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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성진
    2025-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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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성진 칼럼] 이기주의에 병들어 가는 사회

    [손성진 칼럼] 이기주의에 병들어 가는 사회

    심장마비 상태에 빠진 택시기사를 버려 두고 유유히 제 갈 길을 가버린 승객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 범람하는 이기주의의 한 단편이다. 내 배만 부르면 그만이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이기주의에 나라가 병들고 있다. 군중이 떠나간 곳이라면 으레 나뒹구는 쓰레기나 천년 문화유산에 낙서를 하는 행위쯤은 차라리 애교스럽다. 몇 푼 이득을 보겠다고 주사기를 재사용해 간염을 퍼뜨리는 의사들이나 내부 정보를 빼내 주식을 공매도해 이득을 보는 세력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이기주의라는 점에서 악덕 중의 악덕이다. 택시기사를 버린 승객처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는 법이 있다. 이른바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다. 프랑스에서는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어도 자신에게 위험이 없는데도 도와주지 않는 자는 최고 5년의 징역이나 1만 5000프랑의 벌금을 부과한다. 그러나 인륜 도덕을 법으로 강제하는 세상은 이미 말세에 가깝다. 나, 내 가족밖에 모르는 한국인의 이기주의를 이시형 박사는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말한 ‘결핍 동기’로 풀이한다. 지독한 가난을 겪다 보니 채워지지 않으면 늘 부족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악착같이 해서 오직 나와 내 가족만 살아남으려 하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 안중에도 없게 된다. 극한의 순간이 오면 이기주의도 더욱 나밖에 모르는 극의 단계에 이른다. 학생들을 수장시키고 혼자 도망친 세월호 선장이나 좀비 영화 ‘부산행’에서 다 죽어도 난 살겠다고 설친 기업 임원 ‘용석’ 같은 인물이 예다. 이기주의는 집단과 지역 사회로 전염병처럼 번졌다. 말로는 공생을 외치면서도 끼리끼리 똘똘 뭉쳐 오로지 그들만의 이익을 추구한다. 노조, 여야 정당, 농민, 의사 같은 집단이나 넓게는 영호남, 좁게는 작은 자치단체 같은 지역들이 국가, 사회야 어떻게 되든 이익에 집착하고 조그만 손해라도 보지 않으려고 힘을 합친다. 억대에 가까운 연봉을 받으면서도 더 많은 돈을 달라는 일부 ‘귀족노조’의 파업은 무리의 힘으로 이득을 취하려는 집단 이기주의와 다름없다. 파업의 또 다른 이슈인 성과연봉제에 대해서는 여러 이유로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프로 스포츠의 수준이 아마추어보다 월등한 이유는 성과연봉제 때문이다. 오직 성적에 따라 연봉을 매기는 현실에 선수들이 불평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더 나은 연봉을 받고자 겨우내 혹독한 훈련을 감내하며 경기에 최선을 다한 결과가 기록 경신으로 나타난다. 당장 내일 폭탄이 날아와도 내 집 앞에는 방어무기를 배치할 수 없다는 게 우리 지역민들의 심보다. 전기를 펑펑 쓰면서도 내 집 근처에는 핵폐기물저장소를 둘 수 없다고 한다. 국토 전체의 효용성은 무시하고 어떤 논리, 수단을 써서라도 신공항은 자기 지역에 건설해야 한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모습은 지방자치제도가 낳은 지역 이기주의란 병폐다. 도대체 국가나 공동체의 이익, 즉 공공선(公共善)이라고는 개념조차 생소할 정치인들부터가 문제다. 집권욕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국민은 처음부터 고려 대상에서 하위순위인 정치적 수사(修辭)용이었음을 이젠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기실 노조나 그에 동조하는 이들의 주장대로 성과연봉제를 제일 먼저 도입해야 할 곳은 국회가 아닐까. 온 나라가 이기주의에 젖은 풍토에서 발전을 기대하는 건 사치다. 남, 사회, 국가를 위한 배려와 기부가 생활화된 서양의 여러 국가까지 거론할 것도 없다. 반복되는 재난에 학습된 결과일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일본인들의 이타주의는 그 나라의 미래까지 밝게 보이게 한다. 폭동을 부를 만한 지진에도 일본인들은 배급품 앞에서 새치기를 하거나 남을 밀치지 않는다. 일본의 학교에서는 남에게 미혹(迷惑), 즉 폐를 끼치지 말라고 수시로 가르친다. 그냥 얻어진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기주의와 배려심을 떠올리면 우리의 교육부터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의 비뚤어진 심리 구조를 뜯어고치려면 그 길밖에 없다. 논설실장
  • [길섶에서] 다시 찾은 대학 교정/손성진 논설실장

    대학 캠퍼스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교정이야 넓기만 할 뿐 황량했지만 20대 초반의 청춘을 보낸 대학은 내게는 찬란한 신세계였다. 내리 4년간 다닌 대학 시절은 공부도 하고 미팅도 하고 학회 활동도 하면서 누구나 그렇듯 꿈에 부풀어 살던 시간이었다. 졸업 후 시간은 덧없이 흘렀다. 그사이 교정은 어떻게 변했는지 늘 궁금했다. 그래서 휴일을 맞아 작정하고 다녔던 대학을 찾아가 몇 시간 동안 교정 곳곳을 돌아보았다. 도시락을 펴 놓고 먹던 잔디밭, 집회를 하던 광장, 벤치가 있던 연못, 학구열을 불태우던 중앙도서관…. 그 시절 추억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마치 다시 대학생이 된 듯한 착각에도 빠져 본다. 연휴 기간인데도 학생식당은 붐빈다. 학생들과 밥을 같이 먹었다. 그때는 한 끼에 400원이었다. 지금은 3000원 안팎이다. 학생들에겐 간혹 1000원짜리 식사를 제공하기도 한단다. 무엇보다 밖에서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밝은 표정에 마음이 든든해진다. 우리 기성세대가 할 일은 일자리 많은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저들을 맞는 것이라 생각하며 어둑어둑해진 교정을 뒤로하고 교문을 나섰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석파정(石坡亭)/손성진 논설실장

    가끔 유적지에 들르는 까닭은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자 함이다. 역사서를 읽으며 상상하던 인물들이 살아 있는 듯한 착각을 한다. 왕릉도 그런 곳이다. 선릉, 태릉, 공릉, 정릉, 홍릉, 헌릉…. 지하철 역명이나 지명으로도 익숙한 왕릉에 어느 왕이나 왕비가 잠들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숭인동의 비구니 도량 청룡사에는 비가 꽃처럼 내린다는 우화루(雨花樓)가 있다.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가기 전날 다시는 만나지 못할 정순왕후와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이다. 왕후는 밤새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인왕산 끝자락, 부암동 석파정에 가 보았다. 서울 도심에 이렇게 풍광 좋은 곳이 있었던가? 흥선대원군의 별장인데 원래는 영의정 김흥근의 소유로 이름도 삼계동정사(三溪洞精舍)였다고 한다. 흡사 대형 분재 같은 아름드리 소나무 고목은 수령이 630년이라고 하니 조선의 건국과 멸망을 지켜보았을 게다. 암반 계곡으로 물이 흐르고 안쪽에는 코끼리 바위로 불리는 커다란 암석이 있다. 대원군은 이곳이 마음에 들어 왕인 아들의 힘을 업고 반강제로 빼앗았다고 전한다. 방에 앉아 난을 치고 손님도 맞는 대원군이 눈앞에 그려진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손성진 칼럼] 언론인의 윤리

    [손성진 칼럼] 언론인의 윤리

    송희영 전 조선일보 주필의 호화 여행 파문을 보고 가슴이 조금이라도 뜨끔했던 언론인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경력 20년이 넘는 중견 언론인이라면 누구라도 외유성 취재를 한두 번쯤 다녀온 경험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필자도 일선 기자 시절 여러 기자들과 함께 비행기, 호텔, 식사를 제공받으며 해외 취재 활동을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기업체에서 일체의 취재경비를 제공하는 게 관행이었다. (김진태 의원의 폭로가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다른 점이라고 하면 송 전 주필의 경우 접대의 내용이 관행을 뛰어넘는 초호화판이라는 것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고 더 과거의 일이라는 점 때문에 도덕적 면책을 받겠다는 생각은 없다. 앞서 밝힌 대로 많은 외유성 취재 관행이 외환위기 이전에 있었던 과거의 일이라면 송 전 주필의 경우는 언론 정화 과정을 몇 번은 더 거친 후인 2011년, 최근의 일이라는 점이 좀 놀랍다. 영화 ‘내부자들’을 본 사람들은 송 전 주필의 사례를 보고 “그런 일이 현실에서도 있구나”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그 영화를 보고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고 제작자를 탓했던 언론인들도 할 말을 잃게 됐다. 겉으로는 언론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뒤로는 촌지를 챙겼던 부끄러운 시절이 언론에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언론은 여러 차례 자율정화 운동을 벌이며 구태를 벗으려 무던히 노력해 온 것은 사실이다. 김영삼·노무현 전 대통령은 언론개혁을 주요 시책으로 추진했다. 1991년 ‘보사부 촌지 사건’은 촌지 추방에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현금성 촌지는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해외 취재도 언론사가 경비를 부담하는 쪽으로 차츰 바뀌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송 전 주필은 백번 천번 비난받아도 마땅하다. 도대체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권력이나 기업과의 유착은 구시대의 유물이 돼 가는 중이다. 감시의 눈이 한둘이 아닐진대 서민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호화 접대를 버젓이 받았다니 같은 언론인으로서 참담한 심정을 감출 수 없다. 언론계 내부에서는 “아직도 이런 일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송 전 주필의 사례가 단지 그에게서만 일어난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고 싶다. 전체 언론이 매도당하지 않을까 걱정도 앞선다. 언론 정화나 개혁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한다. 이미 여러 언론사들은 내부 규정을 통해 골프를 포함해 과도한 접대를 받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논란 끝에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을 거쳐 오는 28일 시행되는 김영란법은 또 한번 언론의 나쁜 관행을 몰아내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언론 문화가 대변혁기를 맞을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 나온다. 골프 접대는 물론 술 접대도 거의 사라질 것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 언론이 반성해야 할 점들이 아직도 많다. 언어학자이자 정치 비평가인 노암 촘스키의 미국 언론에 대한 시각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촘스키는 (미국) 언론이 겉으로는 ‘권력의 감시자’ ‘민주주의 보루(堡壘)’를 자처하지만 사실은 대기업-정부-언론으로 이어지는 단단한 3각 구조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언론이 부패하고 타락해서는 바른 목소리를 낼 수 없다. 기업이나 권력과의 유착에서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게 접대 관행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사건은 유착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접대 문화를 개혁할 계기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을 듯하다. 작금의 사태를 언론 길들이기 측면에서 해석하는 이들이 있다. 김영삼 정부 때나 노무현 정부 때도 언론개혁이라는 말만 나오면 그런 반발이 등장했다. 청와대의 깊은 속내를 알 길은 없다.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입법·사법·행정부에 이어 ‘제4부’로 불리는 언론은 그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라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언론의 자유와는 별개의 문제다. 언론 자유의 침해만큼 언론의 권력화 또한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 권력이 부패와 결합하면 그 부작용은 하나의 기업만이 아니라 국가의 발전까지 저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길섶에서] 가을을 맞는 단상/손성진 논설실장

    고개를 넘어오니/가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흙빛 산벚나무 이파리를 따서 골짜기물에 던지며/서 있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그랬느냐는 내 말에/가을은 시든 국화빛 얼굴을 하고/입가로만 살짝 웃었다(도종환, ‘가을 오후’) 여름 햇살이 아무리 뜨거울망정 가을의 서늘한 기운을 이기지는 못한다. 더워를 못 견디는 육신들을 즐기기나 하는 듯 숨어 지켜만 보다 가을은 어느새 폭염을 저만치 몰아내 버렸다. 살갗에 닿는 바람의 느낌은 더위에 시달린 시간들이 있어서 더 상쾌하다. 이 가을엔, 질릴 만큼 뜨겁던 여름을 견뎌 내고 맞는 이 가을엔 그래서 할 일이 많다. 땀에 젖는 게 싫어서 가보지 못했던 야트막한 산자락에 올라가서 저 먼바다로 해 넘어 가는 풍경이라도 바라봐야겠다. 더위를 핑계로 멀리했던 책들도 가까이하고 싶고 모자란 솜씨일지라도 백지에 연필로 글을 끄적이고 싶다. 이제 곧 산이란 산에는 들꽃이 물들 것이고 들판에서는 곡식과 과실이 누렇고 붉게 영글 것이다. 지친 마음에 닥칠 고독보다 먼저 도착해 사랑으로 우리를 어루만져 줄 결실들이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자연 속의 삶/손성진 논설실장

    TV 방송을 잘 보는 편이 아닌데 가끔 눈길을 끄는 프로그램이 자연 속에서 혼자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물이다. 해발 500m가 넘는 깊은 산속이나 외딴섬에서 나 홀로 자급자족하며 사는 사람들. 저마다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건강을 잃은 사람도 있고 사업에 실패한 이도 있고…. 그들의 삶을 보면서 어떻게 단 한 사람의 이웃도 없는 적막강산에서 혼자 살 수 있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인간은 소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런 질문을 하면 그들은 십중팔구 자연을 벗이나 배우자 삼아 산다고 대답했다. 오래전 퇴직한 한 동문 선배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자연 속에 묻혀 산다. 하와이 오지에 들어가서 직접 집을 짓고 땅을 일구어 꽃과 나무를 심어 기르고 있다. 다른 전직 고위 공무원은 퇴직 후 강원도 원주로 가서 초야에 묻혀 밭작물을 가꾸며 산다. 그들은 요즘 세상을 어지럽히는 수십, 수백억의 돈에도 관심이 없다. 텃밭에 땀 흘려 기른 채소 한 잎도 소중한 그들에게는 그런 욕심이 생기지도 않는 것 같다. 젊어서 권력과 금전을 탐했을지라도 자연을 가까이하며 비로소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씨줄날줄] 팩션과 왜곡/손성진 논설실장

    [씨줄날줄] 팩션과 왜곡/손성진 논설실장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합성어 팩션(faction)은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장르를 말한다. 1990년대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등장했고 2003년 3월 출간된 ‘다빈치 코드’의 성공은 팩션의 확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설의 한 기법이었던 팩션은 영화와 드라마, 게임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광해군을 닮은 천한 인물이 잠시 광해군의 대역을 했다는 줄거리의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대표적인 팩션 영화이며 ‘바람의 화원’, ‘대장금’, ‘주몽’ 같은 드라마도 팩션이다. 팩션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건조한 역사적 사실에 작가들이 흥미로운 드라마적 요소를 가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과 픽션을 혼합하기 때문에 팩션은 늘 역사 왜곡의 도마에 오른다. 문제는 극적인 줄거리 전개를 위해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진실까지 왜곡한다는 점이다. 마치 팩션은 아니지만 영화 ‘내부자들’이 언론의 어두운 모습을 지나치게 과장해 관객의 눈길을 잡으려 한 것과 비슷하다. 그 목적은 물론 흥행이다. 4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덕혜옹주’도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을 여러 곳에서 왜곡했다. 덕혜옹주를 다룬 서적은 10종이 넘게 나와 있다. 그중에서 일본인 여성학자 혼마 야스코가 쓴 ‘덕혜옹주’는 발로 뛰고 근거 자료를 찾아 구성한 인물 평전이다. 권비영의 소설 ‘덕혜옹주’는 100만권이 넘게 팔렸는데 사실에 픽션을 더한 팩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권씨의 소설은 혼마의 평전을 표절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영화 ‘덕혜옹주’는 권씨의 소설이나 혼마의 평전을 원작으로 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내용도 다르다. 내용 중에서 옹주가 어머니 한씨의 장례는 물론 영구 귀국 때까지 조선 땅을 한번도 밟지 못했다는 부분은 진실과 다르다. 옹주가 항일운동을 한 것처럼 표현한 부분도 사실이 아니며 정신병이 발병한 시점도 평전의 내용과는 같지 않다. 한글학교를 세운 적도 없다. 왕족들은 독립운동을 하지 않았으며 감시를 받았지만 풍족한 생활을 했다. 덕혜옹주가 원치 않게 일본으로 가서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됐다는 점이나,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조현병에 걸려 불우한 인생을 살았다는 건 맞지만 있는 사실을 왜곡해서는 곤란하다. 작가의 상상력은 자유이고 한계도 없다. 그러나 역사를 다룬 팩션에서는 넘어서는 안 될 경계가 있다. 역사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부분과 명백한 진실 사이의 경계다. 무수리 출신인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를 다룬 드라마 ‘동이’를 왜곡이라고 할 수는 없다. 최씨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기에 작가의 상상의 영역이다. 그러나 사진과 기록으로 남아 있는 덕혜옹주의 조선 방문을 없었던 것으로 그리는 것은 명백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거짓이 주는 감동은 의미가 없다. 진실보다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민병산/손성진 논설실장

    한번 뵌 적이 있는 신경림 시인의 책을 읽다 우연히 잊어버렸던 ‘민병산’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1980년대에 매달 ‘월간바둑’을 구독한 적이 있는데 거기에 자주 등장한 인물이 민병산(1928~1988)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민병산이라는 이름을 꺼낸 이유는 두 가지 배울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으로 통하는 민병산은 방대한 독서량으로 ‘거리의 철학자’, ‘한국의 디오게네스’ 등으로 불렸다. 그가 남긴 ‘철학의 즐거움’이란 저작과 전기물, 수많은 글의 원천은 독서였다. 바둑을 좋아한, 서울 인사동과 관철동의 터줏대감으로 신동문, 신경림, 천상병 등과 교유하며 책을 놓지 않았던 그는 주변인들에게 익살과 지식을 선물로 줬다. 민병산은 또 법정 스님처럼 무소유를 실천한 자유인이었다. 아버지가 1000평의 저택에 살던 부호였지만 귀공자의 삶을 포기하고 평생 직업도 갖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회갑 잔치를 열어 주겠다던 지인들의 뜻을 한사코 거부하던 그는 회갑 하루 전날 월세 단칸방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의 글을 구해 읽어 보고 욕심을 버린 삶도 되새겨 봐야겠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폭염 단상/손성진 논설실장

    24절기도 환경의 변화에 맞게 바꿔야 할 모양이다. 폭염의 한복판에 있는데 가을로 접어든다는 입추(立秋)가 지나갔으니 말이다. 이러다간 ‘모기도 입이 삐뚤어지고 풀도 울며 돌아간다’는 다음 절기 처서(處署)까지도 더위가 기세를 떨칠지 모르겠다. 절기에 거의 틀리지 않게 날씨가 변해 갔으므로 그리 오래전도 아닌 예전에는 땡볕 더위도 즐겼었다. 땀 흘리고 나면 금세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질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복더위조차 감내했던 게다. 대청마루에 눕거나 느티나무 아래에서 장기판을 마주하고 있으면 더위 걱정은 할 것 없던 시골이나 변두리 풍경이었다. 이젠 더위도 언제 끝날지 모르니 마음이 답답해서 더 더운 듯하다. 사실 열이란 몸 밖에서도 받지만 몸 안에서도 나온다. 마음을 잘 다스리면 더위도 쉬 견딜 수 있을 듯하다. 덥다 덥다 하면 더 더울 것 아니겠는가. 이열치열(以熱治熱)이란 말은 과학적 근거가 있지만 그보다 마음가짐을 말한 것일 게다. 덥다고 시원한 곳만 찾지 말고 “이런 더위쯤이야”라며 뜨거운 음식을 먹으며 맞서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다 보면 더위도 곧 지나갈 터이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우정/손성진 논설실장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한국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의지할 데가 없다는 기사를 보고 든 감정은 서글픔이었다. 내가 과연 그런 상황일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친구나 지인은 몇 명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깝다고 할 친구가 꽤 많지만 진정으로 나의 어려움까지 받아 줄 친구라고 한정하면 손가락을 꼽기가 어려울 것 같다. 40년 넘게 우정을 이어 오고 있는 지방의 죽마고우는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그다음은? 확신이 없다. 사회인으로서 교류하는 지인들은 그저 스쳐 가는 인연이라는 생각을 하면 씁쓸할 뿐이다. 그들은 그저 나의 지위 때문에 만날 뿐인 것이다. 몇 년 전 어느 직책에 있다가 자리를 옮기던 당일 전화를 몇 통 받았다. “오늘 저희와의 약속은 취소하겠습니다.” 나를 만나려던 게 아니라 나의 직책을 만나려 했던 것이다. 자리를 내놓으면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기는 정치인들도 같은 일을 겪을까. 사람과의 만남, 관계에서는 진심이 그만큼 중요하다. 전화번호부에 10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있지만 진심이 통하는 사람은 그중 몇이나 될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손성진 칼럼] 홍·진·우에서 곪아터진 검찰병

    [손성진 칼럼] 홍·진·우에서 곪아터진 검찰병

    “시험 한번 잘 쳐서 평생 잘 먹고 산다.” 검찰 고위직을 거쳐 법무부 장관을 지낸 김경한 변호사는 가끔 이런 자족적(自足的)인 말을 하곤 했다. 몇 년 넘게 불철주야 공부를 해야 하지만 나흘에 걸쳐 치러지는 사법시험에 통과하기만 하면 그 열매가 얼마나 달콤한지 50년 법조인 생활 끝에 깨달았던 것이다. 비상한 두뇌와 각고의 노력이라는 인풋에 비해 사법시험 합격이라는 아웃풋은 고려나 조선의 과거 급제보다 더 크다. 약관의 나이부터 ‘영감’ 소리를 들으며 죄의 면탈권, 심하게는 생명 박탈권을 행사하는 그들 법조인에게 좀 과장하면 세상은 우습게 보일 수밖에 없다. 탄탄대로의 재조에서는 권력욕에 도취되기에 충분한 자리들이 보장돼 있고 재야로 나오면 퇴직의 보상책치고는 너무 거대한 금전이 기다린다. 뭘 해도 잃을 것이 없는 ‘꽃놀이패’를 쥔 그들이다. 임관하자마자 3급 공무원급이라는 칙사 대접을 해 준 것은 군부정권이었다. 권력 유지를 위해 또 다른 권력을 키웠던 게다. 최유정-홍만표-진경준-우병우로 이어지는 일련의 비리 의혹 사건은 이런 배경에서 잉태돼 자라던 악의 덩어리였다. 권력욕에 금전병이 결합한 이들 사례의 결과가 언젠가 폭발하듯 터질 것이라고 검찰 안팎에서는 예상하고 있었다(넷 중 최는 판사 출신이지만). 최·홍 변호사가 일찌감치 권력을 버리고 금전에 매달린 경우라면 진 검사장은 권력을 놓지 않으면서 그 권력을 이용해 금전, 즉 뇌물을 자청한 인물이다. 홍 변호사가 현직과 유착한 증거를 찾지 못했지만 그의 이름만으로도 수사에 영향을 미치기에 충분하다. 권력형 부패의 한 형태가 아닐 수 없다. 결혼을 통해 이미 준재벌이 된 우 민정수석은 최고의 권력까지, 양손에 떡을 거머쥐고 흔들었다. 곪아 터진 4인 사례이지만 제2, 제3의 최-홍-진-우가 어디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는지 가늠키 어렵다. 주기적으로 터져 나오는 법조 비리는 면역된 고질병과 다름없다. 개혁이란 처방전이 도통 약효를 보일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검사 우대, 전관예우가 만연한 풍토에서 검찰 개혁이란 맨손으로 언 땅 파기일 뿐이다. ‘검사스럽다’는 말을 유행시키며 대통령으로서 직접 검찰과 ‘대적’했던 노무현조차 두 손 두 발 다 든 검찰 조직 아닌가. 김수남 검찰총장이 내놓은 대책은 고작 ‘검사의 주식투자 금지’와 ‘내부자 비리 제보 강화’였다. 그것도 경 듣는 소처럼 끄떡하지 않고 버티다 마지못해 내놓은 방안이다. 이런 미봉책, 입발림으로 ‘검찰 공화국’, ‘정치 검찰’이란 오명을 씻을 약효를 바라는 건 큰 오산이다. 검사는 총리, 청와대, 국회까지 진출해 권력의 핵심을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다. 우 수석처럼 그러잖아도 등성이에 오른 권력의 어깨에 날개를 달아 주는 청와대 검사 등용부터 멈추어야 한다. 비서관부터 시작해 수석까지 오른 사람이 검찰 조직을 어떻게 좌지우지했을지는 굳이 사례를 들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견제받지 않는, 차관급 검사장만 50명이 되는, 괴물 같은 검찰권을 강제로 약화시켜야 개혁의 효과를 볼까 말까 한다. 특권 내려놓기는 비단 국회의원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비대해진 검찰 권력의 다이어트를 국회의 개혁과 동시에 모색하는 것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직급 격하와 기소독점주의의 수정을 검토 못 할 것도 없다. 경찰 편드는 게 아니라 검찰은 공소유지에 집중케 하고 수사권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영국의 검찰 역사는 이제 겨우 30년이다. 그전까지는 경찰이 검찰의 역할까지 대신했다. 독일, 프랑스 같은 대륙법계 제도를 받아들였지만 검찰은 수사 지휘권만 행사한다. 우리가 배우고 따른 일본의 검찰제도 또한 권한 분산으로 권력 집중의 폐해를 보완하고 있다. “권력은 국민이 준 것인데도 마치 내 것인 듯 자기도취에 빠지기 쉬운 것 같다.” 10여년 전 재야에 있다 장관이 됐던 강금실 변호사가 한 말이다. 권력은 취하기 쉽고 한번 잡으면 놓치기 싫은 존재다. 스스로 깨어나지 못한다면 검찰의 변화에 대한 기대는 일찍 접는 게 좋을 것 같다. 논설실장
  • [길섶에서] 보신탕/손성진 논설실장

    보신탕을 먹어보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입사 이후 기자 초년병 시절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서 보신탕을 처음 접했다. 그러나 스스로 찾아 먹지 않는 것은 개 키우기를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보신탕 문화에 대해서는 정신적 혼돈을 겪고 있다. 한 나라의 전통적인 음식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과 사람보다 충직한 애완동물을 어떻게 먹느냐는 주장과의 사이에서다. “보신탕 중단 안 하면 평창올림픽을 보이콧하겠다”는 이탈리아 정치인의 일갈은 지나친 간섭임이 틀림없다. 사실 고기는 서양인들의 주식이고 매일 셀 수 없는 동물을 요리용으로 잡고 있으니 그들도 할 말이 없다. 개와 소가 다를 바는 없다. 더구나 프랑스나 스위스 사람 중에는 고양이 고기를 즐기는 이도 있다고 한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서양인이 고양이 고기로 수프를 만드는 끔찍한 동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보신탕을 먹으러 가자는 권유를 슬며시 뿌리쳤다. 언제부턴가 왠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보신탕 문화를 우리 스스로 부정할 것까지야 없지만 동물 학대를 적극 단속하고 식육견과 애완견을 구분했으면 한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재정포럼 정보, 지방정부엔 가뭄의 단비”

    “재정포럼 정보, 지방정부엔 가뭄의 단비”

    “중앙정부의 예산 편성 과정뿐 아니라 인센티브 사업의 선정 과정 등에 대해 처음 들어보는 알찬 강의”라면서 “지방정부의 기획·예산담당 공무원들은 꼭 한 번 이상 들어야 한다.” 장석태 대구 달서구 팀장은 14일 대구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제3차 지방재정포럼: 대구·경북’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장 팀장은 중앙정부 인센티브 사업 공모 관련 정보를 얻고자 행정자치부에 문의해도 그 문턱이 높았다고 했다. 장 팀장은 그래서 행정안전부에 있는 고향 선후배를 통해 어렵게 정보를 알아보곤 했다. 그는 “재정이 어려운 지방정부에 이런 재정포럼의 정보는 ‘가뭄의 단비’”라면서 “오늘 배운 내용을 잘 응용해 내년 인센티브 사업 공모 전략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이상연 행정자치부 지역경제과 팀장이 맡은 3강 ‘중앙부처 공모사업 선정 과정의 이해’라는 주제는 그래서 격찬을 받았다. 이 팀장은 “공모사업 심사 과정에서 현장방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면서 “공모 사업 참여 민간단체의 사업 추진 의지를 현장 평가단에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날 지방재정포럼에는 대구시와 대구철도공사, 대구 서구, 경북도와 청송군, 영천시, 칠곡군 등에서 모두 31명의 공무원이 참석해 8시간 동안 강의를 받았다. 주요 강의로 1강은 이왕재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이 ‘중앙정부 예산 확보 비법’을 주제로 강의했다. 이 연구위원은 “2015년 결산에서 예산정책처가 교육특별교부금의 2년 연속 지원이 규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면서 “교육특교 신청 시 중복에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강을 맡은 배성기 민간위탁경영연구소 소장은 ‘민간위탁 관리의 모든 것’을 주제로 강의했다. 배 소장은 “민간업체 선정 시 계약 심사 시간이 10분 발표, 5분 문답 식으로 너무 짧아 충분한 심사가 불가능하다”면서 “충분한 심사 시간을 가지고 심사해야 예산 절감과 서비스 질 향상을 도모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날 포럼에 참여한 경북 구미시 이재욱 주무관은 “민간위탁 사무는 익숙한 사무이지만 민간위탁 조례부터 선정, 평가에 이르는 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어 체계적 관리 방안의 아이디어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손성진 서울신문 지방자치연구소장은 “앞으로도 중앙과 지방 정부가 소통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구상하겠다”고 말했다. 대구 한찬규 기자 cghan@seoul.co.kr
  • [길섶에서] 교화의 책임/손성진 논설실장

    맹자는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불행과 고통을 그대로 보아 넘기지 못하는 마음,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 있다고 했다.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지나치지 않고 뛰어들어 구하는 마음과 같은 것이다. 사람의 성정(性情), 즉 본성에 관한 맹자의 성선설이다. 반대로 사람의 본성은 방종하므로 반드시 다투게 되어 질서가 문란해지니 교육과 예(禮)로써 교정해야 한다는 게 다 아는 순자의 성악설이다. 두 현인 중에서 누구의 말이 맞다고 할 수 없지만 교육과 환경이 사람을 더 선하거나 악하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했었다. 주차나 층간 소음 문제로 살인까지 일어나는 사회를 보면서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기 이전에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근자에 어떤 이와 주차 문제로 다투면서 사람은 본래부터 악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무가내로 상대방을 몰아붙이는 게 예의라고는 없는 사람이었다. 알고 보면 사람의 마음속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악이 도사리고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 악을 선으로 바꾸는 것은 학교와 사회,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여름꽃/손성진 논설실장

    오늘 아침 몸 가득/하얀 꽃잎 열더니/태양과 마주했다/서로 바라볼수록/뜨거움에 취했다/서산 해가 얼굴 붉힐 즈음/부용의 꽃잎도 붉어졌다/부용아 부끄러워 말아라/그건 진정 청순한 일이며/너와 나만 그런 게 아니다/세상 사람들 다 그렇다(‘부용꽃’, 양전형) 금낭화, 털중나리, 패랭이꽃, 능소화, 도라지꽃, 개망초, 산수국화, 엉겅퀴, 봉선화…. 꽃의 계절은 흔히 생각하는 봄이 아닌 여름인 모양이다. 특히 산에 들에 피어나는 야생화는 봄 내내 움츠렸다가 찌는 듯한 삼복 때가 되어서야 기다렸다는 듯이 더위를 뚫고 백색 백태의 색깔과 자태를 뽐낸다. 여름 야생화는 짙푸른 초목 속에서 숨어 피어서 그런지 그 색이 너무 강렬하고 화려해서 눈을 뜨지 못하겠다. 마치 너무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 눈을 똑바로 뜨지 못하듯이. 여름꽃의 꽃말은 색깔만큼이나 강하다. ‘영원한 행복’, ‘변치 않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변덕스런 바람둥이’라는 꽃말을 가진 여름꽃도 있다. 아무리 아름다움이라도 변덕스럽기보다는 영원하고 변치 않는 아름다움이어야 더 사랑받지 않을까. 무더위를 견디며 피는 여름꽃이라면 더 그렇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손성진 칼럼] 이념 아닌 이익을 좇은 영국, 우리는?

    [손성진 칼럼] 이념 아닌 이익을 좇은 영국, 우리는?

    이념 호사가들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대해 왈가왈부하기가 몹시 껄끄러운 모양이다. 왜냐하면 브렉시트는 영국의 극우파와 좌파, 서민, 노동자가 손을 맞잡고 만들어 낸 희한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민자를 배척하는 인종차별적 극우파와 유럽 통합이라는 세계화에 반대하는 좌파가 결과적으로 동상이몽의 합작을 했던 것이다. 정통 좌파로 불리는 영국 노동당 당수 제레미 코빈은 브렉시트에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했지만 보수당이나 노동당이나 모두 당론으로 잔류를 지지했다. 사정이 이러니 적어도 브렉시트를 놓고 일률적으로 이념적 재단을 하기가 어려워졌다. 보수와 진보, 여당과 야당의 구분이 없다. 영국민들은 좌파, 우파가 아니라 잔류파, 탈퇴파로 구분할 수밖에 없다. 영국민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 각자 영역에서의 이익이었다. 탈퇴로 결론이 나자 극우파와 좌파가(심지어 우리나라에서도) 아전인수식 해석을 하며 서로 자신들이 승리를 주도했다고 우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국민들은 이념과는 크게 상관없다. 유럽의 통합으로 자신들의 삶이 피폐해졌다는, 어쩌면 단순한 생각에서 고립주의, 반세계화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본디 세계화는 선진국들이 밀어붙였다. 금융·투자 개방과 자유로운 노동 이동, 자유무역 등을 앞세운 세계화로 선진국들이 챙긴 이익을 모두 계산해 낼 수도 없다. 개발도상국들은 선진국이 이끈 세계화로 착취를 당했다고 여기며 반세계화 운동을 벌여 왔다. 그러나 막상 피해자는 개발도상국만이 아니었으며 선진국들도 이민자의 급증에 따른 값싼 노동력의 유입으로 임금이 깎이고 결국은 양극화라는 피해를 보고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세계 5위의 경제 대국이며 주요 선진국인 영국이 반세계화를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 몸을 지키겠다고 자해를 하는 모순을 선택한 영국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될까. 국제통화기금(IMF)은 영국의 국내총생산(GDP)이 몇 년 안에 5.5% 줄어들 것이라 했다. 영국 재무부는 일자리 52만개가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런 대가를 치르며 영국민들은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자기들끼리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고립된 채 대영제국의 기반을 닦았던 16세기 헨리 8세 때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부존자원이 부족한 한국은 개발도상국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세계화의 혜택을 많이 입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좌파와 반세계화 세력이 그토록 반대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 잃은 것도 있겠지만 얻은 것도 많다. 도리어 미국의 대선 후보 트럼프는 FTA로 “대(對)한국 무역적자가 두 배로 늘었고 미국 내 일자리도 10만개나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탈퇴파’처럼 세계화에 반대하고 신고립주의를 지지하는 미국 내 극우 층이 세를 넓히고 있다. 혼란스러운 세계 정세 속에서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우리도 이제는 개개인의 이익, 국익을 우선으로 판단하는 도리밖에 없을 듯하다. 그러자면 이념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계화가 이익이면 세계화를 택하고 반세계화가 득이면 그것을 좇으면 될 일이다. 철저한 탈이념, 자국 이기주의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정치인들은 여전히 허울 좋은 이념의 틀에 갇혀 있다. 세계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명분만 앞세운 싸움에 몰두하며 좌정관천(坐井觀天)하는 중이다. 양극화로 따지면 한국은 세계 1등이다. 양극화 해소를 외치지 않은 역대 정부가 없지만 대선이 다가오자 정치인들이 또 일제히 흔드는 ‘정치 상품’이 있다. 바로 양극화 해소다. 영국 정치인들이 단순히 포퓰리즘에 편승해 브렉시트를 주창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정치인들이 대선 국면에서 대중을 선동하고 편을 가르는 엉뚱한 정책을 또 들고 나서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신공항’ 공약 따위를 보면 기우만도 아닐 것 같다. 설마 양극화 해소를 이유로 트럼프를 추종하는 공약을 내놓을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믿지만. 논설실장
  • [씨줄날줄] 초강력 토네이도/손성진 논설실장

    [씨줄날줄] 초강력 토네이도/손성진 논설실장

    강력한 회오리바람, 즉 토네이도는 재난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된다. ‘퍼펙트 스톰’이나 ‘인 투 더 스톰’ 같은 영화다. 토네이도가 미국에서 자주 발생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고 한다. 토네이도가 발생하려면 수직으로 크게 발달하는 밀도가 높은 구름, 즉 적란운(積雲)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미국 중부의 대평원이 그런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대평원은 로키 산맥이나 캐나다 쪽에서 내려오는 한대성 기단과 멕시코만에서 올라오는 열대 해양성 기단이 만나는 곳이다. 두 기단이 만나 적란운을 형성하여 강력한 상승 기류를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토네이도다. 최악의 토네이도는 1925년 미국 미주리 주에서 발생한 것으로 세 시간 반 동안 352㎞를 이동하면서 695명의 사망자를 냈다. 1974년에 발생한 토네이도로 330명이 사망한 일이 있고, 가깝게는 2011년 미국 남동부 지역의 토네이도 재난으로 305명이 숨졌다. 이 정도면 대지진 못지않은 자연재해다. 토네이도는 미국에서만 발생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인도, 이탈리아 등에서도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그러나 그동안 발생한 것은 규모가 크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24일 중국에서 초강력 토네이도가 발생했다. 장쑤성 푸닝(阜寧)현과 셰양(射陽)현 일대에 폭우와 우박을 동반한 토네이도가 휩쓸어 100명가량이 숨졌다. 자동차가 하늘로 날아다닐 정도였다고 하니 회오리바람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도 토네이도의 안전지대가 결코 아니라는 말이 된다. 다만 산지가 많은 지형이어서 발생 확률은 낮다고 볼 수 있다. 동해에서는 작은 토네이도 격인 용오름 현상이 일어난다. 용오름은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생겨난 우리 고유의 용어다. 그러나 토네이도에 비하면 크기도 작고 파괴력도 약하다. 그래도 동해에서 발생한 용오름으로 해안의 민가에 물고기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육지에서도 작지 않은 용오름이 있었다. 1964년 9월 13일 새벽에 현재의 서울 강남구 신사동과 압구정동 주변에서 발생해 한강을 건너고 뚝섬을 지나 다시 강을 건너 풍납동, 성내동을 거쳐 팔당에 이르기까지 약 20㎞를 이동한 용오름이 언론 보도에 남아 있다. 주민들은 “갑자기 강풍이 휘몰아치고 흙덩어리와 먼지가 하늘로 치솟았다”고 말했다. 그 후에도 용오름은 약 5년 주기로 심심찮게 있었다. 2014년 경기 고양시 일산에서는 강력한 회오리바람이 불어 그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에 앞서 1980년 경남 사천에서는 황소가 20m 높이까지 회오리바람에 날아올랐다고 전해지고 제주와 전북 김제에서도 용오름이 발생한 일이 있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미약한 존재임을 실감케 된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두타(頭陀)/손성진 논설실장

    탐욕에서 비롯된 끔찍한 범죄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줄을 잇는다. 맘 놓고 걸어다니기도 겁나는 세상이다. 육욕과 물욕. 인간은 어찌해서 이 말초적인 욕구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하고 탐욕의 노예가 되는가. 우리는 다 걸어다니는 잠재적 범죄자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정신 수양으로 탐욕을 다스릴 수 있다. 대부분의 인간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점점 제정신, 육신 하나 제어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늘고 있는 게 문제다. 이럴 때 우리는 종교를 생각한다. 성경 말씀에는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로마서 6장)”라는 구절이 있다. 내가 죄 앞에서 무기력해지기 전에 내가 먼저 죄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불교에는 두타(頭陀)라는 말이 있다. 탐욕을 버리고 청정하게 불도를 닦는 수행을 말한다. 우리의 선조는 산 이름, 물 이름에 두타라는 말을 붙였다. 강원 양구에는 두타연이 있다. 강원 동해·삼척, 충북 진천·증평에는 두타산이라는 같은 이름의 산이 있다. 근자에 가 본 두타연에 이어 두타산에 가서 잠시 수양을 해야겠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6월의 의미/손성진 논설실장

    6월은 여름이 시작되는 계절이다. 기온은 계절을 앞질렀지만 6월이 되니 비로소 여름이 마음으로 느껴진다. 짙푸른 녹음과 시원한 계곡이 있기에 무더위가 싫지만은 않은데 짜증 나는 뉴스들이 올리는 체온은 견디기 어렵다. 정치인들의 싸움은 그칠 줄 모르고, 서민에게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인 100억원대의 부정한 돈에 관한 기사가 난무하고, 19세의 젊은이가 위험한 일을 하다 비명(非命)에 가고…. 양력 아닌 음력이지만 6월 15일을 유둣날이라고 한다. 유두란 ‘동유두목욕’(東流頭沐浴)에서 나온, 거의 사라진 민속명절로 이날이 되면 동쪽으로 흐르는 냇가에서 머리를 감으며 몸을 깨끗이 씻는다. 유둣날이 오면 혼자서라도 열이 오른 몸을 깨끗이 씻고 마음을 정화하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든다. 그래도 서양에서 6월은 좋은 의미가 많은 달이다. 6월에 결혼하면 운이 따른다는 말이 있다. 6월의 영어 준(June)은 로마신화의 유노(그리스 신화의 헤라)에서 이름을 따 왔는데 유노가 결혼의 여신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6월에 치러지는 결혼 청첩장을 여러 장 받았다. 새 세상을 열어 갈 그들을 축복해 줘야겠다. 손성진 논설실장 sonsj@seoul.co.kr
  • [손성진 칼럼] ‘알파고’ 법조인 시대가 빨리 와야 한다

    [손성진 칼럼] ‘알파고’ 법조인 시대가 빨리 와야 한다

    홍만표 변호사를 수사하는 후배 검사들의 심정이 어떨지 참 궁금하다. 특별수사통으로 존경했던 선배가 1년에 100억원을 버는 변호사로 변신했을 때 선망의 대상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언젠가 ‘대박 변호사’가 될 거라는 꿈을 가졌을 후배들이 선배의 거액 수임료를 수사하는 상황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변론이란 이름으로 상상도 못 할 거액이 오가는 이런 풍토에서 법이니 정의니 떠드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다. 수임료의 일부가 판검사에게 흘러들어 가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현직 판검사와 변호사는 소위 ‘전관예우’의 고리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퇴직해 변호사가 되면 또 같은 형태로 다른 후배들과 연결돼 도움을 주고받을 것이다. 홍 변호사와 나는 다르다고 큰소리칠 수 있는 법조인이 몇이나 될까. 한때는 나도 정의의 편에서 섰다고 자부했을 판검사들이 종내 물욕에 사로잡혀 아등바등 수임료 강탈에 목을 매는 현실이 서민들에게 주는 건 절망뿐이다. 판사, 검사, 변호사를 일컫는 법조 삼륜은 서로 연결된 하나의 거대한 권력집단, 즉 카르텔이다. 고교와 대학 동문이란 학연과 재조 동료의 인연을 가진 이들은 한솥밥을 먹는 한 지붕 세 가족이나 매한가지다. 서로 밀어 주고 당겨 주는 배경에서 이른바 전관예우가 탄생한 셈이다. 이런 현실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피고인들이 판검사와의 인연을 수소문해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을 마냥 나무랄 수만은 없다. 문제는 법조 삼륜의 부적절한 유착과 이를 악용한 변호사들의 악착같은 ‘피고인 돈 털기’를 부르는 뿌리 깊은 전관예우란 관행이다. 판·검·변호사의 사이에서 피고인(피의자)의 위치는 과연 무엇일까. 변호사는 피고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일까. 검사실에 불려다니며 조사를 받고 변호사를 선임해 법정에도 서 봤던 A씨가 느낀 감정은 소외감이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변호사는 판검사와 한통속이며 피고인의 편이 아니다. 변호사는 젯밥(수임료)에 더 관심이 많고 판사 또는 검사와 적절히 협의해 제사(사건)를 잘 지내면 그만인 사람들이다. 그들 사이에서 피고인은 아웃사이더에 불과하다. 판사가 오로지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한다면 말도 안 되는 감형 판결이나 비슷한 사건에 대한 들쭉날쭉한 양형도 없을 것이다. 법리가 아닌 돈을 앞세운 변호사들의 무리한 변론, 청탁이 재판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거액을 받고 피고인에게 좋은 결과를 얻는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될 터이니 변호사는 양심에 거리끼지도 않을 것이다. 그 틈바구니를 노리는 이들이 법조 브로커이니 썩은 곳에 벌레가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도대체 양심과 정의와는 담을 쌓은 일부 판검사들의 재량권 남용이 기생충과도 같은 브로커들이 활개를 치는 환경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막장 드라마보다 못한 이번 법조 스캔들이 빙산의 일각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제일 먼저 사라질 직업은 법조인이 될 것이라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말은 벌써 현실화되고 있다. 미국 뉴욕 대형 로펌 베이커앤드호스테틀러가 최근 인공지능(AI) 변호사 ‘로스’(ROSS)를 사용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법정에도 인공지능 판사가 등장할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양심조차 필요 없는 무생물 판사가 오직 법률에 따라 내리는 판결은 공정성 하나만큼은 확실히 보장될 것은 틀림없다. 금전과 권력에 초월했던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의 뒤를 밟는 법조인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법조계는 혼탁하기 이를 데 없다. 유력한 검찰 인사가 상을 당했을 때 조의금을 5000만원이나 내놓았다는 법조 브로커 윤상림 스캔들이 있은 지 10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없다. 곪을 대로 곪은 법조계의 부패를 도려낼 마땅한 대안이 없는 현실이 답답하다. 가인의 추종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법조계에 ‘돈벌레’들만 들끓는다면 알파고 판·검·변호사들이 등장할 날을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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