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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희경
    202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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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CIA 신고하기

    [씨줄날줄] CIA 신고하기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일부 여권 지지자들이 ‘CIA 신고’를 인증하고 있다. 탄핵에 찬성한 유명인을 미 중앙정보국(CIA)에 신고했다는 캡처 화면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다. 이런 움직임이 처음은 아니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 탄핵을 지지한 유명 인사들을 반미주의자로 CIA에 신고한 것이 ‘원조’였다. 신고 대상의 주류는 연예인들이다. 가수 아이유는 국회 앞 탄핵 찬성 집회 참가자들에게 선결제로 음식을 제공했다고, 배우 김민교는 대통령의 비상계엄 패러디 영상을 게시했다고 각각 신고 명단에 올랐다. 정치적 의사표현부터 풍자 개그까지 가리지 않고 ‘반국가적 행위’로 해석한 것이다. 어제는 조기대선을 거론한다는 이유로 여권 인사인 홍준표 대구시장도 신고를 당했다. 이들을 굳이 미국 정보기관에 신고하는 까닭은 간단하다. CIA가 신고된 이들을 ‘종북 세력’으로 판정해 이들에 대한 미국 입국심사를 까다롭게 하거나 무비자 입국 프로그램인 ESTA(전자여행허가제) 발급을 저지하겠다는 의도다. ESTA가 거부되면 주한 미 대사관에서 비자 인터뷰를 거쳐야 하는 번거로움을 겪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 신고자들의 논리다. 미국이 정치·외교적 이유로 입국을 제한한 사례들이 있기는 하다. 최근 미중 기술 패권다툼 와중에 중국 기업들은 내년 초 미 가전전시회(CES) 초청장을 받고도 90%가량 비자 발급을 거부당했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애국자법으로 외국인 학자들의 입국이 제한된 적도 있다. 그러나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미국의 대외 정보기관인 CIA가 그 신고들에 신경을 쓸 리가 만무하다. 탄핵 촉구 집회의 팬들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아이유는 일부 보수 지지자들의 맹비난을 받는 중이다. 미국 정보기관에 의존하는 사대주의 세계관까지 엉뚱하게 뒤엉켜 왜곡된 현실 대응 방식이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세계 10위 경제대국의 위상과는 한참 거리가 먼 살풍경이 씁쓸하기만 하다. 홍희경 논설위원
  • [씨줄날줄] 조건부 상여금도 통상임금

    [씨줄날줄] 조건부 상여금도 통상임금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어제 한화생명보험과 현대자동차의 통상임금 소송 상고심에서 재직 여부나 특정 일수 이상 근무 조건을 기준으로 지급되는 조건부 정기 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포함된다고 판시했다. 2013년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되지만 재직자 조건이 붙으면 고정성이 없어 통상임금이 아니다’라고 했던 전원합의체 판결을 11년 만에 뒤집은 것이다. 법원 판결은 통상임금의 범위를 넓게 보려는 경향을 일관되게 유지해 왔다. 2022년엔 통상임금을 소급 적용해 지급할 때 재직자와 퇴직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로 새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통상임금 범위가 확대되면 연장근로수당과 휴일수당, 퇴직금 등이 함께 늘어나 근로자들의 임금 실수령액이 상승하는 효과가 생긴다. 경총은 이번 판례 변경으로 연간 6조 7889억원의 추가 인건비가 발생할 것으로 추정했다. 기업 입장에선 법정수당 부담 증가로 근로시간 단축 등에 관심을 두게 된다. 노사 모두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임금체계는 기업 내 노사 협의나 사회적 대화, 입법을 통해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다. 하지만 현실은 ‘임금체계의 사법화’나 다름없다. 노사정이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하고 갈등이 곪은 뒤 송사를 거쳐 규율이 생기는 것이다. 사법 판단은 현실의 변화를 사후적으로 제도화할 뿐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다. 대법원의 전원합의체 판결은 그간의 갈등을 매듭짓는 종착점이 아닌 새로운 하급심 소송 홍수의 시발점이 되곤 한다. 2013년 통상임금 판례 이후 1년 내 250여건의 소송이 계류 중이라는 통계가 나오기도 했다. 통상임금 기준에 따라 3년치 임금을 재산정해 달라는 청구가 대부분이었다. 이번 판례도 또 다른 갈등의 물결을 몰고 올 가능성이 있다. 시대적 과제를 합의나 입법을 통해 풀지 못하고 법정 다툼으로 해결하려는 구조적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똑같이 반복될 일이다.
  • “미활용 軍용지 200만평… 첩첩 규제에 기업·사람들 연천 떠나”

    “미활용 軍용지 200만평… 첩첩 규제에 기업·사람들 연천 떠나”

    김영봉 한반도발전연구원장접경지역 이유 70년 희생국가의 전폭적 지원 필요교통망 늘려 접근성 강화해외기업 유치 안보 도움김덕현 연천군수연천 93%가 군사보호구역수도권에 포함 역차별받아국방부 개발 절차 5년 넘어이젠 정부 발 벗고 나서야이정훈 경기북부 연구단장아직도 70년대 사고 갇혀軍 떠난 토지 그대로 놔둬1000만 노동력 접근 용이새로운 투자처 기회 열려수도권인 경기도에서 인구 및 지역 소멸이 급격히 진행되고 있다. 특히 경기도 최북단 접경지역인 연천군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연천군은 가평군과 함께 인구 소멸 위험 지역이다. 면 단위 지역에서는 65세 이상 노인 비율이 6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초고령화가 진행 중이다. 연중 신생아가 단 1명도 태어나지 않는 면 지역도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불야성을 이루던 신서면 대광리역 앞 상가는 제5보병사단이 이전해 나가면서 군인들의 인적마저 끊겨 90% 이상 문을 닫았다. 연천군은 인구와 지역 소멸을 막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는 ‘주민 기피시설’이라며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제3현충원과 광역 화장장 유치를 추진할 만큼 절박하다. 김덕현(68) 연천군수는 “이제 국가가 발 벗고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연천이 소멸하면 접경지역은 누가 지키느냐는 것이다. 서울신문은 연천을 비롯한 접경지역의 소멸을 막고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사회와 정부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주제로 김 군수와 전문가들이 참석하는 ‘접경지역 균형발전 간담회’를 지난 17일 개최했다. 김영봉(75) 한반도발전연구원장, 이정훈(62) 경기연구원 경기북부특별자치도연구단장이 참석했고 홍희경 서울신문 논설위원이 진행했다. -경기 북부는 군사시설보호구역이라는 태생적 제약에 더해 수도권정비계획법의 각종 규제를 받으며 이중고를 겪어 왔다. 2011년 접경지역 지원 특별법이 제정됐음에도 실질적 발전이 더뎠던 이유는. 김 군수 연천군의 92.9%인 627㎢가 군사보호구역이다. 화장실 하나 짓는 일부터 모든 절차에 군부대 허가가 필요한 상황이다. 정책적인 배려도 받지 못했다.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해 공공기관을 전국에 분산 이전시켰지만, 수도권이란 이유로 경기도 접경지역에는 하나도 배치되지 않았다. 김 원장 4차 국토종합계획을 보면 남북 7개, 동서 9개 고속도로를 계획했는데 전부 서울 강남에서 시작해 남쪽으로만 뻗었다. 그보다 더 북쪽인 접경지역은 ‘연장선’이나 ‘확장’ 계획에 기대 사회간접자본(SOC)을 구축해야 했다. 지난 70년간 접경지역이 국가 안보를 위해 희생해 온 만큼 국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특히 교통망 확충을 통한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 이 단장 중국 개방이 본격화되던 1990년대 세계 유수 기업들이 경기 북부를 주목했다. 인천의 공항과 항만을 낀 접경지역이 최적지로 꼽혔지만 수도권 규제 때문에 중국 개방 흐름에 맞춰 상하이로 갔다. 미국에 도널드 트럼프 2기 내각이 들어서게 됨에 따라 중국에서 벗어나려는 다국적 기업이 늘어난 지금은 두 번째 기회가 될 수 있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모습이다. 인천공항에서 시작해 김포, 파주를 거쳐 철원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투자처가 될 수 있는데도 말이다. 김 군수 군사보호지역, 수도권 규제, 인구 감소가 겹친 접경지역은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는 격이다. 새로운 패러다임과 함께 전략적 사고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연천에 미활용 군용지 200만평(약 660만㎡)이 있다. 인구 유발 시설인 기업과 대학 등을 유치해야 하는데 수도권 규제가 가로막고 있다. 그래서 기회발전특구, 그린바이오 클러스터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22년 11월 기준 통계를 보면 여의도 면적의 2.2배인 645만㎡의 경기도 군부대 부지가 미활용 상태로 방치돼 있다는데 이 부지들을 산업벨트로 활용할 수는 없나. 김 군수 개발 의지는 있으나 현실적 제약이 너무 크다. 토양 환경 평가부터 정화까지 국방부 절차로만 5년이 넘게 걸리니 그사이 기업들은 다 떠나 버린다. 이 단장 이런 비효율이 역사적 관성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게 문제다. 1953년 휴전 이후 27㎞, 지금은 25㎞ 띠를 군사보호구역으로 설정했는데 1970년대식 사고에 갇혀서 군부대가 나간 뒤 텅 빈 땅을 그대로 놔 두고 있다. 김 군수 지방자치단체 자체 예산이나 민간 참여로 토양 정화 및 지장물 철거 등의 조치를 진행하는 방안을 국방부에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질지 모르겠다. 강원도는 특별자치도가 돼서 미활용 군용지뿐만 아니라 군 시설물 활용까지 가능하게 됐으나 경기도 접경지역은 역차별받는 실정이다. 이 단장 사실 이 지역은 1000만명의 노동력이 한 시간 안에 접근할 수 있는 최적의 입지를 갖추고 있다. 경기 남부 판교처럼 글로벌 기업 투자의 새로운 거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안보를 위해 접경지역 개발은 통일 이후로 미루자는 주장도 설득력 있지 않은가. 이 단장 시대가 바뀐 것을 간과한 얘기다. 1953년 휴전 직후 우리가 북한보다 화력·경제력이 뒤질 때는 그 얘기가 맞았다. 그러나 이제 대한민국은 고도성장했고 지금의 전쟁은 공중전이 대세가 됐다. 핵심 군사시설만 규제하고 나머지는 행정에 넘겨야 한다. 미활용 군용지가 80%에 이르고 (연천군의 경우) 군사시설보호구역이 90%를 넘어서는데 어떻게 자치행정을 할 수 있나. 사람도 살지 않고 군인도 없으면서 지원 없이 이중 삼중 규제만 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김 원장 접경지역에는 풍부한 미개발 토지가 있다. 땅이 부족한 남쪽에서 싸우지 말고, 남북 관계가 어려워도 언젠가는 통일되니까 기업에 토지를 공짜로 줘서라도 경기 북부 접경지역을 키워 나가야 한다. 돌려서 생각하면 파주·연천·철원 등 비무장지대에 해외 기업을 유치하는 게 안보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이 기업들을 북한이 공격할 수 있겠나. 김 군수 안보와 국방력이 최우선이던 시기엔 군사시설과 훈련장, 사격장이 지역 성장의 걸림돌이 될지언정 안보 기능을 담당했다. 접경지역 주민들은 안보를 위해 희생하고 참았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군사시설 규제를 완화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어야 할 시점이다. 성장의 걸림돌이 빠져나간 자리를 방치하면 안 된다. 빼낸 자리에는 반드시 디딤돌을 놓아야 한다. 그게 바로 정부의 역할이다.
  • [길섶에서] 크리스마스실

    [길섶에서] 크리스마스실

    어린 시절 중학생이던 오빠의 우표첩은 내게 특별한 그림책이었다. 편지봉투에서 조심스레 떼어 모은 우표들과 대통령 취임식 같은 특별한 행사를 기념한 2장, 4장짜리 기념우표가 빼곡했다. 크리스마스실은 10장이 한 세트로 돼 있어 더욱 눈길을 끌었다. 성인이 돼서도 우체국에서 실을 보면 그때의 설렘이 떠올라 충동구매를 한다. 디지털 시대 편지가 설 자리를 잃으면서 실 판매도 줄었다. 그렇다고 실의 혁신이 멈춘 건 아니다. 2003년 십이지신을 담은 스티커형 실을 시작으로 2007년 전자파 차단 소재를 활용한 그린실이 등장했다. 피겨 여왕 김연아, 국민 캐릭터 뽀로로, 독도까지 시대의 아이콘을 담아냈다. 올해는 ‘브레드 이발소’ 캐릭터가 실의 새로운 얼굴이다. 배지와 패딩담요까지 다채로운 굿즈들이 함께 나와 즐거움을 더했다. 물론 실을 사서 결핵퇴치 모금에 참여한다는 의미는 변함없다. 작은 종이 한 장에 담긴 한 해의 초상화처럼 실은 늘 우리 삶의 한켠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편지가 사라진 세상에서도 실은 여전히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배달부다.
  • [씨줄날줄] 키즈버스

    [씨줄날줄] 키즈버스

    지난 주말 여의도 국회 앞 시위 현장에는 키즈버스가 있었다. 기저귀와 간식, 수유 공간으로 채운 버스는 육아맘들의 작은 해방구가 됐다. 아이와 함께 시위에 참여할 수 있다는 희망은 그 자체로 새로운 시민 문화의 탄생을 예고했다. 누구에게나 열린 시위에 모인 참가자들은 서로의 처지와 계층은 제각각이지만 모두 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한다는 공감대를 확인했다. 여의도는 늘 ‘정치 1번지’였다. 하지만 광장 집회의 물리적 위치와 문화적 위상은 확연히 바뀌었다. 1987년 혹한 속에 야당 대선후보 김대중이 연설했던 광장은 마포대교 건너 여의도공원이었다. 당시 아스팔트 비행장 위를 까맣게 매운 130만 시민은 권력에 저항하는 함성을 내질렀다. 군사정권 시대를 끝내겠다는 절박함으로 대중정치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서강대교를 넘어 국회 앞으로 옮긴 오늘날의 광장은 달랐다. 형형색색 응원봉들이 반짝였다. ‘전국 누워있기 연합’, ‘한국 마법소녀 협동조합’, ‘집에 가고 싶은 사람들’…. 재치 만발한 깃발들이 펄럭이는 공간이었다. 의사들은 부상을 대비해 의료 봉사에 나섰다. 추위를 이겨 내라며 거리 곳곳에는 핫팩이 비치됐다. 계엄 사태를 빚은 대통령의 담화는 극우 유튜버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했지만 그런 확증편향에 시민들의 경계심은 더 커진다. 계엄을 경험하게 해서 미안하다며 기성세대는 커피와 식사를 선결제했다. 청년들은 이렇게 좋은 대한민국을 망가트리지 않겠다며 추위 속에서 춤추며 광장을 지켰다. 중년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어느 가수의 응원봉인지 물었다. 엑스(옛 트위터)에서는 다음 집회를 위해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를 외우자는 제안도 공유됐다. 광화문의 보수 집회도 질서정연했다. 민주주의는 지금 진지하고 유쾌하게 성장판을 키우는 중이다. ‘시민 광장’이 여의도공원에서 국회 앞으로 자리를 옮겨간 30여년. 민주주의 초병인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산’도 옮겨 놓을 것 같다.
  • [씨줄날줄] 스피어피싱

    [씨줄날줄] 스피어피싱

    계엄령 관련 검색이 급증한 틈을 노려 계엄 문건으로 위장한 해킹 메일이 기승을 부린다. 당국도 비상이 걸렸다. 비상계엄 정보를 가장한 악성메일이 무차별 유포되고 있다며 정부는 첨부파일을 열거나 링크를 클릭하지 말라고 주의를 당부했다. 이런 형태의 해킹을 일컫는 말이 ‘스피어피싱’(Spearfishing)이다. 원래는 창이나 작살(spear)로 물고기를 꿰뚫어 잡는 낚시 방법을 말한다. 일반적인 피싱이 불특정 다수를 노린다면 스피어피싱은 특정 개인이나 조직을 겨냥한 맞춤형 공격이다. 스피어피싱의 무기는 ‘시의성’이다. 코로나19 대유행 초기에는 세계보건기구(WHO) 사칭 이메일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을 때는 구호단체를 가장한 문자들이 골칫거리였다. 북한 해커조직 ‘김수키’는 학자나 언론인을 사칭해 북한 전문가들을 노린 이메일을 보냈다. 국제 택배 배송지연이 빈번하던 시기에는 택배 조회 링크로 위장한 메시지 피싱이 성행했다. 먹잇감으로 삼는 사건은 다르지만 하나같이 사회적 관심사나 불안 심리를 교묘히 이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계엄과 같은 중대한 상황에서 정보를 놓칠지 모른다는 불안감, 코로나 시기에 WHO의 중요 지침을 놓치면 안 된다는 조급함, 혹은 업무 관련 메일을 무시했다가 경쟁에 뒤처질까 하는 조바심. 평소 정보보안 위험성을 잘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링크를 클릭하게 된다. 스피어피싱에 낚이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어도 순간의 방심으로 낚이는 실수는 흔하다. 순식간에 치명적인 악성코드에 감염될 수 있다. 스피어피싱은 사회의 불안과 공포를 끊임없이 자양분 삼아 앞으로도 건재할 듯하다. 불안한 마음에 계엄령이나 전쟁 같은 자극적인 키워드 앞에서는 누구든 반사적으로 반응한다. 스피어피싱이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면 해법은 하나뿐이다. 우리 사회가 좀더 건강하고 안정된 모습을 되찾는 것. 쉽지 않은 숙제다. 홍희경 논설위원
  • [길섶에서] 사다리의 마지막 계단

    [길섶에서] 사다리의 마지막 계단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의 국민이 비상계엄의 밤을 보내고 당파로 갈린 정치를 보는 현실. 극단적 불균형의 세태다. 그 이유를 서구와 정반대로 걸어온 우리 현대사에서 찾는다. 유럽·미국의 근대화는 정치, 경제, 교육 순으로 진행됐다. 17~18세기 혁명을 거치며 시민권을 쟁취했고, 19세기 초까지 산업혁명으로 경제적 토대를 다졌다. 19세기 후반 산업화에 필요한 근로자 양성을 위해 공교육 체계가 자리잡았다. 정치적 자유, 경제적 풍요, 보통교육이라는 삼각축이 순차적으로 완성됐다. 해방 이후 한국의 발전 경로는 거꾸로였다. 한국전쟁의 잿더미 속에서도 학교를 보내는 교육열에 힘입어 전쟁이 끝난 지 6년 만인 1959년 초등 취학률 96%를 달성했다. 자라난 인재들이 ‘한강의 기적’을 이뤄 냈고 1987년 뒤늦게 정치혁명의 출발선에 섰다. 비상계엄으로 정치의 취약성이 또 드러났다. 하지만 서구의 정치혁명도 수백년에 걸친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우리는 지금 거꾸로 놓인 사다리의 마지막 계단을 오르는 중이다.
  • “의료용 마약 처방 年2000만명… 중독자 선 치료 후 재활을”

    “의료용 마약 처방 年2000만명… 중독자 선 치료 후 재활을”

    조성남 서울시마약관리센터 원장투약 중독 치료 안 되면 재범 33%또래집단 속 거절 어려운 청년들 ‘세이 노’ 캠페인처럼 예방 교육을채규한 식약처 마약안전기획관의료용 마약 처방 시스템으로 관리범죄자 낙인에 숨어 치료 적기 놓쳐‘1342’ 상담 비밀 보장·치료 도와줘박영덕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센터장공급책, 싼값에 통제 의약품 밀수 국내에서 5~10배 이윤 ‘남는 장사’‘1342’ 사회관계망 회복 돕는 역할이성규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인터넷·SNS 통한 확산 속도 빨라불면 등 의료용 마약 오남용 심각안정적 삶 살게 할 직업 재활 중요형사 법정, 그중 마약 사건 전담 재판부의 법정은 유난히 적막하다. 강력 사건 재판정에서는 피해자 가족이라도 방청석을 지키지만 마약 사범 법정은 피고인의 가족조차 참관하기를 원치 않는다. 형사재판을 받을 정도로 중한 마약 사범이라면 이미 가족을 비롯해 모든 사회적 관계가 끊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건강을 해치고 사회적 관계를 망치는 마약류 확산이 가속화되면서 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지 2년여가 지났다. 이후 강력한 단속과 처벌, 그리고 치료와 재활이라는 두 축이 가동되고 있다. 서울신문은 지난 1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지원을 받아 마약류 중독 예방과 재활의 현주소를 짚고 과제를 점검하기 위한 전문가 좌담회를 열었다. 홍희경 논설위원 사회로 조성남 서울시마약관리센터 원장, 채규한 식품의약품안전처 마약안전기획관, 박영덕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1342용기한걸음센터 24시전화상담센터장, 이성규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마약류의 실태와 방향을 논의했다. -마약 사범이 급증해 대한민국은 더이상 ‘마약 청정국’이 아니라는 말이 나온다. 최근 마약 확산의 주된 특징과 심각성은 무엇인가. 조성남 원장 마약류 사범은 크게 공급 사범과 투약 사범으로 나뉘는데, 투약 사범은 중독 질환을 지닌 환자들이기도 하다. 중독 치료가 제때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들은 투약 범죄를 저지른 상태로 유지된다. 이는 지난해 기준 32.8%라는 재범률 통계로 이어진다. 마약을 범죄로만 규정하면 재범률이 높아질 뿐 범죄 근절이라는 정책 효과는 나타나기 어렵다. 중독이라는 질병을 의학적으로 치료하지 않고 벌을 주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성규 교수 마약에 대한 인식, 치료 여건에 비해 마약류 확산 속도가 빨랐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SNS)가 활성화된 게 큰 이유다. 가상화폐와 같은 익명의 거래 수단까지 생기면서 마약을 비밀리에 구하기가 쉬워졌다. 중학생이 30분 만에 필로폰을 구하는 일은 SNS 이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마약 거래 환경이다. 최근 20대 마약 중독 문제가 심각한데 이들은 10대부터 마약을 접한 경우로 보인다. 게다가 의료용 마약 오남용 문제도 심각하다. 미국에선 ‘마약과의 전쟁’뿐 아니라 ‘오피오이드(opioid·마약성 진통제)와의 전쟁’을 별도로 규정할 정도다. 한국에서도 이 문제가 약 5년 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으로 전망한다. 다이어트, 불면, 집중력 개선 등의 이유로 손댄 마약성 약물에 중독되는 경우다. 채규한 기획관 매달 나오는 식약처 통계를 보면 2000만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의료용 마약 처방을 받는다. 이 중 0.1%만 남용한다고 가정해도 상당히 큰 수치가 나온다. 이런 부분을 과거엔 수기로 관리했으나 2018년부터 식약처 마약류통합관리시스템을 통해 살핀다. 마약성 진통제의 중복 처방이나 과다 처방 사례를 이 시스템으로 걸러내는데, 시스템이 가동되면서 암암리에 이뤄지던 마약류 남용이 적발되는 경우가 늘었을 것으로 본다. 박영덕 센터장 국내에서 엄격하게 마약성 의약품을 통제하면 역설적으로 그 의약품이 마약 공급책들이 선호하는 물품이 되기도 한다. 외국에서 싼값에 들여온 뒤 국내에서 5~10배 비싸게 팔 수 있기 때문이다. 밀수를 10차례 시도해 한 차례만 성공해도 공급책에게 남는 장사가 된다면, 마약을 불법으로 들여오려는 시도에 공급책들이 계속 나서게 되는 문제가 생길 것이다. -정부는 2022년 10월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 데 이어 이듬해 4월과 11월에 마약류 관리 종합대책 향후 계획을 발표했다. 마약류 중독자의 치료·재활을 돕는 1342용기한걸음센터를 전국 17곳으로 확대하고 치료·재활 조건부 기소유예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효과가 있나. 채 기획관 마약을 하면 범죄자라는 낙인이 생긴다. 그래서 마약을 한 본인이나 가족들이 문제를 공론화하지 못하고 숨는 게 문제였다. 그러면 치료 적기를 놓친다. 과거엔 마약 중독 치료를 하면 의사가 당국에 보고하게 했다. 그러면 자신이 마약 치료를 받았다는 이력이 남을까 봐 병원을 피하는 이들도 많았다. 1342용기한걸음센터는 상담의 비밀을 보장하면서 적절한 재활과 치료에 대해 상담하고 병원으로 연결하며 직업을 알선하는 일을 한다. 마약을 접했다고 센터에 연락하는 용기를 낸다면 정확한 진단과 상담, 치료와 회복이 시작된다. 박 센터장 1342 상담을 하다 보면 마약 중독 이전에 이미 사회적·심리적 불안감을 느끼던 이들이 많다. 우울한 사람들이 약물에 중독되기 쉽다. 어떤 이유로든 마약 사범이 된다는 건 전과자가 된다는 말과 같다. 대부분 신용불량자가 돼 통장도 만들 수 없고 어렵게 구한 직장에 관련 서류를 제출하고 난 뒤 채용이 취소되기도 한다. 마약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사회인으로 서지 못하고 궁지에 몰리면 또다시 마약을 해 재범자가 되는 악순환에 빠진다. 한걸음센터는 이들이 두 번째 마약 대신 사회의 관계망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돕는 모든 역할을 하려 한다. 1342는 당신의 일상(13) 사이(42) 모든 순간을 함께하겠다는 마음을 담은 번호다. -마약 중독자들이 재활, 사회복귀에 성공할 수 있도록 시민들도 사회적 편견을 해소해야겠다. 우리 사회가 바꿔야 할 인식과 제도는 무엇인가. 이 교수 직업 재활을 활성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중독자들이 마약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는 방법은 마약 없이 살 수 있는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다. 직업 훈련부터 취업 연계, 사후 관리까지 종합적인 지원 체계가 필요한데 지금은 이런 시스템이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마약을 접한 이들을 사회로 다시 이끌 사회복지사에 대한 보상이나 지원도 미약하다. 안정적인 삶을 위한 여러 복지망을 연결하려면 사회복지사의 역량이 높아야 하는데, 지금의 보상 체계로는 숙련된 사회복지사를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조 원장 최근 명문대 동아리에서 집단 마약을 한 사건이 벌어져 충격을 준 일이 있다. 대학생은 초기 청년기 연령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는 또래 집단이 권하는 마약을 거절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기 쉬운 나이이기도 하다. 외국에서 ‘세이 노(Say NO·마약 거절하기) 캠페인’을 벌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마약 예방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스타트업 디자인, 대기업 만나 빛 봤다

    스타트업 디자인, 대기업 만나 빛 봤다

    AI 친구·다회용기 등 혁신 제품현대百·롯데월드와 새 시장 개척“디자인산업 활성화에 다각 지원” #1. 지난 8월 현대백화점 충청점에서 디자인 기업 카티어스의 인공지능(AI) 기술이 접목된 ‘AI 대화친구 카티’ 팝업스토어가 열렸다. AI 캐릭터와의 대화, 컬러링 체험, 포토존 등 체험형 콘텐츠를 선보인 공간에 방문객들이 몰렸다. 이후 무역센터점에서 추가 전시가 진행됐다. 안민지 카티어스 대표는 “평소 AI 카티를 오프라인 공간에서 체험해 보고 싶다던 고객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2. 디자인 기업 푸들은 롯데월드 인기 캐릭터 ‘로티’와 손잡고 리버시블 다회용기를 선보였다. 부산 광안리에서 진행된 문화 콘텐츠 팝업 행사에서 공개됐다. 실용성과 디자인을 모두 잡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윤채영 푸들 대표는 “행사를 통해 고객들에게 직접 일회용품 대체의 즐거움을 알릴 수 있었다”고 밝혔다. 카티어스, 푸들 등 6개 스타트업이 참여한 ‘2024 디자인 스케일업 프로젝트’가 성공적인 결실을 맺었다. 서울시와 서울디자인재단이 디자인 스타트업의 성장을 위해 추진한 이 프로젝트에서 스타트업은 대기업의 인프라와 마케팅 역량을 활용해 시장 검증 기회를 얻고 대기업들은 혁신적인 디자인 기업들과의 협업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발굴했다. 현대백화점, 롯데월드와 손잡은 참여 기업들은 고객들과 대면하며 시장을 검증하고 사업 확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참여 기업은 1000만원의 개발비를 지원받는 한편 투자, 경영, 제조, 브랜딩 등에 관한 전문가 멘토링을 받았다. DDP 디자인론칭 페어, 파리 메종오브제 전시 참가를 통해 글로벌 시장 진출의 기반을 다졌다. 성과도 속속 나왔다. 위에이알이 현대백화점 오픈행사에서 선보인 가상 옥외광고 영상은 10만회 이상 조회됐다. 페이퍼팝과 예술공공은 현대백화점 킨텍스점에서 ‘레디 셋 아트’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페이퍼팝은 종이로 만든 골프존 게임으로 체험형 콘텐츠를 구현해 내년 상반기 게임 상품화를 앞두게 됐고, 예술공공은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2024 우수산업디자인상품 전시 부문에 선정됐다. 천일디자인은 반려동물 제품 케어하우스와 가방형 소프트 켄넬과 액세서리를 개발했다. 와디즈와 텀블벅 등 크라우드펀딩을 통한 시장 반응 조사도 앞두고 있다. 차강희 서울디자인재단 대표는 8일 “대기업·중견기업과의 협력 경험을 통해 디자인 기업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디자인 산업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지원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서울디자인재단은 이번 성과를 바탕으로 프로그램의 발전 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 [서울광장] 윤석열의 ‘대검부터 계엄까지’

    [서울광장] 윤석열의 ‘대검부터 계엄까지’

    2006년 대검의 현대차 비자금 수사는 고양지청에 들어온 제보로 시작됐다. 제보자 조사로 비자금의 전모가 드러나자 대검 중수부가 사건을 가져왔다. 당초 고양지청 담당 검사를 받으려 했으나 그 검사가 다른 건설비리 수사를 계속하고 싶어 해 대신 후배인 윤석열 검사가 파견됐다. 곧 그는 술을 아무리 마셔도 멀쩡한 검사로 유명해졌다. 당시 검찰 특수팀엔 최재경, 채동욱, 김경수, 홍만표, 강찬우, 오광수 등 쟁쟁한 부장검사들이 포진했고 안대희, 이인규가 지휘를 했다. 특수통들은 근무연에 따라 알파팀과 브라보팀으로 나뉘어 경쟁하듯 움직였다. 알파팀의 기소 사실이 재판에서 더 잘 인정받았지만 브라보팀의 승진이 더 수월했다. 윤 대통령은 브라보팀 소속이었다. 브라보팀이 명실상부 검찰 내 주류로 부상한 것은 정치권력의 변화와 맞물렸다. 의혹이 많은 후보들이 선거에서 승리하면서부터였다. 재판 결과 유무죄에 관계없이 수사·기소 여부를 전략적으로 결정하는 데 능했던 브라보팀이 주요 보직에 올랐다. 이명박부터 이재명까지, 선거 후보 결정은 정당과 국민의 몫이지만 후보 컷오프는 검찰의 권한이라는 인식이 검찰 내 자리잡기 시작했다. “검사 시절부터 다른 능력은 시원치 않았는데 조직 장악 능력만은 탁월했다.” 정치 분야 베스트셀러 ‘보수의 종말’에서 내려진 윤 대통령에 대한 평가다. 황교안 대표에서 한동훈 대표 시기 보수 정치를 복기한 이 책은 계엄 사태 전에 나왔다. 그런데도 책은 윤 대통령이 검찰과 여당이라는 권력 기반이 흔들리자 외세와 군부라는 새로운 두 기둥을 찾았다는 통찰을 담고 있다. 책의 평가처럼 윤 대통령은 검찰 실세들의 신임을 얻는 데 능했다. BBK 사건의 김홍일 중수부장, 국정원 여론조작 수사의 채동욱 검찰총장, 최순실 사건의 박영수 특검과 함께 일하며 입지를 다졌고 이는 그를 더 큰 권력자들과 연결해 주는 계기가 됐다. 그는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총장이 됐다. 문제는 총장이 된 후로 생겼다. 더이상 그에게 임무를 줄 선배 실세가 없어진 것이다. 이 공백을 그는 후배인 한동훈 검사장에게 의지하는 방식으로 채웠다. ‘조선제일검’이란 자신의 칭호를 좋아하는 한 검사장은 사법농단, 조국 일가 등 진영을 가리지 않는 수사를 했다. 윤 대통령은 이를 보호했다. 대통령이 된 후 법무부를 맡기며 잠시 한 장관에게 권력을 의탁했지만 ‘당대표 한동훈’의 독립적 행보에 대해선 경계하기 시작했다. 결국 한 대표와 멀어진 윤 대통령은 새로 의지할 세력으로 군부를 택했다. 이는 6시간의 한밤 비상계엄으로 이어졌다. 윤 대통령의 성공은 늘 예기치 않던 방식으로 찾아왔다. 검찰 조직의 실세들 곁을 지키다 보면 다른 권력자들이 그를 발탁했다. 문제는 지위가 높아지면서 발생했다. 스스로의 능력이 아닌 실세들의 도움으로 성공해 온 그에게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오히려 족쇄가 됐다. 실력보다 조직 장악을 통해 권한을 쥐고 휘두르는 리더십은 윤 대통령과 검찰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달성하지 못한 한국의 조직에 만연한 문제이기도 하다. 노조 비위를 맞추는 공공기관, 총수 측근이라면 회사에 해를 끼쳐도 묵인하는 기업, 조직 내의 입지를 위해 공익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는 공직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에게는 자신만의 리더십을 만들 기회가 최소 두 번은 있었다. 첫 번째는 검사 시절 좌천됐던 몇 년간이다. 좌천된 그에게 도움을 주며 응원하던 검사들과 함께 평범한 시민들의 사건을 해결하며 검사 일의 본질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쳤고 결국 윤 대통령 재임 시절 검찰은 야당 대표 구속에만 집중하다 정작 민생 사건은 방치하는 조직으로 전락했다. 두 번째 기회는 정치인이 됐을 때다. 조직 장악 대신 개인기를 우선시하는 이준석 같은 정치인을 겪으며 여의도 정치의 쓴맛, 짠맛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여당 대표들을 잇따라 쫓아내고는 검사 출신과 MB(이명박)계가 주도하는 익숙한 정치에 머물렀다. 윤 대통령의 실패. 그것은 결국 조직과 실세에 기대 온 낡은 리더십이 맞이한 ‘승자의 저주’다. 홍희경 논설위원
  • [길섶에서] 전나무 옆 참나무

    [길섶에서] 전나무 옆 참나무

    울산 울주군 소호참나무숲. 산림청 선정 ‘대한민국 100대 명품숲’인 이곳 이름엔 참나무만 있지만 잣나무와 전나무가 함께 자란다. 보통의 참나무가 옆으로 가지를 뻗으며 자유분방하게 자라는 것과 다르게 이곳 참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곧게 솟아 있다. 높이 16m, 가슴높이 지름 20㎝인 반세기 수령의 나무들이 빚어낸 숲은 경이로운 풍경을 자아낸다. 1974년 한국과 독일의 임업 전문가들이 이곳에 모든 나무가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가는 특별한 숲을 설계했다. 방식은 단순했다. 구부러진 가지를 자르거나 묶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참나무 사이에 곧게 자라는 잣나무와 전나무를 심었다. 그러자 마치 한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서로의 말투를 배우듯 참나무들이 전나무를 닮아 곧게 자랐다. 50살이 된 이 숲은 우리나라 산림경영의 자랑이자 살아 있는 교과서로 불린다. 그러나 숲은 나무에 대한 공부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저 서로 닮아 가며 자라는 것이 때로는 가장 지혜로운 성장의 비밀이라는, 좋은 건 자꾸 퍼져 나가는 힘이 있다는 가르침이다.
  • [씨줄날줄] 미룬이 사회

    [씨줄날줄] 미룬이 사회

    “시작이 제일 무서워” 사회생활을 유예하는 ‘미룬이’ 청년들이 늘고 있다. 한국은행은 어제 ‘그냥 쉬었음’ 청년 비중이 지난해 4분기 22.7%에서 올해 3분기 29.5%로 늘어난 배경을 분석한 보고서를 내놨다. 보고서에 따르면 증가세인 ‘쉬었음’ 청년 대부분이 취업 유경험층이었다. 직장을 잠깐 다닌 뒤 스스로 사회생활을 접었다. 한은은 일본의 1990년대 ‘취직 빙하기’를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리는 장기침체에 진입하던 무렵 청년층이 노동시장에서 밀려나면서 자발적 실직 상태인 니트족이 급증했다. 청년기의 ‘사회생활 유예’가 중년의 좌절로 변모한 30여년 동안 일본 사회는 전례 없는 문제들에 맞닥뜨렸다. 사회와 단절된 채 은둔하는 중년 히키코모리가 늘었고, 80대 부모가 50대 자녀를 부양하는 패러사이트 싱글이 등장했다. 도쿄 후지산 인근 원시림 아오키가하라가 ‘자살의 숲’이 되는 비극까지 이어졌다. 이 모든 사회 병리의 시작점이 30년 전 청년 실업이었던 셈이다. 지금 한국 청년들의 ‘미룸’도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정년 연장 제도가 가동된 2016년 청년 고용의 16.6%가 감소했다. 이후 코로나 팬데믹 기간 청년 고용의 양과 질은 더 추락했다. 구조적 장벽 앞에 선 청년들의 선택지는 안쓰럽다. 눈높이를 낮춘 하향 취업 아니면 유행가 ‘미룬이’에서 파생된 수많은 유튜브 밈으로 위안을 찾는다. “시작이 제일 즐겁던 어린이”로 자랐으나 “완벽하지 못할까 봐 내일의 나에게 일단 미룬이”가 되는 청년들의 자화상이다. 비자발적 실업 이후 1년까지는 청년의 90%가 근로 의지를 보이지만 그 후 그 의지는 절반으로 꺾인다. 쉬었음 청년이 급증한 뒤 장기간 쉬었음, 노동시장 영구이탈 등으로 이어지는 이유다. 청년들이 도전할 터전을 만드는 일은 우리 사회가 결코 눈감을 수 없는 과제다. 홍희경 논설위원
  • [씨줄날줄] 달러 패권

    [씨줄날줄] 달러 패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브릭스(BRICS) 국가들을 향해 초강수를 뒀다. 미 달러를 대체할 새로운 통화를 만들려 한다면 100% 관세를 부과하고 미국 시장 접근을 차단하겠다는 것이다. 달러 패권에 대한 도전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공개 협박이다. 2000년대 초 미국 금융업계는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의 성장 잠재력을 주목하며 이들의 영문 이름 첫 글자를 따서 ‘브릭’이라 명명했다. 이들은 2009년 첫 정상회의를 열어 공식 출범했고 이후 남아공이 합류하며 ‘브릭스’가 됐다. 올해 이란, 이집트, 에티오피아, 아랍에미리트(UAE)를 새 회원국으로 받아들였다. 회원국은 세계 인구의 약 45%,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약 35%를 차지한다. 여기에 동남아 국가들도 가입에 관심을 보인다. 최대 에너지 소비국과 산유국을 아우르게 된 브릭스는 달러 기반 국제 원유 거래 체계에 잠재적 도전 세력으로 부상했다. 브릭스 정상들은 비트코인을 통한 회원국 간 국제무역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1971년 브레턴우즈 체제 붕괴, 1999년 유로화 출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달러 패권에 대한 도전은 처음이 아니다. 그럼에도 브릭스의 도전이 주목받은 이유가 있다. 비트코인이라는 새 변수가 제재 우회와 거래 효율성 향상이라는 실질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어서다. 이 대목에서 ‘암호화폐 대통령’ 트럼프의 진의도 드러난다. 정부의 비트코인 보유, 자문위원회 설치 등 암호화폐 육성을 약속했지만 어디까지나 미국 재정건전성과 금융패권 강화의 범주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얘기다. 미국이 달러 패권을 유지하려는 관성과 디지털 자산 패권을 장악하려는 구심력을 동시에 작동시키는 격변 속에서 한국은 소외될 위기다. 국제 금융질서가 빠르게 재편되는 이때 발언권을 잃으면 많은 것을 잃게 된다. 금융 비용 상승을 넘어 실물 위기를 피하기 어렵고, 한국의 독자적인 정책 대응 여지가 축소된다. 걱정이 자꾸 커진다.
  • [씨줄날줄] AI 맨해튼 프로젝트

    [씨줄날줄] AI 맨해튼 프로젝트

    미국이 ‘AI 맨해튼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핵 개발로 패권을 장악했듯 이번에는 인공지능(AI)으로 기술 헤게모니를 확고히 하겠다는 선언이다. 중국이 이미 생성형 AI 분야에서 미국보다 6배 더 많은 특허를 출원하고 투자를 쏟아붓는 상황에서 나온 미국의 대응이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예고하는 글로벌 패권 경쟁의 핵심이 AI가 될 것이다. 과거 맨해튼 프로젝트는 핵물리학을 넘어선 혁신을 가져왔다. 대규모 계산을 위해 컴퓨터 과학이 도약했고, 재료공학 분야 신소재 개발의 촉매가 됐다. 입자가속기와 같은 거대 과학 실험장비 시대를 열었고, 방사성 동위원소 치료법이란 현대 의학의 진전도 이끌었다. 수만 명의 과학자가 협업하는 현대적 연구체계도 이때 확립됐다. 이는 아폴로 달 탐사 계획, 인간 게놈 프로젝트, 대형강입자가속기(LHC) 같은 ‘빅 사이언스’ 시대를 여는 토대가 됐다. 거대 과학 프로젝트들은 다시 인터넷과 위성항법장치(GPS), 개인 맞춤형 신약 등 일상을 바꾼 혁신 기술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AI 맨해튼 프로젝트가 가져올 파급력이 이보다 작진 않을 터다. 인간 수준을 뛰어넘는 범용 AI(AGI) 개발은 새로운 물질과 신약 발견을 가속화하고 기후변화 대응책을 제시할 것이다. 양자컴퓨팅과 결합한 AI로 현대 암호체계도 재편될 전망이다. 제조, 물류, 교육 등 다양한 산업구조와 일자리 지형의 획기적인 변화도 예상된다. 이 시점에서 한국의 AI 생태계를 돌아보면 우려스러운 면들이 보인다. 3~4년 전 주목받았던 AI 스타트업의 상당수가 AI 핵심기술이 아닌 활용기술에만 매달리다 주저앉았다. “현재 추세대로면 미국이 2040년 도달할 AI 수준을 우리가 달성하려면 447년이 걸릴 것”이라는 전문가 진단도 나왔다. 우리 국회는 아직 AI 기본법조차 통과시키지 못했다. AI 과학기술 정책의 전면 재구조화라는 과감한 선택이 시급하다. 홍희경 논설위원
  • [길섶에서] ‘신노년’의 메세나

    [길섶에서] ‘신노년’의 메세나

    가수 이승윤의 나이 든 팬을 만났다. ‘액티브 시니어’를 자임하는 그는 최근 이승윤의 새 앨범을 수십장이나 샀다. 놀라워하자 그 정도는 많이 사는 축에 끼지도 못한다며 웃었다. 가족들 시선이 살짝 민망해 집으로는 10장 정도만 배송받고 나머지는 다른 팬의 주소로 받는 일도 있다고 한다. 이런 CD 대량 구매를 ‘사재기’라고 낮춰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큰돈을 들여 CD를 구매해 ‘팬 중의 팬’으로 불린다는 이가 남긴 소감을 들으니 생각이 바뀐다. “평생 쓴 돈 중 가장 의미 있는 돈”이라며 “이승윤이 음악을 계속할 동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단순한 과시나 순위 조작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티스트를 향한 진정한 후원의 마음으로 소비를 한 셈이다. 디지털 시대 실물 CD 구매는 더이상 음악 감상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마치 16세기 메디치 가문이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후원했듯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이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아티스트의 음악 여정을 응원하고자 지갑을 열었다. ‘신노년’이 새로운 문화 메세나 현상을 만드는가 보다. 홍희경 논설위원
  • [씨줄날줄] ‘자사주 소각’의 명암

    [씨줄날줄] ‘자사주 소각’의 명암

    기업이 주식시장에 보내는 신호는 다양하다. 실적 발표, 배당 정책, 투자 계획 등인데 그중 자사주 소각은 기업이 주주환원 의지를 가장 적극적으로 보여 주는 수단이다. 삼성전자가 이번에 내놓은 10조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소각 결정을 시장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이유다. 삼성전자는 2015년 10월에 11조 3000억원 규모의 특별 자사주 매입·소각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2017년 초에도 9조 30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해 소각했다. 그리고 최근 주가가 4만원대로 하락하자 다시 자사주 소각을 결정했다. 두 가지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 하나는 정책의 일관성이다. 삼성전자는 주가 하락기마다 자사주 매입과 소각이라는 동일한 카드를 꺼냈다. 다른 하나는 실행의 신속성이다. 삼성전자는 오늘부터 10조원어치를 매입하고 3개월 내 3조원어치를 우선 소각하기로 했다. 이번 결정은 2020년 6월 이후 처음으로 삼성전자 주가 5만원선이 무너지고 외국인 매도세가 12거래일째 이어지는 위기 상황에서 나왔다. 하지만 시장은 최근의 주가 하락이 단순한 반도체 업황 악화나 미중 갈등 때문만은 아니라고 본다. 시장 경쟁력 약화가 더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 SK하이닉스에 뒤처지고 파운드리에서 TSMC와 격차가 더 벌어지는 등 기술 경쟁력 약화가 뚜렷해지고 있다는 게 삼성전자에 대한 시장의 냉정한 평가다. 2030세대 인력 감소와 핵심 인재 이탈이라는 조직 문제까지 겹친 현실을 타개해야 한다는 제언도 들린다. 대체적인 요구들이 ‘체질 개선’이라는 말보다 ‘체질 복원’ 쪽에 무게중심이 쏠려 있다. 제조업 강국을 선도한 삼성전자에 대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여러 부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세계 최초’를 외치던 삼성전자의 귀환, 시스템이 완벽히 작동하던 그 삼성전자의 복귀를 모두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홍희경 논설위원
  • [씨줄날줄] 일론 머스크, 미국판 ‘기업 호민관’

    [씨줄날줄] 일론 머스크, 미국판 ‘기업 호민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를 정부효율부 수장으로 지명했다. 정부 조직을 효율화하고 관료주의를 해체하겠다는 트럼프의 파격적 인사는 14년 전 한국의 실험과 닮았다. 우리는 이미 ‘기업 호민관’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시도를 해 본 적이 있다. 2009년 이명박 정부는 고 이민화 메디슨 창업자를 초대 기업 호민관으로 임명했다. 정부 규제로 인한 기업의 애로사항을 해결하고, 민간의 시각으로 정부혁신을 이끄는 게 그의 임무였다. 이민화는 한국 최초 벤처인 메디슨을 창업한 혁신 기업가이자 DJ정부 시절 벤처육성법 제정에 공헌한 사회개혁가였다. “규제는 기업 발목을 잡는 게 아니라 높이 날 발판이 돼야 한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이민화는 단단한 바위를 깨는 망치처럼 규제를 부숴 나갔다. 가장 큰 성과는 공인인증서 규제 철폐. 당시 한국에선 전자상거래를 할 때마다 복잡한 공인인증서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런 경직된 시스템은 웹2.0 시대 기술혁신 경쟁에서 한국을 뒤처지게 만들었다. 그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인터넷 갈라파고스’의 부당함을 설득한 끝에 10년 넘은 규제를 무너뜨렸다. 하지만 뒤이은 도전은 관료사회의 벽에 막혔다.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 평가를 위해 준비한 ‘호민인덱스’는 동반성장지수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제동이 걸렸다. 중소기업 실태조사는 부처 파견 직원들의 태업으로 무산됐다. “호민관실이 통제받는 시점이 물러날 시점”이라던 그는 취임 1년여 만에 사임했다. 한국 초대 기업 호민관의 시도는 ‘칼날 없는 칼’로 끝났다. 독립성과 실행력이라는 양날의 칼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트럼프는 머스크를 정부 개혁의 칼자루로 삼았다. 바이든의 전기차·화석연료 규제에 맞선 머스크의 반관료주의 성향을 높이 산 것이다. 한국에선 미완으로 남은 관료 개혁이 미국에선 트럼프와 머스크라는 조합을 통해 다른 결말을 쓸지 주목된다.
  • [씨줄날줄] 비트코인 패권 경쟁

    [씨줄날줄] 비트코인 패권 경쟁

    2009년 사토시 나카모토가 비트코인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만 해도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이는 많지 않았다. 이후 각종 코인 붐이 불고 거래소도 생겼지만 극심한 가격 변동성과 규제 불확실성 때문에 암호화폐는 주류 금융 시스템에 쉽게 편입되지 못했다. 그러나 15년 만에 새로운 전환점이 오고 있다. “미국을 암호화폐의 수도로 만들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선언이 글로벌 금융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한때 “비트코인은 사기”라고 일축했던 그는 대선 기간 비트코인을 새 전략자산으로 키우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시장은 트럼프 당선 이후 나흘 연속 최고가 경신으로 화답 중이다. ‘비트코인 대통령’이 되겠다는 트럼프의 입장 선회는 암호화폐를 둘러싼 논의를 질적으로 바꿔 놓았다. 이를테면 이미 공약 단계에서 트럼프는 비트코인을 말하다 말고 채굴 산업 일자리 창출을 언급해 고용 정책을 슬쩍 얹었다. 암호화폐 규제론자인 게리 겐슬러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의장을 백악관 입성 첫날 해임하겠다며 규제 정책의 대전환을 예고하기도 했다. “중국이 비트코인 거래를 금지한 것은 우리(미국)에게 기회”라는 발언은 트럼프 1기 치열했던 미중 경쟁의 전장이 암호화폐 분야로 확전될 것이란 해석을 낳았다.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 경제 정책을 고수하는 동시에 비트코인 전략을 나란히 세운 부분은 특히 주목할 지점이다. 35조 달러에 육박하는 재정부채가 달러의 위상에 생채기를 내는 상황에서 미국 금융 패권을 강화할 새로운 전략무기로 비트코인을 낙점한 것 같은 형세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미 대선 기간 중 러시아가 암호화폐 채굴을 공식 승인하고 중국이 암호화폐 금지 조치를 해지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 건 공연한 일이 아니었다. 트럼프의 ‘비트코인 대통령’ 선언에 대한 첫 반응은 시장보다 미국과 경쟁하는 국가의 정치인들에게서 먼저 나왔던 셈이다. 홍희경 논설위원
  • 철 따라 피고 지는 생명의 경이로움… 무력한 삶을 치유하다[계절실종: 식물은 답을 알고 있다]

    철 따라 피고 지는 생명의 경이로움… 무력한 삶을 치유하다[계절실종: 식물은 답을 알고 있다]

    암 환자였던 정원사 매기 경험 기반식물 가득한 공간서 무료 돌봄 지원 영국 내 24곳·일본 등 해외 4곳 운영“성장·순환하는 정원 보며 희망 얻어”아마존 우림 파괴, 해수면 상승 같은 이야기가 나올 때 기후위기는 ‘지구의 아픔’이란 뜻으로 들리곤 했다. 올해 유독 길고 가혹했던 폭염, 제때를 놓친 꽃과 단풍은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일상 속에서 깨닫게 했다. 기후가 만들어 낸 재난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는 ‘기후 우울증’을 호소하는 이들도 부쩍 늘었다. 이럴 때 화분 하나, 작은 정원은 자연과 연결되는 새로운 통로가 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물을 주고 햇빛을 조절하며 생명을 키워 내는 과정에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변화에 대한 희망이 싹튼단 것이다. 지난 9월 방문한 매기센터는 위기에 처했을 때일수록 식물 가까이에 있어야 할 이유를 보여 주었다. 영국 에든버러 웨스턴 종합병원 안 밝은색 건축물이 사시사철 피고 지는 꽃나무와 어우러지는 매기센터는 암 환자와 가족들에게 돌봄과 지원을 무료로 제공하는 공간이다. 기부금과 유산 기부, 모금행사 등을 통해 운영비를 마련하며 영국의 공공정원이나 공원 입장료 일부가 매기센터로 전달되기도 한다. 가정집처럼 편안한 매기센터에서 암 환자들은 의료진 이외에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를 이어 간다. 임상심리학자와 복지·재정 전문가를 만나고, 정원사나 운동처방사와 의견을 교환한다. 예약이나 의뢰 없이 방문해도 영국식 차를 대접받을 수 있는 곳이다. 영국 전역에 24곳의 매기센터가 있다. 홍콩, 일본, 스페인, 네덜란드 등 4곳엔 해외 센터가 있다. 기자가 방문한 에든버러는 1996년 첫 매기센터가 설립된 곳이다. 유방암으로 투병하며 매기센터 설립을 구상, 추진했던 정원 디자이너 매기 케직의 동상이 방문자들을 맞이했다. 매기는 암에 걸렸다는 사실보다 그로 인한 우울함과 두려움 때문에 삶의 기쁨을 빼앗기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을 세계적 건축가이자 남편인 찰스 젠크스에게 털어놓았다. 암은 고통이지만, 그것이 삶의 기쁨을 찾으려는 노력을 멈추게 할 이유가 될 순 없다고 매기 부부는 결론을 내렸다. 웨스턴 종합병원 임상 간호사로 일하면서 매기를 치료했던 인연으로 1998년부터 매기센터를 이끌고 있는 로라 리 대표(CEO)는 “매기는 암 환자들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정서적 지원을 받으며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원했다”면서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날까지 매기센터를 만드는 계획에 몰두했다”고 전했다. 이들의 꿈은 고통에서 잠시 눈을 돌렸을 때 밝고 따뜻한 색상의 건물, 마음을 흔드는 자연 채광,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 줄 정원 식물이 있는 치유 공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후 프랭크 게리, 자하 하디드, 리처드 로저스 등 유명 건축가들이 지역 매기센터 설계에 참여했다. 카밀라 영국 왕비가 2008년 매기센터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곳은 병원 배수로가 지나 늘 축축한 땅이에요. 하지만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도 꿋꿋이 피어나는 꽃들을 심었죠. 저 위 병원에서 방사선 치료를 받느라 며칠씩 격리된 환자들이 병실 창문으로 이 꽃들을 볼 수 있어요. 환자들이 잠시나마 고통 대신 희망을 느끼길 바라요.” 에든버러 매기센터의 정원사 수전은 멋진 건물과 정원이 보내는 위로의 힘을 확신하며 얼마 전 암으로 남편을 떠나보낸 부인과의 대화에 대해 들려줬다. 수전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들어주고 함께 정원을 바라보고 그러다 ‘저 꽃은 왜 심으셨어요’라고 질문하면 자세히 설명해 주는 일이 전부였을 뿐인데도 부인은 다시 살 힘을 낼 수 있게 됐다는 인사를 건넸다”며 웃었다. 수전의 믿음은 연구로 증명된 바 있다. 스웨덴의 환경심리학자 로저 울리히는 창문 너머로 나무가 보이는 병실의 환자들이 벽돌담을 바라보는 병실 환자들보다 혈압과 심박수가 안정된다는 연구를 내놓았다. ‘마지막 잎새’가 희망을 준다는 이야기는 꽤 과학적인 이야기였던 셈이다. 매기센터 홍보 책임자인 서맨사 부스는 기후변화 위기 속에서 정원이 주는 치유 효과가 더 주목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성장하고 순환하는 정원을 본다는 건 우리가 불안하고 우울한 나쁜 상태로만 머무르지는 않는다는 자연의 가르침을 준다”면서 “자연이 주는 위로와 희망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치유 경험”이라고 강조했다.
  • 인위적 개입 없이 순리대로… 기후위기 속 ‘한국 정원’ 주목[계절실종: 식물은 답을 알고 있다]

    인위적 개입 없이 순리대로… 기후위기 속 ‘한국 정원’ 주목[계절실종: 식물은 답을 알고 있다]

    기시감. 전 세계를 사로잡은 한국 자연주의 정원 열풍을 이끄는 황지해 작가는 한국 정원의 특징을 이 말로 표현했다. “수백 년 동안 이 자리에 원래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 실제적”이라는 세계의 평가를 받으며 한국 정원이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기후위기 시대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황지해 작가는 영국 첼시 플라워쇼 3관왕이다. 2011년 ‘해우소: 근심을 털어버리는 곳’으로 금상을 받으며 한국인 최초로 첼시 플라워쇼에서 수상했다. 2012년에는 ‘DMZ: 금지된 정원’으로 금상과 최고상을 모두 거머쥐었다. 그리고 지난해 지리산 산약초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인 ‘백만년 전으로부터 온 편지’로 다시 금상을 수상하며 한국인 최초 3관왕을 달성했다. 한국 정원의 특징은 ‘무심함’에 있다. 인위적 개입을 최소화하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방식은 현대 정원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고 있다. “한국 정원은 흐르고 있어요”, “매번 볼 때마다 달라 보여요”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역설적으로 기후위기 시대는 한국 정원의 ‘무심함’에 대한 주목을 높이고 있다. 매년 이상기후로 자연 생태계 변화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우리가 무심하게 보던 자연이 내년에도 재현될지 장담하기 어려워지고 있어서다. 이에 대해 황 작가는 “인간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본래 있던 것을 되돌려줌으로써 원시로 돌아가고자 하는 식물의 관성을 존중하는 것이 결국 원시성의 회복이자 인간과 자연의 공생의 본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국내 지원은 아직 미흡한 실정이다. 첼시 플라워쇼에 초청받아 참가하던 당시에도 스폰서 없이 7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작품을 완성해야 했다.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정원의 가치를 고려할 때 체계적인 지원과 육성이 시급해 보인다.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 나에게 정원 설계는 다음 세대를 위한 실질적인 준비이자 행동”이라는 황 작가의 작품은 기후위기와 이상기후로 우리가 잃어 가는 중인 정원에 대한 기록들이다. 황 작가가 만든 정원에서 위로받는 ‘나를 위한 여행’이 기후위기를 극복할 첫 단추로 기대를 모으는 이유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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