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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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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건축기행34/김성호 서울신문 문화전문기자

    미륵신앙의 본산이자 동학혁명의 발원지였으며, 강증산의 후천개벽 사상을 낳은 우리나라 민중종교운동의 본거지인 전북 김제 모악산 들머리에는 개신교의 순례성지가 하나 자리잡고 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전통 윤리를 교회건축에 그대로 살려낸 금산교회가 그것이다. 유교적 전통이 완강하던 1908년 세워진 금산교회는 ‘ㄱ’자형이다. 합각을 이룬 모서리에 있는 강단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여성, 오른쪽에는 남성 신자들이 예배를 봤다. 그런가 하면 경남 양산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다. 대웅전의 북쪽에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이 있기 때문이다. 대웅전에서는 북쪽 벽에 난 커다란 창으로 금강계단, 즉 부처를 향하여 참배할 수 있다. 김성호 서울신문 문화전문기자가 쓴 ‘종교건축기행34’(W미디어 펴냄)를 펼쳐들면 한국 종교건축이 언제 이렇게 다양한 전통을 만들었을까 새삼 놀라게 된다. 한국 문화의 저변을 형성한 불교의 절집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불과 100년이 조금 넘는 건축 역사를 지닌 천주교와 기독교의 예배공간이 이미 우리 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자산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34곳의 사례는 분명히 일깨워 준다. ‘종교건축기행’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호평을 받으며 서울신문에 실린 연재물. 종교건축의 아름다움에 머물지 않고 정치·사회·종교·문화적 배경으로 시야를 확대한 만큼 한국 종교문화사를 개괄한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다. 초창기 백정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여 ‘백정 교회’로 불린 서울 인사동의 승동교회와 국내 유일의 정사각형 교회인 봉화 척곡교회 등 개신교회 8곳, 천주교도를 처형한 전주 풍남문의 석재를 주춧돌로 쓴 전주 전동성당과 한옥으로 지은 익산 나바위성당 등 천주교회 11곳을 소개했다.‘한국 불교 1번지’인 서울 조계사와 시인 고은이 출가한 절로 일본 에도(江戶)시대 건축양식으로 지은 군산 동국사 등 절집 10곳도 둘러볼 수 있다. 무엇보다 원불교의 발상지인 영광 영산성지와 증산도의 성소인 대전 태을궁, 천도교의 발상지인 경주 용담정, 한국정교회의 요람 성 니콜라스 서울대성당, 한국 이슬람의 핵인 서울 이슬람중앙사원 등 소수 종교 및 종파의 건축물도 자세히 소개한 것은 이 책의 가치를 높인다.1만 5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계룡산 모든것’ 공주 박물관서 보세요

    국립공주박물관과 국립청주박물관이 각각 계룡산과 우암 송시열과 계룡산을 주제로 하는 특별전을 연다.국립광주박물관이 호남선비 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기획전을 갖고 있는데 이어 지역이 갖고 있는 문화 자원을 집중 조명하는 지방 국립박물관들의 노력이다. 공주박물관(041-850-6360)이 23일부터 12월30일까지 여는 ‘계룡산’특별전은 특정한 산을 주제로 잡았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이미 신라시대에 국가적으로 중요한 오악(五岳) 가운데 서악(西岳)으로 등장한 계룡산의 역사적 유래와 풍수지리적 특징, 그리고 이를 토대로 인간이 이룩한 종교와 문화를 살펴본다. 계룡산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문헌이나 문학작품을 모았고, 산악신앙과 풍수도참설, 불교문화가 함께 공존하는 이 산만의 독특한 종교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유물도 곁들인다. 백제시대에 축조된 표정리 고분군의 출토 유물과 계룡산 학봉리 가마터에서 구워낸 분청사기도 나온다. 청주박물관(043-252-0710)의 ‘우암 송시열 탄신 400주년 특별전’은 박물관 개관 20주년을 겸하는 행사.23일 개막해 내년 1월30일까지 계속된다. 우암의 학문세계와 삶을 조명하고자 우암 종가에서 기탁한 유물 90점을 내놓는다. 성리학 완성자인 주희의 글과 말을 모은 ‘주자대전’을 염두에 두고 만든 우암 전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典)도 만날 수 있다. 24일에는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와 이용삼 충북대 천문학과 교수가 각각 ‘우암 다시보기’와 ‘전시대의 혼천의 복원-우암의 혼천의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특별강연도 갖는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 서울 봉은사의 헤라클레스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 서울 봉은사의 헤라클레스

    그리스·로마 신화에 상상력을 가미하는 작업으로 명성을 얻은 작가 이윤기는 런던에 있는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을 찾았을 때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록 몇권을 사가지고 나와 입구의 계단에 앉아 펼쳐보다가 ‘바즈라파니(Vajrapani)’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에 눈길이 갔습니다. 곧 금강역사인데, 뜻밖에도 ‘헤라클레스 차림으로 제우스의 벼락을 든 부처님의 수행원’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었다지요. 그는 다시 박물관으로 뛰어들어가 부처님 일행을 돋을새김한 이 간다라 조각을 찾았습니다.‘수행원’은 사자 가죽을 머리에 쓰고 왼손에는 제석천이 아수라를 쳐부술 때 썼다는 금강저, 오른손에는 굵직한 몽둥이 같은 것을 들고 있었지요. 올리브 나무를 뿌리째 뽑아 만든 몽둥이를 든 헤라클레스가 성미가 고약한 네메아 골짜기의 사자를 30일 밤낮으로 목졸라 죽인 뒤 그 가죽을 쓰고 다녔다는 그리스 신화 그대로였습니다. 최근 발간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4-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간다라의 불교 미술이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것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지역인 간다라는 서기전 327년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되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이 슬그머니 부처님의 호위무사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던 것도 대대적인 문화융합의 결과였을 것입니다. 헤라클레스의 사자는 그리스 시대에 이미 무사의 어깨를 보호하는 갑옷의 어깨(肩甲·견갑) 장식으로 정착된 듯합니다.‘영웅 따라 하기’를 좋아했던 로마 황제들은 사자가 입을 벌린 채 마치 어깨를 무는 듯한 견갑 장식을 즐긴 것으로 알려지지요. 간다라에서 불교에 편입된 헤라클레스는 흔히 서역으로 부르는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해졌습니다. 미술사학자 권영필은 중국에서 헤라클레스를 상징하는 사자가 어깨 장식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당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설명합니다.657년 시안(西安)의 무덤에서 나온 무인상이 그렇습니다. 베이징 교외의 명 13릉에 도열한 무인석의 어깨 장식도 로마 황제의 그것과 매우 닮았지요. 간다라에서 금강역사가 된 헤라클레스는 동쪽으로 전해지면서 다시 사천왕으로 변신합니다. 신라 문무왕이 682년 세운 경주 감은사 서탑의 사리함에 새겨진 사천왕상에 헤라클레스의 사자가 나타난 것이지요. 금강역사나 사천왕 모두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니 역할은 달라지지 않은 셈입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의 목조 사천왕상은 헤라클레스로 하여금 불법을 수호케 하는 전통이 조선시대에도 이어졌음을 보여줍니다. 사천왕은 일주문에 해당하는 진여문(眞如門)에 버티고 있습니다. 조선 영조 22년(1746년) 당시 능창군 이숙 부부의 시주로 조성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발원문이 2002년 발견되었지요. 사자 모양의 어깨 장식을 하고 있는 사천왕은 정면에서 보아 진여문의 왼쪽 바깥쪽에 서 계시는 서방광목천(추정)입니다. 어깨뿐 아니라 배에도 사자 머리가 장식되었는데, 무섭기보다는 어수룩해 보이는 광목천의 표정에 걸맞게 귀여운 아기 사자의 모습입니다. 사자 머리 아래에는 한 마리 분의 사자 가죽이 고리로 매달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가죽을 벗겼다는 네메아의 사자일 것입니다. 서울 한복판에 있는 유서깊은 절이 지금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호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신화보다 더 신화적이지 않습니까. dcsuh@seoul.co.kr
  • ‘소통과 교류의 땅 신의주’ /혜안 펴냄

    ‘소통과 교류의 땅 신의주’(혜안 펴냄)는 북한 지역을 대상으로 한 지역사 연구의 성과이다. 서인범 동국대 교수 등 12명의 한국사와 중국사 연구자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워크숍 형태로 신의주의 역사를 한국사 체계에 맞추어 재구성한 것이다. 의주가 우리 역사의 일부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전기부터이다. 서희가 993년(성종 12년)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하여 이듬해 의주 지역을 포함한 강동 6주를 고려의 영역 아래 두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은 유명하다.1033년(덕종 2년)에는 또 압록강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세기 전반까지 고려는 이 지역에 대한 완전한 지배권을 확보하지 못한 채 거란 및 여진과 섞여 살았다. 그러다 1117년(예종 12년) 여진이 금을 세우자 거란이 압록강 동쪽에 쌓은 포주와 내원성을 바치며 고려에 투항함으로써 이 지역이 완전하게 고려의 통치권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에 고려는 의주방어사를 두어 치안과 통치를 담당하게 했는데, 이때부터 의주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신의주는 일제가 1905년 한반도 수탈과 만주침략을 위해 경의선을 개설하면서 의주 서쪽의 압록강가에 있는 넓은 벌판에 역사(驛舍)를 지으면서 비롯된 일종의 신도시이다. 일제는 또 한일합병 이듬해인 1911년 열강의 반대를 무릅쓰고 당시의 압록강 철교를 가설하는데, 신의주는 이후 경제적인 가치는 물론 정치, 군사, 외교적인 가치를 지니며 오늘에 이르게 된다. 이기동 동국대 사학과 교수는 “국민국가시대에 들어와 국경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라면서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은 신의주라는 한 국경도시의 역사를 통해 한국사의 본류에 육박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1만 7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태안 보물선 신비 간직한 ‘바코드’ 물품 꼬리표 목간 발굴

    ‘탐진에서 개경에 있는 대정 인수에게 보낸다.…최대경 댁에 올린다.´(耽津亦在京隊正仁守·탐진역재경대정인수…崔大卿宅上·최대경택상) 탐진은 전남 강진의 옛이름이고 개경은 고려의 수도로 오늘날의 개성이다. 대정은 고려시대 하급 관리, 대경은 고위 관직인 것으로 보인다. 지난 5월 주꾸미를 낚던 어민의 신고로 드러난 뒤 고려청자를 쏟아내고 있는 ‘태안 보물선’이 이번에는 물품꼬리표인 목간(木簡)을 내놓았다. 판독 결과 강진에서 만든 청자를 싣고 개경으로 가던 배가 태안 앞바다에서 거센 물살에 휩쓸려 침몰했을 것이라는 그동안의 추정이 사실로 확인됐다. 문화재청은 11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충남 태안의 대섬 앞바다에서 침몰한 채 발견된 고려시대 청자운반선의 2차 발굴 결과를 발표했다.목간은 소나무 껍질에 먹으로 쓴 것으로 청자를 포장한 쐐기목과 함께 3종류가 나왔다. 첫 번째 목간에는 앞면에 ‘탐진…’, 뒷면에 ‘선적 책임자 ○가 배에 실었다.’는 내용의 ‘○재선진(○載船進)’이라고 씌어 있다. 두 번째 목간에 적힌 ‘○안영의 집으로 사기 일과를 보낸다.’는 ‘○안영호부사기일과(○安永戶付沙器一 )’에서 ‘과’는 한 꾸러미를 뜻하는 것으로 추정됐다.‘최대경택상’은 세 번째 목간에 씌어 있었다. 적외선 촬영으로 목간을 분석한 최연식 목포대 교수는 “고려시대 도자기 생산과 운송체계, 해상항로, 선박사, 도자사, 생활사 등을 밝히는 귀중한 자료”라면서 “국내 수중발굴사의 한 획을 그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날 문화재청은 그동안의 발굴에서 모두 1만 9000점 남짓한 12세기 전반의 청자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특히 이번에 출토된 철화(철분이 섞인 안료로 그린 무늬)와 퇴화(붓으로 두껍게 올려서 만든 무늬)로 장식한 두꺼비모양 청자 벼루(靑磁鐵畵堆花文蟾形硯)와 사자모양 청자 향로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형태이다. 두꺼비모양 벼루는 피부와 눈동자를 검붉은 철화와 하얀 퇴화로, 입과 다리는 음각으로 표현했고, 사자모양 향로는 독특한 조형감이 일품이다. 도자기 전문가인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평생 도자기를 봐왔지만 이렇게 흥분되는 순간은 처음”이라면서 “목간과 사자향로 같은 이형(異形)청자 등은 청자연구사에서 경이롭고 놀랄 만한 발견”이라고 강조했다. 문화재청은 태안 보물선에 대한 발굴을 연말까지 마무리지을 계획이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9) 불암산 학도암 마애관음보살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9) 불암산 학도암 마애관음보살

    마애불(磨崖佛)이란 벼랑바위에 새겨놓은 부처이지요.‘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마애삼존불처럼 바위 속에서 부처가 걸어나오고 있는 듯 높게 돋을새김해놓은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통일신라 말기부터는 갈수록 평면화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아예 선각(線刻)에 가까워지지요. 이런 현상을 두고 조각기법이 퇴화한 결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시대가 떨어지는 마애불은 이렇듯 세상의 평가가 후하지 않으니, 기대를 갖지 않게 마련이지만 뜻밖에 조선 후기 것이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학도암 마애관음보살좌상이 그렇습니다. 학도암(鶴到庵)은 서울 노원구 중계동의 불암산(佛巖山) 남서쪽 기슭에 있는 작은 암자입니다. 관음보살상은 절 바로 뒤에 우뚝 솟은 높이 22m의 거대한 바위에 새겨졌지요. 학도암에 오르면 왼쪽으로는 멀리 삼성동 무역센터 너머로 청계산이 산세를 자랑하고, 가운데로 눈길을 옮기면 관악산과 남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관이 펼쳐집니다. 산 아래 마들에서 시작된 건물 숲은 끝간 곳이 없는데, 군데군데 솟은 산은 회색 바다 위에 떠있는 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불경에 관음보살은 작고 흰꽃이 피어 있는 바닷가 봉우리에 살고 있다고 했으니, 이곳에 관음보살좌상을 새긴 사람도 분명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학도암 마애불은 1872년 명성황후의 시주로 조성된 것으로 사지(寺誌)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도암은 1624년(인조 2년) 창건된 이후 줄곧 작은 암자였다고 하지요. 절터가 가파른 경사지여서 앞으로도 큰 규모의 중창불사는 그리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럼에도 이곳에 왕실의 발원으로 거대한 마애불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관음보살의 상주처로 꼭 맞는 환경조건을 가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학도암 마애불이 예기치 않은 감동을 주는 것도 이처럼 현장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상징성이 더해졌기 때문이겠지요. 높이가 13.4m에 이르는 학도암 관음보살은 일단 크기로 참배객을 압도합니다. 그러면서도 자비의 화신인 관음보살의 성격에 걸맞게 부드럽고 넉넉해 보이지요. 전체적으로는 조각이라기보다 그림처럼 느껴집니다.‘화폭’으로 쓰여진 바위는 자연석으로는 보기 드물게 희고 판판합니다. 좋은 ‘그림’의 바탕에 좋은 재료가 뒷받침되었습니다. 실제로 학도암 마애불은 화승이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새긴 것입니다. 마애불에는 명문(銘文)도 남겨놓았는데, 화승을 뜻하는 금어(金魚) 장엽의 이름이 보입니다. 명문에는 또 김흥연 이운철 원승천 박천 황원석 등 석수(石手) 5명의 이름도 올려놓았지요. 마애불전문가인 이경화는 법명(法名)을 쓰지 않는 석수들을 1865년 시작되어 1872년 마무리된 경복궁 중건과 연결지었습니다. 선의 강약과 리듬을 살려내는 솜씨로 보면 궁중에서 실력을 쌓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장엽의 작품인 삼척 신흥사 아미후불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균형감각과 유려한 필선을 장기로 하는 그가 비계에 매달려 초본대로 바위 표면에 관음보살상을 그려놓으면 궁중 석수들이 선을 따라 새겨나갔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이쯤되면 마애불 전통의 퇴화가 아닌 회화와 조각이 만나는 새로운 전통을 창조한 것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요. 불암산이 뒷동산이나 다름없는 중계동 주민이라면 우리 동네에 정말 훌륭한 문화유산이 있다는 자부심을 한껏 가져도 좋을 것 같습니다. dcsuh@seoul.co.kr
  • 4세기 이후 中불상 한눈에

    4세기 이후 中불상 한눈에

    중국은 한나라(기원전 206∼서기 220년) 후기에 이미 불교 교단이 성립되었지만, 불상이 예배대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육조시대인 4세기에 들어선 이후로 알려진다. 인도 불상을 서툴게 모방하는 초기 단계에서 5세기 북위시대에 이르면 ‘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이 생겨나면서 겉옷인 대의(大衣)가 황제의 곤룡포와 같은 포복식을 바뀌는 등 중국화된 불상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서울대학교박물관이 마련한 ‘중국 불교조각 1500년-불상, 지혜와 자비의 몸’특별전은 바로 육조시대 초기 불상부터 수나라, 당나라를 거쳐 청나라 시대에 이르는 중국 불교조각사의 전 흐름을 관통한다. 서울대박물관과 타이완 국립역사박물관이 공동 주최하여 58건,61점의 수준 높은 중국 불교조각이 출품되는 이번 특별전은 17일부터 12월22일까지 열린다. 진준현 서울대박물관 학예연구관은 “그동안 중국 미술 전시회가 적지 않았지만 이번 처럼 중요한 불교조각이 다수 한국을 찾는 것은 처음”이라면서 “특히 중국 불상과 중국 불상에 영향을 받은 한국 불상의 사진을 함께 제시하여 인도와 중국, 중국과 한국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출품작 가운데 용문석굴에서 출토된 북위 시대(386∼534) 석회암으로 제작한 아난두(阿難頭·부처의 제자인 아난존자의 머리 조각·높이 55cm)는 인도사람이 가진 이목구비의 특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어 불상 제작 초기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북제 시대(550∼577)에 역시 석회암으로 만든 반가사유상(높이 65cm)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국보 78호와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또 어떻게 우리 스타일로 재창조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하는 작품이다. 서울대박물관은 전시회가 시작되는 17일 오후 1시부터 특별강연회도 연다.(02)880-5333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신미양요때 뺏긴 어재연 장군기 126년만에 돌아온다

    신미양요때 뺏긴 어재연 장군기 126년만에 돌아온다

    신미양요(1871년) 때 강화도 광성진이 미군에 함락되는 바람에 전리품으로 빼앗긴 어재연 장군기가 126년 만에 돌아온다. 문화재청은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帥字旗)를 장기 대여하기로 했다고 9일 밝혔다. 가로, 세로 각 4.5m에 장수를 뜻하는 수(帥)자가 씌어 있는 이 장군기는 2년씩 5차례 연장이 가능해 최장 10년 동안 빌릴 수 있다. 구한말의 대표적인 수자기인 어재연 장군기는 국내에서도 희귀한 군사자료로 역사적,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매우 높은 문화재이다. 문화재청은 “어재연 장군기는 당초 영구반환을 추진했지만 미국 해군사관학교측이 관련 법령을 개정하고 의회 및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 불가능하다는 뜻을 고수하여 우선 장기대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장군기는 오는 15∼16일 한·미 두 나라 관계자가 입회한 가운데 상태를 점검한 뒤 18일 워싱턴을 출발해 19일 오후 5시 인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장군기는 일단 국립고궁박물관이 보관하면서 내년 3월 특별전시되며 5월 이후 인천광역시립박물관,2009년에는 새로 문을 여는 강화박물관으로 옮겨져 장기 전시된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청자 주꾸미’ 동상 세운다

    ‘청자 주꾸미’ 동상 세운다

    수만점의 고려청자를 실은 채 충남 태안앞바다에 침몰한 운반선을 찾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 주꾸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진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주꾸미 동상 건립을 이완구 충남지사에게 제안했다.”면서 “충남도나 태안군 모두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11일 말했다. 유 청장은 특히 주꾸미가 청자 접시를 붙든 채 바다에서 건져올려지는 장면을 스케치한 동상 설계안을 직접 그려 충남도와 태안군에 전달했다. 태안군 관계자는 “우리 지역 바다에서 발견된 고려청자와 운반선을 널리 홍보할 필요가 있어 전시관과 함께 주꾸미 동상을 건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면서 “동상 건립 시기는 내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태안 고려청자 운반선은 지난 5월 충남 태안군 근흥면 대섬의 이웃 바다에서 통발로 주꾸미를 잡던 현지 어민 김용철(58)씨가 주꾸미가 움켜쥔 청자대접 한 점을 건져 올림에 따라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에 최인규씨

    제32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최인규씨의 청자상감당초화문대반이 대통령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이완규씨의 다뉴세문경과 동검(거푸집)은 국무총리상, 손영학씨의 열녀춘향수절가 목판은 문화관광부장관상을 받는다. 또 문화재청장상에는 조복래씨와 백은종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상에는 윤정숙씨와 이수예씨, 한국중요무형문화재기능보존협회 이사장상에는 신경혜씨의 작품이 각각 뽑혔다. 대통령상에는 3000만원, 국무총리와 문화부장관상에는 각각 1500만원과 1000만원의 상금이 주어진다. 대통령상 수상작인 청자상감당초화문대반은 지름 73㎝, 높이 25㎝ 크기로 심사위원들로부터 기법이 매우 독창적이고 과감하다는 평을 들었다. 문화재청이 주최하고 한국중요무형문화재기능보존협회가 주관하는 전승공예대전은 올해 본선 심사를 완전 공개로 전환했고, 심사위원도 10명에서 23명으로 확대하여 공정성을 높였다. 전승공예대전의 개막식을 겸한 시상식은 오는 16일 오후 2시 서울 강남구 삼성동 서울중요무형문화재전수회관에서 열린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日 쇼쇼인展 신라가야금 공개

    올해로 59회를 맞는 일본 나라(奈良)국립박물관의 연례 행사인 쇼쇼인(正倉院) 특별전이 27일 개막해 새달 12일까지 계속된다. 쇼쇼인은 일본 나라시에 있는 유서 깊은 사찰인 도다이지(東大寺) 경내에 자리잡은 일본 고대 황실의 보물창고로, 이곳 소장품은 매년 10월말에서 11월초에 걸쳐 약 2주 동안 나라박물관이 개최하는 특별전에 일부가 공개된다. 올해 특별전에는 뒷면에 꽃과 새 무늬를 도안한 팔각형 동경(銅鏡)인 화조배팔각경(花鳥背八角鏡)과 가죽에 칠을 입히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 상자인 금은평탈피상(金銀平脫皮箱), 사찰에서 분향할 때 사용한 자루 달린 향로 일종인 자단금세병향로(紫檀金鈿柄香爐)를 비롯해 70건이 출품된다. 이 가운데 17건은 이번 특별전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다. 쇼쇼인 특별전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물품도 적잖이 전시돼 해마다 한국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올 특별전에서는 신라금(新羅琴)과 그것을 보관하는 상자인 신라금궤가 선보여 눈길을 끈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윤봉길의사 유품 6점 보물 해제예고

    윤봉길의사 유품 6점 보물 해제예고

    문화재청은 보물 제568호로 일괄지정된 윤봉길 의사 유품 가운데 연행사진(위 사진)과 선언사진(아래)을 비롯한 사진 3점과 친필액자 3점을 보물에서 해제하기로 했다고 5일 밝혔다. 한 남성이 일본 군경에 양쪽 팔을 붙잡힌 채 끌려가는 연행사진은 1932년 5월1일자 일본 아사히신문에 실린 것이나, 윤 의사의 외모와 달라 보인다는 이유로 엉뚱한 사람의 사진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이에 따라 2003년부터 이 사진을 실어온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는 2007년도판에 이 사진을 선언문을 가슴에 부착한 채 태극기 앞에서 선서식을 하는 사진으로 대신 넣었다. 하지만 이날 보물에서 지정 해제가 예고된 유품 가운데는 교과서에 새로 실린 사진을 포함한 2장의 선서식 사진도 들어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진위가 의심되는 연행사진과는 달리 선서식 사진의 주인공은 윤봉길 의사가 맞는다.”면서 “그러나 이 사진은 원본이 아닌 복사본으로 국가지정문화재가 되기에는 가치가 다소 떨어진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또 보물 해제가 예정된 3점의 유묵은 윤봉길 의사의 필적으로 집자한 뒤 확대한 인쇄물로 밝혀졌다. 한편 문화재청은 이날 안중근 의사가 1910년 중국 뤼순 감옥에서 쓴 유묵 등 7점을 보물로 지정을 예고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대중독재’ 어떻게 벗어날까

    나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서 생존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기록 ‘이것이 인간인가’(1947)에서 “몰인정하고 단호하며 비인간적인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고 ‘증언’한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았지만 결국 자살을 선택한 유대계 이탈리아 작가이다.●비정한 인간들이 홀로코스트서 생존 생존자들은 먼저 친위대의 선택을 받아 수용소의 관리직에 오른 사람들로 ‘특권층’으로 분류될 수 있는 요리사나 의사, 간호부, 야간 경비병, 막사 청소부, 화장실 관리자, 세면실 관리자 등이다. 특별히 레비의 흥미를 끈 것은 유대인 특권층이었는데, 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또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더욱 더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또 ‘경쟁자’에 대한 동정심이나 체면을 버리고 모든 존엄성, 모든 양심을 던져버린 야수처럼 혹독한 상황에서 생존 본능에 의지해야 했던 사람들도 살아남았다. 레비가 기억하는 아우슈비츠의 프랑스 출신 유대인 앙리는 생존에 도움이 될 만한 기회가 오면 마치 창세기의 악마처럼 냉혹하고 쌀쌀한 모습으로 갑옷을 온 몸에 두른 채 모든 이의 적이 되어 비정할 정도로 교활하고 이기적인 인간이 되었다.레비는 전쟁이 끝난 뒤 “앙리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을 알지만,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잘라말했다고 한다. ‘대중독재3’(임지현·김용우 엮음,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기획)은 ‘일상의 욕망과 미망’이라는 부제처럼 일상의 문제의식을 대중독재 연구에 투영해보려는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다. 대중독재(大衆獨裁)란 독재체제의 유지를 위해 대중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어떤 동원의 메커니즘이 작동되었는지를 포착하기 위하여 고안된 개념. 임지현 한양대 교수가 주도한 연구팀에 의해 2002년 고안된 뒤 이미 백과사전에 실릴 만큼 일반적인 개념으로 정착되어가고 있다. 그동안의 연구 성과는 2004년 대중독재의 개념을 제시한 ‘대중독재1-강제와 동의 사이에서’와 2005년 독재가 대중의 동의와 열광을 이끌어낸 종교화·신비화의 양상을 분석한 ‘대중독재2-정치 종교와 헤게모니’로 묶였다. 세번째 성과에 해당하는 ‘대중독재3’은 레비가 지적한 ‘살아남은 자’처럼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대중의 모순된 일상에 대한 이해 없이는 대중독재의 양상을 제대로 살피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의 결과이다.●평범한 시민들이 독재체제 유지에 기여 또 하나의 사례로, 히틀러의 나치 독재 체제를 유지하는 데 게슈타포(비밀경찰)가 결정적 기여를 했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1939년 말 현재 게슈타포 요원은 7000명 정도에 불과했다. 게슈타포가 조사한 사건은 자체적인 사찰로 밝혀진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평범한 독일인’들의 ‘자발적인 고발’에 의존했다. 평범한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의도와 관계없이 나치 테러에 필수적인 기여를 했고, 결과적으로 나치독일은 경찰국가가 아니라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실질적인 자경사회(自警社會)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제 나치즘의 경우 나치를 지지하는 광범위한 사회정치적 동의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역사가는 거의 없게 되었다. 임지현 교수는 “강고한 것으로 보이는 대중독재의 헤게모니에 균열을 내고 출구를 찾는 지름길은 정치적 올바름에 따른 규범적 이해가 아니라 대중독재 체제를 살아내야 했던 사람들의 ‘꾸불꾸불한’ 일상, 모순되고 복합적인 삶이라는 현실에 대한 정직한 이해”라면서 “이 책은 완결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대중독재3’의 집필에는 임지현 교수와 김용우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 권형진 건국대 교수, 나인호 대구대 교수, 황보영조 경북대 교수를 비롯한 12명의 국내 연구진과 알프 뤼트케 독일 에어푸르트대학 교수와 피터 램버트 영국 웨일스대학 교수, 찰스 암스트롱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 등 8명의 해외 연구진이 참여했다.2만 7000원.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위기의 학교/이병곤 옮김

    A는 과제를 풀라는 교사의 지시를 간단히 무시하고는 턱을 괸 모습으로 컴퓨터를 하고 있다. 교사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교실 밖으로 나가라고 지시하지만 A는 장난을 치면서 거부한다. 교실 뒤쪽에서는 남학생들이 알아듣지 못할 욕설을 주고받고 있다. 요즘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 교실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풍경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영국 셰필드 시 동쪽에 있는 애비데일 그레인지 중등학교의 이야기이다. 한때 좋은 학생과 훌륭한 전통으로 2000명에 이르던 학생은 500명밖에 남지 않았고, 중등학교 졸업자격시험에서 기준을 통과한 사람은 전체의 22%에 지나지 않는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닉 데이비스는 ‘위기의 학교’(이병곤 옮김, 우리교육 펴냄)에서 애비데일 그레인지 학교의 실패 원인을 빈곤에서 찾는다. 부모는 책을 읽지 않고, 집에는 읽을 책도 없으며, 밤에 제대로 자지 못해 낮동안 반쯤 잠들어 하루를 보내야 하는 아이들을 받아들인 학교가 학업 성취도를 높이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1330만명의 영국 아이들 가운데 400만명이 빈곤상태에 처해 있고, 이들을 받아들인 결과 전체 학교의 40%는 영국의 교육당국이 요구하는 기준에 미달하고 있다. ‘위기의 학교´(원제 The School Report)는 지난 20년 동안에 걸친 영국의 교육이 실제 학교현장에서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고 있는지를 추적한 중도좌파 일간지 ‘가디언’의 탐사보도 기사를 묶은 것이다. 지은이는 과도한 경쟁과 시장논리에 따른 영국의 교육개혁이 어떻게 표류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립학교는 정부의 비호와 높은 등록금에 힘입어 나날이 발전하는 반면 공립학교는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학부모가 사교육비를 얼마나 지원할 수 있느냐에 따라 자녀의 장래가 결정되는 우리 사례와 다르지 않다. 런던대 교육연구대학원에서 박사논문을 작성하고 있는 옮긴이는 영국의 실패사례에도 불구하고 경쟁과 효율성 추구라는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인정한다. 그럼에도 전체 고등학생의 절반이 있는 실업계 고교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 재학생의 1.56%밖에 되지 않는 특수목적고 정책은 중요한 뉴스거리가 되는 우리 사회에서 ‘위기의 학교’가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고 강조한다.1만 3000원.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모란의 아름다움 함께 나누고 싶어”

    “모란의 아름다움 함께 나누고 싶어”

    모란그림의 대가인 왕시우(65) 중국 뤄양(洛陽)박물관장이 한국에 왔다. 그는 한국에서는 문화유산 분야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지만, 중국에서는 모란화가로 더욱 유명하다. 그는 5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인사동 다보성갤러리에서 60여점의 모란그림을 출품한 초대전을 갖는다. 왕 관장은 전시회 개막에 앞서 4일 모란그림 시연회를 갖고 “한국에서 전시회를 갖고 싶다는 희망이 10년 만에 이루어져 기쁘다.”면서 “한국사람들과 모란의 아름다움을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왕 관장과 한국의 인연은 19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뤄양박물관은 국립부여박물관과 교류협력에 합의했고, 이듬해 국립중앙박물관과 부여박물관에서 ‘낙양문물특별전’이 열렸다. 당시 부여박물관장으로 재직하던 신광섭 국립민속박물관장은 왕 관장이 중국을 대표하는 화가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초대전을 주선하겠다는 약속을 했던 것. 이 약속이 10년 만에 다보성갤러리 대표인 김종춘 한국고미술협회장의 후원으로 성사된 것이다. 중국에서 모란은 그 화려함으로 ‘꽃중의 왕’이라는 화왕(花王)으로 불린다. 왕 관장의 모란그림은 특히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리펑 전 총리가 소장하고 있을 만큼 인기가 높다. 왕 관장은 “이번에 출품된 그림은 오늘날 나의 모란화풍을 대표하는 작품”이라면서 “한국민들이 이번 전시회를 통하여 중국 문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면 그보다 기쁜 일이 없겠다.”고 소박한 희망을 밝혔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골각기’ 시대별 양상 한눈에

    ‘골각기’ 시대별 양상 한눈에

    골각기(骨角器)란 포유류, 조류, 어류의 뼈, 이빨, 뿔 등으로 만든 도구와 장신구를 총칭한다. 선사시대의 골각기는 생업활동과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폭넓게 활용되면서 석기와 함께 주요 생활 도구로 위상을 갖게 됐다. 뿐만 아니라, 금속기가 보급된 이후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골각기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의 생활 주변에 존재해 왔다. 그럼에도 골각기는 석기나 토기, 철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부산 복천박물관의 ‘또 하나의 도구-골각기’특별전은 골각기에 대한 세상사람들의 관심을 다시 불러모으겠다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복천박물관 개관 11주년을 기념하여 3일부터 일반에 공개된 골각기 특별전은 오는 11월4일까지 34일동안 열린다. 이번 특별회는 그동안의 발굴성과에 비하여 연구는 지지부진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 결과 전국의 주요 박물관이 적극 호응하여 어느 때보다 충실하게 우리나라 골각기의 전체적인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회가 될 수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국립박물관과 서울대와 충북대 등 대학박물관, 영남문화재연구원과 경남고고학연구소를 비롯한 발굴조사기관 등 국내 22개 박물관과 연구기관이 참여하여 380점 남짓한 중요 유물을 출품했다. 특별전은 ▲골각기의 출현 ▲생산도구 ▲일상생활 소도구 ▲무기와 장신구 ▲주술도구 ▲골각기의 제작과정 ▲골각기의 제작기술 ▲세계의 골각기 등 8가지 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골각기가 출현하기 시작한 구석기시대 유물로는 뼈나 뿔의 끝을 뾰족하게 가공한 청원 두루봉과 단양 구낭굴의 첨두기가 선을 보인다. 신석기시대 것은 골촉이나 골창 같은 수렵구와 낚싯바늘과 작살 같은 어로구, 괭이와 낫 같은 농경구, 바늘과 칼 같은 가공구, 그리고 장신구와 의례구를 살펴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골각기 활용은 감소하는 청동기시대 이후에는 피리와 숟가락, 인물조각상, 장신구 등 가공 수준은 크게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하인수 복천박물관장은 “이번 전시회는 우리 역사 속에서 골각기가 차지하는 존재 이유와 의미를 재조명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면서 “나아가 일반 시민들이 우리의 골각기 문화를 재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동래읍성이 가까운 동래구 복천동에 있는 복천박물관은 삼한 및 삼국시대 부산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가야문화의 해명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 복천동고분군을 발굴한 뜻깊은 자리에 1996년 세워진 고고학전문박물관.5만 6334㎡(1만 7041평)의 부지에 전시관과 야외전시관을 갖춘 지역 대표박물관의 하나이다.(051)554-4264.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8) 예산 향천사 멸운대사 부도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38) 예산 향천사 멸운대사 부도

    서양의 묘지에서는 주인공의 얼굴을 새겨놓은 무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네프스키수도원 묘지를 찾았을 때도 문호 도스토옙스키와 작곡가 차이콥스키·무소르그스키·글린카의 무덤에 예외없이 흉상이 세워져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스트리아 빈의 중앙묘지에 있는 모차르트의 기념물에는 얼굴 옆모습이 돋을새김되어 있고, 브람스 무덤에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그의 모습을 조각해 놓았습니다. 물론 같은 묘지에 묻힌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무덤처럼 하프나 음악의 요정같은 상징적인 장식만 되어있는 것도 있었지요. 우리나라에는 무덤에 주인의 얼굴을 새겨놓는 전통은 없었던 듯 합니다. 하지만 큰스님의 사리를 모신 부도를 일종의 무덤으로 볼 수 있다면, 충남 예산 향천사(香泉寺)에 있는 멸운대사 부도는 유일한 사례가 될 것입니다. 예산(禮山)은 백제시대에는 오산(烏山)으로 불렸습니다. 이 오래된 땅이름의 흔적은 지금도 예산의 안산인 금오산(金烏山)에 남아있지요. 향천사는 이 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백제 의자왕 16년(656년) 의각대사가 세웠다고 창건 설화는 전합니다. 의각 스님은 당나라에 유학한 뒤 불상을 모시고 돌아와 석달동안이나 절 지을 자리를 찾아다녔다고 하지요. 어느날 금빛 까마귀(金烏) 한 쌍이 날아가는 곳을 따라갔더니 향기로운 샘물(香泉)이 있어, 절을 짓고 산 이름을 금오산이라고 붙였다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예산과 금오산, 향천사가 서로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금도 읍내에서 걸어서 오를 수 있을 만큼 가깝고, 풍광도 뛰어난 향천사와 금오산은 주민들의 가장 훌륭한 휴식처이자 등산코스가 되고 있지요. 향천사에는 두 기의 옛 부도가 있습니다. 부도밭은 절에서 개울 건너 100m쯤 떨어진 언덕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전형적인 조선시대 부도가 멸운대사 것입니다. 몸통의 정면에 ‘멸운당대사 혜희의 탑(滅雲堂大師惠希之塔)’이라고 새겨놓았지요. 가까이 다가가 보면 팔각 지붕돌의 정면으로 내민 추녀마루 끝에 작은 인물상이 하나 조각되어 있습니다. 사실성이 느껴지는 얼굴 모습은 왕방울만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코가 커지는 바람에 다소 희화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장난스럽지는 않습니다. 전체적으로는 고승다운 품격에 연륜이 더해져 너그러운 인상을 풍기지요. 향천사에는, 멸운대사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군을 조직하여 금산전투에 참여했고, 전란이 끝난 뒤에는 불타버린 절을 중창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합니다. 하지만 멸운대사 부도에는 숙종 34년(1708년)에 해당하는 강희 4년에 세웠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습니다. 임진왜란(1592∼1598)과는 100년 이상의 시차가 있지요. 지금은 수덕사가 보관하고 있는 향천사 동종에 숙종 28년(1702년)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멸운대사가 주석하며 대대적으로 절을 중건한 시기는 숙종대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높이 102.6㎝의 향천사 동종은 일제에 공출되어 예산역까지 실려갔다가 광복을 맞아 극적으로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멸운대사탑은 새로운 부도의 양식을 창조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하지만 새로운 시도가 후대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멸운대사탑에서 보듯 초상을 새겨놓고보니 ‘깨달은 자의 신성함’보다는 ‘인간의 모습’이 오히려 강조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dcsuh@seoul.co.kr
  • “법식 갖춘 괘불 보셨나요”

    “법식 갖춘 괘불 보셨나요”

    괘불(掛佛)이란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고자 절의 큰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그림을 말한다. 보통 높이가 10m가 넘는 크기여서 다루기가 쉽지 않은데다,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에 따른 훼손 위험도 적지 않아 걸기를 꺼리는 분위기이다. 따라서 요즘에는 박물관이 아닌 법당 앞뜰에 법식을 제대로 갖추어 걸린 괘불의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땅끝마을이 가까운 전남 해남의 미황사가 해마다 한 차례씩 여는 괘불재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미황사 괘불재는 해남지역 주민들이 정성들여 농사지은 것을 부처님에게 공양하고 다음해 풍년을 비는 자리지만, 전통문화 애호가들에게는 괘불의 본래 쓰임새를 확인할 수 있는 드문 기회이기도 하다. 보물 제1342호로 지정된 미황사 괘불은 조선 영조 3년(1727년)에 그려진 것으로 밝은 녹두색과 분홍색·황토색이 조화를 이루어 은은하면서도 환상적인 세계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높이 1170㎝에 너비가 486㎝에 이르는 대작이다. 지역축제로 발돋움한 미황사의 ‘괘불재 그리고 작은음악회’는 올해로 여덟번째. 올해는 오는 27일 열린다. 절 아랫마을 사람 20명이 오후 1시부터 대웅전에 있는 괘불을 앞마당으로 옮기면, 만물공양(萬物供養)과 하늘·땅·사람에게 소원을 비는 통천(通天), 법문, 축하공연에 이어 2시50분 괘불을 큰법당으로 다시 모신다. 두레상 한솥밥 나누기는 오후 3시, 작은음악회는 오후 6시에 펼쳐진다. 미황사에서는 이날 밤 템플스테이도 가능하다.(061)533-3521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장면 가옥’ 문화재 등록

    문화재청은 장면(1899∼1966) 전 총리가 1937년에 지은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장면 가옥’을 1일 문화재로 등록했다. 한식과 일식, 서양식 건축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외관을 보이는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는 물론 수행원실과 경호원실도 원형대로 남아 있다. 이 집은 장면 전 총리가 5·16 군사쿠데타로 정치에서 물러난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택연금을 당한 광복 이후 정치의 중심지로,1930년대 주거양식을 보여주는 드문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책의 날’ 문화훈장에 장평순씨

    오는 11일은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제정한 제21회 ‘책의 날’이다. 정부는 이날을 기념하여 교육출판문화 발전에 힘쓴 장평순(56) 교원 회장에게 옥관문화훈장을 수여한다. 철학의 대중화에 기여한 이건복(54) 동녘 대표에게는 대통령 표창, 김태진 다섯수레·강병선 문학동네·김형성 시아출판사 대표와 김기태 세명대 교수에게는 국무총리 표창을 준다. 금창연 동원대학 교수와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 류희남 물병자리 대표 등 20명은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는다.상식을 겸한 올해 ‘책의 날’ 기념식은 5일 오전 11시 서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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