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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성진
    2025-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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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씨줄날줄] 켈로 부대와 카투사/손성진 수석논설위원

    6·25의 전황을 반전시킨 인천상륙작전과 중공군의 남하를 지연시킨 장진호 전투. 유엔군이 주도한 두 작전에는 숨은 한국군 영웅들이 있었다. 바로 켈로 부대원들과 카투사다. 켈로 부대로 불리는 KLO 부대는 미군이 1949년 6월 조직한 비정규 첩보부대였다. 1950년 9월 14일 저녁 7시. 켈로 부대원들은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히라는 맥아더 장군의 명령을 받았다. 최규봉 대장과 미군들은 어둠을 뚫고 팔미도에 침투해 치열한 전투 끝에 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팔미도를 손에 넣었다. 9월 15일 0시 12분, 이들이 등댓불을 밝힘으로써 261척의 유엔군 함정이 상륙작전을 개시할 수 있었다. 첩보부대의 성격상 그들은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원자력학회장을 지낸 원자력 학계의 원로 이창건 박사는 서울대 전기공학과 1학년에 다니다 이 부대의 기획참모로 참전했다. 이 박사는 몇년 전 ‘KLO의 한국전 비사’라는 책을 써 활약상을 알렸다. 8000여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지만 켈로 부대원들은 군번이나 계급, 군적이 없다. 최근 정부가 부대원들이 점호를 받는 모습, 침투하기 직전 모습, 작전지도 등을 확보해 보상을 받을 길이 열렸다. 6·25 전투 중 가장 처절한 전투로 남은 장진호 전투.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넌 중공군은 동부전선 장진호 주변 산악에 매복하고 있었다. 미군은 계곡을 따라 북진하다 11월 27일 밤부터 중공군 7개 사단의 포위 공격을 받았다. 병사들은 철수 명령을 받고 후퇴하면서 12월 1일까지 혹한 속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냈다. 살아 돌아온 미군은 385명뿐이었다. 장진호 전투는 병력 손실이 컸지만, 중공군의 진출을 2주나 지연시키는 전과를 남겼다. 이 전투에서 한국인 카투사 875명도 숨졌다. 카투사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싸우고 얼어붙은 발걸음을 재촉했다고 한다. 카투사(KATUSA)는 주한미군에 배속된 한국군이다. 첫 카투사병은 대구와 부산 등지에서 징집됐다. 이들은 1950년 8월 16일부터 일본 후지산 근처에서 훈련을 받았다. 한달도 안 되는 훈련을 마친 카투사들은 곧바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했다. 한국 지형을 잘 아는 카투사들은 말이 잘 안 통했지만 미군들에게는 중요한 존재였다고 한다. 카투사는 혜산진 점령, 펀치볼 전투 등에서도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참전 당시 갓 스물의 나이였던 켈로 부대와 카투사 용사들은 정전 60년이 지난 지금 팔순을 넘겨 이미 상당수가 고인이 되었다. 더불어 그들의 전공(戰功)도 점점 잊히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사소한 기록/손성진 수석논설위원

    3년 전 정초에 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다소 엉뚱한 연유에서였다. ‘나이가 더 들어서 혹시라도 치매에 걸려 과거의 기억을 몽땅 잊어버리는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참담할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일기라기보다 하루에 있었던 일의 기록이다. 사소한 것들도 적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과 점심을 먹으면서 나눈 대화 내용, 어떤 일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적는 단상(斷想), 여행을 갔다면 상세한 이동 경로와 먹은 음식 등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받는 정보의 양은 엄청나고 뇌의 용량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뇌는 선별해서 기억해 스스로 과부하를 막는다고 한다. 가령, 집 출입문 비밀번호는 만취가 되어도 기억해 내지만 대중목욕탕 옷장 번호는 목욕탕에서 나오면 잊어 버린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어 버리는 일이 잦아져 걱정이다. 집안에 벗어둔 안경을 찾으려고 헤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찮은 것까지 써 놓은 일기장을 늙어서 펴보았을 때 얼마나 기억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씨줄날줄] 영도다리/손성진 수석논설위원

    부산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은 어린 시절 “니(너)는 영도다리 밑에서 주우(주워)왔다”라는 말을 들은 기억을 누구나 갖고 있다. 장난투의 놀림이었지만 참말로 알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영도다리에서 부산 사람들은 고향 같은 친근함을 느낀다. ‘구포다리는 걷는 다리요, 영도다리는 드는 다리요, 영감다리는 감는 다리요’라는 익살스러운 부산지방의 구비 민요도 있다. 여의도 면적의 두 배에 조금 못 미치는 영도(影島)는 선사시대의 패총 유적이 많고 해안 경치가 아름다운 섬이다. 영도와 부산의 본토 남포동을 잇는 다리가 영도다리다. 영도의 남쪽 끝에 있는 태종대로 가려면 영도다리를 건너야 한다. 6·25 피란 시절 영도다리 밑은 피란민들이 비를 피하고 잠을 청했던 공간이었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떴다.”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가사처럼 영도다리는 피란민들이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향수에 빠졌던 곳이기도 했다. 영도다리는 일제강점기 때인 1934년 11월 준공됐다. 준공식에는 멀리 김해나 밀양에서까지 6만 인파가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밤새 제등행렬도 이어졌다고 한다. 영도다리가 명물 중의 명물이 된 것은 국내 유일의 도개교(跳開橋,draw bridge)였기 때문이다. 영도다리는 부산의 남항과 북항 사이에 있어서 배가 영도 남쪽을 돌아가는 시간 낭비를 해결하는 비책이 도개교였던 것이다. 영도다리는 하루에 여섯 차례 들어 올려졌다. 거대한 물체가 하늘로 치솟아 오를 때 처음 본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부산사람들은 그저 “영도다리가 끄덕끄덕한다”고만 했다. 그러나 교통량의 증가로 1966년 9월부터는 영도다리가 들린 모습을 더는 볼 수 없게 됐다. 다리를 들어 올릴 때 차량들이 길게 줄지어 기다려야 했다. ‘배 몇 척을 보내려고 수많은 차들이 기다려야 하느냐, 배가 돌아가면 되지’ 하는 원성이 자자했던 것이다. 노후화된 영도다리를 철거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었다. 결국 복원하기로 결정되어 2006년에는 부산시 기념물 제56호로도 지정됐다. 이듬해 7월 보수·복원공사가 시작되어 최근 상판 연결공사가 끝났다. 부산시는 다리를 복원함과 동시에 47년 만에 도개 기능도 재현한다고 한다. 올 연말에는 영도다리가 ‘끄덕끄덕’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 같다. 낭만적인 풍경을 위해서라면 잠시 교통이 정체되는 것쯤은 참을 수 있지 않을까.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씨줄날줄] 전통주/손성진 수석논설위원

    최근 열린 재외공관장 만찬의 건배주는 ‘복순도가’라는 경남 언양의 시골 막걸리였다. 이 막걸리는 지난해 핵안보정상회의 때도 참석자들이 건배를 하면서 마셨다. 발효 과정에서 생성된 천연 탄산가스 때문에 샴페인 같은 상쾌한 느낌이 나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막걸리를 가장 좋아한 사람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1966년 여름, 박정희는 경기도 고양에 있는 골프장에 다녀오는 길에 목이 컬컬하다며 삼송동 ‘실비옥’이라는 막걸리 주막에 들렀다. 그 집의 막걸리 맛에 반한 그는 사망할 때까지 14년 동안 청와대로 배달시켜 마셨다고 한다. 지금도 ‘배다리 막걸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고 ‘배다리 술박물관’에는 막걸리를 마시는 박 전 대통령의 밀랍 인형이 전시돼 있다. 몇 년 전 뜨겁게 불던 막걸리 열풍이 점점 식어가 전통주 업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술은 본래 유행가처럼 시류를 타지만 아직은 우리 술에 대한 애정이 확고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와인이나 사케 같은 외국 술을 선호하고 맥주에 소주를 타서 마시는 폭탄주 문화가 점점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통주 전문가’인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죽어가는 전통주를 살리겠다고 나선 것은 그래서 반갑다. 우리 전통주는 지역마다 원료와 제조방법, 맛이 다르다. ‘앉은뱅이 술’로 불리는 한산 소곡주, 문배나무의 향이 난다는 문배주, 국화로 빚는 경주 황금주, 송화와 찹쌀로 빚는 완주 송화 백일주, 옥수수로 빚는 강원도 옥로주, 연잎을 재료로 하는 아산 연엽주 등은 모두 귀한 우리 술이다. 또 배와 생강으로 만드는 이강주, 대나무가 원료인 죽력고, 색깔이 붉은 진도 홍주, 술이 곧 안주이고 안주가 곧 술이라는 진양주, 소주의 최고봉 안동소주 등 아직도 수십 종의 전통주들이 명주로 꼽히고 있다. 전해져 오는 전통주는 수백에서 수천 종에 이르겠지만, 상당수는 자가 제조와 소비의 형태이다. 그 다양성이 판매 시장을 좁히는 독이 되었고 명맥이 끊기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막걸리를 위시한 전통주는 1970년대에 시장점유율이 80%에 이르기도 했지만 지금은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전통주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배상면 국순당 창업자가 별세했다. 고인의 호는 ‘또 누룩을 생각한다’는 의미의 ‘우곡’(又麯)이다. ‘백세주’로 전통주 바람을 불러일으켰지만, 시장의 침체 속에서 소위 ‘밀어내기’ 파동을 지켜봐야 했다. 전통주 연구와 더불어 주류시장에서 우리 술의 위상을 높인 고인의 업적만은 평가할 만하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라디오/손성진 수석논설위원

    차를 몰 때를 빼고는 라디오를 듣는 일이 거의 없다. 화려한 색상의 화면이 겸비된 방송이 전화기 속에서도 나오는 시대이니 라디오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까. 텔레비전이 없던 어린 시절, 트랜지스터 라디오 옆에서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드라마를 듣고 퀴즈도 풀던 기억이 생생하다. 화면이 없다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연속극의 장면들이 총천연색으로 머릿속에 그려졌으니까. 라디오는 상상력을 키워 준 고마운 존재였다. 불을 꺼놓고 ‘법창야화’의 강진 갈갈이 사건을 들으면 보이는 것이 없는데도 몸이 오싹해졌다. ‘왕비열전’에서는 인목대비며 장희빈이라는 이름과 함께 조선의 역사를 배웠다. 구수한 음성으로 들려준 ‘전설 따라 삼천리’는 할머니의 이야기보따리 같았다.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 중에서도 유난히 기억에 선명한 게 부산에서 방송된 ‘자갈치 아지매’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성우(그때의 성우는 김옥희씨였다)가 아침 시간에 5분 동안 신랄하게 사회 비판을 했다. 1964년 6월 7일 시작되었다는 이 프로가 지금도 장수 방송으로 살아남아 있다니 놀랍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씨줄날줄] 매머드 복원/손성진 수석논설위원

    매머드는 한반도에서도 살았던 동물이다. 크기는 3m 정도였지만 28만년 전에 살았던 쑹화강 매머드는 몸길이가 9.1m나 되었고 키는 5m가 넘었다. 1933년 북한 함북 온성군에서 철도 공사 도중 매머드 화석이 발견됐다. 북한에서는 또 1961년에 화대군에서, 1977년에는 길주군에서 잇따라 매머드 화석이 나왔다. 남한에서도 1996년 전북 부안에서 매머드의 어금니와 골격 화석이 발굴된 일이 있다. 매머드는 우리와 퍽 친숙했던 동물인 셈이다. 매머드는 약 480만년 전부터 불과 4000년 전까지 존재했다. 이 시기는 인간의 역사와도 거의 일치한다. 두 발로 걷는 최초의 원시 인간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출현한 것은 약 500만년 전이다. 빙하기였던 수십만년 전 따뜻한 곳에 살던 매머드는 사라졌지만 추위에 적응한 털북숭이 매머드 등은 오히려 번성했다. 매머드는 빙하기가 끝난 홍적세 말기인 1만년 전 멸종하기 시작했는데 여러 가설만 나와 있을 뿐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빙하기가 끝난 기후의 변화 때문이라는 설과 인류의 사냥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최근에는 1만 2800년 전 지구에 운석이 충돌한 뒤 발생한 유독 가스와 기온 급강하로 멸종했다는 운석 충돌설이 힘을 얻고 있다.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에서는 냉동 상태에서 완벽하게 원형이 보존된 매머드가 발견되고 있다. 2009년에는 가죽과 장기가 깨끗하게 남아 있는 아기 매머드의 사체가 발견되기도 했다. 어떤 매머드는 입 안에 씹던 풀들이 있었고 그 풀은 열대 혹은 온대 식물이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지구 자전축의 변화가 지구를 급속히 냉동시키는 바람에 매머드가 멸종됐다는 가설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이 최근 한 연구소의 연구팀이 진행하고 있는 매머드 복원 프로젝트를 방영해 눈길을 끌었다. 이 연구소는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가 관여하고 있어 더욱 주목을 받았다. CNN 등 미국의 방송들도 이 프로젝트를 보도하면서 연구팀이 매머드의 혈액을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고 전했다. 매머드 복원 과정은 이렇다. 코끼리의 난자에서 핵을 제거하고 매머드의 세포에서 분리해 낸 핵을 집어넣는다. 화학적·전기적 자극을 주어 세포분열을 시켜 배아가 만들어지면 이를 코끼리의 자궁에 이식해 아기 매머드를 출산시킨다는 것이다. 매머드 복원에 성공한다면 과학계를 발칵 뒤집을 만한 엄청난 사건이 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몇년 전 배아줄기세포 자료를 조작해 물의를 빚었던 황 전 교수가 참여하고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 것 같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서울광장] 가스도입 경쟁체제는 국민 이익을 위한 것/손성진 수석논설위원

    [서울광장] 가스도입 경쟁체제는 국민 이익을 위한 것/손성진 수석논설위원

    우리의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은 한국가스공사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국내 경쟁자 없이 전 세계 자원시장에서 가스를 대량 도입하는 가스공사는 막강한 구매력을 가진 큰손으로 통한다. 가스공사의 가스 도입 금액은 어마어마한 규모다. 2010년 10월부터 1년 반 동안 계약한 금액이 자그마치 250조원이다. 국민 1인당 500만원, 한 가구당 2000만원이나 부담해야 하는 엄청난 돈이다. 도입권뿐만 아니라 공급권도 틀어쥔 가스공사의 매출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2007년에 14조 2608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엔 35조원을 넘어섰다. 순이익은 1조 2000억원대에 이른다. 올해 1분기에는 매출 12조 2224억원, 순이익은 8497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각각 7.5%, 18.3%나 증가했다. 이는 지난해 7월과 올해 2월, 2회에 걸쳐 도시가스 요금을 올린 덕이다. 많은 소비자는 가스요금 폭탄을 맞았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한 달에 40만원이 넘는 가스비를 내는 집이 허다하고 방 한 칸짜리 오피스텔에 25만원이 부과되어도 하소연할 데도 없다. 반면 가스공사 직원들의 평균 연봉은 8000만원이 넘고 지난해 말에는 성과급을 1561만원이나 지급했다. 소비자들이 땀 흘려 벌어서 낸 가스요금으로 독점기업이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가스요금을 낮추려면 우선 가스를 조금이라도 싸게 들여와야 한다. 그러나 독점체제여서 비싸게 사 와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최근 1년 반 동안의 계약 체결분 250조원에서 1%만 깎아도 2조 5000억원이라는 돈을 절약할 수 있는데 말이다. 이 돈은 인천대교 전체 건설 공사비보다 많은 금액이다. 1990년 이후 한국의 가스 도입 가격은 늘 일본보다 높았다. 일본이 우리보다 높은 가격에 산 때는 원전 사고 이후뿐이다. 가스 도입을 경쟁체제로 바꿀 필요가 있다. 다양한 공급원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싼 가격에 들여올 길을 열어줘야 한다. 정부에서는 일단 민간의 직수입 규제를 완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듯하다. 국회에서도 규제를 완화하는 내용의 도시가스사업법 개정안을 김한표 새누리당 의원이 발의해 놓고 있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규제를 강화하는 법안도 동시에 발의되어 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규제 강화를 추진하는 쪽에서는 가스 직수입 확대가 구매력을 약화시켜 도입가격을 상승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 직수입 업체들의 도입 단가는 가스공사보다 절대 높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가스 도입을 독점하고 있는 국가는 우리뿐이다. 일본은 종합상사 등 많은 회사가 경쟁체제로 가스를 수입하고 있다. 경쟁체제인 일본의 가스 도입 가격은 도리어 우리보다 낮다. 규제 강화 쪽에서는 또 직수입에는 일부 대기업들이 참여해서 이익을 챙길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으면서도 막대한 이익을 독차지하고 해마다 고액의 성과급까지 받는 가스공사의 독점체제가 나은지, 아니면 다수 기업들이 그 이익을 나눠 갖는 것이 나은지는 생각해 보면 자명하다. 더욱이 셰일가스(암석에 갇힌 천연가스)의 등장은 천연가스 가격 하락 요인이다. 일부 발전사들은 셰일가스 등 상대적으로 값싼 가스를 들여와 전력생산 비용을 낮추려 한다. 이와 함께 정부가 추진 중인 LNG 발전소에 저렴한 가스를 공급하기 위해서도 도입 채널을 다양화하는 규제 완화가 따라야 한다. 그런데 우리보다 싸게 가스를 도입하고 있는 일본에서도 최근 유럽이나 미국보다 최대 3배나 비싸게 수입해 연간 2조~3조엔(약 23조~35조원)을 허비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본 학자들은 일본의 LNG 도입가를 15% 낮추면 3년간 국내총생산(GDP)이 1조 7000억엔(약 20조원) 늘어날 것이며 5만명을 추가 고용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분석한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과연 가스 도입의 규제를 강화하는 게 옳은지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sonsj@seoul.co.kr
  • [씨줄날줄] 동성결혼 논란/손성진 수석논설위원

    동성애는 역사서에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사에는 공민왕이 미소년 무사들을 궁으로 불러들여 가까이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은 사다함과 무관랑 등의 화랑들이 우정이 지나쳐서 동성애에 빠졌다고 적었다. 조선의 세종은 봉씨를 세자빈으로 삼았지만 몇 년 동안 부부 사이가 좋지 못했다. 그 이유가 봉씨가 소쌍이라는 시녀와 동성애 관계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에 적혀 있다. 판소리 적벽가와 박타령에는 항문 성교가 등장한다. 중국에서도 한나라 고조인 유방은 적유와 동성애 관계였다고 전한다. 문학작품 금병매와 홍루몽 등에도 동성 간의 사랑이 묘사되어 있다. 여성 동성애자를 레즈비언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그리스 에게해의 레스보스섬 이름에서 유래한다. 고대 그리스의 여류 시인 사포는 동성애자였다고 하는데 그녀가 살았던 곳이 레스보스섬이었다. 동성애의 원인에 대해서는 호르몬의 부조화 때문이라는 등 여러 가지 학설이 있기도 하고 한때는 정신질환으로 보기도 했지만, 동성애자들은 그런 분석 자체를 싫어한다.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동성애자의 권리 찾기 운동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됐다. 1955년 미국에서 첫 레즈비언 단체 ‘빌리티스의 딸들’이 조직됐다. 우리나라에서도 1994년 여성 동성애자 인권운동 모임이 생겼고 동성애가 다양한 정체성의 하나로 서서히 인정을 받아 가고 있다. 최근 김조광수(48) 영화감독이 동성 남자와 결혼한다고 발표해 시선을 끌었다. 연예인들의 커밍아웃은 있었지만 결혼 발표는 처음이었다. 물론 혼인은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세계 최초로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한 국가는 네덜란드로 2000년의 일이다. 벨기에, 캐나다, 스페인 등이 뒤를 따라 현재 14개국이 동성 결혼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등에서는 동성 결혼에 대해 최고 사형까지 시키는 등 중범죄로 다루고 있다. 요즘 동성 결혼 논쟁이 가장 뜨거운 나라가 프랑스다. 지난 18일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관련 법안에 서명함으로써 프랑스에서도 동성 결혼이 합법화됐다. 그러자 70대 노인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입 안에 권총을 쏴 자살한 데 이어 극우 활동가인 도미니크 베네가 관광객 1500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같은 곳에서 같은 방법으로 자살했다. 이는 15만여명이 모인 동성결혼 반대 시위로 이어졌다. 문화적 다양성을 포용하는 톨레랑스(관용)의 나라로 알려진 프랑스에서 이런 정도인데 우리나라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어머니의 전쟁/손성진 수석논설위원

    시인이면서 박사학위도 갖고 있는 동창이 ‘어머니의 전쟁’이란 책을 냈다.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어머니를 임종 때까지 일곱 달 동안 간병하면서 쓴, 어찌 보면 처절한 기록이다. 책에는 둘째 아들인 그 친구가 팔순이 넘은 병든 어머니를 돌보면서 겪은 절절한 사연이 담겨 있다. 움직이기조차 힘든 몸으로 새벽녘에 병상에서 기다시피 내려와 보호자용 간이침대에서 자는 아들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어머니의 사랑을 친구는 ‘끔찍한 사랑’이라고 표현했다. 모시지도 않던 차남이 마지막을 책임지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그런 아들에게 어머니는 “둘째야, 너와 나는 죄를 많이 지어서 마지막에 이렇게 만났나 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친구는 어머니의 최후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어머니를 성자(聖者)라고 했다. ‘백리를 달려 남도로 달려가면/비가 새어들고 바람이 들이치는 옛집에/절뚝거리며 마중 나오는 성자가 산다/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더 못 주어 안타깝다던 그 사람’(고향에는 성자가 산다) 손성진 수석논설위원 sonsj@seoul.co.kr
  • [인사]

    ■서울신문 ◇논설위원실△수석논설위원 손성진△논설위원 박건승 박현갑 안미현◇경영기획실△부실장(겸임) 이상훈◇편집국△부국장 손석구 이도운△선임기자 임태순 유상덕 노주석 장상규△전문기자 임병선<부장>△정치 박홍환△사회 박찬구△메트로 이동구△정책뉴스 김성수△국제 이종락△경제 김태균△산업 최용규△문화 황수정△체육 이기철◇사업단△부단장 이연경 김성곤△수석기획위원 함혜리◇콘텐츠평가팀△팀장 육철수△심의위원 김주혁◇온라인뉴스국△기획위원 박희석◇일본현지법인개설준비위△위원장 황성기 ■감사원 ◇고위감사공무원 <승진>△공직감찰본부장 주승노△감사교육원장 김충환<전보>△제2사무차장 정길영△기획관리실장 왕정홍 ■외교부 △의전장 최종현 ■농림축산식품부 ◇국장급 <승진>△대변인 남태헌<전보>△식품산업정책관 임정빈△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장 임재암◇과장급 전보△축산정책과장 이상만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 최영현△인구정책실장 이태한△정책기획관 장재혁△보건의료정책관 권덕철△건강보험정책국장 이동욱△보건산업정책국장 박인석△복지정책관 조남권△장애인정책국장 윤현덕 ■환경부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 사장 송재용 ■해양수산부 △허베이스피리트피해지원단 보상협력팀장 노진관△해양수산인재개발원장 설인철△인천지방해양항만청 항만정비과장 김종래△국립수산과학원 운영지원과장 최경욱 ■금융위원회 ◇임명△사무처장 고승범△금융정책국장 김용범 ■병무청 ◇고위공무원 승진△병역자원국장 이성수 ■농촌진흥청 ◇승진△농촌지원국장 이범승△국립농업과학원 농업생물부장 이규성△국립농업과학원 농업공학부장 이용범△국립원예특작과학원 인삼특작부장 이진모△국립축산과학원 축산자원개발부장 김인철△충북도 농업기술원장 김숙종◇전입·전보△국립농업과학원 농업환경부장 이상범△국립농업과학원 농식품자원부장 김종철△국립식량과학원 기능성작물부장 전영춘 ■KBS △대전방송총국장 곽영지 ■에쓰오일 ◇승진 <부사장>△생산지원본부장 류경표<상무>△신사업부문담당 박승구△노사협력부문담당 오석동△업무부문담당 김평길△변화지원부문담당 박태철△컨트롤러 조용국
  • [DB를 열다] 1969년 무교동 유흥가의 네온사인

    [DB를 열다] 1969년 무교동 유흥가의 네온사인

    오색 찬연했던 무교동의 네온사인도 이제 일장춘몽처럼 찾을 길이 없다. 1960~70년대 서울 유흥가의 중심은 무교동과 명동이었다. 금융가가 밀집했던 명동과 사무실의 집결지였던 무교동은 밤이면 명멸하는 불빛 아래 이성을 잃은 듯 흥청대는 주객들로 넘쳐났다. 통금이 있던 그때, 밤 11시가 넘으면 일찌감치 만취한 군상들이 골목을 헤집고 다니며 마지막 주흥을 불사르곤 했다. 주머니에 돈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치 않았다. 암울했던 당시 세상사를 한탄하기도 하고 또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기도 하며 몇 잔의 대폿잔에도 금방 취해 버렸다. 주점과 음식점들이 번성했던 무교동 유흥가란 옛 중부소방서(현재 파이낸스 빌딩 옆 공원 자리)에서 광교에 이르는 500여m의 무교로를 가운데 두고 좌우의 무교동, 다동, 서린동 일대를 일컬었던 말이다. ‘스타다스트’ 같은 대형 나이트클럽과 극장식 식당, 대중음식점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스타다스트 옆에는 무교동 낙지골목이라 하여 60여개의 낙지 전문 음식점들이 주당들을 유혹했다. 음악다방 ‘쎄시봉’도 근처에 자리 잡았었다. 무교동이 쇠락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 그 일대가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되고 강남이 개발되면서 유흥주점들이 옮겨 가던 때부터다. 도로가 확장되고 고층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그 시절 술꾼들의 애환이 서린 장소도 함께 자취를 감추고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 사진은 1969년 12월에 촬영한 무교동의 한밤 네온사인 풍경이다. 손성진 기자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1969년 완공되기 직전의 금화시민아파트

    [DB를 열다] 1969년 완공되기 직전의 금화시민아파트

    주거 환경을 단기간에 개선하고자 1960년대 말에 지었던 서울의 시민아파트들은 대부분 다 헐렸지만 아직도 일부는 역사 유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중에 하나가 서대문구 천연동과 냉천동의 금화시민아파트다. 남아 있는 시민아파트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금화아파트의 입주식은 1969년 4월 21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 등 주요 정부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는데 사진은 그해 완공 전의 모습이다. 그러나 수천명이 참석했던 입주식은 부실공사의 공포로 곧 악몽으로 바뀌고 만다. 저곳은 안산 줄기인 야산의 정상과 가까운 곳인데, 당시 산꼭대기에까지 들어서 있던 불량 주택들을 철거한 자리에 그대로 아파트를 지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청와대에서 잘 볼 수 있도록 일부러 높은 곳에 지었다고 한다. 금화아파트는 당초 모두 3만㎡가 넘는 부지에 112개 동을 지으려 했으니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단지 아파트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가 터지면서 시민아파트 건립 사업이 중단되고 금화아파트의 일부 동을 포함해 부실하게 지어진 아파트들은 도리어 철거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부실 판정을 받은 금화아파트의 철거는 중간중간 계속돼 1990년대까지도 이어졌다. 2000년대 중반까지 서울에는 32개 지구에 430여개 동의 시민아파트가 남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재개발되거나 헐려 공원으로 바뀌었다. 중구 회현동의 회현시민아파트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의 배경 장소였다. 남산에 밀집해 있던 무허가 주택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준공된 회현시민아파트는 당시 최초로 중앙난방 시설을 갖추었고 인기 연예인들이 거주해서 ‘연예인 아파트’로 유명했던 적도 있다. 동숭, 낙산, 김포, 본동, 연희A, 홍제, 청운, 청파, 도봉, 숭인, 영흥, 창신지구 등의 시민아파트는 공원이 되었다. 녹번, 연희B, 삼일, 월곡지구의 시민아파트는 재건축되었다. 금화아파트도 1990년대 말 재건축이 확정되어 거의 모든 동이 헐렸고 그 자리에 일반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재개발 지역인 서울 북아현3구역에 포함된 금화아파트 두 개 동은 그대로 남아 있다. 붕괴 위험이 큰 건물로 지정되었지만 옮겨 갈 집이 없는 10여 가구의 주민이 아직도 폐허가 다 된 아파트를 지키고 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1969년 12월 새 단장 후의 김포가도

    [DB를 열다] 1969년 12월 새 단장 후의 김포가도

    1954년 여의도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서 서울의 관문이 되었다가 김포공항이 그 역할을 대신하기 시작한 때는 1958년이었다. 공항에서 서울까지 드나드는 도로가 반드시 필요한데 처음에는 영등포와 김포 사이에 국도가 있었다. 이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하는 공사를 1961년 8월 1일 시작해 1963년 10월 31일 준공을 보게 되었다. 양화대교에서 등촌동을 지나 강서구청 입구 사거리를 거쳐 김포공항 입구까지 이어지는 도로다. 지금은 공항대로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총 공사비는 당시 돈으로 2억여원이 들었는데 1960년 3·15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씨의 부정축재 환수금이었다는 사실이 이채롭다. 당시에는 주변이 개발되지 않았고 초가집이나 양철집 등 불량주택들이 있어서 당국은 미화 작업과 확장 공사를 계속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별하고 돌아오는 길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김포가도는 대중가요 소재로도 애용되었다. 1974년 남진의 ‘김포가도’라는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그렇게도 떠나기를 아쉬워한 사람을 보내고 돌아오는 김포가도/ 창밖을 스쳐가는 싸늘한 바람 /쌓이고 쌓였던 지난 사연 구름 속에 사라졌네/ 수많은 별 같은 추억을 안고 쓸쓸하게 돌아오는 밤 깊은 김포가도’ 같은 해에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이라는 노래도 나왔다. ‘하고 싶은 말들이 쌓였는데도 한마디 말 못하고 헤어지는 당신이/ 이제 와서 붙잡아도 소용없는 일인데/ 구름 저 멀리 사라져 간 당신을 못 잊어 애태우며/ 허전한 발길 돌리면서 그리움 달랠 길 없어 나는 걸었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1969년 잔디밭에 앉아 대화하는 대학생들

    [DB를 열다] 1969년 잔디밭에 앉아 대화하는 대학생들

    1969년 10월의 어느 날, 대학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다. 지금보다 훨씬 적은 숫자의 학생이 대학에 들어갔던 그 시절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입시 지옥의 문을 탈출했다는 것, 성인이 되었다는 것, 그래서 다방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술과 담배를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것, 미팅을 한다는 것 등등. 무엇보다 캠퍼스의 낭만은 대학생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대학생은 한마디로 낭만의 자유인이었다. 시간이 나면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잔디밭에 앉아 시국을 논하고 철학을 이야기했다. 누구나 가난했던 때 대학생들의 주머니도 늘 비어 있었다. 시골 출신 학생들은 소를 팔아 등록금을 댄다고 해서 대학을 상아탑(象牙塔)에 빗대어 우골탑(牛骨塔)이라 불렀다. 요즘같이 아르바이트 거리도 많지 않았고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란 가정교사가 거의 유일했다. 그마저 떨어지면 돈을 적게 쓰는 방법밖에 없었다. 가난했던 대학생들은 물들인 군복 상의를 입고 군화를 끌고 다녔다. 대학을 왜 상아탑이라 할까. 상아탑은 세속적인 생활에 관심을 갖지 않고 고고한 예술지상주의 입장을 취한 19세기의 프랑스 시인·극작가였던 알프레드 드 비니를 평론가 생트 뵈브가 평할 때 사용한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 말이 발전하여 현재는 대학 또는 대학의 연구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명창 박녹주의 1969년 모습

    [DB를 열다] 명창 박녹주의 1969년 모습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시대의 명창 박녹주(1905∼1979)의 1969년 10월 모습이다. 6·25 때 한쪽 눈을 잃어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경북 선산 출신인 박녹주는 일제강점기부터 최고의 명창으로 군림했고 대구 달성권번과 서울 한남권번의 명기(名妓)로 이름을 날렸다. 동편제의 거목으로 인간문화재 5호인 그녀는 판소리 춘향가와 흥보가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굴곡진 삶은 판소리 서편제처럼 서글펐다. 특히 그녀는 ‘봄봄’ ‘동백꽃’으로 유명한 세살 아래 소설가로 연희전문을 다녔던 김유정(1908~1937)으로부터 광적인 사랑, 요즘 말로 하면 지독한 스토킹을 받은 일화로 유명하다. 녹주에게 첫눈에 반한 유정은 밤마다 연서를 써 보냈다. 편지를 아무리 보내도 답장이 없자 유정은 녹주의 집을 찾아가 대성통곡을 하기도 한다. 녹주가 소리하는 사람이 학생과 연애를 할 수는 없다고 하자 유정은 학생과 소리하는 사람이 사랑해서 안된다는 규정이 어디에 있냐고 대들며 사랑이란 국경이 없는 것이라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유정은 늘 그녀의 공연장을 찾아가 밖에서 기다렸지만 녹주는 만나주지 않았다. 녹주는 이미 다른 사람의 소실이 되어 있어 유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유정은 혈서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녹주를 죽이겠다고 협박을 할 정도로 병적으로 변해갔다. 연모의 감정이 복수심으로 바뀐 것이다. 유정의 소설 ‘생의 반려’와 ‘두꺼비’는 그와 녹주의 관계를 소재로 쓴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1960년대 중산층 가정

    [DB를 열다] 1960년대 중산층 가정

    1968년 5월 2일 촬영한 어느 중산층 가정의 거실 풍경이다. 소파와 탁자가 있고, 부모와 아이들은 신문과 잡지를 읽고 있다. 도자기와 액자가 놓인 장식장도 있다. 먹고살기도 어려웠던 당시 이런 서양식 거실을 갖춘 양옥에서 살았으면 부유층 집안이었다. 아이들은 넷이다. 당시에는 집집마다 평균 네댓 명의 자녀가 있었다. 사진 속의 아이들은 전후에 태어나 현재 5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을 소위 베이비붐 세대들이다. 이런 부유층의 주택은 서울에서도 극히 일부 지역에만 존재했다. 그렇다면, 당시에 일반 가정의 생활상은 어떠했을까. 한국식 주택은 방과 부엌, 마당, 화장실이 서로 분리돼 있었다. 두세 개의 방이 있고 거실 대신 마루가 있고 마루와 마당은 벽으로 막혀 있지 않다. 부엌은 마당으로 나가야 들어갈 수 있고 음식을 해서 방으로 나른다. 화장실도 마당의 한쪽에 있는 재래식이다. 마당에 수돗가나 우물이 있어서 세탁과 세수를 밖에서 한다. 이런 전통 가옥은 1960년대 들어 서서히 변모하기 시작한다. 서양식 주택 설계로 방과 거실, 화장실, 부엌이 모두 한 평면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실내에 있는 입식 부엌과 싱크대는 여성들에게 말할 수 없는 편리함과 노동의 절감을 선사했다. 이런 편리함의 추구는 아파트 문화를 낳았다. 한국인들의 유별난 아파트 사랑은 주택 부족을 단기간에 해소하는 동시에 전통주택의 불편함을 해결해 주는 장점 때문이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1968년 여름철 앞두고 서울시청 앞서 열린 방역차량 발대식

    [DB를 열다] 1968년 여름철 앞두고 서울시청 앞서 열린 방역차량 발대식

    지금도 전염병 발생이 우려되는 곳에서는 방역 차량이 다니기는 하지만 그렇게 흔하게 볼 수는 없다. 위생 상태가 그리 좋지 못했던 시절, 방역차가 수시로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연기를 내뿜었다. 파리, 모기야 요즘도 있지만 그 시절에는 여름철이면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들끓었다. 그럴 때면 방역차가 어김없이 나타났고, 한번 소독을 해 주고 가면 왠지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잠시 맡아도 별 이상한 느낌이 없는 이 냄새를 맡고도 파리, 모기가 죽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실제로도 방역차의 효과는 그리 크지 않다고 한다. 방역차가 나타나면 으레 아이들이 몰려들어 차량 꽁무니를 따라다니는가 하면 연기 속으로 들어가 보곤 했다. 약품 냄새가 나는 연기를 내뿜는 방역 차량의 뒤를 아이들은 왜 그렇게 쫓아다녔을까. 방역차의 연기는 살충제를 섞은 경유를 태울 때 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살충제 냄새가 아니라 경유 타는 냄새를 쫓아다닌 것이다. 경유나 휘발유가 타는 냄새는 묘하게 후각을 자극한다. 거기에다 시골 아이들은 자동차를 구경하기 어려웠을 터이니 연기를 뿜으며 달리는 자동차 자체가 신기해 보였을 것이다. 또 연기 속에 숨었다 나왔다 하며 숨바꼭질하듯 방역차를 놀이의 대상으로 삼았던 듯하다. 방역차를 따라가다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연기에 가려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틈을 타 뒤에서 돌팔매질을 장난으로 하는 녀석들도 있다. 연기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길옆의 웅덩이에 빠지기도 한다. 전봇대나 마주 오는 자전거와 부딪쳐 다치는 일도 다반사다. 방역차 연기가 멈추고 나면 모든 것이 드러난다. 어떤 아이는 머리에 혹이 나 있고 바지에 진흙을 뒤집어쓴 아이도 있다. 연기를 잔뜩 마신 녀석은 비틀거리기도 하고 구토를 해대기도 한다. 사진은 1968년 4월 20일 여름철을 앞두고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방역차 발대식이다. 오른쪽 멀리 덕수궁이 보인다. ‘전염병을 박멸하자’라는 글씨가 적힌 피켓이 보이고 왼쪽 아래에는 ‘쥐를 잡자’ ‘오후 7시 쥐약을 놓자’라는 글귀도 보인다. 식량이 부족하던 때, 곡식을 축내는 쥐잡이는 방역보다 더 중요한 연중행사였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1969년 3월 1차 완공된 3·1 고가도로

    [DB를 열다] 1969년 3월 1차 완공된 3·1 고가도로

    서울 마장동과 도심을 잇는 3·1고가도로는 1969년 3월 22일 1차 구간이 준공됐다. 준공 행사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김현옥 서울시장이 참석할 정도로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근처에 3·1빌딩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전체 도로는 1976년 8월 완공됐으며 폭이 10.3~16m, 연장 5737m였다. 주변에 판잣집이 즐비하던 청계천의 복개 공사가 시작된 것은 1958년이었다. 1961년까지 광교에서 오간수교 사이가 복개되었고 1965년부터 1978년 사이에 청계천 9가 마장철교까지 시멘트로 덮였다. 복개된 청계천 위에 고가도로를 건설한 첫째 목적은 김포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와 워커힐호텔까지 정차 없이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도심고속도로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대통령의 워커힐 행차에도 유용하게 쓰였다. 사진에서 보듯이 청계천 하류 쪽에서 3·1고가도로는 중구 충무로 2가 세종호텔 앞을 거쳐 남산1호 터널로 연결되었다. 이 고가도로는 휘어지는 곡선 도로였기에 신문사들은 차량 불빛이 꼬리를 무는 풍경을 야간 촬영을 해서 연말 신문의 송년호 사진에 자주 실었다. 이 고가도로는 통행량 분산에 도움을 주었지만 도심을 관통했기 때문에 차량 흐름에 방해가 된다는 지적도 있었다. 무엇보다 청계천 복원공사가 시작되면서 3·1고가도로의 운명도 끝이 나 2006년 7월 1일 철거되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1968년 교통사고 낸 ‘하동환 버스’

    [DB를 열다] 1968년 교통사고 낸 ‘하동환 버스’

    서울의 어느 육교 아래 사고를 내 찌그러진 ‘하동환 버스’가 서 있다. 1968년 3월 25일 촬영한 사진이다. 종로와 신촌을 오가는 버스의 앞유리창 아래에 하동환 버스임을 알려주는 체크 표시 위의 H자가 보인다. 뒤에 오는 버스도 하동환 버스다. 하동환은 ‘드럼통 버스왕’이라 불렸다. 1930년 개성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때부터 자동차 정비공장의 기술자로 일하며 자동차와 인연을 맺었다. 그가 하동환 자동차 제작소를 설립, 미군이 남기고 간 폐차 엔진에 드럼통을 두드려 펴서 차체를 붙인 버스를 선보인 것은 1955년이었다. 1962년에 하동환은 회사를 법인으로 전환해 본격적으로 버스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하동환 버스는 1966년 브루나이로 처음 수출되고 이듬해부터는 베트남으로도 수출되어 현대자동차의 포니보다 10년 앞선 한국 최초의 자동차 수출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하동환은 1974년에 지프를 개발하고 소방차 생산업체로 지정된 1977년에는 회사명을 다시 동아자동차로 변경했다. 1984년에는 코란도를 출시한 ㈜거화를 인수하는 등 사업을 확장했지만 1986년 동아자동차를 자동차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쌍용그룹에 매각한다. 결국 쌍용자동차의 뿌리는 하동환 버스인 셈이다. 이후 그는 트레일러를 생산하는 동아정기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한원그룹을 세워 장학회와 미술관, 한원컨트리클럽(골프장) 등을 운영했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 [DB를 열다] 1968년 광화문 복원 기공식

    [DB를 열다] 1968년 광화문 복원 기공식

    사진은 1968년 3월 15일 거행된 광화문 복원 기공식 장면이다. 지금은 철거되어 없어진 옛 중앙청 건물이 보이고 건물 벽에는 ‘증산, 수출, 건설’이라는 글씨가 쓰인 간판이 걸려 있다. 광화문은 전쟁과 침략으로 여러 차례 수난을 겪었다. 1395년(태조 4년) 9월에 창건된 이 문이 광화문이라 명명된 것은 1425년 세종 7년 때 집현전 학사들에 의해서였다. 광화문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불에 타 270여년간 방치되었다. 그랬다가 1864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광화문을 다시 세웠다. 광화문은 다시 수난을 겪는다. 한일병합 후 일제는 1927년 궁궐 건물들을 헐어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광화문을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 존재 가치를 상실시켰다. 설상가상으로 6·25전쟁 동안에 광화문은 폭격을 받아 목조 부분이 불에 타고 말았다. 이를 1968년에 다시 건립하게 된 것이다. 석축은 그대로 썼지만 현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글 필체로 쓰고 상부는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했으며 총독부 건물의 축에 맞춰 짓는 등 겉모양만 복원했다는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이를 바로잡고자 2006년 12월부터 1960년대에 세운 광화문을 다시 뜯어 복원 공사를 해 2010년 8월 비로소 경복궁의 본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광화문 편액(扁額)도 조선 후기 경복궁 중건 당시 훈련대장으로 있으면서 서사관(書寫官)으로서 편액을 쓴 임태영 장군의 서체를 되살렸다. 손성진 국장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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