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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래식계 ‘원조 꽃미남’ 김정원 7일 서울 충무아트홀서 콘서트

    클래식계 ‘원조 꽃미남’ 김정원 7일 서울 충무아트홀서 콘서트

    ‘앙증맞은 화환이나 초콜릿을 들고 있는 소녀팬들이 100m도 넘게 줄지어 서 있다. 한참을 기다리다, 저 멀리서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내면 상기된 표정으로 일제히 탄성을 지른다.’ ‘오빠부대’가 조금씩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유명 콘서트홀의 요즘 풍경이다. 하지만 대중가수에 대한 팬들의 기대와는 분명히 다른 무엇이 있다. 이들이 무대에서 펼치는 음악도 표준적인 클래시컬 레퍼토리가 주류. 아무리 뛰어난 외모를 지녔어도 해외 유명 콩쿠르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등 국제적으로 공인된 수준이 아니면 ‘오빠’ 대열에 합류하기는 어렵다. ●섬세한 음색·화려한 테크닉과 카리스마 대중문화적 감수성에 세계 수준의 음악적 능력을 겸비한 젊은 세대 연주자가 몰려오고 있다. 반면 모자라는 연주능력을 덮어주었던 ‘크로스오버’는 국내 시장에서 퇴조하고 있다. 피아니스트 김정원(32)은 이런 분위기를 선도하는 클래식계의 원조 ‘꽃미남’. 여기에 섬세한 음색과 화려한 테크닉, 강렬한 카리스마가 더해져 어떤 대중문화의 스타도 부럽지 않을 만큼 많은 여성팬을 갖고 있다. 그가 ‘김정원과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7일 오후 5시 서울 충무아트홀에서 콘서트를 펼친다. 김정원이 불러모은 친구들은 바이올리니스트 백주영과 첼리스트 최정은, 색소포니스트 손성제, 소프라노 기수연, 테너 정호윤, 싱어송라이터 하림, 베이시스트 정재일 등 각 자의 분야에서 ‘한 가닥’씩 하는 인물 7명이다. 이날의 음악적 모임에 붙여진 ‘Attraction(매력)’이라는 부제는 뚜렷한 개성과 조화로운 앙상블을 동시에 이루어 청중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서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김정원은 지난해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에 피아니스트로 특별출연하여 대중문화 애호가들에게도 이름을 알렸다. 김정원의 어머니가 ‘은실이’ 등 히트작을 쓴 드라마작가 이금림이라는 것도 그가 대중문화 지향적일 것으로 선입견을 갖게 한다. 하지만 그의 대중문화적 감수성은 대중음악 지향성과는 다르다.‘호로비츠’에도 “국내에서 처음으로 클래식음악을 다룬 영화로 연주만 하면 된다고 해서 수락했던 것”이라고 술회한 것도 일맥상통한다. 그의 경력과 활동상황도 이를 증명한다. 빈 국립음대에 최연소 입학한 뒤 파리 고등음악원 최고 연주자 과정에 한국인 최초로 입학했다. 부조니 콩쿠르에 입상하고 뵈젠도르퍼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빈 심포니, 독일 하노버 방송 교향악단, 부다페스트 국립 교향악단 등과 협연한 정통파이다. 올해도 지난 1월 독일 뉘른베르크 심포니 및 폴란드 루토슬라브 필하모닉과 조금은 골치 아픈 바르토크의 협주곡 3번을 협연했다.6월29일과 7월1일에도 거장 엔리케 바티즈가 지휘하는 멕시코시티 국립교향악단과 슈만의 협주곡을 연주하고 난 참이다. ●대중문화스타 능가할 여성팬 확보 물론 ‘김정원과 친구들’은 내용이 훨씬 가볍다. 사라사테의 ‘카르만 환상곡’과 이탈리아 가곡 ‘아침의 노래’와 ‘물망초’, 베르디의 아리아, 이미 클래식음악회의 표준 레퍼토리로 자리잡은 피아졸라의 탱고와 두 곡의 영화음악 등이다. 대중문화적 감수성을 ‘무기’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김정원은 바이올리니스트 김수빈과 첼리스트 송영훈, 비올리스트 김상진과 M.I.K 앙상블을 결성해 활동하고 있다. 독자적인 ‘오빠부대’를 이끌고 있는 이 클래식 음악계의 스타들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때 정장차림에 점잔을 빼야 하는 우아한 장소의 대명사였던 콘서트홀의 이미지도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2만∼6만원.(02)2230-7890.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소년의 집 기금마련 음악회’ 지휘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54)씨가 ‘소년의 집 기금 마련 음악회’를 알리는데 팔을 걷어 붙였다. 정씨는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는 아동복지시설인 부산 소년의 집 관현악단을 오는 8월20일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지휘할 예정이다. 정씨는 28일 자청해서 기자들과 만나 “소년의 집 관현악단에는 음악을 사랑하는 정신이 있는 만큼 감동이 클 것”이라고 강조했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문화유산에 숨겨진 과학의 비밀/고래실 펴냄

    보존과학자인 이태녕 서울대 명예교수가 충남 공주 송산리 6호 벽돌무덤을 처음 찾은 것은 1956년이었다. 그는 습기가 많은 여름철이었는데도 바닥을 포함한 벽과 천장의 벽돌 표면 전체가 완전한 건조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의문스러웠다고 한다. 특히 바닥의 중앙부로 곧게 뻗쳐 있는 골이 인상깊었다. 배수로처럼 보였는데 손을 넣어 보니 차가웠고 골을 만들고 있는 통로 표면은 젖어 있었다. 배수로는 묘 주위의 둘레석까지 5m 이상이나 길게 구축되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 보니 배수로에는 어떤 실용적 기능이 있는 것 같았다. 항상 묘실의 벽돌 온도는 배수로의 벽돌온도보다 높게 유지되고 있었다. 밤이나 새벽에 기온이 내려가면 묘실 공간에 퍼져 있던 수분은 배수로 벽돌에 우선적으로 결로(結露)될 것으로 생각됐다. 이 배수로 아닌 배수로는 제습기 구실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생각해도 기가 막히게 훌륭한 결로 방지 장치였다고 노학자는 술회했다. ‘문화유산에 숨겨진 과학의 비밀(고래실 펴냄)’에 담겨있는 내용이다.‘문화유산… ’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950년대부터 문화유산을 과학적 시각으로 연구한 과학자들의 성과를 정리하고자 ‘고미술의 과학’이라는 주제로 2005년 실시한 특별강좌의 내용을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전상운(문화재 위원) 전 성신여대 총장은 “15세기 조선 세종시대 과학자들이 이룩한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질과 양에서 동아시아를 뛰어넘어 세계사의 시야에서 볼 때도 유례가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고 우리 역사에 대한 이유없는 열등감을 질타한다. 일본에서 1983년 나온 ‘과학사 기술사 사전’은 1400년에서 1450년까지 주요 업적으로 한국이 29건, 중국이 5건에 일본은 없으며, 동아시아 이외 나머지 전 지역이 28건으로 정리되어 전 세계 학계가 인정하는 객관적 사실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이밖에 ▲박성래(문화재 위원)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최항순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 ▲박상진 전 경북대 임산공학과 교수 ▲조병묵 강원대 제지공학과 교수 ▲정시영 서강대 기계공학부 교수 ▲강성군 한양대 신소재공학부 교수 ▲이성구 인하대 인문학부 교수가 전공분야별로 우리 과학사의 성과를 정리했다.1만 5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4) 매산리 석불입상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4) 매산리 석불입상

    중부고속도로에서 일죽인터체인지로 빠져나와 안성쪽으로 조금 달리다보면 용인 백암가는 길과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옵니다. 여기서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멀지 않은 곳에 고려시대 몽골군과의 격전지 죽주산성이 있는 비봉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지요. 산 아래로 다가가면 위세를 과시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높이 5.6m의 대형 석불이 있습니다. 경기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에 있어 매산리 석불입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지만, 동네사람들은 ‘태평미륵’이라고 부릅니다. 1530년 펴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 곳에 태평원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관계가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원(院)이란 교통의 요지마다 만들어놓은 일종의 관용숙소였지요. 고려 전기에는 이 불상처럼 모자처럼 보이는 사각형 보개(寶蓋)를 쓴 거대한 석불이 경기·충청도 일대에 집중적으로 조성됩니다.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는 충남 논산의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이 대표적이지요. 관촉사 보살입상은 광종 21년(970년)에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매산리 석불입상은 이런 생김새를 가진 석불로는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집니다. 입시기도에 영험이 있다는 대구 팔공산의 갓바위부처도 보개를 쓰고 있기는합니다. 다만 갓모양 보개는 석불이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가 아니라 나중에 올려진 것으로 보고 있지요. 통일신라가 무너진 것은 지방 호족이 성장함에 따라 왕권이 크게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고려 태조도 호족 출신이지만, 새로운 왕조가 세워진 상황에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당면과제였을 것입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해낸 이가 고려의 제4대 왕 광종(재위 949∼975년)입니다. 광종은 후삼국 통일전쟁 시기 포로가 되어 노비로 전락했던 사람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는 노비안검법으로 호족의 경제적 기반을 흔들었고, 과거제를 실시하여 호족의 자제가 칼을 버리고 붓을 잡게 만들었습니다.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바탕으로 커다란 석불을 곳곳에 조성한 것도 권력이 지방 호족이 아니라 왕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겠다는 뜻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광종은 즉위 11년(960년) 준풍(峻豊)을 연호로 쓰면서 개경을 황도(皇都)로 선포했습니다. 이른바 칭제건원(稱帝建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고려가 중국과 대등한 나라라는 자주의식의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광종은 천자가 썼다는 12류 면류관을 썼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충남 서산에 있는 ‘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비’에는 광종이 면류관을 썼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기 어렵다는 고려 전기 석불의 보개는 바로 황제가 쓰는 12류 면류관을 모델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고려 왕조가 출범한 이후 숨죽이며 추이를 지켜 보던 지방 호족들에게, 황제를 부처로 신격화하여 요지마다 세워놓은 석불들은 무언의 경고판으로 역할을 톡톡히 해냈겠지요. 매산리 석불입상은 국가지정 문화재가 아니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미술품으로 크게 대접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한제국 이전에 최초로 황제국가를 표방한 광종의 자주의식이 조형적으로 변용된 사례라는 점에서 적극적인 재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 dcsuh@seoul.co.kr
  • 최근 출토 백제유물 300점 한자리에

    최근 출토 백제유물 300점 한자리에

    무령왕릉 이후 최대의 백제 고분 발굴이라는 2003년 충남 공주 수촌리 유적에서는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중국제 청자, 마구류 등이 쏟아졌다. 2005년 충남 서산 부장리 유적에서도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철제자루솥 등이 대거 출토되며, 이 해 전국을 통틀어 최고의 발굴성과로 꼽혔다.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기 이전 4∼5세기 한성백제 시대에 유력한 세력이 두 지역에 존재했고, 중앙에서 이 세력을 통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일간신문의 지면을 떠들썩하게 장식한 두 유적의 출토품은 이후 보존처리에 들어갔고, 고대사 전공자들이나 미술사학자들은 관심을 갖고 있어도 접근이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국립부여박물관은 수촌리 및 부장리 등 유적 조사에 참여한 충남역사문화원과 손잡고 ‘그리운 것들은 땅 속에 있다’는 제목의 특별전을 새달 3일부터 26일까지 갖는다. 충남역사문화원이 지난 5년동안 백제지역에서 발굴한 300여점의 중요 유물이 출품된다. 백제문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높이는 것은 물론 관련 학계가 최근의 출토 유물을 연구자료로 적극 활용해 백제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수 있도록 돕겠다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수촌리 유적에서 금동관모는 1호와 4호 무덤 두 군데서 출현했다. 보존처리가 거의 끝난 4호 무덤 출토품은 지난해 국립공주박물관 특별전에 출품된 적이 있지만 1호분 것은 이번에 처음으로 일반에 모습을 드러낸다. 내관(內冠)에 표현된 용무늬는 몸통에 비늘을 표현할 정도로 세밀하며 불을 내뿜는 듯한 혀 또한 인상적이다. 수촌리 1호분의 금동신발도 나온다. 앞과 옆에 T자형 무늬, 바닥에는 마름모꼴 무늬를 각각 반복적으로 넣었다. 이 신발에서는 무덤 주인공의 발뼈가 확인되어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부장리 출토 금동관모는 청동 바탕에 금을 입혀 만든 반원형으로,6각형 거북등무늬(구갑문·龜甲文)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안쪽에는 용과 봉황을 속이 보이도록 투조(透彫)했다. 이밖에 웅진도읍기 백제의 토기 생산과 유통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한 청양 학암리 토기가마터와 부여 읍내의 각종 유적지에서 나온 유물, 그리고 백제 지방 산성의 축조 및 운영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인 금산 백령산성 출토품 등이 함께 전시된다. 특별전은 유물을 성격별로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 개별 유적의 양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질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수촌리 1호분이라면 출토된 금동관과 칼, 토기 등을 하나의 세트로 전시하는 방식이다. 이병호 부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백제지역에서는 최근 잇따른 발굴로 고고학적 자료들이 다수 축적됐지만 고대사 등 관련 학계와 공유되지 못하고 있어 전시회를 기획했다.”면서 “앞으로 백제지역에서 활동하는 발굴조사기관을 하나씩 선정하여 발굴 결과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특별전을 지속적으로 가질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7500년전 토우 양양서 출토

    강원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동물 모양 흙인형(토우·土偶·문화재청 제공)이 출토됐다. 토우가 나온 문화층에서 채취한 목탄으로 방사선탄소연대를 측정한 결과 지금으로부터 7500여년 전인 BC 5570∼5480년으로 나타났다. 예맥문화재연구원은 양양 여운포∼송전 사이의 도로개설 부지를 발굴조사한 결과 국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신석기 시대 주거지를 확인하는 한편 토우를 비롯하여 결합식 낚싯바늘, 어망추, 좀돌날 몸돌 등 다양한 유물을 수습했다고 22일 밝혔다. 조사단은 “이번에 나온 동물 모양 토우는 국내에서 출토된 예술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면서 “선사시대 토템신앙과 연관된 것으로 생각되므로 이 시대 문화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이라고 설명했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3)‘양평 출토 금동여래입상’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3)‘양평 출토 금동여래입상’

    오스트리아 사람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에른스트 곰브리치(1909∼2001년)라는 미술사학자가 있습니다. 그가 쓴 ‘서양 미술사(The Story of Art)’는 우리나라에서도 미술학도는 물론 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필독서가 된 지 오래이지요. 이 책은 서문도 유명합니다.‘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라고 시작하지요. 현대는 모든 것이 미술이 될 수 있으니 미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미술은 이런 것’이라고 규정지어 놓으면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음을 걱정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대미술에서 벗어나 종교미술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문제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불교미술의 장인들은 ‘불상이나 탱화, 석탑, 부도는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말없이 강요하는 시대양식과 범본(範本)의 완강한 제약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일구고 싶은 욕심은 불교미술의 장인도 현대미술의 작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겠지요. 엄격한 제약 속에서도 현대미술 이상의 창조력을 발휘한 불교미술 작품은 그래서 더욱 가치있습니다. 1916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신화리에서 농지정리를 하다가 금동여래입상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7세기 전반 것으로 추정되는 여래상은 30㎝ 남짓한 크기로 대좌와 광배를 잃었으나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았지요. 이후 양평출토 금동여래입상이라는 이름으로 국보 제186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 불교미술실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첫 인상은 재능있는 젊은 조각가가 뉴욕이나 파리에 유학한 뒤 돌아와 삼국시대 불상을 ‘리메이크’한 듯 합니다. 미국이나 유럽의 수준이 우리보다 높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현대미술적인 분위기를 풍긴다는 뜻입니다. 이 여래상은 타원형을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추상적인 조형의도로 구상미술의 대표적인 존재인 불상을 만들어놓은 흔치않은 작품입니다. 곰브리치도 이 불상을 보았다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앞에서 바라보면, 이 불상은 크게 얼굴과 몸통을 이루는 두 개의 길다란 타원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얼굴은 몸통과 조화를 해치지 않으려는 듯 길어졌는데, 이 때문인지 만화영화의 캐릭터를 연상시킬 만큼 개성있는 표정입니다. 어깨가 좁아진 것도 얼굴의 타원과 균형을 생각했기 때문이겠지요. 여래가 걸친 대의(大衣)는 옷주름을 자연스럽게 내려뜨렸습니다.7개의 옷주름 역시 얼굴과 비슷한 크기의 반타원형에서 반복·확대해 나갔습니다. 타원형은 또 있습니다. 옆에서 바라본 얼굴과 몸통입니다. 정면에서 보이는 것처럼 부드러운 타원은 아니지만, 작품에 통일성을 부여하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분명하게 읽혀집니다. 불교조각 전문가인 곽동석 국립청주박물관장은 “미적 변형이 대담하게 이루어진, 삼국시대 불상 가운데 가장 생명력이 충만한 작품”이라고 평가합니다. 단순화시킨 조형의지와 장대한 신체의 조형성은 수대(隋代) 양식에서 때때로 나타나지만, 중국에서도 이처럼 힘이 느껴지는 불상은 드물다는 것입니다. 직접 만져볼 기회가 있었던 그는 또 이 금동불이 어떤 금동불보다도 무겁게 만들어졌다고 설명합니다. 그것 또한 상 전체에서 넘쳐나는 힘찬 기상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각가의 의도된 배려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지요. dcsuh@seoul.co.kr
  • 기돈 크레머 22일 바이올린 연주회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면서도 특유의 색채를 지켜나가는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와 크레메라타 발티카가 22일 오후 8시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연주회를 갖는다. 1947년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크레머는 현존하는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받들어지는 인물.1997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의 젊은 음악가들로 현악 앙상블 크레메라타 발티카를 만들어 세계를 누비고 있다. 러시아연방에서 탈퇴하면서 경제적으로는 어렵지만 음악적 재능은 뛰어난 발트해 3국의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내한연주회에서는 말러의 교향곡 10번의 아다지오 악장,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소나타 작품 134, 현대작곡가 칸첼리의 ‘리틀 다넬리아다’, 피아졸라의 탱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를 들려준다. 말러와 쇼스타코비치는 현악 오케스트라 용으로 편곡한 것이다. 크레머와 크레메라타 발티카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와 비발디의 ‘사계’를 묶어 ‘8seasons(8개의 계절)’를 펴내기도 했다.4만∼8만원.(031)783-8000.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카르멘 ‘검은 머리 빨간 치마’ 공식 벗다

    막이 오르면 금발의 젊은 여인이 아슬아슬한 나이트 가운을 입고 무대에 등장한다. 카르멘이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집시여인이라는 고정관념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한편에선 작곡가 자신이 극중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등장인물은 모두 실존인물로, 세상을 떠난 건축가의 초청을 받아 천상으로 건너간 작곡가와 음악평론가는 베토벤과 괴테를 만난다. 러시아 스타니슬랍스키 극장 오페라단의 대작 오페라 두 편과 삶과 꿈 체임버 싱어즈의 단막 오페라 두 편이 주말부터 잇따라 무대에 오른다. 스타니슬랍스키 극장은 비제의 ‘카르멘’과 차이콥스키의 ‘스페이드의 여왕’을 고양아람누리에서, 삶과 꿈 체임버 싱어즈는 강석희의 ‘지구에서 금성천으로’와 라흐마니노프의 ‘알레코’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지난 14∼17일 국립오페라단이 현대 오페라의 서막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를 공연한 데 이어 오페라라면 곧 ‘19세기 이탈리아 작곡가의 낭만파’를 연상했던 한국 오페라 무대의 ‘공식’이 6월들어 완전히 깨지는 셈이다. ●스타니슬랍스키 극장, 고양아람누리 공연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1863∼1938년)는 러시아의 배우이자, 연출가이다. 꾸민 듯하고 과장된 신파조 연기방식을 타파하고 사실주의적 기법을 도입했다. 1941년 창설된 스타니슬랍스키 극장은 황실극장들과는 다르게 서민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고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품격을 유지하는 오페라를 추구했다. 다른 오페라들이 화려한 세트와 의상, 가창력에 초점을 맞춘다면 스타니슬랍스키 극장은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는 연기를 특징으로 한다. 현대적으로 해석한 ‘카르멘’은 상임 예술감독인 알렉산드르 티텔이 연출해 1999년 초연한 것. 이 극장의 대표작으로 첫번째 해외공연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스페이드의 여왕’은 전 예술감독인 레프 미하일로비치가 1976년 연출해 높은 평가를 받던 것으로 티텔이 이번에 재연출했다. 스타니슬랍스키 극장은 고양아람누리의 개관을 기념하는 이번 공연을 위해 오페라단과 합창단, 발레단, 오케스트라 등 210명이 대거 내한한다. ‘카르멘’은 28∼30일,‘스페이드의 여왕’은 7월5∼7일 각각 오후 7시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3만∼15만원.(031)960-0011. ●삶과 꿈 체임버 싱어즈 1986년 9월의 어느 날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이상향 금성천(金星天)의 예술가촌. 먼저 자리잡은 건축가 김수근이 예술적 동반자였던 음악평론가 박용구와 작곡가 강석희를 초대했다. 창덕궁 옆 원서동에 공간 사옥을 지은 김수근은 금성천에도 같은 이름으로 건물을 세웠다. 김수근은 “미노스 궁에 미로를 지은 다이달로스가 공간 사옥이 마음에 들었다면서 새로운 작품을 지어 보라고 권했다.”고 말한다. 잠실올림픽주경기장과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옛 문예회관) 등을 설계한 건축가 김수근이 1886년 타계한 뒤 그를 기리는 문집이 만들어졌다. 신갑순 삶과 꿈 체임버 싱어즈 대표는 이 문집에 실린 작곡가 강석희의 글을 기억해냈고, 오페라를 위촉하면서 ‘지구에서’는 대본으로 탈바꿈했다.‘지구에서’는 연극배우 윤석화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독백을 맡는다. ‘지구에서’가 초현실적인 작품이라면 집시의 고통스러운 운명을 그린 ‘알레코’는 러시아 낭만파의 진수를 보여준다. 라흐마니노프가 19세에 작곡한 것으로 ‘스페이드의 여왕’과 마찬가지로 원작은 푸시킨의 소설이다.23∼24일 오후 6시 LG아트센터.2만∼10만원.(02)318-1726.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정명훈씨 아들도 지휘자로

    한국을 대표하는 마에스트로 정명훈(54)의 셋째 아들인 민(23)씨가 지휘자로 데뷔한다. 정민씨는 오는 8월20일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에서 열리는 ‘소년의 집 기금마련 음악회’에 나선다. 정명훈씨도 이날 연주회의 후반부를 지휘할 예정이어서 부자(父子) 지휘자가 같은 날, 한 무대에 오르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는 정민씨는 아버지로부터 짬짬이 지휘 레슨을 받으면서 지휘자의 꿈을 키워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민씨는 데뷔 무대에서 아버지가 피아니스트로 나서는 베토벤의 ‘피아노·바이올린·첼로를 위한 3중 협주곡’을 지휘한다. 정명훈씨는 막내 아들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을 지휘한다. 정민씨는 “아버지는 소년의 집 관현악단에 공을 들이고 있다.”고 소개하고 “아버지의 대를 잇는 지휘자로 부각되는 것은 아직 부담스럽다.”고 털어놓았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궁중음식 연구가 2人 인간문화재로 인정예고

    “궁중음식이 우리 시대 최고의 음식문화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고맙게 생각합니다.”(한복려) “떡과 과자 같은 전통병과가 별도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을 만큼 관심이 높아진 것이 뜻깊습니다.”(정길자) 문화재청은 15일 한복려(60) 궁중음식연구원장과 정길자(59) 궁중음식연구원 교수부장을 각각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 보유자로 인정을 예고했다. 궁중음식의 인간문화재 계보는 조선시대의 마지막 주방상궁인 1대 한희순 상궁에서, 한 상궁으로부터 조리법을 배운 2대 황혜성 전 성균관대 교수로 이어졌다. 이번 3대에선 한씨가 궁중요리, 정씨가 궁중병과로 구분되어 지정예고가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두 사람은 지난해 세상을 떠난 황혜성씨의 제자로 35년 단짝. 씨의 큰딸인 한씨는 “영광스럽다기보다는 궁중음식을 더 공부하여 발전시켜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정씨는 “퓨전음식이 범람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하는 것이 진짜라는 확신을 갖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서울 수도여고 동창. 정씨가 한양대 가정과에 진학하니 당시 이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던 황씨가 “복려를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하던 해 정씨는 황씨가 설립한 궁중음식연구원에 조교로 들어가 한씨와 다시 만났다. 한씨는 서울시립대 원예과를 졸업한 뒤 어머니의 뒤를 잇고자 고려대 대학원 식품공학과에 진학했고, 명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궁중음식 분야의 과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한씨는 “의궤 등에 담겨 있는 궁중의 식문화를 다시 찾아내는 국가적인 사업이 필요하다.”면서 “그렇게 되살린 궁궐문화를 실제로 오늘날의 사람들이 다시 맛볼 수 있는 단계가 되도록 발전시키는 것이 진정한 중요무형문화재 제도의 의의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현대시, 육필원고·동인지로 재조명

    삼성출판박물관은 내용이 알찬 전문박물관이다. 국보 제26호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初雕本大方廣佛華嚴經)´과 `월인석보(月印釋譜)´ 등 9점의 보물이 있다. 전적과 서화, 근현대 도서 등 소장품은 모두 40만점에 이른다. 운영자는 `문화계의 마당발´로 통하는 김종규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그는 7년동안 역임한 박물관협회 회장 자리를 지난 2월 물려주었다. 그는 “그동안 출판박물관에는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무엇보다 회장이 자기 박물관에만 신경쓴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시인의 마음을 찾아서´특별전은 `회장 박물관´에서 `회원 박물관´으로 돌아간 뒤 갖는 첫번째 기획전이다. 특별전을 시작으로 앞으로 의미있는 전시회를 차곡차곡 열겠다는 것이다.13일 개막식을 대신한 시 낭송회가 열렸다. 김남조, 성찬경, 허영자, 이근배, 오세영, 신달자, 장석주, 정끝별 시인이 참여했다. 연극인 박정자는 이육사의 `청포도´를 노래하기도 했다. 출판평론가 표정훈이 기획한 전시회에서는 김소월과 한용운, 윤동주, 이육사, 오장환, 유치환, 김광섭 등 한국 현대시 역사의 주류를 이루는 시인들의 서화와 친필원고, 시집, 동인지 등 150여점이 관람객을 맞는다.`삼성뮤지엄아카데미´도 20일부터 7월11일까지 매주 열린다. 첫날에는 김상현 동국대 교수와 만해 한용운의 옥중시를 감상하고, 작가 박범신이 자신의 문학세계를 펼쳐보이게 된다.(02)394-6544.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국립민속박물관 ‘허벅과 질그릇’ 특별전

    국립민속박물관 ‘허벅과 질그릇’ 특별전

    ‘한라산과 제주에는 샘과 우물이 매우 적어서, 사람들이 5리나 되는 곳에서 물을 길어오는데, 이를 가까이 있는 물(近水·근수)이라고 한다.’ 기묘사화로 유배지 제주에서 생을 마감한 충암 김정(庵 金淨·1486∼1521년)이 쓴 ‘제주풍토록’의 한 대목이다. 물을 길러가는데 5리 정도는 가깝다고 해야 할 지경이고 10리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주도는 강우량이 국내에서 가장 많은 편이다. 하지만 구멍이 숭숭뚫린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화산회토 지질이어서, 내린 비는 곧바로 지하로 스며들어 해안가에서 물이 솟아난다. 이렇듯 먼 곳에서 물을 길어가는데 필요한 것이 ‘허벅’이다.196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의 새벽은 물허벅을 지고 용천수(湧泉水)나 공동수도장으로 물길러가는 아지망(아낙)의 발자국 소리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허벅은 보통 대나무로 짠 일종의 배낭인 물구덕에 넣어 어깨에 멘다. 이런 모습으로 물길러가는 제주 아낙의 모습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주를 상징하는 풍경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국립민속박물관이 13일 기획전시실에서 ‘허벅과 제주질그릇’ 특별전을 시작했다. 민속박물관이 제주특별자치도와 함께 벌이는 ‘2007 제주민속문화의 해’ 행사의 하나이다. 한 때 대량 유통되었다는 양철허벅과 이른바 ‘고무다라이’와 비슷한 재질인 고무허벅에 눈길이 가는 것은, 산업화 사회가 도래했다는 20세기 후반에도 제주의 물사정은 ‘제주풍토록’이 씌어진 시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별전에는 허벅을 비롯해서 허벅보다 입이 더 낮고 넓은 방춘이와 능생이, 입에 턱을 만들어 깔때기처럼 만든 등덜기, 소주를 증류하는 고소리, 떡을 찌는 시리 등 질그릇 220점과 사진 90점이 출품됐다. 제주목사를 지낸 이형상이 1702년에 제주의 자연·역사·산물·풍속을 기록한 ‘남환박물(南宦博物)’과 이원진이 1651년 제주목사로 재임한 26개월동안의 자료를 정리한 ‘탐라지’, 김상헌이 제주에 안무어사(按撫御史)로 파견된 1601년 8월부터 6개월동안 쓴 기행문 ‘남사록’등의 자료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특별전은 지역 민속자원을 발굴하여 지역민속을 보존하고 연구를 활성화하는 계기를 만들고, 뭍 사람들에게 제주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취지에서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전시회장을 둘러보면, 생활사 박물관이 아닌 미술사 박물관에 온 것이 아닐까 착각할 만큼 허벅의 현대적 아름다움에 눈을 비비게 된다. 미처 깨닫지 못했던 허벅의 매력을 관람객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꾸민 세련된 전시기법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신광섭 민속박물관장은 “요즘은 허벅의 선을 재현하지 못할 만큼 옛 허벅에는 나름대로 정제된 예술적 감각이 배어 있다.”면서 “지금은 허벅을 예술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달항아리가 그랬듯 100년쯤 뒤에는 허벅 자체가 갖고 있는 예술성이 부각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민속박물관의 ‘허벅과 제주질그릇’특별전은 오는 8월15일 막을 내린다. 이어 9월18일부터 10월31일까지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 같은 전시회가 이어진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2) 안양 석수동 마애종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2) 안양 석수동 마애종

    안양감리교회, 안양중앙교회, 안양중앙성당, 안양석수동성당, 안양구세군교회….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검색창에 ‘안양’과 ‘교회’나 ‘성당’을 동시에 치면 줄줄이 뜨는 이름입니다. 인구 60만명을 넘어 대도시로 줄달음치는 경기도 안양시 바로 그곳이지요. 부처님은 지그시 미소짓고 계실 것이 분명합니다. 안양(安養)은 불자들이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서방정토, 곧 극락(極樂)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극락’에 이처럼 많은 교회나 성당이 터잡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예수님도 부처님만큼이나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안양에는 이렇듯 생각이 다른 이들이 등돌리지 않고 서로를 보듬어 안도록 하는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안양이라는 땅이름은 안양사라는 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안양사에는 고려시대 석조부도와 부도비의 받침역할을 하는 거북이 모양의 귀부(龜趺)가 남아있습니다. 국사(國師)나 왕사(王師)급의 고승이 주석하던 일대의 중심사찰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안양사에서 가까운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는 마애종(磨崖鐘)이 있습니다. 바위에 부처를 새긴 마애불은 친숙하지만 종을 새긴 마애종은 귀에 익지 않지요. 우리나라를 통털어 마애종은 이것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고려시대 초기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마애종은 걸 수 있도록 고리 구실을 하는 용뉴와 음통을 포함한 높이가 126㎝, 종 몸통의 높이는 101㎝ 정도이니 그리 크지 않습니다. 왼쪽에는 당목(撞木)을 잡고 종을 치는 스님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지요. 좌우에는 기둥을 세우고, 보를 가로질러 종을 매달아 놓은 모습을 형상화했습니다. 절에서 새벽이나 저녁 예불에 범종을 칠 때는 보통 종송(鐘誦)을 읊지요. 전남 승주 선암사의 범종각에 걸려 있는 ‘이 종소리를 듣고 번뇌를 끊으소서…원컨대 성불하여 중생구제 하소서.(聞鐘聲煩惱斷…願成佛度衆生)’라는 기둥글(柱聯)도 한 예가 되겠지요. 종소리가 부처님이 설법하신 진리를 상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소리로 번뇌에서 벗어나 성불할 수 있다면, 종각에 매달린 범종과 법당에 좌정한 불상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진리가 불상의 입을 통하여 전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범종도 쇠가 울리는 물리적인 소리로 중생이 번뇌를 끊을 수 있도록 제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소리가 날리 없는 마애종과 아침저녁으로 실제 울리는 범종도 본질은 다르지 않겠지요. 옛사람들은 마애종을 새기면서, 꼭 화려하고 풍족한 세상이 아니더라도 근심걱정이 없는 것만으로 행복한 마음 속의 극락세계를 이 고장에 구현하고자 하는 염원을 담았을 것입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안양시민들도 마애종에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2005년에는 ‘안양세계마애종문화포럼’이 열리기도 했지요. 마애종에 깃들어 있는 의미를 도시발전에 새로운 지표로 되살리겠다는 취지였다고 합니다. 사고의 기반이 다르고 환경도 달라졌지만, 살고 있는 고장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의지는 옛날과 지금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양 마애종이 1000년 전 새긴 사람들이 처음 발원했던 그대로, 지역사회의 민심을 아우르는 역할을 여전히 해내고 있다는 것이 반갑습니다. dcsuh@seoul.co.kr
  • 한성백제 최대 집터 발견

    한성백제시대(BC 18∼AD 475)의 초대형 육각형 집터가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의 내부에서 발견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풍납동 197 일대 미래마을지구에 대한 제4차 발굴조사에서 길이 21m, 너비 16.4m의 대형 집터를 확인했다고 12일 밝혔다. 이 집터는 출입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쪽의 일부가 파괴됐음에도 남아 있는 내부 면적이 344.4㎡(105평)에 이른다. 그동안 한성백제시대 집터로는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경기 포천 자작리 유적의 191.17㎡(57.93평)짜리 ‘呂(여)’자형 집터보다 2배 가까이 크다. 문화재연구소는 “경당지구와 함께 풍납토성에서 가장 중요한 궁전 및 관청, 또는 제사 구역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5세기 신라 지하목조건축물 발굴

    경북 문경시의 의뢰로 신라유적 발굴·정비사업을 벌이고 있는 중원문화재연구원은 “5세기 중후반 신라가 대(對)고구려용 군사시설로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모산성에서 용도 미상의 대규모 지하 목조건축물이 발견됐다.”고 10일 밝혔다. 이 목조건축물은 공주 공산성, 금산 백령산성, 대원 월평동 유적 등 이미 발견된 백제 유적에 비해 규모가 2배 이상 큰 신라시대 지하 건축물이다. 발굴되기까지 지하에서 최소 1000년 이상 묻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조사단장인 차용걸 충북대 교수는 “5세기 중반 이전으로 연대도 백제 것보다 앞서는 데다 규모도 최대이고 보존 상태도 거의 완벽해 삼국시대 목조 건축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최대 깊이 4.5m까지 땅을 파고 내려간 후 목재를 성냥개비 쌓듯 축조한 이 지하건축물은 지상건축물 축조법을 그대로 활용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봤을 때 바둑판식 격자 모양을 띠고 있고, 크기가 남북방향 12.3m, 동서방향 6.6∼6.9m에 달한다. 건축물의 용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차 교수는 “곡물 등의 저장시설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물이 차오른 흔적이 있다는 점에서 의문이 있다.”면서 “물 저장고일 가능성도 있지만 자신은 없다.”고 말했다. 고모산성은 신라가 자비왕과 소지왕 무렵 고구려 방어 혹은 한강유역 진출을 목적으로 축조한 총길이 1300m의 소규모 성곽이나, 높이는 자그마치 20m에 이른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백제 초기역사 300년 수용해야”

    “백제 초기역사 300년 수용해야”

    올해는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풍납토성이 백제 왕경(王京)일 가능성이 처음 제시된 역사적인 발견이 있은 지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97년 1월, 이형구(왼쪽·63) 선문대 역사학과 교수는 풍납토성 내부의 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에서 백제 유적의 흔적과 초기 백제의 토기를 찾아냈다. 3세기 후반 것으로 치부되던 풍납토성이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기원전 1세기에 백제가 쌓은 도성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근거가 확인된 것이다. 이후 이 교수는 ‘목숨을 걸다시피’ 풍납토성을 보호하는 데 전력투구했다. 재산권에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토성 내부 주민들로부터 수없이 항의를 받은 것은 물론 지난해에는 몇 시간 동안 감금되는 일도 있었다. 이 교수가 이번에는 사재를 털어 ‘풍납토성 내 백제왕경 유적 발견 1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를 8일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갖는다. 이 교수는 6일 “10년 전, 학자로서 예지했던 대로 왕궁유적이 드러났을 때 마치 천상에 있는 것처럼 평안해지는 희열을 느꼈다.”며 감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 교수는 “그동안 물러서지 않고 학문적 견지를 지켜 왔기에 오늘날처럼 풍납토성이 국가사적으로 되살아나고, 백제 초기 역사도 300년이나 복원되어 가고 있다고 확신한다.”면서 “이형구가 보아도 이형구가 해낸 일이 아닌 것 같다.”면서 웃었다. 그는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떠들썩하지만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말살된 초기 백제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면서 “공주와 부여뿐만 아니라 서울도 백제의 옛 수도라는 인식을 서울 시민들에게 심어주고 싶었다.”고 세미나의 취지를 설명했다. 이 교수는 “풍납토성이 백제의 왕경이라는 것은 나의 주장이 아니라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한신대박물관 등 발굴에 참여한 사람들이 갖는 확신”이라면서 “풍납토성에서 나온 11개의 시료로 실시한 방사성연대측정에서도 모두 백제의 건국연대와 일치하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라는 결과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고고학적 증거에도 풍납토성이 곧 초기 백제의 왕성이라는 학설을 역사학계는 선뜻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국사 교과서에 반영되고 있지 않은 것은 물론 한국과 일본의 역사교사들이 공동 집필한 ‘화해와 공존을 위한 첫 걸음-마주보는 한일사’에도 황해도는 물론 경기도와 충청남도까지를 백제가 아닌 ‘대방’의 강역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 교수는 “식민사관에 입각해 3∼4세기에 백제가 건국됐다고 씌어진 책을 읽고 학위를 받은 뒤 학교에서 가르쳤으니 고정관념을 타파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면서 “이제는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선입견 없이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이 교수가 풍납토성에 쏟는 노력은 글자 그대로 ‘보존’에 모아져 있다. 그는 “풍납토성을 대대적으로 발굴하거나 복원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도시개발에서 지켜 현상유지만 하자는 것”이라면서 “고고학도 아직은 일천한 상황인 만큼 학문의 수준이 진전되고 여러 가지 과학기술의 도움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때 능력 있는 후학들이 발굴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남겨 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풍납토성 건너에 있는 서울 구의동 유적을 예로 들었다. 구의동 유적은 발굴보고서에 백제유적으로 명시돼 있지만, 최근에는 완전히 고구려 유적으로 대접받고 있다. 하지만 아파트를 지으면서 유적을 깎아 버리는 바람에 진짜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은 조선시대만 생각하는 정도 600주년이 아니라 한성백제부터 2000년을 이어 왔다는 점에서 로마 다음가는 역사를 지닌 도시”라면서 “그럼에도 세계 10대 역사도시를 선정하는 데 서울이 빠지는 것은 스스로 역사를 폄하하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그가 밤을 새워 자료집을 손수 복사하고 제본하는 어려움을 겪으며 이번 세미나를 여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고통을 겪고 있는 풍납토성 지역 주민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풍납토성이 사적으로 지정됨에 따라 재산권 행사가 어렵고, 최근 부동산값이 널뛰기하며 바로 이웃마을은 다락같이 아파트값이 오르는데도 살기 좋은 풍납동은 개발이 안 되는 데 따른 주민들의 박탈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주민들이 폭발 일보 직전의 상태에 이른 것이 남의 일 같지 않다.”면서 “이번 세미나에서는 주민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보상할 수 있는지 의견을 나누고, 그 결과를 정부에 전달해 실질적인 해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글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주꾸미가 낚은 고려청자

    서해바다의 주꾸미가 12세기 고려청자 운반선이 침몰한 것으로 추정되는 해역을 찾아냈다.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충남 태안군 근흥면 대섬과 이웃한 바다에 고려청자 30여점이 묻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4일 밝혔다. 앞서 해양유물전시관 조사단은 주꾸미를 잡다가 도자기를 건져올렸다는 어부의 신고를 받고 지난달 30∼31일 긴급 현장 탐사를 실시해 모두 9점의 고려창자를 수습했다. 산란기를 맞은 주꾸미는 죽은 소라껍질 속에서 알을 낳는데, 어민들은 이런 습성을 이용하여 소라껍질로 통발을 만들어 주꾸미를 잡는다. 또 통발에 들어간 주꾸미는 알을 보호하려고 소라껍질의 입구를 단단한 조개껍질이나 돌멩이로 닫아놓는다. 주꾸미는 바로 이런 용도의 ‘보호방패’로 해저에 뒹굴고 있던 고려청자 대접을 빨판으로 잡아당겨 소라껍질을 막고 있었고, 어선에서 통발을 끌어올리자 청자도 함께 올라온 것이다. 청자를 처음 발견한 어민 김용철(58)씨는 이날 “지난달 18일 근흥앞바다에서 주꾸미를 잡다가 도자기가 올라와 바로 신고했다.”면서 “평생 주꾸미를 잡았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현장은 조류가 빠른 지역으로, 반경 20m 일대에 청자가 노출되어 있었다. 수습한 청자는 12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대접 3점과 접시 5점, 기름병(유병) 1점이다. 2점은 당초무늬를 오목새김한 대접(靑磁陰刻菊唐草文)으로 문양은 세밀하지 못한 편이나 비교적 양질의 청자로 분류된다. 일부에는 연화당초무늬(蓮花唐草紋)가 베풀어져 있었다. 조사단은 “대섬 앞바다에서 발견된 청자는 이미 발굴조사한 비안도, 십이동파도, 야미도 등 고군산군도 지역의 해저유물과 함께 12세기 고려청자의 흐름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말했다. 문환석 해양유물전시관 수중발굴과장은 “이웃한 해역에서 대규모 모래 채취가 이뤄지는 바람에 조수 흐름이 빨라지면서 묻혀있던 청자류가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면서 “청자류를 운반하던 선박이 이 일대 어딘가에 침몰했다고 판단되지만, 아직 침몰선박의 존재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해양유물전시관은 불법인양을 방지하고자 새달로 예정하고 있는 본격 발굴조사 전까지 주변 해역을 중요문화재(사적)로 가지정하는 한편 현장을 보호해 줄 것을 관계기관에 요청했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세종음악콩쿠르 일반부 대상 김유나·한은혜씨

    제3회 세종음악콩쿠르의 일반부에서 김유나(해금·한국예술종합학교 4년)씨와 한은혜(한양대 졸업)씨가 국악부문과 서양음악부문에서 각각 대상을 수상했다. 고등부에서는 황보영(해금·국립국악고등학교 2년)양과 최재연(선화예술고등학교 2년)양이 각각 국악부문과 서양음악부문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서울신문사와 세종문화회관이 공동주최해 지난 2일 끝난 이번 콩쿠르에는 어느 때보다 수준높은 150여명의 젊은 예술인이 대거 몰려 수상자를 가려내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올해 서양음악부문은 단일 종목으로 성악을 지정했고, 전통음악부문은 대금·해금·피리의 3개 분야에서 실력을 겨루었다. 대상 수상자 4명에게는 상금과 함께 서울시 예술단 공연에 협연자로 참여하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밖의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전통음악 부문 ▲일반부 △피리 손동주 한양대 3년·유현수 서울대 대학원 △해금 천지윤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과정·김찬미 이화여자대학교 2년 △대금 이오훈 한양대 3년·정소희 연세대 대학원 ▲고등부 △피리 최소리 국립국악고 2년·강승호 국립국악고 3년 △해금 이다윤 국립국악고 2년·최민지 국립국악고 2년 △대금 박종현 국립국악고 3년·변상엽 국립국악고 3년 ●서양음악 부문(성악) ▲일반부 △남자 김성욱 서울대 대학원·임봉석 추계예술대 대학원 △여자 양제경 한국예술종합학교 4년·이정은 서울대 대학원 ▲고등부 △남자 조재원 선화예고 2년·최성훈 경북예고 3년 △여자 손나래 서울예고 2년·박예린 서울예고 3년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서양음악부문 대상 한은혜씨 “즐겁게 음악하는 사람이 꿈” “노래하는 것이 재미있고, 욕심도 있습니다. 앞으로도 즐겁게 음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제3회 세종음악콩쿠르에서 성악부문 일반부 대상을 수상한 소프라노 한은혜(24·한양대 졸업)씨는 3일 “정말 기대하지 않았다.”며 기뻐했다. 한씨는 지난 4월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베르디의 ‘리골레토’ 공연에 주인공 질다로 출연했을 만큼 장래가 촉망되는 기대주. 그는 “그동안 세종콩쿠르에서 수상한 선배들의 앞날이 잘 풀리는 것을 보면서 나도 한번 참여해보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이번 콩쿠르의 본선에서도 ‘리골레토’에 나오는 질다의 아리아 ‘카로노메(그리운 그이름)’를 택했다. 심사위원들은 “맑은 음색으로 테크닉이 좋아 소리를 자유롭게 구사한다.”면서 “좋은 음악성을 바탕으로 자신감을 갖고 노래한다.”고 평가했다. 오페라가수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이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적극적인 성격이 돗보이는 한씨는 현재 이탈리아로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미국이나 독일도 생각해 보았지만,‘리골레토’에 출연한 성악가들이 이탈리아 출신인 연출자 및 지휘자와 이탈리아어로 자유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마음을 굳혔다. 스승인 곽신형 한양대 교수도 한씨에게 ‘오페라의 본고장’이자 한씨의 성격에도 잘 맞는 ‘이탈리아행’을 권유했다고 한다. 한씨는 “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신문사가 주최하는 콩쿠르에 몇군데 더 나가볼 생각”이라면서 “농담이지만, 공부가 끝난 뒤 한국에 돌아왔을 때 이 신문들이 저에 대해 좋게 써주시지 않겠느냐.”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전통음악부문 대상 김유나씨 “정악서 퓨전까지 아울러야죠” “정악과 민속악, 그리고 퓨전까지 아우르면서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해금 연주자가 되고 싶습니다.” 제3회 세종음악콩쿠르에서 국악부문 일반부 대상을 차지한 해금연주자 김유나(22·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4년)씨는 3일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멋진 연주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김씨는 이번 콩쿠르 본선에서 지영희류 작은산조를 연주했다. 심사위원들은 “산조의 멋을 안다. 표현력이 우수한 것은 물론 연주태도가 자연스럽고 안정적”이라고 높은 평가를 내렸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는 김씨는 5학년 때 처음 본 아쟁이 너무 신기했다. 다음날 덜컥 아쟁을 배우기 시작한 뒤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을 접고 국립국악중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중학교 전공과정에는 아쟁이 없었고, 활을 쓰는 악기라는 점에서 바이올린 및 아쟁과 닮은꼴인 해금을 선택한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김씨에게 ‘국악이 갈수록 퓨전화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무엇이든 보편화되기 전에는 시행착오가 있는 법”이라면서 “퓨전은 국악의 인지도를 높여 우리 음악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씨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해금예찬론을 폈다. 가장 존경하는 연주자는 국립국악고 2학년 때 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 처음 인연을 맺은 정수년 교수. 그는 “당장은 정수년 교수님처럼 훌륭한 해금 솔로이스트가 되는 것이 목표”라면서 웃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박상진 지음

    팔만대장경은 초조대장경과 속장경이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뒤 고려 왕조가 백성들의 마음을 한데 모으고자 고종 23년(1236년)에 새기기 시작하여 16년만에 완성했다. 경판(經板)의 숫자는 8만1258장이고, 무게는 280t으로 4t 트럭 70대분에 육박한다.‘조선왕조실록’에 맞먹는 5200만자로, 한문에 통달한 사람이라도 하루 8시간씩 꼬박 30년을 읽어야 하는 분량이다. 팔만대장경은 지금까지 강화도성 서문 밖의 판당(板堂)에서 만들어진 뒤 강화 선원사에서 보관됐고, 조선 초기에 한양의 지천사를 거쳐 해인사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강화도가 아닌 남해안에서 만들어졌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사용된 목재 또한 자작나무라는 설이 정설처럼 되어 있었다. 박상진(朴相珍·67) 경북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전공인 목재조직학으로 팔만대장경과 관련된 의문을 푸는 데 매달렸다. 그는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관이 일본열도에서만 자생하는 금송(金松)이라는 사실을 밝혀내 역사학계에 충격을 준 주인공이기도 하다. 경판에 대한 연구 결과는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김영사 펴냄)에 담겼다. 목재조직학도 문화유산을 해석하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박 교수는 전자현미경으로 209장의 경판과 손잡이에 해당하는 마구리 27개, 나무못과 부위가 불명확한 표본 8점 등 244개를 시료로 하여 조사했다. 그 결과 경판에 사용된 목재는 산벚나무가 압도적으로 많아 전체의 64%인 135장에 이르렀다. 돌배나무가 15%인 32장, 거제수나무가 9%인 18장 등으로 뒤를 이었다. 옛 사람들은 자작나무와 벚나무를 같은 화(樺)자로 표기했는데, 근래에 연구자들이 벚나무가 될 수도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자작나무로 의심 없이 번역한 결과가 아니겠느냐고 해석한다. 나아가 박 교수는 분석 결과와 역사적 정황을 근거로 팔만대장경판은 강화도나 남해안이 아닌 해인사 일대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당시 몽고군에 포위되어 있는 강화도에서는 경판 제작을 위한 나무를 조달하는 것은 물론 제작한 경판을 밖으로 옮기기도 매우 곤란했다는 것이다.1만 4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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