 흩날리는 이맘때라면 대개는 벚나무 무리지은 명소를 찾기 마련이다. 코로나19가 창궐하는 올해는 방향을 달리해 보자. 벚꽃 몇 그루 핀 적요한 절집을 찾아 한나절 어슬렁대는 건 어떨까. 그렇게 피안앵이 아름다운 절집을 찾아 나선 길이다. 하필 벚꽃이 절정일 때 사회적 거리두기도 절정의 순간을 맞았다. 대한민국의 ‘벚꽃 성지’인 경남 창원 여좌천, 경화역 등이 폐쇄됐고, 서울 여의도 윤중로 등 내로라하는 전국의 벚꽃 명소들도 줄줄이 문을 닫아걸고 있다. 유명 벚꽃 관광지는 피하고 덜 이름났으면서도 나름의 빼어난 풍경을 가진 숨은 여행지를 찾아 전해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맞은 셈이다.●배배 꼬인 둥치 위에 연분홍 꽃잎의 봄마중 봄이 오면 꼭 찾아보리라 별렀던 곳이 있다. 경남 양산의 극락암이다. 대가람 통도사에 딸린 열아홉개 산내 암자 중 하나다. 코로나19의 기세가 여전히 등등한 상황에서 산문을 닫지나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아직 문은 열려 있다. 극락암은 통도사에서 4㎞ 정도 떨어져 있다. 걷자면 한참이지만 자동차로는 금방이다. 예전 같으면 걸어 보시라 권했겠지만 요즘 같은 때엔 ‘드라이브 스루’가 당연해 보인다. 암자 초입엔 솔숲이 펼쳐져 있다. 늙은 소나무들이 춤을 추듯 늘어서 있다. 통도사 초입의 ‘무풍한송로’에 견줄 만큼 인상적인 모습이다. 솔숲을 나서면 곧 극락암이다. 어서 오라는 듯 늙은 벚나무 몇 그루가 활짝 가지 벌려 객을 맞고 있다. 산중 암자라 덜 여물었을 거란 예상과 달리 벚꽃은 거의 만개한 상태다. 이 늙은 고목에서 꽃잎이 분분히 날릴 때면 또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질까.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가장 인상적인 건 작은 연못 옆에 있는 벚나무다. 실타래처럼 배배 꼬인 굵은 둥치가 살아낸 세월을 웅변하는 듯하다. 거무튀튀한 수피 위로 연분홍의 가녀린 꽃잎들이 겹겹이 매달려 있다.●무지개 다리 ‘홍교’ 건너 욕심도 노여움도 버리고 연못의 이름은 극락영지(極樂影池)다. 이름 그대로 연못엔 극락암을 둘러싼 영축산 풍경이 그대로 잠겨 있다. 연못 위로는 어여쁜 무지개다리, 홍교(虹橋)가 가로놓여 있다. 홍교는 당대 최고의 선지식으로 꼽히는 경봉(1892~1982) 스님이 1962년 조성했다. 다리의 크기는 작아도 담긴 뜻은 크다. 세속의 세 가지 독, 이른바 탐진치(貪瞋癡, 욕심·노여움·어리석음)를 버리고 극락에 이른다는 다리다. 연못, 벚꽃 등과 어우러진 자태가 속된 곳을 넘어 성스러운 세상으로 오르는 다리처럼 보인다. 홍교 너머로는 극락암 중심 전각인 무량수각(극락전), 설법전인 영월루 등이 주르륵 이어져 있다. 부속 암자라고는 해도 어지간한 사찰보다 큰 규모다. 경내 가장 오른쪽에 삼소굴(三笑窟)이 있다. 경봉 스님이 통도사 방장으로 30여년간 주석하며 기거했던 곳이다. 대가람의 방장이 머물던 집치고는 여염의 사랑채처럼 작고 아늑하다.무량수각 뒤는 단하각이다. 나반존자를 모신 독성각이다. 나반존자는 홀로 이치를 깨닫고 도를 이뤘다는 성자다. 단하각 가는 소로 주변엔 겹동백이 무시로 피었고, 늙은 산수유도 한껏 흐드러졌다. 찾는 이 드문 절집 뒤란에도 이처럼 봄이 무르익고 있다. 통도사 경내에도 벚나무가 몇 그루 있다. 절집의 오래된 당우들과 어우러져 독특한 경관을 선사하고 있다. 일주문 옆 벚나무의 자태가 멋지다. 저물녘 범종 소리 울릴 때 꽃잎이 비처럼 흩날린다면 그야말로 선경이겠다.●말로만 들었던 쌍계사 십리벚꽃길 직관 하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말로만 들었던 십리벚꽃길을 ‘직관’하러 가는 길이다. 쌍계사가 목적지다. 사실 쌍계사는 피안앵이라 할 만한 벚나무가 없다. 대신 절집까지 가는 길이 빼어나다. 그 길이 바로 ‘십리벚꽃길’이다. 섬진강을 따라 하동과 전남 구례를 잇는 섬진강대로(19번 국도). 총연장이 얼추 60㎞ 가까이 되는 이 도로의 가로수 대부분은 벚나무다. 봄의 이 길을 백리벚꽃길이라 부르는 이유다. 이 길은 아주 당연히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이름을 올렸다. 십리벚꽃길은 이 백리벚꽃길에서 떨어져 나온 1023번 지방도를 따로 부르는 이름이다. 일반적으로는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5㎞ 구간을 이르지만, 벚꽃길은 위로 칠불사 갈림길까지 한참을 더 이어진다. ●환장할 이 풍경 올해는 ‘드라이브 스루’로 화개천 양쪽으로 벚꽃이 흐드러졌다. 수령 40~50년을 헤아리는 늙은 벚나무들이 도로 양쪽으로 빼곡하다. 화개(花開)라는 지명처럼 길가의 크고작은 벚꽃들이 일제히 꽃술을 열었다. 객들에게 꽃을 뿌려 산화공덕이라도 하려는 건지. 이 풍경 보고 환장하지 않는다면 정말 사람도 아니다. 이제 꽃 피어 꽃 터널이 됐으니 조만간 꽃이 지면 꽃길이 될 터다. 이런 환장할 풍경이 십리나 이어진다. 그러니 벚꽃 필 무렵에 이 도로를 찾았다면 차량 정체는 각오해야 한다. 아쉽지만 이곳 역시 ‘드라이브 스루’로 즐기는 게 좋겠다. 워낙 풍경이 빼어나다 보니 운전을 하며 휴대전화로 동영상을 찍는 이들도 종종 본다. 촬영일랑 부디 블랙박스에 맡기고 운전에만 집중하시길.십리벚꽃길 끝자락에는 벚꽃만큼이나 아름다운 절집이 들어앉아 있다. 두 계곡의 물길이 만나는 곳에 세워진 절집, 쌍계사다. ‘벚꽃길 엔딩’에 딱 어울릴 단아한 자태가 일품이다. ●쌍계사 문 하나씩 넘다보면 깨달음의 세계로 쌍계사는 개창 연대가 신라 성덕왕 21년(722)까지 거슬러 오르는 고찰이다. 나라 안 대부분의 절집이 그렇듯, 쌍계사 역시 임진왜란 등의 여러 전란을 거치며 무너지고 중건돼 오늘에 이른다. 쌍계사는 명성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다. 하지만 바로 그 덕에 가람 배치가 조밀하고 단아하다는 느낌도 받게 된다. 절집 초입에 서면 비쩍 마른 벚나무 너머로 일주문과 금강문, 천왕문이 나란히 서 있다. 문 사이를 돌아 흐르는 작은 계곡 위엔 아담한 구름다리를 놓고 대숲도 조성했다. 문을 하나씩 넘다 보면 현실 세계에서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쌍계사엔 신라시대 명필로 꼽히는 고운 최치원(857~?)의 흔적이 여럿 남아 있다. 매표소 근처의 두 바위에 각각 새겨진 ‘쌍계’, ‘석문’ 글씨, 대웅전(보물 500호) 앞 계단의 진감선사대공탑비(국보 47호)의 비문 등이 그의 작품이다. 1200년을 헤아린다는 화개 차의 역사도 이 탑비가 근거가 됐다. 신라 흥덕왕 때인 828년에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 씨앗을 쌍계사 근처에 심었다는 기록이 이 탑비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섬진강 ‘백리벚꽃길’ 화양연화 속으로 이들 외에도 하동 일대에 최치원의 고사가 전하는 곳이 많다. 범왕리 푸조나무는 최치원이 땅에 꽂은 지팡이에서 움이 터 자랐다는 노거수다. 둥치가 어른 여럿이 팔을 뻗어야 닿을 수 있을 만큼 크다. 푸조나무 건너편에는 세이암이 있다. 최치원이 벼슬아치들의 비루한 말을 듣고 귀(耳)를 씻었다(洗)는 너럭바위다. 하동의 봄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화개천변의 야생차밭이다. 이제 겨우 신록이 돋는 나무들 사이에서 야생차밭은 유난히 짙푸른 봄의 색을 펼쳐낸다. 벚꽃처럼 화사하지는 않아도 가지런한 조형미만큼은 일품이다. 쌍계사에서 칠불사에 이르는 구간에 야생차밭이 많다. 이제 섬진강의 화양연화를 즐길 차례다. 하동에서 구례까지 이어지는 길은 흔히 백리벚꽃길이라 불린다. 이 길 위에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평사리 악양 들판, 최참판댁, 하동송림(천연기념물 445호), 운조루 등의 명소가 매달려 있다. 요즘 하동 들녘의 주인은 배꽃이다. 매화가 진 자리마다 희디흰 배꽃들이 빼곡하다. 하동 쪽엔 섬진강을 따라 걷기길이 조성돼 있다. 이른바 ‘섬진강 100리 테마로드’다. 하동송림부터 섬진교까지 50㎞ 정도 이어져 있다. 허리춤에 섬진강을 매달고 벚꽃, 배꽃 만개한 길을 걷는 맛이 아주 각별하다. ●수양벚꽃 흐드러진 ‘화훼사찰’ 순천 선암사 순천 쪽에서는 선암사를 빼놓을 수 없다. 봄이면 ‘화훼사찰’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꽃들이 피고 진다. 선암사가 사람들로 북적일 때는 선암매(천연기념물 488호) 등 늙은 매화들이 꽃을 피울 때다. 요즘은 굳이 사회적 거리를 신경 쓰지 않아도 좋을 만큼 찾는 이가 많지 않다. 이맘때 선암사 무량수각 앞에는 수양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수양버들처럼 가지를 축축 늘어뜨린 벚나무들이 가지 끝에 연분홍 꽃등불을 매달았다. 볕 받아 반짝이는 꽃술들이 꼭 별을 닮았다.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선암사와 마주한 송광사도 ‘꽃절집’이다. 진입로의 벚꽃터널이 볼만하다. 늙은 벚나무마다 거무튀튀한 가지 끝에 싱싱한 연분홍 꽃술을 매달았다. 송광사에서 주암호를 건너면 보성 땅이다. 호수를 따라 펼쳐진 해토머리 풍경이 그윽하다. 호수 중간쯤에 대원사로 드는 진입로가 있다. 이 길 역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이름을 올렸다. 진입로 초입에서 대원사까지 5㎞ 남짓한 구간에 왕벚나무가 빼곡하다. 절정이라 하기엔 이르고 이제 막 꽃술을 여는 참이다. 벚꽃길 끝자락에 대원사가 있다. 송광사의 말사로, 머리로 치는 왕목탁 등 해학 넘치는 볼거리들이 많다. 절집 초입의 티베트 박물관은 티베트 불교의 진수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다양한 티베트 미술품이 전시돼 있다.●내년에도 경북 사찰에 꽃은 피리니 피안앵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절집들은 사실 경북 지역에도 있다.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은 곳이라 차마 찾아가시라 권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경주 쪽에선 기림사가 꼽힌다. 오래전엔 불국사를 말사로 뒀을 만큼 규모가 컸던 절집이다. 뜨락의 키 낮은 벚나무와 대적광전 등의 소박한 가람이 보기 좋게 어우러진다. 기림사 벚나무들은 꽃을 늦게 틔우는 편이다. 경주 시내 벚꽃들은 거의 절정을 향해 가고 있는데도 기림사의 벚나무들은 이제 겨우 꽃잎 몇 장 내민 정도다. 이번 주말이나 다음주 초반께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바이러스 창궐의 진원지 중 한 곳이었던 청도의 운문사도 절집 주변의 벚꽃 풍경이 빼어나다.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도량다운 정갈한 경내 풍경과 벚꽃이 어우러져 특별한 봄을 선사한다. 김천 직지사는 대항면사무소에서 직지사 공영주차장까지 사찰 진입로에 줄지어 흩날리는 벚꽃이 절경이다. 직지사 인근의 연화지는 밤 벚꽃놀이로 이름이 높다. 충청권에서는 서산 개심사 왕벚꽃이 많이 알려졌다. 대부분 지역의 벚꽃이 한풀 꺾인 뒤에야 꽃을 피우기 때문에 4월 중하순 무렵이 절정이다. 공주 신원사도 대웅전과 석탑 앞을 외호하는 듯 선 늙은 벚나무 세 그루가 특별한 정취를 전한다. 글 사진 양산·하동·순천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 -십리벚꽃길 주변에 독특한 음식점들이 많이 생겼다. ‘찻잎마술’은 녹차를 활용한 한정식을 내는 집이다. 녹차 소스로 쪄낸 삼겹살찜 등이 별미다. 찻집도 많이 생겼다. ‘비주제다’, ‘윤슬당’, ‘쌍계명차’, 쌍계사 앞 ‘단야찻집’ 등이 알려졌다. 통도사 쪽에선 메밀국수를 맛봐야 한다. ‘삼정메밀소바’, ‘금호정’ 등이 유명하다. 선암사 정문 아래 ‘초원식당’은 보리밥이 맛있다. 2시간 정도 산행을 해야 맛볼 수 있는 저 유명한 굴목이재 ‘보리밥집’에 견줄 만큼 맛깔스런 보리밥을 낸다. -아자방(亞字房)으로 유명한 칠불사는 코로나19로 산문을 폐쇄했다. 이 일대의 봄 풍경은 내년을 기약해야 한다. 아자방은 한번 불을 때면 온기가 49일이나 갔다는 신비의 온돌방이다.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청년 문재인의 시간은 - 해남 대흥사(大興寺)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청년 문재인의 시간은 - 해남 대흥사(大興寺)

    “아버지 49재를 치른 바로 다음 날, 전남 해남의 대흥사로 떠났습니다. 대흥사 내 대광명전이라는 고즈넉한 암자에서 참 열심히 고시공부를 했습니다.” <문재인이 드립니다. 리더스북, 2012> 전라남도 해남에 위치한 대흥사는 대통령의 절집으로 유명하다. 청년 시절 절망적인 시간 속에서도 암자 끝 귀퉁이 방에서 꿈을 놓치지 않던 젊은이는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우뚝 서 있다. 그가 머물던 초라한 암자 귀퉁이 방에는 지금도 누군가 꿈을 찾아 삶의 한 조각을 담아두고 있다. 방의 숫자가 공교롭게도 7번이다. 7번방의 기적이 이루어진 해남 대흥사로 가 보자.해남 대흥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3명을 알아야 한다. 임진왜란 초기 의승군(義僧軍) 총대장 서산대사,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뿌리인 13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 그리고 대한민국 제 19대 대통령 문재인. 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 지역명은 대둔산)의 빼어난 풍광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인 큰 절이다. 현재 해남, 목포, 영암, 무안, 신안, 진도, 완도, 강진, 광주 등 9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하며, 서·남해 지역 사찰을 주도할 정도의 절집이니 규모나 연혁이 그리 만만한 절이 아님은 증명된다.우선 대흥사가 본격적으로 중흥된 연유는 바로 서산대사에 기인한다. 1592년(선조 25) 7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선조는 옛 승관(僧官)인 휴정(休靜, 서산대사)을 불러 승군을 만들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두었고 이후 대흥사는 본격적인 중흥의 시기를 맞이한다.또한 초의선사(1786~1866)가 대흥사에 머물며 차(茶)와 선(禪)을 하나로 보아 「동다송」에서 ‘다선일미(茶禪一味)’를 주장하며 스스로도 차 한잔을 마시는 데서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고 하였다. 이후 호남 지역에서 우리나라 전통의 차문화가 발전하는 데 대흥사는 그 중심에 들어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청년 문재인이 1978년에 대흥사 대광명전 암자 끝방에서 사법고시를 준비하여 1차 시험에 합격한 사연이 대흥사에는 지금도 남아있다.대흥사는 이러한 인물들과 아울러 사찰 내 당우나 암자, 선방 등의 독특한 가람배치도 유명하다. 절을 가로지르는 개천을 기준으로 대웅전과 명부전 등이 있는 북원(北院), 천불전을 중심으로 가허루, 동국선원 등이 있는 남원(南院)으로 크게 구분된다. 이외에도 서산대사와 선조, 정조의 흔적이 남아 있는 표충사 구역, 스님들이 머무는 공간인 대광명전 구역 등이 있다. 이외에도 경내 당우들에 남아 있는 현판 글씨들은 조선 시대 서예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표충사는 정조대왕, 대웅보전, 천불전, 침계루는 원교 이광사, 백설당 지붕밑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 가허루는 전주에서 활약하던 호남의 명필가 창암 이삼만의 글씨가 현재도 남아 있다. <해남 대흥사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해남을 방문한다면 적극 추천. 대흥사는 6.25전쟁 중에서도 훼손되지 않아 사찰의 원형이 잘 남아 있다. 2. 누구와 함께? - 누구라도. 해남 대흥사를 둘러싸고 있는 두류산의 풍광은 빼어나다. 3. 가는 방법은? - 전남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구림리 799) 534-5502~3(061) - 해남터미널 (061-534-0881) → 대흥사(대둔사) - 군내버스 : 06:30 ~ 19:40 (30분 간격 / 25분 소요) 절 입구 매표소 아래 종점까지 운행 (종점에서 절까지 걸어서 30분 소요) 4. 감탄하는 점은? - 생각보다 원형이 잘 보조된 큰 절 집. 유서 깊은 호남 전통 사찰의 맥을 제대로 담고 있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명성에 비해 방문객들이 많지 않다. 교통편이 수월하지는 않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대웅보전, 가허루, 표충사, 절집 아래에 있는 여관인 유선관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100년 전통의 최초의 여관인 ‘유선관’의 식사, 떡갈비 ‘천일식당’, ‘소망식당’, 남도 한정식 ‘진일관’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daeheungsa.co.kr/home/main.asp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고산 윤선도 기념관, 다산초당, 해남우항리공룡화석지, 땅끝마을 10. 총평 및 당부사항 - 해남 대흥사는 절집 자체의 규모가 크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굳이 대통령의 흔적을 찾으려 하지 말고 호국불교의 원형인 서산대사와 우리나라 차문화의 원류였던 초의선사의 시간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방문 가치가 있다. 적극 추천!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깨달음도 덧없어라… 죽은 영혼 달래 주던 야외 법당

    [서동철 논설위원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유산기행] 깨달음도 덧없어라… 죽은 영혼 달래 주던 야외 법당

    충남 서산 개심사(開心寺)는 아름다운 것으로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절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절집이 일으키는 상승작용이 이런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개심사는 이른바 산지중정형(山地中庭型) 사찰이다. 산 중턱 경사지에 큰법당을 비롯한 4개의 절집이 정사각형 마당을 감싸고 있다. 조선 후기를 특징짓는 가람 배치라 할 수 있다.개심사 사적기(事蹟記)에는 ‘신라 진덕여왕 5년, 백제 의자왕 14년 혜감국사가 창건하고 개원사(開元寺)라 했다’고 적혀 있다. 진덕여왕 5년은 651년이고, 의자왕 14년은 654년이다. 게다가 불교사에 이름을 남긴 혜감국사(1249~1319)는 고려시대 고승(高僧)이다. 사적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창건 시기는 미궁에 빠져든다. 사적기는 양면 괘지에 만년필로 썼으니 근년에 옮겨 적고 내용을 추가한 것이다. ●고려 국가기관이 보수할 만큼 가치 있던 사찰 그런데 2004년 개심사 대웅전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복장(腹藏)에서 ‘1280년(고려 충렬왕 6년) 승재색(僧齋色)이 보수했다’는 내용의 기록이 발견됐다. 승재색은 불경 간행과 같은 불사(佛事)를 위해 특별히 설립된 국가기관이었다. 복장이란 불상의 내부에 모신 불경 같은 상징물을 이른다. 보수에 나서야 할 정도였다면 불상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국가기관이 보수에 나섰다는 것은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개심사지만 그저 한적한 시골 사찰이 아니었음을 알려 준다.사적기는 이어 1350년(충정왕 2년) 처능대사가 대웅전과 기타 전당(殿堂) 그리고 요사(寮舍) 일체를 중건하고 개심사로 개칭했음을 알리고 있다. 이 내용은 그런대로 믿을 만하다고 학계는 보고 있다. 큰법당인 대웅전 앞의 오층석탑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오층짜리 석탑은 백제시대 석탑의 전형이지만, 개심사 것에서 백제 특유의 미감(美感)은 느껴지지 않는다. 전형적인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갖고 있다. 처능대사가 이 석탑도 세운 것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처능대사의 중창이란 몽골의 침입이나 왜구의 발호로 훼손되거나 폐허화했던 절의 면모를 일신한 불사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1231년(고종 18년)부터 1259년(고종 46년)에 걸친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가 강화로 천도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몽골 침입기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이 불타는 등 많은 사찰이 피해를 입었다.●고려 처능대사 개원사→개심사 개칭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세력을 키운 왜구가 한반도 전체를 위협했는데, 충청도 서해안 지역은 그 피해가 더욱 심각했다. 같은 서산의 부석사 금동관세음보살좌상 역시 이 시기 왜구가 약탈해 일본에 가져간 것으로 부석사 측은 보고 있다. 일본 쓰시마의 한 절에서 도둑이 훔쳐 다시 들여온 부석사 관세음좌상은 지금 그 소유권을 놓고 소송이 벌어지고 있다. 개심사는 어처구니없는 일로 잿더미가 되기도 했다. 1475년(조선 성종 6년) 충청도 병마절도사 김서형이 훈련을 한다며 군졸을 징발해 사냥을 하다 산불을 내는 바람에 금산(禁山)의 소나무는 물론 개심사까지 태운 것이다. 지금의 대웅전과 심검당은 이 때문에 다시 지은 것이다. 요사채인 심검당은 1962년 해체 수리 과정에서 1477년 세 번째로 중창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개심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구부러진 나무를 가공하지 않은 그대로 기둥으로 삼은 것으로 유명한 심검당의 부엌은 후대에 이어 붙인 것이라고 한다. 스님의 생활공간에 이어 예배공간인 대웅전은 1484년 지었다. 지금 개심사는 중생의 극락왕생 소원을 들어주는 정토사찰의 모습을 하고 있다. 누각이 안양루(安養樓)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것도 그렇다. 안양이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다. 이런 절의 큰법당은 보통 극락전이나 무량수전이라고 이름 짓는다. 그런데 개심사 큰법당은 대웅보전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곡절이 있을 듯싶다. 개심사 들머리의 돌계단을 기분 좋게 오르다 조금 숨이 찰 때쯤 오른쪽으로 안양루가 나타난다. 그 바깥에는 큰 글씨의 전서체로 ‘상왕산 개심사’(象王山 開心寺)라고 쓴 현판이 보인다. 해강 김규진(1868~1933)의 글씨라고 한다. 큼직큼직하면서 모나지 않은 해강의 글씨는 개심사의 분위기와 무척 잘 어울린다. 충청남도 서쪽에 남북으로 자리잡은 산줄기가 가야산이다. 이 산 서쪽에는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 마애불과 보원사 터, 산 동쪽에는 가야사 터가 있다. 둘 다 역사가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큰 절이었다. 개심사는 가야산의 서남쪽 기슭에 해당한다. 개심사가 이고 있는 산봉우리는 별도로 상왕산이라고도 한다. 코끼리는 부처를 상징한다. 부처는 깨달음을 이룬 보드가야에서 멀지 않은 시사가야에서 1000명의 비구에게 설법을 했다. 시사가야가 가야산이다. 가야산은 상두산(象頭山)이라고도 부른다. 상두산은 상왕산과 같은 뜻이다. 그러니 가야산이 곧 상왕산이다. 이런 상징성을 부여한 산에 지은 절이니 초창 시절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를 모시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양란 거치면서 정토사찰로 성격 변화한 듯 그런데 서산 지역에 외적의 침입이 이어지면서 죽음의 문제에 직면한 중생의 신앙 형태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는 깨달음보다는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극락왕생과 남겨진 가족을 위로하는 기능에 힘을 기울여야 했다. 이것이 개심사가 정토사찰로 성격을 바꾼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한편으로 큰법당의 이름은 대웅전을 유지해 상왕산의 상징성도 이어 갈 수 있었다. 개심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정토사찰의 성격을 더욱 강화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사적기에는 1613년(광해군 5년) 대웅전 이후 각 전각과 요사를 중수하고 시왕전(十王殿)을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시왕전은 명부전의 다른 이름이다. 1941년 대웅전 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묵서명에는 1644년(인조 22년) 중창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1889년 작성된 개심사 중창 수리기에는 명부전을 1646년(인조 24년) 신축했다고 적혀 있다. 연도가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양란(兩亂)이 중수의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안양루와 무량수각을 새로 지어 중정형 구조를 완성한 것도 이때일 것이다. 중정형 사찰에서 마당이 갖는 의미는 크다. 많은 신도가 참여한 가운데 법회를 열 수 있는 야외 법당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야외 법회에 내걸 대형 불화(佛畵)도 필요해졌다. 괘불(掛佛)이다. 괘불은 우리나라에만 있다. 학계는 이 걸개그림의 발생을 임진왜란·병자호란과 직접 연결 짓는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어 좁은 법당에서는 고혼(孤魂)을 위로하는 법회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넓은 마당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고, 걸맞은 크기의 탱화도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개심사에 있는 영산회괘불탱(靈山會掛佛幀)은 1772년(영조 48년)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영산회괘불탱 이전에도 이 절에는 당연히 다른 괘불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대웅보전 앞에는 깨져서 쓰지 못하는 옛 괘불대가 남아 있다. 동남쪽에 외따로 지어진 명부전 역시 양난의 비극이 낳은 법당일 것이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의 권능을 빌어 죽은 이의 넋이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기능을 가진 전각이다. 개심사가 가진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이런 사연도 있다. 글 사진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추사와 예산 화암사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추사와 예산 화암사

    추사 김정희(1786~1856)를 만나러 충남 예산에 가는 사람들은 일단 추사 고택을 목적지로 삼게 마련이다. 추사를 비롯한 일가의 무덤이 주변에 몰려 있고 추사기념관도 자리잡고 있다. 주차장은 널찍한 것을 넘어 광활한 수준이니 예술가의 옛집을 이만큼 가꾸어 놓은 사례가 또 있을까 싶다. 그런데 고택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나타나는 사랑채에서 정작 추사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줄줄이 걸려 있는 추사체의 기둥글(柱聯)은 오히려 번다하다. ●별사전 받은 증조부 화암사 중건… 집안 원찰 삼아 추사의 체취는 오히려 화암사(華巖寺)에서 짙다. 화암사는 고택 뒷산인 오석사(烏石山) 서남쪽 자락이다. 고택과 화암사는 산길로 이어지지만 자동차를 타고 돌아가면 같은 산자락인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오석산은 97m에 불과하니 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 주변이 야트막한 구릉지대이다 보니 조금만 올라도 눈이 시원해진다. 추사가 소봉래(小蓬萊)라고 써서 뒷산 바위에 새겨 놓은 것도 과장이 아니다. 봉래란 금강산의 다른 이름이다. ●절집 정면 요사채가 가로막아 사대부 가옥 분위기 추사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1720~1758)은 영조의 둘째 딸이자 사도세자의 누이동생인 화순옹주와 혼인했다. 두 사람은 왕실로부터 추사고택 일대 토지를 별사전으로 받았다. 그 땅에 화암사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월성위(月城尉)에 책봉된 김한신은 화암사를 중건해 집안의 원찰(願札)로 삼는다. 그러니 화암사는 한마디로 경주 김씨의 집안 절이었다. 그래선지 절집 배치도 다른 사찰과 조금 다르다. 정면은 안채와 사랑채의 기능이 합쳐진 듯한 요사채가 가로 막고 있다. 사대부 가옥의 분위기를 풍긴다. 오른쪽에 붙인 누각에는 추수루(秋水樓)라는 추사 필적의 현판이 걸렸다. 추사를 포함해 이 집안의 바깥주인들이 공부도 하고 손님도 맞는 기능을 하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중간에는 원통보전(圓通寶殿) 편액이 달렸다. 관음보살을 모셨다는 뜻인데, 그렇다고 비구니 절 요사채 문을 무작정 열어 볼 수는 없다. ●유배 때 절 다시 중건… 무량수각 등 현판 전래 요사채 왼쪽으로 난 대문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석축 위에 지은 큰법당이 보인다. 대웅전(大雄殿)이라는 편액을 달고 있는 것은 조금 의아하다. 추사가 제주 대정에 유배되어 있던 1846년 화암사는 다시 한번 중건됐다. 이때 추사가 써서 보낸 ‘오석산 화암사 상량문’과 무량수각(無量壽閣), 그리고 시경루(詩境樓) 현판이 지금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 화암사에 무량수각과 시경루는 간데없고 대웅전과 추수루만 남아 있다. 큰법당의 편액인데도 무량수전이 아니라 무량수각이라고 쓴 것을 보면 온전한 절의 모습을 갖추는 것은 의도적으로 피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유교 국가의 사대부 집안이었으니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의 화암사는 수덕사 말사의 지위를 갖고 있는 만큼 두 현판은 수덕사 근역성보박물관에 가면 만날 수 있다. ●천축고선생댁 표현 화암사를 정통 사찰로 안 본 듯 화암사에서 추사의 흔적이 가장 진한 곳은 대웅전 뒷마당이다. 뒤편으로 돌아가면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 이쪽저쪽에 ‘시경’(詩境),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라고 각각 새겨 놓았다. ‘천축고선생댁’은 ‘천축 옛 선생의 집’이라는 뜻이다. ‘인도의 옛 선생’이란 곧 석가모니를 가리킨다. 재치가 넘치지만 본격적인 절집이라고 생각했다면 뒷마당에 이런 글을 새기지는 않았을 듯싶다. 불교를 깊이 이해하고 있지만 신앙은 아니라고 구태여 변명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10년 뒤에는 와병 중에도 서울 봉은사에 판전(板殿) 현판을 쓰는 추사다. 하지만 환갑 언저리까지만 해도 불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한 걸음쯤은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시경’을 새긴 배경에도 설명이 필요하다. 추사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78세의 대학자 옹방강을 만난다. 그에게서 받은 것이 남송 시인 육방옹의 ‘시경’의 탁본이었다. ‘시경’ 각자(刻字)나 ‘시경루’ 편액은 모두 옹방강에 대한 존경의 표시라고도 할 수 있다. 병풍 바위를 바라보면서 글씨에 얽힌 고사(故事)를 되새기고 있으면 마치 추사가 옆에서 말을 걸고 있는 것 같다. 추사고택이 그 집안의 기념물이라면 화암사는 추사 개인의 기념물이라는 느낌이다. 추사는 화암사를 ‘정신적 놀이터’로 삼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글 사진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6] 예산 화암사와 추사의 불교관(觀)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26] 예산 화암사와 추사의 불교관(觀)

     추사 김정희(1786~1856)를 만나러 충남 예산으로 가는 사람들은 당연히 추사고택을 목적지로 삼는다. 추사를 비롯한 일가의 무덤이 주변에 몰려 있고 추사기념관도 자리잡고 있다. 주차장도 널찍해 아무런 불편이 없다. 예술가의 옛집을 이만큼 가꾸어 놓은 사례가 다른 나라에도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런데 고택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나타나는 사랑채에서도 정작 추사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줄줄이 걸려있는 추사체의 기둥글(柱聯)은 오히려 조금 지나치다 싶다  그의 체취는 오히려 화암사(華巖寺)에서 훨씬 진하게 느껴진다. 추사고택의 뒷산인 오석사(烏石山)의 서남쪽 자락이다. 추사고택과 화암사는 산길로 이어지지만 자동차를 타고 돌아가고 있자면 같은 산자락인지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오석산은 해발 97m에 불과하니 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하지만 주변이 모두 야트막한 구릉지대이다 보니 정상까지 오를 필요도 없이 화암사 뒷편 능선에만 올라도 앞뒤가 모두 멀리까지 훤히 트여 눈이 시원해 진다. 추사가 소봉래(小蓬萊)라고 써서 뒷산 바위에 새겨놓은 것도 과장이 아니다. 봉래란 금강산의 다른 이름이다.  추사의 증조할아버지 김한신(1720~1758)은 영조의 부마, 곧 사위다. 영조의 둘째 딸이자 사도세자의 누이동생인 화순옹주와 혼인했다. 두 사람은 왕실로부터 별사전으로 추사고택 일대 토지를 받았다. 그 땅에 화암사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월성위(月城尉)에 책봉된 김한신은 화암사를 중건하여 집안의 원찰(願札)로 삼는다. 한마디로 화암사는 경주 김씨 집안의 개인 절이었다.  그래선 절집 배치도 일반적인 사찰는 조금 다르다. 앞에는 안채와 사랑채의 기능이 합쳐진 듯한 요사채가 가로 막고 있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사대부 가옥의 분위기를 풍긴다. 요사채 오른쪽에 붙인 누각에는 추수루(秋水樓)라는 추사 필적의 현판이 걸려있다. 추사를 포함해 이 집안의 바깥주인들이 공부도 하고 손님도 맞는 기능을 하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중간에는 원통보전(圓通寶殿) 편액이 달렸다. 관음보살을 모셨다는 뜻인데 비구니 절 요사채 문을 무작정 열어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요사채 왼쪽으로 난 대문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석축 위에 지은 큰법당이 보인다. 대웅전(大雄殿)이라는 편역을 달고 있는 것은 조금 의아하다. 추사가 제주 대정에 유배되어 있던 1846년 화암사는 다시 한번 중건됐다. 이때 추사가 써서 보낸 ‘오석산 화암사 상량문’과 무량수각(無量壽閣)과 시경루(詩境樓) 현판이 자금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금 화암사에 무량수각과 시경루는 간데 없고 대웅전과 추수루만 남아있다. 큰 법당의 편액인데도 무량수전이 아니라 무량수각이라고 쓴 것을 보면 온전한 절의 모습을 갖추는 것은의도적으로 피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유교국가에서 사대부 집안에 원찰은 어색한 것도 사실이니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의 화암사는 수덕사 말사의 지위를 갖고 있는 만큼 두 현판은 수덕사 근역성보박물관에 가면 만날 수 있다.  화암사에서 추사의 흔적이 가장 진한 곳은 대웅전 뒷마당이다. 절 뒷편으로 돌아가면 병풍처럼 둘러쳐진 바위 이쪽저쪽에 ‘시경’(詩境),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라고 각각 새겨놓았다. 천축고선생댁은 ‘천축 옛 선생의 집’이라는 뜻이다. 추사가 말한 ‘인도의 옛 선생’이란 곧 석가모니를 가리킨다. 재치가 넘치는 표현이지만 화암사를 본격적인 절집이라고 생각했다면 뒷마당에 이런 글을 새기지는 않았을 듯 싶다. 불교를 깊이 이해하고는 있지만 신앙의 대상은 아니라고 구태여 변명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10년에는뒤 와병중에도 서울 봉은사에 판전(板殿) 현판을 쓰는 추사다. 하지만 환갑 언저리까지만 해도 불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한 걸음 쯤은 떨어져 있었던 것 같다.  ‘시경’을 새긴 배경에도 설명이 필요하다. 추사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78세의 대학자 옹방강을 만난다. 그에게서 받은 것이 남송 시인 육방옹의 ‘시경’의 탁본이었다. ‘시경’ 각자(刻字)나 ‘시경루’ 편액은 모두 옹방강에 대한 존경의 표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병풍 바위를 바라보면서 글씨에 얽힌 고사(故事)를 되새기고 있으면 마치 추사가 옆에서 말을 걸고 있는 것 같다. 추사고택이 그 집안의 기념물이라면 화암사는 추사 개인의 기녈물이라는 느낌이다. 추사는 화암사를 ‘정신적 놀이터’로 삼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예산은 사과가 한창이다. 고속도로나 국도에서 화암사가 추사고택으로 이어지는 도로변도 붉게 익어가는 사과가 지천이다. 이 가을을 제대로 느끼기에 화암사만한 곳도 흔치않을 것이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시리즈 전체보기
  • [서동철의 시시콜콜] 서산 부석사와 영주 부석사

    [서동철의 시시콜콜] 서산 부석사와 영주 부석사

    일본 쓰시마의 관음사에서 도둑이 훔쳐 국내로 들여온 금동관음보살좌상을 당초 조성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절은 충남 서산의 부석사다.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이 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글로 더욱 유명한 경북 영주의 부석사와는 다른 절이다. 하지만 관음사의 문화재 안내판조차 불상의 고향을 영주 부석사로 잘못 표기하고 있을 만큼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한자 이름도 같은 두 부석사(浮石寺)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영주 부석사는 676년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왕의 명을 받아 창건했다.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창건 설화는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오는 의상의 뱃길을 선묘라는 낭자가 바다의 용이 되어 보살폈다는 내용이다. 상대적으로 조촐한 서산 부석사에도 677년 의상대사 창건설이 전하는데, 창건 설화도 영주 부석사와 같은 선묘 설화라는 것이 흥미롭다. 실제로 두 절은 닮은꼴이다. 우선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재한다는 아미타부처를 주존으로 모셨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주는 무량수전, 서산은 극락전으로 큰법당의 이름은 다르다. 하지만 무량수전의 주존인 무량수무량광불(無量壽無量光佛)은 극락전의 주존인 아미타부처를 뜻한다. 그러니 무량수전이 극락전이고, 극락전이 무량수전이다. 서산 부석사는 무량수각을 별도로 지었다. 두 절은 전망 좋은 사찰로도 유명하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앞에는 소백산맥 연봉이 바라보이는 안양루가 자리잡았다. 서산 부석사에도 천수만 일대 간척지와 부남호, 그 너머 안면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역시 안양루가 세워졌다. 관음보살이 서산 부석사에서 조성됐다는 사실은 기록으로 확인됐다. 불상 내부에 ‘고려국 서주 부석사 당주 관음’을 주조한 내용을 담은 ‘결연문’이 들어 있었다. 서주(瑞州)는 고려시대 서산의 지명이다. 불상을 조성한 천력 3년은 충선왕 즉위년인 1330년으로, 천력(天曆)은 원나라 문종의 연호이다. ‘당주(堂主) 관음’이라고 한 것은 의미가 있다. 이 불상은 높이 50.5㎝ 정도지만, 독립된 법당의 당당한 주존이었다는 뜻이다. 과거 서산 부석사의 큰법당은 극락전이 아니라 관음보살이 주인인 원통전이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서산 부석사에는 ‘충남도지’에 나오는 또 하나의 창건설이 있다. 고려 말의 충신 유금헌이 망국의 한을 품고 은거하다 세상을 떠나자 승려 적감이 절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 창건 설화가 좀 더 사실에 근접했다고 보면, 의상대사와 연결시켜 아미타도량으로 만든 것은 절의 역사를 좀 더 빛나게 하겠다는 후대의 노력일 수도 있다. 어쨌든 과거 서산 부석사 관음보살상의 지위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았을 것이다. 적어도 외국의 작은 절에 선물로 줄 만큼 미미한 존재는 아니었다. 한·일 관계는 어려워지겠지만, ‘왜구의 약탈설’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꽃등불’ 켠 남도의 선암·송광·대원사

    ‘꽃등불’ 켠 남도의 선암·송광·대원사

    선암사로 늙은 매화를 보러 갔습니다. 수시로 점검했으니 이젠 꽃 필 때가 됐다고 자신했지요. 한데 사람의 시간으로 꽃의 시간을 가늠했던 게 잘못이었을까요. 전남 순천까지 불원천리 달려갔으나 ‘선암매’는 끝내 제 자태를 보여주지 않더군요. 대신 처진벚나무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능수버들처럼 늘어진 가지마다 꽃등불을 매달았는데, 수수한 절집과 어우러져 여간 곱지 않았습니다. 조계산 반대편의 송광사에선 노란 산수유가 한창이었습니다. 곱기로야 송광사 인근의 대원사 벚꽃길도 뒤지지 않지요. 섬진강 벚꽃들은 벌써 꽃비가 되어 흩날렸는데, 여기선 이제 팝콘처럼 부풀어 오르는 중입니다. 꽃이 전하는 싱싱한 봄날과 마주하지 못한 당신, 늙은 나무들이 전하는 짙은 꽃향기에 취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꽃의 시간에 여정을 맞추는 건 쉽지 않다. 한데 올해는 유난히 편차가 심했다. 그 탓에 국내 대표적인 꽃축제들이 개화시기를 놓칠까 전전긍긍해야 했다. 선암사 홍매도 마찬가지다. 홍매화축제가 열렸던 지난 6~7일에도 선암사의 늙은 매화는 채 절반도 꽃을 피우지 못했다. 광양 등 섬진강 주변의 매화들이 벌써 절정을 지난 것에 견줘 매우 이례적이다. 하지만 심술궂은 봄 날씨 ‘덕’에 여전히 고매(古梅)의 개화를 기다리는 즐거움이 남았으니, 이를 다행이라 해야 할까. 선암사로 향하는 순천 도심 곳곳에 정원박람회를 알리는 표지판들이 내걸렸다. 그런데 정원박람회를 열게 된 계기가 안타깝다. 순천만은 국내 연안습지 가운데 처음으로 2006년 람사르협약에 등록되는 등 생태계 보고로 꼽히는 명소다. 그런데 순천 도심이 팽창하면서 도시화가 목전에 이르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순천시 측은 순천만과 도심 사이에 에코 벨트, 이른바 생태 울타리를 치기로 결정했고, 부지로 쓰일 농지 등을 매입했다. 그곳이 바로 정원박람회장이다. 전시장은 박람회가 끝난 뒤에도 ‘순천의 정원’ 노릇을 계속하게 된다. 순천으로서는 박람회장 조성을 통해 새로운 풍경의 보물과 ‘순천만의 방패’를 동시에 ‘수확’하는 적시타를 터뜨린 셈이다. 봄의 선암사는 꽃대궐이라 했다. 200년 된 영산홍과 300년 된 철쭉, 목련, 보랏빛 수국 등이 번갈아 피고 진다. 가장 앞줄에 서는 건 역시 천연기념물(제488호) 홍매다. 그런데 ‘오호통재’다. 이제야 고매 끝자락에 한 두 개 꽃이 맺히기 시작했다. 600여 살의 무우전 홍매도, 원통전 뒤편의 백매도 꽃을 틔워내는 모습이 힘겹다. 늙은 매화들이니 초봄의 온기만으로는 몸을 달구기가 쉽지 않은 게다. 절집 스님인들 꽃의 속내를 알랴. 다만 13일께부터 “볼 만해질 듯”하단다. 그런데 잊은 게 있었다. 무량수각 앞 처진벚나무다. 수양버들처럼 가지를 축축 늘어뜨린 벚나무들이 가지 끝에 꽃등불을 매달았다. 해를 맞서고 보자니 반짝이는 꽃술들이 은하수를 닮았다. 고매들의 고아한 자태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아쉬움을 달래기엔 충분한 풍경이다. 동백꽃도 붉은 꽃불을 켰고, 흰 목련은 진작 만개했다. 무량수각 앞만 꽃잔치가 펼쳐진 셈이다. 송광사는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선암사와 마주하고 있다. 송광사가 서쪽, 선암사가 동쪽에 터를 잡았다. 둘 다 부처님 말씀을 따르는 건 같지만 종파는 다르다. 송광사는 조계종, 선암사는 태고종에 속한다. 절집의 풍모도 마찬가지. 선암사가 수수하고 소박하다면 송광사는 우아하고 세련됐다. 어느 모로 보나 확연히 구분되는 두 개의 옥구슬(雙璧)이다. 주암호를 휘휘 돌아 송광사로 향한다. 호숫가의 벚꽃은 벌써 폭죽처럼 터졌다. 송광사 진입로 또한 벚꽃터널이다. 노거수마다 뒤틀리고 거무튀튀한 가지 끝에 싱싱한 연분홍 꽃술을 매달았다. 이른 봄, 수 많은 객들이 송광사를 찾는 이유 중 하나다. 덜 알려졌을 뿐, 송광사에도 늙은 매화는 있다. 대웅전 앞마당 오르는 계단 옆을 지키고 섰다. 나무는 바닥에서 다섯 가지로 뻗어 올랐다. 호사가들은 이를 보고 오지벽매(五枝碧梅)라 부르기도 한다. 수령은 200년을 족히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꽃은 수수하다. 연녹색 꽃받침에 모시적삼 같은 흰 꽃술이 얹혀 있다. 절집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쉬 눈에 띄지 않는 건 이 같은 도드라지지 않은 외모 때문일 터다. 이달 중순께 절정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송광사에서 주암호를 따라 보성 땅에 들면 곧 대원사 진입로와 만난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길이다. 들머리에서 대원사까지 5㎞ 남짓한 구간에 왕벚나무가 빼곡하다. 역시 13일쯤이면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벚꽃길 끝자락의 대원사는 송광사의 말사다. 머리로 치는 왕목탁, 빨간 모자 쓴 불상 등 해학 넘치는 볼거리들이 많다. 경내 티베트 박물관은 티베트 불교의 진수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1000여 점의 티베트 미술품이 전시돼 있다. 글 사진 순천·보성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 秋史 처가 ‘건재고택’ 매각 일단 ‘스톱’

    秋史 처가 ‘건재고택’ 매각 일단 ‘스톱’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가 처가인 건재고택 매각을 잠시 멈춰 세웠다. 김찬경(56·구속) 미래저축은행 회장이 별장으로 사용하다 경매에 내놓은 충남 아산시 외암리 민속마을 내 건재고택(중요민속자료 233호)이 추사가 쓴 것으로 알려진 현판 때문에 경매가 무기한 연기됐다. 대전지법 천안지원은 4일 건재고택에 대한 2차 경매에서 법원집행관사무실에 고택 내 현판 등에 대한 재조사를 명령하고 조사 후 경매를 재개한다고 발표했다. 이날 연기는 당초 소유주인 예안 이씨의 한 문중원이 “현판은 경매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언급이 없어 낙찰자가 고택의 일부로 알고 소유권을 주장하면 다툴 수 있는 만큼 이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이의제기해 경매가 늦춰진 것으로 알려졌다. 건재고택 경매물건은 대지 5714㎡, 고택 341㎡, 부속건물 143㎡, 수목 394그루 등이다. 건재고택에는 안채와 사랑채 등에 추사가 쓴 것으로 알려진 현판 2~3점이 있다. 현판에 일로향각(一香閣·한 마음을 화로에 넣고 담금질해 향기를 만든다), 유선시보(唯善是寶·착한 일을 베푸는 것이 보물), 무량수각(無量壽閣·만수무강의 뜻) 등의 글씨가 있다. 글씨 끝에 김정희의 또 다른 호 ‘완당’(阮堂)이라고 쓰여 있다. 추사가 건재고택에 친필을 남긴 것은 첫 부인과 사별하고 22살에 재혼한 부인이 이 고택 주인이던 조선 후기 성리학자 외암 이간(1677~1727)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추사는 인근 충남 예산이 고향으로 재혼 후 예안 이씨 집성촌인 이 처가 마을을 자주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금실 좋은 부부의 연이 현판 글씨로 남았으나 정확한 감정을 거친 적이 없어 진품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지난 4월 30일 1차 가격(47억 4284만원)보다 30% 낮아진 33억 1999만원에 2차 경매가 시작돼 여럿이 관심을 보였다. 천안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해남-끄트머리土末에서의 시작 기억이 사는 곳, 해남

    해남-끄트머리土末에서의 시작 기억이 사는 곳, 해남

    1 두륜산 케이블카에서 내려 전망대까지 이르는 산책로는 소사나무 군락지다. 10월에는 그 열매를 볼 수 있다 2 땅끝 전망대를 향하는 길에는 어김없이 연인들의 맹세가 굳게 잠겨 있었다 3 수군들이 성을 세우고 지켜야 할 만큼 중요한 길목에 자리잡은 이진마을. 지금은 평화롭기만 하다 끄트머리土末에서의 시작 기억이 사는 곳, 해남 해남은 첫사랑 같은 곳이다. 아주 오래전, ‘휴가’라는 것이 처음 생겼을 때, 해남을 선택했었다. 처음 만나는 남도. 그후 해남은 시간과 함께 멀어지기만 했었던 것 같다. 다시 찾은 해남에서 나는 적지 않은 기억을 되찾았고, 또 수정해야 했다. 익룡이 살던 중생대 백악기, 이순신 장군이 호령하던 조선시대까지 다녀왔고, 시작을 위한 끝이라는 땅끝 전망대에서 ‘유구함’의 의미를 다시 생각했다. 아득하게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살아있는 것들, 첫사랑처럼 또렷한 기억의 각인들을, 말이다. 글·사진 천소현 기자 취재협조 전남대 생태관광연구센터 www.ecotourlab.org 되찾은 기억은 이런 것이다. 첫 해남 여행은 아주 추운 1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 국토의 끝이라니. 돌아보면 청승 무모한 청춘의 자작극이다. 게다가 보길도에서 돌아 나오는 배가 풍랑으로 뜨질 못해 여행은 하루가 더 길어져 버렸다. ‘섬에 갇히는 로망’은 그때 그렇게 허무하게 이뤄져 버렸다. 아무튼 당시의 내게 해남은 고산 윤선도의 땅, ‘대한민국’이라는 조국의 끝이었고, 김지하 선생이 그러했듯(그는 땅끝에서 자살을 생각했던 적이 있단다) 청춘의 고뇌를 끝장내 버리고 싶었던 곳이었다. 수정된 기억은 이렇다. 땅끝의 사자봉 위에는 높다란 전망대와 미니레일이 있었고, 두륜산 정상에는 케이블카가 설치되었다.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1박2일>팀이 다녀갔던 여운이 곳곳에 진하게 남아 있었다. 불사는 대흥사, 미황사의 모습을 많이 바꾸었고, 그때는 템플스테이라는 것도 없었다. 우항리에 세워진 공룡박물관과 화석지는 ‘메가급’ 변화에 속했다. 10년 세월의 힘이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내가 고이 품어 온 기억은 따로 있다. 문학과 풍류에 선행하는 생존 자체의 문제, 그래서 목숨을 걸고 이 땅을 지켜냈던 민초들의 어제와 오늘이 보였다. 쉽게 말해 ‘명량대첩’ 같은 전쟁의 기억이다. 주인공은 불멸의 이순신 장군이지만, 승리의 기쁨은 모두를 초대하는 축제가 됐다. ‘강강술래’를 추며 지역 주민들이 주도하는 축제의 마당에는 나름대로의 ‘격한’ 드라마가 있었다. 또한 달량진성처럼 아직도 ‘역사의 잔해’로만 남아있는 쓸쓸한 풍경들도 껴안았다. 고장의 발전을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과 동동주 기울이며 그 마음도 전해 받았다. 더 나아갈 길 없는 막다른 곳, 땅끝에서 모든 것은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땅끝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해남 앞바다.바삐 오가는 노란 모노레일은 바다 속을 드나드는 것만 같다 ‘해남이쿠누스 우항리엔시스’를 만나다 한양에서 1,000리라 했나. 땅끝土末을 품고 있는 해남으로 내려왔으니 가장 먼 과거로, 무려 8,300만년 전 중생대 백악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가뿐했다. 우항리 공룡박물관이다. 내게 공룡의 기억이 없으니, 공룡을 ‘노래’했던 기억을 좀 빌려 써야겠다. “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안 살았다는데 그럼 무엇이 생겼었을까. 공룡이 헤엄치고 익룡이 날아다니고 아주 심심한 것 같은데 <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안 살았다는데>.” 80년대에 ‘꾸러기들’이라는 팀이 부른 이 엉뚱한 노래를 꽤 좋아하여 즐겨 불렀었다. 그 익룡들을 우항리에서 만났다. 세계에서 가장 큰 익룡발자국(35cm)은 이곳의 지명을 따 ‘해남이쿠누스 우항리엔시스’로 명명되었다. 세계에서 7번째, 아시아에서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공룡 화석의 보고인 우항리의 백악기 퇴적층이 드러난 것은 금호 방조제 공사 이후 이 지역이 담수호를 낀 육지로 변했기 때문이다. 90년대 중후반에 국내외 과학자들이 조사한 이후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에는 공룡박물관까지 설립할 수 있었다. 우항리 화석지(33만 평방미터)는 이런저런 공룡의 발자국 화석으로 도배가 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발자국 크기가 작게는 52cm, 크게는 95cm나 되는 초식공룡의 몸집은 얼마나 컸던 걸까(몸통길이만 7m가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발자국 105개가 밀집되어 있는 곳에 보호각(대형 공룡관)이 세워졌다. 익룡 발자국 443점과 물갈퀴새의 발자국(전세계에서 발견된 물갈퀴새 발자국 중 가장 오래됐다) 1,000여 점을 보호한 익룡 조류관, 조각류 공룡관까지, 보호각은 총 3개가 있다. 화석으로만 남아있는 공룡들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은 공룡박물관에서 얻을 수 있고 연꽃이 가득한 연못에 공룡 모형을 설치한 야외공원은 기념사진을 찍기 좋은 곳이다. 우항리 공룡박물관 | 주소 전남 해남군 황산면 공룡박물관길 184 개관시간 오전 9시~오후 6시(매주 월요일 휴관) 입장료 어른 3,000원, 청소년 2,000원 문의 http://uhangridinopia.haenam.go.kr 1, 2 우항리 일대는 공룡 발자국 화석으로 도배되어 있다시피 하다. 공룡뼈와 화석 모형을 전시하고 있는 공룡박물관의 규모도 공룡사이즈라 꼼꼼히 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3 단청을 벗어버린 대흥사 대웅전은 한결 부드러운 인상이다 4 소가 멈춘 자리에 지었다는 미황사는 달마산 기슭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전설은 알수록 재미있고, 절은 볼수록 아름답다 5 두륜산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누구나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고계봉(638m). 맑은날에는 제주도까지 보인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땅끝으로 달려가는 공룡의 등뼈 최고最古의 다음은 최장最長이다. 두륜산에는 국내 최장거리의 케이블카(1.6km, 왕복 성인 8,000원)가 연결됐다. 다행히도 직행으로 고계봉(638m)에 내려주는 것은 아니고 내려서 286개의 나무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뿌연 안개가 사방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맑은 날에는 제주도까지 보인다고 했지만, 전망대 위에 섰을 때에는 한반도 지도 모양의 마을도, 월출산도, 주작산도, 완도, 진도 등의 섬들도 모두 안개에 숨어들었다. 골짜기에 들어앉은 대흥사도 고계봉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힘차게 달려온 소백산맥이 두륜산(703m)을 통과해 남쪽의 달마산(489m)을 지나고 급기야 땅끝의 사자봉(155m)에 이르러서야 수그러드는 모습을 어렴풋이 목격할 수 있다. 당장이라도 암봉으로 이어진 능선을 타고 바다까지 흐르고 싶지만 산행은 금지되어 있어서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야 한다. 대흥사 입구까지는 차로 이동했다. 구림구곡九林九曲의 10리 숲길을 배신하는 마음이 아팠지만 해가 저물고 있었다.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地處로 불렸던 안전한 절집은 전쟁을 피해 곱게 늙었다. 1,000개의 불상이 모셔진 천불전뿐 아니라, 추사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 현판,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 정조대왕이 쓴 표충사 현판도 남아 있어 살아있는 ‘서예 박물관’으로 불린다. 도를 닦는 것은 차를 마시는 것과 같다 했는데禪茶一如, 초의선사가 머물면서 차를 즐겼다는 일지암에 가지 못한 것도, 차 한잔을 마시지 못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차창 밖으로 달마산이 나타날 때마다 내 시선은 고정되었다. 유홍준 교수는 암릉으로 솟아오른 산의 모양새를 ‘공룡의 등뼈’ 같다고 했었다. 그럴싸한 표현이다. 누군가는 달마대사가 살고 있다고도 했다. 달마Dharma·法산, 진리의 산이라니, 과감하고 멋진 이름이다. 설화 속의 어떤 이는 같은 산정을 두고 1만개의 불상을 보기도 했다. 그게 바로 미황사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금인金人이다. 신라 경덕왕 8년(749년)에 우전국(인도)에서 온 금인이 검은 소를 따라가다 주저앉는 자리에 불경을 모시라는 말에 따라 미황사가 설립되었다는 것이다. ‘美’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黃’은 금인의 황금빛을 뜻한다. 1754년 이후 단청을 덧칠하지 않아 색이 바래 버린, 아니 화장을 벗은 대웅보전은 해질 무렵마다 아름다운 황금빛이 된다. 기둥 아래 주춧돌에 게와 거북이가 새겨진 이유는 ‘대웅보전’이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배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알수록 흥미로운 절이다. 솟아오른 등뼈의 릴레이가 멈추는 곳이 땅끝土末(북위 34도17분21초)이다. 노란 모노레일(395m, 왕복 4,000원)을 타고 사자봉 정상의 전망대(38m)로 올라가는 대신 시비가 도열해 있는 산책로를 선택했다. 연인들의 간절한 마음과 언약은 이곳에서도 녹슨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앞날을 어찌 알겠나. 꼭 그만큼 불투명한 전망이 눈앞에 펼쳐졌다. 희미해서 더 아름다운 풍경. 여기가 끝이 아니라 저 너머 무엇이 있으리라는 희망 없이는 사랑도, 여행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바다의 눈물이 거둔 승리 해남 사람들에게는 자랑스러운 승리의 기억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대패시켰던 명량대첩(1597년 9월16일)에 대한 기억이다. 제갈량이 바람의 방향을 읽어 적벽에서의 승리를 이끌어 냈듯, 울돌목 거센 물살의 방향을 예측하여 이순신 장군이 승리를 거둬낸 명량대첩은 ‘기적의 해전’이라는 수식까지 달고 있다. 고작 13척의 전력으로 133척의 왜군은 대파한 것. 명량대첩은 매년 가을 축제를 통해 다시 재현되는데 올해는 9월30일부터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러 보게 될 ‘우수영 국민관광지’에는 충무사, 어록비, 전시관 등 이순신 장군과 명량해전을 기념하는 여러 시설과 조각상, 기념비들이 세워져 있다. 또 우수영과 진도 사이, 울돌목 물길에는 여름 내내 거북배가 바삐 움직였다. 뱃시간을 놓쳐 버렸지만 울돌목의 물결을 바라보는 것은 그 자체로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빠른 물길이 암초에 부딪치는 소리와 사방으로 소용돌이치는 물의 아우성. 예부터 바다가 운다鳴梁고 한 이유를 알겠다. 명량해전의 승리는 그 눈물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일 터. 때마침 주말이라 펼쳐진 명량역사체험마당은 흥겨운 시간이었다. 등에 ‘수水’를 새기고 행렬하는 수군들의 교대식은 사뭇 진지한 분위기에서 진행됐고 뒤이어 남도 소리의 진수를 보여주는 판소리 한판과 절제된 듯 화려한 군무, 강강수월래 무대가 이어졌다. 목숨을 바쳐 땅을 수호한 선조들을 기억하는 따스한 몸짓, 갸륵한 아우성이었다. 1 명량해전을 펼쳐졌던 울돌목에는 아직도 ‘긴 칼 옆에 찬’ 이순신 장군이 지키고 있으니 듬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큰하다 2, 3 우수영관광지에서는 여름 동안 주말마다 명량역사체험마당을 펼친다. 각각 수문장 교대식과 강강수월래 공연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9월의 해남 여행, ‘초요기를 올려라!’ 알고 보니 9월의 해남은 여러 축제와 행사가 오버랩되는 절묘한 타이밍이다. 여름 내내 토요일마다 깃발을 나부꼈던 명량역사체험마당이 9월24일까지 개최되고, 곧 이어 명랑대첩축제가 9월30일부터 10월2일까지 개최된다. 땅끝작은음악회도 그 마지막 무대를 9월17일에 대흥사에서 펼쳐 놓는다. 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생태관광연구센터의 기획으로 진행되는 해남여행상품 ‘초요기를 올려라’는 명랑대첩축제와 명량역사체험마당 등의 이벤트와 함께 땅끝마을, 두륜산, 대흥사 등의 해남 명소를 방문할 수 있도록 일정을 구성했다. 여행상품 초요기를 올려라 출발 2011년 6~11월 매주 토, 일요일 및 공휴일 출발. 명량대첩축제기간(9월30일~ 10월2일)에는 매일 밤 출발. 서울 교대역 9번 출구, 오전 7시 출발. 요금 1박2일 11만9,000원(왕복 교통비, 1박 3식, 가이드, 입장료, 보험 포함) 문의 여행스케치 www.toursketch.co.kr 당신이 아직 모르는 해남이야기 우리가 ‘유명하다’고 해서 찾아가는 모든 여행지는 ‘유명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고, 그것을 유명하게 만들기 위해 애쓴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찾아가 보면 초라하고 허망할 수 있는 해남 북평면의 무명소無名所들. 그 이름들을 기억해 두시라. 해남군의 예산 지원이 확정된 북평면 일대가 완도의 길목이었던 시절의 활력을 되찾을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허망한 남창장’에 언능 와보소” 박상일 지역활력연구소 소장 이름부터 에너지가 넘치는 지역활력연구소의 박상일 소장. <해남신문>의 편집국장을 역임하고 해남포럼, 해남습지 보전모임, 남도문화관광센터를 만들었던 그는 남도의 음식과 풍습에 대해 막힘이 없다. 요즘 그가 ‘꽂힌’ 대상은 ‘남창장’이다. 혹시 ‘허망한 남창장’이라는 말을 아시는가. 다른 장에 비해 일찍 서고 일찍 파장이 되어 버리기에 낭패를 본 사람들에게서 나온 푸념이 허무한 상황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해남에서 완도로 넘어가는 다리가 생기기 전에 남창장은 인근 섬에서 해산물을 가득 실은 채 모여들고, 제주도에서도 밀감을 싣고 올 정도로 흥한 장이었다. 현재는 규모도 손님도 줄었지만, 혹시 2일, 7일에 해남에 오게 되거든 장차 ‘풍물 어시장’으로 달라질 남창장을 기대해 달라는 것이 박상일 소장의 당부다. 강아지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옛 시절의 영광은 멀어졌지만 사람과 물자가 모이고 흩어지는 장터의 기능만은 유효하다. “달량진성, 이진진성, 그대로랑께요” 노명석 북평면 청년회장 40대의 청년회장이라고 소개를 받은 것이 쑥스러운 듯 웃기만 하던 그가 북평면 남창리에 도착하자 성큼 앞장서며 말했다. “여기 보세요. 돌담이 그대로 남아있죠. 이렇게 잘 보존된 성벽은 별로 없다네요. 저기, 저 집들은 안에 들어가 보면 뒷담이 모두 옛 성벽으로 되어 있어요.” 조선시대 이 자리에 수군의 진지였던 달량진達梁津이 설치됐고, 그 안에 남쪽의 조운창(조세를 거둔 현물을 모아두던 창고), 즉 남창을 두었기에 그 이름이 남창리다. 1498년(연산군 5년)의 일이니 500년이나 서 있었던 돌담은 정말로 보존 상태가 좋았다. 지난해 달량진성이 향토유적으로 지정됐고, 이제 본격적으로 손님맞이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주민들에게 떨어진 즐거운 숙제다. 아직은 쇠락한 상태인 시골 마을의 풍경을 등에 지고 뭔가 고민에 빠진 듯한 그의 얼굴에 듬직한 ‘청년’이 있었다. 그가 두 번째로 안내한 곳은 멀지 않은 이진진梨津鎭성터였다. 약 2.5km의 석벽 중 940m 정도가 남아있으니 역시 양호한 상태다. 서문터에 남아있는 옹성에는 우물터까지 보존되어 있다. 마을에서 까만 현무암이 발견되는 것은 제주에서 이곳까지 배에 조랑말을 싣고 왔던 흔적이라고 했다. 역사의 파편들이 골목마다 박혀 있었다. “우리집의 포석정 볼라요?” 함박골큰기와집 김순란 여사 새로 지은 한옥집. 그러나 모양만 한옥집인 숙소가 아니라 한옥의 가치와 정신을 살리되 현대인 편의를 더한 한옥집. 그게 바로 ‘함박골큰기와집’이다. 고향인 해남 북평면 오산리에 돌아와 민박을 꾸린 김순란 여사는 직접 황토를 발라서 건강한 한옥집을 완성했다. 그 집에 머무는 자체가 일종의 치유였다. 직접 담그는 동동주는 가장 먹기 좋을 때 내놓는 것이라 실패가 없고, 숙취도 없다. 두 동의 사랑방은 각각 넓은 마당을 끼고 있으니 바비큐 파티가 벌어지기 일쑤. 자리끼 물병에 민트 잎을 따 넣어 주고, 동동주에도 꽃잎을 따 넣을 줄 아는 그녀는 풍류의 고수이기도 하다. 마당 한쪽에 직접 고안하고 복원한 미니 포석정에 물을 채우고 동동주잔을 올리니 정말 술잔이 한 바퀴 돌아 내 앞으로 돌아왔다. 선비처럼 시를 읊어야 할 것 같은 밤이었다.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그녀가 내게 준 선물은 뜻밖의 것이었다. 급하게 손끝으로 대충 짓이겨 새끼손가락에 얹어 주었던 봉숭아꽃이 지금 고운 살구빛으로 내 몸에 스며들어 있다. 각인된 추억이다. 주소 전남 해남군 북평면 오산리 1016-2(차경리) 요금 4인실은 5~8만원, 8인실은 15~20만원 문의 011-9606-7557 www.hanbakgol.co.kr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부처님 오신날 충남 서산 개심사 가는 길따라

    부처님 오신날 충남 서산 개심사 가는 길따라

    이맘때 충남 서산의 이미지는 ‘둥글다.’로 모아집니다. 서산의 오른쪽, 그러니까 운산면과 해미면, 음암면 일대의 느낌이 특히 그렇습니다. 한우를 방목하고 있는 야트막한 산들은 이국적인 둥근 구릉의 자태로 이방인을 맞습니다. 그 위에 신록이 입혀지고, 한우들이 뛰놀기 시작하면서 예쁜 풍경화가 완성됩니다. 둥근 구릉들 너머엔 소박하고 단아한 개심사도 있습니다. 작은 절집이지만 풍경의 크기는 그보다 몇 배 더 큽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코앞입니다. 시기에 맞는 여행지를 찾는다면 충남 서북부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서산도 대안이 될 듯합니다. 세상에 온 부처님의 뜻이야 범부로서 가늠조차 할 수 없지만, 혹시 모를 일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좇아 서산을 주유하다 번뇌를 끊는 반야의 칼을 찾을 수 있을는지도요. ●순박한 절집에서 혼탁한 마음 털기 충남 서산은 내포(內浦·충남 서북부) 불교문화의 성지처럼 여겨지는 곳이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수덕사와 보덕사 등의 절집과 마애삼존불상 같은 불교 문화유산들이 가지처럼 펼쳐져 있다. 개심사는 그 가운데 첫손 꼽히는 명찰 수덕사의 말사다. 절집 초입엔 벌써 많은 종류의 꽃들이 피어 있거나, 개화를 준비하고 있다. 봄철 개심사의 아이콘인 진분홍 왕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지만, 해탈문 앞 겹벚꽃과 명부전 앞 청벚꽃은 벌써 절정에 달했다. 자목련과 흰동백도 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사적기에 따르면 ‘마음을 여는 절집’ 개심사(開心寺)는 백제 멸망(660년)을 6년 앞둔 의자왕 14년, 서기 654년에 창건됐다. 당시 절을 세운 혜감 스님은 절집 이름을 개원사(開元寺)라 했으나, 고려 때인 1350년에 처능 스님이 중건하면서 개심사로 개칭했다. 절집 뒤편 상왕산(象王山) 코끼리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연못을 지나면 해탈문과 안양루 등 소탈한 건축물들이 방문객을 맞는다. 규모가 작은 데다 번듯한 느낌도 없지만, 어딘가 차분한 기운이 절집 안팎을 휘감고 있다. 개심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은 대웅보전이다. 보물 제143호다. 그 안에 보물 제1619호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엄정한 자태로 앉아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불상 중 하나로, 나무 위에 금박을 입혔다. 또렷하면서도 엄숙하게 표현된 이국적인 얼굴 등이 조각예술의 진수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정작 방문객의 시선을 끄는 건 대웅전 옆 심검당(尋劍堂)이다. 얽히고설킨 번뇌를 벨 반야(般若)의 칼을 찾는 집이란 뜻. 한데 이름은 날카로우나 자태는 더없이 순박하다. 사람 인(人)자를 겹친 맞배지붕 아래 이리저리 휜 목재를 기둥 삼았다. 단청도 하지 않았다. 껍질만 벗긴 소박한 두리기둥과 기둥 위를 가로지르는 창방의 나무들이 물결 같은 곡선을 그려낸다. 그 모습을 보자니 회색 도시에서 다져진 각진 마음이 은연중 둥글어 가는 듯하다. ●용현계곡의 내포 불교 유적들 사실 대웅전을 제외한 개심사의 대부분 건축물들은 이처럼 굴곡진 목재를 사용하고 있다. 명부전이 그렇고, 무량수각과 범종각, 해탈문 등도 비슷한 형태다. 개심사를 창건한 이는 기둥에 어떤 뜻을 담았던 걸까. 이강열 서산시 문화관광과 학예사는 “치목(다듬어진 목재)을 사용해 건물을 짓는 게 이리저리 휜 목재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을 것”이라며 “하지만 왜 이런 목재를 사용했는가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고 아쉬워했다. 결국 절집을 돌아 보며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는 오롯이 방문객의 몫으로 남는다. 예까지 온 마당에 ‘마애삼존불상’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국보 제84호다. 마애삼존불상은 개심사 인근의 용현계곡 들머리에 서 있다. 백제시대 용현계곡은 중국과의 교역항이었던 태안반도에서 사비(부여)로 가는 길목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마애삼존불상은 사비를 떠난 사람들이 다리쉼을 하거나, 먼 교역길의 안녕을 비는 곳이었던 셈이다. 계곡 너머 너덜겅 사이로 놓인 돌계단을 올라 가면 세 불상과 만난다. 불상마다 꾸밈없고 순박한 미소를 입가에 매달고 있다. 나른한 오후 햇살 아래라선지 미소가 더욱 은은해 보인다. ‘백제의 미소’라 부를 만하다. 누군들 저 미소를 피어나게 한 내면의 평화를 찾고 싶지 않을까. 용현계곡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는 보원사 절터도 남아 있다. 한때 1000여명의 승려가 기거했을 만큼 대찰이었으나, 이제 법인국사탑과 비,오층석탑과 당간지주,석조 등만이 광대한 절터를 지키고 있다. ●청년 이순신 머물던 해미읍성 개심사에서 차로 15분 거리의 해미읍성(海美邑城)도 둘러볼 만하다. 230여년간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이 있었던 곳. 왜구의 빈번한 침략을 막기 위해 1417년 축조 사업이 시작돼 세종 3년인 1421년 완성됐다. 이순신 장군도 서른다섯 살 때(1579년) 이 성에서 종8품 훈련원 봉사로 열 달간 근무했다고 한다. 해미읍성은 조선 초기의 성채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성벽의 높이는 4.9m, 성의 둘레는 약 1.5㎞다. 오래전엔 성의 둘레에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탱자나무를 심었다 해서 ‘탱자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해미읍성은 여느 성벽과 견줘도 뒤지지 않을 만큼 빼어나다. 진남문은 결코 위압적이지 않고, 복원된 관아와 주택들도 정겹고 소박하다. 읍성 초입의 회화나무는 병인박해(1866년) 때 천주교도들을 목매달아 처형했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동헌 위쪽 서벽 근처의 소나무들은 자유분방하면서도 절제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서문 밖 여숫골 등에도 천주교 유적들이 남아 있다. 글 사진 서산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41)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서해안고속도로→서산 나들목→운산→개심사(68 8-2256) 순으로 간다. ▲맛집 마애삼존불상 초입의 용현집(663-4090)은 어죽 전문 식당이다. 추어 국물에 국수와 쌀을 넣고 끓여 양푼에 담아 내는데, 비리지 않고 얼큰한다. 1인분 5000원, 2인분 이상 판다. 해미읍성뚝배기(688-210 1)는 소머리곰탕이 맛있다. 80 00원. 해미읍성 앞에 있다. ▲주변 볼거리 천수만과 간월도 등은 서산의 관광 명소. 지곡면 화천리에 조선 초 산수화의 대가 안견기념관이 있다. ‘몽유도원도’ 영인본 등 그의 대표작들이 전시돼 있다. 660-2536.
  • 제주 추사관 개관 특별전

    제주 추사관 개관 특별전

    ‘해국(海國)의 먹물은 깊고’ 추사 김정희(1786∼1856)가 귀양살이했던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추사관이 들어서 13일부터 특별전시회가 열린다. 추사가 쓴 편지와 시 등 유묵 17점을 수록한 ‘신해년책력’을 비롯해 글씨를 쓰는 법을 밝힌 ‘완당필첩’, 제주에서 귀양살이할 때인 1846년 충남 예산 화암사에 예서체로 써서 보낸 ‘무량수각’, 추사 고택 뒷산인 오석산 바위에 새긴 ‘소봉래’ 탁본 등 60점의 작품이 특별 전시된다. 추사관은 추사가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그린 국보 제180호 ‘세한도’에 있는 건물의 모습을 본떠 나무로 지어졌고 지하 2층, 지상 1층, 전체면적 1192㎡ 규모다. 1840년(헌종 6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돼 제주도로 유배된 추사는 9년 동안 머물며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비롯한 많은 서화를 그렸으며, 제주의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는 등 업적을 남겼다. 제주 황경근기자 kkhwang@seoul.co.kr
  • 전시 리뷰 / ‘영혼의 여정’ 특별전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찾아가기 쉬워진 절 중 하나가 서산 개심사(開心寺)다.상왕산 기슭의 개심사는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산지중정(山地中庭)형 절이다.마당을 중심으로 전각이 사방을 둘러싼 크지 않은 사찰이다. 안양루를 지나 중정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웅보전이 있고,좌우에 요사채인 심검당과 무량수각이 자리잡았다.조금 떨어진 곳에 명부전이 있다. 불국사로 대표되는 통일신라시대 절은 물론,발굴이 한창인 여주 고달사 같은 고려시대 절 하고도 구조가 다르다.전각이 아주 단출해진 것은 조선시대의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에 따라 불교가 퇴락했기 때문이 아닐까. 2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영혼의 여정-조선시대 불교회화와의 만남’ 특별전은 이런 추측이 사실이 아님을 확인시켜준다.사후 세계를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는 유교의 빈 자리를 조선 불교가 파고들면서 현실의 고통을 내세에서 보상받는 명부전 신앙으로 발전시켰고,신앙 체계에 맞게 공간을 확립시킨 결과가 바로 개심사와 같은 구조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기획 전시실은 대범한 공간 구성이 먼저 눈길을 끈다.가로 242.2㎝,세로 364㎝에 이르는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등 큼직큼직한 유물 40여점으로만 꾸몄다. 전시실은 불화(佛畵)를 통하여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사찰 하나를 표현하려 한 듯하다.실제 절에서는 불화들이 여러 전각에 흩어져 있고,컴컴한 법당 안에서 흐릿한 촛불만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지만,여기에선 체계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저승사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명부전(冥府殿)에 들어선 셈이다.지금은 없어진 북한산 태고사에 걸려 있었다는 시왕도(十王圖)는 생전의 죄과를 심판받는 모습이 생생하다.염라대왕 앞에서 자신의 죄과를 비춰보아야 하는 업경대(業鏡臺)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그러나 고통이 가득한 명부전에도 충만한 생명의 기운이 담긴 천진난만한 동자상이 있고,자비를 베풀어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이 계신다. 극락으로의 여정을 가시화한 것이 감로탱(甘露幀)이다.고통받는 영혼을 지옥에서 건져올리는 천상세계의 모습이다.현실세계의 어려움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극락정토에서 설법하는 아미타불,중생을 질병의 고통에서 헤어나게 하는 약사불,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의 모습은 영혼이 궁극적으로 닿아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상징한다. 조선 후기답게 몇몇 그림에서 서양식 명암법의 영향을 느낄 수 있지만 간혹 눈에 띄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표현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여래도(四如來圖)를 비롯한 보물 3점도 나왔다.사여래도는 1997년 뉴욕의 소더비 경매에서 71만 7500달러(당시 환율로 6억 3000만원)에 낙찰받아 화제가 됐던 유물이다.특별전은 10월5일까지 계속된다. 서동철 기자 dc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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