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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성진
    202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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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성진 칼럼] 극단의 몰락

    [손성진 칼럼] 극단의 몰락

    생각이 다른 것은 생김새가 다른 것과 같이 당연한 일이긴 한데 생각의 끄트머리, 극단의 자리를 고집하는 이들이 항상 있다. 이념에서도 그렇고 정치에서도 그렇다. 극단을 선택하는 것은 대중의 관심을 쉽게 끌 수 있는 충격적인 요법이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좌파 극단주의자로 통하며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버니 샌더스도 극단주의자라는 곱잖은 평가를 듣는다. 우파에서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정치권과 그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극단주의가 위험한 것은 자신만이 옳다는 과도한 자기 확신에서 비합리적 의사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융통성이나 유연성과는 거리가 멀고 선동을 해도 대중이 따라주지 않을 때에는 테러라는 무시무시한 수단으로 생각을 관철시키려 한다. 좌파적 극단주의는 일단 논외로 하고 한국에서 우파적 극단주의는 이번 총선을 통해 국민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 서너 개의 극우정당이 받은 표는 전체 국민의 3%에도 못 미치며 표수도 100만 표 언저리에 머물렀다. 물론 극좌든 극우든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민주국가에서는 정치활동이 방해받아서는 안 되며 다만 국민의 지지나 반대의 표심으로만 살피면 된다. 이른바 태극기부대에서 촉발된 극우적 정파는 시대를 오판한 과거회귀적 주장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그 결과 저변을 넓히지 못하고 그들끼리의 세계에 갇힌 꼴이 됐다. 악다구니만으로는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준열한 평가를 다수 국민이 내린 것이다. 보수 우파 미래통합당도 선거 일정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극우와 선을 긋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에 경고음이 울렸음에도 끝내 각계의 충언을 외면하고 말았고 선거 참패라는 자업자득의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확인되지 않은 보도를 근거로 한 차명진 후보의 막말에 탈당 권고라는 하나 마나 한 징계를 한 것에서 이미 참패의 시그널은 나타났는데도 통합당의 리더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현재, ‘북한 김정은 사망설’을 어떤 근거도 없이 느닷없이 쏟아낸 통합당 당선자들도 차명진의 막말 계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김정은이 건재하든, 사망했든 우리가 어느 쪽도 바랄 일이 아니며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단지 북한의 상황에 맞게 대처하면 그만이다. 근거도 없이 건재하다고 우기는 것을 종북이라고 친다면 무조건 사망했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불필요한 혐북(嫌北)일 뿐이다. 정치 발전과 독선 견제를 위해서는 좌우 정파의 건전한 정책적 대결이 필요하다. 일본 정부가 일사불란하게 완고한 대한(對韓) 정책을 고수하는 것은 우파 자민당이 장기집권하는 정치적 토양에서 비롯된 것이다. 힘의 균형을 잃은 정치는 자국뿐만 아니라 주변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제1야당으로서 통합당의 역할은 막중하지만 건전한 보수정당으로 거듭남에 대한 기대는 처음부터 싹수가 노랗다. 여당의 ‘장기집권’은 따 놓은 당상처럼 보이는데 자신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민주당 장기집권의 일등공신이 바로 통합당 자신들인 셈이니 스스로 한심하지 않은가. 거대 여당이 된 민주당은 사실 좌파 정당으로 불리지만 보수적 정책까지 수용해 변신을 시도할 개연성이 크다. 이미 민주당을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국민도 적지않은 마당인데 그렇다면 앞으로 선별적인 정책에서 좌우를 아우르는 정책을 여당은 구사할 것이다. 통합당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고 양극화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통합당에 대한 지지율이 반전할 가능성도 작아진다. 우클릭하는 여당처럼 소외계층을 보듬을 적극적인 좌클릭 정책을 통합당은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극단적 발언과 정책은 설 땅이 없다는 사실이 실증적으로 선거에서 드러났다. 단지 우파만의 문제가 아니다. 맹신적 좌파들 또한 극단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우파의 극단주의를 나무랄 충분한 자격이 없다. 극단의 몰락은 민주 정치, 민주 국가에서 발전을 위한 좋은 신호다. 극단주의가 세계 역사를 후퇴시키거나 발목을 잡은 사례는 많다. 무엇보다 극단은 협력과 통합을 거부하고 다른 사람, 다른 이념과 어울릴 수 없다. 극단이 판치는 사회는 늘 투쟁만이 남게 된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이념적 극단, 정책적 극단, 언어적 극단과 하루속히 결별하는 것이 국민의 지지를 얻는 길임을 인식하기 바란다.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달맞이꽃/손성진 논설고문

    붉은 꽃들은 강렬한 태양 아래에서 더 현란하다. 검붉은 장미나 선홍빛 양귀비가 그런데 무심하게 쳐다보다 짐짓 아찔함을 느낀 적이 있다. 붉은 튤립 꽃밭에서도 레드(red)의 찬란함은 찾아오는 사람들을 도취시키고 있었다. 꽃들은 저마다 태양의 계절을 반기고 있지만, 빛을 싫어하는 꽃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은 남들보다 뒤늦은 최근의 일인데 그것도 유행가를 통해서였다. 누구나 아는 달맞이꽃이다. 여름밤에 피어 아침이 되면 시드는, 일반적인 꽃과는 정반대의 품성을 갖고 있다. 달맞이꽃의 이런 성질은 햇볕이 내리쬐는 환경에서는 꽃이 필 수 없는 유전적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수정도 벌이나 나비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방이나 박각시 같은 밤에 활동하는 곤충이 한단다. 약용식물로서도 유익한 꽃이다. 지금까지 잘 볼 수 없었던 것은 달밤에 피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산에 달님도 기울어 새하얀 달빛 아래 고개 숙인 네 모습 애처롭구나’ 가사의 한 구절처럼 빛을 피해 밤에 피는 달맞이꽃에서는 쓸쓸함이 배어 나온다. 그러나 유채꽃과도 닮은 노란 꽃의 자태는 아름답기만 하다. 과시하지 않고 그늘진 곳에서 조용히,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떠올려 주는 꽃이다. sonsj@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양치질 습관을 바꾸다 -‘라이온 치마’/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양치질 습관을 바꾸다 -‘라이온 치마’/손성진 논설고문

    칫솔과 치약이 없던 근대 이전에는 소금을 손가락에 묻혀 양치질을 했다. 수십 년 전 시골에서도 노인들이 소금으로 이를 닦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소금도 귀한 물건이어서 서민들은 그저 지푸라기 같은 것으로 치아의 이물질을 제거했다고 한다. 또 버드나무 가지 끝을 수십 개로 쪼개어 지금의 칫솔처럼 사용했다고 한다. 칫솔에 치약을 묻혀 이를 닦는 것이 양치질인데 양치의 어원이 버드나무와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다. 즉 버드나무 가지를 한자어로 양지(楊枝)라고 하는데 양지질이 양치질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추스틱이라는 이쑤시개로 치아를 관리했다. 최초의 칫솔은 15세기에 중국에서 발명된 것으로 보인다. 수퇘지의 억센 털을 대나무나 뼛조각에 박아 칫솔을 만들어 썼고 유럽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1780년 무렵의 영국에서 개량된 칫솔이 나왔는데 나폴레옹이 사용했다는 말털로 만든 칫솔의 실물이 지금까지 전한다. 1938년 미국 듀퐁사가 나일론 칫솔을 내놓아 칫솔은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됐다. 치약 대용으로 소금 외에 고대로부터 달걀껍질이나 조개껍데기 등을 가루로 내 썼다고 한다. 1860년 무렵 영국에서 가루도 된 치분(齒粉)이 발명됐고 현재와 같은 형태의 치약은 1896년 미국의 콜게이트가 개발했다. 우리나라에 치약이 들어온 것은 1889년이며 가루 형태였다. 그 후 1891년 일본에서 창업한 생활화학 기업 ‘라이온’은 ‘사자표 라이온 치마’라는 치약을 1896년 개발, 국내에도 들여와 시장을 지배하게 됐다. ‘치마’(齒磨)는 이를 갈아 낸다는 뜻의 분말치약이다. 라이온 치마는 일제강점기에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광고의 하나였다. 일본 기업 라이온으로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치약을 써 본 적이 없는 한국은 큰 시장이었다. 그런데 라이온 치마는 광복 후에도 계속 팔렸다. 아마도 일본은 물러갔지만 수요가 있었기에 우리나라 사람이 대표인 라이온 치마 국내 회사가 일본에서 물건을 들여와 판매했을 것이다. 위 광고는 1950년 3월에 나온 라이온 치마 광고로 대표가 전석규로 돼 있는데 전씨는 일제강점기에 라이온 치마 국내 지점의 대표로 있던 사람이다. “너도나도 조석으로 이를 닦는데 반드시 라이온 치마분을 애용합시다”라고 적혀 있다. LG그룹의 모태 기업인 ‘락희화학공업사’가 칫솔은 1952년, 튜브형 치약은 1954년에 생산하기 시작했다. 짜서 쓰는 젤 형태의 치약을 드디어 우리 손으로 만들어 냈지만, 분말 치약도 바로 없어지지 않아 라이온 치마는 1950년대 중반까지도 팔렸다고 한다. sonsj@seoul.co.kr
  • <신간 소개>퍼스널 브랜딩에도 공식이 있다 / 조연심 지음

    <신간 소개>퍼스널 브랜딩에도 공식이 있다 / 조연심 지음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가장 빠르게 연결되도록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고객의 개인화된 쇼핑경험을 서비스한다.” 제프 베조스가 1994년 시애틀에 설립, 약 3억 명의 가입자와 19년 매출 2805억 달러를 달성한 ‘아마존’이 내건 슬로건이다. 브랜드 메이킹 전문가인 저자는 지난 10여 년간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퍼스널 브랜딩 컨설팅을 통해 기업과 개인과 개업이 자신을 설명하는 메시지를 정의하는 것이 영향력을 키우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성공하는 ‘브랜드’가 되려면 아마존의 슬로건처럼 짧고, 강력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를 ‘원샷 메시지’라고 정의하고 성공적인 브랜딩을 위해 창안한 공식을 전하고 있다. 지식소통가이니 저자는 브랜드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코칭하여 세상을 움직이는 영향력, 그 중심에 가도록 돕는다. 개인과 기업이 브랜드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비전과 강점을 비롯한 모든 것이 표현되고 이것이 그대로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표현할 문장을 만들고 문장대로 실천해 나가면 힘이 생기고 이것이 바로 브랜드 파워가 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왜 원샷 메시지가 필요한지, 그 메시지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자신만이 특별한 메시지를 만들 수 있는지를 말하고 그와 더불어 성공한 브랜드가 되기 위한 마케팅 전략도 소개하고 있다. 328쪽, 힘찬북스, 1만6000원.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광고 속의 명월관/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광고 속의 명월관/손성진 논설고문

    명월관은 궁중 요리 전문인 근대 최초의 대형 요정으로 지금의 서울 세종로 동아일보 본사 자리에 있었다. 1903년 개업했다는 명월관 광고가 최초로 나온 것은 만세보 1906년 7월 14일자로 위치는 황토현(서울 세종대로 사거리) 기념비 앞, 주인은 김인식으로 돼 있다. 동서양과 한국의 각종 주류와 과자, 담배, 차 등을 갖추어 놓았다고 돼 있고 기생 얘기는 없다. 대한매일신보 1906년 10월 2일자에 목욕탕까지 갖춘 2층 양옥으로 신축 공사에 착수했다는 기사가 날 정도로 이름난 음식점이었다. 석 달 후인 1월 4일자에 확장 공사가 끝나 개장했다는 광고가 나왔다. “공주관찰사 이건영씨가 재작일(그저께) 명월관에서 연회를 개설하고 탁지부 일반 관인과 기타 빈객(귀한 손님)을 초청해서 잔치를 베풀었다더라.” 이 기사(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 24일자)에서처럼 손님은 주로 고관대작들로 환영회, 송별연, 망년회 등이 열렸다. 명월관이 기생 요정으로 변신한 것은 1909년 관기(官妓) 제도의 폐지와 관련이 있다. 궁내부 주임관과 전선사장(典膳司長)으로 있던 안순환이 인수해 갈 곳이 없어진 궁중 기녀들을 고용, 궁중요리를 선보이며 요정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확장 공사를 더 해서 2000명 이상의 연회를 할 수 있다고 광고했으니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안순환은 조선의 마지막 대령숙수(조선시대 이조 사옹원 소속인 궁중의 남자 요리사)였고 일진회 평의원 등으로 활동한 친일파였으며 시흥에 녹동서원을 설립하고 단군전을 건립하기도 했다. 명월관 광고는 자주 나온 편이었다. 사진 속의 명월관은 1913년 신년호 광고에 나온 것으로 ‘조선 요리의 원조’라는 글귀가 들어 있다. 왼쪽은 출입문이고 오른쪽은 서양식 건물에 기와지붕을 얹은 모습이다. 명월관에 불이 난 것은 1919년 5월 23일 오전 6시쯤이었다(매일신보 1919년 5월 24일자). 화재 원인에 대해 기사는 발화 지점은 온돌방이 2층에 있어서 불이 나기 쉬운 구조라고 분석했다. 포털에서는 불이 난 날을 1918년 5월 24일이라고 했는데 이 또한 1년이나 틀린 것이다. 화재 후 장춘관 주인 이종구가 명월관 상호를 사들여 1921년 돈의동(옛 피카디리극장 자리)으로 옮겨 영업을 계속했다. 그전부터 종로구 인사동에 명월관의 분점인 태화관이 있었는데 순화궁을 개조한 곳으로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된 곳이기도 하다. 태화관 건물은 이후 감리교에 팔려 영업을 중단했다. 돈의동 명월관은 서린동에 지점을 두었다. 1948년 서울시의 폐업 조치로 궁중요리의 전통을 이어 온 돈의동 명월관은 문을 닫게 됐다.
  • [길섶에서] 업보(業報)/손성진 논설고문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없지 않아 있는데 그때마다 ‘업보’(業報)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국어사전에는 ‘선악의 행업으로 말미암은 과보(果報)’라고 어렵게 풀이돼 있는데 쉽게 말하면 ‘내 탓’이라는 뜻이다. 나도 잘못한 것이 있었고 그 때문에 화를 불렀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누구나 전생이든 현생이든 지은 죄와 잘못이 없을 수 없다. 당장 지금은 잘못이 없다손 치더라도 눈을 감고 나의 과거 업보라고 생각해 보자. 내게는 한 번의 잘못도 없었다는 옹고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그 때문에 세상살이가 더 힘들어질뿐더러 스트레스를 더 받는다. 한 살씩 더 먹어 가면서 나잇값을 하려면 용서하고 화해하고 인내하고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 나 또한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나이를 헛먹고 헛공부를 한 것이다. 연륜을 쌓을수록 늙어갈수록 선하고 바르게 사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멋대로 살고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어지나 보다. 내게도 곧 다가올 미래이지만 젊은이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어르신은 추해 보인다. 잔뜩 흐린 아침에 잠시 명상을 하며 푸른 바다의 수평선을 떠올려 본다. sonsj@seoul.co.kr
  • 목숨 걸고 광복군에 무기 공급… 항일투쟁 중 사료 모아 독립사 집필

    목숨 걸고 광복군에 무기 공급… 항일투쟁 중 사료 모아 독립사 집필

    “위협과 모욕을 수없이 퍼붓다가 필경에는 온갖 악독한 형벌을 행한다. 나를 꿇어 앉힌 후에 직경 삼촌(三寸)쯤 되는 통나무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양단에 두 놈이 올라서서 통나무를 디디면 형문(刑問) 다리가 부러질 듯 기절하게 되는데, 나는 끝까지 아무 말도 않고 당하였다.” 1929년 2월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힌 김승학 선생이 고문을 받던 상황을 기록한 ‘망명객행적록’ 부분이다. 희산(希山) 김승학 선생은 만주 대한독립단에서 활약하고 독립신문 사장과 참의부 참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다. 선생은 1881년 7월 12일 평북 의주군 비현면 마산동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이웃집 방아를 찧어 주고 삯으로 등겨를 받아와 먹었다고 한다. “등겨에 백태(白太·흰콩)를 약간 섞은 것은 상미(上味)라 하여 우리 형제를 먹이고 부모님은 순전한 등겨만을 자시었다. 아침은 겨밥, 저녁은 송피 범벅, 이런 생활을 매일 계속하였다.”배움에 대한 열의가 강했던 선생은 가난한 살림에도 7년 동안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익혔다. 1899년 선생은 명망 있던 유학자 조병준(건국훈장 독립장)의 문하생이 됐다. 조병준은 “우리는 섬 오랑캐 왜노(倭奴)와 400년 동안 원수인데 을미년에 우리 국모 명성황후를 참시(慘弑)하였으니, 우리 선비로서는 거의하여 왜노를 토벌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다”라고 말했다. 선생은 스승의 우국충절에 크게 감동해 서간도 지역을 다섯 달 동안 답사하며 독립운동을 꿈꾸었다. 선생은 1904년 한문박사과 시험에 응시했는데 시험 부정으로 탈락하고 말았다. 이에 학무국장을 찾아가 항의했다가 타협책으로 한성사범학교 입학을 제의받아 1년 남짓 신학문을 공부했다. 1907년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자 선생은 서울 종로에서 배일(排日) 강연을 하다 체포돼 석 달 동안 구금당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극명학교 등에서 근무했는데 매일같이 일경이 찾아와 “김승학과 같은 불온분자에게 교육을 받으면 순량한 자제들까지 불량자가 된다”며 이간질을 했다. 더는 고국에서 있을 수 없었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선생은 만주로 건너가 봉천성 관립 강무당에 입학, 군사교육을 받고 의병단에 가담해 6년 동안 활동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만주에서 대한독립단이 결성됐는데 선생은 재무부장이 됐다. 선생의 첫 임무는 국내에 잠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 지단(支團)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평남북 일대를 다니며 친지, 동창들을 설득해 지단과 연통제 기관을 만들었다. 첩보를 접한 일경은 집요하게 추적했고 선생은 배추씨 장수와 좁쌀 장수로 가장해 그때마다 따돌리며 활동을 계속했다. 목숨을 건 활동 덕분에 1920년 1월까지 평안남북도 일대 52곳에 하부 조직을 만들고 독립운동 자금도 수만원을 모았다.선생은 이어 상하이임시정부에 대표로 가서 만주 독립운동 통합단체 명칭을 받고 무기를 구입해 오는 임무를 맡게 됐다. 마우저 총과 루저 권총 240정, 탄환을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구입하기는 했는데 운반이 문제였다. 철궤 4짝을 사서 포장한 뒤 누에고치 거래로 위장해 우여곡절 끝에 압록강변 안동현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경이 정보를 듣고 대기 중인 상황이었다. 독립군을 도와주던 이륭양행 주인 아일랜드인 조지 쇼의 도움으로 무기는 내렸지만 선생은 야음을 틈타 상륙하다 경찰견까지 동원한 일제의 추적을 받게 됐다. 옥수수밭에 사흘이나 숨고 맨발로 산골짜기를 헤매며 천신만고 끝에 귀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이 무기는 국내 동포들이 주는 것이니 제군들은 무기를 생명과 같이 사랑하여 한 발의 탄환이라도 헛되게 쓰지 말고 1탄에 왜적 1명씩 잡기로 결심하여야 한다.” 1920년 광복군사령부 무기수여식에서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이 무기로 광복군사령부는 서너 달 동안 일본군과 78회 교전하면서 주재소 등을 습격해 일경 95명을 사살하는 막대한 전과를 거두었다. 일제가 한인들을 학살한 경신참변 후 선생은 임정에 상황도 알릴 겸 두 번째로 상하이로 갔다. 뜻밖에도 선생은 독립신문 사장을 맡게 됐다. 당시 독립신문 책임자였던 소설가 이광수는 변절해 국내로 돌아갔고 프랑스 조계에 있던 신문사는 일제의 방해로 인쇄 도구가 압수되고 신문 발행이 중단된 상태였다. 선생은 프랑스 영사관과 교섭한 끝에 신문을 복간, 1927년까지 6년 동안 발행을 책임졌다. 그동안 일제의 추적을 피하고자 28번이나 인쇄소를 옮겼는데 한번 옮길 때마다 마차 2량과 인력거 20여대가 필요했고 한밤중에 이사를 다니기도 했다.선생은 1924년 무렵 임정 학무부 총장 대리 등의 직도 맡았다. 그런데 당시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인 통의부와 참의부의 알력이 깊어져 유혈극이 벌어졌다. 독립신문의 글 때문에 불똥이 선생에게까지 튀자 사장직을 사임했다. 그것도 잠시 선생은 임정의 임명으로 비어 있던 참의부 제4대 참의장이 됐다. 갈등을 겪으면서도 참의·정의·신민 3부는 통합을 추진했는데 통일 단체 이름은 ‘혁신의회’였다. 1929년 2월 5일 선생은 혁신의회 회의를 마치고 나오다 환인현 와니전자에서 일경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상하이에서 무기를 구입한 일, 독립신문을 발간한 일 등을 캐물으며 일경은 혹독한 고문을 했다. 특히 선생이 틈틈이 수집해서 보관하던 독립운동사 사료를 내놓으라고 추궁했다. “왜경에게 피포(被捕) 후 손발이 요절되는 수십 차 악형이 주로 이 사료 수색 때문이었다”고 선생은 밝힌 바 있다. 선생은 굴복하지 않았고 5년의 옥살이도 버텨냈다.출옥 후 선생은 다시 만주로 망명, 임정 베이징 조직을 맡고 만주 천금채에 맡겨 둔 독립운동 자료를 찾았다. 독립운동 자료는 선생에게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베이징 조직이 탄로 나는 바람에 선생은 베이징을 탈출, 70여일 동안 무려 1000㎞를 뚫고 한구에 도착했고 만주로 돌아와 은둔하다 그리던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선생은 정치 참여는 자제하고 독립신문 복간과 독립운동사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복간은 중단됐고 ‘한국독립사’는 1964년 탈고했지만 출간 직전인 1964년 12월 17일 선생은 별세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경기 고양에 있던 묘소는 2012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했다. 광복회 학술연구원장으로 있는 장증손자 김병기 박사를 만났다. 선생은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도 여러 번 감옥에 갇혔고 자손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선생과 가족들은 피란지 부산에서 10여년을 살았는데 부두 노동자 취업도 못하게 이승만 정권의 탄압과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오리를 키우고 행상을 해서 생계를 잇는 형편이라 자손들이 포상 신청을 하자고 하자 선생은 “독립운동을 한 게 무슨 벼슬이라도 되느냐”고 화를 내며 만류했다고 한다.김 박사에 따르면 정부가 독립운동가 포상을 시작한 때가 1962년인데 처음에는 친일 역사학자들이 심사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들이 반발해서 이듬해 독립운동사 편찬자인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도 심사위원으로 위촉됐다. 선생은 심사를 하면서 이병도 등 학자들에게 “자네들이 독립운동에 대해서 뭘 아는가”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김 박사는 40대에 독립운동사 연구를 시작해 만주 참의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선생의 유업을 이어받아 ‘한국독립사’를 7권으로 나눠 현대화하고 보완해 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단성사 공연 광고와 박승필

    [근대광고 엿보기] 단성사 공연 광고와 박승필

    영화 전용극장은 1910년 개관한 경성고등연예관이 최초이지만 그보다 앞서 1907년 6월 서울 종로구 묘동에서 전통 연희를 공연하면서 영화도 상영하는 단성사가 문을 열었다. 일종의 복합공연장이었다. 단성사는 그 안에 흥행 단체인 ‘강선루’를 조직하고 기생과 창부를 전속으로 두어 종전의 기생 가무를 개량해 새로운 형태의 연극을 기획해 공연했다. 위 광고는 1912년 ‘강선루 일행’의 공연을 알리는 광고다. 강선루는 공연 단체의 이름이자 공연 이름이었다. 강선루는 4월 21일부터 5월 26일까지 공연했는데 승무, 검무, 전기호접무 등 전통 무용과 날탕패 공연, 가야금 연주 등을 선보였다. 5월 1일 관람객이 535명에 이를 정도로 공연은 성공을 거두었다(매일신보 1912년 5월 3일자). 그러나 “악공의 춤 장단이 너무 느려서 관람자에게 지루함을 느끼게 한즉 좀 빠르게 개량하는 것이 좋을 듯하며 음담패설이 곧 괴란한 것은 문영갑 등의 날탕패와 박춘재의 성주풀이니 제석타령이니 하는 것은 제집 안방에서 혼자라도 못할 것이거늘 하물며 수백 명의 남녀노소가 모인 연극장 아닌가”라는 호된 비평을 들었다(매일신보 1912년 4월 26일자). 기자 시각에서 본 일종의 공연 평인데 공연이 화려하기는 했지만, 내용이 당시 기준에는 문란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경찰의 취조(조사)도 있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단성사를 말하며 박승필을 빼놓을 수 없다. 일본인 손에 넘어간 적도 있었던 단성사를 1918년 인수해 상설 영화관으로 개축한 사람이 박승필이다. 박승필은 1908년 동대문활동사진소를 인수해 ‘광무대’로 바꾸고 판소리와 창극을 공연하며 전통 연희의 보존과 발전에 힘을 쏟은 인물이기도 하다. 박승필은 단성사 안에 영화촬영부를 설치하고 영화를 직접 제작하거나 제작을 지원한 한국 영화제작의 선구자다. 1919년 ‘의리적 구토’ 개봉은 박승필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연극에 영화를 가미한 연쇄극 형태인 의리적 구토는 한국 영화의 효시이지만 촬영과 편집 등에서 일본인의 손을 빌려야 했다. 박승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1924년 촬영·현상·편집 등을 온전히 우리 손으로 진행한 영화 ‘장화홍련전’을 제작, 개봉했다. 박승필은 국내 제작 영화와 ‘몬테크리스토 백작’ 등 서양의 최신 영화를 상영하는 한편 단성사를 전통 연희 공연장으로도 자주 개방했다. 또한 한국 영화의 도약점이 된 나운규의 ‘아리랑’이 상영된 곳도 단성사였고 이 영화를 제작한 ‘나운규 프로덕션’도 박승필이 후원했다. 박승필이 1932년 사망한 뒤 단성사의 역할도 축소됐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신문과 담배 판촉에 활용된 영화/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신문과 담배 판촉에 활용된 영화/손성진 논설고문

    우리나라에서 영화가 처음 소개되고 상영된 때는 1897년 전후로 추정된다.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대중 앞에서 영화를 처음 상영한 때가 1895년 12월 28일(세계 영화의 날)인데 각국에 기사를 보내 현지 풍경을 촬영하고 상영하며 영화를 세계에 전파했다. 활동사진을 처음 본 사람들은 영화 속 달려오는 기관차에 혼비백산하거나 스크린 뒤로 들어가 확인하기도 했다고 한다. 1901년 9월 14일자 황성신문에는 “사람들이 활동사진을 보고 신기함에 정신이 팔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마치 사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이 가히 움직이는 그림이라 할 만하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같은 신문 1903년 6월 23일자에는 “동대문 안 전기회사 기계창에서 상영하는 활동사진은 일요일과 비 오는 날을 제외한 매일 오후 8시부터 10시 사이에 상영하는데 대한 및 구미 각국의 도시와 극장의 절승한 광경이 구비되었다. 입장 요금을 동화(銅貨) 10전”이라는 기사가 있다. 극적인 요소가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풍경을 찍은 필름을 유료로 상영한 최초의 기록이다. 전기회사는 한성(한미)전기회사로 미국인 콜브란이 전차를 부설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였다. 사람들은 전차를 타고 동대문까지 가서 영화를 보고 되돌아오곤 했는데 하루 1000여명이 몰렸다고 하니 엄청난 인파였다. 1902년 근대 극장의 효시인 협률사가 왕실극장으로 서울 신문로 새문안교회 자리에 문을 열었고 1907년부터 단성사, 연흥사, 장안사 같은 민간 극장이 생겨나 판소리나 탈춤 등 전통 연희(演戱)를 공연하고 활동사진도 상영했다. 한성전기회사는 영미연초회사와 협력해 영화를 담배 판촉에 활용했다. ‘올드골드’, ‘히어로’, ‘할로’ 등의 고급 담배는 빈 갑 10장, 그보다 싼 ‘드럼헤드’ 같은 담배는 20장을 입장료로 대신 받았다. 한성전기회사는 동대문 기계창을 아예 ‘동대문활동사진소’로 바꾸었다. 동대문활동사진소는 1908년 광무대로 바뀌어 1914년까지 공연장 역할을 했다. 활동사진상설관 즉, 영화 전용 극장은 1910년 서울 을지로에 문을 연 경성고등연예관이 최초이며 1912년에는 우미관이 개관했다. 활동사진상설관은 부산과 대구 등 지방에도 들어섰다. 위 광고 속의 활동사진상설관은 대구 최초의 활동사진상설관으로 1911년 대구 중구 대안동에 문을 연 대구구락부다. 매일신보 대구지국 개설 1주년을 맞아 독자에게 반액 입장권 3장을 준다는 내용으로 영화를 신문 판촉에 이용한 것이다. 당시 영화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수입한 것이었고 우리나라 사람이 제작한 영화를 보기까지는 더 기다려야 했다. 한국 최초의 영화는 1919년 10월 27일(영화의 날)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한 ‘의리적 구토’다. sonsj@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인 ‘활명수’/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인 ‘활명수’/손성진 논설고문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 1897년 궁중 선전관 민병호가 궁중 비방에 서양의학을 접목해 부채표 ‘활명수’를 제조했다. 국내 최초의 양약(洋藥)이자 한·양방을 합한 퓨전 신약이었다. 같은 해 민병호의 아들 민강은 동화약방을 차려 활명수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활명수는 ‘목숨을 살리는 신통한 물’이라는 뜻으로 국내 최초의 상표이며 최장수 의약품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구한말에 화평당이나 제생당은 전통적인 제조법으로 약을 제조하던 약방으로서 큰 광고주였고 동화약방도 대한매일신보에 부채표를 로고로 내세워 광고를 해 왔다. 동화약방은 경술국치 이후 대한매일신보가 매일신보로 바뀐 뒤 1912년 1월 1일자에 신년 축하 전면광고를 게재했다. 매일신보는 이날 녹색과 붉은색을 섞은 컬러로 평소 지면의 네 배인 16면을 발행했는데 이 광고는 8면에 실렸다. 이날 광고는 대부분 ‘恭賀新年’(공하신년), ‘謹賀新年’(근하신년)의 제목을 써 넣은 새해 축하광고였다. 매일신보가 총독부 기관지라는 이유 때문에 민족기업인 동화약방이 일제에 협력했다고 할 수는 없다. 광고는 광고일 뿐이다. 더욱이 당시에는 기업이 광고할 매체가 매일신보밖에 없었다. 오히려 동화약방은 독립운동에 앞장선 기업이었다. 초대 사장 민강은 일찍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고 항일 비밀결사인 대동단 사건에도 관여했다. 이 사건은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을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동화약방은 서울 중구 순화동에서 출범했는데 민강은 동화약방을 임시정부의 서울 연락거점인 서울연통부로 이용했다. 순화동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연통부지’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표지석에는 서울연통부가 서울시청의 역할을 하며 임정의 활동을 국민에게 알리고 국내 정보를 임정에 보고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했다고 씌어 있다. 민강은 활명수를 판매한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했고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가들은 돈 대신 활명수를 중국에 가져가서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활명수 한 병 값은 약 50전으로 설렁탕 두 그릇과 가격이 비슷할 만큼 비쌌다. 1923년 감옥에서 순국한 민강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동화약방의 독립운동 참여는 민강에서 중단되지 않았고 유지를 받들어 동화약방의 역대 사장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까스활명수’의 아버지 윤광렬 동화약품 명예회장은 광복군 5중대장 출신이다. 1936년 독일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따자 동화약방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광고를 신문에 내기도 했다.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추억의 소환/손성진 논설고문

    추억 또는 기억이라는 것이 머릿속에만 있다면 그저 환상처럼 빙빙 돌 뿐이다. 추억을 떠올려 줄 장소나 물건이 있다면 추억은 꺼냈다가 다시 넣어 둘 유형의 존재처럼 될 수도 있다. 사진이 그런 것이 될 수 있고 움직일 수 없는 집이나 동네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기억을 되살려 줄 것들이 오래도록 한자리에 있다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다. 자고 나면 달라진다고 할 정도로 변화가 많은 세상인 까닭이다. 지금까지 6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 달이라도 살았던 공간을 헤아려 보니 20여곳쯤 된다. 그중에 온전히 남은 것은 근래에 거주한 몇 곳밖에 없다. 간혹 유년기에 살았던 곳을 떠올리며 기억을 머리에서 짜내 보는 적이 있다. 어렸던 10년의 시간 중에 기억할 수 있는 장면을 영상으로 만든다면 1시간짜리도 안 되지 싶다. 추억의 소환을 쉽게 하기 위해 살던 곳을 지도로 탐색해 보지만 골목길이 이어지던 그곳은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돌아가고 싶어도 갈 곳이 없는 것이다. 변화의 바람을 덜 타는 농촌이나 벽촌 출신의 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버틴 고택이 있다면 유년의 추억을 금세 되살려 줄 그곳을 당장 내일이라도 찾을 수 있을 터다. 그래서 부럽기만 하다. sonsj@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국내 백화점의 시발점-삼월오복점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국내 백화점의 시발점-삼월오복점 광고/손성진 논설고문

    생소하게 느껴지는 오복점(吳服店)은 일반적으로 포목점이라는 뜻인데 일본식 용어다. 오복은 일본 의상을 말하고 오복점은 일본에서 기모노 원단이나 여러 가지 의류, 잡화를 취급하는 점포라고 한다. “우리 아아(아이)가 있던 오복점 주인 말이제. 그 쇠가 빠지(빠져) 죽을 왜놈이 전방을 치우믄서 이자는 일자리도 없어졌어이…”는 소설 ‘토지’에 나오는 문장이다. 오복점은 일본에서 백화점으로 발전했다. 알다시피 서울 신세계백화점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미쓰코시(三越)백화점 경성 지점이었다. 미쓰코시의 역사는 에도(도쿄)에 오복점을 연 16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미쓰코시오복점은 1903년 백화점으로 확대 개편했다. 미쓰코시오복점이 1906년 경성출장소를 현재의 명동 사보이호텔 건너편에 열었는데 국내에서 문을 연 최초의 백화점인 셈이다. 세계 최초의 백화점은 1852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점한 ‘봉 마르셰’로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다. 연말인 1911년 12월 10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삼월오복점 광고는 이미지가 없이 ‘세모(歲暮) 대매출’이라는 글귀를 앞세운 활자 광고로 눈길을 붙잡으려 하고 있다. ‘그 옆에는 내(來) 15일부터 야간영업 개시’라고 써 놓았고 아래에 “1. 신제 완구품 진열 1. 유행 우자판(羽子板·제기 비슷한 일본 놀이기구) 진열 1. 연말연시 증답품(贈答品·선물로 주고받는 물품) 진열”이라고 덧붙여 두었다. 이를 통해 보면 당시에도 연말이 되면 바겐세일 행사를 했고, 연말 대목에는 야간에도 영업을 했으며, 백화점을 통해 어린이 장난감도 판매됐고, 일본식 놀이도 유입된 것을 알 수 있다. 미쓰코시오복점 경성출장소는 1916년 그 자리에 3층짜리 새 건물을 지었는데 1층과 2층은 상품 판매장이었고, 3층은 서예나 그림 전시회장, 부인들의 모임 장소로 개방했다고 한다. 또 비품도 화려한 것으로 일본에서 들여오고 일본에서 상품 전문가가 와서 진열을 하는 등 일본화한 것으로 보인다(매일신보 1916년 10월 6일자). 현재 남아 있는 미쓰코시 경성출장소 사진은 1915년의 것으로 새 건물을 짓기 전이다. 도쿄 본점은 1923년 9월 큰불이 나 전소됐는데도 국내 출장소는 광고를 계속 내며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 후 미쓰코시오복점은 1930년 10월 현재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당시로서는 동양 최대라는 백화점 건물을 지어 입주했다. 강점기 초기의 백화점은 일본 자본이 독식했으며, 민족 자본으로 설립한 화신백화점이 생기기까지는 더 기다려야 했다. 광복 후 미쓰코시백화점은 동화백화점으로 바뀌었고, 삼성그룹이 1963년 이 백화점을 인수해 신세계로 상호를 변경했다. sonsj@seoul.co.kr
  • [손성진 칼럼] ‘거리를 둔 소비’는 필요하다

    [손성진 칼럼] ‘거리를 둔 소비’는 필요하다

    코로나19 예방과 경제는 딜레마의 관계다. 경제를 살리려면 소비를 해야 하고 그러자면 다중이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이 모이면 감염의 위험이 커지니 걱정스럽다. 당국으로서도 문밖 출입마저 막으려 하면서 한편으로는 돈을 쓰라고 현금을 살포하는 것은 모순된 정책으로 보인다. 온라인으로는 구매나 소비를 하기 어려운 업종이 많기 때문이다. 워낙 급박한 상황이고 미국도 전대미문의 대책을 쏟아내는 판에 정부와 지자체의 엇박자식, 중구난방의 대응책이라도 딴죽을 걸기는 어렵다. 다만 선거를 앞둔 정치의 시절을 맞아 코로나를 정치에 이용하는 포퓰리즘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현재 위기 상황에 놓인 사람들은 관광·무역·교통·음식·공연 분야 등의 기업가와 자영업자, 피고용인 중에서도 그런 업종에 종사하는 신분이 보장되지 않는 단기 근로자들이다. 여전히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문제가 없으며 쓰고 싶고, 하고 싶은 것들은 다 하고 산다. 유흥가나 골프장, 유명한 음식점은 변함없이 붐빈다. 이런 상황에서 전 국민에게 현금이나 상품권을 균등하게 나눠 주는 것이 효과를 볼지는 미지수다. 무상급식의 논리를 지금의 상황에 대입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본다. 기업가 중에서도 자금이 급한 사람이 있듯이 근로자 중에도 사정이 상대적으로 더 나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현금을 준들 현재 소비를 하고 있는 업종, 코로나와 무관하게 여전히 잘 되는 업종에서 소비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중소 규모의 기업과 자영업자를 포함한 취약계층에 더 많은 돈을 뿌려서 생존을 돕는 선별적 지원이 나을 것이다. 코로나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종식된다는 전제하에서 서바이벌을 위한 집중적 지원이 필요하다. 모든 국민에게 10만원씩 준다면 5조원, 100만원씩 준다면 50조원의 예산이 든다. 지급한 돈의 다과를 떠나서 돈을 쓸 곳이 없다면 현금 살포는 무효무책이 되고 말 것이다. 현재 상황이 소비자들이 돈이 없어서 쓰지 못하고 그 결과 기업이나 자영업이 매출이 줄어든 것이라기보다는 돈이 있어도 쓰기를 꺼린다는 게 더 맞는다. 현금을 똑같이 나눠 주는 것보다는 부도와 도산, 폐업 위기에 직면하거나 극한 상황에 몰린 기업과 취약계층에 차등 지원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다고 봐야 한다. 살포책을 놓고 고민하는 지자체나 정부나 마찬가지다. 코로나가 조금씩 잡혀 간다면 정부는 서서히 출구전략을 모색해 볼 필요가 있다. 감염 예방을 위해서는 과도한 대응이 요구된다지만 딜레마에 놓인 경제 회복과의 균형을 생각하는 방책도 내놓고 홍보도 해야 한다. 제주도 같은 여행지가 텅텅 비었다는데 역설적으로 인구밀도가 낮은 제주도 같은 관광지가 더 안전할 수 있다. 관광지로 가는 교통편도 거리 두기 규준을 지키는 선에서 비행기나 철도, 버스를 이용하는 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인구가 밀집한 대도시에 머무는 것이 위험성이 크다. 극장이나 공연장도 2m 거리 제한을 지키는 선에서 적절한 관객 수용은 고려해봄 직하다. 이미 그렇게 하는 극장들이 있다. 물론 철저한 방역과 개인위생 수칙을 지킨다는 조건하에서다. 음식점을 봐도 유명한 맛집들은 마스크도 벗은 고객들이 꽉 들어차 있지만, 손님이 많지 않던 영세 음식점들은 아예 문을 닫아야 할 정도로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소비자로서는 감염을 경계하며 활동해야 하겠지만 거리 두기를 실천하면서 여행지나 공연장, 음식점을 찾아 돈을 쓰는 궁리를 해야 한다. 일정 거리를 둔 혼밥이나 혼술, 혼영(혼자 영화 보기)도 좋은 방법이다. 경제를 살리는 여러 가지 길 중에서 소비자 활동이 기본이면서도 가장 중요하다. 위기를 돌파하려면 정부와 기업, 국민(소비자)이 삼위일체가 돼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각자 따로 움직여서는 코로나 퇴치와 경제 회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쉽지 않다. 정부는 효율이 가장 높다고 판단되는 정책을 시행하고 기업과 국민은 수칙을 지키면서 국가 경제에 보탬이 되는 행동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우리 국민은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을 하며 위기 탈출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결국 나라를 구한 것은 국민이었다. 코로나 사태를 극복하는 데서도 국민의 힘은 절대적이다.
  • 日 육사 출신으로 조국 독립 위해 헌신한 ‘전설적인 항일 영웅’

    日 육사 출신으로 조국 독립 위해 헌신한 ‘전설적인 항일 영웅’

    김경천은 김좌진, 홍범도를 뛰어넘는 전설적인 항일 영웅이다. 백마를 타고 일본군을 무찔렀고 ‘진짜 김일성 장군’으로 불리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나경석은 “조선의 유지 청년이 노령에 수천수만이 출입하였으나 김 장군같이 위대한 공적을 성취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김경천은 백범일지에 버금가는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라는 친필 수기를 남겼다. 늦게서야 발견된 수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시영이 보고 싶다. 신동천이 보고 싶다. 신용걸이 보고 싶다. 안무가 보고 싶다.…” 독립군 전우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다.김경천은 1888년 6월 5일 함남 북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정우는 구한말 군기창장 등으로 일한 고위인사였다. 1900년 10월 김경천 가족은 서울 사직동으로 이사했고 김경천은 1904년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그의 진로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서점 주인이 건네준 책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었다.1905년 9월 김경천은 도쿄 육군유년학교 예과 학년에 입학했다. 650명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예과를 마치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23기생으로 들어가 1911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육사 재학 중에 나라는 일본으로 넘어갔고 김경천은 엄청난 심적 갈등을 겪었다. 김경천은 그래도 실력 양성을 위해 기병학교까지 마친 뒤 1919년 2월 귀국했다. 2·8 독립선언이 선포되던 때였다. 귀국하자마자 3·1운동이 일어났고 시위 현장을 보면서 김경천은 피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자동차에 우리 청년 4~5명이 실려 있다. 모두 죄수복을 입었다. 그 근방에 나이가 40가량 되는 부인이… 그 뚫어지고 더러워진 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통곡하는 것이 보인다. 아, 나도 가슴이 막히면서 두 눈에 눈물이 흐른다.”●함남 북청서 태어나 서울 사직동 이주 김경천은 더는 일본 군인으로 살 수 없었다. 일본 육사 후배 이응준, 지대형(지청천)과 함께 서간도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응준은 중간에서 길을 달리했다. 김경천은 1919년 6월 6일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수원으로 내려가 기차를 타고 신의주로 간 뒤 압록강을 건넜다. 일본 육사 출신 군인이 망명하자 일제는 충격에 빠져 현상금 5만엔을 내걸었다. 부인 유정화를 체포해 고문했지만 부인은 남편의 행방을 발설하지 않았다. 김경천은 일단 중국 안동에서 활동하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했다. 그러나 활동이 어려워지자 하루 20㎞ 넘게 보름 동안 걸어 봉천성 유하현 신흥무관학교에 도착, 교관으로 일했다. 그곳에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인 신팔균도 있었다. 경천(擎天) 김광서, 동천(東天) 신팔균, 청천(靑天) 지석규 세 사람은 남만주 삼천(三天)이라 불렸다. 1919년 9월 중순 김경천은 길림 서간도 군정서에서 무기구입 위원으로 선정돼 연해주로 출발, 이듬해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달 12일 소비에트 적군과 한인 빨치산부대가 아무르강 하구 니콜라옙스크의 일본군을 전멸시킨 전투가 있었다. 일본 시베리아 주둔군은 보복으로 4월 4일 연해주 신한촌을 공격, 한국인 빨치산과 민간인 5000여명을 학살한 ‘4월 참변’을 일으켰다. 독립운동가 최재형도 이때 살해됐다. 김경천은 간신히 피신했다가 한인 빨치산 근거지인 내수청 대우지미로 이동했다. 당시 간도나 연해주에는 중국 마적이 날뛰었다. 마적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민가를 습격해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납치했다. 일제는 마적단에 무기를 대주고 한인들을 괴롭히도록 했다. 김경천은 마적을 일본군과 동일시하고 대우지미에서 마적토벌대를 만들어 토벌에 나섰다. 4월 8일 마적 380여명이 침입하자 김경천의 토벌대 45명은 소비에트 적군 600명과 연합해 360여명을 몰살시켰다. 이어 창해청년단을 조직, 총지휘관을 맡아 1920년 5월 다우지미 전투에서 마적 300여명 중 60명만 살려 보냈다. 1921년 1월 김경천은 블라디보스토크 임시정부 격인 대한국민의회에 참석하라는 공문을 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김경천은 “독립을 하자는데 너무도 희생이 없다. 너무도 정치에만 눈이 팔리고 실천력이 적다. 너무도 자칭 영웅이 많다. 너무도 당파가 많다”고 한탄했다. 군인인 그에게는 오직 무장투쟁만이 독립의 길이었고 자리다툼만 하는 임정은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921년 4월 트레치푸진에서 혈성단 강국모의 요청으로 한인 빨치산부대 사령관이 됐다. 더불어 ‘수청의병대’를 조직했다. 각지에서 모인 한인 빨치산 병력이 800여명이었고 소총과 군마로 무장했다. 김경천은 트레치푸진에 설립된 사관학교 교장도 맡아 사관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시베리아 내전서 가장 위대한 ‘이만 전투’ 그해 8월 수청의병대는 연해주에 있는 러시아 적군(赤軍·혁명군)과 연합했다. 일본군은 러시아 백군(白軍·반혁명군)과 연합해 의병대와 적군을 공격했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혁명 이후 극동 지역이 혼돈에 빠지자 시베리아를 차지할 기회라고 판단해 17만여 병력을 배치했다. 1921년 11월 수청의병대와 적군은 일본군과 백군에 포위돼 퇴각했고 카르톤 마을에서 적군 대대장이 항복하고 말았다. 이듬해 1월 김경천은 적군 패잔병과 의병대의 혼성 부대를 이끌고 이만(달레네친스크) 지역의 백군을 공격했다. 200여명의 혼성부대는 700여명의 백군과 6시간 동안 전투를 벌인 끝에 이만을 정복했다. 이 전투는 시베리아 내전에서 가장 위대한 전투라는 극찬을 받는다. 김경천은 그때의 상황에 대해 “(군사들이 지나가는) 발자국마다 피가 고이었다”고 썼다. 1922년 여름 이후 김경천은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러시아 육사에서 교관을 초청해 급여를 주며 교육시켰다. 김경천의 목표는 조국의 독립이었다. 러시아 땅에서 독립운동을 펼쳤기에 러시아인들과 협력했고 적군의 도움을 받아 한반도로 진공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패퇴를 거듭하던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러시아는 빨치산부대도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김경천에게는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김경천은 이후 1932년부터는 하바롭스크 합동국가보안국 통역으로 일했고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사범대에서 군사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1935년 무렵 스탈린의 강압정치가 한인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김경천은 간첩죄로 체포돼 1936년 9월 3년형을 받았다. 1939년 2월 일단 석방됐다. 그 사이 가족은 카자흐스탄 카라간다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재회도 잠시 그해 12월 간첩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김경천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이런 점이 이유가 됐을 것이다.●광복 못 보고 유배지서 심장질환 사망 김경천은 2년 동안 철도 건설 노역에 동원됐다가 1942년 1월 2일 소련의 북동쪽 끝 코미자치공화국으로 유배돼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스탈린이 죽은 뒤 김경천은 무죄 선고를 받았고 사후 복권됐다. 김경천은 수용소 근처에 집단으로 묻혀 별도의 묘소가 없다. 김경천은 2남 4녀를 두었다. 아내와 자식들은 밀항선을 타고 연해주로 가 같이 살았지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강제 이주는 더욱더 큰 고난을 주었다. 가족들은 국영농장에서 힘든 노동에 동원됐고 인민의 적으로 박해를 받았다. 후손들은 현재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1998년 정부는 김경천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막내아들 김기범(1932년생)씨와 막내딸 김지희(1928년생)씨는 정부의 초청으로 아버지 사후 처음으로 고국을 방문했다. 2015년 8월 정부는 모스크바에 사는 의학박사인 김경천의 손녀 옐레나 필랸스카야 등 후손 7명의 특별귀화를 허가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음반광고에 실린 명창 5인의 스토리

    [근대광고 엿보기] 음반광고에 실린 명창 5인의 스토리

    매일신보 1911년 10월 14일자에 근대 판소리 명창 5명의 사진을 담은 광고가 실렸다. 그들의 사진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광고가 하나의 역사적 기록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급고’(急告)라는 제목의 판소리 음반 광고에 실린 다섯 사람은 심정순, 문영수, 김홍도, 박춘재, 유명갑이다. 이들은 1911년 1월 30일 일본 도쿄로 가서 판소리와 경기 민요 등을 취입했는데 축음기 시장을 장악한 ‘일본축음기상회’가 주도해서 광고를 낸 것이다. 심정순은 충남 서산 출신의 판소리 명창이자 가야금 연주자였다. 자녀들도 판소리를 했는데 막내아들 심화영은 중고제(경기도 남쪽과 충청도에서 성행한 판소리 유파)의 마지막 계승자였다. 가수 심수봉은 심정순의 손녀다. 문영수는 구한말 이정화와 더불어 평양 날탕패(민속가무단)에서 활약하다 원각사 시절 박춘재와 짝이 돼 서도입창(西道立唱)과 재담으로 인기를 끌었다. 김홍도는 경성 기생으로 경기소리 명창이었다. 유명갑은 서울 수표교 근처에 살던 피리 연주가였다. 박춘재는 전통극과 근대극을 잇는 교량 역할을 한 경기 명창으로 조선 최고의 가객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유성기 음반을 처음으로 취입한 인물로 알려졌지만 음반이 전하지는 않는다. 1895년 6월 미국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참석했다가 미국 빅터 레코드에서 녹음했다고 한다. 그는 또 ‘십년감수’라는 4자 성어의 유래에 나오는 인물이다. 어느 날 빅터사가 고종 황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궁궐 안에 원통식 녹음기를 설치하고 박춘재에게 나팔 통에 입을 대고 녹음을 하게 했다. 잠시 후 원통식 납관에서 박춘재의 소리가 흘러나오자 고종이 깜짝 놀라며 “춘재야, 어서 나오너라 네 수명이 10년은 감(減)하였겠구나”라고 했는데 여기서 ‘십년감수’(十年減壽)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1900년대 초 컬럼비아와 빅터 등 미국 음반 회사들이 소리꾼들의 음반을 제작했다. 1908년에는 빅터 레코드가 100여 곡의 음반을 취입했다. 가객 김재호·이정서, 기생 향선·남수·벽도·채옥·옥도·향월·앵앵·채봉, 율객 박팔괘·오태선, 창부 신경연·송만갑, 기타 악공 등 30여 명의 소리를 녹음했다지만 10여 종만 전한다. 그러나 미국 음반 회사들은 일본에서 녹음하고 미국에서 제작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철수했다. 경술국치 이후 그 자리를 이어받은 음반회사가 위 5명의 음반을 제작한 일본축음기상회였다. 일본축음기상회는 이후에도 조선의 가객과 기생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1928년까지 약 500종의 전통음악 음반을 제작, 발매했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무심한 봄/손성진 논설고문

    봄 햇살이 눈부셔서 그 속에 몸을 던지고 싶던 때가 있었다. 세상은 너무 아름다웠고 천상(天上)의 바람처럼 구름처럼 봄과 하나가 돼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어쩔 줄 몰라 했었다. 전장(戰場)의 포연 속에서도 봄꽃은 피어났지만 지치고 힘들 때도 무심하게 찬란한 풍경을 쏟아내는 봄이 도리어 야속했던 적도 있긴 했다. 올해, 봄이 벌써 가까이 왔는데도 마음이 무덤덤한 것은 시류(時流) 탓인지 점점 시들어 가는 육체와 정신 탓인지는 단정하기도 어렵다. 단지 나만 그런 게 아닌 것은 사람마다 이유가 있는 고된 세상살이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열정은 끓어넘칠진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찾아오는 봄에게 관심을 둘 여유를 우리는 잃어버렸다. 잠시 주변을 돌아보면 한 걸음 한 걸음 살며시 다가온 봄이 옆에서 해시시 웃고 있다. 봄 딴에는 엄동의 풍파를 견디고 달려왔지만 아무도 반겨 주지 않는 우리가 미울 것이다. 그래도 봄은 갖은 치장을 하고 지친 우리를 달래 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시큰둥하다. 세상이야 어떻든 홀로 아무렇지도 않은 봄이 달갑게 보이지 않겠지만, 마음을 열고 손을 내밀어 봄의 위로를 받아봄이 어떨지. sonsj@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말하는 기계’와 한국 최초의 음반

    [근대광고 엿보기] ‘말하는 기계’와 한국 최초의 음반

    1907년 3월 19일자 만세보에 축음기(유성기) 광고가 실렸다. 축음기 한국총대리점인 구미 제품 수입상 ‘십옥’(?屋·즈지야)에서 낸 광고다. 이 광고 안에 한국 최초의 음반에 대한 광고도 나온다. “대한 악공 한인오와 관기(官妓) 최홍매와 그 외 수명을 특별히 일본에 빙용(聘用)하여 평원반의 제반 음보가…”라는 부분이다. 미국 컬럼비아레코드사가 1906년 2월 한인오와 최홍매 외 3명을 일본 오사카로 초청해 녹음하고 미국 본사에서 음반을 제작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 음반이라고 한다. 컬럼비아사는 당시 한국 음반 30장을 만들었는데 9장만 전해지고 있다. 다만 30장의 목록이 발견돼 일본 고음반 전문가가 최근 공개했다. ‘단위타령’, ‘유산가’, ‘제비가’, ‘담바귀’, ‘아리랑타령’, ‘적벽가’ 등 판소리와 민요, 시조가 레코드에 담겨 있다. 이 음반들 중 일부를 복원해 동국대 한국음반아카이브에서 ‘한국의 첫 음반 1907 한인오-최홍매’라는 제목으로 내놓았다. 한인오는 대한제국 시절의 경기명창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이며 최홍매는 기생인데 당시의 기생은 요즘으로 치면 연예인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 음악이 담긴 가장 오래된 음반은 1896년 미국에서 유학생들의 노래를 녹음한 것인데 현재 미국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음반은 상업적 용도가 아니라 인류학적인 목적으로 제작한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 유성기(留聲器), 유성기(有聲器)로도 불렸던 축음기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1880년대 초로 추정된다. 1877년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한 지 몇 년 후였다. 1907년 4월 19일자 만세보 광고에서는 축음기를 ‘말하는 기계’라고 소개했다. 일반 백성에게 축음기는 비싸기도 했으려니와 음반이 없으면 무용지물이었지만 매우 신기한 물건이었다. “외부에서 일전에 유성기를 사서… 삼청동 감은정에다 잔치를 배설하고… 사나이 학봉 등의 잡가를 넣었는데… 먼저 넣었던 각 항 곡조와 같이 그 속에서 완연히 나오는지라 보고 듣는 이들이 구름같이 모여 모두 기이하다고 칭찬하며 종일토록 놀았다더라.”(대한매일신보 1899년 4월 20일자) 서울 사대문 안 여러 곳에 유성기 감상소를 설치하고 돈을 받고 틀어 주었는데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렸다. 영화 상영 전에 청중에게 유성기를 틀어놓고 서양 음악을 들려 주거나 학교에서 유성기로 강화회(講話會)를 했다는 기사도 있다. 음반이 발매된 1907년 이후부터 축음기는 조금씩 보급되기 시작했다. 축음기는 거의 서울에서 팔렸기 때문에 음반 수록곡은 경기민요가 대부분이었고 주로 원각사에서 활동한 국악인들이 녹음했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독립운동가의 발명특허 1호-말총모자/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독립운동가의 발명특허 1호-말총모자/손성진 논설고문

    고종의 조칙(詔勅)으로 단발령이 내려진 것은 을미사변 직후인 김홍집 내각 때였다. 남자들이 머리카락을 자르자 상투가 없는 머리에 얹을 모자가 외국에서 들어와 인기를 끌었다. 대한매일신보 1909년 8월 24일자에 중산모자, 중절모자, 운동모자, 학생모자, 부인모자, 예복모자, 상복모자 등 모자를 종류별로 소개한 광고가 실렸다. 이 모자들은 보통 모자가 아니라 말총으로 만든 말총모자다. 말총이란 말의 갈기나 꼬리의 털을 뜻하는데 질기고 촉감이 좋아 예전부터 갓, 망건, 탕건, 관모, 허리띠 등을 만드는 데 쓰고 있었다. 광고 위쪽에는 등록상표인 비둘기 문양이 있다. 그 아래에 남성이 모자를 물로 씻는 모습이 있듯이 말총모자의 장점은 심하게 구겨져도 물에 담그면 잘 펴지고 세척이 쉽다는 점이었다. 땀으로 더러워진 부분과 먼지, 때를 비누와 솔로 문질러 씻으면 새것처럼 쓸 수 있다고 광고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전통 갓을 만드는 재료인 말총을 이용해 만든 서양식 모자는 광고에 써 놓은 대로 발명특허를 받은 제품이었다. 광고를 내기 5일 전인 1909년 통감부 특허국에 특허 제133호로 등록됐으며 한국인 특허로는 1호였다. 말총모자를 만들어 특허를 받은 인물은 정인호(1869~1945) 선생이다. 그런데 광고에 보면 좌우에 서양식 복장을 하고 모자를 쓴 남녀가 ‘옥호서림광고’(玉虎書林廣告)라고 적힌 글자판을 들고 있어 의아하게 한다. 정인호는 궁내부 감중관이라는 관직과 청도군수 등을 지내다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사직하고 1906년 고향 양주에 동흥학교를 세워 교장을 지냈다. 또 교과서를 저술하는 등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헌신한 사람이다. 구세의원이라는 병원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1908년 선생은 ‘초등대한역사’, ‘최신초등소학’ 등의 교과서를 저술, 이 교과서들을 옥호서림에서 펴냈는데 옥호서림의 주인이 바로 정인호였다. 모자를 책과 함께 옥호서림에서 판매한 것이다. 선생은 말총으로 모자뿐만 아니라 핸드백, 토시, 셔츠 등의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일본, 중국 등에 수출도 하며 민족기업으로 키웠다. 그렇게 번 돈은 구국활동에 썼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 구국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단장을 맡아 상하이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했다. 특히 부자들을 상대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데 힘을 쏟았는데 1920년 12월(음력) 충남의 부호 임병철에게 군자금 납입을 요구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징역 5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마음의 다스림/손성진 논설고문

    다양한 상황과 맞닥뜨리는 삶은 요철 위를 걷는 것처럼 불안한 과정이다. 늘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으려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수양이다. 수양 또는 수신이란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다. 마음을 갈고닦아 바르고 착한 품성을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는 행위다. 수양이 부족하면 복잡한 세상사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일희일비한다. 또한 그릇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탐욕에 빠져 그런 결과 필요 없는 걱정으로 아까운 인생 시간을 낭비한다. 수양이 되면 좋고 나쁜 대소사에 쉽게 깔깔거리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잦은 감정 변화로 정신의 피로를 자초하지 않고 어떤 일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삼사일언(三思一言) 즉, 다른 사람에게 말 한마디를 해도 세 번의 생각을 거쳐서 할 만큼 매사에 신중해진다. 그러면 말을 해놓은 뒤에도 아무 탈이 없다. 수양이 모자란 사람들이 넘쳐난다. 바르고 착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다. 그런 사회가 잘되기는 어렵다. 수양은 오직 자신의 몫이며 수양의 길은 멀리 있지도 않다. 고승이 면벽수도 하듯이 참선할 필요도 없고 하루 5분이라도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며 자신의 언행을 돌이켜보는 것으로도 가능하다. sonsj@seoul.co.kr
  • [근대광고 엿보기] “부인 사진은 부인이 찍어요”-천연당사진관/손성진 논설고문

    [근대광고 엿보기] “부인 사진은 부인이 찍어요”-천연당사진관/손성진 논설고문

    프랑스의 조제프 니에프스가 최초로 사진을 촬영한 때는 1826년이다. 수십년 후 우리나라에 선교사들과 일본인들이 사진기를 갖고 들어와 사진을 찍고 사진관을 열었다. 1883년 초 황철이 서울 안국동 자기 집 사랑채를 개조해 설치한 ‘촬영국’이 한국인이 연 최초의 사진관이라고 한다. “처교한(교수형에 처한) 죄인 동학 괴수 최시형을 고등재판소에서 사진을 박아 각도 각군에 회시하야 경중하라(여러 사람을 깨우치라)고 훈령한다더라.”(매일신문 1898년 9월 7일자) 고(古)신문에서 확인되는 최초의 사진 관련 기사는 최시형에 관한 것이다. 관(官)에서도 사진을 활용했다는 뜻으로 현재 전봉준과 마찬가지로 최시형의 얼굴 사진도 남아 있다. “남문내 회동(에) 居(거)하는 김진사는 본시 일본을 왕래한 사람으로 방금 사진관을 설(設)하고 유독 여인만 촬영할 양으로 원림(園林)의 경치 있는 집을 구매한다니 여인의 사진하기가 편리할 듯하더라.”(황성신문 1898년 9월 24일자) 한국인의 또 다른 상업적 사진관에 관한 기사다. 김진사라는 사람이 경치 좋은 집을 사서 여성 전용 사진관을 열었다는 뜻이다. 19세기 말 사진은 일반인에게 생소한 신문물이었고 사진관은 대부분 일본인이 운영했다. “사진 한 벌에 넉 장씩 드리더니 지금 물가가 고등하여 금년부터는 한 벌에 석 장씩 드리기로 작정하였으니….” 독립신문 1899년 1월 6일자의 이 광고는 진고개(충무로)에서 일본인이 운영한 옥천당이라는 사진관 광고다. 기쿠다 사진관은 민영환이 자결한 뒤 피 묻은 옷을 보관하던 뒷방에서 자라난 혈죽(血竹)을 촬영했고 그 사진이 전해진다. 한국인이 연 본격적인 사진관은 천연당사진관으로 1907년 8월 20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개업 광고를 냈다. 서화가 김규진이 일본에서 사진을 배우고 돌아와 박주진과 함께 서울 소공동 자신의 집 행랑 뜰에 열었다. 소공동은 일제강점기에 천연동이었다. 김규진은 1907년 어진(御眞·왕의 초상)을 촬영했고 부인에게 여성을 전담 촬영하도록 했다. 남녀칠세부동석이 통하던 때로 남녀 접촉이 금기시되고 여염집 부인은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을 때라 여성은 사진 찍느라 다른 남자 앞에 얼굴을 내밀기도 민망했을 것이다. 광고에서는 “부인은 내당(內堂)에서 부인이 촬(撮)하고 출입이 심편(甚便·매우 편리)함”이라고 강조했다. 여성을 따로 촬영하는 전략으로 천연당사진관은 1908년 음력 정월 한 달에 1000여명이 이용할 정도로 성황이었다. 천연당사진관은 평양에 분관을 설치하는 등 사업을 확장, 1972년까지 영업했다.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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