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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태순
    2025-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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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가든파이브의 교훈/임태순 논설위원

    시인 김광섭은 ‘성북동 비둘기’에서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 번지가 없어졌다.”고 했다. 청계천 공구상 등 청계천 상인들도 개발로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는 성북동 비둘기 신세가 될 뻔했다. 지금은 청계천이 도심 한가운데를 유유히 흘러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지만 복원공사가 시작된 2003년만 해도 반발과 우려가 적지 않았다. 청계고가 해체에 따른 교통난을 걱정하는 시민들이 적지 않았고 주변 상인들은 청계고가 해체로 인한 먼지, 분진 등 환경악화, 유동인구 감소에 따른 상권 붕괴 등을 들어 태반이 반대했다. 점심을 먹은 뒤 회사 동료의 손에 끌려 청계천 공구상가 거리를 돌아본 적이 있다. 깨끗하게 정비된 청계천 도로변과는 달리 이면 골목길은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매캐한 냄새, 분진이 흩날려 1970~80년대 분위기 그대로였다. 공구상가는 도로변 전면에는 공구를 조립해 완성품을 파는 공구점들이 늘어서 있고 뒤편에는 부품을 만드는 공장과 창고들이 들어서 있다. 생산과 판매처가 붙어 있으니 물류비가 적게 들고 물류비가 싸니 제품가격도 저렴하다. 업체들이 밀집해 있으니 구하지 못하는 부품이 없다. 소비자들이 몰려들고 청계천 공구상들이 경쟁력을 갖는 이유다. 서울시가 청계천 이주상인들을 위해 지은 송파구 장지동 ‘가든파이브’가 썰렁하다고 한다. 10층짜리 공구·생활·아파트형 공장 빌딩 3개로 이루어진 가든파이브는 1조 3000억원을 들여 지난 2010년 6월 문을 열었지만 상가 분양률은 50%에 불과하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방문하고 나서 “귀곡산장 같다.”고 했을 정도다. 가든파이브는 왜 실패했을까. 청계천 공구상들에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상권이다. 서울시는 세금을 들여 현대식 건물을 짓고 입주비를 싸게 하는 등 여러 가지 특혜를 제공했지만 핵심인 상권 창출에는 실패했다. 공구상은 물론 부품업체도 이전해 생산과 판매의 시너지효과를 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청계천 공구상가에 가 보면 ‘장지동 가든파이브 가게 싸게 내놓는다’는 벽보가 종종 눈에 띈다. 장지동에 점포를 얻었던 공구상들이 청계천으로 U턴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가든파이브는 시설이나 부지를 이전할 때 외형적인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생태환경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준다. 김광섭도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엔 조용히 콩알 하나 먹을 널찍한 마당’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씨줄날줄] 바람/임태순 논설위원

    바람만큼 인류 문명이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것도 없다. 삼국유사에 보면 환웅이 인간을 다스리려 하늘에서 내려올 때 우사(雨師), 운사(雲師) 등 비와 구름을 가져오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람인 풍백(風伯)이었다. 비, 구름보다도 바람이 미치는 영향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기 순환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바람이다. 따뜻한 공기가 위로 올라가면 찬 공기가 내려와 빈 공간을 메워주게 된다. 바람은 바다와 육지, 고도 등 지표면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물론 지구 회전 에너지의 영향도 받는다. 바람은 위도에 따라 규칙적인 흐름을 보이는데, 적도 위아래의 아열대 지역에서 적도를 향해 서서히 부는 바람이 무역풍이다. 이 북동무역풍을 이용해 아메리카 대륙에 닿은 사람이 콜럼버스다. 15~17세기 대항해의 시대에 유럽 항해가들이 무역풍으로 지구의 지평을 넓혔으니 무역풍(貿易風)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도 당연하다. 반면 적도 북반구와 남반구 각각 위도 30도와 60도 사이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바람이 편서풍이다. 편서풍은 따뜻하고 온난한 북대서양 해류를 유럽대륙으로 몰고 와 유럽지역은 위도가 높은데도 겨울철에 우리나라에 비해 덜 춥다. 삼국지에서 조조에게 적벽대전의 패배를 안긴 것도 바람이었다. 강하게 불어오는 남동풍에 조조의 배는 싸움 한번 변변히 해보지 못하고 불길에 휩싸였다. 바람은 시인들의 인문학적 상상력, 감수성을 자극한다. 영국의 셀리가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는 ‘서풍부’(西風賦)의 시상을 떠올린 곳도 이탈리아 피렌체의 숲에서 불어오는 서풍이었다. 서정주도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고 했다. 윤동주가 ‘서시’에서 부끄러운 과거를 통절히 반성하면서 괴로워한 것도 ‘잎새에 이는 바람’이었다. 바람은 이처럼 희망에서 시련과 역경이 되기도 하고, 고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전국 곳곳에 많은 피해를 안긴 사상 유례 없는 봄 강풍이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4월이면 약해져야 할 시베리아 고기압세력이 늦게까지 사그라지지 않으면서 이상 저온 현상까지 몰고와 희망과 생명의 봄을 사납게 만든 것이다. 농작물이 해를 입은 것은 물론 강풍으로 전력 공급이 끊겨 지하철이 멈추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오늘은 향후 4년을 책임질 국회의원을 뽑는 날이다. 민심은 선거 때마다 요동쳐 변화를 가져왔다. 이번 선거에서도 민심은 바람을 탈 것이다. 유권자들에게 무슨 바람이 불어 어떤 정치 지형도를 만들어낼지 궁금하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씨줄날줄] 산림 기부/임태순 논설위원

    전남 장성 축령산 편백나무 숲은 삼림욕장으로 유명한 대표적인 ‘국민 숲’이다. 100만평에 이르는 편백나무와 삼나무 군락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는 세파에 시달린 현대인의 심신을 풀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편백나무 숲이 치유의 숲으로 주목받기까지에는 한 독림가의 평생에 걸친 열정과 정성,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인이 된 임종업 선생은 1955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축령산에 삼나무와 편백나무 5000그루를 시험재배한 뒤 성공하자 1976년까지 21년간 253만여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1968~69년 극심한 가뭄으로 밭작물을 포기할 정도였는데도 선생은 물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 나무를 살려냈다. 그러나 필생의 사업은 1979년 후원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위기에 봉착한다. 가계가 파산하고 그도 1987년 숨지면서 그가 조성한 산림은 소유권이 여러 사람들에게 넘어간다. 2002년 분할소유로 벌목될 위기에 처한 편백숲을 산림청이 매입하면서 명품 숲으로 거듭나게 된다. 독림가의 길, 숲가꾸기는 필생의 노력과 의지, 자본이 없으면 꿈도 꿀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독림가 손창근 옹이 그제 평생을 일군 경기도 용인 일대 산림 662㏊를 산림청에 흔쾌히 기부했다. 50년 이상 가꾼 200여만 그루의 잣나무와 낙엽송 등의 보전상태도 좋아 시가 1000억원대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임종업 선생의 예에서 보듯 숲가꾸기는 자본 회임기간이 길어 자본을 투입한 뒤 성과는 늦게 나타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가 기부한 1000억원대의 산림은 그 몇배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국민들이 대를 이어 두고두고 이용할 수 있는 공공재라는 점에서 산림 기부는 더욱 빛을 발한다. 산림 기부는 또 척박한 우리나라의 기부문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최근 들어서야 기부가 문화재, 재능 등으로 보폭을 넓히고 있지만 산림 기부는 지난 2010년 시작돼 이번이 세번째일 정도로 일천하다. 기부는 경제적 기여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줘 향후 나눔의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할 것으로 전망된다. 산림청에는 벌써부터 “산림 기부가 있었느냐,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등의 문의전화가 적지 않게 걸려 온다고 한다. 웰빙과 녹색성장 시대에 산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산림 기부가 활성화돼 더 많은 명품 숲, 국민 숲이 생겨나 국토의 품격이 높아지기를 기대한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씨줄날줄] 우도(牛島)의 밤/임태순 논설위원

    한국인들의 소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그래서인지 전국 곳곳의 지명에는 소와 관련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면(牛眠)산, 우이(牛耳)도, 우목(牛目)도 등이 모두 산이나 섬의 모양이 소와 비슷하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지만 뒤집어 보면 소가 우리들과 친근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제주도 우도(牛島)도 섬의 모양이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서 우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제주도 본도에서 배로 10여분이면 도착하는 작지만 보석처럼 아름다운 섬이다. 섬의 아름다운 풍광이 입소문을 타고 번져 2001년 40여만명에 이르던 관광객은 해마다 두 자릿수 이상의 신장세를 보이며 지난해 처음으로 100만명을 넘어섰다. 6㎢의 면적에 1600여명의 주민이 사는 곳에 한 해 100만명이 찾았으니 관광의 부가가치가 아주 높은 편이다. 올해는 29% 늘어난 120만명의 관광객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성산항과 종달항에서 각각 3.7㎞, 2.7㎞ 떨어져 있는 우도는 해안도로 13.1㎞를 따라 한 바퀴 도는 올레길이 우도 관광의 백미다. 섬을 일주하다 보면 우리나라 유일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볼 수 있는 산호 해수욕장, 우도봉에서 내려다보는 기암절벽 등 절경과 쉬지 않고 마주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 관광객이야 섬 속의 섬이라서 더욱 운치를 느끼지만 주민들은 연륙(連陸)을 희망한다. 도항선이 하루에도 수십 차례 다니지만 기상상태에 따라 연중 40여일은 배가 끊겨 주민들이 의료 또는 교육문제로 겪는 불편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달항과 우도를 다리로 연결할 경우 ▲주민들이 출자한 도항선사업이 타격을 입고 ▲관광객들도 차를 몰고 들어와 한번 둘러본 뒤 빠져나가는 바람에 섬 경제에도 치명타를 가져온다는 점 때문에 3000억원이 드는 연륙교 건설은 수면 아래로 잠재워졌다. 대신 의료문제는 보건소 시설 확충으로 절충이 됐다. 제주도가 4억 2000여만원을 들여 우도 올레길에 야간 경관작업을 실시한다고 한다. 해안도로 구간에 신재생에너지인 태양광을 이용한 야광등을 설치해 올 연말이면 한밤에도 올레길을 걸을 수 있게 된다. 야간 조명등이 설치되면 우도의 부가가치는 더욱 높아지게 된다. 지금까지는 아침에 우도로 들어와 둘러본 뒤 오후에 빠져 나가는 반나절 관광이 일반적이었지만 야간 조명작업이 완성되면 하룻밤 머무는 체류형 관광지로 변모하게 되기 때문이다. 제주도 야경, 한라산 일몰 등 더욱 풍성해질 우도의 밤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길섶에서] 늦은 후회/임태순 논설위원

    화상으로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진 아버지는 어린 아들, 딸을 고아원에 맡기고 외진 곳에서 숨어 살았다. 자녀들은 어느 날 나타난 아버지에게 배신감과 실망감에 등을 돌렸고, 그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자녀들은 문상객이 아버지는 화장을 싫어했고 뒷산에 묻히길 원했다는 말을 전해 주었으나 귓전으로 흘려 버리고 화장을 했다. 장례를 마친 뒤 아버지의 짐을 태우다 빛 바랜 일기장을 발견했다. 일기장은 어린 애들 울음소리 때문에 당신을 구하지 못했다는 아내에 대한 죄책감과 평생 밤마다 불에 타는 악몽에 시달려온 만큼 화장만은 하지 말아달라는 자식들에 대한 당부로 끝을 맺었다. 자식들은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통곡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5년 전 아버지를 떠나 보낸 친구가 “생전엔 소중함을 잘 몰랐는데 요즘 아버님 생각을 하면 가슴속 깊이 허전한 마음을 많이 느낀다.”며 보내온 이메일이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씨줄날줄] 나트륨/임태순 논설위원

    음식도 지역별로 차이가 있다. 북부 지방은 남쪽에 비해 싱겁고 매운 맛이 덜하다. 반면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음식 맛이 강해져 짜고 맵다. 남쪽이 북쪽에 비해 더운 만큼 발효음식이 상대적으로 발달하고, 음식이 덜 상하도록 양념도 많이 썼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이 긴 북한은 음식 부패에 대한 염려가 적어 양념을 덜 써도 되니 담백한 맛이 발달했다. 좀 더 들여다 보면 서울, 경기 등 중부지방은 음식의 간이 짜지도 맵지도 않아 적당한 편이다. 특히 서울은 음식에 색의 조화도 고려하는 등 멋을 부려 화려하다는 평이 있다. 전라, 경상도의 음식은 대체로 간이 세고 매운 편이다. 특히 전라도 음식은 해산물과 젓갈, 고춧가루를 많이 써 자극적이다. 이에 반해 평안, 함경도는 맵지 않아 싱겁다. 그 사이에 낀 황해도와 충청도는 구수하고 소박한 맛이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 지역별 음식 차는 점차 강한 맛으로 통일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짜고 매운 남도 음식이 중성의 중부 음식을 밀어내고 있다. 점심시간 서울시내 뒷골목 식당가를 가 보면 고춧가루, 고추장, 소금을 듬뿍 친 음식을 땀을 뻘뻘 흘리며 먹는 모습을 쉽게 본다. 웬만큼 자극적이지 않고선 직장인들의 선택을 받을 수 없다. 이에 비해 북한은 음식 맛 전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듯하다. 취재차 금강산, 개성공단에 들렀을 때 맛본 북한 음식은 대체로 싱겁고 자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양념을 많이 넣지 않아 음식 재료의 향취가 그대로 전해진다. 서울에 있는 몇몇 평양냉면 원조집에서 맛볼 수 있는 밍밍한 육수맛이라고나 할까. 회담차 몇 차례 북한을 다녀온 고위 공무원도 담백하고 싱거운 음식 맛에 깜짝 놀랐다며 공감했다. 보건복지부가 2020년까지 우리 국민의 하루 나트륨 섭취를 20% 줄이기로 했다고 한다. 짜고 매운 음식이 고혈압, 뇌졸중, 위암 등 각종 성인병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나트륨 섭취를 4646㎎에서 3000㎎으로 줄이면 연간 의료비를 2조원가량 절감할 수 있다고 하니 식습관만 잘 조절해도 건강을 챙기고 국가경제에도 보탬이 되는 것이다. 사실 짜고 매운 맛은 양념에 많이 좌우된다. 반면 싱겁고 담백한 음식은 맛을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양념이나 조미료가 아닌 것으로 맛을 살려야 하니 정성과 손맛이 더 들어가야 한다. 음식 난이도가 더 높다는 이야기다. 웰빙시대에는 강한 맛에서 벗어나 숭늉처럼 구수하고 은은한 맛에 젖어드는 게 좋지 않을까.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길섶에서] 어머니의 짐/임태순 논설위원

    “서울에서 김서방 찾는 격이지만 어머니의 은인을 찾아 주세요.” 몇년 전 미국에 사는 친구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1980년대 초 어머니가 운수업을 하는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 이웃에 사는 김희숙이라는 분한테 200만원을 빌렸으나 갚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내용이었다. “죽기 전에 꼭 신세를 갚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흘려들었으나 86세가 된 요즘도 입에 올려 도움을 청한다고 했다. ‘박’자 ‘종’자 ‘희’자를 쓰는 어머니는 30대 초반의 김씨가 서울 역촌동에 함께 살다 서초동(아마 삼익아파트)으로 이사 갔고, ‘준일’(아마 5~6세)이라는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 봤으나 은인 찾기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은인의 도움에 보답하는 미담기사를 볼 때마다 친구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은 영원히 잊지 못하고, 신세를 갚아야지만 마음이 가벼울 것이다. 어머니의 마음도 그랬을 것이다.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서울광장] 실패 백서가 더 값지다/임태순 논설위원

    [서울광장] 실패 백서가 더 값지다/임태순 논설위원

    경남 김해시가 최근 ‘부산·김해 경전철 20년사’ 백서를 발간했다. 부산 사상역과 김해 가야역을 오가는 이 경전철은 1992년 정부 시범사업으로 선정돼 20년 만인 지난해 9월 개통됐다. 그러나 경전철은 ‘돈 먹는 애물단지’로 전락, 두 지자체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됐다. 수요 예측을 부풀리는 바람에 향후 20년간 김해시 1조 5000억원, 부산시 1조원 등 모두 2조 5000억원의 운영손실분을 사업자에게 메워줘야 하기 때문이다. 1조원의 연간예산 가운데 인건비 등 경직성 경비를 빼면 사업 가용예산이 300억원에 불과한 김해시로선 돈 갚을 일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다. 백서는 주요 정책이나 대형 국책사업을 마쳤을 때 발간하는 정부 보고서로, 업적·치적 과시용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번 백서는 실패정책에 대한 보고서요 반성문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자화자찬하고 잘못된 것을 숨기기 일쑤인 우리 행정 풍토에선 이례적이다. 1992년 국무회의 의결로 시범사업이 된 부산·김해 경전철 사업은 1995년 민자 유치 사업으로 지정되고 2002년 현대산업개발 컨소시엄을 사업자로 선정, 실시협약을 체결하고 건설에 들어간다. 정부는 민자사업에 기업의 참여가 저조하자 1998년 민자사업법을 개정, 수요 예측에 미달하면 보전해 주는 최소운영수입보장(MRG) 규정을 만든다. MRG는 문제가 많다는 지적에 따라 그 뒤 폐지됐지만 김해시의 발목을 잡는다. 하루 이용객을 17만 6000명으로 예상했지만 실제론 3만명에도 못 미쳐 차액을 2014년부터 보전해 줘야 할 지경에 처했기 때문이다. 20년간 대통령선거 4차례, 국회의원선거 5차례, 지방선거 4차례가 치러졌으니 경전철 사업은 정치와 선거바람을 타고 왜곡되고 굴절될 수밖에 없었다. 부산~김해 교통난 해소, 대도시 연계 위성도시 개발, 경전철 인근 택지 개발, 대학 유치 등의 장밋빛 공약이 쏟아져 나와 주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했다. 여기에 국책연구원, 민자사업 참여업자도 수요 예측을 뻥튀기해 기대심리를 부추겼다. 초기인 1993년 교통개발연구원은 이용객을 11만 7800여명으로 전망했으나 금호컨소시엄이 사업신청서를 냈던 2000년에는 33만 6000여명으로 부풀려지는 등 수요 예측은 이리저리 춤을 춘다. 김해시의 백서발간은 다목적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심각한 재정부담이 된 민자사업의 실패를 철저히 반성하자는 것이 가장 크다. 공무원 교체로 행정의 연속성이 단절되고, 장기간 사업이 진행돼 주민들이 사업의 전말을 잘 모르는 점도 고려됐다. 이와 함께 사업을 중앙정부 권유로 시작한 만큼 책임도 나눠 져야 한다는 현실적인 의도도 숨어 있다. 김해 경전철 사업은 재정여건을 무시한 채 무리하게 추진되는 다른 민선단체장의 성과 쌓기식 사업과는 다르다며 선을 그은 것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도가 있다고 해도 백서의 의미가 평가절하되는 것은 아니다. 백서는 공무원의 전문성 부족으로 사업시행자와 협상은 물론 업무추진 시 어려움을 겪었다고 고백한다. 또 지자체의 정치적 필요에 휘말리는 바람에 사업의 적정성과 비용편익 분석을 냉정하게 하지 못했다고 반성을 한다. 아마 이러한 실패 백서가 좀 더 일찍 나왔으면 단체장의 업적과시용 마구잡이 사업으로 재정난을 겪고 있는 용인, 인천, 태백시 등의 유사 사례 재발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우고, 어리석은 사람은 경험에서 배운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히도 실패를 덮고 가리는 문화에 젖어 경험에서도 배우지 못하고 있다. 우루과이 라운드로 183조원을 농촌에 쏟아붓고도 그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모르는 게 우리들이다. 미리 앞날을 내다보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은 차치하고라도 최소한 일을 그르친 뒤 살펴보는 ‘사후’(事後) 또는 ‘후견’(後見)지명이라도 있어야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게 아닌가. stslim@seoul.co.kr
  • [씨줄날줄] 위기대응/임태순 논설위원

    위기 극복의 모범 사례로는 ‘타이레놀 독극물 사건’이 꼽힌다. 1982년 미국 시카고에서 독극물이 들어간 타이레놀을 먹고 7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존슨 앤드 존슨사는 사건이 터지자 즉시 재고 물량을 처분하고 시중의 타이레놀을 회수한다. 짐 버크 회장이 전면에 나서 사태의 경과 및 진행상황을 설명하며 솔직하고 개방적인 자세로 언론의 협조를 구한다. 뒤에 정신병자가 일부 타이레놀에 청산가리를 탄 사실이 밝혀지고, 회사 최고경영자가 정직한 자세로 기민하게 대응한 것이 소비자들의 신뢰를 사면서 매출은 다시 사건 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회복됐다. 이후 타이레놀의 위기관리 매뉴얼은 위기관리의 교과서, 고전이 됐음은 물론이다. 고리 원전 사고와 국무총리실 민간인 사찰 사건으로 나라가 뒤숭숭하다. 고리 원전 사고는 10여분간 원전 1호기가 가동 중지된 것을 지식경제부 등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한 달간 은폐해 온 것으로, 한국수력원자력은 물론 원전에 대한 불신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민간인 사찰 사건은 장진수 전 주무관의 폭로로 이 사건에 권력의 핵심부인 청와대가 연루된 정황 및 증언이 제시되면서 파장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두 사건 모두 은폐·축소했다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일단 숨기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심리다.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통제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폐는 일시적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으나 오히려 더 큰 화를 부르는 소탐대실의 대응 방법이다. 대중은 거짓말에 대해 더욱 분노하고 감정이 상하기 때문이다. 고리 원전도 초기에 가동 중단된 사실을 알리고 매를 맞았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민간인 사찰 사건도 당시 검찰 수사에서 실체에 접근, 털어버렸으면 이처럼 정권 후반기에 큰 부담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초동 단계에서 위기 대응의 핵심은 상황의 전파라고 말한다. 상황을 보고하면 일단 그 일은 자기 손을 떠나 조직 전체가 공유하게 된다. 물론 잘못한 정도에 따라 책임을 지겠지만 한편으로 조직은 집단 지혜를 활용해 사태 해결에 나서게 된다. 상황을 알린다는 것은 소비자에게, 국민에게 진솔한 자세로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깔려 있다. 진솔한 자세는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업이나 정부나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솔직하고 정직해야 국민의 마음과 신뢰를 산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길섶에서] 9988234의 진화/임태순 논설위원

    한동안 ‘9988234’라는 말이 유행했다. 우리 사회가 고령화사회로 접어들면서 단순히 ‘장수’라는 삶의 양에서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는 삶의 질에 눈이 돌려졌을 때다. 말 그대로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앓다 세상을 하직하자는 뜻이다. 오랜 병수발로 자식들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담겨 있다. 지인이 보낸 메일을 열어 보니 9988234를 재해석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흔히들 노후 준비 하면 돈을 떠올리지만 노후자금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신건강이라는 것이다. 한국인 사망원인 가운데 암, 뇌혈관질환, 심장질환 등의 질병이 1, 2, 3위이지만 4위는 자살인 만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하루하루 비관적으로 살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따라서 ‘99세까지 팔팔하게 20~30대의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신건강이란 한마디로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계속 늦추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팔팔한 20~30대의 마음은 누구든 마음먹기에 달렸다. 삶의 질은 나이를 불문하고 맑은 정신에서 출발한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씨줄날줄] 토사구팽/임태순 논설위원

    정권 출범 초기나 총선 공천 철이 되면 자주 쓰이는 말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사자성어다. 토사구팽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쓰였겠지만 일반인들에게 회자된 것은 김재순 전 국회의장 때문일 것이다. 김 전 의장은 1993년 김영삼 민자당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나 정치권 물갈이 바람에 몰려 용퇴대상이 되자 이 말을 남기고 정계를 떠났다. 당시 상황과 자신의 처지, 심경을 이처럼 압축적이고 적절하게 표현한 말도 없을 것이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뜻의 토사구팽은 그 뒤 용도폐기될 때 자주 쓰이는 유행어가 됐다. 토사구팽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사기에 나오는 말로,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왕 구천의 신하 범려에서 유래한다. 범려는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켰으나 제나라로 건너가 동료였던 문종에게 편지를 보냈다.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도 창고에서 썩게 된다는 조진장궁(鳥盡藏弓)과 토사구팽이란 비유를 들면서 이제 구천을 떠나라고 한다. 범려는 구천은 목이 길고 입은 새처럼 뾰족해 어려운 시절을 함께 보낼 수 있으나 즐거움을 나눌 수 없다며 그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문종은 이 말을 따르지 않다 결국 구천의 의심을 받아 자결하고 만다. 또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출범시킨 개국공신 한신도 역시 나중에 토사구팽당하고 만다. 토사구팽 사례가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토사구팽의 용인술은 어쩔 수 없는 세상 이치라는 생각마저 든다. ‘새 술은 새 부대’라는 말처럼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면 새로운 인물로 물갈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야만 변화가 오고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19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등 주요 정당들이 벌이고 있는 공천작업이 거의 마무리단계에 와 있다. 개혁과 쇄신이라는 명분에 밀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국회의원들이 공천을 받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나돈다. 의원들 가운데 일부는 당을 옮기거나 창당을 해 출마 의지를 불태우는가 하면 불출마를 선언하거나 백의종군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어떤 선택이 옳은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누구도 평생 금배지를 달 수는 없다. 달이 차면 기울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다. 산 정상은 머물다 내려오는 곳이지, 사는 곳이 아니다. 누구든 물러날 때를 생각해야 한다. 구천을 떠난 범려는 장사를 하면서 거부가 돼 제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았다고 한다. 바야흐로 진퇴의 미학이 돋보이는 시점이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씨줄날줄] 눈물/임태순 논설위원

    찰스 다윈은 저서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에서 “영장류는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태어나고 이 감정을 몸과 마음을 통해 표출한다.”고 했다. 동물 중 가장 발달한 영장류는 두뇌활동에 감정표현까지 하지만 파충류는 지능도 떨어지고 감정도 없는 만큼 동물 진화단계에서 한참 처진다. 하지만 파충류의 대명사 악어는 능청스럽게 위선자 연기를 훌륭하게 수행해 ‘악어의 눈물’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악어는 먹이를 삼킬 때 눈물을 흘리지만 이는 단순한 생리적 작용이지 그 속에 감정이 담긴 것은 아니다. 입을 벌려 먹이를 삼키면 자동적으로 소화가 잘되도록 침샘이 자극되고, 침샘은 눈물샘을 자극해 눈에 눈물이 고이게 되는 것이다. 악어는 먹이를 먹을 때 슬퍼 눈물을 흘린다는 이집트의 전설이 중세 유럽에 소개되고,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오셀로에서 ‘아, 그녀가 흘리는 저 눈물 방울은 악어의 눈물일지어라.’고 인용하면서 악어의 눈물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인간이 영장류에서 진화해 땅 위를 걸어다닌 것은 200만년 정도 됐다. 반면 구술언어는 16만~35만년 전에 생겨났으니 인류는 손짓, 발짓, 몸짓 등 신체언어로 훨씬 더 오랜 시간 의사소통을 해왔던 것이다. 신체언어 가운데 울음만큼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도 없다. 슬플 때, 기쁠 때 저절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고 울지 않는 사람은 없고, 그 눈물은 주위 사람들에게 전이돼 감동을 자아낸다. 흔히들 여자의 눈물은 남자를 약하게 한다지만 여자의 눈물보다 더 파괴력이 있고 세상을 움직이는 게 남자의 눈물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는 의리, 충절의 표상으로 여겨지지만 ‘눈물의 통치학’으로 위기를 넘긴 것으로 유명하다. 재사 제갈량을 삼고초려로 영입할 때 눈물을 흘렸으며, 아들 유선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도 내키지 않아하는 제갈량의 마음을 바꾼 것도 대성통곡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도 전황이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눈물을 보였다. 푸틴 러시아 총리가 대선 중간개표 결과가 나온 뒤 대규모 집회에 참가해 승리를 선포하며 눈물을 흘렸다. 평소 마초 기질의 강한 모습을 보여온 데다 반대 측 인사들을 압박해온 만큼 승자가 패자를 위로하는 포용의 눈물이 아니라 ‘악어의 눈물’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유비나 히틀러나 눈물로 위기를 넘겼지만 역사의 승리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눈물은 감정을 한순간 지배할 수 있지만 이성이나 논리까지 지배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겨야 한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길섶에서] 새소리/임태순 논설위원

    아침 집을 나서는데 유난히 새소리가 크게 들렸다. 조잘조잘대는 새들의 지저귐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화창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걸으니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왠지 오늘 하루는 기분 좋은 일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새소리는 흐리고 궂은 날보다는 맑게 갠 날 자주 들었던 것 같다. 언젠가 아침 일찍 문경새재 조령관문에 올라가니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새들의 합창 소리에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간밤 단잠을 잔 뒤 상쾌한 기분으로 서로 아침 인사를 주고받으니 요란스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루한 장마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도 새소리였다. 오랜만에 해가 뜬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새들의 흥겨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성경에도 노아의 대홍수가 끝나자 방주로 찾아온 것은 새들이었다고 하지 않았나. 때마침 기상청은 올해는 개나리가 지난해보다 2~4일 빨리 필 것으로 예보했다. 봄이 빨리 오는 것이니 새들의 울음소리를 더 들을 수 있게 되나 보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씨줄날줄] 경춘선/임태순 논설위원

    지난 주말 문상차 춘천을 다녀왔다. 승용차로 함께 가자는 친구의 말을 뿌리치고 상봉역으로 가 혼자 전철에 올라타는 청승을 떨었다. 조금 지나니 도심을 벗어나 전원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대성리, 청평, 가평, 강촌 등을 지나자 북한강을 낀 수려한 풍광이 연이어 펼쳐져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동료들보다 먼저 춘천에 닿고 눈까지 호사했으니 내심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에 쾌재를 불렀다. 경춘선은 도시인들의 영원한 로망이다. 열차에 몸을 실으면 금세 혼잡한 도시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과 마주친다. 경춘선의 탈서울 기능은 숙명이었던 것 같다. 일본 특파원 미즈시마 겐도 1939년 개통 당시 ‘경춘 철도 시승기’를 쓰면서 “나직하고 작게 멀어지는 경성의 거리, 그 거리의 하늘에 우뚝 솟아 있는 프랑스 교회의 첨탑이 묘하게 빛난다.”고 했다. 경춘선에는 또 추억과 낭만이 남아 있다. 대학생 시절 인기 MT 장소이자 연인과 떠나는 기차여행지로 사랑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경춘선에는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다. 경춘선이 오랫동안 남다른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차창 밖 경치도 절경이지만 도시화의 때를 덜 탄 요인도 크다. 서울·인천의 경인 축과 서울·수원의 경수 축이 도시 연담화(連擔化)로 거대도시가 된 것과 달리 경춘 축은 인구 유입이 적어 한적한 시골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피천득의 명수필 ‘인연’도 경춘선과의 인연이 없었으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학에 강의를 하기 위해 춘천을 자주 오가던 그는 “그리워하면서도 한번 만나고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서로 아니 만나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고 토로하면서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라고 했다. 경춘선에 어제부터 ‘ITX-청춘’이 추가 투입돼 기존의 전동차와 함께 복수 운행에 들어갔다. ITX-청춘은 KTX 다음으로 빠른 준고속 열차로 최고속도가 시속 180㎞에 이른다. 서울 용산과 춘천을 69분에 달려 기존의 전동차보다 운행시간이 30여분 단축된다. ITX-청춘이 투입됨으로써 경춘선은 세번째 변신을 하게 됐다. 일제시대인 1939년 사설철도로 첫출발한 경춘선은 1946년 국유화된 뒤 무궁화 열차로 운행되다 2010년부터 상봉~춘천 복선전철이 개통되면서 수도권 전철이 됐다. 피천득이 살아 있었다면 경춘선의 세번째 인연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씨줄날줄] 신라 향가/임태순 논설위원

    통일신라 경덕왕 때(760년) 해가 두 개 나타나 10일 동안 사라지지 않자 민심이 뒤숭숭했다. 고민하던 왕이 해법을 묻자 신하들은 “인연 있는 스님을 불러 산화공덕(散花功德)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왕은 불전을 차리고 기다리던 중 스님 월명사가 인근을 지나자 기도문을 부탁했다. 월명은 “저는 원래 국선(國仙)의 무리에 속해 있어 향가만 알 뿐 산스크리트어로 된 염불은 잘 모른다.”며 사양했으나 ‘향가도 괜찮다.’는 말에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올렸다. 요즘 말로 “오늘 여기서 산화가를 부르니 꽃이 피어나네/너는 곧은 그 마음 변치 말고 도솔천의 부처를 맞으라.”는 내용이다. 해가 사라졌음은 물론이다. 모든 문학작품이 그렇듯이 월명의 도솔가에도 시대상이 반영돼 있다. 도솔은 미륵보살이 사는 도솔천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다스리다’라는 뜻을 지닌 ‘다살’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도솔가는 변괴를 다스리는 노래인 만큼 일찍이 신라시대 때부터 나라의 어려움을 노래로 극복하려는 전통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국선이라는 말에서 보듯 월명은 화랑이었다. 그러나 삼국통일로 태평성대를 구가하게 된 통일신라로선 화랑의 효용가치가 크지 않았다. 입지가 약화된 화랑 중 상당수는 승려로 신분을 전환해야 했고, 뒤늦게 승려가 된 월명은 법문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무(武)의 성격이 짙은 화랑들이 심신을 수련하면서 시가를 읊으며 정서를 함양한 것도 인상적이다. 그런 배경 때문인지 월명은 죽은 누이를 위한 ‘제망매가’(祭亡妹歌)라는 서정성 짙은 향가도 남겼다. “어느 가을 바람에/떨어지는 꽃잎처럼/같은 나뭇가지에서 났지만/서로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라는 구절은 요즘 감각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신라시대 향가가 발견됐다는 주장이 나왔다. 서울대 이승재 교수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2000년 출토된 목간(木簡·종이 대용으로 글씨를 남긴 나무조각) 가운데 통일신라시대 향가 한 수가 포함돼 있다면서 어제 그동안의 연구결과를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다. 학계에서는 그의 주장에 대해 찬반 양론이 일고 있다. 향가는 향찰(鄕札) 및 이두(吏), 즉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지은 신라의 시가다. 지금까지 삼국유사에 11수, 균여전에 14수 등 25수만 전해지고 있을 정도로 희귀하다. 목간의 글귀가 향가인지 여부는 학계에서 좀 더 검증해야 가려지겠지만 그런 주장이 나왔다는 것만 해도 가슴이 뛴다. 신라인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생겼기 때문이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서울광장] ‘누가 되나’에서 ‘누굴 뽑을까’로/임태순 논설위원

    [서울광장] ‘누가 되나’에서 ‘누굴 뽑을까’로/임태순 논설위원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가까이로는 두 달 앞으로 다가온 국회의원 선거가 있고, 10개월 지나면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그래서인지 국민의 눈과 귀는 온통 선거, 특히 대선에 쏠려 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끝날 때쯤 되면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될 것 같아.’, ‘누가 되지.’ 하고 묻는다. 또 ‘박근혜는 괜찮아.’, ‘요즘 문재인이 뜬다는데 어느 정도야.’, ‘손학규는 어때.’, ‘안철수는 나와 안 나와.’ 등의 질문도 단골 메뉴다. 국민은 왜 누가 되느냐에 그렇게 관심을 가질까. 다음 5년간 국정을 책임질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인 만큼 국민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축제라는 말처럼 그 자체로 재미가 있다. 당내 경선, 여론조사의 등락, 후보자 토론회, 선거유세 등 상황에 따라 판세가 요동치고 수시로 변하니 이보다 더 흥미 있는 드라마도 없을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정치게임을 계속 관전하려면 정보 습득이 필수적이다. 또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궁금증도 작용한다. 직장 동료, 친구 등과의 대화를 통해 정보를 교환하면서 자신의 결정에 대한 판단 자료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음증’은 판단의 잣대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대세에 편승해 적당히 따라가겠다는 편의주의적 발상이다. 여기에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심리도 엿보인다. 누가 되느냐에 대한 관심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다시 도입된 이후 줄곧 이어져 왔으니 4반세기가 지났다. 국민의 대선에 대한 열기나 열정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지만 결과는 지극히 실망스럽다. 새 지도자는 국민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출발하지만 끝날 때가 되면 측근·친인척 비리와 실정으로 대국민 사과를 한다. 여에서 야로, 야에서 여로 정권이 서로 바뀌면 정치문화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새로 정권을 잡은 여당은 ‘그동안 당한 분풀이를 하겠다.’며 더욱 다양하고 교묘한 수법으로 야당을 못살게 군다. 야당도 ‘집권 시절 우리도 당했으니 너희도 맞 좀 봐라.’ 하며 더욱 진화된 방법으로 발목을 잡는다. 이러니 정치의 생산성이 높을 리 없고, 정치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답보 상태에 머물게 된다. 한국 정치가 낙후된 것은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국민에게도 상당 부분 책임이 있다. 유권자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 야당의 투쟁을 훨씬 더 선호한다. 타협하고 절충하면 야합했다느니 야성(野性)을 잃었다며 비난한다. 유권자들이 대화와 타협보다 대결과 충돌에 더 박수를 보내니 싸움국회, 막말국회, 의장석 점거 등의 극한행동이 끊이지 않는다. 의원들은 또 국민이 선거 때 잠깐 정신을 차렸다가 선거가 끝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치매’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위헌소지가 높은 카드수수료법, 저축은행법을 입안할 리 있겠는가. 또 지키지 않을 믿거나 말거나식 공약을 남발하고 후손들을 빈털터리로 만드는 사탕발림 복지정책도 주저 없이 내놓는다.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친 만큼 이젠 좀 유권자들의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누가 되나’에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누굴 뽑을까’로 의식이 전환되어야 한다. 귀찮더라도 공약을 세밀히 분석하고 의원들이 지난 4년간 무엇을 했는지 공부하고 평가해야 한다. 누가 당선이 됐는지 ‘결과’에만 관심을 기울일 게 아니라 당선되고 나서 뭘 했는지 ‘과정’도 따져 봐야 한다. 정치발전은 유권자들의 의식과 궤를 같이한다. 유권자들의 수준이 높으면 정치도 따라가기 마련이다. 그동안 국민은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는 말에 취해 정치를 손가락질해 왔다. 그러나 그 절반의 책임은 우리들에게 있다. 어리석고 변덕스러운 게 또 대중이기 때문이다. 올해 선거는 유난히 ‘표(票)퓰리즘’이 부산을 떨고 있다. 이럴 때는 국민이라도 똑똑해야 한다. stslim@seoul.co.kr
  • [씨줄날줄] 바가지 관광/임태순 논설위원

    영국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는 몇년 전 중견 언론인들의 모임인 관훈클럽 주최 포럼에 나와 영국, 한국, 나이지리아 식당 종업원 중에서 나이지리아 사람이 가장 똑똑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식당 종업원은 식탁을 치우면서 음식 주문도 받고 계산도 하지만, 영국 식당에 들어가면 종업원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밖에 하지 못해 답답하다고 했다. 나이지리아는 한술 더 떠 한국 식당 종업원보다 더 능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식당에서 고객이 느끼는 만족감은 영국이 가장 좋고 다음은 한국, 나이지리아의 순이다. 영국 식당 종업원은 비록 한 가지 일밖에 할 줄 모르지만 살아가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다. 반면 나이지리아는 개개인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번번이 당한다. 부정, 부패 등으로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은 일반적으로 경제력 차이로 구분되지만 사회 시스템이 얼마나 정상적으로 작동하는가도 중요하다. 선진국은 약자나 강자나 제 할 일 하고, 법을 지키면 사회생활을 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사회적 갈등도 중재, 조정 등 정해진 절차를 따르면 공평하고 투명하게 해결된다. 부정, 비리가 개입될 소지가 적은 만큼 사회적 거래비용도 적게 든다. 이른바 저비용 고효율 사회다. 이는 물론 사회 구성원 간에 신뢰가 쌓여 있기에 가능하다. 그래서 미국의 사회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사회발전과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신뢰”라면서 “경제발전은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얼마나 잘 보존하고 축적해 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바가지 관광이 고개를 들고 있다. 남대문시장 포장마차에서 일본인 관광객에게 김치전에 맥주 2병을 5만원에 팔고, 콜밴은 2㎞밖에 가지 않았는데도 33만원을 내라고 횡포를 부렸다고 한다. 중국·일본인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영글고 있는 관광대국의 꿈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다. 바가지가 잦아지면 외국인 관광객은 우리나라를 불신하고 더 이상 찾지 않게 된다.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섰는데도 이런 후진적인 바가지 행태가 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관광산업은 고용효과가 크고 부가가치가 높은 대표적인 서비스 산업이다. 서비스업은 친절, 봉사 등 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한번 무너진 신뢰는 다시 쌓으려면 몇배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만큼 업주들도 눈앞에 이익에 연연하지 말고 긴 안목을 가질 필요가 있다. 관광공사 등 당국도 관련 업소를 대상으로 교육을 철저히 해야 한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길섶에서] 책상정리/임태순 논설위원

    책상 주위에 어지럽게 쌓인 자료를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개운치 않았다. 언제 한번 정리해야 할 텐데 마음만 먹다가 추위가 물러가고 봄기운이 감도는 것을 핑계로 미뤘던 책상 정리에 나섰다. 여기저기서 모아놓은 자료들을 살펴보니 쓸 만한 게 그리 많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유용하지 않거나 무의미해진 것들이 태반이었다. 정리가 끝나자 남은 것은 절반도 안 됐다. 서랍에 있던 명함에도 손을 댔다. 이미 현업을 떠난 사람도 많았고, 명함을 봐도 오래전이어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명함도 절반가량이 휴지통 속으로 들어갔다. 곧 이사를 가야 한다. 문득 다락 속에 처박아 둔 짐들이 생각났다. 버리기 아까워서, 또 언제 쓸지 모른다며 버리지 않고 모아뒀지만 지난 6년간 다락에서 내다쓴 기억이 없다. 쓸데없는 집착, 욕심으로 인해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 안고 살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박경리 선생은 돌아가시기 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시를 남겼는지 모른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씨줄날줄] 바보 3주기/임태순 논설위원

    바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지적 능력이 떨어져 제 앞가림도 못할 때 흔히들 바보라고 놀린다. 그러나 바보가 항상 남에게 속고 이용당하고 놀림만 당하는 것은 아니다. 똑똑한 사람의 꾐에 빠져 제 것을 나누어 주고, 상황변화에 대처하지 못해 앞만 보고 가지만 오히려 강자가 되고 승자가 된다. 좌고우면하지 않고 한 길을 가는 ‘바보의 역설’이다. 이러한 바보의 양면성은 이솝 우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먹이를 물고 다리를 건너다 물가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뛰어드는 ‘어리석은 바보’ 개가 있는가 하면 토끼와 경주를 벌여 이기는 ‘우직한 바보’ 거북이도 있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바보 이반’에 나오는 이반도 우직한 바보다. 악마는 잘난 형들을 괴롭히고 골려 주지만 묵묵히 일하는 이반에겐 끝내 당해내지 못하고 도망가고 만다. 우리 주위엔 우직한 바보가 적지 않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바보 노무현’이라고 불렸다. 부산에 출마하면 떨어질 줄 알면서도 눈치 보지 않고 여러 번 나가 고배를 마셨다. 결국 지역감정을 타파하려는 진정성이 국민의 마음을 움직여 그를 대통령의 길로 이끌었다. 정계의 ‘원조 바보’는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난 김근태 전 의원이다. 그는 옛 민주당 경선 때 스스로 정치자금법을 위반했다고 고백했다. 말 바꾸고 불의와 타협하는 현실에서 그는 손해 볼 줄 뻔히 알면서도 원칙은 양보하지 않는 바보였다. 지난해 숨진 애플사의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도 바보 반열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2005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 축사를 하면서 ‘항상 갈망하고 우직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한눈 팔지 않고 파고드는 집요함이 없었다면 정보기술(IT)분야에서의 그의 성공은 요원했을 것이다. 노자는 ‘대지약우’(大智若愚)라고 했다. ‘큰 지혜는 어리석음과 같다.’는 말이다. 버릴수록 채워지고 아낌없이 베풀수록 더 많은 것이 돌아오는 게 세상이치다. 바보가 아니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큰 깨달음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파스텔로 듬성듬성 그린 자신의 자화상에 ‘바보야’라고 적어놓은 자칭 바보다. 약자와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사랑을 실천해온 평생 바보였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도 16일이면 어언 3년이 된다. 김 추기경 선종 3주기를 맞아 서울 명동 등지에서 자선음악회, 사진전, 전시회 등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린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그가 더욱 그리워진다.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 [씨줄날줄] 상담원의 눈물/임태순 논설위원

    어느 기업에 매일 찾아와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이 있었다. 제품에 불만이 있어서인가 하고 교환, 환불 등으로 달래거나 봐달라며 사정하고 위협해도 통하지 않아 전문 상담사의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며칠 지나지 않아 골칫거리 고객은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상담사에게 비법을 물어보니, 회사에 불만을 이야기했는데 담당자가 들어주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며 자신은 단지 그의 이야기를 죽 듣기만 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사회가 복잡다단해지면서 상담 수요가 늘고 있다. 업무 또는 조직 구성원과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과 관련, 스트레스를 받거나 강박관념에 시달려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소통 단절 또는 소외로 인해 이야기 상대를 찾는 경우도 늘고 있다. 상담자의 제1덕목은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경청’(傾聽)이다. 물론 노련한 상담가는 상대방의 말에 담긴 표면적인 메시지 외에 말할 때의 몸짓, 감정 등 이면의 내용까지 읽지만 초보 상담자는 내담자(談者)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상담의 절반은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실생활에서 친구나 마음이 통하는 동료가 자신의 고민이나 불만을 들어주기만 해도 심리적 위안을 얻는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마음에 공감하고 감정을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감정 교류를 통해 서로 마음이 통하는 ‘라포’(Rapport)가 형성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경제난 등으로 살기가 어려워지면서 자살자들이 늘고 있다. 자살충동자 상담의 경우 익명으로 신속하게 접근할 수 있어 전화상담이 일반적이다. 자살 상담도 물론 경청과 공감이 절대적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어려운 처지를 이해해 주어야지, 자살행위는 이기적이고 무책임하다며 논리적으로 맞서는 것은 금물이다. 서울시 자살예방센터 상담원들이 상담 후유증으로 ‘남모를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한다. 자살충동자와 감정이입을 하다 보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그들을 도와주지 못한 데 대한 무기력감·죄책감 등으로 자책한다는 것이다. 내담자와 공감대를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심리적 고뇌에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래서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상담자들에게 전문가의 심리 치료를 받게 한다. 오랜 시간 상담으로 인해 심신이 피로해지는 데다 내담자의 세계에 상담자가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원봉사 또는 비정규직 형태로 상담원을 꾸려가는 우리나라 현실에선 너무 먼 이야기인가. 임태순 논설위원 stsl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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