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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매실이 가기 전에

    [길섶에서] 매실이 가기 전에

    매실 익는 나무 그늘에 앉아 보지는 못하고. 청매실 쏟아진 시장에서 상자째 들여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까짓것 매실청 한 병 사먹고 말 일을. 유월이면 유월의 일을 굳이 하는 사람들 덕분에 매실은 푸른 물을 적시고 또 돌아왔다. 마당 있는 집을 꿈꾼다. 시금떨떨한 유월의 매실알이 칠팔구월의 항아리 안에서 들큼해져서는 엄동을 곰삭이고 다시 유월을 건너는 마당집. 시간이 둥글게 돌아 단물이 되는 자리. 거짓말 같기도 하지. 옛집 마당에 늙은 매화나무, 제 그늘 제 발치에 제 열매 곰삭는 늙은 단지를 품고 서 있었네. 오래전의 작가 이태준은 웃어른 없는 집에 나이 든 물건조차 없으니 거만스러워진다고 했다. 마당 둥근 집 풋그늘에서 매실 단지를 오래 익히고 싶다. 어른이 그리워진 탓일까. 비바람을 삼켜 진액이 되는 매실의 일이 사람 사는 일과 한가지여서일까. 시간을 견뎌야만 그렇게 되는 일이 있다는 것, 그립고 그리워야만 속속들이 익는다는 것, 단물이 된다는 것. 아, 유월이 가기 전에 매실청을 담가야지. 매실이 가기 전에 유월을 붙들어야지.
  • 윤동주와 떠나는 ‘종로 문학산책’

    윤동주와 떠나는 ‘종로 문학산책’

    서울 종로구는 윤동주문학관의 문학 투어 프로그램 ‘동주와 마실’을 오는 16일부터 운영한다고 15일 밝혔다. 동주와 마실은 해설사와 함께 종로 일대를 거닐며 윤동주와 동시대 문인들의 삶과 작품 세계를 골목과 공간을 따라 만나는 문학 산책 프로그램이다. 2022년 ‘동주와 새로운 길’로 시작한 뒤 2024년 ‘동주와 마실’로 개편·확대했다. 이번에는 혜화동과 명륜동까지 탐방로가 확대됐다. 프로그램은 총 6개 길로 구성된다. 가볍게 즐기는 ‘짧은 마실’, 책방과 연계한 ‘긴마실’, 청소년 대상 ‘동무마실’, 혜화·명륜동 일대 문학 공간을 탐방하는 ‘문학마실’ 등이 있다. 올해는 기존 청운동·부암동·서촌 중심 길뿐만 아니라 혜화동과 명륜동 등 종로구 동부권 문학 공간을 탐방하는 ‘문학마실’ 길도 즐길 수 있다. 문학마실은 혜화동 여성문학과 명륜동 아동문학 산책으로 나뉜다. 여성문학 산책에서는 학림다방, 동양서림. 조병화 시인의 집, 한무숙 문학관 등을 거치고 소원책담에서 필사 체험도 할 수 있다. 아동문학은 백기완 마당집, 윤석중 집 터, 마해송 가옥, 도상봉 가옥 등을 지나 성균관 문묘에서 그림책 필사 체험도 한다. 긴마실 길은 연계 프로그램으로 동네 책방 활성화에도 힘을 보탠다. 윤동주문학관은 2012년 옛 청운수도가압장을 리모델링해 조성된 공간이다. 전시·해설·교육·문학 투어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문학적 영감을 주고 있다. 이번 프로그램은 오는 11월 1일까지 운영된다. 종로구 관계자는 “동부권 코스가 새롭게 추가된 만큼 시민들이 종로의 다양한 문학 공간을 보다 폭넓게 만나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 벚나무 품은 치마폭 닮은 공간…마당집 계보 잇는 ‘한옥 같은 집’[건축 오디세이]

    벚나무 품은 치마폭 닮은 공간…마당집 계보 잇는 ‘한옥 같은 집’[건축 오디세이]

    고즈넉한 고택을 방문하거나 서울 북촌의 한옥 마을을 산책할 때 ‘한옥에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하게 된다. 그런데 한옥을 지어서 살겠느냐고 묻는다면 망설이게 될 것 같다. 아무래도 불편함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건축가 조정구(구가도시건축 대표 건축사)는 한옥적 요소를 새로운 언어로 만들어 낸 ‘한옥 같은 집’을 제안한다. 한옥의 유전자가 녹아 있어 한옥스러운 집은 기둥과 보가 있는 중목(重木) 구조에 전통적인 구조미가 드러나며 안팎으로 마당과 집이 개방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 한지와 창호로 마감된 방이 있으며 마당으로 처마가 드리운다. 조 대표가 경기도 파주 교하지구(동패동)에 작업한 ‘한옥 같은 집’ 세 채 중 가장 최근에 완성한 ‘S주택’을 찾았다.#붉은 벽돌 외관의 이층 목구조 집 “나지막한 뒷동산을 배경으로 좌우로 널찍하게 펼쳐진 교하 주택단지 한가운데로 선을 그었을 때 위에서 아래로 세 채가 자리하는데 이들 집의 건축주 이름 머리글자가 우연히도 공영방송 이름과 같은 K, B, S였어요. S주택은 건축주의 아내를 위해 지은 집이라 부인의 성을 딴 것이지만 마치 삼 형제 같은 이 작업을 해 놓고 보니 원래부터 하기로 정해진 인연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세 채 모두 한옥 같은 집이고 K, B, S라고 하니 부르기도 쉬웠다. 이 집에는 ‘서소헌’이라는 옥호가 있지만 ‘S주택’이라 부른다. 디자인적으로 볼 때 K주택에서 파생된 것이 S주택이고, B주택은 도시 한옥의 유전자를 가지고 2층으로 새롭게 구성한 집이다.S주택은 부지를 사들인 지는 꽤 오래됐는데 그동안 사업을 하느라 여유가 없다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서 그동안 고생한 아내를 위해 땅을 산 지 17년 만에 지었다. 양지바르고 균형 잡힌 터에 단정하게 자리잡은 붉은 벽돌 외관의 이층 목구조 집은 작은 숲과 두 그루의 벚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처음 대지에 갔을 때 인상 깊었던 것은 대지 남쪽의 작은 숲이었습니다. 차량 소음을 줄이고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단지 전체에 만든 공개녹지인데 어떤 집은 앙상한 나무들만 남아 있었던 반면 이 집의 대지 앞에는 우거진 숲이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옆으로 지나는 길에 벚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화창한 봄날에 벚꽃이 만개하면 얼마나 대단할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찼습니다.”작은 숲은 마당의 일부가 됐고 벚나무 두 그루는 안팎으로 집과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 봄날 벚꽃이 만발한 집은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조 대표는 이 집을 설계할 때 ‘치마폭 같은 공간’을 상상했다고 한다. 남편은 큰 공간에 주방과 아궁이, 굴뚝이 있어서 여럿이 같이 불도 때고 밥도 해 먹으면 좋겠다고 하고, 아내는 제주의 물부엌(물 쓰는 일을 편하게 할 수 있는 바깥 공간) 같은 공간이 마음에 든다고 해서 떠올린 생각이었다. S주택 1층에는 거실, 식당, 주방, 작업실, 한실 등 공적인 공간을 배치했다. 2층과 다락에는 부부 침실과 자녀 방을 두었다. 1층은 마당을 향해 열려 있어 넓고 시원한 느낌이 들고 2층은 아기자기한 구성을 가졌다. 한옥에서 가져온 요소들이 곳곳에서 보이는데 하나같이 창의적으로 해석해 ‘한옥스럽다’는 표현이 딱 맞다. 마당 향해 열린 1층, 시원한 느낌2층·다락엔 부부 침실·자녀 방 둬기둥 세 개에 세 칸 대청마루 닮아한지 미닫이문, 한옥 분위기 물씬 한실 바닥엔 구들장… 아궁이 갖춰“현대 건축에 들어온 전통의 미학”움집 모양 비정형물 ‘짓다’ 선보여‘마당집’ 상상 점점 현실로 만들다 #마당·숲, 벚나무 풍경… 독특한 매력 현관에서 중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실과 주방이 있고, 그 너머로 마당이 펼쳐져 보인다. 사이를 넓게 두어 세 개의 기둥을 세워 놓은 모양새가 마치 세 칸 대청마루에서 탁 트인 마당을 보는 것 같다. 공간이 크고 시원한 느낌이 드는 것은 한옥처럼 대들보와 기둥을 둔 결과다. 한지를 바른 미닫이문들을 설치해 한옥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민화 그리는 솜씨가 프로급인 안주인을 위해 특별히 만든 작업실에는 한지를 바른 미닫이문을 달았다. 열면 개방된 공간이 되고, 닫으면 편안하게 집중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닫힌 공간이 된다. 1층 작업실에는 벚나무가 보이도록 큰 창을 냈다. 마당을 향해 앞면과 옆면의 처마를 드리우고 서까래가 길게 보이는 것이 제대로 치마폭을 연상하게 하는 집은 여유롭고 푸근하다. 조 대표는 “한쪽으로는 처마 아래로 마당과 숲이 보이고 다른 한쪽으로는 작업실 큰 창으로 벚나무가 눈에 들어오는 자연스러운 풍경의 흐름이 이 집의 독특한 매력”이라고 말했다. #45㎝ 높이차 한실, 툇마루 앉은 듯해 앞서 지은 K주택에서는 한실을 안쪽에 배치해 서재처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면 S주택에서는 아예 거실 한쪽의 방 하나를 온돌 한실로 만들어 마당 쪽으로 배치했다. 걸터앉기 좋게 거실 바닥과 45㎝ 높이차를 둔 한실에는 벽장이 있고 창살무늬 패턴을 한 창문과 한지를 바른 덧창이 있다. 한실 바닥에는 전통 구들장을 깔았고 바깥의 아궁이에서 불을 땔 수 있도록 했다. 한실과 거실 사이의 문은 ‘들어열개문’으로 만들어 필요에 따라 문을 들어 올려 천장의 들쇠에 고정하면 또 다른 분위기가 난다. 한실에 걸터앉아 거실 쪽을 보니 툇마루에 앉아 마당을 보는 것 같다. 조 대표는 “건축가로서 스스로의 역할은 한옥과 같은 우리 전통의 보편적인 집들을 지금, 그리고 미래에 우리의 삶을 담는 집으로 만드는 일”이라면서 “일본의 현대 주거에 있는 다다미방처럼 현대의 우리 주거에 맞는 한실을 만들려고 한다”고 말했다.“하나의 집에서 전통과 현대가 만나면서 현대건축의 작업 공정에 전통 건축의 공정과 사람이 자연스럽게 섞이게 됩니다. 한지 장인, 대목수, 창호 목수 등 한옥 공간을 만들었던 여러 주체가 들어와서 작업을 하지요. 이것은 ‘전통 한옥의 작업과 미학, 기술이 현대 건축 속에 들어옴’을 의미합니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보편적 창의’를 지속해 나가는 그의 작업은 한마디로 ‘마당집의 계보를 잇는 집’으로 압축된다. 한옥의 바탕에 있는 마당을 삶의 중심에 놓은 ‘마당집’은 서울 서대문의 오래된 한옥에 살면서, 그리고 20여년간의 답사를 통해서 찾은 개념이다. “우리 건축의 대표적인 특징이자 공간을 꼽는다면 그건 마당입니다. 한옥의 바탕에 마당을 중심으로 사는 삶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마당집’이라고 하고 개념을 살려 나가는 작업을 해 왔습니다.”#‘익숙한 새로움’ 만들어 내는 작업 서대문의 한옥에 살면서 그는 한옥이 무척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티 나지 않고 평온한 건축임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집으로 들여온 자연의 조각을 마당 삼아 그 위로 지붕을 덮으면 밝은 마루가 생기고 이를 벽으로 감싸면 포근한 방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양한 도시주택을 답사하면서 우리 주거의 원형이 마당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확신이 더 굳어졌다. 운중동 주택(2012)은 ‘마당집’을 생각하며 지은 최초의 주택이다. 마당을 중심으로 디자인한 ‘마당집’ 작업은 자연스레 ‘한옥 같은 집’으로 발전했다. 한옥은 좋지만 한옥에 사는 것은 부담스럽다는 건축주를 위해 지은 파주 K주택은 마당으로 열린 3칸 대청을 떠오르게 한다. 조 대표는 “한옥을 확장한 개념을 정의할 때 마당을 중심으로 돌, 나무, 흙, 종이로 지은 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을 현대건축으로, 우리의 언어로 재해석할 때 한옥스러운 집이 탄생한다”고 설명했다.넓고 편안한 1층과는 대조적으로 S주택의 2층은 독립된 개인 방들로 이뤄져 마치 골목 안 풍경을 보는 것 같다. 오른쪽으로 부부 침실, 그 위로 가끔 와서 지내는 아들을 위한 다락방이 있고 왼쪽에는 딸의 방이 있다. 딸 방에는 높낮이 차를 두어 한옥처럼 누마루 공간을 만들었다. 여기서 다른 벚나무가 보인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 둔 천창에서 떨어지는 햇살은 해시계처럼 시간에 따라 다른 그림자를 드리운다. 조 대표는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면서 이제껏 본 적 없는 ‘익숙한 새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 건축가로서 자신의 작업”이라고 말했다. 현재 열린송현녹지광장에서 열리고 있는 제4회 도시건축비엔날레에서 그가 선보인 나무 파빌리온 ‘짓다’는 마당집의 개념을 담은 움집 모양의 비정형 구조물이다. 구들을 깐 마당을 중심으로 기둥들과 처마를 목재로 만든 ‘짓다’에는 박이 주렁주렁 달려 익어 가고 있다. 그의 ‘마당집’들을 보면서 깨닫는다.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것을.함혜리 건축 칼럼니스트
  • 별이 된 박완서 길이 되다

    별이 된 박완서 길이 되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5차 서울의 문학5-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편이 지난 21일 서대문구 현저동과 종로구 무악동·사직동·필운동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 독립문역 4번 출구를 출발, 현저동 가파른 언덕배기에 올랐다. 박완서 작가가 어린 시절 놀던 길과 매동보통학교(매동초등학교) 등굣길을 연상하는 코스였다. 독립문~옥살이 골목~무악현대아파트~인왕산 순성길~종로도서관~매동초등학교로 이어진 코스는 단출했지만 명작의 힘은 위대했다. 꼬불꼬불한 골목 귀퉁이마다 작가의 숨결이 느껴졌다. 한 참가자는 “작품 속 등굣길이 궁금했고, 그대로 따라 걸어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꿈이 이뤄졌다”는 감동적인 소감을 남겼다. 올해 최종회인 이날 코스에서 서울미래유산은 영천시장이 유일했다. 해설을 맡은 심흥식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서울문학의 현장을 차분하고 깊이 있게 전달했다.박완서(1931~2011)는 서울과 서울사람을 탐구한 대표적 작가이지만 서울 토박이와는 거리가 멀다. 경기 개풍군 박적골에서 태어나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다 8살 때 극성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온 이주민이다. 사대문 밖 대표적 빈촌지대 현저동 46-418번지는 ‘제2의 고향’이었다. 숙명여고를 다니다 개성 호수돈여고로 전학 갈 때까지 6년간의 성장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광복 후 몇 차례 행정동 개편을 통해 의주로 남서쪽은 서대문구 현저동으로 남고, 북동쪽은 종로구 무악동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지금의 무악동 아이파크아파트가 있는 산 중턱이 옛 집터쯤으로 추정된다. 현저동을 벗어나서는 잠시 신혼살림을 차린 종로구 충신동과 성북구 돈암동 신흥주택 개발지구에서 살았다. 강남개발 이후 주저하지 않고 잠실 장미아파트로 이주, 강남문학을 선보인 이유도 서울의 사대문 안과 사대문 밖을 구분 짓는 앙상레짐이 싫었기 때문이다. 40세 늦깎이 데뷔작 ‘나목’((1970년)에서 거주지를 북촌 계동으로 설정한 것도 현저동 달동네를 벗어나고픈 의도였다.현저동은 박완서의 문학세계에서 가장 특별한 장소다. 현저동이라는 사대문 밖에 둥지를 틀었지만 언젠가는 사대문 안에 입성하기를 갈망했다. 사대문 안과 밖이라는 분리주의는 남북 분단과정에서 빚어진 오빠의 죽음이라는 가족의 비극과 닮았다. 50~51세에 발표한 ‘엄마의 말뚝1~2’는 분리와 분단의 세계에 세운 작가의 깃발이다. ‘박완서 산문집6: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애수(문학동네 2015)’에서 “그러나 막상 내가 도달한 어머니의 서울 살림은 형편없이 궁색한 것이었다. 평지의 반듯반듯한 기와집 동네를 다 그냥 지나쳐 꼬불꼬불한 돌사닥다리 길을 한없이 기어올라가 깎아지른 듯한 축대 끝에 제비집처럼 매달린 초가집의 우중충한 문간방이 어머니 서울 살림집이었다. …서울에서의 첫날밤…나는 이불 속에서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다”는 구절은 8살 박완서가 서울살이를 시작한 현저동 달동네 어느 문간방의 1938년 풍경이다.세월이 흘러 현저동 산기슭엔 아파트단지가 빼곡하다. 소설에서 “골목은 깎아지른 듯한 층층다리로 변했다, 집들도 층층다리처럼 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이상한 동네였다”고 묘사된 곳이라곤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미끈하게 변했다. 현저동은 물이 좋아서 악박골(약박골)이라고 불렸다. 이광수의 ‘흙’에 “…소화불량이 심하기나 해야 악박골 약물에나, 그것도 다른 사람들 오기 전에 이른 새벽에 다녀올까…”라는 대목이 나오고, 심훈의 ‘상록수’에서 주인공 영신과 동혁이가 나누는 대화에서도 “그럼 목두 마른데 악박골루 가서 약물이나 마실까요?”하고 독립문 편짝을 향해서 앞장을 선다. “참, 악박골이 영천이라구도 하는 덴가요?”라고 나온다. 약수로 유명한 이 동네의 진면목과 다양함은 박완서의 작품에 의해 사실화되고 구체화된다. 박완서의 연작 자전소설은 장장 15년 만에 마무리된다. 50세에 쓴 ‘엄마의 말뚝’에 나타난 자전적인 서사를 62세 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다듬었다. 이 작품에는 ‘소설로 그린 자화상’이라는 부제까지 붙어 있다. 65세 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드디어 3부작을 완성했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저서 ‘서울문학기행’에서 “이들 자전적 연작소설을 보면 박완서 가족에게 서울은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부역과 전향에 얽힌 가족사 때문에 전쟁 속의 서울이 작품의 주무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풀이했다.작가가 경험한 서울은 전쟁의 도시인 동시에 사랑의 도시였다. 해방과 전쟁, 피란살이가 중첩된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살았다. 현저동 ‘괴불마당집’은 서울에 입성한 작가에게 ‘지상의 방 한칸’이었다. 서울사람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이자 작가의 길을 마련해준 이야기보따리였다. “우리 세 식구가 처음으로 서울에 장만한 내 집인 현저동 꼭대기 괴불마당집에서의 첫 겨울은 가혹했다. 추위도 예년에 없이 혹독했지만 여름철 장마처럼 눈이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몇 날 며칠 계속됐다. …물보다는 불 걱정이 훨씬 더 심각했다”고 ‘엄마의 말뚝’에서 현저동 시절을 추억했다. ‘엄마의 말뚝’이란 소설 제목은 현저동에 입성했을 때 “드디어 서울에 말뚝을 박았구나”고 안도하는 어머니의 말에서 따왔다. 엄마의 말뚝은 서울의 말뚝이었다. ‘서울탄생기’의 저자 송은영은 “이 말뚝은 드디어 서울에 정착했음을 알게 해주는 장소이다. 말뚝은 지식과 주체성을 갖춘 새로운 여성상에 대한 지향과 그것을 딸에게 투사한 어머니의 욕망을 담고 있다”고 해석했다. 어린 박완서는 등굣길 인왕산 산록에서 싱아를 애타게 찾아다녔다.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 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었다. 그 줄기에는 마디가 있고, 찔레꽃 필 무렵 줄기가 가장 살이 오르고 연했다. 발그스름한 줄기를 꺾어서 겉껍질을 길이로 벗겨 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했다. 입안에 군침이 돌게 신맛이, 아카시아 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 데는 그만일 것 같았다.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 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박완서의 작품에서 현저동은 ‘바닥 상것들’이 사는 ‘쌈박질이 그치지 않는 동네’로 묘사되고 있다. 현저동의 삶은 ‘서울살이의 법도라기보다는 셋방살이의 법도’부터 익혀야 하는 궁핍한 삶이었다. “오줌과 밥풀과 우거지가 한데 썩은 시궁창 물”이 흐르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박완서는 현저동에서 작가의 길을 찾았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고 썼다. 현저동은 박완서 문학을 잉태한 산실이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 “어려운 이웃에 써달라”...마당집 윤경숙 대표 사랑의징검다리에 2000만원 기탁

    “어려운 이웃에 써달라”...마당집 윤경숙 대표 사랑의징검다리에 2000만원 기탁

    “어려운 이웃들에 힘이 되고 싶어 시작한 나눔이 지금은 나의 큰 행복이 됐습니다.”. 부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회장 신정택)는 부산서면 한식당인 ‘마당집’ 윤경숙 대표가 ‘사랑의 징검다리’에 이웃돕기성금 2000만원을 기탁했다고 31일 밝혔다. 윤 대표는 지난 2017년에도 ‘사랑의징검다리’ 사연 주인공들을 위해 써달라며 성금 2000만원을 기탁한 바 있다. 윤 대표가 전달한 기부금은 총 15회에 걸쳐 13명의 사연 대상자에게 전달됐다.2003년 7월부터 시작된 ‘사랑의 징검다리는’ 부산사회복지행정연구회, 부산일보, 부산사회복지공동모금회, TBN교통방송, BNK부산은행 등이 협력해 매주 어려운 이웃의 사연을 발굴해 지면과 방송으로 소개하고 일주일 간 모인 성금을 사연 주인공에게 전달하는 사업이다. 윤 대표는 “명품 옷을 사 입으면 사흘 행복하고, 가족들과 나누면 3개월이 이웃들을 위해 나누면 30년이 행복하다.”며 “어려운 이웃들에 힘이 되어주고 싶어 시작한 나눔이 지금은 나의 큰 행복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 다함께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앞으로도 꾸준히 나눔을 실천할 것”이라고 전했다. 윤 대표는 부산 서면 소재의 한식전문 외식명가인 ‘마당집’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밥장사는 무조건 베풀어야 더 잘되는 장사라는 경영철학에 따라 무료급식소 후원 및 무료밥차 운영, 노인회관 떡국나눔, 자선음악회 기부 등 오랫동안 꾸준히 나눔을 실천해오고 있다. 부산 김정한 기자 jhkim@seoul.co.kr
  • [길섶에서] 매실을 놓치다/황수정 논설위원

    정수리를 데이는 염천에도 내 마음은 놓쳐 버린 유월에 걸려 있다. 청매실, 황매실이 자리를 바꾸며 소란스럽게 계절을 건너는 동안 한 상자쯤 집 안에 들이지 못한 것이 후회막급이다. 올해는 꼭 매실청을 담가 보자, 주둥이 꽁꽁 싸맨 항아리를 베란다 구석에라도 밀쳐놓고 세월을 익혀 보자. 시답잖은 욕심이 내 딴에는 옴팡졌었다. 눈 뜨고 매실을 놓친 ‘뒷북’들한테 매실과 설탕이 요령껏 버무려진 플라스틱 단지를 인터넷에서 팔고 있다. 싱거운 장삿속에 넘어가 줘야 할지. 마당 있는 집을 꿈꾸고는 한다. 시큼털털한 유월의 매실알이 칠팔구월의 항아리 안에서 들큼해져서는 엄동을 곰삭인 힘으로 다시 유월을 건너는, 돌고 돌아 둥글어지는 마당집. 작가 이태준은 웃어른 없는 집에 나이 든 물건조차 곁에 없으니 거만스러워진다고 했다. 매실청 단지를 마당 둥근 집 풋그늘에서 오래 익히고 싶다. 때늦은 마음은 어른이 그리워진 탓일까. 풍상을 삼켜 진액을 내리는 매실의 일이 사람 사는 일과 한가지여서일까. 까무러쳐도 시간을 견뎌야 그렇게 되는 일이 있다는 것, 뜸이 들면 매듭은 풀린다는 것, 그리워야만 속속들이 익는다는 것. 매실을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짐은, 살고자 하니 그리 알라…남한산성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짐은, 살고자 하니 그리 알라…남한산성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소설 ‘남한산성’) 소설 ‘남한산성’을 쓴 김훈 작가는 100쇄 특별판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가진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우연히 기차 안에서 만난 작가에게 김 전 대통령은 ‘김상헌과 최명길 중 어느 편인가’를 물었다. 김훈 작가는 ‘아무 편도 아니다’라고 답한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나는 최명길을 긍정하오. 이건 김상헌을 부정한다는 말은 아니오’라고 말했다고 작가는 전한다. 수많은 민주 항쟁의 고초를 겪은, 평생을 이념적 지향과 현실적 실체의 갈등 속에서 삶의 방향을 찾았던 김 전 대통령의 답변은 지금도 유효하다. 역사는 반복되고 있는가.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병자호란(1636∼1637) 초입 47일 동안이었다. 인조(1595∼1649)가 머문 남한산성은 신하들의 말(言)로써 높이를 더해 가고 있었다. 죽음을 통해 삶을 지탱하려 한 예조판서 김상헌(1570∼1652)과 감당할 수 있는 치욕을 통해 훗날을 도모하고자 한 이조판서 최명길(1586∼1647)의 목소리는 아마도 늘상 울음기가 가득했을 것이다.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를 다시금 되짚는다. 경기도 광주(廣州)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가자. 1636년 12월 6일 청나라의 태종은 조선과 군신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이에 용골대를 선봉으로 한 10만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바로 한성을 공격한다. 이에 인조는 급히 강화도로 처소를 옮기고자 하였으나 이미 한양 부근의 양화진과 개화진에 청군은 12월 14일에 도착한 상태였다. 다시금 남한산성으로 급히 어가(御駕)를 돌린다. 남한산성은 해발 500m이상의 험준한 산악 지형을 따라 쌓은 둘레 11.76㎞의 성곽이다. 북한산성과 함께 한양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으로 원래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 쌓은 주장성(晝長城)의 옛터 위에 1624년(인조 2년)에 축성(築城)한 것이다. 남한산성 성벽에는 성가퀴라고 불리는 작은 독립 담장이 1700첩(堞)이 있었고, 공식적인 출입구인 성문은 총 4문(門)이 있다. 또한 성안팎을 오가는 작은 비밀통로인 암문(暗門)이 총 8개가 있었다. 막상 인조의 어가(御駕)가 산성에 올랐을 때 성내에는 미곡 1만 4300여 석, 잡곡이 9500석, 장독이 220여 개가 있었으니 비축한 양식은 넉넉한 듯하였다. 하지만 총융청, 훈련도감 소속의 군인과 진관 소속의 남한산성 내의 군병들만 하여도 총 1만 3800여명이 넘다보니 불과 보름도 제대로 버티지 못할 상태였다. 이미 전세(戰勢)는 일찌감치 청군에게 기운 상태였다. 결국 1637년(인조 15) 1월 30일, 인조는 곤룡포 대신 평민이 입는 남색 옷을 입고 소현세자와 더불어 남한산성의 서문을 걸어서 나선다. 현재의 잠실나루 근처의 삼전도(三田渡) 수항단(受降壇)에서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라는 항복 예식을 행한다. 1637(인조 15) 2월 8일, 소현세자는 청의 인질이 되어 봉림대군 등과 함께 한양을 출발해 심양으로 향한다. 다산 정약용이 남긴 ‘비어고(備禦考)’에 이 당시의 상황이 상세히 남겨져 있다. 전란 이후 청에 끌려간 포로는 60만 명이 넘으며, 그 중 부녀자들의 수는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당시 인질 1인당 몸값은 원래 은(銀) 30냥 내외였으나, 일부 사대부 집안의 경우 자신의 가족들을 먼저 구하기 위해 웃돈을 청군에게 얹어주다보니 실제 인질의 몸값은 200냥 가깝게 폭등하였다. 따라서 여염집 출신 포로는 아예 구명(求命)을 포기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상황은 달랐다. 영의정 김류는 첩의 딸 한 명을 구하기 위해 용골대에게 은(銀) 1000냥을 불렀다. 일반 백성 50명을 살릴 돈이었다. 병자년 그 해 겨울, 남한산성에서 일어난 고통의 역사는 말로써 머리를 채우려한 사대부들이 아닌 볼모가 된 백성들만이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남한산성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훌륭한 산행코스다. 성남에 가 볼 일이 있다면 천천히 돌아볼만한 곳이다. 2. 누구와 함께? -가족과 함께. 혼자로도 좋다. 3. 가는 방법은? -지하철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에서 내려 9번, 52번 버스를 타고 산성로타리에서 하차. 4. 눈여겨 볼만한 것은? -수어장대, 행궁, 암문, 4대문 등 볼만한 곳이 많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수도권 지역의 대표적인 산행 코스여서 주말에는 인파가 많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수어장대, 행궁, 침괘정, 연무관 7. 먹거리 추천? -닭볶음탕 ‘산성오복식당’(743-6566), 닭죽 ‘논골장마당집’(745-5700), 붕어찜 ‘고향매운탕’(767-9693), 비빔밥 ‘남문관’(743-6560) / 지역번호 031 8.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gg.go.kr/namhansansung-2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경기도자박물관, 경안천습지생태공원, 한국잡월드 10. 총평 및 당부사항 -병자호란에 대한 역사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아주 훌륭한 역사 탐방의 기회가 될 듯. 눈 내린 겨울의 남한산성을 추천.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기자 vieniame2017@gmail.com
  • [길섶에서] 마당 있는 집/황수정 논설위원

    지인의 집 벽난로에 여럿이 둘러앉아 장작불을 지폈다. 타닥타닥 불티 날리는 소리가 어찌나 경쾌하던지, 맨숭맨숭한 얼굴들에 금세 화색이 번졌다. 땔감을 건사하는 방편도 얘깃거리. 아침저녁 동네 산책길에 나무쪽을 주워 모으거나 이도 저도 궁해지면 장작을 산다고. 사방을 걸어 잠근 아파트 사람들에게야 재미진 이야기다. 예전 우리 집 마당 귀퉁이에는 조촐한 가마솥 아궁이가 있었다. 보리차를 끓이든 시래기를 삶든 부엌에서 못할 것도 없는 일거리들인데, 저녁 어스름에 엄마는 꼭 한두 가지쯤 아궁이로 들고 나왔다. 부산했던 동선이 병풍처럼 멈추던 시간. 이글이글한 불잉걸이 하얗게 사위도록 하염없이 앉았었고. 지금은 알 듯도 하다. 삶의 매듭을 다스리는 지혜가 그날들의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삶을 달래는 기도는 깊은 산 선방(禪房)에만 있지 않다는 것. 욕심이 생겼다. 큰 집이 아니라 마당 있는 집. 아궁이 하나 놓을 수 있게만 마당이 깊은 집. 호되게 심란한 날은 불땀도 세게, 소소하게 심란한 날은 불땀도 약하게. 마당집 아궁이 생각만 하면 나는 한동안 실실 웃을 것 같다. 이런 날에는 지복(至福)이 별건가 싶다. 황수정 논설위원 sj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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