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논술형 시험, 30년 수능 흔드나…①채점 ②수용성 ③사교육 등 쟁점
교육당국이 ‘오지선다’ 객관식 문항으로 이뤄진 현재의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에 서·논술형 문항을 도입하는 대입 제도 개편안을 추진 중이다. 30여년 동안 이어져 온 수능 역사상 가장 큰 변화가 찾아올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교육계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왜 지금 서·논술형 도입이 대두되는지, 교육 현장의 우려 및 핵심 쟁점은 뭔지 짚어봤다.
“AI가 객관식 더 잘 푼다”…30년 수능 바꿀 때 됐나킬러문항 등 오지선다 수능 출제 방식도 한계 봉착10일 교육계에 따르면, 교육당국이 수능 개편을 추진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수능이 30여년 동안 치러지면서 문제 출제가 구조적 한계에 다다랐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기이하게 변형시킨 초고난도 문항, 소위 ‘킬러문항’을 출제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생성형 인공지능(AI)의 고도화로 학생들에게 필요한 역량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5일 교육부와 국가교육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초보 컴퓨터도 할 수 있는 객관식 문제 풀이 수능이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고 표현했다. 정보 수집 및 문제 풀이 능력은 AI가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이제 사고력·창의력을 키우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초대 교육과정평가원장)는 “원래 수능의 취지가 통합적 사고력과 문제 해결력을 측정하기 위함”이라면서 “그런 의미에서 서·논술형 문항 도입은 원래의 수능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이제 지식 전수는 AI가 하기 때문에 창의성, 협동성, 비판적 사고력이 가장 중요한 교육 요소”라고 말했다. 서·논술형 문항이 변별력, 객관성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지적에는 “1점 차이로 성적을 가르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대통령 선거 여론조사처럼 ‘경향성’만 보면 된다”고 강조했다.
55만명 답안 어떻게 채점하나…3주 안에 평가 마칠지 미지수AI 평가 시스템 도입한다지만…최소 수천명 채점인력 필요교육계 관계자들은 AI 시대 인재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덴 공감하지만 서·논술형 도입의 부작용을 고려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채점 문제’는 서논술형 문항 도입의 현실적인 난관이다. 2026학년도 수능 기준 응시생수는 55만 4174명이었다. 통상적으로 매년 수능을 치른 뒤 3주 뒤쯤 수험생에게 성적 통지가 이뤄지고, 대학별 입학 전형도 이와 맞물려 진행된다. 하지만 서·논술형 시험이 치러질 경우 기존 속도에 맞춰서 채점을 끝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채점 기준을 어떻게 삼아야 할지, 채점자를 어떻게 선별할지도 문제다. 학생의 주장과 근거, 논리 전개 등을 채점자별로 다르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능 채점 위원은 최소 수천명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많은 인력을 검증·선별하고, 채점자별 편차를 최소화하는 일도 중요 과제가 될 전망이다.
교육부와 국교위는 ‘AI 평가 지원 시스템’을 도입해 서·논술형 평가를 체계화한다는 구상이다. 전국 중학교, 고등학교 내신 평가에 시스템을 먼저 도입해 수많은 ‘채점 데이터’를 쌓고, 이를 기반으로 수능에서 활용한다는 방침이다. 현재도 서울시교육청 ‘채움AI’, 경기도교육청 ‘하이러닝’ 등 일부 시도교육청에선 AI 평가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하지만 결국 최종 판단은 사람에게 달려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관계자는 “현재도 답안지를 기계로 채점한 뒤 사람이 다시 답안을 일일이 검토하는 작업을 거친다”고 설명했다. 서·논술형 문항의 경우 AI 평가 시스템을 사용하더라도 검토에 현재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통일된 판단 기준을 세우기도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1점에 당락 갈리는 대입…학부모 수용성·법적 분쟁도글쓰기 사교육 확대 우려…“출제방식·예시 공개해야”수험생 및 학부모의 수용성도 기존보다 낮아질 수밖에 없다. 장승혁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대변인은 “평가 점수에 따라 대입 당락이 달라지는데 그걸 수용할 학부모가 극히 드물 수 있다”면서 “수능에 대한 행정심판, 행정소송 등 법적 대응이 매우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대통령은 업무보고에서 대학별 수시 일부 전형에 면접이 포함된 점을 언급하며 “더 주관적인 면접도 수용 가능하다면 서·논술형을 수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학별 고사와 국가 단위 시험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긴 어렵다는 반론이 제기된다. 대학은 각각 희망하는 인재상이 다르고 고유의 ‘주관적’ 선발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전형 평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까다롭지만, ‘객관적’ 평가를 전제로 하는 수능은 평가에 대한 이의신청이 빗발칠 수 있다는 의미다. 일각에선 수능에서 서·논술형 시험을 보더라도 그 답안은 대학별로 채점하게 해야 한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또한 글쓰기 사교육 시장이 급격히 확대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학교 현장에서 서·논술형 평가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대입 제도만 바뀌면 그 수요가 고스란히 사교육으로 향한다는 것이다. 서울의 한 초등학생 학부모는 “요즘 일반 과목도 공교육으로 해결하지 못하는데 서·논술형 문항까지 도입되면 고비용 사교육이 증가할 수 있어서 더 혼란스러워질 것 같다”고 꼬집었다.
수능 시험의 급격한 변화가 수험생들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2022년 교육과정 개정 이후에도 문·이과 통합 수능이 시행되면서 ‘사탐런’ 등의 부작용이 발생한 바 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서·논술형 수능을 발표와 동시에 문제 출제 패턴이 뭔지 보여주고 수험생 입장에서 향후 부담이 될지를 판단하게 해야 한다”면서 “그렇지 않으면 여러 선행 학습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유럽은 이미 서논술형…하지만 한국과 다른 ‘대입 문법’日도 공통시험 서술형 추진 철회…채점 오류·편차가 발목
서·논술형 수능 도입 논의가 이번에 처음으로 제기된 건 아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8년 4월 교육부가 2022학년도 대입개편을 국가교육회의에 넘기면서 중장기 검토 과제로 논·서술형 수능 도입을 제시했다. 이후 2022년 9월 출범한 1기 국교위에서 서·논술형 도입 논의가 보다 구체화됐다. 2024년 국교위 산하 중장기 국가교육발전 전문위원회에선 수능체제를 둘로 나누는 방안도 제시됐다. 이어 2024년 말 국교위 국민참여위원회가 국가교육발전계획을 놓고 토론하면서 이를 공식 의제로 올렸다.
해외에선 프랑스·영국·독일·핀란드 등 유럽 선진국 국가를 중심으로 서·논술형 시험이 이미 핵심 대입 제도로 자리잡은 상황이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는 철학 등에서 장문의 논술형 시험을 치르고, 영국의 A레벨도 인문·사회 과목을 중심으로 에세이와 서술형 문항의 비중이 높다. 독일의 아비투어 역시 필기시험에 논술·서술형 문항을 활용한다.
하지만 이를 한국 수능에 그대로 대입하기엔 무리가 있다. 유럽 국가에선 대부분 해당 시험이 고등학교 졸업 시험인 경우가 많고, 약간의 성적차가 대입 당락을 좌우하지 않는다. 또한 우리나라와 달리 대부분의 대학이 국·공립으로 설립돼 평준화돼있고 엘리트 트랙이 별도로 있다. 일본에서도 2017년 서·논술형 대입 도입을 추진했지만 채점 오류, 채점자 편차 등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무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