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한국 장보고에서 21세기까지](10회)
신라 8대 아달라왕(阿達羅王)때(158년)의 일이었다.연오랑(延烏郞)이라는바닷가에 사는 사내가 해초를 따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가 움직여 일본땅으로데려갔다. 사람들은 놀랍고 신기해서 그를 데려다 왕으로 삼았다.남편을 찾아 바닷가를 헤매던 세오녀(細烏女)는 바위에 남편의 신발이 있는 것을 보고,그 위에 올라타자 다시 바위가 움직여 세오녀를 일본땅으로 데려갔고 그녀는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다.그러자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삼국유사에 기록된 이 이야기는 해와 달을 관장하는 종교집단이 배를 타고 일본열도에 진출해 소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을 표현한 설화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얘기가 일본서기에도 나온다.수인(垂仁) 3년에 신라왕자 아메노히보코(天日槍)가 배를 타고 왔는데 7가지 보물을 가지고 왔다고되어 있다.‘고사기’에는 역시 수인 2년에 임나국의 소나가시치가 귀국도중신라왕이 길을 막고 보물을 가로챘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천일창은 바로 시마네현의 이즈모지역에 정착한 세력이다.이즈모는 일본신화에서는 아마테라스신에 대항한 스사노오노미코도로 대표되는 강력한 집단의 근거지였다.
신라계인 그 신이 하강한 도리가미(鳥髮)의 땅은 이즈모 최대의 철산지였다.결국 연오랑 등의 신라계 진출자들은 발달된 제철기술을 갖고 이곳에 정착하여 문화를 발전시키고,질좋은 무기와 농기구를 사용하면서 주위를 복속시켜 나갔다.고진다니(荒神谷)에서는 350여개의 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지금은 바닷가 부근 한적한 마을이 되어버린 옛 이즈모국 평원에는 방분(方墳)전방후원분 등이 많이 있다.그 고분들에서는 청동거울과 철촉 구슬 토기류등 우리문화와 관련있는 것들이 출토됐다.
그러면 신라인들이 건너다닌 일본항로는 어떠했을까? 연오랑 세오녀 부부처럼 영일만,박제상처럼 울산(栗浦),대왕암이 있는 감포를 출발하여 동해 남부를 횡단한 다음에 혼슈 남부인 돗토리현,시마네현,야마구치현,그리고 후쿠이현에 도착하였다.
이즈모지역은 울산이나 포항과 비슷한 위도(북위 35,5도)이므로 동해남부나남해에서 리만한류를 타다,북위 30도 부근에서 대한난류를 횡단하여 본류에타면오키제도를 경유해 도달할수 있다.계절풍을 활용한다면 항해는 크게 어렵지 않다.
필자는 광개토대왕이 신라를 구원하려고 남부지방까지 내려왔을 때 고구려군이 일본열도로 진출했을 가능성을 주장한 바 있는데 당시 그들은 이 동해남부 횡단항로를 택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북한학자와 몇몇 일본학자들은 이즈모지역에 고구려 영향이 강했다고 주장한다.후대에는 발해인들도 이곳에도착했다.이 항로는 가을과 겨울에 더 적합하다.모험심이 강했던 신라인들은 낮은 수온과 강한 북서풍이 일으키는 거친 파도를 헤치며 항해했다.반대로이즈모에서 연안을 항해,규슈 가까이 내려간 다음 대마도로 항해하여 북동진하는 해류에 올라타면 신라의 해안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면 신라땅과 일본열도를 오고 가며 생활한 놀랄만한 개척정신의 소유자들이 사용했던 항해도구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신라왕자 천일창은 배(艇)을 타고 항해하면서 7가지(고사기에는 8가지)의 신령스런 보물을 가져왔다.구슬 2개,청동거울,천(布)등인데,이것들을 방위측정기,풍향,풍속측정기,조류측정기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특히 청동거울은 가장자리에 표시되어 있는 12지신을 지표로 삼아 방위를 측정하는 나침반 대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茂在寅男 ‘고대인의 항해술’).필자는 뗏목항해를 할 때마다 이러한 가능성을 실험하였다.
이렇게 신라계 이주민들은 시마네,돗토리 등 지역에 정착한 다음 다시 여러 지역으로 진출하였다.한 갈래는 척량산맥을 넘어 기히(吉備,오카야마지방)로 가 거대한 전방후원분을 축조하였다.오카야마시 근처에는 시라기(白石)마을이 있다.기히지방에는 산처럼 보이는 전장 350m의 쓰쿠리야마(造山)고분을 비롯해 약 4,000기의 고분이 분포돼 있다.특히 오쿠지역은 신라적인 요소가 강하다.츠키야마 고분에서는 말 재갈과 행엽 등 말의 장식품이 출토되었는데 경주의 출토품들과 유사하다.근처 구로야마 2호분에서도 초기 신라계 토기가 많이 나왔다.
다른 한 갈래는 연안항해를 하며 북상해 후쿠이현의 쓰루가 지역에 도착했다.쓰루가(敦賀)는 원래 츠누가(角鹿)라고 불렸는데,머리에 뿔이 난 사람들이 왔기 때문이라고한다.이들은 바로 투구를 쓴 가야인들이다.그러나 신라인도 많이 들어왔다.가장 큰 만(灣)인 와카사만에는 신라를 나타내는 시라기마을(白木浦)이 있고,시라기신사(白木神社)가 있다.지금은 40여호 남짓한 작은 마을이지만 예전에는 신라인과 가야인,고구려인들이 들어온 항구이다.특히 발해인들은 이곳을 주요한 도착 거점으로 몇 개월씩 머물면서 장사를 했다.쓰루가에는 이곳 말고도 ‘白石신사’‘白城신사’‘信露貴彦신사’등 한자는 다르지만 발음은 ‘시라기’인,신라의 조신(祖神)을 모신 신라신사들이 많다.
가야나 백제계 세력은 초대천황인 짐무(神武)의 동정(東征)설화처럼 규슈를 출발하여 좁고 물살빠른 세토내해에서 힘든 항해와 숱한 전투를 치러가면서 어렵게 오사카만에 도착했다.그 항해에 비하면 이즈모지역에 도착한 신라계는 연근해 항해를 하여 쓰루가에 거점을 확보한 후 다시 동으로 이동,비와(琵琶)호의 곁을 지나 단거리로 야마도지방(현재의 오사카,나라,아스카지역)에 도착할 수 있다.
동해남부를 항해하여 이즈모지역의 해안가에 소국을 건설했던 신라계 진출자들은 생각보다 일찍 야마도지역에 정착하여 일본의 고대국가가 형성되는데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尹明喆 동국대 겸임교수] *죽은 천연기념물도 보호대상 죽은 천연기념물은 보호대상인가 아닌가.
결론은 당연히 보호대상이다.
지금까지 죽은 천연기념물을 놓고 논란이 많았다.종전의 문화재보호법에 국가지정 문화재의 현상을 변경하거나 그 보존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행위는 허가를 받도록 돼 있으나 생물만 보호대상으로 해석해왔기 때문이다.이에 따라 검찰에서도 종종 박제범 처벌을 놓고 문화재청에 문의를 해왔다.
그러나 이제 이런 논쟁에 종지부가 찍어졌다.개정된 문화재법에서 보호대상으로 못박았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최근 개정 문화재법 설명자료를 배포하고 죽은 천연기념물을 표본·박제하는 경우에도 문화재청장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고 밝혔다.
이는 죽은 천연기념물 조수류도 법상의 보호대상이라는 것을 명확히 한 것으로 천연기념물의 밀렵행태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법 시행전에 보유하고 있는 박제나 표본은 오는 12월31일까지 관할 시·군·구에 신고하면 허가받은 것으로 경과규정을 뒀다.
신고해야 하는 것은 조류는 크낙새·따오기·고니·황조롱이·매·올빼미등 40종,포유류는 반달가슴곰·사향노루 등 6종,곤충은 장수하늘소 1종,어류는 무태장어·어름치 등 3종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이번 조치로 80년대 중반 자취를 감쳤던 세계적 천연기념물 크낙새가 신고되기를 기대했다.
한편 개정 법은 정식 허가를 받아 만든 천연기념물의 박제나 표본은 수출할수 있도록 했다. 원앙을 사육,수출하는 농가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또 화석등 고생물자료와 천연동굴도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 발굴하도록 했다.
처벌 규정도 대폭 강화됐다.허가없이 천연기념물을 박제 또는 표본으로 제작했거나 불법으로 손상한 것을 알고도 이를 취득·운반·알선했을 경우에는2년이상의 징역이나 2,000만원이상 1억5,000만원이하의 벌금을 물도록 했다.
또 신고없이 박제·표본 등을 갖고 있거나 화석 등 고생물자료와 천연동굴을 발견하고 신고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500만원이하의 과태료를 내도록 했다.
임태순기자 stsl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