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열 칼럼] 한국 외교가 직면한 불신의 이중구조
한국은 불신의 시대에 진입했다. 지난 8월 3일 발표한 동아시아연구원(EAI)의 동아시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 국민의 미국에 대한 신뢰도는 45%, 일본은 37%, 중국은 15%이다. 반대로 불신의 수준은 중국이 74%, 일본 52%, 미국 46% 순이다.
한국 국민의 미국에 대한 신뢰는 2022년 85%에서 불과 4년 만에 반토막이 났다. 지난 6월 여론조사기관 퓨 리서치의 36개국 여론조사에서 미국에 대한 신뢰도 평균 47%를 밑도는 수준이다. 중국에 대한 신뢰는 2017년 사드 보복 이래 줄곧 10%대에 머물고 있다. 일본의 경우 ‘노(No) 재팬’ 등 불매운동이 뜨겁던 2020년 4.4%까지 떨어진 신뢰도가 2026년 37.1%까지 상승해 미중 양국의 경우와 대비되지만, 여전히 국민의 반 이상은 일본에 대한 불신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본래 국제정치는 세계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무정부 상태이고, 항시 생존의 위협에 노출돼 있는 세계이다. 이런 구조에서 신뢰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상대국과 신뢰가 쌓여 있을 때 상대의 의도에 대한 불확실성이 낮아지고 우발적 충돌 위험이 완화되며, 측정 가능한 경제적 이익이 창출된다.
반면 신뢰가 없으면 오해, 긴장,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고 협력의 유인이 낮아진다. 신뢰는 협력의 촉매자가 되고 불신은 협력의 방해자가 된다. 그런 가운데 입장이 비슷한 국가들은 군사동맹, 무역협정, 경제연합, 기술제휴, 기후협정 등을 통해 상호 신뢰 관계를 구축하며 평화와 번영을 추구했다.
현재 신뢰의 체계는 악화일로다. 이는 일부 국가의 일시적 갈등이나 감정적 대립이 아니라 국제 질서의 근본적 변화에 기인한다. 신뢰의 중심축이던 미국은 패권 쇠퇴에 따라 각종 국제제도에 대한 지지를 축소하거나 철회하고, 동맹 공약을 조건화·거래화하고 있다. 러시아는 강압적 행동으로 국제사회의 기존 규칙과 규범을 파괴하고 있고, 중국은 공급망 등 협력의 연결고리를 지정학적 압박과 보복의 수단으로 무기화해 경제적 신뢰 체계를 흔든다.
한국 여론은 미국이 자국우선주의에 입각해 가치와 신뢰 기반 동맹에서 거래 기반 동맹으로 전환하는 것에 위화감, 불안감, 배신감을 표시하고 있다. 또한 중국 경제에 과잉 의존하면 취약성이 증대되어 언제든 보복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해 있다. 일본의 경우, 관계 개선에 따른 호감도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역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무역 보복의 기억이 여전히 협력의 기운을 억누르고 있다.
이렇듯 신뢰 자산이 하락하는 가운데 현 정부는 과거와 달리 이들 국가와 합의나 협정을 맺을 때나 협력의 범위를 확장할 때 더 많은 거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공약 이행 의지가 의심되므로 위험회피(헤징) 전략도 고려해야 한다. 상대 행동에 대한 예측 가능성도 떨어지기 때문에 장기적 이익을 추구하기 쉽지 않다.
더욱이 정부는 대외 불신이 국내적으로 분열되는 양상을 목도하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보수 진영 응답자들은 미국에 대해 63%(신뢰) 대 32%(불신)로 신뢰를 보였고, 진보 진영은 34% 대 59%로 불신이 높다. 일본에 대해서도 보수는 54% 대 39%로 신뢰가 높고, 진보는 22% 대 66.7%로 불신이 높다.
압도적 불신의 대상인 중국에 대해서도 보수는 12% 대 85%로 불신이 깊지만 진보는 26.4% 대 63%로 그 정도가 낮다. 현 정부를 지지하는 진보 진영은 미국과 일본을 불신하고 중국에는 상대적으로 낮은 불신감을 가진 반면 보수 진영은 미국과 일본을 신뢰하고 중국에는 강한 불신감을 표시한다.
이런 경우 정부는 특정국 관계에 전략적 결단을 내릴 때 상대 진영으로부터 ‘굴종 외교’, ‘안보 실종’ 등 반대에 직면하고, 내부 분열로 상대국에 신뢰의 시그널을 주지 못해 협상력이 약화되고 종종 결정 연기나 미봉책에 머무른다. 핵심 외교 합의는 정부가 교체될 때마다 흔들리거나 번복되어 상대국으로부터 신뢰 상실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렇듯 대외 불신과 대내 분열의 이중 구조는 한국 외교의 활로를 제약하고 있다. 실용주의 원칙에 기반하고 진영논리를 넘는 외교정책을 견지하지 않고서는 불신의 세계에서 신뢰 네트워크를 재구축하기 어렵다.
손열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