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계석/ ‘1910년대 식민통치’ 학술대회, 권태억교수 주장/“항일의지에 막힌 일제 同化정책”
일제의 식민지배가 본격화한 1910년대의 ‘동화(同化)정책’은 본래적 의미의 동화정책이 아니었으며,추진 강도도 매우 약한 예비과정에 불과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권태억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최근 서울대 인문대학에서 열린 서울대한국문화연구소(소장 이병근)주최 ‘1910년대 식민통치 정책과 한국사회’주제의 학술대회에서 ‘1910년대 일제의 조선 동화정책’이라는 연구주제를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권 교수는 “이 시기의 ‘동화정책’은 식민 지배와 한국인에 대한 현실적인 차별을 합리화하는 정치적 선전의 성격이보다 강했다.”면서,그 근거로 동화정책의 상징적 사례처럼 거론되는 창씨개명이 1940년에 비로소 시작된 점을 들었다.권 교수의 주제발표를 요약한다.
일제는 조선 통치정책의 기조를 동화정책이라고 했다.그러나 제국주의 식민지배 정책사에서 동화정책을 실시한 대표적 나라인 프랑스의 경우,기본적으로 식민지에 본국과 동일한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식민지 및 그 주민을 본국에 통합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었다.일제가 이런 유형의동화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한 것은 식민지 지배 말기였다.동화의 상징적 정책인 창씨개명은 1940년에 비로소 시작됐다.
그렇다면 일제 식민지배의 기초를 닦은 1910년대에 동화정책은 어떻게 이해·표방되고 추진됐으며 그 구체적 성격은 무엇인가.
일제의 합병이 형식상으로는 황제가 조선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양여하는 형식을 취했지만,의병항쟁 등의 저항을 겪은 일제로서는 한국인들의 인심을 무마해 지배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작업이 우선 필요했다.
이때 등장한 대표적 담론이 바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문명화론’이다.전자가 ‘태고부터 일본과 한국에 존재한 일체불가분의 근친성’을 근거로 했다면,후자는 낙후한 동생의 나라 한국을 문명화하는 일이라고 미화하는 것이었다.일제의 동화정책은 이렇게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담론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전개되었다.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는 조선합병 직후 훈령에서 “병합의 취지는 두 나라가 상합(相合)하여 일체를 삼고,피아 차별을 철거하여 상호 전반의 안녕과 행복을 증진하려는 것”이라고 했다.당시 총독부 기관지는 ‘천황폐하의 일시동인(一視同仁)아래서 이 땅을 개척하며 이 백성을 이끌어 일선(日鮮)의 생민으로 하여금 같이 문명의 덕택을 받으며,같이 문명지역으로 나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을 일본 헌법의 적용 범위에 포함시키는 등의 핵심적인 동화정책은 실시하지 않았다.그들은 그 이유로 시세(時勢)와 민도(民度)의 차이를 들었다.즉 한국의 사정은 일본과 다르며 문화수준도 떨어지기 때문에 일본 제국헌법을 적용하지 않는 ‘특수한 통치’를 시행해야 하며,일본에 동화하기 전까지 한국인은 동등한 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합병 초기에 상당히 조심스러웠던 동화정책은 1915년을 경계로 적극적으로 바뀐다.이유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이권 획득과 1915년 ‘시정 5주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의 성공적 개최에서 얻은 자신감 때문이었다.
데라우치 총독은 이 시기에 “병합의 종국의 목적은 정신적 동화를 도모하여,내선일가의 실(實)을 거두는 데 있음은 말을필요로 하지 않는 바”라고 했다.이때부터 교육을 통한 장기적인 동화정책을 시행한다.
그러나 당시 보통학교 취학률은 10%대로 매우 낮았다.동화정책의 가장 중요한 수단을 교육이라고 하면서도 의무교육을 실시하지 않았음은 물론,당시 정책선전의 통로이던 총독부 기관지의 발행 부수도 1910년대에는 2만 부를 넘지 못했다.따라서 1910년대 실시한 일본형 ‘동화정책’은 소극적인 것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1910년대 일제의 ‘동화정책’은 본래적 의미의 동화정책이 아니었으며,추진 강도도 매우 약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리 심재억기자 jesh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