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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I 기술로 되살린 ‘임시정부환영가’ 첫 공개

    AI 기술로 되살린 ‘임시정부환영가’ 첫 공개

    “원수를 물리치고 맹군이 왔건마는 / 우리의 오직 한길 아직도 멀었던가….” 1945년 연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을 축하하는 환영식에서 부른 노래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오는 11일부터 디지털도서관에서 선보이는 ‘해방의 소리, AI(인공지능)로 담다’ 전시에서 ‘임시정부환영가’ 악보를 최초로 공개한다고 6일 밝혔다. 악보는 중앙신문 1945년 12월 17일 자에 실렸다. 중앙신문은 1945년 김형수 등이 ‘조선상공신문’을 인수해 창간한 일간지다. 도서관에 따르면 신문에 실렸던 악보가 공개된 적은 없었다. 악보에는 곡의 빠르기 표시와 함께 ‘거름(걸음)에 맞추어 힘차게’라고 적혀 있다. 당시 미군정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은 일반인 신분으로 쓸쓸히 귀국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인공지능을 활용해 악보를 바탕으로 만든 노래 선율을 들을 수 있다. 한편, 이번 전시에서는 해방 소식을 전한 미국의 소리(VOA) ‘한국어 방송’ 내용을 대담 형식으로 꾸민 오디오 팟캐스트, 대한독립협회가 무료 배포한 ‘애국가’ 등도 선보인다. 또, 전시에서는 1945년 10월 15일 자 ‘매일신보’ 신문에 실린 국립도서관 개관 기사를 낭독하는 음원과 당시 사서들이 작성한 일지를 각색한 영상 등도 만날 수 있다. 전시는 오는 12월 31일까지 별도 예약 없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 “월남 이상재 선생님을 아십니까”, 서훈 1등 상향 추진

    “월남 이상재 선생님을 아십니까”, 서훈 1등 상향 추진

    서천 주민 등 “국가적 예우 격상해야”한국 근대사 상징적 인물, 서명운동 “독립운동과 민족계몽, 근대화에 기여한 공적과 위상에 비해 서훈 등급이 낮습니다.” 충남 서천 지역에서 광복 80주년을 맞아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계몽사상가인 월남 이상재 선생의 서훈 등급 상향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30일 서천군에 따르면 월남 이상재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 받았다. 하지만 지역사회와 학계 등을 중심으로 이 선생의 서훈을 최고 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으로 격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확산하고 있다. 그는 독립협회 창립과 만민공동회 개최를 주도했다.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조선교육협회·신간회 초대 회장 역 등 자주외교와 독립운동, 계몽운동에 헌신했다. 오늘날에도 한국 근대사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된다. 군은 ‘월남 이상재 선생 서훈 상향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군과 추진위는 △공적 자료 추가 발굴과 학술적 근거 확보 △서훈 승격 타당성 검증을 위한 학술회의 △온오프라인 범국민 서명운동 전개 등 3대 분야 7개 핵심 과제를 추진할 계획이다. 국민적 공감대 확산을 위해 주민 수 2배에 가까운 10만명 이상 참여를 목표로 서명운동도 전개한다. 서천군 관계자는 “민족의 자주독립과 국민계몽에 헌신하신 선생의 공적에 걸맞은 예우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며 “충남도와 협력해 범도민 운동으로 확산하고 기념사업재단, 기념사업회, 서천교육지원청 등 관계기관, 단체와 연대하여 추진 동력을 확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마스가 프로젝트에 힘 싣는 이 대통령 “필리조선소…한미 포괄적 전략동맹의 새장”

    마스가 프로젝트에 힘 싣는 이 대통령 “필리조선소…한미 포괄적 전략동맹의 새장”

    이재명 대통령은 26일(현지시간) “한화 필리조선소를 통해 72년 역사의 한미동맹은 안보동맹·경제동맹·기술동맹이 합쳐진 미래형 포괄적 전략동맹의 새장을 열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화 필리조선소’를 방문해 미국 해양청이 발주한 국가안보다목적선(NSMV) ‘스테이트 오브 메인’호의 명명식에 참석해 이같이 연설했다. 이 대통령은 필리조선소 방문을 통해 한미 조선 협력을 의미하는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에 대한 한국의 의지를 재확인함으로써 한미동맹을 한층 더 강화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조선업이 미국 해양 안보를 강화하고 미국 조선업의 부활에 기여하는 새로운 도전의 길에 나서게 된다”며 “동맹국의 대통령으로서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제가 트럼프 대통령께 제안한 ‘미국의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프로젝트’는 단지 거대한 군함과 최첨단 선박을 건조하겠다는 비전만이 아니다”라며 “사라진 꿈을 회복하겠다는 거대한 비전”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한화가 필리조선소를 인수한 뒤 미국 견습생들이 이곳으로 모이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한국이 미국 경제와 고용 부분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대통령은 “세계 제1의 저력과 역량을 마주한 필리조선소는 최첨단 선박 기술을 보여주는 미국 최고의 조선소로 거듭날 것”이라며 “미국 해안벨트 곳곳에서 조선업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한국의 조선소들은 미국 조선소에 투자하고 우수한 인력을 양성하는 한편 현대화된 공정 기술이 미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은 “미국 조선업과 대한민국 조선업이 더불어 도약하는 ‘윈윈’의 성과를 만들어낼 것이고 오늘의 출항은 한미 양국이 단단한 우정으로 써 내려가는 또 하나의 희망과 도전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세계를 무대로 펼쳐질 마스가 프로젝트는 대한민국과 미국이 함께 항해할 새로운 기회로 가득한 바다의 새 이름”이라고 했다. 필리조선소는 1801년 미국 해군 조선소로 지어졌으며 1997년 민영조선소로 출범했다. 지난해 12월 한화그룹이 1억 달러(1400억원)를 투자해 인수한 조선소다. 한국의 조선 기업이 미국 현지 조선소를 인수한 건 처음이었다. 이날 명명된 ‘스테이트 오브 메인’호는 한화 필리조선소 체제에서 처음으로 완성된 선박이다. 한화 필리조선소는 미 해양청이 발주받아 한 척당 3억 달러(4200억원) 규모로 모두 5척의 NSMV를 건조할 예정이며 오늘 명명된 선박은 그 5척 가운데 3호선이다. 한국의 조선 전문기업인 DSEC가 설계와 기자재 조달에 참여하는 등 한미 간 대표적 조선 협력 사례라는 게 대통령실의 설명이다. 이 선박은 평시에는 해양대학교 사관생도들의 훈련용으로 활용되다가 비상시에는 재난 대응 및 구조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다목적선으로 활용하게 된다. 이날 명명식에는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조현 외교부 장관,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 김용범 정책실장과 조시 샤피로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토드 영 상원의원,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김희철 한화오션 대표 등이 참석했다. 이어진 현장 시찰에서 한화그룹 관계자는 이 대통령에 필리조선소에 대한 추가 투자로 생산 능력을 현재의 연 1.5척에서 20척 내외로 확대하며 중장기적으로 LNG운반선 등 대형 첨단선박을 제조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함께한 미 정부 인사들에게 한국 기업의 투자가 원활히 진행되고 미국 내 사업 운영에 차질이 없도록 제도적 지원을 다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앞서 부인 김혜경 여사와 함께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재필기념관’을 방문해 기념관 시설을 둘러보고 재단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서재필기념관은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창립 및 독립문 건립 등을 한 서재필 박사의 숭고한 업적과 애국애족 정신을 미국 사회에 널리 알리고자 1986년 서재필 기념재단에서 박사가 생전에 거주했던 주택을 매입해 개보수를 거쳐 1990년 11월 기념관으로 개관한 곳이다. 한국의 대통령이 서재필기념관을 방문한 것은 1999년 7월 김대중 던 대통령 이후 26년 만이다. 이 대통령은 “이번 미국 방문에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서재필 박사의 정신이 깃든 기념관을 방문하게 되어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이날 필리조선소 방문을 끝으로 3박 6일의 미국·일본 정상회담 일정을 마치고 28일 귀국한다.
  • [열린세상] 노년이 더 빛난 월남 이상재

    [열린세상] 노년이 더 빛난 월남 이상재

    여느 선진국처럼 한국도 고령화 사회가 됐다. 나도 어느덧 칠십 노인이 됐지만, 65세 이상의 노인이 천만명을 돌파하면서 전체 인구의 20%를 넘었다. 이제 노인들이 자신의 역할을 잘하고, 좋은 태도로 잘 살아 줘야 나라 전체가 편안하고 발전하는 시대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 시대 노인들, 아니 내 친구들에게 사표(師表)로 삼을 분으로 월남 이상재 선생을 추천하고 싶다. 월남의 가장 훌륭한 점은 청년들을 친구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청년들을 가르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로부터 배웠다. 그분은 한성감옥에서 25살이나 어린 우남 이승만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 아들에게 배우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독립운동사에서 월남과 우남의 관계는 매우 큰 의미를 가진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시절부터 시작된 오랜 인연이고, 우남에게 월남은 든든한 보호자로서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 1910년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승만을 불러들여 전국으로 순회강연을 시키고,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1912년 다시 미국으로 내보낸 이도 바로 이상재다. 한성 임시정부에서 집정관 총재로 이승만이 추대된 배경에도 월남의 영향력이 느껴진다. 50세 차이가 나는 박헌영에게 월남은 할아버지뻘이다. 1900년생 박헌영은 경기고보 학생 시절 YMCA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미국 유학을 꿈꾸던 청년들 중 한 사람이다. 1899년생 조봉암도 3ㆍ1운동으로 감옥에 갔다 풀려나와서는 바로 YMCA 중학부에서 공부를 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1920년대 경성은 이런 청년들이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고, 소련의 식민지 종속국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물심양면의 지원으로 공산주의로 휩쓸리던 때였다. 이런 시대에도 월남은 의연히 청년들과 함께 놀고 즐기면서 그들이 극단으로 가지 않도록 달래던 어른이었다. 그래서 그는 ‘흰 터럭의 청년’, 즉 수염과 머리카락이 흰 젊은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월남은 종로 YMCA에 버티고 있으면서 통렬한 풍자와 유머로 아들 세대와 손자 세대를 모두 넉넉하게 품에 안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큰 어른이었다. 1927년 좌우를 아우르는 연합전선으로 신간회가 만들어질 때 월남이 회장으로 추대된 모습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나라 없는 백성들의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고난에 찬 그분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가 가장 화려하고 장엄하게 빛난 것은 물론이다. 그분의 장례식은 전 민족이 참여한 거대한 시위였다. 나라가 없는 시절이라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이라 이름하였지만, 실제로는 국장(國葬)이었다. 전국 모든 도시에 장례위원회가 꾸려지고 참여한 장례위원이 10만명을 넘어섰다. 특히 장례 마지막 날 저녁, 서울역에서 출발한 장의 열차가 수원역, 평택역, 천안역, 조치원역, 서대전역, 논산역, 이리역을 통과할 때마다 수백명의 시민들이 횃불을 들고 나와 맞이하는 광경은 장례를 빙자한 시위ㆍ독립운동과 다름없었다. 장의 열차는 느릿느릿 달려 마침내 다음날 아침 군산역에 도착했다. 군산 시민들이 운집한 가운데 영결식을 거행하고 상여를 배로 옮겨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 선생의 고향 서천군 한산면 장지에 이르렀다. 월남은 끊임없이 성장해 노년이, 70대가 가장 빛났던 분이었다. 1898년 만민공동회가 열린 종로 거리에서 월남이 사회를 볼 때 나이는 48세였다. 당시 그 나이면 이미 어른으로서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사상과 인품이 한층 깊어져 더 큰 산이 됐다. 모든 노인들에게 권하고 싶다. 혹시 종로 4가를 지나칠 일이 있으면 잠시 선생의 동상 앞에 가서 절이라도 한번 하시라. 그분에 대하여 알고 자주 생각하면, 모두가 월남 같은 위인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손자 세대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지는 않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주대환 민주화운동동지회 의장
  • 130년 전 동학농민혁명 ‘유족수당’… 보상일까 포퓰리즘일까

    130년 전 동학농민혁명 ‘유족수당’… 보상일까 포퓰리즘일까

    ‘1894년 3월에 봉건 체제의 개혁을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2차로 봉기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에 나와 있는 동학혁명의 정의다. 1894년 1년간 전개됐던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봉건사회의 부정·부패 척결 및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대규모 민중항쟁이었다. 개화파가 주도했던 갑신정변이나 독립협회운동, 재야 유생이 주도했던 위정척사운동이나 의병 항쟁 등은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닌 아래로부터 진행된 민중항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은 202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며 그 가치와 의미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유족에 대한 예우, 특히 유족수당 지급에 대해선 논란이 커지고 있다. ●전북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 재평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재평가는 행정과 지역 정치권에서 본격화되고 있다. 특별법상 동학농민군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다.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들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하는 특별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행정은 유족수당 지급을 검토 중이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1월 고부 농민봉기를 도화선으로 3월 전라도 무장에서 본격화됐다. 조선 후기 빈발했던 농민봉기 단계에서 나타났던 민중의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 의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해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대규모 농민 대중에 의한 혁명으로 시작했다. 1894년 이후 전개된 의병항쟁, 3·1독립운동과 항일 무장 투쟁에 이르기까지 사회개혁 운동과 자주적 국권 수호 운동으로서 한국의 근대화와 민족 민중운동의 근간이 됐다는 게 전북의 입장이다. 도 관계자는 “동학농민혁명 참가자들도 2차 봉기 당시 일본군에 맞서 항일 운동을 했다”며 “그러나 현재 독립 유공자는 1895년 을미의병부터 적용해 그보다 1년 앞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 참가자에 대한 서훈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북 “혁명 참가자 증손자까지만” 최근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은 동학농민혁명 참가자들의 유족에 대한 수당 지급이다. 전북도는 내년부터 동학농민혁명 참가자의 유족 1인당 월 10만원의 유족 수당을 지급할 계획이다. 지급 대상은 전북에 거주하는 동학농민혁명 참가자의 직계 후손(자녀, 손자녀, 증손 자녀) 915명이다. 이를 위해 연간 10억 9800만원의 예산이 투입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족수당 지급을 반대하는 여론도 상당하다. 조롱을 넘어 담당 부서 공무원들에게 욕설을 하기도 한다. 이들은 “나도 세종대왕의 후손이니 그 업적에 대해 보상해 달라”, “내 조상님은 고려를 건립한 개국공신 중 한 명인데 나도 10만원을 받을 수 있나”,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등에 참여한 군인 유족도 수당을 줘야 한다” 등을 주장하며 비꼰다. 전북 지자체 한 관계자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전화를 걸어 소리치고 욕설까지 해 과할 때가 있다”며 “유족수당 대상은 혁명 참가자의 증손 자녀까지만 가능해 동학혁명은 130년이 넘어 몇 년 지나면 이 사업도 끝이 날 것”이라고 했다. ●5년 전 유족수당 지급 시작한 정읍시 유족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명예회복심의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확정된다. 전북도와 시군은 이 과정에 개입하지 않는다. 전북 정읍시는 지난 2020년부터 동학농민혁명 참가자 유족에게 매월 10만원씩 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기초단체로선 전국 최초다. 정읍시는 지역에 주민등록을 두고 1년 이상 거주한 유족 중 혁명 참가자의 자녀·손자녀·증손 자녀를 대상으로 신청받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정읍시 관계자는 “어렵게 살아온 유족들에게 지금이라도 수당을 지급하는 등 예우를 하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생활비 아닌 동학 선양사업의 전환점” 동학농민혁명 유족수당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확산하자 전북도는 지난달 31일 공청회를 열었다. 정읍 지역 유족회 관계자는 “후손들이 어렵게 살았는데 국가가 방관해 왔다”며 “돈을 바라는 게 아니라 과거에 대한 인정과 명예회복으로 특히 부인과 자녀들이 가장 억울한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시군·유족별 편차 없는 동일한 정책 추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한 유족은 “정읍시의 월 10만원(연 120만원)과 비교해 앞뒤가 맞지 않는 행정”이라며 “연 50만원은 월 4만 2000원에 불과하다”고 했다. 일부 유족들은 “증손자나 손자가 없고 고손만 유족으로 남는 경우 혜택을 받지 못한다”며 지급 범위 등에 대한 포괄적 검토를 요청했다. 그러면서 “수당 지급 대상을 참가자의 증손 자녀까지 개인별 월 10만원으로 할 것을 제안한다”며 “5·18 민주화운동, 제주 4·3사건 등 다른 역사적 사건 피해자들은 월 10만원을 받는데 동학농민혁명만 차별 대우를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단체 관계자들은 유족수당의 목적이 생활비 보탬이 아니라 동학농민혁명 선양사업의 전환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반대 의견을 설득하려는 노력의 필요성에도 공감했다. 염영선 전북도의원은 “유족수당 지급은 동학농민혁명 참가자의 독립유공 서훈, 헌법전문에 동학 정신이 수록되는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은 “유족수당 제도가 잘 정착했으면 한다”며 “동학의 고장 전북에서 선도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 [열린세상]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열린세상]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우리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제1조 제2항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한 사실도 알고 있다. 우리나라의 민주정체(democracy)를 규정하고 있는 금과옥조로 받들고 있다. 그런데 왜 제3항을 두어 공화국(republic)이 무엇인지를 규정하지는 않았는가? 우리나라 국호가 영문으로 ‘Republic of Korea’임을 염두에 둔다면 가져봄 직한 의문이다. 철학자 한면희가 최근 저작 ‘공화주의와 위기의 한국’에서 제기하고 있다. 그는 이 질문을 통해 공화주의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를 비롯한 여러 지식인들이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한국의 정치 위기가 민주주의만 알고 공화주의를 모르는 데에서 기인하는 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꿈에서 아직 깨지 않은 듯, 민주주의에만 몰입하고 공화주의에 무관심하지는 않았는가? 우리나라 역사에서 공화주의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98년 만민공동회가 전개될 때였다. 1898년 11월 4일, 서울 거리에 벽보가 나붙었다. 그 내용은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를 하려 한다며 황제를 몰아내고 대통령에 박정양, 부통령에 윤치호, 내부대신 이상재, 외무대신 정교 등으로 정권을 세우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빌미로 고종은 독립협회 간부 체포령을 내렸다. 이튿날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순검들은 부회장 이상재를 비롯해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체포했다. 수구파의 반격에 맞서 이승만을 비롯한 젊은 지도자들은 박영효를 대통령으로 옹립하는 정변을 모의하기도 했다. 실제로 공화정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이런 흐름은 3ㆍ1운동이 일어난 후 1919년 4월 23일 서울에서 한성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독립운동가들이 가두시위의 현수막에 ‘공화국 만세!’라는 구호를 적는 데로 이어졌다. 또 그에 앞서 4월 10일 상하이에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채택한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였다. 군주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선언이자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때로 공화국을 민국(民國)으로, 황제가 없는 나라로 이해했다. 하지만 공화국의 운영 원리는 보다 복잡하고 공화주의는 좀더 깊은 정치철학을 내포하고 있다. 민주정이 고대 아테네에서 실재했던 정치 체제를 가리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화정 또는 공화국 역시 관념과 이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실재했던 고대 로마 정치 체제에서 비롯됐다. 아테네 민주정치가 타락해 중우정치, 선동정치가 되고 나라가 쇠퇴해 마침내 신흥 제국 로마에 편입되면서, 그리스의 현인으로 불리던 철학자 폴리비오스는 로마로 압송돼 와서 귀족 가문의 교사 노릇을 하게 된다. 그는 이 신흥국의 정치 체제가 군주정과 귀족정, 민주정의 세 가지 요소가 혼합돼 서로 견제하는 가운데 균형을 이루어 날로 강성한 나라가 돼 가는 모습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러한 혼합정,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오늘날 현대 민주공화국들에서 삼권분립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 그가 로마에서 본 것은 법치주의와 시민의 자유, 그리고 자발적 애국심과 공동선의 추구 등이었다. 이런 요소들 역시 미국을 비롯한 현대 민주공화국들이 더 발전시키려 애쓰는 덕목들이다. 왜 ‘민주주의’는 ‘공화주의’라는 더 큰 틀에 담겨야만 하는가, 왜 우리 조상들은 ‘민주공화국’을 만들고자 하였던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공화국을 단지 왕이 없는 나라로만 이해한다면 일당독재로서 시민의 자유가 제한적인 중화인민공화국도 ‘공화국’이라 할 수 있고, 심지어 세습 왕조가 돼 버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공화국’이라고 우길 수 있다. 주대환 민주화운동동지회 의장
  • [열린세상] 독립운동 기본노선 이탈한 두 세대

    [열린세상] 독립운동 기본노선 이탈한 두 세대

    나는 지난 40년 동안 지루하게도 긴 세월, 이른바 ‘86세대’에 대하여 ‘무식하고 건방지다’고 비판해 왔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내가 아무리 목청 높여 “민족주의는 지성을 마비시키는 독약”이라고 말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쓸데없는 잔소리로 나만 손해 본 것이다. ‘86세대’가 20대 청년기를 보낸 1980년대는 민주화운동을 하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던 시절이었다. 보드카(마르크스 레닌주의)든 고량주(마오쩌둥 사상)든 마시고 비틀거려도 다 용서가 되었다. 심지어 싸구려 북한 술(주체사상)에 찌들어도 다들 모른 척했다. 당시의 청년들은 흔히 공권력을 우습게 보고 돌을 던지고 폭력을 휘둘러도 크게 비난받지 않았다. 심지어 감옥에 가도 독립운동가 대접을 받았다. 이렇게 탄생한 공부 안 한 학생들, 무식한 영웅들의 영향력이 자기 세대 내에서 무척 클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음 세대, 70년대생들에게까지도 미친다. 이런 세대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 나타난 것인가? 아니다. 이들보다 60년 전에, 1920년대를 20대로 산 청년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이 독립운동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독립운동은 크게 성장했지만, 동시에 기본노선을 이탈했다. 이들의 활동으로 민족운동에 사회운동을 결합하고 노동자와 농민, 여성을 독립운동에 가담시키는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기본노선을 이탈한 것은 이들 세대의 치명적인 문제였다. 1920년대, 일제의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와 조선총독부의 이른바 ‘문화통치’라는 의외로 느슨한 분위기 속에서 ‘주의자’를 자처하는 일은 모든 지식 청년들의 멋이고 유행이었다. 해방 당시 이들이 40대 장년으로 전국 방방곡곡의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건국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3ㆍ1운동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쉽게 ‘3ㆍ1운동의 아이들’이라고 부를 수 있으니, 86세대를 ‘5ㆍ18의 아이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두 세대는 60년을 서로 떨어진 시대를 살았으나 공통점이 많았으니, 무엇보다 자신들이야말로 ‘과학적이며 혁명적이고’ 진정한 역사는 자신들이 처음 쓰기 시작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시건방진 어린 왕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가치, 근대 해양문명과 민주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조선책략’을 읽지 않았다. 김홍집과 유길준의 고민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상재와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등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서 정립한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기본노선, 친미의 민주공화국을 세워서 중ㆍ러ㆍ일로부터 독립하자는 노선을 이탈했다. 바로 이 해양문명 지향의 독립운동의 기본노선을 이탈하는 순간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남만인소’와 위정척사파의 입장에 서게 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숙명이다. 우리나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나라 중국에 가장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조선왕국이 스스로 번속국(藩屬國)을 자처한 것이 어찌 즐거운 일이었겠나? 불과 1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반도에 사는 우리 조상들은 중화제국, 명나라와 청나라의 번속국의 하나인 조선왕국의 신민이었다. 천년의 숙명을 벗어날 길을 알려준 ‘조선책략’의 저자가 중국 사람 황준헌이라는 사실도 역설적이지만, 우리 조상들은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중화(中華)의 천하를 넘어선 세계를 보기 시작했다. 우리 조상들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국민이 주인인 나라, 미국을 모델로 한,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의 민주공화국을 독립운동의 목표로 정립했다. 가장 명쾌한 표현은 안창호 선생이 1920년 1월 3일 상하이 교포들의 신년 축하회에서 행한 연설, ‘나라 사랑의 6대 사업’에서 읽을 수 있다. 주대환 민주화운동동지회 의장
  • 그날, 이들의 대한제국은 어땠을까

    그날, 이들의 대한제국은 어땠을까

    정치인·선교사·지식인·언론인·상인 당대 5인의 기록으로 역사 재구성“망국 초래” “근대화” 엇갈린 평가 속다양한 처지·지향·욕망 성찰의 기회 대한제국(1897~ 1910)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엇갈린다.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해 망국을 초래했다는 비판과 제국주의라는 시대적 한계는 있었지만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공존한다. 이처럼 논쟁이 가열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삶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것이다. 대한제국사 전문가인 김태웅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대한제국기에 살았던 사람들의 현실 인식을 토대로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수립에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 러일전쟁과 을사늑약, 헤이그 특사 파견과 군대 해산, 의병 전쟁과 일제 강제 병합에 이르는 역사적 사건의 맥을 차례로 짚어 나간다. 당대를 살았던 5인의 기록을 통해 대한제국의 역사를 재구성했다. 서구 문물을 앞장서서 수용했지만 친일파로 분류되는 정치인 윤치호, 천주교를 포교하면서 대한제국의 권력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프랑스인 신부 귀스타브 뮈텔, 당대의 인물과 사건을 예리하게 관찰하면서 역사책을 남긴 지식인 정교와 언론인 황현, 일반 백성의 시각에서 당시 상황을 전달하는 상공인 지규식이 그 주인공이다. 책에서 가장 많은 자료를 제공하는 인물은 윤치호다. 188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쓰인 ‘윤치호 일기’는 국내외 정세와 지방 사회 동향을 상세히 기록해 사료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윤치호는 이 일기에서 일제의 조선 통치 정책에 대한 복잡미묘한 견해와 조선의 역사·문화와 조선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저자는 “윤치호는 일제의 통치 정책이나 민족주의 진영의 움직임은 물론 고종 황제 독살설, 유길준의 을미사변 관련설 등 당시 풍문으로 전해졌던 사건의 뒷이야기도 상세하게 기록했는데 이는 학자들과 대중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중요한 논쟁거리”라고 말했다. 귀스타브 뮈텔이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1890년부터 1933년까지 쓴 ‘뮈텔주교일기’에는 교회의 일반 행사뿐만 아니라 조선 정계 인물의 활동과 외국 열강의 움직임 등이 수시로 언급된다. 저자는 “삼국 간섭의 경우, 뮈텔이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며 “이 일기에는 고종이나 주요 관료들을 만난 이야기와 공식적인 정치 활동 뒤에 숨은 일화 등이 담겨 있어 근대 정치사와 외교사의 이면을 살펴볼 수 있다”고 밝혔다. 정교의 ‘대한계년사’와 황현의 ‘매천야록’은 ‘대한매일신보’ 등 당대 신문 자료와 기타 공식 기록을 활용해 서술한 역사서로서의 요건을 갖춘 야사다. 농촌형 유학자에 가까운 황현과 도시형 개화 지식층이라고 할 수 있는 정교는 서로 다른 역사관과 현실 인식을 보여 준다. 문장가이자 학자였던 황현은 1910년 8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자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했다. ‘하재일기’를 쓴 지규식은 자기(瓷器)를 왕실과 관부에 조달하는 평민 출신 공인(貢人)으로 41세인 1891년부터 1911년까지 매일 일기를 남겼다. 그 속에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사람의 고민과 고통이 잘 드러나 있다. 책은 900쪽이 넘는 ‘벽돌책’이지만 통시적 흐름으로 대한제국사의 주요 논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됐다. 저자는 “대한제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 행위자의 다양한 처지와 지향, 욕망을 다층적으로 성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동학농민혁명 명칭·정신, 헌법 전문에 수록해야”… 맨 앞에 선 정읍

    “동학농민혁명 명칭·정신, 헌법 전문에 수록해야”… 맨 앞에 선 정읍

    ‘혁명의 도시’ 정읍 발 벗고 나섰다“아래로부터 진행된 민중의 혁명헌법에 담아 명확하게 정리·규정”정부·국회 향해 직접 촉구 나서세계혁명도시 연대회의도 개최“대한민국 진정한 출발로 삼아야”정읍·39개 동학혁명 단체 손잡고국회 앞에서 공동성명 처음 낭독전북도의회도 개헌 건의문 채택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아 ‘동학농민혁명 명칭과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대한민국 민족운동, 민주화운동의 정신적·이념적 뿌리는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사실을 헌법 전문에 명시해 숭고한 뜻을 살려 나가야 한다고 요구한다. 독립운동과 민주주의 토대가 된 동학농민혁명의 헌법적 가치를 명확히 세워야 한다는 의미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투쟁했지만, 그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군의 독립유공자 인정 논란도 60여년째 계속되고 있다. ‘혁명의 도시’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가 동학농민혁명의 명칭과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2020년 시도지사협의회에서 동학농민혁명의 명칭과 정신이 헌법 전문에 포함돼야 한다는 공동성명을 채택했으나 더이상 논의가 없자 국회와 정부를 향해 직접 촉구하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세계혁명도시 연대회의를 개최하는 등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한 전방위적 노력도 함께 펼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프랑스 대혁명, 멕시코 혁명, 쿠바 혁명, 러시아 혁명 등 세계 유수의 혁명 역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민중혁명이라고 강조한다. ●동학혁명, 민족운동사의 정신적 뿌리 정읍시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제강점기 의병운동,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한국 민족운동사의 정신적 뿌리라고 정의했다. 이런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과 의의가 제대로 평가될 경우 헌법 전문에 수록될 수 있는 당위성이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을 헌법 전문에 담는 게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명확하게 정리하고 규정하는 것이라고 힘줘 말한다. 우리 민족사에 의미가 큰 혁명을 헌법 전문에 포함하는 일은 지극히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는 입장이다. 실제로 동학농민혁명은 항일 투쟁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됐고 해방 이후에는 이 땅의 민주화운동과 민족 통일운동의 정신적 토대가 됐다. 1893년 11월 사발통문 작성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됐던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의 봉건사회와 부정·부패 척결,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었던 대규모 민중혁명이었다. 개화파가 주도했던 갑신정변이나 독립협회, 유생이 주도했던 의병 항쟁 등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으나 동학농민혁명은 일반 민중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진행된 민중혁명이었다. 조선 후기 사회 전반에 제기된 개혁 의지를 발전적으로 계승해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대규모 농민 대중에 의한 혁명이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국가는 2019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을 제정하면서 동학농민혁명의 가치와 의미를 정식으로 인정하게 됐다. 앞서 2004년 특별법 제정으로 역적의 오명을 쓴 채 살아야 했던 유족들의 복권이 이뤄졌다. 2022년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준공되면서 대한민국 정부 주도로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동학농민혁명 정신 실현은 헌법 전문에 명시돼 전 국민이 그 뜻을 이어받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이 대한민국의 역사 발전에 보탬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 촉구가 기폭제 동학농민혁명 명칭과 정신의 헌법 전문 명시 요구는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을 촉구하고 나선 정치권의 움직임에 더 거세게 타오르고 있다. 지난 5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 등 야권은 물론 당시 황우여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당시 비대위원장이었던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등 여권도 5·18정신 헌법 수록을 촉구하고 나섰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페이스북을 통해 “헌법 전문에 5·18정신을 수록할 것을 여야 각 정당이 공약한 것은 큰 진전”이라며 “헌법 개정의 기회가 오면 최우선으로 실천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정읍시는 정부와 국회가 5·18 정신은 물론 동학농민혁명의 명칭·정신 헌법 전문 명시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촉구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동학농민혁명 명칭·정신 헌법 전문 명시를 본격적으로 요구하고 나선 정읍시와 동학농민혁명 단체는 3·1운동의 뿌리이자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미친 동학농민혁명을 대한민국의 진정한 출발로 삼아야 한다고 밝혔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 믿었던 동학농민혁명정신과 동학농민군의 고귀한 희생은 우리 민족의 정신적 뿌리가 돼 근현대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됐다고 평가했다. 앞서 전북 정읍시와 전국 39개 동학농민혁명 단체는 지난해부터 동학농민혁명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을 한목소리로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9월 국회 앞에서 “정부와 국회는 동학농민혁명 명칭·정신 헌법 전문 명시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동학농민혁명 단체가 한마음으로 공동성명을 낭독한 것은 처음이었다. 전북도의회도 지난 2월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민중혁명이자 민주화 운동의 효시인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올바르게 계승·발전될 수 있도록 국회와 정부가 개헌을 통해 헌법 전문에 포함해야 한다”면서 건의문을 채택했다. ●이학수 시장 “애국애족 정신 전국 확산” 이학수 정읍시장은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하고 동학농민군의 애국애족 정신을 전국적으로 확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헌법 전문에 동학농민혁명의 명칭과 정신이 포함돼 자손만대에 전해져야 한다”면서 “정읍이 동학농민혁명 세계화와 선양사업을 추진하는 중심 도시 역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동학농민혁명은 2004년 특별법이 제정된 뒤 혁명 참여자 3700여명과 유족 1만 2000여명이 명예를 회복했고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는 황토현 전승일인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법정 기념일로 선정했다.
  • 독립 열망 서린 예배당… 100년 전 유관순 흔적이 오롯이[마음의 쉼자리]

    독립 열망 서린 예배당… 100년 전 유관순 흔적이 오롯이[마음의 쉼자리]

    1885년 건립… 韓 감리교회 어머니 독립협회 모태 ‘협성회’ 조직된 곳 손정도 등 민족운동 지도자 거쳐가오르간 뒤편서 태극기 비밀 제작도 어릴 때는 유관순(1902~1920) 열사를 ‘누나’라고 불렀다. ‘열사’라는 다소 무거운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무렵으로 기억된다. 유관순 ‘누나’가 생존했던 나이와 비슷해졌을 즈음이었던 듯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유관순’의 이미지는 사실 대부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 중이던 ‘열사’의 모습이다. 모진 고문으로 퉁퉁 붓고 수심으로 가득했던 얼굴 말이다. 그런데 2019년에 이화여대가 공개한 사진은 달랐다. 청초하고 갸름한 얼굴의 소녀가 거기 있었다. 충남 공주 이인면의 한 마을에서 만난 벽화도 그랬다. 공주 영명학당에 다니던 유관순 열사의 13~14세 당시 추정 모습을 인공지능(AI)으로 복원했다는 벽화에선 앳된 모습의 유관순 ‘누나’가 예쁜 한복을 입고 헤드셋을 쓰고 있었다. 돌아보면 누구나 화양연화와 같은 시절이 있지 않은가. 서울 중구 정동의 정동제일교회는 유관순 ‘누나’의 화양연화를 추억할 수 있는 장소다.정동교회가 이 땅의 교회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꽤 묵직하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 교회로, ‘한국 감리교회의 어머니’라 불린다. 정동교회는 미국인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1885년 한옥을 사들여 세운 게 시초다. 신자가 늘면서 규모가 큰 석조 예배당이 필요해졌고, 1897년 현재의 벧엘예배당이 세워졌다. 6·25전쟁을 겪으며 일부 훼손되기도 했지만 벧엘예배당은 대부분 19세기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후 예배당 신관, 기념관 등이 들어서면서 일종의 신앙공동체 클러스터를 이루게 됐다. 구한말의 정동은 미국, 러시아, 독일 등 서양 열강의 공관이 줄지어 있었던 곳이다. 굵직한 역사적 사건도 많이 벌어졌다. 그 복판에 정동교회가 있었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 정동교회 초대 담임목사였던 아펜젤러는 이 교회에서 황후의 추모 예배를 드렸다. 나라의 독립을 바라는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 망명길에 올랐던 서재필은 귀국해 정동교회 청년회를 중심으로 협성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는 독립협회의 모태가 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도 정동교회의 장로였고, 아펜젤러 사망 이후 이 교회를 이끈 노병선, 최병헌, 현순, 손정도, 이필주 목사 등도 개화기 개혁운동과 민족운동의 지도자들이었다.정동교회와 이웃한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 ‘누나’도 신자였다. 비록 나라는 일제가 빼앗았지만 소녀의 꿈까지 뺏을 수는 없었을 터. 시골에서 상경한 소녀는 정동의 돌담길을 걸어 학교와 교회를 오가며 꿈을 키웠을 것이다. 하지만 조국은 앳된 소녀에게 ‘열사’의 무거운 짐을 안겼다. 특히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 목사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유관순 ‘누나’가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 진급한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났다. 여고생에서 조국 독립을 열망하는 열사로 변모한 유관순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며 독립운동에 발을 내디뎠다. 벧엘예배당 내 파이프오르간 벽면 뒤에 송풍실이란 작은 공간이 있다. 유 열사와 친구들은 이 비좁은 공간에 숨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몰래 인쇄하고 기도를 올린 것으로 전해진다. 이듬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유 열사의 장례식도 이 교회에서 치러졌다. 정동교회는 서양식 혼례, 성찬식, 기독교 여성단체 등 ‘한국 최초’를 기록한 것들이 많다. 그 덕에 ‘붉은 벽돌로 쓴 역사서’란 상찬도 받는다. 빛바랜 붉은 벽돌, 야트막한 지붕, 약간의 장식으로 마무리한 창문···. 교회 건물 곳곳이 고풍스러우면서도 소박한 분위기여서 친근한 느낌을 준다. 안내판은 이런 건축 양식을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전원풍 고딕 양식’이라고 적고 있다. 정동교회에 갈 때는 덕수궁 쪽보다 배재학당 쪽에서 접근하길 권한다. 주변에 크기를 견줄 건물이 없던 시절에 세워진 정동교회의 모습을 상상하기 좋다.
  • 600만 돌파 ‘파묘’…이게 왜 좌파? ‘건국전쟁’ 감독 향한 질문

    600만 돌파 ‘파묘’…이게 왜 좌파? ‘건국전쟁’ 감독 향한 질문

    장재현 감독의 영화 ‘파묘’가 개봉 11일 만에 600만 관객을 모으며 천만 영화 고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4일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영화 ‘파묘’는 지난 3일 현재 누적 관객수 603만명을 기록했다. 3·1절 연휴 사흘 동안에만 233만명을 동원했다. ‘검은 사제들’(2015) ‘사바하’(2019) 등을 만든 장재현 감독은 ‘파묘’에서 전통적인 풍수지리와 무속신앙을 다루면서 그 안에 고난에 찬 민족사를 녹였다. 거액을 받고 수상한 묘를 이장해 화장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무당 화림(김고은)과 봉길(이도현)이 이 작업을 풍수사 상덕(최민식)과 장의사 영근(유해진)에게 함께하자고 제안하고, 네 사람이 이 묘를 파헤친 뒤 기이한 일에 직면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이승만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을 만든 김덕영 감독은 ‘파묘’의 흥행에 대해 “반일주의를 부추기는 ‘파묘’에 좌파들이 몰리고 있다”라며 “‘건국전쟁’에 위협을 느낀 자들이 ‘건국전쟁’을 덮어버리기 위해 ‘파묘’로 분풀이를 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김덕영 감독은 ‘건국전쟁’이 100만 관객을 돌파하자 “편 가르기식 민족주의를 떨쳐버리고, 무엇이 사실인지 찾아볼 수 있는 단계로 진입한 것이자 대한민국이 선진 사회로 나아가는 징표라고 생각한다”라며 진영 논리를 비판하는 듯했지만 ‘파묘’의 흥행에 또다시 진영 논리를 들고나오는 모순을 보였다.이를 두고 역사강사 황현필은 3일 ‘파묘’를 보고왔다며 김덕영 감독에게 “독립운동가를 존경하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황현필은 주인공들 이름에 독립운동가 이름을 차용한 것, 차량번호에 여러 독립 운동 관련 날짜가 들어간 것, 일제 쇠말뚝 등을 언급하며 “항일적인 영화인데 이게 왜 좌파영화인가”라고 지적했다. 그는 자신을 좌파가 아닌 진보주의자라고 소개하며 “저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싫어하기 때문에 좌파라는 단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면서도 “독립운동을 존경하는 게 좌파고 일제의 조선 침략과 일제강점기 식민지 수탈에 대해 분노하는 게 좌파라면 좌파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좌파의 반대인 우파는 우리 독립운동가를 존경하지 않는가? 김덕영 감독께 물어보고 싶다”고 말했다.‘파묘’ 숨겨진 항일코드 찾기 극 중 최민식, 유해진, 김고은, 이도현의 이름은 상덕, 영근, 화림, 봉길이다. 상덕은 임시정부 국무위원, 광복 이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에게서 따온 것으로보인다. 영근은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고영근, 화림은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한 이화림, 봉길은 윤봉길 의사의 이름을 사용했다. 무당 광심(김선영)은 광복군의 오광심, 무당 자혜(김지안)는 신채호의 부인이자 독립운동가 박자혜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외세에 당하기만 하고, 잔재가 곪은 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발톱의 티눈을 뽑아내듯 우리 과거의 아픈 상처와 두려움을 ‘파묘’해버리고 싶었다.”장재현 감독은 “많은 독립운동가가 계신데 잘 알려지지 않은 분들의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주인공들이 타는 차량의 번호판은 0301, 1945, 0815이다. 3.1운동과 광복절을 가리킨다. 영근의 사무실 이름은 ‘의열 장의사’이며 험한 것과 사투를 벌이는 절 ‘보국사’는 ‘나라를 지킨다’라는 뜻이다. 이 절을 만든 주지는 원봉 스님인데 의열단장인 김원봉을 연상케 한다. 쇠말뚝을 뽑으러 다닌 ‘철혈단’도 1920년대 상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 단체의 이름이다. 풍수사 김상덕(최민식)이 묫자리를 볼 때 100원짜리 동전을 던지는 것 또한 관객들의 예리한 눈을 피하지 못했다. 100원짜리 동전엔 이순신 장군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김상덕의 딸이 독일인과 결혼하는 장면은 사죄와 반성없는 일본에 비해 통철한 자기비판을 가졌던 독일과는 서로 화해하고 하나가 될수 있음을 보여주는 엔딩이었다는 평가다.
  • ‘한국의 그레고리 펙’ 하늘 극장의 별이 되다

    ‘한국의 그레고리 펙’ 하늘 극장의 별이 되다

    선 굵은 외모로 ‘한국의 그레고리 펙’으로 불리며 1960~70년대를 풍미한 영화배우 남궁원(본명 홍경일)이 5일 별세했다. 90세. 서울아산병원에 따르면 남궁원은 이날 오후 4시쯤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들은 수년 전부터 그가 폐암 투병을 하면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전했다. 1934년 경기 양평에서 태어난 그는 한양대 화학공학과를 다니다 영화계에 입문했다. 서구적인 외모에 키가 180㎝나 돼 대학 시절 유명 감독들이 그를 캐스팅하려 노력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연예인보다 교수나 외교관에 뜻을 두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중 어머니가 암 진단을 받으면서 치료비를 마련하고자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친구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는 아세아영화사를 찾아가 데뷔했다. 이렇게 찍은 첫 영화가 1958년 노필 감독의 ‘그 밤이 다시 오면’이다.다음 해 개봉한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한국영화 르네상스기를 맞아 본격적으로 영화를 찍었다. 1999년 마지막 작품인 ‘애’까지 출연한 영화가 무려 345편에 이른다. 주요 작품으로 ‘자매의 화원’(1959), ‘빨간 마후라’(1964) ‘내시’(1968), ‘화녀’(1971), ‘아이 러브 마마’(1975), ‘피막’(1980), ‘가슴 달린 남자’(1993) 등이 있다. 그는 1960년대 초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 전속 배우로 활약했다. ‘자매의 화원’(1959) 등을 시작으로 ‘내시’ 등이 큰 인기를 끌며 입지를 탄탄하게 다졌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외화 ‘007 시리즈’를 본뜬 ‘국제간첩’(1965), ‘극동의 무적자’(1970) 등 스파이 액션물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슈트가 잘 어울리는 세련된 이미지로 유명하지만 1970년대 김기영 감독과 작업한 ‘화녀’를 비롯해 ‘충녀’(1972),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 등에서는 나약한 남성의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연기를 체계적으로 배워 본 적이 없던 터라 1960년대 초 ‘닥터 지바고’, ‘로미오와 줄리엣’ 등 연극 무대에 올라 연기를 배우려 노력했다. 일동제약 ‘아로나민 골드’, 해태음료 ‘훼미리 쥬스’ 등 TV 광고 모델로도 유명하다. 그는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가정생활에 충실한 배우로도 알려졌다. “아내가 유방암 수술을 받을 때 10시간이 넘도록 수술실 앞에서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방송에서 밝힌 바 있다. 사업 마인드도 있어 햄버거집과 중식당 등을 운영했으며 특히 자녀 교육에도 헌신적이었다. 그는 “세 자녀의 미국 유학비를 벌고자 밤무대 행사부터 에로물 출연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부일영화상 남우조연상, 청룡영화상 인기남우상, 대종상 남우주연상 등 여러 상을 받았다. 2016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한국영화인총연합회장, 한국영화배우협회장, 헤럴드 명예회장 등을 지냈다. 유족으로는 아내 양춘자씨와 ‘7막 7장’ 저자이자 제18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지낸 홍정욱 올가니카 회장 등 1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8일, 장지는 경기 포천시 광릉추모공원.
  • 유정인 서울시의원 “송현공원, 이승만기념관 건립해야”

    유정인 서울시의원 “송현공원, 이승만기념관 건립해야”

    서울시의회 유정인 의원(국민의힘·송파5)은 지난 15일 열린 제321회 정례회 제5차 본회의에서 5분 자유발언을 통해 현재 조성계획 수립 중인 송현문화공원에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고 이에 더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검토해줄 것을 서울시에 요청했다. 송현문화공원 조성사업은 종로구 송현동 48-9번지 일대에 약 3만 7000㎡ 면적의 대지에 공원과 문화시설을 건립하는 사업으로 현재 정부와 서울시가 활용계획을 세우는 중이다. 현재는 열린송현녹지광장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날 5분 자유발언에서 유 의원은 “송현동 부지는 역사적으로나 경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라며 “송현공원은 서울 한복판에 위치함은 물론이고 규모로는 서울광장의 3배로 공원과 가칭 이건희 기증관만으로 운영되기에는 아쉬운 공간”이라고 계획에 보완이 필요함을 말했다. 유 의원은 “서울의 중심이자 역사적인 공간인 송현공원을 정치와 문화가 공존하는 서울시의 랜드마크로 조성해야 한다”라며 “이에 송현공원에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제안하는 바이며, 서울시도 이를 적극 정부에 건의해주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또한 유 의원은 송현부지가 이승만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 곳임을 언급하며 “송현공원은 과거 해방 후 미군 장교들과 외교관들이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서울에서 떠나려고 할 때, 이승만 대통령이 주거단지를 조성해 미국 측에 유상제공함으로써 한미동맹의 싹을 틔운 곳”이라고 말했다. 이어 유 의원은 “송현공원에 이승만 기념관이 생긴다면 제헌의회 의사당, 건국선포현장, 최초의 행정부 청사, 청와대가 새로운 랜드마크 중심으로 정렬되는 효과가 생길 것”이라며 “마치 조선왕조부터 시작하여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근대화 100년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라며 기념관 건립의 효과를 설명했다.이 의원은 현재 전 세계에 건국 대통령 기념관이 없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무이함을 언급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체제를 채택해 한국이 세계경제 8위의 경제대국이 되는데 기틀을 다졌음에도 그의 잘못만을 따져 변변찮은 기념관도 하나 없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라며 “최적의 장소와 시민들의 논의가 있는 지금이야말로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추진해야 할 적기”라고 말했다. 추가로 유 의원은 “또한 현재 박정희 기념관은 마포구 상암동 난지도 위에 덩그러니 존재하며, 낮은 접근성과 부실한 안내 때문에 하루 방문객은 200명에 그치고 있는데, 송현공원에 박정희 기념관도 건립하는 안을 검토해 줄 것을 서울시에 요청하는 바이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유 의원은 “현재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기리는 시설은 전국에 즐비한데,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의 근대화를 이끈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은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 거의 없다”라며 “대한민국의 시작과 근대화를 이끈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이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라며 5분 자유발언을 마쳤다.
  • [사설] 한 세기 이어진 독립유공자 논란 종지부 찍기를

    [사설] 한 세기 이어진 독립유공자 논란 종지부 찍기를

    정부가 독립유공자의 공적을 재검토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점이 분명하거나 공적 조서가 가짜로 드러나면 서훈 박탈 등을 하기로 했다. 현행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기준을 개정해 ‘가짜 유공자’를 가려냄으로써 국가 보훈에 대한 국민 신뢰를 높이겠다는 것이다. 정부 말대로 독립유공자를 둘러싼 논란을 이번에야말로 끝내길 기대한다. 공적 재검토 대상에는 손혜원 전 민주당 의원의 부친 손용우와 다른 사람의 공적을 가로챘다는 의혹이 제기된 김원웅 전 광복회장의 부모 김근수·전월순 등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손씨는 광복 후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한 이력으로 여섯 차례나 보훈심사에서 탈락했지만, 이런 활동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것이 아니면 서훈이 가능하도록 심사 기준을 바꾸면서 2018년 일곱 번째 신청 만에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 이와 달리 3·1운동 등 독립운동을 했던 죽산 조봉암, 독립협회 창설에 참여한 동농 김가진 등 독립유공의 공이 뚜렷함에도 친일 논란으로 공적 심사에서 보류된 경우에는 공과를 따져 서훈을 부여하는 방안도 추진한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분들을 나라에서 잊지 않고 보답하려는 보훈정신은 지켜야 한다. 마찬가지로 건국에 방해가 된 활동을 한 경우라면 공적에서 제외하는 게 합당한 일이다. 하지만 근 한 세기 전의 인물에 대해 그 공과를 검증하기란 쉬운 게 아니다. 이들이 활동한 광복 전후 시기는 대혼란기였다. 많은 독립투사들이 일제 억압에 맞서 만주벌판 등지에서 풍찬노숙하며 싸워 광복을 이뤘으나 해방 직후의 극심한 좌우 이념 대립으로 국토는 두 동강이 난 상황이다. 보훈정신을 살리되 서훈 박탈과 서훈 부여를 둘러산 혼란 없이 사회통합에도 기여하는 재검증이 되기를 바란다.
  • “송혜교 돈으로 건물 샀다”…네덜란드에 있는 ‘이 건물’

    “송혜교 돈으로 건물 샀다”…네덜란드에 있는 ‘이 건물’

    배우 송혜교가 네덜란드 헤이그에 마련된 이준 열사 기념관에 후원금을 쾌척했다는 미담이 뒤늦게 전해졌다. 28일 다수의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송혜교가 돈 보태줘 산 네덜란드 건물’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이 글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 기념관 사진과 함께 2019년 한 네티즌이 작성한 댓글이 포함됐다. 댓글에는 “2년 전에 (기념관에) 갔다 왔는데 그때는 1층이 없었다. 송혜교가 후원금을 많이 줘 1층도 인수했다더라. 확장 공사한다고 관장님이 싱글벙글하면서 1층 데리고 가서 소개해 주던 게 생각난다”는 내용이 담겼다. 글쓴이는 “교민 부부가 인수해서 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돈이 부족해서 1층은 인수 못 했었다. 송혜교가 후원금을 지원해서 이제는 건물 전체가 기념관”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송혜교는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와 함께 지난 12년간 해외에 남아있는 한국 역사 유적지에 한국어 안내서, 한글 간판, 부조 작품 등을 지금까지 33곳에 기증해 왔다. 이준 열사 기념관에는 2019년 3월 한글 간판을 기증하면서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 교수는 “송혜교는 한류스타로서 국가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주는, 정말 좋은 선례를 만들어 주고 있다”고 칭찬했다. 한편 이준 열사는 한말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개혁당, 대한보안회, 공진회,헌정연구회, 보광·오성학교를 세운 항일 애국지사다. 1907년 일제의 부당한 침략을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주권 회복을 호소하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위종 등과 합류했지만 일본 측의 방해로 참석 못하고 순국했다.
  • 보훈처 “이승만 기념관 건립 위한 사전 검토 작업 진행”

    보훈처 “이승만 기념관 건립 위한 사전 검토 작업 진행”

    국가보훈처가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에 나선다. 보훈처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위해 기념관 소재지 등 사전 검토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27일 밝혔다. 보훈처는 사전 검토 결과를 바탕으로 내년도 정부예산안에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관련 사업 예산을 반영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구체적인 건립 계획은 오는 6월 5일 국가보훈부 정식 출범에 맞춰 발표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기념관 사업은 지방자치단체로부 부지를 제공받으면 보훈처 등 중앙정부 예산으로 건물을 세우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으로 전해졌다. 보훈처에 따르면 이미 서울시와 함께 기념관 건립 부지 선정 등을 위한 사전 조사 작업에 착수했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취임 이후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보훈처 관계자는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자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공과를 객관적으로 국민들께 보여 주고 그 평가를 받게 하는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 처장은 전날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서울 종로구 이화장(이 전 대통령 사저)에서 열린 이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는 축사에서 “이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이제 바로 서야 한다”며 “자유 대한민국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공칠과삼’(攻七過三·공을 세운 게 7개이고 잘못한 게 3개)이 아니라 ‘공팔과이’(功八過二)로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은 1875년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났으며,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다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했다는 혐의로 투옥된 뒤 특별사면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에 추대됐지만 1925년 탄핵됐다. 1945년 광복 후 귀국했으며 1948년 제헌의회에서 제1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1960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4·19 혁명으로 물러났다. 하와이로 망명해 그곳에서 1965년 세상을 떠났다.
  •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 추진...보훈처 사전검토작업 착수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 추진...보훈처 사전검토작업 착수

    국가보훈처가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에 나선다. 보훈처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위해 기념관 소재지 등 사전 검토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27일 밝혔다. 보훈처는 사전 검토 결과를 바탕으로 내년도 정부예산안에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관련 사업 예산을 반영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구체적인 건립 계획은 오는 6월 5일 국가보훈부 정식 출범에 맞춰 발표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기념관 사업은 지방자치단체한테서 부지를 제공받으면 보훈처 등 중앙정부 예산으로 건물을 세우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으로 전해졌다. 보훈처에 따르면 이미 서울시와 함께 기념관 건립 부지 선정 등을 위한 사전 조사 작업에 착수했다. 박민식 보훈처장은 취임 이후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보훈처 관계자는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자유대한민국이라는 국가정체성을 바로 세우는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공과를 객관적으로 국민들께 보여주고 그 평가를 받게하는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 처장은 전날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서울 종로구 이화장(이 전 대통령 사저)에서 열린 이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 직접 참석했다. 그는 축사에서 “이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이제 바로 서야 한다”며 “자유 대한민국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공칠과삼’(攻七過三·공을 세운 게 7개이고 잘못한 게 3개)이 아니라 ‘공팔과이’(功八過二)로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은 1875년 황해도 평산군에서 태어났으며,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다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혐의로 투옥된 뒤 특별사면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에 추대됐지만 1925년 탄핵됐다. 1945년 광복 후 귀국했으며 1948년 제헌의회에서 제1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1960년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됐지만 4·19 혁명으로 물러났다. 하와이로 망명해 그 곳에서 1965년 세상을 떠났다.
  • 우당 이회영 순국 90주기 추모식 열려

    우당 이회영 순국 90주기 추모식 열려

    우당 이회영 선생 순국 90주기 추모식이 17일 오후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렸다.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가 ‘아흔 번째 난잎’을 주제로 여는 행사에는 이회영 선생 후손인 이종걸 기념사업회장과 이종찬 우당교육문화재단 이사장, 박민식 국가보훈처장, 독립운동 관련 단체와 유족 등 200여명이 참석했다. 이회영 선생은 구한말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넷째 아들로 186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제에 국권이 침탈당하자 1910년 12월 6형제(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와 가족들 50여명이 전재산을 처분하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만주로 망명했다. 6형제 가운데 가장 많은 재산을 내놨던 이석영 선생은 1934년 중국 상하이에서 굶어 죽었을 정도로 6형제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6형제 가운데 유일하게 해방 뒤 고국으로 돌아온 이시영 선생은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이회영 선생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1898년 민중계몽 운동, 1905년 을사오적 규탄, 1906년 안창호·전덕기·양기탁·이동녕·신채호·노백린 등과 함께 설립한 비밀결사 신민회 활동 등에 참여했다.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 인재 양성을 위한 1907년 서전서숙 및 1908년 상동청년학원 개설, 청산리전투의 주역들을 배출한 1912년 신흥무관학교 설립, 1931년 항일구국연맹 조직 등도 전해진다. 이회영 선생은 1932년 만주에 연락 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 공작망을 조직할 목적으로 상하이에서 다롄으로 배를 타고 가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문당한 끝에 11월 17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박 처장은 “조국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치셨던 선생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애국혼을 엄숙한 마음으로 되새기며 우리 국민이 선생의 숭고한 뜻과 정신을 언제나 기억하고 계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19세기 한국/우석대 명예교수

    [박상익의 사진으로 세상읽기] 19세기 한국/우석대 명예교수

    영국 정치인 조지 커즌은 1893년 조선을 방문한 후 조선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에 있다고 확신했다. 영국인들은 조선 정부의 실정(失政)에 경악했다. 조선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잘못 통치되고 있는 나라’로 보였고 ‘웃음거리 왕국’이었다. 영국 외교관이나 여행자들 모두 조선 정부와 지배층의 부패와 착취를 언급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관리는 습관적으로 수탈과 횡령을 자행했고, 그 부패의 피라미드 꼭대기에는 국왕이 있다고 봤다. 조선 국왕과 지배층에서 공공정신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사사로운 이해관계에만 골몰했다. 영국인들은 개인의 이익과 가문의 영광을 높이는 것이 조선의 지배 엘리트를 움직이는 단 하나의 원칙이라고 평가했다. 시민이 주축이 되는 근대 국가가 성립하지 못한 전근대사회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었다. 조선 정부의 무능과 지배층의 파벌 싸움에 실망한 영국인들은 조선인이 스스로 개혁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판단하고 조선을 일본 손에 맡겨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주일 영국 공사 어니스트 새토의 눈에 고종은 근대적 통치자로서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한 인물로 비쳤다. 그는 ‘조선을 둘러싼 국제적 갈등은 조선 정부의 허약함과 부패·분열에 의해 조장됐다’고 판단했다. 그는 튀르키예가 ‘유럽의 환자’라면 한국은 ‘동아시아의 환자’라고 말했다. 주한 영국 공사로 서울에서 근무(1896~1905)한 존 조던은 처음 부임했을 때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에 좋은 인상을 받아 ‘서울이 프랑스혁명에서 파리가 한 역할보다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곧 실망한다. 조던은 고종을 혹독하게 평가했다. ‘황제는 정말로 희망이 없다. 조선 궁정에서 일어나는 일과 비교하면 로마가 불에 탈 때 네로가 현악기를 연주한 것은 차라리 위엄 있는 행동이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부패하고 억압적인 체제의 희생양은 결국 국민이었다. 19세기 말의 저명한 여성 여행가인 이저벨라 버드 비숍은 정직한 정부에 의해 산업이 진흥되고 생계를 보호받을 수만 있다면 조선 사람도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고 평가했다. 국민의 우수한 자질이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는 것이다.
  • [씨줄날줄] 입헌군주제/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입헌군주제/서동철 논설위원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은 글자 그대로 서양 각국을 돌아보고 지은 일종의 기행문이다. 1889년 집필이 마무리된 ‘서유견문’은 서양 각국의 정치체제에도 내용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그는 다양한 정치체제를 다루면서 ‘임금과 국민이 함께 다스리는 정치체제’(君民이 共治하는 政體)를 가장 높게 평가했다. 유길준은 “이 정치체제는 그 제도가 공평하여 나라의 정령과 법률을 국민의 공론에 따라 시행하니, 사람마다 의논에 참여할 수 있기에 도리어 귀찮아할 정도”라면서 “가령 만 명이나 십만 명 가운데 한 사람씩 재주와 인덕이 가장 높은 이를 천거해 임금의 정치를 돕게 하며, 국민의 권리를 지키게 한다”고 핵심 가치를 설명했다. 이런 입헌군주제 가운데는 영국의 체제가 가장 바람직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 백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은 꺼렸다. ‘한 나라의 정치체제는 언제나 구성원의 학식 정도에 따라 제도의 등급이 이뤄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홍범14조’(洪範十四條)에도 입헌군주제적 요소가 있었다. 1895년 ‘내각관제’(內閣官制)는 ‘내각은 국무대신으로 구성하고 국무대신은 대군주폐하를 보필해 나라를 다스리는 책임을 갖는다’고 했다. 국왕이 내각회의 안건 재가를 불허하는 경우 이유를 명시하도록 국왕의 권한을 부분적으로 제약하는 내용이 있다. 1896년 창간한 ‘독립신문’은 ‘임금같이 높은 권리를 다만 나 혼자 차지할 것이 아니라 누구든 백성이 믿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대통령을 만드는’ 미국식 공화정을 가장 우위에 두었다. 그러면서도 ‘무식한 세계에는 군주국이 도리어 민주국보다 견고함은 고금 역사와 구미 각국의 정치 형태를 보아도 알 것’이라고 했다. ‘독립신문’을 펴낸 독립협회는 이렇듯 입헌군주제를 선호하며 의회 설립 운동을 주도했다. 영국의 찰스 3세 국왕이 엊그제 즉위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서거가 ‘화려했던 시대의 종말’로 받아들여질 만큼 상징성은 크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영국 국왕이지만 며칠 전 영국 총리 교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떠들썩하다. 역사를 돌아보니 일본의 침략이 없었다면 우리도 영국식 입헌군주국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어서 더욱 감회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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