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폐지 없다” 메모… 죽음의 공포 못 이긴듯
자살한 정남규는 병원으로 옮겨진 뒤 한때 호흡과 맥박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법무부는 목을 맨 정이 21일 오전 6시35분쯤 구치소 순찰 근무자에게 발견돼 즉시 인근 평촌 한림대병원으로 옮겨졌으며, CT촬영 등 정밀진단 후 중환자실에 입원조치됐다고 22일 밝혔다. 하지만 정은 이날 0시50분쯤부터 상태가 악화돼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으나 회생하지 못하고 2시35분쯤 사망했다고 덧붙였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정은 유영철부터 강호순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사이코패스 묻지마 살인자의 대표격이다. 어린시절 성폭행 당한 고통을 안고 살던 정이 본격적으로 살인에 나선 것은 2004년부터다.
정은 2004년 1월 경기 부천에서 초등학생 윤모(당시 11세)군과 임모(당시 10세)군을 납치·성폭행한 뒤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서울·경기 서남부 지역을 돌아다니며 심야에 귀가하는 여성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거나 집에 침입해 살인과 방화를 함께 저지르는 등 연쇄살인 행각을 벌였다. 이후 2년여동안 정에게 살해당한 사람만 13명, 중상을 입은 사람은 20명에 달해 ‘제2의 유영철’로 불렸다.
정은 폐쇄회로(CC)TV가 적은 서민주택 등지를 범행 무대로 삼는 치밀함을 보였고, 특히 비오는 목요일에 살인을 집중해 ‘비오는 목요일 괴담’이 돌기도 했다.
2006년 4월 한 남성과 싸우고 도망치다 검거됐던 정은 한 차례 도주를 감행, 공권력을 희롱하기도 했다. 다시 체포된 후 경찰 조사 과정에서 자백을 통해 유영철이 저질렀다고 주장했던 이문동 살인사건의 진범이 정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사를 담당한 경찰은 정을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로 결론냈고, 재판과정에서도 정은 “사람을 많이 죽일 때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하는 등 범행을 뉘우치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아 충격을 줬다. 또 항소심 재판에서 “부자들을 죽이지 못해 안타깝다. 빨리 사형시켜 달라.”고 말해 극심한 반사회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결국 정은 강도살인 혐의로 2007년 4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항소심 결심에서 검사에게 돌진하는 등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과 달리 정은 수형 생활이 시작된 이후 성경을 열심히 읽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법무부 관계자는 22일 “정이 남긴 물건 가운데 자신의 범행을 반성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은 사형수를 상대로 실시되는 심리 검사에서 자살 징후를 내비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은 최근 사형집행 및 사형제 존폐 등의 내용이 사회적 이슈로 다시 등장하자 커지는 불안감을 억누를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법무부에 따르면 정의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개인노트에 “현재 사형을 폐지할 생각은 없다고 한다. 요즘 사형제도가 다시….”,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같은 것”과 같은 내용의 메모를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고 반성의 기미마저 보이지 않았던 정도 죽음 앞에서 밀려오는 불안과 공포를 이겨낼 수는 없었던 셈이다.
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