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경영 이야기] (40) LG생명과학 양흥준 사장
“역사를 다시 쓴다는 자세로 도전하는 것 뿐입니다.”
말단 연구원으로 출발, 이공계 출신 전문경영인(CEO)으로 우뚝 선 LG생명과학 양흥준(楊興準·58) 사장은 우리나라 생명과학산업을 일궈낸 ‘산파’이자 ‘대부’로 꼽힌다.
양 사장은 전자, 반도체, 자동차, 석유화학 등 한국의 주력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1980∼90년대, 불모지나 다름없던 생명과학분야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투자에 주력했다.20여년이 지난 지난해 4월 호흡기 질환 항생제 ‘팩티브’를 ‘국산신약 1호’로 내놓는 등 성장산업으로의 가능성을 이끌어냈다.
●수학교과서,1주일 만에 ‘뚝딱’
“교과서에 적혀 있는 그대로 암기해야 하는 과목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 이해를 못했어요. 적어도 내가 해야 할 몫이 남겨져 있던 과목은 수학과 과학뿐이었습니다.”
양 사장은 학창 시절, 교과서에 모든 지식이 나열돼 있는 인문·사회과학 과목보다 계산이나 실험을 통해 스스로 해답을 찾아야 하는 자연과학 과목에 훨씬 흥미를 느꼈다.
이 때문에 그는 새학기가 시작된 지 1∼2주일 만에 수학교과서에 실린 모든 문제를 혼자 힘으로 풀어냈다. 물론 선생님의 일방적인 주입식 강의에서 벗어나 실험을 할 수 있는 과학시간은 ‘탈출구’나 다름 없었다.
그는 “과외나 학원 등 사교육은 꿈도 꿀 수 없었고, 경상도 ‘깡촌’이라 물어볼 사람도 마땅치 않았던 시절이었다.”면서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내고 실험 과정과 결과를 지켜보던 순간들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죠.”라고 회상했다.
결국 양 사장은 망설임없이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선택했다.1969년 대학을 졸업한 이후 충북 충주의 한 비료회사에서 근무하던 그는 1978년 LG생명과학의 전신인 ㈜럭키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입사하면서 LG와 첫 인연을 맺었다.
●성공은 새로운 도전 위한 디딤돌
양 사장은 연구소에서 전자제품을 세밀하게 가공하는 데 쓰이는 PBT라는 고분자 수지를 만드는 공정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개발, 한국 화학산업에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플라스틱의 일종인 PBT는 전자, 전기, 자동차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제품으로 당시 이를 생산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과 일본, 독일 등 3개국뿐이었다.
또 국화꽃 향기가 파리와 모기 등 벌레들을 죽이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 착안, 인체에 해가 없는 피레스로이드 살충제 제작공정도 국내에 처음 도입했다. 양 사장이 개발한 공정들은 지금도 활용되고 있다.
화학분야 연구원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가 과감히 유학의 길을 선택한 것은 80년대 중반.“당시 태동하기 시작한 생명과학분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라면서 “도전정신이 없었다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나를 가꾸기보다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 사장은 지난 89년 미국 워싱턴대에서 단백질 분리에 관한 연구로 생물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다시 ㈜럭키에 재입사했다.
연구에만 주력하는 외곬로 비쳐졌던 그가 96년에는 LG화학의 기술 및 사업전략을 담당하면서 연구원으로서의 둥지를 박차고 나왔다. 이어 LG화학 생명과학사업본부장을 거쳐 2002년 8월 국내 대기업 가운데 첫 생명과학 전문기업으로 탄생한 LG생명과학의 CEO를 역임하면서 경영인으로서의 삶을 활짝 열었다.
●위기는 끝이 아닌 과정
양 사장이 ‘성공의 문’만 두드린 것은 아니다.
10여년간 500억원을 쏟아부은 퀴놀론계 항균제 신약 팩티브가 2001년 12월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FDA)에 의해 신약 승인 유보 판정을 받았다. 미국이 전세계 의약품 시장의 60∼70%를 차지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형선고’에 가까운 충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재신청을 준비하던 2002년 4월 개발 제휴사인 미국 GSK사로부터 공동개발 포기라는 ‘비보’도 접해야 했다.
“신약 개발 경험이 없는 데다 승인 여부도 불투명해져 눈앞이 캄캄했죠.GSK는 자사 전략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신약 승인이 물건너간 것은 아닌지 의구심마저 들었습니다.”그는 당시 심정을 이같이 털어놓았다. 그러나 양 사장은 특유의 ‘뚝심’을 발휘해 신약 승인을 다시 추진했다.A4용지 10만쪽 분량의 방대한 자료도 빠짐없이 준비했다. 결국 2003년 4월 국내 제약사상 최초로 미국 FDA 신약 승인이라는 쾌거를 이뤄냈다.
지난해 9월 미국에서 공식 판매에 들어간 팩티브는 연간 40억달러(약 4조 2000억원)에 달하는 세계 퀴놀론계 항균제 시장의 10%가량을 점유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는 “국내 제약회사가 700여개에 이르지만, 우리 스스로 개발한 약이 전무하다시피 한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신약 개발이 어려운 분야라는 방증이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가장 가능성 있는 분야인 만큼 도전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얘기도 된다고 했다.
●지나친 이공계 부각은 차별
이공계 연구원에서 전문경영인으로 자리매김한 양 사장은 과학적 마인드가 다른 분야에 진출하는 것을 훨씬 쉽게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연구든 경영이든 지식을 바탕으로 실제 생활에 적용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정확한 분석과 냉철한 판단을 요구하는 연구 경험은 시련이 닥쳤을 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고 여긴다.
이 같은 철학 때문에 이공계 현실에 대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다.“이공계 교육 프로그램이 잘못됐거나 이공계 전공자들의 실력이 낮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긍심을 심어주는 교육이 아닌 각종 인센티브를 주는, 시쳇말로 ‘꼬여내는’ 방식으로 이공계를 부각시키는 것은 우대가 아닌 차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또 “요즘 일부 학생들 사이에서 물리학·화학·생물학 등 기초과학은 구식이고, 생명과학 등 응용과학은 최첨단이라는 선입견이 있는 것 같다.”면서 “사실 응용과학을 깊이 연구하다 보면 기초과학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한데 이를 멀리하는 학생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특히 양 사장은 최근 세계적인 연구성과를 속속 내놓고 있는 생명과학분야조차도 갈길이 멀다고 지적한다. 연구 인력의 능력은 선진국과 차이가 없지만, 조급증에 휘둘려 문제를 인식하고 풀어내는 능력이나 이 같은 과정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관이 부족한 게 현실이라고 진단했다.
●선택과 집중이 승부수
양 사장은 1897년 국내에 근대적 의미의 제약사가 설립된 지 106년 만에 신약 개발의 염원을 풀었다. 동시에 한국을 세계 10대 신약 개발국의 반열에도 올려놓았다.
특허기간이 끝난 다국적 제약사의 오리지널 약을 복제하거나 염기만을 일부 바꾼 제너릭제품(개량신약)으로는 장기적인 경쟁력 확보가 어렵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다국적 제약사에 비해 인력과 연구비가 턱없이 부족한 환경에서 모든 분야를 따라잡을 수는 없습니다. 대신 항암제나 항생제 등 우리가 특화할 수 있는 분야에 전략을 집중해야죠.”
이 같은 신념에 걸맞게 LG생명과학은 지난해의 경우 매출액 2100억원 가운데 3분의1이 넘는 700억∼800억원을 연구·개발(R&D)에 사용했다. 연구개발인력도 전체 직원 1000여명 중 400명에 육박하며, 이들을 독려하기 위해 다양한 포상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이 뒷받침되면서 LG생명과학은 현재 서방형 인간성장호르몬과 B형간염 치료제 등 제2, 제3의 신약 개발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약을 만든다는 신념이 없다면 연구에서 상품화까지 10∼20년이 걸리는 신약 분야에 발을 담글 수 없죠. 풍성한 가을걷이를 위해 봄에 씨를 뿌리는 농부의 마음이 필요한 때인 것 같아요.”
양 사장의 도전정신은 끝이 없어 보였다.
장세훈기자 shjang@seoul.co.kr
■ 양흥준 사장은
회사 안팎에서 양흥준 사장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인물로 통한다. 깔끔한 인상에 온화한 표정, 여기에 경남 창녕 출신으로 사투리 억양이 묻어나오는 말투에서는 이웃집 아저씨 같은 편안함마저 느껴진다. 양 사장은 특히 분기별로 맥주집에서 직원들과 만나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업무추진에 있어서만큼은 결단력과 승부사로서의 기질을 갖췄다는 게 지배적인 의견이다. 지난 20여년간 ‘한 우물을 판’ 양 사장은 신약 팩티브 개발과 국내 생명과학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5월 발명의 날에 금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매일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책상머리에 앉는다는 양 사장은 과학뿐만 아니라, 경영과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국내외 서적을 탐독하는 ‘책벌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