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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버스토리] 최저임금이 한국의 3배…기회의 땅, 밤늦은 시간 돌아다니는 것은 ‘금물’, 대사관 홈피 ‘헬로워홀’ 상담 제공도

    [커버스토리] 최저임금이 한국의 3배…기회의 땅, 밤늦은 시간 돌아다니는 것은 ‘금물’, 대사관 홈피 ‘헬로워홀’ 상담 제공도

    “한국인을 표적으로 하거나, 백호주의(호주 백인 우선정책)와 관련된 인종차별주의자의 소행은 아닙니다. 조금만 주의하면 사고를 예방할 수 있었을 텐데….” 김봉현 주호주 대사는 지난해 말 연이어 발생한 한국인 워킹홀리데이 참가자 살인 사건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했다. 김 대사는 24일 서울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몇 가지 생활 수칙만 지키면 호주에서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다”며 “밤늦은 시간이나 이른 새벽에 돌아다니면 안 된다. 교통법규나 환전 규칙 등을 지키지 않아 사기에 휘말리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호주에서는 ‘묻지 마 폭행’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김 대사는 “토니 애벗 호주 총리도 묻지 마 폭행에 대해 강도 높게 비난하며 엄벌하겠다고 경고했다”면서 “한인 동포 사회뿐만 아니라 호주 정부도 침통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드니가 속한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정부는 주폭 범죄에 대한 형량을 최소 징역 8년으로 대폭 강화했다. 김 대사는 “묻지 마 폭행 대다수가 과음한 상태에서 벌어지다 보니 연방 정부 차원에서 음주 시간을 제한하는 등 다양한 대책을 고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주호주 대사관은 워킹홀리데이로 호주를 방문하는 청년들을 위해 1월부터 대사관 내 홈페이지에 ‘헬로워홀’ 코너를 만들었다. 유학·이민·취업 등 호주 생활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제공한다. 워킹홀리데이 성공담과 실패 사례도 볼 수 있다. 김 대사는 “호주에 대한 일반 상식, 일자리, 숙소, 의료보험 등을 철저히 준비하고 와야 자리 잡을 수 있다”면서 “헬로워홀 코너에서 공신력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언제든 상담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대사관에서는 3개월에 한 번씩 시드니, 브리즈번, 퍼스, 멜버른, 애들레이드, 태즈메이니아 등지를 돌며 워킹홀리데이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간담회를 열고 있다. 또한 ‘영사협력원’ 10여명을 위촉, 한인 영사관이 없는 지역에서 워킹홀리데이 참가자들을 돕는 일도 한다. 영어가 부족한 학생을 위해서는 호주 현지인 자원봉사자를 소개해 준다. 김 대사는 “일자리가 다양하고 시간당 최저 임금이 한국보다 3배 많은 1만 7000~1만 8000원인 호주는 기회의 땅”이라고 강조하며 “영어 공부를 하든 돈을 모으든, 또는 문화 체험을 하든 뚜렷한 목적의식으로 준비를 철저히 한다면 호주에서 좋은 추억을 갖고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호주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대사관이나 총영사관에 거주 등록을 하면 사고가 발생할 경우 처리하기 쉽다”고 조언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커버스토리] 워킹홀리데이 이렇게 했더니…성공 vs 실패

    [커버스토리] 워킹홀리데이 이렇게 했더니…성공 vs 실패

    어떻게 하면 워킹홀리데이를 성공적으로 다녀올까. 한국의 지원자 중 대부분은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외국어 능력을 키우면서 돈을 벌고, 여행도 하고, 취업에 필요한 ‘스펙’까지 쌓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것들을 모두 거머쥐기에 1년이란 시간은 너무 짧다. 오히려 영어에 대한 두려움과 수많은 유혹에 자칫 아무것도 못하고 시간만 낭비한 채 귀국할 수도 있다. 세계 각지에서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을 경험했거나 현재 경험 중인 ‘워홀러’(워킹홀리데이 참가자) 7명과의 인터뷰에서 성공담과 실패담을 들어 봤다. 이렇게 하니 성공 #성공 1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의 1차 목적은 ‘홀리데이’여야 해요. 여행이죠. 그 앞에 붙는 ‘워킹’은 여행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수단이죠. 그 이상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통해 직업과 아내, 생활 터전까지 모두 얻은 배성환(31)씨. 그는 호주 워홀러들로부터 ‘조상’이라고 불릴 만큼 성공 사례의 대표자다. 2005년 처음 호주 시드니에 발을 들인 그는 그곳에서 만난 최혜진(32)씨와 함께 귀국해 2007년 결혼한 뒤 다시 호주로 갔다. 배씨는 멜버른에 있는 윌리엄 앵글리스 요리학교를 졸업해 지금은 이 도시에 있는 200석 규모의 레스토랑에서 부주방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호주에서 마음껏 여행을 다니다 요리의 매력을 알게 됐다고 했다. 배씨는 “멜버른에는 전 세계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수백 개의 식당이 있다”며 “이곳을 여행했던 3개월 동안 평생 먹어 보지 못했던 음식들을 맛보면서 요리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고 말했다. 그는 “워킹홀리데이를 할 때 호주에서 번 돈은 호주에서 쓰자고 마음먹었다”며 “1달러라도 한국에 남겨 가는 순간 여행자가 아니라 노동자로 호주에 온 것이 돼 버린다고 생각했다”고 되돌아봤다. 여행비 마련을 위해 각지의 농장에서 땀 흘려 일했고, 일이 끝난 뒤 백패커(배낭여행자 숙소)에 모인 세계 각국 출신의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영어가 늘고 다양한 나라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배우는 재미에 빠졌죠.” 2006년 귀국한 뒤 배씨는 국제공인영어시험인 IELTS에서 요리학교가 요구하는 점수를 훌쩍 넘겨 입학 허가를 받았다. 배씨는 요즘 워홀러들이 처음부터 너무 많은 정보를 갖고 시작해 오히려 기회를 놓친다며 안타까워했다. “제가 워홀을 할 때는 트램(노면전차)에서 맞은편에 앉은 현지인에게 길을 물어보는 등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 대화해야 생활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다 찾아볼 수 있어서 오히려 입을 열지 않아요.” #성공 2 A(여)씨는 대학 시절 워킹홀리데이로 일본에 다녀와 공인일본어시험인 JLPT와 JPT에서 모두 최고 등급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일본 연예인을 좋아해 일본어에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서울지역 대학에 다니던 중 전공인 경영학이 자신과 맞지 않음을 깨닫고 일본어에 매진했다. 그래서 일본 방송을 봐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일본어 실력으로 출국했다. 그는 도쿄 인근 사이타마현의 한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설거지 일을 하며 만난 일본 동료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일본어 실력을 키웠다. A씨는 번 돈을 다시 일본어 과외에 투자했다. 귀국해서는 한국으로 워킹홀리데이를 하러 오는 일본인들과 함께 살며 일본어 실력을 더 늘렸다. #성공 3 B(여)씨는 아직도 타이완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에 참가하며 전 지역을 여행한 경험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는 “여행하다 보니 중국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돼 중국어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했다”고 말했다. 중국에 가서 어학을 더 공부하고 싶었던 B씨는 중국에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이 없다는 것을 알고 타이완을 선택했다. 그는 중국어가 워낙 어려워 현지에서 일자리를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대신 오전엔 어학원을 다니고 오후에는 한국을 좋아하는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며 돈을 벌었다. B씨는 한국에 돌아와 중국을 상대로 무역을 하는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성공 4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으로 2012년 1월까지 캐나다에 다녀온 구병윤(26)씨는 그때의 경험을 살려 캐나다 전문 유학원에 취직해 부산 지사장으로 부임할 예정이다. 지난해 4월부터 11월까지 외교부에서 운영한 워킹홀리데이 홍보대사 ‘워홀프렌즈’ 2기 부산팀장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캐나다에서 3개월간 현지 초등학생의 여름 캠프 도우미로 봉사 활동을 하고 5개월 동안 피자 프랜차이즈 업체에서 근무했다. 구씨는 “한국인을 멀리하고 외국 친구들과 활발히 교류해 일본, 중국, 터키, 스위스, 브라질 등 거의 모든 대륙에 수십 명의 친구를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이어 “캐나다에서 영어를 잘하기 위해 컴퓨터 운영 체제까지 영문판으로 교체할 만큼 노력했다”며 “소중한 내 경험을 후배들과 나누고 싶어 유학원을 진로로 선택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하니 실패 #실패 1 C(28·여)씨는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 참가자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해 주는 한국인 중개인에게 속아 하마터면 빈털터리가 될 뻔했다. 그는 2011년 9월 ‘퀸즐랜드주 보엔지역에서 망고 수확철을 맞아 워홀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중개인에게 연락했다. 망고 수확철이 아직 3개월이나 남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중개인이 운영하는 백패커에서 숙박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 실수였다. 그는 “농장에 일이 전혀 없어 돈을 한 푼도 벌지 못했다”면서 “그렇다고 그 먼 곳에서 달리 갈 곳도 없어, 주당 110달러(당시 약 13만원)의 적지 않은 숙박비와 식비를 쓰며 3개월 이상을 버텨야 했다”고 말했다. #실패 2 2008년 호주 케언스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D(여)씨는 영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한국인끼리만 지내다 돌아왔다. D씨는 “학점은 엉망이고 딱히 꿈도 없어 워킹홀리데이만 다녀오면 영어가 늘고 여행도 하며 경험을 쌓아 좋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만 갖고 떠났다”면서 씁쓸해했다. 그는 자금을 모으기 위해 한 학기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영어 공부를 하지 못했다. 케언스에서 한 달 동안 홈스테이를 하며 집주인에게 말도 못 붙였다. 그는 살 집도 현지에서 알게 된 한국인에게 부탁해 구했다. D씨는 “‘초기 자금이 3개월 만에 동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압박감도 심하게 느꼈다”고 털어놨다. 그는 영어에 대한 두려움에 결국 한국인들만 모여 사는 집을 구했다. #실패 3 2012년 호주 시드니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F씨는 한인이 운영하는 업체에서만 일하다 온 것을 후회하고 있다. 한국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던 그는 한인 사이트에서 집과 일자리를 구했다. F씨는 “그래픽 디자이너 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슈퍼마켓 점원이었다”면서 “숙소를 제공한다는 말에 덜컥 수락한 것이 문제였다”고 말했다. 주급 500달러라고 적혀 있던 급여도 가서 보니 300달러에 불과했다. 한 달 만에 슈퍼마켓을 나온 그는 그래픽 디자인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대부분의 업체가 영주권자나 현지 대학을 나온 사람을 원했다. F씨는 결국 한인 슈퍼마켓과 식당을 전전했다. 그는 “당시 육체노동이 싫다고 한인 가게에만 취업했던 것이 제일 후회된다”고 말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커버스토리] “소송보다 분쟁조정 신청… 피해보상 받는 게 실익”

    [커버스토리] “소송보다 분쟁조정 신청… 피해보상 받는 게 실익”

    “개인정보가 유출됐다고 바로 소송을 준비하기보다는 분쟁조정을 통해 피해 보상을 받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김종구(58) 한국개인정보보호협의회 상근 부회장 겸 개인정보보호 범국민운동본부 운영위원장은 17일 최근 발생한 신용카드사의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과 관련해 “검찰 등의 수사 결과를 지켜본 다음 해당 카드사 등에 자신의 개인정보 유출여부를 확인하는 게 우선순위”라고 말했다. 김 부회장에 따르면 그 다음으로 할 일은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의 개인정보침해신고센터에 손해배상 등 분쟁조정 신청서를 제출하는 것이다. 다만 KISA는 개인정보보호법 등에 해당되는 피해 상황만 처리하기 때문에 금융거래 관련 피해 및 분쟁조정 건은 금융감독원에 이첩한다. 따라서 전화 국번 없이 1332나 금감원 홈페이지(www.fss.or.kr)를 통해 분쟁조정을 신청하면 된다. 개인이 직접 변호사를 선임해 소송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지만 피해 증거 확보와 변호사 선임비용 등의 부담이 생길 수 있다. 김 부회장은 “분쟁조정의 경우 접수 기관이 피해 증거 등을 입증하고 해당 금융사에 적정 수준의 보상을 권고하게 되는데 금융사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도 있어 그때 소송을 준비해도 늦지 않다”고 설명했다. 김 부회장은 빈번하게 발생하는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회사 내부적으로 개인정보보호책임자(CPO)와 관련 실무진의 전문성과 책임의식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부회장은 “개인정보 유출에는 외부의 해킹과 내부직원의 고의적 유출이라는 두 가지 상황이 있다”면서 “CPO 등의 전문성을 키우고 방화벽 강화, 백신 설치, 정보파일 암호화 등의 기술적 대비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개인정보보호법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개인정보보호법이 어떤 것을 해야 한다는 등의 열거식으로만 돼 있어 방대할뿐더러 두루뭉술해 정보보안 관련자들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김 부회장은 “어떤 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네거티브 방식으로 법을 개정해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고 처벌하기도 쉽다”고 말했다.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커버스토리] 당신의 정보 안녕하십니까

    [커버스토리] 당신의 정보 안녕하십니까

    #1 직장인 이승아(27·여·가명)씨는 최근 금융소비자연맹에 ‘보이스피싱’(전화 금융사기)으로 1200만원대의 피해를 입었다고 하소연했다. 이씨는 “(카드사의 고객 정보 유출 전에는) 한번도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은 적이 없었다”고 전제한 뒤 “전화 상대방은 (내가) 롯데카드 등을 사용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농협과 거래하지 않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더구나 “연락처와 주민등록번호도 알아 깜짝 놀랐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금융국장은 “이씨의 피해가 이번 카드사의 정보 유출과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 #2 김이석(41·가명)씨도 최근 스팸 문자를 받는 횟수가 늘었다고 말했다. 문자는 ‘1500만원·5.5% 대출 승인되었습니다. 연락 바랍니다. NH농협’과 같은 내용이었다. 금융기관을 사칭해 보내는 문자들로, 전화를 걸면 대부분 대출 서류가 필요하다고 요구한다. 이를 무심코 제공하면 금융 사기를 당할 수 있다. #3 롯데카드의 10년 고객인 송모(64·여)씨는 최근 직장인 딸을 통해 자신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건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송씨는 “17일까지 카드사로부터 정보 유출에 대한 사고 발생 문자메시지나 사과 안내를 받은 적이 없다”면서 “(카드) 가입 때만 친절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신용카드를 한 장이라도 소유한 국민이라면 이번 ‘카드사 사태’로 개인정보가 모두 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금융업계는 중복 회원을 빼면 1000만~1700만명의 개인정보가 빠져나간 것으로 추정한다. 초기에 범인을 잡아 2차 피해 가능성은 낮더라도 부쩍 늘어난 낯선 문자와 보이스피싱은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다. 카드 3사는 금융당국의 거듭된 ‘팔 비틀기’에 17일 오후부터 자사 홈페이지에 피해 여부 확인란을 개설해 고객이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검찰이 지난 8일 중간수사 발표 이후 나온 첫 번째 피해구제 조치다. 개인정보 관리 소홀에 대한 상담 건수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개인정보 침해신고의 상담 건수는 ▲2009년 3만 5167건 ▲2010년 5만 4832건 ▲2011년 12만 2215건 ▲2012년 16만 6801건 ▲지난해 17만 7736건으로 급증했다. 김인석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금융사가 ‘정보기술 부문 보호업무 모범 규준’을 형식적으로만 지키면서 실질적인 정보보호 조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금융위원회는 이날 ‘금융회사 고객정보보호 정상화 TF’ 1차 회의를 열고 신용카드 재발급과 결제 내역 무료 문자서비스제공, 개인정보 마케팅 활용 정지 등을 통해 2차 피해를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김경두 기자 golders@seoul.co.kr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커버스토리] 고객님, 신상 털려 당황하셨어요~이름·전화번호 나오면 50원 대출 기록 나오면 최고 2만원

    [커버스토리] 고객님, 신상 털려 당황하셨어요~이름·전화번호 나오면 50원 대출 기록 나오면 최고 2만원

    “내 개인 정보는 단돈 500원짜리….” 허술한 보안을 틈타 개인정보를 사고파는 정보 유통시장이 날로 커지고 있다. 대출중개업체나 무등록 대부업자 등은 물론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조직이나 불법 도박사이트 업체 등 개인정보를 토대로 장사를 하는 곳에서 개인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집하기 때문이다. 금융사와 직접 계약을 맺고 고객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대출모집인이나 금융사의 정보보안을 담당하는 외주업체 직원들이 이들의 주요 표적이다. 대출모집인 이모(41·여)씨는 “대출모집법인(에이전시)을 상대로 고객 데이터베이스(DB)를 사거나, 다른 데서 사온 DB를 파는 브로커들이 개인정보 유통시장의 중심에 있다”고 말했다. 개인정보가 거래되는 시장에서는 고객의 이름과 전화번호만 나와 있는 정보는 단순 DB, 대출이력이나 신용등급이 나와 있는 정보는 고급 DB로 분류돼 가격이 매겨진다. 업계 관계자는 “전화번호만 있으면 텔레마케팅(TM)을 할 수 있는 대리운전업체나 도박 사이트가 건당 10~50원에 단순 DB를 사가고, 보통 얼마나 최신 정보인가에 따라 100~500원의 가격이 매겨진다”면서 “그중에서도 고급 DB는 주로 대부업체의 표적이 된다”고 말했다. 업계에 따르면 대출 기록이 있거나 앞으로 대출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지는 집단의 DB는 건당 5000~2만원의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한다. 주민등록번호와 자택, 직장 주소, 과거 대출을 받은 이력이나 신용등급 등이 포함된 정보는 ‘부르는 게 값’이다. 금융사들의 보안 장벽이 높아지면서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방법도 진화하고 있다. 3~4년 전까지는 중국에 본거지를 둔 해킹 전문가들이 국내 금융사 DB를 해킹하는 수법이 주를 이뤘지만 최근에는 금융사 내외부의 직원들에게 접근해 직접 정보를 빼오는 방식이 주로 사용된다. 최근 카드사 정보 유출 역시 외주업체 직원이 이동식 저장장치(USB)에 개인정보를 담아 대출광고업자와 대출모집인에게 돈을 받고 넘긴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12월 한국SC은행과 한국씨티은행의 고객정보 유출 역시 대출모집인이 저지른 일이었다. 한 은행의 정보보안 관계자는 “‘열 포졸이 도둑 한명을 못 잡는다’는 말도 있듯이 아무리 보안 장치를 강화해도 작정하고 정보를 빼가는 직원들을 사전에 미리 파악해 차단하기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금융사 고객정보 유출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개인정보 보호에 둔감한 기업들의 무관심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사들의 정보 보호 불감증을 틈타 금융사 내부직원이나 외주업체 용역직원이 유출한 개인정보가 대출중개업계나 전화금융 시장에 팔리는 등 활발히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CEO부터가 정보 보안을 비용만 발생하는 것으로 봐 개인정보보호책임자(CPO)의 전문성 등을 키울 생각이 없는 데다가 직원들도 정보 보안 부서를 한직으로 여겨 가고 싶어 하지 않고 외주업체에 맡기면 된다고 여기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금융당국 관계자는 “정보 보안과 관련해 각 사마다 그럴듯한 규정은 정해져 있지만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게 문제”라면서 “CEO들이 이번 사태처럼 고객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면 회사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손해배상 비용이 생기는 등 사태 해결에 더 큰 비용이 든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이번에 사상 최대인 1억건 이상의 정보유출이 발생했던 NH농협카드 등 3개사는 정보가 이미 새어 나갔는데도 7~14개월이 되도록 유출사실조차 모르고 있던 것으로 드러나 평소 고객 개인정보 관리에 소홀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금융감독원이 지난해 8월 만든 금융 분야 개인정보보호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금융사는 개인정보 유출이 발생한 지 5일 이내에 피해 고객에게 개별적으로 사실을 알리고 홈페이지에 밝혀야 한다. 정보 유출 카드사의 한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내부직원이 아니라 전산 위탁을 맡은 외주업체 직원이 계획적으로 벌인 일이라 사전에 유출 사실을 간파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해당 카드사들은 다음 주부터 정보 유출 고객에게 피해 사실을 통보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미 정보가 새어 나간 지 오래라 전화금융사기 등 2차 피해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다른 카드사의 한 관계자는 “대규모 정보유출 사건이 있을 때마다 기승을 부리는 게 카드사를 사칭해 ‘개인정보가 유출됐으니 주민번호를 대고 확인하라’는 전화사기”라면서 “이 같은 2차 사기에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유출사건을 피해 간 다른 금융사들도 정보 보안에 대한 민감도가 낮은 것은 마찬가지다. 몇몇 카드사들은 소비자들의 불안심리를 틈타 슬그머니 유료 신용정보 보호서비스 판매를 재개해 비난을 받기도 했다. 신한, 삼성, 우리카드는 사고 직후 금융당국의 요청에 따라 해당 서비스 판매를 중단했다가 이틀 만에 재개했고 현대카드는 사고 이후 줄곧 유료 서비스를 판매하고 있다. 이미 한 차례 뭇매를 맞았던 보험사는 그나마 사정이 조금 나은 편이다. 카드사와 외국계 은행에 앞서 지난해 대규모 고객정보 유출 사건을 일으켰던 메리츠화재와 한화손해보험은 이후 고객 개인정보 보호 수위를 한 단계 강화했다. 메리츠화재는 각 영업지점에서 고객의 개인정보를 일주일마다 암호화하도록 했다. 암호화 작업을 거치지 않은 고객의 개인정보는 자동으로 파기된다. 메리츠화재 관계자는 “보안 강화로 예전보다 업무에 많은 제약이 있어 불편하긴 하지만 지난해 정보유출 사건 이후 고객 개인정보 관리가 워낙 중요하다는 데 직원들이 공감해 보안 강화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한화손해보험은 사내 정보보호위원회를 개인정보 보호, IT정보 보호, 일반 보안의 3개 영역별로 나눠 각 영역에 책임자를 두고 있다. 이 외에도 현재 카드사 정보유출의 원인이었던 위탁업체를 반기마다 점검하기로 했다. 윤샘이나 기자 sam@seoul.co.kr 김진아 기자 jin@seoul.co.kr
  • [커버스토리] “다음엔 잘해라” 주의·과태료…영업정지·형사처벌 제도 시급

    금융당국의 솜방망이 처벌과 법원의 관대한 판결이 결과적으로 금융사의 고객 정보 관리 소홀을 가져왔다는 비판이 나온다. 고객 정보가 유출될 때마다 고작 수백만원대의 과태료와 주의 등으로 끝낸 것이 금융사의 ‘보안 해제’로 이어졌다는 지적이다. 17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지난 3년간 금융사의 고객 정보가 유출된 건수는 총 1억 700만여건으로 집계됐다. 은행부터 카드와 보험, 제2금융권까지 금융권의 전 업종이 한 차례 이상 털렸다. 유출 경로도 내부 직원이 다섯 차례, 외주 직원 두 차례, 외부 해킹이 두 차례로 조사됐다. 이에 대해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금융국장은 “최고경영자(CEO) 처벌 수위를 강화하고 영업 정지라는 강력한 칼을 빼 들어야 한다”면서 “금융기관 경영평가에서 보안과 고객 정보 보호 관리를 주요 항목으로 다뤄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고객 정보 유출에 대한 금융당국의 제재를 보면 한심한 수준이다. ‘다음부터 잘하라’는 주의와 함께 실무자 처벌로 끝내는 사례가 대부분이었다. 2011년 7월 하나SK카드사에서 내부 직원이 고객 정보 9만여건을 빼돌린 뒤 이를 넘겨받은 외부 직원이 “고객 100만명의 개인 정보를 입수했으니 사장을 연결해 달라”며 회사를 협박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금융당국의 제재는 기관 주의와 과태료 600만원, 임원 주의 등의 경징계에 그쳤다. 2011년 4월 외부 해킹으로 고객 정보 175만건이 유출된 현대캐피탈 사건도 결국 기관 경고에 ‘임원 주의적 경고’로 마무리됐다. 일각에서는 법률을 개정해 고객 정보 유출에 대한 징벌적 과징금 도입과 형사 처벌도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법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2010년 1월 외부 해킹으로 개인 정보가 유출된 옥션 가입자 14만여명이 낸 집단소송에서 법원은 옥션의 손을 들어 줬다. 2008년 GS칼텍스 정보 유출 사건에서도 대법원은 GS칼텍스 보너스카드 가입자 7675명이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한 원심을 확정했다. 김경두 기자 golders@seoul.co.kr
  • [커버스토리] “정보는 돈…돌리고 돌리고 돌려라” 1만여 곳 활개

    [커버스토리] “정보는 돈…돌리고 돌리고 돌려라” 1만여 곳 활개

    “에이전시에 가 보면 각종 은행 대출 서류가 책상마다 쌓여 있습니다. 책처럼 두꺼운 서류 카피본이 막 굴러다니는데 이 정보를 가지고 영업하는 거죠.” 지난 연말까지 시중은행과 계약을 맺고 대출모집인으로 활동한 최모(37)씨는 일명 ‘에이전시’라고 불리는 대출모집법인의 실태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연초부터 1억건이 넘는 사상 최대의 카드사 고객 정보 유출 사태가 터지면서 금융권의 허술한 고객 정보 보안이 도마 위에 오른 가운데 유출된 고객 정보가 모이는 곳으로 알려진 에이전시의 실태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금융사가 각종 내부 통제 장치를 두고 정보 보안에 힘쓰고 있지만 정작 금융사와 가장 가까운 담장 너머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값싼 정보’로 취급되고 있다. 금융업계에 따르면 에이전시는 은행, 카드사 등 금융사로부터 흘러나온 고객의 개인 정보가 모이고 또다시 흘러 나가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에이전시는 은행, 보험사, 저축은행, 캐피탈사 등 제1금융권 및 제2금융권 회사와 계약을 맺고 대출 영업을 담당하는 모집인들이 속해 있는 법인을 말한다. 모집인과 법인은 계약한 금융사에 대출 고객을 중개하거나 상품을 판매해 금융사로부터 수수료를 받는다. 지난해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306개 법인에 전체 대출모집인(1만 8985명·6월 기준)의 50.5%인 9584명이 소속돼 있다. 대출모집법인은 별도의 인허가 없이 금융업협회에 등록만 하면 영업을 할 수 있어 1~3명으로 구성된 ‘미니 법인’도 상당수다. 업계에서는 이렇게 활동하는 법인의 수가 제1, 제2금융권을 합쳐 최소 1만여개 이상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직 대출모집인 이모(44·여)씨는 “모집인들은 금융사에서 받는 수수료가 수입의 전부이기 때문에 무조건 영업 풀(pool)을 넓혀야 한다”면서 “고객 정보가 많을수록 더 많은 무기를 가진 셈이라 이를 확보하는 데 치열하게 매달린다”고 말했다. 대출모집인이 고객 정보를 함부로 다루는 폐해가 이어지자 금융당국은 올 연말까지 대출모집인을 축소, 폐지하기로 했다. 지난해 말 한국SC은행과 한국씨티은행에서 활동하는 대출모집인이 13만여건의 고객 대출 정보를 유출한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SC은행은 지난해 9월 기준 730여명이었던 대출 모집인을 지난 연말까지 모두 폐지했고 씨티은행도 지난해 1300여명에서 올해 초 1000여명까지 인원을 줄였다.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은 지난해 9월, 우리은행과 농협은행은 지난해 10월 대출모집인을 통한 신용대출을 전면 금지했다. 이에 따라 은행권 대출모집인은 2012년 말 5100여명에 이르던 규모가 지난해 말 3000여명 수준으로 줄었다. 지방 은행과 외국계 은행의 대출모집인 축소 방침이 이어지면 올해 안에 1000여명 안팎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그나마 양지에서 활동하던 모집인들이 일자리를 잃으면 불법 대부업 중개나 개인 정보 브로커 등 ‘음지시장’으로 이동할 확률이 높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대출모집인 이모(41·여)씨는 “올해 초 한 시중은행이 대출영업팀 인원을 10%가량 줄였는데 직원들이 나가면서 내부에 남아 있는 후배를 일종의 프락치로 심어 놓고 나갔다”면서 “남은 직원들도 퇴사하면 에이전시에 취업해 먹고살 궁리를 하기 때문에 연결고리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제1금융권에서 활동하던 대출모집인들이 저축은행, 캐피탈 등 제2금융권의 모집인으로 옮겨 가면서 개인 정보를 유통시키기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지난해 연말부터 창원지검이 수사하고 있는 금융권 개인 정보 유출 사건 역시 대출과 카드 등 각종 고객 개인 정보가 오가는 에이전시를 중심으로 수사를 하다 속속 적발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연말 SC은행과 씨티은행의 개인 대출 정보 유출부터 최근 카드사 용역 직원의 1억여건 정보 유출은 경남 창원 지역에서 활동하는 대출모집법인 에이전시를 수사하다 증거로 나온 파일과 출력물에서 덜미가 잡힌 것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그동안 대출모집인을 통해 영업망을 늘려 온 것도 사실이지만 이들이 제2금융 쪽에서 활동하는 대부중개업자나 무등록 대출중개업자들과 연계해 다단계식으로 고객 정보를 물려주는 등 폐해가 상당해 득보다 실이 많은 제도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윤샘이나 기자 sam@seoul.co.kr
  • [커버스토리] 전통 덮은 건축… 디자인 서울 길을 잃다

    [커버스토리] 전통 덮은 건축… 디자인 서울 길을 잃다

    구글어스를 통해 대한민국 서울 중구의 흥인문과 광희문 사이를 보면 전에 없던 대형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구렁이가 똬리를 튼 것 같기도 하고, 시내 한복판에 불시착한 UFO(미확인비행물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공위성에서도 식별이 가능한 이 건축물은 옛 동대문운동장 부지에 들어서 오는 3월 개관할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앤 파크(DDP)다. 오세훈 전 시장이 야심차게 추진한 ‘디자인 서울 프로젝트’의 역점 사업이자 서울의 랜드마크로 삼고자 했던 곳이다. 하지만 이 건물이 창조와 변혁의 아이콘으로 서울을 전 세계 디자인의 중심도시로 만들 구심점이 될 것이라고 단정짓기엔 설계부터 건설공사 과정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미 5000억원에 육박하는 엄청난 혈세가 투입됐을 뿐 아니라 앞으로 운영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은 세금을 더 쏟아부어야 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도심 흉물로 전락한 서울시 신청사, 세빛 둥둥섬과 함께 오 전 서울시장이 추진한 디자인서울 프로젝트가 또다시 여론의 도마에 오를 조짐이다. 거대한 조감도와 허황된 표어를 앞세운 프로젝트가 시민 모두의 자산이자 살아 꿈틀거리는 서울 도시디자인의 본질적 가치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거세다. 이제라도 메가시티 서울의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는 ‘좋은 도시공간’을 만들려면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는 공공 프로젝트 진행절차상의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이 시급하다. 개관을 앞둔 DDP의 사례에서 우리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 동대문운동장과 그 주변지역을 재개발하는 계획은 2000년대 중반 이전에 이미 세워져 있었다. 민선 4기 오 전 시장은 관광객 1200만명을 목표로 하는 도시마케팅 정책을 내세워 2006년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문화로 돈을 번다’는 컬처노믹스를 강조하며 광화문축, 인사동-명동축, 세운상가 녹지축, 동대문디자인축을 근간으로 하는 도심재창조사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 2007년 월드디자인플라자 건설계획을 추가했고, 이를 위해 국내외 건축가 8명을 지정한 가운데 국제설계공모를 진행했다. 그해 8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한 자하 하디드의 ‘환유의 풍경’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그 일대의 역사성을 살려 공원화하려던 계획은 명품 건물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예산규모도 900억원에서 3700억원으로 늘어났다. ‘동대문 잔혹사’는 동대문운동장 철거과정에서 600년 도읍 한양의 역사 유적이 발굴되면서 클라이맥스를 맞는다. 2008년 겨울 DDP 건설현장에서 청계천 물길이 성곽 밑을 관통해 흘러가도록 만든 이간수문(二間水門) 등 총 123m에 이르는 한양도성 성곽과 조선시대 최대 군영인 훈련도감의 부속기관인 하도감 터 유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서울성곽은 식민지 시대에 경성운동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멸실된 것으로 추정됐지만 최고 잔존 높이 4.1m에 바닥 폭 8~9m에 이르는 규모로 남아 있다는 게 확인됐다. 서울시는 일단 공사를 중지하고 자하 하디드와 협상을 벌인 끝에 1000억여원을 다시 들여 설계를 약간 변경해 공사를 강행했다.서울성곽 안쪽에 있던 하도감을 성곽 밖으로 이전시키고, 그 터에 있던 유적들도 여기저기로 옮기고 터를 덮어버렸다. ‘주변과도 어울리지 않는 기괴한 외관’이라는 비난은 디자인의 독창성이니 덮어 두더라도, 서울의 유구한 역사를 무시한 채 올라선 건물에 서울시민들이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주기를 기대하기는 당분간 어려워 보인다.‘5000억원짜리 애물단지’를 떠안게 된 박원순 시장은 DDP의 콘셉트를 ‘세계 디자인 메카’에서 ‘함께 만들고 누리는 디자인’으로 바꾸고 운용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에 들어갔다. 공공건축물이란 용도와 목적이 먼저 있고 그에 맞게 건축물을 구상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인데, DDP의 경우는 그 반대가 된 셈이다. 7년여에 걸쳐 3000억원의 예산을 들여 세운 서울시 신청사의 건물디자인 공모부터 완성까지의 과정을 담은 다큐영화 ‘말하는 건축 시티:홀’은 시청사 디자인 선정을 둘러싼 논란을 개괄하고, 대형 시공사가 설계부터 시공까지 일괄적으로 맡아 계약하는 턴키 방식으로 인한 상업주의와 관료주의의 폐해를 꼬집는다. 이 영화를 만든 정재은 감독은 “시청사가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공공건축물이 진영논리에 갇혀 그 속에 어떤 가치를 담아야 하는지의 가치가 실종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사람들은 흉물이 된 시청사 건설에 많은 돈이 들어갔다는 것을 문제 삼을 뿐 정작 어떤 가치를 위해 돈을 들여야 하는지, 우리에게 어떤 공간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았다”면서 “DDP의 경우도 세계적인 위대한 건축가의 예술작품을 갖고 싶다는 요구와 욕망이 있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몰랐던 것 같다”고 말했다. ‘디자인 서울’로 가시화되고 본격화된 공공프로젝트에 대한 비난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추적해 보자. 발주의 주체인 공무원 혹은 국가기관의 무능과 무지, 리더의 정치적 야심이 그 단초를 제공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공무원들에게 건축의 전문성을 갖추라고 요구할 수는 없을지라도 다른 방식으로 전문성을 갖춰 이를 극복할 것을 주문할 수는 있다. 건축비평가 이종건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는 “공공프로젝트의 성패와 관련한 모든 공과는 주체능력의 한계가 그 원인”이라며 “부족한 전문성을 보완하기 위해 전문가들을 동원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공공프로젝트의 추진과정에서 윤리적인 기준과 전문적 안목을 갖춘, 제대로 된 전문가들을 배제한 채 안일하게 대처했다”고 지적했다. 서울시 신청사의 디자인 결정도 그렇고, DDP의 공모당선작 결정도 한국건축문화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을 최종심사에 참여시켜 정치적인 결정에 거수기 역할을 하게 한 결과 시민혈세만 낭비하고 비루한 외형물이 탄생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미국 오하이오대학에서도 건물을 짓는 데 모든 학생과 전문가들이 모인 가운데 공개심사를 하며 문제점을 검토하는 등 결정과정을 거친다”면서 “공공프로그램은 절차가 가장 중요하며 공무원들의 전문성이 없을수록 모든 절차는 더 투명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름다운 도시공간을 만들려면 앞으로 추진될 공공프로젝트는 전체 절차 안에 검증·비판·감시가 상시적으로 이뤄져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 절차를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 인물을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절차상의 문제도 문제지만 정치적인 야심에 휘둘려 조급증을 부린 것도 앞으로의 공공프로젝트 추진에서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대목이다. 서울시 신청사를 짓는 데 7년, DDP를 추진하는 데 7년 6개월이 각각 소요된 사실은 세계적으로는 뉴스거리가 될 만하다. 가까운 일본을 예로 들어보자. 일본 오사카 시립역사박물관 건물터는 고대궁궐 유적지 궁터 일부였다. 유적 파괴 논란이 일자 오사카 시는 전문가들과 시민들이 토론하며 의견을 수렴하는 데만 7년을 보냈다. 그리고 유적을 훼손하지 않고 그 자체를 지하에 보존키로 했다. 그 위에 건설된 고층 박물관은 오사카의 랜드마크가 되어 있다. 서울시 부시장 시절 디인서울 총괄본부장을 지낸 권영걸 서울대 교수는 “서울을 디자인 도시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한 점은 인정해야 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추진한 측면이 있다”며 “장·단기 계획을 투트랙으로 진행하면서 지속가능한 디자인을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커버스토리-디자인 서울] “서울의 역사성 로마에 꿀리지 않아… 그 결 그대로 살려서 디자인해야”

    [커버스토리-디자인 서울] “서울의 역사성 로마에 꿀리지 않아… 그 결 그대로 살려서 디자인해야”

    도시는 생물이다. 인간이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도시가 살아나고 죽는다. 그러나 보통 인간은 자본의 논리로 그것을 황폐하게 한 뒤 다른 곳으로 옮겨가 똑같은 일을 한다. 고서와 금석학의 거리였던 서울 종로구 인사동이 중국산 제품과 질 낮은 공예품이 판치는 국적 불명의 장소가 된 것이 대표적이다. 푸진 음식으로 서민의 주린 배를 달랜 종로 피맛골, 근대 역사를 품은 동대문운동장 등은 초고층 빌딩과 온갖 상업시설들에 잠식당했다. 600년 고도(古都) 서울은, 대체 어디까지 더 ‘세련’돼지기만 할 것인가. 권영걸(63·서울대 미술관장)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는 “서울은 역사문화 도시로 분명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10일 인터뷰에서 권 교수는 서울의 역사를 먼저 훑었다. 서울 송파구 방이동의 풍납토성과 오륜동 몽촌토성 지역을 백제의 도읍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그는 “아주 겸손하게 잡아도 서울은 2000년 역사를 가진 도시로서, 유럽 어느 도시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다”고 했다. “로마나 아테네보다 훨씬 더 오랜 역사의 결이 켜켜이 쌓인 도시”라고 강조했다. ‘디자인 서울’을 내세운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 초대 디자인서울총괄본부장을 맡았던 그는 “서울시장은 행정가여야 하는데 역대 시장을 살펴보면 정치가 성향이 더 강했다”고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임기 초반에 뭔가를 보여 줘야 한다는 과잉 의욕이 디자인의 오남용을 불렀던 점이 없지 않았다. 서울이 역사문화도시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인식도 약간은 부족했다”고 고백했다. “고층빌딩을 세우고 지역 개발을 할 때 유적과 유물이 나오면 개발 방향을 틀고 설계 변경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권 교수는 “서울을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만들기 위해서 ‘개발’보다 ‘역사보존’을 앞세우고 문화재법을 지엄하게 여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제라도’라는 단어에 힘을 주면서 “공무원도, 자치단체장도, 중앙정부도 이제는 ‘유물이 나오면 개발을 중단한다’는 방향으로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 교수가 3년 만에 탈고해 내놓은 신간 ‘나의 국가디자인전략’ 역시 그런 기조를 깔고 있다. 책에서 그는 ‘공공성’을 바탕에 둔 88개 디자인 전략을 제안한다. “좋은 디자인은 공공성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디자인의 본래 가치는 자연의 도를 따르고 인간을 섬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 [커버스토리] 전통 덮은 건축… 디자인 서울 길을 잃다

    [커버스토리] 전통 덮은 건축… 디자인 서울 길을 잃다

    구글어스를 통해 대한민국 서울 중구의 흥인문과 광희문 사이를 보면 전에 없던 대형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구렁이가 똬리를 튼 것 같기도 하고, 시내 한복판에 불시착한 UFO(미확인비행물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공위성에서도 식별이 가능한 이 건축물은 옛 동대문운동장 부지에 들어서 오는 3월 개관할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앤 파크(DDP)다. 오세훈 전 시장이 야심차게 추진한 ‘디자인 서울 프로젝트’의 역점 사업이자 서울의 랜드마크로 삼고자 했던 곳이다. 하지만 이 건물이 창조와 변혁의 아이콘으로 서울을 전 세계 디자인의 중심도시로 만들 구심점이 될 것이라고 단정짓기엔 설계부터 건설공사 과정에 이르기까지 너무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미 5000억원에 육박하는 엄청난 혈세가 투입됐을 뿐 아니라 앞으로 운영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은 세금을 더 쏟아부어야 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도심 흉물로 전락한 서울시 신청사, 세빛 둥둥섬과 함께 오 전 서울시장이 추진한 디자인서울 프로젝트가 또다시 여론의 도마에 오를 조짐이다. 거대한 조감도와 허황된 표어를 앞세운 프로젝트가 시민 모두의 자산이자 살아 꿈틀거리는 서울 도시디자인의 본질적 가치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거세다. 이제라도 메가시티 서울의 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는 ‘좋은 도시공간’을 만들려면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는 공공 프로젝트 진행절차상의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개선이 시급하다. 개관을 앞둔 DDP의 사례에서 우리가 반성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 동대문운동장과 그 주변지역을 재개발하는 계획은 2000년대 중반 이전에 이미 세워져 있었다. 민선 4기 오 전 시장은 관광객 1200만명을 목표로 하는 도시마케팅 정책을 내세워 2006년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문화로 돈을 번다’는 컬처노믹스를 강조하며 광화문축, 인사동-명동축, 세운상가 녹지축, 동대문디자인축을 근간으로 하는 도심재창조사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 2007년 월드디자인플라자 건설계획을 추가했고, 이를 위해 국내외 건축가 8명을 지정한 가운데 국제설계공모를 진행했다. 그해 8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한 자하 하디드의 ‘환유의 풍경’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그 일대의 역사성을 살려 공원화하려던 계획은 명품 건물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예산규모도 900억원에서 3700억원으로 늘어났다. ‘동대문 잔혹사’는 동대문운동장 철거과정에서 600년 도읍 한양의 역사 유적이 발굴되면서 클라이맥스를 맞는다. 2008년 겨울 DDP 건설현장에서 청계천 물길이 성곽 밑을 관통해 흘러가도록 만든 이간수문(二間水門) 등 총 123m에 이르는 한양도성 성곽과 조선시대 최대 군영인 훈련도감의 부속기관인 하도감 터 유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서울성곽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운동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멸실된 것으로 추정됐지만 최고 잔존 높이 4.1m에 바닥 폭 8~9m에 이르는 규모로 남아 있다는 게 확인됐다. 서울시는 일단 공사를 중지하고 자하 하디드와 협상을 벌인 끝에 1000억여원을 다시 들여 설계를 약간 변경해 공사를 강행했다. 서울성곽 안쪽에 있던 하도감을 성곽 밖으로 이전시키고, 그 터에 있던 유적들도 여기저기로 옮기고 터를 덮어버렸다. ‘주변과도 어울리지 않는 기괴한 외관’이라는 비난은 디자인의 독창성이니 덮어 두더라도, 서울의 유구한 역사를 무시한 채 올라선 건물에 서울시민들이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주기를 기대하기는 당분간 어려워 보인다.‘5000억원짜리 애물단지’를 떠안게 된 박원순 시장은 DDP의 콘셉트를 ‘세계 디자인 메카’에서 ‘함께 만들고 누리는 디자인’으로 바꾸고 운용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에 들어갔다. 공공건축물이란 용도와 목적이 먼저 있고 그에 맞게 건축물을 구상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인데, DDP의 경우는 그 반대가 된 셈이다. 7년여에 걸쳐 3000억원의 예산을 들여 세운 서울시 신청사의 건물디자인 공모부터 완성까지의 과정을 담은 다큐영화 ‘말하는 건축 시티:홀’은 시청사 디자인 선정을 둘러싼 논란을 개괄하고, 대형 시공사가 설계부터 시공까지 일괄적으로 맡아 계약하는 턴키 방식으로 인한 상업주의와 관료주의의 폐해를 꼬집는다. 이 영화를 만든 정재은 감독은 “시청사가 완성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공공건축물이 진영논리에 갇혀 그 속에 어떤 가치를 담아야 하는지의 가치가 실종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정 감독은 “사람들은 흉물이 된 시청사 건설에 많은 돈이 들어갔다는 것을 문제 삼을 뿐 정작 어떤 가치를 위해 돈을 들여야 하는지, 우리에게 어떤 공간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았다”면서 “DDP의 경우도 세계적인 위대한 건축가의 예술작품을 갖고 싶다는 요구와 욕망이 있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방법을 몰랐던 것 같다”고 말했다. ‘디자인 서울’로 가시화되고 본격화된 공공프로젝트에 대한 비난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추적해 보자. 발주의 주체인 공무원 혹은 국가기관의 무능과 무지, 리더의 정치적 야심이 그 단초를 제공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공무원들에게 건축의 전문성을 갖추라고 요구할 수는 없을지라도 다른 방식으로 전문성을 갖춰 이를 극복할 것을 주문할 수는 있다. 건축비평가 이종건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는 “공공프로젝트의 성패와 관련한 모든 공과는 주체능력의 한계가 그 원인”이라며 “부족한 전문성을 보완하기 위해 전문가들을 동원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공공프로젝트의 추진과정에서 윤리적인 기준과 전문적 안목을 갖춘, 제대로 된 전문가들을 배제한 채 안일하게 대처했다”고 지적했다. 서울시 신청사의 디자인 결정도 그렇고, DDP의 공모당선작 결정도 한국건축문화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을 최종심사에 참여시켜 정치적인 결정에 거수기 역할을 하게 한 결과 시민혈세만 낭비하고 비루한 외형물이 탄생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미국 오하이오대학에서도 건물을 짓는 데 모든 학생과 전문가들이 모인 가운데 공개심사를 하며 문제점을 검토하는 등 결정과정을 거친다”면서 “공공프로그램은 절차가 가장 중요하며 공무원들의 전문성이 없을수록 모든 절차는 더 투명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름다운 도시공간을 만들려면 앞으로 추진될 공공프로젝트는 전체 절차 안에 검증·비판·감시가 상시적으로 이뤄져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 절차를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 인물을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절차상의 문제도 문제지만 정치적인 야심에 휘둘려 조급증을 부린 것도 앞으로의 공공프로젝트 추진에서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대목이다. 서울시 신청사를 짓는 데 7년, DDP를 추진하는 데 7년 6개월이 각각 소요된 사실은 세계적으로는 뉴스거리가 될 만하다. 가까운 일본을 예로 들어보자. 일본 오사카 시립역사박물관 건물터는 고대궁궐 유적지 궁터 일부였다. 유적 파괴 논란이 일자 오사카 시는 전문가들과 시민들이 토론하며 의견을 수렴하는 데만 7년을 보냈다. 그리고 유적을 훼손하지 않고 그 자체를 지하에 보존키로 했다. 그 위에 건설된 고층 박물관은 오사카의 랜드마크가 되어 있다. 서울시 디자인 서울 총괄본부장을 지낸 권영걸 서울대 교수는 “서울을 디자인 도시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한 점은 인정해야 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추진한 측면이 있다”며 “장·단기 계획을 투트랙으로 진행하면서 지속가능한 디자인을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커버스토리-디자인 서울] 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 ‘세련된 서울’에서 ‘인간 친화적 서울’ 로

    [커버스토리-디자인 서울] 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 ‘세련된 서울’에서 ‘인간 친화적 서울’ 로

    박원순 시장 취임 이후 ‘디자인 서울’이란 단어가 사라졌다. 오세훈 전 시장의 ‘세련된 도시 서울’에서 ‘사람 중심의 인간 친화적 도시 서울’로, 정책 방향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10일 서울시 등에 따르면 박 시장은 세종로 차없는 거리 조성과 한양도성 복원 등 사람 중심의 인간 친화적 도시 복원에 집중하고 있다. 2006년 7월부터 5년간 한강르네상스와 뉴타운 개발 등을 추진한 오 전 시장과 차별되는 대목이다. 오 전 시장은 취임 첫해 “서울시를 매력 있는 세계적인 도시로 키우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디자인이 살 길’이란 표어를 내걸고 전국 자치단체 가운데 처음으로 ‘디자인총괄본부’를 꾸리고, 2008년에는 서울디자인올림픽을 개최했다. 도시에 디자인의 옷을 입히려는 시도는 다양한 변화를 몰고 왔다. 2500개의 관련 기업과 2만 4000명의 인력을 확충한다는 계획부터 거리 환경 개선사업, 대규모 조성 사업 등이 동반됐다. 서울시내 50곳을 디자인거리로 지정하고 보도블록, 가드레일, 가로등, 간판 등에 통합디자인을 제공하면서 거리 모습을 변모시켰다. 거리를 단순히 목적지로 가게 하는 수단이 아닌, ‘걷고 즐기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는 곳으로 만들었다. 이런 시도를 다른 자치단체에서 벤치마킹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후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곳도 디자인한다’는 취지 아래 설치한 120다산콜센터 역시 자치단체들이 아류를 만들면서 대표적인 성공작으로 꼽힌다. 이 밖에 여성 화장실 개선사업, 새로운 서울 상징색 도입, 우수 공공디자인 인증제, 디자인 중심의 건축심의 등도 좋은 점수를 받고 있다. 그러나 대규모 사업은 대부분 좌초되거나 비판에 직면해 있다. 82년 만에 동대문운동장을 역사 속에 묻은 동대문 디자인플라자&파크(DDP)를 비롯해 광화문광장, 용산국제업무지구, 남산르네상스, 플로팅아일랜드, 한강예술섬 등의 사업이 그렇다. 축구장 3개 크기의 광화문광장은 조선시대 육조거리를 재현한 파격적인 디자인에도 불구하고 400여억원을 들인 서울의 상징 광장이란 찬사와 함께 도심 교통난 유발의 주범이란 극단적 평가를 받고 있다. 오 전 시장의 상징과도 같았던 한강르네상스 사업 역시 빛을 잃었다. 한강르네상스의 상징적인 건물인 세빛둥둥섬은 서울시 감사 결과 수천억원의 혈세를 낭비한 것으로 조사됐다. 관련 직원이 중징계를 받았고, 최근 용도를 변경해 재개방하는 것으로 결론 났다.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의 결정판이던 용산역세권개발사업도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시행사의 부도로 막을 내렸다. “이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았다”면서 박 시장이 내놓은 ‘서울건축선언’으로 오 전 시장의 ‘디자인서울’ 정책은 사실상 사라졌다. 무난한 평가를 받았던 디자인거리 조성 사업조차 2007년 32억원, 2008년 80억원에 이르던 예산이 2012년 9000만원, 2013년 8300만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서울시 관계자는 “화려한 디자인보다는 사람과 역사 중심의 정책으로 서울을 가꾸려는 박 시장의 철학에 맞추다 보니 ‘디자인서울’ 정책은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커버스토리-디자인 서울] 생태도시 쿠리치바의 비밀… 고립 벗어난 선형 교통축 도입

    [커버스토리-디자인 서울] 생태도시 쿠리치바의 비밀… 고립 벗어난 선형 교통축 도입

    브라질 남서쪽의 ‘생태도시’ 쿠리치바는 1990년대 말 한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08년 이곳의 도시계획연구소를 방문해 만난 리카르도 빈도(64) 설계담당관은 “도시 설계와 디자인은 도시 개혁의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수백년 된 나무와 현대식 연구소가 조화를 이룬 연구소에선 바람의 흐름을 고려한 빌딩 배치부터 눈의 피로를 덜어 주는 색상 배열, 쓰레기 재처리까지 세세한 부분을 다뤘다. 시립연구소가 도시 설계와 개혁을 주도한 남미에선 거의 유일한 성공 사례이기도 하다. 쿠리치바에선 환경을 우선하는 도시 설계, 고립을 벗어난 선형 교통축 도입 등이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역사 중심지 보존과 하부구조 개선 등도 착착 진행됐다. 도심 고층건물은 주변부로 갈수록 낮아지는 형태로, 미관 못지않게 공기 순환을 고려했다. 쿠리치바처럼 창조적인 도시 관리 철학을 실천한 곳은 적지 않다. 연간 100만명 넘는 관광객이 몰리는 스페인의 빌바오는 회색빛 공업도시에서 문화·디자인 도시로 탈바꿈한 사례다. ‘테러도시’라는 오명을 썼던 빌바오는 세계적인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하면서 6년간 1조 3000억원의 경제효과를 얻고, 문화 도시로 훌쩍 컸다. 인구 20만명의 탄광도시였던 영국의 게이츠헤드도 마찬가지. 버려졌던 탄광도시는 도시 재설계와 볼틱 미술관, 세이지 음악당 등의 문화시설을 통해 매년 230억원의 관광수입을 올리는 곳으로 바뀌었다. 미국 뉴욕은 스스로 되살아나고 있다. 뉴욕 9~14번가에 걸친 첼시마켓은 버려진 비스킷 공장에서 식당, 상점, 방송국 등이 들어선 다목적 건물로 변형됐다. 1990년대까지 도살장·고기포장 공장이었던 미트 패킹은 디자이너, 작가, 건축가들이 유행거리로 탈바꿈시켰다. 일본의 디자인 혁명도시로 불리는 가와고에는 ‘주민 참여’ 디자인을 활용했다. 상인, 전문가, 자치단체가 뭉쳐 전통 거리 이치반가를 소생시켰다. 전통가옥의 색깔과 채도를 조절하고 거리 정체성을 지키는 일은 독특한 매력뿐만 아니라 상권을 부활시켰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커버스토리] 베일 벗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앤 파크’ 가보니

    [커버스토리] 베일 벗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앤 파크’ 가보니

    우리나라 공공건축물로는 역대 최대의 예산(총 4840억원)이 투입된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앤 파크(DDP)가 논란 속에 베일을 벗었다. DDP의 운영 주체인 서울디자인재단은 공식 개관을 70여일 앞둔 10일 내부 기물을 들이기 전의 온전한 공간을 언론에 공개하고 향후 운영계획을 발표했다. 오는 3월 21일 개관 예정인 DDP는 세계 건축계의 핫 아이콘으로 꼽히는 이라크 출신의 영국 여류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했다. 대지 면적 6만 2692㎡, 연면적 8만 6574㎡로 세계 최대 규모의 3차원 비정형 건축물이다. 각기 다른 모양의 알루미늄 외장 패널 4만 5133장이 사용된 건물 외관의 면적만 따지면 일반 축구장의 3.1배나 된다. 백종원 재단이사장은 “DDP는 ‘시민이 함께 만들고 누리는 디자인’을 최고 가치로 삼아 디자인과 창조산업이 어떻게 접목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DDP가 역사성을 무시한 채 들어선 건축물이라는 비난을 무마할 만큼 공공건축물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지, 재단 측의 구상대로 운영면에서 100% 자립화가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우선 기이한 외관만큼이나 내부 공간의 생경함이 문제로 지적된다. 건물이 지하 3층, 지상 4층이라고는 하지만 비정형 건축물의 특성상 층간 구분이 뚜렷하지 않고 거대한 공간의 동선이 끝없이 연결되다 보니 입구가 24개로 분산돼 있다. 재단 측은 훈민정음 해례본 등 국보급 문화재를 포함한 간송미술관 소장품전을 기획하고 디자인스포츠전 등 개관 초기 일반 시민들의 관심을 유도할 기획전을 마련했다. 그러나 연간 300억원에 이르는 운영비를 자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김경민 교수는 “DDP를 짓는 데 5000억원에 육박하는 예산이 들었다지만 실제 땅값까지 계산한다면 1조원을 넘을 것”이라며 “운영비도 만만치 않게 들어갈 초대형 건물을 지으면서 역사성과 경제산업적 중요성을 무시하고 구체적 건물 활용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어마어마한 운영비를 감당할 수 있도록 공간 배분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세금 먹는 하마가 될 것이 자명하다”는 우려와 함께 “이제 와서 부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지금이라도 주변 지역의 역사성을 살리고, 패션지구의 산업적 맥락을 짚어 가치를 제대로 구현하는 자산활용 계획과 공간 운용 방안을 세심하게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서울신문의 2014년 첫 걸음/안혜련 주부

    [옴부즈맨 칼럼] 서울신문의 2014년 첫 걸음/안혜련 주부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할 일을 생각한다. 새로운 한 주, 새달을 맞을 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그어놓은 선 긋기 같은 한 주, 한 달, 한 해지만 새로운 날들을 맞을 때면 그때 그 자리에서 앞으로의 전망을 생각해 보고 계획을 세울 필요를 느낀다. 2014년을 맞아 서울신문은 지난해보다 나은 한 해를 위해 무엇을 계획하고 있을까. 올해 첫 주의 ‘신년기획’ 기사를 통해 ‘그것을 알고 싶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유라시아 루트를 가다’(1월 1일자 1, 8, 9면) 기획이었다.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결하는 ‘철의 실크로드’는 생각만 해도 호쾌한 일이다. 대륙의 끝자락에 위치하면서도 비행기나 배를 통해서만 외국으로 갈 수 있는 섬 아닌 섬으로 존재하는 우리 현실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게다가 대륙 철도와의 연결을 통한 한국 철도의 세계 진출 전략이라니 얼마나 가슴 시원한 이야기인가. ‘석학 인터뷰’도 의미 있는 기획이었다. 때로는 우리의 문제를 우리 밖에서 더 잘 볼 수 있고, 우리와 다른 타인의 시각이 문제를 더 큰 그림 속에서 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또 다른 해결책과 새로운 비전을 찾기를 기대한다. 조지프 나이 미 하버드대 석좌교수(1월 1일자 10면)는 동북아 문제에서 한국이 “경제적으로는 중국, 안보 문제는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마이클 하트 미 듀크대 교수(1월 4일자 6면)는 한국사회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사회 통합’과 ‘다양성’에 대해 “두 가지는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라 모두 민주주의의 토대”라고 강조한다. 통합과 동일화는 다른 개념이고, 모두가 동일하게 생각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가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서로 협력해서 다양성을 보완해 가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미래 전망과 비전에 대한 석학들의 조언은 유익했던 반면, 신년 커버스토리로 다룬 ‘응답하라 청년공간 신촌’(1월 4일자 1, 14, 15면) 기사는 다소 아쉬웠다. 대학가의 명물들이 거대 자본의 힘에 밀려나고 상업화된 곳이 비단 신촌만이 아니고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커버스토리를 포함해 3개 면에 걸쳐서까지 신촌의 흥망성쇠를 소개할 필요가 있었을까. 눈에 보이는 공간의 상업적 변화보다는 오히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청년들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들의 아픔과 어려움, 그들의 절박한 심정을 짚어주고 살펴주면 좋을 듯싶다. 이참에 우리의 미래인 청년들의 문제를 좀 더 깊이 인식하고 함께 고민하는 지면을 마련해 보면 어떨까. 그들이 세상을 향해 소리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면 어떨지. 안정적 직업이라는 공무원 시험에 매달려 몇 년을 비좁은 고시원에 살면서도, 취업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는 상관없이 토익 책을 붙들고 젊은 날을 보내면서도,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80만원 세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아직 우리 청년들은 꿋꿋하게 버텨내고 있다. 하지만 안쓰럽다. 취업에 대한 불안감, 결혼에 대한 자신 없음, 아이 양육에 대한 부담감에 짓눌린 젊은이들에게 뭐라 말해야 할까. ‘어쩔 수 없으니 경쟁에서 살아남아라’가 최선의 답일까. 그들의 짓눌린 어깨를 감싸 안아주고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해 주고 싶다. 서울신문이 그들을 위해 무언가 해 주면 좋겠다.
  • [커버스토리] 응답하라 청년공간 신촌

    [커버스토리] 응답하라 청년공간 신촌

    “록카페와 오래된 찻집, 소극장 등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훌륭한 청년 공간이었죠.”(정민경·여·38) “낡고 지루한 유흥가. 딱 그 정도 동네예요.”(박하린·여·22) 연세대학교의 13년 터울 선후배인 ‘98학번’ 정씨와 ‘11학번’ 박씨가 각각 기억하는 신촌은 이처럼 서로 다른 공간이다. 정씨에게 신촌은 뜨거운 해방구였다. 정씨는 1980~1990년대 신촌 전성기의 끝자락을 누린 세대다. 당시 대학생들은 PCS 휴대전화, PC 통신 등으로 낯선 사람과 교감하는 등 디지털 기술로 무장해 갔지만, 신촌에서는 여전히 아날로그 감성의 청년문화가 소비됐다. 청년들은 록카페에서 몸을 흔들며 밤새우기도 했지만, ‘훼드라’나 ‘섬’ 같은 오래된 주점에서 그들의 선배가 그랬듯,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쾅 두드리며 치열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반면 후배 박씨에게 신촌은 젊음의 욕망을 채워 주기에 뭔가 2% 부족한 공간이다. 대학들 사이를 비집고 노른자 땅에 자리했지만 정작 자기 색깔은 없는 꾀죄죄한 유흥가였다. 특히 연세대가 2011년 송도캠퍼스의 문을 연 뒤 많은 학생이 인천으로 가면서 신촌에서 선후배들과 추억을 쌓는 일은 예전만 못해졌다. 이제 박씨와 친구들에게 가장 재미있는 놀이터는 ‘뭔가 있어 보이는’ 홍익대 앞이다. 정씨는 최근 종영한 드라마 ‘응답하라 1994’ 속 신촌의 화려함을 짧게나마 경험했고, 박씨는 생기 잃은 신촌만 보았다. 두 사람이 입학한 10여년 동안 신촌은 쫓기듯 늙어 갔다. 록카페로 상징되는 신(新) 유흥문화가 신촌을 강타하고 주거지까지 상업지로 탈바꿈하면서 땅값은 몇 배씩 뛰었다. 또 신촌 곳곳을 상업자본이 채우기 시작했다. 1999년 264.5㎡(80평) 규모의 스타벅스 한국 1호점이 이화여대 앞에 문을 열었다. 노래방, 비디오방 등이 급격히 늘었고 대형 술집이 속속 들어섰다. 상업화의 물결은 생각보다 거셌고, 전통의 명소들은 예상외로 견고하지 못했다. 간신히 버티던 서점 ‘오늘의 책’이 2000년 문을 닫았고, 학생들의 추억이 서린 주점 ‘섬’도 2004년 폐업했다. 고(故) 김광석의 그룹 ‘동물원’이 결성됐던 주점 ‘무진기행’(2007년 폐업)과 ‘독수리다방’(2005년 폐업 뒤 2013년 재개업), ‘훼드라’(2010년 폐업) 등도 줄줄이 문을 닫았다. 홍석기 서울연구원 연구위원은 “보헤미안(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성향)의 예술인들이 특정 지역에 모여 청년 문화촌을 만들어 성장하면 대형자본이 들어와 상업화·고급화되고 땅값이 올라 최초 개척자들은 몰락하는 것이 전형적 패턴”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신촌은 부활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시는 오는 6일 신촌로터리에서 연세대 정문으로 이어지는 연세로를 왕복 4차로에서 2차로로 줄여 대중교통 전용지구로 개통하고 넓어진 보도 등에 공연문화 공간을 조성한다. 지역 청년 문화활동가 등 40여명은 신촌을 새 문화촌으로 만들자는 취지로 ‘신촌재생포럼’ 발족을 준비하고 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시가 고서점 임대료 깎아주자 시민들도 ‘단골 지키자’ 운동

    수백 년 전통의 청년 문화와 역사를 보존해 온 프랑스 파리의 ‘라탱지구’(Quartier Latin)는 사라져 가는 국내 대학가의 청년문화 회복 방안에 시사점을 던져 준다. 800년 전통을 지닌 대학가 파리 5구와 6구 서쪽의 라탱지구는 2000년대 급격히 유입된 상업자본으로 홍역을 치렀다. 고서점과 학생들이 즐겨 가는 저렴한 가격의 음식점이 몰려 있던 거리에 관광객을 유혹하는 부티크와 고급 레스토랑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자갈을 박아 만든 좁은 골목길도 콘크리트 바닥으로 바뀌었다. 이곳이 ‘라탱’(Latin)으로 불린 까닭은 1798년 프랑스혁명 때까지 소르본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이 거리의 서점과 카페, 레스토랑에 모여 앉아 라틴어로 대화하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다. 라탱지구 인근에는 소르본대학과 콜레주드프랑스, 앙리 4세 고교 등 명문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상업자본이 유입되면서 라탱지구 고유의 분위기가 훼손되기 시작했다. 인터넷 서점이 늘고 가게 임대료가 폭등하자 200개 이상의 서점이 폐업했다. 이때부터 과거의 청년과 현재의 청년이 같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라탱지구의 고서점과 단골 레스토랑을 지켜야 한다는 파리 시민들의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대학가에서는 ‘서점 지키기 운동’이 일어났다. 파리시도 대학가의 오래되고 작은 서점을 살리려고 뛰어들었다. 파리시는 2008년부터 4년간 ‘비탈 카르티에’(생기 있는 거리) 프로젝트를 통해 라탱지구를 문화 상권으로 지정하고, 17곳의 오래된 서점을 시가 소유한 건물에 보증금(3개월 임대료)만 받고 매장을 내줬다. 또 옷가게 등의 매장이 구역을 점령하거나 고서점·레코드 가게와 같은 문화상품 매장이 사라지는 것을 방지했다. 청년문화기획자모임 활동을 하는 최현호(33)씨는 3일 “대학가의 오래된 서점이나 음식점, 단골 가게는 단순한 상점이 아니라 그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담은 하나의 스토리 공간”이라면서 “무형의 자산을 지키려는 정책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윤샘이나 기자 sam@seoul.co.kr
  • 신촌, 쉰촌… 다시 新촌

    신촌, 쉰촌… 다시 新촌

    ‘새로운 마을’ 신촌(新村·옛지명 새말터)은 6·25 전쟁의 포성이 멈춘 뒤 새로움을 좇는 젊음의 열정이 늘 넘치던 곳이다. 통기타나 저항연극, 록카페 등 기성 주류 문화에 대항했던 청년문화가 꽃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 신촌은 급격한 노화를 겪었다. 2014년 신촌의 밤거리는 여전히 불야성이지만 문화의 향기는 사라지고 상업 자본의 유혹만 남았다. 더불어 향기를 좇던 ‘꿀벌’(청년)들도 줄었다. 무엇이 신촌을 늙게 했을까. 신촌의 생로병사를 추적했다. “신촌 일대가 온통 호박·배추·오이밭이었어요. 지금이야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1936년 신촌에서 태어나 떠난 적이 없는 ‘토박이’ 박춘화(78) 창천교회 목사가 지그시 눈을 감고 60년 전 신촌을 회상했다. 서울 신촌동과 창천동, 노고산동 일대를 가리키는 신촌에는 연세대와 이화여대 등 대학들이 자리 잡았지만, 개발 전 서울의 여느 곳처럼 밭과 논뿐이었다. 신촌의 ‘상전벽해’가 시작된 것은 1960년대부터였다. 1950년대까지 명동을 주무대로 삼던 젊은 문인들이 신촌에 모여들면서 문화의 여명이 동텄다. 소설가인 고(故) 최상규(1994년 별세), 시인 정현종(75) 등 연세대 출신 문인들이 이 지역을 터전 삼았다. 나도삼 서울연구원 선임연구위원(문화·예술 전공)은 “신촌에는 서강대·연세대·이화여대·홍익대 등 여러 대학이 서로 마주 보는 곳에 움푹 파인 형태로 위치했다. 대학생들이 모이기에 적합한 지형”이라고 말했다. 자연스레 청년층을 겨냥한 소비 시장이 만들어졌다. 1970년대 이화여대 입구는 ‘로망’, ‘부르몽’, ‘아카디아’, ‘벵땅’ 등 150개 넘는 양장점이 자리 잡은 ‘패션 메카’였다. 1970년대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판탈롱바지(나팔바지)와 미니스커트 같은 최신 의상을 사 입었다. 홍석기 서울연구원 연구위원(공간·문화 전공)은 “‘1970년대 당시에는 멋쟁이가 되려면 일단 신촌에 가라’는 얘기가 회자될 정도였다”고 전했다. 신촌의 전성기는 1980년대 들어 열렸다. 서울 중구 세종문화회관 주변 등 도심에 있던 소극장과 연극단이 신촌에 입성하면서 문화가 만개했다. 나 연구위원은 “정권 비판적인 작품을 무대에 올려 권력자에게는 눈엣가시 같았던 연극단들이 1980년대 탄압을 피해 신촌으로 터전을 옮겼다”고 설명했다. ‘신천’, ‘산울림소극장’, ‘연우소극장’ 등 모두 9곳이 신촌에 자리 잡았다. ‘서울의 브로드웨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문화를 즐길 준비가 된 젊은 층이 넘쳐나고 공연할 공간도 생기니 서정적 민중가요를 부르던 노래꾼들이 신촌을 주무대로 삼기 시작했다. 고(故) 김현식의 ‘신촌블루스’, 고(故) 김광석의 ‘동물원’ 등은 신촌의 라이브카페에서 청년 관객들을 만나 함께 호흡하고 교감했다. 특히 1984년 지하철 2호선이 완전히 개통되면서 유입 인구가 크게 늘었다. 1990년 신촌은 ‘X세대’로 불린 신인류의 등장과 함께 절정을 맞았다. 이 시절 신촌을 강타한 문화 아이콘은 ‘록카페’였다. 최근 종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 등장한 ‘스페이스’ 등 록카페들이 밀집했다. 하지만 문화와 유흥의 경계에 있던 업종인 록카페는 신촌 청년 문화의 절정을 보여 준 동시에 쇠락의 전조이기도 했다. 나 연구위원은 “록카페의 매력 덕에 엄청난 청년 소비층을 끌어 모았지만 결국 독약이 됐다”고 분석했다. ‘돈의 맛’을 알게 된 신촌의 지가는 이후 크게 요동쳤다. 전통적 명물들이 땅값을 견디다 못해 문을 닫았다. 이미 1990년대 들어 신촌 소극장들이 명륜동(대학로)으로 떠나가고 있었던 까닭에 신촌의 상업화는 순식간에 진행됐다. 더구나 ‘홍대앞’이라는 대체재가 있었다. 홍대 지역은 ‘클럽’이라는 상징 업종이 있었던 데다 홍익대 미대나 지역의 대형 연예기획사 YG엔터테인먼트 등에서 파생돼 나온 네트워크 덕에 문화적 뿌리가 단단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홍대 주변에서 대규모 응원전이 벌어지면서 서울 청년 문화 패권의 무게중심은 이 지역으로 급격히 쏠렸다. 전문가들은 서울시와 서대문구, 지역 상인·시민이 ‘신촌 부흥’에 나선 것을 두고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의 변화가 더 급하다고 말했다. 나 연구위원은 “지역 상인들이 새 예술을 얼마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청년 문화촌 탄생과 번영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실제로 고려대 박수정씨가 2012년 낸 석사 논문 ‘서울시 창조계층의 분포 패턴과 입지 특성’에 따르면 영상물과 창작·예술 관련업, 전문디자인업 종사자 등 보헤미안(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성향의 직업인) 계층은 합정동과 서교동, 연남동 등 홍대 일대에 고루 분포해 있었다. 나 연구위원은 “신촌이 홍대를 따라가려고 하면 부흥하기 어려울 것”이라면서 “개방성과 창조성을 기반으로 독창적 장점을 살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사라지는 또 다른 낭만들] 대학가 서점? 사막에서 바늘 찾기죠

    고려대 97학번인 김모(36)씨는 모교 근처인 안암동 로터리를 찾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다. 학창 시절에 즐겨 찾던 사회과학 서점 ‘장백서원’이 이젠 추억으로만 남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대학가 사회과학 서점의 몰락은 일종의 트렌드였다. 1980년대 사회과학 서점이 학생 운동의 동향을 주시하는 공안기관의 시찰 대상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서점들은 1997년 외환위기를 거쳐 경영난으로 대부분 문을 닫았다. 신촌 연세대 인근의 ‘오늘의 책’은 2000년, 고려대 ‘장백서원’은 2001년, 성균관대 ‘논장’은 2004년 폐업했다. 2011년에는 중앙대 앞 ‘청맥’과 동국대 ‘녹두’가 문을 닫았다. 서울대 인근 ‘그날이오면’과 성균관대의 ‘풀무질’ 정도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학가 서점의 퇴조는 1990년대 후반부터 대학가에 불어닥친 취업난과 연관이 있다는 분석이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김씨처럼 사회과학 서적을 즐겨 읽는 학생이 상당했고, 이런 학생들이 대학가의 토론문화를 주도했다. 운동권이 아니어도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즐기는 학생들의 존재는 사회과학 서점이 버틸 수 있는 기반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 대학가에 몰아닥친 극심한 취업난은 이런 기반을 휩쓸어 갔다. 신촌을 대표하는 50여년 전통의 ‘홍익문고’도 2012년 서대문구가 추진한 신촌 일대의 재개발 사업으로 폐점 위기에 몰렸지만, 후원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대형 커피숍엔 없는 낭만과 추억 담아 40년 전 모습 그대로

    대형 커피숍엔 없는 낭만과 추억 담아 40년 전 모습 그대로

    3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명물거리에는 새로운 가게 입점을 위해 내부 공사를 하는 건물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하지만 화려한 외관의 프랜차이즈 커피숍들이 흥망을 반복하는 가운데에도 원두커피 전문점 ‘미네르바’는 40년째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2000년 가게를 인수해 운영하고 있는 현인선(52)씨는 “(장수의 비결은) 욕심내지 않고 지킬 것을 지킨 데 있다”면서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질 좋은 커피와 클래식 음악은 변함이 없었다”고 말했다. 43㎡(13평) 남짓 되는 공간은 2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 낮은 테이블, 먼지 낀 창틀 등 1975년 처음 가게 문을 열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시간이 흐를수록 신촌 명물로 거듭났다. 현씨는 “예전에 이곳을 찾았던 젊은이들이 이제는 아들딸을 데리고 와서 옛날 얘기들을 하고 간다”면서 “당시 모습이 남아 있는 카페가 낭만과 추억의 공간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현씨는 번화하던 신촌이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급격히 쇠락해 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다. 대형 자본에 밀려 작은 가게들은 신촌에서 홍대로, 또다시 합정동·상수동 등으로 밀려 갔다. 그는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작은 가게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지만, 프랜차이즈 매장들도 오래가지는 못했다”면서 “대학이 몰려 있는 신촌은 새로운 가게들이 먼저 들어서는 곳이지만 전문성과 개성을 갖추지 못하면 결국 살아남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1970년대 젊은이들의 문화공간이자 신촌의 랜드마크이던 독수리다방도 2005년 문을 닫았다가 창업자 김정희(85)씨의 손자 손영득(33)씨가 지난해 1월 현대식 커피숍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손씨는 “대학가에는 청년들이 모여 이야기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면서 “건물이 바뀌면서 옛날 모습은 사라졌지만 공연, 포럼, 전시회 등 대학가만의 특색을 살려 대형 커피숍들과 차별화했다”고 말했다. 신융아 기자 yashin@seoul.co.kr
  • [사라지는 또 다른 낭만들] 하숙집 딸? 하숙집 찾기가 힘들어요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주 무대는 하숙집이다. 그러나 최근엔 하숙집 찾기가 쉽지 않다. 원룸이 하나둘씩 하숙집을 잠식하면서 대학가의 숙박 지형을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방값이 치솟는 데다 남과 어울리기보다 나만의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학생이 늘어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서울 서대문구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는 김모(56·여)씨는 3일 “예전에는 부모님들이 대학 간 자식들의 주거 형태로 밥을 굶지 말라는 뜻에서 하숙집을 선호했다”며 “10년 전만 해도 하숙생끼리 어울려 술도 자주 먹고 토론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요즘은 하숙생끼리 가족처럼 지내는 것이 옛일이 됐다”고 덧붙였다. 드라마에 비치는 과거 모습과 달리 층별로 남녀가 엄격히 구분돼 있고, 아침을 챙겨 먹기보다 잠을 더 자거나 밤늦게 들어오는 학생이 많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하숙촌은 대부분 원룸촌으로 바뀌고 있다. 하숙을 하다 1년 전부터 서울 용산구 원룸에서 자취를 하는 대학생 이모(25·여)씨는 “아침을 안 먹다 보니 식비로 내는 돈이 아까워 원룸을 알아보게 됐다”며 “특히 공동화장실에서 샴푸 등 사소한 것이지만 내 물건이 없어지는 일이 많아 불편했다”고 털어놨다. 최근엔 하숙과 원룸의 장점을 합한 ‘원룸형 하숙집’도 등장했다. 원룸형 하숙집은 욕실이나 화장실이 방 안에 있으면서도 하숙처럼 밥이 제공되는 형태다. 식사 값은 보통 10만~15만원으로 호불호에 따라 취사선택할 수 있다. 이화여대 근처에서 원룸형 하숙을 하는 이모(21·여)씨는 “집 밥은 그립고 하숙은 부담스러웠는데, 음식이 제공되는 원룸이 있어 선택했다”며 “이번에 드라마를 보면서 하숙집에 대한 환상이 생기기도 했지만, 역시 혼자만의 독립된 공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명희진 기자 mhj46@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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