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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집값은 선진국형?/이두걸 논설위원

    [씨줄날줄] 집값은 선진국형?/이두걸 논설위원

    10년 전만 해도 한국을 선진국으로 분류해야 하는가 여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2008년 출범한 주요 20개국(G20)에 참여했지만 환경이나 농업 분야 등에서는 개발도상국 지위를 상당 기간 유지했던 것도 ‘반 선진국 반 개도국’이라는 한국의 모순된 특성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1인당 개인소득이나 삶의 질 등은 여전히 선진국 수준에 못 미치는 것도 사실이다.하지만 집값만 보면 우리는 엄연한 ‘선진국’이다. 지난해 국내 주택 시가총액은 4022조 5000억원으로 1년 전보다 7.6% 늘었다. 1730조 4000억원인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2.32배에 달했다. 전년 GDP 대비 주택 시가총액 배율인 2.28배보다 높아진 것은 물론 관련 통계가 작성된 1995년 이후 사상 최고치다. GDP 대비 주택 시가총액 배율만 따지면 주요 선진국보다도 높다. 2015년 기준 한국이 2.24배로 미국(1.3배), 일본(1.8배), 캐나다(2.0배) 등을 크게 앞지른다. 물가상승률과 실질 GDP 성장률을 합친 명목 GDP 상승률이 5% 정도인 데다 최근 ‘미친 집값’ 추세를 감안하면 올해 격차는 더 벌어질 공산이 크다. 물론 한국은 프랑스(3.2배), 호주(3.0배) 등보다는 낮은 수준이지만 이 국가들은 2000년대 이후 꾸준히 집값이 상승한 데다 인구당 주택 수가 우리보다 높다. 서울만 따지면 이런 경향은 더욱 뚜렷해진다. 최근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서울의 지난해 3분기 ‘소득 대비 집값 비율’(PIR)은 11.2를 기록했다. 런던(8.5)이나 뉴욕(5.7)은 물론 도쿄(4.8), 싱가포르(4.8) 등보다 높았다. PIR은 가구 평균 연소득으로 특정 지역의 집을 사는 데 걸리는 시간을 뜻한다. 서울에서 내 집 마련을 하려면 11년간 말 그대로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한다는 얘기다. 홍콩(19.4), 베이징(17.1), 상하이(16.4) 등 중화권 도시 정도만 서울보다 높다. 강남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아크로리버파크 전용면적 84.9㎡가 최근 30억원까지 팔렸다고 한다. 지난달 초엔 전용 59㎡가 24억 5000만원에 팔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3.3㎡(1평)당 1억원 시대를 연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집값이 비싼 미국 뉴욕 맨해튼의 고급 아파트 시세와 비슷하다. 강남을 진원지로 한 부동산 열풍이 강북과 수도권까지 번진 상태다. 대구와 광주 등에서도 급등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정부가 쏟아낸 온갖 처방은 외려 집값 폭등만 부채질했다. 정부는 추석 전까지 공급 확대 예정지역과 임대등록자 규제 강화, 종합부동산세율 인상 등 추가 대책을 내놓을 예정이다. 국민들이 집단적으로 겪고 있다는 ‘집값 우울증’이 과연 사그라질 수 있을까.
  • [씨줄날줄] 장하성의 ‘입’/이두걸 논설위원

    [씨줄날줄] 장하성의 ‘입’/이두걸 논설위원

    최근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대중 앞에 나서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정확하게는 지난달 23일 2분기 가계소득동향이 발표된 이후다. 그러나 정부와 청와대의 입장을 홍보하고 대변하기에는 부적절한 발언들이 적지 않다. 장 실장은 어제 한 라디오 방송에서 여당의 종합부동산세 과세 강화와 관련해 “강남에만 세금을 올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부정적인 의사를 밝혔다. 심지어 “고가 주택에 대해서는 정부가 다 제어할 수 없고, 제어할 이유도 없다. 모든 국민이 강남에 가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터전이 있지도 않다”면서 “저도 거기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라며 친절하게 부연했다.문재인 정부는 사람 중심 경제나 소득 양극화 해소를 표방하고 있다. 이는 소득뿐 아니라 부의 불평등을 정책과 세제 등으로 해소해야 가능하다. 장 실장의 발언은 이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계층의 사다리가 끊어지는 순간 경제의 활력도 멈춘다’는 당연한 진리도 중요치 않은 것처럼 보인다. ‘삶의 터전’ 운운하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장 실장이 광주 출신에 강북 청와대로 주로 출근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본인의 원래 삶의 터전이 강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모든 국민이 강남에 가서 살려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도대체 어떤 근거로 말하는 건지 알기 어렵다. ‘흙수저’는 접하기 어려운 호남 명문가의 ‘금수저’ 출신의 발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우리 경제에 대한 설명도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그는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도 성장률이 상당한 상위권에 속한다. 위기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했다. 경기와 관련해서는 “온라인 매출이 급격히 늘며 골목상권을 압박하고 있다. 골목상권이나 편의점 점주들이 느끼는 체감 경기가 매우 안 좋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비와 투자, 고용 등 거의 모든 지표가 빨간불인 데다 경기를 알려주는 동·선행지수 순환변동치도 고꾸라지고 있다. 올 2분기 경제성장률은 전기 대비 0.6% 증가해 2.9%인 정부 전망치 달성도 쉽지 않다. 체감경기 하락의 원인을 소비구조 변화에서 찾는 것도 학자의 발언에 가깝지 청와대 정책실장이 할 말은 아니다. “최저임금 인상폭을 보고 나도 놀랐다”(지난 3일 JTBC 인터뷰)는 식의 ‘유체이탈식’ 화법이 비판받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구조 문제 등까지 감안해 현실의 과제를 해결하고, 그 결과가 좋지 못하면 책임을 지우기 위해 1억 2815만원(올해 기준)의 장관급 연봉을 받는 것이다. 고용지표 악화 등을 두고 ‘직을 걸고 임하라’는 문 대통령의 ‘경고’ 시한이 언제까지일지 궁금하다.
  • [서울광장] 더 담대한 세제개혁을 기대한다/이두걸 논설위원

    [서울광장] 더 담대한 세제개혁을 기대한다/이두걸 논설위원

    2009년 초 당시 이명박 정부는 노후차 교체 세제지원책을 내놨다. 새 차를 사면 개별소비세와 취득·등록세 등 최대 250만원의 세금을 깎아 준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누구도 재벌 특혜 논란을 제기하지 않았다. 한국 경제가 망하는 줄 알았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천하’의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했고 미국 자동차 ‘빅3’ 업체들은 도산 위기에 몰려 미국 정부의 긴급 자금에 연명하고 있었다. ‘공공기관 대졸 초임 30% 삭감’ 같은 정책도 버젓이 시행될 정도였다. 당시 한국 경제를 지탱했던 유일한 동아줄은 재정건전성이었다. 그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33.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90.0%를 크게 밑돌았다. 이후 4대강 사업 등에도 불구하고 국가부채 비율은 39.5%의 양호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당장 빚을 지면 후세가 고생한다’는 간명한 진리를 누구나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정부는 내년부터 확장적 재정정책을 본격화한다. 급격한 고령화나 통일 등을 감안했을 때 나라 곳간은 충분히 채워져야 한다. 향후 경제가 더 나빠졌을 때 예금처럼 써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지금은 적금을 당겨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상황이 녹록하지 않다. 고용 부진과 소득 양극화 등 구조적인 문제에 직면한 데다 서비스업 등 산업 구조조정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 사정이 어렵다고 무조건 지갑만 닫는 건 하수(下手)의 정책이다. 제대로만 쓴다면 재정은 미래를 위한 투자다. 국제통화기금(IMF)조차 “국가채무를 GDP 대비 45% 수준으로 높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권고할 정도다. 나라 살림의 최선은 쓸 돈은 쓰면서도 곳간은 튼실히 가져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돈을 덜 쓰거나 세수를 통해 돈을 더 많이 거두면 된다. 그러나 장기적인 나라 가계부인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는 세수 확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내년 국세수입은 지난해 법인세 인상 등의 효과로 11.6% 증가하지만 2020년 이후에는 증가율이 4% 초반대로 뚝 떨어진다. 통합재정수지가 2020년 이후 적자로 전환되고 GDP 대비 국가채무 비중이 40%를 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중산층을 뺀 고소득층만의 증세는 ‘언 발에 오줌 누기’ 격이다. 2016년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이 펴낸 ‘소득수준별 세 부담 평가와 발전방향’ 보고서에 따르면 명목소득세율 3% 포인트 인상을 ‘초고소득층’, ‘중산층 이상’, ‘전 계층’에 적용했을 때 각각의 세수 증대 효과는 6.3%, 23.7%, 8.6% 등으로 분석됐다. 내년 종합소득세와 근로소득세 추정치가 대략 55조원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중산층 이상 증세는 13조원, 전 계층은 21조원의 세수가 늘어난다. 반면 초고소득층만 적용했을 땐 3조원 남짓에 그친다. 소극적인 세제정책은 국정운영의 핵심 과제인 소득 양극화 해소와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있다. 대표적인 소득분배 지표인 균등화 처분가능소득 5분위 배율은 지난 2분기 5.23을 기록했다. 10년 만에 최대치다. 균등화 처분가능소득은 실제 소득에서 세금을 떼거나 연금을 지급하는 등 국가의 재정정책이 적용된 뒤의 소득을 말한다. 소득 상위 20%인 5분위의 균등화 전후 소득 증가율은 각각 10.3%, 10.2%로 변함이 거의 없었다. 국가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재정정책이 상위층을 대상으로는 전무하다는 뜻이다. 고소득층의 소득 급증이 최근 서울 아파트 가격의 폭등으로 이어졌다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다. 물론 증세는 섣불리 접근해서는 안 된다. 세금을 많이 걷을수록 민간의 경제 활력은 줄어든다. 지지율도 떨어질 수 있다. 보유세 면에서는 다행스럽게도 3주택 이상이거나 초고가 주택에 대해 종합부동산세 도입을 검토한다는 목소리가 여당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는 서민 중산층을 기둥으로 삼는 ‘촛불 정부’의 모습으로는 부족하다. 빈부격차는 천정부지로 벌어지고 아파트 가격은 고공행진을 계속하는 상황에서는 창업 욕구는 떨어지고 출산은 미루기 마련이다. 증세는 더이상 미룰 수 있는 숙제가 아니다. 소득주도성장을 위해서는 중부담 중복지를 통한 보편적 복지가 필수적이다. 복지확충 없는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서민 중산층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현실을 이미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다행히 앞으로 1년 9개월간 선거가 없다. 중산층 이상의 보편증세를 위해 여론을 설득할 시간은 충분하다. 그래야 집토끼도 떠나지 않으면서 우리를 튼튼히 만들 수 있다. 더욱 담대한 개혁을 기대한다. douzirl@seoul.co.kr
  • [씨줄날줄] 밥상물가/이두걸 논설위원

    [씨줄날줄] 밥상물가/이두걸 논설위원

    40도 안팎까지 치솟는 폭염은 밥상물가에 치명적이다. 고온다습한 날씨가 이어지면 채소나 과일의 생육이 부진해지는 탓이다. 불볕더위로 수확을 제때 하지 못하는 것도 공급 감소로 이어진다. 올 7월 생산자물가지수는 전월 대비 0.4% 상승한 104.83을 기록했다. 2014년 9월(105.19) 이후 최고치다. 시금치와 배추 등은 두 배 안팎으로 뛰었다. 농산물 가격만 전월 대비 7.9%, 농림수산품 전체는 4.3% 상승했다. 1년 전과 비교한 채소류 물가는 1.0% 하락했지만, 이는 지난해에도 채소값이 워낙 높았기 때문이다. 올해 전까지 사상 최악의 무더위로 평가받는 1994년에는 채소류의 전년 대비 물가상승률은 31.5%를 기록했다.최근의 밥상물가 상승은 추석 물가 급등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사과 가격은 10㎏ 아오리 품종이 이번 주 4만원을 넘기면서 1주일 만에 2만원 가까이 상승했다. 23일 태풍 솔릭이 한반도에 상륙하면 물가가 추가로 오를 수 있다. 차례상에 올릴 수확을 앞둔 사과나 배, 포도 등 모두 위험하다. 80㎏당 17만 7740원으로 전년 동월 대비 36% 이상 치솟은 쌀값 상승도 불 보듯 뻔하다. 내수 불황과 밥상물가 상승이라는 이중고를 겪으며 추석을 보내야 할 수도 있다. 폭염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 국립해양대기국(NOAA)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지난달에만 하루 최고기온 기록이 3538번이나 다시 쓰여졌다. 지난달 8일 미국 데스밸리에서는 52도, 5일 알제리에서는 51.3도가 관측됐다. 여름 최고기온이 20도 안팎에 머무는 북유럽도 30도를 웃도는 더위에 시달렸다. 밥상물가 상승은 ‘반복될 미래’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름에는 동남아 못지않은 폭염이 계속되고, 겨울에는 반대로 한파가 불어닥치는 기후의 양극화가 한반도에서 진행되고 있어서다. 온실가스 배출량의 증가에 따라 지구온난화가 진행되면서 고위도 지역의 온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그 결과 찬 공기와 더운 공기를 골고루 섞는 제트기류가 약해지는 바람에 북반구의 열이 흩어지지 못하면서 폭염이 발생했다. 겨울철에는 반대로 약화된 제트기류 탓에 북극의 찬 공기가 그대로 내려오면서 한파로 이어진다. 기후변화의 주범은 기존 선진국들이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구온난화가 ‘과학적 사기’라고 주장하며 온실가스를 줄이자는 파리기후협약에서 지난해 탈퇴했다. 그가 더위와 추위에 동시에 잘 적응하는 신인류를 기대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후대에 ‘반(反)생태적’이라는 수식어가 그의 이름에 뒤따를 것이라는 예측은 어렵지 않다. douziri@seoul.co.kr
  • [씨줄날줄] 왼손잡이/이두걸 논설위원

    [씨줄날줄] 왼손잡이/이두걸 논설위원

    “하지만 때론 세상이 뒤집어진다고/그런 눈으로 욕하지 마/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난 왼손잡이야!”남성 듀오 패닉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가요계를 대표하는 뮤지션이다. ‘혁명의 시대’가 가고 ‘문화의 시대’가 도래한 당시 패닉은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소리 따라 영원히 가겠다”(달팽이)며 당대 청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왼손잡이’에 담겨 있다. 이 곡을 작사 작곡한 이적은 억압받는 성 소수자의 삶을 왼손잡이에 빗대 노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날것의 목소리로 자신들의 잇속만 챙긴 살진 손가락들과 권위들에 정확히 손가락을 겨눈 것”(김윤하 음악평론가)이라는 비평은 노랫말만큼이나 적확하다. 이 곡이 담긴 패닉 1집이 대중음악 100대 명반 중 하나로 꼽히는 건 이들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징표다. 어제는 ‘국제 왼손잡이의 날’이었다. 인류의 10% 안팎이 왼손잡이로 추정된다. 왼손잡이가 가장 각광받는 분야는 야구다. ‘좌완 파이어볼러는 지옥에서라도 데려온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 등이 대표적인 왼손잡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 대왕, 뉴턴,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인류 역사의 ‘거인’들도 여기에 속한다. 폴 매카트니와 지미 헨드릭스 등 팝 음악의 거장들도 왼손으로 기타를 쳤다. 왼손잡이일수록 오른손잡이보다 좌뇌와 우뇌를 균형 있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왼손잡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부드러운 소수자’였다. 영어에서 왼쪽(Left)은 ‘버려졌다’는 뜻인 반면 오른쪽(Right)은 ‘옳다’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말의 ‘바른손’은 오른손의 다른 말인 반면, 왼손은 ‘비뚤어지다’는 뜻의 ‘외다’에서 따왔다. 중견 소설가 이순원씨의 작품 ‘19세’ 속 주인공 ‘정수’는 우수한 성적임에도 하루빨리 독립하기 위해 상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하지만 정수는 도중에 학교를 그만둔다. 왼손잡이였던 그가 오른손잡이용 주판을 능숙하게 다루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순원씨는 몇 해 전 한 칼럼에서 “왼손잡이들은 오른손잡이들보다 수명이 5년쯤 짧다. 오른손잡이 위주의 세상에서 왼손잡이는 일상 자체가 스트레스고 순간의 일들 모두가 해결 없는 차별”이라고 썼다. 효용성의 명목으로 왼손잡이들에게 ‘다름’을 ‘틀림’이라고 강요한 건 아닌지,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라테스처럼 자신만의 잣대로 그들의 머리와 다리를 자른 게 아닌지 ‘오른손잡이’들은 모두 반성할 일이다. douziri@seoul.co.kr
  •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자존심 대신 현실감각으로 북핵 국면 주도해야… 野와 협치는 필수”

    [논설위원의 사람 이슈 다보기] “자존심 대신 현실감각으로 북핵 국면 주도해야… 野와 협치는 필수”

    “자존심 대신 현실감각으로 북핵 국면을 주도해야 합니다. 국제 정세를 냉정하게 바라보면서도 국익을 위해 현명한 대처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협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지만, ‘수구세력이 반전을 노린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불가능합니다.”남재희(84) 전 노동부 장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논객이자 정치평론가로 손꼽힌다. 서울신문 주필 등 언론인 출신으로 4선 국회의원과 장관 등을 지내며 언론과 정치 등 각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장관 재임 당시에도 노동계의 무노동 부분임금을 지지하면서 ‘비판적 보수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0년대 이후에는 웅숭 깊은 진보적 색채의 칼럼으로 우리 사회에 지표를 제시하고 있다. 지난 6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관훈클럽에서 만난 그는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형형(炯炯)한 눈빛으로 북핵 등 국제 정세와 한국 정치에 대해 막힘 없이 의견을 풀어냈다.→요즘 북·미 회담을 보면 마치 외줄타기 하는 광대를 눈앞에서 보는 듯하다. -미국이나 북한이나 최고도의 전략 전술을 발휘하는 거다. 미국은 회담 과정에서 두 개의 목표가 있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북핵의 제거다. 싱가포르 북·미 회담에서 ICBM 해결은 끝난 것 같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오는 11월 중간선거에 활용할 카드가 생긴 셈이다. ‘내 업적은 ICBM을 제거한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북핵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계속 북핵 협상에 낙관적인 이유다. 하지만 북한에게 핵은 유일한 밑천이다. 핵 하나만으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불가침협정, 수교, 원조 등 여러 가지를 다 해결해야 한다. 협상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도 3년 중에 1년은 전쟁을 하고 나머지 2년은 전쟁과 협상이 동시에 진행됐다. 그러나 둘 다 판이 깨지는 걸 원치 않으니 결국 긴장 완화로 향할 것이다. →주한미군 주둔 인정 여부도 문제가 될 수 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때 ‘북한도 주한미군 주둔을 인정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직접 이야기한 건 아니다. 북한은 주한미군 주둔을 미리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주둔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일 것이다. 국제정치의 큰 흐름으로는 미국의 동북아 정책을 수용하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 →중간자로서 우리의 역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들 부시 대통령을 만났을 때 (부시가) ‘디스 맨’이라고 지칭했다. 우리 식으로는 ‘이 자’에 해당한다. 매우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오바마 대통령 당시 재임했던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도 회고록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칭해 ‘크레이지’(Crazy)라는 표현을 썼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강경화 외무장관 등을 계속 특사로 보냈다. 그 덕분에 아직 미국과의 관계는 부드러운 것 같다. 우리 입장에서 미국의 국익이라는 미국 정부의 기본 라인은 건드릴 수 없다. 2000년대 말 집권한 일본 민주당 정권은 미국 중심 외교에서 벗어나 자주외교를 시도했다. 그 일본 민주당 정권은 단명했다. 미국 외교 라인과의 마찰이 한 요인이 됐다는 게 국제정치학계의 정설이다. 미국을 벗어난 자주외교는 쉽지 않다. 그게 우리 앞에 놓인 운명이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는. 출범 초에 ‘혁명적 상황에서 만들어졌으니 혁명적 대응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는데. -1960년 4·19 이후 장면 정부는 혁명적 상황을 비혁명적인 해법으로 일관했다. 군의 부정부패를 그대로 방치했다. 혁명적 상황에서는 최소한 반 정도는 혁명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 조류에 씻겨 내려간다. 그런 면에서 현 정부는 긍정적으로 본다. 기무사 해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방선거 압승 이후 여당의 폭주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정치 지형은 보수가 강하다. 이는 남북이 분단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영향력도 엄청났다. 그에 반해 진보는 아예 없다시피 하다. 정치 지형만 놓고 보면 어쩌다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다가 문재인 정부로 이어 온 것이다. 진보 정부라도 제대로 된 진보가 아닌 약한 진보다. 문재인 정부가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지만, 낙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다만 박근혜 정부의 실정에 책임이 있는 자유한국당은 ‘연옥’을 거쳐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청와대의 협치내각 구상은 어떻게 보나.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인 이해찬 의원 관련 기사를 가리키며) 이 의원이 자꾸 말을 잘못한다. 협치하자고 하면서 “수구세력이 반전을 노린다”고 이야기하면 되겠나. 여당이 원내 과반수에 미달하면 야당을 슬슬 구슬러야 한다. 끌어들이지 못할망정 도발하는 건 맞지 않다. 이 의원은 문 대통령과 갈등을 빚거나 대통령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다. ‘나(이 의원)는 (예전에) 총리였고, 넌(문 대통령) 민정수석이었고, 난 (운동권) 선배고 넌 후배’ 이런 식의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인터뷰가 끝난 직후 이 의원이 문 대통령을 ‘문 실장’이라 지칭한 보도가 나와 논란이 일었다). →연동형비례대표제 등 개헌을 통한 선거구제 개편 논의도 활발하다. -인구 대비 적정 국회의원 수는 우리나라가 500명 정도이지만, 단원제를 감안하면 350명 정도가 적정 숫자다. 의원수를 현재보다 늘리는 데 대해 국민의 반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숙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유럽식 선진 정치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에 2015년 연동형비례대표제를 제안했을 것이다. 지금의 구도는 상대방보다 약간의 표만 더 받으면 권력의 전부를 갖는 거다. 국회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비례는 대표의 원리요, 다수는 결정의 원리’라는 게 정치학의 기본 아닌가. →빈부 격차 심화가 사회 정의 문제일 뿐 아니라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는 의견도 많다. -일본 파나소닉 창업자이자 ‘경영의 신’으로 불린 마쓰시다 고노스케 회장은 “땅은 공기나 물과 같다”고 말했다. 하늘이 주고 다른 것과 대체할 수 없는 땅을 독과점하는 건 부당하다는 것이다. 땅의 독점을 통해 엄청난 이익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빈부 격차가 심화한다면 당연히 정부가 정책으로 해결해야 한다. 다만 종부세 인상 등은 ‘오리털 뽑듯이’ 올려야 한다. →얼마 전 한 언론(프레시안)에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글을 썼다. -노 의원과도 술자리를 갖는 등 잘 어울렸다. 내가 인정하는 ‘구라’는 3명이다. 소설가 황석영과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그리고 노 의원이었다. 구라는 과장과 재치가 합쳐져야 가능하다. 황석영은 소설가로 1급, 유홍준은 미술평론으로 1급, 그리고 노 의원은 언어를 사용하는 정치인으로 1급이었다. 한국 정치 언어의 품격을 높인 그가 그런 선택을 해 애석하기 짝이 없다. 이두걸 논설위원 douzirl@seoul.co.kr ■남재희는 누구 언론인 출신 4선 국회의원·장관… 운동권 딸들로 인해 우여곡절도 193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그는 1952년 서울대 의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해 2년 수료 후 1954년 같은 대학 법학과에 재입학했다. 1958년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민국일보를 거쳐 조선일보 정치부장·논설위원을 지낸 뒤 서울신문에서 편집국장과 주필 등을 역임했다. 이후 1979년 서울 강서구에서 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13대까지 내리 4선을 지냈다. 보수당 의원 시절 운동권 딸들 덕분에 우여곡절이 많았다. 1981년 당시 서울대 국사학과에 재학 중이던 장녀 남화숙(현 미 워싱턴대 교수)씨가 시위 도중 연행되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사퇴서를 썼지만,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반려했다. 차녀인 남영숙 주노르웨이 대사도 시위 전력으로 옥고를 치렀다. 1986년 하나회 멤버 중심의 군 고위 장성과 현직 국회의원들의 취중 난투극으로 알려진 ‘국방위 회식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정계 은퇴 뒤에는 집필과 강연 등을 이어 오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남재희가 만난 통 큰 사람들’, ‘진보열전’ 등이 있다. 이두걸 논설위원 douzirl@seoul.co.kr
  • 남재희 전 노동장관 “자존심 대신 현실감각으로 북핵국면 주도해야”

    남재희 전 노동장관 “자존심 대신 현실감각으로 북핵국면 주도해야”

    “자존심 대신 현실감각으로 북핵 국면을 주도해야 합니다. 국제 정세를 냉정하게 바라보면서도 국익을 위해 현명한 대처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협치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지만 ‘수구세력이 반전을 노린다’는 식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남재희(84) 전 노동부 장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논객이자 정치평론가로 손꼽힌다. 서울신문 주필 등 언론인 출신으로 4선 국회의원과 장관 등을 지내며 언론과 정치 등 각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장관 재임 당시에도 노동계의 무노동 부분임금을 지지하면서 ‘비판적 보수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2000년대 이후에는 웅숭 깊은 진보적 색채의 칼럼으로 우리 사회에 지표를 제시하고 있다. 지난 6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관훈클럽에서 만난 그는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형형(炯炯)한 눈빛으로 북핵 등 국제 정세와 한국 정치에 대해 막힘 없이 고견을 풀어냈다. -요즘 북·미 회담을 보면 마치 외줄타기 하는 광대를 눈 앞에 둔 듯 하다. 연일 냉·온탕을 오가고 있는데 어떻게 될까. =미국이나 북한이나 최고도의 전략 전술을 발휘하는 거다. 미국은 회담 과정에서 두 개의 목표가 있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북핵의 제거다. 트럼프 미 대통령 취임 직후 일본 국제정치학자가 ‘북한 문제에 있어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먼저 할 시도는 미국에 도달할 수 있는 핵 장착 미사일의 제거이고, 그 다음이 북핵일 것’이라고 분석하던데 맞는 이야기다. 싱가포르 북·미 회담에서 ICBM 해결은 끝난 것 같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오는 11월 중간선거에 활용할 카드가 생긴 셈이다. ‘내 업적은 ICBM을 제거한 것이다. 이로써 미국은 북핵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계속 북핵 협상에 낙관적인 이유다. 하지만 북한에게 핵은 유일한 밑천이다. 마지막 카드를 내놓는 건데 최고가로 흥정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북한은 핵 하나만으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불가침협정, 수교, 원조 등 여러가지를 다 해결해야 한다. 협상이 오래 걸릴 수 밖에 없다. 한국전쟁 당시 1년 간 전쟁이 벌어진 뒤 나머지 2년 간은 협상이 동시에 진행됐다. 공산권 협상은 전쟁과 협상이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이뤄진다. 공격하면서도 대화하고 대화하면서도 공격을 가하는 ‘타타담담(打打談談) 담담타타(談談打打)’가 그것이다. 나라도 마지막 카드는 쉽게 버리지 않을 거다. -판이 아예 깨질 가능성은 없나. =트럼프가 ICBM을 이용해 중간선거를 막더라도 여러 난제들이 있다. 북핵 말고도 이란·시리아 등 중동 문제도 복잡하다. 동북아 전체로 봐서도 러시아와 중국 등과 해결할 문제가 간단치 않다. 그러니 북한 문제가 추가적으로 악화되는 걸 원치 않는다. 쾌도난마 식으로 북한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없다. 북한도 판을 뒤엎을 처지가 못 된다. 국제 사회의 공론도 무시 못한다. 북한을 괴멸시키는 대신 북한의 생존을 인정한다는 식으로 인식이 바뀐 상태다. 그러니 결국 북미 긴장이 풀리는 방향으로 갈 거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에 우호적이라는 점도 북에게는 큰 힘이다. 다만 장기적으로 북한에도 변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쿠바의 경우 결국 카스트로 형제들이 다 물러나고 다른 이들이 집권하고 있다. 쿠바 모델이 북에 재현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주한미군 주둔 인정 여부도 문제가 될 수 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때 ‘북한도 주한미군 주둔을 인정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직접 이야기한 건 아니다. 김 전 대통령이 그런 심증을 가졌다는 것이다. 북한은 주한미군 주둔을 미리 인정하지는 않을 거다. 주둔의 불가피성은 이해하지만 바겐 포인트를 스스로 버릴 이유가 없지 않냐. 협상할 때는 미군 철군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주한미군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국제정치의 큰 흐름으로는 미국의 동북아 정책을 수용하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중간자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들 부시 대통령을 만났을 때 ‘디스 맨’이라고 지칭했다. 우리 식으로는 ‘이 자’에 해당한다. 매우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오바마 대통령 당시 재임했던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도 회고록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칭해 ‘크레이지(Crazy)’라는 표현을 썼다. 우리 식으로는 ‘괴짜’ 정도에 해당한다. 노 전 대통령이 미국 입장에서는 까다롭고 불쾌했다는 것이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강경화 외무장관 등을 계속 특사로 보냈다. 그 덕분에 아직 미국과의 관계는 부드러운 것 같다. 다만 창피한 일이지만 우리 입장에서 미국의 국익이라는 미국 정부의 기본 라인은 건드릴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6월 계간지 ‘황해문화’ 발간 100호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개번 맥코맥 호주국립대 태평양아시아학과 교수의 진단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맥코맥 교수에 따르면 2000년대 말 집권한 일본 민주당 정권은 미국 중심 외교에서 벗어나 자주외교를 시도했다. 그때 나온 말이 오키나와 미군 기지 이전이다. 당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는 제국주의 문화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한 정치인이다. 방한 당시 서대문 형무소에서 무릎까지 꿇은 사람이다. 그러나 일본 민주당 정권의 단명은 미국 외교라인과의 마찰이 한 요인이 됐다는 게 국제정치학계의 정설이다. 일본보다 외교력이나 경제력이 약한 한국은 더 말할 게 없다. 미국을 벗어난 자주 외교는 쉽지 않다. 그게 우리 앞에 놓인 운명이다. 사대에 대해서도 나쁘게 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사대는 약소국의 생존 전략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조선은 사대 정책을 펴왔지만 그걸 욕하기는 어렵다. 이승만 정부 때인 1951년부터 1955년까지 외교를 이끈 변영태 외교부장관이 퇴임 뒤 사석에서 “중국 주변국 중 화교가 자리를 못 잡은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우리 조상들의 사대외교가 능수능란하고 현명했다는 점을 방증한다”고 설명하더라. 노예근성을 갖자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러나 한·미 관계에서도 자존심만 내세울 건 아니다. 현실감각을 갖고 접근해야 한다. 남로당 경북도당 간부였다가 전향했던 박진목씨가 과거에 언론인들과 친했다. 그는 한국전쟁 중 평양 밀사로 가서 이승엽 당시 국가검열상과 협상을 벌였던 인물이다. 박씨의 지론은 “과거 남로당이 생각을 잘못 했다. 그 막강한 일본 제국주의 군대를 물리친 미군을 상대로 남로당 몇몇이 ‘물러나라’고 투쟁했으니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아니겠냐”는 것이었다. 중국이 미국에 맞서는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지만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미국의 외교 전문지 ‘포린 어페어스’는 중국의 부상과 동북아 정세를 일컬어 ‘빙하를 움직이는 일’(Moving Ice Glacier)라고 표현한다. 강대국 입장에서 빙하는 한반도다. 빙하가 움직이려면 몇 십년 몇 백년이 걸린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는. 출범 초에 혁명적 상황에서 만들어졌으니 혁명적 대응을 해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는데. =1960년 4·19 이후 장면 정부는 혁명적 상황을 비혁명적인 해법으로 일관했다. 군의 부정부패를 그대로 방치했다. 혁명적 상황에서는 최소한 반 정도는 혁명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시대 조류에 씻겨 내려간다. 그런 면에서 현 정부는 반 쯤은 혁명적인 색깔을 드러냈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기무사 해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쿠데타의 원조인 기무사를 이번 기회에 해체해 개편해야 한다. 최근 경제가 안 좋다. 근로시간 단축이나 최저임금 상승 등을 원인으로 지목하지만 미국을 제외한 전 세계적인 경기 하락이라는 해외 요인이 더 크다. ‘삼성 투자 구걸’ 논란도 일종의 소아병적 반응이다. 대범하게 바라봐야 한다. -지방선거 압승 이후 여당의 탈주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은데.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정치 지형은 보수가 강하다. 이는 남북이 분단됐기 때문이다. 세부적으로는 북한에서의 상층 인텔리들이 월남을 하면서 남쪽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개신교만 해도 평안도 출신의 보수적인 예수교장로회가 주역이 되고, 함경도 기반의 진보적인 기독교장로회는 소수가 됐다. 예장을 대표한 한경직 목사도 보수적인 색채가 매우 강했다. 미국의 영향력도 엄청났다. 미국이 길러낸 군, 학자, 언론 등 분야의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미국 문화가 압도적이다 보니 보수가 강할 수 밖에 없다. 그에 반해 진보는 아예 없다시피 하다. 한국전쟁으로 일단 궤멸됐다가 조봉암 진보당 당수가 사형당하면서 더 위축됐다. 4·19 혁명 이후 잠시 머리를 들었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또 다시 사라졌다. 1980년대 이후 학생운동 정도가 진보의 명맥을 이은 것이다. 정치 지형만 놓고 보면 어쩌다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섰다가 문재인 정부로 이어온 것이다. 진보 정부라도 제대로 된 진보가 아닌 약한 진보다. 김대중 정부는 아주 약한,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는 조금 약한 진보 정부다. 이에 반해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강한 보수였다. 그런 면에서 문재인 정부가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지만 낙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다만 박근혜 정부가 완전히 망치고,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막말정치를 일삼으면서 보수가 힘을 못 쓰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실정에 책임이 있는 한국당은 연옥을 거쳐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엄청난 자정 노력 숙청, 반성 등 재생을 위한 노력이 뒤따라야 했지만 연옥을 안 거치니 안 되는 거다. 김병준 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점잖게 나가고 있지만 위기에 부딪혔을 때 어떤 행태를 보일 지 지켜봐야 한다. -그렇기에 평소 협치를 강조한 게 아닌가. 청와대도 협치내각을 구상 중이다.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후보인 이해찬 의원 관련 기사를 가리키며) 이 의원이 자꾸 말을 잘못 한다. 협치하자고 하면서 “수구세력이 반전을 노린다”고 이야기하면 되겠냐. 여당이 원내 과반수에 미달하면 야당을 슬슬 구슬러야 한다. 같은 표현이라도 ‘개혁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면 되는데 이렇게 자극하면 될 일도 안 된다. 한국당과의 협치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더라도 그런 입장을 취해야 한다. 끌어들이지 못할 망정 도발하는 건 맞지 않다. 이 의원은 문 대통령과 갈등을 빚을 수도 있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가 껄끄러운 관계로 가면 안 되는데 문 대통령에게 부담을 줄 것이다. ‘나(이 의원)는 (예전에) 총리였고 넌(문 대통령) 민정수석이었고, 난 (운동권) 선배고 넌 후배’ 이런 식의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등 개헌을 통한 선거구제 개편 논의도 활발하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가 10년 전 쯤에 발표한 논문을 보면 전 세계 인구 대비 적정 의원수는 우리나라가 500명 정도이고, 단원제를 감안하면 350명 정도가 적정한 것으로 나온다. 의원수를 현재보다 늘리는 데 대해 국민들의 반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숙제다.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의원이 정치 일성으로 의원수를 줄이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안철수는 끝났다’고 주변에 이야기했다. 의원 수를 줄이자는 건 정치를 전혀 모르는 거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유럽식 선진 정치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에 2015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제안했을 것이다. 나도 국회의원에 5번 출마해서 4번 이겼다. 상대방보다 약간의 표만 먹으면 권력의 전부를 먹는 거다. ‘올 오어 낫씽’(All or Nothing)이다. 이건 국회가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비례는 대표의 원리요, 다수는 결정의 원리’라는 게 정치학의 기본 아닌가. 대통령 임기와 관련해서는 4년 중임제가 좋다고 생각하지만 5년 단임제 역시 무리하게 바꿀 필요는 없다고 본다. 1987년 개헌 과정에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세 유력 정치인이 서로 번갈아가며 대통령이 되기 위한 속내로 5년 단임을 지지한 측면이 강하다. 지금은 속도가 중요한 4차 산업혁명 시대다. 이젠 10년이 아닌 5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내각책임제는 우리 현실에서는 절대 안 된다. 국회의원들이 서로 자리다툼에 골몰해 내각이 몇 개월 만에 무너지는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 싸움하다가 볼일 못 볼 수 있다. 제2공화국 당시에도 헌법에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이 분명히 구분돼 있었지만 윤보선 전 대통령과 장면 전 총리는 권력을 놓고 서로 암투를 일삼았다. -경제 면에서는 빈부격차 심화가 사회정의 문제 뿐 아니라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는 의견도 많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가 지난해 헨리 조지를 언급하며 강조한 것처럼 지대추구의 특권이 용인되는, 곧 땅으로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건 큰 문제다. 일본 파나소닉 창업자이자 ‘경영의 신’으로 불린 마쓰시다 고노스케 회장은 “땅은 공기나 물과 같다”고 말했다. 하늘이 주고 다른 것과 대체할 수 없는 땅을 독과점하는 건 부당하다는 것이다. 땅의 독점을 통해 엄청난 이익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빈부격차가 심화된다면 당연히 정부 정책으로 해결돼야 한다. 다만 노무현 정부 때 그렇게 많이 올리지도 않았지만 종부세 인상으로 벼락을 맞았다. 속도는 알게 모르게 해야 한다. ‘오리털 뽑듯이 올린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원래 오리털은 펜촉으로 쓸 용도로 뽑았다. 오리털을 뽑으면 상처는 안 나지만 오리는 매우 아파한다고 하더라. 그래도 오리털은 뽑아야 한다. -얼마 전 한 언론(프레시안)에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글을 썼다. =노 의원보다는 심상정 의원과 더 가깝다. 하지만 노 의원과도 술자리를 갖는 등 잘 어울려 다녔다. 내가 인정하는 ‘구라’는 3명이다. 소설가 황석영과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그리고 노 의원이었다. 구라는 과장과 재치가 합쳐져야 가능하다. 황석영은 소설가로 1급, 유홍준은 미술평론으로 1급, 그리고 노 의원은 언어를 사용하는 정치인으로 1급이었다. 한국 정치 언어의 품격을 높인 그가 그런 선택을 해 애석하기 짝이 없다. 이두걸 논설위원 douzirl@seoul.co.kr
  • [씨줄날줄] “하나님도 예수에게 세습?”/이두걸 논설위원

    [씨줄날줄] “하나님도 예수에게 세습?”/이두걸 논설위원

    교회 목사 세습이 세간의 관심을 끈 건 1997년 충현교회 부자 세습이 첫 사례다. 이후 광림, 소망, 금란 등 대형 교회에서도 부자 세습이 이어졌다. 이에 개신교 교단들은 세습방지법을 ‘교단 헌법’에 명기했다. 하지만 부자 세습은 헌법을 회피하며 ‘진화’를 거듭했다. 교회를 쪼개 주었다가 다시 합병하는 건 물론 2~3명의 목사가 서로 아들 목사를 청빙하는 ‘쌍방·삼각 교차’, 아버지에서 곧바로 손자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세습 등이 나타났다.등록교인 10만명, 한 해 재정 규모만 1000억원대인 세계 최대 장로교회 명성교회에서도 ‘부자 세습’ 논란이 벌어졌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재판국은 7일 열린 ‘명성교회 목회세습 등 결의 무효’ 소송 재판에서 김하나 목사 청빙 결의가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김하나 목사는 2015년 정년퇴임한 명성교회 창립자 김삼환 원로목사의 아들이다. 명성교회는 김삼환 목사 퇴임 이후에도 후임 담임 목사를 뽑지 않았다. 대신 지난해 3월 김하나 목사를 청빙하기로 결의하고, 10월엔 명성교회가 속한 서울동남노회가 이를 통과시키면서 김하나 목사는 11월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이에 서울동남노회 정상화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는 노회 결의가 무효라며 총회 재판국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7일 재판국은 명성교회 쪽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예장 통합 헌법 2편 28조 6항은 “사임 또는 은퇴하는 담임목사의 배우자 및 직계비속과 그 직계비속의 배우자는 담임목사로 청빙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교회 측은 “해당 조항이 ‘은퇴하는’이라고 돼 있어 김삼환 목사 은퇴 2년 뒤 김하나 목사가 부임하는 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변칙 세습을 합리화하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명성교회는 교회로 불릴 자격조차 없고, 양심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역겨움과 수치심을 안겨 주고 있다”는 이수영 전 새문안교회 담임목사의 비판은 전혀 과하지 않다. “왜 남의 교회 일에 왈가왈부하냐. 하나님도 예수에게 교회를 물려줬다”고 한 주장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교회를 ‘성도들의 공동체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명시한 성서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반(反)그리스도교적 발언인 탓이다. 예장 통합 교단을 이끌었던 고 한경직(※사진※) 목사는 평생 청빈과 겸손의 자세를 지켜 존경을 받았다. 한국 장로교의 대표 교회인 영락교회를 세우고 평생 시무했지만, 후임은 부담임 목사에게 승계했다. 그의 외아들인 한혜원 목사는 미국에서 목회 활동을 했다. 평생 낮은 곳에만 임했던 예수의 ‘비움의 신학’의 재현이 없다면 누가 교회 안에서 안식과 희망을 찾을 것인가.
  • [서울광장]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이두걸 논설위원

    [서울광장]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이두걸 논설위원

    지난 주말부터 뉴스에 종종 등장하는 단어는 ‘삼성 투자 구걸’이다. 지난 6일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간의 만남에 앞서 김 부총리가 삼성 측에 투자와 일자리 확대를 요청했고, 이에 대해 청와대가 반대 입장을 내놨다는 게 요지다. 청와대와 김 부총리는 모두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구걸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일부 비서진의 정제되지 않은 발언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우려가 나온 건 ‘팩트’에 가까워 보인다. 그게 아니면 청와대가 나서서 “어떤 방식이 효과적인지 의견을 나눴다”고 해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요즘같이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삼성의 ‘통 큰 투자’는 쌍수를 들고 반길 만하다. 그러나 이 정도면 청와대가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렸거나 김 부총리가 대통령 대신 재벌에 손을 벌리는 ‘악역’을 떠맡은 것처럼 보인다. 삼성의 결단을 이끌어 낸 주체는 김 부총리가 아닌 문 대통령 자신이기 때문이다. 뇌물공여 혐의로 대법원 판결을 앞둔 이 부회장은 지난달 9일 삼성전자 인도 노이다 신공장에서 문 대통령의 손에 이끌려 사실상 ‘복권’됐다. 혁신성장을 위해서는 규제완화가 필수적이다. 그래야 기업이 투자를 하고 일자리를 만든다. 정부는 발 벗고 나서 기업의 애로를 듣고 대못도 뽑아야 한다. 미국과 일본 등 각국 지도자들이 기업인들과 정기적인 만남을 갖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정부의 역할은 딱 여기까지다. 그에 맞춰 기업은 돈이 되면 투자를 하고, 돈이 안 되면 투자를 못 한다. 삼성전자나 현대차 등의 외국인 지분 보유 비율은 모두 50% 안팎인 상황에서 손해가 날 사업에 투자를 한다면 주주에 대한 배임의 소지가 있다. 헤지펀드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한국 정부를 대상으로 소송할 수도 있고, 아니면 직접 기업을 공격할 수도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친기업 정책을 펼쳤던 2012~2015년 대기업 투자가 110조원대에서 정체된 건 이런 이유에서다. 기업이 투자를 하도록 강요하고 읍소하는 순간 정부는 기업에 코가 꿰인다.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것이 경제학의 기본 아닌가. 대기업들로부터 돈을 걷었다가 정권이 뒤바뀐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진 지 2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삼성만 하더라도 삼성전자 지분 매각, 반도체 공장 정보 공개 등 다양한 현안이 걸려 있다. 6일 간담회에 고한승 삼성바이오에피스 사장이 참석한 건 의미심장하다.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의 중심에 있는 기업이다. 삼성 측이 김 부총리에게 바이오시밀러(복제약)의 약가를 높이거나 자유로운 가격 결정 권한을 달라며 규제완화를 요구한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 국내 약가는 건강보험공단과 제약업체의 협상으로 결정된다. 바이오시밀러를 주로 만드는 삼성바이오에피스 입장에서는 바이오시밀러 가격이 오르면 높은 수익성을 기대할 수 있다. 제약계에서는 삼성바이오에피스의 항암제인 허셉틴 하나만 가격이 올라도 연간 200억원 정도의 건보 재정이 추가로 소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규제완화의 대가가 국민 호주머니에서 나가야 한다는 얘기다. 소득주도성장론과 혁신성장, 공정경제 등 ‘J노믹스’의 3대 축이 흔들린다는 건 더 큰 문제다. 소득주도성장론은 수출 일변도였던 우리 경제의 틀을 수출과 내수의 동반성장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내수는 소비 성향이 강한 서민 중산층의 소득이 느는 게 핵심이다. 여기에서의 전제는 공정경제를 통해 재벌과 중소기업 사이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고,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혁신 기업들의 창업과 성장으로 혁신성장의 동력을 삼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 경제가 어렵다고 대기업에 손을 벌리는 건 성과 조급증에 빠져 과거의 성장 모델로 회귀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 중심의 수출주도 성장의 성과가 온 사회에 퍼진다는 낙수효과(트리클다운)가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기 위해 얼마나 더 많은 중소 상공인과 서민들의 피눈물이 더해져야 할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신분부터 재계와 갈등을 지속했다. 2003년 6월 서울 시내의 한 삼계탕 전문점에서 대기업 총수들과 오찬을 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노 전 대통령은 투자와 고용 확대를 부탁했고, 총수들은 투자 계획을 내놨다. 불과 6개월 만에 개혁 대신 성장으로 정책의 무게중심도 옮겨 갔다. 이후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15년 전의 비판은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 douzirl@seoul.co.kr
  • 이두걸의 시시콜콜/여의도발 낙하산 실종의 명암

    이두걸의 시시콜콜/여의도발 낙하산 실종의 명암

    요즘 금융권은 인사의 계절이다. 금융공기업 수장들의 인선이 한창이기 때문이다. 4일 금융권에 따르면 예금보험공사는 지난 1일 신임 사장 선임을 위한 서류접수를 마감했다. 예보 임원추천위원회는 서류심사와 면접 등을 거쳐 신임 사장을 최종 확정할 계획이다. 예보 사장은 금융위원장이 임명을 제청하면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번 달 중하순 정도에는 윤곽이 잡힐 전망이다. 기술보증기금도 최근 신임 이사장 선임을 위한 임추위를 구성하고 다음주 공고를 내기로 했다. 추석 전까지는 인사가 마무리될 것으로 기보 안에서는 기대하는 분위기다. 두 기관의 공통점은 수장의 인사가 늦어졌다는 점이다. 현 곽범국 예보 사장의 임기는 지난 5월 26일 만료됐다. K 전 기보 이사장은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지난 4월 해임됐다. 모두 기획재정부 고위 관료 출신들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는 점도 닮은 꼴이다. 예보 안팎에서는 위성백 전 기재부 국고국장, 진승호 전 기재부 대외경제국장 등이 새 사장으로 임명될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은 둘 다 더불어민주당 수석전문위원이다. 기보 이사장 역시 기재부 출신의 전직 차관급 인사가 물망에 오른다.금융공기업 인사가 늦어진 결정적인 이유는 6·13 지방선거 등 정치 일정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권 입장에서는 지방선거라는 중차대한 일정을 앞두고 인사를 결정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관가에서는 민주당이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자리를 챙겨줄 사람이 줄어든 게 인사 일정을 늦췄다는 관측이 나온다. “직접 ‘손’을 들거나 챙겨줘야 할 후보자들이 별로 없다보니 후임 인사 결정이 신속히 이뤄지지 않았다”(한 경제부처 고위관료)는 것이다. 기재부 등 경제부처 인사들의 ‘몸값’이 어부지리 격으로 높아졌다는 분석도 힘을 얻는다. 여의도발 ‘낙하산’들이 별로 없다 보니 경제와 금융에 전문성을 갖춘데다 ‘친정’의 힘도 센 경제부처 관료 출신들이 갈 자리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최근 민간행 등을 이유로 옷을 벗는 경제부처 고위 관료들까지 나오는 상황이라 경제부처의 고질적인 인사적체가 해소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현직이든 전직이든 향후 인사에서나 공기업 등 진출 과정에서도 지난 정부 때보다는 ‘한 등급’ 정도 올라간 자리를 기대하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변화를 긍정적으로만 보기 어려운 게 엄연한 현실이다. 정치권으로부터의 낙하산이 줄었다는 건 반길 일이지만 자칫 검증이 덜 된 인사들이 대통령의 인기를 등에 업고 지방권력을 획득한 결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기초단체 의원 당선자는 선거 전까지 ‘무직’ 상태였다는 점 때문에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선거 전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도 광역자치단체 의회 진출에 성공한 여당 의원들도 거론된다. 결국 시민들의 일상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지방권력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나 지방 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는 ‘생활 민주주의’의 복원이 유일한 해법이다. 이두걸 논설위원 douzirl@seoul.co.kr
  • [길섶에서] 어떤 조사(弔詞)/이두걸 논설위원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은 클래식 음악 중 가장 유명한 곡으로 꼽힌다. 우수와 서정미 그리고 열정이 가득 찬 러시아 낭만주의 음악의 대표작이다. 하지만 4악장은 낯설다 못해 기괴하다. 빠르고 장대한 피날레를 보여 주는 일반적인 교향곡과 달리 아다지오 라멘토소, 곧 느리면서도 비탄과 절망에 잠긴 템포를 선뵌다. 더블베이스와 첼로 등은 저음의 선율을 이어 가다 이윽고 영원의 침묵으로 빠져든다. 차이콥스키는 1893년 10월 이 곡을 손수 지휘해 초연하고 9일 뒤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다. 공식적인 사인은 콜레라 감염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철저히 금기시되던 동성애자였던 그에게 러시아 황실이 ‘명예 자살’을 강요했다는 설도 설득력을 얻는다. 당대 존경을 한몸에 받았지만 결국 세상과의 불화로 세상과 작별했다. 고(故)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오늘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치러지는 영결식에서 세상과 마지막 인사를 한다. 그제는 소설가 최인훈 선생의 발인일이었다. 민족과 계급의 이중 모순과 평생을 대결한 그들은 영원한 불화의 길을 떠났다. ‘평등한 통일 한반도’라는 그들의 꿈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으로 남았다. 비창 4악장을 들으며, 이제라도 영원한 안식을 얻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이두걸 논설위원 douzirl@seoul.co.kr
  • [씨줄날줄] 금수저와 세습자본주의/이두걸 논설위원

    [씨줄날줄] 금수저와 세습자본주의/이두걸 논설위원

    ‘벨 에포크’(belle epoque)는 우리말로 ‘좋은 시대’로 번역된다. 1871년부터 1914년 사이 프랑스 제3공화국의 풍요롭던 파리의 황금기를 뜻한다. 혁명과 전쟁이 사라진 자리에 경제적 풍요와 문화 번성, 그리고 낙관적인 세계관이 자리잡았다. 모네와 르누아르 등 인상주의 화가가 남긴 유유자적하면서도 풍족한 부르주아 계급의 모습은 이때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분배 측면만 놓고 보면 인류 역사상 없는 이들에게 가장 가혹한 시기였다.‘21세기 자본’의 저자인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는 소득분배 측정 지수로 전체 부(자산)의 가치를 국민소득으로 나눈 ‘베타(β)값’을 제시한다. β값이 클수록 부가 소수에게 쏠려 있다는 뜻이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β값은 사상 최고인 7.5 정도로 평가된다. 하지만 김낙년 동국대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β값은 2000년 5.8에서 2016년 8.28로 뛰어올랐다. 미국(4.10)이나 영국(5.22), 일본(6.01) 등보다도 크게 높다. 우리나라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부의 대물림’이 주범으로 손꼽힌다. 상속·증여가 우리나라 전체 자산 형성에 기여한 비중은 1980년대 연평균 27.0%에서 2000년대 42.0%로 급증했다. 이 비중은 최근 더 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국세통계 자료를 보면 총상속증여재산가액은 2012년 약 21조원에서 2016년 32조원으로 폭등했다. 미국의 경제 잡지 포브스는 지난해 우리나라 주식부자 중 상속형은 65% 정도로 일본(30%)이나 미국(25%)의 두 배를 넘었다고 분석했다. 국세청이 19일 내놓은 국세 통계는 ‘세습자본주의’ 한국 경제의 우울한 단면을 보여 준다. 지난해 상속세 신고 재산은 16조 7110억원으로 전년 대비 14.0% 증가했다. 평균 피상속 재산은 24억원에 달했다. 증여세 신고 재산도 23조 3444억원으로 같은 기간 28.2% 늘었다. 상속과 증여의 급증은 최근 부동산 가격 급증 외에도 문재인 정부가 보유세 인상과 공시지가 현실화 등을 표방한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세금을 더 낼 바에야 미리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심리가 강해진 탓이다. 실제로 지난해 전국 부동산 증여 건수는 총 28만 3000건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부자와 빈자 사이의 이동성이 둔화된 사회에서는 ‘창업’보다 ‘공무원시험’이 합리적 선택이다. 공동체 의식 대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 남는다. “장벽사회의 병리현상을 방치하고는 경제 활력을 되찾는 일은 요원하다”(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지적이 나오는 까닭이다. 19세기 후반의 극심했던 빈부 격차는 1, 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이라는 ‘파국’을 거친 뒤에야 물리적으로 조정됐다. douzirl@seoul.co.kr
  • [씨줄날줄] 라돈과 당진 사람들/이두걸 논설위원

    [씨줄날줄] 라돈과 당진 사람들/이두걸 논설위원

    충남 당진항에 쌓인 라돈 매트리스 1만 6900개가 현장에서 해체된다. 대진침대에서 라돈이 검출됐다는 보도가 나온 지 두 달여 만이고, 전국에서 수거된 매트리스가 당진으로 옮겨진 지 한 달 만이다. 이번 해체는 당진 송악읍 고대리 주민들의 ‘담대한 결단’ 덕분이다. 라돈 매트리스의 방사선 안전성 의혹이 상당 부분 해소됐다지만, 당진 주민들이 끝까지 반대했다면 해체 작업은 시작도 어려웠다. 보상 등 반대급부도 제시되지 않았다. “제3의 장소로 옮길 수 없는 상황이어서 대승적 차원에서 결정했다”는 당진 주민들에게 정부와 국민이 빚을 진 셈이다. 반면 천안의 대진침대 공장에서는 현재 보관한 매트리스 2만 4000여개의 처리 방향이 아직 오리무중이다. 현장 해체와 추가 반입을 반대하는 지역 여론이 여전히 높기 때문이다. “천안에서 해체 처리하는 게 원칙”이라는 정부 입장과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님비’나 ‘핌피’, ‘바나나’ 등의 단어를 연상할 이들도 많을 것이다. 님비는 혐오시설의 입지를 기피하거나 보상을 요구하는 태도를, 핌피는 반대로 선호시설의 유치를 요구하는 현상을 말한다. 바나나는 님비를 뛰어넘어 ‘그 어떤 장소에도 아무것도 지을 수 없다’는 극단적인 반대 의견을 뜻한다. 그러나 ‘님비’는 어찌 보면 인지상정인 측면이 없지 않다. 누가 내 집 앞에 공해시설이 들어서기를 바라겠는가. 이번처럼 정부가 군사작전하듯 슬그머니 라돈 매트리스를 우리 동네에 쌓아 둔다면 가만히 있는 게 도리어 비정상적이다. 생명권과 안전권 등을 침해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이라면 그런 일은 거의 없다. 따라서 정부가 특정 지역에 혐오시설을 설치한다면 선호시설도 함께 짓는 ‘패키지식 대안’을 주민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서울추모공원과 국립중앙의료원을 동시에 유치한 서울 서초구 원지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수요가 부족하거나 교통 여건이 여의치 않는 등 선호시설 확충 조건이 좋지 않다면 추가 예산 책정 등의 메리트가 제공돼야 한다. 기피시설이 특정 지역에 몰리지 않도록 정책적인 배려가 이뤄져야 하는 건 당연하다. 기피시설이나 혐오시설의 기준도 명확해야 한다. 경제적 손실이 조금이라도 예상되면 기피시설이나 혐오시설로 몰아 버리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서울 강서구의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이나 서울시의 역세권 청년주택 사업을 둘러싼 갈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누구라도 교통사고 등으로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현실을 깨닫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두걸 논설위원 douzirl@seoul.co.kr
  • [길섶에서] 아버지 노릇/이두걸 논설위원

    그 책을 집어 든 건 순전히 표지 때문이었다. ‘귀여움 터지는’ 여자 아이가 오른손을 들어 나치식 경례를 하고 있다. 왼손 검지는 히틀러의 콧수염을 연상시키듯 콧잔등 위에 올려놓았다. 프랑스 출신 변호사이자 저술가인 타냐 크라스냔스키는 ‘나치의 아이들’을 통해 홀로코스트의 설계자 하인리히 힘러, 제국 원수였던 헤르만 괴링 등 거물 나치 전범 아이들의 삶을 추적한다. 힘러의 딸 구드른 힘러나 괴링의 딸 에다 괴릴은 부친 못지않은 나치 신봉자로 남았다. 성을 아예 바꾸거나 유대교 랍비로 변모한 이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아무것도 부정하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영성의 길을 걸었으며, 심지어는 스스로 불임의 존재가 되었다.” ‘어떤 아버지가 될 것인가.’ 갓 돌이 지난 늦둥이 딸을 바라볼 때 가끔 떠올리는 문장이다. ‘최후의 비판자이자 지지자’라는 자식의 무게감은 양쪽 모두에게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고위 나치의 자식들이 부친의 행위에 대해 격렬한 옹호나 부인을 하면 했지 중립은 선택지에 없었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아이들에게 어떤 ‘거울’이자 ‘창’으로 남을 것인가. 어려운 숙제다. douziri@seoul.co.kr
  • [이두걸의 시시콜콜] 사람 사는 세상

    [이두걸의 시시콜콜] 사람 사는 세상

    “살인기술 배운 한국인들 아웃! 과격시위테러범 한국인 아웃! 국민은 안전을 원한다.” 얼마 전 인터넷 대안언론 ‘직썰’에 올라온 만화 한 편이 눈길을 잡았다. 제목은 ‘완벽한 난민의 조건’이다. 내용을 보면 이렇다. 트럼프 미 대통령의 ‘실수’로 한국에서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한국인들은 집단 난민이 되어 제3국을 떠도는 신세가 된다. 그 순간, 외국인들이 난민 처지가 된 한국인들의 모습을 TV로 지켜보며 대화를 나눈다. 그중 한 명이 한국 난민에 대해 측은한 감정을 드러내자 다른 이가 이렇게 맞받아친다. “한국인들은 개고기를 먹는 야만족이다. 그 사람들을 받아주면 우리 반려견들을 다 잡아먹을거다.” 한국인들의 ‘과격성’도 근거가 된다. “한국 남자들은 모두 군대에서 훈련받은 살인병기들인데다 시위할 때 노인들마저 가스통을 들고 나올 정도다. 대통령까지 쫓아낸 이들이 폭동을 부리면 어떻게 되겠냐.” “돈독 오른 한국인들이 들어오면 우린 일자리를 다 뺏길 것”이라는 주장도 펼친다. 결국 이들은 “한국인들이 들어오면 큰일난다”며 의견을 모은다. 작가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당신은 완벽한 난민이 될 수 있을까요?”난민 문제는 최근 우리 사회를 달구는 가장 뜨거운 이슈다. 특히 난민을 반대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더욱 크다. 14일에는 난민수용 반대 집회가 전국에서 열린다. 지난달 30일에 이어 두 번째다. 서울과 제주에서 열렸던 1차 집회와 달리 광주, 전북 익산 등으로 장소도 확대됐다. 이들의 주장은 놀랍도록 간명하다. “예멘인들은 유엔난민협약상 난민도, 난민법상 난민도 아니기에 강제 송환돼야 한다”는 것이다. 장이 섰으니 정치인들도 빠질 수 없다.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다’며 난민 수용 반대 의사를 이미 밝힌 조경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집회에 직접 참석할 예정이다. 어김없이 색깔론도 등장했다. ‘진박’ 김진태 한국당 의원실 주최로 지난 11일 열린 ‘난민대책 이대로 좋은가? 난민법 개정을 위한 국민토론회’가 그 현장이었다. 김 의원은 “전 세계의 좌파들이 똘똘 뭉쳐서 기존의 질서를 흔들어 보려는 게 바로 난민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의원은 법사위에서 난민법 개정안이 통과되지 못할 경우 민주당의 법안도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앞서 법무부는 난민심사를 강화하고 난민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토론회에서는 “난민이 우리 딸들을 빼앗아가고 있다. 그래서 (남자들이) 장가도 못 간다. 베트남에서 (여성을) 데려오고 있다”(김승규 전 국정원장)는 기이한 주장도 나왔다. 집권한 지 1년이 지나도록 70% 안팎의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은 공교롭게도 난민과 인연이 깊다. 문 대통령의 부모는 1950년 흥남철수 때 미군 수송선을 타고 거제도로 탈출한 피난민 출신이다. 지난해 6월 미국 순방 도중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방문해 “장진호의 용사들과 흥남철수 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 까닭이다. 촛불혁명을 계기로 집권한 현 정부는 높은 인권의식도 드러낸 바 있다. 청와대는 지난 3월 마련한 대통령 개헌안에서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에서 ‘사람’으로 변경했다. “사람이면 우리 국적이 아니라도 외국인이나 망명자를 다 포함한다”는 취지였다.13일 마감된 난민신청 허가 폐지 국민청원에는 71만명 이상이 동참했다. 청와대는 30일 이내에 이에 답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계승해 문 대통령이 표방했던 ‘사람 사는 세상’의 진면목은 어떨지 몹시 궁금해진다. “피난민의 아들인 문 대통령이 예멘 난민 문제에 침묵하고 있다”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일침에 보기 좋게 응수하는 모습을 기대한다. 논설위원 douzirl@seoul.co.kr
  • [씨줄날줄] 이재용 부회장의 ‘어떤 만남’/이두걸 논설위원

    [씨줄날줄] 이재용 부회장의 ‘어떤 만남’/이두걸 논설위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어제 인도 노이다 휴대전화 생산 공장 준공식에 참석했다. 이 부회장의 인도행은 남다르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에 연루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가 지난 2월 2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풀려난 뒤 첫 공식 외부 일정이다. 이 부회장의 이번 인도행은 사실상 ‘삼성 황태자’의 복귀를 알리는 신호탄이다.이 부회장의 인도행이 주목받는 더 큰 이유는 ‘어떤 만남’ 때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어제 이 부회장과 공식 회동을 가졌다. 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주요 대기업 총수들을 만났지만, 이 부회장을 대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문 대통령이 삼성에 힘을 실어 주는 건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애플과 함께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을 이끄는 삼성전자는 최근 중국 업체들과 힘겨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스마트폰이 반도체와 더불어 우리 경제를 먹여 살리는 수출 효자상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정부는 지원사격 수준이 아니라 대리전에 직접 나서도 모자랄 판이다. 하지만 만남의 대상이 이번 순방 경제사절단의 삼성 대표인 윤부근 삼성전자 부회장이 아닌 이 부회장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번 회동의 메시지는 ‘이 부회장이 삼성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복귀하는 걸 인정’하는 것으로 전달될 수 있다. 문 대통령은 삼성 대주주로서의 이 부회장이 아닌, 삼성을 진두지휘하면서 정부의 시급한 과제인 일자리 창출을 결정할 수 있는 이 부회장을 만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는 재벌 총수 일가 전횡방지와 대기업 지배구조 개선 작업을 하는 금융위원회와 공정거래위원회 등의 정책 방향과도 맞지 않는다. 이 부회장은 대법원의 확정 판결을 앞둔 ‘피고인’ 신분이다. 물론 피고인은 무죄추정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하지만 행정부 수반이 피고인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면 자칫 향후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될 수 있다. ‘이 부회장이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아도 사면하겠다는 신호’라는 뒷말까지 나오는 까닭이다. “(이 부회장과의 회동에 대해)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은지 의문”이라는 청와대의 반응은 ‘단기 기억상실’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청와대가 ‘이 부회장 2심 재판부를 파면하라’는 게시물에 대해 “청원에 드러난 국민의 뜻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답한 게 불과 5개월 전이다. 국정 운영은 현실적인 문제를 무시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해도 ‘촛불’의 정신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douzirl@seoul.co.kr
  • [길섶에서] 메멘토 모리/이두걸 논설위원

    요즘 유독 병원행이 잦다. 십수년간 투병을 이어 온 부친의 병세가 악화된 탓이다. 얼마 전부터는 아예 입원 생활 중이다. 병실의 풍경은 여전히 생경하다. 소독약과 노쇠의 냄새가 뒤섞인 공간에서는 삶과 죽음이 매 순간 치열하게 경쟁을 벌인다. 하지만 움켜쥐는 것보다 내려놓는 게 익숙한 이곳에서 생명의 시간은 각자의 속도로 자정을 향한다. 병원 문을 나서자마자 맞닥뜨리는 한여름의 햇살은, 그래서 더욱 비현실적이다. 소설가 이청준 선생의 작품을 원작으로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영화 ‘축제’는 호남 지역의 장례 모습을 담담히 비춘다. 수많은 인연과 사연으로 얽히고설킨 인물들은 노모의 죽음을 매개로 모이고, 결국 해원(解怨)의 순간을 맞는다. 한 사람의 사그라듦이 남은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장을 마련해 주는 것처럼 우리 전통에서 죽음은 내세(來世)에서의 또 다른 삶과 맞닿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완전무결한 ‘없음’이자 새로운 ‘있음’의 시작이다. 그러기에 ‘죽음을 기억하라’(메멘토 모리)는 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투를 견뎌 내겠다는 다짐이자, 근거다.
  • [씨줄날줄] ‘재벌’의 공익재단/이두걸 논설위원

    [씨줄날줄] ‘재벌’의 공익재단/이두걸 논설위원

    우리나라의 1호 공익재단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 6월에 출범한 양영회(현 양영재단)다. 삼양사 창업주인 김연수 회장이 사재 34만원을 내놓아 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공익재단 설립이 줄을 이었지만, 이때 공익재단은 탈세와 변칙 상속의 온상으로 지목되곤 했다. 2000년대 이후 설립된 공익재단 역시 불온한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06년 ‘삼성 X파일 사건’ 이후 헌납한 8000억원으로 설립된 ‘삼성꿈장학재단’(옛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이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재산을 출연해 만든 ‘청계재단’ 등이 대표적이다. 삼성꿈장학재단은 삼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청계재단은 이 전 대통령의 상속을 위해 급조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공정거래위원회가 1일 발표한 ‘대기업집단 소속 공익법인 운영실태 분석 결과’는 우리나라 공익법인의 민낯을 보여 준다. 2016년 말 기준 대기업집단 소속 공익법인 165곳은 자산의 22% 정도를 주식으로 보유하고 있고, 이 중 약 74%는 계열사 주식이었다. 문제는 해당 계열사의 절반 정도가 총수 2세 지분이 있는 계열사라는 점이다. 공익법인들은 계열사 주식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할 때 모두 찬성 의견을 던졌다. 재벌 총수들이 공익법인이 보유한 의결권 지분 중 5%는 상속·증여세가 부과되지 않는다는 점을 노려 공익법인을 경영권 승계의 지렛대로 악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이사장인 삼성생명공익재단은 2016년 2월 삼성물산 주식 200만주를 사들였다. 이 부회장의 삼성그룹에 대한 실질적인 지분율은 16.5%에서 17.2%로 상승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이사장인 정석인하학원은 지난해 3월 대한항공에 52억원을 출자했지만, 이 중 45억원을 다른 계열사로부터 현금으로 받아 충당했다. 이 과정에서 증여세는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공익법인은 증여세가 면제되는 점을 십분 활용한 결과다. 이쯤 되면 공익(公益) 대신 사익(私益) 재단이 더 어울릴 지경이다. 공정위는 일본 등의 사례에 비춰 공익법인의 계열사 주식 의결권 제한 등 개선안을 내놓을 계획이다. 국회에도 법률 개정안이 계류돼 있다. 하지만 ‘열 사람이 지켜도 한 도둑 못 잡는다’는 옛말처럼 제도 개선만이 능사는 아니다. 한국 자본주의가 본궤도에 오른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재벌 총수들이 사재를 내놓을 때 품었을 ‘선한 의지’를 자발적으로 유지하기를 기대한다. 선진국 한국에서 무리한 기대는 아니다. douzirl@seoul.co.kr
  • [서울광장] ‘국방의 의무’를 재구성하자/이두걸 논설위원

    [서울광장] ‘국방의 의무’를 재구성하자/이두걸 논설위원

    미국의 군사력 평가기관 글로벌파이어파워(GFP)에 따르면 한국의 군사력 순위는 올해 기준 세계 7위다. 프랑스(5위)와 영국(6위), 일본(8위) 등 전통적인 군사 강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하지만 우리 군은 내실을 따지면 4차 산업혁명시대 대신 아동까지 장시간 노동에 몰아넣었던 19세기 쪽에 더 어울린다. 병력은 62만 5000명으로 20만명 안팎의 프랑스나 영국의 세 배, 일본(24만 7000명)의 두 배가 넘는다. 한국의 국방 예산이 400억 달러(약 45조원)로 다른 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1인당 효율성은 절반 이하다. 몸집만 불린 채 물주먹을 휘두르는 권투선수가 딱 우리 처지다. 현대전에서 보병 위주의 지상군 작전이 불필요하다는 건 육군사관학교 교본에도 나온다. 그럼에도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모병제를 반대한다. 이는 오답 쪽에 가깝다. 지난해 이동환·강원석의 ‘한국군 병역 제도의 모병제로의 전환 가능성 연구’ 논문은 육군의 2030년 모병제 전환 비용을 7조원 정도로 제시한다. 병사 한 명당 20대 근로자 평균 임금을 지급하고, 전체 병력을 2030년 52만 2000명으로 감축한다는 정부 계획이 유지된다는 전제다. 2030년 병력 유지비 증가분은 11조 5000억원에 달한다. 지금의 국방 예산 수준을 유지한다면 12년 뒤 모병제를 도입해도 정부가 추가로 지갑을 열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현재 1.3%인 인구 대비 병력 비율을 프랑스(0.6%) 수준인 30만명으로 낮추면 현재 예산으로도 당장 모병제 시행이 가능하다. 1조~3조원의 여유가 생겨 전력투자비로 돌릴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징병제로 과잉 병력을 유지하는 비용은 엄청나다. 프랑스 수준인 30만명을 초과하는 22만명의 병력이 경제 활동에 종사해 올해 최저시급 기준 연봉인 1700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가정하면 매년 3조 7000억원의 비용이 국방 분야에 추가로 지출되고 있는 셈이다. 대체복무인력 기회비용 등까지 합치면 징병제 유지 비용은 10조원을 넘고, 반대로 모병제로 전환했을 때 국가 전체 GDP 증가 효과는 매년 35조원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다. 수지 타산만 따지면 모병제가 징병제보다 낫다. 병력 감축에 따른 모병제 시행은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인구절벽’을 앞둔 우리 현실에도 맞는 데다 전문화를 통해 정예군을 육성하는 계기도 된다. 징병제가 폐지되면 국방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까라면 깐다’는 식의 무조건적인 충성심과 기계적인 업무만을 요구하는 군대와, 창의성과 자발성으로 무장한 군대 중 어느 쪽이 더 강할지는 누가 봐도 명백하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는 마지노선 고수라는 고루한 전술을 고집한 결과 ‘전격전’(blitzkrieg)을 내세운 독일에 점령당했다. 병력 축소가 간부들의 ‘자리 축소’로 이어진다며 모병제 도입에 소극적인 육군 내부의 분위기도 있지만 이를 배려할 만큼 우리 처지가 여유롭지 않다. 징병제가 폐지되면 저소득층만 주로 군 복무를 할 거라는 우려도 나온다. 그렇다면 군대를 어엿한 일자리와 계층 상승의 수단으로 개선하는 게 정도(正道)다. 베스트셀러 ‘힐빌리의 노래’ 저자인 J D 밴스는 쇠락한 공업지대인 ‘러스트벨트’ 출신이지만 군 복무를 계기로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실리콘밸리의 젊은 사업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 미 해병대에서 근무하면서 패배의식을 극복하고 학비도 번 덕분이다. 마침 28일 헌법재판소는 대체복무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국회에 내년 말까지 대체복무제를 도입할 것을 촉구했다. 대법원도 올해 안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정당한 입영거부 사유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 이참에 국민개병제에 국한돼 있는 ‘국방의 의무’의 개념을 재구성하는 게 어떨까. 양심적 병역거부자 외에도 일반 복무 대상자들도 복지나 안전 등 ‘사회복무’를 수행하면 국방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인정하는 게 예가 될 것이다. 징병제와 모병제를 혼합 운영하는 것도 검토할 만하다. 그래야 우리 군이 ‘4일에 한 번꼴로 군인이 자살하는 군대’가 아닌 ‘동북아 중심 국가에 걸맞은 작지만 강한 군대’로 거듭날 것이다. douzirl@seoul.co.kr
  • [씨줄날줄] ‘깡통주택’ 7%/이두걸 논설위원

    좋은 아파트가 좋은 가격에 나와 매매계약을 했는데, 기존에 살던 전셋집 주인이 말썽이라며 지인이 조언을 구했다. 계약기간 종료를 앞두고 “4억원의 전세 보증금을 돌려 달라”고 해도 “집이 안 나간다”며 ‘배 째라’ 식이란다. 2년 전보다 전셋값은 떨어졌는데도 집주인이 기존 가격에 세를 놓았으니, 세입자 찾기가 난망이다. 집주인은 대출이 꽉 차서 추가 대출이 불가능하다. “집주인에게 전세금 반환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내용증명을 보내고 소송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절반의 해법’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올해 들어 아파트 입주 물량이 크게 느는 데다 전세가격이 하락하면서 집주인이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는 ‘역전세난’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은행은 전세가격이 외환위기 당시처럼 20% 급락하면 전체 임대가구의 7.1%는 기존 금융자산이나 주택담보대출 등을 통해 보증금 감소분을 마련할 여력이 없다고 경고했다. 전세가격이 하락하면 집값도 내려가고, 결국 집을 팔아도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깡통주택’이 그만큼 증가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전체 임대주택 274만 가구 중 20만 가구 정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특히 다주택자들은 자금 사정 악화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다주택 임대가구 중 금융자산보다 부채가 많은 비율은 34.2%에 달한다. 이들은 최근 1~2년간 유행이던 높은 전셋값에 기대 제 돈은 얼마 들이지 않고 아파트 등을 사들인 ‘갭 투자자’일 가능성이 크다. 다주택자들은 과도한 집값 상승의 주범으로 지목돼 지난해부터 정부 규제의 집중 표적이 됐다. 보유세 개편과 양도소득세 중과 등 세금 규제와 은행 대출규제 등은 이들을 겨냥한 정책이다. 경제 행위에 대한 책임은 경제 주체의 몫이다. 시장 상황의 변화에 따른 투자 손실을 일일이 정부가 보전해 줄 이유는 전혀 없다. 하지만 주택공급 물량의 안정화를 꾀하는 건 정부의 의무다. 공급 물량이 매년 들쭉날쭉하면 전세가격 역시 롤러코스터를 타게 되고, 그 피해는 결국 세입자가 입게 된다. 다만 정부는 혹시나 있을 수 있는 깡통주택 속출 사태 등에 대비해 세입자 보호제도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지역이나 주택가격 등의 특성이 정교히 고려돼야 함은 물론이다. 세입자들도 당장 급한 자금은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서 받을 수 있는 ‘전세금 반환 보증보험’ 등의 제도를 이용해봄 직하다. 3억원짜리 전세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을 경우 연간 38만원 정도의 보험료만 부담하면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두걸 논설위원 douzir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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