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고대 로마의 일상생활
류재화 옮김 우물이 있는 집 펴냄
로마는 흔히 신분질서가 확고한 경직된 사회로 간주되지만 사실은 신분 혹은 계급간의 이동이 활발했던 사회다.심지어는 황제의 자리도 특정 도시나 특정 가문의 전유물이 아니었다.이민족과의 결혼도 빈번했고,신분제도도 완화돼 노예의 삶의 질이 평민의 수준에 이르기도 했다.노예가 어느날 제국의 2인자가 되는 일도 가능했다.
로마의 신분제는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고 대대로 지속되는 것도 아니었다.신들을 모시는 제례의식에서도 노예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누구 못지않게 컸다.노예가 엘리트 계층으로 편입된 경우도 있었다.클라우디스 황제 때부터 트라야누스 황제 때까지는 이례적으로 해방노예들이 내각 구성원으로 선발됐다.그로 인해 제국시절의 원로원 의원들은 이 노예 출신들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나르키수스 같은 노예는 권력의 2인자로 등극해 신하들의 승진과 재산,목숨까지 좌지우지할 정도였다.
프랑스의 제롬 카르코피노가 쓴 ‘고대 로마의 일상생활’(류재화 옮김,우물이 있는집 펴냄)은 ‘세계제국’ 로마의 일상생활사를 2000년의 시간 장벽을 넘어 생생하게 전해준다.역사학자이자 지리학자,비문(碑文)학자이기도 한 저자는 역사에 대해 섣불리 평가하기보다는 생활상 그 자체를 실증적으로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1939년에 첫 출간된 이 책은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 등 수많은 로마연구자들의 필수 참고문헌이 돼왔지만 국내에서는 이제야 비로소 완역본을 얻었다.
그동안의 로마역사서들은 로마 건국에서 멸망까지 정치와 황제를 중심으로 기술된 것들이 대부분이다.그러나 이 책은 정치나 전쟁,황제의 무훈과 치적 등을 크게 다루지 않는다.그 대신 먹고 마시고 단장하고 일하고 즐기고 사랑하고 질투하는 인간 삶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추적한다.
서기 1세기경 로마 주민은 이미 100만명에 이르렀다.이중 15만명이 실업자로,그들 대부분은 국가가 지원하는 연금으로 생활했다.인구팽창으로 인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주택난.제국의 수도에는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5∼6층(약 18m)의 주택,즉 ‘인술라(insula, 공동주택)’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그것은 당시로서는 현기증이 날 만큼 높은 것으로 수도와 화장실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물은 우물에서 길어와야 했으며 화장실은 돈을 내고 사용하는 공공시설물이었다.요즘은 이런 고층주택의 주인은 보통 맨 위층에 거주하지만 로마시대에는 1층은 건물 주인이나 그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1차 임대자가 차지했다.꼭대기로 올라갈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다.주인은 세입자가 세를 제때에 내지 않으면 위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치워 버려 외부와의 통행을 차단하기도 했다.
고대 로마시대 공공화장실은 무척이나 특이한 장소였다.화려한 대리석으로 꾸며졌으며 분수대가 설치되기도 했다.겨울에는 난로를 피워 안을 따뜻하게 했다.고대 로마인들에게 공공화장실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일종의 사교장이었다.
공중목욕탕 또한 남다른 의미를 지녔다.고대 로마에서 처음으로 공중목욕탕이 설립된 것은 기원전 2세기 무렵.공중목욕탕은 대중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책임지고 해준다는 제국 통치이념의 상징이었다.여러 황제를 거치면서 로마의 목욕탕은 수천 개가 넘었다.요컨대 고대 로마의 목욕탕은 단순히 몸을 씻는 장소가 아니라 최고의 복지공간이었다.로마 시민들에게 목욕은 최고의 레저였으며,공중목욕탕은 황제도 자주 이용했다.
로마제국의 사치와 방탕을 이야기할 때 흔히 드는 일화가 귀족들이 산해진미가 가득한 연회에서 구토를 해 가며 음식을 먹었다는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과장된 면이 많다.책에 소개된 로마인들의 연회 혹은 식생활 문화를 보면 아침식사는 대부분 물 한 잔 정도로 건너뛰었고 점심은 간식 수준으로 가볍게 먹었음을 알 수 있다.하지만 저녁은 성찬이었다.부자들이 베푸는 연회의 경우 7번에 걸친 요리가 나왔다.그러나 일부 부자나 미식가들과는 달리 대부분 로마인들의 저녁식사는 소박했다.
고대 로마에도 페미니즘이란 것이 있었을까.로마 사회에서 가장의 권한은 2세기 들어 여권이 신장됨에 따라 급속히 약화됐다.가장이 자식과 부인에 대해 모든 권한을 가진다는 법률도 사라졌다.처녀 때 누리던 편안한 삶을 포기하지 않겠다며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을 등한시하거나 금기시되던 일에 도전하는 여성들도 생겨났다.이혼이 만연했으며 재산을 노리고 결혼하는 일도 흔했다.고대 로마에도 ‘페미니즘 현상’이 있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한편 저자는 고대 로마의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편협한 이기심의 결과라는 견해를 펴 눈길을 끈다.여성들은 남성의 영역으로 간주됐던 문화와 예술,스포츠를 즐겼지만 직업활동에는 관심이 없었다.그들은 직업을 천하게 여겼다.로마 여인들은 어느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남자들을 흉내내는 데 그쳤다는 것이다.
현대 역사학에서 생활사 혹은 일상사는 갈수록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거대담론보다는 소소한 일상생활이 인간을 지배하는 하나의 코드로 인식되면서 역사분야에서도 수많은 무명씨들의 삶이 각광받고 있다.
찬란하고 오만했던 세계의 중심 로마.이 책은 그 영원의 도시 속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고대 로마인들의 감정과 의식,고민과 희망을 엿보게 한다.그들의 생활상뿐만 아니라 정신세계까지 만날 수 있다는 데 또 다른 미덕이 있다.이 책에는 고대 로마연구의 제1텍스트,미시사의 고전이라는 평가가 따른다.2만 2000원.
김종면기자 jm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