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손성진
    2025-08-17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741
  • [DB를 열다] 1963년 전남 목포 부두의 마차행렬

    [DB를 열다] 1963년 전남 목포 부두의 마차행렬

    1961년 작 ‘마부’는 네 남매를 거느리고 살아가는 홀아비의 삶을 그린 영화다. 김승호가 주연으로 역할을 맡은 홀아비의 직업은 마부다. 말이 끄는 수레, 즉 마차로 짐을 옮겨 주고 운반비를 받는 직업이다. 화물을 실어나를 수 있는 차량이 부족했을 때 마차는 그 대용 수단이었다. 사진은 1963년 1월 목포 부두에서 운반할 짐을 기다리는 마차들이다. 마차는 나무로 만든 수레에 못 쓰게 된 트럭 바퀴를 달아서 만든다. 짐을 잔뜩 실은 마차를 끌어야 하는 말은 혹사당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몹시 가파른 길을 올라갈 때면 마부는 지그재그로 마차를 몰면서 헉헉대는 말에게 심하게 채찍을 휘두른다. 마차는 아스팔트 도로를 다닐 수밖에 없어서 자동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심심찮게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아주 드물게 마차 음주운전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술을 마신 마부가 말에게 마구 채찍질을 하는 바람에 말이 날뛰어 마차가 행인들을 치고 택시를 파손한 사건이 대구에서 실제로 있었다. 자동차가 점점 늘어나면서 마차는 사라져갔다. 삼륜차, 용달차 같은 작은 화물트럭들에 밀려 마차는 변두리에서 연탄이나 실어나르는 신세가 된다. 그런 일감마저도 빼앗겨 1970년대 후반쯤 마차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최근 서울 청계천에 관광용 마차가 나왔다가 동물 학대 논란이 일어 운행이 중단되었다. 옛날 마차를 끌던 말의 노동 강도는 관광마차와 비교가 안 된다. 이 시대에 짐을 잔뜩 실은 마차가 서울 거리에 등장한다면 동물 애호가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1963년 우유죽 타먹으려 줄 선 사람들

    [DB를 열다] 1963년 우유죽 타먹으려 줄 선 사람들

    참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다. 사진은 1963년 1월 19일 한겨울날, 서울 구세군 건물 앞에서 우유죽을 타 먹으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남루한 옷차림에 죽을 담을 양동이나 깡통을 손에 들었다. 전쟁이 끝난 지 겨우 10년, 국토는 황폐해져서 아직 식량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충북 충주 시내에 있는 어린이 중에서 29%가 한 끼 또는 두 끼를 굶고 있었다. 이런 굶주림은 당시에는 도농어촌, 남녀노소를 떠나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하루 세 끼를 다 챙겨 먹는 사람을 찾기가 드물었다. 어른도 어른이지만 한창 자랄 나이의 아이들이 결식을 하고 있는 것은 국가적인 문제였다. 굶주림을 면하려면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식량이 남아돌던 미국은 원조기관인 ‘케어’를 통해 옥수수 가루와 우유 가루를 한국으로 보냈다. 당국은 옥수수 가루로는 죽을 쑤거나 빵을 만들어 배급했고, 우유 가루는 가루째로 아니면 죽을 만들어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우유죽은 전국의 구세군 급식소를 통해서도 배급이 되었다. 사진은 서울 신문로 1가 옛 구세군 별관 건물에 있던 ‘구세군 서울 급식소’다. 이 자리에는 1960년대에 구세군 회관이 새로 들어섰다. 구세군이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08년이다. 1928년에 완공된 구세군 본관(구세군 중앙회관)이 서울 정동에 남아 있다. 이 건물은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돼 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은막의 女優 노름꾼 전락

    [DB를 열다] 은막의 女優 노름꾼 전락

    사진 가운데 안경을 쓴 여성은 복혜숙(1904~1982)과 쌍벽을 이루며 초창기 신극계를 주름잡았던 여배우 석금성(1907~1995)이다. 평안남도에서 태어난 그녀는 일찍 서울로 와 진명여학교를 다니다 기생이 되었다가 극단 토월회 전무였던 이서구의 눈에 띄어 거금을 받고 연극계에 투신했다. 1925년 첫 작품 ‘추풍감별곡’에서 주역을 맡아 무대를 밟자마자 연극계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빼어난 외모의 그녀는 충청도 갑부와 결혼했지만 3년 만에 파경을 맞아 다시 복귀했다. 1932년에 토월회의 후신인 태양극장에서 신민요를 부르며 배우 겸 가수로 활동했다. 1937년에는 무성영화 ‘심청전’에서 뺑덕어멈 역으로 영화배우로도 데뷔한 그녀는 광복 후 ‘춘향전’에서 월매로 나오는 등 주로 개성 있는 조연을 맡았다. 무용가 최승희의 오빠인 한국 최초의 라디오방송국 PD 최승일과 재혼했지만, 남편과 4남매가 1948년 월북해 석금성은 외로운 말년을 보냈다. 1990년대 초까지 영화와 TV 드라마에 출연했으며, 1990년 신상옥 감독의 ‘마유미’가 마지막 작품이다. 그녀는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북한의 자녀들과 만나기를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진은 1965년 1월 28일 유명 배우 K·L 씨와 거액의 상습도박을 벌인 혐의로 경찰에 조사를 받으러 출두한 모습이다. 세 사람은 다음 날 구속됐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53명의 목숨 앗아간 1972년 서울 시민회관 화재

    [DB를 열다] 53명의 목숨 앗아간 1972년 서울 시민회관 화재

    1972년 12월 밤 8시 28분쯤 서울 세종로 서울시민회관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이날 시민회관에서는 문화방송 개국 11주년 행사로 10대 가수 청백전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남진, 이상렬, 이용복, 정훈희, 조미미, 하춘화와 신인상 수상자 김세환·정미조, 특별상 수상자 김추자, 코미디언 구봉서·곽규석 등도 공연에 참가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밖으로 나오는 사이 갑자기 무대 위 조명장치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지면서 불이 나기 시작했다. 원인은 전기 과열로 말미암은 합선이었다. 공연이 끝났기 때문에 막이 내려오고 있었고 불길은 막으로 옮겨붙어 삽시간에 번졌다. 관객 중에서 3분의2 정도는 퇴장한 상태였지만 아직 나가지 못한 사람도 많아 회관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대 쪽에서 시작된 불은 천장 쪽으로 치솟았고 위층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아래층으로 물밀듯이 밀려왔다. 관객들은 서로 먼저 나가려고 밀치고, 계단에서 넘어졌으며 여성들과 아이들이 깔렸다. 2층에 있던 관객 수십명은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기도 했다. 이 화재로 53명이 죽고 76명이 다쳤으며 부상자 중에는 가수 문주란과 김상희도 있었다. 김상희는 가벼운 부상을 당했지만, 문주란은 화장실 유리창을 깨고 뛰어내렸다가 허리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시민회관 화재는 1971년 대연각호텔 화재, 1974년 청량리역 대왕코너 화재와 함께 1970년대 서울의 3대 화재 사건 중 하나다. 시민회관은 1956년 6월 1일 착공됐다. 이승만 정부 시절 국가 최대의 프로젝트로 체신부 청사 자리에 새 건물을 짓기 시작했는데 원래 이름은 우남회관이었다. 우남은 이승만의 아호다. 야당의 반대 등 우여곡절 끝에 1961년 10월 31일 완공됐지만 이미 4·19, 5·16이 지난 뒤여서 우남이라는 이름이 사라진 것은 당연했다. 시민회관은 1960년대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명소였다. 공연과 음악회가 자주 열렸고 10층 옥탑은 당시 주변 건물 중 가장 높아서 야경을 즐길 수 있는 훌륭한 전망대였다. 완전히 소실된 시민회관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이 1974년 1월 착공되어 1978년 4월 완공되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1963년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DB를 열다] 1963년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평화시장은 6·25 때 남쪽으로 내려온 북한 피란민들이 청계천 옆에 판자촌을 이루고 옷을 만들어 판 데서 출발했다. 평화라는 이름도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실향민들은 재봉틀을 한두 대 놓고 미군복을 수선하고 염색해서 팔거나 ‘몸뻬’라고 불리는 여성용 일바지를 만들어 판매했다. 1958년 청계천 판자촌에서 큰불이 나고 이듬해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평화시장은 새롭게 탄생한다. 지금과 비슷한 건물은 1962년 2월 완공되었다. ‘서울피복사’ ‘일광피복사’ 같은 간판이 보이는 사진은 1963년 1월 찍은 것이다. 그런데 왠지 새 건물 느낌이 나지 않고 주변 풍경도 을씨년스럽다. 길가에서는 얼음 위로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있다. 평화시장에는 영세 의류 제조업체가 밀집해 도시 빈민의 값싼 노동력으로 저렴한 옷을 만들었다. 이런 노동력 착취는 청계피복노조원이었던 전태일이 1970년 11월 13일 분신한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아픈 역사를 갖고 있지만 다양하고 저렴한 옷을 파는 대규모 의류상가인 평화시장은 1980년대까지도 호황을 누렸고 주변에는 신평화시장, 청평화시장, 동평화시장, 남평화시장 등 유사한 이름을 가진 시장들이 들어섰다. 평화시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헌책방이다. 1층에는 지금도 20여곳의 헌책방이 있다. 돈 없는 대학생들이 중고서적을 구할 수 있는 소중한 곳이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1963년 서울 치룽 둘러멘 넝마주이들

    [DB를 열다] 1963년 서울 치룽 둘러멘 넝마주이들

    버려진 폐지나 빈 병 등을 주워서 파는 사람을 넝마주이라고 부른다. 넝마란 원래 낡고 해어져서 입지 못하게 된 옷이나 이불 따위를 이르는 말이다. 사진에서 보듯이 싸리나무나 대나무로 엮어 만든 큰 망태기를 등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집게로 폐품을 주워서 담는다. 큰 망태기의 올바른 우리말은 ‘치룽’이다. 아이들은 옷을 남루하게 입고 집게를 휘두르며 다니는 넝마주이를 싫어하고 무서워했다. 아이들이 말을 안 듣고 보채면 “망태기 할아버지 부른다”며 겁을 주었다는 넝마주이를 망태기 할아버지에 빗대어 이야기하기도 했다. 넝마주이들은 행인들에게 시비를 거는 등 범죄를 저지르기도 해 기피 대상이 되었다. 당국은 밑바닥 계층인 이들의 자활을 유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5·16 이후 넝마주이 직업제도를 만들어 등록제를 실시하고 집단합숙소를 만들었으며, 복장을 지정하고 작업구역도 정해 주었다. 당시 등록한 넝마주이는 882명에 이르렀으며 신분증도 만들어 주었다. 등록하지 않은 사람까지 더하면 서울에 1000명이 넘는 넝마주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국은 지역마다 근로재건대를 만들었는데, 1963년 1월 18일 촬영한 사진에는 ‘근로재건대 남대문지대’라는 간판 글씨가 희미하게 보인다. 근로재건대는 나중에 자활근로대로 바뀌어 1980년대까지 있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1967년 94명 희생된 침몰 한일호 인양

    [DB를 열다] 1967년 94명 희생된 침몰 한일호 인양

    1967년 1월 14일 밤 부산과 여수를 오가던 정기여객선 한일호와 동해 경비를 마치고 진해항으로 돌아가던 해군 구축함 충남 73함이 부산 가덕도 서북방 해상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 사고로 한일호에 타고 있던 승객과 선원 106명 가운데 12명만 살아남고 9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한일호는 겨우 140t급 목선이었고 구축함은 2600t급 철선이었다. 한일호는 뱃머리가 완전히 부서져 10분 만에 침몰했다. 영하 7도의 강추위 속에서 세 시간 반 동안 헤엄을 치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4명의 여인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해녀였다. 사진은 사고 닷새 후인 1월 19일 해군이 수색대와 크레인선을 동원해 한일호를 인양하는 모습이다. 승객들은 대부분 가난한 서민들이어서 이들의 죽음은 많은 이들을 울렸다. ‘차가운 북동풍이 몰아치는 밤 목멘 고함소리 울지도 못하고 그 순간 앗아갔네 수많은 생명’이라는 가사의 ‘비운의 한일호’라는 대중가요도 이 사고 후에 나왔다. 세계 역사상 최대의 침몰 사고는 1945년 1월 30일 독일 여객선 구스틀로프호가 피란민과 부상병을 태우고 폴란드에서 탈출하다 소련의 잠수함에 격침돼 9343명이 사망한 사고다. 1517명이 희생된 타이타닉호의 6배나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953년 1월 9일 부산 다대포 앞바다에서 침몰해 362명이 숨진 창경호 사고가 최대의 해상사고로 기록돼 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중학교 입시 폐지로 이어진 1960년대 무즙 ·창칼 파동

    [DB를 열다] 중학교 입시 폐지로 이어진 1960년대 무즙 ·창칼 파동

    다음은 1964년 12월 7일 치른 서울 전기 중학교 입시 자연 과목 18번 문제다. 18) 다음은 엿을 만드는 순서를 차례대로 적어놓은 것이다. ① 찹쌀 1㎏가량을 물에 담갔다가 ② 이것을 쪄서 밥을 만든다. ③ 이 밥에 물 3ℓ와 엿기름 160g을 넣고 잘 섞은 다음에 60도의 온도로 5~6시간 둔다. 위 3과 같은 일에서 엿기름 대신 넣어도 좋은 것은 무엇인가? 당국은 보기 1번 ‘디아스타아제’를 정답으로 발표했지만 2번 ‘무즙’을 선택한 학생들은 무즙도 답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학부모들은 교과서에 침과 무즙에도 디아스타아제가 들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고 항의하면서 복수 정답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른바 ‘무즙 파동’이다. 합격자 발표 결과, 경기중학교의 커트라인은 154.6점이었다. 한 문제 때문에 떨어진 학생의 학부모들이 흥분한 것도 이해할 만했다. 정답을 무즙으로 적어 낙방한 학생은 39명이었다. 학부모들은 무즙으로 실제로 엿을 고아서 들고 가 항의하기도 했다. 오락가락하는 태도를 보이던 당국은 무즙은 오답이라고 결론 내렸고 결국 사건은 법정 공방으로 이어졌다. 1965년 3월 30일 서울고법은 무즙도 정답으로 봐야 한다며 39명을 구제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학생들은 5월 12일 전학 형식으로 원하는 학교에 입학했다. 사진은 이듬해인 1966년 12월 2일 중학교 입시를 치르는 초등학생들의 모습이다. ‘창칼 파동’은 1968학년도 경기중학교 입학시험에서 벌어졌다. 미술 13번 문제 ‘목판화를 새길 때 창칼을 바르게 쓴 그림은?’이라는 문항에서 복수 정답 시비가 생겼다. 학부모들은 교장과 교감을 연금하는 소란을 피우고 소송도 제기했지만 이번에는 패소했다. 지나친 교육열과 입시 경쟁에서 비롯된 무즙 파동과 창칼 파동으로 중학교 입시는 폐지됐다. 1969학년도부터 서울에서 처음으로 중학교 추첨제가 시행됐다. 이듬해에는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등의 대도시도 중학교 입시제도를 폐지했다. 더불어 서울에서는 1970학년도를 끝으로 이른바 명문으로 불렸던 7개 중학교가 폐교됐다. 경기중, 서울중, 경복중, 경동중, 경기여중, 수도여중, 이화여중이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1966년 신입사원 면접시험

    [DB를 열다] 1966년 신입사원 면접시험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바짝 긴장한 채 앉아 있는 입사 지원자. 다리를 꼰 면접관들은 엷은 미소를 머금고 지원자의 신상이 적힌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다. 1966년 1월 16일 서울신문 13기 기자 면접시험장의 모습이다. 사무실 집기는 남루하지만, 책장에는 장서가 가득하다. 신문도 가지런히 철이 되어 있어 자료실을 면접장소로 쓰고 있는 듯하다. 책상에 담배와 재떨이를 놓고 연기를 내뿜는 모습은 이제는 생소하게 느껴진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할 자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재벌로 성장한 대기업이 태동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반 기업체의 공채 인원도 적었다. 삼성, 현대, 동양, 한국화약 등의 대기업은 1950년대 후반 들어서야 공채 사원을 뽑기 시작했다. 당시 최고의 직장은 은행이었고 택시기사, 타이피스트도 인기직업이었다. 고시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는 데 운명을 걸기도 했다. 제1회 고등고시 시험이 치러진 해는 1950년이다. 사법과와 행정과로 나뉘어 있다가 1954년 기술과가 신설됐다. 언론계도 문과 졸업생들이 선호하는 직장이었지만 언론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선발 인원이 워낙 적어서 관문을 뚫기가 쉽지 않았다. 서울신문은 6·25 종전 직후인 1953년 8월 200여명의 지원자 중 1기 수습기자로 엄기성, 민용기 두 사람을 최초로 뽑은 뒤 현재 47기가 입사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1966년 경찰에 압수된 외설만화들

    [DB를 열다] 1966년 경찰에 압수된 외설만화들

    서울동대문경찰서가 종로6가 대학천시장의 서적상과 만홧가게를 수색해 불량만화 2만여권과 외설서적 700여권을 압수했다는 1966년 1월 13일 자 기사가 있다. 서적과 만화를 도매로 판매하는 서점들이 몰려 있는 대학천시장의 책방거리는 청계천 평화시장 맞은편에 지금도 남아 있다. 평화시장의 헌책방에서는 헌책을 싼 값으로, 이곳에서는 새 책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곳이다. 복개된 대학천은 낙산 서쪽과 응봉 남쪽 기슭에서 흘러나와 동대문 안에서 청계천과 합류하는 하천인데 동숭동 옛 서울대 앞을 흐른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의 이름은 흥덕동천이다. 사진은 압수된 외설만화들이다. ‘가짜 여대생’ ‘놀아난 청춘’ 같은 제목이 보인다. 인터넷에서 ‘야설’을 쉽게 볼 수 있고 음란 사진이나 동영상이 넘쳐나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저 정도는 ‘외설’에 해당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압수된 책 중에는 속칭 ‘빨간책’이라고 불리던 외설서적과 ‘펜트하우스’ ‘허슬러’ 같은 도색잡지가 포함돼 있을 것이다. ‘빨간책’이라는 은어는 재생용지로 만든 음란 서적의 겉표지가 빨간색인 데서 나왔다고 한다. ‘꿀단지’ ‘폭포수’ 같은 야릇한 제목을 단 이런 저속한 서적들은 당시에 중고생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나돌았다. 1970년대부터는 본격적인 성인만화가 만홧가게에서 청소년들을 유혹했다. 그중 하나인 ‘김일성의 침실’의 부제목은 엉뚱하게도 ‘실록 반공극화’였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서울 최초 사직터널 준공

    [DB를 열다] 서울 최초 사직터널 준공

    1967년 5월 30일 열린 서울 최초의 터널인 사직터널 준공식 모습이다. 터널 바로 위에 집들이 있다. 저 집들 중 일부는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사직터널이 없었을 때 경복궁에서 독립문으로 가려면 광화문 네거리를 거쳐 서대문 쪽으로 돌아서 가야 했다. 사직터널은 1980년 8월 또 하나의 터널이 완공돼 세 개의 터널을 갖추었다. 원래 효자동 입구에서 사직터널 사이에는 도로가 없었다. 서울시는 그 700m 범위에 있던 집 100여채를 헐어내고 25m 폭의 도로를 새로 냈다. 사직터널과 연세대를 이어 주는 금화터널은 1979년 8월 16일 뚫렸고 두 터널 사이의 고가차도도 같이 완공됐다. 고가차도가 건설된 곳 바로 아래에 독립문이 있었는데 차도 건설에 따라 독립문은 원래 자리의 동북쪽,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사직터널에 이어 터널이 잇따라 뚫렸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뒤 남산1호터널이 같은 해 8월 15일 준공돼 한남로를 통해 경부고속도로와 도심을 바로 연결시켜 주었다. 이어 남산2호터널이 12월 4일, 남산3호터널은 1978년 3월 31일 완공됐다. 또 삼청터널은 1970년 12월 30일, 북악터널은 1971년 8월 31일, 구기터널은 1980년 12월 29일, 자하문터널은 1986년 8월 30일 개통됐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가인 김병로 선생의 장례 행렬

    [DB를 열다] 가인 김병로 선생의 장례 행렬

    “정의를 위해 굶어 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 배 명예롭다.” 초대, 2대 대법원장으로 9년 3개월 동안 재직한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이 1957년 12월 70세로 정년퇴임하면서 남긴 말이다. 사진은 1964년 1월 13일 77세로 별세한 가인의 장례식 모습이다. 가인은 청렴과 강직의 표상, 법관의 사표(師表)로 추앙받는다. 가인의 청렴에 관한 일화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옷은 항상 광목으로 지은 한복과 두루마기 차림이었으며 고무신을 신었다. 영하 5도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면 난방을 하지 않아 잉크병이 얼 정도였다. 박봉을 견디다 못한 법관이 찾아오자 가인은 자신도 죽을 먹고 있다며 돌려보냈다. 부적절한 처신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요즘 법조인들과 너무나 비교가 된다. 1887년 전북 순창에서 태어난 가인은 20세 때 의병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으나 죽음을 면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교수로 일하던 가인은 법학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김상옥 의사사건, 광주항일학생운동, 6·10만세운동 등 100건이 넘는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로 변론했다. 대법원장 재임 시절 가인은 이승만의 독재와 대립하며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1968년 1·21 사태로 파괴당한 버스 운전자

    [DB를 열다] 1968년 1·21 사태로 파괴당한 버스 운전자

    21일은 1968년 1월 21일, 이른바 1·21 사태가 발생한 지 45년 되는 날이다. 북한의 특수부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인 124부대 소속 31명은 1월 16일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 복장에 수류탄과 기관단총으로 무장, 황해도 연산을 출발했다. 1월 17일 군사분계선을 넘은 이들은 경기도 연천군 모래동을 거쳐 남하했다. 이들은 경기도 파주 법원리 야산에서 나무꾼 우씨 형제와 마주쳐 너덧 시간 데리고 있다가 신고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하고 나서 풀어주었다. 공비들은 노고산을 거쳐 1월 21일 새벽 북한산 사모바위 아래 동굴에서 머물다 밤 9시쯤 자하문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 했다. 그러나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에 정체가 발각됐고 이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했다.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시민들이 죽거나 다쳤다. 최규식 종로경찰서장도 현장에서 순직했다. 사진은 수류탄 폭발로 부상을 당한 원효여객 버스의 운전사 이성건씨가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이다. 공비들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비봉과 인왕산, 의정부 쪽으로 도주했다. 10여 일간의 소탕작전 결과 28명은 사살되었고 김신조는 생포됐으며 나머지 2명은 북한으로 도주했다. 우리 측도 전사 43명, 부상 62명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봤다. 이 사건으로 예비군이 창설되었고 우리도 특수부대인 684부대(실미도 부대)를 비밀리에 조직해 북한에 대한 보복성 공격을 계획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1968년 폭파 직전 공중에서 본 밤섬/손성진 국장

    [DB를 열다] 1968년 폭파 직전 공중에서 본 밤섬/손성진 국장

    길쭉하게 두 개의 섬이 잇대어 있는 현재와는 전혀 다른, 1968년 2월 10일 폭파 직전의 밤섬 모습이다. 밤의 형상을 한 밤섬은 한자로 율도(栗島)로 표기되었는데 이 사진을 보면 왜 밤섬인지 알 수 있다. 밤섬과 여의도는 원래 하나의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섬 사이에는 모래톱이 있어 물이 불으면 잠기고 빠지면 드러났다. 역사서에 밤섬은 ‘가산’(駕山), ‘율주’(栗州)라고도 쓰여 있다. 사진 속에 집이 보이듯이 밤섬은 사람이 사는 섬이었다. 고려 때는 귀양지였고 조선시대에는 배를 만드는 조선업자들이 살았다. 또 뽕나무를 재배해 누에를 쳤으며 약초도 심고 염소를 방목했다. 여의도에 윤중제를 만들어 개발하는 과정에서 밤섬은 폭파된다. 그때까지 밤섬에는 62가구 443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폭파 전 강 건너 창천동으로 이주했다. 주민들은 2년에 한 번씩 고향 밤섬으로 가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68년 2월 10일 오후 3시 김현옥 시장이 폭파 단추를 눌렀다. 밤섬을 폭파하게 된 것은 여의도에 제방을 만듦에 따라 한강물의 흐름을 좋게 하기 위한 것이 첫째 목적이었고, 다음으로는 폭파 부산물인 돌을 제방공사에 쓰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여의도와 밤섬은 현재와 같이 500m 이상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폭파 공사로 밤섬은 중심부가 파헤쳐지고 9개의 작은 섬으로 나누어졌다. 밤섬은 그 뒤 30여년 동안 형태의 변화를 겪게 된다. 상류 쪽 작은 섬에 퇴적물이 쌓이면서 점차 커져 크기가 비슷한 두 개의 섬이 되었다. 밤섬에서 한강 너머로 당인리 발전소가 보인다. 지금은 서울화력발전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인리는 예전에 당나라 사람(唐人)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인리 발전소는 1930년 11월 1호기(1만kW)를 준공하여 발전을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열병합발전을 시작하였고 처음에는 석탄을 연료로 썼지만, 지금은 매연을 줄이고자 액화천연가스(LNG)를 연료로 사용한다. 그럼에도, 발전소는 주변이 개발되면서 혐오시설이 되었고 지하화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1963년 대한항공공사의 스튜어디스들

    [DB를 열다] 1963년 대한항공공사의 스튜어디스들

    대한항공공사(KAL) 글씨가 보이는 여객기 앞에서 스튜어디스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63년 1월 15일, 장소는 김포공항이다. 사진에도 프로펠러가 보이는데 이 비행기는 프로펠러기인 DC-4로 보인다. 우리나라 최초의 항공사는 1948년 출범한 대한국민항공사(KNA)다. 그러나 탑승객이 적어 KNA는 만성적자에 시달렸다. 항공기의 부품까지 세무당국에 압류당하는 극도의 경영난에 빠지자 KNA의 설립자인 신용욱은 자살하고 만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KNA를 인수해 1962년 6월 KAL을 설립했다. 현재의 대한항공과는 다른 국영기업이다. KAL은 일본과 홍콩, 방콕 등지로 항공노선을 확장해 가면서 1967년 7월에는 한국 최초로 제트여객기 DC9기를 도입하기도 했지만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이에 정부는 민영화를 결정하고 한진에 비행기 8대를 넘겨주어 1969년 3월 민영항공사 대한항공이 탄생했다. 스튜어디스는 시대와 관계없이 선망의 대상이었다. 국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고 그럴 여유도 없었던 당시 외국을 수시로 드나든다는 것만으로도 스튜어디스는 영화배우 못지않은 특별한 직업이었다. 하지만 툭하면 터지는 항공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했고 납치사건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1969년 12월 발생한 대한항공 여객기 납북사건에서는 성경희·정경숙 두 스튜어디스가 납북되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대한민국 문학의 미래 한자리에…

    대한민국 문학의 미래 한자리에…

    2013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상식이 16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19층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전년보다 37% 늘어난 5240편의 응모작 가운데 등단의 ‘바늘 구멍’을 통과한 6명의 당선자에게 상패와 상금이 수여됐다. 단편소설 부문 당선자 조수경씨에게는 상패와 상금 500만원, 시 부문 당선자 김준현씨에게는 상패와 상금 300만원, 희곡 부문 당선자 임은정씨와 문학평론 부문 당선자 유인혁씨에게는 상패와 상금 250만원, 시조 부문 당선자 송필국씨와 동화 부문 당선자 김보름씨에게는 상패와 상금 200만원이 각각 수여됐다. 사진 오른쪽 하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동화작가 고정욱, 시 부문 당선자 김준현, 시조 부문 당선자 송필국씨, 이철휘 서울신문 사장, 동화 부문 당선자 김보름, 희곡 부문 당선자 임은정, 소설 부문 당선자 조수경씨, 손성진 서울신문 편집국장, 장윤우 서울신문 문우회장, 동화작가 채인선, 시인 손택수, 소설가 성석제, 소설가 방민호, 평론가 김종회, 시조시인 이근배, 시조시인 한분순, 시인 정끝별, 평론 부문 당선자 유인혁씨. 이언탁 기자 utl@seoul.co.kr
  • [DB를 열다] 혼돈의 1963년 재야 4인

    [DB를 열다] 혼돈의 1963년 재야 4인

    1961년 5·16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구(舊)정치인들을 ‘병균’에 비유하며 “박멸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듬해 3월 박정희는 정치활동정화법을 제정해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도록 하고 자신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 구정치인 4300여명의 정치활동을 가로막았다. 박정희는 민정 이양을 약속했으나 애초에 그런 마음이 없었다. 사진은 이런 정국 상황 속에서 1963년 1월 3일 회동한 김병로, 이인, 윤보선, 전진한 등 재야인사 4인의 모습이다. 김씨는 초대 대법원장, 이씨는 초대 법무부장관, 윤씨는 제4대 대통령, 전씨는 초대 사회부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김종필은 나흘 뒤인 1월 7일 중앙정보부장직을 사임하고 공화당 창당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그러나 공화당에서 내분이 일자 3월 16일 박정희는 민정 이양 계획을 백지화하고 4년간 군정을 연장하겠다는 이른바 ‘3·16 군정 연장 선언’을 했다. 반발이 거세지자 박정희는 윤보선, 허정 등과 영수회담을 열었다. 윤보선은 그 자리에서 “석탄만으로 만든 구공탄보다 석탄에 진흙, 톱밥 등 잡물을 섞어서 만든 구공탄의 화력이 월등히 세다”며 정치 규제를 즉각 해제하라고 요구했다. 박정희는 미국의 반대 의사를 확인하고서야 이 선언을 철회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1974년 서울 신문가판대 선데이서울 선풍적 인기

    [DB를 열다] 1974년 서울 신문가판대 선데이서울 선풍적 인기

    1974년 1월 10일 서울의 어느 신문가판대 모습이다. 신문가판대라고 해야 요즘같이 번듯하지도 않고 판때기에 올려놓고 고무줄로 신문들을 둘러놓았다. 당시에는 전국 종합지는 단 7개뿐이었다. 서울신문과 동아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신아일보가 석간이었고 조선일보와 한국일보가 조간이었다. 대한일보는 사주인 김연준씨가 수재의연금 횡령 사건에 휘말려 구속되는 바람에 1973년 폐간됐다. 1980년대 말에 언론통폐합 조치로 신아일보는 경향신문에 통합되었고, 서울신문은 조간으로 변경됐다. 신문의 모습은 지금과 확연하게 다르다. 면수는 8면에 불과했고 세로쓰기를 하고 한자를 혼용했으며, 오른쪽으로 넘기면서 보았다. 머리기사 제목은 시커멓게 음각으로 처리했는데, 이날 석간신문의 제목은 ‘개헌언동 금지 긴급조치 선포’로 유신 치하의 시대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기자가 가판대를 촬영한 목적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선데이 서울을 소개하는 데 있었다. 1968년 창간된 선데이서울은 전체 주간지 판매량의 30%를 넘어설 정도로 주간경향, 주간여성 등 경쟁지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연예 기사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을 심층 분석하는 40~50쪽짜리 기획 기사들도 독자를 불러 모은 비결이었다. 선데이 서울의 판매는 컬러 텔레비전이 나오기 전 절정기에 이르러 1978년에는 발행부수가 23만부를 돌파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고교 평준화 첫해 학교 배정 발표

    [DB를 열다] 고교 평준화 첫해 학교 배정 발표

    1974년 1월 26일 서울 배재중학교에서 3학년 졸업반 학생들이 게시판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그해에 처음 실시된 고교 평준화 제도에 따라 희망하는 고등학교에 배정받은 것을 확인하고는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평준화라고 해서 완전 무시험은 아니고 고입 연합고사를 봐야 했다. 추첨 결과를 발표하는 날 학생들 사이에 희비가 엇갈렸다. 일류고니 삼류고니 하는 구분이 한동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고교 평준화는 1974년 서울과 부산에서 최초로 시행되었다. 평준화의 취지는 과열된 입시 열풍을 식히려는 데 있었다. 당시 서울시내 중3 학생의 60%가 진학을 위한 과외공부를 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보다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의 고교 입학에 맞추어 평준화를 시행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평준화 조치로 서울 지역은 세칭 일류고가 모여 있는 공동학군을 포함해 5개 학군으로 나뉘었다. 서울과 부산의 9개 부실 고교는 문을 닫았다. 공부를 아주 잘하는 상위권 학생들은 비평준화 지역으로 역이동하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평준화는 이듬해 대구·인천·광주, 1979년에는 대전·전주·마산·청주·수원·춘천·제주, 1980년에는 창원·성남·원주·천안·군산·이리·목포·안동·진주로 확대됐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마감 앞둔 서울대 입시원서 접수창구

    [DB를 열다] 마감 앞둔 서울대 입시원서 접수창구

    1975년 1월 6일 서울대 입시원서 접수 창구에 지원자들이 줄지어 서 있다. 당시의 대학입시는 예비고사를 11월에 치르고 이듬해 1월에 대학별로 원서를 받은 뒤 본고사를 보는 제도로, 본고사의 반영률이 높아 당락을 결정하는 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지금이야 인터넷을 이용해 간편하게 원서를 내면 되지만 1990년대까지는 지원자가 대학의 접수 창구로 직접 가서 접수해야 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웃지 못할 광경들이 벌어졌다. 소신지원파도 있었지만 대개는 경쟁률이 낮은 학과에 지원하려고 가족이 몇 사람씩 여러 대학에 나가 서로 연락하며 지원자가 적은 학과를 고르는 눈치작전을 펼쳤다. 또 창구에서 접수를 하다 보니 마감시간의 창구는 막판에 들이닥친 응시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기도 했고, 마감시간을 넘겨 늦게 도착해 원서를 접수하지 못한 응시생들도 적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대입원서를 최초로 접수한 때는 1996년으로 당시 대우정보시스템이 원서접수 시스템을 최초로 개발해 아주대 일반전형에 적용했다. 그 뒤 창구 접수와 인터넷 접수가 혼용되다 2000년대에 들어서 인터넷 접수가 일반화되었다. 사진 속 접수 창구가 있는 곳은 현재의 대학로에 있는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이며, 1975년 그해에 서울대는 관악구 신림동 관악캠퍼스로 이전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