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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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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의 사회면] 성폭력과 성희롱

    [그때의 사회면] 성폭력과 성희롱

    성폭력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성 문제는 그 자체가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주제여서 언론에서도 단편적인 사건으로서만 다루었을 뿐 1970년대까지는 사회문제로 거의 거론하지 않았다. 형법상 강간죄, 강제추행죄에 의한 성범죄 처벌은 있었지만 사회적 시선을 두려워한 피해자들이 신고를 꺼리는 일도 많았다. 강간과 강제추행에 대한 친고죄(피해자의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는 죄)가 폐지된 것도 2013년 6월로 겨우 5년 전이다.성폭력이라는 용어를 쓴 토론회는 ‘여성의 전화’ 주관으로 1985년 열린 ‘성폭력 간담회’가 처음인 것 같다. 올해로 창립 35주년을 맞는 ‘여성의 전화’가 성폭력을 사회문제로 부각시킨 최초의 구심점이 됐다. 하소연할 데도 없이 ‘쉬쉬’했던 성폭력을 상담을 통해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토론회에서는 직장 상사의 성추행과 여상 출신 어린 학생들의 직장 내 성희롱 고민도 기사화됐다. 특히 평화시장의 봉제업주가 다른 직장으로 옮기지 못하도록 미성년 미싱사들을 한 사람씩 성폭행했다는 충격적인 폭로도 있었다(동아일보 1985년 9월 27일자). 성폭력(sexual violence)이 법적 용어가 된 것은 1993년 성폭력특별법 제정 이후다. 직접적인 성폭력이 아닌 언어와 신체 접촉에 의한 성희롱(sexual harassment)이란 개념은 1976년 무렵 미국에서 처음 언급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에 성희롱, 성적 모욕이란 용어가 간헐적으로 쓰였다. ‘성적 모욕’이란 용어는 1986년의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서 사용됐다. 당시 검찰은 “권인숙씨에 대한 성적 모욕이 없었다”고 허위로 발표하고 문귀동 경장을 기소유예 처분했지만 2년 후 법원이 재정신청을 받아들여 문 피고인은 징역 5년형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성희롱이 명백한 범죄행위로 규정된 것은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의 영향이 크다. 이 사건은 1993년 서울대 화학과 실험실에서 유급 조교로 근무하던 우 조교가 신모 교수로부터 지속적인 성희롱을 당하고 민사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변론은 박원순 변호사가 무료로 맡았다. 성희롱 문제가 사회문제로 부각된 것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 증가와도 연관이 있다. 1990년대 초반에 이미 직장 여성의 75%가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보도가 있다(경향신문 1992년 5월 30일자). 우 조교 사건 이후 1995년 제정된 ‘여성발전기본법’에 성희롱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성희롱의 구체적인 개념은 1999년 2월 8일 제정된 ‘남녀차별 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에서 규정됐다. 성폭력은 성폭행, 강제추행, 성희롱을 포괄하는 의미로 다뤄지고 있다.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바른 말글] ~하게 만들다/손성진 논설주간

    “전혀 예상치 못한 문구가 시청자들을 웃기게 만들었다.” “무서운 내용의 콩트를 연기하면서 오싹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런 예문을 기사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시청자들을 웃기게 만들었다’는 영어 ‘made TV audiences funny’를 우리말로 번역한 형태다. 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우고 영어 문장에 익숙한 우리는 ‘make+목적어+보어’ 형태의 문장을 우리말에서도 거리낌 없이 쓴다. 우리말에서 일본어식 어투도 문제지만 영어식 어투 또한 그에 못지않게 깊이 스며들어 있다. 하나씩 고쳐 나가지 않으면 더 고치기 어려워질 것이다. 두 예문은 “시청자들을 웃기게 했다”나 “시청자들을 웃겼다”, “오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나 “분위기를 오싹하게 했다”로 써야 자연스럽고 바른 문장이다.
  • [그때의 사회면] 우골탑의 비애/손성진 논설주간

    [그때의 사회면] 우골탑의 비애/손성진 논설주간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말은 소를 팔아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내다 판 소의 뼈다귀로 세운 탑, 즉 대학을 빗댄 말이다. 지금도 대학 등록금은 학부모들의 큰 부담이 되고 있지만 살기 어려웠던 시절에는 어떠했으랴. 1957년 지방 소도시에 있는 K사범대학에서는 전교생 850명 중 524명이 등록금을 내지 못해 무더기 제적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농촌 사정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랬을까. 이듬해에는 부산의 S대학에서 같은 이유로 학교 측이 125명을 제적하자 학생들과 교직원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1959년에는 서울의 명문 K대학에서 등록금을 내지 못한 신입생 41명의 입학이 취소된 일도 있었다.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대학에 합격했는데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음을 비관해 자살한 예비 대학생들이 속출한 일이다.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강도 등의 범죄를 저지른 신입생이나 재학생의 기사가 심심찮게 등장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시위가 잦아진 1960년에는 비싼 등록금 문제 등을 둘러싸고 학내 분규가 동시에 벌어졌다. 등록금 인하를 요구하는 학생들은 시내까지 나와 과격한 시위를 벌였고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경찰서를 습격한 사건도 벌어졌다.(동아일보, 1960년 10월 9일 자)1960년대에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1964년 2학기의 재학생 등록률을 보면 서울대, 연세대 각각 42%, 고려대 50%였다. 대학들은 추가등록의 기회는 주었지만 학생들이 요구하는 분납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등록금은 해마다 대폭 올랐다. 1967년 대학들은 등록금은 20%, 수업료는 35~39% 인상했다. 당시 입학금은 6000원, 수업료는 2만원 정도였다. 대학 운영을 등록금에 의존하다 보니 대학과 학생들의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정부는 정부대로 등록금을 억제하려 했지만 큰 효과가 없었다. 1969년에 이르면 신입생 등록금은 6만 6000원으로 크게 올랐다. 1967년 기준으로 하면 현재의 대학 등록금은 약 250배 오른 셈이다. 대학 등록금은 고사하고 그보다 금액이 적은 중고교 입학금을 마련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신문 사회면에 실렸다.(경향신문, 1957년 4월 8일 자) 대학보다는 적다 해도 당시 중고교 등록금은 대학의 절반가량일 정도로 지금보다는 비싼 편이었다. 대학은 소를 팔아야 한다지만 중고교 입학금은 그보다 적으니 입학철만 되면 붐비는 곳이 전당포였다. 금붙이, 옷, 라디오, 재봉틀까지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변통해 썼다. 등록철만 되면 전당포에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일손이 달릴 지경이었다. 금은방에서는 금붙이를 팔려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 돌려보내는 데 애를 먹기도 했다. 사진은 교육비 급등을 다룬 1971년 2월의 신문기사.
  • [길섶에서] 인생의 사표(師表)/손성진 논설주간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참 서글프다. 따르고 본받을 만한 훌륭한 사람이 주변에 몇이라도 있다면 어두운 혼돈의 세상에서 한 줄기 빛으로 여기며 기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눈에 띄는 사람들이란 죄다 잘난 척하고 이기적이며 부귀영화, 입신양명에만 눈독을 들이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건 나 혼자만의 자괴감 탓일까. 인물에 관한 외고(外稿)를 청탁받아 쓰면서 숨은 진주 같은 선각자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우리가 모르는 작은 위인들이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언젠가 조용히 세상을 관조하며 자기 자리에서 할 일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런 인물들이 더 널리 알려져서 정신적 추종자들이 생겨나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물질만능주의와 물욕이 범벅이 돼 공공선(公共善) 의식은 실종되다시피 한 세상을 정화시켜 줄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의 사표(師表)가 되어 줄 사람을 찾아서 그 길을 좇는다면 세상은 훨씬 더 밝고 살기 좋게 변모할 터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큰 별 옆에 작은 별들이 모여 지구를 환하게 비추듯이. sonsj@seoul.co.kr
  • [바른 말글] ~할 계획(예정)이다/손성진 논설주간

    ‘~할 계획이다’, ‘~할 예정이다’ 는 영어 표현 ‘be planning to’, ‘be going to’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정부는 제재 절차가 진행 중임을 전 세계에 공표할 계획이다”와 같은 문장을 언론에서도 쓴다. 자세히 보면 ‘정부=계획’이라는 이상한 문장이다. ‘계획’을 ‘예정’으로 바꿔도 마찬가지다. ‘공표하겠다고(공표할 계획을) 밝혔다’가 어법에 맞고 ‘공표하기로 했다’가 자연스럽다. “시청 세미나실에서 사업 설명회가 열릴 예정이다.” 이 예문은 더 이상하다. ‘계획’이나 ‘예정’은 주체(주어)의 의사와 생각이 담겨 있는데 설명회가 의사를 가진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피동형에 ‘예정이다’를 써서 그렇다. 굳이 쓰려면 “시청은 사업 설명회를 열 예정이다”라고 써야 하고 “시청은 세미나실에서 사업 설명회를 연다”고 해야 자연스럽다.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1960·70년대 은어(隱語)

    [그때의 사회면] 1960·70년대 은어(隱語)

    지난해 7월 이용호 북한 외무상이 ‘역대급’이라는, 우리 국어사전이나 북한의 ‘조선말대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를 사용해 화제가 됐다. 신조어, 은어, 속어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재순이(재수생) K양은 주다야싸(주간 다방 야간 살롱)에서 가리지날(가끔 만나는 남자)을 만나 양서를 함께 보고(맥주를 함께 마시고) 발바닥도 비볐다(고고춤을 추었다). 고팅(고고 미팅)에서 만난 가리지날은 약간 등대지기(성관계를 밝히는 사람) 기질이 있는데 K양과는 누가봐 데이트(삼각관계) 중.”(동아일보 1978년 4월 21일자) 지금 ‘뇌섹남’이 있다면 1962년 무렵엔 ‘미스터 마가린’이 있었다. ‘수목(樹木)처럼 산뜻하고 멋있는 신사’라는 뜻이었다. 마가린이 식물성 식용품이어서 그런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경향신문 1962년 7월 13일자). 비슷한 시기에 생겨난 ‘원투(일리) 있어’, ‘솥뚜껑 운전수’(식모), ‘재건 데이트’(돈 안 들이는 데이트), ‘KBS’(갈비씨) 등의 은어는 차라리 애교스럽다고 하겠다. ‘생고무 셔츠’(웃통을 벗은 남자), ‘부속물’(남자들이 놀러갈 때 함부로 따라가는 여자), ‘포장공사’(화장), ‘12시’(데이트: 시곗바늘이 서로 만나므로), ‘잠수함’(국속에 든 멸치), ‘엄마 자장가’(여선생의 강의), ‘청춘복덕방’(교회), ‘속도위반’(결혼 전 임신), ‘루트3’(난해한 애인편지), ‘박호순’(순호박), ‘새발의 워커’(당치도 않은 소리), ‘스팀 아웃’(김샜다) 등의 은어는 신조어를 무분별하게 쓰는 청소년들을 보고 혀를 끌끌 차는 어르신들이 고등학교에 다녔던 1960년대 중반에 썼던 유행 은어들이다(동아일보 1964년 9월 24일자). 그런가 하면 ‘검은 도서관’(영화관: 도서관 이상으로 영화관을 좋아하고 그 속에서 뭔가 배운다는 뜻) 같은 풍자형 은어도 있고 ‘애플두’(사과해), ‘1414’(왔네 왔네), ‘33두’(삼삼하다), ‘2분의1’(반했어), ‘드라이문’(건달)은 현재의 인터넷 신조어와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쩨’(외제), ‘EDPS’(음담패설), ‘칸트’(고민), ‘스키타다’(키스하다), ‘4·8작전’(커닝), ‘오촌오빠’(여자의 애인), ‘18금’(데이트비용 공동 부담시키는 남자), ‘아르데이트’(아르바이트 겸 데이트), ‘교양필수과목’(미팅), ‘ABCD’(남자의 4대 조건: 술, 당구, 담배, 데이트)는 1970년대 대학생 사이에서 유행한 은어들이다. ‘꺾자’(술 마시자), ‘설 푼다’(말을 많이 하다), ‘형광등’(반응 속도가 느린 사람), ‘지방방송’(옆에서 떠듦), ‘코스모스 졸업’(후기 졸업), ‘섬씽’(연애사건) 등은 수십 년도 더 지난 지금도 쓰인다. 사진은 1966년 당시 여고생들의 은어 사용 실태를 보도한 기사.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바른 말글] 안절부절하다

    “불륜 아닌 불륜을 들킬까 안절부절했다.” 어느 매체의 기사 내용이다. 물론 ‘안절부절못했다’라고 써야 바르다. ‘안절부절못하다’는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라는 뜻의 동사다. ‘안절부절하다’로 흔히 잘못 쓰는 데는 ‘혹시 병이 났을까 너무 답답했었지 안절부절했었지’라는 ‘사랑과 평화’의 ‘한동안 뜸했었지’라는 노래 가사의 책임이 크다. ‘안절부절’은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양’을 뜻하는 부사인데 “공무원들 가상화폐 들고 안절부절”처럼 기사 제목에 흔히 쓰인다. ‘갈팡질팡’, ‘오락가락’과 같은 쓰임새인데 꼭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부사 ‘안절부절’ 뒤에 ‘어쩔 줄 모르다’가 생략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공무원들 안절부절해”는 틀린다.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진흙탕 스키대회와 기설제

    [그때의 사회면] 진흙탕 스키대회와 기설제

    우리나라에 스케이트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00년대 초 YMCA 선교사를 통해서였다. “(1904년) 당시 미국으로 돌아가던 질레트씨가 가구를 경매할 때 거저 준 대로 무엇 하는 것인지 몰라서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는 철속(鐵屬)의 물건이 있으니 하도 기이하게 여겨 현동순씨가 15전에 샀다. 질레트를 찾아가 스케이트임을 알고 현씨는 삼청동 구천에서 몇 번 지쳐 보았으나 나아가지 않아 고심한 끝에 필경에는 성공하였다.”(동아일보 1929년 1월 1일자) 스케이트는 이후 일반인들에게도 알려지고 전국 규모의 빙상대회가 열렸지만 주로 스피드스케이팅이었다.피겨스케이팅이 소개된 것은 그보다 한참 뒤인 1924년이다. 그해 1월 일본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이일 선생이 주도해 ‘피규어 스케잇 구락부’를 결성했다. 창경원 연못에서 남자 선수 8명이 외국 서적을 보며 연습했다. 더욱 생소했던 페어나 아이스댄싱도 남자끼리 몸을 끌어안으며 훈련을 했다. 물론 이때 여자 피겨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창경원 연못에서는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피겨 시범경기를 신문은 ‘묘기’라고 했다(동아일보 1929년 1월 18일자). 광복 후 만주나 베이징 등지에서 피겨를 배운 여자들이 들어와 피겨에서도 여자 선수들을 볼 수 있게 됐다. 현재 강원도 삼척에서 살고 있는 홍용명(86) 여사도 중국에서 귀국해 1948년 제1회 전국여자피겨선수권에서 우승했다. 사실 선수도 몇 명 없었고 1회전 점프만 해도 놀라던 때였다. 1955년 전국빙상선수권대회에 참여한 여자 피겨 선수는 홍용명, 당시 15세 조정근 단 두 명이었다. 그때까지도 두 선수의 기량은 여러 면에서 미숙해 (외국 선수들과 비교하면) ‘초보’ 수준이라고 신문은 평했다. 그래도 짧은 치마를 입고 피겨를 하니 관중이 구름처럼 몰렸다. 1953년 남자 피겨스케이터와 한강에서 페어 시범경기를 하다 ‘남녀가 대낮에 손을 잡고 움직인다’는 것이 풍기문란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고 한다. 여자 스키 선수는 더욱 귀했다. 1961년 대관령에서 열린 동계스키대회에 재일교포 박해화(당시 24세)가 홍일점으로 참가했다. 1966년 2월 말 대관령에서 열린 전국체전 스키대회는 기온이 올라 눈이 녹고 비마저 내려 엉망이 됐다. 노심초사하던 대회본부 임원들은 새벽부터 ‘눈밭’을 찾느라 헤맸으나 눈이 남아 있는 곳도 겨우 1㎝였다. 노르딕 선수들은 눈이 아니라 진흙탕을 밟고 다녔다. 본부 측은 대회가 불가능해지자 서둘러 폐막을 선언하고 다음해를 위해 ‘기설제’(祈雪祭)를 올렸다. 힘들게 준비한 경기가 무산되자 엉엉 우는 선수들도 있었다. 사진은 1962년 자연설 위에서 알파인 종목 스키를 타는 선수들.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바른 말글] 끼치다, 미치다/손성진 논설주간

    “교장이 주는 근무평가점수가 승진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다 보니….” ‘미치다’와 ‘끼치다’를 간혹 혼동할 때가 있다. 국어사전은 전자를 “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또는 그것을 가하다”로, 후자를 “영향, 해, 은혜 따위를 당하거나 입게 하다”로 풀이하고 있다. 따라서 ‘영향’은 두 단어와 같이 쓸 수 있다. 예문은 맞다. 그러나 ‘끼치다’는 주로 좋지 않은 일에 쓴다. ‘불편을 끼치다’, ‘심려를 끼치다’, ‘폐를 끼치다’ 등이다. 사전 풀이대로라면 ‘은혜를 끼치다’로도 쓸 수 있으니 그것도 절대적이지는 않다. 다만, ‘불편을(걱정을) 끼치다’를 ‘불편을(걱정을) 미치다’로 바꿔 쓰면 어색하다. 좀더 자세히 보면 ‘끼치다’는 ‘미치다’보다 완전히 실현된 상황을 뜻하는 때가 많다.
  • [그때의 사회면] 날씨 따라 옮긴 빙상대회

    [그때의 사회면] 날씨 따라 옮긴 빙상대회

    최고의 시설에서 전 세계 선수들이 참여하는 평창동계올림픽이 개막됐다. 국내 선수들만 참가하는 전국동계체육대회는 올해 제99회 경기가 열려 지난 4일 폐막됐다. 동계체육대회는 최초의 전국 규모 빙상대회인 1920년 ‘전조선빙상경기대회’를 효시로 삼는다.과거 빙상대회는 실내 경기장이 없어 얼어붙은 강바닥에서 치러졌다. 스피드스케이팅은 물론 피겨스케이팅과 아이스하키도 바람이 몰아치는 강 위에 링크를 만들어 경기를 치렀다. 관중들도 쳐 놓은 줄 밖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경기를 지켜봤다. 전쟁 중이라 수원서호링크와 청주 명암지에서 열린 1952년과 1953년을 빼고는 대부분 한강에서 열렸다. 그러나 한강의 결빙 상태가 나쁘면 다른 곳으로 옮겨 대회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1년까지 춘천 공지천이 주로 경기장으로 사용됐고 원주, 인천에서도 열었다. 최초의 실내 스케이트장 서울 동대문스케이트장이 문을 연 것은 1964년이다. 1972년 태릉국제스케이트장도 개장하면서 비로소 빙상대회는 태릉과 동대문 두 실내 링크에서 열렸다. 스키 대회는 1950~70년대 초반 주로 대관령스키장에서 열렸다. 그전에 서울 아차산(1948년), 울릉도에서 열린 적도 있다. 제설기가 없었을 때라 눈이 오지 않으면 큰일이었다. 대관령에 눈이 적게 와 1975~1979년에는 부득이 진부령스키장으로 대회장을 옮겼다. 1980년에는 전국적으로 눈이 적게 와 스키대회를 아예 열지 못했다. 현대적 시설을 갖춘 용평스키장이 문을 연 1981년 이후에야 대회를 날씨와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열 수 있었다. 동대문 링크가 생기기 전 일반 시민들을 위한 실외 스케이트장들이 서울 곳곳에 있었다. 한강은 물론이고 결빙된 덕수궁, 경회루, 창경궁 연못이 시민들에게 스케이트장으로 제공됐다. 서울광장 스케이트장과 유사한 특설 링크들도 설치됐다. 수은주가 떨어지면 서울운동장 정구장과 야구장, 효창운동장에 물을 채워 스케이트장을 운영했다. 서울운동장 스케이트장은 바람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광목으로 지붕을 만들어 덮기도 했다(동아일보 1962년 1월 3일자). 동대문 실내 링크는 개장 후 운영난에 빠져 재개장과 폐장을 번갈아 했다. 여름에는 롤러스케이트장으로 쓰거나 빙상 위에서 패션쇼를 하기도 했다(경향신문 1968년 8월 12일자). 인공 링크인 동대문 실내 링크는 특히 날씨가 따뜻한 겨울날이면 어린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이를 이용해 바가지를 씌우고 시간 초과 요금을 받아 원성을 샀다. 그럼에도 동대문스케이트장은 1985년 문을 닫을 때까지 스케이팅과 아이스하키의 산실로서 큰 역할을 했다. 사진은 1958년 서울 덕수궁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시민들.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손성진 칼럼] 권력의 비대화가 낳은 비애

    [손성진 칼럼] 권력의 비대화가 낳은 비애

    옛날 지면을 들추어 보면서 국회의원들의 특권의식이 50년 전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에 놀랐다. 고액 세비, 안하무인의 언행, 외유, 각종 비리성 특혜, 전용 엘리베이터 이용 등 의원들의 특권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공무원의 권위의식과 갑질도 과거나 현재나 그대로다. 권한과 예산을 손에 쥔 공무원의 유세(有勢)에 하소연할 데도 없는 민원인은 속앓이만 한다. 수사기관의 물고문은 1987년 박종철 사건을 겪고도 곧바로 사라지지 않았다. 놀랍게도 15년이나 지난 2002년 서울지검에서 물고문 의혹이 불거져 당시 김정길 법무장관과 이명재 검찰총장의 사퇴로 이어졌다. 그 이후에도 강압수사 논란은 끊이지 않았고 지금도 수사기관들의 수사 방식은 민주화와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권력을 가진 권력층은 그 권력을 이용해 더 강한 권력을 가지려 하지 절대 권력을 내려놓지 않는다. 권력의 갑질, 행패는 비권력만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다. 권력 내부에서도 벌어진다. 그런 권력과 권위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 세상이 많이 바뀐 듯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다. 바뀌지 않았는데도 바뀐 듯 위장, 은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실상이 요즘 껍질을 깨고 드러나고 있다. 위장을 벗어던지고 은폐의 덮개를 깨려면 서지현 검사와 같은 용기가 필요하다. 비아냥을 들을 각오를 하고 진실을 공개하지 않으면 영원히 파묻힌다. 겉만 바뀐 세상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흘러간다. 단단한 껍질로 쌓인 조직일수록 변화를 거부한다. 검찰이 그런 조직이다. 검찰이 정권의 풍향계를 좇는 것도 일종의 자기 보호 본능이다. 개혁과 변화의 외풍이 닥치기 전에 차단용 보호막을 펴는 것이다. 사실 검찰은 변한 게 없다. 오히려 검찰 권력 자체나 그들의 특권의식은 50년 전 검찰보다 더 커졌다. 이미 검사장 이상 간부가 50명에 가깝고 검사 수가 2000명이 넘는 공룡 조직은 몸뚱이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점점 비대해지고 있다. 그런 점은 나라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인원과 높은 직급에 각종 특권을 걸머쥔 국회와 다를 게 없다. 권력은 더 큰 권력에 약하다. 춘천지검의 외압 논란은 춘천지검에만 있을 게 아니다. 최영미 시인의 폭로성 시에 드러난 ‘늙은 작가’들의 나쁜 손버릇은 50년도 더 묵은 것이다. 조직의 형체는 없지만 문학계의 선후배 간에 뚜렷한 위계질서와 도제식 교육은 검찰과 닮았다. 문학계의 권력은 대개 출판사와 그에 종속된 작가들의 카르텔에 의해 발생한다. 문학계의 권력화는 거기에 정권마다 유명 문학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그들에게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더 심해졌다. 역대 정권이, 위정자들이 검찰을 공룡으로 만들었듯이 문학계도 마찬가지다. 이 시점에서 제2, 제3의 최영미, 임은정, 서지현이 나오지 않는 것은 권력화된 조직의 보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회, 검찰, 문학계, 공무원은 세계 속의 희귀종이다. 어느 나라에도 없는 시대착오적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봉건시대 영주 행세를 한다. 권력을 버리거나 빼앗지 않는 이상 비극과 비애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권력의 맛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을 만큼 중독돼 있다. 악성 권력은 우리 손으로 만들었으니 우리 세대가 해결하는 도리밖에 없다. 50년간 변치 않은 권력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급격한 개혁은 어렵기도 하거니와 혁명처럼 위험하다. 그래도 방법은 우리 하나하나가 선지자(先知者)가 되는 길이다. 특권 남용에 대한 자각과 반성이 우선이다. 이어서 필요 이상의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는 자발적 개혁이 따라야 한다. 점진적이지만 눈에 띄는 변화가 실현될 때 비로소 국민이 보이고 사건 관계인이 보이며 힘이 약한 아랫사람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공도 있고 과도 없지 않은 노무현에게 배울 점 한 가지를 꼽으라면 권위 내려놓기다. 경비원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으며 운전기사의 결혼 때 자신이 직접 운전을 하며 그 운전기사를 태우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만큼은 선지자다.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형식과 마음/손성진 논설주간

    매년 늦은 가을에 고향에 가서 선조의 시제를 지낸다. 그런데 시제를 진행하면서 절차를 누군가 따지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적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젊은 세대는 시제 자체에 관심조차 없는데 어른들은 “제물을 여기에 놓아야 한다”, “술은 이렇게 따라야 한다” 하며 까다롭게 절차를 따진다. 어쩌면 사소해 보이는 것으로 언쟁이 붙는 일도 자주 본다. 유교적 풍습 때문이다. 제사는 밤 11시가 지나서 지내는 게 맞는데 퇴계 이황의 후손이 생활 편의상 저녁 시간으로 바꾸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유학의 거두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풍습을 버렸는데 일반 가정에서야 어떠랴. 그래도 집에서 지내는 제사의 시간이나 순서, 제물의 위치를 멋대로 바꾸지 못한다. 선조에게 죄를 짓는 듯한 느낌 때문이다. 여전히 우리는 형식과 틀에 얽매여 살고 있다. 돌아가신 조상은 “너희가 편한 게 내가 편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데 말이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마음가짐일 터이다. 형식과 절차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조상을 섬기고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 [바른 말글] 대만, 태국/손성진 논설주간

    나라 이름을 한글(한자)로 쓰느냐, 영어(또는 그 나라말)로 쓰느냐 하는 문제는 순전히 편의에 의한 약속인 것 같다. ‘저머니’나 ‘도이칠란트’라고 하지 않고 ‘독일’이라고 하면서 ‘이탈리아’는 ‘이태리’라고 쓰지 않는다. ‘오스트레일리아’보다는 ‘호주’를 많이 쓰는 것은 간단하기 때문인 것 같다. 미국, 영국, 중국, 일본이라 쓰지만 화란(네덜란드), 불란서(프랑스), 서반아(스페인), 월남(베트남), 오지리(오스트리아), 인니(인도네시아) 등의 음역어는 거의 쓰지 않는다. 그러면 대만은? 공식 국가명은 차이니스 타이베이(Chinese Taipei)인데 대만이라 쓴다. 그래도 상하이(상해), 홍콩(향항)처럼 중국어 발음으로 타이완으로 표기하는 게 맞을 것 같다. 태국과 인도도 월남처럼 퇴출하고 타이와 인디아로 쓰면 어떨지.
  • [그때의 사회면] 뿌리 깊은 의원 특권

    [그때의 사회면] 뿌리 깊은 의원 특권

    초선 의원들이 2층에서 3층으로 가려고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 엘리베이터를 줄지어 이용하고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았다는 2016년의 일은 국회의원의 특권 의식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의원 전용 엘리베이터는 2004년에 없앴다가 슬그머니 부활했다.의원들의 특권 의식은 뿌리가 깊다. 과거 신문에는 그 사례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1964년 3월 8일 서울 동대문에서 청량리로 과속으로 달리던 오모 의원의 검은색 지프가 신설동 로터리에서 교통순경에게 걸렸다. 그러나 적반하장으로 오 의원은 순경에게 호통을 치다 못해 경찰 간부에게 연락해 시말서를 쓰게 하고 좌천시켰다(경향신문 1964년 3월 24일자). 같은 해 중학교에도 입시가 있던 당시 서울의 일류 중학교 학급당 정원이 62명에서 학기 도중에 64명으로 늘었는데 그 이유가 국회의원 자녀를 특혜 전학시켜 줬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국회의원의 고임금도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1964년 국회의원 월 보수가 세비 4만 720원, 거마비 1만원, 정보비 2만원 등을 합쳐 8만 1720원이었다. 4000원 안팎이던 일반 공무원 봉급의 20배나 됐다. 1966년에는 14만원가량으로 껑충 뛰었다. 일반 국민에겐 해외여행이 언감생심이던 시절 의원들의 외유병은 오늘날과 다르지 않았다. 교육 시찰, 산업 시찰, 문화 시찰 등의 명목으로 거의 모든 의원들이 당시로는 거액인 국민 세금 2000달러를 쓰며 20일간이나 외국에서 유람을 하고 들어왔다. 1965년 어느 날 김포공항에는 모 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유럽에서 갖고 들어온 선물 트렁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경향신문 1966년 4월 25일자). 일이나 제대로 하고 그러면 다행이지만 의원들의 외유로 국회는 늘 빈자리가 많았고 국내에 있더라도 지각하고 해야 할 일은 하지 않는 나태한 의원들이 부지기수였다. 국회의사당이 태평로에 있었던 1968년에는 서울 종로 세운상가의 호화판 의원회관이 말썽이 됐다. 을지로와 퇴계로 사이의 세운상가 라동(현재 신성상가) 6~10층에 의원회관을 처음으로 만들었는데 집기와 가구가 보통 비싼 물건이 아니었다. 바닥에는 타일이 깔렸고 그 위에 주단을 덮었다. 그해 7월 1일 상가 앞에서 10여명이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이 든 플래카드에는 “행정부의 시녀 국회의원들이여, 화려한 사무실이 부끄러운 줄 알라”고 씌어 있었다(동아일보 1968년 7월 1일자). 당시에도 엘리베이터 하나는 의원 전용이었다. 거액을 들여 빌리고 치장한 의원회관에 나오는 의원은 겨우 30명뿐이었으며 면회객의 엘리베이터는 붐비는데 의원 전용은 텅 비어 있어 일을 하지 않는 의원들의 ‘나태상’을 보여 주었다. 사진은 세운상가 호화판 의원회관을 보도한 기사.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바른 말글] 밝혀지다/손성진 논설주간

    이중피동은 피해야 한다고 했는데 ‘밝혀지다’는 이중피동이 아닐까. 밝다→밝히다→밝혀지다는 이중피동 잊다→잊히다→잊혀지다와 변화한 과정이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잊히다’는 피동 접미사 ‘히’가 붙은 피동사인데 ‘밝히다’는 사동 접미사 ‘히’가 붙은 사동사다. 따라서 ‘밝혀지다’는 사동사의 피동형으로 이중피동이 아니다. 사동 접미사 ‘이, 히, 리, 기, 우, 구, 추’가 붙은 사동사는 목적어를 가진다. (얼음을) 녹이다, (아이를) 눕히다, (종을) 울리다, (물건을) 맡기다, (손잡이를) 돌리다, (불을) 밝히다, (높이를) 낮추다, (입맛을) 돋우다 등이다. ‘눕혀지다’, ‘울려지다’, ‘맡겨지다’는 이중피동이 아니다. 그러나 ‘잊다’의 피동형인 ‘잊히다’에 피동 보조동사 ‘지다’를 더한 ‘잊혀지다’는 이중피동이니 피하는 게 맞다.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불편했던 60년대 아파트

    [그때의 사회면] 불편했던 60년대 아파트

    지금은 최고의 주거 수단이 된 아파트가 처음 생겼을 때는 어땠을까. 광복 이후 일반인들에게 분양한 최초의 아파트는 서울 고려대 옆 종암아파트다.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하고 연탄보일러를 놓은, 판잣집이 즐비하던 당시로는 고급 주거시설이었다. ‘58 개띠’가 태어난 1958년 열린 낙성식에는 이승만 대통령까지 참석해 “정말 현대적인 아파트”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설계는 독일에서 했다지만 국내 건설업체가 시공한 이 아파트가 처음에는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5층에 152가구인 이 아파트는 연통을 10가구가 같이 써서 옆집의 연탄가스가 새서 입주민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입주민들은 가스 걱정 때문에 겨울에도 창문을 열고 살았다고 한다. 또 수세식 화장실은 물이 하루 두 차례 10여 분밖에 나오지 않아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였고 위층에서는 아예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화장실을 쓰지 못했다. 높은 분양가 때문에 입주민들의 분규가 끊이지 않아 국회가 조사단을 꾸려 현장답사까지 했다.(동아일보 1959년 6월 5일 자) 이 아파트는 1993년 철거돼 종암선경아파트로 재건축됐다. 1962년에 완공된 서울 마포아파트는 국내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로 시공도 주택공사가 했다. Y자 형태의 6개 동 650가구였고 9~17평의 6개 평형이 있었다. 역시 연탄보일러로 연탄가스의 위험이 있어 처음에는 입주율이 10%도 되지 않았다. 빈집이 많아 수도관이 터지는 일도 잦았다. 현장소장이 연탄가스가 샌다는 아파트에 들어가 직접 잠을 자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애초 ‘맘모스 아파트’로 명명됐던 이 아파트의 입주 자격이 재미있다. “월세를 낼 수 있는 능력자, 식구는 5인 이내, 단체생활을 잘 영위할 수 있는자, 지적 수준을 갖춘 사람”이다.(경향신문 1962년 11월 1일 자) 매점, 유치원, 어린이놀이터, 미장원, 식당 등 편의시설과 상가를 갖췄지만 역시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았다. 원래 10층짜리로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기로 한 계획이 바뀌어 입주민들은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주부로서는 무거운 김장재료나 연탄재 등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또 마당이 없는 것은 감수하겠지만 가정의 필수품인 장독을 놓을 공간이 부족한 점도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없는 당시의 아파트 층별 분양가가 1층과 2층이 제일 높았고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쌌던 것은 당연했다. 날림 공사도 문제였다. 1967년에 완공된 서울 서부이촌동 공무원아파트는 방마다 물이 새고 방바닥과 벽에 물이 괴는가 하면 수세식 화장실도 고장 났고 연탄 불길이 막혀 가스가 새는 등 입주민들에게 큰 불편을 주었다. 사진은 마포아파트 항공사진.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납매의 개화/손성진 논설주간

    썩어 문드러진 세상 속에서 절개와 지조는 조선시대 언어처럼 느껴진다. 오랜만에 쓰는 단어는 손끝에서부터 어색하다. 절개와 지조를 떠올린 것은 엄동설한에 꽃망울을 터뜨린 매화 때문이다. 남녘이긴 하지만 춥디추운 대구의 수목원에서 납매(臘梅)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단다. 납매라는 말이 너무 어려워 사전을 찾아보니 ‘음력 섣달에 꽃이 피는 매화’라는 뜻이다. 따스한 봄날을 기다리지 않고 대한(大寒)의 북풍한설 속에 꽃을 피우는 매화! 지조와 절개의 상징, 매화를 두고 조선 중기의 학자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이렇게 읊었다. “매화는 일생을 춥게 살아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 이 시절, 이 시간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욕심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불의를 분간하지도 못하는 온통 아수라장이다. 정신도 팔고 몸도 팔고, 내 이득과 보신(保身)을 위해서라면 간도 쓸개도 다 내놓고 내팽개치는 세상이다. 그런 인간들의 아우성 속에서 매화는 올해도 보란 듯이 피었다. 작년처럼 의연하게. 그래서 더 예쁘다.
  • [바른 말글] 잊혀지다

    “대형 전시물이 공간마다 하나 이상 놓여졌다.” “‘강대강’(强對强) 대결로 치달으면서 남북 대화의 문은 굳게 닫혀졌다.” 언론의 기사에서 실제로 쓰인 문장들이다. ‘놓여졌다’, ‘닫혀졌다’처럼 피동이 두 번 겹친 것을 이중피동이라고 한다. 물론 바른 표현이 아니다. 학교에서 배웠듯이 피동 접미사는 ‘이, 히, 리, 기’가 있다. 능동형 ‘놓다’에 ‘이’를 붙이면 피동형 ‘놓이다’가 된다. ‘잊다’는 능동형이고 피동 접미사 ‘히’를 붙이면 피동형 ‘잊히다’가 된다. 그런데 거기에 피동 보조동사 ‘지다’를 더 붙여 ‘잊혀지다’로 쓰면 이중피동이 된다. 대중가요 ‘잊혀진 계절’ 때문에 대중들이 ‘잊혀지다’를 맞는 말처럼 쓴다. ‘놓여지다’, ‘닫혀지다’, ‘뚫려지다’는 ‘놓이다’, ‘닫히다’, ‘뚫리다’로 바꿔 써야 한다.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사건(12) 메사돈 파동

    [그때의 사회면] 사건(12) 메사돈 파동

    1965년 갑자기 마약 중독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메사돈’(Methadone)이라는 마약 성분이 든 진통제를 사 먹은 사람들이 약물에 중독된 것이다. 메사돈은 백색 결정체로 쓴맛이 나며 물이나 알코올에 잘 녹는 물질로 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에서 모르핀 대신 진통제로 사용됐다고 한다. 모르핀은 아편의 주성분으로 강력한 진통 효과를 가진 허가받은 마약이지만 메사돈은 그보다 더한 마약 그 자체였다. 문제는 메사돈이 암거래된 것도 아니고 돈에 눈먼 제약회사들이 메사돈이 함유된 진통제를 당국의 허가를 받아 제조, 판매해 마약 중독자를 양산한 사실이었다. 주로 힘든 일을 하고 병원이 없는 농촌, 광산촌, 도서 지역 주민들이 먹으면 즉시 효과를 보고 약 성분에 취하게 되는 메사돈 진통제를 다량으로 갖고 다니며 먹었다. 건강한 사람도 10개 정도만 먹으면 저도 모르게 마약 중독자가 됐다. 이 ‘신통한’ 진통제를 먹고 영문도 모른 채 마약 중독자가 된 사람이 당국 추산으로는 3만여명, 전문가 추정으로는 10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메사돈은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흑산도나 무안군 같은 지역은 주민의 30%가 메사돈에 중독됐다고 한다(경향신문 1965년 6월 15일자).보건 당국이 눈뜬장님처럼 손 놓고 있던 사이 이 약물의 정체를 밝혀낸 사람은 당시 내무부 소속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31세의 약무사 이창기씨였다. 그는 시중에 마약 성분의 진통제가 유통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온갖 회유와 협박을 물리쳐 가며 당시 작은 집 한 채 값이나 되는 사재를 들여 2년 만에 스스로 메사돈 합성에 성공했다. 메사돈 원료는 10차례에 걸쳐 2297㎏이 수입됐는데 이는 1500만명을 ‘아편쟁이’로 만들 수 있는 어마어마한 분량이었다(경향신문 1965년 12월 7일자). 이씨의 통보를 받은 의약품 검사 주관 부처인 당시 보사부는 발칵 뒤집혔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내무부 소속인 이씨가 규명해 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보사부는 검찰과 경찰, 세관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반을 꾸려 대대적인 수사에 들어갔다. 수사 결과 이 마약 진통제를 제조한 사람은 관서제약 관리약사로 서울대 약대를 나온 임국선씨임이 밝혀졌다. 수사 당국은 메사돈을 밀조, 매매한 혐의로 공무원과 업자 등 66명을 구속했다. 뇌물을 받은 신모 국회의원도 입건됐다. 또 20여개의 굵직한 제약회사들이 문을 닫았고 보건원장 등 파면된 보건담당 관리가 7명이나 됐다. 광복 이후 최대의 의약 스캔들이었다. 그러나 임씨와 제약회사 대표 등 주범 8명은 행적을 감춰 검거하지 못했으며 그중에는 브라질로 도피한 사람도 있었다. 사진은 메사돈 파동의 전말을 보도한 당시 신문 지면.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 [바른 말글] 맞다, 맞는다

    “네 말이 맞다.” “피의자 신상을 공개하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맞다고 판단돼서….” ‘맞다’가 맞는가, ‘맞는다’가 맞는가. ‘문제에 대한 답이 틀리지 아니하다’, ‘말, 육감, 사실 따위가 틀림이 없다’는 뜻으로 쓰이는 맞다는 동사다. 따라서 현재 사건이나 사실을 서술하는 뜻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종결 어미 ‘-는다’를 붙여 ‘네 말이 맞는다’, ‘네가 아까 말했던 그 사람이 맞는다’, ‘음식 맛이 내 입에 맞는다’와 같이 써야 한다. ‘틀리다’도 마찬가지다. 국립국어원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거의 모두 그냥 맞다로 쓰고 있다. 그러나 활용형 중에서 기본형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종결 어미 ‘-다’를 붙여 ‘네 말이 맞다’, ‘음식 맛이 내 입에 맞다’, ‘반지가 손가락에 맞다’로 적어야 하므로 이 표현 자체가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손성진 논설주간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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