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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독립군 탄압 거점 부산경찰서 폭파… 의열단 거사 1호 ‘부산의 윤봉길’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독립군 탄압 거점 부산경찰서 폭파… 의열단 거사 1호 ‘부산의 윤봉길’

    “왜놈 손에 사형당하기 싫어 단식하고 있으니 도로 가져가게.” 1921년 5월 5일 대구감옥으로 면회 온 친구 최천택이 가져온 달걀꾸러미를 건네자 박재혁 의사(義士)는 이렇게 말했다. 엿새 후인 5월 11일 오전 11시 20분 박 의사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식음을 전폐한 지 열이틀째, 사형 집행 사흘 전이었다. 며칠 후 의사의 시신은 부산진역에 도착했다. 박 의사의 노모와 친구들, 수많은 시민이 역 앞에 몰려들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천만뜻밖에 이 지경이 되니 하늘이 무너진 듯합니다.” 노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최초로 의열단 거사를 성공으로 이끈 주인공이자 ‘부산의 윤봉길’로 불릴 만한 박 의사가 순국한 지 97년이 흘렀다.취재차 찾은 부산 날씨는 바람이 심하게 불어 체감온도가 영하 10도쯤 됐다. 서봉수 박재혁 의사 기념사업회장 겸 삼일동지회중앙회장을 만나 박 의사의 생애와 기념사업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삼일동지회는 해마다 박 의사 추모제를 여는 등 기념사업을 주관하고 있다. 박 의사는 직계 후손이 없다. 박 의사 여동생 명진의 손녀인 김경은(53)씨는 “26세의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인데 업적이 제대로 조명되지 않아 가슴 아프다”고 말문을 떼었다.●정부·지자체 관심 부족… 담당자도 박재혁 몰라 김씨와 서 회장은 인터뷰 내내 독립유공자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정부와 지자체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실제로 고위층은 물론 현지 담당자 중에도 박재혁이 누군지 모르는 이가 있다고 했다. 10억원 가까운 예산을 들여 조성했다는 ‘박재혁 거리’를 찾아가 보니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박 의사는 1895년 5월 17일 부산 동구 범일동 183번지에서 가난한 선비 박희선과 어머니 이치수 사이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생가 복원은 고사하고 아직 출생지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범일동 550번지라는 주장도 있기 때문이다. 550번지는 1919년 이사해서 가족이 살았던 집으로 보인다. 현재 ‘183번지’는 공용 주차장이 돼 있고 ‘550번지’에는 민가가 있다. 박 의사는 1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여동생 명진과 어렵게 살았다.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었다. 교육열 높은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의사는 1915년 부산공립상업학교(부산상고, 현 개성고)를 4회로 졸업했다. 박 의사와 동급생 최천택, 오택(오재영)은 친형제보다 가깝게 지낸 ‘삼총사’였다. 의형제를 맺고 부모상을 당하면 같이 상주 노릇을 하자고 다짐할 정도였다. 최천택이 남긴 글에 따르면 “박재혁, 김인태, 김병태, 김영주, 장지형(장건상 조카), 오택 등 친구들과 매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전도를 모의하였다”고 한다.●고서적상으로 위장… 서장실 들어가 폭탄 던져 2학년 때인 1913년 박 의사와 최천택 등은 일제가 금서로 규정한 ‘동국역사’를 여러 학교와 학우들에게 몰래 나눠주다 발각됐다. 구한말 역사가인 현채가 지은 우리 역사교과서였다. 이때부터 박 의사는 요주의 인물로 찍혀 일경의 감시를 받게 된다. 3학년이 된 박 의사는 최천택 등 16명과 ‘구세단’을 결성, 지역 청년들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6개월 만에 탄로 나 1주일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았다. 구세단은 1915년을 전후해 경남 밀양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이 결성한 ‘일합사’와 교류했다. 이는 나중에 박 의사가 의열단에 가입하는 계기가 됐다. 박 의사는 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과 싱가포르를 오가며 무역업에 종사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고 항일 의지를 불태웠다. 1920년 초 박 의사는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김원봉은 “부산경찰서장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슈헤이는 의열단원 다수를 체포한 악질 경찰로 경남북 경무부 관내 수석 서장인 거물이었다. 박 의사는 김원봉에게서 거사 자금 300원과 여비 50원, 러시아제 원통형 폭탄 한 개를 받아 중국 상하이를 떠났다. ●“모든 책임 진다” 편지 붓대롱에 넣어 친구에 박 의사는 감시가 심한 관부연락선을 타려던 계획을 바꿔 대마도를 거쳐 부산항에 잠입했다. 선생은 상하이 동지들에게 ‘熱落仙他地末古 大馬渡路徐看多’(열락선 타지 말고 대마도로 간다)고 적은 엽서를 보냈다. 검열을 피하려고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부산에 들어온 날은 1920년 9월 6일이었다. 폭탄은 친구 오택의 집에 숨기고 “총독부를 폭파할 것”이라고 거짓으로 얘기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경은 오택을 찾아와 박 의사의 입국 경위를 캐물었다. 의사는 더 지체할 수 없었다. 폭탄을 숨겨둔 오택의 집으로 갔다. 오택은 유고집에서 이렇게 썼다. “박형이 시간이 절박하다며 맡겨둔 물건을 내어달라고 독촉했다. 나는 암실에 들어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고 나왔다.” 박 의사는 가족을 부탁하면서 붙잡히면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홀로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박 의사가 중국 고서적상을 가장해 용두산공원 아래 부산경찰서에 도착한 것은 9월 14일 오후 2시 30분쯤이었다. 폭탄을 숨긴 짐꾸러미를 들고서였다. 최천택은 용두산공원에서 망을 보았다고 한다. 고서적상으로 위장한 것은 하시모토가 중국 고서적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박 의사는 서장실로 들어가 서장이 몸을 돌리는 순간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라며 준엄하게 꾸짖고는 폭탄을 던졌다. “꽝” 하고 폭탄이 터졌다. 폭탄은 1층 유리창과 책상을 부수고 천장을 관통할 만큼 강력했다. 하시모토는 중상을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의사도 오른쪽 무릎을 심하게 다쳤다.●“일본 관광객 보기 안 좋다”… 표지석도 안 세워 다친 박 의사는 현장에서 검거됐다. 투탄 후 경남 전역에 비상령이 내려졌다. 일경은 경찰서 주변을 지나던 행인 등 수십 명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들였다. 어머니와 여동생도 잡혀와 심문을 받았다. 최천택 등 친구들도 붙잡혔다. 오택은 폭탄을 숨겨준 혐의로 1년 동안 수감됐다. 응급처치를 받은 박 의사는 공범을 불라는 일경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단독범행임을 고집했다. 박 의사는 부립병원 간호원을 통해 유치장에 갇힌 최천택에게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짧은 편지를 붓대롱에 넣어 전달했다고 한다. 망을 보았던 최천택(1897~1962·건국훈장 애족장)은 모진 고문을 받아 의식을 잃은 채 풀려났다. 치안 조직의 핵심인 경찰서장실에 폭탄을 던진 박 의사의 의거는 일본 본토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일본 신문들은 “일선(日鮮) 동화를 단념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썼다. 박 의사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2심에서 사형으로 형량이 높아졌고 경성고법 상고심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사형이 선고되자 선생의 홀어머니와 누이동생은 대성통곡했다. 방청객 모두 따라 울었다. 폭탄 파편에 맞은 부상과 고문 후유증으로 감옥 생활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박 의사는 면회 온 사람들에게 “내 뜻을 다 이루었으니 지금 죽어도 아무 여한이 없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의사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고 유해도 1969년 부산에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그러나 부산에서도 박 의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데는 정부나 부산시의 책임이 크다. 동상조차 예산 한푼 들이지 않고 롯데그룹 지원으로 건립했고 그나마도 인적이 드문 부산 성지곡 수원지 맨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산길을 돌아 찾아간 동상 앞에는 등산객 몇몇이 무심하게 지나치고 있을 뿐이었다. 폭탄 의거가 있었던 옛 부산경찰서 자리엔 모텔과 상가가 들어서 있었다. 그 자리에 마땅히 있어야 할 표지석도 없었다. “개인 땅이어서 안 된다”거나 “일본 관광객들 보기에 안 좋다”는 반대에 부닥쳐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크리스마스 차일드’

    [그때의 사회면] ‘크리스마스 차일드’

    성탄 전야는 늘 축제 분위기였다. 기독교·천주교인들은 오히려 조용히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조용히 기도를 드리는 동안 일반인들은 밤을 새우며 광란의 밤을 보냈다. 크리스마스이브 분위기가 늘 이렇게 들뜬 것은 통금과 관련이 있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이 금지되던 시절 이날만큼은 통금이 해제됐기 때문에 사람들은 ‘올나이트’를 하며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했다. 업소들은 철야영업을 했으며 특히 ‘댄스홀’은 광란 그 자체였다. “종잇조각으로 만든 관(冠)과 색안경을 뒤집어쓴 댄서들은 거침없는 교성을 연발. 덩달아 손님들은 비틀걸음으로 고함 소리. 손님들은 끝없이 밀려오고 댄서들은 날개 돋은 듯 끌려다니고.” 전쟁이 끝난 지 불과 3년 후인 1956년 성탄전야 모습이다(동아일보 1956년 12월 26일자).1964년 성탄은 사상 최악이었다. 정부 당국이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남녀 중·고생 3000여명이 도봉산 계곡과 남산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동틀 무렵 내려온 사건이다. 청소년보호대책위원회 긴급 소집을 부른 이 사건은 “여학생들이 서비스(밥 짓기)를 하고 남학생들이 돈을 모아 산으로 올라간 후 술을 마시고 트랜지스터 음악에 트위스트를 추며 보냈던 광란의 밤”으로 신문들은 대서특필했다. 날씨마저 포근해 서울 종로와 명동으로 쏟아져 나온 인파는 무려 35만명이었다. 이들은 필름을 감아 만든 10원짜리 뿔피리를 불어 대고 가면을 쓴 쌍쌍들이 밤거리를 누벼 가면무도회를 방불케 했다. 도심 거리는 취객들로 넘쳐났고 질서 유지를 위해 기마경찰대가 동원됐다. 순시에 나선 내무장관이 종로3가에서 매춘부에게 소매를 끌리는 해프닝도 벌어졌다(경향신문 1995년 12월 21일자). 1965년 10월에는 서울 시내 산부인과에서는 신생아가 어느 달보다 많이 태어났다고 한다. 1964년 성탄 전야에 젊은 남녀의 일탈로 원하지 않은 생명이 잉태됐기 때문이었다. 이때 태어난 아이들을 ‘크리스마스 차일드’라고 불렀다는데 어떤 사람들은 ‘나라의 수치’라고 했다(경향신문 1970년 12월 23일자). 최악의 성탄을 겪은 이듬해인 1965년 성탄 전야는 좀 ‘살벌’해졌다. 명동 등에 경찰이 대병력을 풀어 질서를 유지하고 단속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사회단체들은 ‘조용한 크리스마스 보내기’ 운동을 펼쳤고 어린이들까지 “아빠 엄마 일찍 돌아오셔요”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에 나섰다. 광란이 통금 해제 때문이라며 통금을 유지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그 이후 성탄 전야 광란의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어 갔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외상값 시비

    [그때의 사회면] 외상값 시비

    몇십 년 전 동네 구멍가게, 음식점, 싸전 등 대부분의 상점엔 외상 장부가 꼭 있었다. 외상값 시비는 흔했고 폭력과 살인극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단골 술집에 외상을 긋지 않는 샐러리맨은 거의 없었다. 월급날만 되면 술집 주인들이 외상값을 받으러 몰려와 사무실이 왁자지껄해졌다.대학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학림다방과 같은 다방에도 꼭 외상 장부가 있었다. 문방구의 태반이 아이들의 외상 장부를 만들어 놓고 외상으로 팔았다가 돈을 받지 못하자 졸업식장에서 학부모들과 싸움을 벌인 일도 있었다(경향신문 1976년 3월 6일자). 서울 중심가에 있던 ‘특별재판소’ 심판관이 요정 외상 빚을 계속 갚지 않자 마담 둘이 재판소에 찾아가 외상값을 갚으라고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전체회의장이 아수라장이 됐다(경향신문 1961년 3월 15일자). 어느 제지 공장의 30m 높이 굴뚝에 공장 식당 주인이 올라가 ‘고공 시위’를 벌였다. 직원들이 외상값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였다(경향신문 1970년 9월 29일자). 베트남에서도 파견된 한국군들이 외상을 이용했는데 철수를 앞두고 부대장이 이미지를 구기지 않기 위해 ‘외상값 갚기 작전’을 벌였다고 한다(경향신문 1971년 12월 3일자). 정부가 운영하던 서울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의 전후 7년간 누적된 외상값이 14만 달러나 됐다고 한다(동아일보 1960년 9월 6일자). 1963년부터 10년간 서울역 그릴에 쌓인 외상값이 650만원이었는데, 그중 450만원이 교통부와 철도청 고위 간부의 외상이었다(경향신문 1973년 8월 24일자). 어느 지역 요식업자 10여명이 군수실로 찾아가 외상값 300여만원을 해결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군수는 자신이 재임할 때 밀린 외상값이 아니라고 거부했다고 한다(경향신문 1976년 2월 10일자). 월부 판매도 외상과 같다. 텔레비전과 같은 값비싼 전자제품은 거의 월부 판매였다. 월부는 원래 생산자들의 판매 촉진책으로 생긴 것이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1970년대부터 소비자들의 월부 구입은 폭발적으로 불어났다. 월부로 물건을 많이 사들이는 사람을 일컫는 ‘차관 인생’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다(매일경제 1969년 5월 8일자). 할부판매법도 제정되지 않아 소비자들의 피해가 컸다. 월부금을 완납하기 전까지는 물건의 소유권이 판매자에게 있어 상환이 지체되면 물건을 판매자에게 빼앗기게 돼 있었다. 손글씨로 장부에 적던 외상과 월부는 1980년대 초 신용카드가 도입되면서 합법화·제도화됐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흔적/손성진 논설고문

    살아온 궤적이 머릿속에 빙빙 돌 때가 있다. 수구초심일까, 그리움일까. 마지막으로 치닫는 한 해처럼 인생도 저물녘 황혼으로 타오르는 탓일까. 맛으로 따지면 단맛, 신맛, 쓴맛 등 갖은 맛을 번갈아 느끼며 지내온 듯하다. 그럴 때면 코흘리개 적 뛰어놀던 남쪽 도시의 그 동네가 보고파진다. 연줄에 사금파리 가루 먹이는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소년. 비석 치기, 구슬 치기를 하며 깔깔대는 아이들. 돌고 돌아 태어난 강물로 회귀하는 연어에게도 이런 사무침이 있을까. 동백꽃 검붉었던 옛동산은 박가분 짙게 바른 여자처럼 도무지 분간 못할 모습으로 변해 버린 지 오래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그대로 버티고 있었지만, 낯선 신식 교사(校舍)가 근 반백년 만에 찾은 나그네를 멀뚱멀뚱 쳐다본다. 쌕쌕이 꽁무니의 연기구름처럼 시간은 흔적을 하나둘 둘러매고 흩어진다. 이쯤일까, 저쯤일까 더듬어 보지만 상전벽해에선 별 얻을 것 없는 짓이다. 남아 있는 기억은 비 오는 저녁답처럼 어둡다. 기댈 곳이 그런 기억뿐이라는 건 돌이킬 수 없이 서글픈 일이다. 어쩌겠는가. 실파래처럼 여윈 추억조차도 언젠가 잃어버린 흔적이 되지 않도록 단단히 동여맬 뿐.
  • [그때의 사회면] 속옷 투척, 실신 난무한 팝공연/손성진 논설고문

    [그때의 사회면] 속옷 투척, 실신 난무한 팝공연/손성진 논설고문

    케이팝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요즘 과거 서양 팝스타 내한 공연 때의 광적인 풍경을 돌이켜 보면 금석지감이 든다. 49년 전인 1969년 10월 15일 영국 팝스타 클리프 리처드가 방한하자 김포공항에 200여명의 소녀팬들이 몰려 아수라장이 됐다. 김포공항으로 가는 교통편이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나쁜 시절이었다. 지금은 60대 중반의 나이가 돼 있을 소녀들은 평일 수요일이었던 그날 학교에도 가지 않고 리처드를 환영하려고 공항에 모여들었다. 소녀들은 리처드 일행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일제히 기성을 지르고 더러는 눈물을 흘렸다.리처드가 귀빈실에서 나오자 소녀들은 “나를 보아 달라”며 서투른 영어로 아우성을 지르며 달려들어 경찰이 제지하느라 진땀을 뺐다. 이를 본 공항 직원과 경찰들은 “너무나 한심해서 말이 안 나온다. 한국 여성의 미덕을 짓밟아 놓았다”고 소녀들을 나무랐다고 한다(경향신문 1969년 10월 16일자). 리처드는 두 차례 내한 공연을 했는데 공연장에서도 여대생들이 실신하거나 흥분한 나머지 속옷을 벗어 던졌다고 전해진다. 이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서울의 한 대학교수는 “서양의 것이면 무조건 흉내 내겠다는 사고방식은 지양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리처드를 필두로 한 팝스타들의 내한 공연 때 비슷한 일은 더 있었다. 1980년 6월 내한한 미국 팝가수 레이프 개릿의 공연 때도 여성들이 속옷을 던지거나 실신해서 들것에 실려 나갔다. 그런 이유로 당국은 2년 후 재추진된 개릿의 2차 내한 공연을 불허했다. 1982년 2월 내한한 영국 그룹 둘리스의 서울 잠실체육관 공연은 사상 최다 관객을 모은 공연으로 관중 반응 역시 광적이었다. 처음으로 레이저 조명을 사용해 분위기를 돋운 공연장 주변에는 100명이 넘는 암표상이 설쳤다고 한다(동아일보 1981년 2월 17일자). 열광이 지나쳐 사고로 얼룩진 공연이 뉴키즈 온더 블록의 1992년 공연이다. 그해 2월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공연 표를 구하지 못한 관객들은 유리창을 깨고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공연이 시작되자 실신한 관객들이 속출했다. 급기야 다섯 번째 곡을 부른 직후 흥분한 10대 관객들이 무대 쪽으로 달려들다 뒤엉켜 50여명이 다쳤다. 심하게 다친 여고생 1명은 사망했다. 이 공연을 유치한 서라벌레코드사는 사고 후유증으로 그해 부도를 내고 문을 닫고 말았다. 이후 외국 팝가수 공연은 거의 허가되지 않았다가 1996년 마이클 잭슨 공연으로 재개됐지만 고액 출연료 등의 문제로 늘 말썽이 따랐다.
  • [그때의 사회면] 동성애 인식 변화/손성진 논설고문

    [그때의 사회면] 동성애 인식 변화/손성진 논설고문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퀸’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동성애도 가감 없이 그렸다. 동성애 기사가 처음 나온 것은 1924년 무렵이다. 일본의 어떤 교수가 학생에게 동성애를 간청하고 키스했다가 사직했다는 내용이다(동아일보 1924년 10월 25일자). 당시에는 충격적인 뉴스였을 것이다. 1925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여죄수가 동성애의 질투로 같은 감방의 여자 죄수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 1929년에는 평양의 한 유부녀가 같은 동네 처녀와 동성애로 동반 도피한 일이 보도됐다(동아일보 1929년 4월 10일자). 신문은 “동성애는 결국에는 도덕은 물론 사회도 파괴하므로 금지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동성애를 입 밖에도 꺼내기 어려웠던 때 동성애자들의 선택은 자살 외에는 없었다. 1931년에 동성애 관계인 서울의 유명 여학교 학생 두 명이 같이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해 장안에 파문을 일으켰다(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자). 광복 후 신문에는 내국인들의 동성애 기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육군 소대장이 사병과 동성애 후 자살한 사건(동아일보 1962년 9월 20일자)이나 동성애 관계의 20대 여성 둘이 여관에 투숙했다가 동반자살한 사건(경향신문 1963년 2월 20일자) 외에 보도는 거의 없었다. 1960년대 중반 영국 등에서는 동성애를 합법화했지만 먼 나라 얘기였다. 동성애자의 고백을 실은 잡지에 경고 명령이 내려졌고, 언론은 동성애를 성도착증이나 외설 행위로 취급했다. 그러면서 외국 동성애자들의 자유연애는 해외토픽에 단골로 다루었다. 1986년 11월 20대 동성애자인 남성 2명에게서 에이즈균을 처음으로 검출했다는 의학계의 보고가 나오자(경향신문 1986년 11월 1일자) 동성애에 대한 인식은 더욱 나빠졌다. 1990년대에 들어서도 언론은 동성애 문제를 양적으로 많이 다뤘지만 대부분 외국 얘기였고 진지한 논쟁거리로 삼지 않았다. 동성애를 다룬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도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냉소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동성애가 동면에서 깨어난 것은 1995년쯤이다. 그해 4월 한 방송국이 ‘점점 당당해지는 동성애’라는 심층 보도 프로를 방영했고, 그해 5월에는 서울대생 20여명이 동성애 모임을 발족했다. 9월에는 동성애가 TV 드라마 소재가 되고 실제 게이가 배우로 출연했다. 또한 인터넷의 보급으로 PC통신을 통한 동성애 토론(동아일보 1995년 12월 29일자)도 활발해졌다. 이후 동성애자들은 어둠 속에서 빠져나와 대중 앞에 적극적으로 자신들을 알리기 시작했다.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나목(裸木)/손성진 논설고문

    물안개 자욱하게 흐린 날 저녁, 북한강가에 오도카니 선 나목 서너 그루. 어떤 바람에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무거운 이파리들을 다 떨어내고 처연한 모습으로 서 있을까. 무성하게 거느렸던 그 많던 엽군(葉群)들 언제 다 떠나고 무(無)의 경지에 이르게 됐을까. 뜨겁던 폭염도 이제 메마른 뿌리부터 가녀린 끝가지까지 견딜 수 없는 오한으로 변해 너를 떨게 하겠지.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삭풍은 마지막 남은 최후의 잎새마저 떨어뜨린다. 남김없이 벌거벗었어도 나목의 품새는 팔등신 미녀처럼 아름답고 우뚝 선 장군처럼 당당하다. 나목처럼 홀로 하늘에 내걸린 초승달. 그곳을 향해 갈래갈래 손을 뻗은 나목. 한 줄기 옅은 달빛이라도 온기를 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일까. 다만, 남은 것은 달빛밖엔 무엇도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잊지 마라. 떨어진 나뭇잎이 죽지 않고 네 뿌리를 이불처럼 덮어 한겨울을 견디게 해 줄 것임을. 기억하라. 머나먼 새봄이 오면 움틀 싹이 속곳도 없이 거친 네 몸뚱어리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그래서 꿈을 꾼 듯 혹한의 나날이 지나가고 따스한 봄날에 우리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임을. sonsj@seoul.co.kr
  • 무민은 채식주의자

    무민은 채식주의자

    “마트에서 파는 햄스터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보리가 친구 집에서 봤던 햄스터 이야기를 하며 여러 번 ‘햄스터’란 글자를 입으로 발음했을 때, 내 머릿속에는 사육장 안에 갇힌 채 쉬지 않고 새끼를 밀어내고 있는 힘 빠진 어미 햄스터가 먼저 떠올랐다.”(‘살아있다는 건 신기해’,김봄) “미래는 암고양이치고 미모가 뛰어난 편이었다. 우아하고 도도한 매력은 사람을 설레게 하는 데가 있었다. 천천히 눈을 꿈뻑이며 사려 깊은 눈으로 나를 응시할 때면, 나는 고양이가 친구처럼 느껴져 속 깊은 말도 털어놓게 되었다.”(‘미래의 일생’, 권지예)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물도 지각, 감각 능력을 지닌 생명체로서 보호받을 도덕적 권리, 즉 동물권을 지닌다는 사실을 더는 부인할 수 없다. 동물권이란 말은 철학자 피터 싱어가 처음 주창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동물권에 반하는 행위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 안타깝게도 법과 행정은 물론 동물권에 대한 시민의식 역시 아직은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고 있다. 동물과 인간의 행복한 공존을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 변화가 필요하다. ‘무민은 채식주의자’는 동물권을 테마로 한 작품으로 생명 존중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동물 보호 문화를 확산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소설집이다. 구범모, 권지예, 김봄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평소 동물에 대한 애정이 깊은 신예 작가 16명의 동물의 권리와 동물에 대한 사랑을 소재로 한 짧은 소설을 엮었다. 책 판매 수익금의 절반은 동물권 행동 ‘카라’에 기부해 유기동물 구호 및 동물 권익 수호에 쓰인다. 펴낸 곳, 걷는 사람. 1만2000원.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서울 전차여 안녕!/손성진 논설고문

    [그때의 사회면] 서울 전차여 안녕!/손성진 논설고문

    50년 전인 1968년 11월 29일 밤 서울 거리를 달리던 전차가 발을 멈추었다. 70년 동안 시민의 발 노릇을 해 왔던 전차가 운행을 중단한 것이다. 이날 밤 청량리에서 출발해 8시 20분 동대문에 도착한 마지막 전차의 차장은 승객 46명에게 “동대문 종점입니다. 안녕히들 가십시오”라고 목멘 소리로 작별 인사를 고한 후 운전사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동아일보 1968년 11월 30일자).서울시는 그해 초 운행 중단 방침을 정한 후 6월부터 전차 궤도를 철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궤도는 나중에 도로공사를 할 때 철거하기로 하고 그 위에 아스팔트를 덮어 버렸다. 1968년 당시 운행됐던 전차 176대 가운데 현재 2대가 남아 있다. 그중 한 대인 ‘전차 381호’가 등록문화재 467호로 지정되고 복원 처리돼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전시되고 있다. 미국인 콜브란 등이 청량리에 있던 명성황후릉(홍릉) 행차비를 줄여 주겠다며 고종 황제를 설득해 서대문~청량리 구간에 전차를 개통한 것은 1898년 12월 25일이었다. 1941년 완성된 서울의 전차 노선은 청량리~동대문~세종로, 세종로~서대문~마포, 을지로 6가~을지로입구~남대문, 효자동~세종로, 을지로 6가~왕십리, 남대문~남영동~신용산, 남영동~원효로, 신용산~노량진~영등포, 남대문로 5가~서대문~영천, 종로 4가~창경원~돈암동, 종로 4가~을지로 4가, 동대문~을지로 6가, 세종로~남대문 등 총연장 40여㎞의 다양한 노선으로 서울 교통의 핵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자동차가 크게 늘면서 전차는 차량 흐름에 방해가 되고 자주 충돌 사고를 일으켜 애물단지 취급을 받게 됐다. 전차 종사자 1400여명의 고용 승계는 큰 문제였다. 서울시는 700여명은 시청 산하기관 등에 재배치했지만, 대우가 나빠지고 화장장 인부, 병원 시체 감시원 등으로 발령 내 반발이 컸다(동아일보 1968년 6월 20일자). 전차 종사자들의 심정을 담은 기사가 있다. “노병은 고철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보내는 정은 시민의 감상뿐만은 아니다. 70년 고락을 같이한 반려자들은 뼈저린 아쉬움 속에서 생계마저 떠나 보낼까 안타까워 밤새 거리에서 버티며 발을 굴렀다.”(경향신문 1968년 11월 30일자) 김현옥 시장은 전차 대신 서울의 외곽에 타이어 바퀴를 쓰는 트램을 도입하겠다고 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김 시장 후임으로 1970년 6월 부임한 양택식 서울시장이 지하철건설본부를 발족해 전차를 대신할 교통수단으로 지하철로 방향을 잡았다. 1~4호선 노선이 그해 11월 정해졌다. sonsj@seoul.co.kr
  • [손성진 칼럼] 민주노총과 대통령 지지율

    [손성진 칼럼] 민주노총과 대통령 지지율

    작년 초를 전후해 촛불집회에 몇 차례 나간 적이 있다. 역사의 현장을 놓칠 수 없다는 소명의식에 찬 기자 이전에 내 자격은 국정농단에 저항하는 일반 시민이었다. 특히 좌우 어느 쪽에도 빠지지 않는, 이념 또는 이익과는 무관한 집회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순수한 시민들이 얼추 열중 셋은 더 돼 보였다. 그러나 나머지 예닐곱은 그렇지 않았다. 국정농단과는 무관한 ‘이석기 석방’이나 ‘노동개혁 반대’를 외치는 데 그치지 않고 참가자들의 동조를 선동해 ‘순수파’들은 불쾌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예닐곱의 대부분은 집회를 주도한 민주노총 소속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민주노총이 문재인 정부 탄생의 ‘일등공신’임은 부인할 수 없고 그 때문에 문 정부의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현 정부가 민주노총의 기여도를 의식한 친노조 정부라고 해도 결코 거대 귀족노조의 이익을 대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노총이라는 보호막 속에 들지 못한, 핍박받는 노조가 훨씬 많고 그들이 정책의 지향점이 돼야 마땅하다. 민주노총이 박근혜 탄핵을 그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음은 시간이 흐르면서 드러나고 있다. 정권 교체의 중심에 섬으로써 민주노총이 이미 얻어낸 것은 많다. 정부 정책은 친노조적으로 바뀌었고 전 정권의 노동개혁은 당연히 없던 것으로 됐다. 원래 노렸던 목적을 상당 부분 관철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기업이 죽든, 국가가 잘못되든 그들의 이익에만 몰두하겠다는 태도다. 나라를 걱정하는 국민의 저항력이 민주노총에 의해 배가되었음은 맞지만 그런 점에서는 이용당했음은 마찬가지다. 민주노총에 끌려가는 약한 정부를 보면서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순수 시민들의 심정은 실망 그 이상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최저임금 인상 이후 한 달에 600만원을 버는 외국인 노동자가 있다는 말을 지방의 중소기업 경영주에게 들었다. 최저임금 인상의 최대 수혜자가 외국인 노동자라는 주장은 거짓이 아니다. 외국인 노동자는 차별대우를 받아도 좋다는 사고에서 하는 말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정책의 효과가 엉뚱하게 나타난다면 수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수혜를 입은 우리 노동자도 있겠지만 과실은 목적지 아닌 곳에도 들어간다. 세계 4위라는 자영업자 비율 탓에 최저임금 인상은 약대약(弱對弱), 빈대빈(貧對貧)의 갈등도 낳았다. 대통령이 직접 일자리위원장이 돼 1년 반이나 고용 증대 노력을 했는데도 결과가 거꾸로 간다면 시스템의 문제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 소득주도성장론, 최저임금 인상이나 친노조적 노동정책의 속도조절론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또한 박근혜의 불통과 다를 바 아니다. 개혁이 일방의 이익을 위해서 진행된다면 개혁이 아니다. 일방의 손해를 의식해 개혁을 회피해서도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연한 실용주의 노선에 주목한다. 자유무역협정, 철도 민영화와 같은 노동계와 농민의 반대가 극심했던 현안도 밀어붙였다. 연금개혁에 민주노총과 시민단체가 기를 쓰고 반대했지만 관철시켰다. 노 전 대통령은 노동계 등 지지계층과 등졌지만 결과는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용뿐만 아니라 내년에는 경제가 더욱 어려워진다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산업 경쟁력은 점점 떨어진다. 반도체와 자동차, 휴대전화, 조선 업종 등에서 중국의 위협은 더 커지고 있다. 그런 악조건 속에 노사가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민주노총은 또 파업을 외친다. 영업이익률이 바닥을 치는 현대차 노조도 물론 민주노총 소속이다. 높은 인건비 말고도 파업 자체가 영업이익률을 더 떨어뜨릴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포용국가론이란 전략에 반대할 저소득층은 없다. 하지만 전술이 잘못이라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내치와 경제를 먼저 챙기고 분배의 원천이 될 성장산업을 등한시하지 말아야 불확실한 미래의 어둠을 걷을 수 있다. 민주노총은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고 했다. 이익과 이상, 이념에 빠진 폭주 기관차가 달려가는 미래는 뻔하다. 청와대가 그런 민주노총을 빼고서라도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출범시키기로 했다. 민주노총과 일정한 선을 긋고 새 희망을 찾는 출발점이 되기를 국민은 바란다. sonsj@seoul.co.kr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왼팔 잘린 채 오른팔로 든 태극기…‘남도의 유관순’ 초인적 항일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왼팔 잘린 채 오른팔로 든 태극기…‘남도의 유관순’ 초인적 항일

    일제의 무자비한 진압과 잔인한 고문에도 독립운동가들은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초인적인 저항 정신을 보여 준 독립운동가가 있다. 육신의 일부가 절단돼 선혈이 쏟아지는 중에도 떨어진 태극기를 주워 들고 만세를 더 크게 외친 윤형숙(1900~1950) 열사. 열사를 흔히 ‘남도(南道)의 유관순’이라 부른다. 전남 여천역에서 내려 윤 열사의 조카 윤치홍(78)씨를 만나 여수 이순신공원의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을 둘러보았다. 2014년 건립된 기념탑 옆에는 팔이 잘린 열사의 모습이 담긴 부조물이 있다.윤씨는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평생 나라를 위해 몸바친 인물”이라고 열사를 소개했다. 윤씨의 할아버지 윤자환(1896~1950·대통령 표창) 선생도 3·1 만세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 체포돼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윤씨는 10여년 동안 기록 발굴에 매달린 끝에 알려지지 않은 열사의 공적을 찾아냈다고 한다. 열사는 닥쳐올 운명을 암시하듯 혈녀(血女)라는 이명(異名)으로도 불렸다. 학적부와 판결문에는 ‘윤혈녀’로 적혀 있다. 윤씨는 윤혈녀와 호적상의 윤형숙이 동일인임을 어렵사리 확인했다.●윤 열사 조카, 10여년간 관련 공적 찾아 내 타오르는 들불처럼 만세운동이 번졌던 1919년 3월 광주에서도 민중과 학생들이 떨쳐 일어났다. 윤 열사는 당시 광주 수피아여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이 학교에는 민족의식이 남달랐던 박애순(1896~1969·건국훈장 애족장) 교사가 재직하고 있었다. 박 선생은 고종 황제의 승하 소식과 일제에 빼앗긴 나라 안팎의 사정을 학생들에게 들려주며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광주 만세운동은 3·1운동 전부터 움트고 있었다. 일본 도쿄 유학생 정광호가 귀국해 2·8 독립선언을 청년들에게 알렸다. 서울 유학생인 최정두와 고종 황제의 국장에 참례하고 서울 시위에 참가한 김철도 귀향해 남궁혁의 집에 모여 거사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독립선언서, 태극기, 격문 등을 밤새 만들어 장날인 8일 서울과 똑같은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준비 시간이 너무 짧아 다시 작은 장날인 3월 10일로 거사일을 바꾸고 학생들과 읍민들에게 참가를 독려했다. 이에 박 선생도 김복현, 김강으로부터 독립선언문 50여통을 받고 학생들에게 취지를 설명했다. “당연히 참가해야 합니다.” 학생들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 학생들은 수피아홀에 숨어 밤새 치마를 뜯어 태극기를 만들었다. 드디어 10일 오후 3시 30분. 광주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에 수피아여학교·숭일학교·농업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기독교인, 주민 등 1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여들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받아들고 외치기 시작했다. “대한독립만세!”, “왜놈들은 물러가라.” 윤형숙은 시위 행렬의 맨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시위대는 시장 안을 돌아 서문통을 거쳐 우편국 앞으로 행진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 헌병과 경찰은 군중의 기세에 눌려 감히 시위를 방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위대가 본정통을 돌아 경찰서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헌병들은 실탄 사격을 하고 검을 휘두르며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일본 헌병이 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흔들던 윤 열사의 왼팔 상단부를 군도(軍刀)로 내리쳤다. 잘려나간 팔이 붉은 피를 뿌리며 땅에 떨어졌다. 남은 팔에서도 피가 쏟아졌고 윤 열사는 정신을 잃었다. 조금 전까지 열사의 몸 일부였던 팔이 땅에 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다섯 손가락은 태극기를 꼭 붙잡고 있었다. 유혈이 낭자한 몸으로 열사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오른팔로 땅에 떨어진 태극기를 주워 들고 높이 흔들었다. 그러면서 더 큰 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군중은 비분강개하여 더욱 격렬하게 항거했다. 군중은 광주경찰서 앞으로 몰려들었다. 일제는 총검을 휘둘렀고 경찰서 앞마당은 피로 벌겋게 물들었다. 그 자리에서 100여명이 구금되었다. 한쪽 팔을 잘리고도 만세를 외친 윤 열사의 행동에 일본 군경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육군성에 다음날 보고됐다. 열사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한 채 심문을 당했다. 일경은 굽히지 않는 열사를 가혹하게 고문해 오른쪽 눈을 멀게 했다. 팔이 잘린 열사는 재판정에도 나가지 못했고 결석재판으로 4개월 형에다 4년 연금형을 더한 판결을 받았다.●팔 잘려 재판 못 나가… 결석재판 징역 4개월 이후 열사는 함남 원산 마르다신학교에 입학했지만 고문 후유증이 심해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열사는 요양차 전북 전주로 내려가 전주기전야학교 사감으로 일하고 고창군의 한 유치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1939년 고향 여수로 내려갔다. 왼쪽 눈의 시력마저 거의 잃었지만 열사는 봉산학원 교사로 교편을 잡는 한편 야학을 열어 글을 모르는 마을 청년들을 가르치는 데도 열정을 쏟았다. ‘외팔이 선생’으로 불리며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던 열사에게 더 큰 비극이 닥쳤다. 열사는 평소 반공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1950년 6·25가 터지고 북한군이 여수까지 점령했다. 지인의 집으로 피신했던 열사는 뒤를 캔 내무서원에게 붙잡혔다. 서울이 수복된 9월 28일 북으로 퇴각하기 직전 북한군은 여수 둔덕동 과수원에서 열사를 총살했다. 파란만장한 20세기의 전반을 헤쳐 온 열사의 나이 50세였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한 ‘사랑의 원자탄’ 주인공 손양원 목사도 함께 총살당했다. ●잘린 팔 무등산에 묻혔다 전하지만 못찾아 열사는 1900년 9월 13일 전남 여수 화양면 창무리에서 태어났다. 윤치홍씨와 택시를 함께 타고 30여분쯤 가니 확장 공사 중인 도로 옆 비탈에 열사의 묘소가 있었다. 바로 옆에 작은 공장이 있고 잡초가 드문드문 자란 쓸쓸한 모습이었다. 도로 너머로 추수를 마친 창무리의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창무리는 조선시대에 말을 방목해 기르던 목장이었다고 한다. 묘비에는 ‘고 순교자윤형숙전도사지묘’(故殉敎者尹亨淑傳道師之墓)라고만 씌어 있다. 윤씨는 이 비석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었다. 열사가 총살당했다는 비보를 전해들은 고향 친지들은 20리 길을 걸어 학살 현장을 찾아갔다. 어둠 속에서 한쪽 팔이 없는 시신을 수습해 그날 밤 고향 뒷산에 가매장했다. 이듬해 4월 교회 사람들이 묘비를 만들어 고향 마을로 가져왔으나 마을 사람들은 받아주지 않았다. 항일 운동에 몸바친 열사에게 단순히 ‘순교한 전도사’라고 이름 붙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석은 방치돼 소고삐를 매는 데 사용됐다고 한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뒤 가까운 친지들과 마을 유지들이 모여 묘를 이장하고 조촐한 묘비 제막식을 열어 열사의 영혼을 달래 주었다. 열사의 팔은 누군가 광주 무등산 자락에 따로 묻어 주었다고 한다. 자신이 죽으면 팔을 함께 묻어 달라고 했다는데 팔무덤을 찾을 길이 없었다. 추모비엔 이렇게 썼다. “당신의 충령(忠靈)을 천추(千秋)에 길이 전하게 될 것이며 당신의 거룩하신 충절을 값없이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정부, 2004년에야 건국포장 추서 열사에게도 한때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한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끝내 거절했다고 한다. 젊음은 일제에, 생의 마지막은 북한군에게 희생된 열사의 일생은 민족 비극의 축소판이었다. 2004년 정부는 열사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새로 만든 묘비석에는 이런 글귀가 씌어 있다. “왜적에게 빼앗긴 나라 되찾기 위하여 왼팔과 오른쪽 눈도 잃었노라. 일본은 망하고 해방되었으나 남북·좌우익으로 갈려 인민군의 총에 간다마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학생 동원/손성진 논설고문

    [그때의 사회면] 학생 동원/손성진 논설고문

    남북 축구경기에 학생들을 동원했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1960~1980년대에는 학생들을 각종 행사에 동원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학생 동원은 일제의 잔재다. 일제는 신사참배는 물론이고 축제나 시가행진, ‘근로보국대’ 등에 학생들을 강제로 참가시켰다. 광복 직후에도 학생 동원은 일제강점기보다 덜하지 않았다. 1958년 3월 26일은 이승만 대통령의 83세 생일이었는데 초등학생들을 동원해 매스게임을 펼치는 등 탄신 축하 행사를 거창하게 열었다. 매스게임 문구는 ‘만수무강’이었다(경향신문 1958년 3월 27일자).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나 우리 대통령이 외국을 드나들 때 김포가도에는 동원된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억지 환영·환송 장면을 연출했다.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60년 6월 두 번째로 방한했는데 겉으로는 학생들의 환영은 자발적인 의사에 맡기겠다고 했다. 그러나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아이크’가 김포에서 내려 한강대교를 건너 도심으로 들어올 때 삼각지에서 덕수궁까지 서울의 남녀 중고생 전원을 배치해 성조기를 흔들게 했다(경향신문 1960년 6월 18일자). 여중고생들은 더위 속에 환영춤까지 연습해 추었다. 물론 자발적인 참여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3공화국 정부는 학생들을 행사에 동원해 수업에 지장을 주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수시로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 실세였던 김종필씨 강연에도 학생들을 동원하는 등 금지령은 말뿐이었다. 학생 동원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가장 심했다. 수해 복구에도 학생들은 불려 나갔고 가뭄 극복에도 동원됐다. 조림공사, 모내기, 보리밟기운동, 교통량 조사, 송충이 잡기, 새마을 사업, 피마자 재배, 추수, 각종 캠페인 등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군소리 없는 학생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1년 취임 일성으로 취임식 행사부터 학생들을 동원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지켜질 리 없었고 제스처일 뿐이었다. 그해 7월 김포공항에서 광화문까지 학생 밴드를 포함해 100만명의 환영 인파가 동원됐다. 모내기, 벼베기 등 농촌 일손 돕기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것도 변함이 없었다. 도시에서도 가두 캠페인 등의 행사에 학생은 약방의 감초였다. 학생 동원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때 최고조에 달했다. 논란이 일자 정부는 카드섹션에 학생들을 동원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초등학생을 중심으로 6500여명이 수업을 희생하며 연습을 한 끝에 개막식장에 동원됐다(동아일보 1986년 6월 20일자).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현직 교회 사무장이 노래한 삶의 절망과 부활”

    “현직 교회 사무장이 노래한 삶의 절망과 부활”

    시집 <시가전>, <당신의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에 이어 시인 김용원의 신작시집 <더 이상 눈물은 안되겠다>가 출간되었다. 김 시인은 조병화 시인의 추천으로 열린시 20호에 <웅촌화장장>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14권의 다양한 장르의 책을 쓴 작가다. 인간 노무현의 애환을 다룬 소설 <대통령의 소풍>은 교보문고가 집계한 2017년 상반기 e북 판매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신작 시집은 4부로 되어 있는데 90여 편의 시가 실렸다. 김 시인은 문학과 법, 신앙의 영역을 넘나든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대학 강사를 역임한 법학박사이며 교회 사무장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서정적이면서도 인간 삶의 질곡과 희망을 동시에 노래하고 있다. 시인 허연은 그의 시를 평가하며 “그의 시는 일상 속에 삶과 죽음, 안식과 투쟁이 함께 있음을 증명해 보여준다”고 했다. “어머니를 떠나보내면서 나는 알았다/ 나의 못나고도 시시한 일상이/ 어머니가 그토록 살고 싶어 한 천국이었음을/ 김장을 하거나 빨래를 하는 일이/ 밥을 지어 식솔들을 불러 모으는 일이/ 아아, 없는 살림을 쪼개며 가슴 졸이는 일이/ 얼마나 설레고 눈부신 일인지를 알았다”(‘감사’ 중에서) 시인 오창렬은 김 시인의 시적 경향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설명한다. “김 시인의 시는 무산자에게는 지옥과 다름없는 자본주의 세계와 그 속에서 필연적으로 소외되고 망각될 수밖에 없었던 인간성의 말살 시대를 고통스럽게 살아온 상처의 기록이다. ” “못난 자식 놈 사업 밑천 대느라고/ 살던 집 팔고 동네사람들 보기 창피해/ 광천시장 단칸방으로 숨어드신 어.머.니./ 돈다발을 싸들고 잔뜩 헛바람이 들어/ 집을 나간 자식은 돌아오지 않.았.다.”(‘어머니의 겨울’ 중에서) 이 시집은 잠언성 구절들을 필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왼쪽 면은 시를 싣고 반대 면은 잠언성 시구를 쓸 수 있도록 원고지가 그려져 있다. 심금을 울리는 시편 구절들을 쓰다 보면 긍정적인 삶에 대한 결단을 경험하게 된다. 도서출판 세움과 비움. 146쪽. 1만1700원.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아! 박정만/손성진 논설고문

    박용래는 술을 마시면 아무나 붙잡고 울었다. 두만강 철교를 건너며 흩날리는 눈발을 보면서도 울었다. 시인을 울린 것은 가난과 고독이 아니라 생명과 자연에 대한 벅찬 감정이었다. 술은 눈물을 끌어올리는 펌프였다. 펑펑 솟았던 그의 눈물은 시가 되었다. 박정만. 박용래만큼 술과 낭만을 사랑했던 그였지만 ‘필화사건’에 죄없이 연루됐다가 흉측한 고문에 육신(肉神)이 처참하게 망가졌다. 야만의 시대에 살면서 하소연할 데도 없었던 시인을 달래준 것은 술과 눈물뿐이었다. 88올림픽이 끝나던 날, 하늘에선 불꽃놀이가 벌어질 때 그는 단칸방에서 사십을 갓 넘긴 나이로 홀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전 20일 동안 소주 100병을 마시며 시 300편을 썼다. 774쪽이나 되는 ‘박정만 시 전집’을 탐닉하듯 읽었다. 마지막 거친 숨결이 생생하다. “최후의 발악처럼/ 마구잡이 심술로 바람이 불어/ 내 한목숨을 꽃잎처럼 떨어뜨렸어”(‘썩어빠진 잠 속으로’ 중에서), “세상의 물그림자가 수틀처럼 걸려 있어/ 미리내는 한 별을 이 땅에 주고/ 별은 다시 또 하늘로 솟구쳐 날아오르지”(‘저 높푸른 하늘’ 중에서). 시인이 떠난 지 30년. 그를 잊어 가는 세상이 어쩐지 야속하다.
  • [그때의 사회면] 병역거부, 병역기피/손성진 논설고문

    [그때의 사회면] 병역거부, 병역기피/손성진 논설고문

    병영 생활이 지금보다 더 힘들었을 때 병역에 대한 거부감은 훨씬 컸다. 전쟁 중과 직후에 병역 기피자가 특히 많았다. 1958년에 기피자가 7만여명 있었다는 통계가 있다. 1970년에는 기피 공직자 2220여명이 해직됐다. 일반인들이 병역을 면탈하려고 신체를 스스로 해치는 일도 흔했다. 손가락을 작두로 자른 사람도 있었고, 한 장정은 항문에 양잿물을 발라 치질이 걸린 것처럼 가장했다가 구속됐다(경향신문 1955년 3월 17일자). 심지어 자신을 사망했다고 신고한 사람도 있었다. 기피자 검문을 피하려고 헌병이나 장교 복장으로 활보하다 잡히기도 했다.뇌물을 동원한 병역비리는 말할 것도 없이 많았다. 전쟁 중인 1953년 1월에는 경기도의 어느 현직 판사와 의사가 짜고 한 면(面)의 징집 대상자 12명의 호적 연령을 늘려 주었다가 검찰에 붙잡혔다. 특히 유학생 등 외국 체류자가 문제였다. 정부는 친권자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초강경책으로 대응했다. 친권자 중 공직자는 해고하고 사기업체 종사자에게는 융자를 금지했다. 대통령의 특명에도 병역비리가 줄지 않자 대검이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다. 여야 중진급을 포함한 국회의원, 은행장, 재계·학계·종교계의 특권층 거물들이 수사를 받았다. 이들은 일단 자녀를 귀국시킨 후 허위 진단서 등 갖은 수단으로 다시 해외로 내보낸 사실이 밝혀졌다(동아일보 1972년 7월 15일자). 종교적 이유에 의한 집총 거부가 처음으로 표면화된 것은 1955년 무렵이었다. 병역을 거부한 통일교도 4명에게 징역과 벌금형이 선고됐다(경향신문 1955년 10월 5일자). 여호와의 증인 문제는 1957년 불거졌다. 정부는 위생병으로 복무시키는 방안을 고려했지만, 국민 감정이 수용할 리 없었다. 이듬해 군법회의가 병역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 신도 7명에게 징역 6개월을 선고했다. 이들은 무기를 사용한 독립운동마저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동아일보 1958년 12월 5일자). 서울지법의 한 판사는 군대를 살인단체로 규정한 신도에게 “망상에 사로잡힌 광신자”라고 엄하게 꾸짖었다. 병역을 기피한 신도가 자수했는데 그는 “부산 앞바다 간첩선 사건 등 북괴의 만행을 보고 총을 들지 않는 것만이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 아님을 알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호와의 증인 영동 지역 신도들은 병역 이행 결의대회를 연 적도 있다. 이들은 “청년 신도들이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병역 의무를 자진 이행토록 촉구하겠다”고 결의했다(경향신문 1974년 12월 16일자).
  • [그때의 사회면] 음주운전과 대리운전

    [그때의 사회면] 음주운전과 대리운전

    음주운전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사회적인 문제였다. 1928년 4월까지 서울에서 교통사고가 58건이 있었는데 그중에 음주 사고도 있었던 모양이다. 경찰이 과속 등과 함께 ‘용서 없이 처벌하겠다’고 한 항목 중에 음주운전이 들어 있다(동아일보 1928년 4월 29일자).자동차 수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던 1960년대에도 음주 사고는 빈발했다. 1962년 10월 말까지 전국에서 4264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했는데 149건이 음주 때문이었다. 음주 측정 기구도 없던 때여서 단속은 거의 하지 않았고 운전자들의 각성을 촉구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음주 적정량이라며 운전자가 술을 마셔도 되는 기준을 제시했는데 지금 보면 터무니없다. ‘술에 강한 자’의 기준은 ‘소주 2홉(360㎖), 탁주 6홉(1080㎖)’이라고 했으니 술이 센 사람은 소주 한 병(당시 소주의 도수는 30~40도), 막걸리 한 병 반까지는 마시고 운전해도 괜찮다는 뜻이었을까. 음주운전이 늘어나자 1967년 경찰은 음주 사고에 살인·상해죄를 적용하겠다고 나섰다. 음주운전을 본격적으로 단속하고자 음주측정기를 처음 도입한 것은 1968년이다. 그해 미국에서 ‘주정검정기’ 20대를 들여와 경인가도에서 단속에 사용했다(경향신문 1968년 5월 7일자). 그래도 음주운전이 줄어들지 않자 1979년 대법원은 음주운전자의 동승자도 공동정범으로 처벌하는 판례를 확립했고 1981년 경찰은 단순 음주운전자를 처음으로 구속했다. 당시 숙취 정도가 0.5% 이상이면 형사입건 대상이었는데 구속된 사람은 무려 13%였다. ‘통금’ 해제와 더불어 ‘마이카’ 시대에 들어서면서 음주운전자는 급속도로 늘어났고 그때마다 당국의 단속과 처벌은 더욱 강화됐다. 특히 연말 망년회 시즌에는 음주 운전이 기승을 부렸는데 이에 대응해 경찰은 단속 강도를 높이는 한편 음주운전자의 명단을 공개했다(경향신문 1984년 12월 13일자). 술 취한 오너 드라이버들을 위한 대리운전 업체가 등장한 것은 1982년 1월이다. 당시에는 ‘이색업종’이었다. ‘서울운전대행상사’가 경력 7년 이상의 운전자 10명을 고용해 대리운전업체 1호로 등록하고 영업을 시작했다. 요금은 지금과 비슷할 정도로 비쌌다. 포니류의 소형차 1만 5000원, 레코드 등 중형차는 2만원, 그라나다 등 대형차는 3만원이었으니 지금 가치로는 최고 수십만원을 주고 운전을 맡긴 셈이다. 다만 초창기의 대리운전 기사는 미리 술집 근처에서 고객이 술을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던 것은 지금과 다르다. 단속 강화, 차량 증가와 함께 대리운전은 기업형으로 바뀌어 갔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택시 횡포와 ‘나라시 택시’/손성진 논설고문

    [그때의 사회면] 택시 횡포와 ‘나라시 택시’/손성진 논설고문

    택시요금이 조만간 또 오를 모양이다. 미터기가 도입되기 전 교통이 복잡하지 않을 때 서울의 택시요금은 구간제였다. ‘옛 화신백화점(종각)에서 용산까지는 480환, 영등포까지는 960환’ 식이었다. 택시에는 구간요금표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택시 기사들은 요금표를 아예 붙이지도 않거나 붙여도 지키지 않고 요금을 두 배 이상 요구해 툭하면 시비가 일었다(경향신문 1960년 11월 8일자). 특히 외국인과 서울 물정에 어두운 시골 사람을 타깃으로 삼아 과다한 요금을 내라고 해 말썽이 됐다. 경찰은 사기죄로 단속했지만, 요금 시비는 끊이지 않았다.미터제는 1962년 4월부터 일부 시행됐다. 기본요금제도 함께 도입됐다. 미터기를 처음 본 여성은 “미터기가 찰카닥하고 5원 올라갈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는다”고도 했고, 어떤 신사는 “찰칵찰칵하는 미터기 소리에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다”고 불평했다고 한다(경향신문 1963년 9월 10일자). 택시 횡포에 대응하기 위해 경찰이 택시 안에 운전사의 인적 사항을 적은 표찰을 처음 달도록 한 것은 1965년 무렵이다. 부산에서는 해수욕장 바가지요금을 단속하고자 해변에 택시 행패 고발판을 붙였다(매일경제 1967년 7월 31일자). 일제 ‘코로나’ 택시가 도입되면서 1966년 1월 택시요금이 기본요금 60원, 500m당 10원으로 두 배나 올랐다. 당시 지프를 개조해 만든 시발택시가 1960년대 중반에도 100대 넘게 있었다. 시발택시 기사 120여명이 택시요금 인상으로 구식 시발택시는 승객들이 외면한다며 도리어 요금을 내리라고 당국에 요구한 적도 있다(동아일보 1966년 3월 3일자). 그 무렵 자가용 차량의 불법 영업행위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시간에 쫓겨 택시요금의 3~5배를 불러도 기꺼이 지불하고 타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울 무교동, 신세계백화점 앞, 명동에 자가용 택시들이 줄지어 있었다. 한 달 전세, 하루 전세, 1시간 전세로 빌려주는 자가용도 있었다. 통금에 제약을 받지 않는 호텔 택시는 택시요금의 10~15배를 불렀다. 1990년대에 들끓었고 지금도 가끔 보이는 ‘나라시 택시’의 원조들이다(경향신문 1966년 3월 30일자). 현재 택시 기사들이 ‘카카오 카풀’을 빗대어 비난하는 그 나라시 택시다. 합승택시는 1950년대에 택시가 부족할 때 허가해 준 적이 있다. 9인승으로 미군 트럭 엔진을 뜯어 개조한 차량이었다. 일반 택시 합승은 출퇴근 시간에 한해 허용하기도 했다. 택시 합승은 불법과 허용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 1982년부터 완전히 금지됐다.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무교동의 밤/손성진 논설고문

    네온사인이 찬란했던 무교동의 밤은 사나이들의 우정과 의리가 넘쳐 났었다. 땅거미가 내리면서 모여든 주당(酒黨)들의 소곤소곤한 정담이 흘러나오던 골목골목…. 40여 년 전 이야기다. 재개발 바람은 대폿잔을 놓고 인생을 논했던 허름한 술집들과 함께 그 시절의 애틋했던 낭만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도록 멀리 날려 보내 버렸다. 제집처럼 드나들던 다방, 포장마차, 낙지골목과 그 속에서 옹기종기 기대며 살던 군밤장수, 구두수선공, 연통수리공…. 잘 있으란 말도 없이 그들은 떠나고 번듯하지만, 도무지 정이 들지 않는 고층빌딩들이 그 자리를 점령했다. 기억마저 희미해져 궁금했던 그때의 무교동 밤거리를 촬영한 진귀한 동영상을 접한 것은 행운이었다. 도란도란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시계를 잡히고 술을 먹을 만큼 가난했던 때였지만 표정에선 살가움이 넘친다. 대화가 끊겨 가는 사람과 사람, 정은 타 놓은 지 오래된 찻잔처럼 식어 가고, 서푼어치 낭만조차 찾을 길 없이 삭막한 지금. 과연 현재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통속’할 뿐인데 주변과 단절된 채 이익만을 따지며 웃음마저 잃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염색과 파마 강력 규제함”/손성진 논설고문

    [그때의 사회면] “염색과 파마 강력 규제함”/손성진 논설고문

    학생의 머리 염색과 파마 허용을 놓고 논란이 뜨겁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상상도 못했을 문제다. “외출시에도 항상 학교 배지를 달고 제복과 모자를 착용할 것이며 다방과 당구장, 기타 유흥장에 출입을 금한다.”(동아일보 1961년 6월 1일자) 이 기사의 대상은 중고생이 아니라 성인인 대학생이다. 5·16 직후에 대학생을 포함해 학생의 규율을 바로잡겠다는 군사정부의 의도였다. 교복이 없는 여대생에게는 간소한 옷차림을 예시해 그대로 입으라고 했다. 중고생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스님처럼 머리를 빡빡 깎고 군복 같은 교복과 모자를 착용해야 했다. 4·19혁명이 일어나 각계의 요구가 분출했던 1960년에는 두발 규제에 불만을 품은 중고생들이 동맹휴학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듬해 군사정부는 초·중·고생의 교복, 두발, 모자, 운동화, 이름표와 심지어 양말색까지 기준을 세세하게 정해 지키도록 했다. 1980년대 초 교복과 두발 자율화가 시행될 때까지 이 규정은 20년 동안 지켜졌다. 가령, 여자 중고생의 경우 양말은 학교 단위로 통일하고 검은색 운동화를 신어야 하며 한글로 쓴 이름표를 달도록 했다. 파마를 금지한 것은 물론이고 머리에 머플러를 쓰지 못하고 겨울 외투는 검수한 국산품을 쓰라고 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고 할 수도 없었다. 중고생 교복과 두발 자율화는 1979년 12·12 직후 정국 혼란기에 최초의 여성 교육수장이 된 김옥길 당시 문교부장관의 지시에서 시작됐다. 환영하는 의견도 많았으나 학부모 부담을 늘리고 탈선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1981년에 서울의 고교 15% 정도가 변형된 교복을 채택했다(경향신문 1981년 2월 25일자). S고교는 교복을 검은색 신사복으로 바꾸었다. 머리는 스포츠형을 허용했다. D고는 상의를 군대 예복처럼 바꾸고 모자를 없앴다. 그러나 교복과 두발을 바꾸었다가 반발에 부딪혀 원래대로 돌아간 학교도 있었다. 전면적인 교복 자율화는 1982년 새해 벽두의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그다음 해부터 시행하게 됐다. 자유로운 조발도 허용하나 염색이나 파마는 강력히 규제한다는 단서가 달렸다. 막상 시행하고 보니 학생들의 행동이 거칠어졌다. 두발 검사에 반발한 고교생들이 수업 중에 학교를 이탈하는 일도 벌어졌다. 청소년 강력사건이 나왔다 하면 자율화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경찰은 탈선을 막는다며 유해업소에 경찰관을 배치하기도 했다. 이후 자율화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말이 정치권이나 교육계에서 툭 하면 나왔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서간도 독립운동 선구자…반일 군사항전 이끌었던 거목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서간도 독립운동 선구자…반일 군사항전 이끌었던 거목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만주벌 호랑이’ 일송(一松) 김동삼. 평생을 만주 벌판과 밀림을 누비며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선생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독립운동 연구가들은 김구, 안창호보다 김동삼 선생을 더 높이, 최고로 받든다. 선생의 호(號) 때문인지 ‘일송정(一松亭)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로 시작되는 가곡 ‘선구자’의 실제 모델이 선생이라는 설도 있다. 서간도 독립군기지 개척의 선구자이며 만주의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선생은 1878년 6월 23일 경북 안동 임하면 천전리(川前里) 278에서 태어났다. 행정 지명처럼 선생이 나고 자란 마을 이름은 ‘내앞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낙동강 지류인 반변천이 굽이쳐 흐른다.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강 두물머리처럼 안동에서 물길이 갈라지는데 북동쪽으로 안동호와 이어지는 강이 낙동강 본류이고 동쪽으로 임하호로 연결되는 하천이 반변천이다.경북독립기념관이 있는 마을 어귀에서 차를 내려 200여m 들어가니 선생의 생가가 있다. 원형을 잃었고 평생을 헌신한 독립운동가의 생가로서는 관리 상태가 좋지 않았다. 300m쯤 더 들어가 선생의 족숙(族叔)이며 석주 이상룡의 처남인 독립운동가 백하 김대락의 고택인 ‘백하구려’(白下舊廬)를 찾았다. 김대락의 후손인 김시중(81)씨가 기거하며 집을 돌보고 있었다. 김씨는 “김대락을 필두로 임신부와 아이들까지 의성 김씨 일족 150여명이 한꺼번에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러 떠났다”면서 “‘3000석 부자’였던 백하 선생이 멀리는 강원도까지 흩어져 있던 많은 토지를 50일 동안 처분했는데 헐값에 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동삼은 일제의 침략과 만행이 본격화된 1907년 유인식, 이상룡과 3년제 중등학교 ‘협동학교’를 세웠다. 퇴계 이황의 학통이 면면히 내려오는 유학의 본고장에서 영어와 수학 등 신학문을 가르친 협동학교는 완고한 유림의 극렬한 반발을 샀다. 초대 교장 유인식은 부자 절연, 사제 절연을 당했다. 김대락 또한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마음을 바꾸어 백하구려를 교사(校舍)로 내주었다. 보수 유림은 의병을 가장해 학교로 사용되던 백하구려를 덮쳐 교사 2명 등 3명의 목을 치는 사건을 저질렀다. 경술국치 넉 달 후인 1910년 12월 말 김대락은 65세의 나이에 일가를 이끌고 망명길에 올랐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걸어서 건너고 만주에서는 수레를 타고 이동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협동학교 1회 졸업생이 배출될 무렵인 1911년 초 김동삼도 애국청년 20여명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다. 김동삼은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 이회영, 이상룡, 이동녕 등과 서간도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그해 4월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라는 자치단체를 결성했다.김동삼은 한겨울에도 싸이혜라는 만주족의 여름 신발을 신고 어깨에 담요 한 장을 둘러멘 채 만주 전병으로 끼니를 이으며 광야의 모랫길을 매일 100여리나 걸어 동포들을 독려했다. 만주 생활은 초기부터 고난의 길이었다. 혹독한 추위, 참혹한 흉년, 목숨을 앗아 가는 풍토병, 중국 마적의 약탈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행이 이어졌다. 김동삼은 농지를 개척해 이주민들의 정착을 돕는 한편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서간도 독립운동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다. 1914년 무렵 선생은 극심한 재정난 등 시련을 견뎌가며 신흥강습소 졸업생들과 함께 백두산 서쪽 고원에 백서농장이라는, 사실상의 독립군 병영을 만들어 장주(庄主)로서 조직을 이끌었다. 중국에서도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서명자 39명에 선생도 들어 있다. 그 무렵 남만주에는 이미 수십만명의 동포가 이주해 있었다. 경학사는 부민단, 한족회로 확대 개편됐다. 한족회는 독립군을 지휘할 군사조직으로 서로군정서를 설치했다. 독판(督辦)에는 이상룡을 추대하고 김동삼은 참모장을 맡아 반일 군사항전에 뛰어들었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과 백서농장, 서로군정서 출신은 봉오리·청산리전투를 이끈 주역이 됐다. 서로군정서 독립군들은 국내로 잠입해 주요 기관을 습격하고 일제의 경찰과 밀정을 처단했다. 독립군과 맞붙어 대패한 보복으로 일제는 1920년 10월부터 적어도 3700여명의 무고한 한국인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이때 삼원포 삼광학교 교장이었던 선생의 동생 김동만도 붙잡혀 말꼬리에 묶여 끌려다닌 끝에 살해당했다. 가족을 멀리하던 선생도 사흘 밤낮을 걸어 삼원포로 가서 애통해 마지않았다. 김동만의 부인은 충격을 받고 정신병을 앓았다. 임시정부 통합을 모색하기 위해 1922년 1월 3일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됐다. 김동삼은 의장에 선출됐다. 안창호, 윤해가 부의장이었다. 통합을 외친 김동삼의 노력에도 충돌은 수습되지 않았고 그는 의장직을 사임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김동삼의 통합 노력은 만주에서 빛을 발했다. 통합단체인 대한통군부에 이어 대한통의부를 출범시켜 김동삼은 최고지도자인 총장에 추대됐다. 통의부는 정의부로 재탄생, 김동삼은 참모장으로서 무장투쟁을 지휘했다. 초산, 벽동, 철산 등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의 일제 경찰서와 주재소를 습격해 일경을 사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1925년 7월 내각책임제로 바뀐 임정의 초대 국무령 이상룡은 김동삼을 국무위원으로 발령했다. 그러나 선생은 끝내 사양하고 만주를 떠나지 않았다. 김동삼은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3부의 통합을 주도하면서 민족유일당 조직에도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1931년 어느 날 김동삼은 하얼빈의 옛 동지인 의사(醫師) 정진영 집에 들렀다가 일경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항일운동의 거목에게 일제는 악랄한 고문을 서슴지 않았다. 전기고문을 하고 양팔을 등 뒤로 결박해 공중에 매단 뒤 코에 물을 부었다. 단식을 하자 영양주사를 놓으며 고문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동지들의 이름을 팔지 않았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민족의 아픔으로 받아들였다. 가족을 동원한 회유에도 “이제 더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고 단호히 말했다. 면회 온 맏아들 정묵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이런 일정한 자리에서 죽게 되는 것도 과분한 일이다. 독립군이라면 대개 풀밭이나 산 가운데서 죽는 것이다.” 선생은 1937년 4월 13일 59세의 나이로 싸늘한 감방에서 쓸쓸히 영면했다. 만주 독립운동 최고 지도자의 비통한 최후였다. 만해 한용운이 시신을 서울 정릉 심우장으로 옮겨 장례를 치렀다.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해 한강에 뿌려졌다. 한용운은 단 한 번 눈물을 흘렸는데 선생의 장례 때였다. 후손들도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장남 정묵의 큰딸은 북한에서 폭격으로 사망했고 큰아들, 즉 김동삼의 장손자는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다 실종됐다. 셋째 아들은 정신 이상으로 사망했다. 정묵의 부인인 선생의 큰 며느리 이해동(1905~2003) 여사가 둘째 아들 김중생(2016년 사망)씨와 1989년 1월 근 80년 만에 조국 땅을 다시 밟았다. ‘만주생활 77년’이란 여사의 수기에 형극의 삶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여사는 “시아버지를 세 번 뵈었는데 결혼 2년 후, 첫 손자를 낳았을 때, 일제에 붙잡혀 감금돼 있을 때였다”고 썼다. 정부는 19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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