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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동철
    202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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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편주의 함정’ 벗어나기

    ‘신앙 공동체에서만, 혹은 그 내부에서만 대화를 하겠는가?아니면 신성은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믿음에 따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하느님을 추구하는 행위에도 흠이 없는 고결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런던의 유대인대학 총장을 역임한 종교학자 조너선 색스는 종교에 헌신하고 있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 대답이 긍정적일 수 없다는 것을 그 자신부터가 너무나 잘 안다.‘종교란 그것이 해답의 일부가 되지 않으면, 문제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차이의 존중-문명의 충돌을 넘어서’(조너선 색스 지음, 임재서 옮김, 말글빛냄 펴냄)는 책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전 세계가 겪고 있는 종교간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최종적이고 유일한 처방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최근 세계 주요 종교의 부흥은 자유주의적인 신앙보다 보수적인 신앙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보수적인 종교운동의 힘은 현대성에 저항하는 데서 나타나는데, 그것은 세계 자본주의가 낳은 부작용에 대한 깊은 환멸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부작용이란 불평등과 소비주의, 착취, 만연한 빈곤과 질병에 대한 대처 능력 부족, 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무시하는 구제불능의 둔감함, 물질적 풍요와 나란히 가는 영혼의 빈곤함이다. 그 결과 열성 신도를 끌어모으는 동력은 현대적인 종교의 모습이 아니라 저항으로 특징지어지는 종교의 반현대적인 모습에서 나오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지은이는 오늘날 문명충돌의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로 ‘진리나 궁극적 실재를 찾기 위해서는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는 플라톤 시대 이후 서구 사상을 지배한 패러다임을 지목한다. 오늘날은 세계 자본주의라는 보편적인 질서 속에 살고 있는데, 그것이 지역적이고, 전통적이고, 특수한 것을 위협한 결과가 9·11테러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제 플라톤의 유령을 깨끗하게 몰아내어 지역적이고, 특수하고, 독특한 것에 대한 존중으로 보편주의의 균형을 잡아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의 문화나 종교의 이름으로 인위적인 통일성을 부과하려는 시도는 하나의 체계가 번창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오해한 결과라는 것이다.1만 5000원.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올 여름엔 중국을 읽자”

    올 여름휴가철 출판계의 화두는 단연 중국이다. 중국에 대한 관심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최근의 관심은 ‘미래의 잠재적인 강대국’ 수준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 중국이 한국의 미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게 한다. 중국물 열풍은 전방위적이다. 국내 역사학자들이 참여한 중국사가 새로 집필되고, 서구인의 시각으로 서술된 만리장성의 역사도 나왔다. 중국이 세계 시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무서운 추진력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가 하면, 중국의 문화를 들여다보며 그 바탕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줄을 잇고 있다. 최근 발간된 중국 관련서를 소개한다. ‘아틀라스 중국사’(김병준 등 지음, 사계절 펴냄,2만 7000원)는 중국사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초보적이라는 반성에서 출발했다. 각 시대사의 전문가인 김병준 한림대 교수가 고대, 박한제 서울대 교수가 중세, 이근명 한국외국어대 교수가 근세 전기, 이준갑 인하대 교수가 근세 후기, 김형종 서울대 교수가 근현대를 나누어 썼다. 나열식을 배제한 글맛 나는 글쓰기와 128컷의 역사지도,155개 도판이 이해를 돕는다. ‘장성, 중국사를 말하다’(줄리아 로벨 지음, 김병화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1만 8000원)는 ‘오랑캐’와 ‘중화’를 갈라온 만리장성에 대한 집착과 그에 읽힌 일화로 이른바 중화주의의 실체를 드러낸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중국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지은이는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최근에 만들어진 신화일 뿐 몇 천년 된 만리장성이란 없다.”고 주장한다. ‘중국이 뒤흔드는 세계’(제임스 킹 지음, 최규민 옮김, 베리타스북스 펴냄,1만 7700원)는 독일 철강산업의 자존심과도 같았던 루르강변의 제철소는 통째로 뜯어다 양쯔강 하구에 재조립한 중국기업이 등장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와 로이터통신의 아시아 특파원으로 20년 동안 중국을 취재한 지은이는 중국이 뒤흔드는 세계가 곧 눈앞에 펼쳐질 것이라고 장담한다. ‘동양적 가치의 재발견’(위잉스 지음, 김병환 옮김, 동아시아 펴냄,1만 2000원)은 동양문화가 현대인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설명했다. 하버드대 출신의 중국 역사학자인 지은이는 동양인들이 미래 세계 문화의 창생 과정에서 공헌을 하려면 반드시 계속하여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정신자원을 발굴하고, 자신이 이미 이룬 가치체계를 갱신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자 속 과학 이야기’(다이우싼 지음, 천수현 옮김, 이지북 펴냄,1만 3500원)는 ‘한자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진화한다.’고 역설한다. 한자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상형문자인데, 옛사람들이 관찰과 사고를 통해 객관적인 사물을 간략하게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상형문자는 옛사람들이 이룩한 수많은 창조와 발명을 다채롭고 생동감 넘치게 보여 준다는 것이다. ‘제갈량 문화유산답사기’(제갈량 편집팀 지음, 허유영 옮김, 에버리치홀딩스 펴냄,1만 5000원)는 중국 최고의 지략가인 제갈량이 남긴 역사의 흔적을 따라간다. 그가 17세부터 54세까지 지났던 삶의 발자취를 찾아보며 21세기적 사고방식으로 제갈량의 현대적 의미를 재조명한다. 이밖에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나타난 치인전략에서 교훈을 얻어보자는 ‘사기의 인간경영법’(김영수 지음, 김영사 펴냄,1만 6000원)이나 최근의 중국차 열풍 속에 중국 차문화의 발상지를 찾아간 ‘무이암차-녹차 청차 홍차의 뿌리를 찾아서’(맹번정 박미애 지음, 이른아침 펴냄,1만 5000원), 중국 고대의 성·가족문화를 해부한 ‘혼인의 문화사’(김원중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1만 5000원)도 중국 붐에 가세하고 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48인 인생행로 바꾼 명저들

    레이프 에스퀴스는 24년 동안 로스앤젤레스의 빈민가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호바트 불르바 초등학교는 90%가 극빈층이었고, 영어가 모국어인 아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전원이 무료급식으로 아침과 점심을 해결해야 했다. 교사가 되기 전 레이프가 가장 좋아한 책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었다. 인종차별과 폭력, 위선으로 가득찬 사회를 따돌리듯 달아나며 펼치는 여정이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교사가 된 그에게 허크는 정답이 되지 못했다. 허크식 해법은 교실에서 절대로 달아나서는 안 되는 그에게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아내가 권하는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펼쳐들었다. 이미 몇 차례 읽었지만, 그동안 알고 있던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쓴 흑인 남자를 통해 정의를 되찾는 스토리’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변호사 애티커스는 사건을 수임하고 아이들이 “이길 것 같아요?”라고 묻자 조용하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애티커스는 떠나지 않고 법정으로 걸어들어가 투쟁한다. 책을 읽던 레이프는 자신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에게는 교실이 바로 법정이었다. 좋은 교사란 포기하지 않는 교사라는 것이다. 그는 정말 멋진 선생님이 되고 싶다면, 아이들이 이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한다.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잭 캔필드, 게이 헨드릭스 지음, 손정숙 옮김, 리더스북 펴냄)에 실려있는 이야기이다. 레이프가 교육현장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돌파구를 찾아가는 과정은 한국의 평범한 교사들과 다르지 않다. ‘내 인생…’의 집필에 참여한 48명은 나름대로 미국에서는 배우·작가·변호사·경영자·환경운동가·방송인 등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게다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좋은 책이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감동을 주지 못할 수도 있듯이,‘앵무새 죽이기’ 같은 책들이 누구나 꼭 읽어야 하는 명저라고 강변하지도 않는다. 다만 인생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존재는 책이 아니라 독자 자신이라는 사실을 일러준다. 스스로 깨닫고 실행하는 것만이 인생을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1만 3000원.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최병현 고고학회장이 본 ‘매장문화재 조사 개선안’

    최병현 고고학회장이 본 ‘매장문화재 조사 개선안’

    고고학계가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대외적으로는 문화재청이 추진하고 있는 ‘매장문화재 조사 제도개선 방안’이 개선이 아닌 개악이라며 철회를 요구하는 강경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현재 감사원 감사를 받고 있는 전국 30여개의 발굴조사 전문기관 대부분은 ‘조사원 중복투입’처럼 실정법에 어긋난 그동안의 관행에서 자유롭지 못한 형편이다. 한국고고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최병현(59·문화재위원) 숭실대 사학과 교수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최 교수는 “개인 비리가 있다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라면서도 “하지만 비리가 발굴 제도 체제에 근본적인 허점이 있어 빚어지는 문제라면 감사도 제도를 고쳐주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화재청이 중복발굴 권장 최 교수는 “대형발굴장 주변의 민원성 소형발굴에 대해 오히려 중복발굴을 권장했던 것이 문화재청이고, 나를 비롯한 문화재위원들”이라면서 “문화재청이 요청하는 중복발굴에 뛰어들었던 발굴기관들이 낭패를 당하고 있는데도, 그렇게 만든 당사자는 나 몰라라 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 교수는 1973년부터 10년 남짓 당시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소속으로 경주에서 천마총, 황남대총, 안압지, 황룡사를 발굴하며 현장경험을 쌓아 문화재청이 ‘친정’이나 다름없다. 뿐만 아니라 현직 문화재위원회 매장문화재분과위원으로 ‘제도권’에 몸을 담고 있는 탓인지 그의 문화재청 비판에는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중복발굴이란 같은 조사원과 장비를 2곳 이상의 발굴현장에 투입하여 조사비를 더 많이 타내는 것. 지난봄, 한 발굴조사기관의 원장과 학예조사실장이 구속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최 교수는 “법의 칼을 갖다대면 범죄지만 중복발굴을 하지 않으면 발굴조사기관은 운영이 되지 않고, 발굴 수요에 맞춰갈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발굴요원 일당 현장인부보다 적어 문화재청이 고시한 올해 ‘매장문화재 조사 용역 대가기준’은 대학을 졸업한 보조원이 하루 6만 4821원으로 7만 4000원인 현장인부보다도 적다. 그것도 중복발굴을 하지 않으면 인건비에서 기관운영비까지 일정부분 떼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고고학계가 반발하고 있는 문화재청의 매장문화재 제도개선 방안은 ▲사전 문화재 지표조사가 필요한 사업대상지를 3만㎡ 이상에서 10만㎡ 이상으로 늘리고 ▲발굴일수 100일 이상이면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받아야 하던 것은 200일 이상으로 늘리며 ▲1만㎡ 이하의 발굴허가권은 시·도로 넘기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한다. 고고학계는 수도권 신도시와 행정도시, 혁신도시, 기업도시의 동시 추진으로 조사인력이 크게 부족하여 개발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것을 우려한 조치로 보고 있다. 최 교수는 “한해 1000건 남짓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치는 것은 한달에 10∼20건 정도”라고 했다. 발굴 요건을 완화하면 사업자들이 발굴일수는 180∼190일로 조정하고, 발굴면적은 10만㎡ 이하로 쪼개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받는 개발사업은 사라지고 개발지역의 유적은 대부분 파괴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권한 지방이양시 민원에 밀릴 것 그는 또 “균형발전을 위한 권한의 지방이양은 이론적으로는 좋은 이야기지만 규제를 목적으로 하는 문화재보호법과는 근본적으로 상충되는 것”이라면서 “지역의 민원해결이 가장 중요한 역할인 시도지사가 당장 다음 선거에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문화재 보호에 나설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게다가 당초 문화재청이 마련한 19개항 가운데는 ▲발굴조사 이후 보존 결정이 내려진 유적의 토지를 국가가 사주는 ‘토지매수청구권’과 ▲지표조사비와 발굴조사비의 국고지원을 확대하는 등 글자 그대로의 개선안도 없지 않았지만, 기획예산처의 반대로 삭제된 것도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최 교수는 “지금처럼 개발수요가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상황에서 매장문화재 조사의 수요와 공급을 맞추기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도 불가능하다.”면서 “결국 문화재청이 개발에 따른 정부 일각의 압박에 굴복하여 문화재 파괴를 조장할 것이 아니라 중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7) 경북 풍기읍 용두 당간머리장식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7) 경북 풍기읍 용두 당간머리장식

    1977년 어느날,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차편으로 가마니에 싼 무거운 수하물 하나가 배달되었습니다. 풀어보니 황금빛이 찬란한 용의 머리로, 당간(幢竿)의 꼭대기를 장식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국립대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금동용머리는 경북 영주군 풍기읍에서 하수도 공사를 하다가 발견되었지요.9세기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높이가 65㎝에 이르러 당당한 모습입니다. 당간이란 ‘절 앞에 세워 불·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표시하고 벽사적인 목적으로 당(幢)이란 깃발을 달기 위한 깃대’라고 작고한 고고미술사학자 김원룡 선생은 정의했습니다. 풍기의 금동용머리에는 턱밑의 공간에 도르레를 만들어 놓았지요. 깃발을 달기 위한 장치이니 당간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셈입니다. 당간은 대부분 사라져 좀처럼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절의 들머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지요. 두 개의 석재를 위로 올라갈수록 갸름하게 깎아 마주세워 놓은 당간지주는 보통 쇠로 만든 당간을 튼튼하게 고정시키는 구실을 합니다. 풍기에서 가까운 부석사와, 소수서원이 들어선 숙수사터에도 훌륭한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풍기읍내에서 찾아낸 용머리 장식을 부석사나 숙수사와 연결지어 상상해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미술사학자인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는 당간과 당간지주에 깃발까지 갖춘 건조물 전체를 ‘삼국유사’에 나오는 대로 법당(法幢)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습니다. 단순히 절의 존재를 알리는 표시에 그치지 않는 신앙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적절해 보이는 이름입니다. 충남 공주 갑사와 충북 청주 용두사터에는 당간이 상당 부분 남아있어 풍기의 용머리 장식과 연결지으면 완전한 법당의 위엄있는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겠지요. 두 당간은 모두 철제 원통을 연결하여 만들었습니다. 용두사 것은 64㎝ 높이의 원통 20개가 남아있는데, 당간에 새겨진 ‘용두사철당기(龍頭寺鐵幢記)’에 따르면 당초엔 30개였다고 하지요. 원통 높이만 19.2m에 이르니 기단에 용머리 같은 장식이 더해지면 20m를 넘었을 것입니다. 법당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에서도 만들어졌지만, 중국에서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것은 둔황 막고굴(莫高窟) 제331굴의 것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당간만 23기에 이르고 고려·조선시대 것을 모두 합치면 수백기가 당간지주로 흔적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절에 불상과 석탑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절의 입구에는 법당이 당연히 서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있었다는 뜻이겠지요. 이렇듯 한국이 ‘법당의 나라’가 된 것을 두고 한국고대사를 전공한 신종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전통적인 천신(天神) 숭배와 연관지어 해석합니다. 요즘도 강원도를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는 당간을 짐대라고도 부르는데, 짐대란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며 마을 입구에 세우는 솟대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신 교수는 통일신라시대에 현재와 같은 법당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솟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의 목재 당간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전통적인 천신은 불교가 수용되고 나서도 존엄을 잃지 않았는데, 솟대가 마을 어귀에서 내부를 성역화하듯 당간에도 절이 차지하고 있는 사역(寺域)을 성역화하는 역할을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dcsuh@seoul.co.kr
  • 고려시대 ‘보협인다라니경’ 빛 보다

    고려 후기 불교조각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을 만큼 뛰어난 13세기 목조관음보살좌상이 경북 안동에서 발견됐다. 이 불상에서는 1007년(고려 목종 10년) 개경(개성) 총지사(摠持寺)에서 찍어낸 보협인다라니경(寶印陀羅尼經)을 비롯한 9종의 희귀 목판인쇄물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더불어 비단으로 만들어진 여자용 저고리가 나와 고려시대 복식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과 대한불교조계종 문화유산발굴조사단은 2002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불교문화재 일제조사 사업에 따라 안동 보광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각종 유물을 확인했다고 16일 밝혔다. 박상준 조계종 조사단 문화재조사팀장은 “지난 5월29일 불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몇몇 유물이 흘러내렸다.”면서 “확인 결과 내부에 봉안된 대부분의 복장유물은 사라졌고, 나머지도 훼손이 진행될 위험이 높아 부득이하게 수습조사를 벌였다.”고 설명했다.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높이 111㎝에 무릎 너비가 70.5㎝이다. 신라 금관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보관을 비롯해 섬세하고 아름다운 장식으로 멋을 냈다. 손영문 문화재청 상임전문위원은 “12∼13세기 조각은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다.”면서 “화려하게 꽃피운 고려시대 불교문화의 높은 품격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걸작”이라고 평가했다. 5개의 목판으로 이루어진 보협인다라니경은 32×45㎝ 크기의 종이에 각각 3개와 2개의 목판이 찍혀 있다. 소형 목판인쇄물을 이렇게 찍은 뒤 잘라서 연결하여 두루마리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라는 점에서 목판인쇄물의 제작방법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총지사 보협인다라니경은 월정사 석탑 출토품이 현재 보존처리되고 있으며, 일본도쿄국립박물관도 소장하고 있다. 국내 개인 소장품도 있으나 현재는 소장처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조사단은 이처럼 13세기 불상에 11세기 인쇄물이 봉안되어 있는 것은 다라니경을 비롯한 목판을 오랜 기간에 걸쳐 사용했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수습된 목판인쇄물은 다음과 같다.▲보협인다라니경 ▲범서총지집(梵書摠持集) ▲정원신역(貞元新譯)화엄경소 권6 ▲금강반야바라밀경 ▲백지묵서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 ▲소전동(所詮童) ▲잡문 ▲범자(梵字)다라니 ▲인본(印本)다라니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조선왕실의궤 반환하라”

    일본 궁내청에 보관되어 있는 조선왕실의궤의 반환을 추진하고 있는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가 일본 외무성을 방문해 의궤의 반환을 촉구키로 했다. 봉선사 혜문 스님과 월정사 법상 스님 등 환수위 대표단은 일본 참의원 외교방위위원회 소속 오가타 야스오(공산당 부위원장) 의원의 주선으로 17일 의궤 반환을 안건으로 일본 외무성을 찾는다고 16일 밝혔다.일본 외무성의 누구와 만날지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가타 의원은 지난 5월 일본 참의원 116회 외교방위위원회에서 아소 다로 외상에게 의궤의 반환을 강력하게 요구했다.오가타 의원은 환수위가 일본 국회에 의궤반환청원서를 제출한다면 자신이 대표소개의원으로 나서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궁내청에 있는 조선왕실의궤는 1922년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오대산 사고에서 보낸 것으로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 등 72종에 이른다. 한편 환수위가 서울중앙지법에 일본정부를 상대로 의궤반환을 위한 민사조정신청서를 접수함에 따라 오는 24일 민사조정이 예정되어 있으나 일본쪽에서 응할지는 미지수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전신 화상 민영이 수술 성공할까

    민영이(6)는 3년 전, 시골 할머니 집에 놀러갔다가 펄펄 끓는 가마솥에 빠졌다.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75%의 화상으로 피부가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관절까지 망가졌다. 하지만 민영이는 밝게 자라고 있다. 지난봄,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더욱 개구쟁이가 되었다. 햇빛을 피해 늘 집에만 있던 민영이에게도 함께 뛰어놀 친구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쩍 밝아진 딸아이의 모습을 보는 아빠 박혁기(44)씨의 마음은 무겁다. 목 부분의 흉터가 성장에 장애가 되는 바람에 얼굴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성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MBC ‘닥터스’는 16일 오후 6시50분 ‘미라클’ 코너에서 수술을 앞두고 있는 ‘꼬마천사’ 민영이를 만나본다. 의료진은 이번 수술이 더욱 어렵고 위험할 것이라고 한다. 목 부위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위해서는 여러 각도를 고려하여 피부를 이식해야 하는데, 피부의 상처가 깊기 때문이다. 민영이의 수술은 순조롭게 성공할 수 있을까. ‘응급실 24’는 경기남부권역센터인 아주대학교병원을 찾아 ‘응급실의 해결사’인 차수현씨를 만난다. 매순간 분초를 다투는 긴박한 응급실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타나는 이가 전공의 3년차인 차씨. 원인 모를 출혈로 쇼크 상태에 빠진 환자부터 한밤중 욕설과 난동으로 의료진을 바짝 긴장하게 만든 정체불명의 환자까지 ‘요리’하는 차씨의 활약을 담았다. 또 뛰어놀다 다리를 다쳤다는 6살 꼬마는 이미 모든 처치가 끝난 상태였다. 알고 보니 동네 의원의 치료가 미덥지 못했던 아버지가 다시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은 것. 여섯 번째 응급실 방문이라는 ‘꼬마악동’은 무사히 치료를 받고 돌아갈 수 있을까.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헤이그 특사 혼 서린 덕수궁 중명전 2009년까지 옛모습 되살린다

    정부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이 결정된 덕수궁 중명전의 복원공사를 맡아 2009년까지 마무리짓기로 했다. 올해는 외부의 변형된 부분을 철거하고 지하층을 보수하며, 내년과 후년에는 내부 구조물의 원형복원과 외부 지형의 정비작업을 벌이게 된다. 중명전은 서울시가 2005년 복원공사를 시작했으나 예산부족을 이유로 중단했다. 문화재청은 본격적인 공사에 앞서 13일 중명전에서 헤이그 특사 파견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 ‘대한제국 1907 헤이그 특사’의 개막식을 가졌다.9월2일까지 계속되는 특별전은 일제의 침탈 과정과 우리의 국권회복 노력을 23건의 역사적 유품 및 380점의 사진 자료로 보여준다. 이준·이상설·이위종 특사의 사진을 1면에 실은 1907년 7월9일자 ‘만국평화회의보’와 헤이그 특사 위임장 사본, 특사들이 묵었던 헤이그의 데용 호텔 사진 등이 눈길을 끈다. 배재학당이 소장한 아펜젤러 사진첩에 수록된 건립 초기 중명전의 모습과 1934년 잡지 ‘조선’에 실린 사진도 이 건물의 역사를 보여준다. 1897∼1901년에 황실도서관으로 건립된 중명전은 1904년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의 대화재 이후 고종이 평상시 거처하는 편전이 됐으나 이후 외국인의 사교클럽, 민간회사의 임대사무실, 유료주차장 등으로 사용됐다. 김종수 궁능관리과장은 “중명전은 항일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된 헤이그 특사의 역사적 의미와 활동상을 재조명하는 최적의 장소”라면서 “그동안 방치되다시피한 중명전에서 대한제국의 기구한 운명을 직접 체험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14일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헤이그 추모 열기

    14일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헤이그 추모 열기

    |헤이그(네덜란드) 이종수특파원|‘1000년을 기억할 100년전 큰 죽음’ 14일은 100년 전 ‘망국의 한’을 호소하러 헤이그로 왔던 특사 3인 가운데 한 분인 이준 열사가 순국한 날이다. 열사의 추모식이 열리는 헤이그를 향해 12일 오전 파리를 출발했다. 파리 북역에서 초고속열차를 타고 벨기에 브뤼셀 미디역에서 내려 일반 열차로 갈아탄 뒤 4시간 만에 헤이그(Den Haag)HS역에 도착했다.100년 전 6월25일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른바 ‘헤이그 특사’ 세 분이 내린 곳이다. ●기념관 건물 입구 ‘태극기 휘날리며´ 한국 최초의 검사 이준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전세계에 알리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대장정에 나섰다. 일제의 감시가 살벌해 조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길이었다. 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상설·이위종 열사를 각각 만난 뒤 시베리아를 거쳐 독일 베를린, 벨기에 브뤼셀을 거처 64일 만에 HS역에 도착했다. 낯설고 어색한 풍경의 이국 거리를 지나갔을 열사 3인. 헤이그HS역 정면으로 난 길을 따라 10분쯤 걸어가니 와건스트라트(Wagenstraat)124A번지에 자리한 이준 기념관이 나왔다. 울분을 못이긴 열사가 순국한 드 용(De Jong) 호텔을 개조한 곳이다. 방문객을 맞은 것은 건물 입구에 당당하게 펄럭이는 태극기와 정문의 “이 집은 이준 열사가 순국하신 역사적인 집입니다.”라는 문구다. 좁고 가파른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니 이기항 이준아카데미 원장과 송창주 이준기념관 관장이 ‘유럽 한민족 평화제전’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독립기념관의 지원을 받아 이준기념관도 14일 재개관했다. 당시 만국평화회의는 6월15일부터 10월18일까지 열렸다.3인의 특사가 도착한 것은 6월25일. 기념관에서 걸어서 10분 떨어진 빈넨호프의 회의장에 도착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국권을 상실한 나라의 ‘슬픈 숙명’이었다. 주미 공사를 지낸 아버지 이범진을 따라 다니며 서양 문물에 일찍 눈을 뜬 이위종 열사가 기자회견을 열고 일제 만행을 고발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 7월14일 이준 열사가 순국하면서 3인의 투쟁도 종지부를 찍는다. 이준 기념관에는 다양한 자료들이 ‘그날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특사 3인의 이동 경로, 고종의 특사 신임장, 을사늑약 무효를 알리는 트리뷴지 기사…. 대부분 이 원장 부부가 손수 일본·러시아·네덜란드 문서보관소와 도서관의 마이크로필름 등을 뒤져서 모은 것이다. 이날 네덜란드를 관광한 뒤 벨기에로 넘어가는 도중에 기념관을 찾았다는 양윤정(33)씨는 “굳이 100주년이 아니더라도 유럽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들러야 할 곳”이라고 말했다. ●獨·佛 교민들 단체방문 줄이어 열사의 넋을 기리는 ‘제의’는 13일 오전 시내 한 호텔에서 국제학술회의로 막이 올랐다. 평화제전 위원장인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헤이그 특사의 사명은 현실적으로 성공할 수 없는 노력이었지만 독립을 지켜갈 수 있는 스스로의 힘과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만국평화회의는 일제가 지칭한 것이고 당신 언론에서는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세계평화회의’ 등으로 표현했다.”며 “이준 열사 순국은 이후 국내외 자결 순국, 의열 투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14일에는 기념식과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린다. 헤이그시는 이날을 ‘이준 평화의 날’로 지정했다. 한국·네덜란드 예술가들의 공동 기획으로 헤이그 특사 3인의 도착 장면도 재현한다. 이날 행사에는 김정복 보훈처 장관, 최종무 주 네덜란드 한국 대사,W 데이트만 헤이그 시장 등 국내외 인사 120여명이 참석했다. 독일·벨기에·프랑스 등 인근 국가 교민들도 버스를 동원해 단체로 방문하는 등 700여명이 참석했다. vielee@seoul.co.kr ■대한매일신보 ‘그날의 이준’ ‘이준씨가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파견원으로 갔던 일은 세상사람이 다 알거니와, 어제 동경전보에 따르면 그가 충분(忠憤)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여 만국사신 앞에 피를 뿌려서 만국을 경동(驚動)케 하였다더라.’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분사(墳死)한 소식을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가 1908년 7월18일 호외로 전한 기사의 한 대목이다. 황성신문은 다음날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를 받아 ‘이준씨는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자기의 복부를 할부(割剖)하였다는 전보가 도래하였다는 설이 유(有)하더라.’고 이후 오랫동안 믿음을 준 할복자살설을 기정사실화했다. 대한매일신보의 호외는 이준 열사의 서거 소식에 앞서 급박한 대한제국 정부의 움직임을 먼저 다루었다. 기사는 ‘내각대신 여덟분이 회동하여 어제 오후 7시부터 12시까지 황상폐하를 알견하고 해아(海牙·헤이그)에 위원을 파송함으로 당하시는 곤란을 면하실 방책을 올렸다.’고 적었다. 그 방책이란 ▲광무 9년 11월17일에 체결한 신조약에 어보를 찍고 ▲통치를 대신할 황제의 섭정을 추천해야 하며 ▲황제가 직접 동경에 가서 ‘일황폐하’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조약이란 1905년 을사늑약으로, 고종이 이때까지 정식으로 비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대한매일신보는 ‘황상폐하께옵서는 이 세 가지를 다 윤허치 아니하셨다더라.’고 보도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이준열사 외손녀 유성천여사 “100주기 감회 남달라” |헤이그(네덜란드) 이종수특파원|이준 열사의 외손녀 유성천(80) 여사가 열사의 순국 100주년 추모식을 맞는 감회는 뜻깊었다.13일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는 헤이그 시내 한 호텔에서 만난 유 여사는 어머니(이준 열사의 외동딸)에게 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준 열사와 가족들에 대한 기억을 들려줬다. 그 속에는 독립운동가 가족이 겪은 신산한 삶이 오롯이 녹아 있다. 유 여사는 “외할머니가 헤이그에서 외할아버지가 사망했다는 통지를 받은 뒤 큰 충격을 받아서 심장병으로 고생하시다가 결국 제가 초등학교 2학년때 심장판막증으로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이어 이준 열사 가족의 삶과 관련 “일제 강점기여서 애국 지사 집안은 말도 삼가해야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외할머니는 동지적 입장에서 외할아버지를 이해하고 내조를 잘 하셨다고 들었는데 헤이그 특사로 가기 전에 독립운동하시다가 투옥되셨을 때 굳건하게 옥바라지를 하셨다고 들었다.”라고 덧붙였다. 100주기를 맞은 소감에 대해 “90주기에 참석한 뒤 귀국하면서 10년 뒤에 다시 이곳에 올 줄 생각도 못했다.”며 “많은 교민들이 오시고 행사를 위해 여러 분들이 노고를 아끼지 않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vielee@seoul.co.kr ■ 이기항 이준아카데미 원장 “청소년에 민족의식 고취” |헤이그 이종수특파원|1991년부터 이준 열사 기념식을 시작한 이기항(71) 이준아카데미 원장이 열사의 순국 100주년을 맞는 소회는 남달랐다. 12일 헤이그 이준평화박물관에서 만난 이 원장은 기념식 준비에 정신없이 바빴다. 이준 열사 기념사업에 뛰어든 동기를 물었더니 소박하게 대답했다.“우연히 발을 담갔다가 ‘호랑이 등 탄’ 심정으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거창한 명분 대신에 매번 상황이 그의 발을 기념 사업에 한 발짝씩 끌어당겼다는 것이다. 1972년 상사 주재원으로 왔다가 사업가로 변신하며 네덜란드에 살던 이 원장은 그저 간헐적으로 열사의 묘적지를 참배하던 교포였다. 격년으로 추모식을 주관하던 이 원장에게 1992년은 이준 기념사업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 네덜란드 일간 NRC신문에서 이준 열사가 순국하기 전까지 묵었던 데 용 호텔이 재개발로 매각될 위기에 처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3년 노력 끝에 1995년 사재 20만달러를 쾌척해 ‘사고’를 쳤지만 더 큰 일이 다가왔다. 호텔을 기념관으로 건립하기 위한 자금이 문제였다. 해서 한국에 들어와 소식을 알리고 전경련을 찾아가 기념관 건립 자금을 협찬받았다. “내 나이가 우리 나이로 70이 넘었습니다. 더 바랄 것도 없이 그냥 많이 보고들 갔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청소년들이 많이 와서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vielee@seoul.co.kr
  • 네거티브 선거전 ‘워스트 25’

    사랑스러운 여자아이가 꽃밭에서 데이지 잎을 뜯고 있다. 아이가 아홉을 셋을 때 마치 미항공우주국(NASA)에서 카운트다운을 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카메라는 천천히 아이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카운트다운이 0에 이르면 핵폭발에 따른 커다란 버섯구름이 피어오른다. 그러자 린든 존슨이 이렇게 경고한다.“우리 아이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것인지, 아니면 암흑의 세계를 불러올 것인지….” 민주당의 존슨 후보와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후보가 맞붙은 1964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존슨 진영이 내보낸 TV광고이다. 골드워터가 핵무기를 사용하는 데 목말라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이는 상황에서 “크렘린에 미사일을 떨어뜨리고 싶다.”는 발언은 존슨 진영에게는 신이 주신 선물이었다. ‘네거티브, 그 치명적 유혹’(커윈 C. 스윈트 지음, 김정욱 이훈 옮김, 플래닛미디어 펴냄)은 미국 각종 선거 역사에서 펼쳐진 25건의 대표적인 네거티브 캠페인을 다루고 있다. 선거가 있을 때마다 ‘정책중심’을 강조하지만 대개는 공염불로 끝난다. 사람들이 긍정적인 메시지보다는 부정적 메시지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고, 정확하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거티브 전략은 상대에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지만, 부메랑처럼 돌아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네거티브 선거를 ‘하는’ 후보가 아닌 ‘아는’ 후보가 승리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네거티브 선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네거티브 선거를 가르치는 교과서의 역할도 할 수 있다. 다시 1964년으로 돌아가면, 당시 존슨 진영은 골드워터의 동료 공화당원의 말을 인용해 그를 흠집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 골드워터의 보수파와 넬슨 록펠러의 중도파가 너무나도 많은 분열을 낳은 결과였다. 공화당 전당대회는 엉망진창으로 록펠러가 연설을 하러 연단에 다가가자 골드워터 진영은 엄청난 야유를 퍼부으며 “배리를 원한다.”고 일제히 외쳤고, 록펠러는 얼굴을 찌푸렸다. 현재 우리 대선가도에서 전개되는 상황도 너무나도 똑같은 미국의 사례에서 패배의 교훈을 얻을지, 새로운 공세의 영감을 얻을지도 순전히 각 후보 캠프의 몫이다.1만 6500원.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토정은 민중과의 소통에 신화적 존재”

    충남 아산시 영인면 사무소에는 토정 이지함(1517∼1578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는 아산현감 시절 이곳에 일종의 ‘홈리스재활센터’인 걸인청을 세우고 유랑민들에게 자립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앞서 포천현감 시절엔 ‘땅과 바다는 백 가지 재용의 창고’라면서 상공업을 천시하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국토의 자원을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토정은 현감 시절을 제외하면 줄곧 전국을 유랑하며 주민들에게 장사하는 법과 생산기술을 가르쳤으며, 자급자족의 능력을 기를 것을 강조했다. ‘사람으로 읽는 한국사’(사람으로 읽는 한국사 기획위원회 지음, 동녘 펴냄)의 첫권인 ‘베스트셀러의 저자들’에서 전한 토정의 진면목이다. 토정은 그동안 예언가이자 점술가로, 구리솥을 머리에 얹고 다니던 야사의 주인공 정도로만 알려졌다. 하지만 신병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예연구사는 토정이 ‘적극적인 국부 증진책을 제시한 뛰어난 경제학자였으며,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백성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 실천적이고 통 큰 지식인’이라고 규정한다. 토정은 점술과 천문·지리·의학·관상·비결에 두루 능통했다. 하지만 ‘토정비결’이 그의 저작물이라는 데는 논란이 있다고 한다.‘토정비결’이 민간에 유행한 것은 아무리 올려잡아도 18세기 이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토정비결’의 지은이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토정의 민중 지향적인 성향 때문일 것으로 신 학예사는 짐작한다. 토정을 빼닮은 민중 친화성을 가진 누군가가 이미 신화가 되어버린 토정의 이름을 빌리자, 급속히 민간에 퍼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베스트셀러의 저자들’에는 이밖에 ‘도선비기’의 도선,‘동명왕편’의 이규보,‘열하일기’의 박지원,‘서유견문’의 유길준이 소개됐다. 장지연 서울대 강사, 김인호 광운대 교수, 노대환 동양대 교수, 은정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이 각각의 인물을 맡았다. 토정의 사례에서 보듯, 엄밀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되 풍부한 역사적 상상력으로 스토리성을 복원하여 장구한 세월 동안 이들 책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집필에 참여한 젊은 사학자들은 무엇보다 ‘지은이들이 사람들의 욕구나 시대적인 요구를 적절히 반영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의 한복판에서 당대의 문제를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시대와 소통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동명왕편’은 혼란스러운 국가를 바로잡을 영웅의 탄생을 고대하게 했고,‘도선비기’와 ‘토정비결’은 어지러운 사회에서 삶에 지친 백성들을 위로했다.‘열하일기’는 새로운 주장을 새로운 글쓰기 방식으로 담아 지식인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서유견문’은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하던 사람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들이 지금도 활발하게 읽히고 있다는 것은 당시의 문제들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람으로 읽는 한국사’는 인물을 통한 역사 읽기로 대중적인 역사 서술의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보겠다는 취지에서 기획된 것이다. 한국사에 등장하는 60여명의 인물을 선정하여 각각의 인물과 시대 전공자들이 썼다. 1권 ‘베스트셀러의 저자들’과 처용, 쌍기, 인후, 이지란, 박연을 다룬 2권 ‘이미 우리가 된 이방인들’이 발간된 데 이어 모두 11권으로 나올 예정이다. 각권 1만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본지 박현갑 기자 ‘교육이 살아야’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교육학 박사’라고 한다. 그만큼 생활과 교육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하지만 교육에 대한 고민이 건설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교육이 살아야 꿈을 이룰 수 있다’(박현갑 지음, 오름 펴냄)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현직 서울신문 정치부 차장으로, 교육분야를 오랫동안 취재한 지은이는 대안부재론이 팽배한 가운데서도 “현재 거론되는 교육적 논쟁들을 조금 더 천착하면 의미있는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한다. 교육문제로 고민하는 이유는 출세나 성공 등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지은이는 인간적으로 접근해보자고 권유한다. 이런 전제 아래 보충학습을 필요로 하는 아이까지 포용하는 ‘진정한 의미의 평준화’를 촉구하고, 세계와 소통하려면 영어교사 양성단계에서부터 획기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경쟁력과 창의력 있는 교육은 물론 인성교육과 민주시민교육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질 때 사회통합은 물론 미래 세대가 더욱 더 도약할 수 있는 원동력이 형성된다는 것이다.1만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6) 양산 통도사 괘불탱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6) 양산 통도사 괘불탱

    우리 문화에서 ‘스케일’이 아쉬웠다면 괘불탱(掛佛幀)은 충분히 위안을 주고도 남습니다. 괘불 또는 괘불탱은 ‘거는 불화’라는 뜻으로 야외 의식에 쓰이는 대형 불화를 말합니다. 경북 영천의 은해사 괘불탱이 높이 15m에 너비 6.07m로 가장 크지요. 충북 보은 법주사와 경남 하동 쌍계사 것도 13m가 넘습니다. 괘불탱은 모두 100여점이 남아 있습니다.1622년 전남 나주 죽림사 괘불탱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입니다. 높이 4m에 너비가 2.4m 정도니 큰법당의 후불탱보다는 조금 큰 수준이지요. 처음에는 야외 의식에서도 법당의 불화를 들고 나와 사용하다가 규모도 커지자 아예 별도로 야외용 불화를 만든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괘불탱은 이렇듯 17세기 초반부터 본격 조성되는데, 불행하게도 1592년 시작된 임진왜란과 1636년의 병자호란이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불교는 죽은 이의 영혼이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천도재(薦度齋)로 국민들의 상처 입은 정서를 치유하는 역할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인구의 3분의1이 줄어들었으니 온 나라가 초상집인 상황에서 천도재가 열리면 글자 그대로 넓은 마당에 단을 세우고 자리를 만드는 야단법석(野壇法席)을 이룰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군중이 멀리서도 볼 수 있으려면 불화는 커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요즘 절에서 괘불탱이 내걸린 모습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부분 국보나 보물로 지정돼 큰법당의 뒤편에 모셔진 채 여간해서 바깥 나들이를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우연히 찾은 절에서 괘불탱을 만났다면 큰 행운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통도사성보박물관이 괘불탱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특별히 마련해 놓은 것은 다행스럽습니다. 중앙박물관은 지금 경남 양산 통도사의 석가여래괘불탱을 ‘꽃을 든 부처’라는 이름으로 전시하고 있지요.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을 하면서 연꽃을 들어 보이자 가섭이라는 제자만 그 의미를 알고 미소지었다는 ‘염화미소’의 순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통도사에는 1649년에 만든 괘불탱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766년 12월8일 부처가 진리를 깨달은 날을 기념하는 성도재(成道齋)를 지내려 대웅전 마당에 괘불탱을 내다 걸었는데, 그만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닥치는 바람에 찢어졌다고 하지요. 그러자 27세의 젊은 승려 태활(兌活)이 중심이 되어 후원자를 모으고 법주사 괘불탱을 그린 두훈(薰) 등의 화승을 초빙해 1767년 9월 새로운 괘불탱을 완성하게 되지요. 태활은 괘불탱이 완성될 즈음 통도사 큰스님인 희유(希有)에게 글을 부탁했는데, 희유는 노고를 치하하는 말 대신 “석가모니불의 참되고 참된 모습을 어찌 형상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말인가?” 하고 되묻습니다. 깨달음을 어떻게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또 그렇게 그려진 그림이 어떻게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느냐는 본질적인 의문을 던진 것이었지요. 태활은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석가모니불의 참된 모습에는 그림자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일단 수긍합니다. 그는 “그렇지만 그림자를 통해서 부처의 참된 모습을 찾는 그 흔적을 적을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자기 생각을 펼치지요. 괘불탱 전문가인 정명희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통도사의 괘불을 다시 만든 기록(通度寺改成掛佛記)’에 담겨있는 희유와 태활의 이런 문답이 ‘예수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가.’라는 기독교 미술의 오랜 논쟁과 일맥상통하는 고민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괘불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비극에서 비롯됐다지만, 사회가 조금씩 안정되어 통도사 괘불탱이 완성된 영조 43년에 이르면 이처럼 종교와 철학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크기’로 문화의 가치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 크기로 압도하는 괘불탱이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dcsuh@seoul.co.kr
  • 7000년 된 식물뿌리 진짜 나이는?

    지난 4월 강원 양양의 7000년 전 토층에서 발굴된 뒤 싹이 돋아 화제가 됐던 식물의 죽은 뿌리는 연대 측정 결과 50년 전의 것으로 나타났지만, 논란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발굴조사를 벌인 예맥문화재연구원은 양양 여운포∼송전간 도로부지에서 수습한 식물의 탄소동위원소 C14 함량을 서울대 기초과학교육연구 공동기기원에 의뢰해 분석한 결과 1957±5년으로 확인됐다고 10일 밝혔다. 예맥연구원은 당시 세 그루의 뿌리가 연결된 상태로 나온 식물의 죽은 뿌리 일부를 연대측정 시료로 삼았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연대측정 결과는 뿌리 하나가 50년 전에 죽었다는 뜻이지, 싹을 틔운 두 개의 뿌리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dcsuh@seoul.co.kr
  •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킴벌리 코니시 지음

    ‘레알슐레(오스트리아 린츠의 국립실업학교)에서 나는 한 유대인 소년을 만났다. 우리는 모두 그를 조심스럽게 대했는데, 그 이유는 단지 우리가 여러 차례의 경험으로 그가 경솔하다고 의심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히틀러의 ‘나의 투쟁’) 이 소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부유한 가문 출신으로 말끔한 옷차림에 다른 아이들은 잘 쓰지 않는 점잖은 말씨에 친구도 사귀지 않는 ‘왕따’였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언어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이다. 히틀러가 어린 시절의 비트겐슈타인을 훗날 자서전에서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킴벌리 코니시 지음, 남경태 옮김, 그린비 펴냄)는 “비트겐슈타인은 당시 히틀러에게는 없었던 문화적 특권을 누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히틀러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과 미술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지만, 그것을 충분히 누릴 만한 여건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철강업으로 재계를 주물렀던 바트겐슈타인 가문은 1903년 클림트가 창설한 예술단체인 분리파의 전시회를 후원하고, 브람스를 집으로 불러 연주회를 가질 만큼 예술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또 히틀러는 오페라 ‘로엔그린’의 가사를 모두 외울 만큼 작곡가 바그너에 심취해 있었다. 그런데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는 부인 코지마 바그너가 어린 시절 비트겐슈타인 후작부인에 의해 어머니로부터 헤어져 멀리 떠나야 했다는 악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가문의 배경을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던 비트겐슈타인은 히틀러가 언급한 대로 ‘경솔한’ 존재였고, 평생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당시 유럽에 뿌리 내린 반유대정서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20세기 최대의 만행으로 꼽히는 히틀러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는 사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증오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히틀러는 권력을 잡은 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제치고 어린 시절을 보낸 린츠에 ‘아돌프 히틀러 박물관’을 세운다. 또 이 도시에 헤르만 괴링 제철소를 세우고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비트코비츠 제철소를 흡수했다. 어린 시절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느낀 상대적 박탈감과 질투에 대한 복수였다는 것이다.1만 8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혼인의 문화사/김원중 지음

    ‘동쪽 집에서 먹고, 서쪽 집에서 잔다.’는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은 보통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의 행태를 가리킨다. 하지만 본래는 동·서쪽 남자 모두에게 미련을 두는 처녀의 심정을 담은 표현이었다고 한다. 중국 제나라에 혼기가 찬 처녀가 있었는데, 동쪽 집안과 서쪽 집안에서 동시에 청혼이 들어왔다. 동쪽 집 아들은 못생겼지만 부자였고, 서쪽 집 아들은 가난했지만 ‘꽃미남’이었다. 부모는 궁리 끝에 딸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동쪽 집으로 가고 싶으면 왼쪽 어깨를 드러내고, 서쪽 집으로 가고 싶으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라.”했다. 딸은 한동안 생각하더니 양쪽 어깨를 모두 끌어내렸다고 한다. ‘낮에는 부유한 동쪽 집에서 먹고, 밤에는 잘생긴 서쪽 남자와 자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처녀의 솔직한 속내를 드러낸 이야기로, 공자가 살던 무렵 일반 서민들의 자유연애 풍토는 오늘날과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혼인의 문화사’(김원중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는 중국 고대의 성(性)의 모습을 제시하며 혼인이 하나의 제도로 자리잡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중국의 성과 결혼, 가족 문화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결코 ‘남의 이야기’일 수 없다. 지은이는 ‘여자는 어려서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지아비를,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삼종지도(三從之道)와 처첩제도 등 전통적인 중국의 가족제도가 중국은 물론 한국을 비롯한 유교문화권 여성을 억압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은이는 수천년의 유구한 전통을 이어온 중국 혼인사에서 중심축이 되는 남녀의 관계에는 ‘동가식서가숙’의 고사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주목했다. 실제로 춘추시대나 위진남북조시대의 귀부인 사이에 보편화된 사통(私通)이나 성도덕의 문란, 절대권력을 휘두른 여제(女帝)의 남성 탐닉을 보면 고대 중국의 여성은 남성의 성적 노리개로만 존재하지 않았고, 오히려 반대의 사례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혼인의 예절을 갖추지 않고 이루어진 남녀의 성관계를 야합(野合)이라고 했는데, 공자 역시 야합으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멸시를 받지 않은 것은, 공자를 잉태한 야합이 춘사(春社)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농사가 순조롭기를 땅의 신에게 비는 춘사에는 예외적으로 야합이 허용됐다고 한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버지라는 개념은 아예 나타나지도 않는다. 모계사회의 단계에서는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확신하지 못하고, 어머니도 자식과 아버지의 필연적인 관계를 확신할 수 없는 ‘부계불확실성’이 지배했다. 한반도에서도 단군왕검과 박혁거세, 견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웅이 ‘아비 없는 자식’으로 태어났는데, 이런 현상은 남성 중심의 일부일처제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어원학적 측면에서도 성(姓)은 어머니의 혈통을 중심으로 삼는 개념이었다고 한다. 여자라는 뜻의 女(여)와 태어난다는 의미를 가진 生(생)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글자로 아버지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성의 결정이 모계로부터 비롯하고 있으며, 성의 주체가 여자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1만 5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백제 행정조직 5부명 찍힌 기와 발견

    전북 임실 성미산성에서 백제의 행정조직인 5부(五部)의 이름이 찍힌 기와가 출토됐다. 성미산성은 임실군 관촌면 주천리 산 23번지에 있는 둘레 522m의 테뫼식 고대성곽이다. 전북문화재연구원은 성미산성의 건물터와 빗물을 한데 모아두는 집수시설등을 발굴조사했다고 4일 밝혔다. 그 결과 성벽은 내벽과 외벽 모두 판 모양으로 쪼갠 돌을 쌓아 덧댄 협축식(夾築式)으로, 전남 동부지역에서 확인된 백제산성과 유사했다. 글자가 찍힌 기와인 백제시대 인장와(印章瓦)는 성곽 내부 남쪽에서 다량으로 나왔다.‘上’·‘中’·‘下’·‘前’말고도 ‘五’처럼 백제시대 수도나 지방 행정 조직인 5부를 지칭했을 가능성이 큰 글자가 확인됐다. 이같은 5부명 인장와는 부여를 제외하고는 청주 부모산성에서 ‘前’, 금산 백령산성에서 ‘上部’, 정읍 고부 구읍성에서 ‘上部上巷’이라고 찍힌 것이 출토된 적이 있다. 한편 성벽 상층 퇴적토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금동여래입상 1점이 출토됐다. 높이 9.8㎝로 조사단은 8세기 무렵 몸에 지니고 다니는 호신불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5) 성공회 강화성당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25) 성공회 강화성당

    한국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찰스 존 코프는 1890년 제물포에 상륙하자 곧바로 진료소를 열었습니다. 이듬해에는 한옥으로 병원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병실도 온돌방이었다고 하지요. 새로운 병원은 성누가병원이라고 명명됐습니다. 하지만 내과전문의 엘리 바 랜디스는 한국과는 관계가 없는 이름이라고 반대했습니다. 한문을 배운 그는 ‘기쁨으로 선행을 베푸는 병원’이라는 뜻으로 낙선시병원(樂善施病院)이라고 따로 써붙였던 것으로 전합니다. 성공회는 기독교의 본질에 어긋나지 않는 한 현지 문화에 융통성있게 적응하는 것을 선교이념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성공회의 토착화 노력은 9년 뒤 강화성당을 한옥으로 지으면서 더욱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게 되지요.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성공회 강화성당은 마크 내피어 트롤로프 신부의 주도로 1899년 가을 터를 닦기 시작하여 1900년 11월 완공되었습니다. 강화성당은 기독교 예배공간에 한국의 전통적 예배공간이었던 불교 사찰의 구조를 과감히 받아들였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높직한 언덕에 자리잡은 강화성당은 배를 염두에 두었다고 하는데, 뱃머리에 해당하는 서쪽에 외삼문을 앉혔습니다. 세파에 휩쓸리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주를 상징하려 했다지만, 어지러운 세상을 넘어 피안의 극락정토로 갈 때 탄다는 불교의 반야용선(般若龍船)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외삼문에 들어서면 내삼문이 나타납니다. 이 또한 일주문을 지나면 천왕문이 나타나는 보편적인 절집의 구조와 다르지 않습니다. 내삼문은 종루를 겸하도록 지어졌습니다. 영국에서 들여온 종이 1945년 일제에 징발된 뒤 1989년 만들었다는 지금의 종은 당좌(撞座)에 돋을새김된 십자가가 아니면 절의 범종과 구별이 쉽지 않습니다. 본당이 세로로 앉혀져 있는 것은 큰법당과 가장 큰 차이점일 것입니다. 정면에서는 2층으로 이루어진 팔작지붕의 삼각형 합각이 바라보이지요. 다만 내부는 천장이 높은 중앙부 양쪽으로 날개가 달린 바실리카 양식입니다. 로마의 공공건물에서 유래되어 나중에는 기독교 예배공간의 전형으로 자리잡았지요. 하지만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고 씌어 있는 현판의 작명원리는 석가모니부처를 모신 큰법당인 ‘대웅보전(大雄寶殿)’이나 아미타부처가 있는 ‘극락보전(極樂寶殿)’과 다르지 않습니다.‘삼위일체이신 천주는 만물의 창조자(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와 같은 기둥글(柱聯)도 사찰의 그것과 내용만 다를 뿐 형태는 똑같습니다. 당시 강화도의 조선사람 대부분이 익숙했을 불교 사찰의 분위기는 분명 기독교라는 새로운 서양 문화에 대한 이질감을 크게 줄여주었을 것입니다. 물론 성공회의 이런 움직임을 아름답게만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19세기말 성공회의 해외선교는 복음의 전파보다, 현지의 영국인들을 보호하고 종교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목적이 강했다는 시각도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비슷한 시기 천주교가 제주에서 고유의 가치체계와 토착종교를 부정하는 특권적인 교세확장으로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과는 크게 비교됩니다. 제주에서는 결국 1901년 민란이 일어나는데, 그 과정은 ‘이재수의 난’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지요. 이제는 형편이 좋아져 우리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를 상대로 해외선교에 나서는 상황에서 강화성당은 ‘약자의 문화’를 어떻게 배려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dcsuh@seoul.co.kr
  • 전통음식 글로벌 전략 “멋있게”

    “맛있는 전통음식에서 멋있는 전통음식으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조리법을 표준화하여 산업화가 가능하도록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주최로 4일 서울 필동 한국의 집에서 열린 ‘한국음식 세계화를 위한 심포지엄’에서 내려진 결론이다. 미각과 시각을 동시에 자극해 외국인들에게 인기높은 비빔밥은 어떤 전통음식도 반드시 벤치마킹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됐다. 이날 심포지엄은 전통음식이 음식 자체의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식단과 음식량 등 서비스 문화가 뒷받침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전통음식은 재료나 요리방법에서 세계 어느나라에도 뒤지지 않는데도, 고객의 기호에 맞는 문화상품으로서 식단구성에 대한 고민은 소홀했다.”고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에도 무조건 많은 음식을 내놓는 보릿고개 시절의 음식문화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제발표에 나선 김수진 푸드앤컬처코리아 원장은 “음식의 완성도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가 100%라면 입으로 느끼는 비중은 30%에 불과하고 시각적 즐거움과 식당 분위기 등이 70%를 차지한다.”면서 맛이 아닌 눈으로 먹는 음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전통음식을 세계화하는 데는 국가대표 조리사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되, 보는 것만으로도 오감을 자극할 수 있도록 하는 푸드스타일링이 실과 바늘처럼 함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재춘 한국음식업중앙회 사무총장은 “일본이 1960년대부터 정부주도로 일본음식의 세계화를 추진했고, 태국도 총리 주도로 2001년부터 음식 세계화 프로젝트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우리는 국가 차원이 아니라 몇몇 부처가 산발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이 실정”이라고 실망감을 표시했다. 그는 민관 공동으로 ‘한식 세계화 전문가 위원회’를 구성하여 한식의 개념을 정립하고 집중 육성할 한식의 품목을 선정하여 체계적인 지원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홍렬 문화재보호재단 이사장은 “전통음식에 담긴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유지하면서 국·내외 다양한 입맛을 가진 사람들의 기호에 맞는 식단을 개발하기 위해 심포지엄을 마련했다.”면서 “전통음식을 현대적으로 개선하여 기내식 비빔밥처럼 단품식단으로 브랜드화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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