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권의 책] ‘결코 작지않은 나라’ 신라의 재발견
고구려사는 드라마의 인기와 중국의 역사왜곡 시도와 맞물려 가장 뜨거운 화두가 됐다. 그렇다면 고구려를 정복한 신라사는 어떠한가. 역사학자가 아닌 지리학자인 저자 이기봉씨는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푸른역사 펴냄)’을 통해 작은 나라로 치부됐던 신라사의 이면을 밝혀낸다.
흔히 ‘대한민국은 작은 나라’라고 하지만 이는 중국, 일본과 비교한 것으로 조선을 15세기 유럽에 옮겨 놓으면 가장 거대한 나라에 해당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조선 정도의 인구 규모에 해당되는 나라가 지방 구석구석까지 지방관을 파견해 다스렸다는 것은 15세기의 유럽에서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시아를 제외하고 유럽 근대 이전과 비교하면 고구려, 백제를 정복했던 통일신라보다 더 많은 인구를 가진 통일제국은 많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잘해야 로마제국이나 아테네 주도의 그리스, 알렉산더제국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같은 주장의 근거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전성기에 경중(京中)에 17만 8936호,1360방,55리와 35개의 금입택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호의 구성원을 5명으로 잡는다면, 당시 경주에만 약 120만명이 살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도의 인구가 이 정도였다면 신라 전체의 인구는 114만호, 약 570만명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저자는 계산한다. 신라의 수도 경주에 17만 8396호가 살았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잘못 기입한 것으로만 치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발로 뛰는 답사로 방증된다. 산간 오지에 남아 있는 신라 때 하층계급이 살았던 부곡을 답사하면서 생각을 굳히게 된다.
포항시 죽장면에 있는 죽장부곡 지역이나, 영양면 수비면에 있던 수비부곡 지역은 정말로 산간오지였다는 것이다. 이런 곳까지 개간되어 사람이 살았다면 통일신라 때 이미 조선 초기 못지않은 개간사업이 이루어졌고, 이는 풍부한 노동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120만명이 넘는 경주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 경주와 울산까지의 지형은 매우 평평한데 일단 울산까지 배를 이용해 식량을 가져오기만 하면, 경주까지 운송은 문제가 안되었다는 것이 지리학자의 시각이다.
삼국유사에서는 “밥을 짓는 데 숯으로 하지 땔감으로 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17만 8936호나 되는 경주인들이 매일 밥을 짓는 데 나무를 썼다면 경주의 산이란 산은 모두 민둥산이 됐을 것이다.
고대 경주인들이 한정된 자원으로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숯으로 밥을 했고, 북방지역과 달리 온돌을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기존 역사학계에서 좀처럼 시도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려진 신라사는 저자의 발품과 지리지를 자주 들여다 본 노력에 의해 가능했다.
이 책은 그동안 별 주목을 받지 못했던 역사지리학적 시각으로 신라사를 새로 해석하려 한 시도를 담고 있다. 수도는 곧 권력이자 국가라는 수도의 중차대한 상징성에 주목해 경주를 연구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경주를 새롭게 탄생시켰다.384쪽.1만 4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