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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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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의 사회면]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

    [그때의 사회면]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

    이탈리아인 지아코모 카사노바(1725~1798)는 희대의 바람둥이였다. 생전에 사귄 여성이 130여명에 이르렀으며 귀부인, 하녀, 수녀, 천민까지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그는 군인과 성직자를 꿈꾼 바이올리니스트였고 나중에는 외교관, 복권 창시자, 작가, 탐험가로도 활동한, 시쳇말로 잡기에 능한 ‘뇌섹남’이며 패셔니스트였다.댄스 열풍이 전후 한국 사회를 휩쓸 무렵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이 터졌다. 박씨는 6·25 때 모 대학 3학년에 다니다 해병대에 입대해 헌병대 대위까지 진급했다고 한다. 1954년 4월 어떤 이유로 불명예 제대한 박씨는 해군장교 구락부, 국일관, 낙원장 등 댄스 홀을 무대로 여성들을 농락하기 시작했다. 훤칠한 외모에 대위 신분증을 갖고 다녀 여성들은 쉽게 유혹당했다. 여대생, 국회의원과 고위 관료의 딸 등 피해자는 70여명에 이르렀다. 카사노바의 엽색 행각은 수십 년에 걸친 것이었지만 이 사건은 1954년 4월부터 1955년 6월까지 겨우 14개월 동안 이뤄졌다. 피해자의 고소로 구속된 박씨는 피해자 70여명 중 미용사 직업을 가진 여성 단 한 명만이 처녀였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나중에 ‘여성이 순결할 확률은 70분의1이다’라는 유행어를 낳았다. 신문들은 ‘센세이셔널리즘’에 빠져 피해자들의 이름과 학교 등 신상을 버젓이 공개했다. 피해자들의 인권 보호 주장에도(동아일보 1955년 7월 4일자) 아랑곳하지 않았다. 피고인 박씨와 피해 여성들의 얼굴을 보려고 연일 1만명에 가까운 방청객이 몰려 재판 진행이 어려웠다. 구름 같은 방청객들을 정리하려고 기마경찰대까지 출동할 지경이었다. 방청객은 주로 여대생과 주부가 많았고 소설가, 갓 쓴 노인도 더러 있었다.(경향신문 1955년 7월 10일자) 그러나 여성들은 대부분 재판에 나오기를 거부하고 잠적했다. 어느 신문은 이 재판을 ‘법정 최대의 쇼’라고 했다. 여론은 박씨보다 무너진 정조 관념을 더 한탄하는 등 여성의 잘못을 더 크게 질책했다. 피해자 가족들은 “상제보다 복장이가 더 서러워한다더니 우리는 아무 소리 안 하는데 남들이 왜 떠드는지 모르겠다”며 불쾌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상 피해자가 아니라는 뜻이었을까. 검찰은 공무원 사칭과 지금은 없어진 ‘혼인빙자간음죄’를 적용해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지만 박인수는 ‘혼빙간’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다 여성들이 원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유무죄 논란 속에 1심은 박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판사의 논고는 바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2심과 3심은 일부 피해자의 ‘혼빙간’을 인정했고 박씨는 징역 1년형을 받았다. 사진은 박씨 구형공판을 다룬 당시 기사.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엄동의 온돌방/손성진 논설주간

    엄동(嚴冬)엔 뜨끈뜨끈한 아랫목이 제격이었다. 연탄의 화력은 기름 먹인 종이를 바른 방바닥을 꺼멓게 태울 만큼 강렬했다. 한겨울 바깥 날씨에 꽁꽁 얼어붙은 몸도 온돌방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 금세 녹아내렸다. 밤이 되면 가장 뜨거운 아랫목 안쪽을 차지하려는 꼬마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이불 속에는 귀가가 늦은 아버지의 밥그릇이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보온밥솥이 없던 시절, 밥의 온기를 잃지 않도록 하는 데 온돌만 한 게 없었다. 밥때를 맞추지 못한 식구가 여럿일 때는 밥사발 몇 개가 이불 속에서 옹기종기 식구를 기다렸다. 온돌방은 돌침대, 찜질방, 온장고 역할을 동시에 했다. 어쩌다 새벽에 연탄불을 꺼뜨리는 일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식구들이 오돌오돌 떨었다. 연탄불이 12시간은 가지만 시간을 잘못 맞추면 밤중에 갈아야 하는데 잠이 깊이 들면 놓칠 수도 있다. 식구들이 떨지 않도록 어머니는 새벽잠을 설쳐 가며 연탄불을 갈았다. 보일러로 난방을 하고 각자의 방에서 침대 생활을 하는 요즘에는 온돌방의 따스함과 그 속에서 싹텄던 가족의 사랑을 느낄 수 없다.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손성진 칼럼] 최저임금 인상, 지당하지만

    [손성진 칼럼] 최저임금 인상, 지당하지만

    경제 이론은 수정되고 수정된다. 절대적 이론은 없다. 자유주의는 케인스의 수정자본주의로 바뀌고 수정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에 밀렸다. 신자유주의 또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이론의 차이는 정부의 개입 여부와 정도다. 이런 이론에 바탕을 둔 ‘뉴딜 정책’이나 ‘레이거노믹스’처럼 성공한 사례도 있지만 실패한 예도 많다. 이론대로만 된다면 경제에 실패할 정치가는 없다. 불행히도 이론대로 되지 않는다. 현실과 여건이라는 변수를 이론이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 정권 ‘초이노믹스’의 실패도 탁상 머리 이론에 의존한 탓이다. 저금리로 부동산을 띄우고 임금과 배당을 가계로 돌려주면 경제가 살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가계부채는 폭증했고 부동산은 올랐지만 양극화를 더 심화시키는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 ‘초이노믹스’를 종식시킨 문재인 정부의 선택은 다 알다시피 ‘소득주도성장론’, ‘J노믹스’다. J노믹스는 우리의 문제점을 불평등에서 찾는다. 불평등 해소를 위한 첫 정책이 최저임금 인상과 비정규직 정규직화다. 기업 소득의 가계 환원과 소득불평등 해소, 내수 진작에 의한 성장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구상이다. 이론과 인식은 맞다. 최저임금은 생존의 문제다. 양극화 해소의 중요한 방편일 수 있다.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저소득층에 돈이 돌아가면 소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장애물에 부딪혔다. 최저임금을 주는 고용주들이 고용인보다 사정이 썩 좋지도 않은 영세사업자, 자영업자라는 현실이다. 한국의 자영업자 비율은 그리스·터키·멕시코에 이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4위에 이를 정도로 높다. 그 때문에 최저임금 인상으로 편의점, 커피점, 마트, 음식점, 소규모 공장 등의 업주들이 주로 타격을 받고 있다. 사정이 좋은 대기업에는 최저임금을 받는 고용인들이 적기도 하고 올려 줘도 경영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최저임금 인상 취지가 지당하다 해도 수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먼저 속도 조절이다. 2020년까지인 최저임금 1만원 목표 시한을 문 정부의 집권 기간인 2022년까지 조금 늦추어 보는 것이다. 고용주들이 받는 충격을 줄이고 대비할 시간을 줄 수 있다. 둘째, 영세 자영업자 지원책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고용보험과 국민연금 지원이나 인위적인 임대료 인하 유도가 아닌 근본적인 자활책이 필요하다. 셋째, 최저임금 근로자의 바로 위 차상위 계층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최저임금 근로자들은 아르바이트생과 같은 임시직이 많지만 그 상위는 월급 200만원 안팎을 받는 평생 직장인이다. 대개 중소기업 근로자들이다. 정부가 역점을 두고 있듯 중소기업을 살려야 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유도해야 한다. 상생을 해치는 주요 주체가 대기업의 귀족 노조다. 그들에게 정부는 일언반구의 일침도 없다. 노조라는 이름으로 변장한 그들은 정부가 보호할 대상이 아니다. 보호 대상은 노조조차 만들지 못하는 협력업체, 재협력업체의 저임금 근로자들이다. 넷째, 공무원의 직급 간 임금 격차도 줄여야 한다. 고위직은 낮추고 하위직은 올려야 한다. 정부가 큰 저항 없이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9급 공무원은 거의 최저임금 수준인데 억대 연봉을 받는 고위공직자나 군인이 너무 많다. 공직부터 임금 개혁을 해야 민간이 따라온다. 초기에 부작용이 없는 정책은 없다. 피해가 전무한 고지 탈환 작전도 없다. 주 5일제 근무제를 하면 나라가 망할 거라고 한 사람도 있었지만 잘 정착됐다. 임금 격차 해소와 최저임금 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보와 타협이다. 기득권층은 양보해야 하고 고용주와 고용인 사이의 타협점도 찾아야 한다. 최저임금을 둘러싸고도 사회는 여지없이 갈라졌다. 수구심(守舊心)에 매몰된 사회에서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종국에는 투쟁을 부른다. 최저임금은 양극화 해소의 일부분일 뿐이다. 근본과 핵심을 짚어 내야 J노믹스는 성공할 수 있다. 이제 막 성공과 실패의 시험대에 발을 디뎠을 뿐이다. sonsj@seoul.co.kr
  • [바른 말글] 누군가가/손성진 논설주간

    다 아는 대로 ‘누구’는 ‘잘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인칭대명사’다. “누가 나를 찾지?”에서 ‘누가’는 ‘누구+가’가 줄어든 말이다. ‘누군가’는 ‘누구+인가’의 줄임말로 볼 수 있다. “누군가 나를 찾고 있다”에서와 같이. 또는 “나를 찾는 사람은 누군가?”에서처럼 의문형으로 쓸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를 인칭대명사로 보고 다시 조사를 붙여 ‘누군가가’, ‘누군가를’, ‘누군가에게’라고 쓰는 이들이 많다. “골목길에서 누군가가 서성인다”라든가 “그는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등이 그런 예다. ‘누군가’가 명사가 아니라면 원칙적으로 ‘가’, ‘에게’ 등의 조사가 붙을 수 없다. 따라서 앞의 ‘누군가가’는 그냥 ‘누군가’로, 뒤의 ‘누군가에게’는 ‘누구에게’로 바꿔 쓰는 게 맞을 것이다.
  • [그때의 사회면] ‘땐스 열풍’과 ‘자유부인’

    [그때의 사회면] ‘땐스 열풍’과 ‘자유부인’

    서양식 댄스가 유행하기 시작한 때는 거리에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넘쳐나던 1930년대였다. 그러나 일제는 퇴폐를 조장한다며 여성들의 댄스홀과 카페 출입을 금지했다. 기생 오은희, ‘끽다점’ ‘비너스’의 마담 복혜숙 등이 “경성에 댄스홀을 허하라”는 글을 잡지 ‘삼천리’에 기고한 것은 1937년이었다.광복 후에도 댄스는 미풍양속을 해치는 일종의 범죄행위 취급을 받았다. 정부는 댄스 홀을 수시로 폐쇄하기도 했지만 노도처럼 번져 가는 댄스 열풍을 막을 길이 없었다. 뒷골목 요릿집과 시민관(옛 부민관·현재 서울시의회), 조선호텔, 외교구락부 등 서울의 한복판에서 댄스파티가 공공연하게 열리고 있었다(1949년 12월 29일자 동아일보). 남녀 학생, 유부녀, 공무원 등 직업과 남녀를 가리지 않고 춤바람에 빠졌고 ‘댄스 엄금’은 신문 사설의 소재로도 올랐다. 6·25 전쟁 중이나 직후에도 댄스 바람이 사그라들지 않았는데 당국의 대응은 신문회관의 ‘외국인용 댄스 홀 외에 전 댄스 홀 폐쇄’ 조치였다(1954년 8월 16일). 비밀 댄스 홀과 댄스 교습소는 서울에만 수십 군데였고 일반 음식점에서도 버젓이 춤판이 벌어지자 당국은 음식점마다 이렇게 써 붙이도록 했다. ‘댄스, 낮술 금지!’ 부산에서는 부평동의 비밀 댄스 홀을 ‘습격’해 남자 10명과 여자 22명을 검거해 재판에 넘겼는데 가정주부가 18명이나 됐고 승려도 있었다(1955년 6월 2일). 춤바람이 나 간통을 하거나 이혼 소송을 내는 여성들도 있었고 춤을 못 추게 한다고 여학생이 음독자살한 사건도 있었으니 1950년대의 댄스는 ‘사회악’이었다. 사실 춤과 퇴폐 행위의 유행은 전후의 황폐함을 달래려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댄스의 유행에는 1954년 1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된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도 영향을 미쳤다. 이 소설은 대학교수 부인의 춤바람과 일탈을 다뤘지만 여성의 권익 신장에도 한몫을 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소설이 연재되는 동안 서울신문의 부수가 5만부 이상 늘 만큼 소설은 큰 인기를 끌었다. 연재가 끝난 직후 단행본으로 출간된 ‘자유부인’은 14만부가 팔려 국내 출판 사상 처음으로 10만부 이상의 판매 기록을 세운 책이 됐다. 또 1956년 이 소설은 한형모 감독에 의해 영화화돼 수도극장에서 개봉됐는데 역시 14만명이라는 관객을 동원, 그해 흥행 1위를 차지했다. 한 감독은 ‘운명의 손’에서 처음으로 키스신을 선보인 감독이었다. 영화 ‘자유부인’은 러브신의 수위가 높다는 등의 이유로 개봉일인 6월 9일을 하루 앞둔 8일 정오까지 상영 허가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교수 부인 역의 김정림은 실제 다방 마담 출신으로 일약 여주인공에 스카우트돼 화제를 모았다. 사진은 ‘자유부인’ 14회가 게재된 서울신문 지면.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바른 말글] 필요로 하다/손성진 논설주간

    “아직도 많은 이들이 도움의 손길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미국은 왜 전쟁을 필요로 하는가.” 무심코 쓰는 어구 가운데에 ‘필요로 하다’라는 말이 있다. 필요는 ‘반드시 요구되는 것’ 정도로 풀이할 수 있으므로 ‘필요로 하다’는 풀어서 쓰면 ‘반드시 요구되는 것으로 하다’라는 이상한 말이 된다. 필요 대신 ‘중요’라는 말을 넣으면 ‘중요로 하다’가 되니 더 이상하다. 따라서 ‘필요로 하다’는 비문이 된다. 위의 두 예문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하다”, “미국은 왜 전쟁이 필요한가”로 바꿔 쓰면 좋을 것이다. ‘~을 ~로 하다’의 용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김치를 안주로 하다’의 예와 같이 이는 ‘~을 ~로 삼다’는 뜻이므로 ‘손길을 필요로 하다’ 등과는 전혀 다른 쓰임새다.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억지 설날, 신정

    [그때의 사회면] 억지 설날, 신정

    양력 1월 1일 신정(新正)을 설날로 정하고 음력설을 쇠지 못하도록 강요한 것은 일제였다. 신정과 구정을 같이 쇠는 것을 ‘이중과세’, ‘폐풍’(弊風), ‘악습’(惡習), ‘음력은 미신’이라고 몰아붙인 것도 일제였다. 1896년 친일 김홍집 내각이 음력을 폐지한 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 양력 사용을 촉진하고자 음력설 죽이기에 나선 것이다. 다시 말해 양력설 쇠기는 일제 잔재인 셈이다.음력설을 몰아내고 양력설을 강제로 쇠게 하려고 일제는 몇 가지 비겁한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음력설을 공휴일로 정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구정에 관청과 학교에서 조퇴하거나 늦게 출근·등교하는 것을 금지했다. 또 지역별로 부역이나 청소 활동을 시켜서 음력설을 쇠는 것을 방해했다(1938년 1월 29일자 동아일보). 또 일선 공무원이나 경찰을 동원해 차례를 못 지내도록 조직적으로 훼방을 놓았다. 설을 앞두고 소 도살을 금지하거나 떡집과 푸줏간 영업을 못 하게 하기도 했다. 한 예로 1940년 구정에 전북 임실군 둔남면 면사무소 직원들은 음력설을 앞두고 가가호호 찾아다니며 떡을 못 하게 하고 만약 떡을 하면 빼앗아 동청(洞廳)에서 사람들이 나눠 먹게 했다는 보도가 있다(1940년 2월 8일자 같은 신문). 음력설을 못 쇠게 하고 양력설 쇠기를 독려하는 정책은 광복 후에도 계속됐다. 신정에는 며칠씩 연휴를 주고 통금을 해제했으며 전기도 끊김 없이 제공하고 철야 방송을 하기도 했다. 설 상여금은 구정에 주지 않고 신정에 주도록 강제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음력설에는 일제강점기 때와 꼭 같이 관청은 정상 근무를 하게 하고 학교도 정상 수업을 했다(1960년 1월 16일자 같은 신문). 그러다 보니 설날 인사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아니라 “과세(過歲) 잘 하셨습니까”로 바뀌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구정 말살’ 정책을 펴도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전통을 없애지 못했다. 신정은 ‘일본 설’이라는 인식도 있어서 국민의 저항감이 더 강했다. 국민은 신정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며 음력설에는 어떻게 해서든 설빔을 차려입고 차례를 올렸다. 역이나 버스터미널은 귀성객들로 붐볐다. 구정을 설날로 인정하고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여론은 수그러들지 않았지만 정부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구정이 공휴일로 지정된 때는 양력을 도입한 지 거의 100년 만인 1985년이었다. 그것도 이중과세에 반대하는 정부의 체면을 지키느라 설날로 떳떳이 인정하지 않고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을 붙인 ‘반쪽 설날’이었다. 구정이 ‘설날’로 완전히 복권된 때는 노태우 정부가 집권한 후인 1989년의 일이다. 사진은 정부의 음력설 규제에도 설날을 앞둔 1966년 1월 21일 서울역에 몰린 귀성객들.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저무는 한 해/손성진 논설주간

    한 해가 또 저문다. 휙 지나가 버린 시간을 뒤돌아보면 큰 성취도 없고 연초에 목표로 했던 바를 다 이루지는 못했어도 그저 무탈하게 지냈음에 감사하며 옷깃을 여며 본다. 아쉬움이 있다면 물론 다 내 모자람 탓이다. 인생이란 여정은 불꽃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저물녘 노을처럼 잔잔하기만 해도 충분히 아름답다. 때론 고요하고 때론 출렁거리는 물결을 쉼 없이 노 저어 가다 보면 꽃잔디 같은 삶의 기슭에 몸을 편히 눕힐 수 있을 게다. 그때는 후회도 있을 수 없다. 한 꺼풀의 기억이 내 몸, 내 마음속에 쌓였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므로 아릿하고 눈물겹다. 기쁨이나 슬픔이나 똑같이 정유년을 살았던 나의 소중한 친구이니 언제라도 다시 꺼낼 수 있도록 반짝반짝 예쁜 쟁반에 담아 두고 싶다. 영겁의 세월은 움직이지 않는데 어쩌면 우리 인간만 안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태양은 해가 바뀐다고 뜨고 지는 일을 멈추지 않는데 말이다.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 다만, 지나갔다고 해서 잊지 않으면 된다. 우리 앞에 붉은 해가 다시 떠오르고 있지 않은가. sonsj@seoul.co.kr
  • [바른 말글] 천만의 말씀, 하나님 말씀/손성진 논설주간

    “목사님, 술의 해독은 잘 압니다만 백해무익이란 말씀은 좀 지나친 말씀 같습니다.”(홍성원, ‘무사와 악사’) “큰일을 당하여 말씀드려야 될 것을 말씀드리지 않는 것도 불충(不忠)이라 생각하와….”(정병욱 외, ‘한국의 인간상’) ‘말씀’이란 단어는 참 재미있다. ‘말씀’의 뜻은 ‘남의 말을 높여 이르는 말’이기도 하고 ‘자기의 말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즉 높임말과 낮춤말 양쪽에 다 쓰인다. 예문의 전자는 높임말이며 후자는 낮춤말이다. ‘천만의 말씀’이란 말은 상대방의 말이 가당찮을 때 쓰는 말인데 ‘말씀’이라고 쓴다. 물론 공자가 하는 말도 ‘공자 말씀’이고 하나님이 하는 말도 ‘하나님 말씀’이다. 그렇게 용도가 다양해서인지 ‘言’(언)은 ‘말 언’이 아니라 ‘말씀 언’이다.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사건(11)교사와 살인마

    [그때의 사회면] 사건(11)교사와 살인마

    1963년 11월 12일 오후 6시 20분 거액의 현상금이 걸린 고재봉(당시 27세)이 서울 청계천 5가에서 땅콩행상 김복수(당시 20세)씨의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고재봉 체포는 당시 신문들이 호외를 발행해 전할 만큼 빅뉴스였다. 고는 6명을 한꺼번에 도끼로 내리쳐 살해한 살인마였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인 첫 대형사건이다. 체포 24일 전 고가 6명을 살해한 동기는 이렇다. 고는 201병기대대장 박모 중령의 집에서 당번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는 박 중령의 집 안에서 소고기를 들고 나오다 가정부에게 들키자 도끼로 협박했다가 7개월 동안 육군형무소에서 살인미수 혐의로 복역하게 된다. 만기 출소 후 부대로 복귀했다가 탈영한 고는 복수심에 불타 박 중령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10월 10일 인제에 도착한 고는 박 중령의 집 주변에 숨어 기회를 엿보았다. 19일 한밤에 술에 취한 박 중령(사실은 이득주 중령)이 집에 들어간 것을 보고는 침입해 훔친 도끼로 중령을 죽이고 잠에서 깬 부인, 자녀 3명, 가정부를 차례로 살해했다.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고가 죽인 사람은 박 중령이 아니라 이 중령과 가족이었다. 영창살이를 하는 동안 대대장이 박 중령에서 이 중령으로 바뀐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고는 엉뚱한 사람을 죽인 것을 신문을 보고 알았다고 한다. 고는 다시 박 중령을 찾아내 살해하려고 여비 마련차 서울로 왔다가 발각된 것이다. 죽은 이득주 중령과 아내는 특별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다. 6·25 전쟁 중에 후퇴하던 6사단 7연대 2대대는 충북 음성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다. 1950년 7월 7일 한 여교사가 십 리 산길을 달려와 북한군이 동락초등학교 교정에 모여 있다고 알렸다. 2대대는 학교에 있던 인민군을 공격해 대승을 거뒀고 이승만 대통령은 전 장병을 1계급 특진시켰다. 후에 여교사는 2대대의 소대장과 결혼에 골인하는데 이들이 바로 영문도 모르고 희생된 이 중령과 부인 김재옥 교사다. 김 교사는 6월 20일 부임하자마자 전쟁을 맞았고 피란 가지 않고 있다 큰 공을 세운 것이다. 이 중령 부부와 ‘동락 전투’ 사연은 1966년 ‘전쟁과 여교사’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2011년 국가보훈처는 김 교사를 ‘호국영웅’으로 선정했으며 충북 충주 동락초등학교에는 김 교사 기념관과 전승비가 있다. 고재봉은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됐다. 고는 감방에서 기독교에 귀의했다. 고는 사형 집행장에서 찬송가를 불렀고 “죄인은 가도 죄는 씻을 수 없다”고 참회했다. 고는 웃을 때 자신을 쏴달라고 부탁했고 집행관들은 찬송가가 끝나고 고가 웃자 총을 쏴 부탁을 들어주었다고 한다. 사진은 고재봉 사건을 전한 당시의 신문 기사.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지인의 의미/손성진 논설주간

    과거의 작은 개인용 전화번호부 수첩을 대신하는 것은 ‘연락처’라는 스마트폰 앱이다. 연말연시면 새 수첩에 이름을 옮겨 적었듯 가나다순으로 된 이름을 넘겨 본다. 이름과 전화번호를 손쉽게 넣을 수 있는 만큼 친밀도를 떠나 ‘지인’의 숫자도 빠르게 늘어 1000명을 넘어선 지도 꽤 지났다. 지인은 말 그대로 ‘아는 사람’, 또는 ‘알고 지내는’ 사람이다. 전화번호부에는 가까운 친구도 있고 회사 동료도 있다. 가끔 만나기도 하고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연락한 지 오래된 사람들이고 누군지 잘 떠오르지 않는 사람도 여럿 있다. 지인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은 물론 지인이 아니다. 알지만 거의 연락하지 않는 사람은? 전화번호부에는 세상을 떠난 몇몇 사람의 전화번호도 그대로 있다. 유명을 달리했다고 기억에서 지우기 싫어 그냥 둔 것이다. ‘지인’은 그런 의미일까. 적어도, 죽더라도 이름을 지우지 않고 그 이름을 발견하면 얼굴을 떠올려 보고 싶은 그런 사람쯤 돼야 지인이 아닐까 싶다. 나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다.
  • <신간 안내>평화의 소녀상 지킴이 보고서 ‘동행’

    <신간 안내>평화의 소녀상 지킴이 보고서 ‘동행’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한 세인의 관심은 뜨겁다가도 때로는 식기도 한다. 그 사이 고령의 할머니들은 세상을 떠나고 있다. 2017년 12월 13일 현재, 정부에 등록된 국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는 33명뿐이다. 할머니들이 관심에서 멀어져 가도 진정성을 갖고 변함없이 지원을 아끼지 않는 지자체와 그 주민들이 있다. 경기도 광명시다. 광명 시민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로하기 위해 2015년부터 2017년까지 3년간 활동한 기록을 모은 소책자 ‘평화의 소녀상 지킴이 보고서 ‘동행’(124쪽)이 발행됐다.‘동행’은 광명시(시장 양기대)와 시민들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회복을 위해 벌여온 실질적인 활동과 국내외 지킴이들의 활약을 전하는 국내 최초의 기록집이다. 그동안의 활동에 대한 보고서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에는 시민들과 할머니들의 3년 동행 타임라인,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실제 모델 이용수 할머니의 청소년 인터뷰 등이 실려 있다.또 청소년들이 위안부 피해 역사를 공부하는 데 필요한, 1991년 최초 증언자 김학순 할머니 이야기, 위안부 피해 역사 바로 알기, 국내외 평화의 소녀상 현황 등 교육 자료를 충실히 담았다. 광명시민들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 돕기와 지킴이 활동은 2015년 3월 ‘광명 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 발대식으로 시작되었다. 시민들은 광복 70주년인 그해 8월 15일 성금 6,000여만 원으로 일제 수탈의 현장인 광명동굴 입구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다. 제막식에는 일제 강점기 광명동굴에서 광부로 일했던 장원화 씨도 참석했다. 그 후 시민들은 경기 광주 나눔의 집 할머니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옥선, 박옥선, 김군자 할머니 등을 광명동굴과 라스코동굴벽화전에 초대하고, 악극 ‘꿈에 본 내 고향’과 영화 ‘귀향’ 시사회에도 초청했다. 할머니들을 위해 광명동굴 입장료 수입금의 1%를 기부한다는 광명시의 약속대로 2017년 1월에는 양 시장과 시민들이 나눔의 집을 찾아가 5,300만 원을 기부했다.올해는 광명시의 중고교 청소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월에 ‘평화의 소녀상 청소년 지킴이’가 출범해 활동하고 있으며, 여름방학 동안 ‘소녀의 꽃밭 청소년 기획단’이 광명동굴 입구 평화의 소녀상 둘레에 ‘평화를 위한 소녀의 꽃밭’을 조성했다. 8월 11일 ‘소녀의 꽃밭’으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초청했다. 광명시도 지난 9월 11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전 총리를 나눔의 집으로 안내해 할머니들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한다는 뜻을 함께 밝혔다. 11월 18일 나눔의 집에서 열린 유품전시관과 추모기록관 개관식에 참석한 미국 인권단체인 위안부정의연대 릴리언 싱, 줄리 탕 공동의장과는 위안부 기록물 유네스코 재등재를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 광명시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 돕기 운동은 전국의 지자체들에 귀감이 되고 있다. 일부 지자체는 광명시의 사례를 벤치마킹하고 있다고 한다. 안신권 경기 광주 나눔의 집 소장은 “광명시민들은 나눔의 집 할머니들이 가장 반기는 손님이자 올바른 역사와 여성인권에 대한 실천가” 라고 말했다. 양기대 광명시장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광명시의 모델이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바른 말글] 이유는~ 때문이다/손성진 논설주간

    “발이 아픈 이유는 통풍 때문이다.” “부업을 하려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이런 형태의 글을 일반적으로 쓰고 있다. 엄격히 따져 보면 문법에 맞지 않은 문장, 즉 비문(非文)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유는 ‘어떠한 결론이나 결과에 이른 까닭이나 근거’인데 그렇다면 발이 아픈 이유는 바로 ‘통풍’이고 부업을 하려는 이유는 ‘돈’이다. ‘통풍 때문’이나 ‘돈 때문’이 아니다. ‘때문’이란 단어 자체가 ‘어떤 일의 원인이나 까닭’이란 뜻으로 ‘이유’와 거의 같은 의미다. ‘때문=이유’인 것이다. 따라서 예문은 “발이 아픈 이유는 통풍 이유다”라는 중복 표현이 된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유는~ 때문이다’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이럴 때는 관용적인 문구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비록 비문일지라도 따질 것 없이.
  • [그때의 사회면] 슈퍼마켓과 도둑 감시원

    [그때의 사회면] 슈퍼마켓과 도둑 감시원

    국내 최초의 슈퍼마켓은 1968년 5월 16일 서울 중구 중림동에 300평 규모로 일부 문을 연 ‘뉴서울 슈퍼마키트’로 알려져 있다. 6월 1일 정식 개장할 때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찾아와 카트를 직접 끌고 다니며 설탕, 빵, 돗자리 등 2675원어치의 물건을 산 것으로 신문기사는 전하고 있다.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호텔 근처 건물에 ‘대한민국 최초의 슈퍼마켓 자리’라는 표지를 붙여 놓고 1973년 11월 1일 영업을 시작했다고 써 놓았는데 오류인 셈이다. 고려슈퍼로 시작했던 이곳은 고려쇼핑으로 바뀌어 2007년까지 영업을 했고 지금은 H마트가 그 자리에 있다.1960~70년대에 슈퍼마켓의 등장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질퍽거리는 시장 바닥을 다니며 가격을 많이 깎아 물건을 사도 늘 속는 듯했던 주부들에게 저렴한 가격과 깨끗한 매장, 정찰제 판매를 내세운 슈퍼마켓은 ‘신세계’였다. 하지만 물건을 카트에 담아 카운터에서 일괄 계산하는 판매 방식에 익숙하지 못한 소비자들과 미숙한 운영 때문인지 처음에는 장사가 잘되지 않았다. 결국 ‘뉴서울 슈퍼마키트’는 무인 판매대를 없애고 작은 매장으로 나누어 상인들에게 임대하는 식으로 영업을 했다(경향신문 1968년 12월 18일). 물건을 고르면 그 자리에서 포장을 해 주고 바로 계산을 하는 그전의 방식 그대로였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곧 슈퍼마켓의 판매 방식에 익숙해지면서 ‘삼풍슈퍼마켓’, ‘새마을 슈퍼체인’ 등이 우후죽순 개장했고 슈퍼마켓은 새로운 형태의 판매점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물건을 쌓아 놓고 마음대로 주워 담으면 되는 판매 형태는 감시의 눈이 발달한 지금도 좀도둑들이 설치게 한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처음 슈퍼마켓이 출현했을 때 슬쩍 물건을 훔치는 손길이 많았던 것은 당연했다. 여중생부터 가정부, 대학생, 직장인도 있었다. 긴 코트를 입는 겨울에 더 도둑이 많았다. 한 슈퍼마켓에서는 하루에 많을 때는 10건의 도난 사고가 발생했다(1971년 7월 26일 동아일보). 슈퍼마켓에서 도난 사고가 자주 일어나자 도난 전담 감시원이란 이색 직업이 생겼다. 매대 위에는 뒤쪽이 보이는 거울을 설치해 다른 손님의 눈길을 피할 수 없게 했다. 관리사무실에는 ‘도둑통계장부’를 만들어 놓고 좀도둑을 잡으면 ‘악질’이야 경찰에 넘겼지만 보통은 ‘반성문’이나 ‘자인서’를 쓰게 했다. 먹을 것이 부족했을 때이니 소풍 때 가져갈 과자가 없어서 훔치는 일도 있었고 무작정 상경했다가 며칠을 굶은 뒤 먹거리에 손을 댄 시골 청년에게 감시원이 도로 차비를 쥐여 주는 일도 있었다. 이 청년은 고향으로 돌아가 감사의 편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사진은 설탕과 라면 등을 판매하고 있는 ‘뉴서울 슈퍼마키트’의 개장 당시 모습.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바른 말글] 매달, 매날/손성진 논설주간

    우리말로 ‘다달이’, ‘달마다’, ‘한 달에 한 번’을 뜻하는 매달은 한자어의 매(每)에 우리말 ‘달’(月)이 붙어 만들어진 말이다. 흔히 쓰는 말이지만 한자어는 한자어끼리 붙여 ‘매월’(每月)로 쓰는 게 어떨까. 물론 매달도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 있는 단어다. ‘나날이’, ‘날마다’를 뜻하는 말이 ‘매일’(每日)인데 ‘매날’이라고 잘 쓰지는 않는다. 잘 쓰지 않는다는 말이지 인터넷을 찾아보면 매날을 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매날은 정식으로 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아직은 정확하게 맞는 말은 아니라는 뜻이다. ‘매일 같이 반복해서’라는 뜻의 단어로는 ‘맨날 술이야’라는 가사에도 있듯이 ‘맨날’ 또는 ‘만날’이 있는데 둘 다 맞는 표기다. 언어는 약속이니 매날도 사전에 오를 날이 있을 게다.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사건(10) 윤 노파 살인/손성진 논설주간

    [그때의 사회면] 사건(10) 윤 노파 살인/손성진 논설주간

    1981년 8월 4일. 서울 원효로1가의 한 주택에서 윤경화(당시 71세·여)씨, 수양딸 윤수경(당시 6세)양, 가정부 강경연(당시 19세)양의 시체 3구가 발견됐다. 발견 열흘 전쯤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 이 살인 사건의 신고자는 윤씨의 조카며느리 고숙종씨와 그녀의 남편이었다. ‘원효로 윤보살’, ‘윤갑부’로 불린 윤씨는 거액의 재산을 소유한 부자였다. 자식이 없어 수양딸을 데리고 살았고 그런 윤씨를 고씨는 어머니처럼 따랐다고 한다. 사건 현장은 끔찍했다. 연건평 60평 정도의 목조건물인 윤 노파의 집은 방이 20개나 되었는데 방마다 주술용품들이 뒤엉켜 있었고 부패한 시신의 악취로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경찰은 원한관계에 의한 면식범의 살인으로 단정하고 용의자를 좁혀 나갔다. 경찰은 13일간의 수사 끝에 고씨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구속했다. 경찰은 “고씨가 범행 당시 입었던 원피스에서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자백과 정황 증거 등이 공소 유지에 충분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경찰이 밝힌 범행 동기와 과정은 이렇다. 고씨가 윤씨에게 “2년 전 사주기로 한 아파트를 사 달라”고 했는데 윤씨가 거절했다. 고씨가 “그럼 1000만원만 보태 주면 정릉 집을 처분해 집을 옮기겠다”고 사정했으나 윤씨는 “키워 놓으니까 도와주는 놈은 하나 없고 뜯어가려는 놈만 있다”며 “단돈 10원도 줄 수 없다”고 소리를 질렀다. 고씨가 순간적으로 유산이 탐나 흉기를 내리쳐 세 사람을 차례로 쓰러뜨렸다. 이런 혐의를 고씨도 인정했다고 한다. 기자들 앞에서는 “내가 사람을 죽였다. 나를 어서 죽여 달라”며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러나 확실한 물증이 없었다. 피해자와 돈독한 관계이며 고씨도 서울 음대 출신의 비교적 유복한 가정의 부인이라 범죄를 저지를 만한 정황 증거도 충분하지 않았다. 여섯 달 후 재판에서 법원은 고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담당 검사는 근래에 검찰총장을 지낸 J 검사였는데 환호하는 피고인의 가족들과는 달리 선고 순간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재판 과정에서 고씨는 경찰로부터 호텔 등에서 물고문, 옷 벗기고 때리기 등 갖은 가혹행위를 당하고 자백을 강요당한 끝에 자백한 사실이 밝혀졌다. 범행 과정과 도주 상황 등의 구체적인 사건 경위도 경찰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고문·조작 수사임이 밝혀진 뒤 당시 용산경찰서장은 직위해제되고 담당 경찰관은 윤 노파의 예금증서를 훔친 혐의도 드러나 구속됐다. 사건 자체는 미제로 남았다. 이 사건은 그해 박상은양 피살 사건과 더불어 관행처럼 행해지던 수사기관의 고문과 조작 수사에 경종을 울렸다. 고씨는 척추 장애인이 되었고 정신적 피해는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었다. 사진은 당시 사건을 보도한 기사.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글쓰기/손성진 논설주간

    시 쓰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시인들이 있듯이 글쓰기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벌써 기자 생활 30년째인데 말이다. 다른 사람이 잘 쓴 글을 탄복하며 여러 번 읽어 보고 흉내도 내보려 하는데 역부족이다. 북송 시대 구양수의 3다론, 즉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란 경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중에서 ‘상량’이란 ‘헤아려서 잘 생각함’이란 뜻인데 사고, 생각(思)을 열심히 하라는 말일 게다. 거의 매일 글을 쓰니 셋 중에 그래도 다작은 해 온 편인데 내 글이 부족함은 다른 두 가지가 모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많이 읽고 그것을 토대로 생각을 더 하면 좋은 글이 나올지도 알 수 없다. 그래도 나름대로 하나의 원칙은 있다. 맛깔스럽게 글을 쓰는 것도 포장을 잘하는 것처럼 필요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멋을 부리려 하지 말고 쉬운 표현으로 진솔하게 쓰는 게 내 방식이다. 화장을 진하게 한다고 언제까지나 본 얼굴을 감출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글의 형식보다는 글의 내용, 다시 말해 그 속에 담긴 깊이와 진실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손성진 칼럼] ‘홍위병’과 검찰의 독립

    [손성진 칼럼] ‘홍위병’과 검찰의 독립

    처음으로 검찰을 ‘홍위병’이라고 한 사람은 박지원씨였다. 20여 년 전 옛 국민회의 박 대변인은 검사직에서 물러나 당시 신한국당에 갓 입당한 홍준표 변호사를 향해 “정권 표적 사정의 홍위병 역할에 충실했던 인물”이라고 한 것이다. 정권이 바뀐 2001년 9월 홍준표 의원이 속한 당시 한나라당은 검찰을 정권의 홍위병이라 비난했고 대검은 손해배상 소송을 검토한 적이 있다. 검찰 창설 60주년 된 날이었던 2008년 10월 31일 당시 민주당은 “시대는 정권의 홍위병으로서의 검찰이 아닌 국민의 편에서 정의를 수호하는 검찰의 모습을 원한다”고 논평했다.반복되는 역사와 정권의 교체 속에서 검찰은 ‘홍위병’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17년 12월 지금도 적폐 수사의 중임을 걸머진 검찰은 수사의 당위성을 떠나 또 홍위병 소리를 듣고 있다. 대중이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면 검찰은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드러누웠다. 대권 주자마다 ‘정치 검찰’을 비난하고 정권마다 ‘검찰 독립’을 외쳤지만 검찰은 정치를 떠나 홀로 서지 못했다. 아무리 정치 검찰을 비난하고 검찰 독립을 외쳐도 어느 정권이나 뜻하는 바를 관철하는 수단은 결국 검찰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검찰 자신도 정권의 뜻을 따랐거나 스스로 앞장섰다. 상황이 이러니 검찰의 독립은 아득하기만 하다. 검찰이 홍위병이란 비난에 소송을 청구한다면 소송을 당한 쪽에서 보여줄 증거가 훨씬 많다. 이제 와서 ‘BBK 사건’을 재수사하겠다고 나서지 말고 사건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눈치를 보지 말고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려는 노력을 제대로 했다면 검찰로서도 중요한 반박 자료 하나는 확보했을 텐데 말이다. 문무일 검찰총장이 적폐 수사를 연말까지 끝내겠다고 말했다. 이 발언이야말로 검찰 스스로 정권의 하명수사, 무리한 수사를 하고 있음을 자인한 것이다. 병이 있는 곳에 수술이 있고 범죄가 있는 곳에 수사가 있다. 큰 병이 있는데 의사가 수술을 중단하겠다고 하면 사람 살리기를 포기하겠다는 말밖에 안 된다. 범죄가 있는데 검사가 수사를 그만두겠다는 것은 나라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지도 않다면 집도의가 너무 큰 칼을 들고 설친 것을 인정한 꼴이다. 검찰총장이 수사지휘권을 갖고 있지만 집도의의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병원장이 수술 중단을 선언하는 것도 의료계에서는 없는 일이다. 검찰의 독립과 신뢰 회복이 어려운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검찰 자체가 큰 권력이지만 검찰의 권력지향적, 출세지향적 성향 때문이다. 큰 권력일수록 더 큰 권력 앞에 굴종하는 것은 역사가 말해준다. 두 번째는 수사의 전근대성이다. 가혹행위만 사라졌을 뿐 낡은 수사방식은 수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짜맞추기’, ‘으름장’, ‘별건 수사’, ‘사생활 침해’ 등의 나쁜 수사 관행은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한 검찰은 불신받을 수밖에 없으며 독립이 아니라 견제를 받아야 마땅하다. 적폐를 보복으로 보는 것은 야당의 생각일 뿐이다. 많은 국민은 적어도 적폐 수사에서만큼은 검찰 편이다. 그런데도 적폐를 근절하겠다면서 ‘시한부 수사’를 선언하는 것은 의지 부족의 천명 아니겠는가. 적폐 수사의 반발을 불식하는 길은 시간제한이 아니라 수사의 당위성을 높일 밀도 있는 수사와 정도를 지키는 수사다. 설익은 수사로 섣부르게 영장을 신청해서 기각당하고 새벽녘에 잠옷 바람으로 있는 집을 압수수색하는 것은 바둑으로 치면 아마추어 5급도 못 된다. 환부가 깊다면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말끔히 도려내야 한다. 진단도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무리한 수사로 적폐의 상처를 덮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라. 하명, 보복, 과잉, 나아가 정말로 ‘망나니 칼춤’을 추고 있는지 검찰 스스로 판단해 보고 맞는다면 수사를 중단하는 게 맞다. 87명이나 되는 검사가 밤낮 없이 적폐를 캐고도 ‘정의의 흑기사’ 같은 찬사는 못 들을지언정 다음에 또 홍위병 따위의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는가. sonsj@seoul.co.kr
  • [바른 말글] ~에 다름 아니다/손성진 논설주간

    “미국이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우리는 수비만 하는 미국만의 페널티킥 경기에 다름 아니다.” “이번 결정은 법원이 정치권의 압력에 굴복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이런 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글 가운데 있는 ‘다름 아니다’라는 표현은 문장의 멋을 부리려는 목적으로 흔히 쓰인다. 결론적으로 이 문구는 일본어 ‘に ほかならない’를 그대로 옮긴 일본어식 표현으로 안 쓰는 게 좋겠다. ‘~과(와) 다름 없다’라는 좋은 우리말 표현이 있다. 그러나 ‘다름이 아니오라’, ‘다름 아닌’은 예부터 써 오던 순수한 우리말 관용구다. 전자는 지엽적인 말을 하다 본론으로 들어갈 때 쓰는 문구이며 후자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라는 뜻으로 어떤 대상을 콕 집어서 말할 때 쓴다.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베비 골프’와 인도어 캐디

    [그때의 사회면] ‘베비 골프’와 인도어 캐디

    우리나라 근대 골프장의 사실상 효시는 1921년 6월 21일 개장한 9홀 규모의 서울 효창원 코스다. 효창원이 공원으로 개발되는 바람에 1924년 12월 청량리에 18홀 정규 코스를 새로 개장해 경성골프구락부가 운영했다. 경성골프구락부는 군자리(현재 어린이대공원 자리)에 18홀 6155야드 규모로 새 코스를 만들었다. 한국전쟁으로 황폐화된 군자리 코스는 서울컨트리클럽으로 재개장했지만 어린이대공원으로 개발되는 바람에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했다. 한양컨트리클럽은 1964년 최초의 민간 자본에 의해 경기도 고양에 18홀로 문을 열었다가 1970년 36홀로 증설했다. 옮길 곳을 찾던 서울컨트리클럽이 1972년부터 그중 18홀을 임대해 사용하기 시작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한양서울컨트리클럽’ 또는 ‘서울한양컨트리클럽’이라는 이름을 쓰고 각각의 역사를 달리 본다.1966년 뉴코리아, 태릉 골프장이 문을 열었지만 골프는 정치인 등 일부 특권층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김성곤, 김치열, 이재형 같은 정치인들은 싱글 실력이었다(경향신문, 1966년 8월 6일). 회원권은 35만원 정도였는데 당시 쌀 한 가마 값이 3000원이었다. 골프장 캐디는 태릉 CC에서 가장 먼저 도입했다고 한다. 1960년대에 골프연습장은 서울에 10여곳 있었는데 연습장에도 골퍼를 도와주는 ‘인도어 캐디’가 있었다. 여성으로 처음 골프를 치고 다른 여성들을 가르친 사람은 국악인 고 안비취씨였다. 1956년 지금의 대연각호텔 자리에 최초의 골프연습장을 만들었으며 핸디 12의 고수로 별명이 ‘골프 교장’이었다고 한다(매일경제, 1970년 11월 12일). 골프 인구가 수천 명이었을 시절에도 골프 대중화 주장이 나오고 있었다(경향신문, 1960년 11월 6일). 그러나 대중에게 골프는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려운 스포츠였다. 사치 논란이 인 것은 당연했다. 세무 당국도 골프를 사치로 인식하고 1965년 무렵 입장료의 50%를 세금으로 징수했으며 그린피는 더 오르게 됐다. 그 대안으로 ‘베비 골프’라는 오락이 유행했다. 베비 골프는 퍼팅만으로 경기하기 때문에 도심의 작은 공간에 설치돼 대중들도 쉽게 즐길 수 있었다. 남녀의 데이트 코스로도 애용됐다. 베비 골프장은 1960년대 중반 서울에 18곳이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현재의 스크린골프 격이라고 할까. 일제강점기 때 생겼던 베비 골프는 ‘미니 골프’라는 이름으로 일부 유원지에 명맥을 잇고 있다. 이후에도 골프의 사치성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됐고 업계나 골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1996년에는 입장료와 골프용품에 대한 특별소비세를 30%나 올렸다. 사진은 서울 뚝섬에 있던 골프연습장. 여성 캐디가 앉아 골프공을 치도록 놓아 주고 있다(경향신문, 1971년 8월 26일).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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