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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희경
    2025-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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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다이야기’ 자금 흐름 추적

    서울중앙지검 마약·조직범죄수사부(부장 정윤기)는 사행성 게임 ‘바다이야기’ 제조·판매업체가 2004년 말 이후 1년반 동안 3000억원 가까운 매출과 1000억원대의 수익을 올린 사실을 확인, 전반적인 자금 흐름을 추적하고 있다고 20일 밝혔다. 검찰은 자금추적에서 정치권 유입 여부가 드러나면 사건을 특수수사 부서에 재배당키로 했다. 검찰 관계자는 “정치권에 떠도는 소문 등은 알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들 자금의 정치권 유입 부분 등은 드러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검찰은 최근 바다이야기 제조업체인 에이원비즈 대표 차모(35)씨와 판매사인 지코프라임 대표 최모(34)씨를 사행행위규제특례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기소하고, 또다른 대주주인 송모(47)씨와 김모(33)씨는 불구속기소했다. 검찰은 지난 6월 사행성 게임업체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 뒤 지난달 초 바다이야기 등의 제조업체들을 전격적으로 압수수색한 바 있다. 검찰은 일단 이들을 불법 사행성 게임기 제조·판매 혐의로 기소했으나 특히 바다이야기와 관련, 정권 핵심 실세 개입의혹 등이 잇따라 불거지고 있어 수사 확대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차씨 등은 지난해 1월부터 지난 6월까지 최고당첨 제한액수를 125배까지 초과해 당첨될 수 있게 하는 등으로 승인 당시와는 다르게 프로그램을 조작한 게임기를 만들어 판매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이처럼 사행성을 유발하는 바다이야기 게임기 4만 5000대를 제작해 1대당 550만∼770만원씩 받고 전국 오락실에 공급했다. 바다이야기와 함께 철퇴를 맞은 사행성 게임기는 ‘황금성’ ‘인어이야기’ ‘오션 파라다이스’ 등이다. 홍희경 박경호기자 saloo@seoul.co.kr
  • [바다이야기 논란 확산] 한게임에 400만원 ‘잭팟’ 유혹

    바다이야기 등 사행성 게임업체에 대한 수사를 서울중앙지검 마약·조직범죄수사부에서 착수하게 된 이유는 이들 업체 배후에 조직폭력배가 있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막상 수사를 해보니 게임기를 제조·유통한 업체 대표들은 조폭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찾을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특히 바다이야기 제조업체 대표로 이번에 구속된 차모씨와 최모씨는 30대 중반으로 바다이야기를 개발하기 전부터 게임 기계 개발과 판매업에 종사했다. 이들은 바다이야기를 개발하고도 이 정도의 ‘대박’이 터질지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검찰 수사 과정에서 털어놨다. 바다이야기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에는 카지노 슬롯머신의 ‘잭팟’ 기능에 비교될 수 있는 ‘메모리 연타’ 기능이 있었고, 이를 통과시키기 위해 이들은 영등위 심의과정에서 불법을 저질렀다. 시중에 유통하는 기계의 소스를 영업비밀이라며 공개하지 않고, 기계와는 다른 사용설명서를 첨부해 영등위 심의를 통과한 것이다. 이 사용설명서는 영등위 자체 기준인 4-9-2룰을 지킨 것으로 돼 있다.4-9-2룰은 4초 안에 승부가 나고,1시간에 9만원 이하의 게임 비용이 지출되며, 상품권으로 지급되는 경품 최대액수가 2만원을 넘지 않으면 사행성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 바다이야기 기계는 연타 기능과 예시 기능이 탑재돼 법정 경품 한도액인 2만원보다 훨씬 많은 액수가 당첨될 수 있도록 했다. 잭팟이 터진 사실을 게임기 메모리에 저장해 2만원씩 따기를 20여차례 반복할 수 있게 하고, 한 게임에 200만∼400만원까지 잭팟이 가능하게 한 것이다. 바다이야기는 또 고래, 상어, 인어와 같은 특정 상징물을 내보이는 예시 기능을 통해 그 다음 게임부터 연속으로 2만원씩 받을 수 있게 했다.‘대박 환상’에 사용자들이 급증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단위 게임장들은 상품권 환전 수수료로 수익을 올렸다. 이용자들이 카지노의 ‘칩’ 구실을 하는 상품권을 지급받으면, 상품권을 할인해 현금으로 지급하며 10%의 수수료를 챙기는 것이다. 예컨대 상품권 10만원어치를 환전하면 10%를 뺀 9만원을 지급하고 1만원을 챙기게 된다.2004년 심의 통과뒤 바다이야기로 3000억원대 매출액을 올린 업체 대표 등 5명은 제조사인 에이원비즈에서 판매 부문을 떼어내 지코프라임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이들은 지분계약을 맺었지만, 이에 따른 이익금 배당은 지난 2월 한 차례밖에 하지 않았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바다이야기 논란 확산] 檢칼끝 영등위 심사·정치권 로비의혹 향할듯

    [바다이야기 논란 확산] 檢칼끝 영등위 심사·정치권 로비의혹 향할듯

    사행성 게임인 ‘바다이야기’ 문제를 둘러싼 의혹이 확산되자 검찰이 20일 그동안 진행 중이던 사행성 게임 업체에 대한 수사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사행성 부분에 집중돼 온 수사는 앞으로 영상물등급심사위 심사과정이나 관련 회사들의 영업과정에서 정치권 로비가 있었는지 규명해야 한다. 검찰은 사행성 게임장이 불법자금을 합법적으로 융통하기 위한 돈세탁 장소로 활용됐는지도 수사 중이다. ●영등위 속였다는 첩보로 수사 수년간 검찰은 영업장 단속 외에 사행성 게임장의 제어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바다이야기·황금성·오션 파라다이스의 ‘빅3’ 체제를 구축하며 관련 산업 규모가 커졌다. 바다이야기 유통업체인 지코프라임은 지난해 매출액 1215억원과 영업이익 218억원을 기록했고, 올해 상반기에만 100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단위 게임장별로 한 달에 융통되는 현금은 1억 5000만∼2억원에 이른다고 검찰은 추산했다. 그러던 중 바다이야기의 아류인 인어이야기 게임기가 잔 고장이 많다는 진정이 검찰에 접수됐다. 이후 수사에서 검찰은 인어이야기 관계자로부터 “영등위에서 게임기와 다른 사용설명서로 심의를 통과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검찰은 대형업체들도 같은 방법으로 심의를 통과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지난 6월부터 업체 압수수색에 나서 관련 게임의 프로그램 소스를 확보했다. ●기계와 다른 사용설명서 제출해 영등위 심사 통과 지난달 5일 검찰의 압수수색 대상지에는 지코프라임이 우회상장을 위해 인수한 우전시스텍의 주주총회장도 포함됐다. 이날 안건에는 노무현 대통령의 조카인 노지원씨의 이사해임건이 포함돼 있었다. 검찰은 노씨의 사표까지 압수했지만, 노씨의 신분에 대해서는 최근에 알았다고 밝혔다. 압수한 프로그램 소스를 분석한 검찰은 1회 게임 때 100원을 넣고 얻을 수 있는 최고당첨액 및 경품누적액을 2만원 이하로 하는 내용으로 지난해 4월 개정된 문화관광부 경품취급기준고시를 어기고,100원짜리 게임 한번으로 최고 250만원의 ‘대박’을 터뜨릴 수 있도록 업체 대표들이 기계를 조작한 정황을 포착했다. 고배당을 실현시키기 위해 이들은 ‘메모리 연타’ 기능을 숨겨둔 것이다. ●영등위 심의과정 로비 의혹 등 계속수사 영등위 관계자들은 검찰에서 “업체들이 영업비밀을 이유로 프로그램 소스를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에 위원들이 메모리 연타 기능 탑재 여부 등을 심의 과정에서 알 수 없었다.”고 검찰 조사에서 말했다. 하지만 검찰은 영등위 심의과정에서 업체 대표들이 심의위원들에게 리베이트를 줬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영등위 부분은 추가로 수사를 더 할 예정이다. 영등위 게임관련 심사 과정에 개선돼야 할 부분이 있다.”며 허술한 심의 과정에서 외압이나 로비가 있었는지 조사하겠다고 시사했다. 영등위는 바다이야기 등급 분류 과정에서 실제 게임 프로그램 내용과 다른 설명서만 검토하고 등급분류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업체 대표들, 영등위 심사과정에서 행패 부리기도 영등위에 대한 로비의혹이 사실무근으로 밝혀진다고 해도 업체 대표들을 보호해줄 배후가 있었는지에 대한 의혹은 여전하다. 황금성 대표 이모씨는 지난 2월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별관에 있는 영등위 심의실에서 등급분류를 신청한 ‘극락조’ 게임이 이용불가 결정을 받자,“당신이 게임기를 알면 얼마나 알아, 창자를 꺼내 목졸라 죽일까.”라며 폭언을 퍼부은 것으로 드러났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이번엔 법무부간부가 ‘브로커 짓’

    판사와 검사들이 비리로 구속기소된 가운데 이번에는 법무부 간부가 사건청탁과 함께 수천만원대의 금품을 받은 사실이 적발돼 구속됐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 김경수)는 변호사 사무실에 사건을 소개하거나 구치소 특별면회를 알선하고 돈을 받은 법무부 4급 공무원 우모(56)씨를 18일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우씨는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법무부 감사관실에서 근무하며 다른 직원들의 비위 사실을 적발, 감찰하는 업무를 맡았다.검찰 수사 결과 그는 변호사 알선을 할 때 법원 직원인 동생의 인맥을 활용해 동생과 공모한 것으로 드러났다. 우씨와 동생은 지난해 2월 평소 알고 지내던 김모(59·여)씨에게 이혼소송을 맡을 변호사를 연결시켜 주고, 수임료 가운데 2200만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우씨는 앞서 2003년 7월 관세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던 D씨의 사건을 무마시켜달라는 청탁을 받고,“세관 직원에게 얘기해 놓았다.”며 의뢰인에게 200만원을 받은 혐의도 받고 있다. 우씨는 다른 부처나 지자체 공무원을 만나게 해주겠다며 각종 인·허가 처리 명목으로 금품을 받기도 했다. 그는 2003년 모 업체로부터 충남 천안시에서 가스충전 사업 인허가 편의를 받게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200만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업체는 한달 뒤 가스충전 사업 인허가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검찰은 김씨가 실제로 관련 부처와 지자체 공무원에게 인허가 청탁을 했는지 추궁하고 있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100년만의 귀향 항일 허위가문 후손들] 일부 후손들 “고국에 영구 귀국 않겠다”

    광복절을 맞아 왕산 허위의 손자인 허프로코피씨 등 17명이 한국을 방문했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이 이제서야 이들을 반겼지만, 이들은 고국에 영구귀국하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한세기 가까이 일가가 이국생활을 하며 그 곳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70이 넘은 고령에 말과 사람이 낯선 조국에서 새로 시작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입국했을 때 받는 지원금도 턱없이 부족하다. 형제가 한명도 없을 때 후손이 최대한 받을 수 있는 정착지원금이 7000만원이다. 형제가 많으면 가구별로 받는 지원금이 줄어든다. 해외에 살고 있는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이 얼마나 되는지 어림 통계치도 없다. 지난해까지 국가보훈처는 해외에 있는 유공자 후손 381명을 찾아 고국에 초청했다. 올해는 17명의 후손들이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캐나다, 미국 등지에서 찾아왔다. 후손 가운데 에피모바 류드밀라(70)씨는 고종의 밀령을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갔던 이위종의 손녀다. 일제의 방해공작 때문에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던 이위종은 만국기자협회 회견을 통해 일본의 야만적 침략행위를 알렸다. 황빅토르(58)씨는 1920년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 500여명의 시위를 주도했던 황경섭의 손자다. 황경섭은 같은 해 일본군이 한국인을 학살했던 4월참변 때 최재형·김이직·엄주필 등과 함께 사살됐다. 황경섭과 함께 사살됐던 최재형은 9살이던 1867년에 부모를 따라 러시아에 귀화해 관리로 성공했다. 그는 연봉을 은행에 예치해 교포 장학금을 만들었고,1919년에는 상해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근거지로 무장투쟁 준비를 했다. 이번 고국 방문단에는 최재형의 손자인 최 세르게이(29)씨도 포함됐다. 1919년 간도 무관학교에서 신식군대를 양성하고 1922년 고려혁명군 사령관을 지낸 김경천의 손녀 필란스카야 갈리나(43)씨도 이번에 고국에 왔다. 미국 워싱턴에 살고 있던 독립운동가 김화영의 자녀 신순향(70)씨 부부도 고국을 방문했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100년만의 귀향 항일 허위가문 후손들] (하) 어려운 국적 회복·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100년만의 귀향 항일 허위가문 후손들] (하) 어려운 국적 회복·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100여년 전 만주와 연해주로 쫓겨 갔던 왕산가 후손 가운데 아직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키르기스스탄·중국·미국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 중 귀화를 원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3,4세대 중에는 그곳을 제2의 고국으로 생각하고 귀국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세계 각지에 뿔뿔이 흩어진 왕산의 후손들 허게오르기씨의 형이며 허국의 2남인 허프로코피(72)씨는 모스크바에 살고 있다. 키르기스스탄에서 농업기계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귀화를 원하지 않는다. 고령인데다 러시아에 정착한 자녀들과의 떨어져 사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허프로코피씨는 이번 광복절에 보훈처 초청을 받아 한국을 방문했다. 모스크바에는 왕산 허위의 3남인 허준의 딸이며 화가인 허미이라(45)씨 등 다른 후손들도 있다. 귀화한 허금숙씨는 여동생 허옥숙(51)씨와 허성숙(47)씨, 남편 최치도(65)씨를 중국에 두고 왔다. 최씨는 교사로 일하다 5년 전 정년퇴직했다. 허금숙씨는 10여년간 떨어져 있던 남편과 자녀들에게 한국 국적을 회복시키려고 준비 중이다. 왕산의 2남인 허영의 아들인 허도성(73)씨는 미국 휴스턴에 살고 있다. 귀화는 곧 이산을 의미하기 때문에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 허게오르기씨 형제도 한동안 가족과 떨어져 생활했다. 남은 가족들을 귀화시키는데 몇년이 걸릴지 모른다. 타국에서 교육받고 자란 4세대에게는 그 곳이 더 살기 편할 수도 있다. ●독립운동 했어도 입증받기까지 절차 복잡해 허금숙씨는 특별귀화를 하기까지 1년이 넘게 걸렸다고 했다. 이유는 허금숙씨가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허겸의 손녀가 맞는지 확인하는 절차가 복잡했기 때문이다.1995년에 홀홀단신 서울에 들어온 허금숙씨가 할아버지 성산 허겸과의 관계를 입증할 만한 서류를 챙겨왔을 리 만무했다. 허씨는 “1992년에 보훈처 직원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할아버지 시신을 한국으로 모셔왔고, 인적관계를 파악해 갔는데도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해서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성산이 “왜놈의 호구조사를 따르지 않겠다.”며 본인뿐 아니라 허금숙씨의 아버지인 허선의 이름도 나라에 등록을 하지 않아 일이 더 어려웠다. 허금숙씨는 “중국동포 사회에서 독립운동가 자손이라고 존경받고 살던 집 자손도 독립운동을 한 기록을 남기지 않은 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불법체류를 하고 있다.”고 했다. 후손이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활동을 증명해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게오르기씨는 “이런 면에서 왕산의 자손들은 그나마 혜택을 받은 셈”이라고 말했다. 왕산의 독립운동 기록이 일본군 재판기록 등에 온전히 남아 있었고, 이 기록을 바탕으로 여러 사가들이 왕산가의 독립운동을 연구해 놓았기 때문이다. 허게오르기·블라디슬라브 형제는 6개월 만에 독립유공자 후손이라는 것을 인정받고 특별귀화증을 받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있었고 몇 차례 언론에 공개돼 큰 도움이 됐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왕산家의 독립운동사] (3) 허위·허겸의 죽음

    일제 헌병에게 체포당한 왕산 허위는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압송돼 의병탄압 최고 지휘자이던 헌병사령관 아카시 겐지로에게 신문을 받았다. 의병을 일으킨 목적을 설명하는 왕산의 목소리는 당당했다.“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요, 실상은 한국을 멸할 흑심을 가졌다. 우리들이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멈추려 하듯 힘에 벅찬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왕산은 또 일본 수사관이 의병활동에 앞장 선 자와 대장이 누구인지 추궁하자 “앞장선 자는 이토 히로부미고 대장은 나다.”라고 말한다. 이토 히로부미를 지목한 연유에 대해 왕산은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나라를 뒤엎지 않았더라면 의병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즉 앞장 선 자가 이토 히로부미가 아니고 누구인가.”라고 대답했다. 아카시는 왕산의 인품과 충성심에 감복해 왕산을 국사로 대우했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왕산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청했지만, 허락이 나지 않았다. 결국 1908년 9월18일 왕산에 대해 사형이 선고됐고,10월21일 왕산은 교수형을 당했다. 서대문 형무소가 지어지고 최초의 사형 집행이었다. 형이 집행되기 전에 왜승이 명복을 빌기 위해 불경을 읽으려고 하자, 왕산은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혹 지옥에 떨어진다고 해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 복을 얻겠는가.”라며 물리쳤다. 제자 박상진이 왕산의 시신을 수습해 뒷날 고향 선산인 구미 선영아래에 모셨다. 왕산이 숨진 뒤 왕산가는 탄압하는 일제를 피해 야반도주하듯 고향인 구미를 떠나 만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했다. 왕산과 함께 의병활동을 했던 형 성산 허겸은 1912년 이상룡 등이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만주에 조직한 자치기관인 부민단에서 10여년간 일했다. 부민단은 동포들의 자활과 교육사업에 중점을 두고 활동했으며, 성산은 남북만주와 노령을 무대로 활동하며 국내에 잠입했다 붙잡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성산은 출옥해 86세에 다시 만주로 가,1940년 90세를 일기로 주하현 하동에서 서거할 때까지 광복운동에 헌신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왕산家의 독립운동사] (2) 서울 진공작전

    러일전쟁 이후 일제는 침략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왕산도 1905년 1월 일제 헌병대에 며칠 동안 구금됐다. 항일투쟁을 중단하라는 요구를 거부하자 일제는 같은 해 3월부터 4개월 동안 왕산을 다시 구금했다. 구금에서 풀려난 뒤 은거생활을 하던 왕산은 이해 9월 지금의 휴전선 일대인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 지방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킨다. 성산 허겸도 아우의 부대에 합류했다. 왕산은 경기도 이인영 의병부대와 강원도 서부 이은찬 부대 등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해 전력을 극대화시켰다. 서로 연락을 이어가던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 하순쯤 왕산과 이인영 부대를 주축으로 의병 1만명을 모아 13도창의군을 조직,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했다. ●日 치열한 방해공작에 뜻 못이뤄 작전에 앞서 왕산은 서울주재 각국 영사관에 선언문을 보내 의병 항일전의 합법성을 공포했다. 그리고 1908년 1월27일 왕산은 선발대 300명을 거느리고 동대문밖 30리 지점까지 진격했다. 이 때 이인영이 친상을 당해 귀향을 했다.5000명 규모의 후발 본대도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서울진공계획이 노출돼 언론이 이미 두달 반 전부터 보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방해공작이 치열했던 것이다. 결국 수적·전략적으로 열세했던 왕산의 부대는 패했다. 실패 뒤 왕산은 연천에 머물며 전력을 다시 모으고 있었지만, 항간에는 왕산이 음독 자살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8년 2월13일자에서 이런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의병장 허위씨는 파주 등지에서 약을 먹고 자처하였다더니 항설을 들은 즉 죽기는 고사하고 도당 4000∼5000명을 거느리고 가평 등지에 둔취하여 병졸을 연습한다더라.”라고 근황을 전했다. 기사처럼 사태가 수습된 뒤 왕산은 다시 임진강 근처에서 의병을 일으켜 유격전을 벌이며 일본군을 괴롭혔다. 이들은 일본군 진지를 기습해 통신을 마비시키고, 관공서를 습격하고 부일매국노를 처단했다. ●외교권 회복 등 30개조항 日에 요구도 1908년 2월부터 5월까지 왕산 부대는 왜군과 15차례의 교전을 벌였다. 왕산은 이 기간에 부하 박노천, 이기학을 서울로 보내 통감부에 외교권 회복, 통감부 철거, 이권침탈 중지 등을 골자로 하는 30여개의 요구조항을 내기도 했다. ■ 참고 서적 왕산 허위의 나라사랑과 의병전쟁(왕산허위 기념사업회 편), 아직도 내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허은 여사 구술집)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친일파 민영휘후손 재산다툼

    친일 대가로 물려받은 땅을 두고 친일파 후손 친척끼리 재산다툼을 하고 있는 것으로 14일 뒤늦게 확인됐다. 주인공은 친일파 민영휘의 후손들이다. 민영휘는 2차 대전 당시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해 조선총독부에서 작위를 받고, 일제의 한반도 토지강탈에 협력한 대가로 거액의 재산을 형성한 전형적인 친일파로 분류된다. 그의 셋째 아들 민규식의 재산을 두고 후손들끼리 다툼이 생겼다. 민규식은 1933년 서울 종로에 부동산 매매 회사인 영보 합명회사를 세우고, 종로빌딩을 세웠다. 한국전쟁 때 민규식이 납북되고, 이 회사에서는 민규식의 셋째 아들과 의붓아들인 유모씨가 1985년부터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후 1994년 재개발 사업 와중에 민씨 일가는 75억원을 받고 빌딩과 부지를 팔았다. 4년 뒤인 1998년 민씨는 자신과 남매들의 명의로 된 회사 지분을 아들 유씨에게 양도했다. 민씨가 2001년 사망한 뒤 민씨의 형제들은 “지분양도 동의서를 위조했다.”며 유씨를 검찰에 고발했지만, 항소심 법원은 유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檢, ‘친일파 땅찾기’ 訴취하 거부

    친일파 땅찾기 소송을 낸 친일파의 후손이 소를 취하하려고 했지만, 국가가 소 취하를 거부한 것으로 14일 확인됐다. 친일파재산환수법이 지난해 12월 말 시행된 이후 친일파 땅 소송의 취하 의견이 거절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종황제의 사촌형으로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 등을 내용으로 한 을사조약 감사 사절단으로 활동한 이재완의 후손이 지난 3월 국가를 상대로 한 소유권 보존등기 말소 청구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가 4개월만인 지난달 11일 소 취하 신청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하지만 국가를 대리해 소송을 수행하고 있는 검찰은 이에 동의하지 않겠다고 25일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에 따라 이재완의 후손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은 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난 이후에야 종결될 전망이다. 민사소송법에 따라 본안 사건에 대한 판결이 나오기 전에 소 취하 의견을 내 법원이 받아들이면, 이후에 소송을 또 다시 낼 수 있다. 검찰은 이씨의 후손들이 상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해질 때 소송을 다시 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확정 판결을 받아놓겠다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친일파 후손들의 소송남발을 막고, 친일파재산환수법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소 취하를 수용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법무부와 검찰이 파악하고 있는 친일재산 관련 국가소송은 이완용·송병준·이재극·이근호·윤덕영·민영휘·나기정의 후손들이 제기한 33건으로 국가 승소 5건, 국가 패소 9건, 소 취하 6건을 제외한 13건이 재판 계류 중이다.6건에 대해 검찰은 재소송 의사가 없다는 확인을 받았다.계류 중인 사건 가운데 6건은 친일재산 여부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소송이 중지됐다. 나머지 7건은 소송중지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재판이 진행 중이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100년만의 귀향 항일 허위가문 후손들] (중) 이국 망명생활

    [100년만의 귀향 항일 허위가문 후손들] (중) 이국 망명생활

    의병장 왕산 허위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한 뒤 더 이상 집성촌인 구미에 모여살 수 없었던 왕산의 일가와 후손들은 짐을 싸서 만주로 야반도주를 했다. 만주도 안전하지는 않았다. 왕산의 후손의 목에는 신고보상금이 걸려 있었다. 일본 순사가 눈치챘다는 말이 들리면 자다가도 일어나 국경을 넘어야 했다. 고향을 떠난 뒤부터 그들의 삶은 격동의 시대만큼 흔들렸다. ●술마시면 독립운동 얘기하던 허금숙씨 아버지 왕산의 바로 위 형인 성산 허겸은 만주에 정착했다. 쫓기는 와중에도 허겸은 만주에 조선어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에서 성산의 아들이며 이번에 귀화한 허금숙씨의 아버지인 허선(1987년 사망)씨도 배웠지만, 상급학교에 다닐 수는 없었다. 허선씨는 배운 게 없으니 헤이룽장성에서 평생 소작농으로 일했다.14살 때 허선씨에게 시집온 어머니는 어렸을 때 친어머니를 여의고 만주 등지에서 생활해서인지 솜씨가 야물었다. 허금숙씨는 어머니가 장아찌와 김치를 담가 일년내 가족들의 반찬을 댔다고 회상했다. 지금 한국에서 먹는 것보다 더 짜고 덜 매운 음식이었다. 아버지 허선씨는 말이 없으셨지만, 힘이 장사였다. 친구들과 술이라도 마시면 아버지인 성산보다는 삼촌인 왕산 얘기를 꺼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왜군들에게 호통치며 취조에 응했던 이야기, 의병활동을 하면서 썼던 격문…. 술자리에서 나오던 집안 얘기가 뚝 끊긴 것은 1966년 중국에 문화대혁명 바람이 분 뒤부터다. 아버지가 어딘가 끌려갔다 온 뒤부터 큰 소리로 집안 얘기를 하지 못했다. 그 때만 해도 남조선이라고 부르던 고국은 중국의 최대 적국이고, 독립운동 얘기는 금기가 됐다. 할아버지 허겸은 일본 국적의 호적을 만들 수 없다며 아버지 허선씨를 낳은 뒤 이름을 관청에 등록하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피해를 감수해야 했던 것처럼 장녀인 허금숙씨도 동생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했다. 그는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인 소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3남3녀 중 다른 동생들은 덕분에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 대해 다시 말할 수 있게 됐지만, 아버지는 서울올림픽이 열린 바로 전 해에 사망했다. 허금숙씨의 어머니도 한국땅을 밟지 못하고 1997년에 숨을 거뒀다. 경상도 출신인 어머니는 “집앞에 감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지금도 그대로일지….”라며 궁금해했었다. 허금숙씨의 한국말은 철저하게 부모의 말투 그대로다.“‘나라말’을 잊어버리면 정신을 잃게 된다.”는 아버지의 경상도 말씨를 집안에서는 꼭 써야 했기 때문이다. ●광복되자 고국으로 보내달라고 스탈린에게 편지썼던 아버지 허국 허위의 직계 후손들은 주로 구 소련 땅으로 도주했다. 허위의 4남 허국의 아들로 이번에 귀화한 허게오르기씨와 블라디슬라브씨는 한국말을 쓸 수 없었다. 쫓는 일제의 눈길이 무서워 부러 집안에서도 러시아말을 쓰게 했다. 허국(1971년 사망)씨는 만주 군경을 피해 연해주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가족들과 함께 떠나야 했다. 기개가 대단했던 허국씨는 고국에 돌려 보내달라고 직접 스탈린에게 편지를 썼다. 나갈 수 있다는 예상 밖의 답장이 왔다. 하지만 나가고 싶다고 한 의도가 뭔지, 당국이 캐고 있다는 말을 지인에게 전해듣고 그날로 허국씨는 가족들과 함께 고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방으로 야반도주를 했다. 정착한 곳이 키르기스스탄이다. 험한 일을 해보지 않았던 허국씨는 여기에서 소작농으로 일하며 육체노동을 했다. 하지만 곧 십장으로·반장으로 직위가 올랐고, 감독일을 맡게 됐다. 교육열이 유달리 강했던 허국씨는 자녀들에게 엄했다. 게오르기씨를 비롯한 자녀들을 모두 대학교육까지 시켰다. 허게오르기씨가 20대 중반이 되던 1971년까지 허국씨가 살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다. 머리가 큰 뒤부터 기숙학교에 다녔고, 여름에만 잠시 집에 돌아와 생활했던 탓이다. 허게오르기씨는 고려인과, 허블라디슬라브씨는 연구소 동료이던 러시아 여성과 결혼을 했다. 이들도 동·서 화해무드가 조성되던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에 대해 자유롭게 알아보지 못했다. 김일성대학을 나와 모스크바대 교수를 하는 아저씨뻘 되는 친척과는 연락을 했지만, 남한과는 소통하지 못했다.1988년 텔레비전을 통해 서울을 처음 봤을 때는 충격을 받았다. 소수민족의 비애는 구소련이 해체된 뒤 찾아왔다. 자국민 우선정책을 쓴다며 둘다 직장에서 나가라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일제를 피해다니던 아버지가 이주정책 때문에 다시 쫓겨가 소작농부터 시작한 것처럼 형제도 소작농과 트럭운전사로 일해야 했다. ●만주서 귀국한 허벽씨가 귀화에 도움 줘 왕산의 친척 허벽씨는 이들과는 다르게 광복 직전 만주에서 귀국했다. 허벽씨가 갖고 있던 허씨 일가 사진이 이번에 허게오르기씨 등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40년 전에 찍은 사진을 필름까지 갖고 있었던 이유에 대해 그는 “아버지가 만주에서 도망을 다니느라 사진을 한장도 찍지 않았다. 영정사진으로 쓸 사진 한장 없는 게 한이 맺혀서 중학교 때부터 사진을 배웠다.”고 말했다. 허벽씨는 “한국에 살면서 내가 가장 힘든 시대를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이국에서 온 친척들 모두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시대에 희생당하며 살았다.”면서 “낯선 고국에 돌아온 이들이 어떻게 다시 정착하고 살아갈지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불법체류 10년…부모 임종못해

    불법체류 10년…부모 임종못해

    고국에 온 뒤에도 왕산가(家) 후손인 허게오르기씨와 허금숙씨는 서로 연락을 못하다 지난 달에야 처음 만났다. 허금숙씨는 “그 분들은 한국말을 잘 못하셔서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라고 걱정했다. 허게오르기씨는 “10년이 넘게 귀화를 하지 못하고 고생했다고 들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들은 서로의 안부를 걱정했지만, 정작 자신들의 일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체념하는 태도를 보였다. 고국이 부당하게 대우해도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습이 핏줄끼리는 통하는 게 있어 보였다. 오히려 한국 국적을 갖게 된 후손들은 이산가족이 됐던 가족들과 다시 만날 생각에 들떠 있었다. ●할아버지 서훈 받아도 불법체류자로 입국…부모 임종도 못지켜 해외에 흩어져 살던 왕산가 후손 가운데 가장 먼저 조국에 돌아온 사람이 성산 허겸의 손녀인 허금숙씨다. 입국과 체류 경위를 따지자면 사실 ‘조국에 돌아왔다.’는 말이 무색하다.1995년에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온 허씨는 곧 불법체류자가 됐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된 아들과 딸의 학비를 벌기 위해 입국한 첫해 가정부로 일하던 허금숙씨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 신도시 개발 때 아파트 공사현장 식당에서 잠시 일하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아파트 단지내 페인트칠 작업을 하게 됐다. 현장의 우악스러운 분위기와 남자들의 지분거림에서는 해방됐지만, 여성이 하기에는 고된 일이었다. 교사의 아내로 중국에서 지낼 때와는 달리 힘든 생활을 하다 허금숙씨는 골다공증을 얻었다. 불법체류자 신분이라 건강보험 적용도 받지 못하고,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자원봉사 단체에서 치료를 받았다.10년 동안 법적·정신적으로 허금숙씨는 외국인이었다. 부모와 형제들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무너진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해 허금숙씨까지 6남매 중에 오빠, 바로 밑 남동생이 허금숙씨가 우리나라에 온 다음에 숨을 거뒀지만, 한번 나가면 국내로 돌아올 수 없으니 갈 수가 없었다. 남편과 자식도 국내로 들어오지 못했다.3살 터울로 사이좋은 두 남매가 결혼할 때에도 사진과 전화로 소식을 듣는데 만족해야 했다. 허금숙씨는 “이제 국적을 받았으니 주민등록증도 만들고, 여권도 만들어서 남편을 보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불법체류자라도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는 기사를 보고, 귀화 신청을 한 게 2년 전이니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만도 하다. 할아버지 성산의 시신을 대전 국립묘지로 옮긴 게 1992년인데도 확인할 게 남았다며, 행정처리 기간이 늘어졌다. 허금숙씨는 “나만 귀화신청을 하는 것도 아니니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국 왔으니 좋은 일만 생길 것” 다행히 왕산 허위의 막내 허국의 아들인 허게오르기씨와 허블라디슬라브씨는 각각 입국한 지 6개월과 1년 만에 국적을 받았다. 이들은 우리나라 국적을 갖게 됐으니 이름도 바꾸겠다고 한다. 게오르기씨는 ‘길(吉)’로, 블라디슬라브씨는 ‘석(石)’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허게오르기씨는 우리나라에 왔으니 이제 ‘좋은 일’만 생기라는 의미에서 ‘길’자를 택했고, 허블라디슬라브씨는 지질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이름을 ‘돌’로 지었다. 미국·중국·구소련 지방 등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왕산가 후손들은 대부분 대학교육을 받았다. 유독 공학을 전공한 사람이 많은 것도 특이하다. 허게오르기씨도 자동역할을 공부했다. 언젠가 고국에 돌아간다면 문학이나 어학을 공부하는 것보다 공학을 배우는 게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고 이들은 설명했다. 하지만 고국에 돌아와도 이들은 단순한 노동밖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따져보면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1991년부터 구소련 지역의 자국민 우선정책에 따라 연구소에서 쫓겨나 트럭운전사·소작농을 하던 때와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은 셈이다. 허게오르기씨는 “한국말이 서툴고, 한국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라면서 “문제는 우리에게 있지, 하나도 잘못된 게 없다.”고 말했다. 최근 이들의 사연을 들은 경기도 안성의 의료기 제조업체 ㈜비겐에서 일자리를 마련해줬다. ●“그동안 나라 발전하느라 독립운동가 못챙겼을 것…” 허블라디슬라브씨의 아들 허알렉산드라(27)씨는 독립유공자 후손이라는 이유로 고려대학교 한국문화센터에 장학금을 받고 다니게 됐다. 한국말은 못하지만 며칠 만에 젓가락질을 배운 아들이 대견한지 허블라디슬라브씨는 “먹고 사는 일이니 금방 배우더군요. 말도 곧 배울 겁니다.”라며 웃었다. 그는 이어 “그 동안 독립운동한 사람을 못찾은 것도 나라가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것뿐”이라면서 “뿔뿔이 흩어졌던 왕산가 후손들도 모두 모이고 점차 나아질 것입니다.”라고 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친일파 400명 재산환수 착수

    친일파들의 재산을 환수하기 위한 범정부 차원의 조사작업이 이달 18일부터 본격 시작된다. 친일파 재산환수를 위해 만들어진 대통령 직속 범정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위원장 김창국)는 오는 18일 서울 충무로 극동빌딩 6층에서 현판식을 갖고, 공식활동을 시작한다고 13일 밝혔다. 조사위는 을사오적 등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명백하거나 친일 활동의 대가로 토지 등을 획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400여명의 후손들이 보유한 재산을 국고환수 우선 대상으로 정하고 직권조사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로써 1949년 반민특위 해산 이후 57년 만에 친일파 재산에 대한 국가 차원의 환수 작업이 재개됐다. 조사위는 을사오적 가운데 한 명인 이완용과 ‘친일매국노 1호’로 불리는 송병준 등 친일행위자 400여명에 대해 직권조사를 벌이고 조사 범위를 확대하는 한편 공공기관이 의뢰한 사건 조사도 병행할 방침이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반민족 행위로 취득한 재산 60일간 이의신청 거쳐 환수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의 본격 가동은 소위 반민특위 해산으로 중단됐던 ‘친일 단죄’가 57년 만에 실현된다는 민족사적 의의가 있다. 조사위는 특정한 재산이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돼 친일파 후손이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지를 파악, 해당 재산을 국고로 환수하는 역할을 맡는다. 친일파가 명백하거나 친일·반민족 행위를 한 것으로 의심되는 400여명의 재산을 직권조사 대상으로 정했다. 이 가운데 ‘을사오적’ 이완용의 후손이 소유권을 인정받은 재산 2건과 이재극·민영휘의 후손이 획득한 재산 2건 등 4건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개시’ 결정이 내려졌다. 조사 결과 반민족 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이 맞고 그 후손이 보유하고 있을 경우,9명의 위원 과반수 출석에 다수결로 ‘국고귀속’ 결정을 내린다. 하지만 해당 토지가 친일파 재산이 아니었거나 친일파 재산이 맞더라도 제3자가 선의로 취득한 점 등이 밝혀지면 환수 대상에서 제외된다. 국고귀속이 결정된 토지에 대해서는 60일간의 이의신청 기간 뒤 재경부에 통보하고, 소유권을 국가로 이전하는 등 환수 절차를 밟는다. 당사자가 이의를 제기하면 조사위는 30일 내에 다시 판단하며 이마저도 불복하는 당사자는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조사위는 행정소송의 빈발 가능성에 대비, 검사 3명과 공채 변호사들로 구성된 법무담당관실을 설치했다. 친일파 재산 환수는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해산으로 57년간 중단됐었다. 반민특위는 친일파 221명을 기소했지만 신체형을 받은 친일행위자는 10여명에 그쳤고 이들 역시 대부분 곧 석방됐다. 친일파들이 매국 활동의 대가로 받은 재산은 국고로 환수되지 못한 채 후손들에게 그대로 대물림됐다. 후손들의 ‘땅찾기 소송’도 잇따랐다. 제2의 반민특위로 불리는 ‘친일재산조사위’가 어떤 성과를 낼지 주목된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의병장 허위선생 후손들 ‘100년만의 귀향’

    의병장 허위선생 후손들 ‘100년만의 귀향’

    구 소련과 중국에서 각자 떨어져 살다 지난달에야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왕산 허위의 후손들. 항일 운동으로 탄압을 받아 국외로 뿔뿔이 흩어졌던 그들이 조국 땅을 밟는데 100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후손들은 고국으로부터 외면당했지만, 돌아온 게 꿈만 같다고 했다. 오랜 세월 고초를 겪었지만 고국의 공기를 마시게 된 것만 해도 고맙다고 했다. 이들의 귀국 후 생활, 타국에서의 인생 역정, 다시 찾은 고국에 대한 느낌을 3회에 걸쳐 싣는다. ●키르기스스탄서 온 허게오르기 형제 “말만 들었지, 이렇게 발전한지는 몰랐어. 우리 아버지가 이 땅에서 내몰린 뒤 남은 후손들이 이만큼 해 놓은 거야.” 의병장 왕산 허위의 손자로 키르기스스탄에 살다가 지난달 한국 국적을 취득한 허게오르기(62)씨와 허블라디슬라브(55)씨 형제에게 고국이 무관심한데 섭섭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아버지에게서 듣던 조국에 돌아왔지만, 한동안 이들은 발붙일 곳이 없어 발을 동동 굴러야했다.1907년 13도 창의군 편성을 주도한 의병장 왕산은 밀고로 붙잡혀 1908년 교수형을 당해 순국했다. 그뒤 왕산가 사람들은 일제를 피해 중국과 러시아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헤이룽장에서 온 허금숙씨 “1995년 아이들 대학 학비를 벌어보려고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10년 동안 제가 누구 손녀인지 알고 박대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죠.”왕산의 바로 윗형 성산 허겸은 역시 의병활동을 하다가 만주로 건너갔다. 성산의 손녀인 허금숙(59)씨는 한국에 들어와 모진 고생을 했다.1992년 정부는 허금숙씨의 할아버지 허겸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주었지만 허씨는 10년간 불법체류자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해방전 귀국한 허벽씨 만주로 망명했다가 해방이 되기 직전에 국내로 들어와 고국에서 살 수 있었던 왕산의 먼 친척 허벽(71)씨는 허게오르기씨 등이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각종 자료를 간직해 왔다. 조국에서도 독립유공자 후손의 삶은 편치 않았다. 일제 때 도망다니느라 남은 재산이 없었고, 해방했을 때까지 이국만리에서 떠돌고 있는 어른들 대신에 허벽씨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으니까 굶는 것보다 ‘누구 후손이 비겁하게 살고 있다.’는 말을 듣는 게 더 무서웠었지. 벌 받을 말이지만 때론 조상들이 짐이 됐어.”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日은행권 경제침탈” 유통반대운동 주도

    왕산 허위(1854∼1908)는 구한말 정미의병 때 ‘서울진공작전’을 펼치려고 했던 의병장이다. 서울 동대문에서 청량리 구간은 1996년부터 그의 호를 따 ‘왕산로’라고 불린다. 왕산뿐 아니라 왕산의 바로 윗 형인 성산 허겸과 맏형 방산 허훈도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은 군자금을 만들어 왕산에게 보내주기도 하고, 왕산과 함께 의병활동도 했다. 국내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만주로, 연해주로 뿔뿔이 흩어지며 독립운동을 했다. 왕산은 맏형 방산 허훈(1836∼1907)에게 글을 익히고 학문을 배우며 영남학파의 지식주의와 실용주의를 익혔다.27살이 되던 1881년에 아버지를 여읜 왕산은 10년 동안 후배들을 가르쳤고, 이 때 의병활동을 함께 할 동지들과 교분을 쌓기 시작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공포된 1895년 동학군을 피해 피난생활을 하고 있던 방산이 아우 성산 허겸과 함께 진보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을미의병이다. 이 때 방산의 나이는 이미 환갑 가까이 됐다. 방산과 함께 피난 중이던 왕산은 김산으로 가서 의병을 일으켰지만, 관군에 패한 뒤 세력을 다시 모으고 있었다. 이 때 왕산이 쓴 격문의 일부다. “지금 왜적이 우리나라 안에 발을 내리고 앉았음이 이미 두어 해나 되었건만 의리를 좇아서 응모하는 자가 보잘 것 없다. 팔도 안에 참으로 의용과 지략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겠는가. 손을 내리고 바라만 볼 수 없기에 기필코 이 도적의 괴수를 소탕코자 하는 바이다. 여러분은 같은 소리로 응모하라. 비록 몽둥이와 허리를 가지고 달려들어 공격해서 용기를 도우면, 적들도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1896년 3월 왕산은 이기찬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다시 김산의진을 일으켰지만, 몇차례 관군에 패하고 해산하게 된다.1898년에 왕산은 이건석과 함께 구국상소를 올렸고, 이듬해에는 나중에 대한광복회를 결성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박상진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45살이 되던 1899년 왕산은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영희천 참봉 판임관, 성균관 박사, 소경원 봉사를 거쳐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을 전후해 주차일본공사관수원, 통정대부, 평리원 재판장 등 고위직에 올랐다. 이 동안 왕산이 한 활동 중 눈에 띄는 게 일본 제일은행권 유통반대운동이다. 제일은행권 유통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전초를 만드는 작업으로, 우리 정부의 허가 없이 이뤄진 작업이다. 유통반대운동은 공제소에서 주도했지만, 일본공사의 압력 때문에 대한제국 정부는 1903년7월 공제소에 대한 해산령을 내렸다. 하지만 왕산은 동료들을 규합해 운동을 이어갔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홍석현씨 비공개 소환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편법증여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는 13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아들 재용씨를 이번주 중 소환조사키로 방침을 정하고, 변호인측과 일정을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오는 24일로 예정된 에버랜드 사건 항소심 공판에 앞서 관련자 조사를 마무리하기로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검찰은 지난 10일 홍석현 전 주미대사를 비공개로 소환, 에버랜드 주주사인 중앙일보 회장으로 재직하던 1996년 12월 에버랜드가 발행한 CB의 인수를 포기한 배경을 집중 추궁했다.검찰은 특히 이 회장이 1998년 홍 전 대사가 대표이사로 있던 보광그룹에 중앙일보 주식 51만 9000여주를 무상증여한 것이 중앙일보가 CB 인수를 포기한 대가였는지도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지난해 10월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인 허태학ㆍ박노빈씨가 1심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직후 수사를 재개, 지금까지 이 회장 부자와 이학수 그룹 부회장을 제외한 30여명의 피고발인 조사를 마쳤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주민들 “갈등수습 이제 시작”

    11일 부안 핵폐기장 관련 집회와 시위를 한 혐의로 집행유예형 등을 선고받은 55명이 사면대상자에 포함되자, 관련자들은 일제히 환영의 목소리를 냈다. 정부는 “핵폐기장 선정 문제가 마무리된 상황에서 지역 주민간 갈등과 반목을 해소해 화합의 전기를 마련할 필요성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 조치”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이번 사면 조치를 바라보는 정부와 부안 주민의 시선은 미묘한 차이를 보였다. 정부는 사면조치를 갈등 수습의 마무리 단계로 보고 있는 반면, 주민들은 “이제 시작”이라고 받아들였다. 2003년 핵폐기장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관계자들은 “그 동안 정부에 사면복권을 꾸준히 촉구해온 데 대한 결과물”이라면서도 “부안주민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명예회복”이라고 강조했다. 당시 정책실장이던 이현민씨는 “100만∼7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던 분들과 부상자에 대한 조치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142명 사면·복권… 재벌 총수 빠져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인 안희정씨와 신계륜 전 열린우리당 의원이 광복절을 맞아 특별사면·복권됐다. 고령인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은 특별감형됐고, 부안 주민 55명도 복권됐다. 김연배 한화그룹 부회장 등 여당이 포함시켜 줄 것을 요청한 재벌 총수들이 빠진 반면, 분식회계 사건 등에 연루된 전문경영인 17명이 사면 대상에 포함됐다. 정부는 11일 광복61주년을 맞아 국무회의 의결과 대통령 재가를 거쳐 142명에 대한 특별사면·복권을 15일자로 단행한다고 밝혔다. 대상에는 대선자금 사건에 연루됐던 서청원·김원길 전 한나라당 의원과 대통령 측근 비리에 연루됐던 여택수 전 청와대 행정관이 들어갔다. 강태운 전 민주노동당 고문, 김용산 전 극동건설 회장,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처남인 이성호씨는 모두 70세가 넘은 고령이라는 이유로 사면됐다. 하지만 당대표 경선자금을 받은 혐의로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상고한 한화갑 민주당 대표와 나라종금 사건과 관련, 기소돼 집행유예형을 받은 한광옥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빠졌다. 선거법 위반 사범과 개인적 이익을 위한 대출사기 등에 연루된 경제인도 제외됐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오늘 8·15 특사 발표…안희정·서청원 포함

    8·15광복절을 맞아 특별사면과 가석방이 11일 단행될 예정이다. 10일 법무부 등에 따르면 8·15광복절을 맞아 정치인과 경제인, 민생사범과 시위 가담자 등 140여명을 사면 또는 복권하고 800여명을 가석방하기로 결정,11일 국무회의를 거쳐 발표된다. 이번 특사에는 2002년 불법 대선자금 사건에 연루된 안희정씨가 복권되고 열린우리당 신계륜 전 의원, 여택수씨가 사면 대상에 포함될 것으로 전해졌다.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집행유예 중인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와 김원길 전 의원도 사면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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