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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 환멸·조선 흠모에 투항한 왜군 장수… 능숙한 조총·화포술로 전공[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日 환멸·조선 흠모에 투항한 왜군 장수… 능숙한 조총·화포술로 전공[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항왜(降倭)란 글자 그대로 투항한 왜인을 가리킨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귀순한 항왜는 1만명 이상으로 알려진다. 숫자의 근거가 된 것은 1597년 5월 18일자 선조실록의 ‘원수 권율이 적정을 자세히 보고하다’라는 제목의 글이다. 부산포의 왜인 가운데 사정을 알 만한 사람을 찾아 은냥을 주고 정세를 은밀히 물었더니 ‘일본에서 꺼리는 것은 항복한 왜인이다. 이미 1만에 이르는데, 일본의 용병술을 모두 털어놓았을 것이다. 조선에서 산성을 쌓고 있는 것도 역시 이 왜인들의 지휘일 것’이라 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왜인은 ‘조선이 항왜를 발탁하기로 했다는 것은 이미 일본에서도 자세히 알고 있다. 조선이 후대하고 죽이지 않는다면 어찌 우리들뿐이겠는가. 우리를 인솔해 가라’고 했다는 내용이다.사야가(沙也加) 김충선(金忠善·1571~ 1642)은 항왜의 대표적 인물이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가토 기요마사가 이끈 왜군 제2진의 선봉장으로 부산포에 상륙했지만 싸움도 하기 전에 경상좌병사 박진에 귀순했다’고 후손들이 편찬한 ‘모하당문집’에 적혀 있다. 모하당(慕夏堂)은 김충선의 아호다. 조총과 화포를 능숙하게 다루고 화약제조법도 잘 알고 있었으니 사야가는 조선에서 쓰임새가 컸다. 선조는 그에게 김해 김씨 성과 충선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선조는 오늘날의 대구시 달성군 우록동 일대 땅도 김충선에게 하사했으니 후손들이 지금껏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오고 있다.지금 우록동에는 김충선을 기리는 녹동서원(鹿洞書院)과 그의 무덤이 있다. 서원 곁에는 2012년 세워진 달성 한일우호관이 여행객을 반긴다. 마을 이름은 우미산 아래 소 굴레 모양이라 우륵(牛勒)이라 했던 것을 김충선이 사슴과 벗하는 마을이라는 우록(友鹿)으로 고쳤다고 한다. 김충선은 ‘산중에 은거하는 사람은 대개 사슴을 벗하며 한가로움을 탐한다. 우록은 내가 평생을 산중에 숨어서 살고자 하는 뜻과 부합한다. 여기 한 칸 띠 집을 지어 자손에게 남기니 이곳이 바로 내가 원하는 땅’이라고 녹촌지(鹿村誌)에 적었다. 김충선과 관련된 기록을 모은 ‘모하당문집’은 6대손 김한조가 1798년 초간하고 그의 동생 김한보가 1842년 개수했다. 사야가의 투항 과정은 문집에 실려 있는 김충선의 큰아들 김경원이 1675년(숙종 원년) 썼다는 행록(行錄)에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다. ‘임진년 가토 기요마사가 군사를 일으켜 조선을 정벌했다. 가토는 담용절륜하고 기개가 뛰어난 공을 우선봉장으로서 뽑았으니 불과 22세였다. 4월 13일 바다를 건너와 조선의 문물을 보자 일본과는 달리 전란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사람은 누구나 예법과 질서, 의관문물을 갖추고 있었는데 평소에 듣던 것과 같았다. 그날로 사야가는 한 차례 접전도 없이 본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강화서를 보낸 후 조선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워 공을 세웠다.’ ‘모하당문집’은 사야가가 부산에 상륙한 이후 4월 17일 효유서(曉諭書)로 조선에 침략할 뜻이 없음을 밝혔고 4월 20일에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강화서(講和書)를 보내 3000명의 군사와 귀순했다고 적었다. 그런데 개전 직후 밀양부사로 작원관 전투를 이끌었던 박진은 5월이 돼서야 경상좌도병마사에 올랐으니 ‘4월 20일’이나 ‘박진에게’라는 표현 가운데 하나는 착오라고 봐야 할 것 같다. ‘3000’이라는 숫자가 상식을 뛰어넘는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서울대 사범대가 편찬한 중학교 도덕교과서(1998)는 ‘며칠 밤을 고민하던 끝에, 사야가는 자신을 따르는 군사 500여명을 이끌고 귀순해 왔다’고 적었다.김충선은 한일 두 나라 학자들이 모두 와카야마현 기슈의 사이가 집단(雜賀衆)과 연관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한다. 사이가 집단은 일본 전국시대 최강의 철포(鐵砲), 곧 조총 용병 집단이었다고 한다. 사야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패배하고 보복을 피해 지금의 구마모토 지역인 히고로 도망한 집단의 일원이라 보는 것이다. 사이가 집단을 이끈 스즈키 마고이치는 조총의 연속발사 전법을 창안한 인물로 알려진다. 조선인들에게 ‘사이가’는 ‘사야가’에 가깝게 들렸고, 이름을 대신해 한자로 이렇게 썼다는 것이다. 김충선이 사이가 집단의 일원이었다면 히데요시 치하에서의 입지는 불안정했을 것이다.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는 1971년 ‘길을 걷다-한국기행’에서 우록리를 다뤘다. 작가는 ‘일본의 오랜 내전 규칙에 의하면 항복한 자는 어제까지 적군이었던 아군 편에서 어제까지의 우군을 향해 화살을 쏜다. 사야가도 그런 점에서 조금도 고민이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야가가 조선에 투항한 즉시 일본군을 상대로 전공을 세우고, 이후 조선 조정으로부터 관직과 이름을 하사받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일본은 1449~1473년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다스렸다. 후계자가 없어 동생 요시미에게 쇼군의 자리를 물려받도록 했지만, 뜻밖에 이듬해 아들 요시히사가 태어난다. 한 발도 양보할 수 없었던 양쪽은 11년 동안 처절하게 싸우니 ‘오닌의 난’이다. 막부와 쇼군의 권위가 크게 추락하면서 군소 세력까지 저마다 주도권을 잡겠다고 나서 100년 이상 싸움이 그치지 않는 전국시대가 개막한다. 이렇게 되자 막부와 연합정권을 이뤘던 각 지역의 지배자 슈고 다이묘는 몰락하고 센가쿠 다이묘가 득세한다.1543년 포르투갈 선박이 가져온 조총의 대량 보급과 전술 개발로 전쟁의 양상을 바꾼 인물이 센고쿠 다이묘의 하나인 오다 노부나가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피살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손잡고 1590년 일본을 통일한 인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일본인들에게 ‘지켜야 할 국가’란 존재하지 않았다. 항왜의 반대편에 침략자에게 협력한 순왜(順倭)가 있다. 조선 같은 신분사회에서 주인의 소유물인 노비계층에 국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왜군은 점령지에서 관직을 나눠 주는 등 이들을 회유하는 데 힘썼다. 물론 노비만 순왜가 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을 틈타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게 김충선은 매우 껄끄러운 존재였던 것 같다. 통감부에 협력하며 경성신문을 발행한 아오야기 쓰나타로는 1910년 ‘세상에 배움이 얕은 역사가가 있어 사야가의 황당무계한 큰소리에 현혹돼 당당하게 기요마사 선봉의 부장이라고 하거나 혹은 일본무인이라고 결단하는 자에 이르러서는 그 난폭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남해안의 왜구와 조선인 사이 잡혼에서 태어난 혼혈아 가운데 일본의 사정에 조금 밝은 자가 거짓으로 일본무장이라 칭하여 조선군에 투항한 것이라는 주장도 이어졌다. 일본에서 사야가의 존재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자리잡은 데는 시바 료타로의 한국 여행기에 이어 역사학자 기타지마 만지의 연구서를 바탕으로 NHK가 제작해 1992년 TV로 방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 또 하나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기타지마는 일본이 패전한 이유의 하나로 히데요시군의 도주와 조선으로의 투항을 들었다. 일본 국내의 반발을 무릅쓰고 출병을 강행한 데다 군역이 기한 없이 길어져 군대 전체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는데, 전황마저 악화되자 견디지 못한 병사들이 일본으로 도주하거나 조선에 투항하는 사태가 빚어졌고, 그렇게 조선에 넘어간 사람의 하나가 사야가였다는 것이다. 이제 우록동은 수학여행단을 비롯해 일본인들이 즐겨 찾는 여행지가 됐다. 김충선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 때도 전공을 세워 ‘임갑병 3난의 공신’으로도 불린다. 이괄의 난이 일어난 1624년은 갑자년이다. 이때 김충선은 반란군의 부장(副將)인 항왜 서아지(徐牙之)를 벤 공으로 사패지를 받았지만, 사양하고 수어청의 둔전으로 삼게 했다. 이괄의 난 초기에는 항왜가 선두에서 싸운 반란군이 관군에 연승하며 도성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항왜와 항왜가 이국땅에서 맞서 싸워야 하는 현실이 당사자들에게는 엄청난 비극이었을 것이다. 사패지 반납의 이면에도 이런 복잡한 심경이 뒤얽히지 않았을까 싶다.
  • [서울광장] 여행길, 명나라 장수 공덕비와 마주치면/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여행길, 명나라 장수 공덕비와 마주치면/서동철 논설위원

    공주 공산성은 백제가 부여로 천도한 이후에도 지방행정의 중심지 북방성으로 기능했다. 이후 신라는 웅천주, 고려와 조선도 공주목의 중심으로 활용했다. 성 내부의 공주목 관아는 17세기 중반에야 지금의 시내 중심가 중동으로 옮겨 갔다. 공산성 내부에는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라는 생뚱맞은 비석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제독 이공(李公)과 위관 임제, 유격장 남방위를 기린다. 1598년 세운 것을 1713년 고쳐 세웠다고 한다. 공산성은 당나라 웅진도독부 치소(治所)로도 쓰였으니 중국과의 인연이 질기다. 2030년 부산 엑스포 예정지였던 북항이 내려다보이는 부산진성에는 진남대(鎭南臺)가 있다. ‘남쪽을 진압한다’는 장대의 이름은 말할 것도 없이 왜를 겨냥한 것이다. 곁에는 상당한 크기의 비석이 있는데, 뜻밖에 천만리영양천공비(千萬里潁陽千公碑)다. 천만리는 1597년 평양과 울산 전투에 나섰던 명나라 장수다. 귀화한 영양 천씨 후손들이 1947년 세웠다. 왜군은 정발 장군이 분전한 부산진성을 헐어 내고 뒷산에 증산왜성, 바닷가에는 보조성 자성대왜성을 쌓았다. 왜군이 물러나자 명나라 장수 만세덕을 기리는 부산평왜비(釜山平倭碑)를 세웠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조선은 1607년 옛 부산진성을 보수하는 대신 왜성을 그대로 부산진성으로 활용했다. 지금 보이는 가파른 성벽도 왜성의 흔적이다. 고금도는 강진 남쪽, 완도 동쪽의 섬이다. 강진에서 연륙교로 이어지고, 완도에서도 신지도를 거쳐 자동차를 타고 고금도로 들어갈 수 있다. 간척사업으로 고금도와 합쳐진 묘당도는 이순신의 조선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이 주둔했던 군항이었다. 고금도 관왕묘비는 1713년 좌의정 이이명이 비문을 짓고, 삼도수군통제사 이우항이 글씨를 썼으며, 승려 처환이 새긴 것이다. 관왕묘는 중국인들이 신으로 믿는 삼국지의 영웅 관우를 모신 사당이다. 진린은 1598년 고금도에 관왕묘를 세우고 직접 제례도 올렸다고 한다. 앞서 이이명은 1710년 고금도 관왕묘에 이순신과 진린을 함께 배향했다. 그런데 1931년 소설가 이광수가 불러일으킨 여론이 변화를 몰고 왔다. 이광수는 ‘고금도에서 충무공 유적 순례를 마치고’라는 답사기에서 “통분한 것은 관우의 묘정 서무(西廡)에 충무공을 배향한 것이니, 충무공이 관우의 신하처럼 됐고 동무(東廡)의 진린보다도 아래 서게 됐다”고 썼다. 묘금도 관왕묘는 1947년 이순신 사당이 되어 1953년 충무사 현판을 내걸었다. 명나라는 1592년 원병을 조선에 보냈고, 많을 때는 10만명 남짓한 병사가 주둔했다. 명군은 1600년 모두 돌아갔는데 길지 않은 기간 적지 않은 흔적을 남겼다. 서울에는 민충단ㆍ무열사ㆍ선무사가 세워졌고, 남원ㆍ안동ㆍ성주ㆍ여수 등에 관왕묘가 지어졌다. 장수를 기리는 비석은 공주, 부산, 고금도와 함께 보령, 남해, 울산, 청산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여행길 명나라 장수를 떠받드는 비석을 발견했다고 자괴감에 휩싸일 필요는 없다. 조선 후기 유행한 지방관의 선정비가 그렇듯 비석이란 세운 이들의 존경이 아닌 고통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명나라 장수를 칭송하는 비석도 이면의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 조선의 진심은 이랬다. 부산평왜비를 다룬 선조실록 1599년 10월 1일자 사관(史官)의 평가다. ‘옛날에는 기록할 만한 명망과 공로가 있어야 비석을 세웠다. 그래야 세월이 오래될수록 공로가 알려지고 시대가 멀어질수록 명망이 높아진다. 그럼에도 중국 장수들은 한 모퉁이에서 군사를 거느린 채 왜노(倭奴)가 물결을 드높이며 바다를 건너가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었다. 헛된 명성을 과장하더니 돌에다 공적을 새겨 이름을 전하려 하고 있으니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극에 이르렀구나.’ 오늘날 국가의 문서에도 어느 구석 진심을 적어 후세에 전하는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
  • [길섶에서] 다람재/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다람재/서동철 논설위원

    대구 출장길. 일만 하고 오는 것이 아까워 도동서원으로 간다. 현풍에서 서원에 들어가는 길은 이제 탄탄대로다. 과속방지턱을 몇 개 지나자 새로 뚫린 터널 끝에 서원이 싱겁게 나타난다. 구불구불 산길을 나서면 눈앞에 낙동강이 펼쳐지고, 대니산 등성이에 붙여 지은 서원이 그림처럼 다가왔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돌아갈 때는 다람재로 들어선다. 굽이굽이 좁은 산길로 올라가니 저 아래 도동서원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정상에는 작은 전망대도 세워졌는데 멀리서 흘러들어 다시 아스라히 흘러나가는 낙동강을 아무 생각 없이 오래도록 바라봤다. 비석엔 ‘낙동강 절벽 가까이 조성된 오솔길을 버리고, 1986년 현재의 다람재를 정비했다’고 적혔다. 한때는 서원에 가려면 낙동강 벼랑길을 감수해야 했나 보다. 다람재가 뚫리고도 그길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었을 게다. 너무 쉽게 만난 서원의 감동은 전 같지 않았지만, 서원이 그 자리에 없었다면 옛길 고개마루의 즐거움도 분명 덜했을 것이다.
  • [씨줄날줄] 서해안 봉수(烽燧)/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서해안 봉수(烽燧)/서동철 논설위원

    한국은 디지털 기술에서 앞선 통신 강국이다. 그런데 고려와 조선시대 때도 그 위상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에겐 봉수(烽燧)가 있었던 것이다. 봉우리와 봉우리를 이어 정보를 전달하는 봉수는 넓은 나라에서는 신호 단절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좁은 나라에서는 당연히 전령이 말을 달려 정보를 직접 전달하는 것이 훨씬 더 빠르고 정확했다. 한반도는 봉수를 활용하기에 매우 적절한 넓이였다. 봉수는 불꽃으로 알리는 연봉(燃烽)과 연기로 신호하는 번수(燔燧)를 합친 말이다. 변방 상황을 중앙에 알리는 것이 목적이다. 조선이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불꽃이나 연기를 5개 굴뚝에 올리는 5거제를 확립한 것은 세종 원년(1419)이다. 남쪽 해상의 경우 적의 움직임이 없으면 1거,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2거, 해안에 다가오면 3거, 접전하면 4거, 상륙하면 5거였다. 북쪽 봉수도 1거는 평안화(平安火)고, 적이 국경 밖에 나타나면 2거, 다가오면 3거, 침범하면 4거, 접전하면 5거였다. 세종은 전국 5개 봉수 노선을 확립하기도 했다. 1로는 함경도 경흥에서 양주 아차산 봉수, 2로는 동래 다대포에서 성남 천림산 봉수, 3로는 평안도 강계에서 서울 무악 동봉수, 4로는 평안도 의주에서 서울 무악 서봉수, 5로는 전남 여수에서 서울 개화산 봉수로 이어졌다. 이렇게 도성 주변에 접근한 정보는 최종적으로 목멱산(남산)에서 받아 조정에 전달했다. 엊그제 여수 돌산도에서 고흥-장흥-해남-진도-무안-영광-부안-논산-평택-강화에 이르는 5로 봉수 16곳이 사적으로 지정됐다. 모두 61개인 5로 봉수 중 대표성이 있고 보존 상태가 좋은 곳이라 한다. 서해안을 망라한 봉수답게 수군(水軍)이 운영한 특징이 있다. 앞서 2로 봉수 16곳도 사적으로 지정된 만큼 보존에 탄력을 받게 됐다. 다만 목멱산 봉수가 지정에서 제외된 것은 안타깝다. 남산에 근거 없이 재현해 놓은 봉수는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정보의 최종 수신지에 지금 보이는 것처럼 정보의 발신 기능을 뜻하는 5개 굴뚝이 있었는지부터가 의문이다. 북한 지역 3개 봉수의 보존도 과제다. 지금은 남북 관계가 어렵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오르고도 남을 유산인 만큼 공동 등재 노력으로 이어지면 좋겠다.
  • [씨줄날줄] 한영(韓英)의 가교 베델/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한영(韓英)의 가교 베델/서동철 논설위원

    한말의 영국은 한국인에게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얻고자 다른 서구 열강과 경쟁을 벌인 것이 그 하나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대하려는 러시아의 남하에 맞서 일본과 공조한 것은 대한제국의 운명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대한제국에서 활동한 몇몇 영국 언론인은 제국주의의 국권 침탈 움직임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정론(正論)을 폈다. 한말의 최대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한 어니스트 베델이 대표적이다. 조선과 영국은 1883년 조영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런데 조약 원안은 영국이 권익보장 강화를 요구하며 거부했고, 결국 ‘영국 군함이 조선 어디나 정박할 수 있고 선원이 상륙할 수 있다’는 내용이 추가로 담겨 비준됐다. 이를 바탕으로 영국은 1885~1887년 남해안의 전략적 요충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고 ‘포트해밀턴’이라는 이름의 군항으로 활용했다. 한영 관계의 ‘아픈 손가락’이다. 베델은 역사를 통틀어 한국인들에게 가장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은 영국인이다. 영국 신문 특파원으로 대한제국에 왔던 베델은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진 의혈 청년이었다. 배설(裴說)이라는 한국 이름도 가졌던 그는 37살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면서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윤석열 대통령의 영국 방문을 맞아 런던 시내 광고 영상에 대한매일신보와 베델이 소개됐다고 한다. 19세기 말에는 ‘반(半)문명국’으로 비쳤던 한국이다. 140년 전 불평등조약마저 감수했던 나라가 세계 10대 경제강국이 됐고, 그 대통령이 찰스 왕의 첫 번째 국빈으로 찾아갔으니 영국의 감회도 없지 않겠다. 2024년은 베델이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지 120년이 되는 해다. 정부는 베델과 대한매일신보를 기리는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베델의 존재를 영국에 널리 알리고 고향 브리스틀에 흉상을 세우는 것도 그 하나다. 단순히 한 언론인에 대한 기념물을 넘어 한영 관계의 미래를 굳건히 하는 상징물이 될 것이다.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힌 베델의 정신적 귀향이라는 의미도 크다. 아직도 베델의 존재를 모르는 영국 국민과 브리스틀 시민이 있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 [길섶에서] 동네 단상/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동네 단상/서동철 논설위원

    2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상가엔 분식집이 있다. 가끔 이 집을 찾는데 오래 봐서 그런지 주인이 남 같지 않다. 그는 한동안 과일과 채소를 팔았다. 상가 건물에 붙여 천막을 쳤으니 무허가였을 게다. 상가엔 내가 잘 가던 빵집도 있었다. 어느 날 빵집이 문을 닫았고, 뚝딱거리더니 과일·채소 가게가 천막을 헐고 이 자리에 입주했다. 고생하더니 마침내 ‘사장님’이 된 것이다. 과일ㆍ채소 가게는 여전히 단골집이었다. 작은 포장으로도 팔았으니 먹다 남은 과일ㆍ채소를 버리는 일도 없었다. 한데 몇 년이 지나자 분식집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나름의 ‘시장조사’ 결과였을 것이다. 채소ㆍ과일 가게도, 빵집도, 분식집도 애용하는 나는 업종이 바뀔 때마다 아쉽다. 이제 채소ㆍ과일이 필요하고 빵이 먹고 싶으면 차를 타고 나가야 한다. 친절한 분식집 사장님이 돈을 많이 벌어 채소ㆍ과일 가게도, 빵집도 냈으면 좋겠다. ‘삼남매 분식’이니 세 형제가 하나씩 맡으면 되지 않겠나. 진심으로 축원한다.
  • [씨줄날줄] 막걸리 한 사발/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막걸리 한 사발/서동철 논설위원

    지난달 충북 청주 문화제조창에선 ‘막걸리엔(&) 못난이 김치 페스티벌’이 열렸다. 전국 36개 막걸리 제조업체가 참여해 사흘 동안 열린 축제엔 5만명 넘게 몰렸다. 막걸리와 함께 이른바 못난이 농산물에 대한 수요 촉진 행사였다고 한다. ‘막걸리엔 김치’라는 축제 이름에선 옛날식 술도가의 추억이 떠오른다. 술도가의 사전적 의미는 ‘막걸리를 만들어 도매하는 집’이라지만 커다란 술독을 묻어 놓고 커다란 국자로 휘휘 저어 주전자에 담아 주던 동네 막걸리 가게도 흔히 술도가라고 불렀다. 길가 술도가에서 공짜 신김치를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곤 했던 세대가 작명(作名)에 참여했을 것이다. 막걸리가 왜 막걸리인지는 이견이 있는데, 어떤 주장이든 ‘서민이 주로 마시는 거친 술’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겠다. 그런데 ‘막’에는 ‘마구’라는 뜻과 함께 ‘지금 바로’라는 의미도 있다. 그러니 막걸리에는 ‘방금 거른 신선한 술’이라는 뜻도 있다. 실제 막걸리의 유통기간은 매우 짧다. 서울탁주제조협회가 운영하는 서울 망원동 홍보관에선 종종 시음회가 열리는데 ‘막걸리의 근대화 역사’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진다. 1960년대에는 스테인리스 탱크를 적재함에 올린 중형 삼륜트럭이 운송수단이었다. 막 생산을 시작한 국산 삼륜차에 반짝거리는 운반 탱크는 막걸리 산업의 발전을 상징했다. 한편으로 막걸리 한 말이 들어가는 이른바 ‘말통’을 자전거 한가득 곡예하듯 매달고 술집으로 배달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막걸리가 플라스틱 용기에 처음 담긴 것은 1967년이다. 요즘처럼 용기가 단단하지 않고 물렁물렁해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따를 때도 두 손을 쓰는 것이 불가피했다고 한다. 예의범절에 어긋난다는 불만이 높아져 한 손으로 따를 수 있는 보조 용기도 등장했다니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다. 어제 아침 서울신문에는 서울 탑골공원 주변에서 ‘막걸리 한 사발 1000원, 안주공짜’라는 문구를 내건 식당 사진이 실렸다. 이것도 싸지 않게 느껴질 노년층이 모이는 낙원동에서 ‘막걸리의 본질’이 살아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한데 한 병에 10만원이 넘는 ‘귀족 막걸리’가 등장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술의 존재 이유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지 싶다.
  • [씨줄날줄] 반야용선(般若龍船)/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반야용선(般若龍船)/서동철 논설위원

    경남 창녕은 최근 교동·송현동의 가야 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경사를 맞았다. 이맘때 창녕이라면 화왕산의 장관을 이루는 억새 군락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역시 가야시대 처음 축조됐다는 화왕산성은 정유재란 당시 홍의장군 곽재우가 왜군에 맞서 굳게 지킨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창녕에는 또 하나의 명산이 있다. 화왕산과 이어진 관룡산이다. 화왕산은 757.7m, 관룡산은 753.6m이니 높이로는 쌍둥이라고 해도 좋겠다. 관룡산 중턱 관룡사는 신라 8대 사찰의 하나로 394년(내물왕 39) 창건됐다는 설화가 전한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에는 원효가 중국 승려 1000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해 대도량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내려오는 유서 깊은 절이다. 관룡사에서 산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갑자기 시야가 트이고 계곡을 향해 내민 너럭바위와 석불이 나타난다. 용선대(龍船臺)와 통일신라 석조여래좌상이다. 불상은 3단의 연화대좌를 포함해 높이가 298㎝에 이르는 당당한 모습이다. 용선대라는 이름은 불교에서 말하는 반야용선(般若龍船)에서 비롯됐다. 중생을 고통이 없는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배다. 그러니 용선대는 극락으로 가는 배의 갑판에 해당하고, 여기 앉아 있는 부처는 선장이라고 해석해도 좋겠다. 용선대 부처의 존재로 관룡사 계곡엔 ‘극락으로 가는 거대한 배’라는 상징성이 부여됐다. 창녕 사람들은 용선대 석불을 ‘팥죽 부처’라고도 부른다. 어느 동짓날 관룡사 주지가 동자승에게 용선대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라고 했다. 용선대에 올랐더니 부처님 입가엔 벌써 팥죽이 묻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동짓날 용선대 부처에게 정성을 드리면 소원을 이룬다는 믿음이 퍼졌다. 문화재청이 ‘창녕 관룡산 관룡사 일원’을 국가지정유산 명승으로 지정 예고했다. 절과 병풍처럼 둘러진 기암괴석 산봉우리가 수려한 경관을 이루고, 반야용선을 재현한 듯한 용선대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 독특한 경관적 가치를 지녔다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관룡산과 관룡사뿐 아니라 용선대에서 바라보이는 산 아래 풍경도 지금처럼 보존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으면 좋겠다. 용선대에 올라보면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가질 것이다.
  • [길섶에서] 첫눈 오는 날/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첫눈 오는 날/서동철 논설위원

    11월 기온으로는 기상관측 이후 가장 높았다는 뉴스를 본 것이 엊그제 같은데 갑자기 찬바람이 분다. 아무리 기상이변이 일상화된 시대라고 해도 겨울이 오기는 오는 건가 보다. 조만간 눈도 내릴 것이다. 친구들이 만든 합창단이 부른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노래를 며칠 전 우연히 들었다. 정호승의 시를 노래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2절은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로 시작한다. 그러고는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고 커플을 위한 찬가를 부른다. 가수 진성의 ‘안동역에서’도 첫눈 오는 날의 이야기다. 그런데 ‘바람에 날려 버린 허무한 맹세였나’라고 절규하는 서두부터가 비극적 분위기를 풍긴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 새벽부터 오는 눈이 무릎까지 덮는데…’로 이어지면 비오는 날 헤어진 커플도 첫눈 오는 날 헤어진 듯 공감하기 마련이다. 정호승 시처럼 만나도 ‘안동역에서’처럼 헤어지는 것이 인생일 것이다.
  • [서울광장] 서울상업사박물관 어떤가/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서울상업사박물관 어떤가/서동철 논설위원

    서울시가 강북 도심의 세운상가 일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계획을 공표했다. 종묘에서 퇴계로를 잇는 상가와 주변을 대규모 녹지공간과 업무·주거용 건물, 문화·상업 시설로 재개발하겠다는 것이다. 상가 건물을 헐어내고 녹지화하면서 그 양쪽을 고밀도 주거·상업시설로 꾸밀 계획이다. ‘녹지생태도심’이란 표현을 앞세웠지만 낙후한 도심을 고층빌딩군(群)으로 바꾸겠다는 속내일 것이다. 도심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세운상가는 1967년 완공됐다. 개발시대의 상징이라는 긍정적 평가는 오래가지 못했다.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으로 꼽히는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라지만 추종자 사이에서조차 세운상가를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미 그의 작품 연보에서 지워졌다는 얘기도 있다. 세운상가 정비는 스카이라인을 바꾸면서 경제 활력도 크게 높일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자 할수록 오래된 역사를 보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노력도 더욱 치열해야 한다. 지금 세운상가의 겉모습은 그저 낡아빠진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운상가와 주변의 전문업종 밀집지역은 우리 경제 발전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양도성의 4대문 내부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역사를 돌아보면서 조상들이 정치지상주의에 매몰돼 실사구시적 사고를 하지 않은 것을 한탄하곤 한다. 그럼에도 문화유산 보존에서조차 정치사 위주로 치달아 막상 사람이 먹고 살아간 역사에는 지극히 소홀한 모습을 보여 준다. 도성 내부지역의 문화유산 보존 실태를 보면 이런 현상은 너무나도 뚜렷하다. 조선은 한양도성을 설계하면서 정치적 권역과 경제적 권역을 분명하게 나눴다. 경복궁과 육조거리가 있는 광화문 일대가 정치 권역이라면 종로거리는 경제 권역이었다. 종로1가부터 동대문에 이르는 종로6가까지 국가가 정책적으로 조성한 육의전 거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조선은 경제와 상업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런 인식을 도성 조성 계획에서부터 적극 반영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오늘날 도성 내부 보존은 상업사를 외면하고 있다. 경복궁과 육조거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 복원하는 작업이 오늘도 이루어진다. 하지만 종로의 경제 권역은 오히려 급격하게 파괴되고 있으니 안타깝다. 종로 초입부터 대형건물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지하에 남아 있던 육의전의 흔적도 사라지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종로의 조선시대 상업 역사가 완전히 잊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서울시의 세운상가 재개발 계획에 주목하는 것은 조선시대 상업사를 복원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아도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종묘 건너편 세운상가 초입의 고층빌딩 계획을 두고 맞서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하지만 서울시도 초대형 공영개발에 무엇이든 문화 공간을 계획하고 있을 것이다. 그 저밀도 문화공간을 종묘 건너편에 자리잡게 하면 논란은 사라진다. 세운상가 재개발 과정에서 부지의 전면적 발굴조사는 불가피하다. 특히 종묘 건너편의 지하에는 당연히 육의전 유구가 남아 있을 것이다. 민간업체의 개별적 개발사업 과정에서 훼손이 가속화되고 있는 조선시대 상업 역사의 흔적이다. 서울시의 공영개발에서도 같은 운명에 처하는 불행이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종묘 건너편 세운상가 초입은 서울상업사박물관이 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지하의 육의전 유구를 그대로 전시 콘텐츠로 활용하는 새로운 개념의 박물관을 희망한다. 문화유산 보존에 대한 서울시의 의지를 드높이고 조선 상업 유적의 영구보존도 현실화하는 일석이조 효과가 있다. 녹지공간 건너에 세운상가역사박물관이 들어서면 더더욱 좋겠다.
  • [씨줄날줄] 창작판소리/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창작판소리/서동철 논설위원

    요즘 잘나가는 소리꾼 이자람의 창작판소리 ‘노인과 바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 원작 소설과 비슷한 분위기로 시작한다. 그런데 다음 순간 “노인이 다랑어회를 한번 떠 보는데, 회 뜨는 솜씨 말해 뭐해. 저 수산시장 사장님들이 주르르르 와서 구경 한번 해보고 갈 듯이”라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한국화한다. 앞서 박애리의 ‘아기공룡 둘리’도 창작판소리의 저변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또랑광대 김명자는 ‘슈퍼댁 씨름대회 출전기’로 이름을 날리는 스타 소리꾼이다. 먹성 좋은 아이 넷을 키우는 성북동 슈퍼댁이 김치냉장고를 타겠다는 일념으로 여자 천하장사 씨름대회에 출전하는 이야기이다. “싸움도 슈퍼, 수다도 슈퍼, 욕도 슈퍼, 인심도 슈퍼”인 슈퍼댁은 바로 우리네 자화상이다. 또랑광대는 ‘명창’의 상대적 개념으로 기량이 부족한 소리꾼을 일컬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시대의 문제로 관객과 소통하는 소리꾼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리잡았다. 너무나도 일상적이어서 오히려 파격적인 내용을 소리화하고, 극장이 아닌 마당을 무대 삼아 기존 판소리 공연과의 차별화를 꾀했다. 마당으로 돌아가는 것은 전통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2001년 제1회 또랑광대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은 ‘스타대전’이 상징적이다. 인터넷게임 스타크래프트를 판소리화한 스타대전은 이후 김용화가 ‘배틀 그라운드’를 작창하는 바탕이 됐을 것이다. 배틀 그라운드는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메카 피시방에 한 청년이 들어서는디 … 1학기 시험을 마치고 기분 좋은 마음으로 사양 좋은 컴퓨터에 자리잡고”로 시작한다. 창작판소리는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라는 광고 문구로도 유명했던 박동진 명창이 1960년대 ‘예수전’과 ‘이순신전’으로 막을 열었다. 1980년대 임진택은 ‘똥바다’, ‘오적’, ‘오월 광주’ 등을 발표했으니 이 역시 시대정신을 담으려는 노력이었다. 이자람의 ‘노인과 바다’는 2019년 초연 이후 국악 분야의 최고 인기작으로 떠올랐다. 최근 관람 후기 중에는 ‘주인공 쿠바 어부 산티아고가 초고추장도 없이 다랑어회를 먹었을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카리브해가 배경인 ‘노인과 바다’가 우리 이야기로 느껴지도록 이끈 창작판소리의 힘이다.
  • [씨줄날줄] 서울 독도/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서울 독도/서동철 논설위원

    경기 고양시 일산신도시의 가와지마을 자리에는 구석기시대부터 줄곧 사람이 살았다. 5000년 전 볍씨가 출토된 유적지다. 토층 조사에서 벼의 생육에 알맞은 저습지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더 오래전에는 바닷물이 드나들었음을 보여 주는 지질학적 증거도 확인됐다. 일산신도시는 남북으로 길쭉한 모양이다. 그런데 가와지를 찾아가면 신도시 중앙로에서 한강쪽이 아니라 반대편 고봉산 방향으로 치우친 곳에 자리잡고 있어 놀라게 된다. 가와지는 조선시대 전기만 해도 조수간만의 영향을 받았으니 지금의 일산신도시 대부분이 저습지였다는 뜻이다. 실제로 고양시와 건너편 경기 김포시를 지나는 한강 하류의 과거 모습은 지금과 달랐다. 초대형 호수를 연상케 했을 주변 한강은 조선시대 이후의 간척사업으로 오늘날의 모습처럼 바뀌게 된다. 간척사업은 조선 숙종 시대 고양에서 먼저 시작됐다. 행주산성 하류쪽 한강에 둑을 쌓아 만들어진 거대한 농경지가 일산신도시와 자유로 사이 신평(新坪)이다. 한강 건너 김포의 간척사업은 20세기가 되어서야 본격화됐다. 고양과 김포 사이 한강엔 퇴적으로 이루어진 갈대섬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홍도(紅島·鴻島)도 그중 하나였는데, 일제강점기 섬을 그대로 둑으로 활용하면서 김포평야로 불리기도 했던 홍도평(坪)이 탄생했다. 양안(兩岸)의 제방 축조로 한강은 폭이 좁아졌고 유속이 빨라지면서 갈대섬은 대부분 물살에 깎여 나갔다. 고지도에 보이는 독도(獨島)도 홍도평을 간척하며 흙을 퍼날라 사라질 운명이었지만, 바위로 이루어진 일부만 형제섬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일산대교 부근이다. 김포시는 지난여름 형제섬의 행정 명칭을 되돌리는 ‘독도 부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형제섬에 남은 건축물에 걸포동 주소를 부여해 김포시 관할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는 작업도 마쳤다. 조선시대 ‘전국 8도 군현지’가 김포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됐다. 정치권이 경기 김포시의 서울특별시 편입을 추진하고 있으니 성사된다면 ‘김포 독도’는 자연스럽게 ‘서울 독도’가 된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작은 바위섬이 하루아침에 한강 수상 관광의 중심으로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 선조 마음 돌린 ‘정탁의 상소’… 명량대첩 승리 만들고 조선을 구하다[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선조 마음 돌린 ‘정탁의 상소’… 명량대첩 승리 만들고 조선을 구하다[서동철의 임진왜란 열전]

    선조는 왜란이 발발하고 마지막 희망으로 삼았던 신립의 중앙군이 충주 탄금대에서 무참히 패하자 황망히 한양도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향했다. 난공불락으로 여겼던 평양성마저 다시 내주자 선조는 요동 망명의 뜻을 굳히게 된다. 결국 광해군을 황급히 세자로 삼고 종묘사직을 받들어 나라를 지키도록 했다. 행재소(行在所)와 더불어 별도 조정인 분조(分朝)를 가동한 것이다. 영의정 최흥원을 비롯해 10명 남짓한 중신이 분조에 배속됐는데, 좌찬성 정탁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분조는 사실상 이후의 전쟁 수행을 주도하다시피 했다. 분조의 실상을 오늘날에도 가감없이 살필 수 있는 것은 정탁이 남긴 ‘피난행록’(避難行錄) 덕분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후세에 뚜렷이 각인된 이유는 따로 있다. 충무공 이순신이 처형 위기에서 벗어나 명량대첩으로 전세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정탁이 상소로 선조를 설득한 결과다.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이 세상을 떠난 뒤 실록에 실린 졸기(卒記)는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에 각각 전한다. 선조실록 본문은 ‘서원부원군 정탁이 죽었다’는 한 줄이다. 그런데 사관(史官)의 평가가 제법 길다. ‘탁은 인품이 유순하고 온후한 사람인데, 등과했을 당시 명망이 없어 오랫동안 교서관에 머물러 있었다. 일찍이 향실(香室)에서 숙직하던 날 문정왕후가 불공을 드리려 하자 불가한 일이라고 고집하면서 끝내 향을 올리지 않았다.’ 사관은 정탁이 ‘이 사건 때문에 당세(當世)에 중시되고 현로(顯路)가 열리게 됐고 결국 재상에 발탁됐다’고 했다. 명종의 어머니로 수렴청정을 하며 권세을 휘둘렀던 문정왕후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대비를 상대로 유교국가의 정통성을 지켜 세상에서 인정받고 벼슬길도 열렸다는 뜻이다. ‘나이 들어서는 벼슬에서 물러가기를 청했으니 옛사람의 기풍이 있었다. 자리를 탐하여 늙어도 물러가지 않는 자에 비하면 차이가 크다’고 했으니 최상급 추도사다. 그런데 수정실록은 다르다. ‘정탁이 죽었다. 정탁은 예천 사람으로 류성룡과 친해 재상이 되었으나 언제나 우유부단했다. 성룡이 조정에서 떠나자 탁도 해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이때에 이르러 집에서 병으로 죽었다.’ 광해군 시대 북인이 중심이 돼 서술한 선조실록을 인조반정 이후 서인 시각에서 고친 것이 선조수정실록이다. 약포는 젊은 시절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문하에 모두 출입했다. 남명과 퇴계는 각각 북인과 남인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다. 졸기의 평가가 바뀐 이유도 정치적 상황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피난행록’을 읽어나가다 보면 약포가 선조수정실록의 서술보다는 선조실록의 평가에 더 근접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1592년 6월 8일 대동강변에 왜적이 나타나자 선조는 영변으로 가겠다고 고집한다. 평양부민들은 떠나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정탁은 10일 이렇게 주청했다. ‘서울을 지키지 못한 것은 돌이킬 수 없다. 다행히 평양은 성곽이 완비되어 있고 식량도 아직은 버틸 만한 데다 패수(浿水·대동강)는 중국의 장강(長江) 같은 천혜의 참호다. 평양을 버리면 큰일을 그르친다. 엎드려 성상(聖上)의 명철한 결단을 바라오니 반드시 대가(大駕)의 행차를 멈추어야 한다’고 했다. 누가 봐도 줄을 잘 서 출세하는 부류의 언동은 아니다. 정탁의 절절한 호소에도 선조는 ‘적의 예봉은 피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선조가 광해군에게 분조를 꾸려 강계로 가도록 명한 것은 영변에서 의주로 출발하기 직전인 6월 14일이다. 분조는 최흥원과 정탁, 형조판서 이헌국, 부제학 심충겸, 형조참판 윤자신, 호조참판 류자신, 병조참의 정사의, 승지 류희림, 익위 류조인 등의 면면이었다. 이후 순변사 이일이 합류하는 등 8월이 되면 분조는 당상관 13인에 당하관 30인에 이르는 체제를 갖추게 된다.평안도 북동쪽 내륙의 강계는 4개의 하천이 합류하는 전략적 요충지다. 그런데 나이 든 대신으로 이루어진 분조는 발걸음이 느렸고 이미 주변 지역에서 왜적이 출몰하고 있었다. 강계를 거쳐 함흥으로 간다는 구상은 실현되기 어려웠다. 함경도는 머지않아 가토 기요마사의 왜적 2군이 휩쓸게 된다. 정탁은 분조의 사정을 이렇게 적어 의주 행재소의 선조에게 올렸다. ‘동궁의 행차를 모시는 인원은 그 수가 본디 적었는데, 늙고 병든 사람이 다수를 차지해 낙오자가 있었던 데다 골짜기와 고개를 치달리느라 마부와 말이 몹시 지쳤습니다. 험한 길에 자빠지고 엎어지며 지금 이천(伊川)에서 관동의 온당한 곳으로 가고자 하나, 적은 이미 철원을 경유해 김화 등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분조는 운산, 개평원, 희천, 영원, 양덕현, 곡산, 이천, 문암, 곡산, 성천, 자산, 순천, 숙천, 안주, 영유, 증산, 함종, 용강, 영유, 영변, 정주 등 안전한 곳을 찾아 불과 며칠 단위로 옮겨다녀야 했다. 장동역에서 설한령으로 가는 6월 19일자에는 이렇게 적었다. ‘왕세자(광해군)는 고개 아래 민가에서 묵었고 신료들은 모두 노숙했는데, 저녁에 가랑비가 내렸다.’ 분조의 과제는 전쟁 수행과 민심 수습이었다. 정탁은 분조가 주어진 역할을 성공적으로 이뤄 내려면 독자적 인사권 행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부왕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광해군은 하지만 임면권 행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정탁은 전시 상황인 만큼 분조가 먼저 관원을 임시로 임명하고 행재소에 보고하겠다고 선조에게 주청한다. 이후 전국에서 올라오는 관리의 장계 등 각종 보고서는 분조가 먼저 열람하고 국왕에게 보내게 된다. 8월 10일자에는 행재소에 보낸 장계가 보인다. ‘나라의 형세가 아슬아슬 위급한 때를 당해 고을의 수령 자리가 빈 곳을 임명해 채우는 것이 하루가 급한 만큼 그 가운데서 가장 급한 여러 곳을 임시로 임명했습니다. 심지어 중첩되게 임명했으니 지극히 황공하옵니다’라는 내용이다. 관리 임명권이 행재소와 분조 두 군데로 나눠져 있다 보니 때로는 서로 다른 인사발령도 없지 않았다.분조는 1000명 남짓한 군졸로 자체적 군사력도 확보했다. 정탁은 의병에도 눈을 돌린다. 실제로 분조가 거쳐 가는 지역에서는 의병이 다투어 봉기했다. 정탁은 12월 의병을 활용해 도성을 수복하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경기도에는 의병조직인 의려(義旅)가 40개 남짓이나 있으니 명망 있는 인물을 도순찰사로 관군과 의병을 통합해 이끌게 하면 승산이 있나이다’라고 했다. 첫 번째 분조는 1592년 6월 14일부터 이듬해 1월 20일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평양성 수복 전투에서 승리하고 왜군을 추격하던 명나라 군사는 벽제관에서 대패하자 강화협상에 나서게 된다. 명군은 조선에 세자로 하여금 직접 하삼도 방비에 나서게 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하는데 그 결과 다시 분조가 성립된다. 정탁은 1593년 11월 19일부터 이듬해 8월 25일까지 2차 분조에도 참여한다. 2차 분조는 전라도 전주와 충청도 공주·홍주(홍성)를 오갔다. 시간이 흘러 1597년 2월 1일 선조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하옥시키라 명한다. 조선과 왜를 오간 이중첩자 요시라(要時羅)가 가토 기요마사의 움직임을 미리 알려 주었는데도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두어 기다릴 것’이라며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앞서 12월에는 도체찰사 이원익이 주도해 부산포 왜군진을 공격하고 화약고를 불태우는 쾌거가 있었다. 그런데 통제영 군관들이 자신들의 공로인 양 보고했는데 이순신이 그대로 장계를 올린 것도 빌미가 됐다. 1597년 2월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체포된 이순신은 3월 4일 서울로 압송됐다. 선조는 승정원에 비망기를 내려 ‘죄를 용서할 수 없다’고 했으니 이순신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1298자로 이루어진 정탁의 상소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순신은 큰 죄를 지었으나 성상께서는 얼른 극형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두둔하여 문초하시다가 그 뒤에야 엄격히 추궁하도록 허락하시니, 다만 감옥 일을 다스리는 체모와 순서만으로 그러심이 아니라 인(仁)을 베푸시는 한 가닥 생각으로 기어이 그 진상을 밝힘으로써 혹시나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으시고자 바라심에서 하심이라, 성상의 생명을 중시하는 마음이 자못 죄를 짓고 죽을 자리에 놓인 자에게까지 미치시므로 신은 감격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언뜻 이해가 어려울 만큼 복잡한 수사(修辭)가 인상적이다. 다음에 나오는 본론은 ‘왜적이 이순신을 무서워하고 있으니 임금께서 너그럽게 용서해 전장에서 공을 세우는 것으로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다. 선조의 복잡한 심경을 헤아리다 보니 완곡하기 이를 데 없는 상소가 됐을 것이다. 정탁은 예천 출신으로 1558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도승지, 대사성, 강원도관찰사, 대사헌, 예조·형조·이조 판서,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했다. 호종공신 3등에 녹훈됐고 서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 [길섶에서] 어떤 묵념/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어떤 묵념/서동철 논설위원

    주류성은 나당연합군과 대치하던 백제부흥군이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이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성의 위치를 두고 역사학계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엇갈린다고 한다.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의 운주산성도 주류성일 가능성이 제기된 곳 가운데 하나다. 운주산에는 1994년 고산사(高山寺)라는 작은 절이 세워졌다. 이 절이 특별한 것은 백제부흥군의 원혼을 위로하는 일종의 원찰(願刹)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백제의자대왕 위혼비를 중심으로 큰 법당인 백제극락보전과 도침당, 그리고 백제루가 제법 규모 있게 자리잡고 있다. 백제부흥군의 대장군 도침은 스님이었다고 한다. 30주년 백제고산대제가 지난주 열렸다. 백제 문화를 잇는다는 행사의 취지답게 지역 인사들이 많이 자리했다. 식순의 하나인 ‘백제부흥군에 대한 묵념’이 신라 지역 사람에게는 어떤 느낌일까 싶기도 했다. 이런 게 문화의 다양성이지 하며 산중의 가을 저녁을 흠뻑 즐겼다.
  • [씨줄날줄] ‘근대 문예인’ 위창 오세창/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근대 문예인’ 위창 오세창/서동철 논설위원

    조선시대 중인은 신분 질서의 최상층을 이룬 사대부를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조선 말기가 되면 중인 가운데 중국어 통역인 한어역관(漢語譯官)이 명실상부한 지도 세력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이들은 대과 과거시험만큼이나 어려운 한어 역과(譯科)를 거치면서 높은 수준의 학문과 교양을 쌓았다. 연경(燕京), 곧 북경을 드나들며 국제적 감각도 익혔다. 한어역관은 막대한 부(富)도 쌓을 수 있었다. 연경 사행(使行)은 국서(國書)를 전달하고 답서(答書)를 받아 오는 역할이었다. 더불어 우리가 방물(方物)을 보내면 중국은 이른바 회사품(回賜品)으로 응답했는데 그 물량이 적지 않았다. 상방원·상의원·내의원 등 궁궐 내부 각 기관에서 쓰이는 물품을 사행에서 조달하기도 했다. 여기까지를 공무역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사무역의 경우 조선 초기부터 정사·부사·서장관 등 3사신(三使臣)이 관여해 질책을 받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역관의 사무역은 일종의 관행이다시피 했다. 그러니 역관들은 자제들도 같은 이익을 누릴 수 있도록 사교육에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었다. 아들이 7~8세만 되어도 가숙(家塾)을 만들고 최고 학자들을 ‘과외 선생’으로 불러 과거를 준비시켰다.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오경석 집안은 8대 역관으로 이름을 날렸다. 위창(葦滄) 오세창(1864~1953)이 이 집안의 마지막 역관이다. 위창은 역관에 머물지 않았다. 1886년 박문국 주사로 한성순보 기자를 겸했고, 1894년 군국기무처 총재 비서관이 됐다.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1897년엔 도쿄외국어학교에 머물렀다. 이후 만세보와 대한민보 사장을 지냈고 3·1운동 때는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옥고를 치렀다. 광복 이후엔 서울신문 초대 사장을 지냈다. 위창은 서화 연구가로 더욱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높은 수준의 문화적 교양에 경제력이 뒷받침되면서 예술품 수집 감상의 토대가 됐을 것이다. 올해는 위창 서거 70주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근대 문예인, 위창 오세창’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글자 그대로 격변의 시대를 살아간 대표적 문예인으로 위창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그의 독창적인 상형고문(象形古文)과 전서 작품도 볼 수 있다.
  • ‘책거리 작가’ 조은희 개인전…현대적 민화의 세계

    ‘책거리 작가’ 조은희 개인전…현대적 민화의 세계

    현대적인 창작 민화의 새로운 세계를 펼쳐가고 있는 화가 조은희의 개인전이 27일부터 11월 1일까지 혜화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조은희는 홍익대 미술교육과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화가답게 전통적인 민화 정신(folk soul)에 매우 충실하면서도 서양화적 색감과 상상력을 작품에 담는 미래지향적인 화풍을 선보여 주목받는 화가다. 그는 ‘책거리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서책을 비롯한 양반집 사랑방의 모습을 담은 우리 전통 민화 책가도(冊架圖)의 이미지를 참신한 감각으로 재구성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조은희는 책가도의 서책 묶음을 화면 곳곳에 배치하는데, 원색을 과감하게 사용한 현대적인 화풍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게 한다. 현재 한국민화창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작가는 지난해 헌법재판소 도서관에서 열린 ‘책거리 민화전’을 주도하기도 했다. 작가의 첫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회에서는 산(山)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진다. 원색의 산 봉우리를 중심으로 책가도 이미지가 조화롭게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다. 조은희 자신이 굳이 강조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불교적 분위기도 조심스럽게 풍긴다. 그의 그림에 나타난 산 봉우리에서도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곳곳의 책거리 이미지는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도 때로는 제석천이 주인인 33천(天)의 궁전을, 때로는 불교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상징한다. 무엇보다 작가가 살고 있다는 팔당호수 연화리의 풍경에서 책가도의 이미지는 석탑이 되기도 하고, 전각이 되기도 하며, 또한 절 주변의 소박한 마을이 되기도 하는 마법을 부리는 모습이 매우 흥미롭다. 미술사학자인 정병모 한국민화학회 회장은 “조은희의 작품은 민화의 명랑한 정서와 낙관주의적 세계관이 충만해 있다”면서 “편안하고 즐거운 그의 작품은 오늘날 더욱 높은 가치를 부여받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서동철 기자
  • [씨줄날줄] 로만글라스/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로만글라스/서동철 논설위원

    언젠가 테헤란의 이란국립박물관을 찾았을 때 경주 황남대총의 봉수형병(鳳首形甁)과 너무나도 닮은 유리 그릇이 전시돼 있어 반가웠다. 새의 머리를 연상케 하는 표주박 모양의 아름다운 유리병으로 중국을 거치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유리잔 역시 경주 천마총에서 나온 파란색 유리잔과 같은 장인이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만큼 닮은꼴이었다. 천마총 유리잔은 국립경주박물관 문화상품 매장에서도 복제품이 팔리고 있을 만큼 예쁘다. 테헤란에는 유리도자기박물관도 있다. 유리 문화에 대한 이란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곳에서는 BC 1300년 시작됐다는 이란의 유리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자연 상태에서 찾을 수 있는 유리의 재료와 유리공예품에 특유의 색깔을 내는 광물질도 흥미롭다. 목걸이용 유리 구슬의 거푸집도 보였는데, 황남대총 북분 출토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라가 당시는 서역으로 불렀던 서아시아 지역에서 유리공예 완제품은 물론 제조 기술까지 받아들여 활용했음을 알려 준다. 유리의 기원은 확실치 않다고 한다. 하지만 고고학적 조사 결과에 따르면 BC 2300년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유리 생산이 본격화된 것은 대롱으로 불어서 모양을 만드는 기술이 개발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런 방식의 유리 그릇을 이른바 로만글라스라고 하는데 서아시아를 점령한 로마가 유리를 전 세계로 퍼뜨리며 이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본거지 이란이 애써 사산글라스라고 부르려 하는 것도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한반도에서는 신라는 물론 가야 지역에서도 유리가 출토된다.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합천 옥전 고분군, 함안 마리산 고분군이 그렇다. 학계 일각에서는 대형 범선을 형상화한 창원 마산 현동 유적의 배 모양 토기를 근거로 실크로드가 아닌 바다를 거쳐 신라보다 1세기 빨리 전래됐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오늘 ‘가야 유리기(琉璃器) 기원, 유통 그리고 재활용-로만글라스 가야에 묻히다’를 주제로 부산에서 국제학술심포지엄을 갖는다고 한다. 손톱보다 조금 큰 마리산 출토 유리 조각 한 점이 갖는 힘이 놀랍다.
  • “섬진강이 내 시(詩) 속으로 들어온 것이지요.”…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마주한 시적인 순간 [인터뷰]

    “섬진강이 내 시(詩) 속으로 들어온 것이지요.”…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마주한 시적인 순간 [인터뷰]

    “섬진강은 제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줄곧 봐 온 친숙한 강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같이 지내다 보니 섬진강이 내 시(詩) 속으로 들어온 것이죠.” 자연을 벗삼아 살아가며 정감 어린 시로 많은 사랑을 받는 김용택(75) 시인은 지난 14일 충북 제천시 포레스트 리솜에서 ‘김용택 시인과 함께 하는 시/詩/적인 순간’을 주제로 열린 문학 콘서트에 앞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섬진강 시인’이라는 애칭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전북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에서 섬진강을 벗삼아 살아가고 있는 김용택 시인은 이날 문학 콘서트에서 참가자들에게 자신의 시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솔직 담백하게 공유했다. 1948년 진메마을에서 태어난 김용택 시인은 1969년 순창농림고교 졸업한 뒤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2008년 8월 덕치초등학교에서 30년간의 교사 생활을 마치고 퇴임했다. 1982년 창작과 비평사의 ‘21인 신작 시집’에 연작시 ‘섬진강’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시작해 ‘꺼지지 않는 횃불’, ‘강 같은 세월’,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등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며, 지금도 활발한 작품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인터뷰는 문화부 기자로 30년 넘게 문화계 인사들을 만난 서동철 논설위원이 진행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오랜만에 뵙습니다. 건강은 어떠세요. - 나이가 들어서 이제는 여기저기 아프죠. 나이가 들면 (몸과 마음이) 좀 더 편해질 줄 알았는데. 인생이라는 게 살아가면서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 아프리카 탄자니아 출신으로 202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압둘라자크 구루나(Abdulrazak Gurnah)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그분은 소설을 집중적으로 보는데 지금 세 권을 읽었고, 칠레의 민중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의 시 평전을 두 번을 읽었죠. 그리고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의 ‘총 균 쇠’도 읽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문학에서 나가고 싶은 거죠. 그래서 우리가 처한 우리 인류의 문제라든가 경제 문제라든가 정치 문제라든가 뭐 이런 문제들이 우리나라도 복잡하지만, 사실은 세계 속에 다 들어 있거든요. 그래서 시각을 좀 다르게 해서 시를 쓰려고 합니다. ➜ ‘섬진강 시인’이라는 애칭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계신데요. - 섬진강은 제가 태어나고 자라면서 늘 보던 강입니다. 학교 다닐 때 강을 거슬러 다녔고, 교사 생활을 하면서 걸어 다니던 그냥 친숙한 마을 앞 강일 뿐입니다. 제 시의 모태가 된 곳입니다. ‘섬진강 시인’이라는 이름은 제가 문단에 나올 때 ‘섬진강’ 연작을 쓰다 보니 평론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붙인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이름 앞에 국토의 어떤 명칭이 붙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부담이 될 때도 있고 그렇습니다. (국민에게 불리는 애칭이) 제게 큰 의미는 없습니다. ➜ 스스로를 서정 시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 전쟁, 코로나 등 세계적인 이슈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구 공동체 자체가 굉장히 역동적이다라고 볼 수 있죠. 제가 주로 서정시를 쓰고 있지만, 서정시라고 해서 그런 문제를 도외시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서 우리 인류 문제를 더욱더 깊이 관여하고 개입하고 또 그것이 시로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을 하고 싶습니다.  ➜ 선생님의 시가 읽기 편한 서정시로 생각했는데 세상의 문제를 깊이 다루고 계시네요. -인간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자체가 산중 깊은 곳에서 홀로 살 수는 없고, 세상과 부딪치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외면할 수가 없죠.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나 어떤 사회적인 생각을 담지 않는 시는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제가 사는 농촌, 농민, 농사 이런 이야기들을 하다 보니 시대적인 정서, 감정, 감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밖에 없죠. ➜ 1980~90년대에는 세상 문제를 다룬 참여적인 시가 많았는데요. - 그때는 ‘시의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1970년대 이후 한 30년 동안은 산업화와 민주화가 부딪히는 굉장히 격동적인 시기였습니다. 직접적인 언어로는 시대와 대결할 수가 없으므로 시적 은유라든가 시적인 비유 이런 것들이 세상의 움직임과 같이 갈 수밖에 없으므로 굉장히 치열했습니다. 그래서 시가 사람들한테 많이 읽혔죠. 그때는 시가 앞서서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갔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죠. ➜‘선생님 시인’으로도 불리시는데 어떻게 교직 생활을 시작하셨나요. - 제가 교사가 될 무렵인 1969년에는 전국적으로 교사가 너무 많이 모자랐습니다. 특히 시골에는 더 많이 모자랐죠. 그러다 보니 고등학교 나온 사람들한테 교사 시험 볼 자격을 주고 4개월 동안 교육을 했습니다. 제가 (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놀고 있는데 친구들이 시험 보러 가자고 해서 갔는데 이게 덜컥 합격이 됐습니다. 그래서 38년 동안 선생을 했는데 제가 태어나고 자란 모교(덕지 초등학교)에서만 31년을 근무했습니다.➜ 한 학교에서 30년을 넘게 교사 생활을 하셨는데요. - 제가 근무할 때 전라북도 교육 인사원칙이 선생님이 한 학교 5년 밖에 못 있어요. 그럼 5년 있다가 다른 학교로 가야 하잖아요. 그런데 마암분교(현 마암초등학교)가 모교인 덕지초등학교의 이웃 면에 있었습니다. (고향을 떠나기 싫어서) 덕지초등학교에서 5년 있다가 이웃 학교로 가서 1년 있다가 다시 덕지초등학교로 다시 왔습니다. 그래도 마암분교에 가서는 좀 오래 근무했습니다. 5년 넘겨 있었습니다. ➜ 교사 생활하시면서 동시도 여러 편 쓰셨는데요. - 처음에는 동시를 안 썼는데 학교에서 학생들과 동시를 쓰는 시간이 있었어요. 아이들이 쓰는 시들을 보니 꽤 잘 쓰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한번 써 봐야 하겠네, 그렇게 생각하고 동시를 썼는데 한 15일 만에 동시집 한 권을 썼죠. 그때 쓴 동시가 ‘콩 너는 죽었다’라는 시집입니다. ‘콩 너는 죽었다’가 유명한 책이 되어 초등 교과서에 실려 있고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굉장히 유명한 시집이 됐죠. 지금도 동시를 쓰기도 합니다.  ➜ 학생들과 함께 시집도 내셨는데요. - 당시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쓴 시집을 냈는데 독일과 일본 등 외국에서 취재할 정도로 굉장히 유명해졌습니다. 독일이나 일본에서 방송하고 그랬었죠. (시집이 유명해지면서) 제가 마 분교에 있을 때 처음으로 교환학교라는 걸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입니다. 도시의 아이들이 마암분교에 와서 처음에는 2~3주일 공부하다가 갔는데 점점 늘어나 1년씩 있었죠. 그러다 보니 유명해지고 도시에서 아이들이 많이 오게 됐습니다. 당시에는 폐교 직전의 작은 학교였던 마암분교가 지금은 마암초등학교로 아주 큰 학교가 됐습니다. 전주에서 아이들이 버스를 타고 다니는 학생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반면 덕지초등학교는 학생이 줄어서 지금 6명이 다닌다는 것 같아요.  ➜ 지금 사시는 진메마을은 많이 변했나요. - 지금도 봄, 여름, 가을, 겨울 다 예쁘죠. 자연은 변한 게 없습니다. 변한 게 있다면 예전에 있던 한옥을 해체해서 다시 복원했고 그 뒤에다가 집을 지어서 거기서 살고 있습니다. 한옥 툇마루에 있던 ‘관란헌’(觀瀾軒)이라는 현판을 ‘회문재’(回文齋)로 바꿨습니다. 관란헌이라는 이름이 좀 어려워요. 그래서 초등학교 바로 뒷산이 회문산(回文山)이라서 회문재로 했습니다. ‘글이 돌아오는 집’이라는 뜻인데 아주 예쁘잖아요. ➜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많죠, 그런데 제가 마을 사람들한테 피해가 가지 않고 또 수선스럽지 않게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사실 마을에 사람이 거의 없지만 다 여든이 넘으신 분들입니다. 제가 마을에서는 소장파예요. 제자들은 몇 명 가끔 만나서 밥을 먹고 그럽니다. 이제 다 같이 늙어서, 모여 있으면 내가 젊어 보여요. ➜ 진메마을에서 문학 교실도 운영하시는데요. - 초·중·고등학교에서 강연을 신청하면 강연해주고 글쓰기도 가르쳐 주고 그렇게 있었는데 귀촌하신 분들이 찾아오셔서 문학 교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두 번씩 만나서 글쓰기를 하는 데 이분들이 굉장히 글을 잘 써요. 지금까지 시집을 4권이나 냈거든요. 모두 8명인데 예순, 일흔이 다 넘은 분들입니다. 저보다 한 살 많은 분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글을 가르쳐 달라고 오셨는데 어른들이라서 뭐 이래라저래라할 수 없고, 그냥 모여서 놀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모였다가 갈 수 없으니 글을 한 줄씩 써와서 읽자고 제안했고, 이렇게 하다 보니 시를 한편씩 쓰게 된 것이지요.  ➜선생님의 시가 교과서에 많이 실리고, 시험에도 많이 출제되는데 (시험을 보시면) 정답을 맞추실 수 있나요. - 솔직히 저는 못 맞추죠. 정답이 너무 어렵더라고요. 제가 이제 전주 살 때 여고 앞을 지났는데 여학생들이 “김용택 선생님, 저기 가신다”라면서 제게로 뛰어오는 거예요. 그리고 앞에 오더니 대뜸 “오늘 선생님 때문에 국어 문제를 틀렸어요”라고 그래요. “왜”라고 물었더니 “선생님 시가 시험에 나왔는데 (너무 어려워서) 다 틀렸다고”고 말해요. 그리고 언젠가는 학부모님들한테 전화가 와서 “우리 아이가 이렇게 썼는데 이게 맞지 않느냐, 근데 (학교) 선생님이 틀렸다고 한다”라며 정답을 물어봐요. 그래서 내가 그러죠. “저도 (정답을) 몰라요. (학교) 선생님들이 맞으시겠죠.”라고요.➜선생님의 시가 시험 문제로 출제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그래서 아이들이 시를 싫어한다고 생각해요. 시험 문제를 틀리니 기분 나쁘죠. 김용택의 시 읽다가 틀렸는데 기분이 좋지는 않잖아요. 시에 대한 어떤 뭐 친숙함, 시를 자연스럽게 공부하고 그런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고등학교나 대학 때 기본적으로 교과서에서 월트 휘트먼(Walter Whitman)이나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를 배우고, 공부하죠. 우리가 시를 계속해서 공부해야 상상력, 인간을 지키려는 노력, 또 환경을 지키려는 노력, 또 아름다움 등이 살아나잖아요. ➜ 시를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면. - 지금 우리 사회에서 아름다움이 점점 사라지고 있잖아요. 너무 격하고 너무 적대적이고 적개심을 가진 그런 말들이 횡행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너무 날카로워졌어요. 그리고 길을 가다 보면 사람들의 표정이 뭔가를 경계하거나 굉장히 공격적으로 보여요, 도시에서는 특히 더 그렇죠. 정치적으로 굉장히 격정적이고, 경제적으로 양극화가 심하죠. 그러다 보니 안심, 평화, 또 아름다움, 점잖음, 성실함, 착하고 선량함 등 중요한 인간 덕목들이 사라졌죠. 이런 나라가 무섭습니다. (웃음)➜ 앞으로 준비하고 계신 시집이 있으신가요. - 올해 시집이 나왔어요. 앞으로는 내 시로부터 도망간 시를 쓰고 싶어요. 지금의 시는 너무 갇혀 있어요. 시를 감옥에 비유하면 시인들이 시 속에 갇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좀 벗어나고 싶죠. 요즘 벗어난 시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뭐 다 만들어 본 건 아니지만, 시도는 한번 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이후 독서의 범위를 굉장히 넓혔습니다. 아프리카나 중동, 남아메리카의 칠레나 브라질 등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세계가 아닌 또 다른 세계를 보고 있습니다.  ➜ 선생님이 다시 ‘섬진강’을 주제로 시를 쓰신다면 내용이 좀 다를까요. - 이제 (기존의) 시에서 도망가고, 나가려 합니다. 나한테 나가고, 나한테서 떠나야 하고 그래야 우리가 사는 세계가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 번역된 외국 시들을 많이 읽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시적인 어떤 틀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자유자재로 어디에 구애됨이 없이 주제에 국한되지 않고 자유롭게 우리가 사는 세상을 쓰고 싶습니다.
  • [길섶에서] 섬진강 시인/서동철 논설위원

    [길섶에서] 섬진강 시인/서동철 논설위원

    ‘나는 어머니가 좋다. 왜그냐면 / 그냥 좋다’ 시인 김용택은 1999년 자신이 교사로 있던 임실 마암분교 전교생 22명의 글을 엮어 동시집을 펴냈다. ‘어머니’는 당시 2학년 어린이의 작품이다. 시인은 ‘이제 다시는 이 땅에서 이와 같은 아이들의 글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었다. 주말 제천 리솜리조트에서 열린 ‘시(詩)적인 순간’ 토크 콘서트에서 시인을 만났다. 마암분교 안부를 물었더니 뜻밖의 이야기가 돌아왔다. 학생수가 제법 늘어나 마암초등학교로 승격했고, 전주 시내에서 통학하는 어린이도 있다는 것이었다. ‘섬진강 시인’의 학교라는 이미지가 이런 변화에 보탬이 됐을 것이다. ‘교사로 행복했느냐’는 물음에는 시구절로 답변을 대신했다. ‘오랫동안 어린이들을 가르치면서 가르친 대로 살지 못했다. 아이들도 배운 대로 살지 않았다. 나는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괴로워했다.’ 그림 같은 섬진강변에서도 교육 현장이 아름다움만 가득할 수는 없었나 보다.
  • [씨줄날줄] 문화재 전담관/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문화재 전담관/서동철 논설위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재 담당 공무원은 문화유산 보존의 최일선에 있다. 개발에 따르는 문화재 훼손을 막는 것이 이들의 소임이다. 주민 생활 불편을 최소화하고 재산상 이익도 지켜야 한다. 마치 동전의 양면 같은 책무가 주어져 있다. 전문성을 갖춘 학예직이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경주시는 고고학과 민속학을 각각 전공한 왕경기획팀장과 문화재연구팀장을 비롯해 8명이 학예직이다. 문화재과와 왕경조성과라는 두 개의 과 단위 전담 조직을 가진 것도 이례적이다. 신라 왕경답게 문화유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처럼 비친다. 다른 기초자치단체와 비교하면 분명 진전이다. 정작 학예직들은 “경주시 문화유산 예산이 문화재청 예산의 10분의1”이라는 표현으로 아쉬움을 토로한다. 업무는 과중한데 성과를 내도 올라갈 ‘자리’가 없는 것은 더욱 맥 빠지게 한다. 경주시는 그래도 학예연구관 자리가 하나 있다. 하지만 연구관 직제가 없는 지자체의 학예연구사는 같은 직급, 같은 자리에서 평생을 일해야 할 뿐 최소한의 승진이라는 보상이 아예 봉쇄되어 있다. 조선 왕실 백자의 고향인 경기 광주시는 왕실요지팀을 두고 있다. 문화재팀과 별도로 왕실요지팀이 존재한다면 백자 요지에 대한 지역의 관심에 박수를 보낼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왕실요지팀은 가마 유적 보호는 물론 다른 문화재 업무까지 떠안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왕실요지팀에는 고고학과 역사학을 각각 전공한 학예직이 두 사람 있다. 문제는 ‘연구사 30명이 넘어야 연구관 1명을 둔다’는 광주시 조례다. 광주시 학예연구사가 이 숫자에 이를 가능성은 없다. 그러니 승진 가능성도 영원히 없다. 이런 조례는 다른 기초지자체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자체에 문화재 전담관을 두도록 하는 문화재보호법 개정안이 엊그제 국회를 통과했다. 전국 지자체의 문화재 담당자는 1497명이지만, 전문성을 가진 학예직은 259명으로 17.3%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라고 한다. 일선 학예직 공무원들은 “일단 관심은 환영한다”면서도 “전담관 지정에 앞서 전문성 있는 학예직을 필요한 만큼 채용하는 것이 순서”라고 입을 모은다. 일하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승진 제도 역시 차근차근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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