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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원짜리 ‘꿀꿀이죽’의 한(恨), 세계 홀린 ‘불닭볶음면’ 기틀로[창업주의 비밀노트]

    5원짜리 ‘꿀꿀이죽’의 한(恨), 세계 홀린 ‘불닭볶음면’ 기틀로[창업주의 비밀노트]

    “국민의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기업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배고픈 국민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기업의 가장 큰 도리입니다.” 1960년대 초 어느 날, 서울 남대문시장 한복판. 미군 부대에서 버린 잔반을 끓여낸 ‘꿀꿀이죽’ 한 그릇을 받기 위해 시민들이 뙤약볕 아래 길게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 행렬 끝에서 발길을 멈춘 한 남성이 있었습니다. 당시 국내 유수의 보험사인 제일생명보험의 사장이었던 고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이었습니다. 금융계의 거물, ‘안락한 의자’를 버리고 가시밭길로전 회장은 라면 사업에 뛰어들기 전 이미 금융업계에서 독보적인 자취를 남겼습니다. 일제강점기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금융 실무를 익힌 그는 해방 후 파산 위기에 처했던 제일생명을 인수해 단기간에 정상화하며 경영 능력을 입증했습니다. 당시 보험업은 신용이 생명이었고, 전 회장은 이 시기부터 ‘정직과 신용’이라는 철학을 경영의 최우선 가치로 삼았습니다. 보험업계에서 안락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그는 시장 바닥에서 꿀꿀이죽을 먹는 동포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배불리 먹지 못하면 신용도, 보험도 사치다”라는 생각에 그는 안정적인 보험사 사장직을 내려놓고 식량 보국의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금융을 통해 경제의 혈맥을 짚던 통찰력은 이제 국민의 생존권인 ‘먹거리’ 문제로 향하게 됩니다. 실권자 설득해 얻어낸 ‘운명의 5만 달러’ 전 회장은 일본 방문 당시 접했던 라면이 한국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최적의 대안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조리법이 간편하고 열량이 높아 쌀을 대체할 ‘제2의 주식’으로 손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라면 제조 시설을 들여오기 위해서는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액수인 외화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당시 실권자였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찾아갔습니다. 김 부장이 국가 예산 부족을 이유로 난색을 보이자, 전 회장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국민이 쓰레기 죽을 먹고 있는데 정치인들이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으냐”며 식량난 해결의 시급함을 절절하게 피력했습니다. 그의 진심 어린 호소와 논리에 움직인 김 부장은 결국 농림부에 할당된 외화 10만 달러 중 절반인 5만 달러를 전 회장에게 배정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라면 산업의 시초가 된 ‘운명의 자금’이 되었습니다. 묘조식품 오쿠이 사장과 ‘백색 봉투’의 기적 자금을 확보한 전 회장은 일본의 묘조(明星)식품을 찾아가 오쿠이 기요즈미 사장을 만났습니다. 당시 라면 제조 기술은 일본 기업의 핵심 기밀이었기에 오쿠이 사장은 처음엔 기술 전수를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전 회장은 포기하지 않고 매일같이 그를 찾아가 한국의 비참한 식량 사정을 설명하며 끈질기게 매달렸습니다. 결국 오쿠이 사장은 전 회장의 호소에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는 “한국의 배고픈 국민을 돕겠다는 당신의 결심에 동참하겠다”며 당시 최신식 라면 제조 시설 2대를 파격적인 가격인 2만 6000달러에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기계 가격만 간신히 보전하는 수준의 특혜였습니다. 또다른 기적은 전 회장이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밤 일어났습니다. 오쿠이 사장은 호텔로 그를 찾아와 하얀 봉투 하나를 건넸습니다. 그 안에는 절대 공개하지 않기로 했던 라면 맛의 핵심, ‘스프 배합표’가 담겨 있었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는 무상 전수였죠. 이 기술을 바탕으로 1963년 9월 15일, 대한민국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이 세상에 첫선을 보였습니다. 대관령 황무지에 일군 600만평의 ‘단백질 보국’ 라면 출시 이후 전 회장의 집념은 다시 한번 불가능해 보이는 영역으로 향했습니다. 바로 축산업이었습니다. 1970년대 초, 그는 “라면에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쇠고기가 필요하다”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단순히 스프의 원료를 구하는 차원을 넘어, 국민에게 고기 한 점이라도 더 먹여 영양 상태를 개선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대관령의 거친 황무지 개간에 착수했습니다. 1972년부터 시작된 이 대규모 프로젝트를 통해 그는 600만평에 달하는 동양 최대 규모의 ‘삼양 목장’을 일궜습니다. 전 회장은 노구에도 직접 짚신을 신고 산등성이를 누비며 초지 조성 과정을 진두지휘했습니다. 주변에서는 산간 오지에 목장을 만드는 것은 미친 짓이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전 회장은 묵묵히 소를 키우고 우유를 생산했습니다. 라면과 축산, 이 두 축은 국민의 배고픔과 영양 결핍을 동시에 해결하려 했던 그의 ‘식량 보국’ 철학이 완성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시련과 결백: ‘우지 파동’과 정직의 가치승승장구하던 삼양식품은 1989년 이른바 ‘우지 파동’이라는 기업 존립의 위기를 맞습니다. 공업용 유지를 사용하여 라면을 튀겼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삼양라면은 순식간에 시장에서 외면받고 공장은 가동을 멈췄습니다. 기업가로서 가장 치명적인 ‘신뢰’의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전 회장은 “식품은 정직해야 한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타협 대신 진실을 밝히는 길을 택했습니다. 7년 9개월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어진 법정 공방 끝에, 대법원은 결국 삼양식품의 무죄를 판결하며 전 회장의 결백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평생을 청렴하게 살았습니다. 퇴임 시에도 주식 1주나 퇴직금 1원조차 챙기지 않은 채 빈손으로 회사를 떠났습니다. “기업의 이익은 사회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그의 평소 지론을 몸소 실천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청교도적 기업가’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경영인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꿀꿀이죽의 한(恨)을 넘어, 글로벌 ‘불닭’ 신화로 60여년 전, 남대문시장의 꿀꿀이죽 줄 뒤에서 희망을 보았던 전 회장의 집념은 이제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강력한 ‘K-푸드’의 상징으로 승화되었습니다. 특히 그의 며느리인 김정수 부회장이 주도한 ‘불닭볶음면’ 시리즈는 현재 전 세계 90여개국에 수출되며 삼양식품을 명실상부한 글로벌 메가 브랜드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삼양식품은 현재 전체 매출의 70% 이상을 해외에서 벌어들이며 역대 최대 실적을 경신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식품 수출을 넘어 전 세계적인 매운맛 챌린지 열풍을 일으키며 한국 문화의 위상을 높이고 있습니다. 가난했던 시절, 국민의 배를 채워주던 10원짜리 삼양라면의 진심이 불닭볶음면의 뜨거운 맛으로 이어진 셈입니다.
  • 라멘? 아니죠, 맞아요! 라면…지구촌 24시간 K누들 후루룩 짭짭[세계 속 K푸드 이끄는 라면]

    라멘? 아니죠, 맞아요! 라면…지구촌 24시간 K누들 후루룩 짭짭[세계 속 K푸드 이끄는 라면]

    우리나라 대표 간편식 라면이 올해 탄생 60주년을 맞이했다. 5분이면 끓여 내 손쉽게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음식이지만 라면에 담긴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국내 최초 라면은 전후 지독한 식량난을 겪던 1963년 9월 출시됐다. 당시 서울 남대문시장에선 미군이 버린 음식을 끓인 ‘꿀꿀이죽’을 사 먹기 위해 매일같이 배고픈 노동자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삼양식품 창업주 고 전중윤 명예회장이 이 모습을 보고 해결 방안으로 일본 유학 시절 접했던 라멘을 떠올렸다. 일본 묘조식품으로부터 기계와 기술을 도입해 국내 첫 라면이 탄생했다. 당시 중량은 100g, 가격은 10원이었다. 라면은 쌀 중심이었던 국민 식습관을 바꿔 놓으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국내 인기에 힘입어 1969년에는 최초의 라면 수출이 이뤄졌다. 삼양식품이 베트남에 150만 달러 규모의 라면을 판매한 것이다. 이어 1984년 팔도 비빔면, 1986년 농심 신라면, 1988년 오뚜기 진라면 등 장수 제품들이 차례로 출시되면서 국내 라면 시장이 한층 넓어졌다. 현재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취급하는 라면 상품은 250여개에 달한다.우리나라 국민의 허기를 달래 주던 라면은 이제 어엿한 ‘K푸드’ 대표 상품이 됐다.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 게임 등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은 한류 콘텐츠에 라면이 등장하면서 수출액은 2014년 이후 매년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라면 등 즉석 면류 수출액은 1년 동안 12% 늘어난 8억 6200만 달러(약 1조 1542억원)로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수출량으로 놓고 보면 26만t, 120g짜리 봉지면 약 21억개가 해외로 나간 셈이다. 수출 국가도 총 143개국으로 사상 최다다. 주요 수출국인 중국, 미국, 일본뿐 아니라 중동, 아프리카 지역으로의 수출도 활발하다. ‘라멘’ 종주국인 일본에서는 최근 한국 라면의 디자인을 베낀 표절 상품들이 등장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한국 라면의 위상이 올라간 셈이다.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인의 입맛을 돋우고 있는 라면들을 소개한다. 농심 신라면①은 올해로 33년째 국내 라면시장 판매 1위를 지키고 있다. ‘국민 라면’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얼큰한 소고기장국을 모티브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매운맛을 구현한 것이 가장 큰 인기 비결로 꼽힌다. 농심 연구진은 매운 국물맛을 만들기 위해 전국에서 재배되는 모든 품종의 고추를 사들여 대대적인 실험을 거쳤다. 신라면은 세계 100여 개국에서 판매되며 글로벌 ‘넘버원’ 라면 브랜드를 꿈꾸고 있다. 유럽의 지붕인 스위스 융프라우 정상,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 지구 최남단 칠레 푼타아레나스까지 세계 방방곡곡에서 신라면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미국 시장 성장세가 뚜렷하다. 농심은 월마트, 코스트코, 크로거 등 현지 주요 유통업체에 신라면을 입점시켜 판매를 늘리고 있다. 2018년부터는 미국 주류 유통채널 매출과 아시안 마켓 매출 비중이 6대4를 기록하는 등 현지인들의 수요도 높다. 농심은 지난해 4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제2공장 가동을 시작하면서 현지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미국법인의 신라면 봉지 상품 매출액은 전년 대비 32% 증가했다.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올해 미국 제3공장 설립 검토에도 착수했다.오뚜기는 진라면②의 인기를 바탕으로 2012년부터 라면 업계 2위 자리에 올라섰다. 특히 대표상품 진라면은 올해 35주년을 맞아 케이팝 스타 방탄소년단(BTS) 멤버 ‘진’을 새 광고 모델로 선정하고, BTS 상징색인 보라색을 활용한 ‘퍼플 에디션’ 제품을 내놨다. 진라면은 1988년 ‘순한맛’과 ‘매운맛’ 두 가지로 출시됐는데, 이는 1969년에 설립된 오뚜기가 라면 시장에 뛰어들 당시 이미 종합식품기업으로 제품 개발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오뚜기는 이후에도 세분화된 소비자 취향을 반영한 라면을 선보였다. 특히 ‘진’ 브랜드 라면 시리즈를 바탕으로 국내 시장 점유율 20%를 넘기고 있다. 연구진이 전국 유명 짬뽕 전문점 88곳과 일본 나가사키까지 찾아다니며 개발한 ‘진짬뽕’은 프리미엄 라면의 대명사로 꼽힌다. 2020년 출시돼 여름 별미 비빔면 시장의 신흥강자로 부상한 ‘진비빔면’은 지난 3월까지 누적 판매량 1억개를 넘겼다. 오뚜기는 베트남과 미국에서 라면이 인기를 끌면서 지난해 해외 매출 3264억원을 기록했다. 처음으로 해외 매출 비중이 10%를 돌파하는 등 수출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다.팔도비빔면③은 1984년 출시 당시 ‘라면은 뜨거운 국물 요리’라는 고정관념을 깬 제품이다. 비빔국수 조리법을 그대로 적용해 차갑게 비벼 먹는 라면 시장을 개척해 39년 동안 약 17억개가 판매됐다. 팔도비빔면의 인기 이유 중 하나는 고품질 원재료를 그대로 갈아 만든 액상수프 기술력에 있다. 당시 한국야쿠르트가 보유한 발효와 미생물공학 기술을 활용해 액상수프를 만들 수 있었다. 또 변화하는 소비자 입맛에 맞춰 매년 맛 개선을 실시하고 있다. 2017년부터 감칠맛과 매운맛을 높이기 위해 순창고추장을 적용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고소한 맛을 더하기 위해 통참깨 참기름을 사용하고 있다. 소비자 의견을 반영한 제품들도 내놓으면서 계절과 연령을 뛰어넘는 국민 비빔라면으로 도약했다. 겨울철 판매량을 높이기 위해 어묵 국물맛 수프를 넣은 ‘팔도비빔면 윈터에디션’, 중량을 늘린 ‘팔도비빔면1.2’, 온라인 트렌드에 따라 제품 이름을 재미있게 바꾼 ‘괄도네넴띤’ 등을 잇따라 출시했다.삼양라면은 국내 최초이자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라면이다. 삼양식품은 1972년 삼양라면④ 매출액 141억원을 바탕으로 국내 재계 순위 23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당시 소비자 가격 22원으로 계산하면 연간 약 7억개가 팔린 셈이다.삼양식품은 2012년 ‘불닭’⑤브랜드 출시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당시 김정수 부회장이 젊은이들이 매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강렬한 매운맛 라면’이란 아이디어를 냈다. 1년간 매운 소스 2t, 닭 1200마리를 투입한 끝에 ‘불닭볶음면’이 세상에 나왔다. 중독성 강한 매운맛 덕분에 출시 초기 국내 매출 월 7억원에서 1년 만에 월 30억원대로 껑충 뛰었다. 매운맛을 완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조합이 입소문을 타면서 치즈, 커리, 까르보 불닭 등 제품 라인업도 확장하고 있다. 특히 유튜브를 통해 외국인들 사이에서 불닭볶음면 먹기에 도전하는 영상이 유행하면서 수출이 급증했다. 불닭볶음면의 해외 매출은 2015년 300억원에서 지난해 6050억원으로 7년 만에 20배 증가했다. 한국 라면 수출의 절반인 셈이다. 이에 힘입어 삼양식품은 지난해 연매출 9090억원을 기록하는 등 매년 창립 이래 사상 최대의 실적을 경신하고 있다. 풀무원은 맛있는 음식으로 건강을 관리하는 ‘헬시 플레저’ 유행에 맞춰 메밀을 활용한 건면 신제품을 연달아 출시하고 상온 가정간편식(HMR) 라인업을 확대 중이다. 풀무원식품은 지난 9일 쫄깃한 식감의 메밀면에 들기름을 더해 고소한 풍미를 살린 ‘들기름 메밀 막국수’를 출시했다. 새로운 제면 공정을 적용해 표면이 거칠고 웨이브가 적은 형태의 면으로 메밀 전문 식당과 같은 식감을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풀무원은 메밀 비빔면, 메밀 소바 등에 이은 신제품 출시로 ‘자연건면’ 브랜드 내 메밀면 라인업을 완성했다. 자연건면은 기름에 튀기지 않고 바람에 천천히 말려 면발의 미세한 기공에 소스가 잘 배어들고 쫄깃한 탄력의 식감을 갖고 있다. 고물가 시대를 맞이해 가격 경쟁력이 높은 대형마트나 편의점 등 유통사 자체 브랜드(PB) 라면도 인기가 높다. 특히 요즘에는 유명 맛집 등과의 협업을 통해 맛과 화제성까지 잡은 상품들이 나와 기존 라면 회사들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다.롯데마트는 PB 브랜드 ‘요리하다’⑥의 경쟁력을 높이면서 대표 신상품 중 하나로 ‘요리하다X오근내 닭갈비볶음면’을 내놨다. 서울 용산의 맛집인 오근내 닭갈비에서 직접 양념 레시피를 전달받아 이를 바탕으로 라면 수프를 만들었다. 지난해 11월 출시 이후 1개월 만에 3만개 이상 판매되며 볶음라면 상품군에서 판매량 5위권에 진입했다.편의점 CU도 요리 연구가 백종원씨를 비롯해 지역별 특산물이나 맛집을 활용한 PB 라면 ‘헤이루’(HEYROO)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특히 올해는 ‘백종원 고기 짬뽕’ ⑦라면이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 1월 출시 후 현재까지 약 300만개의 판매고를 올렸다. 하루에 3만개 이상 판매된 셈이다. 현재 CU 전체 컵라면 중 육개장, 불닭볶음면에 이어 판매량 3위를 차지하고 있다. 탄탄한 마니아층을 보유한 기존 라면 회사 제품보다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는 것은 라면 시장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란 설명이다. GS25는 편의점 최초 PB 라면 ‘틈새라면’을 2006년 출시한 이후 현재까지 10여종의 PB 라면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김치의 씹는 맛이 살아 있는 찌개 형태의 ‘오모리김치찌개’ 라면은 2014년 출시 이후 GS25에서 컵라면 매출 순위 1~2위를 줄곧 유지하고 있다. 이마트24도 가성비와 맛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아임e 얼큰e라면’, ‘아임e 진한e짜장’ 등의 PB 라면을 판매 중이다. 특히 얼큰e라면은 출시 이후 5년 연속 봉지라면·컵라면 각 상품군에서 판매량 5위권 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현재까지 누적 판매량은 2300만개에 달한다.
  • [어린이 책]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때 그 시절

    [어린이 책]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때 그 시절

    “당번들이 바케쓰에 뭘 들고 들어온다. 모두가 신기한 듯 둘러서서 말들이 많다. 나도 궁금해 가보니 샛노란 색깔의 뭔 죽이다. 밥 굶는 거지 같은 애들에게 준다는 둥. 꿀꿀이죽이라는 둥.”(40쪽) 농업에 종사해 온 1954년생 이종옥씨가 어린 시절 쓴 일기를 복원한 에세이 ‘몽당연필은 아직 심심해’에는 반세기 전 한국의 가난한 풍경이 생생하다. 저자는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963년부터 군에 입대하는 1975년까지 쓴 일기 가운데 60편을 골라 수록했다. 강냉이죽을 배급받고 돼지죽이라고 놀리는 급우들 때문에 자존심 상해서 운동장으로 뛰쳐나가 물로 배를 채운 이야기, 기성회비를 가져가야 하는 아이와 돈이 없어 주지 못하는 부모의 실랑이 등 산골의 가난한 아이가 겪었던 일상이 담겼다. 가을 소풍에서 “이쁘게 싸온 김밥이며 도시락에 너무나 기가 죽고, 나의 초라한 꽁보리밥에 짱아찌 도시락이 부끄러워 바위 뒤에 몰래 숨어서 퍼먹어야 했다”(21쪽)고 쓴 대목에선 가난의 풍경이 두드러진다.저자는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대필을 의심할 정도로 글솜씨가 뛰어나 교육청 글짓기 대회에 나가게 됐지만, 난생처음 탄 버스에 멀미로 기절해 참가하지 못한 아픔도 간직하고 있다. 간결한 문장으로 쓴 글의 전개나, 섬세하게 심정을 드러낸 표현력이 일품이다. 이씨는 옛 일기를 꺼내 놓는 것에 대해 “평생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자 살아갈 힘이 됐기 때문이며 동시대 보통 사람들의 일상이 차곡차곡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요즘 어린이들이 읽으면 할아버지 세대의 풍경과 아픔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반일감정 덕(?)에 탄생한 ‘한국형 전투식량’의 비밀

    반일감정 덕(?)에 탄생한 ‘한국형 전투식량’의 비밀

    소고기 고추장 비빔밥, 김치 비빔밥, 카레 비빔밥, 해물 비빔밥, 닭고기 비빔밥…. ‘집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이 음식들은 바로 ‘전투식량’입니다. 최근 출시된 전투식량은 일반 즉석식품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품질이 높아졌습니다. 심지어 물이 없어도 ‘발열팩’으로 데워 먹을 수 있습니다. 6·25 전쟁 때만 해도 전투식량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주먹밥’이 곧 전투식량이었습니다. 물론 미군이 2차 세계대전부터 보급한 ‘C레이션’이 있었지만, 우리 입맛엔 맞지 않았습니다. ‘한국인의 밥상’에 대한 갈구는 베트남전까지 이어졌습니다. 한국군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8년간 베트남전에 파병됐습니다. 이 긴 기간을 미군 전투식량으로만 버텼다면 아마 군인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을 겁니다. 그래서 이 시기 ‘한국형 전투식량’(K레이션) 개발이 본격화됐습니다.●베트남전이 만든 ‘한국형 전투식량’ 23일 이신재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이 작성한 ‘베트남전쟁기 한국형 전투식량 개발과정 고찰’ 논문에 따르면 베트남전 파병 첫 3개월 동안 우리 군은 쌀밥을 맛보지 못하는 ‘지옥’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파병 초기 미군으로부터 전투식량을 보급받았지만, 대다수 병사들은 제대로 된 사용법조차 몰랐습니다. 참고로 당시 미군 전투식량은 냉장시설이 완비된 곳에서 사용하는 신선식품 조리식 ‘A레이션’, 취사장비는 있지만 냉장시설이 없을 때 먹는 통조림 형태의 ‘B레이션’, 취사가 불가능한 지역에서 먹는 즉석식품 ‘C레이션’ 등 3종류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한 해병대 대대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취사병들이 B레이션 깡통 속 내용물을 요리할 줄 몰라 처음에는 솥에 넣고 물을 부어 ‘꿀꿀이죽’처럼 먹었다. 맛이 시금털털하고 괴상했다. 처음엔 엉망이었지만 차차 나아졌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한국군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의 요청으로 남베트남의 쌀이 보급됐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김치’였습니다.●“김치 보급 문제 美 상원 청문회에도 등장” 채 전 사령관은 회고록에서 “월남쌀로 밥을 짓고 C레이션으로 찌개나 국을 끓여 먹이니 장병들의 입맛이 살아나 살이 찌는 현상까지 생겼지만 한계가 있었다”며 “내가 부대를 방문할 때마다 듣는 건의사항은 무기나 탄약, 한국에서는 귀했던 휘발유 같은 보급품이 아니라 ‘된장, 고추장, 김치가 먹고 싶다’는 요청이었다”고 토로했습니다. C레이션에 질려버린 일부 장병들은 추수가 끝난 밭에서 그 매운 ‘베트남 고추’를 따 섞어 먹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김치 문제는 미 상원 청문회에 등장할 정도로 크게 이슈가 됐습니다. `채 전 사령관의 간곡한 요청으로 미 군사원조사령부는 ‘한국형 C레이션’을 새로 보급했습니다. 밥, 김치, 꽁치 통조림이 포함돼 맛도 괜찮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었습니다. 전투식량을 하와이에서 일본인들이 만들어 납품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한국 고유의 음식인 김치를, 일본 사람이 만들어 납품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의 여파로 베트남전 파병시기는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매우 높을 때였습니다. 이에 채 전 사령관은 정부에 ‘국산 전투식량’을 개발해 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난관이 이어졌습니다. 시제품 통조림에선 시뻘건 녹물이 나와 도저히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열대 기후에도 버틸 수 있는 통조림 제조기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미 육군 시험소 분석 결과 미군이 최초 보급한 한국형 C레이션도 미군 C레이션 중량의 절반이었고 칼슘, 비타민 등의 영양소가 기준치에 미달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14개 업체를 동원해 7개월간의 노력 끝에 1967년 3월 드디어 미군 검증을 통과한 제품이 나왔습니다. 그해 10월 한미 양국은 한국에서 개발한 ‘K레이션’을 납품하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K레이션은 한국인 기호를 고려해 K1부터 K6까지 6가지 종류로 구성됐습니다. 흰밥과 김치, 멸치 파래무침, 돼지고기 조림, 소고기 조림, 오징어 조림, 꽁치 조림, 두부전, 콩자반, 장조림, 소시지 조림 등 반찬 10가지가 포함됐습니다. 여기에 인삼차, 가루고추장, 설탕, 소금, 껌, 담배, 휴지, 성냥 등의 부속품도 포함됐습니다. 한국형 전투식량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입니다.●베트남전 기간 5639만 달러 수출 달성 한미 정부는 1967년 12월부터 1968년 6월까지 7개월분 709만 달러, 이후 1년 단위로 해마다 1000만 달러가 넘는 전투식량 공급 계약을 맺었습니다. 한국 장병들이 먹는 음식이었지만, 비용은 미국이 부담했기 때문에 우리가 미국에 전투식량을 ‘수출’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김치를 그리워하는 장병들의 원성에 마음이 급했던 정부는 위문품 형태로 시제품 15만 상자를 구입해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이 ‘성탄절 선물’은 1966년 12월 배에 실렸고 다음해 2월 처음으로 장병들에게 보급됐습니다. 이후 장병들은 하루 2끼는 미군 전투식량을, 1끼는 한국 전투식량을 먹게 됐습니다. 심지어 남베트남 쌀까지 보급돼 식단 열량이 미군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아도는 쌀을 베트남 민간인에게 보급할 정도였습니다. 베트남 파병 장병에게 우선 공급됐던 K레이션은 1971년부터 한국에도 보급됐습니다. 전투식량은 해외 수출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베트남 전쟁 시기 군납을 통한 외화수입은 1억 8000만 달러 규모였는데, 그중 31.3%인 5639만 달러가 K레이션 수출로 달성한 것이었습니다. 1968년 1000만 달러 이상 수출한 업체가 국내에 2곳밖에 없을 정도였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던 겁니다. 지금은 일반 마트에서도 제품을 접할 수 있을 정도로 전투식량이 흔해졌습니다. 진공건조 기술을 적용하고 물만 부으면 일반 비빔밥처럼 즉시 먹을 수 있어 여행할 때 이용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제품과 입맛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지만, 편의성만큼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겁니다. 불과 50년의 역사로 이런 성과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정부와 군, 업체가 경쟁력 있는 제품을 계속 개발해 K레이션이 세계적인 전투식량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기무치’는 도저히 못 먹겠다”…‘반일’로 탄생한 전투식량 [밀리터리 인사이드]

    “‘기무치’는 도저히 못 먹겠다”…‘반일’로 탄생한 전투식량 [밀리터리 인사이드]

    베트남전, 초기 3개월간 미군 C레이션 제공“한국음식 그립다” 불만에 ‘한국형 C레이션’‘일본인 생산’ 김치 비판여론…K레이션 개발베트남 군납 수출 30% 차지…외화벌이 기여소고기 고추장 비빔밥, 김치 비빔밥, 카레 비빔밥, 해물 비빔밥, 닭고기 비빔밥…. ‘집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이 음식들은 바로 ‘전투식량’입니다. 최근 출시된 전투식량은 일반 즉석식품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품질이 높아졌습니다. 뜨거운 물만 부으면 한 끼 식사로 충분한 밥상이 차려집니다. 물을 끓이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발열팩’이 포함된 제품으로 데워 먹을 수도 있습니다. 6·25 전쟁 때만 해도 전투식량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주먹밥’이 곧 전투식량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은 전투를 마친 뒤 참호에서 늘 ‘따뜻한 밥 한 끼’를 떠올렸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전투에 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미군이 2차세계대전부터 보급한 ‘C레이션’이 있었지만, 우리 입맛엔 맞지 않았습니다. ‘한국인의 밥상’에 대한 갈구는 베트남전까지 이어졌습니다. 한국군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8년간 베트남전에 파병됐습니다. 이 긴 기간을 미군 전투식량으로만 버텼다면 아마 군인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을 겁니다. 그래서 이 시기 ‘한국형 전투식량’(K레이션) 개발이 본격화됐습니다. ●베트남전 파병으로 개발한 ‘한국형 전투식량’ 한국형 전투식량 시초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뿐 구체적인 연구가 진행된 적이 없습니다. 참전자의 회고록이나 사료 등으로 조금씩 알려졌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신재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이 올해 ‘베트남전쟁기 한국형 전투식량 개발과정 고찰’이라는 제목의 첫 논문을 냈습니다. 5일 이 논문을 바탕으로 김치 등 한국음식이 어떻게 참호 속 군인들의 밥상에 올라왔는지 되짚어보려 합니다.베트남전 파병 첫 3개월 동안 우리 군은 쌀밥을 맛보지 못하는 ‘지옥’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파병 초기 미군으로부터 전투식량을 보급받았지만, 대다수 병사들은 제대로 된 사용법조차 몰랐습니다. 참고로 당시 미군 전투식량은 냉장시설이 완비된 곳에서 사용하는 신선식품 조리식 ‘A레이션’, 취사장비는 있지만 냉장시설이 없을 때 먹는 통조림 형태의 ‘B레이션’, 취사가 불가능한 지역에서 먹는 즉석식품 ‘C레이션’ 등 3종류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한 해병대 대대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취사병들이 B레이션 깡통 속 내용물을 요리할 줄 몰라 처음에는 솥에 넣고 물을 부어 ‘꿀꿀이죽’처럼 먹었다. 맛이 시금털털하고 괴상했다. 처음엔 엉망이었지만 차차 나아졌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한국군 사령관이었던 채명신 장군의 요청으로 남베트남의 쌀이 보급됐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김치’였습니다. ●“휘발유보다 더 귀한 고추장·김치를 달라” 채 전 사령관은 회고록에서 “월남쌀로 밥을 짓고 C레이션으로 찌개나 국을 끓여 먹이니 장병들의 입맛이 살아나 살이 찌는 현상까지 생겼지만 한계가 있었다”며 “내가 부대를 방문할 때마다 듣는 건의사항은 무기나 탄약, 한국에서는 귀했던 휘발유 같은 보급품이 아니라 ‘된장, 고추장, 김치가 먹고 싶다’는 요청이었다”고 토로했습니다. C레이션에 질려버린 일부 장병들은 추수가 끝난 밭에서 그 매운 ‘베트남 고추’를 따 섞어 먹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김치 문제는 미 상원 청문회에 등장할 정도로 크게 이슈가 됐습니다. 채 전 사령관의 간곡한 요청으로 미 군사원조사령부는 한국 음식으로 구성된 ‘한국형 C레이션’을 새로 보급했습니다. 밥, 김치, 꽁치 통조림이 포함돼 맛도 괜찮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었습니다. 전투식량을 하와이에서 일본인들이 만들어 납품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한국 고유의 음식인 김치를, 일본 사람이 만들어 납품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의 여파로 베트남전 파병시기는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매우 높을 때였습니다. 이에 채 전 사령관은 정부에 통조림 형태의 ‘국산 전투식량’을 개발해 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군납업체인 ‘대한종합식품’이라는 회사가 만들어지고 시제품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다시 난관이 이어졌습니다. 시제품 통조림에선 시뻘건 녹물이 나와 도저히 음식을 먹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열대 기후에도 버틸 수 있는 통조림 제조기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 육군 시험소 분석 결과 미군이 최초 보급한 한국형 C레이션도 미군 C레이션 중량의 절반이었고 칼슘, 비타민 등의 영양소가 기준치에 미달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14개 업체를 동원해 7개월간의 노력 끝에 1967년 3월 드디어 미군 검증을 통과한 제품이 나왔고, 그 해 10월 한미 양국은 한국에서 개발한 ‘K레이션’을 납품하는 내용의 합의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K레이션은 한국인 기호를 고려해 K1부터 K6까지 6가지 종류로 구성됐습니다. 흰밥과 김치, 멸치 파래무침, 돼지고기 조림, 쇠고기 조림, 오징어 조림, 꽁치 조림, 두부전, 콩자반, 장조림, 쏘세지 조림 등 반찬 10가지가 포함됐습니다. 여기에 인삼차, 가루고추장, 설탕, 소금, 껌, 담배, 휴지, 성냥 등의 부속품도 포함됐습니다. 한국형 전투식량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입니다. ●5600만 달러 수출 기여…전투식량 발전 ‘초석’ 한미 정부는 1967년 12월부터 1968년 6월까지 7개월분 709만 달러, 이후 1년 단위로 해마다 1000만 달러가 넘는 전투식량 공급 계약을 맺었습니다. 한국 장병들이 먹는 음식이었지만, 비용은 미국이 부담했기 때문에 우리가 미국에 전투식량을 ‘수출’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김치를 그리워하는 장병들의 원성에 마음이 급했던 정부는 위문품 형태로 시제품 15만 상자를 구입해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이 ‘성탄절 선물’은 1966년 12월 배에 실렸고 다음해 2월 처음으로 장병들에게 보급됐습니다.이후 장병들은 하루 2끼는 미군 전투식량을, 1끼는 한국 전투식량을 먹게 됐습니다. 심지어 남베트남 쌀까지 보급돼 식단 열량이 미군을 능가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아도는 쌀을 베트남 민간인에게 보급할 정도였습니다. 베트남 파병 장병에게 우선 공급됐던 K레이션은 1971년부터 한국에도 보급됐습니다. 전투식량은 해외 수출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베트남 전쟁 시기 군납을 통한 외화수입은 1억 8800만 달러 규모였는데, 그 중 30%인 5639만 달러가 K레이션 수출로 달성한 것이었습니다. 1968년 1000만 달러 이상 수출한 업체가 국내에 2곳 밖에 없을 정도였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던 겁니다. 지금은 일반 마트에서도 제품을 접할 수 있을 정도로 전투식량이 흔해졌습니다. 진공건조 기술을 적용하고 물만 부으면 일반 비빔밥처럼 즉시 먹을 수 있어 여행할 때 이용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제품과 입맛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지만, 편의성 만큼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 할 겁니다. 불과 50년의 역사로 이런 성과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정부와 군, 업체가 경쟁력 있는 제품을 계속 개발해 K레이션이 세계적인 전투식량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우리 식생활 바꾼 음식 이야기] ‘삼시 한끼’ 라면… 4대 천왕, 2조원대 면의 전쟁

    [우리 식생활 바꾼 음식 이야기] ‘삼시 한끼’ 라면… 4대 천왕, 2조원대 면의 전쟁

    학령기 아동의 건강상태 질문에 일주일에 라면을 몇 번 먹느냐는 질문이 있다. 매일 먹는다, 일주일에 3∼4번, 일주일에 1∼2번, 거의 먹지 않는다 등이 선택지다. 이는 라면이 우리 일상생활에 깊이 들어와 있고 이에 따른 건강상의 우려가 있다는 점을 반영한다. 국내에 출시된 지 반세기가 넘은 라면은 시장 규모 2조원의 산업으로 성장했다. 우리 라면은 세계 100여개국에 수출되는 인기 제품이기도 하다. 세계의 ‘땅끝마을’인 칠레 푼타아레나스에서도, ‘유럽의 지붕’이라는 스위스 융프라우에서도 라면을 만날 수 있다. ●라면의 麵史 우리나라에서 라면이 처음 생산된 때는 1963년 9월이다. 일본 묘조식품과 기술제휴한 삼양식품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라면을 생산했다. 고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은 당시 서민들이 먹던, 미군부대에서 나온 잔반을 끓인 꿀꿀이죽을 대체할 수 있는 음식으로 라면을 생각했다. 동방생명 부사장으로 일본에서 경영연수를 받았을 때 먹어본 라면을 국내에 도입하기 위해 외화차관까지 받았다. 세계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은 1958년 일본에서 개발됐다. 생산 초기 소비자들의 반응은 별로였다. ‘라면’의 ‘면’을 옷감이나 실로 오해하기도 했다. 쌀이 주식이고 밀가루 음식은 새참이나 간식이라는 오랜 식생활 관습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정부가 1965년 혼·분식을 장려하면서 인식이 개선됐고 생산에 뛰어든 업체도 늘어났다. 1965년 9월 농심의 전신인 롯데공업도 라면을 만들었다. 당시 신춘호 농심 회장은 형인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라면을 생산했다. 신춘호 회장은 지금도 “라면은 서민만 먹는 음식이 아니다. 나는 국민을 위해 라면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출시 초기 라면 국물맛은 닭고기 국물이었다. 지금처럼 소고기 국물맛이 나온 것은 1970년이다. 1975년 롯데공업에서 나온 ‘농심라면’의 광고 카피가 “형님 먼저, 아우 먼저”였다. 당시 새마을운동과 맞물려 농촌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싹트던 시기에 인기를 끌면서 롯데공업은 1978년 회사 이름을 농심으로 바꿨다. 1980년대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라면의 다양화와 고급화가 진행됐다. 우리 라면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1972년 출시됐다가 호응을 얻지 못해 사라졌던 용기면이 1981년 ‘사발면’으로 나오면서 대중화됐다. ‘너구리’(1982년), ‘안성탕면’(1983년), ‘짜파게티’(1984년) 등 연이은 히트작을 내놓은 농심이 1985년 삼양식품을 제치고 업계 1위로 올라섰다. 이어 1986년 ‘신라면’이 나오면서 부동의 1위를 지키게 된다. 팔도(1983년), 빙그레(1986년), 오뚜기(1987년) 등도 라면 생산을 시작했다. 팔도는 1986년 사각 용기면인 ‘도시락’을 내놨다. 빙그레는 2003년 라면 사업에서 철수했다. 현재 라면시장은 농심, 오뚜기, 삼양식품, 팔도 등의 4강 구도다. 1989년 아직도 사람들 뇌리에 남아 있는 우지파동이 발생했다. 그해 11월 3일 삼양식품 등 5개사가 공업용 우지를 수입해 라면을 튀기거나 마가린의 원료로 썼다는 검찰 발표가 나왔다. 사건 발생 13일 만에 당시 보사부 장관의 무해 판정, 고등법원의 무죄선고에 이어 1997년 8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지만 삼양라면은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은 뒤다. 1997년 외환위기까지 겹쳐 회사가 존폐 위기까지 겪었다. 라면은 2010년대 한번 더 진화했다. 한 봉지에 1000원 안팎인 프리미엄급 라면이 나왔다. 풀무원은 2011년 1월 ‘자연은맛있다’ 브랜드로 생라면을 출시했다.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처럼 소비자들이 자기 입맛에 맞춰 라면을 요리하고 이를 공유하는 열풍이 불었다. 개그맨 이경규의 ‘꼬꼬면’이 대표적이다. ‘꼬꼬면’은 팔도에서 상품으로 나왔고 삼양식품의 ‘나가사끼 짬뽕’, 오뚜기의 ‘기스면’ 등 하얀 국물 라면 열풍을 불러왔다. 하얀 국물 라면의 열풍은 다소 잦아들었고 지금은 중화풍 라면이 인기를 끌고 있다. 2015년 국내 라면시장은 굵은 면발, 불맛의 중화풍 라면 인기 덕에 2조원대 시장 규모를 회복했다. 2015년 전국 라면 지도를 보면 모든 지역에서 ‘신라면’이 1위인 가운데 2, 3위에서 지역별 특성이 보인다. 호남에서는 ‘삼양라면’이, 영남에서는 ‘안성탕면’이 각각 2위다. 강원에서는 용기면인 ‘육개장사발면’이 3위다. 등산 인구가 많은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농심 위주의 구도이지만 최근 들어 일부 변화가 감지된다. 오뚜기의 선전이다. 1988년 나온 오뚜기의 ‘진라면’은 2014년 프로 야구선수 류현진을 내세운 공격적인 광고로 매출을 늘려갔다. 매운맛과 순한맛 두 가지로 개별 집계가 되고 있는데 ‘진라면’으로 합칠 경우 3대 인기 품목에 든다는 것이 오뚜기 측 주장이다. 2015년 10월에 나온 ‘진짬뽕’은 농심의 ‘맛짬뽕’, 팔도의 ‘불짬뽕’, 삼양의 ‘갓짬뽕’이 가세하면서 2015년 라면시장을 뜨겁게 달궜다. 현재 승자는 ‘진짬뽕’이라고 업계는 평가하고 있다. 영화배우 황정민을 모델로 한 마케팅과 짬뽕 국물의 맛을 살린 액상수프로의 변신 등이 주요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치열한 경쟁을 통한 발전의 힘은 라면연구소다. 농심은 회사 창립(1965년) 당시 연구소를 만들어 현재 석·박사를 포함해 150명이 근무하고 있다. 삼양식품(26명), 팔도(14명) 등도 연구소에서 매일 라면과 수프에 대해 연구한다. ●라면은 자주 먹어도 되나 라면은 대표적인 인스턴트 식품으로 늘 건강 유해 논란에 시달린다. 이에 대해 라면업체는 라면의 발명자인 안도 모모후쿠 닛신식품 회장이 2007년 96세로 죽을 때까지 매일 인스턴트 라면을 먹었다는 예로 이를 반박한다. 업체의 주장은 이렇다. 라면을 튀기는 기름은 야자나무 열매에서 채취한 식물성 기름인 팜유다. 큰 그릇에 기름을 담아서 튀기는 방식이 아니라 연속식 튀김 장치로 신선한 기름이 계속 공급된다. 수프는 우려낸 국물을 건조한 것이다. 튀기는 면의 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풍에 말린 건면, 식초를 넣어 보존성을 높인 생면을 쓰기도 한다. 또 라면에는 방부제가 없다. 유통기한이 6개월 정도지만 수분이 거의 증발돼 건조된 제품이기 때문이다. 액상수프의 경우 염도나 당도, 산도를 조정해 미생물이 자랄 수 없는 환경을 만든다. 식품의 변화를 일으키는 햇빛과 공기 중 산소와의 접촉을 막기 위해 포장재도 여러 겹으로 만들어진다. 나트륨 함량을 높이는 수프를 적게 넣거나 국물을 덜 마시기, 두 개의 냄비에 물을 끓여 한 곳에서 삶은 라면을 다른 곳으로 옮겨 끓이기 등 라면을 좀더 건강하게 먹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소개되고 있다. 건강 유해 논란이 있지만 라면의 유혹을 떨치기가 쉽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우리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라면을 먹는다. 세계라면협회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1년에 평균 73개를 먹는다. 2위 베트남(55개), 3위 인도네시아(54개)와 차이가 크다. ‘라면 강국’인 우리나라의 라면은 주요 수출품으로 현지화까지 됐다. 러시아에서는 팔도의 도시락면이 용기면 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고 동남아 지역에서는 치즈분말이 들어간 오뚜기의 ‘치즈라면’이 인기다. 쫄깃한 라면을 좋아한다면 열이 빨리 전달되는 양은냄비를 쓰고, 라면을 끓이면서 면을 몇 번 들었다 놨다 하면 좋다. 끓는 물에 면이 익는 시간을 줄여 퍼지는 것을 늦추기 때문이다. 전경하 기자 lark3@seoul.co.kr
  • [김영탁의 시식남녀] 가난과 억척의 맛, 부산

    [김영탁의 시식남녀] 가난과 억척의 맛, 부산

    부산의 전철 안에는 조용필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이 가사 없는 선율로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곳곳에서 시끌시끌한 경상도 사투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처럼 느껴졌다. 목련 빛 바바리를 걸친 영화배우 같은 김종미 시인을 비롯해 최영철, 김종미, 고명자, 김다희, 김성배, 김요아킴, 김예강, 정온, 신정민 시인 등 부산에서 시 쓰는 이들이 많이들 모였다. 박효운 사장이 15년 째 운영한다는 '부광돼지국밥'은 부산시인들의 단골식당이라 한다. 투박하고 오래된 뚝배기국밥에 국물보다 돼지고기를 수북하게 쌓아 내온다. 큰 스테인레스 함지박에 담은 부추를 함께 내준다. 아무쪼록 국밥은 뜨거운 김 후후 불어가며, 입천장도 살짝 데어가며 먹어야 제맛이다. 국밥이 입으로 들어오는지 코로 들어오는지 모르쇠로 퍼먹다가 국그릇이 바닥이 보일 때쯤 소주잔을 채워 건배를 했다. '야성을 연마하려고 돼지국밥을 먹으러 간다/ 그것도 모자라 정구지 마늘 양파 새우젓이 있다/ 푸른 물 뚝뚝 흐르는 도장을 찍으러 간다/(중략)/ 히죽이 웃는 대가리에서 야성을 캐다/ 홀로 돼지국밥을 먹는 이마에서 야성은 빛나다'(최영철, '야성은 빛나다') '전쟁 직후 검은 솥바닥 같은 부산/ 산을 타고 오르는 좁은 골목엔/ 피난민의 눈물로 끓여낸/ 국물이 있다// 뜨거운 돼지국밥과/ 차가운 가야밀면이/ 온도가 똑같다면// 그것은 눈물의 온도/ 버리고 온 피의 온도'(김종미, '슬픈 음식') 야성에 유혹되지 않고 야성을 연마함으로써 극복하는 행위로 국밥을 먹는 최 시인이야말로 진짜 부산 사내인 듯하다. 또한 돼지국밥 한 그릇에서 눈물과 피를 건져내는 김 시인은 민족과 지역의 역사를 견뎌온 사람들의 슬프고도 힘겨운 삶을 고스란히 시에 담았다. 부산 중앙동은 옛 냄새가 났다. 거리 곳곳에 문화유산이나 유적지를 잘 복원하였다. 국밥집 곁에는 나선 형태라 이름 붙여진 '소라 계단'이 있다. 층층이 나가는 길이 있고, 사람과 오토바이도 함께 다니는 조심스럽지만, 재미있는 계단이다. 해안가를 중심으로 탄생한 부산은 산과 바다 사이의 땅이 좁으미 산을 깎아 집을 지었고, 그러다보니 중간중간 도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계단을 다 올라와 ‘40계단 문화관’으로 들어갔다. 아련한 근현대의 역사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유산을 모아 낳은 보물창고라 할 만하다. 갖은 옛 음식들이 모형으로 즐비한 음식 코너에는 꿀꿀이죽이 눈길을 끈다. 일명 ‘유엔탕’이라고 불린 것은 이름으로나마 격을 높게 부르고 싶은 탓일 테다. 먹을 것이 너무나 귀한 시절, 유엔군 병사들이 먹다 남긴 음식과 난민구제회에서 나눠주던 강냉이가루를 함께 넣고 끓인 게 꿀꿀이죽이며 ‘유엔탕’이었다. 어쩌다 기름진 쇠고기 살점이 나오는 날이면 운수 좋은 날이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부산은 계단의 도시다. 아래위를 잇는 디딤돌 역할을 하는 계단이 곳곳에 산재한다는 것은 부산이 그만큼 경사진 도시라는 얘기다. 땅만 경사진 것이 아니라 부산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칠 할이 경사라는 게 최영철 시인의 설명이다. 작은 포구였던 시절부터, 일제의 수탈을 거쳐 한국전쟁의 아수라까지 한몸에 받아낸 지역이니 부산은 언제나 늘 가파랐고, 사람들의 삶 역시 자칫 발을 헛디딜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승과 하강을 거듭했다. '그냥 엎어질 걸 그랬다// 그날 밤 꽃무늬 팬티를 내릴까 말까/ 망설이다 돌아선 젊은 그 밤/ 식은 밥처럼 굳은/ 계단을 내려오며 골목을 돌며/ 여전히 여관 이름만 만지작거렸지// 지금은 모처럼 화창한 봄날/ 황급히 여관을 빠져나오다 엎어진 여인의/ 코피처럼/ 맞은편 철쭉이 비리다/ 아니 쌉싸름하다'(정온, '화춘장') 정온 시인은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부산으로 귀화했다. 그가 발견한 ‘40계단’ 초입에 화춘장여관이라니. 사실 우리는 여관 앞 화단에 흐드러지게 핀 붉은 철쭉을 바라보며 탄성을 연발했다. 부끄러워 급하게 여관을 빠져나오다 엎어진 여인의 코피 맛은 비리고 쌉싸름하다. 활달하고 분방한 시는 진퇴(進退)를 잘 알고 있다. 정 시인은 화춘장과 철쭉을 식재료로 한편 맛있는 시를 버무렸다. 터벅터벅 걸어갈만한 거리에 보수동 헌책방골목이 있다. 어림잡아 보니 쇠락해 가는 서울의 청계천 헌책방보다 대여섯 배나 많은 헌책방들(47개)이 즐비했고 책을 사거나 팔러 온 손님들로 북적였다. 책 안 읽는 한국인이라고 세계 독서통계에도 부끄러운 낙인이 찍혔지만 최소한 이곳은 책에 대한 갈증과 아름다운 책 향기로 가득했다. 보수동 헌책방골목은 6․25전쟁이 터지면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을 때, 함경북도에서 피난 온 부부가 최초로 헌 잡지 등을 팔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보문서점(현 글방쉼터)을 시작으로 1970년대 70여 점포가 들어설 정도로 흥성했다. 피난 온 예술인들은 용두산을 오르내리는 게 일과였고 보수동 헌책방골목을 단골로 드나들었다. 하여 보수동 헌책방골목은 문화와 추억의 거리로 기억됐다. 헌책이 새 주인을 만나 재탄생되는 창조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시집 한 권을 반값에 사고/ 나머지는 보수동 헌책방골목/ 소문난 찹쌀도너츠를 책장에서/ 방금 튀겨 나온 향기를 따라/ 문장 곱씹은 시가 오물거린다'(김성배, '헌책과 찹쌀도너츠')한참을 걸어서인지 약간의 시장기를 느끼고 있던 차에 김종미 시인이 찹쌀 도넛을 사서 일행들에게 나누어준다. 이 골목에서 도넛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명물집 '유진스넥'이다. 김성배 시인이 시 한편을 뚝딱 토해낸 배경이다. 용두산 공원 밑 광복동에 위치한 40년 된 고갈비집 '남마담'이 있다. 고갈비는 큰 고등어를 숙성하여 구워서 먹는데 고등어도 뼈가 있으니 갈비라 할 만하다.80년대까지만 해도 고갈비로 알려진 고등어구이는 주머니 가벼운 대학생과 젊은 직장인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던 '소박한 호사'였다. 고갈비는 자갈치에서 막 들여온 고등어에 소금간을 하고 숙성을 한 다음 연탄불에 올려서 바싹하게 굽는데, 요즘은 철판에 기름을 두르고 노릇노릇하게 굽는다. '남마담'이란 애초에 남자가 요리를 하고 마담 구실을 했다는 뜻이다. 고갈비의 원조로 고갈비 골목을 형성할 만큼 큰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할매집'과 두 곳만 남았고 사람들의 왕래도 뜸해 보였다. '날 선 세상에 저 멀리 잘려나간/ 한 줌의 희망마저 그려보지 못한 창백한 아가미/ 파르르 저며 떠는 잔비늘들의 서걱거림/ 끝내 버둥거렸던 긴 꼬리의 외마디 침묵'(김요아킴, '자갈치 횟집에서') 김요아킴 시인의 목을 메이게 한 건, 우리들에게 바다의 쫄깃한 맛으로 허기진 저녁 뱃속을 위로할 회 몇 점이었다. 아마도 김 시인은 수족관에서 유영하는 그 맑은 두 눈을 마주쳤을 것이고, 회를 뜨는 광경을 목격했을 터. 그러나 날 선 세상에 저 멀리 잘려나간 한 줌의 희망은 시인의 몸으로 들어오면서 연민과 함께 피가 되고 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 줌의 희망과 외마디 침묵은 김 시인에게 육화되면서 시로 살아났다. 자갈치시장 안팎은 싱싱함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부두와 밤바다를 불빛으로 몸을 나타내는 묵직한 배의 윤곽들이 그림 같다. 다음날 영도다리를 보기 위해 택시를 탔다. 영도다리엔 전국에서 몰려온 관광버스와 사람들로 보슬비가 내리는데도 북적였다.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를 듣다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우람한 몸체를 뽐내며 상판 일부를 끄떡 들어 올린 영도대교에 박수갈채를 보낸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경계라인을 넘으려는 사람들을 제지하는 경비는 연신 호루라기를 불었다. 가장 큰 유산이었던 다리 난간의 낙서들, 거기 베인 눈물과 한숨, 그리운 이름들을 애타게 부르던 흔적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관광객만 몰려오고 있다. 여기서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민족의 비극 6․25전쟁과 가난한 시절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래도 값진 유산일 것이다. 가난과 눈물, 흥청거림과 억척스러움, 그리고 돼지국밥과 간밤에 남긴 회 몇 점을 뒤로 하고 부산버스터미널에서 서울행 버스에 올라탔다. 글·사진 김영탁 시인 tibet21@naver.com
  • ‘삼양라면’ 전중윤 삼양식품 창업주 별세

    ‘삼양라면’ 전중윤 삼양식품 창업주 별세

    한국 최초 라면인 ‘삼양라면’을 만든 삼양식품 창업주 전중윤 명예회장이 지난 10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95세. 강원도 철원 출신인 고인은 1960년대 초 남대문 시장을 지나가다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을 사먹으려고 길게 줄을 선 것을 보고 1959년 일본 출장 때 접한 라면을 떠올렸다. 애초 보험·금융업에 종사하던 고인은 1961년 삼양식품을 세우고 당시 주무부처인 상공부를 설득해 5만 달러를 받아 라면 제조에 돌입했다. 이렇게 해서 1963년 9월 15일 국내 첫 라면인 삼양라면이 탄생했다. 당시 가격은 10원이었다. 삼양라면은 출시 6년 뒤인 1969년 업계 최초로 베트남에 수출됐고 현재 전 세계 60여 개국에서 판매되고 있다. 1970년대 소고기와 우유의 안정적 공급원 확보를 위해 대관령목장을 개척했고, 1980년대 들어 라면 외에 스낵, 유가공, 식용유, 축산업, 농수산물 가공 등으로 업종을 다각화하면서 삼양식품을 종합식품기업으로 키웠다. 1989년 이른바 ‘우지(牛脂) 파동’으로 시련도 겪었다. 라면에 비식용 소기름을 사용했다는 논란 속에 당시 라면업계 2위였던 삼양식품은 공장 가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8년 뒤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뒤이어 찾아온 외환위기로 경영이 악화해 결국 1998년 초 삼양식품은 4개 계열사 화의를 신청하기도 했다. 2010년 장남인 전인장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사회발전에 힘써왔다. 이건식품문화재단을 운영하며 인재양성 등에 이바지해온 공로로 2010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0호실, 발인은 14일 오전 9시.(02)940-3000. 박상숙 기자 alex@seoul.co.kr
  • [극과 극](4)라면과 울고 웃은 50년…‘신라면’ 아성 뒤 비운의 ‘쌀탕면’ 아시나요

    [극과 극](4)라면과 울고 웃은 50년…‘신라면’ 아성 뒤 비운의 ‘쌀탕면’ 아시나요

    라면이 우리나라에 소개된지 꼭 50년이다. 1963년 9월 15일 삼양라면이 처음 출시됐다. 중량은100g, 가격은 10원이었다. 1961년 설립된 삼약식품이 2년만에 내놓은 첫 작품이다.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은 최근 “국민을 위해 애국하는 마음으로 라면을 생산했다”고 말했다. 전 회장에게 ‘라면은 기아(飢餓)로부터 탈출, 식량자급문제 해결 수단’이었다. “당시 남대문시장을 지나다 시민들의 미군들의 음식찌꺼기로 만든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줄을 선 광경을 보고, 과거 일본에 갔을 때 라면을 시식했던 기억을 떠올렸다”는 게 전 회장의 회고담이다. 이후 일본 묘조(明星)라면의 오쿠이(奧井) 사장을 끈질기게 설득, 시설과 기술을 이전받았다. 한국 1인당 年69개,세계1위 라면소비국  라면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은 시큰둥, 자체였다. 곡식 위주의 생활을 하던 국민들에게 라면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생소한 제품이었던 까닭에서다. 게다가 담백한 국물도 소비자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식량 문제를 고심하던 박정희 대통령이 삼양라면에 관심을 보였다. “한국 사람은 맵고 짠 것을 좋아하니 고춧가루가 좀 더 들어갔으면 좋겠군”이라며 박 대통령은 제조 단가 탓에 사용하지 못하던 고춧가루 자금을 지원해주었다.(책:사물의 민낯) 일본식 라면과 다른 맵고 짠 맛으로 대표되는 한국식 라면이 탄생한 것이다. 라면은 적극적인 자사 홍보와 함께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에 힘입어 출시된지 1년쯤 지나자 소비자들의 반응이 나타났다.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라면 붐’의 시작이다. 라면은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인스턴트 식품으로 꼽히고 있다. 일본에 본부를 둔 세계라면협회(WINA)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즉석라면 판매량은 1014억 2000만개이다. 1997년 조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 1000억개를 돌파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소비된 라면은 무려 35억 2000만개다. 중국, 인도네시아, 일본, 베트남, 인도, 미국에 이어 7번째로 라면을 많이 먹었다. 하지만 1인당 라면 소비량은 우리나라가 69개로 1위다. 중국 32.6개, 일본 42.6개에 비해 월등히 앞섰다. 쌀이 부족했던 시기 대체식품으로 개발했던 국산 라면이 반세기만에 국민의 기호식품, 제2의 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삼양, 농심, 한국야쿠르트, 오뚜기 등 주요 라면업계의 지난해 매출액은 무려 1조 9800억원을 기록했다. 올해는 2조 8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물론 삼양라면이 첫 선을 보인 지 50년 동안 모든 라면이 국민들의 호응을 받은 것은 아니다. 제대로 소비자들의 손길을 받지도 못한 채 자취를 감춘 ‘비운의 라면’이 적잖다. [1968년 개발된 동명식품의 ‘풍년라면’ CF. 당시 라면은 기호식품이 아닌 배곯는 대다수 국민들의 훌륭한 먹거리였다. 1960년대부터 수많은 라면이 개발됐고 상당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자료=유튜브] 농심 야심작 ‘쌀탕면’, 최단명 불명예 국내에서 ‘최단명 라면’은 농심에서 나왔다. 농심은 1990년 2월 야심차게 쌀을 30% 함유한 ‘쌀탕면’을 내놓았다. 1989년 12월 삼양식품이 전격적으로 쌀라면을 출시, 초반에는 공급이 달릴 큰 인기를 끌던 쌀라면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다. 한국야쿠르트도 농심보다 약 한 달 전 쌀라면을 선보였던 터였다. 이른바 ‘쌀라면 전쟁’은 1989년 11월 사회적인 논란이 된 ‘우지(牛脂)파동’에서 촉발됐다. 삼양식품은 직격탄을 맞았다. 우지, 즉 공업용 쇠고기 기름으로 라면을 튀겼다는 것이다. 삼양식품은 우지파동 속에 ‘절대강자’의 위상 유지를 위해 대안으로 쌀라면을 신제품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때 마침 쌀 소비량이 급격하게 감소, 쌀 소비 촉진도 쌀라면 전쟁을 부추기는데 한 몫했다. 농심은 ‘쌀탕면’의 흥행을 위해 최초로 ‘진공믹서공법’이라는 신 제조기술까지 도입, 면발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또 기름에 튀기지 않은 ‘무지방 건면’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가격 역시 기존 쌀라면보다 30원 비싼 330원으로 책정했다. 그러나 쌀라면에 대한 시장의 호응은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밀가루 라면’에 익숙해져버린 소비자들의 입맛을 돌리기에 역부족이었다. 쌀은 밀보다 비싸 가격경쟁력도 떨어졌다. 결국 뒤늦게 ‘쌀라면 전쟁’에 뛰어든 농심은 6개월 만에 ‘쌀탕면’ 생산을 중단했다. 쌀탕면은 농심 홈페이지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사라진 것이다. 쌀라면은 현재 삼양식품 등이 건강식으로 생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84년 설립된 청보식품의 주력 ‘영라면’ CF.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이었던 이주일씨를 홍보모델로 내세워 ‘곱배기’라면과 함께 출시 4개월 만에 라면시장 점유율 5%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장기 성장 발판을 마련하지 못하고 출시 2년 만에 결국 단종됐다. 자료=유튜브] 이주일 내세운 ‘영라면’도 불운 청보식품의 ‘영라면’과 ‘곱배기라면’도 생명이 짧았다. 1984년 식품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청보식품은 이듬해 ‘영라면’과 ‘곱배기라면’으로 라면시장의 판도를 흔들었다.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이었던 고(故) 이주일씨를 모델로 발탁, 출시 4개월만에 시장 점유율 5%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청보식품 측은 이주일씨를 여러 차례 찾아가 “도와달라”고 읍소한 끝에 홍보모델 수락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과는 다르지만 당시 라면 광고 모델은 대체로 인기 코미디언이 맡았다. 코믹하고 소탈한 서민 타겟의 광고가 대세를 이뤘기 때문이다. 1975년 ‘농심라면’의 광고 모델 구봉서, 곽규석씨가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광고 멘트로 히트를 친 것이 대표적인 예다. 1986년 코미디언 이홍렬과 이경규의 ‘짜짜로니’ 광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맛’이다. 곱배기라면은 이름 그대로 면의 양이 다른 라면보다 많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소비자들로부터 “맛이 싱겁다”, “스프 양이 부족한 것 같다”, “특별한 장점이 없다”는 혹평을 받았다. 이후 1987년 경영난을 겪다 부도가 난 청보그룹의 식품사업 대부분은 오뚜기로 흡수되면서 두 라면은 2년만에 단종됐다. 라면업계는 소비자들의 다양한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파격적인 맛을 내거나 새로운 기능을 곁들였지만 적잖게 쓴맛을 봤다. 지금은 이름도 생소한 카레라면(삼양·1971년 출시), 머그면(농심·1993년), 쇼킹면(팔도·1997년), 채식면(오뚜기·1998년), 케찹라면(팔도·1998년), 매운콩라면(빙그레·1998년), 랍스타맛 왕라면(한국야쿠르트·2000년) 등이 그것이다. 쇼킹면은 TV 광고에서 입에서 나온 뜨거운 열기 때문에 천장 스프링쿨러에서 물이 뿜어져 나와 방 전체가 물바다가 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자신있는 분만 드십시오’라는 다소 과장된 멘트로 청소년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는 했지만 소비자들의 오랜 선택을 받지 못했다. “자신있는 분만 드십시오” 쇼킹면의 도발 최근 들어 출시된 제품 가운데 2011년 4월 농심의 ‘신라면블랙’은 쌀탕면보다 더 빠른 출시 5개월만에 잠정 생산 중단돼 ‘최단명 라면’이라는 새로운 오명을 쓸 뻔했으나 용기면인 ‘신라면 블랙컵’으로 부활한 동시에 봉지면을 재출시, 미국·일본·중국 등 해외 수출로 판로를 개척했다. ‘신라면블랙’은 ‘신라면’보다 두배나 비싼 1600원을 소비자가격으로 정하고, “설렁탕 한 그릇의 영양이 그대로 담겼다”는 광고 카피를 통해 프리미엄 라면 이미지를 내세웠다. 하지만 출시 직후부터 “기존 제품을 개선한 ‘리뉴얼제품’에 불과한데 가격을 너무 많이 인상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끝에 출시 5개월만인 8월 30일 전격적으로 국내 봉지면 생산·판매를 중지했다. 농심은 지난해 봉지면 ‘신라면 블랙’을 국내에서 다시 내놓은 한편 월드스타 싸이를 용기면 ‘신라면블랙컵’ 홍보모델로 등장시키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 해외에서 더 통한 신라면 블랙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어도 소비자들이 선택한 라면 맛의 변화는 그리 크지 않다는 게 업계의 한결같은 말이다. 일반적으로 국내 소비자들을 사로잡는 맛은 얼큰한 ‘매운 맛’이다. 장기적으로 성공한 라면을 단번에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는 얘기다. 농심 관계자는 “지금까지 장기 히트한 신라면 같은 대부분의 주력 라면은 출시 이후부터 맛의 변화가 전혀 없다. 맛을 바꿀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반대로 전통적인 매운 맛이 아닌 실험적인 시도는 거의 실패로 돌아갔다. 소비자가 요구하는 라면 맛이 상당히 보수적이라는 의미다. [빙그레가 1998년 개발한 ‘매운콩라면’ CF. 100% 콩기름을 사용해 라면시장에 ‘건강’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한 때 돌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빙그레가 2003년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라면시장에서 철수하면서 결국 퇴출됐다. 자료=유튜브] 라면요리대회에서 우승경력이 있는 라면매니아 이창헌(42·국방부 계룡대 조리원사)씨는 “과거에 새로운 시도가 많았지만 소수를 위한 시장이기 때문에 소비자의 입맛에 어필하지 못하고 사라진 라면이 많다”면서 “각 회사마다 라면을 연구해서 새롭게 출시해도 대다수 소비자의 입맛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시장성이 떨어져 중도에 사라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신라면’, 단일품목 27년연속 1위 아성 반대로 우리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라면은 농심의 ‘신라면’ 이다. 1986년 10월 첫 출시돼 지난해까지 총 220억 봉지를 판매했다. 농심은 지금까지 판매한 신라면을 일렬로 세우면 지구를 100바퀴 돌 수 있고 에베레스트산을 22만 7924회 왕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어떤 라면도 따라올 수 없는 실로 어마어마한 판매량이다. 단일 품목으로 현재까지 27년 연속 1위를 차지해 ‘라면계의 아성’으로 불린다. 한때 ‘하얀라면 돌풍’으로 점유율을 위협받기도 했지만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이르렀다. 해외에서는 80여개국에 수출돼 효자수출상품으로 불린다. 농심은 국산 라면의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 2009년부터 ‘한국의 빅맥지수’로 불리는 신라면 지수를 발표하고 있다. 신라면 지수는 신라면이 판매되고 있는 주요 10개 지역의 신라면 1봉지 가격을 미국 달러로 환산한 것이다. 신라면 매출액은 국내외 판매를 합쳐 연간 8000억원에 달한다. 농심 전체 매출 2조원의 3분의 1에 가까운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최근에는 농심의 또 다른 베스트셀러인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의 약진에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까다로운 입맛을 사로잡기에는 신라면 만한 것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라면매니아 이창헌씨는 “하얀 국물 라면이라는 새로운 시도가 있었지만 역시 빨간 국물이라는 전 국민적인 공감대를 벗어나지 못했다”면서 “신라면은 주식은 물론 해장용으로도 많이 사용하는 빨간 국물 라면의 대표주자 격인 라면”이라고 설명했다. 이씨는 “앞으로는 염도를 줄이고 건강을 생각하는 프리미엄 라면이 앞으로의 트렌드가 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망했다. 한 라면업계 관계자는 “염도가 낮아지면 특유의 맛이 변할 위험도 있지만 규제가 강화되고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어 조금이라도 염도를 낮춘 건강 라면 개발에 모든 연구자들이 사활을 걸고 있다”고 말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씨줄날줄] 부대찌개/서동철 논설위원

    경기 의정부시의 부대찌개 특화거리에는 14개의 전문점이 모여 있다. 부대찌개는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6·25전쟁과 미군 주둔의 산물이다. 1950~1960년대만 해도 생소했을 햄과 소시지 등 육가공품을 토종 입맛을 가진 사람이라도 먹을 수 있도록 창조력을 발휘한 음식이다. 이런 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최근 이 골목에서는 부대찌개를 맛있게 먹고 있는 미군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 명동의 부대찌개집에는 한국 사람보다 외국 손님이 더 많을 지경이다. 의정부시청이 이곳에 ‘글로벌 문화체험 존’의 하나로 ‘부대찌개 홍보 체험관’을 만들기로 한 것도 매력 있는 문화자원으로 이 음식의 잠재력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대찌개의 시작을 전쟁 직후의 ‘꿀꿀이죽’과 연결시키기도 한다. 곤궁하던 시절 미군부대에서 내다 버린 음식찌꺼기를 한데 모아 끓여낸 잡탕이 곧 꿀꿀이죽이다. 미군이 먹다 버린 음식찌꺼기에서 햄이나 소시지 조각만 골라내 만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비참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데 효과적일지는 몰라도 올바른 문화해석법이라고 할 수 없다. 건강음식으로 전 세계적인 칭송을 받는 비빔밥이 음식의 영양과 색조의 조화를 고민한 창조정신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밥상에 남은 반찬을 한데 쓸어넣고 마구 섞어 먹던 데서 비롯된 음식이라고 자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동두천 미군부대 취사반의 한국인 군무원들이 통조림에 든 미국산 재료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킨 데서 비롯됐다는 설명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부대찌개를 부대고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으로 프라이팬에 소시지 등을 구워 먹는 음식을 부대고기라고 일컫기도 한다. 부대찌개는 지역마다 재료와 맛이 조금씩 다르다. 크게 의정부식과 송탄식으로 나누고, 의정부식은 다시 동두천식·의정부식·파주식으로 구별하기도 한다. 의정부를 비롯한 경기 북부의 부대찌개가 비교적 맑은 육수에 채소를 적당히 넣는 특징이 있다면, 송탄식은 뼈를 고은 듯 진한 육수를 써서 기름진 편이다. 하지만 의정부 특화거리만 해도 집집마다 재료와 맛이 모두 다르니 이런 구별은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한 음식전문가는 부대찌개가 탕이라는 국물요리법을 충실히 따른 우리 전통음식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니 햄과 소시지, 통조림콩, 치즈와 같은 서양의 가공식품을 한국의 전통적인 조리법으로 응용한 결과 세계인의 입맛에 맞게 다시 태어난 음식이 부대찌개이다. 맛의 수도라는 뉴욕이나 파리에 부대찌개집이 줄지어 들어서는 날을 기대해 본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을 품은 우리 동네] (8)부산 중구 40계단길

    [길을 품은 우리 동네] (8)부산 중구 40계단길

    뜨거운 태양보다 전국에서 찾아든 젊은이의 열기로 더 뜨거운 해운대, 세계에서 가장 큰 ‘노래방’인 사직 야구장, 해마다 국제 영화제와 록 페스티벌이 열리는 축제의 도시. 항구 도시 부산은 시가 내건 ‘다이내믹 부산’이라는 구호만큼이나 역동적이고 뜨거운 곳이다. 특히 본격적인 피서철에 접어드는 7월부터는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 관광객이 대거 방문하는 관광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부산은 그 화려한 겉모습 이면에 한국전쟁의 상처를 품고 있는, 아픔과 설움이 짙게 밴 도시다. 전쟁의 피해가 가장 적었기에 전쟁의 흔적도 오롯이 간직한 부산, 그중에서도 피란민의 눈물과 땀으로 얼룩졌던 중구 40계단길을 찾았다. “니 어디고? 아직 안 나왔나. 내는 벌써 나왔지. 계단에 있으니까 글로 온나.” 2일 점심시간 부산국제여객터미널과 인접한 중구 동광동의 작은 골목 길. 골목 길 주변 상가와 건물에서 반소매 셔츠 차림의 직장인들이 점심 식사를 위해 삼삼오오 무리지어 나오기 시작했다. 같이 밥을 먹기로 한 일행을 찾는 듯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이들이 정한 만남의 장소는 대부분 ‘계단’이었다. 부산 동광동, 더 넓게는 중구 일대에서 계단은 특정한 장소를 뜻하는, 삶의 흔적이 녹아 있는 특별한 공간인 것이다. 이 지역의 도로명 주소인 ‘40계단길’(180m) 역시 이 계단이 역사와 의미가 깊기 때문에 탄생한 새 주소다. 사실 이 40계단을 아는 사람은 부산에서도 이 지역 인근 주민이 아니고서는 그리 많지 않다. 이 계단이 큰길에 있는 것도 아니고, 높은 건물 숲 사이에서 옛 ‘달동네’를 잇는 좁은 길에 덩그러니 놓인 계단이기 때문이다. 40계단이 처음으로 ‘외지 사람’에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초 피란민의 아픔을 노래한 가요 ‘경상도 아가씨’가 나오면서부터다. 경상도 아가씨는 “40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 울지 말고 속시원히 말 좀 하세요. 피난살이 처량스레 동정하는 판잣집에 경상도 아가씨가 애처로워 묻는구나…(중략)… 그래도 눈물만이 흘러 젖는 이북고향 언제 가려나.”라는 가사로 ‘굳세어라 금순아’와 함께 부산 일대의 피란민들을 위로했던 대표적인 노래다. 이때의 40계단은 영도다리와 함께 피란민들의 상봉의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이후 이 계단은 1999년 흥행에 성공한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주요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지금의 젊은층에게도 폭넓게 알려졌다. 40계단이 언제 처음 생긴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동광동 일대가 개발됐던 1908년을 전후로 생겨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지금의 40계단길의 기준이 되는 계단도 원래의 40계단이 1970년대 난개발로 사람 한 명 지나기도 불편할 정도로 좁아지면서 새로 만든 것이다. 옛 40계단은 지금의 40계단보다 북쪽으로 10m쯤 떨어진 지점에 있다. 40계단 문화원에서 문화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는 홍우석(77)씨는 전쟁 당시 40계단 일대 풍경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홍씨는 “전쟁 당시 함경도고 서울이고 할 것 없이 전국 각지에서 부산으로 몰려들었고, 특히 배를 타고 피란 온 사람들이 부산항을 통해 들어오면서 지금 40계단을 중심으로 인근 야산에 판잣집을 짓기 시작했다.”면서 “당시 미군 구호물자 배급을 항구 근처에서 했는데 피란민들은 먹고살 게 구호물자뿐이라 그 40계단을 맨발로 뛰어다니곤 했다.”고 말했다. 이때 피란민들이 구호물자를 서로 사고 팔기 시작하던 ‘도떼기 시장’(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한 비정상적 시장)이 현재 부산의 명소 ‘국제시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밖에 피란민들이 당시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음식 찌꺼기를 모아다 끓여 파는 ‘꿀꿀이죽’(일명 유엔탕) 장사와 빈 깡통과 포탄 파편 등을 엮어 판잣집 지붕 등으로 쓸 수 있도록 하는 ‘깡깡이’ 장사 등이었다. 홍씨는 “당시 40계단 뒤로 동광동, 영주동, 보수동, 대청동 일대 모두가 피란민에게는 ‘무주공산’이었고, 그때의 피란촌이 아직도 부산의 서민 밀집지역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피란민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긴 40계단 일대는 2000년대 초반 들어 대대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구청이 계단을 중심으로 역사성을 살린 ‘문화관광테마거리’를 조성하면서부터다. 지금의 40계단길 주변 건물은 대부분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지만 거리 곳곳에서는 1950~70년대의 향수가 묻어 나온다. 발가벗은 큰아이 옆으로 아기에게 젖을 물린 모습의 ‘어머니의 마음’과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잠든 아기를 업고 가는 모습의 ‘40계단 여인상’ 등의 조형물은 당시 고단한 삶 속에서도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전해진다. 계단 중턱에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위로라도 하는 듯 ‘아코디언 켜는 사람’이라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고, 이 조형물을 가로지르면 ‘경상도 아가씨’ 등의 노래가 아코디언 연주로 흘러나온다. 중구는 이 지역에 대한 1단계 사업을 마치고 2013년 완공을 목표로 총 사업비 42억원의 2단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단계 사업에 따라 한·일 우호의 거리와 문화예술인의 거리, 부산 정거장 거리 등 거리의 역사성을 되살릴 계획이다. 중구 관계자는 “중구에는 40계단뿐만 아니라 곳곳에 조국 독립운동과 6·25 전쟁의 유서가 깊은 지역이 많기 때문에 도시 개발 정책 수립 시 역사성 보존을 가장 중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 사진 부산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9회는 정읍·부안·고창 ‘동학로’를 소개합니다.
  • [씨줄날줄] 라면/박홍기 논설위원

    보릿고개란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묵은 곡식이 떨어지고 아직 보리가 여물지 않은 5~6월, 농가의 끼니 때우기가 가장 어려운 때’이다. 일제 강점에서 해방된 이후 1970년대까지 서민들이 겪어야 했던 가난, 굶주림을 상징하는 용어다. 우리나라 라면의 역사는 배고픔과 맞물려 있다. 라면은 1963년 9월 15일 처음 국내에서 10원에 출시됐다. 삼양라면이다. 1961년 삼양식품을 설립한 전중윤 명예회장이 기아(飢餓)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목표 아래 회사 설립 2년 만에 선보인 제품이다. 전 명예회장은 당시 남대문시장을 지나다 시민들이 미군들의 음식찌꺼기로 만든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길게 줄을 선 광경을 보고는 식량자급문제 해결의 시급성을 절감했다. 이후 일본 묘조(明星)라면의 오쿠이(奧井) 사장을 끈질기게 설득, 시설과 기술을 이전받았다. 국민, 즉 소비자들은 초기엔 시큰둥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생소한 제품이었던 까닭이다. 무료 시식 등 라면 알리기에 나선 지 1년쯤 지나자 소비자들의 반응이 나타났다. 그 결과 6년 만에 초창기 매출액과 비교하면 300배의 성장을 이뤘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배를 채워주는 ‘제2의 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최근 라면 매출이 크게 늘고 있다. 특히 편의점 라면 매출이 눈에 띌 만큼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세븐일레븐·바이더웨이에 따르면 전국 4800여개점의 매출을 분석한 결과, 지난달 7~27일의 컵라면과 봉지라면의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각각 36.4%와 46.8% 늘었다는 것이다. 치솟는 물가로 비싸진 식당 음식이 부담스러워진 탓인지 대학 구내에 입주해 있는 편의점 27곳의 컵라면 매출도 전년 대비 52.2%나 늘었다. 최근의 라면 매출 급증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서민들의 삶이 그만큼 팍팍해졌다는 방증이어서다. 물가 상승폭이 장난이 아니다. 허리띠를 졸라맨 직장인들은 값싼 음식점을 전전하는 실정이다. 점심을 뜻하는 런치와 유목민이라는 노마드를 합친 ‘런치노마드족’ 이라는, 싼 식당을 찾아 떠도는 젊은이들도 생겨났다. 그제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하반기 1분위(소득하위 20%)의 엥겔지수는 22.5%로 6년 만에 최고치였다. 엥겔지수가 높을수록 살림이 힘들어진다는 뜻이다. 21세기형 보릿고개 같다. 전 명예회장이 추구했던 ‘먹는 데 족하면 천하가 태평하다’라는 식족평천(食足平天)의 의미가 무색하기만 하다. 대한민국은 심각한 양극화에 직면해 있다.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 [길섶에서] 돼지국밥/강석진 수석논설위원

    팔도강산 돌아다녀 봐도 먹을거리에 관한 한 영남 지방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점수가 박한 편이다. 영남 음식 이야기가 나오면 맵든가 짜다는 식의 혹평은 흔히 듣는 말. 아예 ‘할 수 없이 먹지.’라는 표정으로 말을 아끼는 축들도 없지 않다. 부산 부임 초기 돼지국밥도 영 낯선 음식이었다. 왠지 ‘꿀꿀이죽’이 연상됐다. 선입견의 벽이 이중으로 쳐진 셈이다. 계절은 입맛도 바꾼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습기 먹은 찬바람이 바늘처럼 꽂히던 어느날,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국밥집 솥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뽀얀 뼈 국물에 부추 겉절이 듬뿍 넣고, 밥이랑 고기랑 한 입 가득 떠 넣으니 언 속이 뜨끈해진다.‘음 좋군.’ 한마디에 선입견은 슬그머니 자리를 비킨다. 서울에서 내려오는 손들이 워낙 ‘자갈치 아지매’ 보기를 원해 돼지국밥을 ‘강추’하지는 못했지만, 부산 붙박이들이랑은 즐겨 찾는 메뉴의 하나가 되었다. 유행가 가사였던가.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그렇게 부산은 반 고향이 됐다. 강석진 수석논설위원 sckang@seoul.co.kr
  • ‘꿀꿀이죽 사건’ 재발 없게 보육 조례 개정운동 확산

    서울시내 자치구들의 보육조례 개정을 위한 주민 발의가 확산되고 있다. 13일 민주노동당서울시당에 따르면 민노당 양천구위원회 등 양천구민 30여명은 지난 12일 보육조례개정 운동본부 발대식을 갖고 주민발의를 위한 서명운동에 들어갔다. 운동본부 발족은 서대문·강북·영등포구에 이어 양천구가 네 번째다. 보육조례 개정운동은 지난 6월 강북구 수유 2동의 한 어린이집에서 ‘꿀꿀이죽 사건’이 발생한 뒤 구 보육조례의 규정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자는 취지에서 본격화됐다. 양천구 운동본부 측은 “양천구의 보육대상 아동이 3만여명이지만 보육시설 수용인원은 9000명에 불과하다.”며 “구립 어린이집은 전체 10%가 안된다.”고 말했다. 운동본부는 조례개정을 통해 보육 예산 및 시설 확대를 일차 목표로 삼을 방침이다. 이를 위해 내년 2월까지 주민발의 서명운동을 펼치고 ▲모든 보육시설에 대한 점검 제도화 ▲양천구청에 보육정책위 설치 ▲20인 이상 어린이집에 학부모운영위 설치 등의 내용을 개정 조례안에 반영할 계획이다. 양천구 보육조례개정은 내년 2월11일까지 최소 7800명의 주민서명을 받아야 가능하다. 민주노동당 구로구위원회도 홍준호 구의원 등을 통해 12월 중 조례개정안을 발의할 예정이다.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의정 포커스] ‘꿀꿀이죽 급식’ 재발 막는다

    [의정 포커스] ‘꿀꿀이죽 급식’ 재발 막는다

    강북구 주민들이 보육조례 개정을 위한 주민 발의를 추진하고 있다. 서울시에서 주민 발의로 보육 조례를 개정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구 의회와 구청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어 보육조례 개정의 성과가 주목된다. ●‘개정 운동본부´ 구성 주민 서명 받아 K어린이집 학부모 대책위원회와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강북지부 등 강북구 주민들은 지난 15일 강북구보육조례개정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를 구성, 주민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이는 지난 6월 수유 2동 K어린이집에서 ‘꿀꿀이죽 사건’이 발생한 뒤 구 보육조례의 규정을 구체적으로 명시해 제2의 꿀꿀이죽 사건을 막아 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운동본부측은 지난 23일 수유4동 솔밭공원에서 주민들과 함께 강북구 보육조례개정 선포식을 갖고 주민 걷기대회를 열었다. 또 학부모와 어린이들에게 ‘보육조례 개정 풍선’을 나눠주고 서명을 받으면서 4·19 묘역까지 걷기대회를 벌였다. ●사립 어린이집도 지도·점검 정례화 운동본부가 보육 조례를 개정하기 위해서는 선거권을 가진 강북구 주민 6900명의 서명을 받아야 한다. 본부측은 주민서명의 법정기한인 90일인 내년 1월 14일까지 1만명 서명을 목표로 수유역 등지에서 서명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현재 보육 조례의 문제점으로는 강북구청의 사립 어린이집에 대한 정기적인 지도·점검 규정이 없다는 것이 꼽힌다. 현재 관내 22개의 구립 어린이집은 연간 1회 정기점검을 받도록 되어 있으나, 사립 어린이집 180개는 이같은 규정을 적용받지 않고 있다. ●학부모등 보육시설 운영 참여 추진 또 학부모나 보육종사자가 보육시설 운영이나 보육계획을 수립하는데 배제돼 있으며, 구 보육정책위원회 위원으로 명시된 14명 가운데 어린이집원장이 3명 참여하는 데에 비해 학부모는 1명에 그치고 있다. 운동본부측은 ‘안심보육·참여보육·공공보육·보육의 질 향상’을 내걸고 개정되는 보육 조례에 구체적인 사항을 명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세부적으로는 ▲모든 보육시설에 대한 연 2회 정기 지도, 점검실시로 안전한 보육시설을 실현하고 ▲보육정책위원회 공개모집을 통한 학부모·주민참여 보장 ▲20인 이상의 보육시설에 운영위원회 설치 의무화 ▲강북구에 보육정보센터를 설치해 보육시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라는 것 등이다. 강북구의회 관계자는 “강북구에서는 처음 있는 주민 발의 운동”이라면서 “세부적인 사항들은 서로 조율해 봐야겠지만 이번 운동이 지역 현안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조례개정·제도 개선을 이루는 주민 참여자치운동으로 지방 자치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의회] “아동 이용 돈벌이 반성해야”

    “미래의 꿈나무인 어린이들을 보육사업 돈벌이로 보는 어른들은 각성해야합니다.” 지난 23일 꿀꿀이죽 사건으로 파문을 일으킨 강북구 K어린이집에 대한 조사를 마친 강북구의회 허종엽 의원(미아3동)은 이같이 말했다. 구 의회는 6월 23일 ‘K어린이집 운영관리실태 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허 의원은 “조사 결과 셋째 아이 보육료 경감과 영아 간식비로 부당 지원된 1727만 8000원을 발견해 어린이집을 폐쇄조치하고 K어린이집 이모 원장을 형사고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고려어린이집의 운영일지와 출석부를 확보하지 못해 학부형들이 제시한 원아들의 숫자를 검증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면서 “1년에 한번씩 하기로 되어 있는 조리시설 점검을 분기별로라도 할 수 있도록 조례를 개정해서 엄마들이 아이들을 마음놓고 맡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의회] 초선으로 의장된 원칙주의자

    [의회] 초선으로 의장된 원칙주의자

    ● 신승호 강북구의회 의장 강북구의회 신승호(55세) 의장은 임시회,정례회 등 회기가 아닐 때 더욱 바쁘다. 그는 동네를 돌면서 집행부에서 챙길 수 없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풀뿌리 생활정치’를 하는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가로등이 잘못된 데는 없나,쓰레기는 잘 치워지고 있나 주민들의 민원 등도 살펴볼 겸 동네 한바퀴를 순찰하죠.” 신 의장은 구의회에서 ‘마이너 중의 마이너’로 꼽힌다. 초선 의원인데도 의장에 오른 독특한 케이스다. 더군다나 한나라당 출신 의장들이 압도적으로 많은데에 반해 신 의장은 민주당 출신이다. 신 의장은 구청장(한나라당)과 당적이 다르지만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의회·집행부간 발전적인 파트너쉽을 원활하게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의장직 걸고 꿀꿀이죽 사태 밝혀내... 최근 강북구 ‘K어린이집 꿀꿀이죽 사태’의 경우 신 의장은 일부 반대 의원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K어린이집 운영관리 실태 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특위는 조사활동을 벌이면서 K어린이집 보조금을 부정 수령한 사실 등을 파악,강북구가 지난 6일 K어린이집 폐쇄조치,K어린이집 원장 형사고발,보조금 반환명령 등의 조취를 취하도록 했다. 강북구는 서울 시내 25개 자치구 가운데 재정 자립도가 꼴찌인 만큼 복지가 취약한 지역이기도 하다. 신 의장은 평의원 시절인 2004년 6월 제84회 임시회 제1차 본회의시 강북구 여성들의 건강을 위한 골다공증 기계 도입 필요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최근 조례 수정을 통해 골다공증을 정밀하게 촬영할 수 있는 최신 기종을 보건소에 설치케했다. 일반병원에서는 2만∼3 만원 들지만 강북구 보건소에서는 5000원만 내면 검사를 받을 수 있다. 65세 이상,의료수급권자,장애인으로 등록된 사람들은 무료다. 한편 신 의장은 “지방의회 의원은 무엇보다도 금전과 도덕성에서 자유로워야 지역의원으로서의 소명을 다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신 의장은 “의원들이 이권에 개입하고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들에게 돌아가게 된다.”고 말했다. 신 의장은 합리적이고 원칙을 중요시하는 의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의장에 선출되기 전 건설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신의장은 공무원들로부터 ‘잘못했다.다음부터는 타당성을 철저히 따져보겠다.’는 답변을 가장 많이 이끌어낸 ‘송곳의원’으로 유명하다. 철저한 현장확인을 통한 정확한 근거로 집행부를 공략했기 때문이다. ● “삼각산 케이블카 설치해야...” 삼각산(북한산) 케이블카 설치도 그가 목소리를 높이는 현안중의 하나다. 신 의장은 “우이~신설동간 지하경전철이 건설되면 삼각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며 “케이블카를 설치하면 세입도 늘어나 재정 자립도 최하위의 오명도 벗고 일자리도 창출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 의장은 거창한 구호나 예산을 많이 들이는 사업보다는 주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하는 ‘생활구정’을 구청에 주문해 왔다. 전체 예산이 줄어도 민생 예산은 삭감하지 않는다는 것이 의정활동의 원칙이다. 그는 명지대 정치외교학과와 방송통신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을 수료하고 2001년에는 고려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조순형 전 국회의원 정책 보좌관과 고려대학교 아·태학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교우회 상임이사로 활동중이기도 하다.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꿀꿀이죽 아침 제공 어린이 집 실태조사

    강북구의회(의장 신승호)가 꿀꿀이죽 사태로 파문을 일으킨 관내 K어린이집 실태조사에 들어갔다. 강북구의회는 지난 23일 K어린이집 운영관리실태 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이달 22일까지 한달 동안 조사를 벌이고, 활동이 끝나면 조사결과 보고서를 작성해 본회의에 ‘부의’, 승인 의결을 받은 뒤 구청장에게 보낼 예정이라고 30일 밝혔다. 허종엽(미아3동)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특위에는 김종삼(미아5동) 의원, 채규범(미아8동) 의원, 백중원(수유2동) 의원, 이백균(수유6동) 의원 등 총 5명이 참여한다. 허 위원장은 “현재 경찰서 수사가 진행 중인 꿀꿀이죽 사태와 관련하여 K어린이집 관리 실태와 구청의 지도 감독 상태 등을 특별위원회 조사를 통해 문제점을 파악·분석해 다시는 제2의 K어린이집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특위를 구성했다.”고 밝혔다. 한편 강북구청은 지난 27일 K어린이집이 정원을 넘겨 어린이들을 수용한 사실 등에 대해 2개월 동안 운영 정지,K어린이집 이모 원장에 대해서도 3개월 동안 업무 정지 등의 제재조치를 취했다. 또 집단급식소 설치 미신고와 유통기한 초과 식품보관에 대해 각각 100만원,20만원의 과태료를 부과했다. 이에 앞서 지난 10일 K어린이집은 원생들에게 먹다남은 음식을 섞어 만든 죽(꿀꿀이죽)을 매일 아침 먹인 사실이 내부 교사의 폭로로 드러나 물의를 빚었다.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지금 그곳은] ‘꿀꿀이죽’ K어린이 집

    [지금 그곳은] ‘꿀꿀이죽’ K어린이 집

    지난 17일 서울시 강북구 수유2동 K어린이집. 먹다남은 음식을 섞어서 만든 ‘꿀꿀이죽’을 어린이들에게 먹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 일주일 만에 다시 찾았다.100여명의 어린이들은 5명으로 줄었고 4층짜리 건물 현관은 검은 양복을 입은 사설 경호원 2명이 굳게 지키고 있었다. 경호원은 학부모들의 항의 방문 등을 막기 위해 고용됐다고 구청 관계자가 전했다. ●“내 딸만 장염 앓는 줄 알았는데…” 지난 10일 내부 교사의 폭로에 따르면 K어린이집은 3개월 전부터 매일 오전마다 점심으로 나왔던 남은 반찬이나 현장학습 때 학부모가 싸주는 도시락으로 죽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먹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영양죽’으로만 알고 있던 학부모들은 사건 직후 ‘K어린이집 개죽사건’으로 규정하고 대책위원회를 꾸렸다. 학부모들은 그동안 60여명이 한 번 이상 병원에 입원했고 100여명의 아이들이 장염, 만성 장증후군, 식중독으로 인한 피부병 등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책위원회 관계자는 “장염이 뇌수막염으로 진전돼 인근의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어린이도 있다.”면서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다른 어린이집을 알아 보고 있거나 친척집을 전전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마저 여의치 않은 35명 안팎의 어린이들은 지난 14일부터 구청에서 마련해준 ‘임시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일주일 동안 쓰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그동안 양육시설을 구하지 못하면 어린이들은 갈 곳이 없어지게 된다. 두 딸을 K어린이집에 보냈다는 서모씨는 “큰 딸이 장염을 앓았을 때에는 우리집 아이만 그런 줄 알았는데 사건을 알게 된 뒤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면서 “대부분 맞벌이부부라 아이를 당장 봐줄 집이 없어 직장을 그만둔 학부모들도 있다.”고 전했다. 대책위원회는 현재 K어린이집 이모 원장을 식품위생법 위반 혐의로 형사고발하고, 강북구청에 정확한 진상규명, 원장에 대한 법적조치·처벌, 수유동 관내에 구립어린이집 확보 등을 요구하고 있다. ●정원 위반한 원장, 오히려 폭로교사등 고소 그러나 이모 원장은 해당 교사 등을 명예훼손 및 업무방해죄로 고소한 상태다. 기자는 이 원장과 전화통화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다만 이 원장은 가정통신문을 통해 “일부 언론을 통해 보도된 쓰레기죽 화면은 어린이집에서 촬영된 것이 아니고 (해고된 교사가)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해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K어린이집은 민주노동당의 현장방문단(단장 최순영 의원) 조사결과 구청에 81명 정원으로 인가를 받은 것과는 달리 145명을 수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100명 이상의 시설에 의무적으로 배치해야 하는 영양사, 조리사를 고용하지 않는 등 영유아법상의 인력배치 기준을 어긴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강북구청은 지난 13일 K어린이집에 대해 100만원의 과태료를 매겼다. 강북구청 가정복지과 김병규 계장은 “50인 이상의 집단 급식소에 구민으로 구성된 어린이집 급식지킴이를 파견하는 등 이같은 사건을 막기 위한 대책을 세웠다.”면서 “K어린이집에 대해서는 북부경찰서의 수사결과가 나오는 대로 위반사항 전반에 대해 강력하게 조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유영기자 carilips@seoul.co.kr
  • [사설] 당국이 앞장선 불량 농·축산물 유통

    불량식품 파동이 날 때마다 공적(公敵)으로 지목되는 것은 식품업체였다. 만두파동이 났을 땐 만두제조업체에 비난이 집중됐고 불량급식이 문제됐을 땐 학교와 어린이집 등이 도마 위에 올랐다. 그러나 감사원이 발표한 식품과 농·축산물 검사제도 운영실태를 보면, 농림부와 보건복지부, 식약청, 지자체 등 규제당국의 관리부실도 업체 못지않게 한심하다. 재료 단계의 불량품 유통도 제대로 막지 못하면서 최종 먹을거리 생산업체에만 악덕업체니 뭐니 하며 칼날을 휘두른 꼴이다. 감사결과로 유추해 보면 항생물질이 기준치를 넘은 돼지고기, 잔류농약 범벅인 시금치 등이 시장에 그대로 유통됐을 가능성이 크다. 간이검사에서 항생물질 양성반응이 나온 돼지고기에 대해 정밀검사도 하지 않고 출하금지 조치도 하지 않은 탓이다. 농약 시금치의 경우도 해당 도매시장에 적발 사실이 통보되지 않아 한 달동안이나 같은 농가 제품이 유통됐다. 유통중인 식품의 위생점검을 백화점 등 대형유통점 위주로 한 데 대한 변명은 어이없기만 하다. 재래시장은 위생상태가 훨씬 취약한 곳인데도 수거비용 카드결제가 어려워 점검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식품 안전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정부는 불량식품 파동이 나자 식품위생법을 강화하고 식품안전기본법안을 내놓는 등 법규정비에 열을 쏟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법규도 당국이 시행을 소홀히 한다면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오늘도 ‘꿀꿀이죽’논란 때문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부모들이 울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당국은 각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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