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뒤의 오페라/밀턴 브레너 지음
어머니와 열살짜리 아들이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을 찾았다.서곡이 울리기 시작했는데 아들이 뭔가를 얘기하려 한다.어머니는 십중팔구 눈을 흘기며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댈 것이다.왜냐하면 오페라는 ‘고상한’ 것이니까.
그러나 ‘무대 뒤의 오페라’(밀턴 브레너 지음,김대웅 옮김,아침이슬 펴냄)를 보면 오페라의 세기라고 할 19세기,오페라의 본고장인 유럽에서는 상황이 오히려 달랐던 모양이다.
아일랜드의 소설가 시드니 모건은 19세기 초반 로마의 극장을 “어둡고 불결하고 초라하며 시설도 엉망”이라고 적었다.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1816년 2월20일 아르헨티나 극장에서 초연됐다.모건이 대표적으로 불결하다고 지적한 극장이었다.로시니는 “이 작품을 13일 만에 작곡해서 1200프랑과 금단추가 달린 코트를 선물로 받았으니 하루에 100프랑을 번 셈”이라고 자랑했다.그는 이 외투를 입고 초연무대에 나왔는데,관객들은 야유와 조소를 퍼부었다.
바그너는 1861년 3월13일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탄호이저’를 공연했다.제1장이 끝나자 휘파람과 고함이 들려왔다.파리의 조키클럽이 계획적으로 방해한 것이다.조키클럽은 돈많고 경박한 신사들의 모임으로,보통 보수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무용수들을 애인으로 삼고 있었다.당시 파리에서 오페라를 초연할 때는 2막에 이들의 애인들이 나서는 발레를 넣는 것이 관례였으나,바그너는 거부했기 때문이다.
1873년 비제의 ‘카르멘’을 제안받은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은 부도덕한 작품을 공연하면 선보러 온 관객들이 도망간다며 거절했다.
당시 극장의 특별석은 상담과 사교장소로 이용됐는데,오페라 코미크는 선보는 장소로 인기가 높았다.바그너가 바이로이트 극장의 모든 좌석을 앞으로 향하도록 고정하고,조명을 끈 채 귓속말조차 금지한 것은 3년 뒤의 일이다.
1910년 12월10일 푸치니의 ‘서부의 아가씨’를 세계 초연하는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은 북새통이었다.부정유통을 막으려 일일이 입장객의 서명을 대조하느라 줄은 몇 블록에 걸쳤다.
그럼에도 평소의 2배 값으로 판 입장권은 30배로 암거래됐다.첫날 공연이 성공하자 극장측은 다시 2배,즉 평소의 4배로 값을 올렸다.
미국의 오페라 비평가가 쓴 이 책은 제목처럼 걸작 오페라 27편의 뒷얘기다.물론 아름다운 이면사도 많이 담겼다.그렇다해도 우리에게는 고상한 오페라가,고상하기만한 토양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러준다.오페라가 제 아무리 명작으로 평가받아도 즐기면 되지,숭배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도 행간에서 읽혀진다.지은이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1만 5000원.
서동철기자 dcsu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