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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하이 주름잡은 조선인 ‘영화 황제’, 예술로 항거하다

    상하이 주름잡은 조선인 ‘영화 황제’, 예술로 항거하다

    항일 투쟁 맹활약한 배우 김염 일제의 홍보 영화 출연 강요에 “기관총으로 겨눠도 안 찍는다”안중근 동생에 독립자금 전달독립운동 관련 영화 제작 추진 1930년대 중국 상하이에서 ‘영화 황제’로 불린 조선인이 있다. 영화배우로 맹활약했던 김염(1910~1983)이다. ‘이데올로기의 전쟁터’였던 20세기 초반 김염은 영화로 항일투쟁을 펼쳤던 인물로 기억된다. 김염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상하이를 무대로 활약했던 조선 영화인들의 삶을 다룬 전시 ‘상하이 영화 황금시대의 조선 영화인들’이 인천 중구에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내년 2월 22일까지 개최된다. 관람료는 무료다. 1930년대 상하이는 ‘동양의 파리’로 불렸다. 중국 근대화의 상징인 동시에 제국주의 침탈의 상처를 안은 도시이기도 했다. 서구의 근대와 중국의 전통이 뒤섞인 공간으로서 정치·경제·문화에서 자유를 찾고자 여러 망명자로 붐비는 곳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부친인 김필순을 따라 어린 시절 상하이로 망명했던 김염은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 자라난 인물이다. 전시는 총 2부로 구성됐다. 1부에서는 당시 상하이의 도심이었던 와이탄의 모습을 재현한다. 거리의 공중전화와 인력거 등을 통해 ‘올드 상하이’와 그 안에서 활동한 영화인들의 일상을 조명한다. 정기탁, 김일손, 이경손, 한창섭, 김명수, 전창근 등 상하이에서 활동한 망명 조선 영화인들의 삶과 작품도 아울러 살펴본다. 하이라이트는 2부다. 1933년 현지 영화 전문매체를 통해 ‘영화 황제’라는 칭호를 얻었던 김염의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김필순을 비롯해 7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황해도 소래마을 김성첨 일가의 활약상도 다룬다. 김염은 일본이 제국주의 홍보를 위한 영화에 출연을 강요했을 때 “기관총으로 나를 겨눈다고 해도 그런 영화는 찍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전시는 상하이 망명 조선 영화인들의 기고문과 영화 스틸사진, 포스터, 설명서 등을 통해 당대 영화인들이 어떻게 민족의식을 고취했으며, 시대를 어떻게 진단했는지 보여준다. 김염의 후손이자 ‘상하이 올드데이즈’ 저자로 이번 전시를 위해 자료를 제공한 박규원 작가는 25일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그간 알려지지 않은 김염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박 작가에 따르면 김염은 김구의 측근이자 안중근의 친동생인 안공근과 1935년 만나 우정을 쌓는다. 김염은 안공근에게 들었던 독립운동 이야기를 바탕으로 ‘영웅혈루’라는 제목의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박 작가는 “(김염과 안공근은) 1936년 7월부터 1937년 6월까지 네 차례 만났고 (김염이 안공근에게)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주기도 했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중일전쟁(1937~1945)이 발발하면서 ‘영웅혈루’는 끝내 완성되지는 못했다. 1940년 김구가 광복군을 창설할 때도 김염이 자금을 쾌척했다고 한다.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 관장은 “이번 전시가 질식할 것 같은 식민지 조선을 벗어나 영화 황금시대의 상하이로 망명한 조선 영화인들과 중국 유일의 ‘영화 황제’에 오른 배우 김염의 민족정신과 예술세계를 공감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中 근대 교육 산실 난카이대 설립… 도산 정신 이어받아 독립운동가 후원자로[대한외국인]

    中 근대 교육 산실 난카이대 설립… 도산 정신 이어받아 독립운동가 후원자로[대한외국인]

    中에 올림픽 첫 소개·화극 창시자박용태와 교류로 독립운동 관심1920년대 한인 학생만 최소 13명수업료 면제·장학금에 신분 보장안창호 체포 당시 구명운동 나서임시정부기념관에 사진 등 전시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배우로 인기를 누렸던 김염,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으로 유명한 김산(본명 장지락),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나선 이회영의 자녀 규숙·규창 남매, 중국 초대 국무원 총리를 지낸 저우언라이(周恩). 이들에게는 1920년대 중국 톈진에 있는 난카이(南開)대를 다녔다는 공통점이 있다. 난카이대는 중국의 교육가 장보어링(張伯·1876~1951)이 설립한 사립대로 근대 교육의 산실 중 하나로 꼽힌다. 중국에 올림픽을 처음 소개하고, 화극이란 장르를 창시한 문화·체육의 선구자이기도 했던 장보어링은 일제 강점기에 한인 유학생, 독립운동가와 교류하며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그가 1919년에 설립한 난카이대는 개교 초기부터 중국으로 망명한 청년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찾는 학교였다. 장보어링은 독립운동을 하는 학생들에게 수업료를 면제해 주거나 장학금 혜택을 줘 학비 부담을 줄여 줬고, 유학생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신분도 보장해 줬다. 독립운동가 이회영(1867~1932·독립장)의 아들인 규창(1913~2005·독립장)도 장보어링을 찾아가 난카이대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장보어링은 입학비와 학비를 면제해 주며 열심히 공부해 독립에 이바지하라고 격려했다. 경제 상황이 워낙 어려워 한겨울에도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고 학교까지 걸어 다녀야 했던 이규창을 보고 중국 학생들이 ‘망국노’라고 비웃자 장보어링은 오히려 “부자(父子)가 함께 독립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배우라”며 중국 학생들을 꾸짖었다. 장보어링이 조선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난카이대 유학생이자 기숙사 사감을 맡고 있던 독립운동가 박용태(1888~1938·애국장)와 교류하면서다. 도산 안창호(1878~1938·대한민국장)와도 청년 교육의 중요성에 공감하며 두터운 우정을 쌓았다. 안창호가 중국 지린성에서 체포됐을 때 장보어링이 지린성 유력자들에게 직접 편지를 써 구명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1938년 3월 안창호의 추도회에 참석한 장보어링은 “그의 정신은 빛나고 있으므로 조선인 여러분도 계속해 안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아 어디까지나 조선 독립이 완성될 때까지 만전의 노력을 발휘해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장보어링의 이러한 도움은 ‘도산 안창호 전집’, 유기석(1905~1980·독립장)의 ‘삼십년방랑기: 유기석 회고록’,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의 별책 ‘조선민족운동연감’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로 독립운동가와 교류하는 내용이고 독립운동가들이 이 지역에서 겪는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내용이 담겼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에도 임정 활동에 힘을 보태 준 외국인 가운데 장보어링의 이름과 얼굴이 전시돼 있다. 그러나 국내에선 그의 이름이 여전히 낯설다. 양지선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학예연구사는 4일 “난카이대 총장이라는 신분으로 독립운동단체를 직접 지원하기가 어려워 학교라는 공간을 마련하고 독립운동가와 학생들의 활동을 보호하며 뒤에서 도와준 것으로 보인다”며 “장보어링이 중국에선 존경받는 인물이지만 한국에선 생소한 인물이다. 그가 한국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학계는 물론 가족조차 잘 몰라 양국에서 관련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일본이 패망하고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하고 대만으로 옮겨 갈 당시 장제스는 장보어링에게 함께 가자고 권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장보어링은 고향을 지켰고 1951년 고향에서 병사했다.
  • 김용순·김필순·김순애… 일가 대부분이 독립운동 투신

    김용순·김필순·김순애… 일가 대부분이 독립운동 투신

    김마리아 선생의 가계와 정신여학교김마리아의 본관은 광산이다. 18세기 말 현조부 김창주가 조정 정치에 염증을 느껴 고향인 황해도 장연으로 낙향, 버려진 땅을 개간해 대지주 집안이 됐다고 한다. 김마리아 가계에는 부유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항일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몸바쳐 노블레스오블리주를 실천한 이들이 많다. 큰숙부인 김용순(김윤오)은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와 막역한 사이였는데, 서울로 이주해 서우학회라는 애국계몽단체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서북학회로 발전시켰다. 동생 김필순과 김형제상회를 경영하며 국권회복 운동의 본거지로 내놓았다. 김윤오의 외딸인 세라의 딸이 서울여대 총장을 지낸 고황경이다. 김필순은 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생 7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안창호와는 의형제 사이였고 구한말 독립지사들과 두터운 교분을 쌓으며 구국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신민회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하다 소위 105인 사건이 터져 일제의 추적을 받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만주에서는 독립운동가들과 한인들의 진료에 헌신하고 몽골 치치하얼에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다. 김필순의 셋째 아들인 김덕린은 김염이라는 예명으로 20세기 초 상하이 영화계를 주름잡았던 중국의 영화 황제였다. 김염은 제국주의에 맞서는 영화에 적극적으로 출연했다. 고모 김순애(건국훈장 독립장)는 중국으로 망명,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한인여자청년동맹 간부로도 일한 독립운동가다. 그의 남편은 파리강화회의에 민족 대표로 파견된 유명한 독립운동가 김규식(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다. 고모 김필례는 김마리아가 가져온 2·8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을 하고 광주 수피아여고 교감과 교장으로 근무하다 일제에 협력하지 않아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모교인 정신여고 교장과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둘째 고모부 서병호도 신한청년당과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김마리아는 결혼을 하지 않아 직계 후손이 없다. 신학문을 배우겠다며 가출해 무작정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을 찾아온 배학복을 수양딸로 맞아들였다. 또 1937년 어느 날 누군가 문밖에 버리고 간 남자아이를 양자로 삼아 태국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키웠다. 그러나 마리아가 죽고 태국이도 어느 목사에게 맡겨졌다가 행방불명이 됐다. 배학복은 인하공대 학장을 지낸 최승만과 결혼했으며, 수년 전 사망했다. 마리아의 모교인 정신여학교 출신 가운데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다. 정신여학교는 1887년 미국 북장로교에서 보낸 선교사 애니 앨러스가 고종이 하사한 주택에서 문을 연 정동여학당에 뿌리를 두고 있다. 1895년 연지동으로 학교를 옮겨 연동여학교로 이름을 바꾼 뒤 1903년 연동중학교로, 1909년 정신여학교로 개칭했다. ‘정신 100년사’에 따르면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항일 구국활동에 참여한 정신여학교 출신이 10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1907년 1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 1922년 14회까지 졸업한 학생이 169명인데 당시 졸업생의 거의 60%가 독립운동과 연관이 있었던 셈이다. 김마리아 외에 유각경, 박순희, 이정숙, 김순애 등 알려진 인물도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도 많다. 특히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간호사 중에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이 많다고 한다. 졸업생 이정숙, 이아주 등이 간호사양성소를 나와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로 일하다 독립운동을 했다. 정신여고 최성이 교장은 “배워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자는 학교의 가르침과 건학 이념이 영향을 주었다”고 말했다. sonsj@seoul.co.kr
  • “임정, 온전한 조국 독립 꿈꿨는데… 통일이 진정한 광복 완성”

    “임정, 온전한 조국 독립 꿈꿨는데… 통일이 진정한 광복 완성”

    이런 삶을 살아온 이가 있다.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이하 임정) 청사 옆에서 도산 안창호(1878~1938) 등의 축하를 받으며 태어났다. 상하이~항저우~난징~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으로 이어지는 중국 대륙을 임정과 함께 풍찬노숙하며 횡단했다. 한국인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김(金)씨 대신 진(陳)씨로 성을 바꿔 학교를 다녔고, 백범 김구(1876~1949)와 김치에 거친 밥을 겸상했다. 석오 이동녕(1869~1940)과 성재 이시영(1869~1953)을 할아버지라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던 소년이었다. 1930년대 중국 영화 황제 미남배우 김염(1910~1983)이 드나든 집에서 자란 이 소년은 훙커우공원 폭탄의거의 윤봉길(1908~1932)이 “내 아들과 동갑”이라고 사탕 사주며 예뻐했다. 엄마 손잡고 약산 김원봉(1898~1958)의 부인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인 박차정(1910~1944)이 폐병으로 세상을 뜨기 전 병문안 다니곤 했다.이 소년은 열아홉 되던 해 광복을 맞았다. 올해로 91세인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의 이야기다.만주군 장교에서 일제 패망 직후 광복군으로 신분을 바꾼 박정희(1917~1979)와 거의 같은 시기 미군 수송선을 타고 임정 식솔과 함께 상하이에서 부산으로 왔다. 귀국 뒤 이승만(1875~1965)에게 세배를 갔고, 결혼식 주례는 해공 신익희(1894~1956)가 섰다. 의용군으로 끌려가다 겨우 도망쳤더니 아버지는 전날 납북돼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말았다. 조선일보 수습 1기 기자로 일하며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한 역사적 오보를 바로잡는가 하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사법살인’을 당한 뒤 훗날 무죄로 판결난 조용수(1930~1961)와 함께 민족일보 창간멤버로서 진보언론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그의 삶 곳곳에는 현대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이 출몰한다. ●모스크바 3상회의 역사적 오보 바로잡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역사의 한복판에서 부침을 함께한 김 회장. 대한제국 법무대신 등을 지내다 가솔을 이끌고 임정으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에 나섰던 동농 김가진(1846~1922)이 그의 할아버지고,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김의한(1900~1964)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정정화(1900~1991)가 그의 아버지, 어머니다. 2019년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은 감회는 누구와 비교할 바 아니다. 지난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김 회장을 만났다.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함께 충칭 임정 청사를 방문해 당시의 삶과 활동을 설명할 정도로 기력이 좋았지만, 지금은 거동이 좀더 불편해졌고, 청력도 많이 약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기억은 또렷했고, 또박또박 짚어내는 임정의 가치와 정신은 청춘처럼 빛났다. -올해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은 소회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임정은 조국의 독립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지금 같은 반쪽짜리 독립은 아니었습니다. 분단은 진짜 독립이 아닙니다. 분단이 있는 한 광복은 미완성입니다. 1946년 제가 귀국할 때만 해도 분단이 이렇게 오래가리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70년 동안 분단이 고착됐으니 짧은 시간 내에 통일은 어려울 듯합니다. 일단 남북의 평화로운 공존이 필요하고, 자유롭게 교류하고 협력하는 모습 자체가 통일의 과정이지요.” -젊은 사람들은 물론 많은 사람이 임정 100주년의 의미나 혹은 독립운동 자체에 대해 별 감흥이 없는 듯합니다. 그런 반응을 접하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감흥이 없는 게 당연하지요. 그렇다고 젊은 세대를 탓할 것은 아닙니다. 국가와 정치가 하기에 달려 있는 부분이고 그만큼 잘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대한민국은 헌법에서 밝히고 있듯 임정의 법통을 이어 왔습니다. 광복 이후 그 부분을 좀더 정확히 밝히고 임시정부의 목표와 강령을 실천했다면 그렇지 않았겠죠. 정치를 통한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교육을 통해 이를 후세와 공유해야 합니다.” -최근 정부가 임정 수립일인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려다 사실상 백지화하기로 한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쉽습니다. 한때 건국절 등 논란이 일기도 했던 만큼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대통령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시대인 만큼 어쩔 수 없죠. 교육기관 등을 통해 항일투쟁의 역사, 친일 인사들의 행적, 일제의 침략 역사 등을 정확히 배울 수 있게 하고 임정의 가치를 잘 공유하면 됩니다.” ●남북관계 복원 난관… 곧 좋은 소식 있을 것 기대 -통일이 광복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최근 북미 정상회담 흐름 등 한반도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지만 지난달 베트남 회담에서 확인됐듯 여전히 뿌리 깊은 북미 상호 불신을 드러낸 부분 또한 있습니다. 일본과의 관계도 악화일로고요. “일단 남과 북이 서로를 통일의 주체로 인정해야 합니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유소년 시절 서구에서 유학하는 등 서구문화의 영향이 분명히 있을 것이며, 그로 인해 안목 또한 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완전히 망쳐 놓은 남북 관계를 복원하는 작업인 만큼 난관이 있더라도 곧 좋은 소식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야 우리의 통일에 관심이 없겠지만, 자신의 명망을 높이는 일이거나 미국에도 이익이 되는 일이니 북미 관계 정상화 및 한반도 평화를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일본이야 기대할 부분이 별로 없고, 당분간 집권당도 안 바뀔 것 같고…. 훼방하지 않도록만 우리가 잘 관리해야죠. 내 생전에 통일까지는 아니라도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남북의 모습은 꼭 봤으면 좋겠습니다.” 김 회장은 임정의 정신과 교훈을 얘기하며 평화와 통일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실제 임정은 공화주의를 지향한 좌우합작 정부였다. 좌익, 우익, 아나키스트, 유림까지 모두 모인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우익 인사인 백범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평양을 찾은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임정의 정신이 통일 지향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다음달 11일 열리는 임정 수립 100주년 기념식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 선포식’도 치러질 예정인데 이 기념관 건립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요.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그 선양사업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현재는 아무개 선생, 아무개 선생 등 개별 후손 중심으로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후대로 넘어갈수록 먹고살기 바쁘고 관심도 시들해져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념관이 만들어지면 국가가 체계적으로 독립운동 관련 자료도 한데 모으고 개별 독립운동가들의 뜻과 업적을 기릴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2021년 완공 예정인데, 늠름히 서 있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요.” -꼭 그러셔야죠. 그런데 조심스럽습니다만, 말씀하신 임정의 진정한 독립 정신을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제대로 이어 가지 못한 채 과거 독재정권과 타협하는 일도 제법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어요. 시대가 그랬고, 교육이 그랬으니까요. 또 후손들이라고 아버지, 어머니와 똑같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물론 타협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광복회를 만들어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을 권력 주변으로 많이 포섭했습니다. 유공자 서훈도 원칙과 기준 없이 남발하다시피 했고요.” 실제 김 회장의 조부(동농 김가진)는 항일 비밀조직인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해 활동했고 망명 뒤 임정 고문, 북로군정서 고문을 맡았으며,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장으로 치러졌다. 하지만 아직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밖에 약산 김원봉 또한 독립유공 서훈이 없다. 반면 이승만 전 대통령의 비서 출신인 임병직 전 외무부 장관은 가장 높은 서훈인 대한민국장을 받아 원칙과 기준에 대한 의문을 낳게 했다. 지난 13일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포상 보류자 2만 4737명에 대해 재심사를 하겠다고 밝힌 만큼 투명하면서도 체계적인 서훈이 내려질 것인지 기대를 모으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임정 건국강령 21세기 복지국가정책 닮은 꼴 임정이 1941년 발표한 건국강령은 21세기 복지국가들이 표방하는 정책과 다를 바 없다. 1948년 제헌의 내용적 기초가 됐으며 2019년 현재도 여전히 유효한 실천적 과제를 담고 있다. 의료비 면제, 학비 면제, 최저임금제, 노동자 대표 경영관리 참여권 보장, 실업보험, 사형제 폐지, 노동자와 이익을 나누는 이익균점제, 몰수 재산 무산자 이익 위한 국영기관 이전 등을 주 내용으로 삼았다. 김 회장과의 얘기가 깊어질수록 100년 전 임시정부가 꿈꾼 나라를 우리가 잘 만들어 가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youngtan@seoul.co.kr
  • [홍석경의 문화읽기] 상하이에서 읽는 동아시아

    [홍석경의 문화읽기] 상하이에서 읽는 동아시아

    사람마다 꿈꾸는 도시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 도시는 상하이였다. 오랫동안 프랑스에 살았기에 올 8월에야 처음 방문하게 된 상하이. 물론 국제학회에서의 발표를 위해 왔지만, 도시 전체가 텍스트인 이곳, 하루 정도 ‘발로 하는 독서’의 매력을 물리칠 수 없다. 아편전쟁의 결과로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에 조계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이곳은 오랫동안 서구와 동아시아 간 순간이동 터널 역할을 했다. 상하이를 통로로 서구가 동아시아로 쏟아져 들어왔고, 동아시아인은 상하이에서 멀고 먼 프랑스와 영국 등 서구의 일부를 만났다.서구에도 상하이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는 신비한 곳이었다. 오손 웰스의 1947년 영화 ‘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주인공 리타 헤이워스는 상하이에서 보낸 몇 년의 과거와 중국어를 한다는 사실에 힘입어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팜파탈의 반열에 오른다. 그녀는 유명한 거울 신 속에서 죽는데, 이 장면이 중국을 다시 글로벌한 동서 간 문화교류 속으로 끌어들인 이소룡에 의해 ‘용쟁호투’(1973)에서 패러디됐던 것도 우연이 아니리라. 대한민국에게 상하이는 문자 그대로 동아시아에 열린 서구의 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젊은 장군 드골이 대서양을 건너가 런던에 임시정부를 세울 것을 생각하기 무려 20년 전 근대국가를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하고 식민지가 됐던 조선의 엘리트들은 3·1운동으로 깨어나 이곳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웅지를 틀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당시 조선의 어두운 미래와 조선인의 힘든 삶을 실감할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대륙 침탈을 준비하는 일본의 기세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내걸어 민족의 정당하고 자주적인 미래를 도모한다는 결의와 실행은 얼마나 큰 결심과 신념이 있어야 가능했을까. 레지스탕스를 부르는 드골의 런던 행보에 대한 프랑스의 역사적 대접을 보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그간의 한국 내 이견이 부끄러웠다. 당시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암살’ 속에서 주인공들이 거사 전날 모여 샹송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에서 임시정부의 상하이 커넥션이 강하게 암시된다. 1930년대 상하이와 조선의 커넥션은 영화 속에서 임시정부를 넘어선다. 중국 영화사에서 가장 빛나는 별 진린은 한국인이었다.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중심이었던 당시 상하이의 위상을 고려할 때, ‘동양의 루돌프 발렌티노’라고 불렸다는 이 한국인 남자 배우의 의미는 되새겨볼 만하다. 한국 이름 김염, 그의 부친은 독립운동가 김필순이고 고모부가 무려 김규식이니, 아무리 험난한 세월 속 인척 간 교류와 교육의 영향이 크지 않았더라도 그의 존재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상하이, 중국을 잇는 노드(node)다. 동아시아의 초국적 인기인의 전형과도 같은 노래하는 배우 장국영과 그 뒤를 잇는 한류 스타들이 있기에 앞서서 1930년대 글로벌 상하이에 한국인 배우 김염이 있었던 것이다. 밤이 되니 팔월에 크리스마스같이 치장한 불야성의 상하이가 펼쳐진다. 강의 이쪽과 저쪽이 이처럼 극적으로 서로 다른 모습이라니. 하늘을 향해 다투어 치솟는 푸둥 고층 건물들의 화려한 파사드를 마주 보는 와이탄의 강변로에는 프랑스 니스 해변의 콜로니얼 건축을 닮은 건물들이 육중하게 늘어서 있다. 와이탄 지역은 명·청대의 상점과 정원을 배경으로, 70년대 재개발 서민촌을 닮은 거리를 감추고 있다. 어두운 골목 끝 고담시티를 연상시키는 상하이타워가 구름 속으로 치솟는다. 중국의 들끓는 자본주의적 욕망처럼.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는 훙구공원에 해가 뉘엿뉘엿하자 노인들이 배 두드리며 나와 바람을 쐰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 서구 문호들의 동상 군집에서 멀지 않은 곳엔 새로 세워진 중·일 청년들의 우의를 다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시내 도처에서 한국어가 들리지만 한국 사드가 지나간 중국 어느 곳에도 한류의 자취는 없고, 일본식 바와 음식점이 즐비하다. 거대한 쇼핑몰 벽에 붙은 한류 스타를 똑 닮은 중국 배우의 모습이 묘하게 과거와 현재의 상하이, 그리고 동아시아의 굴기 속 중국의 욕망을 느끼게 해 준다.
  • 2018년 상하이에서 감상해 본 1930년대 동아시아

    2018년 상하이에서 감상해 본 1930년대 동아시아

    사람마다 꿈꾸는 도시가 있을 것이다. 나에게 그 도시는 상하이였다. 오랫동안 프랑스에 살았기에 올 8월에야 처음 방문하게 된 상하이. 국제학회에서의 발표를 위해 왔지만, 도시 전체가 텍스트인 이곳, 하루 정도 ‘발로 하는 독서’의 매력을 물리칠 수 없다. 아편전쟁의 결과로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에 조계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이곳은 오랫동안 서구와 동아시아 간 순간이동 터널 역할을 했다. 상하이를 통로로 서구가 동아시아로 쏟아져 들어왔고, 동아시아인은 상하이에서 멀고 먼 프랑스와 영국 등 서구의 일부를 만났다.서구에도 상하이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는 신비한 곳이었다. 오손 웰스의 1947년 영화 ‘상하이에서 온 여인’의 주인공 리타 헤이워스는 상하이에서 보낸 몇 년의 과거와 중국어를 한다는 사실에 힘입어 영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팜파탈의 반열에 오른다. 그녀는 유명한 거울 신 속에서 죽는데, 이 장면이 중국을 다시 글로벌한 동서 간 문화교류 속으로 끌어들인 이소룡에 의해 ‘용쟁호투’(1973)에서 패러디됐던 것도 우연이 아니리라. 대한민국에게 상하이는 문자 그대로 동아시아에 열린 서구의 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젊은 장군 드골이 대서양을 건너가 런던에 임시정부를 세울 것을 생각하기 무려 20년 전 근대국가를 제대로 경험해 보지 못하고 식민지가 됐던 조선의 엘리트들은 3·1운동으로 깨어나 이곳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웅지를 틀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는 당시 조선의 어두운 미래와 조선인의 힘든 삶을 실감할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청나라에 이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대륙 침탈을 준비하는 일본의 기세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내걸어 민족의 정당하고 자주적인 미래를 도모한다는 결의와 실행은 얼마나 큰 결심과 신념이 있어야 가능했을까. 레지스탕스를 부르는 드골의 런던 행보에 대한 프랑스의 역사적 대접을 보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그간의 한국 내 이견이 부끄러웠다. 당시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암살’ 속에서 주인공들이 거사 전날 모여 샹송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에서 임시정부의 상하이 커넥션이 강하게 암시된다.1930년대 상하이와 조선의 커넥션은 영화 속에서 임시정부를 넘어선다. 중국 영화사에서 가장 빛나는 별 진린은 한국인이었다. 동아시아 대중문화의 중심이었던 당시 상하이의 위상을 고려할 때, ‘동양의 루돌프 발렌티노’라고 불렸다는 이 한국인 남자 배우의 의미는 되새겨볼 만하다. 한국 이름 김염, 그의 부친은 독립운동가 김필순이고 고모부가 무려 김규식이니, 아무리 험난한 세월 속 인척 간 교류와 교육의 영향이 크지 않았더라도 그의 존재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상하이, 중국을 잇는 노드(node)다. 동아시아의 초국적 인기인의 전형과도 같은 노래하는 배우 장국영과 그 뒤를 잇는 한류 스타들이 있기에 앞서서 1930년대 글로벌 상하이에 한국인 배우 김염이 있었던 것이다. 밤이 되니 팔월에 크리스마스같이 치장한 불야성의 상하이가 펼쳐진다. 강의 이쪽과 저쪽이 이처럼 극적으로 서로 다른 모습이라니. 하늘을 향해 다투어 치솟는 푸둥 고층 건물들의 화려한 파사드를 마주 보는 와이탄의 강변로에는 프랑스 니스 해변의 콜로니얼 건축을 닮은 건물들이 육중하게 늘어서 있다. 와이탄 지역은 명·청대의 상점과 정원을 배경으로, 70년대 재개발 서민촌을 닮은 거리를 감추고 있다. 어두운 골목 끝 고담시티를 연상시키는 상하이타워가 구름 속으로 치솟는다. 중국의 들끓는 자본주의적 욕망처럼.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는 훙구공원에 해가 뉘엿뉘엿하자 노인들이 배 두드리며 나와 바람을 쐰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 서구 문호들의 동상 군집에서 멀지 않은 곳엔 새로 세워진 중·일 청년들의 우의를 다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시내 도처에서 한국어가 들리지만 한국 사드가 지나간 중국 어느 곳에도 한류의 자취는 없고, 일본식 바와 음식점이 즐비하다. 거대한 쇼핑몰 벽에 붙은 한류 스타를 똑 닮은 중국 배우의 모습이 묘하게 과거와 현재의 상하이, 그리고 동아시아의 굴기 속 중국의 욕망을 느끼게 해 준다. 글·사진: 홍석경 서울대 언론학과 교수
  • 지금과 닮은… 성냥불 같던 올드 상하이

    지금과 닮은… 성냥불 같던 올드 상하이

    그림은 한 점인데 뻗어나갈 수 있는 서사는 무한대다. 배경은 1930년대 ‘동양의 파리’라 불렸던 중국 ‘올드 상하이’. 20세기 초 서구 열강의 각축장이자 서양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던 변혁의 중심, 온갖 무역으로 축적한 황금의 도시였다. 유럽식 건축물, 고급 사교 클럽, 백화점, 영화관들로 흥성거렸던 격정의 순간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조덕현(61)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교수가 그 극적인 순간들을 소환한다. 다음달 20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열리는 ‘에픽 상하이’전에서다. ●시공간 넘나드는 1930년대 ‘황금의 도시 ’ 갤러리를 들어서자마자 폭 5.8m, 높이 3.9m의 초대형 화폭에 옮겨진 올드 상하이의 풍경과 인물들이 관람객을 맞는다. 제목은 ‘1935’. 그림은 어느 한곳에 시선을 오래 두게 놔두질 않는다.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이 뒤섞여 빚어내는 관계는 상상하는 만큼의 다채로운 서사를 펼쳐내고, 시간은 과거와 현재가 함께 어우러져 비틀려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당대 최고의 상하이 여배우 롼링위(阮玲玉)가 말 등에 올라타 한껏 스포트라이트 받으며 촬영에 한창인 장면 바로 옆에서 진행되는 장례식의 주인공 역시 롼링위다. 건물 2층에서는 조선에서 태어났으나 상하이로 건너가 중국 영화 황제가 된 김염(金焰)이 아내 진이(秦怡)와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들과 한 풍경에 녹아든 인물은 상하이 영화판에서 일하고 있는 20대 조선인 남성 조덕현과 상하이 여성 소설가 홍이다. 1914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만주로 흘러들어 갔다가 상하이에서 일하게 된 조덕현 작가는 20세기의 풍랑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1995년 고독사한 것으로 설정된 가상의 인물이다. 조덕현 작가는 2015년 일민미술관 전시 ‘꿈’에서 그의 말년을 그렸다면, 이번에는 ‘프리퀄’ 격으로 그의 20대 상하이 시절을 불러냈다. 이번 전시의 서사는 조 작가가 상하이 출신 소설가 미엔미엔(홍의 분신)과 합작해 만들어낸 것. 조 작가는 이번 전시의 서사를 이끄는 ‘조덕현’에 대해 “나와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린 인물이지만 지속적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투영해 주는 인물”이라고 했다.●관객들이 스스로 맞춰가는 서사의 퍼즐 왜 그는 한 점의 그림에 이렇게 다양한 시대와 공간, 관계를 중첩해 보여주는 걸까. “제 작품은 하나의 이야기만 제공하는 게 아니고 관람객들에게 여러 관계와 단서를 주고 퍼즐 맞추듯이 짜맞추기를 해 보라는 겁니다. 그림이 펼치는 서사는 100명이면 100명이 다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죠. 문학과 영화는 하나의 서사를 공유하는 장르지만 그림은 표현 방식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니까요. 그간 다양한 시공간의 자료를 한데 모으고 이야기를 증폭시키는 방식으로 작업해 왔는데 이는 이전 역사화에서 진화된 형태라고 생각해요.”●화려했지만 격렬한 위협의 시대 매료 한 편의 거대한 역사화 같은 ‘1935’에는 인물들의 드라마뿐 아니라 전쟁과 계층 간 암운 등도 드리워져 있다. 왜 지금 ‘올드 상하이’일까. “1930년대 올드 상하이는 성냥불을 켜면 확 켜졌다 꺼지듯 화려하게 빛나다 사그라든 시대입니다. 지금은 없어진 시공간이지만 삶의 질과 속도가 같은 시대 다른 공간 혹은 다른 시대 같은 공간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너무도 극적이고 격렬했던 곳이자 시대였죠. 그 극적인 공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서사가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지진, 핵위협 등 사회의 모든 요소가 너무도 격해지고 위협적인 현재의 시대와 닮은꼴 아닌가요.” 극사실주의적인 필치가 특히 돋보이는 다른 대형 회화 ‘꿈꿈’은 이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여기서도 시간과 공간은 경계 없이 뒤엉켜 있다. 수몰되는 ‘올드 상하이’를 배경에 둔 채 지구촌 곳곳의 참상들이 펼쳐져 있다. 1·2차 세계대전 난민, 베트남 보트피플, 팔레스타인 난민, 이탈리아 지진 피해자, 시리아 난민, 미얀마 로힝야족, 중일전쟁 당시 상하이 주민 등 각종 테러와의 전쟁, 재해의 희생자들이 극적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린 바로크 회화처럼 곳곳에 배치돼 ‘묵시록’의 풍경을 빚어낸다. ●‘꿈꿈’ 지구촌 곳곳 참상, 화폭에 펼쳐 이번 전시에는 ‘1935’, ‘꿈꿈’ 등 대작 회화 2점을 포함한 회화, 사진, 영상 설치작업 등 신작 18점이 공간에 맞게 부려져 있다. 전시의 동선 마지막인 갤러리 지하 1층에 자리한 영상 설치작업 ‘에픽 상하이’는 1930년대 상하이의 유명 영화 장면과 독거노인 조덕현의 골방 모습을 5면의 거울에 투영해 일파만파로 확장되는 영상의 파편들 사이에서 낯선 시공간을 부유하는 듯한 기묘한 경험을 안긴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학위도 거대 담론도 필요없다 생활속 인문 이야기 찾습니다

    출판사 창비가 모두 5000만원의 상금을 내걸고 인문사회 분야의 좋은 원고를 찾아나섰다. 콘텐츠 산업의 원천 소스를 발굴하겠다는 것으로, ‘인문사회의 신춘문예’ 같다. 창비는 지난 4일 ‘2014 창비인문도서상’을 신설하고 내년 2월 28일까지 후보작을 공모한다고 밝혔다. 창비는 이날 보도자료에서 “우리 사회의 대중적 인문학 글쓰기를 활성화하고 새로운 인문학 저술가를 발굴하기 위해 이 상을 제정했다”면서 “대학의 연구자와 다양한 집필 활동을 하는 신예 또는 중견 저술가들이 많이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다. 창비를 비롯해 문학동네, 세계사, 문학의오늘, 문학과지성 등 대형 출판사와 신문사 등에서 최고 1억원의 상금을 내건 문학작품 공모가 부러웠던, 인문사회 전문 저술가들은 호재를 만난 셈이다. 염종선 창비 편집국장은 7일 “대학 교수나 연구소의 박사학위 소지자를 대상으로 국가에서 최고 2000만원의 저술비를 제공하는 등 관(官) 주도의 인문·사회과학 논문들이 양산되고 있지만, 일반 독서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통하는 글쓰기, 소통하는 단행본은 거의 없다”고 지적한 뒤 “좋은 필자들을 정부가 지원하는 학술논문에 빼앗겨서 읽을 거리가 적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안을 제시한 것”이라고 의도를 밝혔다. 올해 지정주제는 ‘세대’ 또는 ‘결혼’으로 당선작은 상금 3000만원, 역사와 철학, 문학 등 자유주제 당선작은 상금 2000만원이다. 창비의 이런 시도는 사실 처음은 아니다. 2003년 민음사는 업계 최초로 ‘올해의 논픽션상’을 제정해 인문사회계열의 원고를 찾아나선 적이 있다. 지금도 거금인 5000만원의 상금을 내걸었다. 첫해에 박규원이란 작가가 중국 영화계에서 ‘영화 황제’로 기억됐던 독립운동가의 아들인 한국인 배우 김염을 추적한 평전 ‘상하이 올드 데이스’로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민음사는 2004년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2005년에 박정석의 인도네시아 여행기 ‘용을 찾아서’를 다시 당선작으로 냈다. 요즘은 흔한 여행기이지만, 당시에는 참신한 원고였다고.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장은수 대표는 “2003년 무렵 문학이 아닌 인문서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있다고, 기자나 교수·연구원 등 고급 저자들도 쉽게 발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그러나 매년 약 100편의 공모작이 들어왔지만, 대체로 회고록들이었다. 블로그 활성화로 나타난 ‘파워 블로거 탄생’ 이전의 상황이었다. 장 대표는 “8년이 지나 콘텐츠 환경과 출판 환경이 바뀌었으니 창비가 잘되길 바란다”면서 “창비에서 ‘대박 원고’를 낚는다면 민음사를 비롯해 많은 출판사가 달려들지 않겠나”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골목 서점들은 사라지고, 온라인서점 사업모델은 정점을 찍었으며, 전자책은 비전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이번 인문저술 공모가 독서인구 확장이라는 돌파구를 마련해 주길 바라는 것이다. “모든 국민이 저술가”라며 원고를 공모하는 곳이 더 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우수저작 및 출판지원’ 사업으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30편의 원고를 공모한다. 인문, 사회과학, 과학 등 3개 분야다. 상금은 1000만원이다. 저자에게 500만원, 출판할 수 있도록 500만원을 지원한다. 신청기간은 5월 21일까지로, 올 11월 30일까지 도서로 발간이 가능한 원고를 찾는다. 염 국장과 장 대표는 “셀프 브랜딩 시대에 자신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법은 저술”이라며 “과감히 도전하라”고 입을 모았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김병종의 화첩기행3-고향을 어찌 잊으리/효형출판 펴냄

    김병종의 그림을 보면 글을 읽는 듯하고, 글을 읽으면 그림을 감상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일상을 잘근잘근 씹어 예술이란 소화액에 잘 버무려낸 듯한 그의 그림과 글은 그래서 문(文)과 예(藝)의 문외한으로부터 고수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읽히는지 모른다. 이는 그의 ‘화첩기행’에 특히 잘 나타나 있다. 화첩기행은 이미 한 일간지에 부분적으로 연재되고, 단행본으로도 두 권이 출간됐는데, 그동안 미루어왔던 세 번째 해외편이 최근 출간됐다. ‘김병종의 화첩기행3-고향을 어찌 잊으리’(효형출판 펴냄)는 이런저런 이유로 고향과 고국을 떠났거나 다시 돌아오지 못한 채 남의 나라 땅에서 한 줌 흙이 된 우리 예술가들의 자취를 더듬어 엮은 책이다. 일본과 중국, 유럽, 러시아 등 여러 곳을 다니면서 낯선 골목과 모퉁이, 광장에서 떠도는 한국의 예술혼들과 만나 나눈 ‘예혼의 대화록’인 셈이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역마직성(驛馬直星)이란 병에 걸린 지은이는 안식년(그는 서울대 미대 교수다)을 얻어 1년간 종횡무진 떠돌았다. 그가 이국에서 만난 예술혼의 주인공들은 ‘만인의 연인’으로 각인된 전혜린, 중국 영화사의 별이 된 김염, 대지를 적시는 자유와 저항의 노래를 부른 빅토르 최 등 14명. 지은이는 지금까지 나온 ‘화첩기행’중 이번 해외편을 가장 힘들게 썼다고 했다. 추측컨대 이는 여독의 피로 때문이라기보다는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조국을 그리며 스러져간 예혼의 아픔을 함께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혼자 마시는 커피는 독약처럼 쓰다. 스무 살 무렵 내 정신의 중량을 지탱해준 몇 권의 책들 속에 남아 있던 전혜린의 일기며 에세이들을 꺼내 읽는다.’전혜린이 머물던 독일 뮌헨에서 그는 귀기와, 도발과 광기로 불온한 그녀의 글을 읽으며, 그녀가 공부하고 거닐었던 학교와 골목을 헤집으며 스케치북을 편다. 대한민국이 참다운 문화강국, 예술강국이 되기 위해선 원혼이 되어 구천을 떠도는 예술가가 더는 나오지 않기를 지은이는 소망하고 있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광주국제영화제 새달2일 개막

    광주국제영화제 새달2일 개막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4회째에 접어든 광주국제영화제가 올해는 관객들과 보다 편안하게 호흡할 채비를 갖춰 새달 2일 개막한다. 우선 상영관 6곳을 모두 도보로 10분 이내에 이동할 수 있는 시내 충장로 부근으로 정했고,터미널·역에 안내 부스를 설치했다.또 10일부터 열리는 ‘광주비엔날레’의 일정과 맞물림으로써,관람객들이 문화·예술의 향취에 흠뻑 젖어들 수 있게 했다.“부산영화제가 산업과 연계된 영화제라면,광주영화제는 보통 이상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을 위한 영화제”라는 임재철 프로그래머의 설명대로 관객들에게 보다 편리한 관람 환경을 제공한 것. 영화제를 여는 개막작은 일본의 와타나베 겐사쿠 감독의 ‘러브드 건’.부모의 복수를 꿈꾸는 킬러와 부모를 잃은 소녀의 러브스토리를 파격적인 영상에 담은 작품이다.폐막작은 남도를 떠도는 장돌뱅이의 고집스러운 인생에 감독 자신의 삶을 투영한 배창호 감독의 신작 ‘길’이다. 120여편이 소개될 메인 상영작에서는 거장과 신예들의 신작을 동시에 만날 수 있다.‘히로시마 내 사랑’의 프랑스 감독 알랭 레네는 뮤지컬 코미디 ‘입술은 안돼요’에서 이혼 사실을 숨기고 부호를 만나는 한 여성의 좌충우돌을 들려준다.이집트를 대표하는 유세프 샤힌의 ‘알렉산드리아…뉴욕’,미국 다큐멘터리의 거장 로스 맥엘위의 ‘셔먼 장군의 행진’,에롤 모리스의 ‘전쟁의 안개’등도 만날 수 있다.신예들의 도전적인 작품들로는 조르주 바타이유의 소설 ‘어머니’를 각색한 크리스토프 오노레의 ‘어머니’,베니스영화제 신인감독상 출신의 압델라티프 케시시의 ‘레스키브’,올해 칸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선정된 양 차오의 ‘여정’등이 소개된다. 중장년 영화팬들의 향수를 자극할 영화들도 선보인다.‘닥터 지바고’‘영화의 탈출’‘석양의 무법자’‘레오파드’등 시네마스코프 시대의 대표작들이 ‘와이드 스크린의 황금시대’섹션에서 상영된다. 세 개의 회고전도 눈길을 끈다.‘장-마리 스트라우브와 다니엘 위예 회고전’에서는 프랑스,독일,이탈리아 3개국을 넘나들며 제작,촬영,편집,각본에 이르기까지 영화 전과정을 통제한 두 시네아티스트의 작품들이 선보인다.또 식민지 시대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인 배우 김염의 작품을 소개하는 ‘상하이의 김염회고전’과,현대사회의 부조리를 영화미학으로 승화시킨 이탈리아의 거장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걸작선’도 마련된다. 부대행사로 9·10일 ‘디지털(HD) 영화제작 이해과정’이라는 강좌도 개설했다.31일까지 홈페이지(www.giff.org)를 통해 선착순 접수한다.영화제의 입장료는 홈페이지 또는 무비OK(www.movieok.co.kr)에서 신청을 받는다.개막작과 심야상영작은 1만원,그밖의 상영작은 5000원.당일 현장매표소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폐막은 새달 11일. 김소연기자 purple@seoul.co.kr
  • 화쟁기호학으로 풀어본 삼국유사

    ‘경덕왕 19년인 760년 4월 초하룻날에 해가 둘이 떠올라 열흘이 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월명사가 도솔가를 부르며 산화공덕(散花功德)의 의례를 행하였더니 두 해의 괴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삼국유사’감통편 ‘월명사 도솔가’조)이 황당무계한 말은 과연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국문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이도흠 박사는 경덕왕이 전제왕권을 확립하는 마무리 책략으로 여러 면에서 모자라는 세살바기인 건운(혜공왕)을 세자로 옹립하려 하자 김염상을 비롯한 귀족세력이 왕권에 도전,두 세력이 맞선 것을 상징화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신라인들은 태양을 왕으로 여겼다는 얘기다.또 왕실의 안정을 위해서는 현실적인 대응 뿐 아니라 주술적인 힘도 필요해 승려로 하여금 화엄의 이상을 널리 펴는 꽃을 부리는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는 것. 이박사는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푸른역사 펴냄)에서 우리가 말로만 듣고 읽어보지 못했거나,읽었어도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삼국유사’를 원효의 화쟁(和諍)사상을 바탕으로 철저한 고증을 거쳐 알기 쉽게 설명했다.자신이 창시한 화쟁기호학으로 풀어낸 우리 신화와 문화의 원형 찾기다.화쟁기호학은 이분법을 극복하고,세계를 셋으로 보는 화쟁사상을 바탕으로 형식주의와 마르크시즘 비평을 결합,텍스트의 의미와 미적 가치를 끊임없는 진동의과정에 놓는 새로운 인문학 비평이론이다. 우리 앞의 사물을 드러나는 모습(품)과 숨어있는 본질(몸),작용하는기능(짓)등 세가지 범주로 인식한다.우리문화는 한(恨)의 문화가 아니라 정(情)과 한의 화쟁의 문화이며,우리에게 최상의 맛은 ‘얕은맛이 나는 깊은 맛’이요 ‘뜨거운 시원함’이라는 것. 경문왕의 귀가 당나귀 귀가 된 이야기는 헌안왕을 속이고 왕위에 오른 사실을 은유한 것이며,조신의 꿈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왕자였으나 계속 푸대접받는데 격분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당한 김흔과 그일가의 무상한 삶을 환유한 것이라는 등 명쾌한 해석을 내놓는다. 신라의 조상신들이 산으로 온 데서 풍류도를,선도산 상모 사소의 법회에서 풍류만다라를,도솔가에서 화엄만다라를 발견한다.신라인은 오랜 세월동안 풍류도라는 세계관으로 자기 앞 세계를 바라보고 대응하다가,불교가 들어오자 풍류도와 합해 풍류만다라라는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하더니,통일 후 극락정토 왕생을 소망하며 화엄의 원리를 체계화해 화엄만다라의 세계관을 정착시켰다고 강조한다. 김주혁기자 jhkm@
  • 유영식감독 데뷔작 ‘아나키스트’중국 상하이 올 로케

    곧게 뻗은 남경대로,황포(黃浦)강가의 유럽식 건물,‘동양의 베니스’로 불리는 소주(蘇州)의 수로마을….영화‘아나키스트’를 촬영하고 있는 중국 상하이 필름 스튜디오 처둔(車墩)세트장에는 1920년대 상하이의 모습이 그대로재현돼 있다. 사방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이 이국적인 오픈 세트장이야말로피끓는 열혈남아들의 액션과 사랑을 다루는 ‘아나키스트’를 찍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유영식 감독(33)의 장편 데뷔작‘아나키스트’는 이데올로기의 전시장이었던 1920년 상하이를 배경으로 의열단의 항일 테러활동에 가담한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의 활약상을 담은 액션느와르.첫 한·중 합작 영화로 상하이 필름스튜디오는 8억원을 받고 세트와 소품,의상,엑스트라등 촬영에 필요한 모든것을 지원했다.‘중국 중앙정부의 공식경로를 통해 촬영허가를 받아내기는이번이 처음’이라는게 제작사인 씨네월드측의 설명.100% 중국 현지에서 촬영될 ‘아나키스트’의 제작진은 내년 5월 개봉을 목표로 영화찍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쵤영 일주일째가 되는 29일 밤.차가운 공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처둔 세트장은 100여명의 한·중 스텝과 배우들의 움직임으로 부산했다.허무주의 지식청년 세르게이(장동건)가 일본 경찰 사무소를 폭파하는 것이 이날 촬영의 주요 내용.창백한 갓등이 을씨년스럽게 거리를 내리비추는 일본인 거주지역,감독의 “액션”소리에 멀리 인력거 뒤로 한 청년이 뚜벅뚜벅 걸어온다.이내멈춰서 담배에 불을 붙인다.그 순간 일본 경찰사무소는 풍비박산돼 화염에휩싸인다.감독은 이 폭파장면을 실감나게 찍기위해 두 대의 카메라로 정상촬영과 고속촬영을 동시에 진행했다. 아나키스트는 상하이 필름 스튜디오에서만 전체의 60% 가량을 촬영할 예정. 유영식 감독은‘격동기 역사에 묻힌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의 삶을 발굴하는 자세로 제작에 임하고 있다’고 밝혔다. 상하이 김종면기자 jmkim@ * ‘아나키스트’ 주연 장동건 깎은 밤 같이 반듯한 얼굴에 크고 깊은 눈매가 인상적인 ‘조각미남’ 장동건(28).그는 이제 미남배우나 청춘스타가 아니라 ‘연기할 줄 아는’ 배우로 불리길 원한다.올초개봉된 ‘연풍연가’와 최근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등을 통해 연기폭을 넓혀온 그가 ‘아나키스트’에서는 허무주의 인텔리청년역을 맡아 연기파 배우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제가 맡은 세르게이는 테러단체의 리더에서 일제의 고문 후유증 때문에아편쟁이로 파멸하는 비운의 인물입니다.낙차 큰 주인공의 캐릭터를 어떻게입체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고민이에요”.‘아나키스트’의 촬영에 임하는 그의 눈빛에는 연기다운 연기를 해보겠다는 열의가 가득 담겨 있다. “‘아나키스트’는 치열한 대의명분을 추구하되 달콤한 낭만을 잃지 않는‘감성적인’ 영화입니다.뜨거운 가슴 하나로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고 사라진 아름다운 남자가 제가 해낼 역활이죠”.장동건의 이름 앞에 진정한 ‘연기자’란 이름이 붙게 될지,말쑥한 외모로만 기억되는 ‘거품배우’에 그칠지 ‘아나키스트’는 그 관건이 되는 작품이다. *'상하이 필름 스튜디오'…동양의 할리우드 1905년 최초의 자국 영화인 ‘유원경몽(游園驚夢)’에서부터 중국 영화는늘 그 위대한 자취를 상하이에 남겨왔다.1920년대 상하이는 이미‘동양의 할리우드‘라 불리며 아시아영화의 중심지로 군림했다.오늘의 홍콩·상하이·베이징·타이완 영화들은 모두 그 뿌리를 상하이 영화에 두고 있다.유구한역사를 지닌 영화의 도시 상하이.이곳의 명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상하이필름 스튜디오’(SFS)다.상하이 국제 공항에서 이곳까지는 자동차로 10분 정도 걸린다. 상하이 필름 스튜디오는 베이징·창춘(長春)과 함께 중국의 3대 스튜디오로 꼽히는 중국 영화의 산실.지난 49년 건립된 이래 수많은 걸작 영화들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다.장이모 감독의 ‘상하이 트라이어드’,첸 카이거 감독의‘패왕별희’‘풍월’등이 상하이 필름 스튜디오에서 찍은 대표적인 작품이다.스필버그 감독의 ‘태양의 제국’‘상하이 1920’을 비롯한 많은 할리우드 영화와 ‘레드 바이올린’등 유럽합작 영화들도 이곳 신세를 졌다. 상하이 필름 스튜디오는 특히 첨단장비를 이용한 디지털 특수효과와 15년의 역사를 지닌 중국 유일의 영화 스턴트팀을 운영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스튜디오 2층 벽에는 중국 배우 차이추성(蔡楚生)·완링위(阮玲玉),‘상하이의 조선인 영화황제’김염 등 당대 명배우들의 사진이 나란히 결려있어 중국영화사의 흐름을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게 한다. 중국에는 각 성(省)마다 대형 스튜디오가 있다.등소평시대 이전에는 전액정부의 투자로 운영됐다.그러나 등소평의 개방화 정책 이후 각 스튜디오는정부의 독립채산제 운영지침에 따라 해외합작 등을 통해 재원을 보충해오고있다.상하이 필름 스튜디오는 그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해외합작을 추진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상하이 필름 스튜디오는 현재 상하이 외곽지역에 60만평 규모의 초대형 오픈 세트를 건설중이다.이 프로젝트는 지난 93년부터 진행돼 온 것으로 50%정도의 공정을 보이고 있다. 오픈 세트내에는 영화‘아나키스트’의 무대인 1920년대 상하이의 중심가 남경대로를 비롯해 홍등가·아파트·백화점 등이 고스란히 재현돼 있다.동양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 세트는 중국 5대 감독 첸 카이거가 직접 설계한 것이어서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다.상하이 김종면기자
  • 상해의 조선인 영화황제/스즈키 쓰네카스 지음(화제의 책)

    중국영화사상 유례없는 황금기를 누리며 「동양의 할리우드」라고 불렸던 1930년대 상해.그곳을 무대로 「영화황제」라는 칭송을 받으며 최고의 배우로 활약했던 조선인 배우 김염(중국명 친옌)의 일대기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린 책. 거장 손유 감독의 「풍류검객」으로 영화계에 정식 데뷔,톱스타가 되기까지의 개인적 일화뿐 아니라 문화혁명기의 농촌해방과 수용소생활 등 당대의 암울했던 시대사도 가감없이 보여준다. 특히 이 책은 김염의 삶이라는 창을 통해 1930년대 중국 인기배우들의 내밀한 사생활까지 덤으로 엿보게 하는 즐거움을 준다. 첫 아내 왕인미와의 결혼과 이혼,주은래 수상으로 하여금 그를 「중국의 부마」라고 부르게 한 중경시대 이래의 톱스타 진이와의 결혼생활 등 결코 순탄찮았던 김염의 생애가 극적으로 그려진다. 오늘의 홍콩,상해,북경,대만 등의 영화는 그 뿌리를 모두 30년대 상해영화에 두고있다.그런 만큼 30년대 상해 영화계의 주인공 김염의 삶을 조명한 이 책은 현재의 중국어권 영화를 한 은막스타의 개인사를 통해 우회적이지만 재미있게 이해하게 하는 장점을 갖고 있다.실천문학사.이상 옮김.6천8백원.〈김종면 기자〉
  • 돈받고 「중기 대여허가서」 발급/부산시청 공무원 영장

    ◎41개 업체도 입건 【부산】 부산지검 특수부 강대성검사는 부산시 건설현장과 7급공무원 김병근씨를 뇌물수수 및 허위공문서 작성 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일등기업 대표 김염줄씨(60) 등 부산시내 41개 중기대여업체 대표를 뇌물공여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김씨는 지난해 2월초 3년간 묶여있던 신규 중기대여업종허가가 풀리자 김염줄씨 등 중기대여업체 대표로부터 1천만원을 받고 허가조건인 중기주차장을 갖추지 않았는데도 주차장시설 보유증명서를 발급해준 혐의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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