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방북] 수교협상 물꼬 틀듯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22일 두번째의 정상회담을 통해 북·일 수교 가능성을 본격 타진한다.2002년 10월 수교협상이 납치가족 등의 문제로 중단된 지 1년 7개월 만의 일로,두 정상의 만남은 두 나라는 물론 한반도 평화,나아가 동북아 신질서 태동을 위한 중요한 움직임으로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과연 두 정상간 두번째 북·일 정상회담이 동북아 화해와 평화의 흐름에 물꼬를 트는 계기로 작용할까.도쿄 외교가에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기대섞인 전망까지도 나오고 있다.
|도쿄 이춘규특파원|북·일 수교로 가는 길은 한마디로 “이제 마라톤의 중간쯤을 달리는 형국”이라는 것이 일본 언론과 전문가들의 분석이다.예기치 못한 돌발변수가 많다는 얘기다.일본 언론들은 한국이 1951년 일본과 수교협상을 시작,14년이 걸려 1965년 양국 국교가 이뤄진 점과 비교하며 신중론을 편다.
북한과 일본은 1991년1월 1차 국교정상화 교섭을 시작한 지 13년이 지났지만 핵과 미사일이라는 높은 장벽이 있어 험난한 길이 예상된다는 것.지난 14일 양국 정상회담 발표 직후만 해도 순풍을 타는 듯하던 양국간 교섭이 “북핵·미사일 문제 해결이 전제되지 않은 양국간 수교는 곤란하다.”는 미국 입장이 알려지며 주춤거리는 것도 협상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북한은 경제,일본은 북핵 중점
이번 2차 정상회담에서 북한측은 경제지원,일본은 납치피해 잔류 가족 문제는 물론 ‘북핵·미사일 문제의 포괄적 해결’을 목표로 협상을 진행해 왔다.일본에서는 “잔류가족 해결은 최소한의 성공요건일 뿐,핵·미사일의 포괄적 해결을 위한 1보라도 반드시 내디뎌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북한측은 일본이 대북송금 금지 등으로 북한의 목을 죄고 있기 때문에,이를 해소해 경제지원을 얻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상황이다.동북아 긴장을 완화,미국과의 핵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의지도 엿보인다.
2002년 1차 북·일 정상회담 때는 김정일 위원장이 일본인 납치 사실을 시인,‘북·일 평양선언’이라는 역사적인 성과물에도 불구하고 국내는 물론 외교무대에서도 위기를 맞았듯이 이번 회담도 돌발상황 발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양국 내부 사정,회담막판 변수
북한과 일본 양국 강경파들은 두 정상의 급속한 접근에 상당히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상황이다.예상대로 수교협상이 6월에 재개된다면 강경 해결책을 고집했던 양국 강경파의 입지가 급격히 축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번 1차 정상회담에서 납치를 시인하고 사과,군 장성과 당 간부 등 원로급들로부터 엄청난 불평을 들었던 김 위원장으로서는 이번 회담서는 ‘실수없이(?)’ 가시적 성과물을 반드시 보여주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경제지원이든,알맹이 있는 과거 문제 청산이든 당·정 강경파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게 김 위원장의 회담에 임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칠 것같다.
고이즈미 총리는 더 복잡하다.1차 북·일 정상회담 때도 경제지원의 군사비 전용 가능성 등을 제기하며 대북접근 신중론을 폈던 아베 신조 현 자민당 간사장 등 강경파들은 이번에도 “조기 국교정상화에 신중해야 한다.”며 여전히 신중론을 펴고 있다.고이즈미 총리로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반드시 보여줘야 할 형편이다.
특히 7월의 참의원선거,자신의 국민연금 미납 파문의 계속 등 고이즈미 총리를 무겁게 하는 문제는 산적해 있다.자민당 인사들의 도덕성 위기도 심화중이다.이때문에 “고이즈미 총리가 정국위기 탈출을 위해 이번 정상회담에서 무리수를 둘 우려가 있다.”고 경계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일본·미국,신경전의 진실은
2002년 1차 북·일 정상회담을 미국측의 경고 속에 강행했다가 2003년 1월 북한이 농축우라늄 핵개발에 착수했다고 미국측이 밝히고,이어 북한이 핵확산방지조약(NPT)에서 탈퇴하는 과정서 미국과 불편한 관계에 빠졌던 일본측은 2차회담에서는 미국측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다.
일본 정부 고위관계자들은 틈나는 대로 일련의 북·일 교섭과정을 미국에 상세히 전하면서 입장을 조율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지난 4월 초 중국 다롄에서 북측 고위인사와 북·일 교섭에 참석했던 자민당 히라사와 의원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롄회담을 전후,(함께 참여했던 고이즈미 총리의 맹우)야마사키가 미국에 정확히 보고하고 있으며,미국도 우리측 회담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측은 북·일 정상회담에 기대보다 우려가 강한 분위기다.리처드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 등 고위관리들은 “핵문제 해결이 북·일 국교정상화의 분명한 전제조건”이라며 납치가족 송환에 치중한 일본측에 제동을 걸었다.이번 회담의 성과보다는 ‘위험성’을 우려하는 기류다.
근본적으로 미국은 ‘북한 고립화 전략’이 흔들릴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으로 외교전문가들은 분석한다.미국과 외교기조를 같이 해 온 일본이 북한과 가까워지면 미국의 동북아 외교전략에 차질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일본은 ‘독자외교’및 동북아 안정 기여라는 일거양득을 노리는 기류다.다만 조시 W 부시 미 대통령이 11월 대통령선거까지는 핵문제 해결을 서두르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는 점은 일본측의 어깨를 다소 가볍게 해주는 대목이다.
아울러 미국이 2002년 북·일 정상회담 움직임이 있을 때 ‘극비자료’(북한의 농축우라늄 핵개발로 추정)를 보여주며 정상회담 자제를 요청한 걸로 알려졌듯이 이번에도 양국의 실제 물밑 움직임은 여전히 베일속에 가려 있다.
taein@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