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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성진
    2025-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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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명의 소설가와 한명의 건축가, ‘문학의 공간’을 말하다

    소설은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아가는 곳, 즉 공간은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세 명의 젊은 소설가와 건축가가 모여 ‘문학의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소설가 김봄, 서현경, 장성욱 그리고 건축가 이덕종이 그들이다. 이번 기획을 맡은 소설가 김봄은 2011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을 했고, 소설가 서현경은 2011년 문화일보로, 장성욱은 2015년 조선일보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되며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건축가 이덕종은 AA School을 졸업했고, 현재는 BCHO Architects에서 건축가로 일하고 있다. 3강에는 하성란 작가의 특강이 마련되어 있다. 소설가 하성란은 1997년 서울신문을 통해 등단했으면, 동인문학상과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황순원 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받으며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중견 작가이다.  이번 강의는 서울문화재단의 예술창작지원 선정작으로 1강에서는 소설 속 ‘방’을 중심으로 이상의 ‘날개’ 속 33번지 방에서부터 박민규의 ‘갑을고시원체류기’의 고시원까지 문학 안에 나타나는 ‘방’의 변천사와 더불어 건축 분야에서는 방을 어떻게 형상화하는지를 살펴본다. 2강은 소설 속 감각의 공간인 환상적 공간과 더불어,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할 수도 있는 건축이 어떠한 방식으로 인간의 감각과 조우하는지를 조명한다. 3강에서는 하성란의 ‘곰팡이 꽃’과 ‘옆집 여자’ 속에 그려진 집합공간에 대해 소설을 집필한 작가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매주 강의의 끝에는 자신이 살고 싶은 공간을 직접 디자인해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강의는 연희문학창작촌의 협찬으로 연희문학창작촌 미디어랩실에서 각각 1월 9일, 16일, 23일 세 번에 걸쳐 오후 3시부터 세 시간 동안 진행되며, 수강료는 2만원, 강의 신청 및 문의는 kimbom0519@gmail.com을 통해 할 수 있다.손성진 기자 sonsj@seoul.co.kr
  • [손성진 칼럼] 아듀, 2015

    [손성진 칼럼] 아듀, 2015

    주야장천(晝夜長川) 이어지는 싸움질을 보자니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정치인들 이야기다. 뭐 하나라도 풀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치고 박기만 하고 있으니 앞이 캄캄하다. 국회만 본다면 천하무도(天下無道·세상이 어지러워 도리가 행해지지 않음)의 난국이다. ‘헬조선’이니 ‘둠조선’이니 하는 은어들이 판을 쳐도 적어도 정치인들만은 나무랄 자격이 없다. 선진국들도 제로 성장,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판국이니 3%도 되지 않는 성장을 해도 자족해야 할 것인가. 외환위기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탄식도 한두 번 들은 게 아닌 올해였다. 국회 때문에 이 모양이라고, 그래서 삼권분립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이 국회를 맹비난해도 반박할 수 없는 게 당연지사로 여겨진다. 참 힘들었던 2015년이 간다. 지겨우니 어서 가라고 손짓들마저 하는 것 같다. 세월호 후유증이 가시기도 전에 메르스가 덮쳐서 온 국민이 시름시름 앓는 듯했던 시간이었다. 뇌물 파동은 올해도 비켜가지 못해 국정의 2인자가 쫓겨나서 수사를 받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처음으로 기업 매출이 감소한, 일찍이 없던 경제적 사건도 있었고 ‘무역 한국’의 명성과 걸맞지 않은 수출의 감소도 우리에겐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런 와중에 ‘먹고사는 데는 쓸모없는’ 이념 대립은 극에 이르러 역사 교과서 국정화라는 먹잇감을 놓고 아귀다툼을 했다. 어느 재벌의 상속 다툼도 토악질을 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최선을 다 하는데 여건이 받쳐 주지 않는다면 도리가 없지 않으냐는 것을 무책임하다 할 수만도 없다. 어떤 것은 고질적인 ‘한국병’ 탓이라지만 어떤 것은 외인(外因)에 책임을 돌릴 수 있으니 한탄만 하는 것은 바른 태도가 아닐 것이다. 다만 여건이 어떻든 오늘도 내일도 최선을 다해야 하고 거기서 희망의 싹이 틀 수 있다. 수십 년 전 주린 배를 쥐고도 웃을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을 품고 살았기 때문이다. 오늘 힘들다고 희망마저 버린다면 우리에게 장래는 없다. 어렵다, 어렵다 하면 더 어려워진다. 그래서 새해에는 긍정적으로 살자. 희망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한다. 중국의 사상가 양계초는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첫째 힘은 희망이라고 했다. 희망은 더 나은 미래를 예상하고 기대하는 마음이라고도 했다. 이 시간에도 골방에 틀어박혀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이 있다. 끼니 걱정을 하며 비탄에 잠긴 독거노인들도 있다. 그러나 절망과 비탄만으론 현실을 이겨 낼 수 없다. 행복은 저절로 오는 게 아니다.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맞겠다는 밝은 마음과, 그와 더불어 힘든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겠다는 노력을 병행할 때 비로소 행복은 우리 곁에 다가온다. 새해는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한다. 어려울수록 뭉쳐야 한다. 어려운 이웃을 돌볼 줄 알아야 한다. 혼자 잘살겠다고 해서 잘살 수 있는 게 세상은 아니다. 경기도 군포의 77세 허위덕 할머니를 반의반만 본받아도 사회는 훨씬 더 따뜻해질 터이다. 20년이란 세월에 김밥을 팔아 한 푼 두 푼 모은 1억원을 선뜻 내놓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우리는 전진과 퇴보의 갈림길에 서 있다. 자칫하면 지금까지 힘들게 쌓아 올린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 우리 경제의 근간은 괜찮다 해도 세계경제의 침체 여파가 도미노처럼 우리에게 들이닥칠 수도 있다. 그런 고난을 이겨 내지 못한다면 선진국 진입 또한 요원하다. 분열, 갈등, 폭력, 대립, 투쟁은 영원히 추방하자. 그 대신 통합, 화해, 대화, 평화, 상생 같은 단어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자. ‘헬조선’은 더 입에 올리지 말고 ‘천국 한국’이라는 말이 유행하도록 해야 한다. 싫어서 떠나는 한국보다는 살기 좋아 오겠다는 한국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아듀, 2015. 회한이 남는 한 해였다. 아쉬움은 늘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도 하루가 지나면 새해, 새 아침이 찾아오지 않는가. 그러기에 희망의 끈은 이어진다. 부족한 것은 채우고 잘못한 것은 고치면 될 일이다. 다시 희망을 노래하자.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가족의 정(情)/손성진 논설실장

    50 중반을 넘어서는 친구들이 겨울나기를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옛 사람들은 문종이 한 장만으로 살을 에는 삭풍을 어떻게 견뎌 냈을까. 한겨울에는 아궁이에 군불을 때도 방은 바깥과 다름없는 냉골이었다. 그릇에 담긴 물이 얼고 입에선 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니 온돌방 아랫목을 차지하려고 형제들은 늘 다투곤 했다. 혹한을 버텨낸 것은 온전히 가족의 정 덕분이었다. 온 가족이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살을 맞대며 온기를 나누었다.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응팔’ 드라마에도 정겨운 풍경이 나온다. 늦게 퇴근하는 아버지가 드실 뜨끈한 밥 한 그릇을 이불 속에 넣고 고이 덮어 두는 장면이다. 아버지 밥그릇 속엔 가족의 정까지 담뿍 담았다. 절절 끓는 방에서 한기를 모르고 겨울을 나고 있으니 격세지감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도리어 서글퍼지는 겨울이다. 온도는 후끈하지만 가족 간의 정은 식어간다. 아버지가 드실 밥은 보온밥솥이 챙겨 주니까 신경 쓸 일이 없다. 정은 어려움을 함께 이겨 낸 시간이 많을수록 더 돈독해지는 모양이다. 부족할 게 없는 세상, 정은 가뭄철 논바닥처럼 메말라 간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손성진 칼럼] 공동선을 위한 마지막 보루, 양보와 타협

    [손성진 칼럼] 공동선을 위한 마지막 보루, 양보와 타협

    온통 투쟁이다. 여야가 싸우고 야당은 내분으로 붕괴 직전이다. 과격 노조는 폭력을 써서라도 뜻을 관철하려 한다. 로스쿨 학생들과 사시생들은 사생결단의 태도로 맞붙고 있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여 생존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지만 각자 그 권리를 무한히 추구하면 결과적으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상태가 된다.” 절대군주제를 옹호하기 위한 토머스 홉스의 이 이론이 시대착오적으로 들리지 않는 시국이다. 따지고 보면 현시점의 혼돈은 공통의 목표, 구심점이 없는 데서 비롯된 듯하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 1970년대까지는 가난 탈출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2015년 현재의 목표는 무엇인가. 선진국 진입일까, 통일일까. 이제 우리 사회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세상은 뻗어 나가는 나무뿌리처럼 다원화됐다. 천 갈래 만 갈래다. 하나의 주의(主義),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지 않는다. 또한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됐다고 끝이 아니다. 부(富)는 균등하게 분배되지 않고 경기는 코사인 곡선처럼 출렁거린다. 자본주의의 속성이기도 하다. 목하 목숨을 걸고 대결하는 중이다. 여와 야, 노()와 사(使), 노()와 소(少), 동과 서, 남과 북, 좌와 우, 부와 빈, 도(都)와 농(農)…. 모두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고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다툰다. 이대로는 공멸이다. 서로 공격하다 같이 치명상을 입고 다시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다. 공멸하지 않으려면 당장 대결을 중단해야 한다. 우리는 외환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순간 공멸의 위험에서 용케 빠져나온 경험이 있다. 반발이 없지 않았지만 공생 의식은 충만했기에 가능했다. 공생은 양보와 타협 없이는 불가능하다. 양보와 타협이란 일방의 고집이 있는 한 달성할 수 없다. 노동계는 막무가내로 정부의 정책에 반기만 들어서는 안 되고 정부는 노동자들의 힘겨운 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외환위기는 노동계가 그토록 반대했던 구조조정을 하지 못했다면 극복하기 어려웠다. 구조조정이 없었으면 결과는 공멸이었을 것이다. 각자의 사익 추구는 사회의 와해, 국가의 패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공동선(共同善·common good)을 위해 한발씩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 공동선은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란 뜻이다. 다원화된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원리다. 일찍 고령화를 접한 스웨덴은 노년 세대가 양보해 ‘낸 만큼 받는다’는 모범적인 연금 개혁을 완수했다. 영국·독일 등 유럽 국가들이 노동개혁에 성공해 성장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노사정(使政)이 조금씩 물러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언뜻 케케묵은 듯한 양보와 타협의 가치는 현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양보와 타협은 정치의 원리, 또는 원점이라고들 한다. 양보의 결과물이 타협이기도 하다. 각자의 이익을 좇았던 주(州)들의 양보와 타협이 없었으면 연방국가 미국은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알린스키에 따르면 타협은 전체주의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 주는 보루와 같다. 목표가 모호한 사회는 필연적으로 분열된다. 국가는 새 지향점을 만들어야 한다. 통합은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 대결의 주체들이 일심동체가 되도록 국가적 어젠다를 만들어야 한다. 공동선을 위해 정부가 할 일도 적지 않다. 이기적인 구성원들을 윽박지를 것만이 아니라 한마음이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양보와 타협의 선봉에 서야 하는 게 정치, 정치인들이다. 사회 전반의 갈등을 의회 내로 끌어들여 해소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 그러나 도리어 갈등의 도화선이 되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양보와 타협은 비굴한 게 아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여 함께 살아가자는 말이다. 패배가 아니라 승리다. 다 함께 죽는 길을 피해 같이 사는 길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작금에 투쟁하고 있는 대결의 주체들이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에서 벗어나 공생의 길을 모색할 때다.
  • [손성진 칼럼] 잃을 것밖에 없는 폭력시위

    [손성진 칼럼] 잃을 것밖에 없는 폭력시위

    말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차후 수단으로 폭력을 쓰게 된다. 타일러도 안 되는 자식을 훈육하고자 매를 드는 것도 그와 다르지 않다. 정권의 독재, 그중에서도 ‘극악의 독재’에 대한 민중의 저항은 폭력을 동반하기도 한다. 저항권을 행사할 때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 일상적인 시위에서는 폭력이 허용되지 않지만 독재에 대한 저항에서는 뜻을 관철하기 위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폭력시위 혹은 폭동에 의해 민중이 탄압받는 현실을 뒤집은 일이 있다. 프랑스 혁명이 그 하나다. 무기를 든 민중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결국 앙시앵레짐을 무너뜨렸다. 프랑스 혁명은 폭력을 썼지만 독재를 뒤엎는 결과를 얻었다. 이를 볼 때 저항권 행사에서 ‘폭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용납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극악의 독재’에 대한 저항에서 폭력이 정당화될 수도 있는 것은 그것이 최후의 수단일 때만 가능하다. 극악과 최후라는 두 전제가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극악이라는 개념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와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1980년대까지의 군부 통치는 독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극악의 독재이며 따라서 그 시절의 폭력시위는 정당화할 수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폭력시위가 독재정권 시절에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소위 좌파정권 시절에도 쇠 파이프와 죽창을 쓰는 폭력시위가 자주 있었다. 폭력시위가 독재와는 무관하게 일상화되고 있는 게 문제다. 노동개악 중단, 재벌책임 강화, 쌀 수입 저지, 민생빈곤 해결…. 지난 14일의 광화문 시위대의 11개 요구를 보면 아무리 중요한 문제더라도 폭력을 정당화하기에는 부족하다. 더 중요한 저항에서도 비폭력 시위로 충분히 의사를 전달하고 여론을 형성했다. 3·1운동은 폭력을 쓰지 않은 만세운동이었다. 4·19혁명은 비폭력 저항으로 독재정권을 붕괴시킨,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민주화 운동이다. ‘10·26’을 촉발한 부마사태도 폭력을 쓰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린 6월 항쟁도 ‘비폭력 평화노선’을 표방했다. “나의 깨끗한 마음은 대포보다 더 큰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1915년 영국에 대항해 ‘무저항 비폭력 운동’을 선언한 간디는 추종자들이 무기로 대항하자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국민의 의사를 표시할 수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와 같은 시민 불복종 운동도 그 하나다. 시민 불복종 운동을 주창한 미국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폭력이 아닌 소극적 저항으로 간디와 여러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폭력은 더 큰 폭력을 부른다. 프랑스 혁명에서의 폭력의 당위성은 인정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낳았다. 일상적인 폭력시위가 정부의 노선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반대일 수도 있다. 더구나 정부는 폭력이 과격해질수록 제압력을 더 강화할 것이다. 효과의 측면에서도 폭력은 버려야 한다. 불특정 다수에게 위해를 가하는 테러와 폭력시위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파리의 테러는 비난하면서도 폭력시위는 두둔하는 정치인들의 행태에 동의할 수 없다. 같지는 않지만 테러와 폭력시위가 평화와 안전을 위해 모두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선상에 있다. 테러나 폭력이 최후의 수단이라고 할지라도 선량한 시민으로서는 모두 목격하고 싶지 않은 존재들이다. 인류사에서 국가 간의 전쟁이 수없이 일어났지만 앞으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고 했듯이 폭력시위는 더욱 과격한 진압을 불러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시위대는 진정한 의사전달을 하기 어려울뿐더러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는 점점 어려워질 뿐이다. 폭력시위가 불가피하다고 할 국민은 그 숫자가 갈수록 줄어들 것이다. 이 정권, 정부가 아무리 잘못하는 것이 많아도 극악한 독재를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할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다.
  • [길섶에서] 지금 이 순간/손성진 논설실장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말이 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라는 뜻이다. 2000년 작 홍콩 영화의 제목에서 따온 말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일까. 대학에 합격했을 때, 사랑하는 여자에게 청혼하고 승낙을 받았을 때, 취업에 성공했을 때, 아이를 낳았을 때 등등의 대답이 나올 것이다. 특히 아이를 낳고 키워 본 여자들은 아이를 껴안고 잘 때, 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볼 때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세계보건기구가 생존해 있는 전 세계 고령자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황금기가 언제였느냐고 물으니 70대라는 답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미덥지는 않지만, 70대가 되면 비로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게 되며 빈부격차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지금 이 순간 내 모든 걸 내 육신마저 내 영혼마저 던지리라 바치리라.”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에 나오는 가사처럼 가장 행복한, 행복해야 할 순간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닐까. 지금 이 순간 살아 숨 쉬고 있음을 기뻐하며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면 자신의 인생 전부가 저절로 행복한 황금기가 되지 않을까.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손성진 칼럼] 중도학자는 실종인가

    [손성진 칼럼] 중도학자는 실종인가

    좌만 입이 있고 우만 떠들 줄 안다. 어김없이 중도는 실종이다. 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대립의 틈바구니에서 중도는 침묵한다. 전국의 좌파, 우파가 들고일어나는데도 중도의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다. 무기력에 빠져 숨어버린 것일까. 어찌 보면 이념의 목적은 이익이다. 종착지는 결국은 이기주의인 것이다. 부르주아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는 기득권을 빼앗기 위해 싸워 왔다. 그것이 이념의 역사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대의명분이 목표, 목적이 아니다. 불교에서 중도는 무욕(無慾)이다. 고(苦)와 락()을 떠난 진정한 실천수행이다. 집착된 견해에서 벗어나 모든 사물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실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현명하고 냉철해야 한다. 중도도 방향성이 있다. 방향 없는 중도는 교활이지 중도가 아니다. 중도는 극단과 이분법적 사고를 싫어하는 합리주의다. 어떤 좌우의 이론도 100% 진리일 수는 없다. 좌우 극단주의자들은 완전한 진리 아닌 진리를 진리라 믿고 신봉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중도는 통합이다. 중간에서 타협을 모색한다. 중재자인 것이다. 중도는 쉬 지친다. 그러곤 숨는다. 그래서 비겁해 보인다. 역대 국사 교과서가 실패한 원인은 중도가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건 자체가 아니라 의미에 대한 서술이라고 한다. E H 카는 “역사의 진보는 사실과 가치와의 상호의존과 작용을 통해서 이룩된다”고 했다. 가치판단이 없는 역사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가르침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청소년들에게 우든 좌든 편향된 역사관을 심어주는 것은 위험하다. 어릴 때 먹었던 음식에 인이 박이듯 잘못된 사실의 주입은 교정하기가 쉽지 않다. 하얀 도화지에 뿌린 물감을 지우기 어려운 것과 같다. 그래서 중고생용 국사 교과서는 팩트(사실)의 서술이 생명이다. 팩트에 근거하지 않은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일본의 역사 날조를 역사로 인정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하다. 검인정이든 국정이든 국사 교과서의 최우선 가치는 객관적인 사실의 서술이다. 객관적인 사실이란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다. 6·25가 북침이라는 주장은 그래서 교과서에 들어갈 수 없고 가르쳐서도 안 된다. 임진왜란을 조선이 일본에 쳐들어간 전쟁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말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가치판단은 중고 국사교사서라고 해서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화하는 게 맞다. 또 그 가치판단은 외눈박이처럼 일방에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어떤 인물과 사건이라도 양면성이 있기 마련이다. 이승만을 위대한 독립운동가로서만 보거나 악랄한 독재자로만 보지 말자는 것이다. 최남선이 친일파라고 해서 그의 문학적 업적까지도 무시하지는 않듯이 말이다. 객관적·중립적인 교과서의 편찬은 중도 또는 중립적 학자들의 몫이다. 역사학계에도 중도 학자들이 없을 수 없다. 국정교과서 파문의 책임은 사실 중도 학자들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편향인 교학사 교과서나 좌편향이라는 8종의 교과서 외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엄정 중립의 교과서가 진작에 나왔어야 했다. 중립학자들의 일종의 직무유기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국정화 방침이 퇴행적이기는 하지만 무조건 탓할 수도 없다. 다만, 국정화를 밀고 간다면 관건은 엄정한 중립이다. 역사를 왜곡하거나 미화한 교과서는 절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박근혜 대통령은 말했다.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을 얻으려면 정책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의 제안이 눈길을 끈다. 국정화를 돌이킬 수 없다면 국정교과서는 중립적 인사들로 구성된 ‘평가위원회’를 통해 내용의 객관성을 평가받아보자는 제안이다. 중립적 학자들로 구성된 독립적인 편찬 조직을 만들어 전권을 부여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업보와도 같이 우리를 짓누르는 이념 대립에서 속히 탈피하는 길은 이제부터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 “미흡한 정부 정책 이슈화·대안 제시하는 노력 해달라”

    “미흡한 정부 정책 이슈화·대안 제시하는 노력 해달라”

    서울신문 독자권익위원회(위원장 박재영 서울대 행정대학원 객원교수·전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는 28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본사 회의실에서 제77차 회의를 열어 ‘정상외교 및 남북 관계’를 주제로 한 서울신문 보도를 진단했다. 전범수(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위원은 “최근 역사 논란이 많은 만큼 외교 측면에서 과거 사례를 재밌게 다뤄 시각을 다양화시키는 게 중요하다”며 “우리가 가진 역사 기록 유산이 많은데 그것들을 최근 상황에 맞춰 소개하면서 우리나라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기획도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국가 간 관계는 가변적이기 때문에 이런 변화를 읽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광태(온전한커뮤니케이션 회장) 위원은 이번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일정을 언급하며 “방미 성과를 다룬 사설에서 중국경사 이미지 불식, 북한 문제 관련 양국의 공동 성명 등 북한 문제 성과에 주로 초점을 두었다”며 “출국 전 사설에서 주문한 만큼 성과가 기대에 못 미쳤다고 보이는데 솔직한 평가가 부족했다는 점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홍현익(세종연구소 안보전략연구실장) 위원은 “최근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보며 국민들은 우리 정부가 좀 자주 만나게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라며 “과거 20차례의 역사적 자료를 정리해서 정례화를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어떤 대가가 합리적인지를 짚어주는 기사를 써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선승혜(아시아인스티튜트 문화연구수석) 위원은 “연재 중인 ‘명인·명물을 찾아서’ 시리즈를 폭넓게 지속해 갔으면 좋겠다”면서 “통일 준비 측면에서 이북5도의 무형문화재를 함께 다루면 국민의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선 위원은 “한·중·일 정상회의를 앞두고 있는데 정치 외에 문화 어젠다로 접근하는 방식도 좋을 것 같다”고 제안했다. 김영찬(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위원은 “일본의 집단자위권 문제, 한·중·일 정상회의, 환태평양경제공동체(TPP) 문제 등 국제뉴스는 중요도에 비해 비중이 적지 않았나 생각한다”며 “독자들이 글로벌한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국제뉴스에서 심층 보도가 나왔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박재영 위원장은 “신문은 눈길을 끌어야 된다는 점에서 이슈를 만들고 이어가는 게 힘”이라며 “생각만큼 잘 안되는 정부 정책을 이슈화하고 대안을 제시해 정책에 반영하는 노력을 더 보여달라”고 주문했다. 이날 회의에는 서울신문 김영만 사장, 이경형 주필, 오승호 편집국장, 손성진 논설실장 등도 참석했다. 김 사장은 위원들의 제언에 대해 “신문 지면은 신문사 안보다 밖에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면서 “좋은 말씀들을 제작에 반영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강병철 기자 bckang@seoul.co.kr
  • [길섶에서] 배려심/손성진 논설실장

    갈대가 우거진 아름다운 양수리 강변에서 배려심이란 말이 떠올랐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나로서는 또 눈에 거슬리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누가 막걸리를 마시고는 플라스틱 빈 병을 풀숲에 던져 놓고 가버렸다. 주변엔 다른 쓰레기들도 널려 있다. 몽환적인 물안개에 취했던 내 마음을 옥에 티처럼 상하게 한 일이었다. 산이나 강변을 다니면서 아무렇게나 버려 놓은 쓰레기를 보면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먹고 난 병이나 비닐봉지를 가방 속에 넣어 집으로 가져가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자연에 대한 배려심이 없다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치우는 부담을 주고 무엇보다 환경을 망치는 짓이다. 배려심이란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쓰는 것을 말한다. 물론 자연이나 무생물보다는 인간관계에서 더 중요하다. 특히나 약자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배려의 손길이 필요하다. 길을 가다 할머니의 짐을 들어주고, 불우한 이웃에게 적은 돈이라도 건네는 따뜻한 마음씨…. 자신보다는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야말로 사회를 밝게 해줄 소중한 가치가 아니겠는가.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노인 인턴2/손성진 논설실장

    퇴직하면 아파트 경비원이나 하겠다는 말은 이제 함부로 할 수 없다. 노후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경비원 자리도 하늘의 별 따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경쟁이 심한 만큼 처우는 더 나빠진다. 박봉에 용역회사의 횡포는 점점 더 극심해지고 있다. 정당 연구원으로 일하다 퇴직한 뒤 3년 동안 경비원으로 일했다는 70세의 노인이 경비원의 고충을 담은 메일을 보내왔다. 적은 봉급과 고된 일, 주민의 멸시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경비원들끼리의 갈등이라고 한다. 아마도 한정된 자리를 놓고 서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다툰다는 말일 터이다. 비유하면 적은 모이를 주는 주인에게 대들기보다 부족한 모이를 놓고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싸우는 닭과 같은 처지라고 할까.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경비원을 할 수 있다면 운이 좋은 경우에 속한다. 골판지나 재활용품을 가득 실은 손수레를 힘겹게 끌고 가는 노인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바로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들이다. 노인 일자리를 늘려서 노인들에게 일할 기회를 많이 만들어 주어야 하는 책임을 우리 모두 져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본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노인 인턴/손성진 논설실장

    70세의 인턴 이야기를 그린 ‘인턴’은 노인을 무조건 배척하는 세태 속에서 큰 공감을 얻고 있는 영화다. 젊은 여사장이 어머니에게 잘못 보낸 이메일을 지우려고 노인 인턴은 어머니 집에 침입해 컴퓨터를 켜서 지우는 방법을 선택한다. 디지털 세상이지만 아날로그 방식의 유용함을 증명해 보였다. 풍부한 인생 경험은 젊은 사람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가질 수 없는 소중한 자산 아니겠는가. 나 자신 노후의 삶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일본은 우리보다 고령화 문제에 훨씬 먼저 부닥쳤다. 65세가 넘는 고령자가 3384만명이나 된다니 우리 인구의 3분의2다. 일본은 정년이 길기도 하지만 여든이 되도록 일하는 사람이 많다. 일본에 가 보면 택시 기사들은 대부분 노인이고 주유원, 톨게이트 직원도 거의 70세 전후의 사람들이다. 일본 기후현에 있는 금속부품 회사인 ‘가토 제작소’는 60세가 넘는 노인을 고용한 뒤 매출이 3배나 늘었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일하기 싫어하는 주말에 노인들이 일하도록 한 결과다. 우리나라에도 일자리만 보장된다면 주말이 아니라 밤샘 작업이라도 기꺼이 할 은퇴자들이 얼마든지 있지 않겠나.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손성진 칼럼] 예측, 그 무거움과 가벼움

    [손성진 칼럼] 예측, 그 무거움과 가벼움

    몇 년 전 혹한이 닥친다는 일기예보를 믿고 아웃도어 업체들이 두꺼운 등산복을 많이 만들었다. 그러나 예보는 빗나갔고 업체들은 재고 소진에 골머리를 앓았다. 물론 적지 않은 손실을 보았을 것이다. 날씨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기업들에 틀린 예보는 막대한 피해를 준다. 미래 예측의 중요성은 기업들엔 존망을 결정지을 만큼 절대적이다. 트렌드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기업은 하루아침에 도태될 수 있다. 필름 카메라 시장을 100년간 지배한 코닥과 피처폰 1위 기업 노키아의 몰락은 애써 강조할 필요가 없는 주지의 사례다. 반대로 삼성이 최강의 전자그룹이 된 것은 미래를 읽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와병 중인 이건희 삼성 회장은 집무실에서 공상과학이나 우주에 관한 비디오물을 보며 경영전략을 구상했다고 한다. 미래를 내다보려는 노력이 지금의 삼성을 만든 것이다.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예측한 137가지를 미래학자 데이비드 굿먼이 1978년에 검토했더니 실현된 게 100가지가 넘었다고 한다. “과학기술이 인간 사이의 소통을 뛰어넘을 그날이 두렵다. 세상은 천치들의 시대가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식사를 할 때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모바일 기기가 인간을 지배하다시피 하는 현실을 보면 예언은 적중한 셈이다. 그러나 미래 예측은 쉽지 않다. 10여 년 전 미국에서 정보를 가진 증권사와 화살을 쏘아 종목을 고르는 개인의 주식투자 대결에서 증권사가 졌다는 일화가 있다. 유수의 연구기관들도 1년에도 몇 번씩 경제성장률 예측치를 바꾼다. 그만큼 변수가 많다는 뜻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2.7%로 내렸다. 올해만 네 번째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섣부른 예측은 예기치 못한 피해를 유발하기도 한다. 증권사의 주가 예측을 믿고 투자했다가 낭패를 본 사람은 허다하다. 집값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자칭 전문가의 말을 듣고 덥석 부동산을 사들였다가 ‘상투’를 잡은 경험이 있는 이들도 한둘이 아닐 것이다. 맞지도 않을 예측은 넘쳐나는데 사기를 제외하면 책임지는 일은 없다. A씨는 2년 전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S전문가의 말을 듣고 주택 구입을 포기했다. 그런데 집값은 20% 이상 올랐고 A씨는 그 말을 믿은 것을 크게 후회하고 있다. 미래 예측의 중요성은 변화의 속도와 정비례해 커진다. 경제주체들에게 예측, 정확한 예측만큼 중요한 게 없는 시대다. 자고 나면 세상이 달라질 정도로 변화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측은 성공과 실패를 가른다. 예측을 잘못하거나 잘못된 예측을 믿었다간 크나큰 위기에 봉착할 수 있다. 거꾸로 정확한 예측을 통한 경영은 성공의 지름길이 된다. 어떤 이는 이를 ‘예측 경영’이라 이름 붙여 부르기도 한다(‘비즈니스의 99%는 예측이다’, 김경훈). 한국의 주요 산업은 중대기로에 놓여 있다. 혁신이 한계에 이른 상황에서 미래를 지배할 새로운 전략산업을 선점해야 한다. 변화의 트렌드를 읽어 내는 예지력이 필요하다. 30여 년 전에는 반도체, 20여 년 전에는 휴대전화의 발전 가능성을 읽었듯이 말이다. ‘일본 맥도날드사’를 창립, 일본에 햄버거 선풍을 일으킨 후지다 덴이라는 사람이 있다. 세계의 유대인으로부터 ‘긴자의 유대인’이라고 불린 그는 일본인들의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모습을 보고 햄버거를 선택했다고 한다. 국가, 정부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미래 산업은 국가가 주도해서 발굴해야 한다. 국가 차원의 미래 전략 연구가 태동한 것은 20여 년 전이다. 이후 미래기획위원회가 설립됐고 현 정부 들어서는 정부 부처로 미래창조과학부가 발족됐다. 국회에서도 ‘국회미래연구원’ 법안이 제출돼 설립이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얼마만큼 실질적인 미래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30년, 또는 50년 이후의 한국은 지금 미래를 어떻게 내다보고 준비하느냐에 좌우될 것이다. 입법·행정·민간이 힘을 모아 체계적인 미래 연구에 나서야 한다. 후손들의 미래 삶은 우리 손에 달렸다. 논설실장
  • [길섶에서] 시월, 기다림, 이별/손성진 논설실장

    쌉쌀하게 서늘한 날씨가 그리운 건 늦더위 때문이겠다. 50년 만의 늦더위란다. 언제부턴가 봄이 없어졌다더니 가을마저 실종될 건가. 아직 9월인데 만개한 들국화를 기다리는 건 좀 성급한 것일까. 그래도 반소매 차림이 자연스러운 날씨는 시간을 거스른다. 절기로 따지면 가을의 시작이라는 입추(立秋)가 지난 지는 50여일이요, 찬 이슬이 내린다는 한로(寒露)가 여드레 앞이다. 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다. 하루 뒤면 10월이다. 10월은 가을 냄새가 더 난다. 그래서 기다려진다. “시월이 오면/하늘에 곱게 물 들여진 낙엽/호수에 살짝 띄워 놓고/누군가 기다려지는 날이었으면/좋겠습니다”(‘시월이 오면 그대 오려나’, 김용관) 기다림은 설렘이다.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연인을 기다리고…. 또 가을다운 가을을 기다린다. 가을은 만물이 영그는 완숙의 계절이다. 그것은 곧 이별을 의미한다. 들녘은 곡식을 내어주고 텅 빈 벌판이 될 것이다. 꽃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거리에 나뒹굴 것이다. 어서 시월이 오면 누런 벌판을 헤집고 다녀 보고, 낙엽을 저벅저벅 밟으며 걸어 보련다. 그리운 친구의 연락도 기다려 봐야겠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우울한 음악/손성진 논설실장

    누구라도 가끔 우울한 때가 있다. ‘이우치우’(以憂治憂)라고 할까. 우울할 때는 우울한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우울할 때 기분 전환을 위해 듣는 곡이 이바노비치의 ‘도나우강의 잔물결’이다. 원래는 군악대에서 연주한 경쾌한 왈츠곡인데도 슬프게 들리는 이유 중 하나는 ‘사의 찬미’의 비장한 가사 때문일 것이다. ‘도나우~’의 앞부분에 윤심덕이 노랫말을 붙인 일종의 번안곡이 ‘사의 찬미’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피아노곡을 들어 보면 사실 ‘사의 찬미’ 부분보다 그 뒤가 더 슬프고도 아름답다. 단조 음률에 독한 위스키를 곁들이면 일종의 힐링이 된다. 우울한 곡의 대명사는 ‘죽음의 송가’로 불리는 ‘글루미 선데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듣고 나면 도리어 기분이 후련해진다고도 한다. 음악이 기분을 우울하게 하는 게 아니라 우울한 기분을 치유해 주는 셈이다. 우울증을 병으로 앓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우울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겨 내려고 하느냐에 따라 단지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기분에 불과할 것이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손성진 칼럼] 4대강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

    [손성진 칼럼] 4대강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

    울창한 갈대숲이 사라졌을 때 적이 심란했다. 낙동강변을 따라가는 기차 여행 중에 맛보는 작은 즐거움을 더는 누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짙푸른 강물과 어우러진 모래톱의 목가적인 풍경 역시 갈대숲과 함께 사라졌다. 갈대가 뽑혀 나간 자리에 덩그러니 들어선 것은 황량한 수변공원이었다.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란 김소월의 시 구절을 떠올리게 했던 아름다운 경관은 그렇게 망가지고 말았다. 순수한 동기에서 의심을 품었던 4대강 사업의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번드르르한 조감도로 현혹했던 수변공원엔 온갖 쓰레기가 나뒹군다. 인적이 드문 곳에 길을 만들고 운동시설을 설치했으니 잡초가 뒤덮고 녹이 슨 것은 당연한 결과다. 3조 1143억원을 쏟아부은 4대 강변 수변공원 357개의 현주소가 대개 이렇다. 흐르던 강물을 틀어막은 16개의 보(洑)는 완공 2년도 안 돼 200건이 넘는 보수공사를 해야 했다. 건설사들이 나눠 먹기식으로 맡은 공사가 부실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방치한다면 붕괴 위험이 있다는 경고는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가둬 놓은 물은 물고기가 죽어 떠오를 만큼 오염됐다. 4대강 사업의 무용함은 올해 극명하게 드러났다. 땅이 타들어 가는데도 보 속에 그득한 물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물을 가뭄 지역으로 옮겨 갈 시설에는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2조원을 쏟아부은 거대 프로젝트의 허망한 결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사업을 주관한 수자원공사의 빚 가운데 2조 4000억원을 국가가 갚아 주게 된 것이다. 이자까지 합치면 5조 3000억원이나 된다. 내년 예산에서만 3019억원이 책정됐다. 2009년 당시 정부는 “원금은 수공의 개발수익으로 환수하고 부족분만 지원하겠다”고 했다. 국민 부담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큰소리였지만 역시나 거짓이었다. 국민에게 날아든 것은 사철 맑은 물이 철철 넘치는 강이 아니라 수질 오염, 녹조라테와 함께 무거워진 세금통지서뿐이다. 환경을 희생하면서 얻은 반대급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전거길이나 캠핑장 등 국민이 받아든 선물은 빼앗기고 잃은 것에 비하면 너무 적다. 그런 반면에 4대강 사업을 진두지휘했던 수공의 전 사장은 4년 동안 5억 5276만원의 성과급을 챙겼고 수공 직원들도 이 기간에 성과급으로 한 사람당 5276만원을 받았다. 공사를 주도한 사람들은 성과급만이 아니라 훈장을 받고 영전도 했다. ‘한국판 뉴딜’이라는 달콤한 명분에 빠져 있던 대통령에게 직언 한 번 하지 못한 공직자들이 뒤늦게 조사 결과를 내놓은 것은 지난해 12월이었다. 4대강 보들이 홍수 조절 능력이 없고 결국 생태계만 파괴한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영혼이 없다’ 말을 듣는 감사원도 늦게나마 ‘4대강 사업은 총체적 부실’이라고 말을 바꿨다. 그럼에도 사업을 추진한 관료들은 여전히 중요한 자리에 앉아 사업을 옹호하고 합리화하느라 바쁘다. ‘4대강 사업은 역사적으로 평가받을 것’이라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옹고집을 닮았을까. 4대강이란 계륵을 받아든 현 정부는 딜레마다. 피폐한 수변공원부터 원상복구하자니 3조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대로 두자니 한 해에 450억원이나 되는 관리비를 감당하기 어렵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다. 불어나는 이자까지 다 갚으려면 100년도 족히 걸릴 것이라고 한다. 후손들에게까지 짐을 물려줄 생각을 하면 국민으로선 가슴이 답답하다. 급식비, 보육비가 모자라 아우성을 치고 있는 마당에 엉뚱한 곳으로 혈세가 새고 있으니 이런 난감한 상황이 없다. 어쨌든 묘책을 찾아내야 한다. 수변공원은 이용도를 조사해 선별적으로 원상복구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보를 다시 허물 수 없다면 돈이 들더라도 가둬 놓은 물을 활용할 수로를 지금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쩔 도리가 없다. 언젠가는 댐을 해체하거나 제방을 부숴 강의 예전 모습을 되찾고 있는 선진국들을 뒤따라가야 할지도 모른다. 리더의 오판이 국가와 국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생생한 교훈을 곱씹으면서 말이다.
  • [길섶에서] 남의 날/손성진 논설실장

    의과대학 교수로 있는 친구 M이 책을 냈다. 대학 다닐 때부터 틈틈이 쓴 글을 모았다는 산문집이다. ‘인생의 순례길에서 나를 만나다’란 의미심장한 제목이었으나 솔직히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동안 책상에 놓아두다 읽어 보니 글 쓰는 일이 직업인 내가 부끄러울 만큼 글솜씨가 훌륭했다. 수필가를 뺨칠 정도라고 하면 친구는 물론 과찬이라고 하겠지만. 필력만큼 글의 내용도 좋았는데 50여 꼭지의 글 중에서 특별히 눈길을 끈 글이 ‘남의 날’이다. 이웃에게 무관심한 요즘 사회에서 1년에 하루만이라도 자기나 가족이 아닌 남을 생각해 주는 날을 만들어 보자는 배려심 넘치는 생각이다. ‘하루 외식 안 하고 그 돈을 모아 고아원을 방문하는 날’, ‘자동차 경적을 울리지 않고 양보하는 날’, ‘남의 논에 물을 먼저 대 주는 날’, ‘남을 위해 기도하는 날’…. 우리는 남을 위하기는커녕 남을 욕하고 남이 잘되면 배 아파 하기도 하는 속물 아니던가. ‘어버이날’, ‘부부의 날’처럼 ‘남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정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안 되어도 누구나 하루를 정해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한다면 세상이 달라지리라.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손성진 칼럼] ‘정치인스러운’ 한명숙 전 총리

    [손성진 칼럼] ‘정치인스러운’ 한명숙 전 총리

    A 변호사는 현역 B 중진 의원을 “참 ‘정치인스러운’ 사람”이라고 했다. 오래전 그가 재조에 있을 때 B 의원의 정치자금 수수 혐의를 수사한 적이 있는데 혐의가 100% 명백한데도 끝까지 부인하더라는 것이다. 뇌물수수 혐의를 받고 있던 H 전 의원은 구속되기 전 소환되면서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내가 돈을 받았으면 소가 웃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검사스럽다’라는 단어가 2007년 국립국어원 신어사전에 올랐다. 뜻풀이는 ‘행동이나 성격이 바람직하지 못하거나 자기주장만 되풀이한다’로 돼 있다. ‘정치인스럽다’는 말이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잘한다’는 의미로 사전에 기록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정치인의 거짓말이 불가피할 때가 있다. ‘처칠 딜레마’라는 게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영국 총리 처칠은 독일이 소도시를 폭격한다는 암호를 해독하고도 주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사실의 은폐, 거짓말이었다. 대피하라고 알리면 독일은 암호를 바꾸고 전황은 더 불리해질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순전히 국익을 위한 것이었지 우리 정치인들처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책은 아니었다. 한명숙 전 총리는 수감되면서도 결백을 주장했다. “사법 정의가 죽었기 때문에 장례식을 위해 상복을 입었다”고도 했다. 냉정함을 잃지 않고 눈물까지 보였다. 그 주장이 맞다면 대법원이 오심을 했다는 말이다. 과연 대법원이 잘못된 판결을 내렸고, 진정 억울해서 나온 눈물일까. 한 전 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9억원 수수 혐의 중 3억원 부분은 모든 대법관이 인정한 13대0의 판결이었다. ‘동생의 전세금으로 쓴 1억원 수표’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일반인 배심원이라도 유죄를 인정할 빼도 박도 못할 증거다. 이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고 막무가내로 결백을 주장하니 야당 지지자들조차 쉬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2심 법정에 나온 한 전 총리의 여동생은 수표의 출처에 대해 묵비권을 행사했다고 한다. ‘사법살인’의 오명을 남긴 유신 시절의 사법부라면 한 전 총리의 주장이 먹혀들지 모른다. 그러나 최고 권력이 좌지우지하던 유신의 사법부와 현재의 사법부를 동일시하는 것은 시대착오다. 아무리 사법부가 불신을 받는다 해도 민주화와 정권 교체기까지 거친 현재의 사법부는 증거재판주의까지 무시하는 구시대의 사법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야당 탄압, 보혁 대결로 비화시킬 일이 아니다. 진실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 전 총리가 진실을 고백하지 못한 이유는 당과 지지자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 앞에선 여야가 없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을 옹호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한 전 총리가 여당 인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야당이 정치탄압이라고 반발하고 있는 것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 전 총리와의 관계를 부정할 수 없고 더욱이 혐의를 인정하는 순간 야당의 도덕성에 스스로 흠집을 내는 꼴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판단은 단견이었다. 한 전 총리나 야당이나 깨끗이 인정하는 게 당의 미래를 위한 올바른 선택이었다. 박기춘 의원은 달라 보였다. 죄는 추했지만 뒤는 깨끗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기는 했겠지만 ‘소가 웃을 일’이라는 식의 억지는 부리지 않았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박 의원의 체포동의안 투표에 앞서 “아프고 안타깝지만 혁신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한 전 총리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한 전 총리의 경우도 박 의원 사례처럼 했어야 옳았다. 죄를 지었더라도 진실을 고백함으로써 신뢰를 얻는다. 한 총리는 사실대로 털어놓고 당은 ‘혁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면 도리어 국민의 지지도가 올라가는 결과를 얻었을지 모른다. 진실은 단 하나이며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이다. 거짓말은 단지 개인의 양심과 도덕을 저버리는 정도의 작은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닉슨 전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거짓말과 은폐로 대통령직을 사직했다. 선거의 거짓 공약은 사람을 잘못 선택하게 만들어 국가의 운명을 뒤바꿀 수도 있으니 말이다.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선비의 피서법/손성진 논설실장

    폭염이 인내심을 시험하는 요즘이다. 선조들은 더위를 어떻게 견뎌 냈을까. 선인들의 지혜가 담긴 여름용품은 합죽선이나 죽부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시나 삼베로 지은 적삼 안에 입어 땀이 차지 않게 하는 등거리라는 물건은 참 기발하다. 등나무로 엮은 조끼로 옷이 몸에 달라붙지 않게 해 준다. 여름철의 우물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등목을 한 번 하고 나면 추위를 느낄 정도였다. 불볕더위도 당산나무의 넓은 그늘에서는 기세가 꺾였다. 그래도 더우면 계곡물에 발을 담그거나 멱을 감으면 더위는 저만치 달아난다. “송단호시(松壇弧矢·소나무둑에서 활쏘기), 괴음추천(槐陰?韆·홰나무 그늘에서 그네타기), 허각투호(虛閣投壺·빈 정자에서 투호놀이하기), 청점혁기(淸?奕棋·깨끗한 대자리에서 바둑 두기), 서지상하(西池賞荷·서쪽 연못에서 연꽃 구경하기), 동림청선(東林聽蟬·동쪽 숲에서 매미소리 듣기), 우일사운(雨日射韻·비 오는 날 시 짓기), 월야탁족(月夜濯足·달밤에 물가에서 발 씻기)” 다산 정약용의 소서팔사(消暑八事)라는 시다. 몸가짐을 아무렇게나 할 수 없던 옛 선비들의 피서법을 그렸다. 피서도 풍류의 하나였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손성진 칼럼] 검찰과 경찰은 변화의 무풍지대인가

    [손성진 칼럼] 검찰과 경찰은 변화의 무풍지대인가

    세상은 변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발전한다. 발전은 곧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다. 우리는 천지개벽 같은 발전을 했다. 굶어 죽는 사람들이 길가에 나뒹굴 때가 있었다. 지금은 남긴 음식 처리에 골머리를 앓을 만큼 풍요롭다. 철권통치가 물러가고 자유의 시대가 왔다. 권위주의는 민주주의로 대체됐다. 수십 년간 이뤄 낸 발전이다. 변하지 않은 게 없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을 보면서 깊은 절망감을 느낀 적이 있다. 무기수 김신혜의 절규를 듣고서였다. 아버지 살해범으로 몰린 김신혜는 구타와 협박에 거짓 자백을 해 무기징역을 받고 재심을 기다리고 있는 여성이다. 무려 15년간이나 옥살이를 할 동안 쌓였을 울분과 억울함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비슷한 사건이 또 있다.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해범으로 붙잡혀 형사들의 폭행을 견디다 못해 거짓 자백을 한 소년. 포승에 묶여 경찰봉이나 막대에 얻어맞다 어린 소년은 허위 자백을 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10년 동안 갇혀 있다가 가석방으로 풀려 나왔다. 두 사건이 일어난 것은 10여년 전. 21세기 대명천지에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음침한 지하실에서 유사한 가혹행위가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1980년대 김근태식 고문 사건과 다를 것도 없다. 거듭되는 물고문, 전기고문에 정신력으로 극한 상황을 버티던 고 김근태도 결국 자백을 했었다. 폭력은 공포심은 불러일으키고 공포심은 마지막 자존심마저 포기하게 하는 것이다. 경찰이 수사를 주도했지만 수사를 지휘한 검찰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쳐 놓은 ‘범행’의 공범인 것이다. 검찰총장의 사퇴를 부른 피의자 학대 사건이 발생한 사례가 있듯이 검찰 역시 근래까지 가혹 행위의 당사자였다. 수사 방식을 개선하려고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요요처럼 과거로 돌아가고 말았다. 피의자를 겁박해 짜맞추어진 수사 결과를 얻으려는 근본적인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거의 그대로다. 가령 우선 피의자가 원하는 대로 진술하지 않으면 “구속시켜 버리겠다”고 겁을 준다. 그렇게 해서도 성과가 없으면 사건과 관계없는 피의자의 가족을 불러 모멸감을 주기도 한다. 피의자를 석 달간 15번이나 소환해 조사했다는 검찰 수사관의 경우도 정신적인 강압 폭력수사다. 또 하나는 소위 ‘별건 수사’다. 본질적인 수사와는 관계없는 다른 피의 사실을 찾아서라도 피의자를 기어이 법의 심판대에 올려놓고 만다. 한 번 칼집에서 빼낸 검(劍)을 검찰은 좀처럼 다시 집어넣지 않는다. 검찰은 집요한 수사력으로 진실을 캐내고 말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당하는 쪽은 전혀 그렇지 않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괴롭히는 합법적인 폭력이다. 대기업 비리를 수사하면서 김진태 검찰총장은 “환부만 도려내겠다”고 했지만 검사들이 총장 말을 듣지 않아서 그런지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 수사를 받던 피의자가 자살하는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죄책감에서 죽기도 하겠지만 검찰 수사에서 받은 극도의 수치심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피의자도 분명히 있다. 잇따르는 피의자의 자살에 검찰도 결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게 변했는데도 검찰이 변하지 않는 것은 권위주의 탓이다. “우리가 누군데”, “우리가 뭐 어때서”라는 알량한 선민의식(選民意識)이다. 권력기관일수록 그런 현상이 강하다. 국세청이나 감사원의 비리가 자정 노력에도 불구하고 근절되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다. 검찰과 비슷한 ‘변화의 무풍지대’다. 힘센 권력일수록 더 힘센 권력 앞에는 엎드린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여유토강(茹柔吐剛)의 비겁함이다. 검찰이 발전하려면 그 반대가 돼야 한다. 피의자에게 친절하고 상위 권력에는 맞서는 게 시대의 변화에 맞는 민주 검찰상이다. 검사의 월급은 국민이 낸 세금에서 지불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피의자도 국민의 한 사람이다. 논설실장
  • [길섶에서] 인왕산/손성진 논설실장

    인왕산 하면 떠오르는 것은 호랑이와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일 것이다. 인왕산에 호랑이가 살았다는 기록을 남긴 사서(史書)는 한둘이 아니다. 조선 태종실록에는 호랑이가 경복궁 근정전 뜰에 들어왔다고 기록돼 있다. 인왕은 높이가 338m밖에 안 되지만 산세가 제법 웅장하고 계곡이 깊어 호랑이가 서식할 만한 산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 풍수지리상 낙산을 좌청룡으로, 인왕산을 우백호로 삼았으니 인왕은 호랑이와 여러모로 연관이 깊다. 궂은 날씨를 무릅쓰고 인왕산에 오른다. 한여름의 장대비가 세차게 쏟아진다. 거추장스러운 비옷을 벗어 버린다. 빗줄기가 땀에 젖은 온몸을 시원하게 씻어 준다. 초야에 묻혀 사는 자연인이 된 것 같은 순간이다.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제색도’는 ‘비갤 제(霽)’ 자를 썼으니, 비갠 후의 인왕산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구름이 걷히기 시작한다. 가려졌던 도심 빌딩숲이 모습을 드러낸다. 뒤를 돌아본다. 구름이 산허리에 걸린 ‘인왕제색도’가 실물 그대로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어디선가 호랑이도 뛰쳐나올 것 같았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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