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손성진
    2025-08-1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741
  • [길섶에서] 언제나 그대로인 것들/손성진 논설고문

    기차는 늘 정해진 시간에 출발한다. 은행은 오전 9시면 문을 어김없이 연다. 인간이 만든 것이나 하는 일 중에도 언제나 그대로인 것들이 있다. 언제 봐도 변함 없는 것들에서 문득 살아 있는 나를 느낄 때가 있다. 자연과 절대자는 말 그대로 만고불변이다. 인간이 만들 수도 없고 범접할 수도 없는 늘 그대로인 존재. 폭풍우가 몰아쳐도 산은 꿈쩍하지 않는다. 겨울을 견딘 나무는 여느 해처럼 무성한 이파리를 키워낸다. 태양은 변함 없이 동녘에서 떠오른다. 우리 인간만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 분간을 못 하고 갈팡질팡한다. 어제 생각 다르고 오늘 생각 다르다. 눈앞의 이익을 좇으며 인간은 혼돈에 빠진 세상을 더 혼돈스럽게 한다. 갈피를 잡지 못하며 방황하는 인간은 ‘언제나 그대로인 것’들에 기대고자 한다. 산에 오르고 바다를 찾아 위안을 얻고자 한다. 그런 인간을 자연은 넉넉한 품으로 품어준다. 하나님, 부처님 앞에서 변절하는 자신을 뉘우치고 의지한다. 절대자는 말없이 손을 내밀어 거둬준다. 또 하나의 절대자, 어머니. 방랑하는 자식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그런 존재들에게 늘 그대로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서울 교외선, ‘광란’의 추억

    [그때의 사회면] 서울 교외선, ‘광란’의 추억

    이맘때면 통기타를 든 청춘들로 들썩대던 서울 교외선이 폐선된 지도 15년이 흘렀다. 개발도 되지 않고 관심도 받지 못해 교외선은 철길이 풀에 묻힐 만큼 거의 폐허가 됐다. 원래는 서울역에서 능곡, 의정부, 청량리, 용산, 서울역으로 이어지는 83㎞의 순환철도였다가 나중에 축소됐다. 서울역에서 신촌역을 거쳐 의정부까지 가는 구간에는 일영과 송추, 장흥 등의 유원지가 있어 행락철이면 북새통을 이루던 철도였다. 특히 신촌에서 백마 등지로 가는 남녀의 데이트 열차로도 유명했다. 1963년 8월 20일에 개통식을 연 교외선에는 ‘전원열차’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이용객이 예상을 뛰어넘어 주말이면 마치 피난열차 같았다(경향신문 1963년 8월 26일자). 승객들은 선반 위까지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서울역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도 돌고, 서쪽으로도 돌던 교외선은 연발착이 잦았다. 신문들은 초만원 열차를 ‘공포’라고까지 했다. “열차 안 곳곳에서 취객들이 고함을 치고 복작거리는 통로에 10대 남녀가 자기네 공간을 만들어 기타를 튕기며 고고춤을 추고 기성을 내지르며 남녀 일행들이 야유회의 연장인 양 떠들어 대는가 하면….”(동아일보 1978년 5월 22일자) “아베크족들은 남의 눈도 꺼리지 않고 서로 허리를 껴안은 채 이마를 맞대고 밀어를 속삭이기도 했으며 술 취한 40대 아주머니는 이들에게 질세라 일본 가요 등 저속한 노래를 부르다가 말리는 승객과 말다툼을 벌이기도 한다.”(경향신문 1976년 4월 6일자) 기사에서는 난장판, 추태, 광란이라고 표현했지만, 이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다 추억이 됐다. 그러나 열차 안에서 폭력과 성희롱, 소매치기, 10대의 비행이 자주 벌어져 단지 낭만으로만 치부할 수 없었다. 기타뿐만 아니라 탬버린, 드럼까지 열차 안에서 치고 흔들어 유원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공안원들은 질서를 잡느라 진땀을 흘렸고 무엇보다 철도를 이용하는 지역 주민들의 고통이 컸다. 당국도 칼을 빼 들었다. 휴일이었던 1978년 5월 29일에만 음주 소란, 고성방가로 189명의 승객이 즉심에 넘겨졌다. 교외선은 전철의 역풍을 맞았다. 원래 수도권 전철 계획에 교외선 전철화도 들어 있었지만 평일 승객 수요가 적다는 이유로 끝내 배제됐다. 자동차와 도로의 발달로 적자 노선이 됐기 때문이다. 용산~청량리~의정부의 동쪽 구간은 전철에 내주어 서쪽 구간만 남았다. 증기기관차를 운행하고 ‘레저 열차’, ‘데이트 열차’, ‘야경 순환열차’ 등의 이벤트도 벌였지만 노선의 몰락을 막지는 못했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동심(童心) 울린 치맛바람

    [그때의 사회면] 동심(童心) 울린 치맛바람

    뜨거운 교육열은 ‘일류병’을 만들고 일류병은 치맛바람으로 이어졌다. 학부모들은 학교를 제집 드나들 듯했고 학부모와 교사 사이에 음성적 돈거래가 성행했다. 교육 당국이 음성 수입의 다과에 따라 초등학교를 특A, A, B, C, D 다섯 등급으로 나눌 만큼 대놓고 촌지를 주고받았다. 부유하고 적극적인 학부모는 대의원을 맡아 계를 만들고 돈을 모아 교사에게 공짜 곗돈을 전달했다. 돈이 없는 학부모도 자식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1학년과 6학년 담임이 인기였는데 그 학년 담임을 맡으려고 교사들끼리도 돈거래를 했다고 한다. 소풍 때 어느 여교사는 핸드백을 열어 놓고 학부모와 인사를 했다(경향신문 1965년 4월 5일자). 어느 교사는 학부모가 참관하는 성적 발표날에는 평소 들고 다니던 것보다 더 큰 핸드백을 들고 나왔다. 치맛바람은 온갖 잡부금을 만들어 냈다. 1960년대 초에 생긴 기성회비는 원래 교실난 해소를 위한 모금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변질돼 ‘박봉의 선생님’을 돕자는 ‘후생비’를 거두기 시작했다. ‘담임교사 환영비’라는 것도 있었다. 일부 학부모들은 “성의는 돈의 액수에 정비례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말로 경쟁적으로 돈을 냈다. 가난한 집 부모들은 가슴에 멍이 들었다. 서울 영등포의 K초등학교에서는 학부모 대의원들이 집집이 돌아다니며 교사 생활보조금을 매월 거두고 다녔다고 한다(동아일보 1965년 11월 11일자). 정부 고관 자녀가 많았던 서울 D초등학교에서는 고관이 교장과 담임의 인사이동에까지 관여했다. 어느 문교장관은 자식이 일류 중학교에 떨어지자 다른 일류 초등학교 6학년에 재입학시켜 이듬해 기어이 합격시켰다고 한다. 어느 사립학교 교장이 출국할 때 학부모 100여명이 아이들 손을 잡고 김포공항에 나가 손을 흔들며 열렬히 환송했다(경향신문 1966년 6월 20일자). 치맛바람은 중학교 입학시험제와 관련이 있었다. 치맛바람의 극치는 1965년의 ‘무즙파동’이었다. ‘무즙’을 오답처리 하는 바람에 일류 중학교에 낙방했다고 주장하는 학부모들이 교육감 집 안방까지 들어가 농성을 벌였다. 교사들은 노골적으로 촌지를 요구하며 스스로 교권을 추락시켰다. 강원도 속초의 어느 교사는 치맛바람을 비판했다가 학부모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했다. 대구에서 시작된 ‘6학년담임헌장운동’이 확산되며 교사들도 자성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도서 지역 교사들은 ‘벽지교사헌장운동’을 벌였다. 치맛바람은 중학교와 고등학교 평준화로 수그러드는 듯했지만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무명초/손성진 논설고문

    햇볕도 피해 간 돌 틈이며 산비탈에 이름 모를 무명초가 비집고 앉았다. 남몰래 손톱보다 작은 꽃잎을 세상이 두려운 듯 내민 야생화 한 포기. 화려한 꽃들의 유혹에 빠진 사람들은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햇살 가득한 봄날도 무명초에겐 서럽기만 하다. 이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너무 모멸적이다. 며느리밑씻개, 사위질빵, 큰괭이밥, 짚신나물, 애기똥풀, 노루오줌…. 불러 주지 않는 게 오히려 다행이다. 무명초를 얼마나 우습게 봤기에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가시가 무성해 밑씻개로는 도저히 못 쓸 며느리밑씻개, 질빵으로는 너무나 약한 사위질빵. 인간이 다른 인간을 욕하려다 못해 애꿎은 무명초, 야생화에 화풀이를 한 것일까. 멸시와 외면에 억울하기도 할 텐데 들꽃은 투정을 부리지 않는다. 잡풀은 더한 푸대접을 받고도 말이 없다. 서성대지 않고 메마른 땅 귀퉁이를 굳세게 붙들고는 끈질긴 목숨을 이어 간다. 세찬 바람이 비를 뿌렸다. 무명초는 슬며시 가녀린 꽃잎을 떨구었다.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다. 서러워하지 마. 그래도 너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어. 세상에 귀하지 않은 것은 없단다. 너의 봄날도 아름다웠다.
  • [손성진 칼럼] 아메바보다 못한 정치

    [손성진 칼럼] 아메바보다 못한 정치

    ‘다툼을 해결해 모든 국민이 행복하고 편안하게 잘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일.’ 어린이 백과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정치의 뜻이다. ‘정치는 시민 지배가 아닌 섬기는 것.’ 플라톤의 말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배웠을 아이들은 요즘 무슨 생각을 할까. 우리 정치인들도 말끝마다 “국민을 위해”라고 외친다. 겉으로만 국민을 섬기는 척하는 사탕발림이다. 정치인들의 그 검은 속내가 낱낱이 드러난 지난 한 주였다. 행복이 아니라 환멸을 안겨 주는 정치. 그 앞에서 도리어 국민의 낯만 뜨거워진다. 권력욕, 집권욕에 사로잡혀 국민이 안중에 있을 리 없다. 노루발못뽑이 ‘빠루’로 문을 부수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구태가 눈앞에 부활했다. 저급한 삼류정치의 실상은 지구촌 웃음거리가 됐다. 이러면서 어떻게 선진국 운운하겠는가. 아메바라는 단세포동물이 있다. 그 미물 중의 미물도 인간을 이롭게 한다. 세균이나 부패한 유기물을 잡아먹는 유익한 미생물이다. 진정 아메바만도 못한 정치다. 막가파보다 더한 폭력 같기도 하고 ‘개콘’보다 더 웃기는 개그 같기도 하다. 그 많은 시간 동안 무엇을 하다 이런 생난리를 치는지 알 수 없다. 속셈은 하나일 것이다. 선거의 승리. 그를 위한 존재감의 부각, 선명성 강조. 정치 혐오가 번질까 염려스럽다. 국민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우리 국민은 똑똑하다. 덮어 놓고 진영 논리, 이념 대결에 매몰되지 않는 국민도 많다. ‘패스트 트랙’ 현안들만 놓고도 면밀히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각자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한다. 사표(死表)를 줄이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군소정당에 유리하다. 자유한국당만이 아니라 더불어민주당도 의석을 잃는다. 한국당이 반발하는 것은 군소정당들이 소위 ‘여당의 2중대’가 돼 범여권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국민의 선택일 뿐이다. 신념도 없이 이익을 좇아 이리저리 붙는 해바라기는 표로써 심판하면 된다. 국민이 감시하면 된다. 군소정당 또한 오직 정의의 잣대로 캐스팅보트를 던져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버림을 받는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대한 한국당 태도는 더 억지스럽다. 반대할 사람은 오히려 국민이다. 국회의원을 기소 대상에서 쏙 뺀, 부패방지법 소위 ‘김영란법’의 재판(再版) 아닌가. 차 떼고 포 뗀 종이호랑이다. 그마저 반대하는 것은 반대를 위한 반대에 불과하다. 검찰을 정권의 주구(走狗)라고 욕한다. 그러면서 공수처를 ‘제2의 검찰’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다. 다만, 문제는 공수처의 독립성 보장이다. 앞으로 보완하면 된다. 정권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할 방안이 필수적 전제조건이다. 한때 절멸 위기감에 빠졌던 한국당은 이제 자신감도 생겼다. 그러나 이는 순전히 문재인 정부의 정책 실패 덕이다. 한국당은 사실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법의 심판대에 오른 박근혜의 망령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상황 오판은 또 다른 오판을 부른다. 방법도 틀렸다. 극단과 극렬로 지지자를 모을 수는 있겠지만, 한계가 있다. 문 정부에 실망한 중도층도 이런 한국당의 편이 되지는 않는다. 한국당이 해야 할 일은 폭력 저지, 장외 투쟁이 아니라 혁신과 대안 제시다. 한국당 입장으로선 이런 기회가 또 없다. 구태를 못 벗는 한국당에 명석한 유권자들은 표를 주지 않는다. 선거제도에 당의 사활이 걸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선거제도 또한 국민의 판단에 따를 일이다. 못해도 40% 이상의 의석을 갖는 양당제의 온실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됐다. 문제는 선거제도가 아니라 국민의 지지를 얻을 정책 제시다. 여당도 똑같다. 실정을 극복할 비전을 국민 앞에 보여 줘야 한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정책을 무턱대고 옹호할 게 아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새로운 대안으로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그렇게 외치던 민생은 어디 갔는가. 서민들은 선거제도나 공수처법에 별 관심이 없다. 먹고살 걱정만 태산이다. 민생을 위해 몸을 내던져 보라. 박수를 받을 것이다. 표가 쏟아질 것이다. 앞날이 어둡다. 수출은 급감하고 성장률은 떨어진다.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내어 보라. 국민을 위한 서푼어치 양심이 남아 있다면.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여교수, 학생이 트위스트를…

    [그때의 사회면] 여교수, 학생이 트위스트를…

    한양대가 올해 대학 축제를 열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축제를 집행할 총학생회를 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학 축제의 절정기는 1960년대였다. 1963년 11월 2일 밤 서울의 창경원. 이름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생 카니발’. 서울대와 이화여대생 1만 2000여명이 가득 메웠다. 서울대생이 7000여명, 이화여대생이 5000여명으로 서울대가 이화여대생들을 초청하는 형식이었다. 다른 대학 학생들은 입장이 허락되지 않았다. 일반인들은 오후 4시 반까지 퇴장하도록 유도했다. 학생들이 입장하는 데도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물론 대혼잡이었다. 행인들의 반응은 “여보시오, 남녀 학생 혼성데모가 일어났소?”였다. 특설무대가 마련돼 ‘장기놀이’, ‘포크댄스’, ‘쇼중의 쇼’, ‘보물찾기’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학생들은 무리 속에서 짝을 찾느라 분주했다(동아일보 1963년 11월 11일자). 대학 축제는 봄, 가을에 열렸다. 서울대 문리대는 ‘학림제’, 연세대는 ‘무악축전’, 고려대는 ‘석탑제전’이라 불렀다. 대학가 최고의 관심사는 ‘메이퀸’ 선발대회, 남학생 초청 파티, 가장(假裝)행렬 등을 선보인 이화여대의 행사였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맨 마지막 행사인 쌍쌍파티. 이화여대가 역사상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교정으로 불러들여 파티를 열어 준 것은 1962년 5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1000여쌍이 춤을 추고 게임을 했다(경향신문 1962년 6월 1일자). “숲에서 여학생, 남학생, 여교수가 한데 어울려 트위스트가 한창이다.” 축제 때가 되면 학생들은 물론이고 교수들까지 트위스트, 고고춤을 추기도 했고 학생들은 파트너 찾기에 바빴다. 거의 광란의 분위기였다. 이에 ‘배움의 전당’에서 저속한 쇼나 술판을 벌이며 탈선을 부추기고 돈만 낭비한다는 대학 축제에 대한 반성이 잇따랐다. 독재 정치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 격렬해진 상황도 축제에 대한 시선을 곱지 않게 했다. 특히 메이퀸 선발 행사와 쌍쌍파티에 비난이 집중됐다. 메이퀸은 연세대, 이화여대, 덕성여대, 경희대, 단국대, 수도여사대 등에서 뽑았다. 뽑힌 학생은 신상이 신문에 공개됐다. 메이퀸은 선망의 대상이 됐지만, 여성의 상품화에 대한 비판이 거셌다. 덕성여대 메이퀸이 짝사랑한 청년의 청혼에 시달리다 투신자살한 사건도 발생했다. 1973년 이화여대와 숙명여대는 쌍쌍파티를 없앴다. 논란을 거듭한 끝에 이화여대는 1978년 70년 만에 메이퀸 선발대회를 폐지했다. 대학들은 축제 프로그램을 학술·문화예술 행사 위주로 꾸미고 놀이도 농악이나 탈춤 등 민속적, 전통적인 것으로 바꾸었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광복 위해 죽는 날까지 싸우겠다”… 임정 자금 대고 발해농장 개척

    “광복 위해 죽는 날까지 싸우겠다”… 임정 자금 대고 발해농장 개척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니 유한(遺恨)이 없다. 동포의 고난을 네 고난으로 알고 살아가거라. 가사(家事)든 국사(國事)든 오직 자력(自力)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58세의 백산 안희제를 일제는 9개월 동안이나 악랄하게 고문했다. 피가 눌어붙은 죄수복을 입고 반송장이 돼 풀려난 백산은 장남 상록에게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몇 시간 후인 1943년 9월 12일 새벽 2시, 백산은 숨을 거두었다.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광복 두 해 전이었다.백산은 1885년 9월 12일 충절의 고장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마을(설뫼마을)에서 태어났다.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의 생가가 지척에 있는 곳이다. 백산의 선조 안기종은 왜병과 싸운 의병장이었다. 입산마을은 낙동강 지류인 유곡천이 마을 앞에 흐르는 비옥한 땅으로 백산의 집안은 700석 부자였다. 안향의 후손인 탐진 안씨가 조선 중기부터 이 마을에 정착했으며 선생의 생가인 ‘백산고가’(白山古家)가 남아 있었다. 부산에서 살고 있는 백산의 장손자 안경하(80)씨를 만나 백산의 일생에 대해 들었다. 안씨의 어머니, 즉 백산의 며느리는 왕산 허위의 형인 방산 허훈 가(家)의 자손과 결혼했다고 한다. 안씨는 “할아버지는 가족이 무슨 일을 하는 줄도 모를 정도로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했다”고 말했다. “새는 한가하여 벽곡(僻谷)을 찾았는데 해는 싫어하여 중천에 떠 두루 비치도다.” 한학에도 뛰어났던 선생이 유년 시절 지은 시다. 백산은 20세에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달이 밝은 날 밤 몰래 구국의 일념으로 상경했다.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가 1년 후 양정의숙으로 옮겼다. 백산의 조국독립 방략은 무력 저항보다는 실력 양성, 계몽운동이었다. ●발해농장, 실질적인 국외 독립운동기지 1909년 먼저 부산 구포에 구명학교를, 의령에 의신학교를, 입산마을에 창남학교를 세웠다. 그해 9월에는 남형우, 김동삼, 서상일 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했다. 26세 때인 1911년부터 3년 동안은 러시아와 만주를 돌아보며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 “국민을 교육하는 일이 급선무인데 우리가 가난해서는 어렵습니다. 부산을 일본인 손에 넘겨줘서야 되겠습니까.” 귀국한 백산은 부산으로 가서 이렇게 호소해 1914년 9월 백산상회를 창립했다. 고향 논 2000마지기(40만평, 132만㎡)를 팔아 자금으로 썼다. 백산상회는 곡물, 면포, 해산물을 위탁 판매하는 개인기업이었다. 3년 후 합자회사로 전환, 경남 양산의 대지주 윤현태와 경주 최부자로 유명한 최준 등 영남 자산가들로부터 거액의 협력을 받았다. 중국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일 무렵인 1919년 초 백산상회는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됐다. 주주들의 출자금 대부분은 임정 운영자금으로 보내졌다. 윤현태의 동생 윤현진은 아예 상해로 건너가 임정 재무차장을 맡았다. 백산상회는 국내외 20여 곳에 지점 및 연락사무소를 두었다. 겉만 기업이었지 독립운동 자금원이자 연락조직이었다. 김규식이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때 백산은 경비를 제공했다. 낌새를 알아차린 일제는 수색, 고문, 장부 검열을 계속했지만 단서를 잡지 못했다. 독립운동 자금을 장부상 결손으로 꾸며 추적을 따돌렸다. 백산은 자신의 정체를 철저히 숨겼다. 일본인 여관에 묵었으며 금테 안경을 쓰고 일본식 복장을 했는데 의심을 사지 않으려는 위장술이었다. 그러나 1921년부터 자금난이 심해졌고 주주들 간에 마찰이 생겼다. 경영 부실보다 독립운동 자금 탓이 컸다. 1928년 1월 백산상회는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광복 후 백범 김구가 최준에게 독립운동 자금 장부를 보여주자 최준은 백산의 묘소를 향해 엎드려 통곡했다. 그가 준 돈이 한 푼도 어김없이 임정에 전달됐음을 보았기 때문이다.백산상회를 경영하는 한편으로 백산은 자산가들의 지원을 받아 후학 양성을 위한 기미육영회를 결성했다. 국회의원과 사회부 장관을 지낸 전진한,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 북한 조평통 위원장을 지낸 국어학자 이극로, 국방부 장관을 지낸 신성모 등이 육영회 돈으로 독일, 영국에서 유학했다. 백산의 눈길은 언론으로 향했다. 이미 1920년 4월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창간에 참여했었다. 1928년 6월 당시 3대 일간지의 하나로 필화사건을 겪던 중외일보를 인수, 사장으로 취임했다. 임원진 중에는 독립운동가 최윤동, 임유동도 있었다. 백산은 조석간 발행 등 지면 및 경영혁신을 꾀했다. 그러나 일제 통치를 강도 높게 비판하다 1929년에 26회, 1930년에 31회 신문을 압수당하는 등 탄압을 받았다. 그러는 새 경영은 날로 어려워져 1931년 9월 중외일보는 결국 해산하고 말았다. 조국 땅을 지키며 민중과 더불어 합법적인 조직과 방법으로 독립을 꾀하겠다던 백산의 계획은 뜻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좌절밖에 없었다. 백산은 지인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조국은 감옥이다. 자유 천지에 나가서 활개를 펴고 조국 광복을 기어코 달성하는 데 죽는 날까지 싸워보겠노라.” 백산이 선택한 또 다른 길은 만주였다. 만주 땅을 일궈 빈농의 자립을 돕고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자 했다. 김태원이라는 경제적 협력자를 구했다. 그는 경북 봉화 금광에서 노다지를 캐내 일약 거부가 되어 백산과 가까이 지내던 인물이었다. 만주 목단강성 영안현에 토지를 매입했다. 발해국 고도인 동경성이 있었던 곳이다. 1932년부터 목단강 상류 일부를 석축으로 막고 수로를 내 황량한 땅을 개간했다. 백산은 발해농장으로 이름 짓고 조선에서 실농 300여호를 이주시켰다. 자작농창제(自作農創制)를 고안했다. 농민에게 분배한 토지에서 생산한 곡물의 절반을 받아 다른 농지를 개간하고 수도를 개설하며 토지는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해 자작농으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1935년까지 농장 직경은 4㎞가 넘었고 수로는 16㎞에 이르렀다. 수차 증자받은 돈은 농장경영 자금 외에는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몰래 보냈다. 백산은 청년기에 귀의했던 대종교에 심취했다. 발해농장으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대종교로 정신적 결집을 이루고자 했다. 대종교 총본사를 동경성으로 옮겼다. 대종교 서적을 간행하고 단군전인 천진전을 건립했다. 이를 통해 독립투쟁을 벌이고자 했다. 발해농장은 표면적으로는 농장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국외 독립운동기지였다.●백산 장손자 “후손들 할아버지 이름 기억” 농장 규모가 커지고 교세가 나날이 확장되자 위협을 느낀 일제는 백산을 붙잡을 기회만 노렸다. ‘대륙 첩보의 귀신’ 난베가 그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었다. 1942년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조선어사전편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백산을 체포할 빌미를 잡았다. 일제는 조선어학회 이극로가 대동교 교주 윤세복에게 보낸 ‘널리 펴는 말’을 ‘조선독립선언서’로, 글 가운데 ‘일어서라’를 ‘봉기하자’로 조작했다. 일경은 대종교 간부 21명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했다. 이른바 ‘임오교변’이다. 입산마을에서 치병 중이던 백산은 목단강성 경무청으로 포박되어 끌려갔다. 10명이 숨질 정도로 고문은 악랄했다. 사건 배후에는 밀고자가 있었다. 그러나 선생은 숨을 거두기 전 그를 용서하라고 유언했다. 광복 후 후손들은 밀고자를 찾아냈지만, 유언을 따라 응징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근 안민석 의원과 발해농장에 다녀온 장손자 안씨는 “지금도 개척자의 4~5세가 농장에 살고 있고 후손들은 할아버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여검사를 황영감이라니요”/손성진 논설고문

    [그때의 사회면] “여검사를 황영감이라니요”/손성진 논설고문

    지금이야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크게 늘고 있지만 수십 년 전에는 남성의 전유물 같았던 직업이 많았다. 그 속에 끼어 남성과 경쟁한 한 명의 여성, 홍일점은 개척자이자 선구자였다. 1948년 정부 수립 직전 런던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선수단은 67명이었는데 그중에 여성은 단 1명, 이화여중 5학년 학생인 투원반 선수 박봉식(1930~1950)이 있었다. 1948년 제헌국회 총선에 여성 18명이 출마했지만 전원 낙선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의 표적이 됐다. 그러나 1949년 보궐선거에서 임영신이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당선됐고, 이듬해 총선에서 박순천이 홍일점으로 배지를 달았다. 1952년 1월 발표된 고등고시 2회 사법과 합격자 명단에 고 이태영 박사가 들어 있다(동아일보 1952년 1월 23일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최초의 여판사 황윤석은 1953년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검사시보로 근무했다. 직원들이 “황 영감님”이라고 부르자 황씨는 얼굴을 붉히며 “미스 황”으로 불러 달라고 했다고 한다. 기사가 나자 황 시보에게 러브레터가 전국에서 쏟아졌다. 어떤 이는 ‘황 영감’의 사진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이듬해에는 최초의 여성 공군 조종사로 6·25전쟁에도 참전한 김경오 대위의 기사가 실렸다. 석사 학위를 받는 여성도 극히 드물어 기삿감이었다. 1962년 이미순씨가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서울대 농대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에 프랑스에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약학박사 학위를 받은 함복순씨 기사도 실렸다. 그때까지도 함씨는 홍일점 약학 박사였다(경향신문 1962년 8월 28일자). 1969년에 여성 박사는 국내 박사 75명, 해외 박사 11명이었다. 의학 박사를 빼면 문학, 법학, 정치학, 사학 등 각 분야에서 1~2명씩에 불과했다(동아일보 1969년 3월 20일자). 1962년에 홍일점 영화감독인 홍은원씨가 ‘여판사’라는 제목의 영화 데뷔작을 촬영 중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은 박남옥씨인데 1955년 ‘미망인’이라는 영화를 촬영했다. 아기를 업고 15명이나 되는 스태프의 식사를 차리면서 영화를 찍었지만 개봉 3일 만에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동아일보 1955년 2월 27일자). 홍숙자씨는 1959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 됐다. 외교관으로 10년 동안 근무하고 동국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1987년 사회민주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다. 교육자이자 정치가였던 정희경씨는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에 홍일점 대표로 참석해 주목을 받았다. 평양 만찬장에서 정씨가 술을 사양하자 북측 박성철이 “술 연습 좀 하시죠”라고 말했다.
  • [길섶에서] 낙화/손성진 논설고문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간지러운 봄볕 속에 춘설(春雪)이 뿌리나 했더니 떨어지는 벚꽃잎이다. 바람이 거세질수록 꽃잎은 하염없이 날리고 또 날린다. 반 보름도 못 견디고 속절없이 스러지는 벚꽃잎이 야속하기만 하다. 어느 시인은 “꽃을 자루째 털린 산벚나무가 하루 사이 폭삭 늙어 있다”고 읊었다. 묵묵하기만 한 나무는 꽃잎을 바람에게 도둑맞는 줄도 모르는 것일까. 우리나 시인이나 나무의 마음을 혜량하는데 부족했다. 나무는 낙엽을 안타까워할지언정 낙화는 서러워하지 않는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함에 꽃잎은 제 할 일을 다했고 알을 낳은 연어처럼 떨어진다.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는 열매가 맺히고 신록이 무성할 것이다. 낙화는 이별과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만남과 탄생을 의미한다. 나무는 꽃잎을 잃었지만 싱싱하고 푸릇푸릇한 이파리로 단장했고 더 화사해졌다. 그래서 낙화는 슬프지 않고 아름답다. 꽃잎은 땅에 떨어지기 전에 먼저 심장 속에 박혔다. 떨어진 꽃잎을 밟는 것은 심장을 할퀴듯 아프고 조심스럽다. 꽃잎은 안절부절못하는 인간의 발길에 기꺼이 몸뚱이를 내어준다. 잠시 사뿐 밟아도 좋다. 꽃잎의 영혼은 가슴속에 고이 묻어두었기에.
  • [그때의 사회면] 지게꾼에서 ‘벚꽃 알바’까지

    [그때의 사회면] 지게꾼에서 ‘벚꽃 알바’까지

    여자친구처럼 벚꽃 구경을 같이 해주는 이른바 ‘벚꽃 알바’가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의 대학생 아르바이트는 눈물겨웠다. 현실은 냉혹했다. 고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Y대 의대에 입학한 한 학생은 갖은 아르바이트를 다 해 보았지만, 학비를 감당하지 못해 수면제를 먹고 삶을 포기하려 했다. 1964년이었다. 이 학생은 나중에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교수가 됐다. 1960년대 대학생에게 ‘3T’가 있었는데 파티, 데이트, 그리고 아르바이트였다(동아일보 1963년 5월 29일자). 1950년대에 사환 근무, 찹쌀떡·메밀묵·우유·담배·만년필 장사, 신문팔이, 구두닦이는 중고생들이 주로 했다. 대학생들은 가정교사나 야학 교사, 타이프라이터, 번역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구하기 어려웠다. 밤거리를 누비며 행상 일로 학비를 벌어야 했다. 서울역에서 지게꾼 일도 했다. 선거철이 되면 선거 운동원의 절반이 혈기왕성한 대학생들로 채워지곤 했다. 누드 모델을 불건전한 직업이라고 할 순 없지만, 건전하지 않은 일로 돈을 버는 학생들도 없지 않았다. 일부 여학생은 비어홀이나 카바레, 요정 등 유흥업소에서 일했다. 직업소개서를 찾은 여학생을 윤락가로 넘긴 사건도 있었다. 돈 받고 자신의 피를 파는 매혈(賣血)은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길이었다. 1950년대 초 댄스 열풍이 불었을 때 카바레에서 학생, 깡패, 제비족을 포함한 젊은 남성이 가정부인이나 여학생을 유인하는 행위를 ‘아르바이트’, 그런 카바레를 ‘아르바이트홀’이라고 불렀다. 번성하던 아르바이트홀과 사창가 실태를 둘러본 윤치영 서울시장이 남긴 말은 “할 말이 없소이다”였다(경향신문 1964년 12월 17일자). 1970년대 들어 아르바이트도 다양해졌다. 연구소 조사원, 시간제 사무직, 안내원, 도난경보기 외판원, 바텐더, 디스크자키, 연말연시 카드 판매 등이다. 백화점 거리 선전원이나 판매원으로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대생들이 인기였다. 다방을 종일 빌려 차를 파는 1일 찻집이 등장한 것은 1970년대 초다. 미팅에도 이용되는 다방 티켓을 많게는 1000장을 팔아 수입이 적지 않았다. 골프장 캐디로 일하는 여학생들이 있었다. 서울에 캐디 학원이 한 곳 있었다(동아일보 1975년 10월 27일자). 1980년 과외가 금지돼 대학생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음식 배달, 집 봐주기, 세탁물 수거, 학습지 확장 요원 등 새 일자리를 찾아야 했고, 방학 때 중동 건설 현장에서 뛰기도 했다(매일경제 1981년 12월 21일자). 대학들은 ‘아르바이트 조합’, ‘아르바이트 개발위원회’를 만들어 일자리 찾기를 도왔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상투는 장발일까요?”

    [그때의 사회면] “상투는 장발일까요?”

    “하이힐을 벗고 단화를 신어라. 다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점으로 돌려라. 귀부인과 같은 그 손가락으로 쌀을 씻어라. 달랑거리는 핸드백을 내던지고 두툼한 책가방을 들어라.” 고려대 학생들이 이화여대 앞에서 ‘퇴폐풍조 배격’ 시위를 벌이며 이런 글이 적힌 전단을 나눠줬다(매일경제 1971년 9월 19일자). 남녀 갈등을 초래할, 요즘은 상상할 수 없는 시위다. 대마초, 장발, 미니스커트를 필두로 한 히피 문화에 당국이 칼을 빼들었던 때가 1971년이다. 퇴폐 단속은 정부 부처 합동으로 일시에 작전처럼 펼쳐졌다. 정부는 10월 유신을 앞두고 국민의 ‘군기’를 잡으려는 목적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퇴폐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했다. 방송가에도 단속 바람이 몰아쳤다. 라디오나 TV 프로그램은 안보 방송 위주로 개편됐다. ‘송년 대잔치’, ‘이미자의 가요 앨범’ 같은 건전한 오락 프로와 가요 프로도 퇴폐라는 올가미를 쓰고 폐지되거나 축소됐다(동아일보 1971년 12월 13일자). ‘히식스’, ‘키보이스’ 같은 보컬 그룹사운드들도 설 자리를 잃고 가요계는 소위 ‘뽕짝’ 중심으로 되돌아갔다. 퇴폐 단속은 1971~72년 무렵 절정을 이루었다. 심지어 사립초등학교 교육이 엄청난 낭비이며, 학교를 폐지해야 한다는 칼럼이 지면에 버젓이 실렸다(매일경제 1971년 10월 18일자). ‘꽃반지 끼고’라는 가요가 여고생들에게 퇴락과 탈선을 부를 염려가 있다는 글도 게재됐다. 숙명여대 총학생회는 축제를 무기한 연기하는 한편 검소한 복장을 입기로 결의했다. 상투 머리도 장발로 보고 단속해야 하는지를 놓고 경찰이 고민하다 상부에 문의했더니 “그냥 두라”고 해 단속하지 않았다(경향신문 1972년 1월 31일자). 유명한 뮤직 다방인 서울 명동 심지다방은 대마초 거래와 흡연을 묵인했다는 이유로 폐쇄됐다. 도서잡지윤리위원회는 주간지의 ‘운세풀이’가 교통사고, 사업 실패, 가정불화를 아무런 근거 없이 예언해 불안감을 일으킨다며 게재를 중지시켰다. 어린이들이 이용하는 미니 당구장에는 탈선 오락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밤새 춤을 추는 고고족들을 경찰이 덮쳤고, 급기야 1972년 10월 12일 서울시장은 서울시내 모든 유흥업소에서 고고춤을 금지시켰다. 선정적, 자극적 음악으로 퇴폐풍조를 야기한다는 이유였다. 강력한 단속에도 연예계에 대마초 파동이 일자 박정희 대통령은 법무부 초도 순시에서 “공산당과 결전을 앞두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환각제가 나도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대마초 사범에게 법정 최고형을 구형하라고 지시했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제비꽃/손성진 논설고문

    설렘의 보랏빛이 핏기 잃은 시인처럼 늘어진 육신을 깨운다. 메마른 모퉁이에 수줍게 여린 꽃잎을 펼친 제비꽃. 그 많은 꽃 중에 먼저 알게 된 꽃이 제비꽃이었다. 꿈에 부푼 새내기의 눈에 세상 모든 것이 무지개처럼 영롱하게 보였을 때. 속삭임 같은 통기타 음조를 타고 제비꽃은 마음 깊은 곳, 추억의 창고에 다발로 자리잡았다. 푸석푸석한 풀숲이나 물기도 없는 돌 틈새를 좋아하는 귀하지도 않은 꽃. 자운영꽃 같은 화려함도 없고 패랭이꽃처럼 앙증맞지도 않다. 자신을 낮추는 자세에 꽃말마저 ‘겸양’이다. 사실 ‘강인’이란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꽃이다. 겉보기엔 약해 보여도 제비꽃만큼 강한 꽃도 없다. 끈질기고 왕성한 생명력은 민들레에 뒤지지 않기에 제비꽃 또한 우리의 민초(民草)다. 이맘때면 그랬듯 제비꽃은 파묻어 뒀던 청춘의 봄날을 기억 더미에서 건져내 준다. 내가 저를 기억하니 저도 나를 잊지 않은 것일까. 혹, 내가 만난 첫 제비꽃이 씨앗을 뿌리고 뿌려 수십년 먼 길을 돌아 찾아온 것은 아닐까. 제비꽃을 보면 나 자신을 보는 것도 같고 가르침을 얻어야 할 스승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기억, 인연, 존경 같은 말이 그래서 떠오른다. sonsj@seoul.co.kr
  • 온몸 난자당하면서도 “독립만세”… 익산 1만명 핏빛 저항 이끌다

    온몸 난자당하면서도 “독립만세”… 익산 1만명 핏빛 저항 이끌다

    이틀 후면 ‘익산 4·4만세운동’ 100주년이 된다. 전북 익산 지역민들이 장터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일제의 수탈을 규탄한 만세운동이다. 그 중심인물인 문용기 열사를 취재하러 익산을 찾았다. ‘익산4·4만세운동기념사업회’ 전영철 회장이 마중을 나왔다. 만세운동 현장에서는 100주년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만세운동의 전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았다. 전 회장은 “문 열사와, 함께 순국한 다섯 분의 열사들은 긴 세월 묻혀 있었다”면서 “기념공원이나 기념관 하나도 없는 현실이 죄스럽고 부끄럽다”고 말했다.만세운동이 벌어졌던 솜리장터를 돌아보고 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한 남전교회를 방문했다. 남전교회는 산이 보이지 않는 너른 들판 한가운데에 있었다. 박종규 장로는 “살아남은 주동자들도 일제의 탄압을 견딜 수 없어 만주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최근 재판기록을 통해서야 김치옥 열사 등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했다. 차를 타고 왠지 쓸쓸한 겨울 벌판을 달리니 문 열사의 고향 마을인 관음마을이 나타났다. 열사의 생가는 사람이 살지 않는 듯 마치 폐가처럼 보였다. 생가임을 알려 주는 표지판도 없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전북 지역에는 19세기 말부터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견한 선교사들에 의해 일찍이 교회가 들어섰다. 남전교회는 1897년 문 열사의 고향 이웃마을인 익산 오산면 남전리에 미국인 선교사 전킨이 세운 교회다. 오산면의 위치는 익산 도심의 서쪽, 호남평야의 북쪽이며 아래로 만경강과 접해 있다. 기름진 옥답을 일제가 가만둘 리 없었다. 궁벽한 농촌이었던 익산을 일제는 신도시로 만들어 수탈 기지로 이용했다. 일본인들은 빼앗은 토지에 농장을 세워 한국인을 소작농으로 부리며 착취했다. 문 열사는 1878년 5월 19일 오산면 오산리에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해 서당에서 훈장을 하던 열사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은 기독교 귀의였다. 남전교회 평신도로 교회 일을 돕다 군산영명학교 보통과에 입학했다. 이때 나이가 24세였다. 훈장 경력을 인정받아 한문 교사를 겸했다. 30세 되던 해에는 목포 왓킨스 중학교에 진학해 늦깎이로 신학문을 공부했다. 열사는 이승만과 인연이 있다. 선생보다 세 살 위인 이승만은 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YMCA 활동을 하면서 지방 강연을 다녔는데 이때 열사와 만났다. 두 사람은 여관방에서 시국을 토론했으며 이승만의 강연에 열사는 찬조 연설을 했다고 한다. 이승만은 광복 후 익산으로 가서 열사를 찾았지만, 순국한 사실을 알고 몹시 애통해하면서 일필휘지로 순국열사비 비문을 썼다. 1911년 학교를 졸업한 열사는 상당한 영어 실력을 갖추게 됐다. 함경도 갑산의 미국인 금광에 취직해 통역사로 일한 것도 영어 실력 덕이었다. 열사는 8년 동안 근무하며 받은 적지 않은 보수를 만주와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보냈다. 금광에서 열사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열사는 급히 고향으로 내려왔다. 독립운동을 돕던 그가 만세 시위를 주도적으로 모의한 것은 당연했다. 남전교회 집사 김치옥과 박성엽이 열사를 찾아왔다. 기다렸던 일이었다. 두 집사는 거사를 조직화하는 일을 맡았고 열사는 도남학교 학생 박영문, 젊은 교인들과 재학생들을 설득했다. 익산 인근의 교회에도 연락해 동참하겠다는 응낙을 받았다. 거사일은 솜리(이리·裡里) 장날인 4월 4일로 정했다. 사흘 밤낮을 뜬눈을 새우다시피 하며 수천 개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들었다. 드디어 1919년 4월 4일 오전. 남전교회에 교인과 마을 사람들 150여명이 모였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한 묶음씩 받아 여자들은 허리춤에, 남자들은 바짓가랑이 속에 숨기고 솜리장터로 향했다. 먼발치서 지켜보았던 아낙네는 뭉게구름이 들녘을 하얗게 뒤덮는 듯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고 증언했다. 몇 시간 후 정오. 장터 네거리에 빨간 글씨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이 펄럭였다. 교회 교인들, 천도교 지도자, 민족운동지도자들도 참가했다. 도남학교 등 수백명의 어리고 젊은 학생들도 모여들었다. 이들은 모여든 장꾼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눠 주었다. 군중은 금세 1000여명으로 불어났다. 낮 12시 30분쯤. 흰색 두루마기를 걸친, 기골이 장대한 40대 남성이 군중 앞에 섰다. 문용기 열사였다. 오른손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들고 있었다. 열사는 우렁찬 목소리로 연설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군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다. 열사는 시위대를 이끌고 수탈의 핵심부 대교농장으로 향했다. 군중은 순식간에 1만여명으로 불어났다. 농장을 지키던 헌병대는 군중이 정문으로 접근하자 공포를 쏘았다. 급기야 맨손으로 만세를 부르던 군중을 향해 실탄 사격을 시작했다. 일본인 소방대와 농장원 수백명도 칼과 곤봉, 갈고리를 닥치는 대로 휘두르고 찍어댔다.군중은 일시 흩어지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열사는 군중을 독려하며 더 큰 목소리로 만세를 불렀다. 이때 일본 헌병이 칼을 빼 들더니 태극기를 들고 있던 열사의 오른팔을 내리쳤다. 순간 비명을 질렀으나 열사는 왼팔로 태극기를 집어 들고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헌병은 왼팔마저 자르고는 가슴과 복부를 찔러 열사를 숨지게 했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음조(陰助)하여 여러분들이 대한의 신국민이 되게 하겠소”라고 힘겹게 외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열사의 나이 41세였다. 일제도 보고서에 “수모자(首謨者)의 1인이 절명에 이르기까지 만세를 창(唱)했다”고 적시했으니 그가 문 열사였다. 열사의 죽음을 목격한 지도자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시위대를 이끌었다. 도남학교 학생 박영문과 남전교회 청년 신도 장경춘이 총에 맞아 “억” 하면서 쓰러졌다. 54세로 춘포면의 어른이었던 ‘박참봉’ 박도현과 서정만도 총탄에 맞았다. 이충규도 순국했다. 20여명은 크게 다쳤고 39명이 체포됐다. 유족들은 일경이 방해하는 바람에 한밤중에 도둑처럼 시신을 거둬 거적에 말아 묻었다. 살아남은 주모자 가족들은 일경의 감시를 피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며 유랑생활을 하다시피 했다.“나물 많이 캐 오세요.” 거사일 아침, 집을 나서는 노모와 아내에게 열사는 이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사망 소식을 들은 부인 최정자 여사는 남편의 시신을 거둬 뒷산에 묻었다. 피로 얼룩진 한복 저고리와 두루마기는 보관하고 있다가 해방 후 멍석에 펴 놓고 가족들과 예를 올리고 대성통곡했다. 열사가 최후의 순간에 입었던 이 혈의(血衣)는 며느리 정귀례 여사가 기증해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그런데 옷소매가 잘린 흔적이 없다. 양팔이 잘렸다는 내용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들어 있다. 이에 대해 주명준 전주대 명예교수는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서 할복하여 내장을 꺼내어 던지고 순국했다는 말과 동일한 경우”라면서 “과장 어린 표현을 써서 민족감정을 불러일으켰으니 터무니없다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어쨌든 여러 군데를 난자당해 숨진 것은 분명하다. 김치옥, 박동근, 전창여, 강성원 등 주동자들은 목숨을 건졌지만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이들은 법정에서 “우리가 조선의 독립만세를 부른 것이 죄가 되는가”라고 부르짖었다. 김치옥은 잔인한 고문으로 사경에 이르자 석방됐지만,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을 일으키고 반신불수가 됐다고 한다. 글 사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피보기팅, 노예팅, 언약식…’/손성진 논설고문

    [그때의 사회면] ‘피보기팅, 노예팅, 언약식…’/손성진 논설고문

    미팅은 ‘4·19혁명’ 이후의 산물이다. 1960~70년대는 미팅의 전성기였다. 1960년대 말 일종의 참가비인 티켓을 팔아 미팅을 주선하고 짝을 짓은 방식이 유행했다. 주로 다방을 빌려 미팅을 했지만, 더러는 야외에 나가기도 하고 한강에서 보트를 같이 타기도 했다. 그러나 여대생의 76.6%가 혼전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답할 만큼 의식은 보수적이었다. 신체 접촉도 신중해서 네 번째 만날 때 손을 잡는다는 남녀가 많았다(경향신문 1975년 11월 10일자). 은어들도 많다. ‘팅순이’(미팅을 자주 하는 여대생), ‘졸팅’(갑자기 하는 미팅), ‘1일 반창고’(하루 데이트), ‘양말 신었다’(애인이 있다), ‘종빙고’(종강을 빙자한 고고미팅), ‘킹카’(괜찮은 상대), ‘에이스카’(아주 괜찮은 상대), ‘물카’(마음에 안 드는 상대), ‘후지카’(아주 마음에 안 드는 상대), ‘으악카’(그보다 더 이하인 상대) 등이다(매일경제 1978년 4월 12일자). “2(월)말 3(월)초의 기회를 놓치기는 했지만 3말 4초의 신화를 남기고야 말겠다고 바동거리는 경이, 군대 가는 남자친구 때문에 기분이 착잡해져서 나온 윤이, (…) 이렇게 4명이 신촌 경양식집 흩어진 조명 밑으로 스며들었다. 양주병을 앞에 두고 나란히 앉은 남녀, 눈을 내리깔고 다리를 꼬고 앉아서 여유 있게 담배 연기를 뿜어 대는 여성 몇몇….”(동아일보 1978년 9월 28일자) 당시 여대생이 신문에 쓴 미팅 풍경이다. 1981년부터는 졸업정원제 등으로 미팅도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학업 부담 때문에 미팅을 원하는 학생도 줄었고, 첫 미팅 때 꽃이나 손수건을 주고받던 낭만적인 풍경도 사라졌다. 고팅이나 디스코팅이 성행하고 마음에 들면 바로 술집으로 향하는 가벼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상대방의 소지품을 선택해 짝을 짓는 방법이 나온 것도 그 무렵이다. 한 학생에게 ‘에이스카’를 마음대로 선택하게 하고 대신 찻값을 모두 내게 하는 ‘시드 배정’이라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동아일보 1981년 4월 27일자). 남자 수를 늘려 고의로 여자 한 명의 짝을 없도록 하는 ‘피보기팅’이 1970년대식이라면, ‘1지망, 2지망, 3지망’을 적는 ‘학력고사팅’은 1980년대, 경매로 짝을 짓는 ‘노예팅’은 1990년대 방식이다. 또 그룹 미팅에서 벗어나 맞선식 ‘소개팅’ 또는 ‘선팅’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무렵이다. 지방 학생 남녀가 같은 방에서 사는 ‘계약동거’라는, 다소 충격적인 풍조도 번졌다. 소개팅에서 마음에 드는 상대방을 만나면 가족에게는 알리지 않고 친구들을 초대해 결혼까지 약속하는 의식인 ‘언약식’도 일부 학생들 사이에 있었다.
  • [손성진 칼럼] 공직자와 재산, 그리고 최정호

    [손성진 칼럼] 공직자와 재산, 그리고 최정호

    1993년 공직자 재산을 처음으로 공개했을 때 예상보다 훨씬 많은 그들의 재산을 보고 국민들이 깜짝 놀랐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재산 공개는 도덕성을 회복하는 의식 전환에서 시끄러웠던 5공 청문회보다 몇백 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파급력은 엄청났다. 재산 형성 과정에 대한 실사가 진행돼 부동산 투기 등의 부도덕성이 드러난 공직자들은 줄줄이 사퇴했다. 재산 공개가 확대되면 공직자의 청렴도가 높아지지 않겠느냐는 기대도 컸다. 26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지난해 기준 고위 공직자 1711명이 신고한 평균 재산은 13억 4700만원이다. 국민 평균 순자산 3억 4000여만원의 4배다. 다른 분석을 보면 1급 이상 고위 공직자 가운데 33%는 서울 강남에 집을 갖고 있고, 47%는 2주택 이상 보유자다. 힘 있는 기관일수록 소속 공직자가 강남에 집을 가진 비율이 높다. 청렴도가 높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된 것 아닌가. 고시에 합격해 5급 행정직으로 시작한다고 해도 공직자의 연봉은 대기업 수준에 못 미친다. “월급으로 생활이 안 된다”는 고시 출신 젊은 공무원들의 푸념을 자주 들을 수 있다. 최고위직이 되면 억대 연봉을 받는다지만, 역시 민간 기업 임원보다는 적다. 그런데도 고위 공직자들이 평균적 국민보다 월등히 재산이 많은 이유는 뭘까. 첫째, 권력에 배고픈 부자들은 고시에 합격한 가난한 공직자와 가족의 연을 맺어 권력을 간접적으로 향유하고자 한다. 즉 혼인을 통한 금권의 유착과 그에 따른 상속이다. 둘째, 부동산 투기나 주식 투자다. 공직자들은 일반 국민이 알기 어려운 미공개 개발정보 등을 쉽게 취득할 위치에 있어 부정한 마음을 먹는다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다. 셋째, 권력과 권한 주위에는 늘 부정한 돈이 접근한다. 많은 공직자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매수당한다. 지금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을지 모를 비리, 뇌물수수다. 넷째, 이도 저도 아니라면 마지막 하나는 특출한 재테크 능력일 것이다. 월급쟁이 직업공무원인 최정호 국토부 장관 후보자는 이 네 가지 중에 몇이나 관련이 있을까. 가난한 수재들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선택했던 금오공고 출신으로 행시에 합격한 그가 결혼을 통해 재산을 불린 것 같지는 않다. 비리에 휘말린 일은 알려진 게 없고 없으리라고 본다. 집 3채로 20억원의 시세차익을 얻었다는 최 후보자의 재테크 능력은 범인(凡人)이 봐서는 신공(神功)에 가깝다. 주목할 것은 부동산 정보와 법률에 밝을 수밖에 없는 위치다. 주 경력이 교통 분야이지만 2007년엔 토지정책팀장을, 2008년엔 건설산업과장을 지냈다. 이 경력들이 재산 형성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모친 소유 주택이 있는 곳이 뉴스테이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돼 집값이 크게 올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공동증여로 증여세 5000여만원을 절감하고 사실상 3주택자이면서도 법적으론 1주택자로 종부세는 한 푼도 내지 않는다. 시중에는 ‘최정호 따라 하기’라는 말이 벌써 나돌고 있다. 재산 많은 것이 죄가 될 수는 없다. 정당하고 합법적인 재산 형성을 나무랄 수는 없다. 공직자도 재테크할 수 있다. 그러나 장관급 공직자, 특히 부동산 정책을 다루는 경우는 다르다. 법적·도덕적으로 엄격한 잣대가 필요하다. 부동산 투기는 시장을 교란해 비정상적인 가격 앙등을 초래한다. 결국 피해는 서민에게 돌아오기에 최 후보자의 임명은 서민을 위한다는 정부의 이념과도 배치된다. 후보자 지명 직전에 딸에게 증여하고 그 집에서 월세를 살았다는 대목에서도 국민의 실망은 크다. 재산 신고액이 고위 공직자 평균과 비슷하듯이 최 후보자는 청렴과는 거리가 먼, 그저 이 시대의 일반적, 평균적 공직자다. 사회 타락과 함께 공직자들의 도덕관념은 높아지지 않았다. 황희 정승 같은 청빈한 공직자는 찾기 어려운 세상이다. 부동산 투기쯤이야 아무렇지도 않다고 여긴다. 공직자 재산 공개는 청렴성 향상에 효력이 없었다. 역대 정권들이 공직자의 부동산 투기에 관대했던 탓이다. 정의를 앞세우는 현 정부도 그런 과오를 반복하고 있다.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공직자들의 안이한 생각을 바꾸려면 최고 권력자가 엄정한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 최 후보자가 그대로 임명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나쁜 선례가 하나 더 생기고 공직자의 도덕 기준은 더 낮아질 것이다.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나이트 불 나자 “키스타임!” 일제히 환호성

    [그때의 사회면] 나이트 불 나자 “키스타임!” 일제히 환호성

    1960년대 나이트클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964년 서울에는 34개의 나이트클럽이 있었다. 그중 25~26곳은 카바레였다. 카바레는 ‘무도장 설비를 갖춘 고급 술집’이란 본뜻과는 달리 ‘나이 많은 성인이 출입하는 작은 나이트클럽’으로 아는 게 보통이다. 카바레 앞엔 “부부 동반이 아니면 안 받습니다”란 팻말이 붙어 있었다. 탈선을 막겠다는 일종의 ‘규칙’이었지만 ‘있으나 마나 한 잠꼬대’였다며 신문은 이렇게 썼다. “홀 가운데에서는 간혹 추잡한 광경이 눈길을 모은다. ‘패팅’과 ‘키싱’이 벌어지고 있는 장면이다.”(경향신문 1964년 11월 9일자) 옷차림은 H카바레의 경우 절반이 한복이었다. “남녀가 어울려서 춤을 너무 난잡스럽게 춘다”는 이유로 서울시가 속칭 아르바이트 홀(입장료를 받는 카바레) 4곳에 6개월 영업정지 명령을 내렸다. 부시장 등이 직접 단속에 나섰는데 한참 들여다보아야 춤을 추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만큼 어두웠다. 유부녀와 가장들이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과 어울려 춤바람을 일으켜 악의 온상이 됐다고 했다(동아일보 1968년 12월 3일자). 나이트클럽은 통금 시간을 넘겨 새벽 2시까지 영업을 하는 게 보통이었다. 문제는 교통편이었는데 자정을 넘어 나오는 손님들을 태우려는 불법 차량들은 관용차 등 특권층의 차량이 많았다(동아일보 1967년 3월 30일자). 단속 나간 경찰이 도리어 폭행을 당하기도 했는데 호텔 ‘나이트’는 교통부 지정 관광업소로 상부가 뒤를 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드쇼를 한 일부 나이트에 대해 경찰은 음란성을 조사했으며 이는 청와대 보고사항이었다. 연예인들의 폭력도 수사를 받았다. 1970년 8월 고 박노식씨는 C나이트에서 술을 마시고 나오다 외상전표에 사인을 요구하는 종업원들을 폭행해 구속됐다. ‘고고춤’ 열풍으로 나이트 전성기에 들어서자 단속은 더 강화됐다. 이런 것도 단속 대상이었다. “부녀자 단독 입장, 접객부 이외의 여자와 춤을 추는 행위.”(경향신문 1971년 9월 24일자) 그러거나 말거나 고고장엔 젊은이들이 물 밀듯 밀려들었고 고고장은 밤샘영업을 하며 숨바꼭질하듯 경찰에 맞섰다. 경찰은 나이트 주변 해장국집과 다방을 덮쳐 밤새 춤을 춘 ‘고고족’ 77명을 연행하기에 이르렀다(동아일보 1974년 3월 30일자). 1974년 서울 대왕코너 화재로 72명이 새벽까지 고고장에서 춤을 추다 숨진 사고는 나이트가 더 강한 철퇴를 맞는 계기가 됐다. 종업원들이 술값 내고 가라며 출입문을 막아 피해가 컸다고 한다. 화재로 조명이 꺼지자 일부 고고족은 불이 난 줄도 모르고 “키스타임이다”라며 좋아했다고 한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길섶에서] 엄마의 청춘/손성진 논설고문

    작고한 모친의 유품을 정리하며 빛바랜 몇을 추렸다. 누렇게 변색된 사주단자(四柱單子). 60여년 동안 버리지 않고 장롱 깊숙한 곳에 간직했던 것이다. 그리고 담뱃갑보다 작은 흑백사진들. 결혼 전, 그러니까 1950년대 중반 처녀 시절에 찍은 사진들이다. 상상 밖의 젊은 시절 모습보다 사진 뒤에 써 놓은 설명이 눈길을 잡아당긴다. “죽기도 싫고 살기도 싫다. 금자야, 장차에 나는 어디로.” 금자라는 친구와 껴안고 찍은 사진 뒤에 적어 놓은 글이다. 푸른 펜글씨, 생전 어머니의 필체가 분명하다. 심각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앞날을 알 수 없는 전후(戰後) 막막한 현실 속의 불안감이 생생하다. 설명을 붙인 흑백사진들은 더 있었다. 흰 저고리, 검은 치마, 땋은 머리, 단발머리, 제각각의 옷차림을 한 처녀 아홉이 꽃밭에서 깔깔 웃는 사진 뒤엔 이런 글을 써 놓았다. “술 먹고 놀자. 춤도 추고 노래하자.” 교복과 평상복 차림의 남자 네 명과 한복 차림의 여자 둘이 들판에서 찍은 사진 뒤엔 “友(우·벗)들은 고민에 가득 찼고”라고 적어 두셨다. 팔순 중반에 세상을 뜬 엄마에게도 청춘은 있었다. 현 세대와 다를 바 없는 젊음, 근심, 고민을 가졌던….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충무공 동상 방독면 시위

    [그때의 사회면] 충무공 동상 방독면 시위

    미세먼지가 일단 걷혔다. 수십 년 전만 해도 한국은 청명한 하늘을 자랑하던 나라였다. 한국 땅을 밟는 외국인들의 첫마디는 “오, 푸른 하늘이여”라는 감탄사였다고 한다. 한국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였기도 했겠지만, 어쨌든 한국의 첫인상은 맑은 하늘과 공기였다(경향신문 1971년 1월 16일자). 서울의 사철 맑은 하늘과 공기는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공업화와 자동차의 증가로 대기는 오염돼 갔다. 서울 대기가 안전 기준을 넘어선 것은 1972년이었다. 1965년부터 서울시 위생연구소가 매년 대기오염 조사를 했는데 그해에 외국의 안전 기준을 넘어선 것이다. 오염이 가장 심했던 곳은 공장 지대였던 신도림동이었다. 급속히 나빠진 대기 질을 되돌리고자 여러 대책이 마련됐다. 서울 광화문 등 네 곳에 대기오염 자동측정기를 처음으로 설치한 것은 1973년 7월이었다. 서울시는 매연을 내뿜는 공장이나 고층건물에 대한 고발을 접수했다. 서울 대기오염의 가장 큰 원인은 급증한 자동차 매연이었다. 1976년에는 자동차에 배기가스 정화기를 의무적으로 달도록 했다. 대기오염의 영향으로 대도시에 산성비가 내린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도 그해였다. 매연 차량 처벌에 검찰권을 발동하고 환경청을 신설하는 등 국가적으로 심각성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도 옛 중앙청이나 정부종합청사 건물에서 기준치를 훨씬 넘는 매연을 내보낸다는 사실이 드러나 비난이 쏟아졌다(동아일보 1976년 7월 29일자). 가로수도 공해에 시달리고 동물도 대기오염 피해를 본다는 연구 결과도 발표됐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이 창경원의 동물들을 대상으로 오염 피해 조사를 했더니 74%의 폐 속에 분진이 쌓여 있음을 확인했다(경향신문 1975년 12월 20일자). ‘대기오염, 수질오염 문제를 해결해 드립니다’라는 문구를 내건 환경오염 해결 업체가 경제지 1면에 광고를 내고 등장했다(매일경제 1975년 5월 31일자). 심각한 미세먼지 오염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도 느긋하고 환경단체도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사실 환경단체들은 오염 문제가 있을 때마다 시위를 벌이며 정부의 각성을 촉구했다. 환경단체운동연합 소속 회원 60여명이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에 자신들이 제작한 방독면을 씌우고 시위를 벌인 적이 있다. 이들은 ‘숨 막혀서 못 살겠다’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대기오염에 대한 정부의 안이한 대처를 비판했다. 꾸준히 관리되던 미세먼지 문제가 심각해진 데는 경유차 확대 같은 거꾸로 정책에도 원인이 있다는 말을 새겨들을 일이다.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그때의 사회면] “나는 학교가 싫어요”

    [그때의 사회면] “나는 학교가 싫어요”

    부산 감정초등학교가 학생 감소로 폐교돼 마지막 졸업식이 눈물바다가 됐다. 학급당 평균 학생수가 80명에 육박했던 ‘콩나물 학교’ 시절은 ‘호랑이 담배 먹던 이야기’가 됐다. 교실이 부족했던 강원도 속초 어느 초등학교는 교실을 반으로 쪼갰다. 교단과 교구 놓을 자리를 뺀 6평에 70여명이 수용됐다. 서 있기도 어려울 공간이었으니 악취가 첫 번째 문제였다(경향신문 1961년 12월 9일자). 폭발적 인구 증가로 서울 사정은 더 심했다. 1968년 서울 전농초등학교는 123학급(한 학년에 20반 이상)에 학생수는 1만 230명이었다. 학급당 평균 83.1명이었다. 다닥다닥 붙어 수업을 받는 바람에 학생들은 옴짝달싹하기도 어려웠고 가위나 칼을 쓰다 다치기도 했다. 교사는 학생 이름을 다 외우지 못했고 한 달이 되도록 담임교사의 얼굴을 모르는 학생이 수두룩했다. 교실이 모자라 2부제 수업은 보통이었고 3부제도 있었다. 1972년에 서울 숭인초등학교는 학생수 1만 1965명의 ‘동양 최대 매머드 학교’였다(동아일보 1972년 6월 21일자). 학생수를 줄이고자 숭곡초교를 신설했는데 땅을 못 구해 숭인초교 부지를 반으로 나눠 그 안에 새 건물을 지어 쌍둥이 학교가 됐다. 1만명이 넘는 학생들이 등교하는 풍경을 신문은 ‘전선열차가 한꺼번에 들이닥친 서울역’이라고 썼다. 쏟아져 들어오는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전 교사가 새벽부터 교통 정리에 동원됐다. 학교 신설이 인구 증가를 따라가지 못한 서울 강남과 여의도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977년 서울 반포초등학교의 6학년 학급 학생수가 98명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이듬해 독산초등학교 2학년 5반 학생수가 104명에 이르며 깨졌다. 세계 최고다. 책상을 칠판 바로 앞까지 놓아 맨 앞에 앉은 학생은 칠판 글씨가 안 보인다고 아우성이었고 뒷자리 어린이들의 귀에는 교사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동아일보 1978년 7월 8일자). 넘쳐 나는 학생들로 운동장도 비좁아 축구 등 구기 경기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조회는 2~3팀으로 나눠서 해야 했고, 체육 시간은 10여반이 겹쳐 화단이나 담벼락 옆에서 도수 체조를 해야 했다. 운동회도 1·3·5학년과 2·4·6학년이 날짜를 달리해 열었다(경향신문 1976년 3월 31일자). 운동장에서 덩치 큰 상급반 학생들에게 치인 저학년 학생 입에서는 “학교가 싫어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덩달아 교사도 부족해 서울 불광초등학교에서는 교사의 연수, 휴가로 학생들을 보름 사이 세 번이나 이웃 반들에 옮기고 합반시켜 의붓자식 취급한다는 항의를 받았다(경향신문 1965년 11월 4일자). 손성진 논설고문 sonsj@seoul.co.kr
  • [부고]

    ●손성진(서울신문 논설고문)씨 모친상 박승희(전 부산 농협지점장)씨 장모상 9일 부산의료원, 발인 11일 오전 7시 (051)607-2654 ●김필건(전 대한한의사협회장)씨 별세 10일 강릉 아산병원, 발인 12일 (033)610-5983 ●박인갑(전 부산시 주택국장) 상욱(삼우공영 대표) 상봉(동의대 교수) 상택(임팩트인 대표)씨 모친상 9일 부산 시민장례식장, 발인 12일 오전 7시 30분 (061)636-4444 ●이창수(삼양 감사) 창권(KB금융지주 전략총괄 전무)씨 부친상 노대명(보건연구원 팀장)씨 장인상 10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12일 오전 6시 20분 (02)2227-7563 ●김영재(KBS 대구총국 보도국장)씨 장인상 10일 대구의료원, 발인 12일 오전 7시 (053)560-9551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