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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섶에서] 잔소리 약국/서동철 논설위원

    잔소리 듣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게다. 국어사전을 보니 ‘쓸데없이 자질구레한 말을 늘어놓음’이나 ‘필요 이상으로 듣기 싫게 꾸짖거나 참견함’이 잔소리란다. 그러니 ‘듣기 좋은 잔소리’나 ‘기분 좋은 잔소리’는 ‘듣기 좋은 소리’나 ‘기분 좋은 소리’의 오용(誤用)일 뿐이다. 아니면 그 잔소리 한 사람에게 아부하는 것이거나…. 며칠 전 이웃 동네에서 점심을 먹고 골목길을 걸어 나오는데 ‘잔소리 약국’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 집 약사는 어지간히 잔소리가 심한가 보다 하면서 SNS에 사진을 올렸더니 후배가 댓글을 달았다. 실제로 감기약을 사러 그 약국에 갔다가 마스크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강의를 한참이나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잔소리를 각오한 사람만 들어오라’고 미리 경고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 집에선 참아야 한다. 잔소리의 ‘잔’은 ‘작다’는 뜻의 ‘잘다’에서 왔을 것이다. 잔소리하는 사람은 말만 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도 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내가 그렇다. 실수를 저질러 기분이 좋지 않은 이에게 “그것 봐, 내가 뭐랬어” 하고 꼭 한마디씩 한다. 그렇게 두 번 죽이고 나서야 ‘왜 그랬을까’ 하고 반성한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프로농구] 전자랜드 원정 10연패 탈출

    [프로농구] 전자랜드 원정 10연패 탈출

    정영삼(전자랜드)이 지긋지긋한 원정 10연패 탈출에 앞장섰다. 정영삼은 6일 서울 잠실학생체육관을 찾아 벌인 프로농구 정규리그 3라운드 SK와의 대결에서 팽팽히 맞선 2쿼터 결정적인 3점슛 두 방을 꽂아 흐름을 찾아오고 종료 직전 결정적인 U파울을 이끌어내 67-61 승리에 주춧돌을 깔았다. 지난 9월 18일 모비스를 꺾은 뒤 10경기 연속 원정 패배에 울었던 전자랜드는 두 달 만에 원정 승리의 감격을 맛보며 최근 4연패에서도 벗어났다. 62-61로 앞서던 전자랜드는 허버트 힐의 2득점으로 종료 1분46초를 남기고 3점 차로 달아났다. SK는 두 차례 공격 기회를 얻었으나 데이비드 사이먼의 슛이 한 번은 빗나갔고 또 한 번은 힐에게 블로킹당하면서 추격의 동력을 잃었다. 전자랜드는 종료 26초를 남기고 함준후가 미들슛을 꽂아 6점 차로 달아나 승부를 결정지었다. 전날 꼴찌 LG에 1점 차로 분패했던 SK는 사이먼이 24득점 18리바운드로 분전했지만 팀 전체적으로 체력 저하에 덜미를 잡혔다. 마리오 리틀(KGC인삼공사)은 경기 안양체육관으로 불러들인 동부와의 대결에서 3점슛 9개를 던져 7개를 집어넣는 집중력을 선보이며 27득점 33리바운드 3어시스트 활약을 펼쳐 93-82 압승을 이끌었다. 인삼공사는 공동 선두 모비스, 오리온과의 승차를 1.5경기로 좁혔다. 또 홈 12연승을 내달려 프로농구연맹(KBL) 역대 개막 후 최다 홈 연승을 이어 갔고 두 시즌에 걸쳐 홈 15연승으로 팀 자체 최다 홈 연승을 내달렸다. 역대 최다 홈 연승은 SK가 2012년 11월부터 2013년 11월까지 작성한 27연승이다. 안드레 에밋(KCC)은 전주체육관에서 삼성을 맞아 33득점 9리바운드 활약을 펼쳐 78-73 승리를 이끌어 이날 생일을 맞은 추승균 감독에게 시즌 두 번째 4연승을 선물했다. 인삼공사와의 승차도 1.5경기로 좁혔다. 한편 서동철 감독이 병상에서 돌아와 시즌 처음 코트에 나선 여자프로농구 KB스타즈는 청주체육관으로 불러들인 우리은행과의 정규리그 3라운드 대결에서 58-67로 무릎을 꿇었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신라인이 재현한 ‘보드가야의 성도상’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신라인이 재현한 ‘보드가야의 성도상’

    ‘삼국유사’를 보면 경주 토함산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다. 석굴암이라고 하면 곧 인자하고 위엄 있는 모습의 본존불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나의 석굴에 조성한 석불사는 대형 사원을 방불케 하는 상징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이 상징 체계를 포괄하는 공간의 이름만 일러 주었지 본존불의 정체성은 언급하지 않았다. 본존불이 과연 어떤 부처님인가 하는 의문이다. ●석굴암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이 아니다? 석가여래설과 아미타여래설이 주종을 이루는 가운데 비로자나여래설도 있었다. 1907년 석굴암이 다시 세상에 알려졌을 때 일본인 학자들은 석가여래라고 했다. 불상의 이름(존명·尊名)은 우선적으로 손모습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게 마련인데 본존불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짓고 있다. 참선에 들어 있는 자세에서 오른손을 무릎에 얹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습이다. 수행을 방해하는 악마를 굴복시키며 깨달음을 이루는 순간을 상징한다. 하지만 항마촉지인이라고 모두 석가여래는 아니라는 데 묘미가 있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한량없는 수명과 지혜를 가졌다는 아미타불은 무량수무량광불(無量壽無量光佛)이라고도 불린다. 무량수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다. 그러니 무량수전의 부처는 분명한 아미타불이지만 항마촉지인을 맺고 있다. 같은 이치로 석굴암 본존불도 꼭 석가모니불이라는 법이 없었다. 1980년대 어느 날 미술사학자인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은 당나라 승려 현장(600~664)의 ‘대당서역기’를 읽다가 익숙한 숫자와 마주친다. 현장은 부처가 깨달음을 이룬 인도 보드가야 마하보리사를 방문했을 때 성도상(成道像)의 치수를 ‘대당서역기’에 적어 놓았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던 강 원장은 일제강점기 박물관의 일본인 건축직 촉탁 요네다 미네지가 측량한 본존불의 치수를 외우고 있었다. 무엇인가 의미가 있는 치수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석굴암에서 발견한 대당서역기의 흔적 ‘대당서역기’에 적힌 성도상의 치수와 요네다 미네지가 측정한 본존불의 치수는 각각 높이가 1장(丈) 1척(尺) 5촌(寸)과 1장 1척 5촌 3푼(分), 양 무릎 사이가 8척 8촌과 8척 7촌 9푼, 양 어깨 사이가 8척 2촌과 6척 7촌 8푼이었다. 곡선을 이루고 있어 기준점을 잡기가 어려운 어깨를 제외하면 거의 일치한다. 게다가 성도상은 본존불처럼 정동 쪽으로 앉아 있었다. 결국 석굴암 본존불이란 8세기 후반 신라 사람들이 1세기 전 중국에서 출판된 ‘대당서역기’를 읽고 신라 땅에 보드가야의 성도상을 구현하려 했던 노력의 산물이었다. 우리가 외래 종교인 불교를 얼마나 창조적으로 수용했는지를 보여 주는 놀라운 문화 교류의 증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렇듯 통일신라시대 문화의 수준을 보여 주고 석굴암의 가치를 높여 주는 감동적인 스토리가 30년이 넘도록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외포리/서동철 논설위원

    외포리는 석모도를 오가는 배가 떠나는 강화도 서쪽의 작은 포구다. 석모도는 낙조가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강화도에서는 섬에 시야가 가로막히곤 하지만 석모도에서는 거칠 것이 없다. 섬을 오가는 페리에서 갈매기 떼에 과자를 던져 주는 재미도 쏠쏠하다. 석모도에는 ‘기도발’이 잘 받는 3대 관음 도량의 하나라는 보문사도 있다. 외포리는 새우젓의 주산지이기도 하다. 그러니 김장철의 외포리 젓갈시장은 붐비기 마련이다. 젓갈에 고정관념이 있다면 외포리에서는 잊어버리는 것이 좋았다. 이곳에서 마주치는 새우젓은 비현실적일 만큼 젓새우 한 마리 한 마리가 원형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는 데다 신선한 냄새마저 풍겼다. 오랜만에 외포리를 찾았다. 작은 횟집이 다닥다닥 붙은 어시장에서 값싸게 먹었던 회 한 접시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낡고 어두침침했던 어시장 건물은 보이지 않았고 포구를 깔끔하게 정비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회 먹기를 포기하고 젓갈시장에 들어섰다. 외포리의 겉모습은 변하고 있었지만 새우젓의 ‘아름다움’은 그대로였다. 기억의 한쪽이 사라진 것은 아쉬워도 외포리의 변화는 수긍할 만했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DMZ의 후고구려 도성/서동철 논설위원

    지난해 도로명 주소를 쓰기 시작하면서 강원도 철원군에서는 역사책에나 나오던 오래된 이름들이 부활했다. 철원군청이 있는 갈말읍 외곽의 궁예로가 그렇고, 동송읍과 나란히 놓인 태봉로가 그렇다. 궁예(?~918)는 말할 것도 없이 후고구려를 창건한 인물이고, 태봉(泰封)은 그가 철원을 도읍으로 세운 나라 이름이다. 궁예의 신분을 두고 ‘삼국사기’는 이렇게 적었다. ‘궁예는 신라 사람이니 성은 김씨이다. 아버지는 신라 제47대 헌안왕으로, 어머지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다. 혹자는 궁예가 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궁예가 태어나자 “장차 나라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한다”는 천문관의 말에 왕은 궁예를 죽이려 했고, 아이를 포대기 속에서 꺼내 다락 밑으로 던졌는데 유모가 몰래 받다가 손가락으로 눈을 다치게 하여 한 눈이 멀었다는 것이다. 신라는 9세기 후반 통치력이 급속히 약화됐다. 부실한 재정을 메우려 무거운 세금을 물리자 전국에서 잇따라 반란이 일어난다. 중이 되었던 궁예는 진성여왕 5년(891) 지금의 경기도 안성인 죽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기훤의 휘하에 들어간다. 이후 지금의 강원도 원주인 북원의 반란군 두목 양길에게 다시 투신했다. 궁예가 강릉 땅 명주를 점령했을 때 그의 세력은 이미 상당한 규모로 성장해 있었다. 궁예는 명주로부터 서북진(西北進)해 주변 각 고을을 모두 휩쓴 뒤 철원에 자리 잡는다. 895년이 되자 궁예 세력은 국가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고, 이듬해 송악의 대호족 왕건 부자가 귀순해 오자 898년 도읍을 지금의 개성인 송악으로 옮긴다. 궁예는 이후 강원도, 경기도, 황해도, 충북을 아우르는 세력으로 성장하면서 901년에는 후고구려의 왕을 자처한다. 궁예는 904년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고 905년에는 다시 도읍을 철원으로 옮긴다.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으로 바꾼다. 본격적인 철원 왕도(王都)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길지 않았다. ‘삼국유사’에는 ‘무인년 6월 궁예가 죽으니 태조가 철원경에서 즉위했다. 기묘년에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다’는 대목이 보인다. 무인년은 태조 원년인 918년, 기묘년은 919년이다. 이렇듯 철원은 태봉의 도성에 그치지 않고 고려의 도성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철원의 후삼국시대 도성은 그동안 존재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도성 터가 비무장지대(DMZ) 한복판에 놓여 있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도성은 둘레가 1.8㎞인 왕궁성, 7.7㎞인 내성, 15.5㎞인 외성으로 이루어진 3중성이다. 최근 정계를 중심으로 남북이 공동으로 이 도성을 조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북한도 군부의 반대가 문제일 뿐 조사 자체를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도성 터에는 경원선 철길이 놓였다. 공동 조사의 첫 단계로 철길을 이설하는 문제부터 남북이 마주 앉아 풀었으면 좋겠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통일신라에 재현한 보드가야의 성도상

    통일신라에 재현한 보드가야의 성도상

    ‘삼국유사’를 보면 경주 토함산 석굴암의 원래 이름은 석불사(石佛寺)였다. 석굴암이라고 하면 곧 인자하고 위엄있는 모습의 본존불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나의 석굴에 조성한 석불사는 대형 사원을 방불케하는 상징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이 상징 체계를 포괄하는 공간의 이름만 일러주었지, 본존불의 정체성은 언급하지 않았다. 본존불이 과연 어떤 부처님인가 하는 의문이다. 석가여래설과 아미타여래설이 주종을 이루는 가운데 비로자나여래설도 있었다. 1907년 석굴암이 다시 세상에 알려졌을 때 일본인 학자들은 석가여래라고 했다. 불상의 이름(존명·尊名)은 우선적으로 손모습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게 마련인데 본존불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짓고 있다. 참선에 들어있는 자세에서 오른손을 무릎에 얹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습이다. 수행을 방해하는 악마를 굴복시키며 깨달음을 이루는 순간을 상징한다.  하지만 항마촉지인이라고 모두 석가여래는 아니라는데 묘미가 있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한량없는 수명과 지혜를 가졌다는 아미타불은 무량수무량광불(無量壽無量光佛)이라고도 불린다. 무량수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다. 그러니 무량수전의 부처는 분명한 아미타불이지만 항마촉지인을 맺고 있다. 같은 이치로 석굴암 본존불도 꼭 석가모니불이라는 법이 없었다.  1980년대 어느날 미술사학자인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은 당나라 승려 현장(600~664)의 ‘대당서역기’를 읽다가 익숙한 숫자와 마주친다. 현장은 부처가 깨달음을 이룬 인도 보드가야 마하보리사를 방문했을 때 성도상(成道像)의 치수를 ‘대상서역기’에 적어 놓았다.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던 강 원장은 일제강점기 박물관의 일본인 건축직 촉탁 요네다 미네지가 측량한 본존불의 치수를 외우고 있었다. 무엇인가 의미가 있는 치수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당서역기’에 적힌 성도상의 치수와 요네다 미네지가 측정한 본존불의 치수는 각각 높이가 1장(丈) 1척(尺) 5촌(寸)과 1장 1척 5촌 3푼(分), 양무릎 사이가 8척 8촌과 8척 7촌 9푼, 양어깨 사이가 8척 2촌과 6척 7촌 8푼이었다. 곡선을 이루고 있어 기준점을 잡기가 어려운 어깨를 제외하면 거의 일치한다. 게다가 성도상은 본존불처럼 정동쪽으로 앉아 있었다. 결국 석굴암 본존불이란 8세기 후반 신라사람들이 1세기 전 중국에서 출판된 ‘대당서역기’를 읽고 신라 땅에 보드가야의 성도상을 구현하려 했던 노력의 산물이었다. 우리가 외래종교인 불교를 얼마나 창조적으로 수용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문화 교류의 증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렇듯 통일신라시대 문화의 수준을 보여주고 석굴암의 가치를 높여주는 감동적인 스토리가 30년이 넘도록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사진 문화재청 제공
  • [길섶에서] 품앗이/서동철 논설위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인연을 맺은 친구 중 하나는 경북 상주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이 친구가 올리는 사진과 글에는 농촌의 현실이 리얼하게 담겨 있어 유심히 보게 된다. 그런데 얼마 전 올라온 사진은 안타까움 자체였다. 겨울에 접어들었건만 감나무에는 가지가 찢어질 듯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딸 사람이 없어 방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친구는 “까치밥치고는 좀 많다”고 농담을 했지만 웃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TV 프로그램에는 풍년을 구가하는 농민의 모습만 비친다. 곶감을 만드는 장면만 해도 하도 봐서 이제는 아는 체를 할 수 있을 지경이다. 반면 은퇴한 선배는 감나무 사진을 보더니 “이거 아까운데…” 한다. 농촌 체험 여행이라도 갈 판인데 2박3일 정도의 품앗이라면 자기도 손을 들겠다는 것이다. 물론 최소한의 품삯은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다. 문제는 인건비가 헐하다 해도 생산성은 더 떨어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데 있다. 그런 만큼 정부나 기업이 저소득층이나 농어촌 돕기에 응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나 기업은 품삯을 지원하고 농가는 숙식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고선사터 댐 짓느라 수몰… 서당화상비 깨진 채 수습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고선사터 댐 짓느라 수몰… 서당화상비 깨진 채 수습

    국립경주박물관 뒤뜰 한켠에는 압도적인 크기의 삼층석탑 하나가 버티고 있다. 크기가 주는 위압감에 더하여 뒤뜰 복판에 세워진 석가탑과 다보탑의 모조품은 범접할 수 없는 품격이 느껴진다. 고선사(高仙寺)터 삼층석탑이다. ●경주박물관으로 옮긴 고선사 삼층석탑 고선사는 경주 시내에서 감은사가 있는 동해로 넘어가는 토함산 중턱에 있었다. 고선사 탑을 이야기하자면 감은사 쌍탑도 언급하기 마련인데, 전형적인 통일신라 삼층석탑은 고선사와 감은사 탑에서 시작해 석가탑으로 완성됐기 때문이다. 고선사 탑이 제자리를 떠난 것은 1975년이다. 경주 주변에 생활용수와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덕동댐이 지어지면서 절터는 물에 잠겼다. 앞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삼층석탑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고선사는 원효대사(617~686)가 머물렀던 사찰이다. 1914년 그의 일대기가 새겨진 서당화상비의 깨어진 아랫부분이 절터에서 수습되어 고선사의 내력이 밝혀지게 됐다. 원효는 어릴 적 이름이 서당(誓幢)이어서 서당화상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비석 위·아래 부분은 두 군데서 소장 서당화상비의 왼쪽 윗부분은 1968년 경주시내 동천사터로 알려진 동네 민가에서 발견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제지공장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 비석은 경주박물관이 아랫부분을, 동국대박물관이 윗부분을 소장하고 있다. 비석에는 원효의 출생 수학 저술 교화 입적 추모의 내용이 순서대로 적혀 있다. 유성이 몸으로 들어오는 태몽과 태어날 때 오색구름이 자욱했다는 대목은 ‘삼국유사’ 기록과 일치한다. 신출귀몰했던 대사는 드러내지 않아도 자연히 드러났고, 지방을 두루 교화하고 수공(垂拱) 2년(686) 혈사(穴寺)에서 일흔의 나이로 입적했다는 내용이다. 수공은 측천무후의 연호다. 고선사는 금당 구역과 탑 구역이 나란한 형태를 가진 국내 유일의 사찰이다. 동쪽의 금당 구역은 금당을 중심으로 앞에는 중문, 뒤에는 강당이 자리잡았고 사방을 회랑이 둘러싸고 있었다. 탑 구역은 금당 구역보다 규모는 작지만 역시 회랑을 두른 모습이었다. 이런 구조는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연구도 있다. 금당 구역을 먼저 짓고, 석탑이 필요해지면서 구역을 추가로 조성했다는 것이다. 거대한 탑을 세워야 했을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원효대사의 입적이다. 고선사터에는 삼층석탑말고도 서당화상비의 귀부와 석등 대석, 주춧돌과 장대석이 대거 남아 있었다. 이것들도 모두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그것도 가람구조와 관계없이 무의미한 모습으로 놓여 있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칼럼] 낭만이 있던 정치를 떠나 보내며

    [서동철 칼럼] 낭만이 있던 정치를 떠나 보내며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서거한 직후 TV에 비친 빈소의 표정은 뭔가 모르게 드라마적인 데가 있었다. 한다 하는 정치인들이 다투어 찾아와 ‘나는 그의 정치적 아들’이라거나 ‘그는 나의 정치적 대부’라고 고인을 추모하는 장면부터가 현실이 아니라 영화적 설정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YS의 오른팔로 불렸던 최형우 전 의원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빈소에 들어서면서 대성통곡을 하는 모습도 그랬다. 개인적으로 ‘정치적 보스’를 정성을 다해 추도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왜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눈물도 흘리지 못했을까’하며 회한에 잠길 지경이었다. 일종의 ‘시대착오’를 느끼게 한 것은 빈소의 표정뿐만이 아니다. YS의 삶을 다룬 보도가 쏟아지면서 공(功)을 부각시켰든, 과(過)를 강조했든 보고 읽으며 ‘우리 정치에도 저런 모습이 있었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YS가 오랜 민주화 투쟁에 이어 3당 합당이라는 도박으로 대통령에 오른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본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YS의 인생역정이라고 해봐야 별것이 있겠느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TV에는 내가 기억하는 바로 그 장면이 비치고 있건만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은 뜻밖이었다. 오늘날 정치판에서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로망’이 담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짐작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반독재 투쟁 시절 당시 YS 모습이 오늘날 새롭게 느껴지는 것도 이유는 있다. 야당 총재 시절 YS의 반정부 발언을 날것 그대로 언론에서 접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고 했다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유명한 발언이 곧바로 보도가 이루어졌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니 “암흑적인 정치, 살인 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않아서 쓰러질 것”이라고 했던 ‘예언’도 당시에는 직접 들을 수 없었을 개연성이 크다. 민주화에 기여하지 못한 사람에게 YS의 용기는 부럽고도 고맙다. 한편으로 “서슬 퍼런 시절 주변을 움직이게 한 것은 YS의 인간미”라는 회고도 인상에 남는다. 측근이 실수를 저지르면 “한강물에 뛰어내려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지만, 상도동 집에 가면 YS는 늘 ‘밥 묵고 가래이’, ‘고생 많재’라며 다독여줬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미와 더불어 YS의 시대를 낭만의 시대로 기억하게 하는 요인의 하나는 유머집이다. “고생하던 부인이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는 덕담에 “집 사람은 절대 세컨드 아이다”했다는 유머가 대표적이다. 이제는 진부하기까지 하지만, 당시는 일간신문에서 대통령 부인의 사진을 다른 사람의 사진으로 잘못 썼다고 담당기자가 사표를 내는가 하면 대통령 부인의 이름이 발매된 신문도 아닌 교정지에서 한 자가 틀렸다고 시말서를 써야 했던 시대가 불과 얼마 전이었다. ‘YS는 못 말려’가 나온 것은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4월 초순이었다. 문화부 출판담당 시절 책이 나왔음을 알리는 간담회에 참석한 인연이 있다. 유머집에는 안기부장의 국무회의 불참에 YS가 “장관들이 대통령과 회의하는데 부장이 어떻게 자리를 차지하노”라고 일갈하는 대목도 있다. 안기부가 아니고 다른 기관이었다면 충분히 했을 만한 실수라고 시중에서는 키득댔다. 실제로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자 “차씨”라고 한 적도 있다. 이 유머집은 출판사의 모험이 아니었다. 출판사가 YS 측근과 소통하며 만든 책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극히 교과서적인 정치 홍보 전략이지만, 오늘날의 정치 문화라면 용납할 수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YS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외환위기를 초래하며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 했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내가 하나회를 척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도, 노무현도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회고도 이제는 가볍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평가는 이제 역사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싸울 때는 싸우고 웃을 때는 웃는 인간미 있는 정치마저 역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낭만이 있는 정치가 이루지 못할 꿈이어서야 되겠는가.
  • [길섶에서] 칼국수 추모/서동철 논설위원

    1980년대 중반 서울 성북동 초입의 작은 한옥에 살았다. 골목에는 겉모습이 칼국수집 같지 않게 깔끔한 칼국수집이 있었다. 검은색 세단이 좁은 길을 메우곤 했는데, TV에 비치는 유명 인사들이 칼국수집에 드나드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요즘도 명성을 날리고 있는 ‘국시집’이다. 언덕 넘어 혜화동 로터리 근처에는 ‘혜화동 칼국수’가 있었다. 지금 있는 그 자리다. 동네 사람들 이야기로는 이 집이 ‘국시집’보다 역사가 깊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혜화동 칼국수’는 나를 포함해 평범한 손님이 많다. 두 집 말고도 주변에는 괜찮은 칼국수집이 더 있었지만, 문을 열었나 싶으면 없어지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일대가 칼국수의 대명사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된 것은 아무래도 ‘국시집’ 단골이었던 김영삼(YS) 대통령의 칼국수 사랑이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지금 일대에는 손칼국수, 손국수, 명륜손칼국수, 우리밀국시처럼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칼국수집들이 성업하고 있다. YS의 부음을 듣고 이런저런 생각의 말미에 칼국수가 떠올랐다. 칼국수를 먹는 것도 그를 기억하는 방법이라고 하면 코미디일까.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국제 신사’와 ‘국민 호감’ /서동철 논설위원

    한국이 세계 12대 야구 강국이 참여한 ‘프리미어 12’에서 우승하는 과정은 어떤 시나리오 작가도 쉽사리 써 내지 못했을 드라마였다. 일본과의 준결승전은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할리우드 영화 ‘식스 센스’보다 더한 극적 반전이었다. 그런데 두 주일 남짓 이어진 드라마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대사는 김인식 감독이 결승전 전날 농반진반으로 이야기했다는 “어제도 해물탕 먹고 이겼으니 오늘도 해물탕 먹어야지”였다. 여유로운 표현에 담긴 승부에 대한 강한 집념이었다. 김인식 감독이 가진 능력의 원천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번 대표팀은 선수 선발 과정에서 악재가 겹치면서 ‘사상 최약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인식 리더십’이 흔들리기는커녕 오히려 국내용을 넘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준결승에서 일본을 누른 직후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잘 던지던 오타니 쇼헤이를 고쿠보 히로키 감독이 강판시킴에 따라 결과적으로 한국이 승리한 것을 두고 질문이 잇따랐다. 김 감독은 “상대의 사정은 그 팀 감독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라면서 오타니 투수를 바꿀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지 않았겠느냐는 취지로 고쿠보를 배려했다. 그러면서 “야구에서 승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고, 오늘처럼 강자가 약자에게 지는 경우도 있다”고 망연자실한 일본인들을 위로했다. 현지 반응은 ‘신사 감독의 패자 배려’로 뭉뚱그릴 수 있다. ‘좋은 감독’을 넘어 ‘명장’이라는 표현도 있었으니 적장에 대한 이 이상의 찬사는 없다. 김 감독이 ‘프리미어 12’를 계기로 ‘국민 감독’에서 ‘국제 신사’로 발돋움했다면 내야수 오재원은 ‘국민 비호감’에서 일약 ‘국민 호감’으로 변신한 케이스다. 그는 소속팀인 두산 베어스에서도 2루수를 맡고 있다. 김 감독과는 한 세대를 넘는 연륜의 격차가 있는 오재원이 살아가는 방식 역시 김 감독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라운드에 집념을 쏟아낸다는 점에서 김 감독과 오재원은 닮은꼴이다. 하지만 김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가 ‘상대에 대한 배려’라면 오재원의 그것은 ‘상대에 대한 도발’이다. 그러니 KBO리그에서 두산이 아닌 다른 팀을 응원하는 팬들에게 오재원은 밉상 그 자체다. 원성을 부르는 과장된 리액션이 잦은 것은 그만큼 경기력이 뛰어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오재원은 준결승 대역전의 발판을 만들었다. 선두 타자로 나서 안타를 치고는 역전 결승타라도 때린 것처럼 자극적인 몸짓을 했다. 결과적으로 상대의 자신감을 잃게 만든 이 액션은 사실 늘 하던 그대로였다. 야구팬들은 “상대 팀 선수일 때는 얄미웠는데, 우리 팀 선수로 그 모습을 보니 오히려 자랑스러웠다”고 입을 모았다. 그는 그렇게 ‘국민 호감’이 됐다. 이런 국민의 응원이 대표팀에 가진 것 이상의 힘을 내게 했다. 무엇보다 감동이 있는 스토리는 두 사람에 그치지 않는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 @seoul.co.kr
  • [씨줄날줄] 유불 화해를 위하여/서동철 논설위원

    서울 도봉산 기슭에서 지금 유림(儒林)과 불문(佛門) 사이 갈등이 움터 가고 있다. 도봉구가 도봉서원 복원을 추진하면서 벌인 발굴 조사에서 불교 의례용구가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국가지정 문화재로도 손색이 없는 금강령과 금강저를 비롯한 유물은 77점에 이른다. 도봉서원은 조선 중종시대 도학정치를 주창하다 사사된 정암 조광조를 추모하고자 선조 6년(1573) 창건됐다. 하지만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명맥이 끊겼고 1972년 일부가 복원됐다. 이후 창건 당시 유구를 찾는 조사에서 불구(佛具)가 출토된 것이다. 도봉서원은 영국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유물이 나온 곳은 큰법당으로 추정되는 중심 건물터다. 출토 당시 유물은 대형 청동솥에 담겨 있었다고 한다. 불교계는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유림이 영국사를 훼손하고 도봉서원을 세운 증거라고 해석하고 있다. 불교계는 도봉서원의 복원을 반대하고 나섰다. 조계종은 지난 8월 도봉구에 사찰의 존재를 무시하고 서원을 복원하는 계획은 재검토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서원이 번듯하게 제 모습을 찾는 날을 기다리던 유림은 유림대로 날벼락을 맞은 꼴이다. 이러다간 어떤 갈등으로 비화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양쪽 모두 냉정함을 되찾아야 한다. 영국사의 폐사가 실제로 숭유억불 때문인지부터 따져 봐야 한다. 금속공예 전문가들이 금강령과 금강저를 비롯해 향로, 향완, 발우 등 영국사 유물의 연대를 12세기 이전 고려시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서원에서 불교 유물이 쏟아져 나온 것은 처음이 아니다.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이 그렇다. 소수서원은 통일신라 사찰인 숙수사가 있던 자리에 중종 38년(1543) 세워졌다. 서원 입구에는 지금도 당당한 모습의 당간지주가 보인다. 숙수사에 쓴 석재는 서원 기초로 재활용됐다. 그런데 1953년 소수서원 곁에 학교를 짓다가 당간지주 북쪽에서 커다란 항아리에 담긴 25점의 소형 불상이 한꺼번에 나왔다. 학계는 불상이 고려 고종 41년(1254) 몽골의 침입 당시 묻힌 것으로 추정했다. 절이 불타고 스님도 모두 죽거나 잡혀가 불상을 수습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영국사 폐사도 숙수사와 같은 시기, 같은 원인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숭유억불 정책이 폐사 이유라면 귀중한 공양구는 훗날이라도 다시 파냈을 것이다. 그런 만큼 불교계와 유림이 공동으로 영국사의 폐사 원인을 규명해 보면 어떨까 한다. 외적의 침입으로 절터가 수백 년 동안이나 폐허로 남아 있어 근본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서원 건축에 엄청난 적대감을 느낄 일은 아닐 것이다. 유림도 이곳에 고려시대 중요한 사찰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서로 이해하면서 영국사와 도봉서원의 명예를 함께 높일 방법은 없는지 지혜를 모아야 한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41] 불화(佛畵)에 담긴 일제강점기 사회상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41] 불화(佛畵)에 담긴 일제강점기 사회상

     감로탱(甘露幀)은 외래 종교인 불교를 한국인들이 얼마나 창조적으로 해석하고 신앙했는지 보여 주는 불교회화이다. 전생에 지은 죄에 따라 육도윤회(六道輪廻)에 고통받는 중생이 구제 과정을 거쳐 극락에 이른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감로탱화, 감로왕도라고도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과거-현재-미래가 인과관계로 연결되는 3단으로 그려졌다. 아래부터 지옥도와 아귀도에서 헤매는 중생도 단이슬(甘露)이 상징하는 풍성한 음식이 베풀어진 의식을 거치고 나면 부처가 머물고 있는 세계로 올라설 수 있음을 상징한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감로탱은 산천에 떠도는 외로운 영혼을 천도하기 위한 수륙재나 조상을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우란분재에서 쓰였다. 이렇듯 독창적인 그림이 불교가 극심한 탄압을 받던 조선시대에 꽃을 피웠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감로탱 가운데 제작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은 일본 나라국립박물관에 있는 약산사 감로탱(1589)이다. 각각의 감로탱은 하단의 육도윤회상이 조성 당시의 사회상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기록화이자 풍속화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역사적 의미가 뚜렷한 감로탱 가운데 서울 돈암동 흥천사 감로왕도가 있다. 조선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무덤 정릉의 원찰 흥천사는 1939년 감로왕도를 새로 봉안했다. 공주 마곡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계룡산파 화맥(畵脈)의 대표적 화승 보응 문성과 그의 제자 병문이 참여했다. 두 화승은 기존의 도상을 현실에 맞게 재해석한 것은 물론 당시 핵심적 사회상을 서양화법으로 담아냈다.  두 화승 가운데 병문의 족적은 흥미롭다. 병문은 일제강점기부터 사회주의 문화예술 운동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 현대미술의 1세대 조각가로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를 주도한 김복진과도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1949년 출범한 ‘불교미술연구회’에는 미술부장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6.25전쟁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흥천사 감로왕도가 그려진 당시는 중일전쟁이 한창이었고, 1941년 미국 진주만을 공격하기 직전이었다. 보응 문성과 병문은 이 언저리의 시대상을 먹선으로 분할한 31개의 화면에 담았다. 전투함이 돌진하고 전투기가 날아가는 가운데 엄청난 위력을 가진 포탄이 여기저기서 터지는가 하면, 기세등등한 육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상대 진영을 불바다로 만들고 있다.  일제가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과 침략의 본거지 통감부의 모습도 사실적으로 담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설치된 통감부는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총독부로 바뀌었으니 당대의 모습은 아니다. 자동차 여행, 기차가 다니는 어촌, 코끼리 서커스단, 전당포, 전신주 공사, 전화 거는 모습, 스케이트 타는 모습 등 새로운 문물의 양상도 보인다.  흥천사 감로왕도는 최근까지 전쟁 장면이 담긴 몇몇 장면은 호분칠을 하고 흰 종이로 가려놓기도 했다. 하단의 오른쪽 맨 아래 장총을 둘러메고 일렬로 행진하는 일본군의 모습은 호분칠이 짙어 종이를 떼어내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이럼 모습은 흥천사 감로왕도를 한때 친일적인 사회상을 담은 불화(佛畵)로 분류하게 만든 이유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당대의 새로운 사회상을 가감없이 투영한 이 그림을 20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불교회화의 하나로 적극 재평가하고 있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농업 보물/서동철 논설위원

    충남 서산의 개심사는 역사가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지만, 지금은 이른바 산지중정(山地中庭)형의 전형적인 조선 후기 사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사찰이 폐허가 되자 큰 법당을 북쪽에 둔 직사각형 가람의 모습으로 중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개심사가 유명해진 이유의 하나는 심검당(尋儉堂)에 붙인 덧집 때문이다. 심검당은 ‘지혜의 칼을 벼리는 공간’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도저히 동량(棟梁)이 될 수 없을 구불구불한 재목을 써서 덧집을 지은 것이다. 전남 구례 화엄사의 구층암에도 모과나무를 치목(治木)하지 않은 채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한 건물들이 있다. 모두 자연미를 살린 조상의 지혜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왠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려는 작위(作爲)의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농업박물관에서 세 칸 구유를 보고 무릎을 쳤다. 휘어지고 뒤틀려 장작 말고는 쓸모없을 나무의 곡선을 살려 세 칸의 여물통을 판 것이다. 농업박물관은 이 구유를 ‘농업 보물 9호’로 지정했다고 한다. ‘농업 보물’이라는 아이디어도 재미있고, 이 여물통을 보물로 지정한 안목도 감탄스러웠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씨줄날줄] 건재고택/서동철 논설위원

    충남 아산의 외암마을에는 16세기부터 예안 이씨가 모여 살았다고 한다. 지금처럼 외암마을로 불리게 된 것은 아무래도 조선 후기 대표적인 유학자의 한 사람인 외암(巍巖) 이간(李柬·1677~1727)의 명성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외암(外岩)마을이라고 쓰는 것은 일제강점기 표기를 간편하게 한다며 이름을 고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외암마을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잠정 목록에 올랐다. 호서 성리학은 율곡 이이를 비롯한 기호학파의 학맥을 이어받았다. 그런데 18세기에 접어들어 호서 학맥은 호론(湖論)과 낙론(論)으로 분리된다. 호론을 주장한 사람이 남당 한원진이었고, 낙론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외암 이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우암 송시열의 학통을 이어받은 한수재 권상하의 문인이었다. 호락 논쟁이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은지 다른지가 핵심이었다. 한원진은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했지만, 이간은 인성과 물성은 같은 것이라고 다른 견해를 폈다. 두 사람 모두 호서 출신이지만 호서 유학자들이 한원진에, 서울 주변(下) 유학자들이 이간에 동조하면서 각각 호론과 낙론이라고 했다. 외암마을은 설화산이 뒤를 감싸고 반계라는 이름의 작은 시내가 앞으로 흐른다. 하지만 북쪽 산과 남쪽 시내의 전형적 배산임수가 아닌 동쪽 산과 서쪽 시내의 형태이다. 마을의 집을 대부분 서남향으로 지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노출되는 마을 북서쪽에는 모자라는 자연조건을 인위적으로 보완하는 비보(裨補) 숲을 조성했다. 외암마을은 마을 어귀에서 종가(宗家)에 이르는 안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 자리잡고 있다. 안길 양쪽에는 각각 큰 집을 중심으로 중·소 규모 집들이 한데 어울려 있다. 남쪽 영역의 큰 집이 참판댁이라면 북쪽 영역의 큰 집이 건재고택이다. 건재고택은 건재(建齋) 이상익(李相翼)이 19세기 후반기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지었다고 한다. 건재가 영암군수를 지낸 만큼 영암댁(靈岩宅)이라고도 불린다. 중요민속자료인 건재고택은 소유권이 2009년 미래저축은행으로 넘어가는 불운을 맞는다. 수백억원의 고객 돈을 빼돌리고 밀항을 시도하다 붙잡힌 김찬경 당시 미래저축은행 회장은 이 집을 술판을 벌이는 접대 장소로 이용했다. 결국 경매에 넘겨졌지만, 살 사람은 없었다. 건재고택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매입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환영하는 목소리가 크지만 생각해 볼 문제도 있다. 옛집은 국가나 지자체가 사들이는 순간 애물단지가 된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훼손이 빨라지고 관리 인력도 필요하니 예산 먹는 하마가 된다. 사람이 실제로 거주하는 민속마을이라는 가치도 퇴색할 것이다. 매입이 불가피하다면 집에 애정을 가진 사람이 살면서 관리하도록 하는 방안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KB감독 다시 코트로

    서동철 KB감독 다시 코트로

    “코트에 있을 때가 역시 제일 마음 편하더라고요.” 서동철(47) KB스타즈 감독이 병상에서 돌아온다. 서 감독은 지난 7월 십이지장에 생긴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으나 회복이 더뎌 병원과 자택에서 몸을 돌봐 왔다. 2015~16 KDB생명 여자프로농구 1라운드를 박재헌 코치가 대신 지휘하며 악전고투하는 모습을 중계로 지켜봐 왔다. 서 감독은 16일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조금만 마무리를 잘하면 이길 수 있는 경기를 놓치는 장면을 보고 안타깝기도 하고 머리도 아파 산책을 나가곤 했다”며 “이제는 어느 정도 회복돼 이달 말 코트에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나간다고 당장 팀이 달라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제 때가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구단은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다고 보고 조금 더 시간을 갖는 게 어떻겠느냐며 만류했다. 황성현 사무국장은 “완쾌되지 않은 상태에서 돌아왔다가 스트레스를 받아 다시 안 좋아지면 어떡하느냐고 말렸는데 집에 있는 게 더 스트레스’라며 고집을 부리더라”면서 “의사와 상의해 2주 뒤쯤 복귀하는 것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 코치는 지난 15일 우리은행과의 춘천 경기를 앞두고 “감독님이 우리 팀 경기뿐 아니라 다른 팀 경기도 보고 특정 선수는 왜 안 나왔느냐고 물어보신다. 그러느니…”라고 답답함을 대신 전했다. 한편 KEB하나은행은 16일 경기 부천체육관으로 불러들인 신한은행과의 1라운드 마지막 경기를 66-63으로 이겼다. 하나은행은 3승2패로 삼성생명과 함께 공동 2위로 올라섰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길섶에서] 구봉(龜峰)/서동철 논설위원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1534~1599)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다. 율곡 이이, 우계 성혼과는 학문적 동지이기도 했다. 세 사람은 내가 사는 파주에 흔적을 남겼다는 공통점도 있다. 며칠 전 구봉의 유허비(遺墟碑)를 찾아나섰다. 파주출판단지가 지척인 심학산의 남쪽 기슭이다. 심학산의 다른 이름은 구봉산(龜峰山)이다. 거북이 모습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송익필의 호(號)도 여기서 비롯됐다고 한다. 실제 고양시 쪽에서 바라보는 심학산은 거북이 모양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유허비는 산남동(山南洞)의 새로 지어진 건물에 숨다시피 가려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아래 구산동이다. 고양시에 속하는 구산동(九山洞)에는 ‘거그뫼’라는 자연부락도 있다. ‘거북뫼’가 변한 발음이라고 한다. 거북뫼는 파주 땅인데 거북뫼 마을은 고양 땅으로 갈린 것이다. 거북산(龜山)이 아홉산(九山)이 되면서 행정구역도 분리된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 송익필의 생가는 고양땅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 구봉 송익필 선생 기념사업회가 꾸려지면서 갖가지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이렇게 궁금한 것이 많으니 기념사업회가 할 일도 많을 것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40] 최종태의 성모마리아와 관세음보살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40] 최종태의 성모마리아와 관세음보살

     지금 국립현대미술괄 과천관에서는 원로 조각가 최종태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83세 노(老)조각가의 인생 역정을 보여주는 200점 남짓한 작품이 두 개의 전시공간에 나뉘어 관람객을 맞고 있다.  최종태의 화업(畵業) 60년은 ‘구도(求道)의 여정’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우리 교회 조각을 현대 미술의 한 지류로 편입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그의 성상(聖像) 작업은 타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한국 교회 조각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가진 최종태의 작품은 전국 가톨릭 교회에 널리 퍼져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의 작품이 없는 가톨릭 교회를 찾는 것이 오히려 빠를 지경이다. 그럼에도 최종태는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 관음보살상을 조성하는 파격을 보여주었다. 1997년 길상사 개산법회에 김수환 추기경을 초청하는 등 종교 사이의 벽을 허무는데 노력했던 법정 스님의 뜻에 화답한 것이었다.  가톨릭미술가협회장을 맡기도 했던 최종태는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땅에는 나라도, 종교도 따로따로 있지만 하늘로 가면 경계가 없다”고 했다. 관음상은 2000년 4월 설법전 앞에 봉안됐다. 여섯 개의 봉우리가 솟은 관을 쓰고 있는 관음보살상은 국보 제83호 삼산관반가사유상과 이미지가 비슷하다. 왼손에는 맑은 물이 담긴 정병(淨甁)을 들고 있고, 오른손은 아무 걱정 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바닥을 펴든 시무외(施無畏)인을 짓고 있다. 이것말고는 불교미술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음에도 불교적 분위기를 풍긴다.  최종태가 길상사 관음보살상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성북동 언덕에 오르기 앞서 혜화동로터리에 있는 천주교 혜화동성당을 찾아볼 일이다. 본당 계단 왼쪽에 장미넝쿨 너머로 최종태 특유의 소녀적 분위기가 풍기는 성모상이 보인다. 성모마리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길상사 관음보살상의 상호(相好)와 쌍동이자매만큼이나 닮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종태는 “길상사 관음상의 이미지가 성모상의 연결선상에 있는 것은 심성의 참된 가치를 발견하는 불교의 견성(見性)이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모두 같은 울타리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성모마리아가 되었건, 관음보살이 되었건 다른 것을 외향이지 본뜻은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술도 종교도 근원으로 가는 방편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최종태는 자신의 예술 인생에서 창작에 한계를 느꼈을 때 마다 삼산관사유상을 비롯한 삼국시대 불상들이 막혔던 길을 뚫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회고한다. 그렇게 보면 최종태는 성모마리아의 이미지를 길상사 관음보살에 대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삼국시대 불교조각의 이미지를 수십년동안이나 성모 조각에 응용해 자신의 작품세계를 완성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최종태 회고전이 흥미로운 것은 이렇듯 교회 미술가가와 불상을 만든 불모(佛母)의 경지를 두루 개척한 인물의 조각 세계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문대로 돌을 깎는 석공이 아닌 조각가로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은 최종태가 세계 역사상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회고전은 오는 29일까지 열린다.  글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길섶에서] 갓바위 부처/서동철 논설위원

    마음을 한데 모아 기원하면 소원을 들어 준다는 팔공산 갓바위 부처는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기도 하다. ‘경산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이 문화재청이 지은 정식 이름이다. 흔히 갓바위 부처라 부르는 것은 머리에 갓을 쓴 듯 넓적한 돌이 올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갓바위 부처를 약사여래로 믿는다. 이름처럼 중생을 질병의 고통에서 건져 주는 존재다. 우리 약사 신앙의 근본 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약사여래본원경’은 생사의 근원이 되는 무명(無明)의 병을 고쳐 주어 일체중생을 성불하게 한다고 가르친다. ‘약사여래 12대원(大願)’에 나타난 것처럼 자신의 광명을 두루 비쳐 중생이 그 빛을 보고 어둠에서 벗어나기를 발원한다. 이렇듯 중생으로 하여금 지혜의 부재(不在)라는 마음의 질병까지 치유할 수 있게 한다. 그러니 갓바위 부처가 정성을 받아들였다면 단순히 자식이 수능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을 넘어 인생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도록 영험을 베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은 지혜를 바라지 않는다. 자식 잘되라고 어려움을 감내한 모든 수험생 학부모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주십사 갓바위 부처에 청한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39] 불상에 적힌 신라문학의 정수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이야기 39] 불상에 적힌 신라문학의 정수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경주 감산사터 석조아미타여래입상과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드물게 한국의 미술사는 물론 문학사까지 풍요롭게 하는 걸작이다.  미륵보살입상은 목과 허리를 엇갈린 방향으로 살짝 구부린 삼곡(三曲) 자세가 매력적이고, 온몸을 휘감고 있는 장신구도 우아하다. 불상의 시원인 간다라와 마투라를 아우르는 4∼5세기 인도의 굽타 양식이 중국을 건너뛰어 들어온 뒤 통일신라 특유의 미의식과 결합한 사례라고 한다.  상대적으로 아미타여래는 살집 있는 몸매에 키는 작달막하고, 조각도 상대적으로 평면적이다.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석괴(石塊)의 제한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어 재미있다. 주어진 재료가 그렇게 조각할 수 밖에 없도록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때론 미술사에서도 거창한 해석보다 단순한 상상력이 필요할 때가 있다. 두 불상이 후하게 대접받는 데는 명문도 한몫을 했다. 아미타여래의 광배 뒷면에 21행 391자, 미륵보살에도 비슷한 자리에 22행 381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집사성 시랑을 지낸 김지성이 719년 어머니를 위해 미륵보살을 조성했고, 아미타여래는 아버지를 위해 만들려 했지만 이듬해 김지성이 죽자 두 사람의 명복을 함께 빌고자 세웠다는 내용이다.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통일신라의 가장 이른 석불로, 반세기쯤 지나 모습을 드러내는 석굴암이 어떤 ‘조형적 트레이닝’을 거쳐서 완벽해질 수 있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명문의 문학적 가치에 주목한 사람은 국문학자인 조동일이다. 자신의 ‘한국문학통사’에서 “이 명문은 전성기에 이른 신라 한문학의 정수”라면서 “두 조각이 미술사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듯, 명문 또한 문학사에서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는 명작”이라고 강조했다.  불상을 조성한 과정을 설명하는 데서 출발했지만, 6두품으로 더 이상의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신분적 제약을 물리치고 자유로움을 동경하는 ‘문학’으로 획기적 발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명문은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불상을 봉안한다는 것이 요지이지만, 글쓴이 자신이 보탠 말이 더 많다.  정해진 사연을 적는 글을 이용해 자신의 심정을 술회하는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의식각성의 현장’이라는 책에서는 이 불상이 미술과 문학을 함께 존중해 창작한 신라인의 식견을 깨닫게 만든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미술은 미술이고, 문학은 문학이어서 다른 쪽의 사정은 알지 못하는 요즘 세태를 바로잡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조각의 아름다움을 해설하고 감탄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명문은 더욱 무시된다.”고 안타까워한다.  유식함이 극도에 이른 시대의 무식함을 입증하는 단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중앙박물관에서 가서 감산사 아미타여래와 미륵보살을 만나면 꼭 불상 뒤로 돌아가 명문이 있는지를 확인해 볼 일이다.  ‘비록 이 몸이 다한다 하여도 이 원(願)은 무궁하며, 이미 돌이 닳아 버릴지라도 존용(尊容)은 없어지지 않는다. 구함이 없으면 과(果)도 없으니, 원(願)이 있다면 모두 이룰 것이다. 만일 이 마음을 따라 원하는 자가 있다면, 함께 그 선인(善因)을 지을 것이다’ (감산사 미륵보살상 명문 중에서)  글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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