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추석의 미래
1970년대 초, 지방 중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해마다 추석이면 아버지를 따라 종가가 있는 시골 마을로 향했다. 어린 나에게 그 여정은 즐거운 귀향이 아니라 낯선 규칙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었다. 일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당숙과 재종형제들은 친척이라기보다 낯선 손님에 가까웠다. 촌수를 몰라 실수할까 봐 눈치만 보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 어색함은 나만의 기억이 아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대가족을 흩어 놓은 세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은 통과의례였을 것이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 갈등의 성격은 달라졌다. 조부모를 중심으로 모이던 확대가족은 이제 구심점마저 흔들린다. 벌초와 성묘에 며칠을 써야 하는지, 친가와 처가 중 어디를 먼저 가고 얼마나 머물러야 하는지를 두고 부부는 매년 협상을 벌인다. 산림조합중앙회 집계로 연간 벌초 대행 서비스만 9만 건이 넘고 시장 규모는 100억원대에 이른다. 조상의 묘조차 이제 외주로 넘어간 셈이다.
명절 상 앞에서는 또 다른 전선이 펼쳐진다.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는 일은 여전히 며느리와 딸의 몫으로 굳어 있고, 설거지통 앞에서 벌어지는 실랑이는 해마다 되풀이되는 명절 뒷담화의 단골 소재다. 한 유통업체 자료를 보면, 명절 음식을 직접 만들겠다는 응답은 1년 새 10% 포인트 가까이 줄고 간편식과 여행 소비가 그 자리를 채웠다. 차례 음식 만들기와 설거지를 둘러싼 젠더 갈등이 격해질수록, 사람들은 차라리 그 노동 자체를 시장에 맡기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다.
더 근본적인 변화는 조상 추모의 뜻이 옅어진다는 데 있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2년 음력 8월 15일, 피란민 오희문은 “산속에 머물며 바위 아래에서 잤다. (중략) 오늘은 추석인데 성 남쪽 산소에 차례 지내는 사람이 없”다고 ‘쇄미록’에 적었다. 다음 해 추석 때 오희문은 피란 중이었지만, 거처를 마련했고 “누이가 아버지의 신위 앞에 술, 과일, 떡과 구이, 탕을 갖추어 차례를 지냈다. 오늘은 바로 추석이다”라고 적었다. 효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내세웠던 조선 시대 선비 오희문은 피란 중에도 추석 차례를 모시려 안간힘을 썼다.
그때와 오늘 사이에는 핵가족화, 여성의 경제활동 확대, 개인의 삶을 공동체보다 앞세우는 개인화라는 변수들이 놓여 있다. 전쟁과 굶주림도 꺾지 못했던 추석 의례가 오늘날 뒷전으로 밀리는 것은 이 변수들이 조상 추모라는 공동의 의무를 개인의 선택 사안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세계 부국 10위인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는 물질적 결핍 대신 계층과 자산 격차가 세대 갈등의 축이 되었다. 이제 그 격차는 차례를 지낼지, 얼마나 간소히 지낼지를 둘러싼 의례의 온도 차로 다시 옮아가는 중이다. 조상 추모라는 오랜 공동의 언어가 세대마다 다르게 번역되면서, 정작 그 언어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추석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의례가 완전히 사라지기보다 상징적 최소 형태로 압축되리라 본다. 축수형 차례, 차례 대신에 가족 식사, 벌초와 차례 음식의 외주, 온라인 사이버 성묘가 그 조짐이다. 알맹이는 남기되 감당 방식은 형편에 맞춰 가벼워질 것이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추석만 다가오면 어김없이 ‘추석 민심’을 이야기한다. 벌초와 요리 노동으로 지친 대가족이 모처럼 둘러앉은 밥상에서, 정치적 의제를 놓고 대화할 수 있을까. 최근 여론조사에서 국민 다수가 특정 국정 현안에 반대해도 정치권이 강행 처리하는 모습을 우리는 여러 차례 지켜보았다. 정치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명절 밥상이 여론의 축소판으로 기능하던 시절은 이미 저물고 있다.
낯설었던 문중에서 흩어지는 대가족으로, 다시 존폐를 묻는 의례로, 추석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정치권이 들어야 할 진짜 추석 민심은, 이 명절을 어떻게 다시 짜야 공동체가 함께 누렸던 즐거움을 되살릴 수 있을지에 대한 국민의 생각이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음식인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