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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겨울 냉면/서동철 논설위원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한 친구에게 냉면이 어떠냐고 했더니 좋단다. 얼어 죽을 지경인데 무슨 냉면이냐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이다. 그동안 먹는 재미를 좀 가르쳐 놨더니 ‘슬슬 사람이 되어 가는 군’ 하는 생각에 흐뭇했다. 사실 냉면은 이렇게 몹시 추운 계절이 아니면 만들어 먹을 수 없는 겨울 음식이었다. 여름 같으면 줄을 서도 길게 서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한겨울에 손님이 그렇게 있겠느냐는 생각에 느지막이 도착했다. 그런데 냉면집에 들어서니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냉면 열풍이 불었다더니 젊은 사람도 많이 보였다. 당연히 삶은 돼지고기와 소주를 먼저 시켰다. 기름기를 적당히 뺀 제육과 시원한 냉면김치에 소주는 궁합이 잘 맞는다. 냉면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도 이 맛에 따라나서곤 하는 동료도 있다. 소주 몇 잔에 군불이 지펴지듯 식었던 몸에 따뜻한 기운이 퍼진다. 오랜만에 마주 앉은 친구와의 정담(情談)도 한겨울 냉면집 공기를 훈훈하게 한다. 냉면 그릇 바닥이 보이도록 차가운 육수를 모두 비우고 일어섰다. 앞서 냉면집을 나서던 이가 “어, 날씨가 더 추워졌네” 한다. 허허, 이 사람아 추워지긴…. 그게 겨울 냉면 맛이라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과욕/서동철 논설위원

    TV 채널을 돌리다가 진천 보탑사를 다룬 프로그램이 스쳐 지나갔다. 1996년 창건된 보탑사는 불사(佛事)를 마무리한 것이 2003년이라니 역사랄 것도 없는 새 절이다. 하지만 새로운 큰법당의 유형을 만든 삼층목탑을 비롯해 과거의 재현에 머물지 않은 됨됨이가 인상적이다. 언젠가 찾은 보탑사에서 기억에 남는 전각의 하나는 와불(臥佛)이 있는 적조전(寂照殿)이었다. 부처가 열반한 쿠시나가라의 풍경을 벽화로 그려 놓아 사실성을 강조했다. 언제부터인가 좌탈입망(坐脫立亡)이라는 표현을 가끔 대한다. 수행이 지극한 경지에 이른 고승이 앉은 상태로 입적하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런데 예부터 열반하는 부처의 모습은 보탑사처럼 누워 있는 상태로 묘사하고 있으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부처가 오히려 경계했다는 좌탈입망은 누구의 가르침일까. 깨달은 척하려는 자의 과욕이거나, 스승의 명예를 높이려는 자의 무리수일 것이다. 깨달음 없는 자가 억지로 앉은 채 세상을 뜨는 것은 불교에서도 그저 좌사(坐死)라고 한다.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인생이지만 새해 벽두 지나친 욕심을 버리라는 가르침은 고마운 일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양(羊)/서동철 논설위원

    양은 평화와 순종의 아이콘이지만, 일단 화가 나면 참지 못하는 성격도 감추고 있다고 한다. 한자의 양(羊)은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달리고 꼬리를 늘어뜨린 모습의 상형문자다. 이 글자가 맛있을 미(味), 아름다울 미(美), 상서로울 상(祥), 착할 선(善), 옳을 의(義)로 변주가 이루어졌으니 양의 품성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과거 양과 염소를 분명하게 구분 짓지 않았다. 양의 해에 태어난 사람을 양띠라고도 하고, 염소띠라고 부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산양(goat)와 면양(sheep)을 명확하게 구분해 부른다. 생물학적으로도 산양과 면양은 다른 속(屬)으로 염색체 수도 다르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 옛 기록에는 그저 양(羊)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 많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도 ‘다산필담’에서 ‘산양, 즉 염소를 양이라고 잘못 부른 사례가 많아 분간하기 어렵다’고 했다. ‘목민심서’에서는 ‘우리는 산양을 염소라 하고, 고(?) 또는 하양(夏羊)이라고 면양과 구별한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보면 수염 염(髥)자를 쓴 염소(髥牛)라는 이름에서는 외모의 특징이 드러난다. 고(?)는 고트(goat)를 음차했을 것이다. 야생 면양의 가축화는 아시아의 서부 고원지대와 중앙아시아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이란고원의 유적에서 발견된 면양의 뼈는 BC 7000년 것으로 측정됐다. 산양의 가축화를 보여 주는 최초의 증거는 BC 6500년으로 추정되는 메소포타미아의 제리코 유적에서 나왔다. BC 6000년 안팎 카스피해 유적에서도 출토됐으니 역시 이란 북부 지역이다. 고대 한반도에서 양의 존재는 미미하다. 1세기 유적인 김해 패총에서는 멧돼지와 사향노루, 사슴, 소, 말의 뼈가 대거 출토됐지만 양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 후한시대(25~219) 사전인 ‘석명’(釋名)에서는 삼한에는 중국에서 볼 수 없는 양이 있으며, 육포를 만들어 먹는다고 적었다. 한반도 산양 사육의 기원을 짐작하게 해 주는 기록으로 받아들여진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양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책인 ‘서기’에는 599년 낙타 1두와 노새 1두, 양 2두, 흰꿩 1쌍을 백제로부터 받았다는 대목이 보인다. 일본은 이것을 양 사육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고려시대로 내려오면 예종 11년(1116) 거란족의 요나라 유민이 양 수백 마리를 몰고 투항했는데, 이것이 면양의 한반도 최초 유입 기록이다. 이후 양은 상서로운 짐승으로 대접받았다. 특히 양꿈은 길몽으로, 이성계의 일화가 대표적이다. 그가 초야에 묻혀 있던 시절 꿈속에서 양을 잡으려 하자 뿔과 꼬리가 모두 떨어져 나갔다. 이야기를 들은 무학대사는 곧 왕위에 오르리라고 해몽했다. 양(羊)에서 뿔과 꼬리를 떼니 곧 왕(王)이 된다는 것이었다. 을미년 양띠해가 밝았다. 우리 국민 모두 양꿈 꾸고 소원 성취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울광장] 춘천 중도 유적 200년 뒤를 고민하라/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춘천 중도 유적 200년 뒤를 고민하라/서동철 논설위원

    무엇이든 초(超)스피드인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일까. 한국인의 시간 관념은 무엇이든 슬로 템포인 나라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남들이 100년 걸린 것을 10년 만에 이루었다고도 하지 않는가. 문제는 엄청난 속도로 이루어 놓은 것을 벌써 비슷한 속도로 허물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언저리에 살았던 저층 아파트는 벌써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고, 지금 살고 있는 집도 남은 수명은 짧으면 10년, 길어 봐야 20년 남짓일 것이다. 그러니 한국인이 체감하는 상대적인 시간의 빠르기는 지은 지 200~300년 된 아파트에서 느려 터지게 살아가는 나라 사람들의 그것과 비슷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가 언제나 빠르게만 흘러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왕조가 쇠잔해 가던 19세기는 변화의 추세에 동승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너무나 느리게 세월을 흘려보낸 시대가 아닌가. 미래 또한 지금과는 다를 것이다. 뒤처졌던 변화를 따라잡겠다며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의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아야 했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다. 이른바 글로벌 스탠더드에 템포를 맞춰 살아갈 시대가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시대의 조급한 성과주의는 우리 시대에서 그쳐야 한다. 한없이 느리게 살아가도 좋을 후손에게까지 악영향이 미치게 해서는 안 된다. 추억마저 남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파트처럼 빠르게 살았던 시대의 산물은 빠르게 허물어도 그만일 것이다. 하지만 느리게 살았던 과거의 산물만큼은 우리 손으로 훼손하지 말고 미래 느린 세대에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나 싶다. 오늘도 땅속의 문화유산이 줄지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본다.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방식의 개발이 어떤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는 재론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문화적 시각이 아닌 경제적 시각으로도 문화 파괴적인 개발은 미래 세대의 이익을 빼앗는 우리 시대의 탐욕일 뿐이다. 파리나 로마가 온 국민을 먹여살리다시피 하는 관광도시가 된 것은 이런 방식의 개발을 용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낡은 아파트 창틀 하나를 바꾸려 해도 허가를 받아야 하고, 마당에 삽질 한 번만 해도 도굴꾼 취급을 받는 문화재보호제도 덕분이다. 그것은 이 나라 선조가 후손들에게 내린 축복이다. 우리 땅속의 문화유산이 그들 것만 못 하지 않느냐는 주장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문화적 열등감은 파괴적 개발 논리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악용될 뿐이다. 무엇보다 조선시대 도성(都城)이었던 서울만 해도 옛 모습은 로마나 파리가 부럽지 않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그동안 엄청난 파괴가 이루어졌음에도 지하에는 당시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복원할 수 있을 만큼의 기초가 그대로 남아 있다.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종로 양쪽에 들어섰던 조선시대 상점가 시전행랑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불행히 교보빌딩에서 종각 사거리까지 한 블록은 고층빌딩이 들어차면서 이미 흔적이 사라졌다. 지금 춘천 중도 유적이 다르지 않은 위기에 맞닥뜨려 있다. 1967년 의암댐을 막으면서 생긴 중도는 신석기시대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유적의 보고다. 917기의 집터, 101기의 고인돌, 경작지 유적과 비파형동검과 청동도끼가 쏟아져 나왔다. 해자(垓子)와 환호(環壕) 같은 방어 시설도 확인됐으니 당시로서는 초대형 도시였다. 주거 밀집 지역을 담은 사진을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세계적인 선사유적지로 이름을 알릴 가능성은 충분하다. 춘천시가 이곳에 2018년까지 ‘레고랜드 테마파크’를 짓겠다고 나섰다. 최근 출범한 ‘춘천 중도 고조선유적지 보존 범국민운동본부’는 당연히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하(下)중도를 철저히 보존하고 전체를 하나의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라는 것이다. 레고랜드가 정말 필요하면 유적이 적은 상(上)중도나 미군이 떠난 캠프페이지도 있지 않느냐는 대안도 제시했다. 중도 유적이 당대주의(當代主義)에 밀려 사라진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레고랜드를 갖고 싶어 하는 춘천시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럴수록 200년 뒤 후손을 행복하게 하는 결정이 무엇일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 [씨줄날줄] 도시재생/서동철 논설위원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공간이자 관광 자원으로 떠오른 서울의 북촌(北村)도 한때는 계륵(鷄肋)이었다. 1930~1950년대 지어진 이곳의 서울형 한옥은 1980~1990년대 아파트가 주거 문화의 대세로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골칫거리로 등장한다. 적지 않은 한옥의 주인은 낡을 대로 낡아 버린 기와집을 헐어 버리고 다세대나 다가구 주택을 짓고 싶어 했다. 한옥을 보존하기 위한 규제만 만들었을 뿐 지원할 재원이 없었던 행정관청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규제의 허점을 뚫고 무리하게 지었던 한옥 사이의 양옥이 오히려 눈총을 받는 시대가 됐다. 자연발생적 도시 재생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의 도시재생이란 구도심에 밀집한 퇴락 주택을 완전히 쓸어 버린 뒤 지형마저 바꾸어 새로운 공동주택 단지를 건설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형태의 재개발이 급격하게 이루어지면서 지금은 북촌의 한옥보다 늦게 지어진 1960~1970년대 주택을 오히려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재개발한 아파트가 세월이 흘러 다시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도시의 흉물로 바뀌었을 때 어떤 방식의 재개발이 가능할 수 있을지는 답이 없다. 지금은 부동산 경기의 침체로 기존 방식의 재개발마저 벽에 부딪힌 상황이다. 지난 정부 시절 경쟁적으로 지정됐던 서울의 뉴타운지구는 올해 들어 줄줄이 해제되고 있다. 숭인·창신지구는 지난봄 뉴타운지구에서 풀린 뒤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 선도 지역으로 지정됐다. 풍수지리적으로 도성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 남쪽 지역에는 안양암과 청룡사를 비롯한 유적이 곳곳에 있다.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동대문 의류 상가의 배후 생산기지라고 할 수 있는 봉제 골목은 역사적 의미도 적지 않다. 관점은 다르지만 삼청동에 버금가게 발전할 수 있는 문화적 잠재력이 크다. 엊그제 서울시가 ‘서울형 도시재생 시범 사업’ 지역 5곳을 발표했다. 선사유적지가 있는 강동구 암사동과 신발을 비롯한 피혁제품 제조 업체가 밀집한 성동구 성수1·2가 주변, 대표적 대학가인 서대문구 신촌동과 과거 신흥 주택가였던 성북구 장위동과 동작구 상도4동이 대상이라고 한다. 서울시의 지원과 주민의 노력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면 살기 좋은 마을을 넘어 주위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동네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적 파급 효과가 큰 문화시설의 재배치는 자생적 도시재생을 결정적으로 촉진한다. 그런 점에서 정부와 서울시는 새로운 문화시설은 물론 이전이 필요한 기존 문화시설도 재생이 필요한 지역에 배치해 주변에 새로운 문화적 활력을 불어넣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설렁탕 유감/서동철 논설위원

    소고기는 인간과 소의 공존과 역사를 같이하지만, 과거엔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특히 벼농사권에서는 소가 없어선 안 되는 수단이었으니 소를 잡는 것은 중대한 범죄행위였다. 조선 세종 시대에는 소나 말을 도살하는 것을 금지하는 금살도감(禁殺都監)을 두었다는 기록까지 보인다. 그러니 설렁탕이 조선시대 선농제(先農祭)에서 비롯됐다는 속설은 좀처럼 믿기 어렵다. 동대문 밖 선농단(先農壇)에서 임금이 직접 소를 몰아 땅을 가는 의식을 치른 뒤 백성과 나눠 먹은 음식이 설렁탕이라는 것이다. 풍년을 기원하는 자리에서 소에 상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잡아서 국을 끓였다는 뜻이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설렁탕에는 1970년대 역사도 스며 있다. 토요일이 분식일이던 시절 설렁탕에도 밥 대신 국수를 말아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분식일이 폐지되고 나서도 국수맛을 못 잊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듯하다. 시내 단골 설렁탕집의 국수 인심이 좋은 것도 곡절을 겪은 탓인지 모르겠다. 이런 설렁탕이지만 요즘엔 누구도 흔쾌히 손들고 나서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먹고 나면 만족하는 음식이 또한 설렁탕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의 시시콜콜] ‘7성급 오피스 타운’은 문제없나

    [서동철의 시시콜콜] ‘7성급 오피스 타운’은 문제없나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비행기를 되돌린 사건이 일어나자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이른바 7성급 호텔의 향방이었다. 서울의 문화적 허파라고 할 수 있는 송현동에 호텔을 짓는 계획은 그렇지 않아도 논란거리였다. 야당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여권이 내세운 ‘경제 활성화’ 논리는 여론의 공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추진력을 갖기 어렵다. 그런데 ‘학교 옆 호텔’ 건립을 진두지휘한 당사자가 조 전 부사장이라니 이제 ‘총대’를 메겠다고 나설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옛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부지의 호텔 건립 논란은 처음부터 초점이 어긋났다. 무엇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보다 무엇으로 활용할 것인지를 먼저 고민해야 했다. 호텔을 지을 수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곁에 덕성여중고와 풍문여고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학교보건법은 학교 반경 200m 이내의 상대정화구역과 50m 이내의 절대정화구역에서는 관광호텔을 마음대로 세울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이곳은 아예 학교와 담장을 맞대고 있다. 여권은 이 규정을 피해 호텔을 지을 수 있도록 관광진흥법을 개정하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호텔 건립 계획은 넘어서기 쉽지 않은 벽에 가로막혀 있다. 문제는 이렇게 되고 보니 송현동 부지의 미래가 더욱 불투명해졌다는 것이다. 호텔만 지을 수 없을 뿐 다른 건축행위는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최근 만난 종로구 관계자는 “사업계획을 바꾸어 오피스 빌딩을 짓겠다고 건축허가를 요청하면 행정 관청에서 거부할 법적 권한이 전혀 없다”고 설명했다. 이곳이 서울시의 ‘북촌 제1종 지구단위계획 구역’이어서 신축 건물의 높이만 3~4층으로 제한될 뿐 업무용 공간으로 쓰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경복궁이 바라보이는 송현동 부지는 북쪽의 삼청동과 가회동 일대의 북촌, 남쪽의 인사동과 종로를 연결해 거대한 전통 문화권을 만드는 핵심적 위치에 있다. 강남 세곡지구로 이전하는 풍문여고 자리에 서울시가 추진하는 공예문화박물관이 완성되면 일대의 문화적 가치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렇듯 문화적 소통로 역할을 맡아야 할 송현동 부지가 어디에 있어도 좋을 오피스 빌딩의 숲으로 바뀌는 불행한 일은 없어야 한다. 대한항공은 송현동 개발을 ‘복합문화단지’ 계획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인사동과 삼청동의 땅값과 임대료는 이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올랐다. 호텔이 아니더라도 글자 그대로의 복합문화단지를 조성해 사업성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 대한항공에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옛 사람의 글씨 공부/서동철 논설위원

    사진과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역사적 명필의 글씨를 배우는 데 모사본이나 금석문의 탁본을 이용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다. 모사본은 글씨를 아무리 교묘하게 베낀다고 해도 원작의 생명력은 아무래도 감소한다. 게다가 세월이 흘러 모사본이 낡아 버리면 또 다른 모사본을 만들 수밖에 없었으니 원작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졌다. 그러니 시간적 간격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아 원작에 가까운 옛 집자비(集字碑)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었다. 집자비는 명필의 글씨를 여기저기서 모아 비문을 새긴 비석이다. 집자비 애호 열풍은 뜻밖의 심각한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경북 군위의 인각사 보각국사비는 이런 연유로 손상을 입은 대표적 집자비일 것이다. 보각국사는 바로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1206~1289)이다. 국존(國尊)의 지위에 있던 일연이 인각사에서 입적하자 충렬왕은 문신 민지(1248~1326)를 시켜 비문을 짓게 하는데, 서성(書聖)이라는 왕희지(307~365)의 글씨를 모아 비석을 세웠다. 보각국사탑의 글씨는 일찍부터 왕희지의 행서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명품으로 꼽혔다. 어득강(1470~1550)은 ‘제(題)인각사’에서 ‘기껏 비석이나 보려고 멀리서 찾은 나를 하인들은 조롱하겠지’라면서 문장과 글씨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이수광(1563~1628)은 ‘지봉유설’에서 ‘임진년 왜란 이후 명나라 장수가 왕희지의 필적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후 중국에서 다투어 원하니 부임하는 관찰사마다 왕명으로 탁본을 해야 했다고 적었다. 인각사탑은 정유재란 당시 청나라 군사들의 방화로 허리 부분의 표면이 심하게 훼손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누구나 탁본을 갖고 싶어 했고, 청나라 사신들도 줄기차게 요구했으니 손상은 갈수록 심해졌다. 오늘날 남아 있는 인각사비는 비석이라기보다 그저 검은색 바위 조각이라고 하는 게 옳을 지경이다. 탁본 요구를 견디다 못한 승려들이 고의적으로 파손한 결과일 수도 있다니 불행한 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테마전시실에서 ‘서예의 길잡이 중국 법첩(法帖)’전이 열리고 있다. 법첩은 옛 명필의 글씨를 모사하거나 탁본해 만든 서첩이다. 30점 남짓한 법첩 가운데 왕희지 행서를 집자한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가 눈길을 끈다. 용문거사 윤광주는 숙종 2년(1701) 어렵게 구했다는 인각사비 탁본에 ‘왕희지의 글씨로는 삼장첩이 가장 뛰어나다고 하나, 완연히 묘법에 가까운 인각사비의 글씨보다는 수준이 떨어진다’는 내용의 서문을 붙여 놓았다. ‘삼장첩’이 바로 ‘대당삼장성교서’다. 보각국사비는 후세의 서예 교육에 생명을 바쳤다고 해야 하나.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발해의 미소/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발해의 미소/서동철 논설위원

    크라스키노는 러시아 연해주의 마을 이름이다. 최근 북한의 나진·선봉 경제특구와 철도로 이어진 러시아 하산 지역에 속한다. 이국적인 지명이지만, 두만강 바로 건너 마을이라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크라스키노의 남동쪽 평원지대에는 8~9세기 토성(土城)이 남아 있다. 남북 400m, 동서 300m 정도인 토성의 성벽은 2.0~2.5m 높이로, 안팎에는 돌을 쌓고 내부에는 흙을 채웠다. 성의 북쪽과 동쪽, 남쪽에서 각각 성문(城門)이 발견됐는데, 모두 옹성(甕城)의 흔적이 보인다. 발해의 염주(鹽州) 성터다. 발해는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고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 세력과 손을 잡아 당나라 손아귀에서 벗어나 698년 지금의 중국 지린성 돈화성 부근 남만주 동모산에 세운 나라다. 고왕(高王) 대조영에 이어 제2대 무왕(武王·재위 719~737)과 제3대 문왕(文王·재위 737~793)은 영토를 넓히면서 내치와 외교에도 힘써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했다. 이후 제10대 선왕(宣王·재위 818~830)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한 것은 물론 연해주까지 차지하면서 전성기를 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릴 만큼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한 것이다. 크라스키노는 동쪽의 포시예트만(灣)과 맞닿아 있다. 서쪽으로는 중국의 훈춘이 멀지 않다. 훈춘에는 문왕이 한때 수도로 삼았던 동경용원부가 있었다. 이렇게 보면 발해가 염주성을 세운 이유는 뚜렷하다. 이 도시에 한반도 남쪽의 신라, 동해 건너 일본열도의 왜(倭)와 교류하는 창구 역할을 맡긴 것이다. 염주성은 이른바 신라도(新羅道)와 일본도(日本道)라는 교통로의 출발점이었다. 동북아역사재단과 러시아사회과학원의 발굴조사 결과 염주성은 도로를 정연하게 구획하고 설계한 계획도시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발해 유적에서 도로망으로 구획한 계획도시는 상경도성 말고는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한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러시아 연해주 문물전’이 열리고 있다. ‘러시아의 발해 유물, 한국에 오다’라는 부제처럼 한국 관련 유물 500점이 전시되고 있다. 우리 역사의 흔적이지만, 한국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유물이다. 러시아과학원 극동지부 역사학고고학민족지학연구소와 러시아 국립극동대 박물관, 블라디보스토크의 아르세니예프 박물관에서 빌려 왔다. 특히 관람객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염주성 절터에서 출토된 불상이다. 온화하면서도 절제된 미소는 백제의 서산마애불과 닮았으면서도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서산마애불을 ‘백제의 미소’라고 한다면 염주성 불상은 ‘발해의 미소’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싶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팥죽과 단팥죽/서동철 논설위원

    어린 시절 ‘팥죽할멈과 호랑이’ 이야기를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산골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동짓날 팥죽 한 그릇씩을 얻어먹은 알밤이며, 자라, 송곳, 맷돌이 할머니를 구해주었다는 내용이다. 잡귀(雜鬼)를 쫓는 효험이 있다는 붉은색의 팥죽을 동지(冬至)에 쑤어먹는 풍습의 근원설화쯤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핀란드 민속학자 안티 아르네(1867~1925)에 따르면 이 설화는 뜻밖에 거의 전 세계적인 것이라고 한다. 한국 중국 일본은 물론 서쪽으로 러시아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동북쪽으로 베링해협 건너 북미, 남쪽으로 수마트라와 자바에도 전파됐다고 한다. 가히 ‘팥죽 문화권’이라고 할 만하다. 동지를 앞두고 팥죽 판촉 행사가 요란하다. 그렇지 않아도 팥빙수와 단팥죽 집이 크게 늘었다. 이런 일본식 단팥죽이 입맛을 점령하는 동안 우리식 팥죽집은 희귀해졌다. 최근 신당동 골목에 있는 팥죽집에 다녀왔다. 전통 방식의 순수한 팥죽 맛이 인상 깊었다. 요즘 추세면 이런 집주인은 조만간 ‘인간문화재’로 지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황병기류(流) 가야금산조/서동철 논설위원

    우리 음악을 대표하는 기악 독주곡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산조(散調)라고 답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산조는 매우 느린 장단으로 시작해 조금씩 빨라지다 가장 빠른 장단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형태의 민속 악곡이다. 진양조나 중모리 같은 느린 장단에서는 고도의 음악성이, 자진모리나 휘모리 같은 빠른 장단에서는 고도의 기교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느리게 시작해 빠르게 끝나는 모음곡이라는 형식은 정악을 대표하는 영산회상과 같다. 우리 음악의 특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산조에 대한 오해는 매우 오래된 음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산조의 기틀을 만든 사람은 전라도 영암의 가야금 명인 김창조(1856~1919)라는 것이 정설이다. 물론 화순의 한숙구, 영광의 유성천, 충청도 청주와 서산의 박팔괘와 심정순도 가야금 산조의 독립 장르화(化)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산조는 빨라야 19세기 후반 발생한 음악 장르다. 이후에도 산조는 한동안 특정 지역 음악에 머물렀다고 한다. 1930년대 남도 출신 명인 명창들이 서울에서 조선성악연구회를 결성해 공연 및 후진 양성에 나서면서 비로소 각광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가야금산조의 전승 계보는 해당 가락을 짠 명인의 이름 뒤에 ‘류’(流)를 붙여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김죽파류, 강태홍류, 최옥산류, 성금련류, 김윤덕류, 김병호류, 서공철류, 김종기류, 심상건류, 신관용류, 유대봉류 등이 그것이다. 가야금은 물론 거문고, 해금, 피리, 대금, 아쟁 산조도 다르지 않다. ‘류’를 붙이는 구분법은 1960년대 황병기 명인이 처음 시도한 것으로 1970년대 이후에야 일반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황병기 명인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가락을 궁여지책으로 ‘류’라고 썼지만, 지금도 그 용어보다 적절한 용어는 찾지 못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산조는 호랑이 담배 먹던 옛날 옛적 음악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불과 100년이 조금 넘은 오래지 않은 과거에 비로소 만들어졌으니 역사가 일천한 것은 물론 20세기도 중반에 들어선 뒤에야 본격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음악 형식이다. 황병기 명인이 최근 정남희제 황병기류 가야금 산조를 발표했다. 전바탕을 타는 데 장장 70분이 걸린다. 황병기는 정남희(1905~1984)의 손자 제자다. 김윤덕(1918~1978)이 47분에 이르는 정남희 가락을 황병기에게 물려주었다. 정남희제(制)라 이름 붙인 것은 그의 음악적 개성이 강조된 본바탕 가락이라는 뜻이겠다. 흥청거리지 않는 고도의 정교함이 특징이라고 한다. 우리 음악이 지금도 진화를 멈추지 않고 있는 증거라는 점에서 반갑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신라 월성/서동철 논설위원

    경주를 흔히 신라의 1000년 고도(古都)라고 한다. 혁거세의 사로국이 경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나가기 시작한 이후 신라는 도읍을 옮긴 적이 없다. 이렇듯 신라라는 국가의 발상지인 경주는 많은 인구를 감당할 수 있는 비옥한 들판을 주변에 두고 있다. 무엇보다 경주는 외적을 방어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고 있다. 동쪽에는 명활산, 서쪽에는 선도산, 남쪽에는 오늘날 남산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한 금오산, 북쪽에는 소금강산이 있다. 그 사이로 알천과 문천이 흘러 동쪽을 제외하고 3면이 하천으로 가로막혀 있다. 신라 최초의 궁성(宮城)은 ‘삼국유사’의 ‘이성강탄설’(二聖降誕說) 기록처럼 남산 서쪽의 창림사 터 부근에 자리 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는 혁거세 21년(BC 21) ‘경성(京城)을 쌓고 이름을 금성(城)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하지만 오늘날 금성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월성(月城)의 존재는 ‘삼국사기’의 ‘지리지’에 보인다. ‘파사왕 22년(101)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고 이름을 월성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반면 작자 미상으로 전해 내려오던 ‘동경지’(東京誌)를 조선 현종 10년(1669) 보완해 간행한 ‘동경잡기’(東京雜記)는 ‘월성은 부(府)의 동남 5리에 파사왕 12년(91) 쌓았다. 형상이 반달 같아서 붙인 이름이다. 혹 재성(在城)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했다. 축성 연대에 다소의 오차가 있다. 월성은 동서 890m, 남북 260m의 기다란 성곽이다. 흔히 반월성으로도 불리지만, 반달보다는 초승달에 가까운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다. 월성에는 동북쪽으로 안압지와 조금 더 멀리는 황룡사터가 있고, 북쪽으로 첨성대, 서북쪽으로 황남동고분군, 서쪽으로 월정교 터와 일정교 터, 남쪽으로 포석정이 있다. 신라 왕경(王京)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물론 왕궁(王宮)이 자리 잡은 핵심 중의 핵심이다. 이미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지하 탐사에서는 궁궐의 정전으로 보이는 대형 건물 터를 비롯해 정연하게 배치된 건물군의 흔적이 드러났다. 지표조사에서도 11곳의 성문 터를 발견했고, 외곽에서는 해자의 흔적을 찾아내기도 했다. 문화재청과 경주시가 한국 고대사의 공백을 메워 줄 정보를 담은 유적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히는 월성을 발굴한다. 어제는 지신(地神)과 조상에게 발굴 조사를 알리는 개토제(開土祭)도 가졌다. 15일 시작해 내년 말까지 벌이는 발굴 조사 면적은 5만 7000㎡에 이른다. 본격 발굴에 앞서 유적 분포 상황을 점검하는 시굴 조사의 성격이다. 기대가 클수록 성급함은 버려야 한다. 제대로 발굴하려면 최소 40년은 걸릴 것이라고 한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겸재 화첩 귀환 기념 박물관/서동철 논설위원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2005년 독일 상트오틸리엔 수도원으로부터 겸재 정선(1676~1759)의 화첩을 영구 대여 형식으로 돌려받았다. 이 화첩은 오틸리엔 수도원의 노르베르트 베버(1870~1956) 대원장이 1925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수집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첩을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발견해 국내에 알린 사람은 유준영 전 이화여대 교수다. 그는 1964년 제2차 파독 광부로 독일에 갔다. 아헨의 탄광에서 3년 계약 근무를 마치고 쾰른대학에서 미술사 공부를 시작했다.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1973년 도서관에서 노르베르트 베버 대원장이 1927년 출판한 ‘한국의 금강산에서’를 읽다가 ‘금강내산전도’(剛內山全圖)를 비롯한 세 폭의 겸재 그림 사진을 보게 된다. 1975년 오틸리엔 수도원을 찾아가 지하 선교박물관에서 조선시대 민속유물과 함께 ‘일출송학도’(日出松鶴圖)가 펼쳐진 겸재 화첩을 발견한다. 그는 ‘베버 신부의 책에서 사진으로 보았던 그림 말고도 18폭의 겸재 그림이 더 있었으니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셈’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화첩은 곳곳에 좀이 슬어 어떤 그림은 제목조차 읽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박물관 담당 신부는 뜻밖에 진열장 열쇠를 내주면서 마음껏 꺼내 보라며 친절을 베풀었다. 유 전 교수가 사진을 찍으려고 동행한 독일인 교사와 간이식당 식탁 위에 너덜너덜하고 때가 묻은 화첩을 펼쳐 놓는 순간 식사 당번인 젊은 수사가 “이건 또 뭐야” 하며 화첩을 밀쳐 버렸다. 두 사람은 도망치듯 울타리 밖으로 나가 수도원 대문에 그림을 기대어 놓고 사진을 찍었다. 화첩은 두 차례 소실 위기를 넘겼다. 오틸리엔 수도원은 1980년 초 뮌헨의 바이에른주립 고문서연구소에서 일하던 베네딕도회 수녀에게 화첩의 보존 처리를 맡겼다. 그런데 아파트에 불이 나는 바람에 수녀가 세상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화첩도 타 버린 것이 아닌가 걱정했지만 다행히 고문서보관소에 있었다. 2007년에는 왜관 수도원 본관에 화재가 일어나 문서고에 보관하고 있던 화첩을 피난시킨 일도 있었다.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맡겨 안전한 수장고에서 보관하고 있다. 유 전 교수의 회고담은 ‘왜관 수도원으로 돌아온 겸재 정선 화첩’에 담겨 있다. 국외소재문화재단의 ‘돌아온 문화재 총서’ 첫 권이다. 이 책에는 화첩의 귀환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선지훈 신부의 글도 실려 있다. 왜관 수도원에 ‘겸재 정선 화첩 귀환 기념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남은 꿈이라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그렇게 된다면 문화가 풍성하다고 할 수 없는 왜관이 문화 기행의 중요한 중간 기착지로 발돋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시간의 자취/서동철 논설위원

    양력(陽曆)은 과학적이고, 음력(陰曆)은 비과학적이라는 의식이 은연중 한국인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이미 익숙해진 양력은 서구 중심의 글로벌화가 진전되면서 더욱 편리하게 느껴지는 반면 음력이 일상의 기준이던 시대는 오래전에 시간의 저편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력과 음력은 과학성의 우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학계는 명칭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음력, 즉 태음력(太陰曆)은 순수하게 달의 운행을 기준으로 삼는다. 반면 양력, 즉 태양력(太陽曆)은 지구가 해의 둘레를 1회전하는 동안을 1년으로 삼는다. 그런데 우리가 쓰고 있는 음력은 달의 차고 기울기를 주로 하면서 태양의 운행에도 맞춰 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태양태음력(太陽太陰曆)이라고 불러야 하고, 굳이 줄인다면 음양력으로 쓰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서양도 처음에는 태음력을 썼다.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가 만들었다는 로마력(曆)이 그렇다.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한 해 길이는 지구의 공전주기인 1년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동·서양 모두 도입한 보정 수단이 윤달이다. 그런데 당시 로마에서는 어느 해에 얼마만큼의 윤달을 넣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정치적 입김이 미쳤다고 한다. 그래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를 평정한 것이 달력으로는 BC 46년 1월이지만, 실제 계절은 가을이었다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권력을 잡은 카이사르는 이집트에서 쓰는 태양력을 도입했다. 이미 격차가 생긴 달력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무려 90일짜리 윤달을 넣어야 했다. 이 해는 서구 역사상 가장 긴 445일이 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율리우스력(曆)이 다시 맞지 않게 되자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수정한 것이 오늘날 달력의 바탕인 그레고리우스력(曆)이다. 우리는 중국의 달력을 그대로, 혹은 손질해 쓰면서 큰 불편이 없었다. 신라는 당나라의 인덕력(麟德曆)과 무인력(戊寅曆)을 사용했고, 백제는 남조 송나라의 원가력(元嘉曆)을 쓰면서 일본에도 전해 주었다. 고려와 조선도 당연스럽게 모두 태양태음력이었다. 지금 경기도 남양주 실학박물관에서 달력이 인간의 삶에서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를 살펴보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달력, 시간의 자취’ 특별전이다. 가장 오래된 달력인 선조 13년(1580)의 ‘경진력 대통력’(庚辰年 大統曆)을 비롯해 60점 남짓한 시간 관련 유물이 흥미롭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천문’ 특별전을 사장시키지 않고, 전문 박물관에 맞게 재활용한 순회전이라는 의미도 작지 않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삼박자/서동철 논설위원

    밥집은 무엇보다 맛이 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음식값이다. 맛은 괜찮아도 호된 값을 치르고 나면 기분이 상한다. 우리 같은 서민만 그런 게 아니라 밥값 정도는 아끼지 않을 것 같은 친구들도 다르지 않다고 한다. 세 번째로 이런 집에 독특한 역사나 이야기까지 있으면 발걸음은 더욱 잦아진다. 이화여대 앞 만두집에 갔다. 주인 혼자 주방과 서빙을 해결하는 작은 집이다. 입맛을 좀 안다는 동료들이 자기들끼리 다니다 뒤늦게 비밀 털어놓듯 데려간 것이다. 화상(華商)이라고 써 붙였으니 주인은 당연히 중국 사람이겠다. 그런데 중국집 분위기를 내는 대신 만두집이라고 강조해 놓았다. 역시 만두가 맛있다. 음식값도 매우 싸다. 주방 너머 주인과의 대화도 재미있다. 부모님은 중국집을 했지만 그게 싫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늦은 나이에 음식점을 다시 할 줄 알았으면 그때 잘 배워 둘 걸 하는 후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안주로 시킨 깐풍기 맛은 조금 아마추어 솜씨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역사는 짧아도 ‘스토리’를 만들어 낼 줄 알았다. 소박한 대로 ‘삼박자’가 맞는 밥집이었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의 시시콜콜] 콘크리트에 갇힌 석굴암 석등 대좌

    [서동철의 시시콜콜] 콘크리트에 갇힌 석굴암 석등 대좌

    경주 석굴암의 보호각 앞에는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하대석(下臺石)이 있다. 석등의 기둥돌 이상 부재는 모두 사라지고 최하단의 연꽃무늬 기초만 남아 있다. 미술사학계는 이 석등을 8세기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 공사를 시작했다. 석등이 석굴암의 ‘그랜드 디자인’에 따른 조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석굴암의 일부분이라는 뜻이다. 최근 석굴암을 찾은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석등의 대좌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보호각 앞에 콘크리트로 우뚝하게 축대를 쌓은 넓은 공간이 눈에 띄었다. 그는 팔공산 갓바위처럼 많은 사람이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석굴암을 훼손한 것 아니냐며 분개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문화재청에 물어봤다. 석굴암은 지난해부터 보호각 보수 공사를 벌이고 있다. 이 공사를 위해 철골구조의 가설 덧집을 세웠고, 기초를 든든히 하고자 1m 두께의 콘크리트로 바닥을 다졌다. 이 과정에서 지표에 드러난 높이 28㎝, 지름 95㎝의 하대석을 보호한다며 우물 같은 공간을 남기고 콘크리트를 부었다. 여기에 뚜껑을 덮었으니 지금은 하대석을 볼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가설덧집은 착공 당시부터 논란이었다. 법응 불교사회문화연구소장은 지난해 ‘석굴 전면을 뒤덮으며 떡 버티고 선 거대한 강철 구조물이 시야를 압도하는 대책 없는 풍경은 영락없는 어느 개발지의 아파트 공사 현장’이라면서 ‘강철구조물 기단이 시멘트로 되어 있는 것도 충격’이라고 우려를 표시하기도 했다. 그런데 가설덧집이 철거되고 콘크리트 기단만 남으면서 석등 문제가 표면화된 것이다. 문화재청은 공사가 끝나면 가설 구조물은 철거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엄청난 시멘트 덩이를 부수는 데는 고민도 적지 않은 듯했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약해진 석굴암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려면 진동이 없어야 하지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가설덧집과 함께 철거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시멘트 기단을 영구 기도 시설로 남기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더 많은 신도를 모아 수입을 늘리려는 시도는 석굴암 내부에서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석등이란 물리적으로 불을 밝히는 시설이 아니다. 어둠을 깨치는 부처의 가르침 그 자체를 상징한다. 석굴암은 이 공사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안전성과 관련해 수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하지만 정작 눈앞에서 석굴암의 상징성이 훼손되고 있는 모습에 언론을 포함해 우리 모두 방관한 것은 아닌가 반성한다.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제임스 왓슨/서동철 논설위원

    세계 과학 교과서에 빠짐없이 이름이 올라 있는 미국 생물학자 제임스 왓슨(1928~)은 젊은 과학자의 이미지가 여전하다. 영국 캐번디시 연구소 연구원이던 1953년 25세의 나이로 유전정보의 본체인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왓슨은 공동연구자 프랜시스 크릭, DNA의 결정 패턴을 엑스선 사진으로 촬영한 모리스 윌킨스와 196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그는 이때까지도 미혼이어서 스톡홀름에서 열린 시상식에는 아버지와 여동생을 동반했다. ‘나는 발표 전날에 잠자리에 들 때, 이른 아침에 스웨덴에서 온 전화를 받고 잠에서 깨는 상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꼭두새벽에 나를 깨운 것은 지독한 감기였다. 나는 스톡홀름에서 아무런 기별이 없다는 걸 깨닫고 우울해졌다. 일어나기 싫어서 미적대는데, 오전 8시 15분에 전화벨이 울렸다. 옆방으로 득달같이 달려가 받아 보니 어느 스웨덴 신문기자가 수상 소식을 알려주었다. 나는 행복했다. 기자는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고, 나는 “끝내주는군요!”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왓슨의 자서전인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에 나오는 이야기다. 후배 과학자들에 대한 왓슨의 충고에는 이런 것도 있다. ‘노벨상 발표가 난 해를 최대한 즐기라’는 것인데 ‘과거의 노벨상 수상자로 살 시간은 평생이 남았지만, 그 순간 가장 각광받는 과학자로 살 시간은 1년뿐’이라고 강조한다. 사람들은 노벨상이 아니라면 알 길이 없었을 과학자에게 다가와 사인을 부탁하지만, 다음해 수상자가 발표되는 순간 치세는 끝나 버리고 마니 미인대회 입상자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거칠 것 없는 입담에 자신감이 넘쳐 흐르고 있다. 왓슨은 1968년 이후 뉴욕의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를 암 연구의 메카로 키워 내는 데 전념했다. ‘오직 자신만이 차마 말하지 못할 것들도 모두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평을 들을 만큼의 카리스마가 넘쳤다고 한다. 애착을 가졌던 연구소를 떠난 것은 2007년 10월 영국 선데이타임스와의 인터뷰 때문이다. ‘진화 역사가 서로 다른 인종들이 동일한 지능을 가지리라 믿는 것은 희망일 뿐이다. 흑인을 고용해 본 사람들은 내 말 뜻을 알 것’이라고 했다. 비난이 쏟아지자 왓슨은 무조건적으로 사과한다고 했지만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왓슨이 노벨상 메달을 생전에 경매에 부치는 최초의 수상자가 될 것이라는 소식이다. 선데이타임스 발언 이후 사회적으로 매장되다시피 하여 궁핍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어 인종차별적인 자신의 발언이 옳지 않았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울광장] 우리 지역문화는 정말 빈곤한가/서동철 논설위원

    [서울광장] 우리 지역문화는 정말 빈곤한가/서동철 논설위원

    목포시립교향악단은 올해 네 차례 연주회를 열었다. 지난 20일 목포시민문화회관에서 열린 올해 마지막 정기연주회 레퍼토리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서곡과 바순 협주곡,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이었다. 최영철 지휘에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강희선이 바순 협연자로 나섰다. 음악 애호가는 물론 클래식 음악에 막 눈을 떠 가는 관객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지만, 티켓값은 어른 5000원, 청소년 3000원으로 영화 관람료보다도 훨씬 쌌다. 지역민들에게는 이렇듯 소중한 존재지만, 목포시향은 올 들어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목포시는 교향악단과 합창단, 소년소녀합창단, 무용단, 연극단, 국악원을 운영한다. 목포시는 지난해 말 시의회에서 “6개 시립예술단은 시의 재정 여건을 감안할 때 너무 많다”면서 “적정성을 검토하겠다”고 공표했다. 목포시는 특히 시립예술단 전체의 운영 예산 35억원 가운데 절반이 넘는 18억원이 교향악단에 집중지원되고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정리해고 파동이 빚어졌다. 목포시향은 전남 유일의 상설 교향악단이다. 목포를 제외한 전남의 다른 지역은 교향악 불모지라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해 목포시향은 이웃한 해남과 무안에서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해남 공연이 끝난 뒤 목포시향 인터넷 카페에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며 감격에 겨워하는 청소년의 글이 올랐다. 하지만 올해는 목포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내년에도 활성화될 가능성은 많지 않다. 재정이 어려운 기초자치단체가 한 해 네 차례밖에 공연하지 않는 예술단체에 18억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럴수록 목포시에서 운영하는 예술단체는 반드시 목포시민을 위해서만 공연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활동 범위를 전남 전역으로 넓힌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전남에는 22개의 시·군이 있다. 무안·신안·진도·영암·해남·완도·강진·장흥 같은 서·남해안 지역은 목포와 가깝다. 목포시향이 우선 이 8곳의 자치단체에서도 정기연주회를 열 수는 없을까. 이웃 주민들은 교향악에 관한 한 목포 시민과 같은 문화적 혜택을 받게 된다. 대신 각 자치단체는 목포시향에 한 해 1억원 정도의 후원금을 제공한다. 적은 비용으로 교향악단을 갖는 것이나 다름없는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목포시향은 내년에 네 차례 정기연주회를 계획하고 있다. ‘원 프로그램 나인 콘서트’라면 연주회는 36차례로 늘어난다. 한 달에 세 차례꼴이니 전혀 무리가 아니다. 목포시의 예산 부담이 크게 줄면서도 시향 단원들의 실력은 크게 향상될 것이다. 목포시향만의 문제가 아니다. 기초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예술단체가 전국에 적지 않다. 합창단, 국악단, 무용단, 극단 등 종류도 많다. 대부분 지방재정에 악영향을 미치지만 성과는 크지 않다. 예술단체 운영이 어렵다고 하면서도 이웃 문화를 내 문화로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웃과 협력만 강화해도 예술단체를 살리고 문화적 혜택을 받는 주민도 크게 늘어날 것이다. 가능성을 보여 주는 움직임도 없지 않다. 오늘 경북 의성문화회관 대강당에서는 경북북부권문화정보센터 주최로 ‘경북북부권합창제’가 열린다. 안동시립합창단과 영주 엘로힘 어도러 합창단, 문경운암합창단, 의성군새마을여성합창단, 청송초록합창단, 영양온누리합창단, 영덕군여성합창단, 예천군여성합창단, 봉화군새마을합창단, 을진군립합창단이 출연한다. 이 축제를 보면서 어느 누가 경북 북부의 합창문화를 빈곤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의미 있는 행사가 경북 북부 전 지역을 순회하지 않는 것은 유감이다. 지역 주민이 문화적 동질감을 갖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우리 지역문화가 풍요롭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부와 지자체가 적지 않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앙정부에서 광역단체, 기초단체로 이어지는 종적 지원 체제는 당연히 강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정된 예산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안도 적극 고민해야 한다. 기초 지역문화의 횡적 협력체제를 강화해 나가는 것은 돈이 많이 들지 않는다.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매운맛과 삶의 질/서동철 논설위원

    매운맛 전성시대다. 아이들이 먹는 떡볶이는 아예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화끈하다. 너무 매워 우유를 준비해 간다는 짬뽕집도 있다. ‘청양페퍼’로 매운 파스타를 만든다는 기사를 보고 뭔가 했더니 청양고추여서 웃은 적도 있다. 최근에는 청양고추보다 몇 배 맵다는 멕시코 하바네라고추로 만든 라면도 나왔다. 봉지에 ‘도전!’이라고 써 놓았으니 어지간히 매운가 보다. 매울 신(辛) 자를 앞세워 국내외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기존 라면에 도전한다는 뜻도 있는지 모르겠다. 양념 맛도 강해지는 듯하다. 며칠 전 서울 응암동 감자국 골목을 찾았다. 갖은 양념을 아낌 없이 넣은 듯한 국물은 전보다 진하고 매콤하다. ‘메인디시’의 맛이 강하니 김치며 깍두기도 달고 매웠다. 음식이 자극적이 되는 이유를 폭증하는 스트레스와 연결짓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상관이 없지는 않겠지만, 재료의 질(質) 악화에도 상당한 혐의를 두고 싶다. 좋지 않은 재료를 아무리 지지고 볶아 봐야 맛이 날 리 없다. 그러니 자극적인 양념으로 음식 맛을 호도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음식이 진해진다는 것은 추락하는 ‘삶의 질’을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말짱 도루묵/서동철 논설위원

    도루묵은 초겨울부터 맛있는 생선이다. 깊은 바다에 살다 이맘때쯤 산란을 하려고 얕은 바다로 나온다.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 허균(1569~1618)의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은어’(銀魚)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고려시대 한 임금이 목어(木魚)를 좋아해 이름을 은어로 고쳤다가 싫증 나자 되돌려 환목어(還木魚·도로목)가 됐다는 다 아는 스토리다. 변덕을 부린 당사자를 선조로 아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선조 시대를 살았던 교산인 만큼 고려왕설(說)이 그럴듯하다. 더구나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난했지만, 도루묵은 동해안이 주산지가 아닌가. 교산은 ‘민물고기의 귀족’이라는 은어는 은구어(銀口魚)라는 이름으로 다루었다. 도루묵도 이제 흔치 않다. 그럴수록 주문진항의 깡통구이 도루묵이 생각난다. 지난겨울엔 단골 생태집에서 도루묵 식해를 공짜로 내줘 감동했다. 올해도 담그고 있는지…. 이렇게 맛있는데 누가 ‘도루묵’을 넘어 ‘말짱 도루묵’이라고 우습게 보는지 모르겠다. ‘도살장 앞에서 크게 입맛을 다신다’는 ‘도문대작’은 이렇듯 철없는 식탐을 스스로 비웃는 표현일 것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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